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불의 즉위식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폴론 신전이 있었다. 깨끗했지만 아무런 장식 없이 수수한 그곳은 넓고 황량한 부지를 높고 두꺼운 담장이 둘러싼 구조였다. 부지 중앙에는 높은 계단이, 그 위에는 오래된 제단이 있었고, 제단을 지나면 사제들이 생활하는 내부 공간이 나왔다.
신전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곳이기에 거의 항상 고요했고, 종종 사제들의 기도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신전의 권력이 군주 못지않은 나라들도 있었으나, 황족이 곧 신이나 마찬가지인 제국에서 신전은 상징적인 존재였다. 사제들은 정치에 개입 없이 기도나 자신의 수양에 매진하다가 자유롭게 민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신전이 제국 어느 곳보다도 화려하게 꾸며지는 날이었다.
모든 기둥에 황금 칠이 더해지고 지붕에는 고급스러운 실크가 덮였으며, 부지에는 화사한 꽃이며 나무가 심어졌다. 제단으로 향하는 계단 하나하나가 정성스레 닦여서 반짝거렸고, 넓은 제단 옆의 공간에는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가 놓였다.
신전 안에는 사제들이 아닌 황실의 시종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청소며 장식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단 한 치의 착오도 있어서는 안 된다.”
직접 방문하여 모든 것을 감독하던 시종장이 말했다.
“행사가 시작된 후 한 톨의 먼지라도 발견되면 모두를 벌할 것이다.”
시종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더욱 세심하게 일을 이어 나갔다. 오늘은 근 10여 년을 통틀어 황실에서 가장 큰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제국의 역사가 새로이 쓰이기 시작하는 날, 세상이 새로운 시작을 맞는 날, 신의 축복이 깃드는 날.
패리스의 즉위일이었다.
전통에 따라, 즉위식은 신전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귀빈들은 이미 도착하셨다.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려면 한시도 게으름 피울 수 없다.”
시종장이 다시 말했다.
그날의 준비는 이미 세세한 부분까지 아폴로니아의 명령이 있었다. 그녀는 아침에 시종장을 불러 놓고 수많은 서류들을 안기며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신전에 들어설 모든 사람들의 명단이며 자리, 즉위식의 절차를 비롯한 모든 일정이 초 단위로 자세하게 정해졌다.
시종장은 리페르 일가의 멀고 먼 친척으로, 평소 아폴로니아를 무시해 왔다. 그러나 최근 몇 달 페트라가 쫓겨나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아폴로니아에 대해 그는 약간이나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성실하고 똑똑했다. 황실의 대소사를 차질 없이 처리한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오빠의 즉위식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세심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조금의 착오도 있어서는 안 돼.”
그녀는 말했다. 어린 시절에는 예법도 몰라 자신에게 존대를 하고는 했으나, 이제는 제법 주인 같은 모습이 보였다.
“제국의 황제는 저녁에,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때 이루어진다고 했어. 해가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에는 새로운 황제가 관을 쓰고 있어야 해.”
그녀는 몇 번이나 전통을 강조했고, 이는 황제의 의사와도 일치했다. 오랫동안 황족이 아닌 황제를 두었던 제국민에게,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젊은 황제를 보여 주어야 했다.
“준비를 마치면 신전을 잠시 비워야 한다. 신의 축복이 깃들 수 있도록.”
그는 아폴로니아가 준비한 서류를 보며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모든 부분에서 고집스럽게 전통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고 나면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호위할 인력이 들어서야 하느니라.”
시종장의 명령과 시종들의 바쁜 움직임 속에서, 한낮의 태양이 신전 위를 지나고 있었다.
* * *
패리스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모습은 완벽했다. 태양 같은 밝은 금발, 그리고 금빛이 섞인 신비로운 눈동자.
이제는 그것이 그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몇 달 동안 약을 먹지 않았어도, 인위적인 노력이 없어도 아폴론을 닮은 그의 눈동자는 영원했다. 즉위식에 오지도 않을 포트러스 후작은 잊었다. 아모레타가 남기고 간 그 선물은 어떤 세력보다 강력한 힘이었다.
“준비가 되었느냐?”
등 뒤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패리스는 돌아서서 그의 아버지를 반겼다.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는 화려한 황금 자수가 새겨진 흰색 제복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너만의 준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황제가 부드럽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의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보안은 철저히 했겠지?”
패리스는 황제를 따라 웃으며 늠름하게 대답했다.
“신전에 이미 황실 기사단이 물 샐 틈 없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혹시 몰라 신전 밖에는 아몬 백작과 브로넬 백작의 사병들도 배치하도록 했고요. 호위 인력도 충분하니 어떤 일도 없을 겁니다.”
“사절의 숫자가 많다더군.”
“그렇습니다. 외국의 사절들은 물론, 대공령에서 따라온 인원도 화려하더군요. 모두가 제단 아래에서 즉위식을 지켜볼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패리스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는 잠시 후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을 생각에 감정이 벅차올랐다.
“에핀하르트 그놈이 화려한 인원을 데리고 왔다?”
“예. 아름다운 시녀들이 우르르 왔다고 소문까지 났습니다.”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패리스의 즉위식이 즐거울 리 없는 그놈은 보여 주기식 축하를 하며 대인배적인 면모를 나타내려 애쓰고 있었다. 속은 썩어 들어갈 것이 분명함에도.
아니, 아름다운 시녀들을 데리고 왔다 하니 어쩌면 패배자의 억지스러운 자기 과시일 것이다.
“아주 좋아. 모든 이들의 위에 군림하는 네 모습을 보여 주려면 하객도 많아야겠지.”
황제는 호탕하게 웃으며 패리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신전에, 아니 수도에 허락되는 것은 오직 하객과 시종뿐이다.”
그는 조금 더 진지해진 표정으로 덧붙였다. 즉위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안전, 혹시 모를 암살 시도에 대한 대비였다.
“걱정 마십시오.”
패리스가 다시 한 번 자신 있게 대답했다.
“신전 내부에 들어올 사람 중 위협이 될 만한 인원은 없습니다.”
“사병이나 병력은 절대로 안 돼. 대공령의 사병들은 아무 움직임이 없겠지?”
“카엘리온도, 그리고 몇몇 귀족들도 산적들 때문인지 일부 사병을 수도 근처로 옮겼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만 황궁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수도 부근 리페르 영지와 조금 더 가까운 위치라더군요.”
“그렇군.”
리페르 공작가의 언급에도 황제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온 힘을 다해 황제를 보좌했던 그의 혈연은, 패리스의 즉위식에는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페트라의 빈자리는 느껴지지 않았다. 의외로 할 일을 잘해 주고 있는 아폴로니아 덕분이었다.
“다만…….”
패리스가 짜증 섞인 한숨을 쉬며 말끝을 흐렸다. 황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지?”
“아침까지 멀쩡하던 아폴로니아가 몸이 아프다더군요. 참석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뭐?”
황제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걱정이 아닌 짜증이었다.
“오라비의 즉위식에 불참이라.”
“대신 모든 일을 시종장에게 맡겨 두었다며, 축하 선물은 오늘이 가기 전에 직접 전하겠다고 합니다.”
패리스가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뭐 어떻습니까, 그 애가 아픈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좋은 날 그 죽상을 한 얼굴을 볼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혈통에 부끄럽지도 않은지, 아폴로니아는 아프다고 자기 궁에 틀어박히는 일이 잦았고 무예에 소질도 없었다. 성격도 미련해 자기 것을 이리저리 빼앗기는 여자였다.
다행히 전보다 조금 똑똑해졌는지 최근 황실에서 소란을 피운 가레스를 벌하는 등 일처리를 야무지게 하고 있었으나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권력 잃은 가레스가 무엇이 무섭겠는가.
그녀는 여전히 황제나 패리스와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몸이 아프다라.’
황제가 조소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패리스를 바라보았다.
황실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아폴론신을 닮았다는 눈동자를 들어 올리지도 못하는 하찮은 딸, 그리고 늠름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황제의 관이 너무나도 잘 어울릴 패리스.
진정 황제의 자질을 갖춘 것은 역시 패리스였다. 사랑하는 그의 아들, 그리고 사틴의 아들.
이제 모두가 그의 앞에 엎드리게 될 것이다.
“네 말이 맞다. 니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황제가 패리스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었다.
“신전으로 가자.”
그는 꿈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로구나.”
* * *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10년 이상 적막만 가득했던 신전은 며칠 사이에 황궁보다 더 화려한 모습을 갖추었다. 넓은 부지는 여기저기 심어진 꽃과 나무로 화사한 맛이 돌았고, 높다란 신전 기둥은 금빛 칠을 두르고 웅장한 자태를 뽐내었다.
제단 뒤의 실내 공간은 닿기도 아까운 고급 실크와 벨벳으로 장식되어 보기만 해도 황홀할 정도였으며, 신전 부지를 둘러싼 담장조차도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이 그려져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부지 안에는 수천 명의 하객과 그들의 시중을 드는 시종, 시녀들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제국뿐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모여든 귀족이며 왕족들은 한 명 한 명이 아름답고 화려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철저한 사전 준비와 안내에 따라, 그들은 부지 중앙에 높이 서있는 제단 아래에 늘어서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제단 위에는 황금빛, 붉은빛, 푸른빛이 뒤섞인 불꽃이 하늘을 뚫을 것 같은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성인 남자 키의 두 배쯤 되는 거대한 불꽃이었다.
이것이 ‘성스러운 불’이었다. 눈부신 그 빛은 새로이 즉위할 황제의 빛나는 시대를 상징했다.
화려하게 춤추는 불꽃의 황홀함이 보는 이를 홀렸기에, 하객들의 시선은 최면이라도 걸린 듯 제단을 향해 있었다. 황제와 패리스가 아직 등장을 하지 않고 있었으나 누구도 지루해하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다만 소수의 몇 명만은 조용히 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물론,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상대방에 대한 파악과 견제였다.
“비에른 국왕 전하와 왕비께서 직접 오셨군요. 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아몬 백작이 기름진 웃음을 흘리며 이카르트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눈이 빠르게 이카르트와 비앙카 부부를 훑었다.
대륙에서 가장 금슬이 좋다고 알려진 국왕 부부답게, 그들은 서로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서 있었다. 그들의 뒤로 비에른에서 따라온 백 명가량의 사절단이 화려한 차림을 한 채 늘어서 있었다.
“고향이니 당연하지요.”
비앙카가 대답했다.
“저는 제국인이니, 폐하께서는 저의 옛 주군인 셈 아니겠어요?”
그녀는 아몬 백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왕비께서 그토록 충심이 깊은 줄은 몰랐습니다.”
아몬 백작이 사람 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의 머리는 빠르게 이 상황을 계산하고 있었다.
패리스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들과 귀족들의 행렬은 화려했다. 하인들의 수만 해도 역대 어떤 즉위식보다 많았으며, 이는 곧 새로운 황제에 대한 존중을 뜻했다.
‘대공도 별것이 없군.’
최근 귀족들이며 외국의 왕실들이 패리스를 노골적으로 싫어하고 카엘리온을 지지한다던 소문은 사실이 아닌 듯했다. 아니, 싫어하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현상을 뒤집을 정도의 반감은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현명한 자들이었다. 황제의 손에 공고하게 쥐여진 권력을 빼앗는 것이 어디 쉽던가?
아몬 백작의 시선이 카엘리온을 향했다. 그 또한 화려한 행렬과 함께 즉위식에 와 있었다. 감히 경쟁 상대로 여겼던 패리스의 즉위를 직접 축하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의 옆에는 제국에서 가장 강하고 아름답다는, 달빛을 닮은 검사 유리엘 비체도 있었다.
아몬 백작은 실실 웃음이 나왔다. 인척에 해당하는 리페르 공작가가 뒷전이 된 지금, 진작 패리스에게 온갖 보물을 보내 호감을 샀던 그의 지위는 어느 때보다 공고했다.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해.’
그가 스스로의 선택을 뿌듯해하며 우쭐대는 사이, 거친 수염이며 커다란 덩치가 곰을 연상시키는 비에른의 국왕, 이카르트가 비앙카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왕비를 만난 것은 황제 폐하의 은덕입니다. 이렇게라도 갚아야 마땅하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아몬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뭘 좀 아는 이 국왕 부부는 과거 황제의 뜻을 거스르고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황제에게 큰 빚을 졌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듯했다. 그의 시선은 곧 비에른 국왕 부부의 옆에 서 있는 라잔의 왕세자, 세드릭을 향했다.
아직 소년으로 보이는 세드릭은 신전이 참 신기하다는 듯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설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돌리는 것이, 그다지 위엄이 느껴지는 모습은 아니었다.
“라잔의 왕자께서는 참으로 가볍게 오셨습니다. 곁에서 시중들 사람이 충분한지나 모르겠군요.”
그는 콧김을 뿜으며 세드릭과 그의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다 합쳐서 겨우 다섯이었다.
“라잔은 전쟁 후로 부유해졌다고 들었는데, 다 헛소문이었나 봅니다.”
아몬 백작은 과장된 몸짓으로 세드릭과 이카르트를 번갈아 보았다. 비에른은 황제에게 잘 보이려 이렇게 노력하는데 너는 뭐 하냐는 태도였다.
“라잔의 세 번째 왕녀가 제국에 머무르고 있는데…… 그 정도 예만 차려서 되겠습니까?”
아몬 백작이 기어이 한 마디를 더했다. 얼마 전 전쟁이 끝나고 누이가 포로로 잡혀 온 마당에 딸랑 혼자 와서 밉보이는 게 멍청하다는 지적이었다.
“아, 심려는 감사합니다. 아만 백작님.”
어벙하게 서 있던 세드릭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누이보다 조금 옅은 초콜릿색 머리카락이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우윳빛 피부며 동그란 눈이며, 날카로운 표범을 닮은 에반젤린에 비해 더 순수하고 귀여운 얼굴이었다.
갓 상경한 시골 소년 같은 모습이며 태도에 아몬 백작이 코끝을 찌푸렸다.
“아몬입니다.”
“아이고, 이거 실례했군요.”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큰 실례인지 모르는 것인지, 세드릭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헤헤 웃었다.
아몬 백작은 한숨을 쉬었다. 올해 열아홉의 어리바리한 왕세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임이 분명했다. 누구한테 잘 보여야 인생이 잘 풀리는지 전혀 감이 없는 것이다.
딸은 마물이나 쫓아다니는 마녀에, 후계자인 아들은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라니, 라잔의 국왕은 자식 복이 참으로 없었다.
“심려 감사합니다, 아몬 백작님.”
세드릭이 최대한 예의 바르게 고쳐 말했다. 아몬 백작은 그제야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하더니 자신이 있을 곳으로 돌아갔다.
세드릭은 무해한 웃음을 유지하며, 백작에 대한 비웃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백작은 만난 순간부터 마치 세상이 자기 것인 양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물론 세드릭이 백작의 이름을 틀린 것은 실수였다. 그는 아몬 백작이 누구인지 아무 관심도 없었고, 관심 없는 자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귀찮았다.
다만 조금 전 그와 비에른의 국왕 부부가 나누는 대화는 귀를 세우고 들었다. 무척이나 흥미로웠으니까.
가식적인 인사로 보였지만 국왕 부부의 말은 놀랍도록 솔직했다. 아만, 아니, 아몬 백작이 못 알아들은 것뿐이었다.
“폐하께서는 저의 옛 주군인 셈 아니겠어요?”
“따지고 보면, 제가 왕비를 만난 것은 황제 폐하의 은덕이지요.”
그는 비에른 국왕 부부가 어떻게 만났는지 알고 있었다. 누이인 에반젤린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물론 에반젤린은 즉위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그에게도 부탁을, 아니, 협박을 하면서.
‘황위 찬탈…… 주인공을 알 수 없는 즉위식이라.’
세드릭은 국왕 부부를 곁눈으로 보며 웃었다.
아몬 백작은 모르겠지만 세드릭의 눈에는 그들의 긴장한 몸짓이 보였다. 국왕 부부가 지칭하는 ‘폐하’가 패리스도, 황제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백작은 까무러칠 것이다.
그들 부부는 자신들의 은인이자 자신들이 지지하는 새로운 황제, 아폴로니아를 폐하라 부르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상당수의 사람들도 그들과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지.’
세드릭은 신전 부지를 빙 두르고 있는 황실 기사단을 보았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신전 부지를 채우고 있었지만 유의미한 병력으로 보이는 것은 단연 기사들이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은 아폴로니아가 심어 놓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몇몇 귀족들이며 왕국의 사절들, 그리고 에핀하르트 대공을 보았다. 그들의 뜻이 모였다고 한들, 배경도 지위도 다른 세력이 한 몸처럼 협력하도록 지휘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기대되는군.’
조금 전까지 멍해 보였던 세드릭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위험하다며 말리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그는 사절이 되어 제국에 왔다. 평범한 것에는 끌리지 않는 누이가 존경하고, 좋아하고, 심지어 두려워하는 사람을 보기 위해.
세드릭은 에반젤린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고 방관을 선택했다. 그는 기분파도 아니었고, 운명을 운에 맡기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시합에는 뛰어들지 않았다.
다만 이 방관자의 호기심은 누구보다 강했다.
이름만 들었던 황녀가 가면을 완전히 벗는 모습을, 그 가면 뒤에 감춰진 얼굴을 앞줄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두웅-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커다란 북소리가 신전을 울렸다. 세드릭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두웅-
곧 해가 지려는 것이다. 붉게 물든 하늘을 보는 그가 미소 지었다.
두웅-
즉위식, 그 화려한 공연의 시작이었다.
* * *
패리스와 황제는 신전 안에서 함께 걸어 나왔다. 그들 뒤로, 화려한 벨벳 관을 든 신관이, 그리고 그 뒤로 열 몇 명의 사제들이 뒤따랐다. 높다란 계단 위에 자리 잡고 대륙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하객들을 내려다보는 그들은 참으로 웅장했다.
무겁고 고급스러운 자색 망토를 두른 황제가 제단의 뒤쪽 오른편에 놓인 황좌에 앉았다. 제단 위를 제외하면 신전 안에서 가장 높은 위치였다. 하객들이 신성한 불꽃과 그 너머에 있는 황제를 한눈에 올려다볼 수 있도록 안배된 자리였다.
“때가 되었소.”
황제의 옆에 나란히 선 신관의 목소리가 신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는 제단 가까이로 천천히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증인들이 모두 모였으니.”
높은 신전 담벼락에 부딪히면서, 그의 말은 더 웅장하게 울렸다.
“제국력 1236년, 선황이신 파스칼 3세의 적장손이자 엘레니아 베레니스 페르디안 황녀의 아들, 제국의 유일한 황자인 패리스 비아나스 페르디안의 즉위식을 거행하는바.”
신관의 말에 맞추어, 조금 뒤에 서 있던 패리스가 상기된 표정으로 걸어 나와 불꽃과 하객들을 등지고 신관 앞에 섰다.
“새로운 시대에 아폴론신의 축복이 있을지니.”
그는 벨벳 관을 높이 들어 올리며 고대어로 짧은 기도문을 읊었다.
하객들을 내려다보기 위해 반쯤 몸을 돌린 패리스의 눈은 흥분으로 형형하게 빛났다. 불꽃이 반사되어서인지, 그 금적안의 아름다운 빛깔은 제단 아래의 사람들에게도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제단 위의 불꽃은 더욱 거대하고 밝게 타올랐다. 위험하게 흔들리며 춤을 추는 그 모습은 패리스의 야욕과 닮아 있었다.
“태양의 아들은 아폴론 신과 모든 증인들 앞에서 그 자격을 증명하시오.”
신관의 힘 있는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패리스가 벨벳 관에서 눈을 떼고 빙긋 웃었다.
그는 이 절차를 잘 알고 있었다. 기다리던 순서였다. 일종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과거 아폴론의 피를 강하게 이어받았다는 황제들은 즉위 전 기사단 앞에서 그 능력을 보여 주는 절차를 거쳤다.
“아폴론의 후예라면 신성한 불꽃에 다칠 수 없을 터. 새로운 시대가 그대의 것임을 증명하시오.”
신관이 말했다. 패리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신관은 패리스더러 불 속에 몸의 일부를 집어넣어 보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불꽃에 타지 않아야 진정한 황제라는 것이었다.
물론 패리스는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신성한 불꽃, 그런 것은 없었다. 제단 위에 불타는 것은 그저 평범한 불이었다. 역대 즉위식에 쓰였던 불은 다 그랬다.
물론 지난 수백 년간, 불에 전혀 상처 입지 않는 황제는 없었다. 그런데도 신성한 불이니 뭐니 하는 전통이 남아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황실은 신성불가침이라는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신처럼 군림하기 위해서는 신과 같은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식하게나마 편법을 썼다. 잘 타지 않는 재질로 팔을 감싸는 것이었다. 이는 뜨거움이나 화상을 방지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화상을 가려 줄 수는 있었다.
역대 황제들은 대부분 괴물 같은 회복력을 가졌기에, 순간적인 고통만 참으면 흔적 없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전통의 실체였다. 신음 소리 하나 없이 그 고통을 참아 내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시험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패리스에게 그런 고통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훨씬 우아하게 자신의 혈통을 증명할 수 있었다.
아모레타의 도움으로.
패리스는 흰 제복을 덮은 황금 자수를 바라보았다. 팔은 물론 장갑에도 새겨진 금실에는 아모레타의 주술이 걸려 있었다. 입은 자를 잠시 동안 화기로부터 보호하는, 아모레타를 제외한 누구도 구현할 수 없는 고급 주술이.
“아폴론의 아들로서, 자격을 증명하겠다.”
패리스가 당당하게 말하며 걸어 나왔다. 신관을 지나친 그는 제단 바로 앞까지 다가와 멈추어 섰다.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경험이 있었다. 출병 전,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비슷한 일을 하고는 했으니까.
신성한 불꽃이 그를 집어삼킬 것처럼 일렁였다. 황홀하고 위험한 그 불이 그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태양이 지평선 근처에 걸려 있었다. 완전히 떨어지기 전, 황제의 관은 누구보다 그에 어울리는 자신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 눈을 똑똑히 뜨고 보라. 그대들의 주인은 여기에 있다.”
제단 위, 중앙의 불꽃이 닿을 듯 말 듯한 곳에 올라선 그는 오른팔을 높이 들어 보였다.
“이 순간 이후 누구도 나를 거역할 수 없을 것이다.”
말을 마친 패리스는 들어 올렸던 팔을 거침없이 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수천 개의 눈동자가 패리스의 팔을 향했다. 그는 여유를 보이기 위해 입꼬리를 더욱 끌어 올리려 했다.
살갗이 벗겨지는 듯한 고통은 그 순간 찾아왔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웃고 있던 패리스의 얼굴이 아픔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뛰어오르며 팔을 불 속에서 빼냈다.
“아아아아아악!”
불꽃은 그의 팔에 옮겨 붙어 춤추고 있었다. 패리스는 비명을 지르며 팔을 흔들었지만 불은 오히려 어깨까지 번지며 타올랐다.
“뜨, 뜨거워! 뜨거워!”
패리스는 황급히 제단에서 뛰어내렸다. 거침없이 타오르는 불을 이기지 못한 그는 휘청이며 물러나더니 신관의 발치에 쓰러져 양옆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황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잊고 황좌를 박차고 일어섰다.
“패리스!”
그는 다급하게 아들의 이름을 외치며 그의 팔에 자신의 망토를 덮었다.
“허억…….”
가까스로 불이 꺼지자 패리스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덜덜 떨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며 일어섰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계단 밑의 하객들을 향해 돌아섰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를 향한 하객들의 눈동자는 경악에 차 있었다. 다만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은 검게 그을린 그의 오른팔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
“아니!”
“지금…… 황태자 전하가…….”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두가 한순간에 웅성거리는 통에 그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패리스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급히 황제와 신관을 향해 다시 돌아섰다. 팔의 고통은 그대로였지만 왠지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네, 네 얼굴이…….”
황제의 얼굴이 하객들과 같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신관과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왜…… 왜 그러십니까.”
그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의 눈과 머리색이…….”
소녀로 보이는 사제 한 명이 더듬거리며 그의 머리를 가리켰다. 패리스는 멀쩡한 왼손으로 머리를 더듬다가, 한쪽 무릎을 접고 대리석 바닥 가까이로 몸을 숙여 보았다.
“마, 말도 안 돼…….”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아니, 목소리뿐 아니라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 비친 것은 그가 아는 자신이 아니었다. 오래전 잊어버린 얼굴이었다.
연갈색의 눈동자, 그와 비슷한 갈색 머리카락.
열한 살부터 염색을 하고 아모레타를 만난 후부터 눈동자 색을 바꾸었던 그에게는 생소한 생김새였다. 아폴론의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지며 그 내면의 충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 안 돼.”
몇 번을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황좌나 벨벳 관과 맞춘 듯 어울리는, 태양을 닮은 황태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모레타가 선물한, 영원히 남아야 하는 아름다운 금적안은 사라지고 없었다.
“말, 말도 안 됩니다! 누군가가 술수를 부린 것이 분명…….”
“태양신의 아들이 얕은 술수에 당한다면, 그는 사실 신의 후예가 아닌 것이겠지요.”
하객들 틈에서, 패리스가 증오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너는…….”
검은 머리에 금적안을 가진 장신의 청년이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 나왔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패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모두가 보았습니다. 당신에게는 제국을 지배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비소조차 띠지 않고 건조하게 말했다.
패리스의 떨리는 시선이 카엘리온 곁에 있는 하객들을 향했다. 그들은 마치 카엘리온에게 동조하듯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패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아닌 누가 제국을 지배한단 말이냐!”
그가 몸을 다시 일으키며 소리쳤다.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네놈의 짓이로구나!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수작을 부린 거야! 이 반역자가 감히 나의 황좌를 눈에 담아?”
그가 카엘리온을 손으로 가리키며 고래고래 외쳤다. 그러나 카엘리온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나보다 네가 더 자격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게냐? 불 속을 걷는 자라고? 나는 믿지 않아!”
그의 눈에 광기가 가득 찼다.
“저 불에 팔을 넣고 무사할 사람은 애초에 없어! 너조차도…….”
“물론 저는 불에 탑니다. 뜨거운 것이 무섭고요.”
카엘리온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무언가 저주의 말을 퍼부으려던 패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 뒤에 선 황제 또한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신전에는 정적이 흘렀다. 황제, 패리스, 신관과 사제들은 물론 하객들의 시선도 모두 카엘리온을 향했다.
“신성한 불꽃이 품고 지키는 분, 그 속을 편안하게 걸으시는 분, 선황의 후계자이자 황실의 유일한 직계, 그분은 저의 주인이고 제국의 주인입니다.”
무심하던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카엘리온의 시선이 제단 위의 불꽃을 향했다. 그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눈 또한 그를 따라서 이동했다.
거대한 붉은빛은 노을과 하나가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저기 계십니다.”
카엘리온이 말을 마쳤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 태양을 닮은 거대한 빛이 다시 한 번 훅 하고 흔들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빛의 중심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뭐……?”
“불 속에 뭔가가 있었어.”
“저게 대체 뭐지?”
“……사람인가?”
모두가 웅성대는 가운데, 보일 듯 말 듯하던 그림자는 조금씩 커지면서 사람의 형태를 나타냈다.
“세, 세상에!”
그림자는, 아니 그림자의 주인은 한 걸음 한 걸음 불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천천히, 불꽃 사이로 한 여인의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패리스의 눈이 커졌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밝은 빛 때문에 눈이 부셨지만 여인의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화, 황녀 전하시다!”
“신성한 불 속에서 황녀 전하가 나타나셨다!”
“불 속을 걸었어! 평온한 저 미소를 봐!”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 자수며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장미 같은 붉은 드레스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시원하게 드러낸 팔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는 것 외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으로, 그녀는 제단 위에 서서 천여 명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태…… 태양신 그 자체 같아…….”
앞줄에 선 귀족 중 한 명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는 아폴로니아를 감싼 불빛이 너무 환해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그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제단 아래로 떨어져서 괴로운 듯 오른팔을 움켜잡은 채 굳어 버린 패리스가 서 있었다. 마치 한 편의 악극처럼, 두 사람은 완벽하게 대조되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 뒤에서, 황제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듯 커진 눈으로 아폴로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 속에서 걸어 나온 딸, 귀족의 말처럼 그녀의 모습은 흡사 태양 속에서 나타난 신과 같았다.
황제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친애하는 나의 친우들, 나의 신하들, 그리고 존경하는 손님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고 또렷한, 한 자 한 자 듣는 이의 귓가에 박히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자리의 증인들 앞에서, 나는 오래전 보았던 한 사건에 대해 밝히려 하오.”
좌중을 사로잡는 그녀의 깨끗한 목소리가 넓게 울려 퍼졌다. 홀리기라도 한 듯, 하객들의 눈은 그녀와 그녀를 감싼 불꽃에 고정되었다.
“13년 전, 나는 선황과 어머니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소.”
몇몇 사람들이 술렁였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병사한 것으로 알려진 두 사람은 같은 차를 마시고 독살당했으며, 범인은 어머니가 죽기 전 자신의 목적에 대해서도 실토했소.”
더욱 큰 술렁임이 일었다. 제단의 뒤편에서, 황제의 얼굴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반역자는 선황과 어머니가 죽고 내가 어린 틈을 타 자신이 황위를 잇겠다 했소. 그리고 언젠가 황실의 피를 잇지 않은 자신의 어린 아들을 황위에 올리겠다 맹세했지.”
황제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꽉 쥔 그의 주먹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를 사랑했기에 그 아들도 자식으로 받아들였던 어머니는, 배신을 깨달은 지 몇 초 만에 숨을 거두었소. 곧이어 선황도 그 뒤를 따랐지.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소.”
제단 위에 서서 군중들을 향해 말하던 아폴로니아는 별안간 몸을 돌렸다. 사람들의 시선은 홀리기라도 한 듯, 조금도 분산되지 않고 그녀의 몸짓을 따라갔다.
“제국의 반역자, 황실을 배신하고 선황을 죽인 그 자, 술수를 부려 아들의 외모를 바꾸어 황족을 사칭하게 한 자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황좌 앞에 선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저기 있는 가이우스 리페르요.”
그녀가 싸늘하게 내뱉은 마지막 말이 신전을 울렸다.
긴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했다. 대리석 계단 밑의 모든 이가 미동도 없이 아폴로니아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뜻을 소화하고 있었다. 황실을 배신하고 선황을 죽인 반역자 가이우스……. 그렇다면 황실의 피를 잇지 않은 아들은 곧 패리스를 뜻했다.
그들 모두가 보았다. 신성한 불꽃에 화상을 입고, 자신의 혈통을 증명하는 데 실패한 패리스를. 머리색이며 눈동자까지 갈색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괴로운 듯한 모습으로 검게 변한 오른팔을 부여잡고 헉헉거리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에게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모습이었다.
문득, 몇몇 귀족들의 머릿속에 패리스의 소년 시절 모습이 스쳤다. 어린 패리스는 지금과 같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밝은 금발이 된 아들을 두고, 가이우스는 뒤늦은 특성의 발현이라 포장하지 않았나.
그러나 조금 전 불붙은 팔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던 패리스의 모습을 지켜본 하객들과 사제들은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패리스는 황족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명백했다.
그의 외양이, 부족한 기개가,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 오른팔이 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아폴로니아의 설명은 앞뒤가 들어맞았다. 불꽃 속에 숨어 있었던 그녀의 눈부신 등장이 그 설명에 무게를 더했다. 황제와 패리스는 십수 년간 진실을 숨겨 왔던 것이다.
패리스가 신을 닮은, 그 피를 짙게 이어받은 황손이라고 거짓을 꾸며 내면서.
“그럼…… 그럼 지금껏 우리가 속았다는 말인가.”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주변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사이에 혼란스러운 시선이 오갔다.
“저 계집…….”
모든 것을 지켜보던 황제는 손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갑작스레 나타난 것도, 갑자기 돌아와 버린 패리스의 외모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아폴로니아가 서 있는 곳을 보았다.
커다란 불꽃을 살짝 비켜 간 그의 안광이 아폴로니아의 차분한 시선과 마주쳤다. 십수 년 만에,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적으로,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당장 저…….”
황제가 누군가에게 지시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황제보다 먼저 움직인 것은 그 옆에 있던 패리스였다.
“닥쳐! 모두 거짓말이다!”
그는 분노에 찬 얼굴로, 왼손으로 잡고 있던 자신의 오른팔을 놓고 사자처럼 제단으로 몸을 날렸다.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것이다!”
거친 외침을 토하며, 그가 날쌔게 불꽃을 피해 돌며 아폴로니아를 덮쳤다. 그러나 미처 그의 팔이 그녀의 몸에 닿기 전에, 패리스의 팔은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혀 튕겨져 나갔다.
“아윽!”
패리스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제단 아래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양쪽 팔을 모두 쓰지 못하게 된 그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막아 낸 물체를 올려다보았다.
“제단에서 떨어져. 넌 결계를 뚫을 수 없으니까.”
아폴로니아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패리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저, 저것이…….”
그 차가운 모습에, 패리스는 남아 있던 이성이 끊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숨을 씩씩거리더니 다시 한 번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쾅-
두 번째의 충격은 훨씬 컸다. 그의 손이 아폴로니아의 몸에 닿으려던 순간 그는 엄청난 속도로 튕겨져 나왔다. 패리스의 몸은 허공을 날더니 몇 번을 굴러 황제의 발치에서 멈추었다. 의식을 잃은 듯, 그는 더 움직이지 못했다.
황제는 거친 숨을 내쉬고는 다시 제단을 올려다보았다.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을 뿜으며 그의 온몸을 훑었다. 황제는 마치 고정되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말도 안 돼…….’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분명 너무나도 잘 아는 딸의 얼굴이었다. 그가 조롱하고, 이용하고, 또 증오했던 엘레니아 황녀와 꼭 닮은 얼굴. 그러나 불꽃의 색깔을 띠고 얼음처럼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그 날카로운 눈빛만큼은 그 어미에게서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전장의 중앙에 서서 대군을 지휘하는 선황을 보는 기분이었다. 다만 아폴로니아의 기운은 더 고요하고 날카롭게 황제를 꿰뚫고 있었다.
황제의 넓은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 전 아폴로니아가 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엘레니아의 독살을 목격했다는 그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아폴로니아의 나직한 목소리며 말투는 듣는 이를 마비시켰다.
약혼자에게 버림받았다며 엉엉 울던 계집.
자신을 향한 암살 시도조차 알아보지 못했던 미련한 황녀.
화재로 죽을 뻔했다며 팔에 화상을 입고 떨던 그녀였다. 그러나 조금 전 바로 그 아폴로니아가 수천 명의 사람들 앞에 서서 어머니와 조부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그녀는 살인자로, 반역자로 친부를 지목하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황제의 눈이 그녀의 팔을 향했다. 검붉은 흉터, 아폴론의 후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그 부끄러운 표식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패리스의 오른팔로 옮겨져 있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한동안 말없이 그를 쏘아보던 아폴로니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황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제 아셨나요, 아버지?’
그녀의 미소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황제는 비로소 깨달았다. 패리스의 오른팔을 그 꼴로 만든 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의 외모를 되돌려 놓은 것도 아폴로니아였다. 어떻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가이우스가 가장 고대했던 순간을, 수십 년 공을 들여 쌓은 탑을 부수어 버린 것이다.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아폴로니아의 미소는 짙어졌다.
한동안 그를 조롱하듯 바라보던 아폴로니아는 몸을 다시 휙 돌렸다. 그녀는 웅성이기 시작한 하객들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아폴론의 피를 잇지 않은 자에게 더 이상 황좌를 맡겨 둘 수는 없는바.”
아폴로니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신전 전체에 긴장감이 흘렀으나 그녀는 조금도 떨지 않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그려 왔던가. 천여 쌍의 눈동자가 그녀의 몸에 꽂혔다. 아폴로니아는 여유를 잃지 않고 그들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나, 아폴로니아 알리스테어 페르디안은 황실의 유일한 직계로서.”
그녀가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말했다. 그곳에 모인 이들 단 한 명도 그녀의 말을 놓쳐서는 안 되었다.
“선황의 유지를 이어.”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황금색의 속눈썹이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윽고 다시 눈을 뜬 아폴로니아는 참았던 말을 힘주어 뱉었다.
“사마라 제국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오.”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갈랐고, 모여 있는 수천 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폴로니아는 스스로 황위 등극을 선언했다. 전통도, 신관도, 자신의 아버지도, 그 어떤 절차도 무시한 채로. 그녀는 당연히 자신의 자리라는 듯, 신전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수많은 군주며 귀족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객들이 혼란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아폴로니아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몇몇은 겁먹은 표정으로 가이우스를 보기도 했다.
아폴로니아가 다시 가이우스를 향해 슬쩍 고개 돌렸다. 그녀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제국의 운명이 걸린 그 순간에, 아폴로니아는 여유로웠다.
가이우스는 순간적으로 사고가 멈추는 것 같았다. 그가 알던 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이 생소한 여인은, 마치 그에 대해 모든 것을 간파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압도였다.
그는 압도된 것이다. 평생을 무시했던 딸에게.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황제의 마음속에 분노가 차올랐다.
“당장…….”
그가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에, 여전히 지정된 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수백 명의 기사들이 들어왔다. 황제는 비틀어진 미소를 지었다. 멈추었던 숨이 다시 쉬어졌다.
그래, 기세가 강하면 어쩔 것인가, 불에 안 타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십수 년간 제국을 통치하고 기사들을 거느렸던 것은 자신이었다. 신전을 채운 기사들은 자신의 사람들이었다. 그 말은 신전 안의 무력을 장악한 것이 자신이라는 뜻이었다.
패리스가 추태를 보였으면 어떤가, 아폴로니아가 여신처럼 나타났으면 또 어떤가.
그까짓 명분 따위, 무력으로 누르면 그만이었다.
자신의 명령 한마디면 아폴로니아는 끝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죽은 황제는 의미 없었다.
“황실 기사단은 당장 저 여자를 잡아라!”
가이우스의 명령이 쩌렁쩌렁하게 신전을 울렸다.
황실 기사단 전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황녀는 역모를 꾸미고 황태자를 해한 반역자이다!”
그가 아폴로니아를 가리키며 외쳤다.
“반역자를 잡아 나의 앞에 무릎 꿇려라!”
가이우스의 명령에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일부는 머뭇거렸지만, 다수가 거침없이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들은 윗선의 명령을 따르도록 다듬어진 군인이었다. 그리고 지난 십수 년간, 그들이 지키고 따랐던 황제는 아폴로니아가 아닌 가이우스였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정식 절차도 없이 갑작스레 등장한 아폴로니아를 새로운 황제로 인정하는 것은 무리였다. 오랜 기간 훈련된 몸은 기계적으로 가이우스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뒷일은 생각나지 않았다. 평생 군대를 지배했던 가이우스의 목소리는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되어 그들의 귀에 꽂혔다.
기사들은 하나둘씩 제단을 향해 다가섰다.
“멈추어라!”
그러나 또 다른 명령이 그들을 저지했다. 기사들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단장으로서 명한다. 검을 거두어라.”
어느새 제단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버티고 선 회색 머리 기사, 녹스 바이안의 검이 기사들을 겨누고 있었다.
“단, 단장님…….”
“황실 기사단의 원칙은 단 하나다. 황실에 충성하는 것. 그것을 잊었는가?”
날카로운 잿빛 눈동자가 그들 한 명 한 명을 쏘아보았다. 기사들 중 누구도 감히 그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너희들의 단장인 내가, 바이안 백작가가 인정하는 황제는 오직 한 분, 고귀한 신의 피를 이어받은 분이시다.”
그가 몸을 반쯤 돌려 아폴로니아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순간적으로 마주쳤고, 아폴로니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주군이자 나의 주군인 분을 해하려 한다면, 먼저 단장인 나를 쓰러뜨려야 할 것이다.”
녹스가 으르렁거렸다.
앞서 있던 기사들은 움찔 하며 물러섰다. 전설적인 기사, 가장 존경받았던 황실 기사단장인 시드 바이안의 이름엔 그만한 파급력이 있었다.
유서 깊은 기사 가문인 바이안 백작가, 그 가주이자 자신들의 직속상관인 녹스가 아폴로니아를 주군이라 칭했다. 그리고 녹스는 시드가 죽기 전까지 아폴로니아를 가까이서 지켰던 호위 기사였음을 모두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단, 단장님의 말씀이 옳아. 우리는 황실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닥쳐! 황제의 관이 아직 신관의 손에 있는데 어떻게 새로운 황제를 인정한단 말인가!”
“그럼 유일한 황실 직계를 반역자로 체포하란 말이야?”
기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의견이랄 것 없이 기계적으로 명령을 따라 왔던 그들은, 검을 완전히 내리지 않은 채 혼란스러운 논쟁을 시작했다. 누구도 계단을 오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물러서는 이도 없었다.
“형편없는 모습이군.”
기사들 뒤쪽에서 누군가가 비웃음을 흘렸다. 몇몇 기사들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카엘리온을 비롯한 수십 명의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황실 기사단이라 칭해지는 자들이, 반역자의 명령을 듣고 주군을 해하려 해?”
그가 가이우스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물었다.
그의 뒤에 있던 귀족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으로 셀 수 없이 많은 가신이며 시종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기사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흔한 시종이나 시녀가 가질 수 없는 어떤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무언의 압박을 가하기라도 하는 듯.
“기사단장의 말을 들으라고 하고 싶군. 한때 전우였던 이들을 내 손으로 처형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가 기사들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말을 맺었다. 기사들은 그 기세에 눌려 주춤거리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문득,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폴로니아를 주시하던 유리엘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카엘리온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언제나처럼, 두 사람이 한뜻이라는 의미였다.
아폴로니아의 편에서.
불사의 몸이라 불렸던 에핀하르트 대공. 그리고 그 곁에서 막아서는 모든 것을 벴던 ‘사신’, 유리엘 비체.
전쟁터에서 두 사람은 기사들이 바랄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다. 그런 그들이 적이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대, 대공 전하께서도…….”
“그렇다면 더더욱 명분은 황녀 전하께 있는 것이 아닌가.”
기사들이 검을 조금 더 내리며 중얼거렸다.
“허, 헛소리다!”
몇몇 기사들이 검을 아예 검집에 꽂으려는 순간, 아몬 백작의 높은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꽂혔다. 동그래진 눈으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새파랗게 질린 표정에도 불구하고 목청껏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 황좌 앞에 선 것이 누구인지 보이지도 않아? 폐하를 역적으로 몰면 너희가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이 아몬 백작가과 브로넬 백작가가, 그리고 리페르 공작가의 보복이 두렵지도 않아?”
그가 펄펄 뛰며 삿대질을 해댔다.
“십수 년의 통치가 역모였다니, 그 말을 인정하는 순간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너희 모두가 역적이 되는 것이다!”
그가 기사 한 명 한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역적을 따랐던 너희들은 멀쩡할 것 같아? 궤변에 넘어가 주군을 팔아넘기고 황제 폐하를 갈아 치우는 순간, 결국은 너희의 목도 땅에 떨어질 거란 말이다!”
기사들의 사이에 싸한 정적이 흘렀다.
이성을 잃은 목소리였지만 아몬 백작의 말은 의미 있는 협박이었다. 지금껏 따라 왔던 황제를 반역자로 몰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한다면 그 후환은 절대로 작을 수가 없었다. 일이 끝나면 새로운 황제는 기사들의 과오도 심판하지 않겠는가.
명분보다 중요한 것은 목숨이 아닌가.
“황제를 갈아 치우려는 건 그쪽인 것 같군.”
그때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흡사 곰이 으르렁대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나요, 비에른의 국왕.”
두리번거리는 아몬 백작에게, 커다란 덩치를 가진 이카르트가 몇 걸음 걸어 나가며 말했다.
“비, 비에른의 국왕께서 왜…….”
“왜냐니, 우리도 새로운 황제 폐하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아닌가. 누군가가 황실의 맥을 끊어 버린다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이카르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웃는 중에도 그의 눈은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미리 말해 두지. 나의 왕국이 인정하는 황실은 가이우스 리페르가 아니오. 만약 저기 제단 위에 계신 황제 폐하를 마다하고 가이우스 리페르를 황제로 받아들인다면, 이 나라는 제국이라는 칭호를 포기해야 할 거요.”
아몬 백작이 헉 하는 숨소리를 냈다.
이카르트의 눈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폴로니아의 얼굴에서 잠시 멎었다가 다시 자신의 아내를 향했다.
“5년 전에는 폐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몰랐지. 약혼자로서 보여 주지 못했던 신의를, 친우로서는 보여 드릴 것이오.”
그가 씩 웃으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아폴로니아를 향해 자신의 검을 검집째로 들어 올려 보였다.
곁에 서 있던 비앙카도 자신의 허리로 손을 가져가 차고 있던 검집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주변에 서 있던 다른 왕국의 사절들이 하나둘씩 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위해 검을 뽑겠다는 표시였다.
“리튼의 국왕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다.”
“저희 바엘 왕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황녀 전하께서 무사히 즉위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살아서 돌아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가장 크고 화려한 행렬을 데려온 세 왕국의 지지가 아폴로니아를 향했다. 가까이에 서 있던 라잔의 왕세자 세드릭조차도 덩달아 검집을 쥐고 들어 올렸다.
아몬 백작은 물론, 다른 왕국의 사절들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옅은 미소를 띠었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 시녀들과 손을 잡고 약혼을 뿌리칠 때만 해도, 그들이 이토록 귀한 동맹이 되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제단 아래의 사람들이 술렁이고, 소리 지르고, 검을 뽑았다가 혼란스럽게 토론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러고는 한동안 닫았던 입술을 열었다.
“제국의 기사들이여.”
그녀가 말을 시작하자 시끄럽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기 있는 모두는, 주인이 아닌 자를 따르며 잘못된 명령에 복종했던 과거가 있다.”
그녀는 ‘모두’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폴로니아의 시선은 페트라의 명령에 따라 그녀를 감시했던 비앙카에서 출발해, 리페르 가문의 살수로서 그녀를 암살하려던 유리엘에서 멈추었다.
“불필요한 전쟁이 발발했고, 죄 없는 자들이 죽음에 이르렀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지.”
기사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이우스의 통치는 제국의 많은 부분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그저 기꺼웠던 자는 많지 않았다.
다만 누구도 감히 이를 지적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니, 지적했던 자들은 기사단에 남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의 행동에 따라, 그대들은 여전히 명예로운 황실의 기사단이 될 수 있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에 따라 몇몇 기사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니 선택하라. 새로운 시대에서 나와 함께 하는 자들은 과오를 모두 씻을 수 있다. 그대들은 백성의 수호자로, 황실의 영웅으로, 명예로운 나의 기사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금적안이 냉철하게 빛났다.
“모든 진실을 알고도 반역자가 되어 가이우스와 운명을 같이하겠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그녀가 말을 맺음과 동시에,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기사들을 훑고 지나갔다.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그들 사이로 흘렀다.
아폴로니아의 눈빛에서, 힘 있게 깔리는 목소리에서 그녀가 하는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운명을 선택할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잊고 있었던 이상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동시에 아폴로니아의 마지막 말이 그들에게 공포를 안겨 주었다.
아폴로니아의 말은 즉, 지금 가이우스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온전히 그들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가이우스를 따르는 기사들은 영원히 반역자로 남게 될 것이다. 제국의 수많은 귀족들이며 이웃한 왕국까지도 적으로 돌린 채.
스르륵-
몇몇 기사들이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넣었다.
“……새로운 시대에서, 제국의 기사로 남겠습니다.”
가장 앞줄에 서 있던 기사가 말했다. 그는 바멜산에서 프리오닉스를 탄 아폴로니아를 보았던 자였다. 그때부터 아폴로니아는 그의 마음속에서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녀가 가이우스의 반역 사실을 털어놓은 순간부터,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아폴로니아를 따르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는 뽑았던 검을 다시 집어넣고, 조금 전 이카르트가 한 것과 같이 허리에 찼던 검집을 풀어 높이 들어올렸다.
눈치를 보던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씩 아폴로니아를 겨누던 검날을 거두었다.
“제국의 기사로 남겠습니다.”
“새로운 폐하와 함께하겠습니다.”
몇 분 사이에, 황실 기사단은 거의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아폴로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륙 각지에서 모여든 군주들과 함께.
장관이었다.
그 사이에 서 있던 세드릭은 터져 나오는 감탄을 누를 수가 없었다.
“새로운 황제 폐하와 함께 하겠습니다.”
그는 다른 군주들의 사이에 서서, 그들과 입을 맞추어 말했다.
그를 모르는 이들은 어린 소년이 얼떨결에 가까이 선 사절들에게 휩쓸렸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카르트가 아몬 백작에게 반박하는 순간부터 그는 마음을 정했으니까.
이 사건의 결말은 정해졌다고, 이것은 아폴로니아가 이기는 싸움이라고.
파스칼 3세의 후계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십 몇 년 동안 몸을 숙여야 했던 그녀는, 오라비의 즉위식을 통째로 빼앗아 자신의 무대로 만들었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황좌를 지키는 친부가 의심조차 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는 대륙 각지에 동맹을 만들어 그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라잔의 보물과도 같았던 ‘마일론의 눈’까지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면서.
그는 고개를 들어 제단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 빛에 감싸인 채 모두를 내려다보는 여인은 눈이 부셨다.
제국에 오기를 얼마나 잘 했는지. 버릴 장면이 하나도 없는 화려한 쇼였다. 극적이고 아름다웠다. 역사에 길이 남을 즉위식, 그리고 절대로 잊히지 않을 황제의 탄생이었다.
아폴로니아 1세, 저 여인은 그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녀가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었다.
* * *
기사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가이우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주먹은 어찌나 꽉 쥐었는지 감각조차 없었다.
그는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패리스가 만신창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반면 저 앞의 아폴로니아는 조금의 상처도 없이 대세를 자신의 편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의 황금안이 그녀를 뚫을 듯이 바라보았다.
갑옷도, 무기도 없는 그녀는, 얼굴과 팔을 드러낸 채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 호위도 없이. 책략치고는 위험하지 않은가.
충격으로 느려졌던 가이우스의 사고가 다시 빠르게 흘렀다.
‘결계를 부수면.’
그가 생각했다. 가이우스는 결계의 힘을, 그리고 그것을 가르는 방법을 알았다. 그는 아무도 몰래 한쪽 손을 살며시 들어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냈다.
‘나와라.’
신전 내부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가이우스의 곁을 떠나지 않는 그림자 호위였다. 암살과 습격에 특화된 음지의 검이기도 했다. 이름 없는 그자들의 실력은 흔한 전쟁터의 영웅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가이우스가 직접 엄선하여 가르친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검술도, 병법도, 심지어 결계와 같은 물체를 베는 방법까지도 저 그림자들은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런 순간을 대비한 것이다.
‘쳐라.’
아래에서 누군가가 아폴로니아의 이름을 외치고 그녀의 시선이 그쪽을 향한 순간, 가이우스는 다시 한 번 신호를 보냈다.
스스슥-
그림자들은 미끄러지듯 기둥 뒤에서 빠져나와 아폴로니아를 향했다. 그들은 소리 없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타닥, 타닥-
불꽃의 소리에 기척을 숨긴 채 눈 깜짝할 사이에 제단 위까지 올라선 그들은 미리 빼 두었던 검을 치켜들고 아폴로니아를 겨냥했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향해 동시에 검을 내리그었다.
챙-
결계가 깨져 나감과 동시에, 허공에 은빛 선이 어지러이 그어졌다.
“으아아악!”
갑작스런 비명 소리가 들렸고, 신관과 사제들이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누군가가 제단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던 터였다. 그들이 눈을 드는 것과 동시에, 공중에 누군가의 피가 흩뿌려졌다. 몇몇 사제들의 흰 옷이 붉게 물들었다.
가이우스의 두 눈이 커졌다.
‘이럴 수가.’
그 피는 아폴로니아의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 다섯 명의 검은 사람들, 아니 다섯 구의 시체들은 다름 아닌 그의 호위였다.
“예상한 것과 같군요.”
깔끔하게 베여 제단 밑으로 떨어진 시체들 위에서, 청량하고 평온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미간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긁힌 자국 하나 없는 아폴로니아의 곁에 선 것은 유리엘이었다.
“너…… 언제.”
조금 전까지 빈손이었던 그는 한 손에 검을, 그리고 나머지 한 손에는 커다란 은빛 방패를 들고 있었다.
가이우스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제단 가까이에서 대기하던 젊은 기사 한 명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 있어야 할 검과 방패가 보이지 않았다.
유리엘 비체. 이 귀신같은 놈은 가이우스의 손짓을 보았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기사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아 들고, 순식간에 수십 개의 계단을 뛰어오른 것이었다. 어떤 기척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는 검을 휘둘러 날에 묻은 피를 휙 털어 버리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폴로니아를 향해 돌아섰다.
“붉은 옷을 입은 것은 이 때문입니까?”
“그래. 그리고 네가 준 거니까.”
아폴로니아가 은발의 기사에게 웃어 주었다. 드레스의 색깔이 원래 핏빛이어서인지 아니면 유리엘이 신경 쓴 탓인지, 그녀의 몸에는 핏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높은 곳에 서면 표적이 되기 쉽다는 말씀을 드렸을 텐데요.”
“하지만 네 눈에도 더 잘 보이지. 그러면 구하러 올 수 있잖아.”
두 사람은 조금 전의 아슬아슬한 상황을 잊은 듯 다정한 말을 주고받았다. 가이우스의 얼굴이 잿빛으로 굳어졌고, 눈동자는 어지럽게 흔들렸다.
“쳐라!”
그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기둥 뒤에서 몇 명의 그림자가 더 튀어나왔다. 그들은 각자 검과 활을 들어 아폴로니아를 겨누었다.
쉬이이익-
눈 깜짝할 사이에, 화살 대여섯 개가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을 향해 날아왔다. 숱한 귀족 영애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천사 같은 얼굴이 아폴로니아를 향해 씩 웃었다. 그는 재빨리 방패를 들어 아폴로니아의 앞을 막았다.
퍼퍽! 퍽!
화살은 빨려들어 가듯 유리엘의 방패에만 꽂혔다. 그러나 그 틈을 타 남아 있던 그림자들이 유리엘을 덮쳐 왔다.
“여기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가 여유롭게 말하며 아폴로니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조금 전 내렸던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쉬이이익-
은빛 검이 깨끗하고 우아한 궤도를 그렸다. 그는 어떤 불필요한 동작도 없이 그림자들의 목과 심장만을 노렸다. 아름다운 움직임을 그리는 그 손에는 자비가 없었다. 유리엘의 검 끝이 향하는 곳마다 붉은 선혈이 흩뿌려졌다.
“으으으윽!”
“크흑!”
몇 초가 지나기도 전에, 가이우스의 그림자 호위들은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붙어 있는 자는 없었다.
휙-
유리엘이 다시 한 번 검을 움직여 핏자국을 털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가이우스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대세를 읽은 가이우스는 신전 내부의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간 것이다.
“지금은 아니야.”
아폴로니아가 나직하게 명령했다.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는 가이우스를 쫓을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폴로니아를 지키는 것이었으니까.
계단 밑에서는 아몬 백작과 브로넬 백작이 당황하며 자신의 호위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검을 뽑아 아폴로니아를 가리키는 모습이, 여전히 그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고는 불꽃을 통과해 제단에서 내려왔다. 얼이 빠진 채 주저앉아 살수들의 핏자국을 사제복에서 닦아 내려던 신관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관은 어디 있는가?”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신관은 멍한 표정으로 지금껏 팔에 끼고 있던 벨벳 관을 내밀었다.
“그 관을 내가 써야겠네.”
아폴로니아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드디어 정신이 조금 돌아왔는지, 신관은 떨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우스가 사라지면서 이곳을 지배하는 것이 누구인지는 명백해졌다. 조금 전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이 여인은 신관의 손으로 공식적인 즉위를 마치려는 듯했다. 아마 밑에 있는 이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이리라.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신관이나 사제들은 그저 정해진 후계자를 축복할 뿐, 다른 판단은 하지 않았다. 신관은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벨벳 관을 높이 들었다. 자세히 보면 그 위에도 살수들의 피가 묻어 있었다.
“하, 한쪽 무릎을 꿇어…….”
“아니, 됐네.”
아폴로니아는 절차대로 황제의 관을 씌워 주려던 신관을 저지했다.
“예?”
“이리 건네줘.”
싱긋 웃으며 아폴로니아는 신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관을 그냥 손으로 건네 달라니, 제국의 천년 역사에 신관에게 그런 요청을 한 황제가 있었나?
“고맙군.”
신관이 홀린 듯 내민 황제의 관을 건네받은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은 쓰러져 있는 패리스를 지나, 조금 전 가이우스가 앉았던 황좌로 향했다.
관과 마찬가지로 피가 묻은 황금 손잡이를 쓸어 내린 아폴로니아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돌아서서 그 화려한 의자에 앉았다.
“……이로써 찾았군.”
그녀가 벨벳 관을 든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잃었던 내 자리.”
피 묻은 관이 그녀의 황금빛 머리칼 위에 얹혔다. 아폴로니아는 멀리 자신의 기사들과 동맹, 그리고 수하들을 내려다보았다. 신전 벽 너머에 있을 백성들까지도.
그 순간 제단의 불꽃이 더욱 밝은 빛을 뿜었다. 새로운 황제가 관을 쓰자마자, 지평선에 걸렸던 해가 완전히 떨어진 것이었다.
전통 그대로였다.
“황제 폐하 만세.”
가장 가까이에 서있던 유리엘이 검을 내려놓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는 그가 아폴로니아 본인만큼이나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황제 폐하 만세!”
신관과 사제들도 그 뒤를 따랐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제단 아래에서 그녀를 보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며 예를 취했다. 마치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아몬 백작과 브로넬 백작, 그리고 그들의 호위 인력만큼은 여전히 검을 손에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폴로니아의 붉은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지금 당장.”
그녀가 명령했다.
“반역자를 끌어내라.”
토끼 같은 눈을 크게 뜬 아몬 백작과 브로넬 백작의 주변으로, 카엘리온이 사전에 준비시켰던 시종과 시녀들이 다가섰다. 그들은 저마다 옷 속에 감추어 두었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몇몇은 오래 참았다는 듯 휙휙 소리를 내며 허공에 검을 휘둘러 보였다.
“허, 허억!”
두 백작은 물론, 백작가의 식솔들과 가신들도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상당수의 호위가 있었지만 카엘리온과 그 일행을 모두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뒷걸음질 친 곳에는 이카르트와 비앙카, 그리고 여러 왕국의 사절들이 서 있었다. 그들 또한 어느새 검을 빼 들고 있었다.
“감옥 생활 잘하시오. 아니, 사형이겠군.”
이카르트가 사람 좋게 웃으며 아몬 백작에게 말했다. 검을 든 그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히익!”
이카르트의 검이 그에게 미처 닿기도 전에, 아몬 백작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더니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 * *
저벅, 저벅, 저벅.
가이우스는 숨을 몰아쉬며 통로 끝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통로를 황급히 이동하다가 여기저기 찰과상을 입었으나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열 몇 번째로 코너를 돌자 계단이 나왔고, 이를 오르자 닫힌 벽이 나왔다. 그가 기억을 더듬어 막다른 벽의 어느 부분을 두드리자, 벽이 열리고 단단하게 만들어진 돌문이 나왔다.
즉위 전 엘레니아 황녀가 알려 줬던 황궁이며 신전 비밀 통로들을 파악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
역대 황제들은 어찌나 의심이 많고 치밀했는지, 복잡하게 설계된 통로는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각각의 장치와 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안에 갇혀 죽기 딱 좋았다.
신전에서 갈 수 있는 곳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신전에서도 황궁에서도 먼, 아무도 찾기 어려워서 숨기 좋은 숲 한가운데. 나머지 하나는 황궁.
가이우스는 황궁을 선택했다. 손님은 물론, 기사들까지 신전에 있으므로 궁은 거의 비어 있을 것이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직 즉위식에 대해 듣지 못했을 터였고.
신전에 있는 이들은 모두 그가 멀리 도망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통성도 없는 데다 무력을 장악하지 못한 반역자는 황궁을 최대한 벗어나려 할 테니까.
물론 가이우스도 도망칠 것이다. 다만 그 전에 황궁에서 챙길 물건이 있었다. 바로 황제궁 곳곳에 있는 재물이었다.
황제의 반지며 장신구 하나하나는 값을 매기기도 어려울 보물이었고, 황제궁 안에 보관되는 황제의 인장 또한 마정석을 깎아서 만든, 대체 불가능한 물건이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을 가져가면 제국에 원한이 있는 어느 국왕에게 팔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훗날 인장을 이용해 아폴로니아와 협상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가이우스는 신전과 가까운 황궁으로 돌아와 성문을 걸어 잠글 생각이었다. 아직 성 안의 사용인들은 신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니 일단은 그의 지시를 듣지 않겠는가.
그렇게 시간을 번 후 황제궁의 보물이란 보물은 다 챙겨서 다시 도망칠 계획이었다. 기왕이면 마차를 한 대 가지고. 계획대로 된다면 그는 여전히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 중 한 명으로 남을 것이다.
가이우스는 아몬 백작과 브로넬 백작이 최대한으로 저항해 시간을 벌어 주기를 바랐다. 그가 값나가는 물건을 다 챙겨서 멀리 갈 수 있도록.
그다음은? 리페르 영지로 갈 것이다. 보물을 다 가지고. 그곳까지만 가면 사병들이 그를 보호해 줄 것이다.
그를 도와줄 귀족이나 국왕들에게 재빨리 서신을 써 세력을 갖춘 뒤 영지의 독립을 꾀하거나, 아니면 다시 아폴로니아를 공격해 황위를 빼앗아 올 수도 있다.
되찾은 황궁을 재정비하기에도 바쁠 아폴로니아는 당장 병력을 동원해 그를 공격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절이 모이고 기사들이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한들, 그들이 조화롭게 하나의 군대를 이루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 않겠는가.
가이우스는 어두운 통로에 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
진작 이렇게 했었어야 했다. 정통성이 뭐라고, 천년의 제국이 뭐라고. 이렇게만 하면 그는 한 나라의 국왕이, 어쩌면 다시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가이우스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돌문 옆의 벽돌 한 장을 뺐다.
끼이익- 철컹.
돌문이 천천히 열리고, 안쪽에는 익숙한 방이 보였다. 위급한 상황에서 황제가 황궁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통로는 황제의 침실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
“휴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돌아서서 비밀 통로의 문을 닫았다.
끼이익- 철컹.
가이우스가 다시 방 쪽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조금 전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펄쩍 뛰며 물러섰다. 그 서슬에 방 안에 있던 이가 몸을 움츠렸다.
“……신전은 어쩌고 여기 계신가요?”
“세타.”
가이우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작고 무해한, 오직 그만을 바라보는 세타.
그녀는 양위를 마치고 자신에게 돌아올 가이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타는 즉위식이 막 끝났을 시간에 황궁에 있는 그를 보고 놀란 듯했다.
“폐하,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어요. 괜찮으신가요?”
그녀는 걱정스럽게 가이우스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신전에서 아폴로니아의 모습을 보고 흘렸던 식은땀이 아직 마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다, 세타. 당장 성문을 걸어 잠그라고 명령해야 해.”
가이우스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폴로니아가 언제 황궁 앞에 당도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설명해 줄 틈이 없다. 성문을 닫고 나면…….”
“폐하의 안위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요.”
세타가 그의 손을 끌어 침대에 앉혔다. 그녀의 눈이 여기저기 찢어진 가이우스의 소매를 향했다.
“일단…….”
“폐하의 명령은 제가 전하겠어요.”
그녀는 가이우스의 마음을 안다는 듯 말했다.
“당장 성문을 잠그라고 전할 테니 일단 상처를 치료하세요.”
그녀는 군데군데 긁힌 가이우스의 팔다리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순간적으로나마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세타는 그가 어쩌다가 다친 건지 묻지 않았다.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걱정 마세요.”
세타는 가이우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재빨리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언제나 가이우스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기민하게 파악했고, 지금처럼 행동이 중요할 때에는 입을 다물 줄도 알았다.
‘데리고 가야 한다.’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세타만큼은 황궁에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사틴을 닮은 그녀, 가이우스의 과거를 알고도 그를 사랑할 것이 분명한 그녀는 평생 그의 곁에 있어야 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의 떨림은 아직도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쉬지 않고 달려온 가이우스의 몸은 아직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다.
괜찮다. 괜찮았다. 성문이 일단 닫히면 문지기들은 쉽게 그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아폴로니아가 황궁에 도달하기까지, 더불어 신전에 있지 않았던 자들이 아폴로니아가 새로운 황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릴 터였다.
“후우…….”
그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아마 그가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페트라는 신전에서의 일을 알게 될 것이고, 최대한 빨리 지원을 보낼 것이다.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리페르 가문. 그곳의 실질적인 수장은 바로 그였다. 아폴로니아가 신전에서 몇 마디 말을 했다고 하여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자신을 쏘아보며 허탈하게 웃던 페트라가 떠올랐다. 마음속으로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선은 그녀를 다시 찾아가야 했다.
그는 페트라를 내쳤지만, 페트라는 그를 내칠 수 없었다. 그녀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든, 리페르 가문의 장자는 가이우스였으니까. 그뿐인가, 리페르 가문을 제국 유일한 공작가이자 최강의 세력으로 키운 것도 바로 가이우스였다.
‘아폴로니아 그 계집을…….’
그는 주먹에 다시 한 번 힘을 주며 증오스러운 딸을 떠올렸다.
씹어 삼켜도 시원치 않을 계집. 세타와 함께 황궁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그녀를 죽여 버릴 방법을 생각할 것이다. 아폴로니아의 제국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몇 분인지 몇십 분인지 모를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머릿속이 정리된 가이우스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시 눈을 떴다.
“허억.”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새파랗게 날이 선 장검이었다. 물이라도 가를 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검날은 바로 그의 턱 밑에 겨누어져 있었다.
“놓칠 거라 생각했나?”
검을 든 은발의 남자가 물었다. 섬세한 그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유리엘 비체.”
가이우스가 커진 눈으로 검의 주인을 불렀다. 성 바깥에서 자신을 찾고 있을 줄 알았던 그가 황제의 침실에 들어와 있다니. 자신이 보고 있는 모습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가이우스의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대체 어떻게…….”
가이우스가 중얼거렸다. 주변을 살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세타를 통해 닫았던 성문을 이 자가 어떻게 지나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근처에 있을 법한 세타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유리엘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냉정한 사실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당신은 그분에 대해 모르지만, 그분은 당신을 너무나도 잘 알아서. 자신의 손안에 있던 재물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할 테니, 분명히 이쪽으로 올 거라고 하셨지.”
유리엘이 대답했다.
“비밀 통로가 아무리 잘 만들어졌다 해도, 말을 달려오는 것이 빠른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분?”
“새로 등극하신 폐하를 말한다. 내가 그분이라고 부를 만한 다른 사람은 없으니까.”
‘폐하’라는 단어에 가이우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바로 이날 아침까지, 대륙에서 폐하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는 이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유리엘이 말하는 폐하가 누구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신전에서 스스로를 황제라 선포하던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울렸다.
“그 애가…… 그 애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폴로니아는 대체 언제부터 이 일을 준비했을까? 그가 보았던 그녀의 모든 모습이 거짓이었나? 아니, 그는 사실 아폴로니아의 모습이란 것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를 죽이라고 하던가? 자신의 친부를?”
가이우스가 간신히 물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자신의 목에 닿아 있는 서늘한 검날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유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절차에 따른 심판과 처벌이 있어야 하니 사로잡으라 하셨다. 그러나.”
그는 냉정하게 덧붙였다.
“저항이 거칠어 생포가 어렵다면, 죽여도 죄를 묻지 않겠다고도 하셨지.”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가이우스의 몸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서 셀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눈물을 흘렸던 그 딸이 그를 죽여도 된다고 했다고?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함 뒤에 칼을 품고 있었다고?
“궁금증이 해소되었다면 이제 가지.”
유리엘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냉정하게 내뱉었다.
“……알겠어. 일어날 테니 검을 조금만 떼 주게.”
“뭐?”
가이우스가 힘없이 대답하자 유리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검에 눌려 침대에 쓰러질 것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검을 든 손에 힘을 조금 빼주었다.
“빨리 일어…….”
유리엘의 몸이 조금 멀어진 순간이었다.
쉬익-
가이우스는 순식간에 침대 밑에 숨겨 두었던 자신의 검을 빼어 유리엘을 향해 휘둘렀다.
카앙!
방심한 틈을 탄 공격이라 생각했으나, 상대의 배를 노렸던 가이우스의 검은 곧 유리엘의 검에 막혀 엄청난 파열음을 냈다.
쉬익- 챙! 채챙!
그는 기세를 몰아 침대에서 몸을 날려 유리엘을 공격해 들어갔다. 중년이 되어도 단련을 쉬지 않은 몸은 빠르게 상대를 몰아붙였다.
“죽어라!”
유리엘을 침실 벽 바로 앞까지 몰아간 그는 마지막으로 검에 온 힘을 실어 상대의 목을 겨누고 찔렀다.
퍼억!
그러나 조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유리엘의 신형은 검을 찌르는 순간 사라졌다. 가이우스의 검은 침실 벽에 단단하게 박혀 들어갔다.
“폐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의 귓가에서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목 쪽으로 아까의 그 차갑고 날카로운 검날이 느껴졌다.
“한때 제국의 명장이었던 당신의 모든 것을 배우라고. 병법이든, 무예든, 비겁한 기습이든, 당신에 대한 예측은 웬만큼 하게 됐지.”
우두둑!
말을 마친 유리엘은 한 손으로 가이우스의 목에 검을 겨눈 채.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팔을 뒤로 잡아 꺾었다.
“끄으윽!”
가이우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일평생 검술 대결에서 이토록 빨리 패한 적은 없었다. 이자는 자신의 움직임을 예측했다고 하나, 이 남자의 무예는 그저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다.
“대체…… 아폴로니아가 어떻게 너 같은 놈을…….”
가이우스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울분과 수치심에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도 황위를 노리느냐? 평민이었던 주제에 황제의 부군이 되어 그 자리를 함께 누리는 것이 목적이야? 에핀하르트의 곁에 붙는 것보다 니아를 유혹하는 것이 쉽게 보였더냐?”
그가 으르렁대며 애써 고개를 돌려 유리엘을 보았다. 무감정해 보였던 그 눈에 약간의 분노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나는 당신이 아니야.”
조금 전보다 훨씬 싸늘해진 대답이 돌아왔다.
“죄 없는 사람의 애정을 이용해 상처를 주거나 배신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물론.”
유리엘이 가이우스의 눈을 마주 보며 덧붙였다.
“폐하 또한, 어린 엘레니아 황녀와는 다르다.”
“……헛소리, 누구나 필요에 따라 다른 이를 이용한다. 네가 그 애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애가 너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가이우스가 이를 갈며 되받아쳤다. 제압되어 꺾인 팔보다도, 자신을 향한 유리엘의 멸시가 더욱 화가 났다. 치미는 울분을 견디지 못한 그는 더욱 거칠게 소리쳤다. 증오스러울 정도로 냉정한 그를 어떻게든 자극하고 싶었다.
“그 애가 그렇게 총명하다면, 평민 출신인 너를 곁에 두고 다른 귀족과의 결혼을 계산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느냐? 그것이 이용이 아니라면…….”
그를 잡은 유리엘의 팔이 조여들어 오자, 가이우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찮게 보았던 딸과 평민 출신 기사가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그의 분노에 부채질을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말이 옳을지도 몰라요.”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여인이 침실로 발을 들였기 때문에.
“……세타?”
가이우스가 멍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검게 빛나는 눈동자도, 숱 많은 곱슬머리도 분명히 그녀였다.
“죄송해요, 폐하…… 아니.”
그녀가 다소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요.”
팔을 빼내려 저항하던 가이우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세타, 이게 무슨…….”
세타와 유리엘은 마치 동료나 친구라도 되는 듯, 아무렇지 않게 가까이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엘에게 붙잡힌 가이우스를 보는 세타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유리엘 또한 그녀를 붙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신이 말한 그대로예요. 누구나 필요에 따라 다른 이를 이용한다는 것이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표정이었지만 매력적인 입매는 이상하게 냉정해 보였다.
가이우스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꺾여 있는 팔의 고통조차 잊은 채 세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나 상대방을 압도하던 황금빛 동공은 아슬아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너에게만큼은…….”
그는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어.”
“엘레니아 황녀야말로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죠.”
세타가 말했다. 자신의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가이우스에게 별 감흥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이 그녀를 거짓으로 대했듯, 저 또한 당신을 거짓으로 대했을 뿐이에요. 당신 말대로 모두가 하는 일인데 억울할 건 없잖아요? 그리고.”
그녀가 살짝 미소 지었다.
“당신보다 먼저, 제게 모든 것을 줬던 다른 사람이 있어서 말이죠.”
그녀는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아폴로니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노렸던 맹수 같은 딸.
그는 그제야 유리엘이 어떻게 성문을 지나 침실로 들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세타가 가이우스를 속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거짓이었다.
가이우스는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사틴을 닮은 그 얼굴은, 그 순수했던 눈빛이며 부드러웠던 미소는 이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얼굴이 닮았다고 해서, 제가 당신의 죽은 연인인 건 아니잖아요.”
그녀는 가이우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덧붙였다.
“저는 가 봐야겠어요. 이미 새로운 폐하와 기사단이 황궁으로 들어서고 있으니까요.”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그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차갑게 들렸다. 가이우스는 이를 꽉 깨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미안하지만 그들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그녀는 안쓰럽다는 듯 가이우스를 한 번 보고는 아무 미련도 안 남은 것처럼 돌아섰다. 그리고 가이우스가 미처 대꾸를 하기도 전에 빠른 걸음으로 침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세타가, 나의 세타가…….”
가이우스가 여전히 충격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지. 이 방은 당신이 아닌 황제 폐하의 공간이다.”
유리엘이 말했다. 그는 가이우스의 팔을 더 단단하게 잡고 침실을 나서려 했다.
“……폐하라.”
가이우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몸을 비틀어 버티며, 그는 반쯤 쉰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나를 밀어내? 그 계집을 막는 사람이 없다고? 모두 그 계집과 결탁을 했단 말이냐?”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시는 것뿐이야. 물론 당신이 좋은 황제였다면 그걸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유리엘의 대답이 가이우스를 더 자극했다. 조금 전 세타의 배신을 알고 기운이 빠져나갔던 그의 몸은 뒤늦게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네놈 감히 명군과 암군을 판단해? 아무것도 아닌 놈이, 네가 감히 제왕의 자질을, 선악을 판단해 주군을 선택한다는 말이…… 으읍.”
가이우스는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유리엘이 재갈을 물리는 바람에 말을 끝내지 못했다.
“착각하고 있군. 난 그런 판단을 내린 적이 없어.”
유리엘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가 두 손에 힘을 주자 그 안에 붙잡힌 가이우스의 팔이 고통으로 뒤틀렸다.
“내가 그녀의 재능이며 온정을 존경하는 건 사실이야. 당신과 비교되지 않을 명군이 되리란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유리엘은 가이우스를 조금 더 압박했다. 가이우스가 힘을 주려 할수록 그의 얼굴과 목이 시뻘게졌다.
“설령 희대의 폭군이라 한들 그녀는 내 주군이었을 거다. 그녀가 악했다면 난 기꺼이 함께 지옥으로 갔을 거고. 내게는 아폴로니아가 선이다. 그 이외의 선택은 없어.”
“으으으읍!”
가이우스는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 최후의 발버둥을 쳤다. 이 침실을 벗어나는 순간,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진정으로 포기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쾅!
그 순간 유리엘이 팔에 가볍게 힘을 주자 가이우스의 얼굴이 침실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뼈가 부서질 것 같은 충격으로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끄으으으읍…….”
“참고로 난 당신을 봐줄 생각이 없어.”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가이우스의 귓가에 박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별 감정이 없어 보였던 유리엘의 눈동자에는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당신이 그녀에게 했던 짓들, 그녀에게서 빼앗아 갔던 것들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어. 다시 말해서.”
가이우스가 몸을 뒤틀었다. 이번에는 저항이 아니라 순수하게 고통 때문이었다.
“얌전히 끌려오지 않으면 팔 하나쯤 잘라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지.”
유리엘은 몇 초 동안 그를 벽에 대고 눌러 둔 후에야 힘을 조금 풀어주었다. 유리엘의 손에 이끌려 침실을 빠져나가며, 가이우스는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을 맛본 후에야 그는 비로소 절절히 깨달았다. 그에게는 진정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영원할 것 같았던 부귀도, 지존의 지위도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무력감이 그의 몸과 머리를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