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1.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지 (28/34)

Chapter 11.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지

세타의 덕으로, 아폴로니아와 여러 하객들은 활짝 열린 성문을 통해 손쉽게 황궁에 입성할 수 있었다.

밤까지 패리스를 맞이하기 위해 온갖 꽃이며 보석으로 황궁을 꾸미고 있던 사용인들, 그리고 남아 있던 기사들은 처음에 깊은 혼란에 빠졌다. 몇몇 사람들은 벨벳 관을 쓴 아폴로니아를 보고도 ‘새로 즉위하신 황제 폐하는?’이라며 패리스를 찾았다.

그러나 패리스와 아몬 백작 등이 포박되어 끌려온 모습을 보자 대부분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고, 가이우스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모두가 아폴로니아에게 예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아폴로니아가 반역을 일으킨 것이냐며 소리 죽여 웅성거렸으나, 신전에서 밝혀진 사실이 황궁 전체에 퍼지자 그들조차도 그녀를 황제로 인정하였다.

아폴로니아가 정원을 지나 황제궁에 들어서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두 줄로 늘어서 그녀를 맞이하는 사용인들이었다. 성문에서 그곳까지 가는 동안 소문이 퍼진 것인지, 먼저 도착한 기사들이 언질을 준 것인지, 그들은 아폴로니아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페하를 뵙습니다.”

아폴로니아가 지나가자 사용인들은 한 명씩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아폴로니아는 속으로 안도했다. 여러 가지가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된 듯했다.

“황제 폐하를 뵙…….”

“너는 약식으로만.”

아폴로니아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를 취하려던 시녀 한 명의 팔을 붙잡아 무릎 꿇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폐하!”

그녀가 고개를 들자, 에메랄드를 닮은 녹안이 반짝였다. 찰나의 순간 그 안에는 아폴로니아를 향한 반가움, 그녀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 드디어 관을 머리에 얹은 그녀를 향한 축하 등 수많은 감정이 스쳤다.

아폴로니아는 아드리안을 향해 웃었다. 그러나 그녀를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모두에게 네 위치를 알려 주는 것뿐이란다.”

그녀의 말처럼, 그곳에 있는 모든 시종과 시녀들의 시선은 아드리안을 향해 있었다.

그녀 또래의 시녀나 시종들은 특별한 대접을 부러워하는 눈빛이었고, 조금 더 연륜이 있는 이들은 그저 새로운 권력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느 쪽이든, 이제 황궁에서 아드리안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폴로니아가 신전에서 제 손으로 황제의 관을 머리에 얹은 후로, 연인인 유리엘부터 황궁의 사용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녀에게 가장 정중한 예를 보였다. 아폴로니아가 약식 인사를 허락해 준 단 한 명의 사람이 아드리안이었다.

황궁의 사용인들은 새로운 서열을 빠르게 익히고 또 빠르게 적응했다.

혼란스러웠던 밤이 지나간 다음 날, 아폴로니아는 메인 홀의 황좌에 앉아 시종장인 모튼을 대면하고 있었다.

“모튼이 왔어요, 폐하.”

아드리안이 말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가 예를 갖추며 말했다.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며 굳어 있는 표정에서 그의 긴장감이 전해져 왔다.

페트라의 측근, 가이우스의 시종장. 비록 패리스의 핏줄이며 가이우스의 반역에 대해서는 몰랐을지라도, 그는 몇 년 동안이나 아폴로니아를 은근히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자였다. 즉, 여러모로 아폴로니아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 피해 볼 요량이었으나 아폴로니아가 직접 그를 보자고 지시한 이상, 그는 자신의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튼은 이미 수없이 씹혀서 피가 나려 하는 입술을 다시 한 번 깨물었다.

“덕분에 즉위식을 잘 마칠 수 있었어. 역시 유능하군.”

“예, 예?”

뜻밖의 칭찬에, 모튼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 서있던 사용인들, 그리고 카엘리온과 녹스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내가 무사히 즉위할 수 있었던 것에는 너의 공도 있다.”

아폴로니아가 다시 말했다. 그녀는 황좌에 앉은 채 별 표정 없이 모튼을 내려다보았다.

황좌에 앉아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폴로니아의 모습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짙은 남색 원단에 장식이 많지 않은 드레스, 반만 틀어 올리고 나머지는 늘어뜨린 금발, 그 위의 작은 푸른색 머리 장식.

그러나 모튼은 감히 그녀를 마주볼 수 없었다. 한때 그가 업신여겼던 그녀는 황제였다. 십몇 년에 걸쳐 리페르 가문이 쥐고 있었던 황실을 순식간에 장악해 버린 여인.

“폐, 폐하…….”

“쉬어야 할 테지만 보다시피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많아서. 네가 수고를 더 해 주어야겠어.”

황망함에 어쩔 줄 모르는 그에게, 아폴로니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기 중인 사절들이며, 여러 하객들에게 술과 고기가 부족하지 않도록 해. 잠자리도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 써 주고. 한동안 황궁에 머물러야 하니 나의 즉위식 준비를 했던 것과 같은 세심함으로 임하도록 해.”

모튼은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의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처벌은커녕 시종장의 업무를 계속 이어 나가라니?

“가이우스의 황비들은 내가 다른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는 있던 거처에 계속 머무르게 하고.”

“……예.”

“황궁 어딘가에 안톤이라는 자가 갇혀 있을 거야. 즉위식 전에는 처형을 하지 않는 법이니 아직 멀쩡하게 있을 거다. 그는 자기 죗값을 다한 자이니 다친 곳은 치료해 주고 먹을 것을 주어라.”

그녀는 쉼 없이 모튼에게 명령했다. 황제와 시종장의 흔한 대화였으나 모튼은 여전히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가 봐.”

“……예. 폐하.”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홀을 빠져나갔다. 한 무리의 시종들이 그 뒤를 이었다.

“문 닫아 줘. 우리끼리 이야기 좀 할까?”

아폴로니아가 녹스에게 말했다. 시종들이 빠져나간 후, 홀에 남은 것은 아폴로니아를 제외하면 아드리안, 녹스, 카엘리온, 그리고 유리엘이 전부였다.

“폐하, 대체 무슨 생각으로…….”

녹스가 벙 찐 표정으로 물었다. 모튼은 시드가 아폴로니아를 호위하던 시절에도 황실에 있었고, 간혹 아폴로니아에 대한 무례로 그와 시비가 있었던 자였다.

“일단 당장 모튼을 대체할 사람이 없기도 하고.”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쯤 말했으면 리페르 가문에서도 그를 황궁에서 빼돌려 어떻게 해 볼 생각을 못할 테고.”

녹스는 여전히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은 듯,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아까 폐하께서 그의 공로를 치하하신 것은…….”

“일단 모튼이 폐하의 사람인 것으로 보이면, 의도와 상관없이 그는 폐하의 즉위를 도운 사람으로 남으니까 모튼에게 섣불리 반역을 권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요.”

아드리안이 이게 뭐가 어렵냐는 듯 말했다. 아폴로니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장이 폐하를 도왔다는 소문이 나면 아직 폐하를 못미더워 하는 사람들도 폐하를 더 신뢰하게 된다는 효과도 있죠.”

녹스의 눈이 커졌다. 그걸 설명도 안 듣고 그냥 이해한다고?

그는 술수를 모르는 자는 아니었으나, 다수의 사람들이 엮이며 벌어지는 복잡한 정치는 그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드리안은 아폴로니아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그럼 폐하, 저 사람을 계속 시종장으로 둘 건가요?”

“아니. 그는 고모님이 들였던 사람이야. 상황이 안정되면 모튼을 비롯해 많은 황궁의 사용인들을 교체할 거야. 다만 당장은 그가 최선이라는 거지.”

“하긴…….”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모튼의 거만한 모습을 기억하는 그녀는 무언가 아쉬운 듯했다.

“너무 아쉬울 거 없단다. 바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천 명이 넘는 인원을 한참 동안 먹이고 재우는 문제는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니까. 그걸 맡겼다는 것 자체가 모튼에게는 벌이야. 내 눈치를 보느라 대충 하지는 못할 테고, 아마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걸.”

아폴로니아가 가볍게 덧붙였다.

모튼이 유능하다는 말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그 덕분에 즉위식은 정확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으니까.

몇 달 전 아모레타는 자신이 그를 위해 걸었던 주술을 전부 해제해 버렸고, 동시에 패리스의 머리색이 타고난 그대로 돌아오도록 주술을 걸었다. 다만 그녀는 주술과 해제의 효과가 나타나는 시기를 조절해 두었다. 패리스가 혈통을 증명해야 하는 그 순간에 그의 모든 것이 드러나도록.

주술이 완벽하게 실행되기 위해서는 즉위식의 모든 절차가 착오 없이 순서대로 흘러가야만 했다. 고의는 아니었을지언정 모튼은 그 계획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다시 카엘리온을 바라보았다.

“카엘 너는 되도록 빨리 사병들에게 가 보렴.”

카엘리온은 그에게 떨어진 명령에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 내지 않고 가도록 해. 리페르 영지의 경계에 대기 중인 사병을 곧 지휘하게 될 거니까.”

아폴로니아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진지해져 있었다.

“전령이 돌아와 봐야 알겠지만 고모님은 소식을 듣자마자 북쪽의 영지로 출발하셨을 거야. 말하자면.”

그녀의 눈이 짙은 붉은빛으로 반짝였다.

“진짜 전쟁은 이제 시작이라는 거지.”

카엘리온은 평소와 같은 농담을 하지 않았다. 전쟁에 임하는 그는 매 순간 진지했다.

“예, 폐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녹스와 함께 홀을 나섰다.

“어라, 나 좀 들어가도 돼?”

문이 열리는 순간, 들려온 것은 익숙한 말투였다. 가볍고, 장난스러운, 어딘가 붕 떠 있는 사람.

“들어와, 에반젤린.”

아폴로니아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새로 등극한 황제의 앞에 선 에반젤린은 평소와 다름없이 산만한 모습이었다.

“와! 여기 다시 와 보네요.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했는데!”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홀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에반…….”

“와아! 거기 앉으니까 잘 어울려요!”

아드리안이 당황해서 불렀으나 에반젤린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아폴로니아를 보고 입을 벌렸다.

“에반…….”

“아아 맞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드리안이 무섭게 노려보자 그제야 예를 취한 그녀는 재빨리 다시 일어서서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 했는데, 직접 오게 만들었군.”

“저도 귀찮게 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떤 놈이 부득부득 폐하를 소개해 달라고 졸라서 말이죠.”

그녀는 한숨을 쉬며 문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조심스럽게, 한 청년이 그 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에반젤린보다 한층 옅은 머리색, 비슷한 눈동자, 아폴로니아보다는 크지만 유리엘이나 카엘리온보다는 한 뼘쯤 작은 듯한 키에 천진해 보이는 미소.

“세드릭 왕세자.”

아폴로니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린 초면이군.”

“……폐하를 뵙습니다.”

그는 황좌 앞까지 다가와 인사했다. 고개를 숙이는 대신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신전에서 보았네. 다른 사절들과 함께 나에 대한 지지를 보여 주어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세드릭은 대답 대신 멍한 표정으로 아폴로니아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제국은 라잔의 도움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네.”

“……뭘요.”

그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왠지 대답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세드릭의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감탄한 것 같기도 하고,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아폴로니아가 다시 물었다. 긴장한 것이든, 원래 좀 멍한 사람이든, 그녀는 세드릭에게 화를 낼 생각이 없었다. 그의 누이는 아폴로니아가 황궁을 되찾는 데에 가장 큰 힘을 보탠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질문에 대한 세드릭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폐하께, 약혼자가 있는지 여쭙고자 합니다.”

그의 또렷한 목소리가 홀 전체에 울렸다. 동시에 유리엘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는 것이 보였다. 의외의 질문에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게는 연인이 있지.”

“그럼 약혼자는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세드릭이 다시 말했다. 무언가 직감한 아드리안이 요염하게 웃으며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왕세자님, 날씨가 좋으니 저와 함께 말이라도 타러…….”

“이제 그거 안 해도 돼, 아드리안.”

아폴로니아가 한숨을 쉬며 그녀를 저지했다.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섰다.

“왕세자…….”

퍽!

아폴로니아가 미처 제대로 말을 꺼내기 전에, 에반젤린의 손이 붕 하고 허공을 가르더니 세드릭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으헉!”

세드릭이 눈물을 글썽이며 따졌으나 에반젤린은 그다지 후회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기겁하는 세드릭을 향해 다시 한 번 손을 들었다.

“누님! 아프잖아요!”

“연인이 있다면 그런 줄 알 것이지, 약혼 안 했으면 네가 어쩔 건데?”

그녀가 아직 덜 끝났다는 듯 손을 다시 들어 올리며 물었다.

“뭐긴 뭡니까? 첫눈에 반했으니 당연히 청혼을…… 아악!”

에반젤린이 대답을 끝까지 듣지 않고 그의 등짝을 내리치자 세드릭이 펄쩍 뛰며 비명을 질렀다.

“왕세자가 돼 가지고 무슨 헛소리야?”

“그게 뭐가 어때서요!”

“왕세자는 황제 부군 못 해. 폐하랑 결혼해서 여기 살면 라잔은 그냥 혼자 굴러가라고 냅두게?”

에반젤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세드릭은 전혀 굴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거 누님이 하면 되잖아요.”

“뭐래? 귀하게 키웠더니…….”

“귀해요?”

세드릭이 억울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차피 누님들이 다 하기 싫다고 떠넘긴 거면서! 원래 막내가 하는 거라고 거짓말까지 하고!”

그는 에반젤린을 향해 오래 참은 듯한 울분을 토했다.

“어…… 그랬었나?”

“귀하긴 뭐가 귀해요? 마물 잡겠다고 미끼로 쓰지를 않나.”

“아…… 맞다. 그래도 나중에 구해 줬는데.”

에반젤린은 미지근하게 대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외눈까마귀 각인을 시험하겠다고 그놈들이 득실거리는 방에 날 혼자 밀어 넣지를 않나…….”

“시종한테 시킬 수는 없으니까…….”

“숨바꼭질하자고 해서 숲속 나무 구멍에 숨었더니 그 길로 가출해 버리고는 2년 동안 안 돌아오지를 않나. 난 3일 동안 거기 있었다고요.”

“어. 되게 멋있는 마물을 봐 가지고…….”

에반젤린은 다소 쭈그러진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폐하랑 결혼은 안 돼.”

“내 혼사에 신경 꺼요. 폐하를 본 순간 심장이 아팠…….”

“그쯤 하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한참 구경하던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왕세자, 내 약혼 여부는 그대와 아무 상관이 없어. 청혼을 하는 건 그대의 자유지만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

그녀는 곁눈으로 유리엘을 보았다. 그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세드릭을 쏘아보는 새파란 안광에서는 꽤나 위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중한 제후국 차기 국왕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지.’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이 패기만 가득한, 황당한 청혼의 방식으로 볼 때 아마 여인과 손 한 번 안 잡아 보았을 소년에게는 확실한 메시지 전달이 필요했다.

“그럼 결혼 전까지는 승산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폴로니아가 무언가 생각하는 사이, 세드릭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에반젤린의 손이 다시 한 번 그의 등짝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에.

“윽!”

“아, 좀 빠져. 넌 도움도 안 됐으면서…….”

“이제부터 도울 거라니까요. 진짜 목숨까지 바칠 생각이…….”

“두 사람은 천천히 있다가 정원에서 식사라도 하도록 하지. 요리사에게 말해 둘 테니.”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서로 틱틱거리는 남매에게 말하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유리엘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내 연인과 나는 함께 황궁을 둘러봐야 해서.”

갑자기 나긋해진 말투에, 날카로웠던 유리엘의 얼굴에 달콤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곧바로 아폴로니아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두 사람의 거리낌 없는 접촉에, 세드릭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폴로니아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척, 유리엘에게 다시 속삭였다. 물론 세드릭의 귀에도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황제궁에는 총 스물한 개의 침실이 있으니 며칠 동안 천천히 하나씩 볼까 하는데.”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세드릭은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그 말을 이해한 듯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연인과 침실을 둘러본다, 그 말은 곧 잠자리를 갖겠다는 노골적인 의사 표시가 아닌가.

“어…… 음…….”

세드릭은 무언가 말을 하려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귀 끝까지 빨개진 채 굳어 있었다.

“폐하께서 저를 원하시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유리엘이 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붉어진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는 세드릭을 남겨 둔 채 아폴로니아의 어깨를 감싸고 홀을 빠져나갔다.

“어디로 가십니까?”

복도로 나오자 유리엘이 물었다. 조금 전 세드릭을 자극하던 태도는 사라져 있었다.

“침실로 간다며?”

아폴로니아가 픽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조금 전 세드릭에게 그랬듯, 그저 유리엘의 반응이 보고 싶어 한 장난이었다.

유리엘은 갑자기 복도에 멈추어 서서 아폴로니아를 마주 보았다.

“응?”

“그럼.”

유리엘은 아폴로니아의 어깨를 살짝 잡고, 두 사람의 코끝이 살짝 맞닿을 때까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에게서만 나는 달콤한 향이 아폴로니아를 자극했다. 긴 은빛 속눈썹 아래의 아름다운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정말로 갈까요? 지금?”

유리엘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들릴 듯 말 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입술이 아폴로니아에게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추어 있었다.

“……응?”

아폴로니아는 자신의 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 세드릭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순간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유리엘도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경고도 없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바다색 눈동자며 살짝 들린 입꼬리, 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는 그녀의 이성을 흐리기에 충분했다.

생각보다 아폴로니아의 반응이 컸는지, 유리엘은 한 번 웃고는 상체를 펴며 그녀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마치 주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농담입니다, 폐하.”

유리엘이 다시 한 번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는 여전히 유혹적이었다.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이 남자의 조상 중에는 분명히 벨라가 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이 홀린 것 같은 느낌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 * *

“가장 오고 싶었던 곳이 여기입니까?”

유리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두 사람은 거대한 도서관 안에 서 있었다. 별궁이나 동궁, 또는 가이우스의 후궁들이 거주하던 옛날 황녀궁의 도서관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였다.

“어렸을 때 내가 자주 오던 곳이 여기였으니까.”

“독서가 재미있어서요?”

“응. 그리고 할아버지가 산더미 같은 숙제를 내주셔서.”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녀는 사다리 없이는 닿지도 않을 높은 책장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십몇 년 동안, 가이우스도 패리스도 이곳을 자주 드나들지는 않은 것 같았다. 페트라는 황궁의 모든 부분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쳤지만, 도서관만큼은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거의 그대로 두었다. 시녀들이 가끔씩 드나들며 청소와 정돈을 할 뿐이었다.

안락의자도, 벽난로도, 아폴로니아가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책들도 그대로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책장들을 쓸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책을 읽어 주던 엘레니아 황녀의 모습도, 엄격하게 그녀를 가르쳤던 파스칼 3세의 모습도, 마치 도서관에 함께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 책을 좋아했어.”

그녀는 구석에 박혀 있던 두꺼운 책을 빼내며 말했다. 먼지가 쌓인 표지에는 『레일라 루페리온―그녀의 삶, 그리고 죽음』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파스칼 1세에게 처형당했던 대해적의 일대기야. 금서로 지정돼 있지만 황궁에는 있었지.”

유리엘이 책을 받아 들었다.

“여인의 몸으로 7개의 바다를 휩쓸었고, 한때는…….”

“한때는 물의 황제라 불렸습니다.”

유리엘이 그녀의 말을 끝내 주었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폐하께서 좋아하는 인물이라 하시기에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금서를 보지는 못했지만요.”

아폴로니아가 빙긋 웃었다. 유리엘은 절대로 그녀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이 책을 좋아한 건 말이야, 다른 책에 안 나온 부분을 다루어서 그랬어. 루페리온뿐 아니라 그 숙적인 파스칼 1세에 대한 내용도 많지.”

그녀는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책을 펴고 폭신한 도서관 카펫 위에 앉았다. 유리엘도 조용히 그 옆에 자리 잡았다.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이 금서라는 건 독특하군요.”

그가 말했다.

“무슨 내용입니까?”

“서로의 부하를 수백, 수천 명씩 죽였던 두 사람이 한때는 연인이었다는 거.”

유리엘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는 책을 넘겨서 그 첫 페이지에 적힌 작가의 이름을 보여 주었다.

유리엘의 눈이 더 커졌다.

“……파스칼 1세가 직접 쓴 것입니까?”

“그래. 말년까지 잊지 못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책으로 남겼다고 해. 물론 루페리온이 죽은 지 한참 지난 후였지. 왜 금서인지 알겠지?”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최고의 명군이, 그의 숙적이자 원수인 여인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황실에 좋을 것이 없었다.

“선황께서는 내게 이 책을 읽으라고 하셨어. 파스칼 1세에 대해 존경할 점이 보일 거라고. 그런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뭐, 단점이 없다고는 안 하셨지만.”

그녀는 책의 검은 표지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유리엘이 말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제 손으로 처형하고 그에 대한 후회가 남아 두꺼운 책을 썼다니. 비겁한 자가 아닙니까?”

“아, 후회는 안 했어.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대. 황제로서 너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는 루페리온을 잡은 후 바로 사형 선고를 내렸어. 제국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자를 처벌하는 것은 황제의 책임이니까. 뭐, 루페리온은 애초에 그런 질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녀는 익숙하게 책을 넘겨, 단두대에 선 레일라 루페리온의 초상을 보여 주었다.

처형장에 있던 어느 화가가 그린 그림 속에서, 죄수복을 입은 그녀는 활짝 웃으며 주먹을 치켜들어 황제에게 무언의 욕설을 날리고 있었다. 유언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자유롭고 장난스러운 몸짓이었다.

물론 파스칼 1세는 그 모습이 기억에 남아 그림을 간직했던 거겠지만.

“그 후로 수십 년을 괴로워했지만 파스칼 1세는 끝까지 자신의 결정을 되돌리고 싶다는 말은 안 했어. 공사를 구분하는 것은 황제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여겨졌으니까.”

아폴로니아는 책의 마지막 장을 펴고 그중 한 문장을 읽었다.

“‘목숨을 다해 연인을 사랑하는 것, 연인을 위해 무엇이든 해 주겠다는 약속, 그런 것은 황제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기 전에 군주이며, 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혼란, 무질서, 범죄, 가난과 죽음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이건 평소에도 그가 자주 하던 말이야.”

아폴로니아가 말을 마치고 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담스러운 말이군요.”

유리엘이 조용히 말했다.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년에는 미쳐 버렸다고 하지. 진짜로는 루페리온을 잊지 못한 탓일지도 모르지만.”

아폴로니아가 부정하지 않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책장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폐하, 걱정이 있으십니까?”

이윽고 유리엘이 담담하게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살짝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폐하께서는 생각할 것이 많을 때 선황들의 말씀을 떠올리시니까요.”

아폴로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엘의 손이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감쌌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들어 자신을 보게 했다.

“리페르와의 일전이 걱정이십니까? 어제도 밤새 카엘리온과 녹스를 불러놓고 회의만 하셨죠.”

아폴로니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전술이 잘못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많아서, 하나하나 짚으려면…….”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붙이시는군요.”

유리엘이 아폴로니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미칠까 봐 걱정이야?”

“제가 오래 남아 있을 생각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는 아폴로니아의 손을 잡아 올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일이 잘못될 거라는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근거가 있어?”

유리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는 싸움이 아니면 뛰어들지 않는다는 세드릭 왕세자가 폐하께 청혼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폴로니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들었다. 유리엘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괘씸한 녀석이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신호라 여겼습니다. 계산적인 그가 왕위를 포기하겠다며 청혼을 한 것은 곧 인생을 걸 만큼 폐하의 승리를 믿는다는 뜻이니까요.”

아폴로니아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유리엘은 조용하게 대국을 읽는 능력을 가졌다. 소년의 유치한 도발 뒤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질투는 하지 않아?”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릴 정도는 아닙니다. 녀석을 몇 대 쥐어박으면 풀릴 정도니까요.”

그가 다시 한 번 아폴로니아의 손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대인배로군.”

“물론입니다. 꼬맹이를 걱정할 때가 아니니까요.”

“그럼? 뭘 걱정해?”

“폐하께서 하루만이라도 책임을 내려놓고 쉬기를 바랍니다. 어제의 일이 있었던 후로 아직 제대로 쉬지 못하셨습니다.”

유리엘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말했다.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넌?”

“폐하의 휴식이 제 휴식입니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유리엘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단순할 정도로 그녀만 바라보았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미안해지려고 하네.”

그녀는 작게 속삭였다.

유리엘의 시선이 옆에 내려놓은 책을 향했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목숨을 다해 연인을 사랑하는 것, 연인을 위해 무엇이든 해 주겠다는 약속, 그런 것은 황제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아폴로니아는 파스칼 1세의 말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연인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없다고 했지, 연인의 모든 것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없지 않습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다시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감쌌다.

“다른 것은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평온하게 쉬시는 것, 제가 원하는 건 그뿐입니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기울여 그녀와 입술을 겹쳤다. 달콤한 향이 훅 풍기고, 전신의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아폴로니아는 팔을 뻗어 유리엘의 목을 감았다.

유리엘이 한 손으로 아폴로니아의 허리를 감은 채 그녀를 살짝 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고, 두 사람은 공기조차 지나갈 틈 없을 정도로 꽉 붙어서 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호흡이 가빠질 무렵, 유리엘이 그녀를 잠시 놓아주었다. 아폴로니아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쉬는 걸 말한 거였군.”

유리엘은 부정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얼굴이 너무나도 가까워서인지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입술과 가지런한 치아뿐이었다.

사랑스러웠다.

그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며 짓는 그 미소가. 아무리 보아도 질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을 안고 있는 유리엘의 체온이 미치도록 기분 좋았다. 그녀는 그 순간 깨달았다.

아폴로니아는 그를 원했다. 그의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준다고 했지.”

그녀가 다시 속삭이자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폴로니아는 한 손을 뻗어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을 빼내고, 책장의 숨겨졌던 면의 얼룩처럼 보이는 부분을 살짝 건드렸다.

드르륵-

그녀가 건드린 책장 전체가 진동하는가 싶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바닥 전체가 움직였다. 이윽고 책장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게 뭡니까?”

유리엘이 조용히 물었다.

“황궁에는 가려진 공간들이 많아.”

그녀는 태연히 대답했다.

책장은 반 바퀴 회전하고 멈추었다. 유리엘이 눈을 들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실이었다.

황궁에서 보기 드물게 작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폭신한 카펫이 바닥 전체에 깔렸고, 침구가 가지런히 정리된 새하얀 침대와 그 옆의 안락의자 외에는 다른 가구가 없었다.

“어렸을 때 자꾸 도서관에서 밤을 샌다고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셨던 방이지. 아마 10년 동안 청소하는 시녀들 외에는 들어온 사람이 없었을걸.”

“스물한 개의 침실 중 하나로군요.”

“맞아.”

아폴로니아가 유리엘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난 오늘 여기서 쉴 거야.”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조금 전 입맞춤으로 거칠어졌던 호흡은 아직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리엘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이마를 맞댄 채로 듣고 있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아폴로니아는 그것이 자신의 박동인지, 아니면 자신을 안고 있는 유리엘의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벌어지고, 목소리가 유리엘을 간지럽히듯 그의 귓가에 닿았다.

“네가 원한다면 너도 함께.”

유리엘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는 미세하게 얼굴을 떼고, 진심이냐는 듯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싫으면…….”

아폴로니아는 다음 말을 끝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덮쳐 오는 유리엘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았기 때문에.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극이었다.

그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파고들었다. 아폴로니아의 귀, 목덜미, 쇄골 할 것 없이, 그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

온몸이 뜨겁고 저릿했다. 얼마 전까지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오직 유리엘과 더욱 가까이 얽히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아폴로니아.”

달콤해서 취할 것 같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품을 파고들며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녹아 버릴 것 같은 황홀함 속에서,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렀다.

“나의 아폴로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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