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그녀의 수 (1)
“……다시 말해 봐.”
전령의 보고를 받은 페트라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페트라와 전령, 그리고 페트라의 시녀와 어린 시종 한 명은 공작가의 서재에 있었다.
페트라가 앉은 의자 앞에는 작은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는 조금 전 시종이 내온 티 세트가 놓여 있었다. 아름다운 도자기 주전자에서 차향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찻잔에 손도 대지 않은 채 한참 동안 전령을 노려보기만 했다.
살짝 열려 있는 창 밖에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자, 예민해 보였던 페트라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새로운 폐하의 이름이 뭐라고 했느냐?”
“아, 아폴로니아 알리스테어 페르디안…… 입니다.”
페트라는 몇 차례 심호흡을 했다. 수십 년간 충격적인 보고를 받은 적은 많았으나 지금 들은 말처럼 믿기 어려운 소식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다시 한 번 말해 봐.”
전령은 침착하게 다시 말했다. 소식을 전한 것은 신전에 있었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리페르 가문을 오래 보좌한 가신의 아들인 그는 아폴로니아를 지지하는 동료들을 보고 재빨리 그들에게 합류했지만, 황궁으로 돌아가자마자 전령을 찾아 모든 상황을 전했다.
패리스의 비명, 불 속에서 걸어 나온 아폴로니아, 반역자라 불린 가이우스.
카엘리온이 그녀를 주군이라 칭했고, 그다음에는 사절들이, 그다음에는 녹스 바이안과 기사들이,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도 아폴로니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
마지막에는 아몬 백작과 브로넬 백작의 초라한 일행만 남았으나 결국 모두 사로잡혔다는 것.
“폐하께서는 어떻게 되셨지?”
“폐, 폐하라면, 그러니까 어느 분을…….”
“나의 오라버니를 말한다!”
전령이 버벅거리자 페트라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소, 송구하오나 패리스 황자 전하께서는 신전에서 곧바로 붙잡히셨고, 전 황제 폐하께서는 황궁으로 돌아가셨다가…….”
전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페트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이우스가 신전을 벗어나서 황궁으로 갔다면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유리엘 비체 백작에게 붙잡혀 수감되었다는 전갈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수십 년을 황금과 보석에 둘러싸여 지내던 그가 보물을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후에 사병을 일으킬 생각을 했든, 아니면 멀리 떠나 살 생각을 했든, 그는 재물을 쥐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탐욕스러운 본성을 아폴로니아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신전의 일을 치밀하게 꾸민 그녀는 분명 황궁 내에도 덫을 놓아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세타였겠지.
충격을 받은 와중에도 페트라는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짧은지.”
그녀가 평생 동안 보아 온 오라비는 가치의 경중을 구분할 줄 모르는 자였다.
그는 보잘것없는 과거의 추억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페트라와 리페르 가문을 버리려 했고, 그 후에는 재물을 갖겠다고 자신의 자유를, 어쩌면 목숨을 적에게 쥐여 주었다.
“하아…….”
페트라는 다시 한 번 길게 심호흡을 했다.
‘황제가 되었다고?’
처음에는 충격이, 그다음에는 공포가, 마지막에는 분노가 전신을 휩쓸었다.
아폴로니아는 가이우스를,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자신을 반역자라 칭했다. 선황과 엘레니아 황녀의 죽음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고 증언했다.
페트라는 절로 소름이 돋았다.
아홉 살에 그 모습을 직접 보고도,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원수라 여기는 이를 아버지라 부르며 복수를 꿈꿔 온 것일까. 유약하고 미련한 척, 모두를 속이면서 뒤에서 칼을 갈았나.
‘처음부터 그 애가 노린 것이 황위였나?’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황실의 하나 남은 직계, 어린 시절 선황의 품에서 자란, 총명하다 알려졌던 아이.
페트라도 한때는 정통성 있는 황녀인 그녀를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눌렀다. 그러고는 결국 죽일 생각을 하지 않았나.
연약하디연약한 그녀가 팔에 커다란 화상을 입어, 아폴론의 선택을 받지 못했음이 모두에게 드러난 이후부터 페트라는 마음속의 의심을 버렸다.
안톤을 데려와서 그녀와 대적할 때조차도, 페트라는 아폴로니아가 감히 황위에 직접 앉을 생각을 한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패리스와 가이우스의 신뢰를 사서 황제의 곁에 서는 정도일 거라 생각했다.
자신과 가이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무서운 계집, 아니……. 괘씸한 계집.’
그녀의 내면에서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이 계집은 참으로 당연하게 오라비를 내쫓고 그 자리에 앉았다.
황실의 직계라고는 하나, 어린 시절부터 황위와는 상관이 없다 세뇌당하며 여린 황녀로 살지 않았나. 한때 선황의 후계자였던 기억 따위, 진작 흔들리다 못해 흔적도 없이 흩어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구워삶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사람들이 패리스의 경쟁자라 여겼던 황족 청년―카엘리온 에핀하르트조차도 그녀를 주군으로 섬기겠다고 했다. 애초에 아폴로니아는 황위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아들을 우선하는 리페르 가문의 딸로 자란 페트라는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페트라는 다시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아폴로니아는 이미 가이우스를 반역자라고 지칭했다. 그 말은 페트라도,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그를 구해야 하나?
습관적으로 가이우스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페트라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는 페트라를 내치면서 리페르 일가를 포기했다. 그리고 더 이상 황제도 아니었다. 패리스의 핏줄 또한 천하에 밝혀졌다. 황족도, 리페르 가문도 아닌 자들에게 도움을 줄 여력은 없었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리페르 가문 전체가 황제의 적이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전쟁이로구나.”
페트라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어린 시종과 전령의 눈이 커졌으나 페트라의 측근인 중년의 시녀, 칼린 부인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페트라는 아폴로니아와 싸워야만 했다. 살아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아직 공작가의 영향력이 남아 있을 때, 아직 아폴로니아의 권력이 완전히 자리 잡지 않았을 때, 그녀와 싸워서 이겨야 했다.
황제라 칭해지는 이와의 전쟁이라.
거대한 불안감이 페트라를 덮쳤다. 그녀는 자신을 괴롭혔던 핏빛 꿈을 다시 떠올렸다.
“……공작께 전해라.”
그녀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어린 시종에게 명령했다.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수도를 떠나 동북쪽의 리페르 영지로 간다.”
시종이 눈을 크게 떴다.
“나와 공작, 소공작과 니샤는 최소한의 시중드는 사람들을 데리고 모두 오늘 떠날 것이다. 말을 탈 수 있는 자는 전부 함께 가고, 전투에 능한 자들도 최대한 빨리 따르도록 지시해.”
“……나머지는요?”
페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남은 자들을 버리라는 의미임을 이해한 어린 시종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으면 나가거라.”
그는 지체하지 않고 일어섰다.
전령은 따라 나갈까 했으나 옆에 서 있던 칼린 부인이 살며시 고개를 젓자 가만히 서 있었다. 기다리면 그에게 지시가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천천히, 페트라는 상황을 점검했다.
리페르 가문은 제국 곳곳에 영지를 두었다. 상단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다른 귀족들의 영지를 사기도 했고, 황제가 된 가이우스가 죄를 저지른 귀족의 영토를 빼앗아 리페르 공작가에 하사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영지들 중, 가문의 사병 대부분이 주둔하고 있는 동북쪽 영지는 무척 넓었고, 다행히 수도와 멀지 않았다. 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한때 가이우스의 도움을 받았던 두 왕국과의 경계가 있었다.
“아실리아와 타른은 즉위식에 오지 않았다고 했지.”
그녀가 툭 내뱉자 칼린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레 병력을 이끌고 산적을 상대하러 간 것으로 압니다.”
“아폴로니아의 술수겠지. 하지만 괜찮다.”
페트라가 말했다. 지금쯤 두 나라에도 즉위식에서의 일이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두 국왕은 가이우스가 잡혔다는 말을 들은 즉시, 누구보다 빠르게 페트라를 도우러 올 것이다. 준비된 병력을 그대로 이끌고.
서두르기만 하면 페트라는 상당한 규모의 군사를 빠르게 모을 수 있었다. 완벽히 훈련된 강한 군대를.
그렇다면 아폴로니아는 어떤가.
“트리온 후작가, 에드윈 후작가, 에핀하르트 대공가……. 아마 키튼 백작가도 한통속이겠지.”
페트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리페르 영지와 경계를 맞댄 가문들 중 아폴로니아를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몇몇 가문을 떠올렸다. 규모는 다르지만 의미 있는 가문들이었다.
“얼마 전 카엘리온을 비롯한 몇몇 귀족들이 일부 병력을 리페르 영지 가까이로 움직였다고 했었지.”
그녀가 다시 말하자 칼린 부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경계 부근에서 불어난 산적들을 토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심이 점점 흉흉해져 도적 떼가 여기저기서 기승을 부리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핑계도 좋군.”
여우 같은 계집, 아폴로니아가 지시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 페트라가 영지로 돌아가려 할 것을 예상하고, 마침 리페르 영지 부근에서 불어난 산적을 핑계 삼아 그 후의 전쟁에 대비했을 테다. 즉, 그들은 때가 되면 리페르성으로 치고 들어올 것이다.
“부인, 어차피 그 정도로 동북쪽 성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차분하게 들리는 칼린 부인의 말에 페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 부근의 변화에 민감한 그녀는 그들의 규모를 알고 있었다.
카엘리온이 옮긴 병력은 칠백, 트리온 후작이 지원한 것은 오백 명쯤 되었으나 나머지 귀족들은 겨우 일이백 명을 이동시켰다. 다 합쳐 봤자 천오백 명가량이었다.
당장 전쟁을 한다고 하면, 그들은 리페르성에 상시 대기하는 정예 사병 삼천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렇기에 페트라는 병력 이동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거기에 아폴로니아가 당장 동원할 수 있을 수도의 병력은 천 명 정도. 그들이 합세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사절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절치고 인원이 많았다 한들 신전에서나 의미 있는 것 아닌가.
“그 상황에서는 최선이었나 보군.”
페트라가 냉소했다.
각 귀족들이 지원한 병력의 규모는 한 가지 정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이 아폴로니아에게 충성하는 듯 보여도, 사실은 군대를 지원하기 아까워한다는 것. 갑자기 모인 세력이니 이해관계가 다른 것이 당연했다.
페트라가 지금 당장 돌아가서 군대를 모은다면, 어수선한 황궁과 국적도 목표도 각기 다른 인원을 조율해야 하는 황제와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곧 움직이겠지.’
페트라는 입술을 씹었다.
늦을수록 불리하다. 영민한 아폴로니아는 조금의 시간만 줘도 금방 세력을 정비할 수 있을 테니까. 황제의 이름으로 대규모의 군대를 소집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지원군이 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페트라는 먼저 황궁을 칠 수 없다. 공격은 방어보다 어려운 법이니까. 그러나 리페르성에서 마냥 기다리는 것은 더욱 불리하다. 군대의 규모를 떠나서, 아폴로니아는 전쟁이 진행되는 내내 안전한 황궁에 숨어 있을 수 있을 테니까.
아폴로니아가 예정보다 빨리 움직이게 만들어야 했다.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페트라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녹색 눈동자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 떨던 소녀였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어, 여전히 방 안에 서 있는 전령을 바라보았다.
“무엇이든 명하십시오.”
그가 페트라의 생각을 눈치채고 말했다.
“……창문을 닫아라.”
무언가 말하려던 페트라가 갑자기 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서재는 저택 2층에 위치하고 있어 창밖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페트라는 예민했다. 방에서 새어 나가는 모든 소리를 차단해야 한다는 순간적인 직감이 들었다.
달라진 페트라의 기운을 느낀 칼린 부인은 군말 없이 그녀의 지시를 따랐다.
“너는 나가도 좋아.”
페트라가 그녀에게 명령했다.
“떠나는 시간은 최대한 빨라야 한다.”
칼린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문을 빠져나갔다. 고요해진 서재에 남은 사람은 페트라와 전령, 둘뿐이었다.
“황실에는 아직 우리 가문의 사람들이 있지.”
페트라는 소리를 낮추어 전령에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에단 경은 여전히 리페르 가문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상당수의 기사들, 그리고 사용인들이 뜻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전해라. 황궁에서 데려올 사람이 있다고. 확보하면 그 즉시 리페르 영지로 오라고 해.”
페트라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누구입니까?”
“황제의 시녀, 아드리안 리스다.”
그녀가 내뱉은 이름을 들은 전령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한때 공작가의 시녀였던 이가 아닙니까?”
“그래.”
페트라가 말했다. 그녀의 입가에 다시 한 번 잔인한 미소가 스쳤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 계집을 내 앞으로 끌고 와.”
전령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페트라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데려오겠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지시였지만, 페트라 앞에서 불필요한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잠깐.”
돌아서려는 전령을 페트라가 불러 세웠다.
“다른 지시가 있으시다면…….”
“그 계집을 손에 넣는 즉시 이렇게 하라고 일러라.”
그녀는 검지를 움직여 전령을 가까이 부른 후,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전령이 대답하자 페트라는 손에 차고 있던 반지 하나를 빼서 그에게 주었다.
“이 물건이다. 내가 말한 대로 사용하면 된다.”
반지를 받아 든 전령은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시녀도 전령도 내보낸 페트라는 그제야 다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씩, 다음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정신만 바짝 차리면 그녀는 이길 수 있었다.
“납치를 할 거라면 왜 황제를 잡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느 책장 뒤쪽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 있을 때에는 바람 소리며 물소리에 자연스럽게 섞였을 소리였으나, 창문이 굳게 닫힌 서재에서는 또렷하게 울렸다.
페트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가 묻기 전에 레아가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황제의 납치가 어디 쉬운 일이겠느냐? 그 옆을 지키는 자들이 몇인데.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애는 잠을 잘 때조차도 호위를 떼어 놓을 리 없다.”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레아, 너의 실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페트라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너라도 황궁에서 그녀를 빼내 죽이는 것은 불가능해. 리페르성이라면 모를까.”
“시녀의 납치는 왜 지시하셨습니까?”
“흔들기 위해서다. 약점을 파고들어서.”
페트라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흔든다는 말씀이십니까? 시녀 하나쯤, 죽으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글쎄,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둘 중 하나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 거다. 유인하거나, 분열을 일으키거나.”
페트라가 대답했다. 그녀는 아랫것들의 질문을 싫어했지만, 레아와의 대화는 그녀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때 도움이 되었다.
“아폴로니아는 바보가 아니니 앞뒤 안 가리고 목숨을 던질 가능성은 높지 않겠지. 그러나 시녀를 포기한다 해도 아폴로니아의 비겁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니 좋아.”
소중한 것을 잃은 아폴로니아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성을 흐릴 만한 분노도, 그것이 가져올 귀족들의 분열도.
“……저는 여전히 암살이 가장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레아가 다시 말했다.
“안다. 그 생각은 나쁘지 않아.”
페트라는 차가운 찻물을 목으로 넘겼다. 이번에는 약간의 씁쓸한 웃음을 띤 채였다. 아폴로니아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를 스쳤던 불안감은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그 생각을 기억해 두어라. 만약이라는 건 있으니까.”
“그 말씀은…….”
“혹여라도 이 싸움에서 내가 승리하지 못하면, 네 할 일을 하라는 거다.”
페트라가 덧붙였다.
“패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목소리가 물었다. 감정이 실렸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페트라가 말했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패한다면, 리페르 가문은 나와 함께 사라질 것임을 알고 있을 뿐이야.”
냉정하게 말을 끝낸 그녀는 천천히 소파에 몸을 기댔다. 보고를 막 받았을 때에는 대응이 급하기에 페트라 자신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뱉고 나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승리한 아폴로니아는 그녀의 모든 것을 부술 것이다.
저택도, 남편도, 자식도, 그녀의 목숨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문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레아의 대답을 들은 페트라의 미소가 조금 커졌다.
끝이 어떻든, 황제 아폴로니아의 치세는 길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끼이-
창문 밖에서, 짜증 섞인 날개원숭이의 울음소리가 바람 소리와 섞여서 울렸다. 모습을 숨긴 채 페트라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녀석은, 창문이 닫히는 순간 소리가 차단되는 바람에 페트라의 지시를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끼이-
작게 투덜대던 그 녀석은 결국 체념한 듯 허공에서 방향을 돌렸다.
일단은 들은 말을 보고해야 했다.
* * *
“아직은 더 주무셔도 됩니다.”
유리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눈을 뜨려 애쓰는 아폴로니아를 방해했다.
“……넌?”
“호위를 맡았으니 완전히 긴장을 풀 수는 없죠. 그리고 저는 폐하가 주무시는 것만 봐도 피곤이 풀립니다.”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유리엘을 툭 쳤다. 자신이 친 것이 어깨인지, 허리인지, 아니면 다른 곳인지, 두 사람이 엉킨 듯 서로 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황제궁의 손님용 침실에 누워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황제의 침실을 써야 하나, 아직 그곳에는 가이우스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왠지 꺼려졌던 것이다.
결국 황제궁의 스물한 개 침실 중, 그들이 사용할 만한 것은 스무 개뿐이었다.
“에반젤린 왕녀가 오기 전까지는 자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밤에 주무시다 말고 병서 읽으신 거 다 압니다.”
그는 반쯤 뜬 아폴로니아의 눈을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너한테도 물어볼 게 많은데.”
아폴로니아는 말을 돌리며 그의 손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주인을 닮아 길고 아름다운 손이었다. 드디어 눈을 제대로 뜨자, 햇살을 받아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유리엘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쪽.
아폴로니아가 뭐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러고는 희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할 이야기 있단 말이야.”
“저는 언제나 경청하고 있습니다.”
유리엘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공작가에 대한 소식은 들었어?”
“영지에 멀쩡히 도착했다고 합니다. 수도와 가깝고, 가는 길이 평탄하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됐어.”
그녀는 영지로 떠날 페트라의 행보를 예상하면서도 굳이 막지 않았다.
수도의 리페르 저택과 리페르 영지 사이는 유리엘의 말대로 너무나 평탄해서 매복할 틈이 없었다. 근방에서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면 즉위식을 치르기도 전에 페트라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그들 일행을 막지 않은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영지를 내버려 두고 공작 부부만을 처단한다면, 그사이에 리페르 일가의 친척이 영지를 차지하고 그 사병으로 수도를 위협할 여지도 있다는 것.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니, 있어도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녀에게 남은 목표는 리페르의 멸문, 그것뿐이었다.
“리페르 영지…….”
쪽.
아폴로니아는 다시 말을 시작하려 했지만 유리엘의 입술에 막히고 말았다. 그는 다시 한 번 황홀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가 다시 그런 시도를 하지 못하도록 한 손으로 유리엘의 입을 막았다.
“리페르 영지 부근의 병력은?”
유리엘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손을 치웠다.
“입을 막으시면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병력은 거의 다 모였습니다. 에반젤린 왕녀도 보고했지만 저도 어제 따로 전서구를 받았으니까요.”
“아직 의심은 하지 않고 있겠지?”
“천오백 명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치워졌던 아폴로니아의 손을 다시 찾아 쥐며 말했다.
“나머지는 아직 모릅니다. 말씀하신 대로 보안은 철저하게 해서 트리온 후작과 에드윈 후작조차도 저희 병력의 정확한 규모를 모릅니다. 이쪽의 병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자는 총사령관인 카엘리온과 에반젤린 정도가 다이죠.”
“산적 규모가 불어나는데 피해가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아폴로니아는 잡힌 손을 유리엘에게 맡긴 채 다시 물었다. 졸렸던 눈은 이미 반짝거리고 있었다.
“적당히 서로 싸우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의심을 피할 정도로만요.”
“카엘리온이 할 일이 많군.”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같이 있었다면 더 수월했겠지.”
“페트라가 살아 있는 한, 제가 할 일은 폐하의 곁에 붙어 있는 겁니다. 전투가 리페르 영지에서 벌어진다 해서 황궁이 안전하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대신 제 사병들이 카엘리온과 함께 있습니다.”
유리엘이 잘라 말했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안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따뜻한 그의 체온이 온몸에 느껴졌다. 아폴로니아는 굳이 다투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아실리아와 타른 왕국은?”
“페트라의 전령이 가고 있을 겁니다. 지금은 산적을 섬멸하겠다며 산속을 헤매고 있지만 소식을 듣는 순간 리페르 영지로 향하겠죠.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기까지 보름 가까이 여유가 있습니다.”
“좋아. 그 안에 끝낼 거야.”
어느새 진지해진 아폴로니아를 보며, 유리엘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아폴로니아의 정신은 이미 그녀를 감싼 자신의 팔과 몸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는 얼굴의 미소를 지우고 함께 진지해지기로 했다.
“에드윈 후작이 다시 찾아왔더군요. 자신은 사병을 더 내놓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입장입니다.”
유리엘이 말했다.
“시간을 두고, 귀족들의 사병을 전부 동원해 전쟁에 투입해서 두 국왕의 병력도 확실히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 에드윈 후작의 말입니다.”
“그렇겠지. 그는 보수적인 사람이니까.”
아폴로니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두 국왕 도착 전에 전투를 끝낼 작정임을 모르고 있는걸. 리페르 영지 부근의 우리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아마 폐하의 정확한 생각을 알지 못해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유리엘은 지난 세월 미안함이 쌓였던 것인지 아폴로니아에게 자꾸 도움을 건네려 하는 늙은 후작을 떠올렸다. 그 뒤에는 딸의 혼처며 가문의 이름 등 이해관계가 있을지 모르나, 아폴로니아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은 나름대로 진심이었다.
하지만 아폴로니아는 이번 전쟁을 준비하면서 그 어떤 귀족으로부터도 이백 이상의 병력을 요청하지 않았고, 받지도 않았다. 지난번 크로아딘 사건의 빚을 갚고자 하는 트리온 후작이 굳이 오백을 지원한 것이 유일한 예외였다.
대신 그녀는 그들이 내놓은 사병에 대한 통솔권을 철저하게 카엘리온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녀의 정확한 계획과 실행의 시점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귀족들의 힘을 너무 많이 빌리면 곤란해져. 타국의 사절이나 국왕들도 마찬가지야.”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집권 초기에 빚을 많이 지면 나중에 압박으로 돌아올 거야. 그러니 이번에는 안 돼.”
그녀 자신도 이미 여러 번 생각했던 문제였고, 역사상 많은 군주들이 겪었던 문제였다. 다른 이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에는 부작용이 따랐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들이 대가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드릭이 라잔의 군대를 전부 데려오겠다며 가슴을 탕탕 쳐도 거절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왕세자와 그의 군대로부터 큰 도움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갚아 주어야 했기 때문에.
“너와 카엘리온의 사람들, 그리고 리샨 지방의 백성들은 내가 키워 낸 세력이야. 내 뜻과 내 자금으로. 에반젤린은 라잔의 왕녀지만 스스로를 조국에 귀속시키지 않는 사람이고. 그들만을 데리고도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어. 나머지 귀족들은 충성심을 증명할 정도의 지원이면 충분해. 무엇보다…….”
아폴로니아가 잠시 생각한 후 말을 이었다.
“난 이번 전쟁의 규모를 키울 생각이 없어. 이 싸움은 작을수록 빨리 끝날 거고, 빠를수록 희생은 적을 테니까.”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 후작의 걱정 어린 간청에 아폴로니아에게 그의 말을 전달했으나, 그는 사실 그녀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베개 위에 흐트러진 아폴로니아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문득, 그녀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한 팔에 들어오는 가냘픈 몸도, 햇빛을 받아 더 반짝이는 머리카락도, 그와 누워 있으면서 전략을 생각하는 모습도, 그 생각 기저에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도 사랑스러웠다.
“……후작에게 전하겠습니다.”
유리엘은 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말을 마친 그는 아폴로니아를 꽉 껴안은 채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조금 전 장난치던 것과 달리 진하고 강렬했다.
입술이 열리고, 혀에서 전해지는 저릿한 감각은 온몸으로 퍼졌다.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의 팔을 꽉 잡았다.
“이제 놔드리겠습니다.”
한참 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그의 입술은, 아폴로니아에게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이 싸움은 길어지지도, 커지지도 않을 겁니다.”
유리엘은 옆에 벗어 두었던 옷을 집으며 말했다.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야 나랑 더 누워 있을 수 있어서?”
아폴로니아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녀 또한 침대맡의 옷가지를 집어 들고 있었다.
유리엘의 가지런한 치아가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물론입니다.”
덥석 대답했으나 아폴로니아의 말은 너무나 정확히 그의 심리를 꿰뚫었다.
그는 아폴로니아가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에서 자유롭기를 바랐다. 그녀가 평온하기를,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되고 적들이 사라지고, 소중한 것은 곁에 남기를.
아폴로니아의 미소, 안정된 숨소리, 불안함이 사라진 얼굴. 그녀와 누운 채 그 미소를 보고 숨소리를 듣는 것이 유리엘의 삶이고 세상이었다.
* * *
“정예 사병이 삼천이라네요.”
서재에 들어온 에반젤린이 아폴로니아에게 말했다.
이른 아침이라서인지, 잠이 덜 깬 그녀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내미는 얼음이 든 찻잔을 받아 단숨에 마시고 나서야 눈을 제대로 떴다.
에반젤린의 몸에는 외눈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발톱을 묻고 아폴로니아를 쏘아보는 성체 하나, 그리고 어깨에 앉은 주먹만 한 새끼 한 마리.
아직 보송보송한 솜털에 덮인, 발톱 하나가 완전히 흰색인 것이 특징인 새끼 까마귀는 아폴로니아가 보았던 외눈까마귀 중에서는 가장 귀여운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정예가 삼천이라, 많네.”
아폴로니아도 찻잔을 들며 말했다. 조금은 감탄스러웠으나 크게 놀랍지는 않은 숫자였다.
“거기다가 모병 중인 것 같아요. 영지민의 수가 많으니, 아마 시간이 주어지면 더 모이겠죠. 전력으로 쓸 만한 사람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아, 그리고 다른 영지의 사병들도 그쪽으로 모이도록 전갈을 보냈나 봐요.”
에반젤린이 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작은 외눈까마귀는 기분 좋다는 듯 에반젤린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며 눈을 감았다.
“말투를 들어 보니 정보에 대한 네 확신이 평소보다 덜한 것 같군.”
아폴로니아가 말하자 에반젤린이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안톤 사건 때문인지 공작 부인이 보안에 무척 철저해졌어요. 창문도 항상 닫아 놓고, 방 안에서조차 귓속말을 하고, 전갈을 보낼 때도 아주 비밀스러워요.”
“당연한 일이니 걱정할 거 없어.”
아폴로니아는 웃으며 말했다. 이미 그 몫을 다하고도 남은 에반젤린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 아이가 지난번에 태어난 새끼인가?”
그녀가 에반젤린 어깨 위의 작은 외눈까마귀를 보며 물었다. 에반젤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녀석을 자신의 손가락 위에 앉게 했다.
“새끼 중에서 유난히 강하고 빨라요. 조금만 더 크면 폐하께 각인시킬 녀석이죠.”
아직 원수랄 것이 없어서인지, 녀석은 표정조차 온화해 보였다.
“……내가 때리기라도 해야 하는 거야?”
아폴로니아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그래도 되지만…….”
에반젤린은 특유의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성격들이 예민해서, 머리 위로 찬물을 엎어 버리거나 하면 각인시키기 충분해요. 이렇게 데리고 다니는 이유도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각인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예요.”
그녀는 다시 한 번 검은 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에반젤린의 머리 위에 있던 성체가 괘액 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주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에반젤린은 익숙하다는 듯 녀석의 발톱을 잡고 머리를 빼냈다.
“다른 움직임은?”
아폴로니아가 새로부터 눈을 떼고 물었다.
“공작이나 가레스의 움직임은 없어?”
“그게, 가레스는 도박에 미쳐 버린 것 같아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틈만 나면 도박장을 찾아간다더군요. 며칠씩 안 돌아가기도 한대요.”
아폴로니아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가문의 후광을 거의 잃어버린 그의 주변에는 친구도 추종자도 없었다. 그런 그가 현재의 위기를 잊을 수 있는 방법, 타인의 존경심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진탕 취해 도박장에서 돈을 날리는 것이었다.
“아쉽네. 가레스가 정신을 차리고 군대의 절반이라도 지휘하고 있었다면 우리 쪽 승산이 올라갔을 텐데.”
아폴로니아가 차갑게 말했다. 그녀는 가레스와 함께 전쟁을 치러 본 유리엘과 카엘리온으로부터, 가레스가 전쟁터에서 얼마나 무거운 짐짝이 될 수 있는지 들은 바가 있었다.
“고모님도 그걸 아니까 그냥 두는 거겠지. 방해라도 하지 않도록.”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덧붙였다.
“전할 건 다 전했으니 전 돌아가 볼게요, 폐하.”
머리 위의 외눈까마귀가 에반젤린의 머리카락을 다시 한 번 잡아당기자,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과 함께 나가도록 해. 마침 가지러 갈 것도 있고…….”
“아드리안이요?”
돌아서려던 에반젤린이 멈칫 하며 물었다.
“아드리안은 안 보이던데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아폴로니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뭐라고?”
“서재로 안내해 준 건 사라였어요. 물어봤더니 아드리안은 어젯밤부터 보이지 않았다고…….”
에반젤린은 아폴로니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아드리안이 어제 저녁에 외출을 한 건 사실이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굳은 것을 아폴로니아는 여실히 느꼈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고?”
“그게…… 그렇다고 하던데. 사라는 아마 폐하께서 지시하신 걸 거라고, 혹시 모르니 이제 보고하려던 참이었다고…….”
탁.
아폴로니아는 들었던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처음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아드리안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어제 저녁 그녀는 황궁을 떠나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외출한 것이었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호위 또한 대동했다.
“폐하, 왜 그러세요?”
멍해진 아폴로니아에게 에반젤린이 물었다.
“……안 돌아왔다고?”
아드리안은 그녀의 시녀가 된 후 단 한 번도 무단으로 외박을 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보고를 했을 일이다.
돌아오지 않은 것이 자기 의지라면.
아폴로니아는 굳은 표정으로 탁자 위의 찻잔만을 바라보았다. 불안함이 뱃속부터 차올라 온몸으로 조금씩 퍼지는 기분이었다.
“……누가 그 애를 노리고 있나?”
“네?”
에반젤린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아드리안을 대체 왜……. 전쟁에 참여할 사람도 아니고, 원수진 사람도 없을 텐데요.”
당연한 대답이었다. 아폴로니아 자신이면 모를까, 그 시녀를 누가 왜 노린단 말인가. 그럼에도 아폴로니아는 불안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장 사람을…….”
“폐, 폐하!”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녀 한 명이 다급하게 서재로 뛰어들었다.
“사라? 무슨 일이지?”
“급해요, 폐하! 성문 앞에…….”
뱃속의 불안한 느낌이 더욱 심해졌다.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똑바로 보고해.”
“성문 앞에 누군가가 와서 폐하께 전할 말이 있다고…….”
사라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 아드리안을 납치한 사람으로부터 마, 말을 전하러 왔대요.”
쨍그랑-
아폴로니아가 사라를 향해 몸을 휙 돌리자 테이블이 흔들렸고, 그 위에 놓였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깨졌다. 사라가 위험하다며 비명을 질렀지만 아폴로니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드리안을……. 납치해?”
믿을 수 없었다. 심장 박동이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누가…… 왜?”
사라가 다시 입을 열려 하였으나 아폴로니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재를 빠져나갔다. 황제궁을 나선 그녀는 쉬지 않고 정원을 가로질러 성문 앞에 도착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거대한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 두 명은 그녀를 본 순간 예를 취했다. 긴장한 태도로 보아, 그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밖에 있는 건가?”
아폴로니아가 묻자 두 문지기가 서로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폴로니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감았다 떴다. 성문 앞의 그자가 누구이든, 당장 잡아다가 고문하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듣겠다.”
아폴로니아가 짧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누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성벽 위로 향하는 나선형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랐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성벽 위의 파수꾼 역할을 하는 기사 네 명이 그녀를 보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장 먼저 소식을 전했을 그들은 문지기들보다도 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자는?”
아폴로니아가 딱딱하게 물었다. 그녀는 시간을 더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기사들 중 한 명이 손가락으로 성문 바깥쪽을 가리켰고, 아폴로니아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내려다보았다.
“활을 겨누고 기다려라.”
아폴로니아가 명령하자, 네 명의 파수꾼은 각자가 지고 있던 활에 화살을 메겨 팽팽하게 당겼다.
성문 앞에 서있는 것은 평범한 외모의 남자였다. 그는 기사들이 자신에게 화살을 겨눈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잘 훈련된 자였다. 아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겠지.
남자를 본 아폴로니아의 눈썹이 더욱 강하게 찌푸려졌다.
“누가 너를 보냈지?”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차가운 분노가 스쳤다.
남자는 그녀를 올려다보고 빙긋 웃더니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내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새로운 황제 폐하께 보내는 공작 부인의 인사입니다.”
그의 대답은 귀를 찢을 것처럼 크게 울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목소리는 황궁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가 입가에 대고 있는 반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주술이구나.’
아폴로니아는 그 물건을 알았다. 아모레타가 한때 페트라를 위해 만든 것으로, 소리를 크게 증폭시키는 물건이었다. 소리를 듣는 이를 강제로 집중시키는 효력도 있었다.
페트라는 그 반지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보여 주기만 할 뿐 판매하지는 않았었다.
“……그 애는 무사한가?”
아폴로니아가 이를 꽉 깨물며 물었다.
“아드리안 리스는 아직 목숨이 붙은 채 리페르성에 있습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뻔뻔한 웃음을 짓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반지를 들지 않은 손을 품속에 집어넣어 갈색의 무언가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부드러운 연갈색 머리카락, 아폴로니아는 그 주인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살아 있는 그녀를 다시 보고 싶거든 내달 10일 리페르 영지로 직접 찾아오라 하셨습니다.”
그가 아폴로니아를 향해 말했다. 그의 말은 여전히 황궁의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영지에 도착하거든, 호위 한 명만을 대동하고 성문 앞으로 오시어, 고모와 조카 간에 해후하고자 하십니다.”
“……내달 10일? 앞으로 스무 날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황제 폐하께 직접 오라는 것이 말이 되나? 대놓고 죽이겠다는 거 아니야?”
성벽을 지키는 기사 중 두 명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미친놈의 말도 안 되는 요청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드리안 님이 보통 시녀가 아니잖아. 폐하를 대신해서 몇 번이나…….”
또 다른 기사가 말을 시작하다가 아폴로니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아폴로니아는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미동도 없이 성 밖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으나 불안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달 10일, 그날 공작 부인께서 황제 폐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아드리안은 리페르 용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하여 공개적으로 처형될 것이며.”
남자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사지는 가축의 먹이가 될 것이고, 그녀의 목은 성벽에 효시할 것이니 원한다면 늦게 오시라고, 선택은 폐하의 몫이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작정이라도 한 듯, 한 마디 한 마디가 자극적이었다. 남자의 말을 조용히 듣던 아폴로니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남자가 즐거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잔인한 단어를 읊어 대는 그의 얼굴에는 느긋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공작 부인께서는 아드리안이 살아 있는 동안 비천한 그녀의 주제에 맞게 대우할 것이며, 처형은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단어 하나하나가 아폴로니아의 귀에 비수처럼 꽂혔다. 가만히 있던 그녀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자면, 공작 부인께서 손수 채찍을 들어…….”
“더 들을 것 없다. 쏴라.”
아폴로니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성벽 위의 기사들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말을 따랐다.
쉭- 쉬쉭-
네 개의 화살이 거의 동시에 허공을 갈랐다. 남자는 그것을 보고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퍼퍽! 퍽!
남자는 머리, 등, 어깨와 목에 각각 화살 하나씩을 맞고는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즉사였다.
아폴로니아는 몇 초 동안 가만히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던 황궁에는 고요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귀족들을 소집해.”
그녀는 짧은 명령을 남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성 밑에 있던 기사들이 시신을 처리하러 가는 것이 보였다.
몸의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입술은 어찌나 꽉 깨물었는지 피가 날 것 같았다. 뜨거운 무언가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아드리안은 미끼였다. 페트라는 그녀를 잡아 아폴로니아의 코앞에서 흔들고 있었다. 미끼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페트라의 덫에 걸려 죽겠지만.
‘끝까지 고모님답군.’
페트라다운, 음험한 수였다.
그녀는 사람의 심리를 비틀고 조종하는 것에 능했다. 오늘의 일은 단순히 아폴로니아를 자극하기 위한 수가 아니었다. 황궁에 머물고 있는 모두가 아드리안의 일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노림수였을 것이다.
“절대로 안 됩니다, 폐하.”
에드윈 후작이 냉정하게 말했다.
“너무나 빤하지 않습니까? 보름 후면 아실리아와 타른의 국왕이 도착할 겁니다. 닷새가 더 지나면 완전한 진영을 갖출 거고요. 하지만 폐하의 군대는 아직 그 숫자가…….”
“전투의 시기에 대해서는 내가 결정하겠다.”
아폴로니아가 손을 들어 후작의 말을 끊었다.
“그 시기가 합리적인지는 논쟁에서 제외하라.”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폴로니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무엇보다 폐하께 독대를 요청하다니요. 시기도, 방식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겨우 시녀 하나 때문에…….”
“에드윈 후작은 말을 조심하게.”
아폴로니아의 경고에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회의실에 모인 상당수의 귀족이 그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후작은 아드리안 영애를 포기하자는 말입니까?”
아폴로니아의 오른편에 앉은 녹스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조금 전 그자가 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고통스러운 처형과…….”
그는 차마 말을 끝내지 못했다. 탁자 밑으로, 움켜쥔 그의 주먹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
“충성스러운 시녀라면 주인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법이오.”
“조금 전 그 남자가 한 말을, 황궁의 모든 사용인이 들었습니다. 그런 협박을 듣고도 시녀를 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실망할 겁니다.”
에드윈 후작의 반박에 녹스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고 폐하께서 시녀를 위해…….”
“아드리안 리스 영애는 평범한 시녀가 아닙니다. 모두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폐하의 정략결혼을 막기 위해 그녀가 받았던 오해와 뒤집어쓴 오명을.”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듣지 못했으면 모를까, 그자의 잔인한 말을 모두 들은 기사들은 폐하의 행동을 주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몇몇 젊은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장은 이내 술렁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렇다고 폐하께서 대신 죽으란 말이오? 시기는 그렇다 칩시다. 그러나 호위 한 명만 데리고 성문 앞으로 오라니, 화살이 백 개쯤 쏟아지면 유리엘 비체 백작이라 한들 무슨 수로 막습니까?”
“그럼 그 말을 다 듣고도 내버려 둔다는 말입니까? 기사들이 리페르성에 도착해 제일 먼저 보는 것이 그녀의 목이라면 사기가 퍽이나 올라가겠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최소한 구출하려는 시늉은 해야 하지 않겠소?”
“구출? 퍽이나 효과가 있겠군.”
귀족들의 언성은 점차 높아졌고, 아폴로니아는 굳어진 표정으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페트라가 노린 것이 이것이다. 그녀는 시녀 한 명의 납치로 아폴로니아를 죽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다기보다는, 주술 걸린 반지를 이용해 상황을 모두에게 알려서 분열을 유도한 것이다.
아폴로니아가 그녀의 요청에 따른다면 죽일 것이다. 그러나 따르지 않는다면, 황제가 충성스러운 시녀를 죽게 놔두었다는 점을 황궁의 모든 이가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소중한 시녀를 잃은 아폴로니아가 흔들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폐하. 황제에게는 모든 제국민을 돌볼 책임이 있습니다.”
조용히 귀족들의 언쟁을 지켜보는 아폴로니아에게 에드윈 후작이 다시 말했다.
“후손조차 없는 지금, 시녀 한 명을 구하겠다고 대책 없이 적의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어떻게 황제의 본분이겠습니까?”
조용해진 회의장에서, 양쪽 끝에 앉은 후작과 아폴로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대책이 없다…….”
아폴로니아가 후작의 말을 곱씹었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폐하. 페트라는 폐하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대책도 없는 상황에서 적진으로 들어가다니요.”
“대책이 없다면…….”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마치 주변의 귀족들이 보이지 않는 듯, 그녀는 테이블 한가운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목청을 높여 싸우던 귀족들도 그녀를 따라 조용해졌다. 몇 분 동안, 회의장 안에는 정적만 흘렀다.
“그럼…….”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반쯤 떨어뜨렸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럼, 나 또한 잡으면 될 것 아닌가.”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회의장을 가로질렀다. 회의장의 모든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폴로니아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페트라의 약점을 말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귀족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책이라니…… 아드리안을 구출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설마, 반역자 가이우스 리페르를 이용하실 셈입니까? 이미 저택을 버리고 영지로 도망친 페트라 리페르에게 그가 무슨 대단한 약점이 된다는 것인지…….”
몇몇 귀족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에게 반박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시선은 그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귀족들에게 답을 주는 대신, 지금껏 아무 말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던 그녀의 연인, 유리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유리엘의 바다 같은 눈에 미소가 어렸다.
“……이해하겠습니다.”
그는 테이블 밑으로 아폴로니아의 손을 살짝 잡았다. 묘하게 사람을 안심시키는 접촉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아폴로니아의 표정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다만 서늘한 기운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역시 누구보다 빨리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다.
“대체 무슨 말들을…….”
에드윈 후작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설명을 구했지만 아폴로니아는 가볍게 고개를 저을 뿐, 그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이 일은, 다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었다. 비밀스럽게 처리해 줄 사람은 유리엘 뿐이었다.
“……좋아.”
그녀가 말했다. 붉은 눈 속의 황금빛이 반짝거렸다. 유리엘이 다시 빙긋 웃었다. 어리둥절해하는 귀족들을 두고, 아폴로니아는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유리엘, 그대에게 닷새의 시간을 주겠다.”
그녀는 결정했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닷새 안에, 내가 말한 그 대책을 찾아와.”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조용해진 회의장에 낮게 울렸다. 목소리에서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느껴졌다. 페트라에 대한 분노는 가시지 않은 채였다.
“절대로, 절대로 놓쳐서는 안 돼. 놓친다면 아무리 그대라도 용서하지 않겠어.”
그녀는 유리엘과 시선을 맞추며 다시 한 번 당부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유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여 아폴로니아에게 예를 취했다.
“그녀의 약점을, 반드시 가져오겠습니다.”
* * *
“7! 7이 나왔습니다! 승자는 저쪽의 귀공자분!”
“와아아아아아!”
주사위가 떨어지자 둘러앉은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셀 수도 없는 금화와 은화가 테이블 위를 오갔고, 그 주인이 된 청년은 씩 웃으며 상금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모았다.
로브를 머리끝까지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환히 드러난 가지런한 치아는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화려한 차림을 하고 곁에 서있던 몇몇 여인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추파를 던졌다.
“말도 안 돼! 사기가 아닌가!”
반대편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치며 울부짖었다.
“벌써 세 판째야! 어떻게 저 놈만 계속 이긴단 말인가!”
남자가 다시 한 번 테이블을 쾅쾅 두드렸다. 비대한 그의 몸짓에 주사위며 금화가 이리저리 들썩거렸다.
“소공작께서는 진정하십시오.”
두 남자 사이에 앉아 있던 아론 남작이 차분하게 그를 타일렀다.
“또 소란을 일으키면 공작가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뭐라고? 이놈이…….”
비대한 남자, 가레스 리페르는 앉은 자리에서 아론 남작을 향해 주먹을 뻗으려 했으나 너무나 취한 나머지 비틀거리기만 했다.
“형님…… 이제 돌아가요. 지금은 도박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가레스의 옆에 서 있던 소년이 그를 말렸다. 그는 며칠째 도박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형을 찾으러 이곳에 와 있었다.
“저도, 형님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어머님께서 아시면…….”
“닥쳐라, 니샤!”
가레스가 고함을 치며 동생의 손을 뿌리쳤다.
“너까지 나를 무시해? 공작가의 미래가 그리 걱정된다면 너부터 돌아가면 될 것 아니냐!”
그는 씩씩거리며 옆에 있던 술병에 남은 액체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동생분의 말을 들으시지요. 듣자 하니 새로운 폐하께서는 리페르 공작가를 가만 놔두지 않을 거라고 하던데…… 영지로 도망치셨다더니 바르탄까지 다시 오실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아론 남작이 은근슬쩍 그를 자극하자 옆에 둘러섰던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아니, 사실 소공작이라는 칭호가 옳은지도 모르겠군요. 어제 공작위를 회수하셨다는 소문도 돌았고…….”
“시끄럽다!”
가레스가 술병을 쾅 하고 내려놓으며 외쳤다.
“내가 여기서 잃은 돈을 다 찾기 전에는 못 간다고!”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건너편의 청년을 노려보았다. 그는 가레스를 향해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가레스는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다.
저놈과 마주친 순간부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키는 가레스보다도 큰 장정인데, 로브 아래로 드러나는 입술은 여인보다 더 붉었다. 미남 같다며 여인들이 그놈에게 추파를 던질수록, 가레스의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
오늘 아론 남작의 도박장에서 엄청난 규모의 상금을 건 게임을 개최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던 가레스다. 그는 이번 게임이 자신이 몇 달 동안 잃었던 돈을 회복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머니가 자금을 확인할 것이다. 그가 횡령한 돈에 대해 알게 되기 전에 이를 메꾸어 두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돈을 다 찾기 전에는 집에 가지 않으려 했다.
“저, 저놈이 분명 속임수를 썼다!”
그는 다시 으르렁거렸다.
단순한 주사위 게임이었는데, 로브를 쓴 미남자는 초저녁부터 가레스를 붙잡고 탈탈 털었다.
그는 싸들고 온 현금은 물론, 가레스가 끼고 있던 반지며 목걸이까지도 하나씩 하나씩 빼앗아 갔다. 덕분에 가벼운 차림으로 방문했던 청년의 목이며 팔은 이제 황금으로 뒤덮여 반짝이고 있었다.
“다시 하겠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지요, 소공작.”
청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더 걸 것이 있습니까? 옆에 있는 동생을 거시려고요?”
그의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얄미운 아론 남작은 가장 크게 웃으며 가레스의 어깨를 두드리기까지 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무례였다.
“형님……. 부탁입니다. 이제 정말 가야만 해요. 어머니께서 영지를 벗어나지 말라고…….”
“비켜!”
가레스가 니샤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자 니샤는 휘청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내가 다시 하겠다면 다시 하는 거야!”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고함 쳤다.
“오, 그럼 걸치고 계신 옷을 거시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소공작께서 옷을 벗으시면 여기 있는 모두의 눈이 고생을 할 것 같은데요.”
아론 남작이 말하자 테이블 근처의 모두가 다시 한 번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가레스의 핏발 선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스릉-
그는 자신의 허리춤 꽂혔던 보검을 뽑았다. 잘 갈린 검날이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머!”
“아니, 지금 위험하게!”
테이블에 둘러앉은 손님들이 술렁였다. 몇몇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로브를 쓴 청년은 그저 눈썹을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이것은 비에른 왕국의 선대 국왕이 사용하던 검이다. 유명한 장인이 남긴 유작이니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명검이지. 직접 보라고.”
그가 검을 높이 들며 말했다. 과연, 검날이며 황금빛 손잡이, 그리고 손잡이에 박힌 가지각색의 보석들은 휘황찬란한 빛을 내고 있었다.
“한판으로 승부하지. 난 이 검을 걸겠어.”
가레스가 꽉 다문 이 사이로 으르렁대며 검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구경꾼들의 눈이 호기심에 반짝거렸다.
“혀, 형님, 그 검은 저희 집안이 하사받았던…….”
“좋습니다.”
니샤가 애원하듯 울먹였으나, 그의 말은 건너편의 청년에 의해 잘리고 말았다.
“이번 판을 이기시면 제가 딴 것은 다 돌려드리지요.”
청년이 말하자 아론 남작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주사위 세 개를 집어 들었다.
“그럼 마지막 한 판이라고 칠까요? 소공작께서 보검을 거셨으니 숫자를 말씀하시죠. 가까운 쪽이 이기는 겁니다.”
그는 약을 올리듯 주사위를 손에 쥐고 짤랑짤랑 흔들었다. 몸에 장신구도, 검도 없는 가레스가 뜨거운 숨을 씩씩 불며 입술을 떨었다.
“……9!”
이윽고 그가 말했다. 청년은 평온한 모습으로 씩 웃었다.
“그쪽 잘생긴 귀공자는?”
“8.”
아론 남작이 묻자 청년은 답이 정해져 있다는 듯 대답했다. 그는 가레스에게서 따낸 금화 무더기를 다시 테이블 가운데로 밀어 놓았다.
보검과 금화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분 나쁜 표정이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인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가레스는 이내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지금은 게임에 집중할 때였다. 주사위는 남작의 손에 있으니 속임수를 쓸 수는 없을 터였다.
“이제 갑니다!”
구경꾼들의 시끄러운 호응 속에서, 남작이 주사위를 높이 들어 짤랑짤랑 흔들었다.
따다닥-
경쾌한 소리와 함께 주사위 세 개가 테이블 위로 굴렀다. 가레스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쭉 뺐다.
“첫 번째는 3!”
주사위 하나가 멎자 남작이 말했다.
“두 번째도 3!”
가레스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승리해야 했다. 그의 탁한 눈동자가 마지막 주사위가 향하는 방향으로 데굴 하고 굴렀다.
“2!”
마침내 마지막 주사위가 가레스의 팔꿈치 앞에서 멈추자 구경꾼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럼 합은 8입니다!”
“와아아아아아!”
청년의 승리를 선언하는 아론 남작의 목소리는, 모여 있는 사람들의 함성에 묻혀 버렸다. 가레스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청년은 다시 한 번 웃고는 보검의 황금 손잡이를 잡아서 높이 들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역시 명검이군요.”
“이……. 이 사기꾼이…….”
가레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네놈도 한패로구나!”
그는 별안간 옆에 앉은 아론 남작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남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을 뿐이었다.
“그런 의심은 게임 전에 하셨어야지요. 이제 와서 이러시면 그냥 우기기밖에 더 됩니까?”
그는 청년이 든 보검이 눈부시다는 듯 익살스럽게 눈을 가리며 말했다.
“오오, 이런 보물을 직접 구경하게 되다니……. 거참, 소공작도 아까우시겠습니다.”
청년이 들어 올린 보검은 사방의 불빛을 받아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만 봐야 하는 가레스의 얼굴이 경련했다.
“이, 이보게. 미안하지만 그 보검은 우리 집안의 물건이니 돌려주게. 내가 값은 지불할 테니…….”
니샤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청년을 붙잡았다.
“제발 부탁이니…….”
그가 청년의 로브를 죽 당기자 천이 스르륵 하고 벗겨졌다. 동시에 니샤의 눈이 커졌다. 로브 안에 있던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달빛과 닮은 아름다운 은발, 그리고 바다를 담은 시원한 눈동자.
“엇? 너, 너는…….”
쾅!
당황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던 니샤는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누군가의 손에 머리를 눌렸다. 방 안이 빙글 도는가 싶더니, 그의 뺨은 끈적한 테이블에 닿아 움직여지지 않았다.
“으……으윽.”
“당장 다치게 하지는 않을 테니 가만히 있지.”
유리엘은 그의 머리를 누른 채 니샤의 양팔을 포박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 데다 누르는 힘이 너무 강해 니샤는 조금도 저항하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니샤는 팔과 다리를 묶여 도박장 구석으로 던져졌다.
“이, 이놈들이…… 남작! 당장 저자를 붙잡지 못하겠나!”
가레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아론 남작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구경꾼들에게 물러서라는 신호를 보낼 뿐, 유리엘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침착한 그의 표정에서, 남작이 유리엘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패가 맞았구나!”
가레스가 고래고래 소리치고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와르르륵!
“으아아아!”
“꺄악!”
깨진 병이며 쏟아진 주사위와 금화로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가레스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몸을 돌렸다.
당장 달아나야 했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유리엘 비체 저놈을 상대하면 질 거라는 사실을 가레스는 잘 알았다. 게다가 지금의 그는 무기조차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
“비켜!”
콰악!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을 밀치며 달아나려던 가레스는 곧 자신의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무언가가 뒤에서 그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놔! 이거 놓으…….”
“역시 보검은 다르군. 힘 하나 안 들이고 벽을 뚫다니.”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그의 귀 바로 옆에서 울렸다. 가레스는 버둥거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완전히 뒤를 돌아본 그의 눈에, 자신의 옷자락을 꿰뚫고 벽에 박힌 보검이 보였다. 그 검의 손잡이를 잡고 선 유리엘도. 어느 틈에 가레스의 곁으로 온 것인지, 그는 곤충의 날개를 고정하듯 검으로 가레스의 옷자락을 벽에 박아 고정해 버린 것이다.
“비, 비켜라!”
찌이이익-
그가 발버둥 치자 고정되었던 옷자락이 쭉 찢어지면서 가레스의 기름진 상체를 드러냈다.
“당장 비키…….”
휙-
도망치려는 가레스의 몸에 굵은 밧줄이 씌워졌다. 유리엘이 줄을 당기자 그가 쾅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으으으윽…….”
“가관이오, 소공작. 검을 빼앗지 않았다면 옆 사람을 몇 명이나 다치게 했을지 알 만하군.”
유리엘은 한쪽 발을 그의 몸 위에 올려놓고 꿈틀거리는 가레스를 마저 포박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가레스와 니샤는 나란히 밧줄에 묶인 채 바닥에 꿇어 엎드린 상태가 되었다.
“이거, 뭐 도와드릴 틈도 없이 끝나 버렸군요.”
아론 남작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는 반쯤은 겁을 먹고 반쯤은 감탄한 표정으로 유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은 도박장의 구석으로 물러났고, 남작의 옆에는 덩치 큰 장정 열 명 정도가 멋쩍은 자세로 서 있었다. 미리 대기 중이던 남작의 수하였다.
“판을 깔아 주었으니 폐하께서 지시한 일은 잘 끝낸 셈이오. 이건 남작 몫이겠군.”
유리엘은 가레스에게서 받은 금화를 가리켰지만 남작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아폴로니아가 언급된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오른 두려움이 더 짙어졌다.
“아니, 대가는 됐으니 그저 폐하께 제가 말을 잘 듣고 있다고만 전해 주십시오. 이번 일에 제가 도움을 드렸다는 것도요.”
유리엘에 뭐라고 더 할 틈도 없이, 아론 남작은 장정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눈짓을 주고받더니 니샤와 가레스를 들고 도박장을 빠져나갔다.
“저희가 정리해 둘 테니 편히 돌아가십시오. 시간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지.”
유리엘이 남작에게 눈인사를 하고 장정들이 향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선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페트라가 잡은 것이 아폴로니아의 약점이라면, 그의 손에 있는 것은 페트라의 아들들이자 리페르 가문의 후계자, 즉 가문 전체의 약점이었다.
이것이 아폴로니아를 위한 대책이었다.
‘전쟁만 남았군.’
유리엘이 마차에 오르며 생각했다.
그의 눈앞에는 두 명의 청년이 겁에 질린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페트라 리페르가 과연 어디까지 차가울 수 있는지, 이제 그것을 확인해 볼 차례였다.
* * *
“에단, 오늘이 며칠째지?”
“열하루입니다.”
페트라의 질문에, 곁에 서 있던 기사가 대답했다.
“황제의 시녀를 데려온 것이 정확히 12일 전이었으니까요.”
“곧 아실리아와 타른의 군대가 도착하겠군. 우리 쪽의 준비는 어떤가?”
“정예가 삼천, 거기에 날마다 병력이 조금씩 추가되고 있습니다.”
페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 두 사람은 리페르성의 외벽 위에 서서 기사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굳게 닫힌 성벽 안에서 수천 명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꽤나 든든했다. 선두에서 직접 그들을 가르치는 루이스 리페르 공작 또한 강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횃불이 성안의 긴장감을 더했다.
여느 때보다 바쁘고 위태로운 나날이었지만 페트라는 겉보기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틀어 올린 머리에 작은 장식을 꽂았다. 전보다 조금 더 마른 얼굴은 한층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아폴로니아의 즉위 소식을 듣고 순식간에 영지로 후퇴한 그녀는 냉정하게 전투를 준비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영지를 그녀는 자연스럽게 장악했고,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병사들의 훈련을 지시하고 군량을 확보했다. 리페르 공작 또한 그녀의 의견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그들은 밤에도 낮에도 훈련을 쉬지 않았다. 적들이 어둠을 타고 기습할지, 안개를 뚫고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에핀하르트 대공 쪽은 어떤 움직임이 있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산적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에단이라 불린 기사가 조소하며 말했다. 페트라가 거슬린다는 듯 미간을 한 번 찌푸리자 그는 흠칫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올해의 산적은 숫자도 기세도 대단해서, 견제하는 사병들이 늘어날수록 산적의 숫자도 함께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희로서는 아주 잘된 일이죠.”
페트라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과 달리 그녀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카엘리온은 이제 노골적으로 리페르 영지의 경계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이 파견한 병력은 이미 그의 소속이 된 것처럼 함께 움직였다. 그 숫자는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으나 산적에게 막혀서 정작 리페르 영지를 넘어오지는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그녀는 짧게 명령했다.
“수도에서 진격할 병력과 함께라면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을 거야.”
“물론입니다.”
에단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가레스는 어디 있지?”
“그게…… 여, 영지를 순찰하고 계십니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기사가 진땀을 흘렸다. 페트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쓸데없는 짓 말고 성 안에 있으라고 일러라.”
에단은 다시 한 번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을 지켜보고 있어서인지, 페트라는 거짓말을 하느라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공, 공작 부인…….”
갑작스런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했다. 페트라가 미간을 찌푸린 채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령이 왔습니다. 무척 급한 소식이라고…….”
시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전령이 그녀 옆으로 난입하다시피 뛰어들며 예를 취했다.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너무나 급한 소식인지라…….”
“일어나서 전하라.”
페트라는 쓸데없는 예는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황제의 군대가 영지를 향해 진격하고 있습니다.”
전령이 성을 울릴 만큼 큰 소리로 보고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페트라의 황금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방금 뭐라고…….”
“대부분이 황실 기사단의 정예병으로 보입니다. 전원이 말을 타고 있고요. 천 명 정도 되는 인원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곧 영지의 경계를 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령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우리 쪽 전령이 간 지 열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천여 명으로 진격이라니, 무슨 말이지?”
“사실입니다. 황제가 직접 선두에 서서 그들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페트라는 찌푸린 얼굴로 가만히 멈추었다. 아폴로니아의 행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천여 명, 카엘리온 휘하의 병력을 합쳐도 이천 오백가량밖에 안 되는 인원으로 리페르성을 공격한다니?
“공작 부인, 이것은 분명 좋은 소식입니다. 어린 황제를 흔들어 놓으신 결과가 아닙니까? 치기밖에 없을 나이에 분노에 휩쓸려서 판단을 잘못 내린 겁니다. 이대로라면 황제를 죽이고 수도로 진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시끄럽다.”
페트라는 소식을 듣고 신이 나서 떠드는 에단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체 모를 불안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치기밖에 없을 나이?
기사가 아폴로니아를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아폴로니아가 누구보다 잘하는 일이 치기를 억누르는 것이었다.
아드리안을 납치했을 때, 페트라는 애초에 아폴로니아가 그녀의 제안을 들을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 이성이 흐려지더라도 결국은 냉정하게 실익을 판단하고, 아드리안을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내부의 분열이 있기를, 여러 압박 속에서 흔들리고 감정적으로 무너지기를 바랐다. 전쟁을 빨리 시작해야 한다는, 그리고 아드리안을 위해 복수라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으면 그녀는 불리해질 테니까.
그렇게, 작은 곳에서 실수가 나올 것을 기대한 것이다.
물론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보여 주기 식으로라도 직접 영지까지 온다면 더 좋았다. 그만큼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아드리안을 납치한 지 겨우 열흘이 조금 지난 지금, 앞뒤 가리지 않고 대책 없는 진격이라니? 얼마 모이지도 않은 군대의 선두에서?
아드리안이 위험하다 한들, 아폴로니아의 분별력이 그 정도로 떨어졌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페트라는 문득, 자신이 놓친 것이 없는지 상황을 다시 점검할 필요를 느꼈다.
“……대공의 군대가 어디 있는지, 그 규모가 어떤지 다시 파악하라.”
그녀가 지시했다.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페트라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폴로니아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았다. 요청한 날보다 열흘 가까이 빠른 이 시점에, 정말 아드리안 한 명을 구출하고자 영지 경계까지 직접 도착했다는 말인가.
‘나를 흔들려는 것인가.’
자신이 한 것과 같이, 아폴로니아도 심리전을 펼칠 생각인지 그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성을 공략하려면 그 안에 있는 사람보다 많은 수의 병력이 필요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아폴로니아가 대체 왜…….
“아드리안에게 가 봐야겠다.”
페트라는 몸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혼란스러움을 병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독대를 청한 것은 페트라였지만 막상 아폴로니아를 만나면 자신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자 시녀가 반 보 뒤에서 따라갔다.
왜 하필 아드리안을 찾아가고 있는지는 페트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묘한 불안감이 그녀를 떠나지 않았고,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약점을 가까이서 쥐고 있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이 불안감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아드리안을 만나 확인하고 싶었다.
계단을 다섯 개쯤 내려갔을 때, 페트라는 무언가 생각난 듯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성벽에서 대기하는 에단에게 말했다.
“궁수들을 대기시켜라. 혹시 그사이에 아폴로니아가 오거든, 화살이 닿는 거리에 들어서는 순간 쏴 버려.”
그녀를 따라가려던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멈추어 섰다.
‘올 테면 와라.’
페트라가 속으로 되뇌었다. 아폴로니아의 수가 무엇이든, 그녀를 쏴 버리면 모든 것은 끝난다. 심리전 같은 것, 응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머리와는 다르게 몸의 감각은 불안했다. 아폴로니아의 죽음을 지시한 순간에도 페트라는 무언가가 두려웠다. 자신이 끌어낸 것임에도, 이상하게 그녀가 가까이 오는 것이 싫었다.
“감옥으로 가자.”
페트라가 건조한 목소리로 시녀에게 말했다.
페트라가 도착한 곳은 리페르성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지하에 있는 벽돌 감옥이었다.
그곳은 정식 재판을 거친 죄수들을 수용하는 곳이 아니었다. 외부와 절대적으로 차단되어야 하는 사람들만을 가두기 위한 곳으로, 그곳으로 통하는 길이 미로에 가까웠기 때문에 지금껏 누구도 탈옥에 성공한 적이 없는 장소였다. 그러나 페트라의 시녀는 횃불 하나만을 들고 익숙한 듯 길을 찾았다.
복잡한 길을 지나자 묵직한 벽돌문이 나왔다. 그 앞을 지키던 병사 두 명이 페트라에게 깍듯하게 예를 취했다. 페트라는 병사들에게 수신호로 문을 열라고 지시한 뒤, 혼자서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이익- 철컹.
횃불을 비추자 어두컴컴한 감옥의 내부가 조금씩 드러났다. 이끼가 낀 벽돌이며 차가운 돌바닥, 낮은 천장, 그리고…….
“웬일로 직접 오셨군요.”
감옥의 안쪽 벽에, 팔이 사슬로 묶인 채 서 있는 작은 여인.
“아드리안.”
황제가 가장 아끼는 시녀, 아드리안이었다.
페트라는 들고 온 횃불을 벽에 걸었다. 여전히 어두웠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잘 볼 수 있었다.
“많이 바뀌었구나. 예전 같으면 내 얼굴을 감히 마주 보지도 못했을 것을.”
페트라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아드리안의 녹색 눈동자는 페트라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글쎄요, 그저 보기가 싫었던 것일지도 모르죠.”
아드리안이 대꾸했다. 비아냥이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페트라는 아드리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그녀는 심하게 말랐고, 몸 여기저기에 상처도 있었다. 귀 옆에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나간 흔적이 보였다.
“아폴…….”
“폐하에 대해 물으러 왔다면 딱히 할 말이 없어요. 이미 그렇게 말했는데요.”
페트라가 말을 꺼내자마자 아드리안이 딱 잘라 말했다. 페트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채찍으로 맞으면 예의를 알게 될지도 모르겠군.”
페트라가 다시 한 번 싸늘하게 내뱉었다.
“네가 할 말이 없다면, 내가 말해 주겠다.”
그녀는 아드리안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아폴로니아는 리페르 영지에 들어섰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반걸음 정도가 되었을 때 페트라가 말했다. 조금 전까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던 아드리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를 찾으러 온 모양이다만……겨우 천 명의 군대를 데리고 왔다지. 뻔한 눈속임으로 영지 근처에 대기하던 에핀하르트 대공 쪽의 군사와 합쳐도 나의 정예병에 못 미친다.”
페트라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아드리안의 귓가에 닿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아드리안의 몸이 살짝 떨렸다. 페트라의 입꼬리가 살짝 들렸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적의 모습, 그것만큼 그녀를 안심시키는 것이 없었다.
“가까이 오면, 그 순간 나는 그 계집의 머리를 자를 거다. 가까이 오지 않으면 네 머리를 잘라 그 계집에게 보여 줄 거고.”
그녀는 아드리안에게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아드리안이 다시 한 번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곧 도착할 테니, 아직 둘 다 살아 있을 때 주군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렴. 마음속으로 말이다.”
페트라가 입꼬리를 조금 더 올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두려움에 떠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감상하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섰다.
“……두려워하시는군요.”
그러나 아드리안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뭐?”
“폐하를 말이에요. 당신이 정말 자신 있었다면…… 이렇게 저를 찾아오지 않았겠죠.”
페트라는 천천히 아드리안과 시선을 맞추었다. 공포로 가득 찼을 거라 생각했던 아드리안의 눈빛은 그 힘을 잃지 않고 있었다. 말라붙은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떠보려고 왔겠지만 저는 정말로 몰라요.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요. 하지만…….”
어디서 나온 힘인지, 그녀는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페트라는 문득, 가이우스가 자신을 내치던 날,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본색을 드러냈던 아폴로니아가 떠올랐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에요.”
아드리안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죽기 전에 당신을 마주 보고, 당신이 못 가진 것을 내가 가졌다고 말해 줄 수 있어서.”
그녀의 말은 작지만 분명하게 들렸다.
“그걸 깨달았더니, 이제는 정말로 당신이 무섭지 않아요.”
그녀가 말을 끝내자, 페트라는 잠시 그 자리에 멍하게 얼어붙었다.
“내가…… 내가 못 가진 것을 네가 가졌다고?”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아드리안의 말을 되풀이했다.
“네까짓 게…… 사슬에 묶여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주제에?”
“하지만 사실인걸요. 폐하께서 나를 위해 영지에 찾아오셨다면서요.”
아드리안은 천천히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위기에 처한 것이 당신이었다면, 가이우스 리페르가 당신을 구하기 위해 자기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희생했을까요?”
짝!
아드리안이 물음을 던지자마자, 페트라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뺨을 쳤다.
“감히…….”
“보세요.”
아드리안은 부어오른 뺨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더욱 노골적으로 웃었다.
“내 말이 맞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죠. 평생을 바쳐서 모셨던 오라비가 직접 당신을 내쳤으니까요. 불충하고 무능하다는 이유로.”
“입을 다물지 않으면 그 혀를 잘라 아폴로니아에게 선물할 것이다.”
페트라가 으르렁거렸으나 아드리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오히려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당신과 나 또한 폐하와 가이우스 리페르만큼이나 다르니까요.”
페트라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한때 그녀의 시중을 들던 미천한 시녀는 마치 자신이 페트라보다 우월하다는 듯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말해 줄까요?”
짝!
페트라의 손바닥이 다시 한 번 아드리안의 뺨에 닿았다. 그러나 아드리안을 때리는 순간에도 페트라는 자신이 패배한 듯한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마치 페트라의 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 작은 승리감이 아드리안의 눈을 스쳤다.
“당신은…… 당신이나 가문이 위기에 처하면 망설이지 않고 주군인 가이우스 리페르를 희생시키겠지만.”
아드리안이 멈추지 않고 내뱉었다. 페트라를 자극할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나는……폐하가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아도 그분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을 거거든요.”
아드리안은 입 안쪽에 고인 피를 퉤 하고 뱉어 냈다.
“애정할 수 있는 주군을 만난 것도, 주군의 신뢰를 얻은 것도 내 쪽이니……난 오히려 당신이 불쌍하군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었다.
“하!”
페트라가 거칠게 웃음을 토했다. 머리는 냉정을 찾으려 했지만 몸은 의지와 무관하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돌아 버린 모양이구나.”
페트라는 간신히 말을 뱉었다.
“영지까지 왔다고 해서, 아폴로니아가 정말 너 따위를 위해 목숨을 걸 것 같아?”
그녀의 말이 조금씩 빨라졌다. 겨우 아드리안 때문에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아드리안의 말은 그녀의 정곡을 찔렀다. 페트라가 인생에서 맛보았던 가장 큰 실패, 사실상 유일한 실패는 가이우스와의 망가진 관계였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존중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진심으로 아낀 적도 없었다. 그녀의 능력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렇기에 가문은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리페르 공작조차 함부로 언급하지 못하는 그 사실을, 아드리안이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이 페트라를 크게 자극했다.
“그저 전쟁을 시작하러 왔을 뿐이다.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겠다고 네가 죽기 전에 도착한 것뿐이야. 그 계집은 절대로 너를 위해 성문 앞까지…….”
페트라는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아드리안을 때리기 위해 손을 들었다.
“페트라!”
그러나 페트라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멀리서 들리는 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페트라 리페르!”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한 그 목소리는 또렷하게 전달되어 감옥 안까지 울렸다.
마치 소리를 증폭시키는 주술이라도 쓴 것처럼.
아드리안이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보세요.”
피가 맺힌 작은 입술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벌써 오셨잖아요.”
증오스럽고 또 소름 끼치는 아폴로니아의 목소리는, 손을 허공에 둔 채 그대로 얼어붙은 페트라의 귀를 또다시 파고들었다.
“지금 당장, 아드리안을 내 앞으로 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