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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악녀를 닮은 황녀 (34/34)

외전 2. 악녀를 닮은 황녀

카산드라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연무장에 들어선 지 세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는 도무지 검에 집중할 수 없었다.

“2황녀 전하께서는 악녀를 닮았어요.”

그날 오전, 귀족 자제들과의 역사 수업 중 누군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 똑똑했다던데, 그래서 전하도 머리가 좋은 거 아닐까요? 아마 성격도 닮았을 거예요.”

알프레드 에스테반은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열세 번째 생일이 막 지난 카산드라가 세 살 많은 자신을 또다시 제치고 1등을 차지하자, 소년은 분해서 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렸던 것이다.

기겁한 학우들이 그의 입을 막았고, 스승은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알프레드를 훈계했지만 카산드라는 그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처음 들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알프레드가 말한 ‘악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페트라 리페르. 과거 어머니가 가장 경계했던 적이자 폐황제 가이우스의 여동생, 즉 어머니의 고모였다.

카산드라가 아이였을 때부터, 조심성 없는 몇몇 사용인들은 알프레드와 비슷한 이야기를 속닥거리고는 했었다.

“황녀 전하께서……누구 닮지 않았어? 폐황제나 리페르 공작 부인 말고는 그런…….”

“쉿! 누가 들으려면 어쩌려고!”

“아니, 말이 그렇다고. 황금안이 흔하지는 않잖아.”

악의 없는 잡담이었고, 카산드라의 귀가 유난히 밝은 탓도 있기에 그녀도 딱히 그들을 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금씩 신경이 쓰인 것은 사실이었다.

언제부턴가 카산드라는 거울을 보며 스스로의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직 젖살이 남아 있었지만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코와 입술, 어머니를 닮아 약간 무심해 보이는 표정. 그녀의 얼굴은 분명 황제 부부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다만 밤하늘처럼 검고 긴 머리에 늑대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황금안의 조합은 황실의 그 누구에게도 없는 특징이었다. 카산드라는 애써 그 점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알프레드의 말을 들은 그날은 괜히 생각이 많아졌다.

“……전하!”

정말 그 사람을 닮은 건가?

“전하! 잠깐만…… 항복……!”

많은 남매 중 왜 하필 나만?

“전하! 그만 때리시라고요. 항복이라잖아요!”

따악-

목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리자, 카산드라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응?”

그녀는 몇 차례 눈을 깜빡였다. 아까 집어 들었던 것 같은 목검이 멀리 날아가 땅바닥에 떨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코앞에는 연갈색 머리를 높이 묶은 기사 한 명이 그녀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노아?”

카산드라를 가로막은 것은 호위이자 친구인 노아 바이안이었다. 목검을 든 폼으로 보아, 방금 카산드라의 검을 날려 버린 것이 그녀인 모양이었다.

‘잠깐만, 내가 노아랑 대련을 했다고?’

멍한 와중에 누군가와 검을 맞대긴 했지만 그게 노아라면 이상한 일이었다. 천재 소리를 듣는 카산드라도 노아와 대련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아, 그래서 진 건가?’

카산드라는 그제야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목검을 든 노아 너머로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거리는 남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불한당에게 얻어맞았는지, 그는 부어오른 손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얼굴에도 멍 자국이 조금 보였다.

“딜런 경은 아까 항복했다구요! 심판이 말하면 좀 들어요!”

노아가 소리쳤다.

“아! 나구나!”

무언가 기억이 난 카산드라가 제 이마를 탁 쳤다.

내가 그 불한당이네.

그녀는 조금 전 딜런과 대련을 시작했었다. 즉, 딜런 경을 저 꼴로 만든 사람은 카산드라 자신이었던 것이다.

“벌써 아홉 명째예요. 멍하게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노아가 투덜거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일고여덟 명의 성인 남녀가 딜런 경과 비슷한 자세로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모두 황실 기사단 소속의 기사였고, 하나같이 팔다리가 멍투성이였다.

“아이고…….”

카산드라가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이 많을 때면 무심하게 검을 휘두르는 습관은 떨쳐지지 않았다.

“대련을 할 거면 상대를 존중하면서 하셔야죠.”

“으응, 반성할게.”

노아의 잔소리에 카산드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노아는 카산드라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열네 살이었지만 말투며 태도는 훨씬 성숙했다. 키가 카산드라보다 한 뼘이나 작은 그녀가 크게 느껴지는 이유였다.

“전하, 고민이 있으세요?”

한결 부드러워진 노아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카산드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랑 이야기할래요?”

카산드라는 다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프레드 에스테반이 그런 말을 했어요?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노아가 눈썹을 찌푸리며 정원 탁자를 손으로 내리쳤다. 잿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 애 때문에 기분이 나쁜 건 아니고…….”

“아니에요? 딱 기분 나쁘라고 한 말 같은데!”

대신 화를 내주는 노아를 보며 카산드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 사람과 겹쳐 보나 싶어서.”

카산드라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노아의 눈썹 끝도 덩달아 처졌다. 그녀는 잠시 할 말을 고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최소한 저희 부모님은.”

노아가 신중하게 말했다. 카산드라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야?”

“진작 죽은 사람이긴 하지만, 두 분 다 페트라 리페르를 아주 싫어하시거든요. 처음 만났을 때는 그것 외에 별 공통점이 없었다고 농담을 하실 정도니까요.”

노아가 설명했다.

“그래서?”

“그러니까.”

처졌던 노아의 눈썹 끝이 다시 명랑하게 올라갔다.

“전하를 그 사람과 겹쳐 본다면 소중한 딸을 전하의 호위로 들여보낼 리가 없잖아요? 잘생긴 1황자님의 곁으로 보내야지!”

노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카산드라를 위로하기 위해 억지로 농담을 한 것이겠지만 그 와중에 1황자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그녀는 황홀한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너 얼마 전에는 잘 생긴 벨라 남자애가 황실 요리사 보조로 들어왔다고 호들갑이었잖아.”

카산드라가 지적했으나 노아는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미남은 많을수록 좋다는 자신의 철학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제국에서 제일 잘생긴 건 역시 1황자님이죠.”

“하긴, 미카엘 오빠는…….”

카산드라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자신에게는 귀찮은 오빠에 불과했지만 미카엘은 객관적으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아직 열넷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노아를 비롯해 셀 수 없이 많은 소녀들이 그를 보기만 해도 얼굴을 붉힌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아버지를 꼭 닮았으니 당연하지!’

카산드라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미카엘은 아버지의 섬세한 얼굴과 짙푸른 눈동자, 그리고 기다란 체형까지 그대로 받았다. 머리색이 어머니와 같은 밝은 금발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면 아버지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카산드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웃겨 보기 위해 노력하는 노아에게는 미안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은 오빠의 모습을 생각하니 우울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미카엘뿐 아니라 나머지 다섯 남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나 어머니를 섞은 듯한 생김새였고, 반역자를 연상시키는 사람은 카산드라뿐이었다.

1황녀 엘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둘째인 미카엘이 아버지의 소년 모습이라면, 첫째인 엘렌은 소녀 형태의 어머니나 마찬가지였다. 황족이 틀림없는 금발과 신비로운 금적안, 우아한 걸음걸이며 목소리, 말투까지 어머니를 닮았다.

그녀는 황제 부부뿐 아니라 모든 대신들과 백성들의 사랑도 한 몸에 받았다. 아마 진작에 황태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본인이 온 힘을 다해 그 자리를 걷어차지 않았더라면.

넷째와 다섯째, 그러니까 3황녀와 2황자는 쌍둥이였다. 한 명은 금발, 한 명은 은발이기에 그들은 제국의 별과 달이라 불렸다.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두 아이들은 이미 몇 년째 함께 작곡이며 연주를 하고 있었다.

여섯, 일곱째도 비슷했다. 가족들은 서로 한 폭의 수채화처럼 잘 어울렸고, 그 안에서 혼자 달라 보이는 것은 카산드라뿐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그 사람을 떠올리지 않으실까?”

카산드라가 다시 중얼거렸다.

노아는 질문을 들었음이 분명함에도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의 마음은 타인이 짐작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리라. 물론 짐작을 넘어 황제의 생각을 읽다시피 하는 노아의 어머니는 예외였지만.

카산드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는 따뜻하고 공정한 사람이다. 그녀는 분명히 일곱 남매를 모두 사랑했다.

물론 어머니는 바빠서 그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그녀는 황제이니까. 일곱 남매들은 각각 유모를 두었고 평소 그들을 자주 보는 것은 아버지였다.

다만 어머니는 매일 아침 공무를 시작하기 전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 시간을 이용해 훈육을 하기도 했다.

카산드라는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곱 명을 ‘똑같이’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가끔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자식들에 대한 편애를 드러낸 적이 없었으나, 그것이 의식적인 조심성이라면? 어머니는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 능한 사람이었다. 자식 중 한 명이 덜 예쁘더라도 얼마든지 그 사실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산드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는 정말로 잊었을까? 자신을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은 사람의 모습을.

정말로 아무렇지 않을까? 그 사람을 닮은 딸을 날마다 마주하는 일이.

어머니는 정말로 카산드라를 다른 남매들만큼 사랑할까?

카산드라는 어머니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 전하, 곧 황실 사냥 대회가 열린대요.”

가만히 카산드라의 곁에 앉아 있던 노아가 갑자기 말했다. 카산드라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떠올라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사냥 대회? 올해가 아니지 않나? 2년 전에 열렸어야 했는데 취소됐잖아.”

카산드라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본래 5년에 한 번 열리는 사냥 대회의 주최 예정년도는 재작년이었다. 다만 그해에 오랫동안 황실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포트러스 후작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취소되었던 것이다.

물론 반란은 금방 진압되었다. 아버지는 혼자서 적은 수의 군대를 이끌고 후작령으로 가더니 몇 달 만에 후작의 목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때가 되자 사냥 대회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중요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다시 연다고 해요. 이미 초대장이 다 돌았다던데요? 다다음 달인데 소식 못 들으셨어요?”

카산드라가 관심을 보이자 노아가 신나서 말을 이었다.

“전하와 1황자 전하께서 참가하실 것 같다고 다들 관심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하고 미카엘 오빠?”

“네.”

노아가 그것도 몰랐냐는 듯 대답했다. 카산드라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열리면 참가해야겠지. 제국의 영웅을 뽑는다는데 굳이 안 할 이유가…….”

“맞아요. 전하들의 경우는 의미가 조금 더 깊겠지만요.”

“응?”

예상치 못한 노아의 말에 카산드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사냥 대회는 큰일이었고 우승자의 자리는 명예로웠다. 그러나 황자녀라고 하여 뭐가 다른지 카산드라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소문 있잖아요. 폐하께서 최근 황태자를 정하기 위해 고심 중이시라는. 전하들 중 우승자가 나오면 그분이 황태자로 봉해질 거라고들 난리예요.”

노아가 웃으며 덧붙였다. 카산드라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소문이 있어?”

“어? 모르셨어요?”

카산드라의 반응에 당황한 노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하…… 어머니가 쓸데없는 소문 퍼뜨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치만 저는 당연히 전하께서도 아시는 줄 알고.”

그녀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버벅거렸다. 하지만 이미 노아의 말을 들어 버린 카산드라는 집요하게 물었다.

“어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거야?”

“아니요!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노아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최근에 전하들의 스승님을 불러서 말씀을 몇 번 나누셨다고…….”

“그건 나도 아는데…… 그게 황태자 문제였던 거야? 대회 이야기는 또 왜 나와?”

카산드라가 다시 묻자 노아가 할 수 없다는 듯 대답을 마저 했다.

“추측이에요, 추측. 그 이야기 있잖아요. 황자나, 드물지만 황녀가 사냥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경우 그 사람은 꼭 황위에 올랐다고. 파스칼 3세께서도 그러셨다고요.”

그러니까 최근 도는 소문은 이런 것이었다.

황제가 자녀들의 스승을 불러 무언가를 상의할 무렵 사냥 대회 개최의 일정이 잡혔고, 그런 점으로 보아 황제는 분명 황태자 후보를 놓고 고민 중이었을 것이며, 대회 우승자를 그 자리에 올리겠다는 의지가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

카산드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녀도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다만 그 전까지 카산드라는 딱히 황태자라는 자리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유의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냥 대회라…….”

“네! 재미있을 거예요. 끝나고 나면 검투 시합이 따로 열린대요. 투구를 쓰니까 이름을 숨기고 참가할 수도 있다고, 그러면 신분 때문에 서로 져 주는 일 없이 진짜 승부를…….”

노아는 계속해서 조잘거렸지만 카산드라는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런가?”

“네?”

“어머니의 눈에도, 사냥 대회에서 우승하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자식으로 보이겠지?”

“아…… 그렇게까지는…….”

“그래서 황태자로 임명이 된다면, 그건 어머니가 그 사람을 무척 사랑한다는 뜻일 거고 말이야.”

“그런…… 건가요?”

노아는 애매하게 얼버무리려 했지만, 카산드라는 이미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 표정이었다.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어떤 결심의 흔적이 떠올랐다.

“……전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노아를 두고, 카산드라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옆에 두었던 목검을 집어 들었다.

“가자.”

“어딜요?”

“대련하러. 네가 해 줘.”

카산드라가 말했다. 조금 전 연무장에서는 멍했던 그녀의 황금안이 이채를 띠었다. 이는 그녀가 진지하다는 뜻이었다.

“하아…….”

노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카산드라는 그럭저럭 부드러운 편이었으나, 한번 경쟁에 몰입하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눈이 초롱초롱한 걸 보면 오늘 하루는 해가 떨어질 때까지 연무장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카산드라를 따라 일어났다.

해야지 어쩌겠는가. 노아가 나서지 않으면 카산드라는 제대로 된 연습 상대를 찾기가 어려웠다. 아버지의 검술 실력을 물려받은 이 천재 황녀를 상대로 오래 버티는 사람이 너무 드물기 때문이었다.

“가요, 가.”

그녀는 목검을 들고 앞서가는 카산드라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두 달 후.

카산드라는 사냥터 여기저기에서 대기하며 몸을 푸는 참가자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몇 명이 정중하게 묵례를 했다. 카산드라도 고갯짓으로 답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상냥하게 인사를 주고받아 봤자 대회가 시작되면 그들 모두가 적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몇 분 후면 시작이구나.’

아무리 두 달 동안 특훈을 했다지만 이 순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노아라도 옆에 있어 주었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그녀는 ‘잘해 보시라, 난 끝나고 검투 시합이나 나갈 거다’라며 사냥 대회에서 빠져 버렸다.

‘하긴, 참가했다면 노아도 경쟁자였겠지.’

카산드라는 생각에 잠긴 채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자신이 대회의 우승을 노리고 있는 이상 노아의 불참은 좋은 소식이었다. 노아는 검술이 뛰어날 뿐 아니라 황실 기사단 소속 기사로서 실제 마물 토벌 작전에 참가해 본 경험도 많았으니까.

‘그러면 이번 대회는 역시…….’

카산드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론도 경험도 풍부한 노아가 빠졌다. 그렇다면 역시 이 대회에서 가장 유의해야 하는 경쟁자는…….

“캐시, 너 긴장했구나?”

한참 생각에 잠긴 그녀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카산드라가 너무나도 잘 아는 목소리였다.

“늦었네, 오빠.”

그녀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반갑게 미소 짓는 미카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또렷한 이목구비며 바다를 닮은 눈동자까지 아버지와 똑같은 얼굴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고, 어머니를 꼭 닮은 태양 같은 금발은 은빛 갑주 위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카산드라는 저도 모르게 입이 튀어나왔다.

“긴장하면 마물들이 다 알고 너만 공격한다.”

미카엘이 카산드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녀는 애써 여유로운 척 대꾸했다.

“잘됐네. 더 긴장해야겠다. 내가 다 잡게.”

“와, 자신 있나 봐? 요즘 연습 열심히 하더니.”

미카엘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원래도 연습 시간이 자주 겹치던 두 사람은 최근 두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연무장에서 서로 마주쳐 왔다. 놀리는 듯한 말투에 카산드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미카엘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하지 마!”

카산드라가 뿌리치려 했지만 미카엘은 더욱 끈질기게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예쁜데 왜?”

“오빠 좀 저리 가! 이제 나한테 말 걸지 마!”

카산드라가 투덜거렸다. 미카엘은 혀를 쏙 내밀더니 유유히 다른 기사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멀어졌다. 카산드라는 천천히 손을 들어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었다.

찌푸렸던 얼굴은 어느새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멀리서 그녀의 것과 비슷한 장검을 뽑아 허공에 천천히 무언가를 그리며 연습하는 미카엘의 모습이 보였다.

‘오빠도 긴장했구나.’

카산드라가 문득 깨달았다.

겉보기에는 항상 여유로운 미카엘이었지만 속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비슷한 그녀와 미카엘은 다른 어떤 형제자매들보다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연무장에서, 도서관에서, 가끔 서로의 방에서도.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알았다.

큰 대회나 시험 전 긴장이 되면 카산드라를 찾아와 시비를 거는 것은 미카엘의 오랜 습관이었다.

‘우승을 노리고 있는 거야.’

카산드라는 멀리서 연습에 몰입한 미카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힐끗 보았다. 장난스러웠던 눈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직 다가올 승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안 돼.’

카산드라는 그로부터 시선을 떼고 자신의 검을 잡았다. 익숙한 손잡이의 느낌에 비로소 집중력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검을 들어 허공에 몇 개의 획을 그어 보았다. 검이 지나간 곳에 그어졌다가 사라지는 은빛 선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카산드라는 그제야 싱긋 미소를 지었다.

‘계속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오빠.’

그녀가 다시 검으로 허공을 가르며 생각했다. 검이 그리는 궤도가 조금씩 복잡하고 빨라졌다.

‘나는 절대로 안 져.’

아폴로니아는 사냥터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가장 높은 자리에서 대회 준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왼편에는 유리엘이, 오른편에는 대회 참가자를 제외한 다섯 아이들이 나란히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올해는 참가자가 많네. 사냥감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왼편에 앉은 남편을 바라보았다. 유리엘은 언제나처럼 아폴로니아를 보며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직접 잡아 왔으니 걱정 마십시오, 폐하.”

그가 대답했다. 10년을 훌쩍 넘는 결혼 생활을 했음에도, 그의 호칭은 결혼 전처럼 정중했다.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아, 그건 알지. 아는데…….”

아폴로니아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으나 유리엘은 뭐가 잘못됐냐는 듯 웃을 뿐이었다.

황실 사냥 대회의 시초는 민간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마물들을 한곳으로 끌어들여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생포하기 쉬운, 더 작은 마물을 야생에서 잡아들이는 쪽으로 변화한 것이다.

아폴로니아 즉위 후, 대회의 모습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유리엘이 소수의 인원을 데리고 마물 피해가 심한 지역에 가서 사냥감을 생포해 오는 식으로.

사냥감들은 더욱 거대하고 사나워졌지만, 백성들은 5년에 한 번 열리는 이 대회를 무척 환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의심하는 거야. 사람 몇 명 데려가지도 않고 어떻게 그걸 다 잡아 와?”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결혼식 이후부터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에게 맡긴 일을 굳이 다시 점검하지 않았고, 구체적인 보고도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맡은 일에서 한 번도 그녀를 실망시킨 적이 없기에 점검은 불필요했다.

다만, 이를 생략하자 아폴로니아는 종종 유리엘이 대체 어떻게 그러한 일들을 해내는 것인지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을 제압할 때에도, 마물을 사냥할 때에도 그는 최소의 인원만을 데려갔다가 깔끔하게 돌아왔다. 그의 전략이 갈수록 깊이를 더한다는 의미였다.

“제가 아는 모든 것은 폐하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효율적일 수밖에요.”

유리엘은 이상할 것 없다는 듯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그에게 마물 생포 작전을 가르쳐 준 기억이 없었기에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유리엘은 다른 설명을 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이번 사냥 대회의 사냥감은 기존 어느 대회보다 수준이 높을 겁니다. 물론 그만큼 험난하겠지만.”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참가자들은 강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있기도 하고요.”

아폴로니아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유리엘을 따라 미소 지었다.

“그런 걱정은 안 해. 좋은 사냥감을 만나야 능력을 다 보여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조용히 유리엘의 손바닥 위에 손을 얹었다. 그가 아폴로니아의 손을 살며시 쥐는 것이 느껴졌다. 그 온기가 마음에 들었기에, 아폴로니아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오른쪽에 앉은 큰딸을 바라보았다.

“1황녀는 오늘따라 즐거워 보이는구나.”

고개를 쭉 빼고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던 엘렌이 고개를 들어 아폴로니아를 마주보았다.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날인데, 당연히 즐겁지 않겠어요?”

그녀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폴로니아를 꼭 닮은 금적안이 반짝 빛났다.

“누가 대회에서 우승하든 제국의 미래는 밝을 거라 믿어요.”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번지르르하게 갖다 붙였지만, 딸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엘레니아 아스트리드 페르디안. 이 열다섯 살의 소녀는 태어난 순간부터 차기 황제로 지목되어 왔다. 황제의 장녀임은 물론, 아폴로니아와 마찬가지로 아폴론 신이 내려 주었다는 모든 특징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간혹 보수적인 대신들은 황태자를 황자들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아폴로니아를 설득했다.

그들의 주장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황위는 원래 남자들에게 더 어울리며, 제국의 역사에서 여인이 황위에 앉은 경우는 남자 형제가 없었을 때뿐입니다.’

그러나 제국은 여황제인 아폴로니아의 치세에 유례없이 번영했고, 이에 따라 그와 같은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아폴로니아 또한 제국 내 작위 승계의 문제에서 성별은 기준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명확히 했다.

엘렌은 자랄수록 총명해졌다. 그녀는 어린 나이부터 대륙의 정세며 경제를 정확하게 읽어 냈고, 대담함이나 지략에서도 또래의 어떤 아이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렇다. 엘렌은 대담하고 지능적이었다. 문제는, 자랄수록 대담해지던 그녀가 열두 살이 되던 날 자신은 절대로 황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부모에게 선언했다는 사실이었다.

“저는 좀 더 편하게 살려고요.”

엘렌은 대충 설명하고는 신나게 열두 살의 생일 파티를 즐겼다.

그 후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이 번갈아 가며 그녀와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그리고 여러 대신들이 찾아와 애원하다시피 했지만 그녀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잘 배우던 검술을 그만둔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제국의 미래는 1황녀 전하께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황태자를 지정할 권위를 가진 것은 오직 폐하인데, 때가 되면 황명을 거역하려는 것입니까?”

어느 날 엘렌의 나이 든 스승 에드윈 후작이 찾아와 엄하게 타일렀다. 엘렌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고 후작은 만족하며 돌아갔다.

바로 다음 날, 엘렌은 아폴론 신전에 무턱대고 걸어 들어가 신관을 만났다. 그녀가 가지고 들어간 고급 와인 몇 병 덕에 알딸딸해진 신관은, 엘렌의 회유에 넘어가 그녀를 보조 신관으로 만드는 데에 동의하고 말았다.

“신전이 권력과 가까워서는 안 되는 법이지요. 이제 저는 황태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어요.”

황당해하는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에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물론 자신의 거취에 대한 소문을 이리저리 퍼뜨린 다음의 이야기였다.

그 후로 1황녀를 황태자위에 올리자고 제안하는 이는 없었다. 신관 출신 황제를 맞았다가 제국의 모든 권력이 신전으로 쏠려 버리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비슷한 사례가 많았기에 그것만큼은 모두가 피하고 싶어 했다.

엘렌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거처가 신전으로 바뀌었기에 매일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황궁까지 말을 타고 오느라 체력이 좋아진 것을 제외하면.

신전의 규칙은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고 엘렌은 언제든 다시 황궁으로 돌아올 자유가 있었다. 그녀는 별다른 대가 없이 황태자위에서 멀어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타고난 성격이 치밀한 엘렌은 이를 더욱 확실히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황태자위에 누구를 올릴지 고심 중이라는 소문이 있더군요, 어머니.”

엘렌의 발랄한 목소리가 아폴로니아의 사고를 끊었다. 아폴로니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사냥 대회를 치르고 나면 공표하실 거라고 들었어요.”

엘렌은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차기 황태자가 지정되면 자신은 정말로 황위와 영원히 멀어진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쓸데없는 소문이구나.”

“어쩔 수 없는걸요. 제국의 기반이 될 국본에 대한 문제니까요.”

엘렌은 충성스러운 자신의 마음속에는 오직 제국의 미래밖에 없다는 듯 말했다. 황태자위를 제 발로 걷어차 국본의 자리가 비게 만든 장본인으로서는 상당히 뻔뻔한 태도였다.

“어차피 대회가 끝나면 모두가 알게 될 일, 제가 미리 축하할 준비를 하면 안 되는 건가요?”

아폴로니아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엘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근 1년 동안 후계자 지정에 대해 생각해 왔고, 틈만 나면 이를 유리엘과 상의했다. 아폴로니아는 실제로 오늘 후계자를 지정할 생각이 있었다. 다만 모든 것은 대회가 끝난 후의 일이었다.

“황녀는 오늘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지?”

문득 딸의 생각이 궁금해진 아폴로니아가 질문을 던졌다. 엘렌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게 물으시는 건가요?”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회에서 우승할 사람, 황태자가 될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몇 초 동안 아폴로니아를 바라보던 엘렌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 아폴로니아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어때요?”

“……대담한 추측이구나.”

아폴로니아가 몇 초간 침묵한 끝에 말했다. 표정으로나, 말투로나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드러내지 않았다.

“과찬이십니다, 어머니.”

아폴로니아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딸의 추측이 얼마나 정확할지는 아폴로니아 자신도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은 몇 시간 후에 드러날 것이었다. 그녀는 곧 시작될 대회를 기다리며 다시 한 번 사냥터를 훑었다.

* * *

어느새 시간은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카산드라는 검을 휙 하고 휘둘러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러고는 자신이 쓰러뜨린 자칼로페를 바라보았다.

성체는 아니었지만 전설적인 마물이다. 상당한 점수가 추가되었을 것이다. 오래전, 아버지도 자칼로페 한 마리로 대회 우승을 거머쥔 적이 있었다.

왼팔에 약간의 부상을 입었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사냥감이었다.

‘이 정도면 점수가 좀 벌어졌겠지?’

카산드라가 찰나의 만족감을 누리는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쿠웅-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방금 그녀가 잡은 놈과 닮았지만 더 커 보이는 괴수가 쓰러져 있었다. 녀석의 잿빛 털가죽은 방금 흘린 붉은 피로 물든 채였다.

“와아아아아아! 1황자 전하께서 성체 자칼로페를 잡으셨다!”

참가자 중 한 명이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고, 언덕 위의 관객들도 그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거대한 괴수의 시체 너머로, 조금 전의 카산드라와 똑같은 자세로 검을 털어내는 미카엘의 모습이 보였다.

“아오, 그새 저걸 잡아 버렸네, 진짜.”

카산드라가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장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대회가 시작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녀와 미카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3등과는 차이가 벌어진 지 오래였기에 그게 누군지 관심도 가지 않았다.

카산드라는 미카엘이 잡은 잿빛 자칼로페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크기를 가늠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부터 자칼로페는 두 마리밖에 풀리지 않았고, 그중 한 마리만 완전한 성체였으니까.

미카엘이 바로 그놈을 잡은 것이다.

전략의 실패였다. 처음부터 성체를 노렸어야 했는데. 미카엘이 다른 괴수를 상대하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작은 녀석을 먼저 처리하고 큰 놈까지 차지해서 선두를 굳히려는 것이 욕심이었던 것이다.

어린 자칼로페는 카산드라의 예상보다 잡기가 까다로웠고, 미카엘 또한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고 강했다.

카산드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원래 미세하게 앞서던 것은 카산드라였다. 그러나 미카엘이 지금까지 풀렸던 것 중 가장 큰 사냥감을 잡았으니 둘의 점수는 비슷할 것이다.

대회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이미 자칼로페 한 쌍이 나왔다면 아마 다음 괴수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즉, 그놈의 숨통을 끊는 사람이 이 대회의 우승자라는 의미였다.

펑-!

새로운 마물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카산드라는 재빨리 사냥터의 동쪽 가장자리로 눈을 돌렸다. 곁눈으로 보니 미카엘도 그녀와 똑같은 곳을 바라보며 집중하고 있었다.

호르르르륵-

독특한 울음소리와 함께 사냥터에 등장한 것은, 온몸이 새하얀 깃털로 뒤덮인 거대한 새였다.

긴 다리며 단단한 부리, 그리고 다리 못지않게 긴 목이 인상적인 그 녀석은, 얼핏 보면 우아하다고 할 수도 있는 생김새였다. 먹을 만한 인간을 찾기 위해 뒤룩뒤룩 눈을 굴리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오…… 오르핀?”

카산드라가 식은땀을 흘리며 녀석의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책에서만 보았던 괴물을 대회에서 만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르핀은 식인 새였다. 죽이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깃털로 덮여 있는 몸은 사실 강철처럼 단단했기에, 녀석에게는 ‘날개 달린 크로아딘’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있었다.

개체 수가 많지 않았으나 민간에 한 번 나타나면 재앙과도 같은 놈이었다.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는 군대를 동원해야 했다.

어라, 아버지는 그런 놈을 아무도 모르게 생포했단 말인가? 그럼 진짜 괴물은 아버지 아닌가? 수많은 생각이 카산드라의 머리를 맴돌 때, 날렵한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후욱-

“앗, 안 돼!”

멍해진 카산드라를 두고 괴물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미카엘이었다. 카산드라는 그제야 두 사람의 경쟁을 떠올렸다. 괴물이든 식인 새든, 이 녀석을 놓칠 수는 없었다.

뒤늦게 출발한 카산드라는 있는 힘을 다해 미카엘을 바짝 쫓았다.

퍼드드득-

카산드라가 미카엘을 거의 따라잡을 무렵, 새는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쳐 몇 번 퍼덕거렸다. 하얀 몸이 떠오르고, 사냥터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새는 두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호르르르륵-

새는 멀리 날아가지 않고 사냥터 한복판, 수풀이나 나무가 없이 탁 트인 잔디 위에 자리 잡았다. 그러고는 새까만 눈을 뒤룩 하고 굴려 카산드라와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우웅-

오르핀이 착지한 순간이었다. 녀석의 주변, 그러니까 녀석을 중심으로 사방 50보쯤 떨어진 곳까지의 공기가 파란 빛을 내며 진동했다.

“뭐야, 설마 결계?”

카산드라가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잠깐의 변화였지만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마지막 사냥감을 둘러싼 공간에는 결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카산드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것은 분명히 대회의 일부였다.

군대 하나를 동원해야 잡는 포악한 식인 새와 전투를 벌이는 건 너무 쉬워 보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괴수의 주변에 결계를 치고, 이를 뚫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마지막 사냥감을 노릴 자격을 준 것이다.

“너무해…….”

카산드라가 중얼거렸다. 문득 최근에 연무장에 나타나 검기로 결계를 가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나처럼 천사같이 웃던 그는 딱 한 번만 시범을 보이더니 ‘열심히 하면 된다’고 설명하고 가 버렸다.

그게 다였는데. 그것밖에 안 가르쳐 줘 놓고.

뒤로는 이런 어마어마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단 말인가. 따스한 아버지가 수련에 있어서는 무자비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 순간이었다.

궤에에에엑-

녀석은 두 사람을 똑바로 보며 조금 전보다 호전적인 울음을 울었다. 어디 한 번 가까이 와 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카산드라는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들고 새를 겨누었다. 그리고 집중해서 결계의 진동을 느껴보려는 순간.

타앗-

미카엘은 이번에도 카산드라보다 빨리 움직였다. 카산드라가 고민하는 사이에 그는 은빛 검날을 높이 들어 허공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팟-

작은 파열음이 들렸고, 미카엘은 매끄럽게 결계를 통과했다.

우웅-

그가 통과하자, 결계는 벌어졌던 틈을 다시 닫아 버렸다. 그 또한 장치일 것이다.

저벅-

몇 걸음 앞, 결계 너머에 선 미카엘이 짧은 순간 카산드라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새하얀 치아가 가지런히 드러났다. 노아는 냉미남의 황홀한 미소라고 하겠지만 카산드라는 그 얄미운 웃음의 의미를 알았다.

‘봤냐? 넌 이거 못 하지?’

그는 카산드라를 놀리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얌전하기만 한 미카엘은, 카산드라와 둘만 있을 때면 종종 그런 유치한 짓을 하고는 했다. 미카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한 살 많다 보니 검술도 먼저 시작한 그는 이미 이런 연습을 여러 번 해 본 모양이었다.

“이런 빌어먹…….”

그 모습을 본 카산드라는 욕설을 내뱉으려다가 속으로 삼켰다. 급한 와중에 자녀 중 누군가가 황실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내던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이 생각난 덕분이었다.

카산드라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 다쳤던 팔이 시큰거렸지만 집중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언뜻 앞을 보자 미카엘은 이미 검을 들고 오르핀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 머뭇거리다가는 그녀가 결계를 뚫기도 전에 미카엘의 우승이 확정되어 버릴 것이다.

그녀는 단 한 번 보았던 아버지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그리고 조금 전 미카엘이 보여 주었던 움직임도.

타앗-

그녀는 발을 한 번 구르고 검을 들었다. 검날은 어느새 새하얀 빛을 두르고 있었다. 카산드라는 조금 전 미카엘이 했던 것을 똑같이 흉내 내어 허공을 그었다.

파직-

새파란 빛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처음 느껴진 것은 그녀를 밀어내는 묵직한 반향이었다. 카산드라는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검에 체중을 실어 밀어붙였다.

파지직-

순간적으로 결계의 틈새가 느껴졌다. 카산드라는 그 틈으로 검을 더 밀어 넣었다.

팟-

경쾌한 소리가 울렸고, 카산드라의 몸은 결계의 틈을 완전히 통과했다.

“헉.”

그녀는 스스로도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성공한 것이다. 그 어려운 것을, 시행착오도 없이, 한 번에 바로.

‘나 정말 천재인 건가?’

성공에 취해 있는 사이 결계의 틈에서 그녀의 시야를 흐리게 했던 푸른빛이 천천히 걷혔다. 카산드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미카엘 오빠, 봤어? 나 방금…….”

아까의 미소에 대답을 해 주고자 미카엘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순간이었다.

콰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카산드라의 발치에 무언가가 날아와 떨어졌다. 아니, 내팽개쳐졌다.

“뭐…….”

“콜록!”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던져진 그것은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오빠!”

온갖 상처를 팔다리에 새긴 채 몸을 일으키는 그것, 아니 그 사람은 미카엘이었다.

“허어억, 허억.”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쥐고 있던 장검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의 검이 향한 위치에는 흥분으로 가득 찬 새까만 눈을 번뜩이는 오르핀이 있었다. 날개를 퍼덕이는 모습으로 보아, 미카엘을 이쪽으로 날려 버린 것은 눈앞의 마물인 모양이었다.

“저, 저쪽으로 비켜.”

미카엘이 카산드라를 밀어내고 다시 검을 꽉 쥐었다.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카산드라가 더 빨랐다. 미카엘이 다시 도약하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순간 카산드라는 튕기듯이 오르핀을 향해 뛰어올랐다.

쉬이익-

아직 새하얀 검기를 머금은 그녀의 검이 허공에서 은빛 궤도를 몇 번 그렸다. 접근하기 좋은 녀석의 배, 그리고 다른 곳에 비해 그나마 얇은 목을 노린 공격이었다.

그러나 공격은 실패했다.

궤에에에엑-

“으아아아!”

검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카산드라는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쿠웅-

부딪혀 오는 마물의 몸에 제대로 맞은 그녀는 미카엘이 떨어졌던 바로 그곳에 내팽개쳐졌다. 다만, 걱정했던 것보다 충격이 덜한 것 같았다.

“캐시, 괜찮아?”

쓰러진 몸 아래에서 미카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산드라는 후다닥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오빠 바보야? 거기 깔리면 어떡해?”

“너 받아 준 거잖아!”

미카엘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양쪽 팔은 여전히 카산드라의 몸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녀는 멀쩡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미카엘을 멀찍이 밀어냈다.

“소용없어.”

다시 검을 드는 카산드라에게 미카엘이 말했다.

“뭐가?”

“몸이 강철 같다더니 진짜야. 우리 실력으로는 겉가죽에 상처 조금 내는 게 다야.”

그가 단호하게 설명했다.

“검을 열심히 휘두르는 걸로는 절대 안 돼. 온몸이 무기야.”

카산드라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미카엘의 말을 들었다.

“그럼?”

“눈.”

미카엘이 짧게 대답했다. 그는 쉴 틈 없이 번뜩이는 마물의 눈동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눈은 당연히 연약하겠지만…… 그걸 대체…….”

카산드라는 사냥터 중앙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는 마물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머리는 너무나도 높았다. 날아가지 않으면 검이 닿지 않을 정도로.

“혼자서는 못 하지.”

미카엘은 고개를 돌려 카산드라와 눈을 맞추었다.

“한 명이 유인하면 다른 한 명은 사각지대로 피해야 해. 유인한 쪽을 부리로 공격할 때 눈을 찌르면 돼.”

그는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말했다. 카산드라가 눈을 크게 떴다. 미카엘이 협력을 제안하고 있었다.

자신과 우승을 놓고 다투고 있으면서.

승부를 포기하자는 말인가? 여기까지 와서, 대충 보기 좋게 힘을 합치는 걸로 대회를 끝내자고?

“캐시,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여기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

미카엘이 호소하듯 말했다. 그는 경쟁하다가 포기하기 싫어하는 카산드라의 성격을 잘 알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남매들 중 카산드라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원래 항상 미카엘이었다.

“아마 아버지도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셨을 거야. 내 말 들어.”

그의 짙은 바다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산드라의 황금안도 따라서 흔들렸다.

“안 그러면 둘 다 위험해.”

카산드라는 입을 꾹 다문 채 빠르게 상황을 분석했다.

그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미카엘에게 새겨진 상처들이 새의 위험성을 증명하고 있었다. 조금 전 카산드라의 공격 또한 놈의 가죽을 뚫기에 부족했었다.

하지만 협력은 대회의 단독 우승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그 전까지 점수가 비슷하던 두 사람이 마지막 사냥감을 함께 사냥하면 둘은 공동 우승자가 될 것이다.

아니, 만약 카산드라의 계산에 착오라도 있었다면 미카엘이 이길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싫었다.

카산드라는 우승을 강렬하게 원했다. 미카엘을 이긴 유일한 우승자, 역대 최연소 우승자라는 명예를 안고 어머니 앞에 서고 싶었다. 안 그러면 참가의 의미가 없었다.

호르르르륵-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눈을 돌리자 오르핀은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몇 초 안에 공격해 올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날아서.

궤에에에엑-

마물이 다시 한 번 울었다. 녀석의 커다란 혀가 새빨간 입 속에서 부르르 떨렸다.

어, 잠깐만, 새빨간 입 속에서 떨려?

카산드라가 갑자기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무언가 방법이 떠오르고 있었다.

인육을 즐기는 식인 새, 온몸에 강철을 두른 것 같은 마물. 깃털이 박힌 곳은 절대로 뚫을 수 없는 녀석. 하지만…….

“캐시, 제발…….”

“미안, 오빠.”

카산드라는 한쪽 팔에 강하게 힘을 주어 미카엘을 밀쳐냈다.

“아앗.”

예상치 못한 공격에 그가 휘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 틈을 타서 혼자 마물을 향해 달려갔다.

“캐시! 위험해!”

걱정 어린 미카엘의 외침을 뒤로하고, 카산드라는 계속 뛰어가 오르핀의 코앞에 멈추었다.

“나 맛있겠지?”

카산드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거대한 새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궤에에에엑?

“자, 난 가시도 없다!”

카산드라는 들고 있던 장검을 잔디 위에 푹 꽂았다. 그러고는 빈손을 펴서 양옆으로 활짝 벌리며 오르핀을 도발했다.

“먹어.”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 모습을 본 오르핀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맛있는 만찬을 앞에 둔 것처럼.

궤에에에에엑!

녀석이 부리를 크게 벌리고 기쁜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벌어진 입으로 카산드라를 덮쳤다.

궤에엑!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동굴을 연상시키는 새의 입 속 모습이 무섭도록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카산드라는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옆에 꽂았던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마물이 부리를 닫기 직전, 온 힘을 다해 녀석의 입 속으로 뛰어들었다.

쉬익-

새하얗게 번뜩이는 검날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카산드라는 들고 있던 장검을 곧게 세워 위를 향해 찔렀다.

푸욱!

몸통이나 목을 공격할 때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던 검이, 마물의 연한 입천장 깊숙이 꽂혔다. 어둠 속에서 카산드라가 빙긋 웃었다.

궤에에에에엑!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다음 순간 그녀는 허공으로 높이 내던져졌다.

후우웅- 쾅!

카산드라의 몸이 떨어지는 순간 그녀는 온몸이 저릿한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몸부림치는 오르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궤에에엑! 궤엑!

녀석은 입가로 피를 쏟으며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궤에에엑! 케헥!

한참을 울던 오르핀은 결국 온몸을 세차게 몇 번 떨더니 주저앉고 말았다.

쿠웅-

마물의 육중한 몸이 잔디 위로 반쯤 누웠다. 녀석은 계속해서 날개를 퍼덕이고 숨을 헐떡였으나 끝내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끝인가?”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결계 바깥의 참가자들도, 언덕 위의 관중도 조용히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잠시 후, 양측은 동시에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황녀 전하께서 오르핀을 잡으셨다!”

“우승자는 카산드라 황녀 전하!”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갈채며 함성 소리가 계속되었다. 카산드라는 그제야 긴장이 풀려 긴 호흡을 내뱉었다.

“하아…….”

“……캐시.”

그녀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산드라가 고개를 돌리자 충격을 받은 듯 창백해진 미카엘의 얼굴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는 양팔로 카산드라를 감싸고 있었다. 허공으로 내던져진 그녀를 받아 준 모양이었다. 카산드라가 처음 내팽개쳐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미카엘 오빠.”

“너…….”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는 미카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화를 내려는 것일까?

협력을 제안하는 그를 뒤로 밀쳐 버리고 혼자 사냥감을 쟁취한 것은 분명 치사했다. 심지어 미카엘은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는데.

“오빠, 미안…….”

“무사하구나, 캐시.”

카산드라가 뭐라고 사과하기도 전, 미카엘은 그녀를 강하게 포옹했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컥! 오빠…….”

“그럼 됐어.”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짧고, 깔끔하고, 미카엘다운 한 마디였다.

“아, 좀……갑자기 안 어울리게 왜 그래?”

카산드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참 동안 그녀를 안고 놓지 않았다. 꿈틀거리던 카산드라는 결국 빠져나오기를 포기한 채 가만히 있기로 했다.

“……고마워, 오빠.”

마침내 떨어진 미카엘에게 카산드라가 말했다.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쓰다듬어서 머리를 헝클었다. 카산드라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주변의 함성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돌려 언덕 위의 관중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 중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카산드라의 성공을 축하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카산드라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제국의 어떤 소녀보다도 행복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어머니.”

한참 동안 쉬지 않고 박수를 치던 엘렌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동생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긴장했었는지, 손바닥에는 땀이 묻은 채였지만.

하긴, 위험한 순간이었다. 대회 막바지에는 참가자들의 목숨까지는 위험해지지 않도록 유리엘이 내려가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카산드라가 새의 입 속에 들어가도록 그가 움직이지 않았을 때는 아폴로니아도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래, 네가 맞혔다.”

아폴로니아가 대답했다. 그녀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세 아이 중 누구에게 가장 감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전설 같은 괴수들을 사냥한 미카엘과 카산드라일까, 아니면 열세 살짜리 여동생의 우승을 확신에 차서 예견한 엘렌일까.

“다른 하나도 제가 맞힌 거죠? 황태자를 지정하는 문제요.”

엘렌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이미 스스로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단다.”

아폴로니아가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처음 엘렌의 추측을 들었을 때는 일부러 담담하게 반응했으나 큰딸의 통찰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대회에서 우승할 사람, 황태자가 될 사람이 누구냐’는 아폴로니아의 물음이, 사실은 답이 다를 수 있는 두 개의 질문이었다는 점을 바로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폴로니아가 사실 단 한 명의 후보를 정해 두고 있었다는 것도, 사냥 대회를 통해 그의 기본 자질만 확인하면 그녀의 마음이 결정되리라는 것도, 엘렌은 다 읽어 냈다.

엘렌이 아폴로니아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애를 나중에 많이 달래 줘야겠네요. 기대하고 있을 텐데.”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당장은 실망하겠지.”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할 자식의 얼굴을 떠올리자 그녀도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금방 이해할 거다.”

“맞아요, 어머니.”

엘렌이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다정하게 팔을 뻗어 아폴로니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다시 중얼거렸다.

“카산드라는 이해할 거예요. 그 애는 강하고 현명하니까요.”

* * *

함성은 오래도록 계속되었고, 흥분은 잘 가라앉지 않았다. 카산드라는 관중들이 던진 꽃들 속에 파묻히다시피 하며 언덕 위로 올라왔다. 미카엘도 그녀를 축하해 주며 뒤따랐다.

‘축하한다.’

월계수관을 들고 그녀를 기다리는, 언제나처럼 우아한 모습의 아폴로니아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아폴로니아의 입가에는 자랑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카산드라는 마음이 벅찼다. 역시 아폴로니아는 그녀를 아끼고 있었다. 다른 남매들과 똑같이. 그리고 어쩌면 이 순간만큼은 카산드라를 다른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마침내 카산드라가 아폴로니아 앞까지 다가와 멈추어 섰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웃어 주었다.

“카산드라 아이리스 페르디안, 역대 최연소 우승자가 된 것을 축하한다.”

카산드라가 좋아하는, 아폴로니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힘 있게 울렸다. 관중들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월계수관을 들어 올려 카산드라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그러고는 따스하게 카산드라의 뺨을 감싸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을 본 관중들이 다시 한 번 환호했다.

카산드라는 가슴이 뛰었다. 부상당한 팔의 고통도 이 순간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사냥 대회의 우승자였다. 오래전 아버지가 그랬듯, 승자의 영광을 아폴로니아에게 안겨 준 것이다.

“그렇기에…….”

아폴로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산드라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곧 아폴로니아는 카산드라를 황태자로 임명할 것이다. 아폴로니아는 모든 자식들을 사랑했지만 사냥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카산드라이니까. 악녀를 닮은 외모니 뭐니 하는 고민은 다시 카산드라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그대의 앞길에.”

아폴로니아가 말을 이었다. 카산드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신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축복과 영광이 자리하길.”

아폴로니아가 짧게 말했다.

“이상이야.”

그녀는 간단한 축사를 끝으로 입을 닫아 버렸다. 카산드라의 눈이 커졌다.

‘……대체 왜?’

아폴로니아는 황태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카산드라가 황태자라고 선언할 만한 최적의 시기였는데.

잊으신 건가? 그럴 리는 없었다. 아폴로니아는 그런 것을 헷갈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황녀 전하의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길!”

관중들과 다른 참가자들이 환호했으나 카산드라는 그들을 따라 웃지 못했다.

“저…….”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환호성에 묻혀 버렸다.

“어, 어머니…….”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높이자 돌아서던 아폴로니아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를 불렀니?”

그녀는 아까와 같은 따스한 미소를 띠고 물었다. 카산드라는 다시 한 번 희망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른…… 다른 중요한 발표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카산드라가 말했다.

“대회보다 중요한…… 다른 발표가요.”

찰나의 순간, 아폴로니아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카산드라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채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그래, 계획이 있었지.”

아폴로니아가 조용히 대답했다. 주변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소리를 죽이고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보였다.

“다만 이곳은 너의 대회의 우승을 축하하는 자리인 만큼, 그 발표는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녀의 말을 들은 카산드라는 황급히 대답했다.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아폴로니아의 표정이 미세하게 어두워졌다. 카산드라는 이 또한 보지 못했다.

“좋아.”

그녀가 말했다. 카산드라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정식 공표는 나중에 다시 하겠지만, 늦어질수록 소문은 무성해지는 법이니 이 자리에서 말하도록 하지.”

아폴로니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에 주변의 사람들이 다시 조용해졌다.

“제국에는 아직까지 황태자가 없다. 일곱 명의 황자, 황녀가 모두 훌륭하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지.”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오랜 고민 끝에, 짐은…….”

카산드라의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지금이었다. 기다렸던 순간이 드디어 온 것이다.

“짐의 두 번째 자식, 미카엘 루벨 페르디안을 황태자로 봉하기로 결정했네.”

순식간에 장내가 고요해졌다. 카산드라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미카엘이라니. 미카엘이라니? 분명히 대회의 우승자는 자신이 아니었던가. 어머니가 직접 월계수관을 씌워 주시지 않았던가.

카산드라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그 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미카엘 또한 당황한 듯했다.

“오랜 고심 끝에 내린 짐의 결정이네. 오늘은 우승자를 위한 날이니 대회 행사가 다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이 이상 언급을 삼가고, 그 후에 적절한 책봉식을 준비하도록.”

아폴로니아가 말을 끝냈다. 그녀는 안타까움이 섞인 표정으로 카산드라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황녀 전하.”

예상치 못한 전개에 조용해졌던 분위기 속에서, 어느 관중 한 명이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황녀 전하!”

이어서 카산드라를 축하하는 목소리가 한둘씩 늘어났다. 잠시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축하의 목소리에는 미카엘의 것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카산드라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뇌리에는 한 가지 생각이 울렸다.

‘어머니는, 나를 미카엘만큼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 있고 싶었다. 곧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아무도 볼 수 없도록.

* * *

“윽…… 으흐으으윽…… 어엉…….”

“저런, 많이 속상했나 보구나.”

결론적으로, 카산드라는 혼자 남지 못했다. 아니, 혼자 남으려던 마음을 바꿨다고 해야 적절할 것이다. 위로하는 유리엘에게 매달리듯 꽉 안겨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사람은 카산드라였으니까.

그녀는 대회 이후의 상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졌고, 사냥 대회 이후에 있을 검투를 준비하던 노아가 따라와 어깨에 약을 발라 주던 기억이 띄엄띄엄 있었으나 확실하지는 않았다.

우느라 시야가 흐려졌기 때문에, 사실 따라온 사람이 노아였는지 아니면 황녀가 혼자 된 틈을 노리는 어느 자그마한 암살자였는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큰 소리로 우는 그녀를 토닥이며 달래 주다가 유리엘을 불러온 것을 보면 아마 노아가 맞긴 하겠지만.

“흐아아아아앙…….”

“캐시, 그러다가 탈진할까 걱정이다. 조금만 진정하렴.”

유리엘이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그녀를 타일렀다. 카산드라는 그가 위로를 건넬 때마다 더욱 서럽게 울었다. 유리엘이 한숨을 내쉬고 딸을 꼭 껴안았다. 가만히 있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흐윽…… 어머니는…… 어머니는…….”

한참 동안 울기만 하던 카산드라가 퉁퉁 부은 얼굴을 들고 유리엘에게 뭔가 말했다.

“캐시, 괜찮으니까 천천히 얘기하렴. 아버지가 다 듣고 있단다.”

“어머니는…… 저를 덜 사랑하시나요?”

유리엘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태자 발표 때문에 실망한 건 알았지만 덜 사랑하다니? 아폴로니아 같은 어머니가 어떻게 딸로부터 그런 의심을 산단 말인가?

“왜 그런 말을 하지?”

유리엘이 조용히 물었다.

“제가…… 어머니가 싫어했던 사람을 닮아서…….”

“뭐?”

유리엘이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카산드라는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제 생김새가…… 페트라 리페르를 닮았다고, 남매들 중에 아무도 그렇지 않은데 저만 그렇다고…….”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황태자가 되지 못해서 우는 줄만 알았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단 말인가.

그는 대체 누가 그딴 소리를 했느냐고 물으려다 마음을 바꾸었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소중한 딸은 이미 상처를 받아 울고 있는데.

“글쎄, 아버지는 네가 그 사람을 닮았는지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유리엘이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눈물을 흘리는 딸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지만 그 사실을 너무 드러내면 카산드라가 불안해할 것 같았다.

“설령 그렇다 한들, 나와 네 어머니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너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했니?”

카산드라가 눈을 들어 유리엘을 올려다보았다. 유리엘은 언제나처럼 따스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산드라는 갑자기 미안해졌다. 수련에 엄격한 면이 있었지만 그는 더없이 다정한 아버지였다.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유리엘은 카산드라가 하는 말은 한 마디도 허투루 듣지 않았고, 사소한 고민이라도 있으면 해결이 될 때까지 함께 고민해 주었다.

“아, 아버지는 아니고…….”

“그럼 어머니만?”

유리엘이 다시 물었다.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것이었다.

“그게……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그 사람에게 맺힌 것이 많을 것 같아서…….”

카산드라가 자신 없는 태도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폴로니아 또한 자상한 어머니였기에 그녀의 사랑이 작다고 말하는 것도 어딘가 불편했다. 물론,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아폴로니아가 카산드라보다 미카엘을 더 사랑한다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카산드라…….”

유리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카산드라는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그녀를 ‘캐시’가 아닌 ‘카산드라’라고 부른다는 것은 아주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어머니를 해하려는 자에게, 아버지가 인정을 베푼 적이 있었니?”

유리엘이 나직하게 말했다. 말투는 여전히 침착했지만, 웃음기 없이 짙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산드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유리엘의 말은 사실이었다.

몇 년 전, 불법 매음굴을 운영하다가 단체로 추방령을 받았던 어느 조직에서 아폴로니아에게 자객을 보내자, 유리엘은 단신으로 그들을 찾아 우두머리 다섯을 암살해 버렸다.

포트러스 후작이 새로운 황제가 되겠다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조용히 소수의 군대를 데리고 후작령으로 가 그의 목을 쳤다.

“어머니가 누군가를 싫어한다면, 아버지 또한 그렇단다. 한때 페트라 리페르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지. 그 사람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는 네 어머니의 그것보다 절대로 작지 않았다.”

카산드라와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았던 유리엘은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카산드라.”

그가 한 번 더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네가 누구를 닮았든 너는 그저 내 딸일 뿐이야. 그 자체로 특별하기에 다른 사람과 겹쳐 보였던 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어.”

그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카산드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순간도 너를 다른 아이들보다 덜 사랑한 적이 없단다. 그 점은 어머니도 마찬가지라고 약속할 수 있어.”

유리엘이 말을 마치고 카산드라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눈물을 완전히 그친 카산드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완전히 이해가 된 것은 아니었다. 마음속의 의문이 다 해소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유리엘은 그녀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카산드라는 우선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캐시, 코코아 마실래?”

몇 분이 지났을까, 유리엘이 넌지시 카산드라에게 물었다.

“코코아……?”

가장 좋아하는 음료의 이름에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새로 들어온 황실 보조 요리사는 진한 코코아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다. 눈가에 있는 눈물 자국은 그대로였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에 이야기하마.”

유리엘은 카산드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시종을 부르는 사이, 카산드라는 다시 유리엘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 * *

카산드라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떴다.

작은 촛불 두 개만 밝혀진 방 안,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는 다 마신 코코아 잔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몇 시간을 잤던 걸까, 잠들 때까지만 해도 곁에 있었던 유리엘은 보이지 않았다.

“카산드라.”

대신 다른 목소리가 카산드라를 불렀다. 그녀가 사랑하는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어머니.”

카산드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맡에는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아폴로니아가 있었다.

“많이 울었구나. 네 마음을 미리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해.”

아폴로니아가 카산드라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카산드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네 아버지에게 들었다.”

카산드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머니를 걱정시킨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민이 있으면 바로 이야기하지, 그랬다면 너를 더 빨리 이해했을 텐데.”

카산드라는 눈을 살짝 들어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살폈다. 금빛과 붉은빛이 섞여 항상 신비로운 그녀의 눈동자는 다정해 보였다.

‘그런가…… 할 말이 있으면 그냥 말하는 게 좋은 건가.’

아폴로니아가 카산드라의 손을 꼭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손등을 타고 전해졌다. 카산드라는 갑자기 낮에 미처 하지 못했던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이 질문을 꺼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어머니.”

그녀가 작은 소리로 불렀다. 아폴로니아는 듣고 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왜 황태자가 되지 못했나요?”

아폴로니아는 잠시 조용했다.

‘너무 주제넘었나?’

황태자를 지정하는 권한은 오직 황제에게 있다는 것은 카산드라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여타 황제라면 그와 관련하여 과도한 참견을 싫어한다는 것도.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카산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했니?”

아폴로니아가 짧게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네?”

“차기 황제가 되는 것을 말이야. 진심으로 원하는 삶이었니?”

카산드라는 몇 초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황태자나 황제가 되고 싶어서 대회 우승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그저 황태자 자리에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고 싶을 뿐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아폴로니아가 그 자리에 카산드라를 올릴 만큼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미카엘은 원했단다. 아주 간절하게. 백성을 보호하고 그들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네 오빠가 생각하는 가장 큰 보람이야. 엘렌이 자유롭게 살겠다고 선언하고 나서부터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더라.”

카산드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카엘이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미래를 그리는 줄은 몰랐다. 사냥 대회가 시작되기 전, 유난히 진지해 보였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이 자리를 지키려면 강한 의지가 필요하단다. 그게 황제에게 필요한 첫 번째 자질이야.”

카산드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태자의 자리는 가장 유능한 자가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갖는 것도 아니야. 시대나 상황에 따라 요구되는 자질이 달라지기도 하지.”

아폴로니아는 설명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평화롭고 부강한 제국을 물려주고 싶고, 그런 나라가 미카엘처럼 헌신적인 군주를 만나면 더 번영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란다.”

“하지만 소문에는 사냥 대회가…….”

“대회 전에 어떤 소문이 돌았는지는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애초에 사냥 대회의 결과에만 맞추어 그런 중요한 결정을 한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

“마물과 같은 위기를 맞아 어떤 대처를 하는지는 황제의 자질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가 맞아. 하지만 그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아.”

“……네, 어머니.”

아폴로니아의 말에 카산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들은 카산드라에게 또 다른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아폴로니아의 결정에 충격을 받은 채 방으로 돌아오던 길에서부터 그녀를 괴롭혀 왔던 이 의문은 아폴로니아의 설명을 들어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대회를 통해 미카엘 오빠의 자질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거죠?”

카산드라가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잠시 움직임을 멈춘 채 대답하지 않았다. 카산드라는 이를 인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결국 미카엘이 그 자리에 어울린다고 판단하신 건, 마지막에 저를 보호해 주는 모습 때문이었나요?”

카산드라가 눈을 들어 아폴로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예리하구나. 그렇단다.”

카산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일이다.

경쟁 상대인 카산드라, 그것도 마지막 순간에 사냥감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밀쳤던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리는 것은 미카엘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저는요?”

안정되었던 카산드라의 호흡이 미세하게 거칠어졌다. 그녀는 다음 질문에 대한 아폴로니아의 답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

“마지막 순간에 협력을 제안한 미카엘을 제가 밀쳐 버렸어요. 오르핀을 혼자 차지하고 싶어서.”

그녀가 말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오르핀의 입 속으로 들어갈 때, 저는 미카엘이 어떻게든 저를 도와줄 걸 알고 있었어요. 제가 아무리 치사한 짓을 해도 결국 크게 다치지 않도록 뒤에서 도울 거라고요.”

카산드라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미카엘의 마음을 이용해서 우승한 저는…… 저는 악녀인가요?”

카산드라는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질문을 던졌다.

한번 경쟁에 뛰어들면 포기할 줄 모르는 천성, 언제나 정의로운 미카엘과 달리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서라도 승리를 얻어 내는 집요함.

카산드라는 스스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것이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단점이라 한들 본능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황녀 전하는 악녀를 닮았어요…… 성격도 닮았을 거예요.”

알프레드의 말을 들은 후로, 페트라 리페르의 외모를 닮은 자신이 어쩌면 성격까지 그녀를 닮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카산드라를 괴롭혔다.

그리고 대회를 지켜본 아폴로니아가 미카엘을 황태자로 결정한 순간, 그러한 우려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고 만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시는 거 알아요.”

카산드라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이었다. 더 이상 아폴로니아의 애정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런 것과 별개로, 아폴로니아가 그녀에게서 악인의 자질을 본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카산드라를 감쌌다.

“하지만, 그 사람을 닮는 건 싫어요. 외모도, 성격도 그냥 안 닮았으면 좋겠어요.”

참았던 말을 모두 뱉어 낸 카산드라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깨가 조금씩 떨렸으나 다행히 눈물은 나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산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초의 침묵이 흐른 끝에, 아폴로니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글쎄…… 조금 닮았나?”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카산드라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거짓으로라도 닮지 않았다고 말해 줄 거라 생각했던 카산드라의 눈이 커졌다.

“네?”

“나나 네 아버지의 눈에는 네가 훨씬 예쁘지만. 그 사람은 내 고모였으니 네가 닮아도 이상하지 않지.”

아폴로니아의 말투는 담담했다. 그게 뭐 어떠냐는 듯한 태도였다.

“하, 하지만…….”

“나쁠 거 없단다. 페트라는 꽤 미인이었고 머리도 좋았으니까.”

카산드라는 조용히 눈만 깜빡였다. 반역자를 닮았는데 어떻게 나쁜 일이 아니란 말인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었지.”

“그, 그러면…… 저는 정말로 그 사람을……”

카산드라가 말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사냥 대회에서 미카엘에게 했던 행동을 다시 되짚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게 바로 카산드라 아닌가.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던 중, 카산드라를 지켜보던 아폴로니아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카산드라가 더욱 놀라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장난스러우면서도 따뜻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캐시, 너와 페트라는 본질적으로 아주 달라. 외모를 닮든 지능을 닮든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단다.”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네? 하지만 저는 아까…….”

“페트라는 너처럼 오르핀의 앞으로 뛰어들 수 없어. 다른 것은 다 걸어도 자기 자신만은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지. 그녀였다면 미카엘의 무기를 빼앗고 오르핀의 입 속을 향해 밀었을걸.”

아폴로니아가 말을 이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여전히 카산드라를 향한 미소가 보였다.

“미카엘을 밀친 것이 뭐가 문제지? 원래 사냥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서로 견제하고 싸우는 일은 흔해. 너는 어떤 규칙도 어기지 않았단다.”

멍한 카산드라의 표정을 보면서, 아폴로니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페트라는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어. 주변의 모든 이를 이용하고 또 버렸지. 그런 점을 닮지 않았으면 된 거야. 겉모습만 보고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단다.”

설명을 마친 아폴로니아가 카산드라의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카산드라의 뺨을 쓸었다. 카산드라는 한동안 굳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그런 것이었나.

조금씩, 카산드라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어머니 말씀이 맞아요.”

마침내 카산드라가 환하게 웃으며 아폴로니아를 보았다. 아폴로니아의 말이 모두 옳았다.

“저와 그 사람은 전혀 달라요.”

카산드라는 한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걱정거리가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을 실감했다. 참으로 한심하고 쓸모없는 고민이었다. 카산드라는 팔을 뻗어 아폴로니아에게 안겼다. 아폴로니아가 자신의 등을 따뜻하게 감싸 주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정말 괜찮아졌어요, 어머니.”

길고 기분 좋은 포옹을 끝낸 그녀는 다시 몸을 뒤로 빼며 웃어 보였다. 아폴로니아도 마주 보며 웃었다.

“정말 아무렇지…….”

툭-

마음이 다 풀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카산드라의 과장된 손짓에, 침대맡에 놓여 있던 공책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일기장!”

그녀가 당황해서 허우적거렸다. 그 모습을 본 아폴로니아는 말없이 손을 뻗어 공책을 집어 들었다.

“일기를 쓰고 있었니?”

그녀가 물었다. 담담한 말투였지만 어딘가 기특함이 묻어 있었다.

“……네.”

“펼치면 안 되는 거겠지?”

아폴로니아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사춘기 딸의 사생활을 지켜 줘야 한다는 주의였다. 카산드라는 씩 웃었다. 조금 전 무거웠던 분위기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펼치는 건 사실 상관없어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폴로니아가 의아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주술로 만든 잉크를 사용해서요. 쓴 사람 눈에만 보이는 거예요.”

카산드라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잉크를 얻기 위해 그녀는 온갖 진귀한 과일과 케이크를 구해다가 타냐에게 바쳐야 했다. 황녀의 체면도 불고한 채, 주방장을 조르고 졸라서.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덕분에 카산드라는 그 일기장을 숨길 필요가 없었고, 어머니가 그걸 펼쳐도…….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기 계획 1.’”

“꺄악!”

공책을 펼친 아폴로니아는,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인다며 신기해하는 대신 카산드라의 일기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뭐, 뭐예요! 그거 보여요?”

“미안하지만 아주 잘 보이는구나.”

“하지만 타냐는 분명히…….”

“타냐는 주술에 재능이 없어. 사기에는 아주 뛰어나지.”

아폴로니아가 대답했다. 허접한 일기장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안 봐도 다 안다는 태도였다. 시선은 여전히 공책에 집중되어 있었다.

“바보!”

카산드라가 제 이마를 탁 쳤다. 아폴로니아는 다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읽을수록 그녀의 표정은 황당함으로 가득 찼다.

“망나니처럼 술과 도박에 빠질 것. 술 주문 및 도박 칩은 아스테란 뒷골목 주점에서 확보. 예산은 매월 금화 10개. 황실 뒷문을 통해 공급해 줄 것이라는 확답을 받음. 문지기 뇌물로 금화 1개 추가. 시녀들의 눈앞에서 마셔야 함…….”

그것은 일기라기보다는 카산드라의 계획이었다.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기 위한.

아폴로니아는 할 말을 잃었다.

카산드라는 황태자 자리에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일단 그 자리에 오른 다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쫓겨나겠다는 생각이었다.

“어, 어머니! 그게 아니라요…….”

아폴로니아는 울상을 짓는 카산드라를 무시하고 일기를 쭉 훑었다. 계획은 놀랍도록 구체적이었다. 술과 도박이 실패할 시 가출이 두 번째 계획이었다.

가출 후 타 대륙에 건너가서 어떤 사업을 벌일 것인지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자금이며 상품 확보 방법, 그리고 성공까지 걸릴 기간에 대한 연구도 착실하게 되어 있었다.

“캐시,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니?”

어이가 없어진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그냥 어머니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치만 저도 제가 황제에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카산드라가 더듬거렸다. 아폴로니아는 조금 전 카산드라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예전에 스승님께 들었거든요. 황제는 나이가 가까운 형제들을 항상 견제한다고…… 아예 황태자가 되었다가 망나니라는 이유로 쫓겨나면 나중에 형제들과 틀어질 일이 없을 것 같아서…….”

“황태자가 되면 내 사랑을 확인할 수 있고, 거기서 성공적으로 쫓겨나면 미래가 밝아지니 일석이조다 이 말이구나.”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일기장 모서리에 그려진 가짜 신분 증명 서류의 디자인을 보다가 공책을 닫았다.

누군들 믿어줄까, 카산드라의 실체를.

“어, 어머니?”

“…….”

겉으로는 수련과 공부에 힘쓰며 우수한 황녀로서 모범을 보였던 그녀가 뒤로는 이런 엄청난 계획을 짜고 있었다니. 아무도 모르게 가짜 망나니짓과 불법 이민의 꿈을 꾸었다니.

“카산드라, 내 딸아.”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카산드라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아폴로니아를 보았다.

“넌…… 그냥 엄마 닮았어.”

아폴로니아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표정으로 눈만 초롱초롱 빛내는 셋째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페트라를 닮기는 무슨.

겉과 속이 다른 카산드라는 두 얼굴의 황녀, 분명한 아폴로니아의 딸이었다.

* * *

“다 끝났습니까?”

침실 밖에서 기다리던 유리엘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지도 않고, 너무한 거 아니야?”

“부인께서 잘하실 거라 믿었으니까요. 아이가 부인의 관심을 원했기도 하고 말입니다.”

유리엘이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공식석상에서보다 한결 친근한 호칭이었다.

“사춘기 아이 고민 상담이라는 건 보통 일이 아니네.”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유리엘이 다정하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벌써 지치시면 안 됩니다. 아직 밑으로 네 명이나 더 있으니까요.”

그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지치긴.”

아폴로니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후회라도 할까 봐? 당신 말 안 들은 걸?”

그녀의 질문에 유리엘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부인께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옳은 결정이었으니까요.”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품속에서 빙긋 웃으며 눈을 감았다.

엘렌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유리엘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그만 가질 것을 제안했었다.

“황녀가 있는 한 더 이상의 행복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부드러운 포장이었지만, 그는 사실 아폴로니아로 하여금 출산의 과정을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황권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자녀는 더 있어야 해.”

아폴로니아는 그렇게 반박했다. 그녀는 어머니인 엘레니아 황녀에게 형제가 있었더라면 가이우스가 처음부터 반역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거라며 유리엘을 설득했고, 두 사람은 결국 여섯 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을 살피고 가르치는 것은 주로 유리엘의 일이었다.

“부인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유리엘이 다시 속삭였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이 느껴졌다.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특별한 아이들입니다.”

아폴로니아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일곱 아이들 중 한 명이라도 빠진 삶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낳을 때는 정치적인 계산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저 다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우리 셋째는 어떻습니까? 괜찮아졌나요?”

유리엘이 조용히 물었다.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계속 걱정한 모양이었다.

“으응. 검투는 아까 끝났지만 무도회는 진행 중이라고 하니 옷 갈아입으러 갔어.”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들고 그를 보며 말했다. 아폴로니아와의 대화가 끝난 뒤, 카산드라는 언제 울었냐는 듯 웃으며 옷장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그 애는 부인을 닮았습니다.”

유리엘이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렌도 조금.”

그녀가 덧붙였다. 머릿속에는 몇 년 전 모두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보조 신관이 되었던 엘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폴론을 닮은 외모니 뭐니, 그런 걸로 황제를 정하는 건 이상해요. 오히려 제국을 약하게 만든다고요. 언젠가는 외모만 멀쩡한 미치광이 황제가 탄생할 거예요. 신을 닮은 게 대체 뭐가 중요하죠?”

신전에서 꺼내기에는 다소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너는 외모를 떠나서도 좋은 왕재였다고 아폴로니아가 대답하자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를 황태자로 삼는다면, 그 결정이 외모며 체질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이런 전통은 한 세대라도 빨리 잘라 버려야 해요.”

그녀는 확고하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그 체질과 외모로 잃었던 황위를 되찾으신 건 천운이에요. 하지만 황실이 완전히 공고해지고 동생이 여섯 명이나 되는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때엔 아직 열두 살이던 소녀는 거침없이 열변을 토했다.

“부모를 닮지 않은 자식은 원래 소외감을 느껴요. 황족에 어울리는 외모라는 것이 따로 정해져 있다면 그런 소외감은 훨씬 심해지겠죠. 저는 동생이나 미래의 조카를 외롭게 만드는 이유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말을 끝내더니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며 정중히 사과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애는 오늘 같은 날이 올 것을 예상했던 것 같아.”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엘렌의 말이 옳았다. 만약 어머니를 많이 닮은 순서로 황위에 가까워지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예민한 카산드라는 오늘보다 더 큰 더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예리하고 착한 아이야.”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했다.

“부인께서 모범을 보이신 덕분입니다.”

“다 당신이 키웠는데, 뭐.”

아폴로니아는 그의 손을 잡고 복도를 지나 발코니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흥겨운 음악 소리가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무도회는 한창 신나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 참, 검투는 누가 우승했대? 미카엘이 얼굴을 가리고 나갔었다며?”

아폴로니아가 발코니에 기대며 물었다. 카산드라를 신경 쓰느라 보지 못한 행사가 떠올랐다.

“노아 바이안이 우승했습니다. 미카엘은 중간에 기권했고요.”

“기권?”

“예. 원하던 상대를 만나서 이겼으니 됐다고 하더군요. 그 애와 마지막으로 붙었던 소년은 많이 맞고 많이 운 것 같습니다.”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카엘이 원하는 상대가 있었나? 그럴 만한 상대가 있다면 노아나 카산드라였을 텐데…….

“아아.”

고민하던 아폴로니아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알프레드 에스테반인가, 그 애였겠구나.”

“맞습니다.”

유리엘이 대답했다. 그는 카산드라에게 있었던 일을 듣고 화를 내던 아들을 떠올렸다.

평소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 미카엘은, 보기 드물게 분노한 표정으로 이를 꽉 깨물더니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검투에 참가하겠다며 사라졌었다.

“카산드라가 들으면 감동해서 또 울겠네.”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유리엘은 대답 대신 등 뒤에서 그녀를 살며시 껴안았다. 기분 좋은 따스함이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더니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만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의 심장은 아폴로니아에게 반응했다.

“행복해.”

아폴로니아가 조용히 말했다.

몇 가지 소란을 겪은 하루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 속에서 단 하나의 요소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각자가 똑똑하지만 개성 강한 자식들도, 번창한 이 제국도.

무엇보다 유리엘이 곁에 있었다. 과거 약속했던 것처럼 어디든 그녀와 함께하는 유리엘이.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유리엘은 대답과 함께 천천히 아폴로니아의 몸을 자신이 서 있는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그의 얼굴이 보였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짙은 바다색 눈동자는 아폴로니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유리엘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황홀한 그의 얼굴이 가까워 오자 아폴로니아는 눈을 감았다.

“나의 아폴로니아.”

달콤한 속삭임과 함께,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세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녹아내릴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목에 팔을 감았다.

찬란한 별들 아래에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 잔잔하고 낭만적으로 바뀐 연주를 들으며, 두 사람은 서로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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