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순간 그녀는 전생에서처럼 자신이 또 한 번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와 오라버니는 구염락의 미움을 샀다. 이를 만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아니, 만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구염락을 향한 자신의 친절은 장서영의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어머니는 또 다시 본처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장서열은 지그시 이를 깨물었다. 필사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녀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만약 태자에게 과거와 같은 사고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녀에게는 계속 태자비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구염락에게 미움을 산 그녀와 오라버니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만에 하나 그녀가 황가와 혼인을 맺지 않는다 해도, 구염락은 이곳에 있던 모든 이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장서열은 우선 구염락을 구한 뒤 다음 일은 차차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가 그를 끌고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마침 배독(陪读, 황자나 귀족 자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공부를 보살펴 주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리 와서 내 시중을 드는 게 어때? 그럼 그 옷도 갈아입을 필요 없잖아. 그렇지?”
돌연 걸음을 멈춘 그녀가 뒤에 앉아있던 황자들을 바라보았다.
“이견은 없는 것으로 알겠어.”
날카로운 눈길이 황자들을 훑고 지나갔다. 재미삼아 구염락을 괴롭히던 몇몇 황자들은 즉시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모두 천자의 아들이므로 재상의 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중 황제의 총애가 가장 두터운 사황자가 조롱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감히 태자비의 말씀을 거역하겠습니까?”
장서열이 뭐라 반박하려던 순간, 구염단신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무엄하다! 예의를 갖춰라!”
말을 마친 태자는 매서운 눈초리로 사황자를 쏘아보았다. 황제에게 가장 큰 총애를 얻고 있는 사황자 모친의 위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타고난 태자의 위엄과 기세에 감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장서열은 구염단신을 향해 미소 지었다. 만약 그가 무사히 황제가 되었다면 자신 역시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녀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궁에서 수많은 여자를 보아 온 그가 제멋대로인 자신을 언제까지고 눈감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구염단신은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므로 지금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구염단신의 위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장서열의 미소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책을 읽는 척했다. 그리고 더는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런 태자를 바라보던 구염락의 시선에는 양심의 가책과 부러움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역시 서둘러 시선을 거둔 후, 이내 장서열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장서전은 마치 역병 걸린 사람을 대하듯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서열아, 너…….”
장서열은 그의 입에서 듣기 거북한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한 자 한 자 부드럽게 힘주어 말했다.
“오라버니, 돌아가서 자리에 앉아. 이제 곧 스승님께서 오실 거야.”
“스승님께서 오신다!”
누군가의 외침에 왁자지껄하던 학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장서열은 《유학(幼学)》을 펼치고 붓을 쥔 채 단정한 자세로 글자를 써내려갔다. 불경을 베껴 쓸 때와 달리 서체는 부드러우면서 강렬했으며, 자유롭고 대범한 필치가 날카로웠다. 도무지 아이가 쓴 글씨라고 보기 어려웠다.
단상에 선 주 대학사는 희끗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치하(治下)》를 강론하고 있었다. 진지한 자세로 임하던 구염락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나오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장서열에게 먹을 갈아주는 것도 잊었다. 장서열은 말없이 책상 뒤에 놓여있는 먹을 가져와 계속해 글씨를 썼다.
궁궐에서의 생활은 무료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과거 그녀는 대부분 글씨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애벌레가 기어가듯 구불구불한 글자부터 그저 닥치는 대로 썼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필치가 구염락의 것과 몹시 흡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식은땀이 흘렀다. 두려움에 더는 붓을 잡을 수 없었다. 누군가 그녀의 글씨를 보고 반역의 마음을 품었다고 오해할까 무서웠다.
그러나 지금, 구염락은 아직 붓도 잡아 보지 못한 어린아이였고 그녀는 원하는 대로 글을 쓸 수 있었다. 글씨조차 마음껏 쓸 수 없던 지난날의 설움과 그간 마음 속 깊숙이 억눌려 있던 욕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이제 그녀는 얼마든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었다. 무엇을 쓰든 모두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에게 먹을 갈아주는 구염락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글씨를 다 쓴 장서열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갑자기 그 위에 아무렇게나 먹칠을 하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그림을 그려도 속이 후련해지지 않자 이번에는 화선지에 구멍을 냈다. 아무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존귀한 글씨? 웃기고 있네!’
한편, 강론에 집중하던 구염락은 하마터면 손에 쥔 먹을 놓칠 뻔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리는 듯했다. 넋을 놓고 있다니. 안절부절 못하며 장서열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무심결에 그녀의 글씨로 향했다. 순간 그는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그녀의 필치에 온통 매료되었다.
그녀의 글씨는 어떤 마력을 가진 듯했다. 구염락은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억눌린 필치가 한데 어우러져 강한 생동감이 느껴졌다. 한 획 한 획이 모두 살아있어 보는 이를 멍하게 만들 만큼 힘이 넘쳤다. 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올라 그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울고 싶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의 눈물은 이미 말라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오로지 살아남을 방도만을 생각했다. 중독되어 죽을 위기를 넘겼고, 그를 진심으로 모시던 태감이 화살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을 처절하게 실감했다.
피가 파리 떼를 몰고 오듯, 눈물은 적들로 하여금 그를 더욱 집요하게 괴롭히게 만드는 촉매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서열의 붓 끝에서 탄생하는 글자에 크게 동요했다. 내면에 조용히 잠들어 있던 인내와 거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지난 이 년간 잠재워 놓은 균형이 깨지고, 난폭하고 야만스러운 힘이 꿈틀거렸다.
구염락은 자신이 갈망해 오던 장면을 바라보며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는 흐르는 물처럼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여자아이의 손목을 바라보며 탄복하고 흠모했다.
장서열은 쉬지 않고 계속 글씨를 써내려갔다. 나는 듯한 필치에는 어떠한 법칙도 존재하지 않았다. 글씨를 쓰고 그 위에 먹칠하기가 반복되었다. 망치지 않으면 통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주 대학사는 구석진 곳까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그의 주요 임무는 태자를 가르치고 그 나이대의 황자와 귀족 도령을 지도하는 일이었다. 그들을 먼저 살펴본 후에야 어린아이들과 여학생의 글씨 연습, 그리고 《유학(幼学)》을 지도했다. 그리고 배독은 일개 배독일 뿐이었다. 그들을 위해 따로 수업을 진행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건 이미 배독이 아니었다.
따라서 주 대학사는 장서열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기쁜 표정으로 태자가 해석하는 《치하(治下)》의 명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태자의 낭독이 이어질수록 그의 얼굴에는 짙은 만족감이 떠올랐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먹칠에 초조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또 한 번 글자 위에 먹칠을 하려 하자 그는 돌연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순간 그녀의 시선이 얼음장 같이 차가워지는 것을 본 그는 그만 머릿속이 온통 하얘져 하려던 말조차 잊어버렸다.
“놔.”
크지 않지만 차가운 목소리였다. 입술을 깨물던 구염락이 부드럽게 그녀를 어르며 말했다.
“그만해요. 아깝잖아요. 버릴 거면 내게 주면 안 돼요?”
장서열은 그와 지나치게 가까이 앉아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와 숨결이 조심스레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구염락은 진지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 장서열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귓가에 남아있는 그의 숨결이 마치 예전처럼 그녀의 몸을 떨리게 했다. 죽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장서열은 화가 나서 그의 손을 세게 밀친 뒤 그대로 화선지를 찢어 조각내 버렸다.
‘아니, 전부 찢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네게 주진 않아!’
학당 안의 수많은 시선이 조용히 그녀를 향했다.
구염단신은 주 대학사의 질문에 속도를 늦추지 않고 차분하게 답하는 한편, 아무도 모르게 장서열을 향해 얌전히 있으라는 눈짓을 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그녀의 시중을 제대로 들지 못한 구염락을 질책하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구염락이 재빨리 손을 거뒀다. 그는 스스로에게 당황스러웠다. 감히 그녀가 하는 일에 간섭을 하다니. 그는 장서열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더는 그녀가 쓴 글씨를 감상할 수 없었다.
소란이 가라앉은 후, 황자와 귀족 자제들은 스승님이 새로 낸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서열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겨우 다섯 살짜리 때문에 호흡이 흐트러진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러면 과거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방금 전의 일은 구염락의 용서는 고사하고 오히려 새로 원한을 쌓을 만한 행동이었다. 이럴 거면 여기에 다시 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조바심이 났다.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걸 주자.’
장서열은 다시 종이 한 장을 펼쳤다. 그에게 《유학(幼学)》의 구절을 베껴 써줄 참이었다.
「죽음에서 구원한 은혜는 재조라 하고, 죽은 목숨을 다시 살게 하여 준 덕은 은인이라 한다.(感救死之恩,曰再造。诵再生之德,曰二天。)」
장서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가 아무리 뻔뻔해도 이런 문장을 구염락에게 써줄 수는 없었다.
「제나라 부인이 원한을 품자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추연이 옥에 갇히니 음력 6월에 서리가 내렸다.(齐妇含冤,三年不雨。邹衍下狱,六月飞霜。)」
이건 그의 꼬인 마음을 더욱 비뚤게 만들 것 같았다.
「부친의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 함께 할 수 없고, 자식 된 도리로써…(父仇不共戴天,子道……)」
장서열은 책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유학(幼学)》이 원래 이런 내용이었던가?
마침내 붓을 잡아도 좋을 만한 문장이 나타났다.
「성대한 세상의 백성은 태평성대에서 즐거이 놀고, 태평성대의 천자는 빛나는 별처럼 상서로움을 부른다. 盛世黎民,嬉游于光天化日之下。太平天子,上召夫景星庆云之祥。」
태평성대에서 백성은 맑은 하늘과 밝은 달 아래에서 마음껏 뛰놀고, 나라를 평안케 하는 황제의 어질고 바른 정치에 하늘도 감동하여 상서로운 징조, 즉 빛나는 별과 오색구름을 선물한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