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황가학당에 다니는 여학생은 시녀를 데리고 입궁할 수 없었다. 비천한 신분과 부적절한 언행이 황자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곤궁한 집안의 딸 중에서 반독을 한두 명 선정해 시녀 역할을 맡겼다. 물론 그중에는 시녀를 가장해 황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학생은 유능한 수행 시동을 데리고 다녔는데, 시동 역할을 하는 이들은 황가 수업을 청강하고 식견을 넓혀 장래에 큰 인물이 되려는 부푼 꿈을 안고 있었다.
장서열은 반짝이는 눈으로 웃으며 태자를 바라보았다.
“됐어요.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에요.”
‘마음에 꼭 들지는 않는다는 소리군.’
구염단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간지럽게 흘러내렸다.
“너도 참.”
장서열은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여운은 그녀에게 조언을 하려 했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쳤고 결국 여운 스스로 매를 번 꼴이 됐다. 지금은 마냥 억울할 테니 일단은 놔둘 필요가 있었다. 혼쭐을 내는 건 차차 다른 구실을 만들어도 늦지 않았다.
“머리가 엉망이 되잖아요.”
그녀의 말에 구염단신은 오히려 더욱 손에 힘을 주고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미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네가 결정하거라. 그 아이가 반독을 계속 해도 괜찮으면 바로 사람을 보내 데려오라고 하마. 네가 수업을 듣는데 그 아이만 집에서 게으름을 피우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말을 마친 그는 장서열이 딱히 꺼리는 내색을 보이지 않자 사람을 보내 여운을 데려오도록 지시했다.
문 밖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큰소리는 아니었으나 기시감에 장서열은 공포와 긴장으로 일순간 머리가 쭈뼛 곤두서는 걸 느꼈다.
“열셋째, 넌 왜 또 태감처럼 입고 나타난 게야. 태감 옷이 그렇게 좋으냐? 아니면 태감이 네 어머니라도 돼?”
“넷째 형님, 태감이 어떻게 쟤 어머니일 수 있겠어요? 아버지라면 몰라도. 그나저나 저렇게 입으니 정말 태감 같군요. 열셋째 공공(公公, 태감을 부르는 존칭), 이리 와서 이 몸을 위해 먹을 갈아라!”
이어 상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발이 날아들었다.
“내 말 안 들려? 빨리 해! 죽고 싶으냐?”
넘어진 건 비쩍 마르고 왜소한 남자아이였다. 구염락은 옷도 털지 못한 채 황급히 바닥에서 일어나 허겁지겁 먹을 갈러 갔다.
“여섯째, 화를 내서 무엇 하겠느냐. 열셋째는 태감이 아니다. 어미의 출신이 미천한 것은 태감과는 다르다.”
그러자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아첨하듯 울렸다.
“전하, 노비에게 과분한 칭찬이시옵니다. 노비가 어찌 웃음을 파는 여인과 비교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한 여인의 재능이 노비에게는 없사옵니다.”
그 말에 거만하고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는 비웃는 사람들을 따라 아부 섞인 웃음을 지었다.
장서열은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를 향한 연민이 무한한 공포가 되어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그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의 웃음소리가 피로 짠 그물이 되어 그녀를 삼킬 것만 같았다.
그녀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주는 공포는 사람의 마음을 깊이 파고드는 데가 있었다.
침착해야 한다. 지금 구염락은 다섯 살 난 어린아이일 뿐 황위를 거머쥔 제왕이 아니었다. 아무 힘이 없는 그는 당장 그녀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장서열은 주먹을 쥐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두려움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장서전이 태자 일행과 함께 구염락의 옷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구염락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모욕을 참아내는 중이었다. 옷이 벗겨지지 않게 피하면서 동시에 손에 든 먹물이 튀지 않도록 애를 쓰는 모습이 마치 우스꽝스러운 광대와도 같았다. 그를 괴롭히는 이들은 즐거워 어쩔 줄을 몰랐다. 장서열은 분통이 터졌다.
‘그새 또 구염락을 괴롭히러 오다니!’
어찌됐든 그는 황자였다. 아무리 황제에게 미움을 샀어도, 다른 황자들이 그를 못살게 군다 해도, 황자도 신하도 아닌 오라버니가 그 무리에 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화가 난 장서열이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장서전!”
순간 전각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아이 역시 영문을 몰라 하며 두려움이 섞인 듯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장서열의 날카로운 눈빛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도도함이 뿜어져 나왔다. 전생의 그녀는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며 여러 해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그녀가 그 세월을 그저 헛되이 보낸 건 아니었다. 그녀가 온몸으로 드러내 보인 위엄은 과거 무수한 실패와 난관을 겪으며 몸소 익힌 것이었다.
“오라버니, 저 머리 아파요.”
또한 장서열은 구염락이 그 다음 황제가 될 거라고 말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잠시 멈칫한 장서전은 곧바로 구염락을 내팽개치고 누이동생에게 달려왔다.
“아파? 머리가 어떻게 아픈 거야?”
“어서 태의(太医, 궁에서 황제와 황족의 병을 치료하는 의원)를…!”
장서열이 얼른 태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태자 전하, 소녀는 괜찮습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요. 오라버니만 곁에 있어주면 금방 나을 거예요.”
혹시라도 자리를 뜨지 못하도록 그녀는 장서전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구염단신은 안쓰러운 눈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상야 부인(相爷夫人, 장서열의 어머니)이 그녀에게 석 달간 금족령을 내렸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장서열은 그로 인해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그렇게 가시 돋친 말투로 장서전에게 무섭게 고함을 칠 리 없었다.
그는 장서전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열이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놀 생각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열셋째를 골탕 먹이는 게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매일 괴롭히면서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장서전은 태자가 언짢은 기색을 비치고 누이동생조차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자 이유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누이동생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기뻤다. 그는 태자의 험악한 표정을 뒤로하고 작은 목소리로 장서열에게 물었다.
“왜 그래?”
집에서는 멀쩡했던 누이동생이기에 더욱 의아했다.
“그냥. 오라버니가 내 곁에 앉아있으면 좋겠어.”
장서열은 장서전이 자리를 뜨지 못하도록 옷깃을 세게 당겨 옆자리에 앉혔다. 예법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오라버니가 자신의 곁을 떠나 구염락을 괴롭히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 다만 후에 그가 오라버니를 용서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한편 아이들에게는 장서열의 막무가내가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저 세 달 동안 쉬고 나오더니 전보다 성격이 더 나빠졌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의 장서열은 자신이 진짜 태자비라도 된 듯, 마치 초혜전이 자기 집인 양 굴었다. 평민 출신인 그녀의 아버지처럼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한 차례 작은 소동이 지났으나 여전히 주 대학사(朱大学士)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각 안의 아이들은 책을 보거나 먹을 갈았고,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는 등 각자 일에 빠져들었다.
뒷자리의 아이들은 계속 그들의 ‘장난감’을 희롱했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웃음소리가 장서열의 귀에 흘러들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다시금 신경이 곤두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할 셈이지? 머지않아 그의 발밑에 꿇어 앉아 그의 눈치만 보며 살아갈 것들이! 너희가 학문에 정진하는 건 모두 그를 위해서야.’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장서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구염락, 너는 왜 반격하지 않아? 미래에 보여주는 권위는 다 어디로 간 거야? 네 어머니를 화류계 여자라고 욕보이고, 널 태감이라고 조롱하는데 왜 부정하지 않는 거냐고!’
줄지어 있는 책상과 어안이 벙벙한 얼굴들을 지나친 그녀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구염락의 옷깃을 낚아챘다.
“넌 옷도 없어? 태감 옷을 입고 비웃음 당하는 게 그렇게 재밌어? 입을 옷이 없으면 오지 말아야지!”
“난… 난… 수업을 듣고 싶어서…….”
장서열은 순간 멍해졌다.
‘고작 그 이유 때문에?’
구염락이 부끄러운 시선을 내리깐 채 작은 손으로 너덜너덜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형용할 수 없는 비애와 슬픔이 보였지만 모욕을 당해 분노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구염락의 확고한 눈동자에서 누가 뭐래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가던 영덕(赢徳) 황제를 다시 보았다. 쓸쓸하고 조용한 눈동자는 부끄러움을 타는 것을 제외하면 성인이 된 그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똑같았다. 그리고 그 눈은 그녀의 저열한 수법을 언제나 손쉽게 알아차렸었다.
전생을 떠올리던 장서열이 언짢은 듯 중얼거렸다.
“수업을 듣고 싶었다고…….”
그녀도 모르게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녀의 기분에 영향을 미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성인이 된 구염락은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당장 책상으로 내리쳐 죽여도 모자랄 판에! 그럼 미래에 그는 감히 나를 우습게 보지 못하겠지. 좌지우지하지도 못하겠지.’
구염락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 줄은 상상도 못 한 표정이었다.
‘혹시 또 맞게 되는 걸까?’
지난번 그는 그녀가 잃어버린 손수건을 주웠었다. 언제나처럼 그녀를 몰래 쳐다보다 얻은 기회였다. 손수건을 갖다 주면 기뻐할 거라 생각했으나, 그녀는 더러운 손으로 만진 손수건은 필요 없다며 갖다 버리라 했었다.
장서열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 챈 구염락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또 내가 그녀를 화나게 한 걸까.
“누님… 화내지 마요. 만… 만일 내가 여기 있는 게 싫다면 돌아갈게요…….”
그가 떠나기 싫은 마음을 가득 담아 아쉽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갈게……. 그러니까 화내지 마요.”
장서열은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성한 구염락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애원한 적이 없었다.
장서열은 엉겁결에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의 작고 마른 몸이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녀를 향해 끌려왔다. 그녀와 부딪히기 직전, 구염락이 기적처럼 중심을 잡았다. 그는 황공하고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는 세 개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있음을 느꼈다. 하나는 익숙한 태자의 시선이었다. 나머지는…….
멈칫한 장서열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딱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즉시 안색을 바꾸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혹시 구염락에게 지지 세력이 있을까? 하지만 황제에게 부정당한 황자를 누가 지지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