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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화 (1/449)
  • 제1화

    웅장한 대전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연한 하늘빛의 연꽃 치마를 두른 소녀는 귀한 신분을 보여주듯 양 갈래로 틀어 올린 머리에 금실로 수놓은 비단 끈을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는 도도한 노기가 서려 있었고, 가냘프고 작은 손은 위로 치켜 올린 채였다. 순간, 허공에 머무르던 작은 손이 소녀만큼이나 앳된 얼굴을 세차게 후려쳤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따귀를 맞은 여자아이의 한쪽 뺨이 순식간에 빨갛게 부어올랐다. 호두처럼 커다란 아이의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아이는 억울한 얼굴을 들어 거만한 표정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빨갛게 부어오른 뺨이 안쓰러웠다. 아직 앳된 얼굴이지만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만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아이였다. 아이는 여린 음성으로 억울해 하며 물었다.

    “서열 언니, 왜… 때리는 거예요…….”

    장서열은 깜짝 놀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순간 그녀는 두려움에 구석으로 숨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고정하세요, 아가씨.”

    그녀의 주변을 에워싼 궁녀들이 즉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장서열의 눈에 청석이 깔린 눈부신 지면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음속에서 경고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벽의 정중앙에 걸린 거대한 편액에는 패기 넘치는 필체로 ‘근면치학(勤勉治学)’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편액 아래로는 거침없이 긴 물줄기를 묘사한 강렬한 화풍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 앞 책상에서 은은하고 그윽한 묵향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그녀의 영혼은 경악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급 묵향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정신없이 묵향을 들이마시던 그녀는 별안간 깨달았다. 이곳이 그녀가 있던 낡고 허름한 곳이 아닌, 과거의 부귀하고 장중한 곳이라는 것을.

    대전을 떠받친 다섯 개의 기둥은 금빛 용과 봉황으로 빛났고, 거울처럼 매끈한 바닥은 반들반들 윤이 났다. 중앙의 상단에는 교탁이, 아래에는 스무 개 남짓한 책걸상이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모든 책상에는 화선지와 먹, 그리고 벼루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대전을 가득 메운 서책에서는 호화롭고 화려한 권위마저 느껴졌다.

    ‘어째서 이곳 꿈을 꾸게 된 걸까?’

    장서열의 정신이 번쩍 들며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마치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과거를 회상하게 해주려는 듯 모든 것이 몹시도 생생했다. 이곳은 그녀가 죽어도 잊지 못할 곳이자, 유년 시절 그녀가 가장 기세등등한 생활을 영위했던 황가학당이었다.

    고개를 조아리는 주변의 궁녀들과 태감들 역시 매우 익숙한 얼굴이었다. 장서열은 의아하고 놀라웠다.

    ‘나는 이미 죽지 않았던가? 스무 해 넘게 갇혀 있던 냉궁(冷宮, 총애를 잃은 비빈이 거처하던 쓸쓸한 궁) 안,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적막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깊이 사랑한 남자는 그녀가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애원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사랑한 여자는 독사처럼 그녀를 모욕했다. 그녀가 죽을 때는 한없이 동정하는 척했지만 이미 음흉하게 귀비(贵妃)의 지위를 꿰찬 상태였다.

    장서열은 신분이 고귀하고 성격이 제멋대로이며 성품이 거만했다. 하지만 그것이 죽어 마땅한 죄는 아니었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부모님과 숙부님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란 게 죄란 말인가? 금 귀비 같은 궁녀 출신만이 궁 안에서 평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법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왜 때리는 거예요……. 이런 억지가 대체 어디 있어요…….”

    마치 꾀꼬리를 연상케 하는 아이의 원망 섞인 목소리는 봄날의 정경처럼 맑고 청아했다. 이 모습은 그녀를 더 불쌍하고 가련해 보이게 했지만, 장서열은 이에 아랑곳없이 다시 손을 들어 다른 쪽 뺨을 찰싹 갈겼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말할 때 큰 소리 내지 말고 조심하라고! 이러면 나도 널 지켜줄 수 없어!

    그래, 넌 너를 괴롭히기만 하고 존중해주지 않는 나의 보호 같은 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했지. 나에게 황후 자격이 없다며 너를 ‘존중’해주는 금 귀비와 결탁해 나를 폐위시키려 했잖아.

    하지만 난 내 아이를 보호해야 했어. 내 자식들에게 냉궁에 갇힌 어머니를 갖게 할 순 없었지. 그러니 넌 반드시 죽어야 했어. 넌 날 계략에 빠뜨렸고, 호시탐탐 나를 노리던 황제에게 공격할 빌미를 제공했지. 그러니 내가 널 어찌 살려 둘 수 있었겠니?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한 행동이라 해도 나는 널 절대 용서할 수 없었어!

    네가 회임한 지 삼 개월이 다 되어가는 몸이었다는 건 뒤늦게야 알았지.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해도 내 결정은 변하지 않았을 거야.

    이만하면 서로 남은 빚은 없는 셈인가?

    “여봐라! 아가씨께서 손이 아프시다! 어서 얼음을 가져와 찜질을 해드려라!”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익숙한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가씨, 고정하세요. 여기는 황궁이라 소란을 피우시면 수습하기 곤란합니다.”

    곧이어 유모가 다시 호통을 치며 노비에게 재촉했다.

    “빨리 안 움직이고 뭐 하는 게냐! 아가씨 손이 붓기라도 하는 날에는 너희들에게 책임을 묻겠다!”

    그녀를 둘러싼 시종들 사이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멍하니 서있던 장서열은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뛸 듯이 기뻐했다. 꿈이라도 좋았다. 이렇게 생생하게 과거의 꿈을 꾸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기 때문이었다.

    종종 걸음으로 입구로 향하던 궁녀들은 때마침 대전으로 돌아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당황한 궁녀들은 황자들과 도련님, 아가씨에게 질서정연하게 절을 올렸다.

    장서열이 고개를 들어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줄지어 선 책상과 화선지, 서책으로부터 앳되고 귀한 얼굴들을 지나 풋풋하고 발랄한 작은 얼굴 위에 고정됐다.

    ‘어떻게 된 거지? 여덟, 아홉 살 정도인 건가?’

    금실로 수놓은 금포를 입은 그는 귀티가 나는 얼굴을 살짝 치켜들고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거의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한 표정과 세월에 굽은 허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유년 시절 거만하고 호전적인 그 모습 그대로였다.

    뒷사람과 작게 대화를 주고받던 그의 화난 얼굴이 돌연 한층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곧이어 뒤에서 그의 비위를 맞추고 있던 마르고 허약한 남자아이에게 발길질이 떨어졌다.

    “패배한 주제에! 무엄하다!”

    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러나 아이는 억울해 하기는커녕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엉겨 붙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발길질을 해달라고 구차하게 빌었다.

    “모두 노비의 잘못입니다. 도련님의 발을 더럽혔으니 노비가 닦아드리겠습니다.”

    비굴한 표정으로 전력을 다해 비위를 맞추는 모습을 본 장서열의 얼굴이 흡사 귀신이라도 본 양 놀람과 공포로 딱딱하게 굳었다.

    황제 구염락. 주나라 역사상 가장 악랄했으나, 동시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제왕.

    ‘안 돼, 오라버니! 그를 발로 차면 안 돼!’

    장서열은 속으로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지만 너무 겁에 질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미래의 황제야! 그리고 맺힌 원한은 반드시 갚는 사람이야,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조정 대신의 시체를 금란전(金銮殿)에 매달고 신하들을 위협하는 폭군이란 말이야!

    그는 천 리를 내다보는 전략으로 천 년의 패업을 이룬 위대한 제왕이야. 덕분에 미래의 주 왕조는 60년이 넘는 태평성대를 누릴 거고, 인재를 알아보는 그의 탁월한 안목과 전쟁에서 보인 용맹함에 수많은 나라가 그에게 복종할 거야. 그의 손에 억울하게 죽는다 해도 아무도 오라버니를 위해 복수해 줄 수 없어.

    그러니 오라버니, 절대 그에게 미움을 사면 안 돼.

    오라버니의 운명은 그의 손에 달려 있고 오라버니의 청사진은 그의 발아래 실현될 거야. 장군이 되는 꿈조차도 그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어. 지금 황제에게 무시당하는 어리고 철없는 아이라고 해서 그를 모욕하고 괴롭히면 안 돼. 제위와 거리가 멀고 주목 받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해서 황자들과 함께 그에게 발길질하지 마.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해. 지금 그의 앞에서 거들먹거리던 오라버니는 미래에 비참한 신세가 될 거야…….

    오라버니뿐만이 아니야. 그를 업신여기던 이들이,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응징을 당하게 될 거야. 꽃처럼 아름답기에 그에게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칭송 받던 나조차도…….

    우리 모두 완전히 틀렸어!

    잔뜩 주눅이 든 아이의 시선이 겹겹이 진을 친 사람들 사이를 지나 장서열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과 부딪친 순간, 그녀는 격렬한 증오심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그로부터 3개월 뒤, 장서열은 고풍스러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청록색 나비 소매를 걷어 올린 그녀는 차분히 글씨를 써내려갔다. 향로에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 가득했고, 방 한편에는 하인들이 공손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 먹을 갈던 심랑은 수심에 가득 찬 미간을 펴지 못했다. 벌써 3개월이나 지났다. 그런데 아가씨는 왜 이러실까?

    그날, 혼절한 채 궁에서 돌아온 장서열은 정신을 차린 뒤 어머니께 불려갔었다. 심랑으로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후 장서열은 줄곧 침묵하는 중이었다.

    작위만 있을 뿐 실권은 없는 후부(侯府)의 아가씨를 때렸을 뿐이었다. 전에 이런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직 나이도 어린 아가씨를 이토록 엄히 혼낼 필요는 없었다고 심랑은 생각했다.

    서열 아가씨는 원체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음식이나 물건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꺼려했고, 입는 옷과 몸치장에는 특히 더 엄격했다. 그러나 최근 아가씨는 전과 달랐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조용하고 차분했다.

    상야(相爷, 재상의 속칭) 어른께 아뢔야 하는 게 아닐까? 아가씨가 계속 이런 고초를 겪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장서열이 붓을 멈추고 가만히 손목을 주물렀다. 곁에 있던 시녀가 송구해하며 즉시 따뜻한 물과 수건, 붓받침을 대령했다.

    “고생하십니다, 아가씨.”

    장서열은 잠시 시녀가 대령한 물건을 바라보다 이내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글을 베껴 쓰기 시작했다.

    3개월이 지난 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음을 확신했다. 따뜻한 집과 한껏 의기양양 했던 유년 시절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러자 오히려 지난 20년 동안 겪었던 고통과 외로운 세월이 꿈같았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꿈.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첩을 들여 육 이랑(姨娘, 첩을 부르던 말)이 들어온 뒤, 그녀는 지난 경험이 결코 꿈이 아니었음을 똑똑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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