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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7)화 (7/449)

제7화

장서열은 적당한 문구를 발견한 것에 안도하며 이를 베껴 썼다. 마지막으로 틀린 곳이 없는지 훑어본 뒤 그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구염락이 이 문장을 진심으로 마음에 새기길 바랐다. 그리고 미래에 그가 지난날의 고통을 회상하면서 부디 ‘상서로운 징조’를 위해 악행을 조금이라도 덜 저지르길 바랐다.

그녀는 다 쓴 종이를 접어 아무도 모르게 구염락의 소매 속에 넣어주었다. 그런 뒤 얼른 고개를 돌려 수업에 집중하는 척했다.

종이를 발견한 구염락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떠올랐다. 그는 소매를 소중히 어루만지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드러난 맑은 얼굴은 황금빛 기둥보다 더욱 눈부셨다.

장서전은 스승님이 학당을 나설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다 순식간에 누이동생 쪽으로 달려들었다. 장서열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구염락을 밀어 바닥에 쓰러뜨렸다.

“죽고 싶어? 내 동생의 시중을 드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지, 오히려 화나게 해? 스승님께 벌 받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지!”

바닥에 쓰러진 구염락에게 달려든 장서전은 그의 위에 올라타 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장서열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이 구염락의 마음을 돌려놓기 전에 먼저 눈치 없는 오라버니가 그를 때려죽일 참이었다.

식은땀이 솟았다. 구염락이 황좌에 오른 후 제일 먼저 손을 본 사람이 장서전인 것도 당연했다. 그만큼 오라버니는 원한을 사기 좋은 사람이었다.

“오라버니, 그냥 글씨가 마음에 안 들어서 찢은 거예요.”

그녀는 맥없이 웃었다. 왠지 슬프고 괴로웠다. 아버지는 어째서 우리를 사지로 내몰았을까. 높은 지위에 있던 아버지가 오라버니의 성격을 몰랐을 리 없었다.

장서전이 씩씩대며 누이동생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말이야?”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갈기갈기 찢은 종이를 들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장서전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바보처럼 웃었다. 그는 구염락의 몸에서 내려오며 마지막으로 발길질하는 걸 잊지 않았다.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그리고 신이 난 얼굴로 그녀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가서 귀뚜라미 싸움 구경하자. 뚱보가 이번에 좋은 녀석을 구했대. 뚱보의 ‘장군’이 이길지, 아니면 충 세자( 世子)의 ‘철혈’이 이길지 보자고.”

장서열은 구염락에게 다친 곳은 없냐고 물어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끌려나갔다.

바닥에서 일어난 구염락은 걷어차인 소매를 어루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에 든 종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그는 곧 어질러진 장서열의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검게 먹칠이 된 종이를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정리하던 그는 무슨 생각인지 종이들을 소중히 모아 자신의 책상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기분 좋게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문득 그림자 하나가 반독과 함께 불쑥 튀어나와 구염락의 책상에 부딪쳤다. 책상 위에 있던 종이가 모두 바닥에 떨어지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 위에 먹을 뿌렸다.

“이런! 실수로 부딪쳤어. 더 더러워졌네? 미안하다.”

말을 마친 그는 종이를 밟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반독을 데리고 나갔다.

구염락이 몸을 숙여 지저분해진 바닥을 보았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난폭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다시 한 장씩 책상 위에 펼쳤다. 일어선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나약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 * *

학당 밖 모든 이들의 관심이 싸움을 벌이는 귀뚜라미에게 집중 되어 있을 때, 장서전은 누이동생을 몰래 한쪽으로 데려가 작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구염락과 떨어져. 황제께서도 그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데 네가 뭐라고 나서는 거야? 사황자와 육황자 못 봤어? 황제와 태자가 널 총애한다고 해서 네가 태자비인 건 아니야.”

조용히 오라비를 바라보던 장서열이 싱긋 웃었다.

“알았어.”

이렇게 금방 말이 통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장서전은 본래 준비했던 한 보따리의 잔소리를 삼켰다. 누이동생은 영리하고 얌전하게 그의 옆에 서있었다. 자신이 너무 심한 것 같았다. 동생은 이제 겨우 일곱 살이었다. 어린아이가 뭘 알겠는가.

“내 말… 너무 신경쓰지 마.”

장서전의 말에 장서열이 고분고분 답했다.

“응.”

물론 장서전은 꽤 똑똑한 사람이었다. 단지 운명의 장난에 놀아났을 뿐. 군기(军妓, 군대에서 일하는 기녀) 출신의 생모를 둔 구염락이 차기 황제가 될 거라고 감히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가서 귀뚜라미 싸움 보자!”

장서열은 조용히 오라비의 곁을 따라가며 여전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황홀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차분하고 고요했다. 황후였을 때 느꼈던 초조함이나 냉궁에서 느꼈던 절망, 분노 같은 건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며 인생은 아름답고 삶이란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소나무 아래 놓인 바위에 걸터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맑은 바람이 옷에 걸린 비단 끈을 스치자 간지러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만치서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구염단신의 마음에는 봄바람이 일었다. 일순간 그녀에게서 날아온 엷은 향기를 맡은 것만 같았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지 않은 그녀는 오히려 더 행복해 보였다. 입에 머금은 부드러운 미소와 평온함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해주었다. 앉아있는 자태는 붉게 타오르는 모란꽃인 것 같기도,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 추국(雏菊, 데이지)같기도 했다. 정갈한 두 눈에는 언제나 총명함이 가득했다.

구염단신은 만약 어마마마께서 저 모습을 보았다면 그녀를 두고 용모만 빼어날 뿐 총기가 없다고 단정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마마마의 판단은 너무 성급했다. 아직까지 장서열은 응석받이로 자란 소녀였고, 구태여 다른 것에 머리를 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지금 이대로의 장서열이 좋다고 생각했다.

“태자 전하…….”

꽃무늬가 수놓아진 다홍색 유군(襦裙, 짧은 상의와 긴 치마)을 차려 입은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틀어 올린 머리에는 비취색 깃털이 들어간 나비잠이 꽂혀있었다. 아이는 봉황눈이 무척 예쁘고 오관이 뚜렷했으며, 보기 드문 품위를 갖춘 미인이었다.

“오늘 배운 내용 중 모르는 부분이 있사온데 소녀, 전하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뒷짐을 지고 선 구염단신에게서는 조금 전까지의 온화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들어도 안 들어도 그만인 지식일 뿐이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거라.”

그의 시선은 줄곧 소나무 아래를 응시한 채였다.

범억아(范忆娥)의 미소가 산산이 부서지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가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애교 있게 답했다.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옛말에 여자는 학식과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라 했지요.”

그녀는 손에 쥔 염낭을 꽉 움켜쥐었다. 계획대로라면 태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 답례로 건넸어야 했다.

태자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역시나 얄미운 그림자가 있었다. 가정교육도 부족하고, 성격도 까다로운데 전하는 대체 저 아이의 어디가 좋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녀가 전하께 차를 한 잔 올리겠어요.”

말을 마친 그녀가 막 돌아서려 할 때였다.

“되었다.”

범억아는 더는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난 우승(右丞, 관직 이름)의 딸인데,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하다니!’

구염단신은 이런 여자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에 익숙했다. 그는 세도가의 아들과 친밀하게 지내라고 교육 받았지만 세도가의 딸과 가깝게 지내야 한다고 배운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아직 어리므로 가끔씩은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았다.

자신이 태자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눈치 챈 그녀는 모욕당한 자존심을 꾹꾹 누르며 결연히 돌아섰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걱정할 것 없어. 전하가 성인식을 치르고 여인을 들일 때 장서열은 급계(及笄, 만 15세, 혼인할 수 있는 나이)가 못 되었을 거야. 후에 장서열이 진짜 태자비가 된다 해도 난 이미 궁에서 입지를 굳혔을 테니, 멍청한 계집 하나 상대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지.’

* * *

집으로 돌아가기 전, 장서열은 한참동안 손에 쥔 물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들고 있던 먹을 구염락에게 몰래 건넸다.

“하루 종일 서 있느라 고생했어. 고마워.”

그녀는 엷은 미소를 남긴 채 돌아섰다. 머릿속에서 수없이 연습했던 그대로 몸을 돌려 오라버니와 함께 궁을 떠났다.

구염락은 손에 쥔 먹을 만지작거리며 아이답게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오늘은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들었고, 선물도 받았다.

마차로 향하던 장서전은 참지 못하고 장서열을 꾸짖었다.

“오전에 내가 한 말은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거야? 걔는 감히 네 시중을 든 것만으로도 복 받은 거라고.”

장서열이 마차에 오르며 답했다.

“누구나 그런 복을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너 오늘 왜 그래?”

장서전은 누이동생에게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누이동생이 그 재수없는 녀석을 두 번이나 감싸줄 리 없었다.

“출발해라.”

어린 주인들을 모시러 온 집사의 친아들이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마차는 이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장서열은 마차의 가장 깊숙한 곳에 앉아 오라버니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골이 난 아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세상이 얼마나 예측불허하게 돌아가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어머니께서 여운을 때린 건 잘못한 거라고 하셨어. 여 씨 가문은 이번 대에 인재가 많아. 지금 특출한 인물이 없다고 얕잡아 보면 안 돼. 세자도 영리한 사람이라 언제 황제의 부름을 받을지 모르고.”

장서전이 경멸하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성공하라지, 어차피 이 몸은 장군이 되어있을 텐데! 그래도 넌 마음껏 그 애를 괴롭힐 수 있어.”

장서열은 오라버니의 호방한 모습에 기쁘고 위안이 되는 듯 웃었다.

“그때까지 아버지도 무탈하시고, 오라버니도 반드시 장군이 되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당연하지!”

장서전은 한 번도 아버지에게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좌상(左相)이었다. 소년 시절, 일개 평민의 몸으로 장원급제하여 고작 십여 년 만에 최고 관직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개국 공신 중 절대적인 일인자였다. 장서전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었다.

장서열은 문득 울적해졌다. 그녀도 오라버니처럼 아버지를 철썩 같이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장서전이 긴장한 얼굴로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너 무슨 얘기라도 들은 거야? 전하가 네게 뭐라고 했어?”

그의 눈빛에는 신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야.”

장서전이 안도한 듯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마. 넌 영원히 상부의 아가씨이고, 황제가 가장 아끼는 신하의 딸이야. 게다가 태자가 비호하는 나의 혈육이니, 이 오라버니가 있는 한 누구도 널 괴롭히지 못 해.”

“오라버니…….”

장서열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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