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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8)화 (8/449)
  • 제8화

    냉궁에 갇힌 그녀를 찾아와 길디긴 복도 너머에서 해주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그때의 절망적인 상황을 떠올린 장서열은 순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구염락을 괴롭히지 마.”

    “왜?”

    “왜냐하면…….”

    그녀는 턱 끝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삼켰다.

    “그래도 그는 황자니까. 이변이 없는 한 그는 커서 봉부(封府)를 하사 받고 세력을 갖게 될 거야. 그가 오라버니에게 앙갚음을 하려 들면 어쩔 거야? 오라버니를 해칠지도 몰라.”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불현듯 소리쳤다.

    “그럼 나중에 이 몸을 감히 원망할 수도 없도록 당장 버릇을 고쳐놔야겠군!”

    “오라버니!”

    “하하, 장난이야.”

    그는 속으로 동생이 공연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괜한 생각 마. 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 여자애인 넌 아마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장서전은 누이동생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도록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황제께서는 구염락이 학대 받다 죽도록 일부러 모른 척 하시는 거야.”

    놀란 장서열이 그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아들을, 어째서?

    누이동생의 반응을 보자, 장서전은 갑자기 자신이 뛰어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황자들이 일부러 모욕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의 생모는 정말로 군대의 기녀였어. 황제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그런 여자와…….”

    민망함에 장서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으나 그 역시 누이동생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왕에 시작했으므로 숨김없이 말하기로 마음먹은 장서전은 짐짓 어른처럼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황제께서 그 여인의 계략에 걸려들었어. 6년 전 출정을 나가 대승을 거둔 날, 어찌된 일인지 그런 여자를 품게 된 거야. 그날 밤 황제께서는 스스로의 행동에 화가 난 나머지 그 여인을 장형(볼기를 치는 형벌)으로 죽이라 명했어.”

    “…….”

    “하지만 여자는 죽지 않았고, 1년 뒤 서북대장군이 아기와 그 여인을 함께 보냈지. 여인은 입궁하지 않고 삭발한 후 비구니가 되었대. 넌 지금 부귀영화를 내팽개치고 자진해서 비구니가 된 그 여자를 아주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누이동생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신이 나서 계속 설명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재빨리 꽁무니를 빼지 않았다면 황제께서는 그 자리에서 즉시 두 모자를 처형했을 거야. 당연히 구염락도 열셋째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셨겠지. 궁에서 빨리 출세하고 싶은 태감이나 궁녀는 구염락을 괴롭히면 돼. 더욱 모질게 괴롭힐수록 출세도 빠르지. 이건 황제께서 묵인하고 계신 사실이야.”

    누이동생의 놀란 눈빛에 득의양양하던 장서전은 이내 부탁하듯 덧붙여 말했다.

    “아버지 서재에 몰래 숨어 있다가 우연히 듣게 된 거야. 그러니까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말을 마친 그는 우쭐한 가슴을 펴고 누이동생이 자신을 존경하는 눈빛으로 봐주길 기다렸다.

    장서열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역시 인간의 성격적 결함은 이유 없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구염락의 어린 시절에 대해 완전히 잘못 짚고 있었다. 그런데… 서북대장군은 어떻게 황제의 침전에 기녀를 들이고, 그녀가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보호한 뒤 다시 황제 앞에 내보인 걸까?

    장서열은 문득 귀자태후(归慈太后)의 후손과 서북대장군의 가문이 대대로 후작 지위를 유지하고 있음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서열아.”

    생각에 잠겨 있던 장서열은 문득 장서전의 부름에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오라버니에게 칭찬을 건넸다.

    “아버지께 들키지 않았다니 정말 대단해. 난 서재 앞에서 항상 걸렸거든.”

    오라버니가 서재에 숨어있다는 걸 아버지가 몰랐을 리 없었다. 아버지는 오라버니가 황자를 멸시하는 불경죄를 저지르도록 일부러 말을 흘린 게 분명했다. 설사 황제가 구염락의 죽음을 진심으로 바랐다 해도, 정말로 그가 죽게 된다면 천자의 위엄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관련된 모든 이를 죽일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줄곧 구염락의 비굴한 성격이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얼마나 바보 같았던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그가 입고 있던 태감복은…….”

    문득 장서전은 의아해졌다. 생각해 보니 당시에 그는 서재 깊숙이 숨어있던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째서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러나 장서전은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는 누이동생을 보며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밀어둔 채 급히 답했다.

    “구염락이 자기를 모시는 태감에게 세 번 큰절을 하고, ‘어르신’이라고 부른 뒤에 겨우 ‘하사’ 받은 거래.”

    “그럼 그가 예전에 입던 옷은?”

    누이동생을 바라보는 장서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멍청하긴. 걔는 궁에서 아무 것도 아니야.”

    그 말인 즉, 그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의 출처가 이처럼 누군가에게 간곡히 부탁해서 ‘하사’ 받은 것이라는 뜻이었다.

    장서열은 눈앞이 흐려지는 걸 느꼈다. 눈이 온통 시큰거렸다. 그를 동정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궁에 들어온 여인들이 전부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도발하고 끝끝내 곤욕을 치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겼던 장서열은 피도 눈물도 없는 권력자였지만, 그녀들은 그러한 장서열에게 괴롭힘을 당해 황제의 비호가 필요한 가련한 여인들이었다.

    다행히 구염락은 동정심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녀들이 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거나 너무 과장된 눈물을 뿌리면 오히려 더 일찍 죽여 버렸다. 모든 여인들이 금 귀비처럼 운이 좋은 건 아니었다.

    장서열은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입궁하기 전, 딸이 궁에서 순조로운 삶을 영위하길 바라는 인자한 부모님에게 구염락의 비밀을 미리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황궁에 없던 3개월 동안 그 애는 또 죽을 뻔 했었어.”

    장서전이 아쉽다는 듯 한 손으로 다른 손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지경이 됐는데도 죽지 않다니 정말 운도 좋지. 죽으면 땅에 묻으려고 다 준비해 뒀는데 뜻밖에 또 살아난 거야. 이게 다 새로 들어 온 그 눈치 없는 계집 때문이야. 그 계집이 구염락을 진짜 주인으로 알고 멀쩡히 시중을 드는 바람에 살아났어. 그걸 안 내무부 사람들이 그 계집에게 곤장을 쳤는데,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다더라.”

    순간 장서열은 가슴이 옥죄어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중요한 단서를 잡았음을 알았다.

    “그 계집, 이름이 뭐야?”

    “금용(锦榕)이야. 현재 그 애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

    장서전은 금용이 겪는 재앙을 고소해하는 말투로 계속 말했다.

    “지금 황궁 전체가 그 애를 괴롭혀서 죽이려고 준비 중이야. 올해 겨우 다섯 살인데 입궁 하자마자 그런 재수 없는 일을 당하다니. 앞으로 궁녀가 되기는 틀렸어. 하하!”

    장서열은 장서전과 달리 웃을 수 없었다. 궁녀의 길은 막혔으나 귀비의 길이 열렸다. 하늘이 금용에게 이런 기회를 줬을 줄이야! 동고동락한 정을 어느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하고 괘씸했다. 그녀는 또 한 발 늦었으며 그 계집을 죽일 기회까지 놓쳤다.

    고개를 숙인 장서열은 마음을 더욱 단단히 먹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건 두렵지 않았다.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 게 두려울 뿐이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장서열의 얼굴은 온통 투지로 불타고 있었다.

    ‘금용, 네게 그런 행운이 있었구나. 하지만 두고 보자. 궁녀의 본분대로 그의 시중을 든 네가 우세할지, 어려운 시기에 그를 도와준 이 몸이 우세할지!’

    머지않아 구염락의 모든 과거는 황가의 일급비밀이 되어 깨끗이 지워질 터였다. 그는 태자로 봉해지고, 신분은 ‘온화(温和)’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상인의 딸이 된다. 그건 기녀의 몸에서 태어난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미래의 길흉화복은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다. 태자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황후는 구염락의 신분을 바꿔놓았지만 오히려 이것은 구염락의 생모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미래에 자녕궁을 장악하게 될 사람은 갖은 머리를 짜내 구염락을 태자에 앉힌 황후가 아니라 이후 절에서 돌아올, 소녀처럼 아름다운 귀자태후였다.

    장서열은 귀자태후와 반평생을 싸우다 결국 실패하고 무대에서 물러났다.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패인을 알게 되었다. 어째서 태후가 금용만을 총애했는지, 신분도 학식도 금용과는 차원이 달랐던 정식 며느리를 어째서 좋아하지 않았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어머니, 오라버니. 안심하세요. 이번 생에서도 구염락이 황제가 된다면 비겁하게 무릎을 꿇고 굽실거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게요. 우리 집안의 안위를 걱정하던 적들은 피를 토하며 죽게 될 거예요.

    “어르신.”

    어느덧 집 앞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장서열은 황급히 휘장을 걷고 대문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품에 나는 듯이 안겼다. 그녀가 평소보다 세 배는 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저를 기다리셨어요? 역시 아버지가 최고예요.”

    장신성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그녀를 안았다.

    “3개월 만의 입궁이라 네가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했단다.”

    장서열은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어머니의 말만 듣고 아버지의 말은 다 잊었을까 걱정하셨겠죠.

    “아버지, 우리 오늘 저녁에 뭐 먹어요?”

    그러나 이 정도 연기는 그녀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장신성이 그녀의 작은 코를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고기 완자를 먹자꾸나. 어서 가자. 식구들이 우리 셋만 기다리고 있단다.”

    그때 본채 안의 발이 걷히며 대 이랑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르신.”

    대 이랑이 잠시 멈칫하다 곧 자애로운 표정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돌아오셨군요. 아가씨께 드리려고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놓았습니다.”

    전생의 장서열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녀가 직접 음식을 했다고 생각했다. 대 이랑 기 씨는 언제나 말로 장서열을 현혹시켰다. 하마터면 도둑을 어머니로 삼을 뻔했다.

    장신성과 기 씨가 은밀한 눈빛을 교환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가서 씻고 오너라. 뭣들 하느냐. 어서 아가씨를 모셔라.”

    장신성은 선한 눈으로 딸을 달래어 보낸 뒤 위엄 있는 표정으로 기 씨를 바라보았다.

    “내가 부탁한 일은 다 처리했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기 씨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소박하고 조용한 평소의 모습과 달리 물처럼 부드러운 자태가 그녀를 일순간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녀는 장신성의 위엄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당신이 당부한 일을 소홀하게 처리했을 리 없잖아요.”

    그녀의 손이 장신성의 가슴팍에 닿았다. 구겨진 옷깃을 정리하는 아름다운 두 눈이 실처럼 가늘게 그를 응시했다. 밉지 않게 흘기는 표정은 마치 소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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