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장서열은 복잡한 생각을 갈무리하려고 애쓰면서, 동시에 기쁜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예쁜 구슬과 부드러운 비단으로 장식된 서재에는 고급스러운 도자기와 금안(琴案, 금을 연주할 때 쓰는 책상), 그리고 쟁대(筝台, 쟁을 연주할 때 쓰는 책상) 등이 그녀의 취향에 꼭 맞게 배치되어 있었다. 누군가 그녀의 취향을 고려해주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장서열은 차분하게 붓을 쥐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과 그동안 마음껏 드러낼 수 없었던 오만, 그리고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원망을 억눌렀다. 지금은 그런 감정보다 햇볕 아래 서 있을 수 있는 현실에 집중해야 했다.
이제 더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마지막 남은 옷과 물건들을 팔지 않아도 된다. 냉화궁 앞을 지나는 어린 궁녀가 그녀에게 미소 짓기를 바랄 필요도 없다. 그녀는 너무 외로웠다.
넘치는 생명의 활기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녀를 노곤하게 감쌌다. 싱그러운 꽃향기가 취할 듯 그윽했다. 쉬지 않고 글씨를 써야만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기필코 보란 듯이 살아남을 것이다. 나의 아이들은 평생토록 어머니의 보호 아래 살아가게 될 거야.’
놀랍게도 그녀는 자유와 권세를 다시 한번 손에 쥐게 된 것이다.
‘금 귀비, 장서영. 날 다시 만나야 하는 너희도 참 불쌍하구나.’
“아가씨! 아가씨! 부인과 나리가 아가씨를 보러 오고 계세요!”
청색 종복을 입은 조그만 몸뚱이가 경쾌하게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심랑이 불쾌한 표정으로 아이를 흘겨보았다.
“여기는 상부(相府, 재상의 저택)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느냐. 법도는 다 어디 간 게야? 다음에도 그랬다가는 교육을 다시 받도록 하거라!”
일침을 놓은 심랑이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바삐 입구 쪽으로 향했다. 일곱 살 남짓 된 농교(弄巧)는 잔뜩 겁을 먹고 놀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작고 여윈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자 영양부족으로 누렇게 뜬 얼굴이 드러났다. 장서열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농교는 더욱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마치 주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놀란 강아지 같았다. 장서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보잘것없는 아이가 후에 생기 넘치는 미인이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문 밖에서 위엄에 찬 목소리로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장난 좀 친 것으로 이리 심한 벌을 내리다니요. 어미로서 몇 마디 훈계하면 될 것을 금족령은 너무 하지 않소. 오늘 조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태자께서 서열이는 언제 학당에 나오느냐 물어보시더이다.”
장서열은 미간을 찡그렸다. 태자는 조정에 들지 않고 승건전(升乾殿) 밖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던 게 틀림없었다. 조금도 삼가는 기색 없이 아버지에게 곧바로 자신의 소식을 묻다니. 사람들이 그녀를 미래의 태자비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태자의 질문에 대답한 이유는 스스로의 명성을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귀족 출신이 아닌 아버지에게 태자비라는 신분이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예복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아련한 목소리가 울렸다.
“서열아, 고생 많았지? 아버지가 보러 왔다.”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서열은 순식간에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아버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버지! 왜 이제 오셨어요. 앞으로는 멀리 가시면 안 돼요. 어머니가 얼마나 무섭다구요.”
서른이 훌쩍 넘은 장신성은 장원급제 후 훤칠한 키와 남다른 풍채로 수많은 귀족에게 사윗감으로 낙점된 인물이었다. 딸의 목소리에 마음이 뭉클해진 그는 예복을 입고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마음이 아프다는 듯 몸을 굽혀 딸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는 원망 섞인 눈초리로 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비쩍 마른 것 좀 보구려! 당신도 참 너무 하오. 그래봤자 후부의 딸을 때린 것뿐이니 이제 그만 하시오. 서열아, 이 아비가 데리고 나가 놀아주마.”
이내 냉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찌 그리 말씀 하십니까. 아무리 황제께서 후부를 홀대하고 있다 해도 백 년을 이어온 유서 깊은 가문입니다. 그리고 서열이가 사람을 때린 것 역시 잘못한 일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요.”
어머니의 훈계에 장서열은 차마 어머니는 쳐다보지 못하고 아버지의 목에 걸린 조주(朝珠, 고급관원이 목에 걸던 목걸이)만 조용히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는 그녀를 위해 모든 걸 바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를 뵐 면목이 없었다. 과거에 그녀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정성껏 고른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금 연주 솜씨도 형편 없었고 곡조에 맞춰 쟁을 튕길 줄도 몰랐으며, 심지어 예법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그럴수록 어머니는 그녀를 더욱 엄격하게 대했다. 어머니가 바느질과 자수 등 부녀자의 덕목을 갖추자고 그녀를 부드럽게 타일렀을 때에도 그녀는 거절하고 오히려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응석을 받아주는 아버지에게 기댔다.
돌이켜 보면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대체 얼마나 큰 원한이 맺혔기에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어머니를 함정에 빠뜨렸을까. 어머니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 딸을 망치는 일까지 서슴지 않다니. 모든 게 자신이 못났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거짓 웃음에 속아 적에게 어머니를 공격할 빌미를 주고 말았다.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이 금방이라도 울컥 쏟아질 것 같았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인은 못 되었을지라도 최소한 존귀한 상부의 안주인 자리는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매사에 철저해 실수하는 법이 없고, 쉰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우아하고 출중한 외모를 자랑하는 어머니는 냉철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오랜 세월동안 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여인의 기선을 제압했으며, 그 여인이 낳은 자식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일이 없도록 했다. 황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자식조차 지키지 못한 자신만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결코 첩과 타협 같은 걸 하지도, 상부의 안주인 자리를 내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를 뵐 면목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자만에 빠지게 만든 아버지의 고의적 방임을 사랑이라 착각했다. 그 결과 긍지 높은 어머니가 연로한 나이에 등잔불 아래서 근심으로 밤을 지새게 만들었고, 어머니가 이룬 반평생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어 버렸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시죠?’
장서열은 아버지의 목에 머리를 깊이 묻었다.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잘못했어요, 어머니.’
장신성은 딸의 눈물에 마음이 아팠다.
“서열아, 울지 말거라. 네 어머니는 말만 그러하지 널 많이 사랑한단다. 이제 금족령은 끝났다고 내가 약속하마.”
“…….”
“가자. 아버지가 함께 놀아주마. 여봐라, 뭣들 하고 서 있는 게냐. 어서 아가씨가 가지고 놀 연을 준비해라!”
장서열은 아버지의 반응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이렇듯 그녀를 총애했고 무엇이든 그녀의 뜻대로 하게 했다. 그녀의 배움이 변변치 못할 때에는 ‘너는 상부의 귀한 딸이니 그런 건 배우지 않아도 된다.’, 그녀의 학식이 시녀들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때에는 ‘골치 아픈 일은 하인에게 시키면 된다.’
매사 그런 식이었다. 조금만 수가 틀려도 화를 내고 제멋대로 구는 그녀에게 아버지는 ‘너는 고귀한 신분이니 누군가 너에게 복종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런 황당무계한 말들을 그녀는 철썩 같이 믿었다.
덕분에 그녀의 재능과 학식은 곁에 있는 시녀만 못했고, 성품 역시 다른 비빈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녀가 학식 있고 사리에 밝다는 소문은 십중팔구 그녀 곁의 두 시녀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후에 그들 중 한 명이 황제의 눈에 들어 재인(才人)에 봉해진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나 그녀를 끔찍하게 사랑한 아버지였는지 모른다.
“넋 놓고 뭣들 하는 게야. 어서 준비하래도!”
계집종들은 장서열의 어머니인 조 씨의 눈치를 보았다. 다른 건 안주인의 소관이었으나 딸 장서열에 관한 문제에서만큼은 조 씨도 장신성을 말릴 수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조 씨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또 시작이구나. 조 씨는 장신성을 말리려다 문득 책상에 놓여 있는 두꺼운 종이더미와 절반 정도 베껴 쓴 경서를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잠시 뒤 그녀의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조 씨가 막 방을 나서려는 농교를 급히 불러 세웠다.
“모두 아가씨가 쓴 것이냐?”
농교는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그렇습니다, 부인.”
농교에게 부인은 보살처럼 아름다운 분이었다. 부인은 언제나 상냥했고 또 바보 같은 자신을 거둬 주신 분이었다. 그래서 농교는 아가씨를 열심히 모시는 일이 곧 부인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라 여겼다.
조 씨는 강한 의심이 들었다. 정말 지시대로 경서를 백 번 베껴 쓰다니. 조 씨는 비록 미숙하지만 틀린 글자는 찾아볼 수 없는 화선지를 바라보며 마음이 아파왔다.
‘그 어린 것이 경서를 백 번이나 베껴 쓰다니, 손목이 얼마나 아팠을까.’
조 씨는 문득 자신이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촉아, 저녁에 연고를 가져다가 아가씨 손목을 주물러 드려라.”
“알겠습니다, 부인.”
부인의 지시에 홍촉은 마치 ‘그것 보세요, 아가씨도 착한 따님입니다.’하는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답했다. 조 씨는 그런 홍촉을 나무라지 않고 그녀를 따라 기쁘게 활짝 웃었다.
‘딸아이가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장신성에게 무분별한 사랑을 받아 버릇없는 아이로 자랄까 걱정했는데, 이제 한시름 놓아도 되겠어.’
그녀는 그간 온갖 방법을 총동원해 제멋대로인 딸의 성격을 고쳐보려 노력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엄한 벌을 내리면 장신성은 마치 딸을 피신이라도 시키듯 전원(前院)에 머물게 했다. 그럴 때면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물론 조 씨는 딸이 무뚝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지 않았다. 다만 교만과 방자함의 도를 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천천히 하자. 드디어 좋은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어.’
조 씨는 경서를 베껴 쓴 종이를 보며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희열을 느꼈다.
* * *
다음날 새벽, 주홍빛 상의와 주름치마를 단정하게 차려 입은 장서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 갈래로 틀어 올린 새카만 머리에는 구슬이 달린 비단 끈이 큰 나비매듭을 그리고 있었다. 귀에 걸린 정교한 나비 귀걸이와 손목에 찬 순색의 홍옥 팔찌는 그녀의 걸음마다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한층 돋보이게 해주었다.
장서열은 초혜전(初慧殿)으로 향하기 전,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오라버니와 함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