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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 남은 이야기 (32/34)

Chapter 14. 남은 이야기

“자기도 모른대?”

아폴로니아가 에반젤린에게 물었다. 아폴로니아의 심부름을 다녀온 에반젤린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주술도, 폐하의 능력도 원래 신비로운 거라는 말밖에 안 했어요.”

“당연한 소리지만 그 사람 입에서 나오니까 신비롭게 들리네.”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황궁으로 돌아온 지도 며칠이 지났다. 유리엘은 아직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었지만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왔다.

레아는 처형되었고, 리페르 가문의 모든 조직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공작, 아니 전 리페르 공작인 루이스 리페르와 니샤, 그리고 그들에게 충성했던 몇몇 가신들이 아폴로니아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그녀의 권위나 자격을 의심하는 자는 제국에 없었다.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전쟁을 너무나도 빨리, 쉽게 끝내고 돌아온 그녀에게 귀족들은 파스칼 3세가 받았던 것 이상의 존경을 보였다.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황위를 되찾은 이야기나 리페르 공작가를 박살 내고 돌아온 이야기는 그사이 민간에 퍼졌다. 반쯤은 자연스럽게 퍼진 소문이었고, 반쯤은 아폴로니아가 에반젤린의 정보망을 통해 퍼뜨린 것이었다.

‘백성들이 나를 계속 바보로 알면 곤란하잖아.’

그녀가 그렇게 설명하자, 에반젤린은 피식 웃더니 데리고 있던 외눈까마귀들 모두에게 쪽지 하나씩을 들려 보냈다. 아폴로니아의 무용담이 제국 전체에 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한때 어리숙하다고 알려졌던 아폴로니아는 이제 백성들 사이에서 강인한 황제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고, 백성들은 가이우스의 폭정에서 벗어나게 된 사실을 기뻐하며 새 황제를 환영했다.

그리고 아폴로니아는 평화를 누릴 새도 없이 그간 밀렸던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다. 그녀는 오전에 귀족들과 회의를 진행하는 등 공무를 보았고, 오후에는 주로 에반젤린을 만나거나 아드리안과 함께 황실 내부의 살림을 상의했다.

전처럼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에반젤린은 여전히 아폴로니아가 알고 싶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정보들을 가져다주었다.

그 안에는 유부녀와 바람이 난 배우 이야기처럼 쓸모없는 내용이 많았지만, 간혹 아폴로니아가 궁금해하는 정보들도 섞여 있었기에 아폴로니아는 그녀를 자주 초대했다.

오후가 지나면 밤부터 아침까지,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자고 있든 깨 있든. 지금도 유리엘은 옆방에 있었다. 집무실과 바로 이어지는 황제의 침실에.

“다녀와 줘서 고마워. 아드리안을 보냈어도 됐는데 말이야.”

아폴로니아가 건넨 인사에 에반젤린은 새삼스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제가 가고 싶어서 간 건데요, 뭘. 그 사람은…….”

그녀는 자신이 찾아갔던 그녀를 수식할 말을 떠올리며 눈을 한 번 굴렸다.

“뭐랄까, 저한테도 인상이 강했거든요. 웬만하면 다른 사람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 편인데.”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이번에는 에반젤린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반젤린은 언제부턴가 모든 일에 실리를 따지던 과거의 모습과 달랐다. 리페르 영지까지 마물을 데려가 적극적으로 전쟁을 도왔던 것도, 세드릭의 구애를 미리 거절해 주는 것도, 순수하게 아폴로니아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

물론 에반젤린은 바멜산 사건 이후 ‘마일론의 눈’이 아폴로니아의 것이나 다름없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주었던 도움은 약속한 것 그 이상이었다.

카엘리온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은 것도 아니면서 그를 최대한 편하게 해 주려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타인의 괴로움에 공감했고, 친구의 성공을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눈앞에서 사람의 마음이 조각조각 찢어지는 모습을 보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달까요.”

언젠가 아드리안이 의아하다는 듯 달라진 태도에 대해 묻자 그녀는 그런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 사람이 누군지, 그 때가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잘 지낸대?”

아폴로니아는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말은 안 했어요. 하지만…….”

에반젤린이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말 안 해도 얼굴에서 보이더군요. 전과는 완전히 달라요. 신기할 정도로.”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그래, 그러면 됐어.”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옆방에서 기절한 듯 자고 있는 연인을 떠올렸다.

유리엘은 꽤 다쳤다. 치명상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화상과 타박상이 가득했고, 무너지려는 건물 벽을 팔로 받치다가 뼈에 금이 가기도 했다.

그에 대한 소식은 순식간에 황궁 전체에 퍼졌으나 그가 왜 죽지 않았는지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누군가는 유리엘의 무예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기 때문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아폴로니아가 기민하게 불길이 덜 번진 곳을 찾아 운 좋게 빨리 나갔을 것이라고 했다.

아폴로니아는 그 가능성을 두 가지 중 하나로 추측하고 있었다.

첫째는 유리엘이 가지고 있던 향주머니였다. 오래전 아모레타가 그녀에게 주었던 그 물건을,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에게 다시 주었다. 유리엘은 그 이후로 언제나 주머니를 지니고 다녔다. 아폴로니아를 구하기 위해 건물에 불을 지르는 순간까지도.

아모레타는 그 주머니에 호신의 효력이 있다고 했지만 아폴로니아는 그다지 믿지 않았다. 주술이라는 것은 신비해서 상상도 하지 못할 신기한 현상을 만들어 냈지만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었다.

호신의 효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이런저런 물건들은 상징적이거나, 가진 자의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 물건을 가졌던 유리엘은 분명히 화염의 중심을 지나면서도 살아남았다.

‘천재라서 가능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모레타는 그녀가 알던 어떤 주술사와도 달랐으니까.

또 하나의 가능성은 아폴로니아가 가진 특성, 불에 타지 않는 신체였다. 지금까지는 그녀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 그쳤던 그 특성이, 어떤 이유로든 순간 증폭되어 주변까지 미쳤을 가능성이었다.

별 주술을 걸지 않았는데도 아폴로니아가 입고 있던 옷이 멀쩡했다는 사실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물론 명확하게 증명된 것은 없었지만.

“그는 깨어났나요?”

에반젤린이 물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니 유리엘에 대해 묻는 것 같았다.

“한 번씩 깼다가 다시 자는 걸 반복하고 있어. 피곤한 것도 있고, 약효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혼자 있어요?”

“아니, 아드리안이 간호하는 중.”

아폴로니아가 대답했다.

“그럼 갑자기 이 방에 들어오지는 않을 테니 다행이군요.”

에반젤린이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사실 폐하에게 전달할 것이 있어서요.”

그녀가 꺼낸 것은 작은 봉투였다. 흰색에 고급스러운 재질, 흔치 않은 인장이며 테두리의 황금빛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세드릭이 전하는 거예요. 왕세자로서 정식으로 맡긴 일이라 저도 거절할 수는 없었죠.”

에반젤린이 다소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그 화려한 봉투 안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형식의 서신이었다. 이미 여섯 번이나 받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자, 에반젤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봉투를 건넸다. 인장으로 봉인된 부분을 찢어서 열자 예상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간단한 내용이었으나, 아폴로니아는 한동안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몇 초간 정적이 흐른 후,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청혼서로군.”

* * *

“……로니아.”

유리엘이 반쯤 눈을 뜨자, 그의 입에서 신음 소리 비슷한 것이 새어 나왔다. 뒤척이는 통에 이마에서 떨어지던 물수건을 누군가가 집어 들었다. 아직 정신이 다 돌아오지 않은 유리엘의 눈에는 그 사람의 형체가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아폴로니아.”

“죄송하지만 아니에요.”

익숙한,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엘은 그제야 눈을 제대로 떴다. 눈앞에서 물수건을 물통에 집어넣고 있는 이는 아드리안이었다.

“……아까 폐하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다녀가신 건 맞아요. 간호에는 소질도 없으시고 다른 일이 바쁘다 보니 제가 남게 됐죠.”

아드리안이 물통에 넣었던 수건을 다시 짜서 건네자 유리엘은 천천히 그것을 받아 제 이마에 다시 얹었다. 정신을 차리자 몸 여기저기에서 고통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작은 찰과상들은 거의 나았지만, 붕대를 감은 팔다리는 움직이려 하면 꽤 아팠다.

“폐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까?”

“맞아요. 몇 시간 동안 나오지 않고 계세요. 식사도 하지 않으시고…….”

아드리안이 걱정스러운 듯 대답하자 유리엘이 눈썹을 찌푸렸다. 뒤늦게 그의 표정을 본 아드리안이 눈을 피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물었다.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레아는 돌아오자마자 처형됐는데, 설마 그새 또 무슨 위험한 상황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드리안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을 돌리고 싶은 눈치였으나 유리엘은 그렇게 두지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세드릭 왕세자가 폐하께 정식 청혼서를 보냈어요.”

아드리안은 체념한 듯 빠르게 말을 뱉은 뒤 유리엘의 눈치를 보았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굳었다. 유리엘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문 채 말하지 않았다. 침실에는 불편한 정적이 흘렀지만 유리엘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드문…… 조건이라고 들었어요. 지금의 왕이 죽으면 폐하를 라잔의 직접적이고 유일한 통치자로 인정한다는.”

아드리안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처럼 유리엘의 마음에 박혔다. 아프고 괴로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세드릭은 처음부터 자신의 마음을 밝혀 왔으니까.

하지만 지금 청혼이라니, 잔인하지 않은가.

수없이 많은 고비를 겪고 나서야 그들은 황궁으로 돌아왔다. 몸이야 회복이 덜 되었지만 유리엘은 여전히 매일 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잠드는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겨우 며칠이나 됐다고.

유리엘의 몸이 다 회복되면, 그리고 아폴로니아의 바쁜 업무가 어느 정도 끝나면, 그녀는 유리엘 곁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약속했었다. 어딘가로 떠나든, 아니면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든…….

유리엘의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는 순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가 묻자 아드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끓어오르는 감정이 통제되지 않았다. 안타까워하는 아드리안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폴로니아는 이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 아폴로니아가 세드릭과의 결혼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면 그녀는 아드리안에게 청혼에 따라온 조건에 대한 상의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유리엘을 미치게 만들었다.

“애송이 같은 자식이…….”

그가 꽉 다문 이 사이로 중얼거렸다.

과거 세드릭이 아폴로니아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자 아폴로니아는 간단하게 거절했었다. 그러나 조건을 내걸고 정식 청혼서를 보냈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확실한 답을 주어야 하며, 농담으로 받아넘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합리적인 황제라면 당연히 끌릴 법한 제안을 했다. 라잔의 직접적인 통치자로 인정한다니, 제후국의 군주가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결합만 이루어지면 모든 것을 내주고 자신은 아폴로니아의 지위를 절대로 위협하지 않겠다는 것.

작지만 부유한 라잔의 배경을 고려하면 너무나도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대륙의 동쪽에 있는 라잔을 통치하면 자연스럽게 주변의 다른 제후국을 견제하기도 쉬워진다.

그러나 그 말은 즉, 아폴로니아가 라잔을 드나들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최소한 1년 중 한 달은 머물러야 할 것이다.

유리엘의 곁을 떠나서.

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유리엘은 세드릭의 곁에 있는 아폴로니아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먼 라잔으로 함께 떠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 그는 아폴로니아의 혼사에 있어서 마음을 비우기로 결심하지 않았나. 그런데 막상 아폴로니아가 세드릭으로부터 청혼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화가 났다. 서운한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하게 차오르는 것은 후회였다.

‘말할걸.’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냥 먼저 청혼을 했어야 했다. 답답하게 뭘 기다릴 것이 아니라.

아폴로니아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이유는 비겁한 핑계였다. 아폴로니아가 언제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무너진 적이 있었나. 유리엘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면 아폴로니아는 단호하게 거절할 것이다.

그저 두려웠던 모양이다. 아폴로니아로부터 냉정하게 거절당한 자신의 모습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중요한 문제를 지금껏 피해 왔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모든 것을 원했다.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 곁의 유일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는 아폴로니아와 결혼하고 싶었다.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그걸 지금까지 부정했다니. 멍청하기 이를 데 없었다.

“후우…….”

유리엘은 한숨을 내쉬고는 덮고 있던 이불을 거칠게 걷어 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아드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수 없게 유들유들 웃는 세드릭의 낯짝이 생각났다. 전쟁도 끝났는데 포상이나 받아서 돌아가야 할 놈이 황궁에 머무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유리엘 님? 아직 일어나면 안 되는…….”

“……폐하께 가겠습니다.”

그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침부터 올랐던 열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어지러웠으나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당장 아폴로니아를 만나야만 했다.

“안 돼요! 차라리 제가 폐하를 모셔 올게요.”

아드리안이 소리쳤지만 유리엘은 듣지 않았다. 그는 잠시 휘청이다가 침실과 집무실을 잇는 문을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한순간도 더 미룰 수 없었다. 그는 아폴로니아에게 청혼해야 했다.

“후우…….”

에반젤린을 떠나보낸 뒤 집무실에 혼자 남은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맑고 아름다운 날이었다. 넓은 창문 바로 앞에 위치한 책상으로 쏟아지는 햇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에 깃펜을 든 채, 책상에 놓인 종이 한 장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폐하.”

문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폴로니아는 눈을 들어 그 주인을 찾았다.

“폐하.”

아폴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문 쪽에 서서 그녀를 부른 사람은 유리엘이었다.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엘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먼저 책상 앞까지 온 것은 그였다.

“유리엘?”

유리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폴로니아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근 며칠 동안 그는 침대에 누워만 있었기에,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을 올려다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초췌해진 얼굴은 전보다 더 섬세해진 것 같았다. 힘을 주려 애쓰는 것 같지만 평소보다 나른하게 풀린 눈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녀가 사랑하는 은발이 땀으로 조금 젖어 있었다.

“열이 안 떨어졌잖아.”

아폴로니아가 그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예상한 것과 같이 불처럼 뜨거웠다.

“어서 돌아…….”

“청혼을 받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녀가 유리엘을 돌려세우기도 전에, 유리엘이 입을 열었다.

“……응?”

“아직은…….”

그는 아폴로니아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이마를 짚은 아폴로니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서 천천히 내렸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이마에 달콤한 숨결이 닿았다.

아파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그는 평소보다 호흡이 가쁜 것 같았다.

“아직은 답신의 내용이 결정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응?”

유리엘은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청혼서에 대한 말을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안 건지.

“……대충 결정을 하긴 했는데.”

아폴로니아가 얼떨결에 대답하자 유리엘의 눈이 더욱 슬프게 변했다.

“그래도…….”

“유리엘…….”

“우선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그가 아폴로니아의 허리에 양손을 얹어 그녀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햇빛을 받아 청록에 가깝게 빛나는 눈동자가 유난히 애절하게 보였다.

“……응.”

어쩔 수 없었다. 유리엘은 아플 때조차 황홀하게 아름다웠고, 이런 그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폴로니아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제가 오만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조금 숙여 제 이마를 아폴로니아의 이마에 댔다. 뜨거운 온도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슨 뜻이야?”

“제가 황제의 옆자리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우연히 튀어나온 그녀의 결혼 이야기를 듣고 유리엘이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은 틀렸습니다. 저는…….”

그가 아폴로니아와 눈을 맞추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는 아폴로니아에게 설명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폐하의 옆을 원합니다.”

“……응?”

아폴로니아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지금 유리엘이 한 말은…… 마치 청혼처럼 들리지 않나.

“폐하께서 상인으로 사신다면 저는 상인의 남편이, 집시가 되신다면 저도 집시가, 모험을 떠나신다면 그 곁에서 함께하는 동료가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지금도, 앞으로도 황제 폐하이십니다. 그러니 저도 황제의 옆자리를 원합니다.”

아폴로니아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지금 한 말은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렸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부군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대답을 하시더라도, 저는 폐하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폴로니아의 오른손을 감싸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부디, 아주 잠깐이라도, 저와의 결혼을 고려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가볍게 아폴로니아의 입술에도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소중한 보석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아폴로니아의 손을 놓고, 조금 전과 같은 애절함으로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아폴로니아는 잠시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크게 뜬 눈은 깜빡이는 것도 잊고 유리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끝났어?”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린 끝에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유리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서로의 숨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아폴로니아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놀라서 동그래졌던 두 눈도 환한 미소를 머금고 반짝거렸다. 당황한 듯, 유리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심리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자신의 두 팔을 유리엘의 목에 걸었다. 유리엘은 본능적으로 두 손을 다시 그녀의 허리에 둘러 끌어당겼다. 이윽고 아폴로니아의 입술이 열렸다.

“좋아.”

유리엘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며시 찌푸려진 눈썹은 그의 혼란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좋아, 결혼하자.”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유리엘의 청혼은 갑작스러웠으나 그녀의 대답은 아니었다. 그녀는 황궁에 돌아온 후로 쉬지 않고 결혼을 생각해 왔었다. 당연히, 그녀가 고려했던 유일한 결혼의 대상은 유리엘이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그녀는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안 믿는 표정이지?”

“그건…….”

유리엘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지금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왕세자에 대한 답을 이미 결정했다고 하셔서 저는…….”

“응. 청혼에 거절할 때는 어떤 예를 차려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었어. 난 워낙 덥석덥석 약혼만 했으니까.”

아폴로니아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내가 세드릭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너를 거절할 것 같았어? 너와 결혼하면 얻는 것이 없어서?”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유리엘은 정곡을 찔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 너도 알다시피 결혼으로 얻는 이익과 손실, 그리고 감수해야 하는 위험은 아주 복잡해.”

아폴로니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의 허리를 잡았던 유리엘의 손이 더욱 강하게 아폴로니아를 감아들었다.

“리페르 영지에서, 네가 너 자신을 태워 가면서 나를 살리기 위해 불을 질렀을 때. 나는 내가 뭔가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놓치셨다니요?”

“너를 얻는 것이, 다른 어떤 왕국을 얻는 것보다 가치 있다는 거.”

아폴로니아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의 행복뿐이 아니라 나의 안전, 즉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도 말이야. 네가 없으면 난 이미 여러 번 죽었을 테니까.”

유리엘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머릿속에 얽혀 있던 많은 생각들은 정리되었다.

“귀족이나 왕국과의 강한 연대도 좋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그들의 힘을 필요로 할 때의 이야기야. 황위를 되찾고 리페르를 멸문시킨 이상, 굳이 그들에게 황제의 배우자라는 권력을 쥐여 줄 필요도 없어.”

그녀는 웃으며 덧붙였다.

“어떤 유혹이 있어도 날 배신하지 않고 내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지킬 사람.”

아폴로니아가 한쪽 손으로 유리엘의 뺨을 쓸며 말했다.

“강한 황제에게 필요한 건 그뿐이야.”

그녀가 말을 마치고 유리엘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멍했던 그는, 드디어 아폴로니아의 대답을 완전히 이해한 것 같았다. 유리엘은 조금 전 아폴로니아가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랬군요.”

유리엘의 두 눈이 매력적으로 휘어졌다. 아폴로니아를 향해 숙여진 얼굴이 그림자를 드리워서인지, 청록빛이던 그의 눈동자는 평소의 짙은 푸른색으로 돌아가 있었다. 가까이 닿은 그의 가슴이 세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뜨거운 체온도.

“사랑합니다, 영원히.”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직한 목소리도, 아름다운 미소도,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나도……”

아폴로니아가 미처 대답을 마치기 전에, 유리엘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던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입술은 자연스럽게 유리엘과 겹쳐졌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얽힌 채 서로를 파고들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뻤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올랐다.

7번의 약혼과 파혼 끝에, 아폴로니아는 죽을 때까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남자를 곁에 두게 되었다.

* * *

“뭐야, 자세히 얘기 안 해 주시는 거예요?”

아폴로니아의 머리를 손질하던 아드리안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녀는 유리엘이 어떻게 청혼했는지 물어본 참이었다.

“별 얘기 없었어. 그냥 결혼하기로 한 거야.”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아폴로니아에게서 자신이 원하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아드리안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유리엘 님에게 왕세자의 이야기를 흘린 게 누군데요! 안 그랬으면 유리엘 님은 자기 마음도 모르고 청혼을 더 미뤘을 걸요.”

“에반젤린을 통해 청혼서의 내용을 알아낸 건 칭찬 들을 일이 아니야.”

아폴로니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가 유리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알게 된 아드리안은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는 듯 속 시원해했다. 그제야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이 급하게 집무실로 뛰어 들어와 절절한 고백을 쏟아 낸 경위를 알 수 있었다.

“보기에 답답한 걸 어떡해요. 어차피 이루어질 일을 조금 앞당긴 것뿐인데요.”

아폴로니아가 황당해하자 그녀는 그렇게 변명했다. 다만 표정은 뿌듯해 보였다.

“대단한 사람이야, 넌. 황제의 혼사에 너만큼 영향을 많이 끼쳤던 시녀는 역사상 없었을 거야.”

아폴로니아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사실이었다. 걸리적거리는 아폴로니아의 약혼자들을 쫓아냈던 그녀가, 결국 유리엘과의 약혼에까지도 영향을 미친 셈이니까.

“리스 가문의 위대한 업적으로 남을 거예요.”

아드리안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아폴로니아의 긴 머리칼을 쓸었다.

“다 됐어요.”

거울에 비친 아폴로니아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도 차분해 보였다. 장식이 많지 않은, 그러나 무척 우아한 짙은 남색의 드레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 지위를 드러내는, 다이아가 박힌 작은 은빛 관. 편안하면서 적당히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슬슬 가 볼까.”

그녀가 일어서며 말했다.

“세타…… 아니 루아나에게는 다녀왔니?”

“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말씀을 전했더니 굳이 마지막 인사가 필요하지는 않다고, 물어봐 주셔서 감사하다고만 했어요. 조만간 황궁으로 폐하를 만나러 오겠대요.”

“그래.”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문을 열었다.

“정말 혼자 가셔도 괜찮아요?”

아드리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종을 대동할 테니 기다리고 있어. 몇 분 걸리지 않을 거야.”

그녀는 곧바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왔다. 방 앞에서 대기하던 시종 한 명이 반보쯤 뒤에서 그녀를 따랐다. 두 사람은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모실까요, 폐하?”

시종이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호흡을 한 번 들이쉬고는 대답했다.

“지하 감옥.”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시종이 눈을 크게 떴다.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으며 다시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놈들!”

빛이 한 줄기 정도 들어오는 작은 감옥 안에서, 누군가가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멋대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에는 조금의 윤기도 없었고, 한때 매혹적이었던 황금안은 그저 탁하고 황폐해 보였다. 턱 밑에는 듬성듬성 수염이 자라 있었다.

한때 제국을 호령했던 폐황제, 가이우스 리페르였다.

“네 이놈들! 당장 아폴로니아 그것을 데려와! 나를 꺼내라고 해라!”

그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감옥 앞을 지키던 교도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보시오, 황제 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면 죄를 더할 뿐이오.”

교도관은 나름의 인내심을 발휘해 조언했으나 가이우스는 듣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교도관을 쏘아볼 뿐이었다.

“이놈……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 계집을 데려오란 말이다! 감히 나를 이곳에 가두다니…….”

그가 창살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교도관이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아폴로니아를 당장…….”

“귀청 떨어지겠어요.”

그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감옥 전체에 울렸다. 교도관이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하고는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가이우스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너…….”

그가 몇날 며칠 목이 쉬도록 불렀던 아폴로니아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바깥과 이어진 계단 위에 서서 차가운 얼굴로 가이우스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계단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갔다.

“내가 부를 때까지 나가 있거라.”

그녀가 따라온 시종과 교도관에게 지시했다. 그들은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들이 나간 후, 아폴로니아는 한동안 말없이 가이우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가이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폴로니아의 모습을 살폈다.

또각-

계단 아래 가만히 서 있던 아폴로니아가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녀는 가이우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붙잡고 있는 창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멈추어 섰다. 가이우스가 팔을 뻗으면 간신히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가이우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눈앞에 선 여인은 그가 기억하던 딸의 모습보다 성숙해 보였다.

화려하지 않은 차림임에도 자연스러운 기품이 흘렀고, 머리 위의 작은 관은 맞춘 듯이 어울렸다. 그의 앞에서 애원하며 흐느낄 때면 양쪽 끝으로 처졌던 눈썹은 우아한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 아래, 가이우스가 싫어하면서 또 탐냈던 금적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폴로니아를 데려오라며 소리 지르던 그는, 막상 그녀의 얼굴을 보자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초라한 모습이군요, 아버님.”

이윽고 아폴로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식을 들으셨겠지요. 아버님의 가문은 멸문되었습니다. 영지도, 작위도, 재산도 전부 회수되었고, 이제는 반역자란 낙인만 남았을 뿐이에요.”

가이우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그의 입이 벌어졌으나 아폴로니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아버님의 누이, 페트라 리페르도 죽었습니다. 녹스 바이안의 손에요. 리페르 가문은 수치 속에 사라졌습니다.”

가이우스에게는 뼈아픈 소식을, 그녀는 너무나도 담담하게 전했다. 그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너는…….”

그가 꽉 다문 이 사이로 나직하게 으르렁댔다.

“너는 깨끗할 것 같으냐?”

아폴로니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그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예?”

“반역자의 피를 반이나 타고 태어난 것이 너다. 리페르의 이름이 수치라면 네 이름도 깨끗하지 못해! 나는 네 아버지다!”

그가 창살에 몸을 바짝 붙이며 소리쳤다. 황폐했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버지요?”

아폴로니아가 헛웃음을 웃었다.

“설마 지금 와서 제게 서운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가이우스는 여전히 분노한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연한 사정으로 리페르의 피를 절반이나 가졌지만, 리페르의 이름은 받은 적이 없답니다. 황제의 후계로 태어난 자에게 다른 이름이 있을 수가 있나요?”

그녀는 곧 터질 것 같은 가이우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제국의 역사상, 황제의 배우자 가문이 반역을 일으킨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황제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반역자였던 경우 또한 흔했지요. 스스로를 너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감히!”

가이우스가 부들부들 떨며 고함쳤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가이우스는 증오가 끓는 눈으로 한동안 그녀를 노려보았다.

“미련한 어머니를 닮은 줄 알았더니…….”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숨소리가 섞인 그의 목소리는 짐승처럼 거칠었다.

“하늘을 찌르는 건방은 네 조부를 닮았구나.”

창살을 쥔 가이우스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냉소를 지었다.

“아버님은 두 분을 평가할 자격이 없으나, 일단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쾅-

흔들림 없는 아폴로니아의 모습에 분노한 가이우스가 창살을 세게 내리쳤다.

“너는 네 조부가 대단한 인간이라고 믿느냐? 그가 존경스럽다고 생각해? 그가 한 짓은 모두 떳떳한 줄 아느냐?”

그는 다시 입을 열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 또한 살인자다! 한 사람이 반역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그의 모든 가족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어!”

분노를 넘어선 원한이 그의 눈에 맺혔다. 아폴로니아는 그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또한 죄가 없는 사람을 죽였다! 그는 심판을 받아 마땅했어! 그는 나에게서…….”

“사틴을 빼앗아 갔죠. 알아요.”

아폴로니아가 담담하게 그의 말을 대신 끝내 주자, 그녀를 잡아먹을 듯하던 가이우스의 눈이 순간 떨렸다.

“패리스의 어머니요. 불쌍한 사람이에요.”

아폴로니아가 말을 이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사틴 아리에타를 동정했다.

냉정한 황제였던 파스칼 3세는 반역자를 처벌할 때 복수의 씨를 남기면 후환이 된다는 이유로 그 가족들을 함께 처단했다. 때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자비했던 그의 성격을, 아폴로니아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러나 가이우스를 동정하지는 않았다. 용서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님이 한 일이 그녀를 위한 심판이라니, 그만한 헛소리가 어디 있어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냉소를 흘리며 가이우스가 한 말을 되뇌었다. 가이우스가 이를 꽉 깨무는 것이 보였다.

“지난 13년간, 반역을 핑계로 아버님이 죽인 사람의 숫자를 세 보신 적 있으세요?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켜서 희생된 사람은요? 아니, 단순한 유희로 매를 때리거나 사람을 죽이기도 하셨죠. 그런 사람에게 누군가를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폴로니아는 입가의 냉소를 지우지 않은 채 질문을 이어 갔다. 가이우스는 눈을 매섭게 뜨고 노려볼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틴에 대한 아버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 없더군요. 말만 그렇게 하고, 행동은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뭐?”

전혀 의외의 말에, 가이우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황위에 오른 아폴로니아가 그를 낮추어 보는 것도, 자신의 어머니와 조부를 죽인 가이우스에게 분노하는 것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사틴의 사랑에 의문을 제기하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 그 혈육을 괴롭게 한다면 그 진심은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나요?”

아폴로니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혈육……?”

가이우스는 몇 초 동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패리스를 괴롭게 했다는 말이냐?”

아폴로니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가이우스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는 험악한 기세로 창살을 꽉 붙잡으며 소리쳤다.

“네가 뭘 안다고!”

아폴로니아는 패리스에 대한 그의 애정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감히 가이우스가 패리스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이우스의 분노가 새로이 끓어올랐다.

“나는 패리스에게 모든 것을 주려 했다. 이 제국을! 황위를! 그런데 네가 나타나서…….”

“아버님은 황실로부터 이 제국과 황위를 빼앗고 싶으셨죠. 완벽한 자신의 만족을 얻기 위해 패리스를 그 자리에 앉힌 거고요.”

반박하는 가이우스의 목소리는 아폴로니아의 목소리에 덮여 버렸다. 그녀는 순간 멍해진 그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패리스를 사틴의 아들이 아닌 어머니의 아들로 키웠어요. 머리색을 바꾸고, 눈 색을 바꾸고, 무예로 황실의 혈통임을 증명하라고 하셨죠. 그를 폭주하는 열등감 덩어리로 만든 건 아버님이에요.”

“감히……!”

“아직 안 끝났어요. 아버님 때문에 괴로웠던 사틴 아리에타의 혈육은 패리스뿐만이 아니에요.”

“……뭐?”

가이우스가 거친 호흡을 뱉으며 되물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아폴로니아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그는 정말로 잊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살아 있는 사틴의 어머니를 괴로움 속에 방치했으니까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가이우스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무언가 기억난 표정이었다.

“외모가 사틴과 닮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사틴을 죽였던 병사들은 그저 유모일뿐이라는 사틴의 말을 믿고 그 사람을 놓아주었다죠. 패리스까지 데리고 성공적으로 도망친 그 여인은 나중에 아버님을 만났고요. 하지만 아버님은…….”

그녀는 그리고 에반젤린이 며칠 전 방문해서 알려 주었던 사틴의 뒷이야기를 떠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살아 있는 사람 중 사틴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수가 매우 적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사틴의 유모였던 것으로 알려진 여인이 있었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에반젤린은 페트라가 황궁에서 쫓겨난 뒤에도 조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사틴의 유모였다고 알려진 노파의 원래 이름이 아델린 아리에타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사틴의 생모였던 그녀는 이름을 바꾼 채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이미 복수할 계획을 세웠던 아버님은, 패리스를 받아서 다른 곳에 숨긴 후 그 사람에게 패리스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뭐, 그때는 패리스도 다른 이름을 가졌었겠지만.”

그녀가 차분히 가이우스의 기억을 환기시켰다.

아들을 황실로 데리고 들어가 새로운 신분을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의 진짜 출생을 아는 사람이 남아 있는 것은 위험했다. 가이우스는 사틴의 어머니에게 거짓 비보를 전하고, 동시에 자신은 사실 황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니 눈에 띄지 말라는 말로 그녀를 쫓아 보냈다.

“딸도, 손자도 잃은 그 사람은 지금껏 고통 속에서 살고 있어요. 아버님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에반젤린이 전해 준 이야기를 마친 아폴로니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한때 아버님의 사랑이 진실했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버님에게 남은 건 복수심, 그리고 과거에 대한 비틀린 집착이에요. 그 집착이 아버님을 약하게 만들었죠.”

그녀의 모든 말을 들은 가이우스의 얼굴이 작게 경련했다. 마지막 한 마디에서 그는 세타를 떠올렸을 것이다. 사틴을 닮았다는 이유로 말도 맹목적의 사랑을 받은, 그럼에도 그를 배신했던 여인.

가이우스는 사틴의 친모를 방치하고 그녀의 외양을 닮은 여인을 아꼈다. 아폴로니아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빠져들었다.

사틴의 죽음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페트라에게 분노했지만 정작 사틴의 무덤에는 꽃 한 송이 바치지 않았다. 그리고 사틴의 죽음을 억울해하면서도, 그녀를 죽게 만들었던 이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했다.

아폴로니아는 그 괴이한 행태가 일반적인 사랑과는 다르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은 아니었다.

그는 사틴을 잊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과거 그녀를 사랑했던 시절에 대한 집착에, 그리고 과거 자신의 행복을 깨뜨린 모든 것을 향한 분노에 사로잡혔던 것뿐이었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아폴로니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추억에 허우적거리며 스스로의 추악함을 미화하는 나약한 인간, 무능하고 이기적인 아버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한층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황을 비난하면서도 그의 과오를 벗어나지 못하는 폭군. 그것이 아버님의 실체예요.”

쾅-

아폴로니아의 말이 끝나려는 순간, 뒤틀린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던 가이우스가 별안간 창살 틈으로 팔을 뻗었다.

“오만한 계집! 감히 너 따위가!”

그의 손끝이 몸에 닿기 직전, 아폴로니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이우스의 팔은 허공을 거칠게 할퀴었다.

“너 따위가 나를 가르치려 들지 마라! 파스칼의 손녀인 네가 감히!”

우리에 갇힌 늙은 맹수처럼, 그는 아폴로니아를 향해 큰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너도, 너도 똑같을 것이다! 오만하게 나를 가르치려 들지만 너라고 다를 것 같아?”

그가 거의 쉬어 버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눈은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네년의 냉혹함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너 또한 네게 위협이 되는 자들을 남겨 두지 못한다. 황위에 앉는 자들은 다 그러하다.”

“아까는 할아버지의 죄를 심판하셨다더니, 이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하시는군요.”

아폴로니아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대꾸했다. 가이우스의 손은 계속해서 허공을 휘저었다.

“저는 달라요, 아버님.”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가이우스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어떻게 다른지 볼 수 없을 거예요.”

그녀가 덧붙였다.

가이우스는 숨을 몇 차례 몰아쉬고 다시 창살에 기댔다. 여윈 몸에서는 힘이 빠진 듯했지만, 끈질긴 눈동자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아버님의 처형 날짜가 다가왔으니까요.”

아폴로니아가 싸늘하게 말했다.

“내일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아버님은 단두대에 오를 겁니다. 또 다른 반역자인 루이스 리페르와 함께요.”

가이우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그 시선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조금 전까지 아폴로니아를 죽일 듯이 울부짖던 가이우스도 순간 얼어붙어 버렸다.

“네…… 친부인 나의 사형을 명했다고?”

“살려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가이우스는 몇 차례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닥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감옥에 갇힌 사이에도, 그는 자신이 정말로 죄인처럼 끌려가 죽는 상상은 하지 못했었다.

“네가…… 아버지를 죽인 잔혹한 황제라는 악명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잔인하기로는 파스칼을 능가하는구나.”

그가 이를 으드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절반은 아버님의 핏줄이니 그럴지도 모르죠. 어머니도 닮고 조부님도 닮은 제가, 아버님을 안 닮았겠어요.”

쾅-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분노한 가이우스가 다시 한 번 창살을 내리쳤다.

“너는 피의 황제로 남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패륜아로 기억하게 될 거야! 너의 모든 다른 업적은 역사에서 잊힐 것이다!”

그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아폴로니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백성들은 무정한 황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친부를 죽였다는 낙인은 꽤나 강렬해서 황제의 다른 업적을 가리기 쉬웠다. 그렇기에 과거의 황제들은 혈육이 중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많으니까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대답이 가이우스를 더욱 자극한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입을 열어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마녀 같은 것! 너 또한 악명을 얻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형을 명하는…….”

“짐은.”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감옥 전체에 울렸다. 가이우스가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강한 힘을 가진 소리였다.

가이우스가 저주하는 것도 잊고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그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금적안이, 몸을 얼릴 것 같은 냉혹함을 띠고 가이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섬뜩했다. 그것은 조금의 물러섬도, 흔들림도 없는 지배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짐은, 아버지를 죽였다는 악명 따윈 그다지 두렵지 않아.”

그녀가 달라진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 가이우스의 딸로서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가이우스는 시선을 더욱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반역자를 처벌하지 못한 유약한 황제라는 오명을 감수하지는 않겠다.”

아폴로니아의 말이 칼날처럼 가이우스의 귀에 박혔다.

“동이 트기 전, 그대의 처형이 집행된다. 그러니.”

아폴로니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니 나와 그대는 영원히 다시 볼 일이 없을 거야.”

그녀는 가이우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굳어 버린 채 움직이지 못하는 가이우스만을 남겨 두고, 아폴로니아는 우아하게 계단을 올라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의 말과 같이, 두 사람은 영원히 다시 볼 일이 없었다.

* * *

“내일 집행이라고?”

카엘리온이 얼굴을 찡그리며 묻자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까지 절대로, 누구도 폐황제에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황명을 내리셨다더군.”

두 사람은 황궁의 정원을 걷고 있었다. 함께 산책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겨우 몸이 회복된 유리엘은 더 이상 침대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정말로 가고 싶은 것은 사실 연무장이었다. 그러나 아직 완벽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의사의 말, 그리고 황제의 비공식 약혼자가 다시 부상이라도 당하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는 시종의 애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그는 산책으로 타협하기로 했다.

“은근한 반발이 있을 텐데.”

카엘리온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역대 황제들을 떠올려 보았다. 몇 명 되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냉혹하다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자식의 손에 끌어내려진 자가 용서받지 못할 희대의 폭군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후세의 사람들은 폭군의 죽음을 환영하면서도 친부의 죽음을 명령한 황제는 냉정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귀족들에게서도, 백성들에게서도.”

“그러니 빨리 끝내시려는 걸 거야.”

유리엘이 대꾸했다.

“사람을 시켜 독약을 먹이고 암살로 꾸미는 방법도 있지 않나?”

카엘리온이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

“거절하셨어. 경비를 억지로 완화하지 않는 이상 심부름꾼은 붙잡힐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그자를 희생시켜야만 하니까. 그렇다고 경비를 완화하면 암살이 폐하의 뜻이라는 소문이 퍼질 거다.”

유리엘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또한 아폴로니아의 평판을 걱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폴로니아가 괜찮다고 못 박았기에 수긍했을 뿐.

그러나 카엘리온은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정원 한가운데에 우뚝 멈추어 섰다.

“……왜 그러지?”

“그냥, 폐하의 통치가 그렇게 시작한다는 게 아쉬워서. 그리고…….”

카엘리온은 생각에 잠긴 채 허공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쓸데없이 말이 나오는 것이 피곤해서.”

두 번째 말은 조용히 내뱉었지만 유리엘은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제국 내에서 아폴로니아의 평판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아주 가끔, 카엘리온이 황위에 오르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는 자들이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미련하다고 알려진 사이에 전쟁터를 직접 휩쓸며 찬란하게 이름을 알린 것이 카엘리온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이를 특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어떤 황제가 모든 백성과 모든 귀족의 지지를 혼자서 다 받겠는가. 그럼에도 카엘리온은 그 사실을 무척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일로 너에 대해서 쓸데없는 말이 더 나올 거라 생각하는 거야?”

유리엘이 물었다. 아폴로니아에게 냉혹하다는 꼬리표가 붙으면, 카엘리온이 그녀를 대신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한 명쯤은 더 생기지 않겠는가.

“폐하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실 거다.”

“물론, 폐하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합리적인 분이시니까. 나는 그분을 믿고, 그분은 나를 믿는다.”

카엘리온이 수긍했다. 하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폐하께서 신경 쓸 이유가 생기는 것이 싫어. 폐하를 위해서도, 그리고 가문을 위해서도.”

그가 말했다.

“아버지도, 그 선대도, 그리고 그 선대의 선대도 황족 아닌 황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불필요한 견제를 당했으니까.”

카엘리온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가이우스의 견제를 당하다가 결국 사망한 선대 대공을 떠올렸는지,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황위를 실제로 원한 사람은 없었음에도, 황족으로 인정받는 자만 가질 수 있는 대공이라는 지위가 가문을 불행하게 했지. 없느니만 못한 작위야.”

유리엘이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카엘리온을 가까이서 관찰해 온 그는 카엘리온의 습관을 잘 알았다. 그가 허공을 빤히 바라볼 때는, 혼자서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폐황제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황명이 있었다고 했지.”

카엘리온이 나직하게 말하자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기는 자는 엄히 처벌하겠다고 하셨다. 그게 누구라도.”

그의 말을 들은 카엘리온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유리엘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너 설마…….”

“그거 알아?”

카엘리온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대답했다.

“엄한 처벌 중에는 작위의 회수도 있다는 거.”

그는 거의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유리엘의 눈이 커졌으나 카엘리온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척, 천천히 몸을 돌리고는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유리엘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엘리온은 변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도 지금도 무모했다. 그를 저지할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유리엘은 곧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에게는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처형을 겨우 몇 시간 앞두었던 폐황제 가이우스 리페르는 살해당했다. 범인인 카엘리온 에핀하르트 대공은 현장을 벗어나기 전에 체포되었다.

* * *

아폴로니아는 느지막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전날 늦은 시간까지 서류를 보다가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의도된 것이었다. 그녀는 가이우스와 루이스 리페르의 처형이 진행되고 있다는 자잘한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았다. 집행인이 제대로 도착했는지, 구경꾼이 있는지 없는지, 죄수는 상태가 어떤지 등 사소한 것들은 궁금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난 후, 한 번의 보고로 충분했다.

“루이스 리페르의 사형은 집행되었어요.”

아폴로니아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테이블 앞 의자에 앉자 아드리안이 말했다. 인사도 건네지 않고 급하게 보고하는 것이, 아폴로니아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저항도 없이? 그 사람도 참 일관적이군.”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말했다. 졸음이 남아 있던 그녀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드리안의 긴장한 표정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니샤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기에 폐하께서 전하라고 하셨던 말씀을 전했더니……. 황은에 감사하며 기꺼이 제 발로 단두대로 갔대요.”

아폴로니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루이스 리페르는 페트라의 곁에 서서 적극적으로 그녀의 삶을 방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신기할 만큼 원한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폴로니아의 적이었다. 처형은 당연했지만 그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통쾌함도 없고 안타까움도 없는 마지막이었다.

“잘됐네.”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모든 것이 정리가 되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폴로니아가 다시 물으며 눈을 들었다. 아드리안이 아직 소식을 하나밖에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폐하…….”

아드리안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피하자 아폴로니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왜 그래?”

“그게…….”

“난 괜찮다고 했잖아. 끝났으면 그냥 끝났다고…….”

“폐황제의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어요.”

아드리안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아폴로니아는 찻잔을 든 손을 허공에 멈춘 채 눈을 크게 떴다.

“탈옥을 했단 말이야?”

“아뇨.”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암살되었대요. 카엘리온 에핀하르트 대공 전하께.”

달그락.

아폴로니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상황을 이해해 보려는 듯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몇 초가 지났지만 아드리안은 소식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의 말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

“집행을 한 시간 남기고요. 교도관이 미처 막지 못했대요.”

“하아…….”

아폴로니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메인 홀에 귀족들이 모여 있어요. 폐하께서…… 바로 처분을 내리셔야 할 것 같아요.”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엘리온, 이 괘씸하고 무모한 녀석.’

아폴로니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 잘 듣는 척을 하더니,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모두 인정합니다.”

카엘리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입가에는 평온한 미소가 보였다. 홀에 모여 있던 모든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폴로니아가 눈썹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사고란 말인가.

“……왜 그랬지?”

“복수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가 대답했다. 그다지 반성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감히 황궁 내에서 암기를 사용해? 폐황제의 죽음을 겨우 한 시간 앞당기기 위해?”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제 손으로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그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죄를 청했다. 그러나 그의 말투도, 목소리도, 무심해 보이는 표정까지도, 홧김에 저지른 죄를 후회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아폴로니아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황명을 거역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홀에는 정적이 흘렀다. 수십 명의 귀족들은 숨 쉬는 것도 잊고 아폴로니아의 표정을 살폈다.

아폴로니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공식적으로 내린 황명을 보란 듯이 거역하는 것은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이었다.

특히 세력을 갖춘 방계 황족이 그런 짓을 벌이는 것은 황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물론 대책 없이 암살을 저지르고 체포되는 것은 도전치고도 너무나 무식했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폐하, 대공께서는 리페르 가문과의 전투에서 가장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비록 황명을 어긴 것은 중죄이나 폐황제에게 죽임을 당한 선대 대공을 생각하여…….”

트리온 후작이 어렵게 한 마디를 뗐다. 그러나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카엘리온이 빙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폐하.”

사죄의 표시로 고개를 숙였던 카엘리온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아폴로니아도 트리온 후작에게 대답하는 대신 카엘리온을 마주 보았다. 꼭 닮은 두 쌍의 금적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카엘리온은 부드럽게, 그러나 끈질기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설득하려는 듯.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카엘리온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는 암살 소식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대공은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고 나의 권위에 도전했다.”

아폴로니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트리온 후작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으나 카엘리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오르는 듯했다. 무모한 녀석. 아폴로니아는 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완전한 복종을 얻어 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도 이런 오산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일에서, 그는 보란 듯이 아폴로니아의 허를 찔렀다. 아폴로니아가 얻었어야 했던 악명을, 그가 뛰어들어 가로챈 것이다. 아폴로니아의 이름에 한 줌의 티끌도 남지 않도록.

“절대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 할 것인바.”

아폴로니아는 그가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아폴로니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카엘리온의 표정을 살폈다. 한 마디 한 마디 귀를 기울이던 그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서 대공의 작위를 박탈한다. 에핀하르트의 성은 그대로 유지하되,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귀족들이 술렁이고, 카엘리온의 미소가 확연히 짙어졌다. 아폴로니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카엘리온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가 몇 년 사이에 겪었던 변화며 이루어 낸 성장을 생각했다.

처음에 그는 견제할 대상이었다. 그다음에는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그녀가 살려 내고 키웠던 정치적 파트너였고, 어느 순간부터는 진심으로 아끼는 남동생이었다.

그는 아폴로니아를 도우며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겪었지만, 또 그녀 덕분에 몇 번이나 살아났다. 두 사람은 생존을 위해 서로가 필요했고, 그녀가 카엘리온에게 빚진 것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지금 바뀌었다.

‘너는 기어이 나를 미안하게 만드는구나.’

아폴로니아가 쓰게 웃었다. 그는 아폴로니아에게 경쟁자 없는 강한 황권을 쥐여 주고, 악명은 자신이 가져갔다. 아폴로니아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도.

처음부터 그녀를 ‘누이’라 부르며 동정심을 자극했던 소년은, 결국 선대에서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그는 대공 가문이 대대로 받아 왔던 견제와 핍박을 완전히 끊어 내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황제의 영원한 호의를 취했다.

괘씸하지만 현명한 선택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카엘리온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거의 신난 듯한 말투였다.

“저택도, 재산도 모두 황실로 인계하겠습니다. 또한 대공령의 기사들은…….”

“무책임한 소리 말아.”

아폴로니아가 그의 말을 딱 잘랐다.

“예?”

카엘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산통을 왜 깨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영지민과 기사들은 네가 챙기도록 해. 황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이미 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냐는 뜻이었다.

“트리온 후작의 말대로 너는 즉위식에서, 그리고 리페르 가문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난 아직까지 그에 대한 치하를 하지 않았지.”

이제 미소를 띤 것은 아폴로니아였다. 카엘리온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카엘리온 에핀하르트, 너에게 공작위를 내린다. 과거 에핀하르트 대공령이었던 곳은 이제 에핀하르트 공작령으로 부를 거야.”

트리온 후작, 그리고 그 주변의 몇몇 귀족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카엘리온은 여전히 황당한 표정이었다.

“공…… 공작이라니, 폐하.”

“무엇이 문제지?”

“리페르 가문이 멸문된 이후로, 제국에는 공작가가 없지 않습니까! 제게 유일한 공작위를 주신다는 것은 지나치게…… 그러니까…….”

그는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말을 더듬었으나 의미는 명확했다.

황족의 자격을 박탈한다 한들, 다른 어떤 귀족에게도 없는 작위를 내리는 것은 상징성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황족에게 해 주는 특별 대접과 다를 게 없었다.

“유일한 공작위라니. 네 착각이다, 카엘.”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일부러 그의 애칭을 부르고 있었다. 황족은 아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황제의 남동생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귀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카엘리온이 눈을 크게 떴다.

“착각이라니요.”

“아직 회수된 리페르 영지를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하지 않았었지.”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카엘리온과 아폴로니아 사이를 오가던 귀족들의 시선이 천천히 한 사람을 향했다. 아폴로니아 가장 가까이에 선 유리엘 비체였다.

그와 아폴로니아의 약혼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카엘리온과 함께 황제의 즉위에 가장 큰 공로가 있는 황제의 연인, 작위와 영지가 따라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 사실을 파악한 몇몇 귀족들이 유리엘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공로를 감안해도 그에게 주어질 포상이 너무나 크다는 생각이었다. 여러 대를 걸쳐서 공을 세워도 얻을 수 없는 작위를, 출신이 불분명한 청년에게 수여하는 것은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폐하, 외람되오나 비체 백작은…….”

어느 젊은 귀족이 중얼거리려던 순간이었다.

“녹스 바이안, 앞으로 나오게.”

아폴로니아는 그녀가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이름을 불렀다. 귀족들이 다시 한 번 술렁이고, 회색 머리에 잿빛 눈을 한 청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과거 리페르 영지였던 땅을 바이안 공작에게 내린다.”

아폴로니아의 말이 떨어지자 녹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발음은 분명히 또렷했지만, 그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폐하, 방금 뭐라고…….”

“선대에 주었어야 하는 작위야.”

그녀가 가볍게 말했다. 외상 술값이라도 갚는 듯한 분위기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멍하니 서 있던 귀족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대를 걸쳐 황실에 충성했던 바이안 가문이었다. 작은 영지를 가진 젊은 백작에게 공작위를 안겨 주는 것은 파격적인 대우였으나 선대 백작이 아폴로니아의 호위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폐하…….”

녹스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그 얼굴 위로 시드가 겹쳐 보였다.

“그럼, 공작이 한 명 더 있으니 에핀하르트 공작의 부담도 덜어지겠지?”

아폴로니아가 웃으며 카엘리온에게 물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폴로니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어떻게 키워 낸 인재인데.

황명을 거부하고 어떻고 간에, 그녀는 카엘리온에게 한량의 삶을 선물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앞으로도 영지를 돌보고 기사들을 훈련시켜서, 제국을 위해, 그녀를 위해 일해야만 했다.

“두 공작은 나를 도와 제국을 보살펴 주기 바라네.”

아폴로니아는 시종에게 명령해 성지를 전달하고 짧게 상황을 마무리했다. 아직 정리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 모인 김에 처리하도록 하지.”

아폴로니아가 그 자리의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지막 남은 리페르, 니샤를 데려와.”

조금 전까지 장난스러웠던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폐하를 뵙습니다.”

팔이 뒤로 묶인 니샤가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친 곳은 없지만 초췌한 얼굴이었다. 그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떨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아폴로니아의 입만 바라보았다. 곧 떨어질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아직 열일곱 살의 소년이었지만, 그에 대한 처분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니샤.”

아폴로니아가 그를 불렀다. 이상하게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너에게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니샤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너에게서 리페르의 성을 빼앗겠다.”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홀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성을 빼앗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형벌 중에 그런 것도 있었나?”

“이름을 바꾸는 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지…….”

아폴로니아는 잠시 그들이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의 시선은 니샤의 어깨에 고정되어 있었다.

“리페르 가문은 멸문되었으니, 그 후계자도 남아있을 수 없다. 너는 앞으로 다른 이름으로 살아야 할 거야.”

“예?”

니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른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살아야 한다니? 그가 잘못 들은 것인가?

“폐하…… 설마 그를 살려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누군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폐하, 니샤 리페르는 반역자의 아들입니다. 그를 살린다면 추후 분명히 후환이…….”

또 다른 이가 혼란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부의 사형도 명했던 아폴로니아가 아닌가. 니샤의 성품이 그 형이나 어머니와 다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그 또한 결국은 리페르 가문의 사람이었다. 상황이 허락했다면 그도 가문을 위해 싸우지 않았겠는가.

“짐은 황제의 이름으로 했던 약속을 어길 수 없네.”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홀 전체에 울렸다. 귀족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폐하, 그게 대체 무슨…….”

“전투 때 내가 페트라와 무슨 거래를 했는지 그대들도 알고 있겠지.”

아폴로니아가 말하자 귀족들이 다시 한 번 웅성거렸다.

“페트라가 아드리안을 풀어 줄 때, 나는 니샤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또한, 전투가 시작될 때 나는 저항하는 자들을 베고 나머지는 살리라고 명령했었지.”

귀족들의 눈이 커졌다. 니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전투가 끝난 이후에는 의미 없다고 여겨졌던 말이었다.

“나는 니샤를 살리겠다고 약속했고, 니샤는 나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를 처형하는 것은 황제로서 한 약속에 반하는 일이야. 그대들은 나에게 명예를 버리라고 말하지 말게.”

아폴로니아가 딱 잘라 말했다. 모두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반박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폴로니아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니샤, 너는 죄인이 아니다.”

아폴로니아가 니샤를 끌고 나온 병사에게 눈짓했다. 스르륵- 병사가 손을 뻗어 니샤를 묶었던 줄을 풀어 주었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폐하, 정말로…….”

“그래. 가도 좋아. 물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거야. 영지도 없이, 지위도 없이.”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무심해 보였지만 약간의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힘들겠지만, 그게 네 운명이다.”

그녀가 덧붙였다. 니샤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모두 돌아가도 좋아.”

잠시 그를 바라보던 아폴로니아가 짧게 지시했다. 그리고 인사를 기다리지 않은 채 홀을 빠져나갔다.

거의 끝났다. 과정이야 어떻든, 가이우스는 죽었다. 리페르의 성은 제국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 아폴로니아에게는 정리할 것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정리는 조금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야 했다.

* * *

“도착입니다.”

마차가 멈추고,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과 입이 가려진 채 마차에 갇혀 있던 패리스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밖으로 끌어 내려졌다.

“꿇어라.”

그를 끌어 내린 사람은 거칠게 패리스를 주저앉혔다. 무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이 몸을 잠식했다.

“읍…… 으읍.”

열심히 입을 움직여 보았지만 신음 소리밖에 새어 나오지 않았다. 함께 마차에 탔던 누군가가 그를 뒤따라 내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한 시간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마부로 추정되는 자가 뭐라고 하는가 싶더니, 마차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패리스는 온몸을 긴장시킨 채 덜덜 떨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악몽 같은 즉위식이 끝난 후로, 패리스는 줄곧 독방에 갇힌 채 해를 보지 못했다. 간혹, 교도관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통해 몇 가지 소식을 듣기는 했다.

그 소식 중 희망적인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패리스가 황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국의 모든 이가 알게 되었다는 것, 리페르 가문이 멸문되고 페트라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인 가이우스가 카엘리온의 손에 암살당했다는 것까지.

모든 소식들이 패리스를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가이우스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후로 그는 식음을 전폐한 채 감옥의 작은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다. 먹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음은 패리스 차례일 텐데.

그러나 사형 집행일만 기다리고 있던 그는, 그날 새벽 누군가의 손에 의해 눈이 가려진 채 이곳으로 끌려온 것이다.

‘누군가의 보복인가.’

패리스는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그에게 원한을 품은 어느 시종이, 어느 병사가 그를 빼돌려서 고통스럽게 죽이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엎드려 빌어야 할까, 아니면 소리를 질러야 할까. 그가 고민하던 중이었다.

“이제 이야기 좀 할까?”

패리스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만 그를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말투는 귀에 무척 설었다.

휙-

경고도 없이, 패리스의 눈과 입을 막았던 천이 벗겨졌다.

“아윽…….”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에, 밝은 햇빛은 지나친 충격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정신을 빨리 차리도록 해.”

여인이 다시 말했다. 빛에 익숙해지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그녀의 발이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들자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니아.”

패리스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눈앞의 여인을 불렀다. 그녀는 패리스의 여동생이었다. 평생을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손꼽아 기다렸던 즉위식 날 그에게 악몽을 선사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유리엘 비체가 서 있었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아폴로니아와 함께 마차에 탔던 모양이었다. 패리스는 눈을 몇 번 더 깜빡였다. 조금 전까지는 긴장 때문에 느끼지도 못했던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들은 넓은 들판 같은 곳에 있었다. 아폴로니아와 유리엘, 그리고 패리스 자신을 제외하면 주변에 어떤 건물도, 사람이나 동물도 보이지 않는 다소 황량한 곳이었다.

패리스는 두려움도 잊고 혼란스러움에 빠졌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잠시 패리스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표정은 잘 읽히지 않았다.

“호칭이 틀렸어, 패리스.”

그녀가 말했다. 패리스는 잠시 얼어붙은 상태로 아폴로니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 즉위식에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하고 싶어?”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다시 말했다.

“내…… 즉위식?”

순간 멍했던 패리스의 몸속에서 울컥 하고 화가 치밀었다. 아폴로니아는 악몽 같은 그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패리스’의 즉위식이어야 했던 그날, 그가 평생 누렸던 모든 것을 아폴로니아에게 빼앗긴 날.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즉위식. 내가 황위에 오른 날.”

패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폴로니아는 패리스에게 함부로 애칭을 부르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황제이니까.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폴로니아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리페르 일가를 쓰러뜨리고 그 가주를 처형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물론이고, 즉위식 날 불 속에서 걸어 나왔던 아폴로니아의 모습 또한 패리스의 머리에 또렷하게 박혀 있었으니까.

다만, 오랜 시간 그녀를 내려다보았던 그의 몸은 아폴로니아를 황제로 인정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어떤 무례한 언사를 들어도 그저 참던 아폴로니아의 모습이 마음속 한구석을 떠나지 않았다.

“말을 안 듣는군.”

아폴로니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패리스의 눈앞에 별이 보였다.

빠악-

유리엘이 손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패리스의 뒤통수에 묵직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윽!”

퍽!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패리스는 다시 한 번 고통스러운 일격을 맞았다. 이번에는 얼굴이었다.

퍼억- 퍽!

매질이 이어지고,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충격이 느껴졌다. 황자로서 귀하게 자란 그는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온몸을 뒤틀리게 하는 아픔이었다.

“으허어억!”

그는 크게 휘청이며 쓰러졌다. 눈물이 고여 흐려진 시야로, 유리엘이 검을 뽑는 모습이 보였다. 패리스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그만!”

“그만?”

아폴로니아가 되묻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엘은 손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폐, 폐하!”

패리스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유리엘은 그제야 반쯤 뽑힌 검을 다시 집어넣고 한 걸음 물러났다.

“바쁘니까 쓸데없는 걸로 시간 낭비하게 만들지 말아 줘. 손발은 자유로우니 알아서 일어나 앉아.”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조금 전과 다를 것 없는 담담한 말투였으나, 패리스를 덜덜 떨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얌전히 쓰러졌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공손한 자세로 꿇어앉았다.

“……나를, 아니 저를, 어떻게 하시려고…….”

그가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여야 마땅하겠지.”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패리스의 연갈색 눈동자가 떨렸다.

“억울해? 너는 알지도 못했던 출생 때문에 반역자가 된 것이?”

아폴로니아가 그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는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지만 아폴로니아는 그의 마음을 읽은 듯했다.

“패리스, 너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죄를 저질렀어.”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잘못도 없이 네게 매질당해 불구가 된 시종, 시녀가 몇 명인지는 알아?”

패리스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를 매질한 기억은 있었으나 그게 몇 명인지 세 볼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거슬리는 사람은 때리고, 마음에 드는 물건은 강탈하고, 명예를 높여 보겠다며 쉬운 전쟁을 질질 끌어 사상자를 늘리고, 나중에는 제후국의 왕녀를 상품으로 걸고 검술 시합까지 벌였지. 카엘과 유리엘이 전쟁터에서 네 뒷수습을 하고 다니지 않았다면 제국의 외교는 전부 무너졌을 거야.”

패리스는 멍하게 아폴로니아의 입에서 나오는 그의 죄목을 듣고 있었다. 모두 그가 한 일이 맞았다. 그러나 패리스는 그것들이 죄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고귀한 황자이니 아랫것들을 다스리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모든 물건은 그의 소유나 다름없었고,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의 뜻을 이루어 줄 의무가 있다는 것이 과거 그의 생각이었다.

신의 후손에게, 무슨 심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제국을 위기에 빠뜨린 것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해?”

아폴로니아의 말이 패리스의 귀에 박혔다. 그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줄곧 피하고 싶었던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 제국은 패리스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모든 행동의 근거가 되었던 고귀한 핏줄이 사실은 패리스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패리스의 숨이 가빠졌다. 감옥 안에서 억지로 잊으려 했던 기억들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가 괴롭혔던 사람들, 그 때문에 죽어 갔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뇌리를 스쳤다. 그는 긍정적인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으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황자라는 신분을 지워 버리자, 그에게 남은 것은 과거의 악행뿐이었다.

“게다가 너는 어리석었지.”

아폴로니아는 경련하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어쩌면 그게 네 가장 큰 잘못이었을지도 몰라.”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패리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네 것도 아닌 제국에 매달리느라 네 것 중에 제일 귀한 걸 버렸으니까.”

아폴로니아가 씁쓸하게 말했다. 패리스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떨렸다.

귀한 것을 버렸다니? 제 손으로 버린 귀한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재물도,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황자라는 이름과 함께 그에게 쥐여졌다가 다시 사라지지 않았나. 그가 잃은 것 중에 자신의 의지로 포기한 것은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채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참을 잊고 있었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아모레타?”

오직 애정으로 가득 찬, 자수정을 닮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던 여인의 얼굴이 패리스의 머리를 스쳤다. 아폴로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패리스의 눈이 커졌다.

“그녀를 어떻게…….”

“패리스, 난 말이야. 어린 시절 네가 어떤 귀한 물건을 차지해도 부러운 적이 없었어. 그런 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거든.”

아폴로니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패리스에게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딱 하나, 아모레타를 가진 것은 부러웠어.”

그녀가 말했다. 패리스는 정말로, 화가 날 정도로 한심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괴로워하던 그는, 자신이 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지금에서야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천재였어. 그리고 네 지위나 출신과 무관하게 온전히 네 것이었지.”

패리스는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그의 호흡이 조금 더 거칠어졌다.

“그런 사람을 너 같은 멍청이가 데리고 있었다니, 비극이 따로 없지.”

아폴로니아가 내뱉었다.

그녀는 오래전, 리샨에서 처음 보았던 아모레타를 떠올렸다. 그녀를, 그녀가 혼자서 만든 물건들을 처음 보았던 때의 충격은 유리엘을 보았던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살려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재능을 세상에서 없애고 싶지 않았다.

찬란하게 꽃필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패리스의 손에 잡혀 부서지지 않았다면.

“아…… 아모레타…….”

패리스가 멍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폴로니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제국을 통틀어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 건 그 사람뿐이었을 거야. 그 사람은 네가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알고 나서도 너를…….”

아폴로니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모레타의 모습을 떠올렸다. 늦은 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났던 그녀는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아폴로니아의 즉위를 돕겠다면서, 그녀는 단 한 가지 소원을 말했다.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네 머리는 진작 몸에서 분리되었을 거야. 어쩌면 꽤 고통스럽게.”

아폴로니아가 작게 한숨을 쉬며 애매하게 설명했다. 아모레타가 정확하게 뭐라고 했었는지 패리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리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폴로니아의 말이 맞았다. 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었던 사람은 아모레타가 유일했다.

“황자님의 연갈색 눈이 좋아요.”

그녀가 했던 말이 귓가에 울렸다. 일평생, 가이우스에게서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아모레타는 패리스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었다. 그리고 패리스는 그녀를 버렸다. 더 강한 세력을 위한 장기말로 사용했다.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는…….”

패리스가 말했다. 아폴로니아의 말대로라면 아모레타는 패리스가 그녀를 어디로 떠나보내는지 알고 있었다.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을 뿐.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도 아폴로니아에게 패리스를 위한 청을 한 모양이었다. 그를 너무 고통스럽게 죽이지 말아 달라는.

“내가…… 내 손으로 그녀를…….”

땅을 짚은 그의 손등에 투명한 액체가 몇 방울 떨어졌다. 패리스의 등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곁에서 피폐해져 가던 아모레타를 그대로 두었다. 그러고는 잔인하게 그녀를 떠나보냈다.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듣고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제국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아모레타는 소중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제, 패리스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패리스가 간신히 물었다.

“……아모레타는 없어.”

아폴로니아가 대답했다. 패리스는 자신의 몸에 남아 있던 힘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죽었다는 말인가.

패리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됩니까?”

그가 물었다. 목숨을 구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오히려 죽기를 원했다.

“……마셔.”

아폴로니아는 대답 대신 작은 병을 하나 내밀었다. 손가락 길이만 한 작고 길쭉한 유리병에는 아무 색깔도 없이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패리스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병을 받아 들었다.

“이게…… 뭡니까?”

그가 물었다.

“뭐겠어.”

아폴로니아는 무심하게 대답하더니 패리스를 재촉하듯 바라보았다. 패리스는 다시 유리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천천히 마개를 열자 묘한 향이 흘러나왔다.

‘독이로구나.’

그는 깨달았다. 아폴로니아는 패리스의 목을 베는 대신 그에게 독을 준 것이다. 마지막 동정심이든, 아니면 아모레타의 부탁 때문이든.

“……그럼.”

패리스는 심호흡을 하고 병 속의 액체를 입에 털어 넣었다. 쓰디 쓴 액체가 그의 목을 타고 내려갔다.

“하아…….”

패리스의 입에서 숨이 빠져나갔고, 눈앞이 흐릿해져 갔다. 꿇어앉은 그의 상체가 휘청이더니 들판 위로 완전히 쓰러졌다. 목이 타들어 갈 듯이 아팠다. 패리스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고통을 참았다.

“그 약은.”

아폴로니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가 웅웅거리는 통에 그가 들은 말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었다.

“아모레타가 남긴 또 하나의 역작이야.”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시야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목을 타고 전해지는 고통은 여전했다.

죽는 것은 이런 기분인가.

입을 벌렸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는 아모레타의 모습을 떠올렸다. 실크 같은 검은 머리, 나른한 분위기,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패리스만을 향하는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

“아……모레……타.”

그녀의 이름이, 패리스의 숨과 함께 그의 입을 빠져나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 *

“언덕 위의 저 집이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검지를 쭉 뻗으며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튼튼하게 지어진 통나무집이 보였다.

“방금 나도 갔다 오는 길이지. 이걸 받아 오느라고.”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 웃으며 작은 천 인형을 흔들어 보였다.

“장난감이요?”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래. 우리 딸이 저 집 주인이 만든 장난감을 좋아하거든. 이 마을은 모두가 그렇다오. 난 아가씨도 알고 가는 줄 알았는데.”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 아드리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드리안은 빙긋 웃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그 사람이 재주가 좋죠.”

“그렇지?”

남자는 싱글거리며 다시 한 번 손에 들린 인형을 바라보았다. 평범, 아니, 못생긴 축에 속하는 그 물건은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럼 날도 추운데 얼른 가 보시오. 난 딸한테 가 봐야 하거든.”

남자와 아드리안은 서로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참.”

언덕을 향해 두어 걸음 걷던 아드리안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응?”

“혹시 그 집 주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오랜만이라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아드리안이 물었다. 그녀는 에반젤린이 전해 준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얼굴이?”

별 특별할 것 없는 질문이었으나,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어…… 별로 떠오르는 게 없네.”

“없어요?”

“응. 그냥 평범한 여자야. 다리를 좀 저는 걸 빼면 특징이랄 것이 딱히 없고…… 아!”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쳤다. 아드리안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미소가 아주 환한 사람이야. 웃으면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거든.”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서 가던 길을 갔다. 아드리안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남자의 대답을 곱씹었다.

“……정말인가 보네.”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언덕을 향해 다시 걸음을 뗐다.

언덕의 경사는 완만하고 길도 아름다웠다. 마을 전체가 풍요롭고 즐거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그 언덕은 유난히 예뻤다.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든 나뭇잎도, 지금은 져 버렸지만 여름에는 분명히 아름다웠을 꽃나무도 그럴싸하게 조화를 이루며 자리 잡고 있었다.

똑똑-

이윽고 통나무집 앞에 다다른 아드리안이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삐걱-

“누구…….”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 님?”

“오랜만이에요.”

아드리안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문 뒤에서 나타난 여인은 그녀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반짝이는 검은 생머리와 자수정 같은 눈동자, 홀릴 듯한 아름다움.

아드리안은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마치 패리스의 선물처럼 포트러스 후작에게 보내지던 그녀를 빼돌린 후, 에반젤린과 아드리안을 번갈아 보내 그녀의 안전을 확인했었다.

“아모…… 아니, 지금은 모린이라고 했죠.”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의 이름은 안 쓴 지 오래예요. 아드리안 님은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지만요.”

모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아드리안의 팔을 잡아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적응은 끝난 모양이네요? 장난감을 판다면서요?”

아드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통나무집 안은 무척 따뜻하고 아늑했다. 커다란 탁자와 폭신한 소파를 비롯한 가구는 집과 어울렸다. 다양한 무늬의 천, 그리고 천으로 만든 인형이 몇 개 널브러진 걸 제외하면 깔끔한 모습이었다.

“판다기보다…… 그냥 줘요. 어린아이들에게만 영향을 주는 주술을 걸어 둬서 인기가 많답니다.”

“아이들에게만?”

“예를 들어, 어떤 인형은 아이들의 귀에만 들리는 자장가를 부르죠. 아이들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어른은 없으니까 주술사라는 의심을 받을 일이 없어요.”

모린은 널브러진 인형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줘요?”

“저는 그냥 주는데, 답례로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이 오고는 하죠.”

모린은 이번에는 탁자에 놓인 바구니에서 수레바퀴만 한 케이크를 꺼내며 말했다. 조금 전 만났던 덩치 큰 남자가 두고 간 모양이었다. 투박한 모양이지만 달콤한 초콜릿 향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케이크를 잘라 접시 위에 놓고, 그사이 자리에 앉은 아드리안에게 밀어 주었다.

“방금 다녀간 남자는 모린의 얼굴을 모르겠다더군요.”

아드리안이 말했다. 전해 듣기는 했지만 신기해서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뿐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요. 대충 머리가 갈색인 것 같더라, 웃는 모습이 예쁘다는 것 외에는 외모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가 없었죠.”

“그런가요?”

모린이 웃으며 되물었다. 아드리안은 눈을 몇 번 깜빡여 보였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벨라였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

“주술 때문이에요. 여러 번 연구해서 성공했죠.”

모린은 케이크를 또 한 조각 잘라 접시에 담더니 아드리안의 옆자리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외모가 눈에 들어오지 않게 하는 방법이랄까요. 저를 보면 각자가 생각하는 가장 평범한 얼굴이 떠오르는 거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설명했다.

“아드리안 님처럼, 원래의 제 모습을 아는 사람에게는 듣지 않는 주술이에요. 성공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아드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젤린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아모레타, 아니 모린의 주술은 발전하고 있었다. 자신의 외모를 저주하던 그녀는 결국 그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 괴로운 과거 탓에 사라져 버리고 싶다더니, 정말로 그 방법을 찾은 것이다.

벨라이자 주술사인 아모레타는 없었다. 평범한 장난감을 만들어 나누어 주는 평범한 모린이 있을 뿐.

아드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술의 세계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평생을 아름다운 외모로 고생했던 그녀의 괴로움은 알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로부터 놓여났다는 사실을 축하할 수는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어쩌다가 직접 오셨어요? 에반젤린 님은?”

모린이 물었다. 그녀가 마을에 정착한 후로, 아드리안이 모린을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폐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어서요.”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모린이 패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직 알기 어려웠다.

“폐하께서 직접 전할 수 없으니 저를 보내셨어요.”

그녀는 한 입 밖에 먹지 못한 케이크를 밀어 두고 말했다. 모린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드리안은 아폴로니아의 분신 같은 사람이었다. 황궁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 아드리안이 직접 이곳까지 왔다면 그녀가 전해 줄 소식은 무척 중요할 것이다.

“……패리스의 일이 끝났어요.”

아드리안이 말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모린은 포크를 든 손을 허공에 멈추고는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얘기한 대로예요.”

아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소원대로 그를 살려 주셨어요. 기억만 지우고 패리스가 처음부터 있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냈죠.”

모린은 몇 초 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약속을 지켜 주어서 감사하다고 폐하께 전해 주세요.”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신을 끔찍하게 학대했던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마음을, 그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설마 패리스를 지금도…….”

“그 사람은 정말 깔끔하게 잊었어요.”

모린은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아드리안 님이 무슨 소식을 전하러 오신 건지 짐작도 못했다니까요. 제가 부탁을 해 놓고 잊어버린 거예요.”

“네?”

“제가 패리스를 살려 달라고 한 건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에요. 그에 대한 환상은 그가 저를 포트러스 후작에게 보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깨졌는걸요.”

모린은 아무렇지 않게 케이크 한 조각을 먹었다.

“그의 죽음에 제가 기여하게 되면 괜히 더 생각날 것 같아서 그랬어요.”

그녀가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깨끗하게 잊어버리기 위해서 살려 주었던 거예요. 어쨌든 저도 목숨을 빚진 적이 한 번 있으니까요.”

한때 우울함으로 젖어 있던 모린의 눈은 명랑하게 빛났다. 그 모습을 보는 아드리안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 남자의 말이 사실이었다. 모린은 정말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폐하께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기억을 지우는 약을 드렸군요.”

“맞아요. 자기가 황태자였던 기억이 없으면 반발의 여지도 없으니까요. 제가 쓰려고 개발했던 약인데 아주 유용했죠.”

아드리안의 분석에 모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한 끝이로군요.”

아드리안은 내심 감탄하며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아모레타는 과거도, 출신도 완전하게 끊어 내는 데 성공했다. 마음속에 어떤 찝찝함도 남기지 않은 채로.

지나치게 뛰어났던 그녀의 외모도, 재주도 누군가의 손에서 이용될 일은 다신 없을 것이다.

“폐하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

모린이 물었다. 초콜릿 빵 속 호두를 씹던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결혼식 준비로 바쁘……셔야 하지만 그걸 다 저한테 던지고 일만 하신답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녀는 머리가 아팠다. 즉위식을 준비할 때는 그렇게 치밀하던 아폴로니아는 정작 결혼식 준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유리엘이 서운하지만 않게 해 줘.”

너무 오랫동안 결혼식을 정략적인 절차로 인식하고 살아서인지, 아폴로니아는 식에 대한 로망이 조금도 없었다. 유리엘은 조금 더 관심을 보였으나 그는 황제의 부군이 알아야 할 예법을 배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수십 가지도 넘는 종류의 인사를 배우며 밤을 새우는 것은 일상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드리안이 다시 모린을 보며 말했다.

“바쁘신 와중에도 가끔 모린의 이야기를 하세요.”

“저를 찾으신다고요?”

모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행복한 건 다행이지만 가까이 두지 못해서 아쉬우시다고요.”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제든 이곳 생활이 지루해지면 황궁으로 오라고 하셔요. 모린이 필요한 일이 너무 많다고.”

“그래요?”

모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내심 반가운 표정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가끔씩 조언만 해 줘도 좋지만 말이에요. 지난번에 에반젤린 님을 통해 보내온 갑옷은 이미 대량으로 제작하고 있어요. 구름처럼 가볍지만 강철처럼 단단하다고,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하셔요.”

아드리안이 말했다. 모린은 간혹 에반젤린을 통해 아폴로니아를 위한 선물을 보냈고, 그것들은 모두 제국의 운영에 소중하게 쓰이고 있었다. 간혹 주술에 관한 조언이 적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벨라들 중에서도 극소수뿐이었지만.

“결혼 선물도 잊지 않고 보내도록 할게요.”

모린이 말했다. 이미 생각해 둔 선물이 있는 듯, 그녀는 꽤나 즐거워 보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또 올게요.”

아드리안이 인사를 남기고 문을 나서자 모린은 언제든 환영이라며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힌 통나무집 앞에 서서 아드리안은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유명하지도 않고 특별히 부유하지도 않은, 이름을 들어도 잊어버릴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모린이 원했던, 바로 그 평화로움이었다.

* * *

“할머니, 어제 또 꿈을 꾸었어요.”

연갈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노파에게 말했다.

“그 슬픈 눈을 한 절세 미녀에 대한 꿈 말이냐?”

노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주름진 눈에는 손자에 대한 애정이 넘쳤다.

“저녁이나 다 먹고 얘기하지 그러니.”

핀잔 어린 그녀의 말에, 청년은 접시에 놓인 빵 한 조각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어쩌면 예전에 만난 사람 아니었을까요?”

청년이 빵을 씹으며 물었다.

“예전에?”

“네. 기억을 잃기 전에요.”

청년이 대답했다. 노파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그런 사람을 알았을 리가 없다는데도.”

“알아요, 할머니하고만 계속 지냈다는 거요. 동네에 그런 미인은 없었다고도 하셨고, 아리에타 가문의 사람은 다 평범하게 살다 갈 팔자라고도 하셨고…….”

지나치게 단호한 노파의 말에 시무룩해진 청년이 중얼거렸다.

“그래, 녀석. 네가 무슨 책이라도 읽었던 모양이지. 다 먹었으면 가서 잠이나 자거라. 편히 자야 이상한 꿈을 꾸지 않는다.”

노파는 다시 한 번 핀잔을 주고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투박한 말투였지만 손자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혼자 남은 청년은 빵을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모르는 사람인가?’

청년은 그런 사람을 만난 기억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한 달 전까지의 일밖에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그가 가진 처음 기억은 이 집의 침대에서 눈을 뜬 것이었다. 생소한, 그러나 묘하게 자신과 닮은 눈을 가진 할머니는 깨어난 그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청년은 사고를 당해 머리를 다쳤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머리에 별 상처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했지만, 어쨌든 그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말이니 굳이 의심하지 않았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별 탈 없이 지냈다. 정확히 말하면 탈이 날 틈이 없었다. 그는 밭일이며 짐승을 돌보는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할머니는 그가 원래 하던 일이라고 했지만, 청년은 이상하게 그것들이 손에 익지 않았다. 그래서 낮에는 누군가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다만 밤이 되면 그 여인은 어김없이 꿈속으로 찾아왔다. 꿈속의 자신은 그녀를 윽박질렀고, 그녀는 사랑과 원망이 섞인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올 때쯤, 청년은 잠에서 깼다.

‘이름이라도 알고 싶은데…….’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는 편히 자라고 얘기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틀린 것 같았다. 아예 안 나타나면 잊어버릴 텐데, 만날 수 있다면 궁금증이라도 해소가 될 텐데. 그는 천천히 테이블을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졌다.

눈을 감자 여인의 얼굴은 다시 떠올랐다. 실존하는 사람인지 자신의 환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녀를 잊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제대로 기억하고 싶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청년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그가 살아 있는 한, 보랏빛 눈을 가진 여인을 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 *

“날이 추워졌습니다.”

유리엘은 아폴로니아에게 옷을 껴입히며 말했다.

“난 추위 안 타. 이것도 체질이라니까?”

아폴로니아가 항의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어쨌든 날이 추우면 옷을 두껍게 입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보는 사람이 더 춥다며 아드리안까지 동조했기 때문에 아폴로니아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털옷을 껴입고 말에 올랐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쉽지 않았을 일이었다. 유리엘이 외워야 할 예법은 두꺼운 책으로 몇 권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몇 달 동안 해도 끝내기 어려울 분량이었다.

그러나 유리엘은 해냈다. 그는 며칠 밤낮으로 미친 사람처럼 매달리더니 스승들의 시험을 다 통과하고는 아폴로니아에게 함께 외출할 것을 청했다.

“그럼 붉은 호수의 숲으로 가자.”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곳은 유리엘과의 추억이 있는 장소였다. 과거에 그는 예고도 없이 아폴로니아를 그 숲으로 데려가, 흐드러지게 핀 수국과 백합, 그리고 노을이 반사되어 붉게 물든 아름다운 호수를 보여 주었다.

바로 그곳에서, 아폴로니아는 아모레타가 만든 작은 향주머니를 유리엘에게 선물했었다. 화마로부터 유리엘의 목숨을 구했을지도 모르는 그 물건을. 그녀는 달라진 계절이 그 아름다운 호수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보고 싶었다.

마침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흰 눈을 맞으며 말을 탔다.

“니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리엘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생각보다 용감했다고 해야 하나.”

아폴로니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얼마 전, 아폴로니아는 모든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니샤가 죄인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반역자의 가문은 예외 없이 처형이라는 선례를 그녀가 깨뜨린 것이다. 작은 반발이 있었으나 그들도 곧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이름으로 한 약속을 깨뜨리라고 설득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니샤는 자유였다.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니샤는 평민이기도 했다. 가족도 영지도 지위도 없는 평민. 평생을 도련님으로 살았던 그에게는 꽤나 가혹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아폴로니아는 몰래 니샤를 불러 그에게 약간의 재물을 주려 했었다. 과거의 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어느 정도 기반은 마련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다. 니샤에 대해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되도록 그가 편하기를 바랐다.

“아무것도 안 받겠대.”

그녀가 말했다. 유리엘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

“돈도, 다른 것도.”

니샤는 아폴로니아의 도움을 정중히 거절했다. 아폴로니아는 재물을 거두고 약병을 하나 건네며 그거라도 받으라고 말했었다.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약이다.”

그녀가 설명했다. 반역죄로 처형당한 가족들의 기억에 짓눌려 살기는 어려울 거라고 그를 설득하면서. 그러나 니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괴로울 텐데?”

“가문의 이름은 버려도, 혈육의 죄는 지고 살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정중하게 작별을 고했다. 그것이 그녀가 본 니샤의 마지막이었다.

“뭐, 그 애가 선택한 거니까, 내가 뭐라고 하겠어.”

아폴로니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유리엘은 피식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폴로니아는 아마 니샤를 뒤에서 돌봐줄 생각인 듯했다. 그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아폴로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새하얀 옷을 입고 쏟아지는 눈 속에 있는 그녀는 평소보다 한결 청초해 보였다.

“다 왔습니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처음 왔던 그 때처럼 커다란 나무 사이의 길을 뚫고 지나갔다. 흰 눈에 덮인 그 숲은 과거보다 고요한 느낌이었으나 여전히 신비로웠다.

“이쪽입니다.”

앞서 걷던 유리엘이 손을 내밀었다. 눈 속에서 빛나는 은발과 반짝이는 눈동자는 마치 얼음으로 된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와.”

숲을 빠져나와 호숫가에 다다른 아폴로니아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수국도 백합도 보이지 않았다. 한때 눈을 멀게 할 것 같았던 꽃들의 화려함은 눈에 덮인 채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조용하게 눈이 쌓이며 전보다 우아하고 차가운, 한편으로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일렁였다. 한때는 노을이 비쳐 붉게 반짝였던 호수는 이제 푸르스름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시간조차 얼어붙은 듯한 고요함이 두 사람을 감쌌다.

“조심하십시오.”

아폴로니아가 홀린 듯 한 걸음 내딛자, 유리엘이 뒤에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응?”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폴로니아가 몸을 돌리자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아폴로니아의 손을 다시 당겨 그녀를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유리엘.”

아폴로니아는 그대로 그에게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 바람이 춥게 느껴진 것은 아니었으나 유리엘의 품이 따뜻한 것은 기분 좋았다.

“혼자서 너무 멀리 가지 마십시오, 폐하. 항상 그게 걱정이었습니다.”

부드러워서 녹을 것 같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폴로니아는 한순간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넌 항상 따라오잖아.”

그녀가 대답했다. 유리엘도, 그녀도 단순히 얼음 호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아폴로니아의 곁에 있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했던 모든 순간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죽을 뻔해서, 그가 죽을 뻔해서, 두 사람의 신분 때문에.

“계속 같이 가면 되지.”

아폴로니아가 두 팔을 유리엘의 허리에 두르며 덧붙였다. 그녀를 껴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약속하신 겁니다.”

유리엘이 다시 한 번 속삭였다.

“보내도 제가 안 갈 겁니다.”

부드러운 숨결이 아폴로니아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빙긋 미소 지으며 유리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물론이야.”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수국도 백합도 매년 보러 오자.”

유리엘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허리를 감싼 한쪽 팔을 풀지 않은 채, 다른 팔로 뺨을 감싸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유리엘의 눈은 아름답게 휘어져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으로.

“수국도, 백합도, 백 번 피고 질 때까지 돌아올 겁니다. 폐하와 함께.”

그가 속삭였다. 그러고는 아폴로니아가 뭐라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자신이 있는 쪽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아폴로니아는 손을 위로 뻗어 유리엘의 목을 감쌌다. 익숙하지만 여전히 설레는 달콤한 감각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유리엘의 팔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빠져들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황홀함 속으로.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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