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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화 (4/449)
  • 제4화

    장신성은 상부 전원(前院)에 위치한 서재에 있었다. 그는 초조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벌써 한참이나 지났는데, 어째서 딸아이가 찾아오지 않는 걸까?

    “여봐라. 가서 서열이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보아라.”

    딸아이의 성격대로라면 어머니 조 씨와 한바탕 싸웠어야 했다.

    잠시 뒤, 시동이 돌아와 보고했다.

    “상야 어른, 큰아가씨와 큰도련님께서는 이미 입궁하셨다고 합니다.”

    장신성은 놀랐다. 이미 출발했다니? 아내가 서열이를 야단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녀의 성격상 황궁에서 사람을 때린 딸을 쉽게 용서할 리 만무했다. 장신성은 이내 경각심을 곧추 세우며 지시했다.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오너라.”

    절대로 계획이 틀어져서는 안 된다.

    * * *

    우뚝 솟아오른 궁궐은 연경(燕京)의 중앙에서 따스한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으리으리한 모습은 마치 거대한 맹수가 엎드려 있는 듯 장엄하고 신성했다. 모든 건축물과 번영한 거리는 궁궐로부터 백 장() 밖에 물러나 있어서 궁궐 주변은 도읍에서 유일하게 조용한 곳이었다.

    대주국(大周国) 황성은 바로 이 연경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중앙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 마치 오색 비단 끈을 연상케 하는 도로는 광활한 토지를 점령했고, 거리에는 온갖 상점들이 숲처럼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여러 민족이 융합된 수만 인구의 생활권이자 풍족한 물자를 자랑하는 이곳은 대주국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여러 관문을 통과한 마차는 길이 잘 닦인 노선을 따라가다 이윽고 황가학당 초혜전 근처에서 멈췄다.

    장서열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숨을 들이쉬었다. 황가의 위엄과 엄숙함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마음 속 깊이 잠자던 욕망이 끓어올랐다. 잃은 뒤에야 비로소 권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며, 권력을 소유해 본 자만이 황궁의 냉혹함을 깊이 받아들이는 법이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백관이 고개를 숙이고 모든 신하가 복종하는 것만큼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은 없었다. 가장 황홀한 것은, 대전에 앉아 내 아이에게 근심 걱정이 없도록 평탄한 길을 닦아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서열은 마음 속 어두운 기억들을 애써 억누르며 평온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지난 이십 년간 냉궁에서 고통 받았던 기억에 사로잡혀서도, 사람들을 원망으로 대해서도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냉정해 지자.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돼.’

    장서열은 머리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이 그녀의 여리고 앳된 얼굴 위로 쏟아졌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가 미소 짓는 모습을 본 남자아이들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석 달 내내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던 태자가 순식간에 기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빠르게 달려와 그녀를 맞이했다. 황금빛 긴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서열아, 드디어 왔구나!”

    태자를 모시는 장 공공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비가 그치고 새날이 왔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황후께 어떻게 보고를 드려야 할지 몰라 난감하던 참이었다.

    장서열은 태자를 향해 무릎을 굽히고 절을 올렸다. 준수하고 고귀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구염단신은 태생부터 존귀한 몸이었다. 출생 직후 태자로 봉해진 그에게는 황실 특유의 품위와 존재만으로 사람을 복종케 하는 품격이 흘러 넘쳤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구염락의 황권과 달리 그는 따스한 봄 햇살처럼 저절로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개를 떨군 장서열이 다시 얼굴을 들었다.

    “태자 전하.”

    사실 태자에 대한 마음은 이미 엷어진 지 오래였다. 기억 속 그녀는 태자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자신의 허영을 충족하려는 속셈뿐이었다. 배은망덕하게도 그 밖의 모든 것은 진작에 잊었다.

    다시 구염단신을 마주한 장서열은 이 감정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가 가엽지는 않았다. 황권 다툼은 본래 피바람이 몰아치는 전쟁이었다. 그의 부상이 ‘의외의 사고’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신하들은 태자가 후계자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걸 알자마자 더는 그에게 공을 들이지 않았고, 황제 역시 큰 기대를 걸었던 아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장서열은 누구보다도 자신감 넘쳤던 태자, 구염단신에게서 냉궁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태자의 지위를 잃은 그는 인생의 달고 쓴맛을 다 본 뒤, 대주국의 명운에 휩쓸려 이리저리 시달리다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구염단신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더는 그의 과분한 애정이 자신의 명성을 흠집 낸다고 생각지 않기로 했다. 아마 그 역시 불운한 사고가 발생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태자 오라버니, 왜 여기 있어요?”

    그녀의 얼굴에 본능적으로 천진난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스무 해 동안의 냉궁 생활이 그녀에게 가르쳐 준 건 남의 비위를 맞추는 방법과 정신병이었다.

    장서열의 미소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구염단신은 들뜬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귀티 나는 작은 얼굴이 쑥스러움에 살짝 붉게 물들었다.

    “난… 매일 이곳에서 널 기다렸어.”

    열 살 남짓한 그는 자신의 말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느꼈는지 황급히 오라버니의 존엄을 내세우며 이어 말했다.

    “가자. 초혜전으로 데려가 줄게.”

    이에 장서전이 부리나케 누이동생의 손을 낚아챈 뒤 비호하듯 말했다.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이제 태자도 열 살이 되었으니 더는 누이동생과 가까이 지내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당부가 있었던 탓이었다. 그러니 오라버니인 자신이 누이동생을 지켜야 했다.

    웃음기를 머금은 구염단신이 장서전을 바라보았다. 태자는 굳이 그의 말에 반박할 의사가 없어보였다.

    “함께 가자.”

    장서열은 잠시 태자를 바라보았다. 열 살의 황자는 이미 자신의 말 한마디가 어떠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지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나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의 세력을 의식한 걸까.’

    장서열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일 후자라면 그녀는 구염단신에게 구염락을 죽인 뒤 기 씨의 딸을 쫓아다니라고 권유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면, 어쩌면 그는 무사히 제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전자라면…….

    ‘미안하지만 난 당신이 죽을 때까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명을 재촉하게 만들었지.’

    불현듯 장서열은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염락을 죽인다?

    갑자기 눈앞에 새로운 문 하나가 활짝 열리는 기분이었다. 만일 구염락이 죽는다면 그 편에 섰던 이들은 더 이상 오라버니와 다른 이들의 권세를 시기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정통 황자 교육을 받은 구염단신과 혼인하는 것이 구염락과 혼인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하지만… 구염락을 죽일 수 있을까?’

    * * *

    장서열이 초혜전 안으로 들어서자 각기 다른 신분을 가진 여러 아이들이 순식간에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꽃같이 울긋불긋한 의복들은 마치 귀족의 연회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에 아이들은 먼저 세심하게 안부를 묻고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고 먼저 그녀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모습은 어린아이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련했다. 전각 안에 선 장서열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과거의 자신이 바보였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한번 과거의 삶을 살게 된 그녀는 어린 날의 치기를 벗어던졌다.

    장서열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미소 지은 채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또한 이따금씩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들의 인사가 진심이든 가식이든 그녀는 빠뜨리지 않고 모두 받아주었다. 전생에서 익힌 형식적인 예절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장서열은 자신이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성의가 없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사람이 있다는 그 느낌이 좋았다. 비록 마음에 없는 인사말일지라도 상대방이 그녀에게 안부를 물어준다면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따지고 싶지 않았다.

    떠들썩한 ‘관심과 배려’의 시간은 금방 끝이 났다. 장서열은 과거 자신이 너무 모질게 군 탓에 도리어 상냥한 모습에 놀라 일찍 물러난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에게 화가 치미는 걸 느꼈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구염단신은 놀란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왕손의 자제들이 아부하며 빌붙는 걸 제일 싫어했다. 무리가 해산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는 그녀를 보자 구염단신은 돌연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그녀를 위로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구염단신은 이제껏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을 한 번도 숨긴 적이 없었다. 예쁘고 도도해 마치 가시가 가득한 장미와도 같았던 그녀를, 그는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다. 원래는 이런 류의 여자아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그의 사촌 누이동생들이 꼭 이런 성격이었기에 그는 그녀가 입궁하지 않기를 바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장서열은 달랐다. 차갑고 못된 성격이지만 아무리 사납게 화를 내도 동그란 두 눈에는 반짝이는 빛이 가득했다. 빠져들 수밖에 없는 눈이었다.

    “태자 전하께 문안인사 올립니다. 천세를 누리십시오.”

    연달아 자리를 떠나던 아이들이 공손하게 절을 하며 태자의 곁을 지나갔다. 어린 나이임에도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예의범절에 있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서열은 다시 한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실감했다. 그녀는 타인의 안색을 살피기는커녕 분위기를 헤아릴 줄도 몰랐다. 동갑이지만 그녀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이들의 눈에 그녀는 사방을 설치고 다니며 소란이나 피우는 골칫덩이로 보였을 것이다.

    더욱 한심한 건,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게 바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구염단신은 의기소침해 하는 그녀를 보다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서열아.”

    “네?”

    갑자기 오동통한 손 하나가 의기 충만하게 장서전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서전아, 내가 ‘대장군’을 가져왔다. 보여줄 테니 이리 오거라. 용맹무쌍한데다 백전백승이야.”

    “정말?”

    장서전은 즉시 누이동생을 내버려두고 불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따라갔다.

    장서열은 오라버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돌이켜 보면 우연이라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구염단신은 그녀의 손을 이끌고 좌석으로 향했다. 그의 관심 어린 눈빛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장서열에게 위로를 건넸다.

    “걱정 마. 이미 지난 일이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도 너를 꾸짖지 않으실 거야. 정 마음에 안 들거든 반독(伴读, 옛날 귀족이나 부호 자제의 독서 친구)을 바꾸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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