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그녀의 수 (2)
아폴로니아는 리페르성에서 삼백 보 떨어진 곳에 말을 세우고, 유리엘 한 명만을 대동한 채 성문 앞까지 다가갔다. 날짜가 당겨졌을 뿐, 페트라가 요청한 그대로였다.
사전에 누구도 그녀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서슬 퍼런 지시가 있었기에, 기사들은 조용히 주군의 명을 따랐다. 천 명의 병력은 아폴로니아의 말과 함께 선 채 그녀를 기다렸다.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은 은빛 갑주를 두른 채 검을 차고 있었다. 투구는 쓰지 않았지만, 분명히 전쟁에 나서는 군주의 모습이었다. 다만 독특한 것은, 유리엘이 커다란 자루 두 개를 질질 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반쯤 틀어 올린 아폴로니아의 긴 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눈에 띄는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툭-
아폴로니아가 멈추어 서자, 유리엘이 끌고 있던 자루를 내려놓았다. 그 속에서 미세한 꿈틀거림이 보였다.
“성문을 열어라.”
아폴로니아가 성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끼이익-
대답 대신, 활시위가 당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이었지만 성벽 위에서 수십 개의 화살촉이 번뜩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폴로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
그녀가 손짓하자 유리엘이 던져 놓았던 자루 하나를 풀었다. 성벽 위의 화살촉이 그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보았으나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쏠 수 있으면 쏘라지.”
아폴로니아가 말하자, 유리엘이 자루를 뒤집었다. 안에 있던 커다란 무언가가 굴러 나왔다.
“아, 아니…….”
“잠깐, 저것은 설마…….”
조용하던 성벽 위쪽이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곧 그들을 쏠 것처럼 활을 겨누었던 궁수들이 차마 시위를 당긴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유리엘은 자루를 멀리 던지고, 그 속에서 나온 물건, 아니 사람의 팔을 잡고 상체를 세우게 만들었다.
“소, 소공작님!”
성벽 위에서 누군가의 당황한 외침이 들렸다.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자 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점점 더 퍼졌다.
“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하지만 소공작님을 맞추면 어떻게 합니까?”
“소공작께서 대체 왜…….”
누구도 활시위를 놓지 못했다. 아폴로니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으으…….”
꿇어앉은 가레스가 정신을 차렸는지 신음을 토해 냈다. 반쯤 찢어진 상의가 너덜거렸으나 몸에 별다른 상처가 없던 그는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작은 눈이 아폴로니아를 발견하고는 몇 번 껌뻑거렸다. 두려워해야 할지, 풀어 달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폴로니아는 품에서 반지를 하나 꺼냈다. 페트라가 보낸 자가 몸에 지니고 있던 그 물건이었다. 소리를 증폭시키고, 듣는 모든 이의 집중까지 이끌어 내는 주술이 걸린 것.
반지를 보는 순간 아폴로니아의 얼굴에 싸늘한 분노가 피어올랐다. 먼저 그 물건을 가지고 황궁을 방문했던 전령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레스를 힐끗 보고는 다시 성벽 위로 시선을 돌려, 참았던 이름을 불렀다.
“페트라!”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리페르성 전체에 크게 울렸다.
“페트라 리페르!”
그녀는 반지를 손에 쥔 채 다시 한 번 외쳤다.
가레스가 더욱 커진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가이우스나 리페르 공작을 제외한 누군가가 그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는 표정이었다.
아폴로니아는 곁눈으로 그를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멍청한 눈빛이 이만큼 거슬렸던 적이 없었다.
“지금 당장, 아드리안을 내 앞으로 데려와.”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으나 성 안은 조용했다. 성벽 위의 사람들이 당황해서 서로 마주 보는 모습이 눈에 띌 뿐, 페트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좋아. 계속 안 나올 수 있는지 보도록 하지.”
아폴로니아는 손에 쥐었던 반지를 땅으로 던졌다.
툭-
반지는 꿇어앉은 가레스의 무릎 바로 앞에 떨어졌다.
“이게 뭐…….”
그가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추위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쉬익-
아폴로니아는 차고 있던 검을 뽑아 그의 목에 겨누었다.
“으, 으허어어억!”
공포에 찬 가레스의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폴로니아의 금적안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휙-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그의 목을 가리켰던 검을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검집을 들어 올렸다.
“입을 크게 벌려, 가레스.”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가레스의 등과 팔에 소름이 돋았다.
“아, 아폴로니…….”
휙- 퍼어억!
가레스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아폴로니아가 든 검집이 그의 등허리를 강타했다.
“끄아아아아악!”
예상치 못했던 고통에 가레스가 비명을 질렀다. 반지에 의해 증폭된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리페르성 내부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상체를 둥글게 말아 엎드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끄으으으…….”
휘익- 퍽!
그가 호흡을 고를 틈도 없이 아폴로니아의 검집이 다시 한 번 가레스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어깨였다.
“크으으으읍!”
가레스는 다시 한 번 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어깨와 등에는 붉은 멍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크게 벌어진 그의 입술 바로 앞에, 아폴로니아가 던져 놓은 반지가 있었다.
“아직인가?”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가레스의 비명 소리가 성 안의 모두에게 들린 것은 분명했다. 누군가는 활을 거두었고, 누군가는 우왕좌왕하며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성문을 열지 않았다. 아폴로니아의 표정은 한층 더 싸늘해졌다.
“더 크게 울어.”
그녀가 가레스에게 다시 말했다. 그러고는 그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다시 검집을 들어 올렸다.
퍽! 퍼억! 퍽!
“끄으으으악!”
“아아악!”
“아흐으으윽!”
수십 번의 매가 그의 등에, 어깨에, 팔에 내리꽂혔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가레스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를 지키는 사람 한 명 없이, 사지가 묶인 채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매를 맞는 상황이 그의 공포심을 더욱 자극했다.
“제, 제발…… 제발 그만하십시오. 제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할 테니 제발 그만…….”
쉬익- 빠악!
아폴로니아는 애원하는 가레스의 어깨를 다시 한 번 내리쳤다. 이번에는 뼈가 부서진 것인지, 조금 전보다 무거운 소리가 들렸다.
“크아아아아악! 아흐흐흐흐…….”
“더 크게.”
그녀는 가레스가 말한 내용은 들리지도 않았다는 듯 차갑게 내뱉었다.
“헉, 허어어억, 헉.”
가레스가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자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입을 다물면 그 입술을 잘라 버릴 거야.”
아폴로니아의 소름 끼치는 협박이 들리고, 등뼈에 다시 고통이 가해졌다. 가레스는 울음을 토해 냈다.
“흐으으윽!”
“아직 나오지 않으려나 보구나.”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으로 부족한가 봅니다.”
신음하는 가레스를 보는 그의 시선에는 아무런 연민도 없었다. 마치 물건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가레스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는 그 눈빛을 알았다. 바로 자신이 다른 이를 보던 표정이었다.
제 손으로 마물에게 던져 주어 뜯어먹히게 만들었던 아폴로니아의 백마를 볼 때도, 물건이나 다름없던 아드리안을 볼 때에도, 셀 수도 없는 수의 시종이며 시녀들을 때리거나 희롱할 때에도, 가레스는 그렇게 감정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무렵의 그에게는 오직 욕망만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공포에 전신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죽이지 않되, 죽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아폴로니아가 들고 있던 검집을 유리엘에게 건넸다. 묵직한 목재로 만든 그것은 검을 보관하기보다는 사람을 때리는 용도에 더 적합한 물건이었다.
쉬이이익- 퍽!
유리엘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집을 휘둘렀다. 그 뭉툭한 끝이 가레스의 뺨을 강타했다.
살면서 느껴 본 적 없는 아픔이었다. 조금은 버텨 볼 생각이 남아 있었던 가레스는 그 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고통을 제외하면 아무런 감각도, 생각도 없었다.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충격으로 얼어붙었던 가레스의 두 눈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흐, 흐으으으으! 흐아아악!”
유리엘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검집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가레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말았다. 타격으로 인한 충격이 전해져서인지, 가레스 옆에 놓여 있던 두 번째 자루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어…….”
그는 필사적으로 무슨 말을 하려 했다.
퍼어억!
“아악! 어머니!”
유리엘이 두 번째로 휘두른 매가 그의 등에 꽂히자, 가레스는 필사적으로 페트라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이이이! 소자를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유리엘의 팔은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허공에 줄이 몇 번 그어지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가레스의 등은 검붉은 피와 멍으로 뒤덮였다.
몇 분이 흘렀는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유리엘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가레스의 온몸에 매질을 가했다.
퍼억! 퍽!
“어, 어머니…… 어머니…….”
쉬어 버린 목소리로 더듬거리던 그는 버티다 못해 무릎을 꿇은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유리엘이 그를 다시 세우려 했지만 그에게는 비대한 몸을 지탱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잘 버티는군. 페트라 리페르도, 그 남편도.”
아폴로니아가 깊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리를 부러뜨리면, 다시 소리를 지를까.”
피처럼 붉은 눈동자 속 황금빛이 가레스를 찌를 듯 쏘아보았다.
“이미 목소리가 다 쉰 것 같습니다.”
유리엘이 가레스를 발로 툭 차며 말했다. 가레스는 신음 소리를 토해 낼 뿐 조금 전과 같은 비명을 지르지는 못했다.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힐끗 돌렸다. 쓰러진 가레스를 향했던 시선이 그 옆에 놓인 자루를 향했다.
“……니샤를 끄집어내.”
아폴로니아의 말이 떨어지자 유리엘은 곧바로 그 말을 따랐다. 그가 자루를 열어 뒤집자, 안에 있던 소년이 기침을 토하며 굴러 나왔다.
“커헉! 켁!”
“바로 앉아라, 니샤.”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녀를 힐끗 올려다본 니샤는 덜덜 떨면서도 아폴로니아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눈이 니샤를 훑었다. 아직 열여섯, 열일곱 정도밖에 안 된 니샤는 키도 덜 자랐을뿐더러 젖살이 다 빠지지도 않은 소년이었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땅에 떨어뜨린 채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자루 속에서, 그는 형의 비명을 빠짐없이 들었을 터였다.
“잘 들어라, 니샤.”
아폴로니아는 니샤의 옆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속삭였다.
“형과 같은 꼴이 되고 싶지 않다면 지금부터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는 거야.”
나지막한 속삭임에, 니샤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시작해. 성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울어.”
아폴로니아가 명령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서늘했다.
필요하면 며칠 동안이라도 할 수 있었다. 페트라의 아들들은 쉬지 않고 그녀를 부를 것이다. 그녀의 귀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어느덧, 어둠이 걷히고 새벽의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침실로 돌아온 페트라는 의자에 앉아 귀를 틀어막았다.
“흐으으으윽!”
듣지 않으려 했으나 가레스의 울음은 리페르성의 견고한 외벽을 넘고 문을 뚫어 온 성에 울렸다.
“어머니!”
귀를 찢어 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였다. 페트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부인…….”
갑옷을 입은 채 페트라를 뒤따라온 리페르 공작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나가 봐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부인! 가레스는 우리의 아들이오!”
공작이 애원하듯 말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성문을 열고 뛰어나가 아들의 온몸에 내리꽂히는 매를 대신 맞고 싶은 얼굴이었다.
“안 됩니다. 그 계집의 계획에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페트라가 다시 한 번 잘라 말했다.
“어, 어머니이이이이이이! 소자를 살려 주세요!”
귀를 찢을 것 같은 울부짖음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울며 자신을 부르는 아들의 비명 소리에 페트라는 주먹을 꽉 쥐고 버텼다. 공작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가레스는……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페트라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말했다. 다시 뜬 공작의 두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가문에 후계자는 한 명만 필요하지 않습니까.”
“부인의 말은…… 그럼.”
“니샤는 어디 있습니까?”
페트라가 물었다. 공작은 여전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발! 제발!”
가레스의 애원이 벽을 뚫고 전해졌다. 공작은 페트라의 옷깃을 붙잡고 부탁하듯 말했다.
“부인, 지금 밖에서 친아들이 부인을 부르고 있소!”
“그것이 아폴로니아 그 계집이 노리는 것 아닙니까!”
페트라가 참지 않고 소리를 쳤다. 어쩌면 자신의 소리가 가레스의 비명을 덮기를 바라는 마음에 더 크게 내지른 것 같기도 했다.
“비명은 무시해야 합니다. 그 물건이 적군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지 않습니까! 끝까지 무시해야 합니다!”
공작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뛰쳐나가야 할지, 아드리안을 데려와야 할지, 아니면 그곳에 있어야 할지,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버티세요. 얕은 수에 휘말리면 정말로 끝입니다. 아폴로니아를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다면, 아드리안은 더더욱…….”
공작을 설득하던 페트라의 말은 누군가의 비명에 의해 다시 끊겼다.
“어머니!”
공작이 눈을 크게 떴다. 한 줄기 이성이 남아 있던 조금 전과 달리, 그는 모든 희망을 빼앗긴 표정이었다.
“니샤!”
공작의 외침에 따라, 페트라의 얼굴도 잿빛으로 굳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머니이이이! 소자를 살려 주세요!”
틀림없는 니샤였다. 언제나 순종적이고, 불필요하게 다정했던 둘째 아들. 가레스를 제외하면, 리페르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니샤가 대체 왜…….”
페트라가 두 손을 꽉 쥐었다.
“어머니…… 으흐흑.”
니샤가 다시 한 번 울부짖자 공작이 거친 호흡을 뱉었다.
“당장 아드리안을 데려와야겠소.”
페트라는 몸을 돌리는 공작의 팔을 붙잡았다.
“부인!”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를 막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아폴로니아가 짠 판에 휘말리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아들의 죽음을 보는 것보다도, 그쪽이 더 괴로울 것 같았다.
“부인, 제발!”
크게 뜬 공작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처음 보는 그 모습에 페트라의 눈이 커졌다.
“가레스와 니샤는 제 아들이기도 합니다!”
공작은 애원하듯 말했다. 언제나 그녀의 뜻을 우선시했던 남편의 모습에, 페트라의 눈동자가 강하게 흔들렸다.
“리페르의 후계자일 뿐이 아니라…… 제 아들이기도 하단 말입니다.”
공작은 페트라의 팔을 꽉 붙잡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간절한, 강렬한, 그리고 결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말리지 마십시오!”
공작이 소리쳤다. 처음으로 마주한 남편의 분노에 페트라가 흠칫 놀랐다. 두 사람은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페트라는 무언가 반박을 하려 했지만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아…….”
작은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천천히, 페트라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단순히 공작의 말에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페트라도 알고 있었다. 가레스와 니샤를 둘 다 잃으면 가문은 사실상 끝난다는 것을. 그것은 사실상 페트라 자신의 끝이기도 했다.
“가겠습니다. 아들을 되찾으러.”
페트라는 그를 말릴 방법도, 명분도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을 데려오라 이르세요.”
그녀는 나오지 않으려는 말을 겨우 뱉었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 * *
끼이이이익- 쿵.
마침내 성문이 열렸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가레스도, 땀에 젖은 채 한참 동안 목이 쉬어라 울던 니샤도 고개를 들었다.
성벽의 궁수들은 어느새 활을 거두었다. 성문 뒤에서, 어둠과 안개에 반쯤 묻힌 실루엣 몇 개가 나타났다. 검이며 활로 무장한 호위 기사들, 그리고 그 틈으로 보이는 두 여인.
아폴로니아의 얼굴에 희미한 반가움이 보였다.
“……아드리안.”
분명히 그녀였다. 못 본 사이에 초췌해진 아드리안은 입가에 피가 묻은 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입술을 움직여 인사를 하려 했으나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자신의 표정이 다시 굳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이, 아드리안의 팔을 붙잡고 있는 여인에게 옮겨 갔다.
“늦으셨군요, 고모님.”
“네가 일찍 온 것이겠지, 니아.”
아폴로니아와 페트라는 금방이라도 상대를 물어뜯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과거 아폴로니아를 마주칠 때면 형식적인 인사와 존대를 했던 페트라는 이제 목을 뻣뻣하게 새운 채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더 이상 황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아폴로니아는 불필요한 말싸움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아드리안을 보내면 가레스와 니샤를 놓아드리죠.”
차가웠던 페트라의 얼굴이 작게 경련했다. 무언가 불쾌한 사실을 확인한 것처럼.
“……공작가의 두 후계자의 목숨이, 정말로 시녀 한 명의 목숨과 동등하다 여기나 보구나.”
그녀의 옆에 있던 아드리안이 입술을 다시 한 번 움직였다. 미소를 의도한 것 같았으나 힘이 빠져서 보이지 않았다.
페트라의 대답을 자신의 제안에 대한 긍정으로 받아들인 아폴로니아는, 가레스의 포박을 풀고 앞에 선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를 데려가라는 뜻이었다.
“공작가의 모든 것을 합쳐도 아드리안의 목숨값이 되지 못합니다, 고모님.”
축 처진 비대한 몸을 끌고 가는 기사들을 보며,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페트라의 얼굴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를 으드득 갈며 아드리안을 잡은 손을 놓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드리안은 페트라의 손이 떨어지는 순간 양옆의 기사들을 뿌리치고 아폴로니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힘이 없어 휘청대는 그녀를, 유리엘이 다가가서 부축했다.
“왜냐하면.”
아폴로니아는 페트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리페르 가문은 다시 태양을 보지 못할 테니까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페트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무언가 대답을 하려 했지만, 그녀의 목은 이유 없는 불안감에 잠식된 듯 소리를 제대로 내지 않았다.
“……뭐?”
간신히 한 마디를 뱉은 페트라는 눈을 부릅뜨고 아폴로니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시선은 그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차가웠다.
“고작 그 병력으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페트라가 억지로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리페르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곳까지 온 것은 네 실수야.”
“조금 지나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페트라는 무언가 말을 더 하려 했으나, 아폴로니아는 그녀를 무시하다시피 하며 아드리안의 다른 쪽 팔을 잡아서 부축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녀는 리페르성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니샤는 우리가 안전해진 후에 놓아드리겠습니다. 지금 보내 드리면 저 위의 궁수들이 우리를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요. 그러고 나면 그 잘난 정예병으로 나를 죽이든 말든 좋을 대로 하시죠.”
아폴로니아는 눈물과 땀에 젖은 얼굴로 여전히 꿇어앉아 있는 니샤에게 일어나라 손짓하며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는 걱정은 마세요.”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 땅에 떨어졌던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반지를 손에 쥔 채 말했다.
“황제로서 약속하건대, 니샤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겁니다.”
증폭된 그녀의 말은, 양측 진영에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페트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휙 돌렸다. 니샤가 눈치를 보다가 그녀를 따라갔고, 아드리안을 부축한 유리엘이 그 뒤를 따랐다.
“천막 안으로 들여라.”
아폴로니아가 기사단에게 명령했다. 미리 준비되었던 천막 안으로, 누군가가 아드리안을 들어서 옮겼다. 아폴로니아는 말에 올라 그 모습을 지켜볼 뿐 따라가지 않았다.
하늘은 조금 전보다 밝아져 있었다. 시린 새벽 공기 속에 짙은 안개가 퍼져 나갔다.
“준비는?”
아폴로니아가 짧게 물었다. 어느새 에반젤린이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녀 또한 갑옷을 걸치고 말 위에 오른 모습이었다. 말의 안장에는, 언제나 데리고 다니는 작은 외눈까마귀도 있었다.
“완벽해요.”
“좋아.”
아폴로니아가 소리 낮춰 대답했다.
“신호는?”
“세드릭을 저쪽에 보내 두었으니 그 애가 할 수 있어요. 아까부터 그 녀석이랑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어요.”
“페트라의 전령이 카엘을 찾으러 갔었을 텐데.”
에반젤린은 대답 대신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목을 그어 보였다. 전령은 카엘리온 쪽에서 이미 처리했다는 뜻이었다.
“신호가 뜨는 순간 공격해.”
아폴로니아가 속삭였다.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대기 중이던 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뒤로 선 천 명의 기사들에게 빠른 수신호를 보냈다. 페트라는 그들이 카엘리온과 합류하는 순간 공격할 거라 예상했을지 모르나, 실질적인 합류는 이미 되어 있었다.
“폐하, 저 녀석은 어떻게 할까요?”
곁으로 다가와서 선 유리엘이 나직하게 물으며 고갯짓을 했다. 그의 턱이 가리킨 방향에는 겁에 질린 표정의 니샤가 서 있었다. 여전히 포박이 풀리지 않은 채였다.
리페르 성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직 닫히지 않은 성문이 보였다. 그들은 니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보내지 말고 그대로 둬.”
“예?”
녹스와 에반젤린이 동시에 물었다.
적장과의 약속도 약속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황제로서 그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아폴로니아답지 않았다.
“약속을 깨겠다는 것이 아니야. 안전해지면 놓아줘야지.”
아폴로니아는 조금 전 자신이 페트라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전하지 않잖아?”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니샤를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옆에 대기 중이던 기사에게 명령했다.
“넌 여기 남아. 그 애로부터 눈을 떼지 마라.”
기사는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황제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기사들은 이미 그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고 하여 그녀에 대해 실망한 자는 없었다.
아폴로니아는 심호흡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이-
“신호예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그녀는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스르릉-
아폴로니아가 허리에 찼던 검을 뽑아 높이 들었다.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새벽이 가기 전까지 리페르성을 점령하고 반역자를 처단할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기사들의 틈으로 낮게 깔렸다. 그들은 한 명씩 그녀를 따라 검을 뽑아 들었다.
“항복하는 자는 살리고, 저항하면 죽여라.”
그녀는 검을 든 팔을 쭉 뻗어 페트라가 기다리는 성문을 가리켰다. 어슴푸레한 공기 중에도, 은빛 갑주와 이를 덮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눈부시게 빛났다.
“오늘의 태양이 뜰 때, 성의 주인은 바뀌어 있을 것이다.”
짧고 강한 명령이었다. 아폴로니아의 마지막 말이 떨어진 순간, 천여 명의 기사들은 동시에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말고삐를 단단히 잡은 그들은 한 명 한 명 면갑을 내렸다.
“진격!”
녹스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그들은 한 몸이 되어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아폴로니아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리페르의 성문,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리페르의 가문의 멸망이었다.
* * *
아폴로니아를 보낸 후, 성 안쪽을 향해 돌아선 페트라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몇 시간 전까지는 완벽한 호흡으로 훈련을 하던 기사들이 어딘가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 내려와 있던 루이스 리페르 공작을 힐끗 보았으나,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니샤를 향해 고개를 빼고 있었다.
언뜻 보면 자연스러웠으나, 그 표정은 몇 시간 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힘이 풀린 상태였다. 똑같이 니샤를 기다리면서 수시로 사병의 상태를 확인하는 페트라와 달랐다.
페트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사기가 꺾인 것이었다. 몇 시간 동안 고막을 찢어 버릴 것처럼 들려왔던 가레스의 비명이 그 원인일 터였다. 지르는 사람도 괴로웠을 것이나, 그 소리를 듣는 것 또한 고문이었다. 리페르성의 모든 이가 그러한 고문을 당한 참이었다.
그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아폴로니아와 그녀의 기사단이 언제 카엘리온과 합류해 성을 향해 진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리페르 가문의 삼천 정예병은 그 기세가 눈에 띄게 죽어 있었다.
“적들이 눈앞까지 왔는데 무엇 하는 짓들입니까?”
페트라는 루이스 리페르 공작을 향해 일갈했다.
“대공이 합류하기 전에, 먼저 나가서 저들을 쳐야 합니다. 일분일초도 버릴 시간은 없습니다.”
온몸이 으스러진 아들을 보았던 탓인지, 공작은 여전히 안색이 파랬다. 그는 최면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갑주를 정리했다. 주변의 몇몇 다른 사병들도 비슷한 행동을 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멍해 보였다. 그저 받았던 훈련을 기초로 기계적인 준비를 할 뿐이었다.
페트라는 아직 열려 있는 성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출전 준비를 하는 공작을 보았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녀를 감싼 공기가 묘하게 떨리는 것만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페트라의 온몸을 감았다.
“후우…….”
페트라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녀는 문득 성벽 위에 둘러선 경비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가레스의 비명 소리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눈을 꽉 감고 있었다.
끼이이이-
바로 그 순간, 불길하고 소름 끼치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리페르 성 뒤쪽의 허공을 갈랐다. 그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울음소리만 들려온 것이다. 강한 예감 같은 것이 다시 한 번 페트라의 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시 열려 있는 성문을 바라보았다.
“당장…….”
페트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성문을 닫아라.”
눈이 동그래진 병사들이 그녀를 미친 사람 보듯 바라보았다.
“두, 둘째 공자님이 아직 돌아오지…….”
“당장 닫으라고 했다!”
페트라가 일갈했다. 당장은 니샤의 안위보다 더욱 급한 문제가 있었다.
“성벽을…… 성벽을 지켜라!”
페트라가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쳤다. 기사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수행했다.
끼이이이이- 쿵.
페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문이 닫히기 직전 멀리서 보인 먼지구름은 분명 아폴로니아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카엘리온의 합류를 기다리지 않았다. 겨우 천 명의 병력으로 성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미친 것이 아닌가?
리페르 공작도 드디어 그 사실을 확인했는지 다시 성벽 위에 올라 영주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의 생각보다 급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당장 성을 향해 다가오는 아폴로니아를 상대하지 않으면 니샤도, 가레스도 모두 끝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궁수!”
그녀는 공작의 명령에 따라 궁수들이 다시 활을 준비하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몸을 돌려 성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아직까지 카엘리온의 상황은 확인이 되지 않고 있었다. 예상대로라면 아폴로니아와 합세하여 성을 포위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설마 양쪽으로 갈라져서?’
험악한 산이나 계곡에 매복을 한 것도 아닌, 성 외부에서의 공격이다. 다 합쳐도 리페르의 사병보다 적은 병력을 쪼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길한 예감은 떨쳐지지 않았다.
페트라는 리페르성과 정원, 그리고 연무장을 둥글게 감싼 성벽을 끼고 뒤편으로 돌아갔다. 조금 전까지 넋을 놓고 있던 사병들이 조금씩 정신을 차리려는 것이 보였으나, 그녀는 성의 뒤편이 가까워질수록 털끝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궁수들을 대기시켜라!”
마침내 뒤쪽 성벽에 도착한 그녀는 급히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적군은 어쩌면 성문이 아닌 성벽을…….”
그러나 그녀는 명령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뒤편의 성벽 위에서, 궁수 한 명이 그녀를 향해 활을 겨누었기 때문에.
“오랜만입니다, 공작 부인.”
검은 고수머리,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아는 눈동자. 갑옷을 입은 장신의 청년이 그녀를 향해 화살을 겨누고 서 있었다.
리페르의 성벽 위에서.
“……에핀하르트 대공.”
카엘리온이 씩 웃었다. 왼쪽 어깨에는 걸쳐진 밧줄이 보였다. 그 끝에는 세 갈래로 갈라진 무거운 갈고리가 걸려 있었다.
“두 공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동안은 경비도 제대로 서지를 못하더군요. 안개를 틈타 접근하는데 막는 이도 없었습니다.”
주변에 널브러진 경비병의 시체 몇 구를 보며 카엘리온이 설명했다. 페트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대단한 주술입니다. 훈련받은 것도 잊고 두 사람의 비명에 집중하게 만드니까요. 폐하께서는 그런 선물을 진상한 부인께 감사 인사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카엘리온이 더욱 활짝 웃으며 활시위를 당겼다.
“……잡아라.”
페트라가 주먹을 꽉 쥐며 간신히 명령했다. 동시에 카엘리온의 양옆, 그리고 성벽 아래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까지도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카엘리온은 페트라를 향해 겨눈 활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황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아하게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촤아아악!
누군가가 허공에서 검을 몇 번 휘두르자 사방에 피가 튀었다. 페트라는 카엘리온이 쓰러지기를 기다렸다.
“으윽!”
“윽!”
“어억!”
그러나 쓰러진 것은 그를 향해 뛰어든 리페르의 사병들이었다. 카엘리온은 흔들림 없이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뭐…….”
페트라는 눈을 크게 뜨고 카엘리온의 주변을 살폈다.
“딱 맞췄네.”
안개 속에서, 쓰러진 사병들을 한 발로 밟은 채 고개를 든 것은 짧은 머리의 작은 벨라 소녀였다. 그 옆에 비슷하게 생긴 사내 몇 명도 보였다. 얼굴이며 옷, 그리고 각자가 든 무기에서는 조금 전 쓰러진 사병들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페트라의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공기가 한층 더 차가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성벽에 예고 없이 나타난 한 무리가, 순식간에 그녀의 병사들을 사살했다.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은, 페트라가 그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군인과는 다른, 두껍고 거친 가죽옷을 입은 그들은 언뜻 보면 산적을 연상시켰다. 외모가 무척 아름다운 산적.
“봐도 늦었어. 이미 우린 도착했는걸.”
소녀가 말했다. 그녀는 거의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칼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군인이 쓰는 것치고는 거친, 그러나 산적이 쓰는 것치고는 너무나 고급인 그 무기에는 여전히 리페르 사병들의 뜨거운 피가 묻어 있었다.
카엘리온은 그녀를 보고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작게 미소 지었다.
“설마…….”
페트라는 갑자기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갑자기 나타난 자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전쟁을 위해 왔지만 산적을 만나 고전한다던 카엘리온, 그리고 짧은 기간 동안 숫자가 유례없이 불어났다던 산적.
그들은 서로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폴로니아의 명령을 받아, 산적의 가면을 쓴 채 리페르 영지 부근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함께 리페르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순간 바람이 불어 그의 주변에 있던 안개가 흩어졌고,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얼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
페트라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고, 그녀의 호흡이 가빠졌다.
열 명, 아니 수십 명. 어쩌면 백 명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모두 카엘리온과 마찬가지로 어깨에 밧줄을 걸고 있었다. 페트라의 눈에 띈 그 순간에도 그들의 숫자는 점차 불어났다.
페트라는 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나 눈앞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또렷해졌다. 안개가 점점 더 걷히면서 성벽을 지키던 사병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이를 갈며 주먹을 쥐었다.
“당장 저들을…….”
페트라가 무언가 명령하려 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멍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성벽이 적군으로 가득 차기 전에 그들을 사살하고 성벽을 탈환해야 했다. 빠르게 행동하면…….
“전쟁을 앞두고 다 같이 한눈을 팔면 어떡해. 지금 와서 뭐라고 한들 듣겠어?”
그러나 벨라 소녀가 페트라의 말을 끊고 이죽거렸다. 마치 작정하고 그녀를 자극하려는 것처럼.
“너무 실망이야. 당신이 성격은 못됐어도 똑똑하다고 들었는데. 이래서는 멍청이 아들과 다를 것이 없잖아!”
그녀는 페트라가 뭘 할지 다 안다는 듯 과장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이우스는 병법에 능했다더니 역시 동생은 그에 못 미쳤나 보지?”
가이우스에 대한 언급에 페트라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페트라는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당장…….”
“응, 그래, 죽여 보든가.”
왈칵 치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소녀를 쏘아 떨어뜨리라고 명령하려던 페트라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자극하기 위해…… 가이우스를 언급해?’
일개 사병이 즉석에서 떠올린 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페트라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생각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예를 들면 아폴로니아처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페트라는 또 다른 긴장감에 휩싸였다.
아폴로니아가 소녀에게 구체적인 조롱을 지시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조롱이 아닌 어떤 꿍꿍이임이 분명했다. 아폴로니아는 이유 없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날카로운 황금안이 소녀의 옆에 있는 카엘리온을, 그리고 그가 이끄는 다른 사병들을 빠르게 훑었다. 대부분 페트라를 보는 가운데, 기사 한 명의 시선은 성벽 바로 아래 그늘진 곳을 향하고 있었다.
“성문을 지켜라! 열지 못하게 해!”
페트라가 별안간 소리쳤다. 그녀의 긴 손가락이 향한 곳에서는 몇 명의 검은 그림자가 성의 앞쪽으로 빠르게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아폴로니아의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성벽을 기어올랐던 것처럼, 그들은 벨라 소녀가 페트라의 정신을 돌린 사이에 벽을 내려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성문을 열기 위해서.
“저들을 죽여라!”
뒤늦게 그녀 주변의 사병들이 그들을 향해 활과 창을 겨누었다.
쉬이익- 쉬익-
창도, 활도, 어떤 무기도 그들을 맞추지 못했다. 누군가는 검을 들고 그들을 막아서려 했으나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빨랐다. 한 명이 사병들의 공격을 막으면 나머지는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식이었다.
그림자 중 두 명이 성을 끼고 돌아 성문을 향했다. 달린다기보다는 미끄러지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기사가 아닌, 살수로부터 배운 움직임이었다.
페트라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새파랗게 질렸다. 아직 성문 쪽의 사병들은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막아라!”
“으으윽!”
페트라의 외침도 의미가 없었는지, 멀리 성문 앞을 지키던 문지기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를 잇는 것은 페트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무거운 잠금쇠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철컹- 끼이익-
“성문이 열렸다!”
누군가의 외침이 페트라의 귀를 파고들었다.
“폐하의 영광을 위해 싸워라!”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페트라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성벽 내에서 대기하던 사병이 그녀를 에워싸는 것이 보였으나 정작 그녀는 더 이상 어떤 명령도 내리지 못한 채 굳어 버렸다.
그 순간, 페트라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증오스러운 이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폴로니아.
‘대체……대체 언제부터……어떻게…….’
과거 그녀와 대치했던 기억이 페트라의 뇌리를 빠르게 스쳤다.
이데나 상단주로서의 그녀는 페트라가 과거 사용했던 모든 수단을 따라 하며 그녀를 추격했고, 종국에는 그녀를 무너뜨렸다. 지금, 아폴로니아는 또다시 페트라가 던진 수를 역이용한 것이다.
아드리안을 납치하고 주술 걸린 반지를 이용해 아폴로니아의 진영에 분열을 유도한 지 겨우 12일 만에, 그녀는 똑같은 방식으로 페트라의 진영 전체를 흔들었다. 그리고 리페르성이 가장 크게 흔들리는 바로 그 순간을 이용해 성벽을 타고 넘어 견고한 성문을 열었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병력일까, 언제부터 계획한 전술일까. 그녀는 바로 오늘 리페르 영지에서 전투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언제부터 알았을까.
페트라의 몸이 조금씩 떨렸다. 분노가 치밀었으나 곧 그보다 큰 두려움에 잠식되었다.
아폴로니아의 존재가 이토록 압도적으로 다가왔던 적이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멀지 않은 곳에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페트라가 흠칫 놀라자 맞은편의 카엘리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성문이 열렸습니다. 공작 부인, 피하셔야 합니다!”
그녀를 호위하던 기사들 중 한 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페트라는 그제야 충격에서 깨어났다.
‘산적, 그리고 대공의 사병, 그리고 황실 기사단…….’
총 몇 명이 성문을 넘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반면 그들을 상대할 페트라의 지원군은 아직 멀리 있었다.
“상황을 깨달았다면 이제 도망치시지요.”
카엘리온이 서늘하게 경고했다. 여전히 활로 페트라를 겨누고 있던 그는 천천히 한쪽 눈을 감았다.
피잉-
“공작 부인! 피하십시오!”
카엘리온의 화살이 그의 손을 떠남과 동시에 기사가 페트라 앞으로 몸을 날렸다. 화살은 그의 가슴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막지 않았다면 페트라의 심장을 꿰뚫었을 것이다.
“크흑!”
페트라는 눈을 번쩍 떴다. 기사의 비명 소리를 뒤로하고 그녀는 몸을 돌려 리페르성의 화려한 성채 내부를 향해 뛰었다.
피이잉- 퍽! 퍼퍽!
채앵!
그녀 뒤로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며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쪽의 사람인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페트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성 안으로, 그러고 나서는 계단을 오르며 쭉 달렸다. 바깥의 소리는 끔찍했지만 성 내부로 들어온 적들은 아직 없었다.
“모두 나가서 성을 지켜라!”
그녀는 스치는 몇몇 시녀와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그들이 전투를 할 수 있는지는 따지지 않았다. 그저 적군이 성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었다.
“리페르 가문은 오늘의 태양을 보지 못할 테니까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폴로니아가 조금 전 남겼던 말이 귓가를 떠돌았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페트라는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처음부터 이 전쟁을 오래 끌 생각도, 지원군을 기다릴 생각도 없었다. 오늘의 태양이 뜨기 전, 모든 상황을 종료시키려는 것이었다.
쾅-
그녀는 침실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황금빛 눈동자가 넓은 방 안을 훑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례 없이 위태로운 상황을 전해 들었을 레아는 밖으로 나가 전투에 합류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침실 문을 닫았다.
순간적인 고요가 찾아왔다.
‘끝인가.’
페트라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선혈, 그것은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페트라의 호흡이 더욱 거칠어졌다. 아폴로니아가 일으킨 전투에서 리페르의 이름이 사라지게 된다는 생각을 하자 너무나도 끔찍했다.
‘살아야 한다.’
그녀는 애써 스스로에게 말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한 와중에 생존에 대한 본능이 그녀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그래, 살아야 한다.’
페트라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다른 생각을 떨쳤다. 목숨을 보존할 마지막 방법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페트라는 심호흡을 한 뒤 침대 옆으로 걸어가 높다란 책장을 옆으로 밀었다.
촤르르륵-
고정된 듯했던 책장이 스르륵 밀리고, 작은 철문이 하나 나왔다. 식은땀으로 젖은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철컥-
페트라가 책장의 책 한 권을 빼자 철문은 조용하게 열렸다. 그 안으로 좁고 복잡한 통로가 보였다.
리페르성의 통로는 황궁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철저하고 복잡했다. 복도에 관한 비밀을 아는 자는 직계 가족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페트라는 천천히 한 발을 통로 안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옆으로 손을 뻗어 다시 철문을 잡았다.
끼이이-
“멈추세요.”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는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낮고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트라는 순간 그 자리에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다 끝났습니다, 고모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아폴로니아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승리감에 도취된 것도, 조금 전 아드리안과 가레스를 사이에 두었을 때처럼 증오로 타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침착했다. 마치 지금의 상황이 조금도 신기하지 않은 것처럼. 마치 오랫동안 이렇게 되리라고 알고 있었던 것처럼.
페트라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빨리도 왔구나.”
그녀가 말했다. 어떤 허식도 없는 진심이었다.
침실 안, 페트라로부터 겨우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오묘한 금적안을 빛내는 여인이 서 있었다. 갑옷의 은빛에 반사되었기 때문인지, 그녀의 금발이 더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폴로니아의 옆에 선 것은 날이 선 장검으로 페트라를 겨눈 유리엘이었다. 언제부턴가 둘은 항상 함께였다.
“10년이 넘게 걸렸으니 너무 늦은 셈이죠.”
아폴로니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페트라는 천천히 주먹을 꽉 쥐었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느껴졌다.
“……나를 찾으러 온 건가?”
그녀가 물었다.
“고모님을, 그리고 리페르 가문의 남은 사람들을 찾으러 왔어요. 전투가 거의 끝나 버려서 말이죠.”
페트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순간에도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말이 거슬렸다.
“루이스 리페르가 카엘의 화살에 맞았어요.”
아폴로니아가 설명했다. 그녀는 그저 냉정하게 사실을 말할 뿐, 승리에 대한 기쁨을 과시하지는 않았다. 눈앞의 상대와는 일말의 감정도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차가운 태도였다.
“지킬 것이 남지 않은 사병들은 항복했고요.”
여전히 좁은 통로의 입구에 서 있던 페트라는 몸이 휘청이는 것을 느끼고 빠르게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순간이나마 다리의 힘이 풀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아폴로니아와 페트라는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맹수를 닮은 황금안에서는 타오르는 분노가 서렸고, 태양을 닮은 금적안은 오히려 얼음처럼 차가웠다.
페트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슴속에서 불이 치솟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앞의 여인이 증오스러웠다. 당장 숨통을 끊어 놓고 싶을 정도로. 그것은 단순히 아폴로니아가 리페르성을 무너뜨리고 그녀의 목숨을 쥐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페트라의 눈이 아폴로니아를 훑었다.
태양의 현신 같은 모습, 제국 전체를 손에 넣고도 무심해 보이는 표정, 한때는 숨겼지만 사실은 타고났었던 그 자신감.
그녀는 권력을 억지로 훔쳐서 지키려고 안달이었던 자신과 달랐다. 가이우스 앞에서 고개 숙였던 지난날에도 아폴로니아는 제국이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두 사람의 뚜렷한 차이가 페트라를 괴롭혔다.
페트라는 아폴로니아를 질투했다. 페트라가 평생 오라비의 뒤에 서서 일구려 했던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당당하게 쥔 그녀가 부러웠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페트라는 참았던 한 마디를 뱉어 냈다.
“……그 자리에 앉으니, 네가, 네가 정말 제국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가 된 것 같아?”
페트라가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
“……예?”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되물었다. 가이우스를 닮은 그 습관이 페트라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그 머리색, 눈동자, 타고난 혈통, 기사들이 너를 따르는 명분은 결국 다 태생적으로 네게 주어졌던 것들이 아니냐?”
페트라가 계속해서 말을 쏟아 냈다. 어떤 대답을 바라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으나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것이 너를 대단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가진 것들은 네 어머니로부터, 파스칼 3세로부터 받은 게 아니냐?”
“…….”
“그러나 나는 달라. 나는 나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일궜다. 내 힘으로 가이우스를 영웅으로 만들었고, 내 힘으로 리페르 가문을 공작위까지 올렸고, 내 힘으로 잘난 네 조부에게서, 네 어머니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지. 대단하다 찬양하는 황족도 별것 아니더구나.”
페트라가 조소하며 말했다. 다만 그 웃음에는 억지로 쥐어짠 듯한 부자연스러움이 있었다.
“너 또한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었다. 황족의 대를 끊어 버릴 수도 있었지. 만약 내가 너를 살려 두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아니면 이성을 누르는 분노든,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다고 코웃음을 치지도 않으면서 그저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끝까지 말해 보라는 듯. 강렬하지만 평온한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독한 계집.’
과거에도 그랬다. 아폴로니아는 모욕을 당해도 모르는 척, 자신의 감정을, 생각을 잘도 숨겼다. 페트라는 문득 자신이 아폴로니아를 없애려고 시도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몇 번의 암살 시도, 몇 번의 혼담, 그리고 누구의 이목도 끌지 않고 이를 모두 빠져나갔던 그녀. 팔에 흉터를 그려 넣어 모두의 동정심을 사고, 뒤로는 어린 대공을 끌어들여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돌렸던 그녀.
“만약…….”
아폴로니아가 타고난 운과 혈통으로 이곳까지 왔다고, 자신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녀가 여기 없었을 수도 있다고 다시 말하려던 페트라는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스스로의 주장에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폴로니아를 살려 준 것이 아니었다. 아폴로니아가 살아남은 것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승리했다.
“하아…….”
조용하던 아폴로니아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움직임에 페트라가 흠칫 놀라며 눈을 들었다.
“그러니까…… 환경이 달랐을 뿐이지 고모님의 능력이 누구보다, 특히 저보다 뛰어났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녀가 물었다. 정곡을 찔린 페트라가 눈을 더욱 부릅떴다. 페트라와 달리, 아폴로니아는 두 사람의 대치가 길어질수록 자신이 담담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선황을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아폴로니아가 받아야 마땅했던 황위에 가이우스를 앉히고, 시드까지 빼앗아 갔던 페트라였다.
리페르 영지의 심장까지 쫓겨 와 유리엘의 검 끝에 서서, 억지로 자신의 위업을 주장하는 그녀는 자신이 알던 리페르 공작 부인이 아니었다. 어딘가 초라한 모습이었다.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다지 기쁘거나 즐거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페트라를 조롱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위로하고 싶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두려워했던 과거의 자신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찌 됐든 질문을 받았으니, 그녀는 그저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고모님, 저도 한때 비슷한 생각을 했었답니다.”
아폴로니아가 말하자 페트라가 눈을 크게 떴다.
“……뭐?”
“아버님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고모님의 행동에는 항상 제약이 따랐죠. 그래서.”
아폴로니아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고모님과 같은 총명함을 타고난 사람에게, 좋은 환경, 좋은 스승, 좋은 부모와 형제가 주어졌다면 얼마나 대단한 결과가 나왔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페트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 조금 전 벽을 짚었던 그녀의 왼팔은 여전히 그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는 항상 고모님의 재주를 높이 샀답니다.”
아폴로니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고모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아일린 이데나로서 했던 많은 일들도, 즉위를 앞두고 꾸몄던 많은 계획도,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준 전략도 모두 고모님이 가르쳐 준 것들이니까요. 하지만.”
아폴로니아가 말을 끊고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페트라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고모님의 말대로 고모님은 선황과 어머니를 죽이고 반역을 저질렀고, 바로 그 순간부터 고모님의 죽음은 정해졌는걸요.”
평온했던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짙은 금적색의 눈동자는 어떤 용서도, 관대함도 내비치지 않았다.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이, 그녀는 페트라의 사형을 선고하고 있었다.
“너…… 네가, 네가 나를…….”
아폴로니아의 말을 끝까지 들은 페트라가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울분은 여전했으나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제 대답이 고모님의 허영심을 만족시켰다면…….”
아폴로니아가 페트라를 향해 앞으로 한 발짝 떼며 말했다. 유리엘은 여전히 검을 내리지 않았다.
“이제 가문과 함께 죽음을 맞으세요.”
그때, 고정되어 있었던 페트라의 왼손이 벽을 타고 미세하게 미끄러졌다. 아폴로니아가 또 한 번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두 사람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로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페트라의 손이 벽돌 틈에 있던 작은 손잡이를 향했다.
철컹-
스르르르릉-
페트라의 손이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그녀와 아폴로니아 사이에 있던 철문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타악!
유리엘의 눈매가 날카로워짐과 동시에, 페트라는 몸을 돌려 좁은 통로를 뛰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웅-
그러나 그녀가 몇 걸음 옮기기도 전, 어둠 속 깊은 곳에서 기다란 물체가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유리엘이 아니었다. 그 물체는 통로 반대편에서 정확히 페트라의 심장을 향해 날아온 것이었다.
퍼억!
“으윽!”
좁은 통로 가운데에 서서 움직일 틈도 없었던 그녀는 묵직한 고통을 느끼며 벽을 타고 천천히 미끄러졌다. 그제야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자, 왼쪽 가슴에 정확히 꽂힌 창 한 자루가 보였다.
“으으으윽……”
“늦을 뻔했군.”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리더니, 통로의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으로 향할 거라 생각했다.”
“너는…….”
페트라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눈앞이 흐릿했지만 남자의 얼굴은 익숙했다.
회색 머리, 증오로 가득 찬 회색 눈동자. 그녀의 눈이 커졌다.
“……시드 바이안?”
“더 자세히 봐.”
남자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페트라는 왈칵 피를 토해 냈다.
“콜록! 노…… 녹스…… 바이안.”
“그래.”
녹스가 잿빛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폐하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오늘에서야 받았군. 내 손으로 당신을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가 이를 으드득 갈며 말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페트라를 내려다보았다.
“허억…… 헉…….”
“저승에서도 기억하도록 해. 내 이름도, 얼굴도. 그리고 내 아버지도.”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페트라는 무언가 더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그 안에서 쏟아지는 것은 오직 붉디붉은 피였다.
꿈속의 바로 그 색깔, 바로 그 모습이었다. 흐릿해진 시야에, 어느새 통로 안으로 한 발을 걸치고 서서 그녀를 바라보는 아폴로니아의 차가운 얼굴이 들어왔다.
“으윽!”
그녀는 몇 마디 신음을 더 뱉어 냈고, 몇 차례 경련했다. 그러나 그 모든 움직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아…….”
잠시 숨을 헐떡이는가 싶더니, 페트라의 마지막 호흡이 그녀의 몸을 빠져나갔다. 떨리던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텅 빈 동공이 천장을 향한 채 그 자리에 굳었다.
그것이 페트라 리페르의 최후였다. 좁은 복도에서 긴 창으로 심장을 꿰뚫린 채, 그녀는 자신이 죽인 자의 아들의 손에 숨을 거두었다.
화려했던 삶과 대비되는, 허무할 정도로 빠른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