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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그녀의 평판 (33/34)

외전 1. 그녀의 평판

로렐라이 에드윈의 열아홉 번째 생일 파티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에드윈 후작은 황제가 어린 시절 사사했던 스승이었으며, 아폴로니아가 즉위할 무렵 황제를 적극 지지했던 충신이었다.

황제의 결혼식으로부터 반년이 지나 제국이 평화로워진 지금, 황제는 에드윈 후작을 자주 황궁으로 불러 그와 국정을 논했으며 그의 조언을 흘리지 않고 신중하게 들었다.

수많은 귀족들은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다. 그러니 그의 금지옥엽 로렐라이의 생일파티에 신경 써서 얼굴을 비추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로렐라이 본인도 얼마 전에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시녀가 되지 않았나.

한편 에드윈 후작이 과거 사윗감을 잘못 고른 탓에―당시 그의 눈에 들었던 아름다운 남자는 이제 황제의 부군이었다―로렐라이 에드윈은 여전히 약혼자가 없었고, 몇몇 청년들은 명문가의 사위가 되어 볼 요량으로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다.

연회장 곳곳에서 잘 차려입은 하객들이 제 모습을 뽐냈다.

누군가는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흥겨운 춤을 추었고, 또 다른 이들은 곧 있을 황실 가면무도회에 데려갈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매의 눈으로 연회장을 훑었다.

그리고 연회장의 한구석에서는, 춤이나 음식에 별 관심이 없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좋아했다. 바로 사교계의 가십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교계의 가십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어떤 이름은, 오늘도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었다.

“폐하의 약혼자를 세 명이나 빼앗았답니다.”

“정말이에요?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가 있죠? 폐하께서 그렇게 무른 분이 아닌데…….”

“마법에 홀린 듯 시녀장을 아끼셨대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폐황제는 길길이 뛰는데 오히려 폐하께서 살려 주셨다고…….”

파티장의 구석에서 젊은 남녀 몇 명이 수군거렸다. 그들의 말소리에, 곁에 있던 또 다른 귀족 영애가 흥미를 보이며 끼어들었다.

“지금 아드리안 리스 영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떠들고 있던 사람들이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 리스는 몇 년 동안 수많은 사교계 모임의 단골 가십 거리였고, 이는 아폴로니아가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아폴로니아를 나약하고 무능한 여자라며 탓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했던 가문을 몰락시키고 친부를 황위에서 끌어내린, 역사에 남을 강한 황제였다. 자신이 쌓아 온 부를 적재적소에 풀어, 오랜 부패와 가혹한 정책으로 분열되려던 제국을 치유한 유능한 황제이기도 했다.

다만, 사람들은 아폴로니아가 황제라는 사실은 알면서도 정확히 어떤 경위로 황제가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당연히 아폴로니아가 물밑에서 어떤 일들을 해 왔는지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한편 아드리안에게 약혼자를 빼앗기고 울던 아폴로니아의 모습은 아직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아드리안을 감싸던 모습도.

아폴로니아를 존경하는 이들도 그녀가 열일곱 살 때부터 수차례의 파혼을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추측하지는 못했다. 총명하지만 재수가 없어 몇 번씩 파혼당했던 아폴로니아가, 다행히 황위를 되찾으면서 사랑 운도 트였다고 믿는 이들이 다수였다.

그렇기에 즉위 후 아폴로니아가 변함없이 아드리안을 가까이하자, 말 많은 이들은 그 사실에 대해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는 왕자며 귀족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고 황제조차 제 편으로 삼은 아드리안을 신기해했고, 다른 이들은 착한 황제 폐하께서 시녀에게 이용당하는 거라며 투덜거렸다. 물론, 그중 상당수는 그저 출신이 대단하지 않은 아드리안이 시녀장의 자리까지 올라 자신들보다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이 싫었다.

요사스러운 미인이라더라, 아니 청순하다더라, 아니 의외로 평범하더라. 아드리안을 둘러싼 소문은 끊이지 않았고, 모든 이야기에서 그녀는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신기한 사람이에요.”

대화에 끼어든, 가늘게 찢어져 치켜 올라간 눈매가 특징인 영애는 눈을 빛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영애가 받는 총애는 상상을 초월해요.”

그녀는 자신이 잘 아는 주제를 만나 반갑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폐황제로부터 황좌를 되찾고 황궁으로 오시던 날, 폐하께서는 유일하게 아드리안 리스에게 약식 예법을 허락했답니다. 모두가 보란 듯이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웠죠. 지금은 알다시피 시녀장이고요.”

“호오,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이 사람을 무시하지 말라, 이 말이네요.”

끼어든 영애는 어느새 대화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전설 같은 이야기는 따로 있잖아요. 왜, 리페르 가문과의 일전을 앞두고 시녀장이 납치됐었던 사건 알죠?”

그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이야기를 듣던 이들 중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과 황제에 대한 가장 유명한 일화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같은 이야기라도 여러 사람의 입에서 자세하게 듣기를 원했다.

“그렇게 분노하신 폐하의 모습은 지금껏 아무도 보지 못했다더군요. 시녀장을 구하기 위해 폐하께서는 직접 리페르 성문 앞까지 가셔서…… 이건 당시 기사단에 있었던 제 오라버니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예요.”

그녀는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가레스 리페르를 무릎 꿇려 놓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기 직전까지 매질했다지 뭐예요. 그렇게 페트라 리페르를 끌어내고, 시녀장을 가레스와 교환하셨대요.”

“아니, 적장의 아들을 시녀와 교환했단 말입니까?”

어느 청년이 큰 소리로 되물었다. 제국 변방의 어느 백작가 후계자인 그는 기사 수련을 위해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소식이 늦었다.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폐하 스스로도 위험한 상황이었죠.”

먼저 이야기를 나누던 다른 영애가 대답했다. 변방의 소백작보다는 낮은 목소리였으나 주변에 들리기에는 충분했다. 애초에 그들은 주변 사람도 자신들의 대화를 듣고 끼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약혼자 세 명을 빼앗아 간 시녀를 이렇게 아끼시다니, 게다가 에드윈 후작 영애며 트리온 후작 영애를 두고 그 사람을 시녀장으로 삼다니, 폐하께서도 항상 냉철하지는 않은 걸까요?”

소백작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별 소문이 다 있어요. 폐하께서 실은 제국에 남아 황위를 되찾기 위해 파혼을 의도하셨다든가…… 시녀장이 사실은 폐하를 돕고 있었던 거라든가……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니에요. 황위는 강한 나라와의 국혼으로 되찾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영애가 말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소백작은 그녀의 말에 열정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아직 수도에 친구가 없는 그는 누군가와 친밀한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이 무척 즐거웠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준다는 것도.

그는 몇 마디 더 보태기로 했다. 스스로 생각할 때 꽤 날카로운 분석이었다.

“게다가 제가 듣기로는 매번 파혼이 있었을 때 폐하께서는 서럽게 우셨다면서요. 고귀한 황녀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게 어떻게 연기일 수가 있습니까?”

그들은 한참을 웅성거렸다. 처음에는 주로 듣고 있던 소백작은 조금씩 긴장이 풀리고 신이 나서 대화의 지분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떠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등 뒤에서 다가오는 두 명의 여인을 제때 돌아보지 못했다.

“그런 천박한 여인이라니, 멀쩡한 사내라면 절대로 관심을 주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마침내 소백작이 외치듯 말했다. 일부러 그랬다기보다, 각자 할 말들이 많다 보니 모두의 언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그는 적극적인 맞장구를 기대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으나, 그곳에 있는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까지 떠들썩하던 그의 새 친구들은 갑자기 찬물을 맞은 듯 고요해졌다. 모두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눈이 치켜 올라간 영애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입술을 떨고 있었다.

느낌이 싸했다.

“다들 왜…….”

그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감지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등 뒤로 다가와 서 있는 두 여인을 마주했다.

“어…….”

소백작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수도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그도, 제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평범한 하객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특히 그중 한 명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괴짜 같았다. 아주 유명한 괴짜.

“와, 천박하대요. 저 사람이 아드리안 보고 천박하다고 했어요.”

눈치 없이, 야속하게 자신의 말을 반복하고 있는 사람은 라잔의 왕녀 에반젤린일 것이다. 귀족 연회에 짐승 털로 만든 바지 따위를 입고 오는 여인은 대륙을 통틀어 그녀 한 명뿐이었다. 어깨에 박쥐를 얹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그다지 흔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는 제국의 포로 신세였으나, 줄을 무척이나 잘 서서 황제의 즉위를 도왔기에 지금은 대륙에서 가장 큰 부자 중 한 명이자 가장 자유로운 사람, 즉, 모든 제국인의 부러움을 사는 자가 되었다.

도움에 대한 대가로 황제로부터 어마어마한 재화를 하사받은 그녀는, 함께 자유가 된 프리오닉스를 타고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내킬 때쯤 제국의 수도를 다시 방문하거나,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마음대로 참석하고는 했다.

물론, 그녀는 어디서나 환영받았다. 황제의 친우일 뿐 아니라 제국에 두 명뿐인 공작 중 하나인 카엘리온 에핀하르트와도 친분이 깊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연인이다, 아니 절친한 친우이다, 공작이 포로였던 에반젤린에게 반해 폐황태자 패리스를 때려눕힌 적이 있다는 등 소문이 파다했으나 진상을 아는 자는 드물었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의 왕래가 꽤나 빈번하다는 사실이었다.

“가레스 리페르도 한때 입을 함부로 놀렸었는데. 안 닮아도 되는 사람을 닮았네요, 아이반 루블 소백작.”

에반젤린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으나 소백작은 순간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 그 말은 마치 협박처럼 들렸다. 게다가 자신은 행색을 살펴 에반젤린이 누군지 알았다고 쳐도, 그녀가 대체 자신을 어떻게 아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평생 영지를 떠나지 않고 살았고, 다소 늦은 나이에 기사 작위를 받고자 상경한 참이었다.

소백작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에반젤린의 적갈색 눈동자를 견디지 못하고, 굳어 버린 얼굴을 천천히 움직여 에반젤린 옆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귀해 보이는 복장. 분명히 황궁에서 온 사람이다. 직접 오지 못한 황제가 누군가를 대신 보낸 모양이었다.

어, 잠깐, 황궁에서 온 사람? 황제 대신?

소백작의 머릿속에 얼마 전까지 신나게 입에 담았던 누군가의 이름이 스쳤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사실이었다. 조금씩 눈에 들어온 여인의 얼굴은 그가 소문으로 들은 모습과 너무나 비슷했다. 반짝이는 연갈색 머리, 작은 키에 귀여운 눈매, 오밀조밀 아름다운 이목구비, 그리고 에메랄드를 닮은 녹안.

황제가 자매처럼 아끼는 시녀장, 아드리안 리스였다.

‘타이밍이 나빴네.’

아드리안은 사실 그다지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었고, 그런 험담이 자신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그저 흔한 소문이었다. 소문은 원래 세상만사에 대해 나는 법, 막아 봤자 의미도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뒤에서는 수군거리지만 어차피 수도의 귀족 중 누구도 그녀를 노골적으로 무시하지는 못했다. 그녀를 함부로 대했다가 최후가 무척 비참해진 가레스 리페르의 선례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황제의 부군을 제외하면 황제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시녀장이었고, 그런 사람을 무시할 멍청이는 수도에 없었다. 아드리안에 대해 떠들던 이들이 모두 파랗게 질려 입을 다물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였다.

그렇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

“어…… 그러니까, 저는 그저 영애의 미래가 걱정되어서 말입니다.”

아니, 한 명이 계속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헛소리를 했던 아이반 루블 소백작이었다.

“표현은 죄송하나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니…….”

그는 잠시 당황해서 말을 멈추었을 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 아니었다.

“뭐,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그는 헛소리를 주절거리며 변명을 하고 있었다. 험담을 하다가 걸려서 민망하지만, 그 상대가 그렇게 대단치는 않다는 정도의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별거 아닌데 화내지 말고 대충 넘어가라,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중요한 제후국의 왕녀이자 황제의 친구로 알려진 에반젤린에게는 순간적인 두려움을 느꼈지만, 어쨌든 에반젤린에 대한 험담은 아니니 큰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그는 시녀장인 아드리안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한미한 출신, 방탕한 행실.

소백작이 생각할 때, 그런 것에 해당되는 사람은 공개적인 조롱을 좀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를 조롱한 자신은 큰 잘못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귀족 사내들이란 원래 그렇습니다. 싫은 것을 어떻게 좋다고…….”

그는 몇 마디 헛소리를 더 지껄였다. 멍청하게 움직이는 그의 얼굴 근육 위로, 언젠가 스치듯 본 적이 있는 소백작의 아버지―성실하고 겸손한 루블 백작―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만약 백작이 눈치 없는 아들이 수도의 연회에서 시녀장을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는 몸져누워 버릴 것이다. 아드리안은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그의 입을 다물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소백작…….”

“소백작의 생각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네.”

그러나 그녀가 말을 꺼내기 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가 하려던 말을 대신해 주었다. 아드리안은 동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큰 키, 평생 단련한 것처럼 단단해 보이는 몸, 깊고 강인한 잿빛 눈까지. 무인 특유의 위압감이 흐르는 남자가 아드리안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바이안 공작 각하?”

“무례를 저질렀으면 빨리 인정하고 사과할 것이지, 최소한의 매너를 갖추지 못했으면서 무슨 기사 수련을 한다고 수도에 온 건지 모르겠군.”

황제의 부군을 제외하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두 남자 중 한 명, 녹스 바이안 공작이었다.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소백작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를 알아본 소백작의 눈이 공포로 얼어붙었다.

“다, 단장님…….”

제대로 된 기사 수련을 받겠다며 집을 떠난 소백작은, 그가 따르고 모셔야 하는 황실 기사단장을 마주하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제야 그는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의 말에 웃어 주던 이들은 한 걸음 물러서서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소백작을 응원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들도 이 사고에 말려들까 봐 그저 덜덜 떨고 있었다. 소백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대의 말은 전혀 틀렸어.”

“……예?”

소백작이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귀족 사내의 생각이 이렇다 저렇다 넘겨짚지 말라는 뜻이네. 난 아드리안과 춤을 추기 위해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예?”

“네?”

이번에 놀란 사람은 소백작뿐이 아니었다. 아드리안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벙 찐 얼굴로 녹스를 올려다보았다.

“영애가 허락한다면.”

녹스가 한쪽 손을 내밀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드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대체 뭐 하고 있냐는 표정이었다. 녹스는 꿋꿋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잘생긴 얼굴에 민망함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녹스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는 소백작을 내버려 둔 채, 두 사람은 홀 중앙으로 걸어가 섰다. 악사들은 우아하고 느린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찡그린 미간을 펴지 않은 채 녹스의 리드에 따랐다. 그다지 즐겁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왜 그러지?”

“뭐가요?”

녹스가 묻자 그녀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녹스가 이마를 찌푸렸다.

“내게 화가 났나?”

아드리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를 긍정으로 받아들인 녹스가 다시 말했다.

“설마 저 얼간이와의 대화가 즐거웠단 말인가?”

아드리안은 대답 대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건 말도 안 되지.

녹스가 아주 조금 안도했다. 그와 아드리안은 절친한 관계까지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같은 주군을 섬기는 사이이지 않은가. 그녀가 아이반 같은 멍청이와 즐겁게 대화하는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난 영애를 도와…….”

“혼자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아시잖아요.”

아드리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녹스의 눈이 커졌다.

“뭐?”

“루블 소백작의 말은 별것도 아니었어요.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와 갈등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는 친우들 사이에서 배척당했을 거예요.”

“그 녀석은 애초에 친우가 없어. 성격 보면 모르겠나? 그래서?”

녹스가 물었다.

“공작 각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굳이 끼어들었다는 건, 루블 소백작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고 판단하신 거겠죠.”

“뭐?”

녹스가 불쾌한 듯 이마를 강하게 찡그렸다.

“그게 무슨 뜻…….”

“각하께서도 제 평판 때문에 저의 앞길이 밝지 못하다고 결론을 내리신 것 같아서요. 그런 짐작은 반갑지 않거든요.”

아드리안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맑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그를 꿰뚫는 것 같은 기분에, 녹스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새삼 그녀와의 거리가 다소 가깝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제가, 남자의 마음을 얻지 못할까 봐 걱정되세요?”

아드리안은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키는 가슴팍까지밖에 안 오는 이 작은 여인은, 이상하게 그를 긴장시키는 법을 알았다.

“그래서, 공작 각하가 춤을 청하는 게 저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셨어요? 나무랄 데 없는 평판을 가진 각하와 같은 분께서 제게 관심을 보이면 다른 남자들도 제가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할 테니까?”

녹스는 대답을 위해 입을 열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드리안의 말이 맞기 때문이었다.

아폴로니아의 등극으로 인식이 조금 바뀌기는 했으나, 제국의 귀족 여인들은 흔히 결혼을 일생에서 가장 큰일이라고 여겼고 실제로 남편에게 많은 의지를 하며 살았다.

평판이 훼손되어 누구의 청혼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귀족 여인에게는 상당한 불이익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별생각을 하지 않고 아드리안을 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이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영애는 일전에, 영애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싶다고 말했었지. 무서운 사람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그는 오래전, 자신이 납치했던 아폴로니아의 손을 잡기로 한 직후 아드리안과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해 냈다. 그녀는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아픈 치료제로 그를 괴롭히더니, 아주 조금, 감춰져 있던 속마음을 털어놓았었다.

아드리안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걸 기억하시네요.”

그녀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지금 그는 죽었어. 영애는 완전히 그로부터 벗어났고. 페트라 리페르조차도 내가 보는 앞에서 숨이 끊어졌어.”

녹스가 다시 말했다. 아드리안이 피하고 싶어 했던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레스였다. 아드리안을 끊임없이 탐냈던 자였다.

“그러니 이제는 평판을 회복하기 싫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다른 뜻은 없었어.”

녹스는 진지하게 설명했다. 모두 진심이었다. 그는 나름의 배려심을 발휘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만약 영애가 결혼 생각이 없는 거라면, 굳이 다른 남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 필요는 없겠지.”

녹스가 말을 마치는 순간, 아드리안의 입가에 복잡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얼핏 보면 재미있어하는 것 같지만, 그를 향한 두 눈이 웃지 않는 것을 보면 이는 냉소였다. 분명 녹스가 뭔가 또 잘못 말한 것이었다.

“각하께서는 저를 정말 모르시는군요.”

“……응?”

“몇 년 사이에 별의별 험담을 다 들어 봤지만…….”

그녀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탕녀 아드리안 리스가 남자의 마음 하나 얻기 어려워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요.”

녹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아드리안의 입가에 보이는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아니, 아까 루블 소백작에 이어서 두 번째이려나요.”

그녀가 들릴 듯 말 듯하게 덧붙였다. 녹스는 여전히 대꾸할 말을 찾고 있었다.

“난, 그러니까 아무래도 거짓된 소문이라는 것이 워낙 치명…….”

“남자의 마음을 얻는 데에 있어서,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답니다. 저에 대한 평가가 박하시군요.”

그녀가 대꾸했다. 여전히 녹스의 잿빛 눈동자에 시선을 맞춘 채였다.

녹스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의도에 대한 아드리안의 짐작은 여전히 틀리지 않았다. 아드리안에 대한 소문들은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아드리안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람의 외모가 그렇게 중요하던가? 녹스 자신도 미녀로 칭해지는 여인들의 관심을 받아 본 경험은 있었으나 대단한 감흥은 없었다.

그녀는 또한 현명하고 재치 있었다. 가끔 녹스를 놀라게 할 만큼. 그러나 다른 사내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가. 안다 한들 그 영향이 뭐 대단하겠는가.

여인의 평판과 출신으로 미래가 결정되는 사교계에서, 험한 소문이 도는 그녀가 어떻게 사내의 마음을 살 수 있다는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녹스는 제가 한 말을 취소하지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에메랄드를 닮은 녹안이 반짝 하고 빛났다. 조금 전까지 화가 난 것 같았던 그녀는 갑자기 흥미로운 생각이 떠오른 표정이었다.

“각하, 보여 드릴까요?”

그녀가 조용하게 물었다.

“아이반 루블 소백작이 정말로 여인의 평판을 그렇게 중시하는지? 평판이 나쁜 여인에게는 정말 눈길도 주지 않는지?”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나른하게 들려, 녹스는 절로 긴장했다.

잔잔한 음악에 맞춰 느릿느릿 춤을 추던 두 사람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아드리안은 고개를 돌려 악사 중 한 명에게 입 모양으로 무언가 요청했다.

네 명의 악사들은 한 호흡 연주를 멈추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조금 전보다 훨씬 경쾌하고 빠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객 몇 명이 환호성을 질렀다.

“리드해 주세요.”

아드리안이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순간 정체 모를 묘한 긴장감이 녹스의 몸을 타고 흘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말에 따랐다.

녹스는 춤을 잘 추지도 못 추지도 않았다. 귀족 사회에서 필요하다기에 배웠을 뿐, 춤이라는 행위에도, 손을 맞잡은 파트너에게도 큰 매력을 느낀 적이 없었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매너, 감수해야 하는 약간의 어색함과 가식, 그 외에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 매너를 지키기 위해 녹스는 아드리안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조금 전 느낀 긴장감은 애써 떨쳐 버린 채로.

아드리안은 긴 속눈썹을 잠시 내리깔았다가, 춤이 다시 시작되려는 순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찰나, 아까보다 더 확연한 미소를 띠고 녹스를 들여다보았다.

‘……어?’

냉소를 지을 때는 입꼬리만 올리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 그를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분명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묘하게 도발적인 눈빛이었다.

‘……이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던가?’

낯설었다. 마치 한순간에 사람이 바뀐 것처럼. 녹스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조금 전 떨쳤다고 생각했던 긴장감이, 아드리안과 맞잡은 녹스의 손을 타고 다시 그의 몸으로 전해졌다. 아까보다 두 배쯤 강해진 채로.

“정신 놓고 있다가 스텝 틀리면 망신당할 걸요.”

아드리안이 속삭였다. 나른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그의 귀를 자극했다. 반쯤 장난으로 한 말이었을 테지만 녹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주변에는 많은 남녀가 짝을 이루어 비슷비슷한 춤을 추고 있었다. 녹스도 정신을 차리고 적당한 박자에 아드리안의 손을 잡은 왼손을 살짝 들었다.

빙글-

그녀는 사뿐히 한 바퀴를 돌아 녹스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다시 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미끄러지듯 스텝을 밟았다. 모든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우아하고 날렵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연분홍빛 드레스는 꽃잎처럼 화사하게 펼쳐지고 닫혔다.

휙-

녹스가 한 번 더 팔을 들어 올렸다. 아드리안은 순간적으로 박자를 나누어 두 바퀴를 빠르게 돌았다. 반짝이는 연갈색 머리칼이 허공에 날렸다가 떨어지고, 장미향과 비슷한 향이 훅 풍기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는 녹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순히 춤을 잘 추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분위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홀 안에서 춤을 추는 그 어떤 여인보다 눈에 띄었다. 새 음악이 시작되고 아드리안이 녹스를 향해 미소 지었던 순간부터 그녀를 둘러싼 공기는 달라져 있었다.

아드리안은 혼자 빛나고 있었다. 아주 눈부시게.

녹스의 잿빛 눈동자는 아드리안에게 고정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를 끌어당겼다.

이는 홀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둘씩, 춤을 추던 사람들도 구경하던 사람들도 아드리안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녀는 하늘거리는 나비 같고, 또 화려한 깃털을 가진 작은 새 같았다. 우아한 두 발은 날듯이 바닥을 미끄러졌다.

자신이 모든 이들의 눈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지, 알면서 즐기는 건지, 그녀는 수많은 관심 속에서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더욱더 아름답게 빛났다.

한껏 고조됐던 음악이 극적으로 끝났을 때, 홀 중앙에 남은 것은 녹스와 아드리안 두 사람뿐이었다. 모든 다른 이들은 움직임을 멈춘 채 그들을, 아니 정확하게는 아드리안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서 두 사람은 동작을 멈추었다. 아드리안의 작은 몸은 녹스의 오른팔 안에 갇히듯 안겨 있었고, 녹스의 왼손은 아드리안의 손을 삼키듯이 꽉 잡고 있었다.

“하아…….”

아드리안이 숨을 몰아쉬자 그 숨결이 녹스의 가슴에 와닿았다. 그녀의 얼굴은 홍조를 머금고 상기되어 있었다.

“오랜만이라…… 숨이 차네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다시 듣는 순간, 녹스의 몸은 또 한 번 강한 떨림을 느꼈다. 아드리안은 고개를 살짝 돌려 연회장의 한쪽 구석을 바라보았다.

“보세요, 각하.”

그녀가 말했다. 녹스는 여전히 아드리안에게 고정된 시선을 억지로 떼 그녀가 말하는 방향을 보았다.

멀리, 아이반 루블이 서 있었다. 얼빠진 얼굴은 꿈속인 것처럼 멍했고 입은 살짝 벌어진 채였다. 조금 전까지 허세만 가득하던 두 눈은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그의 시선은 분명 아드리안을 향하고 있었다. 연회의 모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애에게 반했군.”

“맞아요.”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원하면…….”

아드리안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려다가 말을 멈추었다. 그녀를 감은 녹스의 팔에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각하.”

“시, 실례했어.”

멍하게 서 있던 녹스는 아드리안이 그를 부르자 그제야 흠칫 놀라 그녀를 놓아주었다. 아드리안은 그 자리에 선 채 녹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녹스는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춤은 아까 멈추었는데 떨림은 그대로였다. 아니, 아드리안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 떨림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이런.”

아드리안이 입꼬리를 보일 듯 말 듯 올리며 말했다. 그 미소 아닌 미소에, 녹스는 다리가 살짝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떡하죠.”

아드리안이 다시 한 번 속삭였다. 녹스는 무언가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확연하게 드러나 있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목에서 귀 끝까지 붉어져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감정을 느껴 본 경험이 없었고, 그렇기에 숨겨 본 경험도 없었다.

녹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무방비하게 아드리안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반하셨군요, 각하도.”

그녀가 기어이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입가의 엷은 미소는 그대로였다. 녹스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제게 반하셨어요.”

아드리안은 쐐기를 박듯 나직하게 덧붙이고 한 걸음 물러섰다.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은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녹스는 온몸의 힘이 한 번에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드리안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과거 그가 여인에게 느낀 깊은 감정이라고는 아폴로니아를 향한 원망이 전부였다. 나중에는 그녀를 향한 신뢰나 충성도. 그러나 지금 그의 호흡을 거칠게 만들고 있는 감정은 그 모든 것과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난…….”

그가 더듬거리자 아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긴 속눈썹이 시선을 빼앗았다.

“또 만나요, 각하.”

그녀는 녹스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너무나도 상투적인 인사를 남길 뿐이었다. 넋이 나간 채 홀 중앙에 서 있는 녹스를 그 자리에 둔 채, 아드리안은 천천히 몸을 돌려 군중 속으로 멀어졌다.

* * *

“앗, 나도 갈 걸 그랬네.”

아폴로니아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옆에서 눈썹을 찌푸린 채 한 팔로 턱을 괴고 있는 녹스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아드리안은 원래 춤을 잘 춰. 나보다 훨씬 소질이 있는데 평소에는 바빠서 잘 발휘하지 않을 뿐이야.”

“그런 것을 물은 게 아닙니다, 폐하.”

녹스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아버지를 닮아 평소 자세가 꼿꼿한 그는 그날따라 흐물흐물해진 채, 테이블에 반쯤 엎드린 상태였다.

화창한 날씨에 아름다운 경치. 황궁을 벗어나 아름다운 정원의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으련만, 그는 아까부터 얼굴을 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녹스가 아폴로니아를 납치했던 알브레이트 정원.

한동안 폐쇄되었던 이곳은 얼마 전 새 주인을 만나 전보다 더 화사한 자태로 문을 열었다. 새 주인은 비어 있던 공간을 활용해 찻집을 운영했고, 이는 꽃들을 감상하며 차 마시기를 즐기는 귀족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얻었다. 아폴로니아가 좋아하던 백합 정원도 과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아, 미안해. 다른 이야기 중이었지. 아까 뭐라고 했더라?”

아폴로니아가 다시 물었다. 분명히 진지하게 시작한 대화였지만, 아드리안이 사교계의 스타로 거듭났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으면서 이야기가 새고 말았다.

“시녀장에 대한 험담을 왜 내버려 두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대로 알려지면…….”

녹스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황실에서 동의했던 약혼인데 나와 시녀장이 짜고 일부러 깨뜨렸다고 공표를 해? 옛날 일이지만 전 약혼자들 귀에 들어가면 원한을 살걸.”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녹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늘어졌던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자기 쪽에서 파혼해 놓고 누가 그걸 문제 삼습니까?”

“그쪽 입장에서는 나를 버리고 아드리안에게 빠진 것이 지루한 인생에서 가장 큰 일탈이자 소중한 추억쯤 되지 않겠어? 그게 사기당한 거라고 하면 싫겠지.”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원한을 품으면 뭐 어떻습니까? 감히 폐하를…….”

“뭐가 어떻긴. 나는 건드리지 못하니까 아드리안을 노릴 수 있지. 그런 위험은 절대로 다시 만들지 않아.”

아폴로니아의 표정이 순간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는 페트라가 아드리안을 납치했던 사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녹스는 입을 다물었다. 아폴로니아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안전을 위협당하면서 명예를 회복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게다가 그 정도는 아드리안이 처리할 수 있는 일이야. 아니, 아드리안이 뭘 할 것도 없어. 로렐라이 에드윈이 손을 썼으면 된 거야.”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로렐라이는 얼마 전부터 아폴로니아의 시녀로서 황궁에 들어와 있었다. 일손이 필요하기도 했고, 에드윈 후작의 부탁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때 그녀가 유리엘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사실은 그다지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잘난 얼굴에 반하는 것을 어떻게 죄라고 하겠는가.

사교계의 장미라는 이미지와 달리 현실주의자였던 로렐라이는 황실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유리엘에게 관심을 끊고 꽤나 충실하게 아폴로니아를 따랐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시녀로 들어온 라일라 트리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묻기도 전에 과거 유리엘에게 거짓 초대장을 보내 그를 초대한 적이 있다고 사죄하더니, 얼굴 보기 민망하다며 유리엘을 피해 다니기도 했다.

에드윈 후작가의 파티가 끝난 후, 주인공으로서 모든 정황을 전해 들은 로렐라이는, 상사에 해당하는 아드리안이 자신의 파티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아드리안에 대해 떠들었던 모든 이들을 사교계의 크고 작은 모임에서 퇴출시켰다. 이는 각자가 속한 가문의 사업에도 영향을 주는 강한 조치였다.

소백작을 제외하면 다 없는 데서 한 말이니 적당히 봐주라는 아드리안의 말에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과거 로렐라이 본인과 친구들도 아폴로니아나 아드리안에 대해 뒷말을 한 적이 있지 않느냐는 추가적인 지적에는 조금 수긍했는지, 몇 개월 동안 깊이 반성하면 그들을 다시 모임에 받아 주는 것도 생각해 보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결과적으로 아드리안은 그녀의 험담을 했던 이들이 보내는 구구절절한 사과 편지에 파묻히고 있었다.

“정작 루블 소백작은 뭘 어떻게 하기 어려웠다나 보더군. 애초에 가문의 사업은 변방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는 어떤 사교 모임에도 속하지 않았으니까.”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녀 자신도 소백작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놈은…… 어, 음…… 제가 잘 데리고 있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상한 그의 대답에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녹스는 그 사실이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아이반은 황궁에서 기사 수련을 받고자 했고, 책임자인 녹스는 무척 대범하게도 그의 무례를 용서하며 청을 받아 주었다. 그뿐인가, 며칠째 매일 아침 그를 성심성의껏 개인 지도해 주었다. 모범적인 단장의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부하들은 이제 눈물 없이 못 보겠으니 멈추라고 그를 뜯어말렸지만, 그 녀석들은 수습 기사에게 얼마나 많은 훈련이 필요한지 모르는 바보들 아니겠는가.

‘뭐, 아직 어디 부러지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녹스는 그날 아침에도 대련을 핑계로 수습기사인 아이반을 흠씬 두들겨 패 놓았다. 어제는 토할 때까지 달리기를 시켰다. 혹독한 수련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반쯤은 그녀석이 아드리안에게 했던 말 때문이었고, 반쯤은 연회 마지막에 아드리안을 보던 그놈의 멍청한 얼굴이 녹스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녹스는 문득 아폴로니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이반을 떠올리는 녹스의 표정이 갑자기 흉폭하게 변한 탓이었으리라.

아폴로니아의 입꼬리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그 모습을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정말 궁금한 게 그것뿐이야? 중요한 건 따로 있을 텐데.”

아폴로니아가 다시 물었다. 녹스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오늘 일부러 내 호위를 자청해서 여기까지 동행했으면 할 이야기가 더 있는 거 아니야?”

“그건…….”

녹스는 대답을 망설였다. 몸이 다시 흐물거리며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 일을 숨길 수도 없다는 것은 녹스도 잘 알았다. 아폴로니아는 이미 그날의 일을 여러 경로로 전해 들어 알고 있었고, 아드리안과 춤을 추고 난 후 녹스의 넋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마 아드리안 본인도 아폴로니아에게 무언가를 전했을 것이다. 우아함을 잃지는 않으면서도 호기심에 가득 찬 금적안이 그 증거였다.

“……영애의 행동이 잘 이해가 안 가서…….”

그가 중얼거렸다.

“행동?”

“그러니까, 대체 왜 제게…….”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문장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아드리안이 그에게 무슨 행동을 했단 말인가? 같이 춤을 추자고 한 건 녹스였고, 아드리안은 그저 제안에 따랐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매력적이었던 것도, 하필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었던 것도, 황홀한 장미향을 풍겼던 것도, 그녀가 휙 하고 돌 때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의 뺨을 스쳤던 것도 딱히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녹안이 그를 바라볼 때마다 몸이 마비되다시피 한 것,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가슴이 쾅쾅거린 것, 그리고 멍청하게 그 사실을 다 들킨 것은 모두 바보 같은 자신의 탓이었다.

그뿐인가. 그날의 설렘은 녹스가 아드리안을 보던 시각을 아예 바꾸어 놓았다.

연회가 있었던 날,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드리안과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복기했다. 그것은 이상한 경험이었다. 아드리안이 유능하고 장점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이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다시 떠올린 기억 속의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 사실을 왜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하아…….”

녹스는 깊은 한숨을 토하더니 의자에 반쯤 미끄러져 걸쳐졌다. 조언은 무슨 조언, 그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여기서 다 녹아 버리면 근심 걱정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이 잘못한 거야.”

아폴로니아가 무심하게 내뱉었다. 녹스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와줄 게 따로 있지, 아드리안이 혼인 상대를 못 찾을까 봐 걱정했단 말이야? 황녀의 약혼자를 세 명이나 빼돌리는 일은 아무나 하는 것 같아?”

그녀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연회 이후로 며칠 사이에 아드리안이 받은 구혼서가 세 장이야. 다 알 만한 가문에서 온 것들이고.”

녹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눈이란 다 똑같았던 것이다. 연회장에서 그녀는 얼마나 찬란하게 빛이 났었나.

그날 이후로 녹스는 태어나서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온갖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아드리안을 다시 보고 싶어 안달이 났고, 그날 자신과 똑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모든 남자들을 향한 정체 모를 분노가 치솟았다.

또한 예전에는 절대로 공감할 수 없었던, 사랑을 위해 죽느니 사느니 하는 내용을 담은 온갖 노래와 시의 의미가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때는 헛소리로 치부했던 그것들은 알고 보니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명문이었다.

소년 시절 몰락한 집안을 다시 세우는 것에만 몰두하느라 한 번도 진지하게 이성과의 교제를 고려한 적이 없었던 그는, 여인을 대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으나 설렌 적 또한 없었다. 또한 결혼의 개념은 이해해도 연애의 가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연인 관계라는 것도 다 결혼을 염두에 둔 계산의 일종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경험한 적이 없기에 감정의 이끌림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오만이었다.

“알면 됐어. 이제 아드리안은 잊어버려. 결혼을 원하면 적당한 사람을 찾아 주지.”

“예?”

힘없이 의자에 팔을 걸치고 있던 녹스는 튕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라고 대충 얘기해 달라던데. 아드리안이.”

아폴로니아가 미안한 듯 덧붙였다. 녹스는 심장이 쾅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제가 귀찮아질 것 같았나 보군요.”

뭘 기대한 것인가. 그녀는 처음부터 녹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를 도발하는 듯한 미소는 애정도 아니고 유혹도 아니고, 그저 주제넘게 그녀를 걱정하는 녹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준 것뿐이었다.

녹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숱 많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갑자기 머리가 멍해져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근 며칠 동안 그는 이 새로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 아드리안을 제 것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 감정을 어떻게든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아드리안이 그를 노골적으로 거절하자, 그의 감정은 오히려 증폭되어 버렸다. 아드리안의 미소가 그의 머릿속에서 한층 선명해졌다.

“……저를 좋아하게 만들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녹스가 아폴로니아에게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공이 나한테…… 그 애를 어떻게 공략하면 되냐고 묻는 거야?”

그녀는 예의상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미처 숨기지 못한 약간의 황당함이 눈빛에서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의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군신을 넘어 친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때 녹스가 바이안 가문을 방치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원망한 적이 있었으나, 그는 납치 사건을 통해 자신이 넘겨짚었던 몇 가지가 대부분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 시드가 가끔 가져다주었던 출처 모를 돈의 제공자가 사실 아폴로니아였다는 사실, 그의 죽음 후부터 아폴로니아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꼬박꼬박 바이안 가문에 후원을 해 왔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 녹스는 아폴로니아를 진심으로 신뢰했다.

다만 둘의 평소 대화는 8할이 공무, 그리고 2할 정도가 시드에 대한 회상이었다. 그가 이런 사적인 감정 문제를 아폴로니아에게 상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영애를 알고 지낸 1년여 동안 아무 생각도 없던 제가 한순간에 그녀를 마음에 담았다면, 그 반대도 가능해야 맞지 않겠습니까?”

그는 굴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차마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듣고 있었다.

“방법이 있다면…….”

“풋풋하네요, 첫사랑이라니.”

그가 뭔가 덧붙이려는 순간, 검은 곱슬머리의 여인이 트레이를 끌고 두 사람의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왔다.

“루.”

아폴로니아가 반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여인은 빙긋 웃더니 트레이에서 다과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세타, 아니 루아나였다. 아폴로니아를 도와 가이우스의 내면 깊이에서부터 그를 몰락시킨 장본인.

“주인이 직접 일해야 하는 거야? 점원은 다 어디 가고?”

“폐하께서 오셨는데 당연히 제가 와야죠.”

루아나는 향긋한 과일 차는 물론 열 가지도 넘는 디저트를 원형 테이블에 꺼내 놓고 자신도 앉았다. 그녀와 친하지 않은 녹스는 다소 민망한 표정이었다.

“다…… 들은 건가?”

“그럼요, 각하. 오늘따라 정원은 조용하고 각하의 목소리는 또렷해서 아주 잘 들린답니다.”

루아나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녹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민망해하실 건 없어요. 여인에게 곁을 주지 않던 바이안 공작이 아름다운 시녀장에게 홀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여기저기서 전해 들었거든요. 각하가 방금 하신 말씀 중 새로운 정보는 하나도 없었답니다.”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지만 녹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이건 악몽이야, 분명히 악몽이다.

아드리안 리스와의 춤이 끝나고 녹스가 얼빠진 표정을 빨리 지우지 못했기에 눈치 빠른 몇몇 귀족들은 한눈에 그의 마음을 읽어냈다. 그들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알브레이트 정원의 단골이었기에, 화술이 뛰어난 새 주인 루아나에게 이 재미난 소식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녹스의 멍한 모습을 누가 더 잘 따라 하나 경쟁해 가면서.

“루, 공작은 아드리안의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을 방법을 알고 싶다는군.”

아폴로니아가 잘됐다는 듯이 말했다. 사람 사이의 감정을 읽고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루아나만 한 전문가가 없었다. 그녀는 아드리안이나 아폴로니아와는 또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읽었다.

“한 번에요?”

루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녹스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루아나를 올려다보았다. 한때 폐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녀가 무언가 비기를 알려 주지 않을까?

“헛짓거리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루아나가 딱 잘라 대답했다. 녹스의 얼굴이 조금 구겨졌다.

“어, 없다는 말인가?”

“아뇨. 있는데 각하는 못 하신다고요.”

그녀는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남자를 유혹하는 요령이 있듯, 여인을 빠져들게 하는 방법도 있죠. 서로 상대방이 자신을 더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밀고 당기는 놀이를 즐기는 남녀도 있고요.”

“그럼 나는 왜…….”

녹스의 말에 루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냐하면, 아드리안 님 같은 고수를 상대로 그런 놀이를 시도하면 각하는 무참하게 깨질 테니까요. 아드리안 님이 마음먹으면 각하를 한 손에 쥐고 휘두를 수도 있을 거예요.”

녹스의 얼굴이 붉어졌고,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묵언의 동의를 표했다.

“……그럼 포기하라는 말인가?”

녹스가 다시 물었다. 언제나 단단해 보였던 그의 잿빛 눈동자는 거의 애절해 보일 지경이었다.

“원하는 게 정확히 뭔가요? 아드리안님이 각하를 상대로 상사병을 앓기를 바라시는 건가요?”

“아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았네!”

녹스가 빠르게 반박했다. 안 그래도 잡생각이 많이 드는데 그런 황홀한, 아니지, 허튼 상상을 하게 만들지 말라고 덧붙이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럼, 다른 세 명의 귀족들처럼 구혼서를 보내시게요?”

“그런 부담은 그쪽에서 싫어한다는 걸 알아.”

녹스가 조금 더 진지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루아나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녹스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은 사실 한 가지였다.

“……그녀를 조금 더 알고 싶네.”

그뿐이었다. 그는 아드리안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단순히 춤을 추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여서가 아니었다. 아드리안은 원래 특별한 사람이었다.

생각 많은 아폴로니아를 옆에서 지켜보며, 눈짓 한 번, 손짓 한 번에 그녀의 마음을 완벽하게 읽어 내는 것은 탁월한 능력이었고, 근거 없는 추문 속에서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의연함은 신기할 정도였다.

밝은 사람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어두운 기억도 품은 사람이다. 필요할 때는 굽히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또…….

“그 안으로 들어가면, 또 어떤 결이 나오는지 알고 싶어.”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이제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말하세요.”

루아나가 싱긋 웃었다. 녹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되지도 않을 공략법 같은 것에 힘 빼지 말고, 그냥 데이트를 신청하시라고요. 각하는 그게 최선이에요.”

그녀가 녹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다시 말했다.

“그럼…… 그러면 되는 건가?”

그의 눈에 희망이 비쳤다. 루아나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녹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아폴로니아에게 말했다. 가만히 대화를 듣던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내일, 휴가를 쓰고 싶습니다.”

“보름 동안 써. 오랜만에 집에도 다녀와야지.”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공의 어머니의 건강이 이제야 회복되었다고 들었어. 내려가서 뵙고, 가능하면 수도 가까이로 모시도록 해.”

녹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무언가 행복한 상상을 시작한 것 같았다. 그를 보며 아폴로니아는 우아한 무늬가 새겨진 도자기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넘겼다.

화창하고 아름다운, 평화로운 날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아름다운 그 정원은 선명한 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고 햇살을 즐겼다.

* * *

아드리안의 눈앞에 내밀어진 것은 분홍빛 장미 꽃다발이었다. 누군가가 세심하게 고른 듯한 그것은 한 송이 한 송이가 흠 잡을 데 없이 화사했다.

“……저 주시는 거예요?”

그녀가 다소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할 말이 있으니 잠시 황제궁 앞 정원에서 산책하자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아폴로니아에게 전할 전갈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갈이 아닌 꽃이었다.

해를 등진 채 꽃다발을 들고 있던 장신의 남자는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그것을 내밀었다. 녹스는 한 눈에 보아도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평소 날카로워 보였던 잿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혹시 좋아할까 싶어서.”

녹스가 대답했다. 슬쩍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 소년 같았다. 연회 때도 보았던 모습이었다.

“싫어하는 건 아닌데…….”

그녀가 장미를 받아 들며 말끝을 흐렸다. 애매한 그 대답에 녹스의 얼굴이 흐려졌다.

‘어쩌면 저렇게 생각이 다 읽힐까.’

아드리안이 속으로 생각했다. 녹스는 이 짧은 만남을 꽤나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평소보다 반듯하고 깨끗한 제복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색이에요.”

아드리안은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녹스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연회 날 아드리안이 순간적으로 상처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예민한 그녀는 녹스가 아이반 앞에서 자신을 도와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녀가 귀족 청년들의 선택을 받지 못해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을 거라는 그의 짐작을.

아드리안이 부린 것은 일종의 오기였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비웃고 넘어갔겠지만, 그들보다 아드리안을 조금은 더 잘 알아야 할 녹스가 그런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는 세상을 딱딱하게만 보는 그를 조금 놀려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자극이 이렇게 오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의 무례를 다시 사과하고 싶군.”

녹스가 말했다. 긴장한 표정에 비해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영애의 상황을 함부로 판단한 것도, 그리고 영애를 과소평가한 것도.”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드리안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분이야 상했었지만 객관적으로 그렇게 큰 잘못도 아니었는데. 그리고 상했던 기분은 춤이 끝나고 녹스의 얼빠진 표정을 보면서 다 풀렸었는데.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각하.”

그녀가 대답했다.

“후회하실 것도 없고요. 그날 일은 그냥 다 잊어버리…….”

“후회한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녹스가 아드리안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말했다. 그의 긴 그림자가 아드리안의 몸 위로 드리워졌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난 영애에게 춤을 청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 잊을 생각도 없고.”

그가 다시 말했다. 말투는 여전히 정중했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네?”

녹스는 고개를 살짝 숙여 아드리안과 눈을 맞추었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묘한 일이었다. 아주 미세한 정도였지만 아드리안은 스스로가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훤히 읽히는 그의 생각이 우습기만 했는데, 한 걸음 다가온다는 것이 이렇게 대단한 일이었나.

“청이 있어.”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아드리안은 녹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청이라니, 그 무겁고 정중한 표현은 갑자기 뭔가. 연애에 대해 아무 경험도 없는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최근 받은 세 통의 구혼서가 아드리안의 머리를 스쳤다. 하나같이 거치적거리는 수식어투성이였던 그것들은, 황궁에서 일만 하다가 나이가 들면 큰일이니 어서 나와 결혼하자는 헛소리를 담고 있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제안들이었다. 아드리안은 답신조차 쓰지 않고 그것들을 다른 쓰레기와 함께 내다 버렸다.

문득, 아드리안은 녹스의 말끔한 차림새를 다시 한 번 훑었다. 훈련 때와 다른, 칼같이 단정한 주름이 잡힌 새하얀 제복.

청혼에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아드리안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순간 마음속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설마 녹스도 구혼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결국 그도, 여인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결혼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걸까. 조금 전의 사과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거짓이었나.

아드리안은 그의 청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녹스의 입에서 부담스러운 소리가 나오기 전에 그를 막고 싶었다.

“각하, 저는…….”

“다음 달에 황궁에서 열리는 가면무도회에, 영애의 파트너로서 참석하고 싶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드리안은 눈을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이었다. 녹스 같은 사람이 무도회의 일정을 알고 있다는 사실부터 신기했다.

“청……이라는 게 그거예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 준다면 영광일 거야.”

아드리안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다. 황실 행사의 파트너라니, 아무 부담도 없는, 정말 별것 아닌 제안이었다. 그녀는 다시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녹스를 마주 보았다. 그는 자신이 뭔가 잘못했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가문, 수련, 주군에 대한 충성, 그리고 자신이 이끄는 기사단 외에 다른 것에 일체 무관심하던 이 남자는, 그녀에게 이 간단한 부탁을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준비한 것이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문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말없이 녹스를 바라보았다.

귀엽지 않은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 때문인지 녹스의 눈동자가 다시 미세하게 떨렸다.

“그렇게 할게요, 각하.”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꽃다발을 팔에 안은 채, 그녀는 돌아서는 녹스를 보았다. 짙은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새로운, 그리고 향기로운 시작이었다.

아드리안의 입가엔 오랫동안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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