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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 아직 남아 있는 자들 (31/34)

Chapter 13. 아직 남아 있는 자들

“사상자에 대한 조치는…….”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창틀에 앉아 책을 읽던 유리엘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그의 은빛 머리칼은 더욱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티 하나 없는 피부 때문인지 그의 푸른 눈은 더욱 선명하고 예뻤다. 그 모습이 눈부셔서, 아폴로니아는 문득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다.

“……다 끝났습니다. 전투가 길어지지 않아서 우리 쪽의 사망자는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리페르 사병들 중에도 항복한 자가 대부분이니 사상자의 간호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죠.”

“아…… 그래, 다행이네. 귀족들에게 사병을 그대로 돌려줄 수 있어서.”

화제가 기억난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페트라의, 아니 과거 페트라의 것이었던 서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음험했던 전 주인의 기질과 달리, 서재는 따스하고 밝았다. 창가에 앉은 유리엘이 기가 막히게 잘생겨 보이는 이유였다.

“비체 백작가의 사람들은 어떻지?”

“다 멀쩡합니다.”

그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카엘리온과 함께 성벽을 타고 들어와 순식간에 성문을 열었던 것은 다름 아닌 비체 백작령의 사병들이었다. 그 고요한 움직임은 유리엘이 아니면 가르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놀라울 정도로 강했고, 성문이 열린 후에도 리페르성 안에서 종횡무진하며 전투의 빠른 종결에 큰 공로를 세웠다. 전투가 끝난 순간까지 쓰러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며 마지막에는 자연스럽게 주변의 정리를 돕기까지 했다.

“일단 카엘리온이 챙기고 있죠. 모든 전투에는 그 녀석과 함께했으니 그쪽이 익숙할 겁니다.”

유리엘이 말했다. 아폴로니아가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다.

“네가 훈련시킨 사람들이잖아.”

유리엘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 전쟁도 끝났으니 제가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포상도, 치료도 직접 진행하죠.”

“그렇게 해. 안 그러면 그들도 서운할 거야.”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녀 또한 리샨에서부터 모인 몇 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고 치료하고 재우느라 바쁘던 참이었다.

유리엘의 사병이 그의 능력으로 키워 낸 것이라면, 산적으로 가장하고 모여들었던 리샨의 병력은 상단의 재력과 영향력으로 벨라들을 앞세워서 준비한 성과였다.

유리엘은 다시 한 번 눈꼬리를 접어서 웃더니 들고 있던 책으로 눈을 가져갔다. 유리엘의 시선을 따라 아폴로니아도 책을 바라보았다.

“……무슨 책이야?”

“예?”

“여기서 찾은 게 아닌 것 같은데…… 병서치고는 이상하게 생겼고.”

아폴로니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가 든 책은 유난히 아름다운 표지에 분홍빛 문양이 박힌, 묘하게 낭만적인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뭐랄까, 어린 소녀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을 법한 모양이었다.

“봐도 돼?”

“아…… 안 됩니다.”

유리엘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돼?”

유리엘로부터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던 말이었다. 아폴로니아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폐하!”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누군가가 서재의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반짝이는 갈색 머리와 녹안을 가진 미인, 아드리안이었다.

“폐하, 방금 대공 전하께서 소식을 전해 왔어요!”

아폴로니아가 손을 멈춘 채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유리엘이 순식간에 책을 덮어 발치로 치워 버렸다.

“쉬라고 했는데, 너 요즘 내 말 잘 안 듣는구나.”

유리엘의 동작을 보지 못한 아폴로니아는 허공에 멈췄던 손을 내리고 말했다. 지나치게 활발한 아드리안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아드리안은 또 잔소리냐는 표정으로 눈을 한 번 굴렸다.

“저 다 나았어요.”

“빠진 살 다시 쪄서 오면 믿어 줄게.”

아폴로니아는 씩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아드리안의 볼을 잡아서 당겨 보았다. 그다지 잘 늘어나지 않았다.

“아! 아흐아요!”

“이거 봐. 원래는 이것보다 더 늘어났었어.”

아폴로니아가 이번에는 아드리안의 볼을 꾹 누르며 말했다. 아드리안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원래 날씬했는데요. 그리고 폐하가 저보다 더 마르셨고요. 저한테 자꾸 보내 주시는 간식은 오히려…….”

“말 나온 김에 하나 먹으렴.”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던 아폴로니아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커다란 과자 한 조각을 집어 아드리안의 입 속으로 넣어 주었다. 아드리안은 어쩔 수 없이 말을 멈추고 과자를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잘 먹네, 날마다 열 개씩 먹도록 해.”

아폴로니아는 강아지를 쓰다듬듯 아드리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에 유리엘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쯤은 안타깝고 반쯤은 부러운 표정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거란 말이에요.”

과자를 다 삼키고, 옆에 있던 물까지 한 모금 마신 후에야 아드리안은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어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소공작, 아니 가레스 리페르가…….”

아드리안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들은 아폴로니아의 표정이 조금 더 진지해졌다. 유리엘도 아드리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가레스는 며칠 전 전투가 끝난 직후,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아폴로니아에게 저주를 내뱉으며 자신의 방에 감금되었다. 조용히 순응하던 그의 아버지나 동생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공식적으로 처벌을 명하기 전까지 필요한 치료를 하라고 지시했던 것 같은데.”

아폴로니아가 말하자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과 달리, 다소 긴장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게…… 죽었대요.”

아폴로니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죽어?”

“네.”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 여기저기가 부러진 채 감금되고 나서도 정신만 들면 행패를 부렸나 봐요. 결국 간병하던 사용인이 모욕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는데 잘못 맞아서 즉사했대요.”

그녀는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하…….”

아폴로니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가레스의 단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의 일관성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식하고 거칠게 살다가 무식하고 거칠게 갔다.

“……공작은?”

“아직 소식을 못 들었을 거예요. 어차피 가레스도 자신도 니샤도 다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꽤 충격을 받겠죠.”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예상은 대부분이 사실이었다. 반역자의 수장을 살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사촌의 죽음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소년 시절부터 자신을,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괴롭혔던 그에게 아폴로니아는 단 한 번도 좋은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공작은 됐고, 니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게 해.”

아폴로니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드리안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도 있니?”

“세드릭 왕세자가 폐하께 가져다드리라면서 자꾸 꽃을 가져오는 것 빼고는 없어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아드리안은 창가 쪽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유리엘이 눈썹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불만스럽지만 말로 하기는 너무 유치해서 입을 다물겠다는 표정이었다.

“……꽃?”

아폴로니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한 번도 아니고 자꾸 가져왔다니, 그녀로서는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네. 어디서 폐하께서 수국을 좋아하신다는 말을 주워듣고 아침마다 꺾으러 다닌다네요.”

“하지만 난 못 받았는데.”

“저도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드리안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에반젤린 님이 전해 주겠다면서 받아다가 마물에게 다 먹여 버렸더라고요. 흰눈박쥐 한 마리가 입맛이 까다로웠는데 수국 꽃잎을 그렇게 잘 먹는다고, 동생은 계속 부려 먹어야 하니 말하지 말라면서 가르쳐 주지 뭐예요.”

아드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나 아폴로니아는 킥 하고 웃었다. 너무나도 에반젤린다운 대응이었다.

불쌍한 라잔의 왕세자.

소년 시절 누나의 괴롭힘 속에서 억지로 날개원숭이와 소통하는 법까지 배워야 했던 그는, 이제 그 누나에게 이용당해 입맛 까다로운 흰눈박쥐의 아침 식사를 찾아서 대령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안됐지만 할 수 없지, 뭐.”

아폴로니아가 덤덤하게 말했다.

“계속 그렇게 하라고 전해 줘. 누군가가 좋아하면 됐어.”

그녀는 손을 뻗어 책상 위 작은 유리병에 이미 꽂혀 있는 보랏빛 수국 한 송이를 집어 들고 향을 맡았다. 유리엘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순간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리엘의 시선이 녹을 듯 부드러워졌다.

“그 꽃은 나에게 필요 없으니 흰눈박쥐가 맛있게 먹는다면 그것도 좋겠지.”

그녀는 사랑스럽다는 듯 수국을 바라보더니, 그것을 다시 병 안에 꽂아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엘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높아졌다.

“슬슬 정리를 마치고 황궁으로 갈 채비를 서둘러야겠다.”

“제가 할 일이라도…….”

“너는 비체 백작령에서 온 사병들을 챙기도록 해.”

아폴로니아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유리엘을 눈에 담을 때만 보이는 환한 미소였다. 반쯤 일어났던 유리엘은 홀린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폴로니아는 몸을 돌려 서재의 문을 향했다.

“할 일이 많으니 저녁에 봐.”

“네, 폐…….”

“아드리안 너는 그냥 쉬고. 살 다 찔 때까지 누워서 움직이지 마.”

의욕적으로 대답하는 아드리안의 말을 딱 자른 아폴로니아는 시녀의 항변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휙 돌려 문을 빠져나가 복도로 향했다. 서재에는 유리엘과 아드리안만 남겨 둔 채였다.

“……바래다드릴까요?”

유리엘이 아드리안을 보며 물었다. 누워서 꼼짝하지 말라는 아폴로니아의 명령이 있었으니 방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유리엘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습니까?”

침묵이 어색하게 길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유리엘이 다시 물었다. 햇살이 유난히 뜨거웠기에, 그는 긴 팔을 뻗어 테이블 위의 물컵을 집어 입에 가져갔다.

아드리안이 질문을 툭 뱉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폐하께 청혼할 생각이신가요?”

“푸훗! 콜록! 컥!”

유리엘은 얼굴이 붉어진 채 머금었던 물을 뱉어 냈다.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도, 거대한 마물을 베면서도, 황제를 체포하면서도 크게 놀란 적이 없었던 그는 이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앉은 자리에서 떨어질 뻔했다.

“콜록!”

창틀을 짚고 고개를 숙인 채 기침을 계속하는 그를 보면서도, 아드리안은 그다지 미안하거나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넴으로써 나름의 친절을 베풀었다.

“방금, 방금 뭐라고…….”

“폐하께 청혼하실 건지 물었어요. 당연히 생각하고 계실 것 같아서.”

손수건을 받아 물기를 닦는 그에게 아드리안이 대답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것 아닙니까?”

“그런가요?”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유리엘 님이 폐하를 좋아하신 게 언제부터였는데요? 사실상 첫눈에 반한 거 아니에요?”

유리엘은 말문이 막힌 채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은 대충 옳았다. 자각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는 했었지만.

“……중요한 건 제가 언제 반했는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도 유리엘 님을 좋아하시는걸요. 아주 많이.”

아드리안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녀는 유리엘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폴로니아와 연인 사이가 된 지도 꽤 시간이 지났으면서,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는 것은 설레는 모양이었다.

“유리엘 님도 생각은 하고 계시는 거죠? 안 그러면 어울리지도 않는 로맨스 소설을 보면서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연구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코, 콜록!”

겨우 멀쩡해졌던 유리엘이 다시 기침을 토해 냈다.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으나, 아드리안의 시선은 이미 그가 보다가 던져 놓은 분홍빛 표지의 책을 향해 있었다.

“저, 저 책을 아십니까?”

“‘푸른 바다 위의 사랑’이요? 당연하죠.”

아드리안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폐하는 워낙 딱딱한 책이나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만 많이 읽으셔서 모르겠지만, 저는 로맨스를 좋아하는걸요. 저 책은 최근 5년 동안 출판됐던 소설 중에 제일 인기가 많았어요.”

“하아…….”

유리엘이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감쌌다. 딱 몇 초 동안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는 아드리안의 눈썰미를 잊고 있었다. 그녀가 약혼자 있는 남자를 공략하는 전문가라는 사실도.

취향도 취향이었지만, 아드리안은 남녀의 심리나 연애 감정에 대한 책이라면 빠뜨리지 않고 읽었다. 유리엘이 어설프게 들춰 본 로맨스 소설 따위는 거꾸로도 외울 수 있을 것이다.

“그거 청혼하는 장면이 특히 유명한데……. 그래서 읽고 계시는 거 아니었어요?”

자리를 피하고 싶은 유리엘의 마음도 모른 채, 그녀가 그의 정곡을 쿡쿡 찔러 댔다.

“그냥, 읽고 상상한 것뿐입니다. 뭘 계획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생각만 한 것도 계획이죠, 뭐.”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으나 아드리안은 그 대답이 하찮다는 듯 넘겨 버렸다.

“방식은 중요하지 않아요. 아니, 중요하긴 한데 책 같은 것에서 참고할 건 많지 않아요. 지금까지는 안 보고도 잘하셨으면서.”

그녀가 다소 진지해진 표정으로 유리엘을 바라보았다.

“폐하께 청혼하고, 폐하와 부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한 거예요? 중요한 건 그거잖아요.”

한 마디도 틀린 말이 없었다. 유리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서재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아드리안은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눈빛으로 그를 독촉했다.

유리엘은 순간적으로 그렇다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니, 당장 아폴로니아를 쫓아가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평생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유리엘은 주먹을 꽉 쥐며 그 충동을 참았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을 말했다.

“……폐하의 곁에 있는 것, 그 이상은 감히 바라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자 아드리안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참 편안한 마음가짐이네요.”

“폐하께서 저와의 결혼을 원한다고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리엘이 입술을 꽉 깨물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유리엘에게 더 열심히 움직이라고 잔소리를 하려던 아드리안이 입을 다물고 눈을 크게 떴다.

“결혼과 사랑은 완전히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리엘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입으로 내뱉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이었다. 실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그저 책으로 읽고 상상만 한다는 것도. 무엇보다 아폴로니아와의 결혼을 입에 담는 순간, 그의 눈 속에 서렸을 깊은 갈망을 숨기는 것이 어려웠다.

아드리안의 얼굴에 있던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유리엘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설득을 하면 되잖아요.”

“예?”

“결혼 같은 중요한 결정을 사랑만 가지고 하기 어렵다는 거죠? 그럼 유리엘 님과 결혼하는 게 폐하께 가장 이득이 된다고 설득을 하세요.”

유리엘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생각을 바꾸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폴로니아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랐던 아드리안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알아요, 두 분 사이에 제가 낄 일이 아니라는 건. 하지만.”

그녀가 한풀 조심스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날따라 선명한 녹색 눈동자는 유리엘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아세요? 가만히만 있으면 폐하 곁에 계속 남아 있기도 어렵다는 거.”

그 말에 유리엘의 얼굴이 순간 경련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했지만, 조금 전까지 침착한 듯 보였던 눈동자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저는 폐하를 알아요.”

아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황제들은 신의 후손이라서 후궁도 두고, 정부도 두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사랑할 수 있다죠. 하지만 폐하는 그런 복잡한 관계를 싫어하는 분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마음을 드러내자 폐하는 그분과의 관계를 끝내셨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지만, 두 사람 이상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굳이 칼로 자르듯 그분을 잘라 내지는 않았을 거예요.”

유리엘은 숨 쉬는 것도 멈춘 채 아드리안의 말을 들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약혼자였고, 애초에 이혼을 염두에 두고 계셨으니 폐하께서 관계를 깨 버리고 유리엘 님을 잡으셨죠. 하지만 어느 왕국의 왕자와 백년해로를 약속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않나요?”

그녀는 유리엘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는 여전히 미동 없이 아드리안의 말을 듣고 있었다.

“두 분이 가까이 붙어 있으면 서로 마음을 접을 수 없을 거고, 결국 폐하께서는 유리엘 님을 멀리할 수밖에 없게 될 걸요. 결혼은 모르겠고 곁에만 있겠다, 그런 건 없다는 얘기예요.”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한편으로는 냉정하게 말을 끝냈다. 그녀는 다시 눈을 들어 유리엘의 반응을 살폈다.

화를 내거나,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리엘은 뜻밖에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한 정도였고, 어딘가 씁쓸하게 느껴졌지만 미소는 미소였다.

“……제 말을 다 들은 거 맞아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조언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씁쓸한 미소는 여전히 입가에 있었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네?”

“영애가 한 말은 결국, 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폐하의 생각을 바꾸라는 것이니까요. 당장 폐하께서 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을 선택하게 만들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거야…….”

아드리안이 살짝 말끝을 흐렸다. 유리엘은 하던 말을 이었다. 짙은 푸른색의 눈이 한 번 반짝이더니, 작은 한숨이 그의 입술을 빠져나왔다.

“그런 것은 싫습니다.”

그가 또렷하게 말했다. 아드리안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청혼이든, 소설 속의 순간이든, 다 제 생각 속에만 남아도 좋습니다. 그분께서 온전하게 자신의 의사로 저와의 결혼을 바라지 않는다면, 조금도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씁쓸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말을 끝냈다. 아드리안은 무언가 덧붙이려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숨만 깊이 쉴 뿐이었다.

그러나 유리엘은 조금 전 띠었던 그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아폴로니아의 것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짧든, 영원하든, 그가 아폴로니아의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미 기적이었다. 지위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안위, 그녀가 그에게 안겼을 때 보였던 미소, 그것을 지킬 수만 있다면.

* * *

까악-

“하아아…….”

시끄럽게 우는 까마귀 소리에 아폴로니아가 한숨을 쉬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그녀는 잠시 리페르성의 연회장에 혼자 들어와 한숨 돌리고 있었다.

할 일은 많았다. 리페르 가문의 재산이며 작위의 회수, 영지민들의 피해 회복, 그리고 물론 리페르 공작을 비롯한 반역자들의 처벌까지도, 대충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없었다.

까아아악- 까악!

그러나 옆방, 그러니까 하필 에반젤린이 머무는 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녀의 휴식을 끈질기게 방해하고 있었다.

이제 딱 각인을 하면 될 것 같다며, 에반젤린은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어린 외눈까마귀를 방에 두고 녀석이 싫어하는 음식 따위를 찾으러 간 참이었다. 그나마 부드럽게 각인을 시키려면 맛없는 음식을 아폴로니아의 손으로 먹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이었다.

녀석은 이상한 떫은맛을 입 안에 퍼뜨린 아폴로니아에게 영원한 원한을 품겠지만, 그 정도가 깊지는 않아서 그녀를 크게 다치게 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창문을 세게 열어 실수로―사실은 에반젤린의 고의였지만―그 바깥에 있던 외눈까마귀를 기절시켰던 카엘리온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까악! 깍! 깍!

물론, 이 소음이 계속되는 이상 그 모든 배려는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녀석은 일정한 리듬이나 규칙 없이 계속 울어 댔다. 에반젤린의 어깨 위에서 애교를 부릴 때에는 꽤 귀여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과거 자신이 했던 그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폴로니아는 그저 각인을 빨리 해치우고 외눈까마귀로부터 조금 떨어진 채 잠이나 한숨 자고 싶었다.

“폐하, 차를 드시지요.”

그 순간, 시녀 한 명이 트레이를 끌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트레이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와 찻잔이 담겨 있었다.

“거기 놓아 줘.”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차보다는 외눈까마귀를 얌전하게 만드는, 아니면 최소한 입을 닥치게 만드는 약, 그것도 아니면 그냥 한 방에 녀석을 기절시킬 몽둥이 같은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따라 드릴까요?”

“좋아.”

시녀는 아폴로니아가 혼자 앉아 있는 긴 테이블 위에 주전자와 찻잔을 놓고 향긋한 액체를 찻잔에 붓기 시작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묘하게 몽환적으로 보였다.

“너는…… 리페르 영지의 사람이로구나.”

아폴로니아가 문득 시녀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시녀는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지만 들고 있는 주전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저를 아시는군요.”

주전자를 내려놓은 그녀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시녀는 중년을 조금 넘은 여인이었다. 평범한 이목구비에는 군데군데 주름이 있었고, 노동을 많이 한 탓인지 여기저기 흉터가 지고 거친 손을 가졌다.

반쯤 희끗한 머리칼, 처진 눈썹, 거친 피부 등은 동정심을 자극하는 흔한 중년의 모습이었다. 세월의 풍파를 꽤나 겪은 듯 입가는 우울해 보였지만, 진회색의 눈동자는 묘하게 강인한 느낌이었다.

“아들이 이 성에서 억울하게 죽었다고 했던가?”

아폴로니아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며칠 전 전투가 끝난 후, 리페르성의 지하 감옥에서 발견되었던 여자였다.

평생 아들과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던 그녀는 세금을 내지 못해 함께 붙잡혔던 아들이 먼저 죽고 말았다며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는 아들의 원수를 갚아 준 아폴로니아를 본 순간 그녀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고, 그 후로 이런저런 잡다한 일을 돕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내게 차를 가져다주는 것은 다른 시녀가 할 일인데.”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여인의 성실함은 높이 살 수 있으나,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까이에서 시중을 드는 것이 편안하지 않았다.

“사라 아가씨는 잠시 대공 전하께 말을 전하러 갔습니다. 기다렸어야 했겠지만 폐하께서 피곤하실 것 같아서…….”

여인은 아폴로니아의 반응이 당혹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피로를 푸는 데에 특효가 있는 차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다른 것이라도 가져오지요.”

그녀가 입술을 떨며 말했다.

“……너 또한 힘들 테니 시간이 있으면 쉬도록 해. 내 시녀의 일을 대신할 필요는 없다.”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차갑게 들렸을 것이나 이런 문제는 정확하게 말해 둘 필요가 있었다. 혼란스러운 마당에 각 업무 담당자 사이의 혼선까지 있을 필요는 없었다.

여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건넸다.

“……음?”

이윽고 잔을 받아 들던 아폴로니아의 시선이 여인의 손바닥에서 멈추었다.

굳은살이 있는 것은 당연했으나, 그 모습이 농기구에 단련된 모양과는 달랐다. 작은 흉터의 위치나 모양도, 굳은살이 박이고 껍질이 벗겨진 자리도. 그것은 마치…….

‘검을 다뤘나?’

그녀의 손과 팔은 꼭 유리엘이나 카엘리온, 성인이 된 타냐, 그리고 기사들에게서 많이 보았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실수라도…….”

“너…… 혹시…….”

아폴로니아는 반쯤 뱉었던 질문을 본능적으로 다시 삼켰다. 그 순간 그녀는 고개를 든 여인의 진회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묘한 위화감이 온몸을 사로잡았고,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농사꾼 같지 않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아폴로니아의 감각이, 본능이 무언가 위험한 것이 가까이 있다는 신호를 주고 있었다.

‘이자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나?’

“찻잔에 벌레가 들어갔구나.”

아폴로니아는 잔을 휙 뒤집어 그 안에 들어 있던 찻물을 버렸다. 그러고는 차가워진 표정으로 명령했다.

“다시 따라 줘.”

여인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잠자코 사기 주전자를 들어 그녀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흠잡을 것 없는 자세, 떨리지 않는 손…….’

확실히 여인은 이상했다.

농사만 지어 온 여인, 그것도 까다로운 황제 앞에서 움츠러든 촌부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태도가 아닌가.

툭- 쨍그랑!

“아이고!”

아폴로니아는 두 번째로 받은 잔을 떨어뜨렸다. 그 안에 든 것을 마시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여인은 고개를 거듭 조아리며 몸을 숙여 잔을 집으려 했다. 아폴로니아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저의는 알 수 없으나 이 여인과 둘만 남은 상황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괜찮으니 놔두고 가도 좋아.”

아폴로니아는 뻗었던 손으로 잔을 줍기 위해 상체를 숙인 여인을 다시 일으키려 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손이 여인의 목덜미를 스쳤다.

‘……어?’

순식간이었으나 아폴로니아의 눈에는 여인의 목덜미에서 반짝인 붉은 문신이 보였다.

그녀의 손이 닿았을 때만 반짝 빛났다가 사라진 그 문신은, 분명히 다른 이로부터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소년 시절 유리엘의 모습이 아폴로니아의 머리를 스쳤다.

흰 목덜미 뒤에 새겨졌던 검날 모양의 문신, 그녀가 손대자 더 짙게 빛을 냈던 그것.

모양은 조금 달랐으나, 분명 같은 위치, 같은 빛깔, 그리고…….

‘같은 주술이구나.’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지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뒷목의 붉은 문신, 평소에는 보이지 않게 하는 그 주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페트라 리페르는……. 여인의 능력을 경시하지 않습니다.”

과거 유리엘이 했던 말이 아폴로니아의 뇌리를 스쳤다.

“여인들은 눈속임에 유리합니다. 상대를 쉽게 방심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면서, 눈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제가 실수를…….”

중년을 넘은 나이, 동정심을 유발하는 외모, 위축된 태도, 가슴 아픈 사연과 그녀가 쏟아낸 눈물. 그 모든 것들 앞에서 누군들 방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여인은 리페르 가문의 살수였다.

“네…… 이름이 뭐였지?”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그녀가 굳이 아폴로니아와 단둘이 남을 기회를 만들었다는 것은, 지금 아폴로니아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의미였다. 아폴로니아는 목소리를 떨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천한 이름이라 폐하께 들려드리기도 부끄럽지만…….”

여인은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레아라 합니다.”

그녀는 아폴로니아를 보며 살짝 웃었다.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진회색 눈동자에, 얼핏 살수 특유의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좋은 이름이야.”

아폴로니아가 애써 대답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리를 치면 올 사람은 많았지만 그 전에 여인의 손이 아폴로니아의 목을 움켜쥘 것이다. 여인은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미안한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암살인가……. 아니, 납치?’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폴로니아는 짐작할 수 없었다. 당장 손을 쓰지 않는 것을 보아 납치일 가능성이 컸으나 어느 쪽이든, 지금 아폴로니아가 그녀로부터 도망칠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리페르성 안에서 만난 리페르 가문의 살수.

그녀는 성안 곳곳에 숨겨진 비밀 장소며 통로를 손바닥 안처럼 꿰고 있을 것이다. 가까이 있는 그녀를 상대로 아폴로니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심장 박동이 주체할 수 없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인은 여전히 순박한 촌부를 연기하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아폴로니아를 쉬지 않고 주시했다. 그것이 아폴로니아를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주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까아아악-

갑자기 옆방의 외눈까마귀가 귀를 찢을 듯이 울었다. 생각에서 깨어난 아폴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한 가지. 그녀가 해야만 하는, 할 수 있는 일이 떠올랐다.

“……새에게 밥을 주는 것을 잊었구나.”

아폴로니아가 여인에게 말했다.

“예? 새 밥이요? 폐하께서 말입니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새 밥을 주러 가야겠어.”

그녀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여인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그녀는 여인에게 깊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 자리에서 재빠르게 일어났다. 서둘러야 했다. 여인이 언제 그녀를 덮쳐서 성 밖으로 끌고 나갈지 몰랐다.

막을 수 없다면, 돌아올 수라도 있어야 했다.

“함께 가자. 금방 끝날 거야.”

“아…….”

여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폴로니아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그럼, 새가 있는 곳까지 모시겠습니다.”

아폴로니아는 여인이 어느새 다시 채워 놓은 찻잔을 손에 들고 까마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생각이 스쳤으나 애를 많이 쓴 덕분에 걸음걸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를 찾아 줘.’

그녀가 뇌리에 떠오른 단 한 명의 사람에게 속으로 말했다.

‘나를 찾아 줘, 유리엘.’

* * *

유리엘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아드리안이 그에게 남겼던 말을 되새겼다.

“폐하께서는 유일한 직계 황족이에요. 대공 전하를 후계자로 삼을 것이 아닌 이상, 누군가와는 후계를 보아야 해요.”

아폴로니아에게 멋들어진 청혼을 하라고 설득하던 그녀는, 유리엘이 안쓰럽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곁에 안 계시면, 유리엘 님은 뭐 하고 사시게요?”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남기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하아…….”

유리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함에 눈을 감자 화사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아폴로니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반할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끔찍하게도 그 옆에는 웬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고 서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게 생긴 것은 분명했다.

‘그만하자.’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잡념을 떨쳐 버렸다.

‘한심하군.’

그는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냈다. 사람의 욕심은 어쩌면 그렇게 끝이 없는지.

처음에 그는 아폴로니아의 곁에 있기를 바랐고, 그다음에는 그녀의 마음을 원했다. 그리고 이제는 감히 그녀와의 결혼까지 상상하려 하는 것이다.

유리엘은 알았다. 귀족들이 자신과 아폴로니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들의 눈에 고귀한 혈통도 무엇도 아닌 유리엘은 그저 아폴로니아의 스치는 연인이었다. 어쩌면 정부의 이름으로 곁에 남을지 모르는 연인.

몇몇은 그를 경계했다. 그다지 대단한 배경은 없으나 고귀한 여인의 사랑을 가졌다는 사실이 가이우스 리페르를 연상시키기 때문이었다. 사내들은 그를 존경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폴로니아에 대한 청혼을 망설이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의 옆자리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모든 가문과 왕국이 탐내는 것.

조금 전 그가 떨치려 했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아폴로니아가 누군가와 함께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이.

그러나 이번에는 그 남자의 얼굴이 조금 더 선명해 보였다. 묘하게 라잔의 세드릭 왕세자를 닮은 모습이었다. 단순히 권력만을 원한 것이 아닌, 첫눈에 반한 그 표정 그대로.

미끈하게 생겨서는 실실 웃던 얄미운 세드릭의 표정이 떠올랐다. 아폴로니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 그녀에 대한 청혼은 참으로 당당하게 했다.

유리엘은 상상으로만 해 보았던 것을.

“젠장.”

유리엘이 눈을 번쩍 뜨며 욕설을 내뱉었다. 오래전에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혼자 남은 서재에, 아폴로니아가 두고 나간 찻잔이며 책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신부의 모습을 했던 아폴로니아의 환영이, 이제는 서재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으로 바뀐 채 유리엘의 머리를 맴돌았다. 햇빛을 받아 황홀하게 반짝거리는 그녀의 옆자리, 그러니까 유리엘이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아서 멍청하게 시시덕거리는 세드릭.

상상 속의 아폴로니아는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자신을 볼 때와 똑같은 그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안 돼!”

유리엘이 소리치며 일어섰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조금 전까지 그를 붙잡고 있던 이성이, 아폴로니아와 그의 신분 차이며 귀족들의 시선 같은 복잡한 상황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흐려지고 있었다.

“유리엘 님은 뭐 하고 사시게요?”

아드리안의 질문이 다시 들려왔다. 그는 그에 대한 답을 몰랐다. 아폴로니아와 멀어진다면 사는 것이 의미가 있나? 아마 없을 것이다. 애초에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그녀를…….’

그는 서재 문을 벌컥 열었다. 갑자기 아폴로니아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쾅-

그는 뛰다시피 서재를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그녀를 만나야겠다.’

그저 바로 지금 당장,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미소를 확인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리페르성의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은 겨우 몇 분 거리였지만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유리엘은 날듯이 복도를 지나 홀까지 다다랐다.

‘……뭐지?’

자신이 왔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시녀를 찾던 유리엘이 눈썹을 찌푸렸다. 아드리안은 방에서 안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쳐도, 대신 있어야 할 사라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복도는 지나치게 고요했고, 평소에 열려 있던 연회장의 문은 닫힌 채였다. 몇몇 병사들이 복도에 서 있었으나 연회장의 바로 앞은 비어 있었다.

“……폐하?”

유리엘이 문 반대편을 향해 아폴로니아를 불렀다. 등줄기에 다시 한 번 땀이 흘렀다. 조금 전과는 다른, 질투보다 훨씬 큰 불안감이 그를 스쳤다.

“폐하, 들어가겠습니다.”

유리엘이 다시 한 번 말한 뒤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자 리페르성의 연회장 내부가 드러났다. 화려한 벽지며 기둥, 그리고 고급스러운 가구가 보였으나 유리엘의 얼굴은 더욱 찌푸려졌다.

아폴로니아가 보이지 않았다.

“……폐하를 보았는가?”

그가 멀리, 복도에 서 있던 병사에게 물었다.

“쉬셔야 한다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신 후로 나오지 않으셨는데…….”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연회장을 들여다보면서 왜 자신에게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유리엘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짙어졌다.

과거 녹스가 아폴로니아를 납치했던 상황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그는 더 기다리지 않고 연회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폐하?”

유리엘이 다시 한 번 불렀다. 답을 기다리는 매 순간 그의 심장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폐하!”

그는 연회장과 연결된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휴게실, 에반젤린이 사용 중인 침실, 여인들의 살롱, 어디에도 아폴로니아는 보이지 않았다.

“폐…….”

“백작님!”

그가 다시 아폴로니아를 부르려던 찰나, 조금 전 그와 이야기했던 병사가 다급하게 유리엘을 외쳐 불렀다.

“침, 침입자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병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불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 유리엘은 황급히 몸을 돌려 복도로 나갔다. 병사는 복도에서 바깥으로 연결되는 문가에 서서, 바깥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

병사의 손가락 끝을 본 유리엘의 눈동자가 강하게 떨렸다. 성 앞에 위치한 정원 안쪽 큰 나무 밑, 사람의 눈이 잘 닿지 않는 그곳에 의식 없이 쓰러진 젊은 여인이 보였다.

“……사라.”

시녀는 누군가에게 공격당한 듯 목덜미에 멍이 든 채 기절해 있었다. 유리엘이 깊은 숨을 토해 냈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에 점차 경련이 일었다.

“……되었다.”

그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예?”

병사가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폐하가…….”

유리엘이 다시 한번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고르지 않게 떨렸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폐하가 납치되었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그가 내뱉었다.

아폴로니아의 안위, 그녀의 미소, 그것만을 바란다고 생각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그는 몇 시간 사이에 아폴로니아를 잃어버린 것이다.

* * *

“들어간 사람은 있는데 나온 사람도, 안에 있는 사람도 없다니 말이 안 되잖아!”

카엘리온이 소리쳤다. 그의 눈이 짙은 붉은색 분노로 빛났다.

“그, 그게…… 리페르성의 곳곳에는 비밀 문이 있어서…… 아마 그곳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을 겁니다.”

그의 앞에 꿇어앉은 열 몇 명의 시종들이 애원하듯 말했다. 모두 리페르 가문에서 시중을 들던 자들이었다.

유리엘, 카엘리온, 그리고 녹스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라가 깨어나자 그녀를 기절시켰던 사람의 인상착의가 밝혀졌고, 몇몇 마을 사람을 추궁하자 그 사람이 자신의 배경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곧이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자의 존재를, 여기 있는 모두가 몰랐다는 것이 말이 돼?”

카엘리온이 다시 한 번 일갈했다.

“저, 저희도 얼굴을 몰랐습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자들의 신분은 원래 비밀로 취급되어서…….”

“이름은 아는가?”

유리엘이 덜덜 떠는 시종에게 물었다. 최대한 질문의 시간을 줄이려는 듯, 그의 말은 짧았다.

“고, 공작 부인을 모셨던 레아일 겁니다. 가문의 몰락 후에도 피를 보려 할 사람은 그 여인뿐입니다.”

시종이 설명했다. 그는 자신도 레아의 얼굴이나 진짜 이름, 그리고 정확한 배경을 모른다고, 그저 그녀가 페트라 휘하의 살수라고만 알고 있다고 했다.

“끝까지 음험한 그 여자가 유언이라도 남겼나 보군.”

카엘리온이 나직하게 내뱉었다. 유리엘은 대꾸하지 않고 시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에반젤린은 당장 폐하를 찾기 어렵다고 했어. 날개원숭이들도 전투 준비에 모든 힘을 쏟아서 폐하의 곁에 붙어 있었던 녀석은 없다고. 지금 바깥에서 녀석들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지만…….”

카엘리온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입술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유리엘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카엘리온의 말이 사실이라면, 상황은 과거 녹스가 그녀를 데려갔을 때보다 절망적이었다.

“공작…… 아니 루이스 리페르를 데려와.”

그가 차갑게 말했다.

“니샤도.”

리페르 영지 내에서, 가문 소속의 누군가가 그녀를 데려갔다. 그렇다면 그녀를 되찾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누군가가 정보를 내놓을 때까지, 가문의 남은 자들을 신문하는 것.

레아가 그들을 주인으로 생각한다면, 누군가가 죽기 전에 돌아오지 않겠는가.

“……아마 어려울 겁니다.”

늙은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유리엘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졌고, 시종은 그 살기에 짓눌려 몸을 떨었다.

“이자의 말이 맞을 거야.”

답답한 듯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녹스가 힘없이 대꾸했다.

“납치를 하면서 그것을 예상 못 했을 리가 없지 않나. 범인은 루이스 리페르나 니샤 리페르에게 관심이 없어. 그저 폐하의…….”

최대한 이성적으로 말하던 그도, 유리엘의 살기 어린 시선을 직접 받자 말을 흐렸다.

“……과연 ‘신문’이 끝나고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는지 보도록 하지.”

유리엘이 나직하게 말하자 녹스의 눈이 커졌다.

아폴로니아의 곁에서는 그저 다정했던 바다색 눈동자는, 마치 눈앞의 모든 것을 파괴할 것처럼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녹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곁에 서 있던 기사에게 눈짓해 두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성의 통로는 수십 개의 출구로 이어질 수 있다고 들었네. 그사이 나는…….”

까아아아악-

녹스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순간, 귀를 찢을 것 같은 울음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뭐지?”

카엘리온의 시선이 에반젤린의 침실로 향했다. 다른 이들도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까아아악! 깍!

최근 며칠 동안 계속 들렸던, 기분 나쁜 울음이었다. 그러나 유리엘은 그 목소리가 묘하게 달라졌다고 느꼈다.

까악!

어딘가 더 날카로웠고, 더 분노에 차 있었다.

그는 홀린 듯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엘리온이 몇 걸음 뒤에서 그를 따랐다.

철컥-

침실 문을 열자, 퀴퀴한 마물들의 냄새가 스며 나왔다. 유쾌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까아아악-

새가 또 한 번 울었다. 유리엘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구석에 걸려 있던 새장이 눈에 들어왔다.

“……!”

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까악-

악에 받힌 듯 우는 외눈까마귀의 새장 밑에는 찻잔 하나가 떨어져 있었고, 녀석의 깃털은 누군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젖은 채였다.

깍!

억울하다는 듯 계속해서 몸을 터는 마물의 모습이, 마치 물벼락을 맞아 기분이 나쁘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리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른 물건이었다.

새장 한구석에, 아폴로니아가 즐겨 하는 루비 목걸이가 보였다. 유리엘이 선물한 것이었다.

“……폐하.”

유리엘이 읊조렸다.

목걸이는 분명히 급하게, 그리고 누군가의 눈을 피해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아폴로니아가 남긴 신호.

“……각인했군.”

뒤따라온 카엘리온이 새를 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새의 이마 한가운데에 있는 눈동자를 향해 있었다. 평소에도 어딘가 기괴해 보였던 그 눈에는 전에 없던 어떤 광기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에반젤린이 언젠가 말한 대로, 물벼락을 맞아 각인한 거야.”

카엘리온의 말을 들으며, 유리엘이 한쪽 손을 뻗어 새장을 열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목걸이를 빼냈다. 납치되기 직전 무언가를 눈치챈 아폴로니아는 기지를 발휘해 이곳까지 와서 각인에 성공했을 것이다. 아마 곧바로…….

까악-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려 했으나 유리엘은 새장을 열었던 손으로 녀석의 날개를 붙잡았다. 발버둥 치며 할퀴려 드는 새를, 그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쥐었다.

“가지.”

그가 목걸이를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에 쥔 목걸이를 본 카엘리온이,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 폐하께서…….”

“방향을 남기고 가셨으니 폐하를 찾으러 가겠다. 그리고.”

유리엘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눈 속의 살기는 한층 짙어져 있었다.

“리페르의 살수라는 것의 목숨을 전부 끊어 놓고 말겠어.”

* * *

가을이 지나가는 때였다. 건조한 공기 속, 꽤나 시린 바람이 부는 늦저녁이었다.

외눈까마귀는, 허공에 풀린 순간부터 빛처럼 빠르게 날았다. 유리엘과 카엘리온, 그리고 수십 명의 기사들은 한순간도 새에게 눈을 떼지 않고 말을 몰았다.

까아아악-

몇 시간을 달렸을까, 발목에 긴 실을 묶은 채 앞서 가던 외눈까마귀는 우렁찬 울음을 내지르더니 허공을 한 바퀴 맴돌았다.

까아아악-

조금 전까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날았던 녀석은 이제 그 커다란 눈으로 어떤 한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리엘이 말에서 내려 실을 당겼다. 녀석은 억울하다는 듯 날갯짓을 하며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말 위에 앉은 채, 백 보가량 떨어진 곳의 커다란 집을 바라보았다.

벌판 위에 덩그러니 있는 그것은 사실 집이라기에는 애매했다.

반쯤은 나무로, 반쯤은 지푸라기로 얽혀서 만들어진 그 건물은, 여러 번 무너지고 다시 지어졌는지 무척 허름해 보였다. 지붕이 반쯤 떨어져 나가고 벽에도 오물인지 피인지 모를 자국이 가득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사실상 폐가에 가까운 건물이 분명했다.

건물 앞에는 독특하게도 버려진 연무장이 있었다. 기사들이 함께 생활하며 수련하는 공간과도 비슷했지만 그런 곳치고는 위치가 황량했다.

크기는 작지 않았다. 어쩌면 한때는 수십 명이 함께 사용했을지도 모를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추위도 더위도 전혀 피할 수 없는, 건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곳이었다.

“찾았군.”

카엘리온이 중얼거렸다. 다행스럽다는 듯,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보이려 했다.

그러나 앞에 선 유리엘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눈썹을 찌푸린 채 건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가까이 있었다. 그녀는 아직 무사하다.

그런데도 느낌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는 이곳의 풍경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주변이 황량한 것도, 낡은 연무장도.

“포위하라.”

카엘리온이 외눈까마귀를 새장에 가두며, 주변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허름한 집을 포위했다.

“해가 거의 졌으니 횃불을 들어라.”

카엘리온이 다시 지시했다. 곧 건물 주변에는 새빨간 작은 불꽃들이 피어올랐다.

“아직 폐하께서는 무사하시다. 새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어.”

카엘리온이 유리엘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정작 그 자신은 확신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긴장한 듯했다.

유리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눈앞의 건물을 훑었다. 어린 시절의 어떤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날아오던 검, 붉게 흩뿌려졌던 피, 죽을 것 같은 괴로움.

그는 이곳에 처음 온 것이 아니었다.

“네 목숨은 이제 내 것이다.”

잊고 있었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날아오던 사피로의 주먹이, 검이, 발길질이 떠올랐다. 그제야 유리엘은 그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살수라더니…….’

유리엘이 납치범의 정체를 생각했다. 그녀가 이 장소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이곳은 그가 한때 수련을 했던, 아니 고문과 세뇌를 당했던 장소였다. 리페르 가문에서 어린아이를 데려와 살수로 길러 내는 데 사용했던 곳. 지금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가 받는 훈련은 누가 그를 발견했는지에 따라 달랐다. 사피로는 한 명 한 명을 따로 데려와서 단독으로 집요하게 훈련시켰고, 누군가는 여러 아이를 데려와 단체로 훈련시키거나 경쟁시키기도 했다.

납치범 또한 그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훈련을 받고, 세뇌당하고. 그리고 그녀는, 절반밖에 꺾이지 않았던 유리엘보다 훨씬 모범적인 살수로 자라났다.

가문이 몰락한 후에도 이런 짓을 꾸밀 충성심이라니.

유리엘은 그녀가 왜 이곳을 납치의 장소로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크게 소리 질러도 찾아올 사람이 없는 장소. 여기는 그런 곳이었다.

“가까이 가 봐야겠다.”

카엘리온이 말에서 내리며 몇몇 기사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건물은 여전히 어둡고 조용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외눈까마귀의 눈빛과 울음소리는 녀석의 원수가 건물 안에서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먼저 나오지 않는다면…….”

카엘리온이 말을 이으며 손짓했다. 그의 지시가 떨어지는 순간, 그를 비롯한 몇몇 기사들은 건물을 습격할 것이다.

“내 신호가 떨어지면…….”

“더 오지 말고 멈춰.”

그의 말이 끝나기 전, 검은 그림자 하나가 폐가의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포위하면 내가 어서 와서 황제를 데려가시오 하고 비켜 줄 줄 알았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인의 것이었다. 물소리, 바람 소리와도 비슷하게 들리는 그 소리는 신기할 정도로 또렷하게 그들의 귀에 꽂혔다.

“대단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

여인은 문을 벗어나 한두 걸음 더 걸어 나왔다. 불빛 아래 그녀의 실루엣이 보였다. 흔한 체격이었으나 고요한 움직임은 분명 평범하지 않았다. 카엘리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뒤에서 여러 개의 활시위가 여인을 향해 당겨졌다. 그는 궁수들에게 손짓해 여인을 고슴도치로 만들 참이었다.

“내가 집 안으로 들어가 그 여자를 죽이는 것이 빠를까, 너희의 화살이 나한테 날아오는 것이 빠를까?”

여인이 큭큭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카엘리온이 허공에 손을 멈춘 채 눈을 부릅떴다. 여인은 여전히 그들에게서 꽤 떨어진 곳에 서 있었고, 반면 그녀와 건물 안에 있을 아폴로니아 사이의 거리는 가까웠다.

“잘 생각했어. 내가 그렇게 느리지는 않거든.”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기사들을 쓱 둘러보았다.

완전하게 무장된 수십 명의 기사가 자신을 포위한 와중이었으나, 여인은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것 같았다.

얼굴은 아직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의 상황에 반쯤은 놀랐지만 반쯤 흥분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광기가 느껴졌다. 마치 목숨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처럼.

“뒤처리가 번거로울 것 같아서 그나마 한적한 옛 거처까지 데려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성에서 죽일 걸 그랬어.”

그녀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카엘리온이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뭐, 원래는 황제를 죽이고 다시 너까지 처리해서 황실의 대를 다 끊어 놓을까 했지만…….”

여인이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네 주군이 죽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괜찮은 복수가 되겠군. 공작 부인께서는 좋아하셨을 거야.”

여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렸다. 그곳에 있는 모든 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말없이 그녀를 쏘아보던 유리엘에게서 날카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페트라 리페르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다니 미쳤군. 그녀는 너희에게 짐승처럼 표식을 새기지 않았나?”

카엘리온이 으르렁거렸다. 빨라진 말은 그의 조급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인은 더욱 여유롭게 웃으며 뒷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작은 문신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난 나를 거두어 주신 그분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녀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목소리에 새겨진 여유도, 광기도 그대로였다.

카엘리온은 그 말뜻을 묻지 않았다.

“그분의 죽음 후에도 말이야.”

“……페트라 리페르의 자식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카엘리온이 서늘하게 경고했다. 말고삐를 꽉 움켜쥔 채 떨리는 손이 그의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죽은 그분이 돌아올 것도 아니고. 그 어린 녀석은 찢어 죽이든가 마음대로 해.”

그녀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카엘리온의 반응이 즐겁다는 투였다. 어둠 속이었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있을 것이다.

“다른 원하는 것을 말해.”

“난 원하는 것도, 두려운 것도 없어. 황제의 목숨을 가져야겠고, 그건 이미 내 손에 있어.”

한 수 접어주려는 카엘리온에게 레아가 말했다. 그녀의 말 속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어떤 거래의 가능성도 없었다.

“그럼 난 황제를 끝내러 들어가야겠으니 좀 더 물러서는 게 어때? 너무 많이는 말고. 일이 끝난 후 너희들의 표정도 보고 싶으니까.”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카엘리온의 얼굴이 한층 더 굳었다.

“너희들이 뭐라도 시도하면 황제는 더 괴로워지기만 할 거야. 그건 싫지?”

그녀는 그들이 당연히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을 안다는 듯, 뒤돌아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카엘리온은 이를 꽉 깨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에게는 아폴로니아를 구할 수단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는…….”

그가 여인에게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너는 어디서 온 누구이기에…….”

“……발란의 유령인가.”

그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유리엘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여인이 멈칫한 것이 여실히 보였다. 카엘리온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유리엘에게 쏠렸다. 여인은 한동안 멈춰 서 있다가 천천히 불빛이 닿는 곳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중년으로 보이는 여인, 약간의 주름이 섞인 얼굴에 흐트러진 머리칼. 그녀는 흔히 생각하는 살수의 외양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녀의 묘한 움직임, 자연의 소리에 곧 섞여 들어갈 듯한 목소리며 날카로운 눈빛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여인의 정체를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납치범이자 리페르의 암살자, 레아였다.

레아는 유리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유리엘의 시선 또한 흔들림 없이 여인을 향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벽안은 조용히 분노할 뿐, 다급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니면 수작이 음험하다는 루시언의 수하? 그것도 아니면 실력은 없지만 개처럼 충성만 한다는 로텐이 키웠나?”

“……뭐지? 그 이름들을 네가 대체…….”

유리엘의 푸른 안광이 그녀를 꿰뚫을 듯 쏘아보았다. 레아는 유리엘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여유롭던 얼굴은,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 듯 굳어지고 있었다.

“뭐, 다 상관없다.”

유리엘이 낡은 연무장을 훑어보며 말했다.

카엘리온은 실패했지만, 그는 두려울 것 없는 레아를 자극하는 방법을 알 것 같았다.

“다 내가 없애 버렸으니까.”

유리엘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는 레아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몇 초만, 단 몇 초만 주어진다면, 유리엘은 쉽게 그녀의 숨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몇 초의 시간이 그에게 절대로 허락되지 않을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사십오, 아니면 오십 보쯤 떨어져 있는 레아는, 당황한 와중에도 건물로 통하는 문과 자신의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유리엘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그녀가 건물 안으로 돌아가 아폴로니아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유리엘은 그녀를 쉽게 죽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폴로니아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 결심한 유리엘은 이를 꽉 물었다. 물론 레아에게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슨 말을…….”

“오래전, 사피로가 작은 심부름을 시켰거든.”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에게는 한 가지 길이 보였다. 아폴로니아를 무사하게 건물 밖으로 내보내는 방법이. 결단은 놀랄 만큼 쉬웠다. 어떤 괴로움이 따를지가 눈에 선했지만 상황을 벗어날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유리엘은 다시 한 번 조소하며 여인을 보았다.

사피로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냉정해 보이던 여인의 진회색 눈동자에 한 줄기 분노가 스쳤다.

“……뭐?”

“페트라가 자신을 몰라주는 것 같으니, 경쟁자를 다 제거하라고 하더군. 그래서 그렇게 했다. 사피로와 달리 그쪽은 무리가 함께 행동하니 쉬웠지.”

유리엘은 무심한 듯 내뱉었다. 그와 대조되게, 레아의 얼굴에 떠올랐던 분노는 더욱 격하게 바뀌었다.

“모두가 하찮았다. 모두 검을 잡을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지.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 중 얼굴을 기억할 만한 자는 없었어. 그들의 대장이라 칭해지던 것들도 마찬가지였지.”

레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유리엘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사피로의 개가 너였나?”

유리엘은 피하지 않겠다는 듯, 말 등에 앉은 채로 그녀를 향해 몇 걸음 다가섰다.

“한밤중에 복면을 쓰고 쳐들어와, 발란의 유령을 통째로 없애 버린 것이 너라고?”

레아가 말했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역시 발란의 유령이었군.”

유리엘이 차갑게 웃었다.

“네 대장은 세 합밖에 받아내지 못하고 쓰러지던걸. 넌 사지가 멀쩡한 걸 보니 운 좋게 그 자리에 없었나 보군. 다른 놈들은 다 어디 하나 못 쓰게 됐거든. 꽤나 꼴사나웠지.”

그가 비웃듯이 말했다. 레아를 자극하려는 그의 계획은 이미 성공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조직이 사라진 것도, 동료들이 쓸모가 없어져 가문에서 쫓겨난 것도…….”

말을 맺지 못하는 그녀의 눈이 다시 한 번 광기로 반짝였다.

“그래. 다 나 때문이다.”

유리엘이 다시 한 번 무심하게 내뱉었다. 레아와의 재회에 별 감흥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과거의 기억은 있었다. 수십 명의 비명소리도, 자신의 검 끝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도. 그러나 그 기억은 새로울 것이 없었고 후회스러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의 검에 쓰러진 자들이 어떤 원한을 품었는지는 중요했던 적이 없었다.

레아가 아폴로니아의 목숨을 쥐게 되기 전까지는.

조금 전까지 레아가 짓고 있었던 미소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나는…… 너를 잊은 적이 없다.”

“그랬나? 이쪽은 몰랐군. 사피로는 그 대가로 페트라 리페르의 총애를 누리느라 바빴지.”

유리엘이 약 올리듯 대꾸했다.

“얼굴을 제대로 봤다면 진작 찾아서 죽였을 거야.”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런데 황제의 곁에서 사랑 놀음이나 하고 있을 줄이야.”

그녀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유리엘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찾아와 죽이다니.”

그가 다시 한 번 대꾸했다.

“네 힘으로는 나를 죽일 수 없다. 소년 시절에도 못했고, 지금은 더더욱 못 하지. 그건 네가 더 잘 알 거야.”

유리엘이 비웃듯 말했다. 레아의 얼굴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조금 전까지는 누구보다 냉정했던 그녀가, 유리엘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러나 쉽사리 움직이지는 못했다.

레아도 알고 있었다. 유리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과거의 기억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비체 백작의 실력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직접 상대하지 않고 아폴로니아를 납치했다. 페트라의 복수를 위해서.

다만, 유리엘과의 인연을 알게 된 지금.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잊고 있었던 다른 원한이 떠올라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유리엘은 가문의 몰락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자였다. 레아의 마음속에서 거대한 증오가 몰아쳤다.

“……아주 잘됐군.”

레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너를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해도, 네 연인, 네 주인의 비명 소리는 들려줄 수 있지.”

그녀는 억지로 조소하며 말했다.

“너를 죽일 수 없다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너를 괴롭혀 주겠다. 네가 평생 잊지 못하도록…….”

“아니, 다른 것을 제안하지.”

유리엘이 다시 말을 몰아 몇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면, 네 칼로 나를 죽일 수 있어.”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그를 지켜보던 모든 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체 무슨…….”

카엘리온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말리려 했다. 그러나 입을 연 것은 레아가 먼저였다.

“헛소리를 하는군. 설마 황제를 풀어 달라고 부탁할 셈인가?”

그녀가 냉정하게 말했다.

“네 목숨값이 비싸다 해서 황제보다 더 비싼 건 아니야. 아니.”

그녀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네 의도가 뻔히 보이니 더더욱 황제를 죽일 이유가 생겼…….”

“한 번 그분을 뵙게 해 줘. 그게 끝이다.”

유리엘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레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뭐?”

“딱 한 번, 그분께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 그러고 나면 누구를 먼저 죽이든 상관없어. 어차피 폐하가 없는 세상에서 살 생각은 없으니까.”

레아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거짓도, 조롱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친놈이군.”

“10분, 10분만 시간을 주면 그 다음은 네가 마음대로 해. 내가 죽으면 네가 포위를 뚫고 도망치는 것도 가능해질지 모르지. 넌 전쟁에서도 쉽게 살아남았으니까.”

그가 말했다. 레아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꽉 쥔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싫다면 당장 검을 뽑겠다. 폐하를 구하지 못한다 한들…….”

유리엘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는 천천히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그분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칠 수는 없게 될 테니까. 물론.”

그의 말투가 한층 더 싸늘해졌다.

“너는 네 동료들이 겪었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아야 할 거다.”

유리엘은 말을 마치고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마지막 말 때문인지, 레아의 호흡이 거칠어진 것이 보였다. 분노 때문이든, 아니면 이제 복수를 할 수 있다는 희열 때문이든, 그녀는 동요하고 있었다.

레아가 카엘리온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그녀만큼이나 놀란 그의 반응을 보고, 레아는 비로소 유리엘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인 듯했다.

“……후회하지 마.”

“그런 건 안 해.”

유리엘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후회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폐하께서 곁에 안 계시면, 유리엘 님은 뭐 하고 사시게요?”

아드리안의 질문에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아폴로니아를 떠나서 살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결단은 너무나도 쉽고 당연했다. 건조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는 부서진 나무에 짚을 얽은 건물 지붕을 다시 바라보았다.

“10분이다.”

음산하게 경고하는 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10분 안에 나오지 않으면 둘 다 죽여 버릴 거야.”

* * *

“이게 꼭 필요한 건가?”

카엘리온이 유리엘의 검을 받아 들고, 그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감과 불쾌함이 뒤섞여 있었다. 유리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겠어. 이게 아니면 다리를 자르겠다는데.”

그는 손목도 내밀었다. 카엘리온은 레아를 체포하기 위해 가지고 왔던, 마정석으로 만든 사슬을 유리엘의 손목에도 채웠다. 그리고 남은 사슬을 그의 어깨에, 가슴에 칭칭 감았다.

마정석으로 만든 결계가 사람을 가두는 것처럼, 마정석으로 만든 사슬은 움직임을 둔화시켰다. 유리엘은 사슬이 감기지 않은 팔다리를 어느 정도 움직일 수는 있었으나 전투는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유리엘은 문득 과거 아폴로니아가 만든 결계를 맨손으로 잘랐던 과거를 떠올렸다. 감히 아폴로니아의 손목을 잡아 벽에 누르자, 그녀는 그의 뺨을 때렸다.

유리엘이 빙긋 웃었다. 별 기억이 다 떠오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범한 사슬을 가져오는 건데.”

카엘리온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그를 추억에서 깨웠다. 유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애초에 날 혼자 들여보내지도 않았을걸.”

출발 전, 레아의 능력을 가늠할 수 없던 그들은 이를 최대치로 상정하기로 했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사람도 부술 수 없는 사슬을 준비한 것이다.

즉, 여러 겹을 몸에 감으면 유리엘조차도 깨뜨릴 수 없을 정도의 결박이었다. 카엘리온의 표정이 더 찌푸려짐과 동시에, 레아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단 10분이다.”

그녀가 유리엘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유리엘은 카엘리온을 보며 물었다.

“술을 가지고 있나?”

“뭐?”

“폐하께서 은근히 술을 좋아하시거든. 독한 술을 줘.”

유리엘이 아폴로니아에 대한 사랑을 처음 깨달았던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벨라들의 축제에서, 그녀는 새하얀 옷을 입고 그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

카엘리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가죽 부대 하나를 내밀었다. 추운 날씨에 고립될 것을 대비해 기사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럼, 잘살도록 해.”

유리엘이 무거워진 팔을 들어 카엘리온의 어깨를 툭 쳤다. 그가 떨리는 시선으로 유리엘을 마주보았다.

“뭐…… 뭐야, 너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유리엘은 돌아서려다 말고 어깨를 으쓱했다.

“거리를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너무 멀어지지도 말고, 바로 여기서 기다려.”

그는 레아가 들을 수 없도록 나직하게 속삭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카엘리온은 확신이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엘이 레아의 앞까지 다가왔다. 사슬과 족쇄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신세였지만 레아는 흠칫 물러섰다. 범접하기 어려운 서늘한 기운이 유리엘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부대에 든 건 뭐지?”

그녀가 의심스럽게 묻자 유리엘은 빙긋 웃으며 부대를 열어 술 한 모금을 삼켰다.

“독주로 편히 보내 드리겠다는 뻔한 수작은 아니니 안심해. 그저 드릴 것이 필요할 뿐이다.”

부대에서는 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레아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손을 저었다. 가지고 들어가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왼쪽 방이다. 난 바로 앞에 있을 거니 허튼 수작 부릴 생각 마.”

레아가 으름장을 놓았다. 그녀는 이미 날카로운 단검을 유리엘의 목에 대 보고 있었다. 어떻게 죽일지를 연구하는 것 같았다. 유리엘은 레아의 행동을 무시한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사슬이 감긴 그의 손에는 술 부대를 제외하면 횃불 하나만 들려 있었다.

찰캉-

그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사슬이 부딪혔다. 발은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거웠으나 유리엘은 계속 걸음을 내디뎠다. 어두컴컴하고 오래된 방이었지만 유리엘은 미소 지었다. 문 너머에 아폴로니아가 있었다.

끼익-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그는 드디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웠다. 횃불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는 횃불을 이곳저곳에 비추어 보았다. 가구라고는 없었다. 그저 그가 비추는 불빛과 그림자, 그리고 오래된 벽만 보일 뿐.

그는 아폴로니아를 찾기 위해 불을 높이 들었다.

찰캉-

그가 다시 한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유리엘?”

듣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엘은 숨 쉬는 것도 잊고 소리가 들린 방향을 찾았다.

“유리엘…… 왔구나.”

횃불을 비추자 방 중앙에 의자에 앉은 채 밧줄에 묶여 있는 아폴로니아가 보였다. 그녀는 기절했다가 막 깨어난 듯, 몽롱해 보였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마음이 놓이면서 동시에 심장이 저려 왔다. 유리엘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 상황이 되어서도, 그는 아폴로니아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언제나 총기로 반짝이던 눈은 몽롱할 때조차도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았다.

“폐하.”

유리엘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족쇄가 있어서 느렸지만 최대한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다. 그는 아폴로니아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꼴은 뭐야?”

그녀가 천천히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유리엘은 아폴로니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빙긋 웃었다.

“각인한 녀석 덕분에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납치범이 만만치 않아서 말이죠.”

그는 아폴로니아의 앞까지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가 사랑하는 얼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밖에 있나 보구나.”

아폴로니아가 힘없이 말했다. 그녀는 몽롱한 와중에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하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 넌 어떻게?”

“제 목숨을 담보로 10분의 시간을 달라고 했죠.”

유리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아폴로니아의 입술이 불안하게 떨렸다.

“10분이라니?”

“……작별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폴로니아의 시선이 그를 향한 것을 알면서도, 유리엘은 바닥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차마 그녀를 마주 보기 어려웠다.

“……누가 어디를 가는데?”

그녀가 날카롭게 물었다. 언제나처럼 정확한 질문이, 유리엘을 조금 웃게 만들었다.

“유리엘?”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가 애매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보고 싶었던 아름다운 금적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게 대체…….”

“제가 떠나니까요. 그리고.”

유리엘이 말을 이었다. 아폴로니아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폐하는……”

“하지 마.”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꼈는지, 그녀가 유리엘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유리엘은 그저 무거운 손을 들어 아폴로니아의 뺨을 쓸었다.

“폐하는 남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폴로니아가 거칠어진 호흡을 내뱉었다.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폐하…….”

“방법이 있을 거야. 난…….”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난…….”

어둡고 좁은 방에 묶여 있는 상태로 떠오르는 방법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줄을 풀어 줘.”

그녀가 부탁하듯 말했다. 유리엘의 눈이 슬프게 빛났다.

“유리엘. 줄을 풀어.”

그가 부탁을 듣지 않자 아폴로니아가 명령했다. 그가 절대로 불복할 수 없을 어조였다. 그러나 유리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줄은 자연스럽게 풀릴 겁니다.”

그는 횃불을 들지 않은 손으로 다시 한 번 아폴로니아의 뺨을 쓸었다. 그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유리엘, 당장 이거 풀어! 풀고…….”

아폴로니아가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밧줄로 묶인 손목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도 그녀를 거역한 적이 없었던 유리엘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횃불을 옆에 있는 벽에 걸어 둔 채, 천천히 들고 온 술 부대를 열었다.

“유리엘!”

그녀가 다시 소리쳤다. 그러나 유리엘은 그 사실을 모르는 척, 술 부대를 들고 일어섰다.

“유리엘, 대체 뭐 하는…….”

촤악-

그는 부대를 흔들어 그 안에 들었던 액체를 자신과 아폴로니아의 주변에 뿌렸다.

촤아악-

독한 술 냄새가 퍼졌다. 그는 멈추지 않고 두 사람의 주변에, 나머지 바닥에, 그리고 닫혀 있는 문에도 술을 뿌렸다. 그러고는 벽에 걸렸던 횃불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유리엘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너 설마…….”

“줄은 알아서 풀릴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겠죠.”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다시 아폴로니아와 눈을 맞추었다.

“당장 풀어.”

아폴로니아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횃불을 다시 걸어. 그런 짓 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녀의 목이 조금씩 잠기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자 유리엘이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닦아주었다.

“여기서 불을 지르면…… 너는…….”

그녀가 말했다. 유리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건물 전체에 불을 지르려는 것이었다. 들고 온 횃불과 술로. 건물은 그를 집어삼키고, 레아도 집어삼킬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은 화염 속에서도 살아날 수 있었다.

태양신의 후손, 아폴로니아만큼은.

“지붕이 무너지기 전에는 나오시는 것이 안전할 겁니다. 밧줄은 그 전에 불에 타서 끊길 테고 레아도 그 전에 빠져나갈 테니 안전합니다.”

유리엘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이마를 아폴로니아와 맞대었다.

“유리엘, 제발…….”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녀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애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항상 그녀를 지탱하던 이성은 없었다.

유리엘의 은빛 머리칼이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홀릴 것 같은 푸른 눈은 살짝 휘어지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살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없어도.”

유리엘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사슬에 묶인 채 횃불을 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지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안 돼!”

아폴로니아가 소리쳤다. 그녀는 계속해서 밧줄을 풀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단단히 감긴 그 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유리엘은 거세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같은 눈,

그 눈이, 아폴로니아의 모든 것을 외우려는 듯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녕히.”

유리엘은 천천히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달콤하지도, 황홀하지도 않았다. 작별의 키스 같은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유리엘을 뿌리치려 했다. 그는 물러나지 않고 달래듯 다시 그녀의 입술에 제 것을 겹쳤다. 다시 밀어내자 또 다시 돌아왔다. 결국 아폴로니아가 그를 받아 줄 때까지.

“하아…….”

길지도 짧지도 않은 입맞춤이 끝나자 유리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안타깝다는 듯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아폴로니아가 다시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툭.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마치 실수라도 되는 듯, 들고 있던 횃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유리엘.”

아폴로니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입술이, 온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화르르륵-

새빨간 불길은 순식간에 두 사람을 둘러쌌고, 바닥을 타고 방 벽으로, 문으로 퍼져 갔다. 아폴로니아는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화염으로 둘러싸인 채 금방이라도 집어삼켜질 듯한 유리엘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그는 만족했다. 아니,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폴로니아를 위해 죽는 것, 결국 그것이 유리엘에게 가장 어울리는 최후였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카엘리온이 옆에 있던 기사에게 물었다.

“10분이 되어 갑니다.”

카엘리온은 조용히 말에서 내렸다. 그는 천천히 아폴로니아가 갇혀 있는 건물에 접근해 볼 생각이었다. 레아는 건물 안에 있었고, 바깥은 어두웠다. 수십 명에게 둘러싸인 상황이라면 한 명의 움직임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내 자리를 대신해라.”

그가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말에서 내려 카엘리온의 말 위에 올랐다.

“내가 나오지 않는다면…….”

카엘리온이 나직하게 지시를 내리려던 참이었다.

화륵-

어둡던 건물이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저게 뭐…….”

카엘리온이 얼굴을 찌푸리고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 창문은 없었으나, 낡아서 갈라진 벽 틈새로 보이는 것은 분명히 환한 빛이었다.

“대기해.”

카엘리온이 지시를 내리고는 건물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콰직-

그 순간, 낡은 벽의 한쪽에 있던 균열이 커졌다. 작은 부분이었지만 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카엘리온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화르륵-

벽을 무너뜨린 것은 분명히 불이었다. 누군가가 건물의 안쪽에서 불을 질렀다. 카엘리온은 무언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유리엘이 생각한 게 이거였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목숨을 내놓겠다던 유리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빌려 갔던 술도.

건조한 날씨에 나무와 짚으로 된 건물, 그 안에 갇힌 아폴로니아.

답은 명백했다. 그는 아폴로니아만 남기고 모든 것을 태워 버리려는 것이었다.

“구출을 준비해라! 안에 유리엘과 폐하가 있어!”

카엘리온이 소리쳤다. 기사들은 하나둘씩 말에서 내려 건물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콜록!”

그가 무언가 지시하려던 찰나, 건물 안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흐트러진 머리칼, 언뜻 평범해 보이는 외모. 레아였다.

“콜록! 허어억!”

안에서 연기를 많이 마셨던 건지, 그녀는 연신 기침을 해댔다.

“체포해.”

카엘리온이 싸늘하게 명령하자, 기사 중 몇 명이 동시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레아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카엘리온은 시선을 다시 건물로 돌렸다.

몇 초 만에 거대해진 불길은 이미 건물 구석구석에 번진 것 같았다. 불꽃은 건물을 통째로 태워 버릴 것 같은 기세로 타올랐다.

콰직-

묵직한 소리가 들렸고, 지붕 한쪽이 무너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카엘리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두 사람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젠장…….”

그가 욕설을 뱉었다.

“유리엘, 네가 끝내…….”

불길이 건물을 다 태울 정도라면, 유리엘은 이미 화마에 집어삼켜졌을 것이다. 숨을 곳도, 빠져나갈 곳도 없었다.

콰지직-

지붕의 다른 한쪽이 무너졌다. 아폴로니아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너무나 위험했다.

“들어가겠다.”

그가 차고 있던 검을 던지고 말했다.

“안 됩니다. 이미…….”

뒤에 있던 기사가 말렸으나 카엘리온은 듣고 있지 않았다. 다급한 상황 속에서,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같은 상황에서, 아폴로니아는 자신을 구하지 않았던가.

“비켜.”

카엘리온이 기사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늦었어도 상관없다. 두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든 그들을 바깥으로 데려올 것이다. 그는 건물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미 불에 휩싸여 형체도 위치도 파악이 어려운 문을 찾았다.

그가 입구를 향해 뛰려던 찰나였다.

“허억!”

또 하나의, 레아의 것보다 큰 누군가의 모습이 건물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이었다. 작은 쪽이 큰 쪽을 감싸 안고 끌고 나오는 모양새였다. 안긴 쪽은 여기저기 불이 붙은 모습이었다.

“카엘!”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들판에 울렸다. 카엘리온은 1초도 낭비하지 않고 그녀에게 뛰어갔다.

“폐하?”

아폴로니아가 카엘리온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비로소 두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빨리…… 불을 꺼 줘.”

그녀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카엘리온은 그녀의 품에 무엇이 안겼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망토를 벗어서, 아직까지 타고 있는 유리엘의 신발이며 옷자락에 덮었다.

후우욱-

천이 덮이자 그제야 불은 꺼졌다. 아폴로니아는 땅에 주저앉은 채 유리엘을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카엘리온이 곁에 앉아 그를 살폈다.

옷은 물론, 피부 여기저기, 머리칼까지도 검게 그을려 있었다. 나오는 길에 부딪혔는지 찰과상도 있는 것 같았으나 이리저리 찢긴 옷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폴로니아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은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그가 유리엘의 얼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눈을 들자, 아폴로니아의 뺨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보였다.

“폐하, 설마…….”

카엘리온의 목소리가 잠겼다. 그는 떨리는 손을 유리엘의 얼굴에 가져갔다. 숨을 쉬는지 확인해 보려 했으나 코 밑에 댄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 유리엘…….”

그가 애써서 유리엘의 이름을 불렀다.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유리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안 돼!”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눈앞의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사내가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힘없이 늘어졌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유리엘!”

카엘리온이 다시 한 번 유리엘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유리…….”

“조용히 좀 해.”

감정이 목 끝까지 차서 터지려던 찰나,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얄미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

“숨 쉬게 손 좀 치우고.”

분명히 유리엘이었다. 명분상 아랫사람이면서 대공인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그의 말투였다. 카엘리온이 멍하게 있자 유리엘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들어 카엘리온의 손을 멀리 밀었다.

“뭐, 뭐야, 살아 있었어?”

카엘리온은 눈만 깜빡거리다가 아폴로니아를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함께 울고 있는 줄 알았던 그녀가 너무나도 침착하게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뺨에는 분명히 흘린 지 몇 분밖에 안 된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있었으나, 지금의 표정은 멀쩡해 보였다.

“우, 우는 게 아니었습니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유리엘이 안에서 연기를 마시고 기절했었어. 그러고 나서 바로 나왔지.”

아폴로니아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본의 아니게 카엘리온에게 충격을 준 것이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하, 하지만 누이!”

당황한 그는 폐하라는 단어를 잊고 과거의 호칭으로 아폴로니아를 불렀다.

“좀…… 뭐랄까, 신기할 정도로 멀쩡한 거야. 불을 뚫고 나오는데. 다치기는 했지만 치명상은 없어.”

그녀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아까 분명히 온몸을 떨고 있었는데…….”

“아, 그건.”

아폴로니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유리엘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으나 조금 전 느꼈다고 생각한 절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슬에, 족쇄에, 안 그래도 나보다 머리 하나가 큰 사람을 운반하면 온몸이 떨리는 게 당연하잖아.”

배신감에 치를 떠는 카엘리온에게, 아폴로니아가 쐐기를 박듯이 대답했다.

“다 울었으면…… 이거 푸는 거나 도와줘.”

유리엘이 사슬을 찬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언제!”

카엘리온은 그런 적이 없다고 투덜대면서도 유리엘의 말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분했지만 스스로 착각한 것이라 화를 낼 핑계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을 향해 돌아선 후, 살짝 젖은 눈을 닦으며 열쇠를 가지러 갔다.

그가 멀어진 뒤, 유리엘은 아폴로니아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는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아폴로니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온몸에 상처를 입고 죽다 살아난 주제에 그녀를 더 걱정하는 유리엘의 태도에 황당해해야 할지 감동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유리엘의 뺨을 쓸었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그의 귀에 속삭였다.

“이제 돌아가자.”

유리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폴로니아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전쟁도, 위험도,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은 돌아갈 것이다.

황궁, 그녀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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