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9. 그들 사이의 거리 (2)(5권) (26/34)

Chapter 9. 그들 사이의 거리 (2)

“아버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패리스가 붉어진 얼굴로 황제의 서재에 뛰어들었다. 세타를 품에 안은 채 병서를 보던 황제가 시선을 들었다.

“트리온 후작이 이번 달 세금을 올리라는 아버님의 명을 거절했습니다. 핑계랍시고 구구절절 서신을 쓰기는 했지만 이는 분명 황명에 대한 불복이 아닙니까!”

“소리를 낮추거라.”

황제가 말했지만 패리스는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

“그뿐이 아닙니다. 에드윈 후작도, 에스테반 자작도, 다른 수도의 중립 귀족들도 은근슬쩍 에핀하르트 그놈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 바멜산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핑계로 그놈에게 선물을 보냈다고 합니다. 지난 번 아버님의 탄신일에 들어온 것보다 값진 물건들을 말입니다!”

“세타, 일단 나가거라.”

황제가 세타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서재를 나섰다.

“소리를 낮추라고 했는데, 너는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훈계였지만 황제의 말은 부드러웠다. 그는 패리스의 모든 행동을 탐탁스럽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아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항상 어떤 애틋함이 있었다. 이를 잘 알기에, 패리스의 태도는 고쳐지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에는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들을 그대로 두면…….”

“그대로 두지 않으면 또 어쩔 것이냐.”

황제가 조금 더 엄한 말투로 아들의 말을 잘랐다.

“어쩌냐니요! 본때를 보여 주고 한 가문쯤 멸문을 시키면…….”

“그러면 다른 자들이 진심으로 너를 지지하겠느냐?”

“그건…….”

패리스가 움츠러들었다. 그는 사실 뒷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분노를 풀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 아버님이 황제로 계신데 무엇을 그리 많이 생각하십니까? 이럴 때일수록 아버님의 위엄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귀족들을 아예 카엘리온의 팔로 밀어주지 그러느냐.”

황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중립 귀족들은 나를 따르지 않는다. 이러저러한 이해관계가 있다 한들 결국 황족의 개들이지.”

“하지만 아버님을 두고 카엘리온 그놈을 지지하게 둔다는 말씀이십니까?”

황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버님?”

“아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아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이제 중년임에도 곧은 자세에 근육질의 몸을 가진 그는 꽤나 장신인 패리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는 황족이지 않느냐. 너를 따르게 하면 된다.”

패리스가 입을 벌린 채 뻣뻣하게 굳었다.

“아버님? 그 말씀은…….”

“그래.”

황제가 황금안을 빛내며 슬며시 웃었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그가 한 걸음 더 내딛자 긴장한 패리스가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패리스, 네가 황위에 올라야 한다.”

황제의 입꼬리가 들렸다. 오랫동안 품었던 꿈을 실현시키려는 그의 얼굴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아, 아버님, 진심이십니까?”

패리스는 입을 쩍 벌린 채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저 미소를 띠고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패리스를 보는 그의 얼굴은 언제나 부드러웠다. 자신을 닮았지만 더 귀하게 자라난 아들에 대한 애정과 자랑스러움, 그리고 오래전 잃어버린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따라오거라.”

황제는 대답 대신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서재를 나섰다. 벙찐 표정의 패리스가 그 뒤를 서둘러 따랐다.

“보이느냐?”

복도를 지나 황제가 도착한 곳은 중앙 홀이었다. 연회장으로 쓰지 않을 때에는 신하들의 알현을 받는 장소였으나 지금은 시종 한 명을 제외하면 비어 있었다.

넓은 공간 깊숙이에 높은 단상이 위치했고, 그 위에서 화려한 황좌가 빛을 뿜었다.

“황제의 관을 가져오라.”

황제가 시종에게 지시했다. 패리스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제국에서, 아니 대륙에서 가장 귀하고 막강한 것이 저 자리이다.”

“아버님…….”

“사랑하는 나의 아들, 저 자리는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지.”

황제가 꿈속에 잠긴 듯한 말투로 중얼거리자 패리스의 표정이 한순간 혼란스러워졌다. 황제의 말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패리스는 황실의 장자였다. 핏줄에 따라 이어받게 되어 있는 자리를 가지고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이라니?

게다가 패리스가 아주 어렸던 때에는 선황도 살아 있지 않았던가? 비록 아폴로니아를 편애하고 패리스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선황은 그의 외조부였다. 황위가 선물이라면 이를 주는 사람은 선황이었어야 했다. 만약 선황이 일찍 병으로 죽지만 않았더라면.

황제가 한 말은 마치 멀리 있던 무언가를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해 패리스에게 건넨다는 뜻처럼 들렸다. 패리스가 눈치를 살폈으나 황제는 여전히 오랜 기억 속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의 눈 속에는 패리스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감동 같은 것이 보였다.

“황제의 관을 가져왔습니다, 폐하.”

그러나 시종의 말에 패리스는 조금 전 느꼈던 의아함을 지워 버렸다. 표현의 문제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황제가 지금 양위를 입에 담았다는 사실이었다.

“앉아라, 패리스.”

황제가 명령했다. 패리스는 잠자코 그가 가리키는 대로 단상에 올라가 황좌에 앉았다.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붉은 벨벳 관이 패리스의 머리 위에 얹혔다. 패리스는 긴장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네 것이었던 것처럼.”

황제는 다시 한 번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으나, 이번에는 패리스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 또한 처음으로 써 보는 황제의 관에 벅찬 감정을 느꼈다.

“아버님, 진정 제가 준비되었다고 보십니까?”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나의 아들이고 제국의 황태자다. 오래전부터 준비가 되어 있었고말고.”

어느새 황제의 눈빛이 예리함을 되찾았다. 패리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제위에 오르면, 수도의 어떤 귀족도 네 뜻에 반대할 명분은 없을 것이다. 지금 그들이 감히 불만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임시로 황제가 되었다는 인식 때문이니까.”

“예, 아버님.”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네게 충성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몇몇 여우같은 귀족놈들은 너를 끌어내리고 카엘리온을 황위에 올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게야.”

“그것이 누구든, 절대로 제게 거스를 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패리스가 목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그는 흥분으로 조금씩 몸을 떨고 있었다.

“공포는 충분하지 않다. 너는 귀족들을 너의 편으로 만들어야 해. 에핀하르트 그놈을 따르는 자들을 포섭해야 함은 물론이고.”

황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나직하게 덧붙였다.

“강력한 네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자들은 누구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패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흥분과 긴장감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쓸데없이 커 버린 그놈 탓에 너의 지위가 흔들리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네 편을 만들고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황제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양위 전까지,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삼가도록 하라. 모두가 너를 신뢰하고 네 위엄을 알 수 있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다정하게 자신의 어깨를 짚는 황제를 보며, 패리스가 벅찬 미소를 지었다.

“제 사람이 될 수 있는 이는 누구 한 명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는 뿌듯한 듯 웃었다.

“곧 즉위식을 준비하라고 이르겠다.”

“리페르 공작가에 맡기는 것입니까?”

패리스가 묻자 황제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아니, 리페르 공작가에는 더 이상 중요한 일을 맡기기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패리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 황제와 리페르 공작가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그도 알았지만, 이런 문제에서 페트라 리페르를 대신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단호했다.

“페트라는 부패했다. 그 애의 능력도 전과 같지 않아. 자신을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그 애를 오만하고 무능하게 만들었다.”

“그럼 대체 누구에게…….”

패리스는 조금 전 황제의 품에 안겨있던 세타를 떠올렸다. 그와는 별다른 접점이 없는 황제의 여인이었다. 간혹 측근으로부터 그 시녀의 외모가 자신과 닮았다는 말을 들었지만 한 번 불쾌한 내색을 한 후로는 그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황실의 대소사는 흔히 황제와 가까운 여인이 관리했다. 황후, 또는 사랑받는 황비. 세타는 분명 황제가 가장 아끼는 여인이었다.

“설마 일개 시녀에게…….”

“아폴로니아가 할 것이다.”

“예?”

패리스가 경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버님, 그 애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물론 실질적인 일은 시종장인 모튼이 할 것이다. 그러나 황실 대소사 총책임자의 지위는 이제 외부인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야. 그런 결정 하나하나가 황제의 권위를 약하게 만든다.”

조금 전까지 부드러웠던 황제의 눈빛은 냉정하게 바뀌어 있었다. 패리스는 굳이 다투지 않았다.

“아버님 뜻대로 하십시오.”

패리스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친우이자 사촌인 가레스 리페르를 떠올렸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황제의 곁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페트라도.

황제의 눈 밖에 나 불안해하고 있을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곳에 힘을 뺄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공작가는 그의 수하이지, 애정이나 의리의 대상이 아니었다.

황제가 홀을 빠져나간 후, 패리스는 여전히 황좌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황좌에서 내려다보는 홀은 근사했다. 지금은 비어 있었지만, 사람들이 오가며 자신에게 머리를 숙인다고 상상하니 온몸이 짜릿했다.

귀족들도, 제후국의 왕들도, 얄미운 카엘리온이며 그가 데려간 빌어먹을 계집, 에반젤린도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이다. 그는 비로소 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내가 되는 것이다.

“강력한 네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자들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조금 전 황제가 해 준 조언을 떠올렸다. 강력한 자신의 편. 그것이 누구를 말하는가. 그가 지금 신경 써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패리스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귀족들의 명단을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리페르 공작가, 아몬 백작가, 브로넬 백작가…… 이들은 그와 밀접하게 엮여 있었고, 패리스가 아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미 자신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잡은 물고기에게, 가만히 있어도 놓칠 일이 없는 그들에게는 굳이 밥을 줄 이유가 없다.

황실기사단장인 녹스 바이안은 어떤가. 창술로 자신을 능가하는 그는 마음에는 안 들지만 카엘리온을 지지할 자는 아니었다. 둘 사이에는 접점이 없었고, 반면 페트라는 그와 그 어머니에게 엄청난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큰 세력이었다. 그러나 카엘리온을 압도하기에는 부족했다. 최근 그와 부쩍 가까워진 트리온 후작가와 에드윈 후작가는 둘 다 수도 가까이에 만만치 않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러 사람을 생각하던 그의 머릿속에 문득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드넓은 영지, 넘치는 자금, 그리고 용맹한 사병까지 거느린 고위 귀족. 패리스와 카엘리온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단번에 승부를 가를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자.

포트러스 후작.

그리고 그 이름과 함께 떠오른 것은 아모레타를 향한 욕망으로 불타던 그의 눈빛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아모레타입니다.”

갈증으로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화를 내며 거절했을 때 그가 뭐라고 했던가.

“저의 제안은 전하의 등극 전까지 유효할 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패리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포식자 같은 포트러스 후작의 눈빛에 거짓은 없었다. 동시에 그의 머리를 스치는 것은 아모레타의 모습이었다. 그린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선, 사랑으로 가득한 보석 같은 눈동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녀의 가치.

양위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패리스는 고민할 것이 많아졌다.

* * *

“쉬었다 보시지요.”

유리엘의 목소리는 청량하고도 달콤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금 쉬고 있잖아.”

아폴로니아가 읽고 있던 책을 들어 보여 주었다. 『제국의 법률』이라는 수천 페이지짜리 서적이었다.

“공부와 쉬는 것은 다릅니다. 일도 많으신데 공부까지 하시면 어떡합니까?”

유리엘이 물었다. 황실 대소사를 처리할 권한이 아폴로니아에게 주어진 후로 그녀는 전보다 더 바빠졌다.

물론 황제는 그녀에게 책임감 있는 황녀의 모습을 기대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아폴로니아가 하는 일은 시종장이 올린 보고서를 결재하는 것뿐이었지만, 그 내용을 꼼꼼히 검토함으로써 전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재미있어. 그리고 일이 아니니까 쉬는 거 맞아.”

“전하, 책상 앞에 바르게 앉아 사람을 찍어서 기절시킬 두께의 책을 읽는 건 공부입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우아하게 손을 뻗어 네모진 바윗덩어리를 닮은 법전을 집어 들었다.

“압수입니다. 10분 동안 다과라도 드시지 않는다면 안 돌려드릴 겁니다.”

아폴로니아는 픽 웃어 버렸다. 유리엘은 나이보다 특별히 어려 보이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가끔 어린아이 같을 때가 있었다.

“뭐 하십니까?”

“쓰다듬고 있는데.”

아폴로니아는 책상 앞으로 걸어 나와 유리엘의 은색 머리카락을 만졌다. 촉감도 향기도 좋았다.

“싫어?”

“아뇨.”

웃으며 묻는 아폴로니아에게, 유리엘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좋습니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손이 더 잘 닿도록 상체를 숙여 주었다. 그러고는 나른한 개처럼 눈을 살짝 감았다. 아니, 아이 같다는 말은 취소다. 유리엘은 놀아 달라고 찡찡대는 강아지 같았다.

한참 은실 같은 머리를 만지작거리자, 유리엘은 그녀의 손을 그대로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그 앞의 테이블에는 차와 함께 초콜릿이 몇 조각 놓여 있었다.

“여기서 10분만…….”

“어제 귀족들한테 전달하라고 한 건 다 했어?”

소파에 기댄 채 아폴로니아를 조르려던 유리엘은 피식 웃으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뜻대로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물론입니다.”

그는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황제를 멀리하고 카엘리온을 가까이 하는 태도를 보이되, 황태자에게는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예의만 지켜라. 지난번과 같은 이야기였지요. 말씀하신대로 선물도 전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폴로니아는 그제야 유리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잘 했네.”

“구체적으로 달성하려는 목적이 있으십니까?”

아폴로니아는 트리온 후작가에서의 회의가 끝난 후부터 귀족들을 상대로 비슷한 지시를 해 오고 있었다. 몸을 적당히 사리면서도, 황제와 패리스를 자극할 만큼 카엘리온에게 관심을 보이라고. 그리고 패리스를 대하는 태도와 황제를 대하는 태도에 차이를 두라고.

“아니.”

아폴로니아가 짧게 대답하자 유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명확한 건 없어. 그저 아버지의 권력을 어느 정도 패리스에게 이전시키면 상대하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했다.

“그리고 패리스는 흥분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낄 때 멍청한 짓을 하니까 자극을 좀 해 본 거고.”

노회한 황제에 비해 패리스는 허점이 많은 편이었다. 대외적으로 황실의 장자인 패리스가 장성한 이상 황제의 권력은 그에게로 옮겨질 것이고, 이 점을 이용해 패리스의 실수를 유도할 수 있다면 제일 좋다는 것이 아폴로니아의 판단이었다.

“그가 어떻게 나올 거라 예상하십니까?”

“글쎄. 성격을 생각하면 어느 귀족에게 횡포를 부리다가 제 평판을 깎아 먹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서툴게 포섭을 해 보려다가 자기 패를 보여 줄 수도 있고, 가능성은 많다고 생각해.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아폴로니아의 분석에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리스의 사람됨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비앙카, 안느, 일로나에게도 편지를 보내야 해. 이건 아드리안이 해 주겠지만.”

이제 이야기가 끝났나 싶어 초콜릿을 먹여 주려는 유리엘에게 아폴로니아가 조용히 말했다.

“약혼자를 빼앗아 간 시녀들과 전하만큼 친하게 지내는 이는 또 없을 겁니다.”

유리엘이 손을 멈추고 말했다.

“출산 축하 선물은 다 보냈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그런 게 아니야. 아까 모튼의 말을 들어 보니 아버지가 여러 왕국에 보낼 서신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군.”

“내용은요?”

“아직 몰라. 하지만 단순히 인사는 아니겠지. 귀족들이 흔들리니까 외부의 지지라도 굳건히 하겠다는 뜻일 수 있어.”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손을 잡아 자연스레 자신의 입술 가까이로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손가락 끝에 들린 초콜릿을 살짝 베어 물었다.

“아버지가 내게 일처리를 맡기셨으니 내용은 에반젤린의 도움 없이도 확인할 수 있어. 그러고 나면 비앙카와 다른 아이들에게 전할 말도 떠오르겠지.”

그녀는 전 시녀들과 자주 소식을 주고받았다. 주로 아드리안이 대신 해 온 일이었지만 왕비들과 아폴로니아의 유대는 단단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고 있는 그들은 모두 아폴로니아에게 큰 빚을 졌다고 여기고 있었으며, 무슨 일이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이를 잘 이용할 생각이었다. 때가 되면 세 왕국의 지지는 그녀에게 유의미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제 정말 일 이야기는 그만하셔야 합니다.”

유리엘이 반쯤 남은 초콜릿을 아폴로니아의 입술 사이로 넣어 주고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지금 이렇게 바쁘면, 즉위하신 후에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의 말에 아폴로니아가 잠시 씹는 것을 멈추었다.

“아직은 즉위 후를 이야기할 때가 아닌걸.”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가이우스가 건재한 이상, 황위를 되찾은 후의 일상을 얘기하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언제 어떻게 즉위를 하냐를 생각할 때지.”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중립 귀족들의 세력을 확보한 후로 그녀는 수없이 많은 계산을 하고 있었다. 언제, 어떤 기회를 잡아야 할지에 대해서.

“하지만 전하께서는 항상 즉위 후를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외교의 문제도, 군대의 개편도, 제도의 변화도.”

유리엘은 소파 한구석에 던져진 법전을 가리켰다. 그는 아폴로니아가 왜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 황제를 상대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때면 제국의 미래를 계획하는 그녀였다.

“그렇다면 전하의 여유 시간 부족에 대해서도 대책을 세우셔야 하지 않습니까.”

“원래 황제들은 바빠. 할아버지는 그 와중에 육아까지 하셨고.”

아폴로니아가 마지못해 말했다. 유리엘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하며 제 어깨에 기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전하께서도 그렇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이들 교육이야 당연히 신경 써야지. 먹이고 재우는 건 유모들이 하겠지만.”

“저는 뭘 하면 됩니까?”

“너는 아버지로서…… 앗.”

아폴로니아는 말을 하다 말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전하? 방금 뭐라고…….”

유리엘도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아름다운 벽안이 평소보다 커진 상태로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야.”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돌리고 얼음이 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잊어버려.”

그녀는 억지로 내뱉었다. 방금 유리엘을 아이의 아버지로 칭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었다. 이게 다 유리엘이 쓸데없는 질문을 해 댄 탓이었다.

‘하아…….’

아폴로니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몰랐던 본심이 튀어나온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전하.”

“정말이야, 잊어버려야 해.”

그녀는 유리엘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말했다. 무심코 말을 뱉었지만,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이 자신과의 결혼에 대한 기대를 갖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연인이었고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럼에도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그에게 황제의 옆자리를 내줄 자신이 없었다. 황제의 결혼은 과거에도 항상 정치적인 것이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테니까. 혼사라는 중요한 문제를 감정에 휩쓸려 결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사내와 결혼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녀와 파혼했던 6명의 약혼자들이 우르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아니, 카엘리온까지 하면 총 7명이었다. 아폴로니아는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잠깐의 상상이었지만 거부감이 들었다.

억지로 하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유리엘 외의 누군가와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것은 달갑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했을 때 유리엘이 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싫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시군요.”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를 상상에서 구출했다.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아니, 괜찮…….”

그녀는 고개를 들다 말고 눈을 감았다. 유리엘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폴로니아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그녀와 입술을 겹쳤다.

“음…….”

입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시원하고 향긋한 맛을 품은 얼음 조각이 유리엘의 입술을 통해 밀어 넣어졌다. 유리엘이 입을 떼고는 싱긋 웃었다. 그는 찻물에 띄웠던 얼음을 머금었다가 그녀의 입에 넣어 준 모양이었다. 그 차가움에 잠시 혼란스러웠던 아폴로니아의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유리엘이 아폴로니아의 뺨을 감싸고 물었다. 접힌 눈매는 황홀할 정도로 예뻤다.

“유리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유리엘이 말했다. 최상급 사파이어처럼 찬란한 새파란 눈동자에는 애정과 함께 약간의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그것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저는 황제의 옆자리를 꿈꾸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든 곁에 있을 거니까요.”

“하지만…….”

“물론 전하 곁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미칠 것 같지만.”

유리엘이 아폴로니아의 붉어진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입맞춤이었다.

“제 지위는 연인이면 충분합니다. 아니, 정 미안하시다면…….”

그는 다시 얼굴을 떼고 씩 웃었다.

“100번째 후궁 정도로 넣어 주셔도 좋습니다.”

“100번째?”

아폴로니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자의 눈에 그녀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색광인 것인가.

“99명은 어디서 찾아야 해?”

“글쎄요. 제국은 넓으니 천천히 미남들을 수집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유리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결국 유리엘을 따라 웃어 버렸다. 조금 전의 무거운 마음은 어딘가로 날아가고 없었다.

“전하께서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최소한 저와 계실 때는요.”

유리엘이 다정하게 덧붙였다. 어조는 가볍지만 그 목소리에는 든 약간의 걱정까지 눈치채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폴로니아는 환한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웠다. 눈빛도, 목소리도, 손길도, 그 안에 담긴 그녀를 향한 애정도.

“전하, 급한 소식이…… 어머.”

아폴로니아가 흐뭇하게 유리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드리안이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소파 어딘가에서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은 순간적으로 서로로부터 몸을 조금 뗐다.

“하아…… 전하.”

아드리안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폴로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바로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왜?”

“쉴 때는 그냥 쉬시라니까요. 몸 상하면 어쩌시려고요.”

“난 잘 쉬었는데…….”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을 슬쩍 보며 말했다. 아드리안은 어쩌면 유리엘과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폴로니아를 피곤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유리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다만 아폴로니아의 허리에 감긴 오른손은 풀지 않았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두 사람을 보고 있지 않았다.

“글씨는 깨알 같고 두께는 크로아딘 뒷다리만 한, 저 흉물스러운 책을 읽는 건 절대로 쉬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조금 전 유리엘이 던져 놓았던 법전을 보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책에 가까이 다가가며 투덜거렸다.

“어디로 숨겨 놓고 싶지만 무거워서 전 들지도 못하겠군요. 차라리 전처럼 정원에서 데이트를 하세요.”

유리엘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그것 보라는 듯 아폴로니아를 향해 씩 웃었다. 그는 책을 들기 위해 낑낑거리는 아드리안이 안쓰러웠는지 한 손으로 대신 집어 들곤 책장에 꽂았다.

“이래 봤자 소용없을 겁니다. 조금 있으면 다시 꺼내 보시겠죠.”

“하아…… 유리엘 님 말씀이 맞아요.”

“아니야, 그만 보려고 했어.”

은근히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며, 아폴로니아는 별 소용없는 해명을 했다. 물론 아드리안은 전혀 들어 주지 않았다.

“네에, 그러시겠죠…… 아 참.”

아드리안이 중요한 것이 생각난 듯 행동을 멈추고 말했다.

“저 바위 같은 책에 정신이 팔려서 전해 드리려던 말도 잊을 뻔했네요. 세타 님이 중요한 소식을 전했어요.”

“소식?”

아폴로니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조금 전 책 한 권 때문에 변명하던, 아이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아드리안이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양위를 결정했다고 해요.”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아폴로니아는 아드리안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하?”

“……언제?”

“3개월 후요. 곧 공식적인 발표가 있을 거고, 여러 가문이며 왕국에도 사신을 보낼 거래요.”

아드리안이 아폴로니아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3개월.”

아폴로니아가 되뇌었다.

“그렇구나.”

그녀는 고정된 자세로 앉아 머리를 정리했다. 황제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을까.

“패리스가 흥분했겠구나.”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생각의 정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많은 경우의 수 사이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졌던 머릿속의 계획들이 하나로 모아졌다.

길이 보였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좋아.”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석 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충분했다. 아니, 그 이상은 그녀도 더 미루고 싶지 않았다.

“패리스도, 아버지도 충분히 즐기기를 바라. 그것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전하, 그 말은…….”

“성대한 즉위식이 될 거야. 바로 그날이…….”

아폴로니아가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아드리안은 동그래진 눈으로 주인을 살폈다.

“아버지로부터 황위를 빼앗는 날이다.”

아폴로니아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이번에는 유리엘도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폴로니아는 깊이 심호흡을 하고 의자에 앉았다. 심장이 조금 전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사람들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종이 세 장을 꺼내고, 깃펜에 잉크를 묻혀 세 통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비앙카, 일로나, 안느. 세 명의 왕비에게 전달될 초대장이었다.

* * *

“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패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풍성한 갈색 머리의 시녀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저, 전하, 곧 창문을 열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아모레타인가?”

그는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녀가 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이 만드는 것이 있다고…….”

“아모레타!”

패리스는 시녀의 해명을 듣지 않고 아모레타의 방으로 통하는 휘장을 열어젖혔다.

“전하.”

자욱한 연기 속에서 푸른빛이 도는 병에 투명한 액체를 붓던 아모레타가 돌아보았다. 그녀는 초췌해 보였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자수정 같은 눈동자에는 언제부턴가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패리스의 미간은 더욱 찌푸려졌다.

“상단의 일은 당분간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지난번 루완 상단의 제품 출시 기념회 이후로 이데나 상단에서는 페트라가 계획했던 많은 제품과 유사한 물건들을 줄줄이 출시했다. 비상이 걸린 페트라는 결국 아모레타와 진행하던 모든 일을 중단해야 했다.

물론, 이는 황제가 페트라의 황궁 출입을 심하게 제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냥…… 제가 필요해서 그래요.”

“무슨 약이지?”

“……기억을 조금 흐리게 해 주는 약이에요.”

패리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아모레타가 한 걸음 물러섰지만 패리스는 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더욱 가까이 선 채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엇을 잊고 싶은 건데?”

“그냥…… 잠이 잘 오지 않아요. 이 정도는 수면제에 가까워요.”

“떨고 있군.”

패리스가 고개를 아모레타 가까이로 기울이며 말했다.

“며칠 전부터 시녀 한 명을 굶겼다고 그러는 거야? 내 침대에 차를 쏟은 멍청이에게 벌도 못 주나?”

“아니…… 아니에요.”

“그럼, 이틀 전 불경한 하인놈을 내쫓아서? 그때도 너는 그놈의 편을 들었지.”

패리스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루비와 호박을 섞은 듯한 아름다운 눈은 선연한 핏빛으로 보였다.

“아닙니다, 전하.”

“그럼, 어제 매질한 소년 때문이군.”

“전하…….”

아모레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패리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나를 무시해도, 너는 매번 그들의 편을 들더군.”

“……열두 살짜리 아이를 피투성이로 만들 필요는 없었잖아요. 그 아이는 앞으로 걸을 수 없을지도 몰라요.”

아모레타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패리스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의 내리깐 눈을 지나 다리에 꽂혔다.

“……그게 신경 쓰였나 보군. 그 애도 네 꼴이 될까 봐?”

“전하!”

아모레타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패리스를 보았다.

그녀가 황궁에 들어온 후로, 패리스의 모습은 갈수록 잔인해졌다. 아니, 아모레타도 이제 알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패리스는 원래 그랬다는 것을. 다만 아모레타와 항상 같이 살지 않았기에 그녀가 몰랐던 것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패리스에게 온전히 의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려웠다. 그의 본색을 깨달은 때부터, 아모레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패리스의 짜증을 유발했다.

그러나 패리스는 때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단에서 쓸모가 없어졌다고 해도 아모레타는 여전히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아…… 미안하다, 아모레타.”

패리스는 한숨을 쉬고는 조금 더 부드러워진 어조로 그녀를 달랬다. 그러나 속에서 치미는 짜증은 여전했다. 아모레타를 친절하게 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순해 빠졌고, 그가 아랫사람을 손찌검할 때마다 옆에서 거슬리게 울고는 했다.

“이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마.”

그가 아모레타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당연히 거짓이었지만 그녀는 모를 것이다.

“아버님께서 양위 계획을 발표한 후로 나를 노리는 자들이 많아. 그래서 신경이 예민해졌다. 전에도 말했듯 나의 지위는 취약하니까.”

패리스는 아모레타의 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떨고 있었다.

“그래서 부탁했던 거야. 내가 영구적으로 금적안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약에 대해서.”

그는 아모레타의 턱을 잡아 올려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항상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내 주변의 사람들도 힘들어지겠지. 너는 내 희망이야.”

“전하…….”

아모레타가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물기를 머금은 짙은 자안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자신을 향한 애정이 있었다.

“가능…… 가능할 수도 있어요.”

아모레타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패리스의 입에 걸린 미소가 눈에 띄게 커졌다.

“정말이야?”

패리스가 거듭 묻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품에 꽉 안았다.

“아모레타, 내 사랑, 너는 나를 사랑하지.”

그가 호소하듯 말했다. 그는 아모레타가 무엇에 약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해요.”

아모레타가 말했다.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그녀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지.”

아모레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웃어 줘, 아모레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해 줘.”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 처연한 모습이 오히려 더욱 아름다웠다. 아모레타의 입술이 작게 움직이고, 패리스가 원하던 대답이 나왔다.

“아모레타가 존재하는 한, 황태자 전하를 배신하지 않을게요.”

방으로 돌아온 패리스는 미소를 떨치지 못했다.

“가능할지도 모른다라…….”

아모레타는 근거 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동자 색을 영원히 바꾸는 약을 거의 완성했을 것이다. 이는 엄청난 일이었다. 일전에 황제가 했던 조언과도 일맥상통했다. 패리스가 자신의 편을 놓치지 않으려면 그들의 존경을 사는 외양을 온전히 갖추는 것이 전제 조건 아니겠는가.

그는 전쟁터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아모레타가 전서구를 통해 전달하는 약이 제때에 오지 않으면, 그는 약효가 사라질까 전전긍긍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더해서, 아모레타 없이도 금적안의 보존이 가능해진다는 데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지금의 그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아모레타입니다.”

포트러스 후작의 말이 다시 한 번 그의 머리를 스쳤다. 이번에 패리스는 굳이 그 생각을 떨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 번이나 곱씹었다. 후작의 그 갈증을, 아모레타를 보고 영혼을 빼앗긴 듯했던 그 눈빛을.

“종이와 펜을 가져와.”

그가 시녀에게 지시했다. 몇 초 뒤, 그는 검은 깃펜을 손에 쥐고 편지 한 통을 써 내려갔다. 내용은 간단했다.

[아모레타를 원한다면 성의를 보이라.]

“포트러스 후작에게 전해.”

그는 편지를 접어 시녀에게 들려 보냈다. 그러고는 의자에 기대 자신이 얻게 될 자금이며 세력을 그렸다. 아모레타는 패리스를 사랑한다. 이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지.’

그녀는 패리스를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돌아올 것이다. 아모레타가 달리 마음을 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그녀의 유일한 사랑이고 구원이었다.

다만 패리스는 몰랐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눈을 감은 자신의 머리 너머로, 천장의 색과 똑같은 자그마한 날개원숭이 한 마리가 날아갔다는 사실을.

녀석은 패리스를 힐끗 돌아보더니 순식간에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 * *

“전하의 오빠는 쓰레기예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그녀의 팔에는 조금 전까지 패리스를 지켜보던 날개원숭이가 앉아있었다.

“루벤이 돌아왔군.”

아폴로니아가 날개원숭이를 보며 말했다. 그녀는 최근 에반젤린이 기르는 마물의 이름과 특성들을 배우고 있었다. 보호색을 띠지 않을 때는 녹색의 털을 가진 그 녀석은 날개원숭이치고 작고 귀여운 수컷이었다.

에반젤린이 가장 똑똑한 부모를 골라 교배시켜 얻은 이 녀석은 아직 청소년에 불과하지만, 머리가 좋은 건 물론 작고 빨라서 염탐에 능했다. 필요할 때는 무언가를 훔쳐 올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카엘은 잘 있고?”

“네. 다쳤던 건 다 나았고요, 귀족들과 자주 만나느라 조금 바빠요.”

전쟁 후 제국의 영웅이자 황실의 손님으로서 동궁에 거주하던 카엘리온은 최근 황궁 밖 작은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바멜산에서 돌아온 사병들도 함께. 과거에는 아폴로니아와 자주 만나기 위해 황궁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귀족들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역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혹시 모를 다른 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다만 그의 시녀로서 함께 저택으로 옮겨 간 에반젤린은 거의 날마다 황궁과 저택을 오가고 있었다. 그녀가 사용하던 방에 우글거리는 마물들 중 상당수가 이사를 거부했고, 황궁에는 녀석들을 강제로 잡아서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동궁이 비워진 후 처음 며칠 동안, 황궁의 식솔들은 밤마다 시끄럽게 울고 먹이를 잡으러 날아다니는 박쥐며 날개원숭이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중 일부는 빵을 나르던 시녀를 습격하는 등 자잘한 사고를 치고 다녔다.

때마침 황궁의 살림을 담당하게 된 아폴로니아는 시종장에게 명령하여 에반젤린이 저택과 황궁을 오가며 마물의 식사를 책임지도록 했고, 이는 순식간에 모두를 평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물들은 이쪽저쪽 오가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아?”

“네. 처음에 황궁에 남아서 버티라고 했을 때는 어리둥절해했지만 지금은 제가 자주 와서 괜찮아요.”

이는 처음부터 에반젤린의 의견이었다. 아폴로니아와 소식을 주고받아야 했던 그녀는 자주 입궁할 구실이 필요했다.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었다고?”

아폴로니아가 과자를 하나 건네며 물었다. 에반젤린과 루벤이 동시에 손을 뻗었지만 승자는 루벤이었다.

“앗! 다음 건 저 주세요!”

에반젤린은 아폴로니아의 질문을 잊어버린 듯했다. 볼 때마다 더 산만해져 가는 그녀는 날개원숭이의 입 속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과자를 보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먹는 것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던 그녀지만 아폴로니아의 궁에 자주 오게 되고 나서부터 달라졌다. 아폴로니아가 내주는 간식은 에반젤린이 평소 먹던 것보다 훨씬 고급이었던 것이다.

“에반젤린…….”

아폴로니아가 경고하듯 말하자 그녀는 움찔 하고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폴로니아는 바멜산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다. 친근함의 뜻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수하라는 점을 명확히 하려는 취지였다.

“아, 음, 그러니까.”

에반젤린이 헛기침을 하며 루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녀석은 과자를 양 볼에 가득 쑤셔 넣고 손가락을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수화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놀레타를 뭔안다면 성이를 모여라.”

“뭐?”

“똑똑한 애지만 아직 조금 서툴러요. 철자를 헷갈려 하거든요. 공작 부인 곁에 붙인 녀석의 자식인데, 아직 어머니를 따라잡지는 못했죠.”

통역을 하던 에반젤린이 말했다.

“원래 문구는 ‘아모레타를 원한다면 성의를 보여라.’였을 거예요. 수신인이 포트러스 후작이라는 건 확실하고요. 그는 언제부턴가 자기 저택에서 아모레타를 닮은 그림을 보며 사색에 잠긴다더군요. 사냥해서 얻은 황금빛 사슴뿔과 박제된 호랑이 사이에 그 사람의 초상을 걸었대요.”

에반젤린이 징그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모레타를 팔아넘긴다…… 포트러스 후작의 세력을 얻기 위해서?”

“쓰레기라고 했잖아요. 그렇다고 당장 아모레타가 주는 약을 끊으면 즉위식 전에 원래의 눈이 돌아올 테니 조금 뜸을 들이는 것 같지만요.”

에반젤린이 과자를 싼 종이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루벤은 끽끽거리며 손을 비볐다. 어디 누가 빠른지 보자는 태도였다.

“……멍청하군.”

“네?”

이번에도 날개원숭이에게 선수를 빼앗긴 에반젤린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패리스 말이야. 그런 얼간이는 세상에 또 없을 거야. 손에 쥔 것의 가치를 그렇게 모를 수가 있나.”

아폴로니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패리스는 항상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아폴로니아가 갖지 못했던 지위며 권력, 아버지의 사랑까지 가졌지만 그것이 얼마나 귀한지는 몰랐다.

“충동적이고 얕은 사람이죠. 배은망덕하고 의리도 없고. 하지만…….”

에반젤린이 말했다. 그녀는 패리스의 인격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포트러스 후작의 지지도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는 거죠? 그가 정말로 황태자를 도우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녀가 부산하게 몸을 흔들며 물었다. 그 모습에 익숙해진 아폴로니아는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강력하고 의미 있는 세력이야. 선대와 달리 정치에서는 한 발 빠져서 관망하고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지.”

아폴로니아는 어린 시절 보았던 가브리엘 포트러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부러울 것 없는 영지며 사병, 오랜 기간 유지되었던 공고한 권력을 가진, 자신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었다.

전쟁에 파병된 경험은 거의 전무하지만 그의 가문은 대대로 병법이나 무예에 출중했다. 한량처럼 지내는 듯하지만 그의 사병들은 잘 갈아 놓은 칼처럼 예리했다. 그들이 가이우스 황제의 편에 합세한다면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게 될 터였다. 아폴로니아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모레타가 그에게 가서도, 포트러스 후작이 패리스의 편에서 싸워서도 안 돼. 아니, 애초에 그는 즉위식에 오지 않는 게 좋아.”

생각에 잠겼던 아폴로니아가 무언가 결심한 듯 말했다. 바뀐 분위기가 느껴졌는지, 산만하던 에반젤린도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석 달도 남지 않은 시간.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지체 없이 세 사람의 관계를 모두 끊어 버리는 것. 그것이 아모레타에게 어떤 충격을 가져올지라도.

아폴로니아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모레타의 얼굴을 떠올렸다. 패리스의 이름만 들어도 붉게 달아오르던 얼굴, 행복에 잠긴 듯 나른한 목소리. 그녀는 분명 사랑에 빠져 있었다.

“많이 슬퍼하고 있겠어.”

아폴로니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모레타요?”

에반젤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겠죠. 편지뿐이 아니에요. 전하가 전에 말씀하신대로 그 사람은 황태자의 본성을 점점 깨닫고 있으니까요.”

아폴로니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에반젤린을 통해 연락책을 주었지만 아모레타는 아직까지도 아폴로니아를 찾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패리스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당장 그녀를 포트러스 후작에게 넘기려는 패리스의 수작을 알려 주면 어떻게 나올까? 그녀는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말을 들으면 자신이 평생 알았던 유일한 사랑을 부정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확인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면?

아폴로니아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빠져나올 시간을 더 주려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겠어.”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건드리면 쓰러질 듯 연약한 아모레타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너지든, 버티든, 그 사람의 운명인 거겠지.”

그녀는 이내 뇌리에서 그 모습을 지워 버리며 말했다. 에반젤린은 대답 대신 귀를 쫑긋 세워 몇 번 움직였다. 그 동작이 그녀를 더욱 표범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에반젤린, 힘든 일을 하나 해 줘야겠어.”

“아모레타를 찾아가서 패리스가 어떤 놈인지 말해 주라고요?”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반젤린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게 왜 힘든 일이죠?”

에반젤린은 순수하게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었다. 관찰력과 기억력이 천재적인 에반젤린이지만 섬세한 감정 문제에 있어서, 특히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와 다를 것 없었다.

“해 보면 알 거야. 패리스가 후작과 한 거래에 대해 말해 줘. 그리고 믿지 않거든 조언을 해 줘. 내가 전하는 말이라고 하면 듣겠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반젤린과 그 옆에서 귀를 기울이는 루벤에게 아폴로니아가 설명했다. 하나는 사람이고 하나는 마물이었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둘의 표정은 닮아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검지를 움직여 에반젤린을 가까이 불렀다. 그리고 가까이 몸을 숙여 귀를 기울이는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렇게만 말하면 돼요?”

“그거면 충분해.”

아폴로니아가 어딘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욕심만 많은 패리스, 그는 항상 자신이 가진 것의 가치를 잊고 남의 손에 있는 것을 탐내는 자였다. 반짝이는 새로운 것을 갖기 위해서라면, 그는 손에 쥔 보물을 놓아 버릴 것이다.

* * *

어스름한 저녁, 아모레타는 정원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이 정원 건너편의 그림자 위에 멈추었다.

“역시 당신이군요.”

“요즘은 산책도 자주 하지 않아서, 일부러 불러낼 수밖에요.”

에반젤린이 정원을 가로질러 다가오며 말했다.

“편지를 어떻게 내 머리맡에 둔 건지 모르겠지만 잘못하면 황태자 전하께 들켰을 수도 있어요.”

아모레타가 질책하듯 말했다. 그녀는 에반젤린 본인보다 그녀를 통해 자신에게 소식을 전하는 은인을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고맙지만 그럴 일은 없어요. 위험하다 싶으면 편지를 그 자리에서 먹어 버리면 되니까요.”

에반젤린은 풍성한 초콜릿색 머리를 흔들며 아모레타가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분은 잘 지내고 계신 건가요?”

아모레타가 물었다.

“궁금하면 패리스를 떠나서 찾아오지 그래요. 아직도 그 결심을 못했다니, 얼마나 대단한 사랑이기에…… 아, 아니에요.”

에반젤린은 무심코 툴툴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

상처받은 아모레타의 얼굴이 너무나 애절해서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힘든 일이라더니, 이런 뜻이었나.’

에반젤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패리스를 증오했고 아모레타에게 무심했지만 커다랗고 순수한 눈동자가 물기 머금은 수정처럼 빛나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그 정도로 마음이 약하면 내 얘기를 듣고 나서는 얼마나 상처를 받으려는 것일까.

에반젤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폴로니아의 조언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자신은 이 가련한 여인의 심장에 절대로 낫지 않을 상처를 새기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문득 아폴로니아가 아모레타를 언급할 때 유독 씁쓸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에반젤린은 그것이 손에 쥘 뻔했다가 놓친 인재에 대한 아쉬움이라 여겼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폴로니아는 아모레타가 겪고 있을, 그리고 앞으로 겪을 괴로움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이상한 데서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니까.’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아모레타가 다시 한 번 입을 뗐다.

“당신은 무슨 일로…….”

“황태자가 당신을 다른 남자에게 넘기려고 해요.”

에반젤린은 단숨에 본론을 입 밖으로 뱉어 버렸다. 그녀는 할 말을 못해서 어색하게 뜸 들이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겨우 몇 초였지만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아모레타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은 채 에반젤린을 응시했다.

“……뭐라고요?”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고 말했다. 그러나 새파랗게 변한 안색에서,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녀가 에반젤린의 말을 들었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보였다.

“말 그대로예요. 포트러스 후작을 본 적 있죠? 아름다운 건 닥치는 대로 수집하는 걸로 유명해요. 약간은 나랑 비슷하지만…….”

에반젤린은 아모레타의 절절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잔인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이 대화에서 아모레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그 사람은 대상을 빼앗고, 납치하고, 가두고, 죽여서 박제하기도 하죠. 여인을 대할 때도 다르지 않아요. 강제로 취한 사람의 수가 한둘이 아니니까요.”

아모레타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의 호흡이 조금 거칠어진 것이 보였다.

“……사실이 아니에요.”

그녀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잣말인지 에반젤린에게 하는 말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는 냉정하지만, 때로 난폭하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해요.”

평소의 나른함은 사라진 그녀의 목소리는 애절한 호소처럼 들렸다.

“하아…….”

에반젤린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한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나를 보낸 그 사람을 믿지 않나요?”

“그, 그건…….”

옛 은인에 대한 언급에 아모레타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에반젤린은 잠시 그 모습을 관찰하다가 말했다.

“그럼 시험을 해 보죠.”

그녀는 아모레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이건 당신이 아는 그 사람이 해 준 조언이에요.”

아모레타가 내리깔았던 긴 속눈썹을 살짝 들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을 때 보이는 얼굴이 그 사람의 진짜 얼굴인 법이니.”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해 준 말을 떠올리며 그대로 전했다.

“황태자가 달라고 하는 것을 주겠다고 하고, 그가 어떻게 하는지 직접 보세요. 실제로 넘겨주지는 말고요.”

“네? 그게 무슨…….”

아모레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에반젤린은 어깨를 으쓱하고 가볍게 대답했다.

“황태자가 당신에게서 원하는 것을 다 얻으면, 그때도 당신을 위할지 시험해 보라는 말이에요. 그가 달라지지 않으면 최소한 당신에 대한 사랑은 진심인 거고, 포트러스 후작 이야기를 꺼내면…….”

낯빛이 다시 어두워지는 아모레타의 모습에, 에반젤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눈앞에 서있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눈이 부실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조되는 어두운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여인은 불행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 줄기 희망으로 잡은 것이 패리스라니, 그리고 그 희망을 부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니.

생각할수록 이번 일은 만만치 않은 임무였다.

아모레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에 뱉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에반젤린은 굳이 답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한 번 해 봐요. 그리고 답이 나오면…….”

에반젤린의 적갈색 눈이 아모레타를 똑바로 보았다.

“이번에는 꼭 찾아와야 해요. 마지막 기회예요.”

에반젤린이 말하는 대상은 아모레타의 옛 은인, 즉 아폴로니아였다. 산산이 부서질 아모레타가 움켜쥘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겨우겨우 할 말을 다 전한 에반젤린은 아모레타가 자신의 말을 다 이해했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섰다.

아모레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반젤린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듣는 그녀의 표정에는 분명히 강한 두려움이 존재했다. 패리스에게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에반젤린의 말을 부정하면서도 그녀 역시 패리스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반젤린은 알 수 있었다. 아모레타는 분명 아폴로니아의 제안대로 패리스를 시험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말을 듣겠지.’

그녀는 아폴로니아를 찾아올 것이다. 유일한 사랑이자 인생의 빛이었던 패리스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 절망으로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면. 에반젤린은 멍하니 서 있는 아모레타를 한 번 돌아보고는 정원을 빠져나왔다.

* * *

“나갔다 온 거야?”

파리한 안색의 아모레타에게 패리스가 물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는 표정도 말투도 부드러웠다. 며칠 전 그녀를 윽박지르던 모습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산책을 하고 왔어요.”

“필요한 약은 잘 먹고 있어? 기억이 흐려졌다고 나를 잊는 건 아니겠지?”

그가 오랜만에 농담을 했다. 평소 같으면 반가웠겠지만 아모레타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에반젤린이, 아니 리샨에서 만났던 그녀가 에반젤린을 통해 전해 준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흐려 놓을 뿐 생활에 문제가 있을 정도의 약은 아니에요.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먹지 않았어요.”

그녀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패리스가 조금 멋쩍은 듯 웃었다.

“선물이 있다.”

그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아모레타가 눈을 들어 그의 손을 보자 패리스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처음 만난 순간과 똑같이 매력적이었다.

“너에게 어울릴 것 같은 목걸이야.”

그가 손을 펴자 화려한 백금 줄이 눈에 들어왔다. 한가운데에는 섬세하게 세공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 정도로 투명한 다이아몬드는 이데나 상단에서도 찾기 어려울걸.”

그는 아모레타를 안듯이 감싸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 가져오신 건가요?”

“즉위 소식을 들은 포트러스 후작이 내게 진상한 선물이다. 이것 말고도 귀한 물건을 많이 보냈더군.”

아모레타는 마음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에반젤린이 언급한 이름이 패리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과거에 단 한 번 마주했던 포트러스 후작을 떠올렸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찰나였지만 불처럼 타올랐던 욕망 어린 시선이었다.

아모레타는 남자들의 유혹과 구애에 익숙했기에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넘겼었다. 그러나 그 눈빛에 보였던 소름 끼치는 갈증은 이따금씩 머릿속에 떠오르고는 했다.

“왜 그러지?”

패리스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우아하면서 사내답게 뻗은 콧대와 턱선이며 따스한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속에 사랑이 없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두 사람 사이의 사랑만은 진실할 거라는 생각이 아모레타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잘 어울리는데.”

하지만 에반젤린의 말을 들은 이상, 그리고 패리스가 포트러스 후작으로부터 받은 물건을 목에 건 이상 그 믿음을 온전히 유지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머릿속의 혼란을 정리하지 않으면 이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을 때 보이는 얼굴이 그 사람의 진짜 얼굴인 법이니.”

그녀는 에반젤린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시험을 해 보고 스스로 판단하라고 했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전하.”

아모레타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패리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지난번에 네가 말한 약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네?”

그는 웃으며 아모레타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웠지만 뿌리칠 수 없는 압력이 느껴졌다.

“황실의 눈을 영구적으로 가질 수 있는 약 말이다. 며칠 전 가능할 것 같다고 했으니 지금쯤은…….”

그의 온화한 미소 속에 조급함이 스쳤다.

“황태자가 달라고 하는 것을 주겠다고 하고, 그가 어떻게 하는지 직접 보세요.”

에반젤린의 말이 또다시 떠올랐다. 아모레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직이라면 더 기다릴 수 있다.”

“만들어 냈어요.”

아모레타는 결국 에반젤린의 조언을 따랐다.

물론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모레타는 이미 오래전 패리스가 원하는 약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한 번 구현하기조차 어려운 금적안을 영구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주술이었지만, 거듭된 연구 끝에 그녀는 약물에 필요한 요소를 다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게 정말이야?”

패리스는 그녀가 본 것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적으로나마 그가 학대한 시종과 시녀들의 수를 잊게 만드는 그런 미소였다.

“만들기는 했지만…… 효능을 완전히 갖추려면 아직 며칠 기다려야 해요.”

아모레타가 재빨리 덧붙였다. 마음속에 의심이 깃든 이상,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잘됐다.”

패리스가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 그녀를 감싼 팔이, 전해져 오는 체온이 아모레타에게 작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내 사랑, 나에게는 역시 너밖에 없구나.”

패리스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것이 꿀인지 독인지, 아모레타는 알 수가 없었다.

“약을 가지고 있어?”

패리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아모레타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는 아모레타를 안았던 팔 한쪽을 풀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제 방 탁자 위, 가장 오른쪽 병이에요.”

거짓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녀는 패리스의 마음을 완전히 확인한 다음 진짜 약을 건넬 생각이었다. 패리스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다.

“고맙다, 아모레타.”

그는 아모레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는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모레타의 희망이 조금씩 부풀었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그저 불안했을 뿐이지 않을까. 그가 원하던 약을 주면 패리스는 더 이상 누군가를 학대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그시 아모레타의 눈을 들여다보는 그는 분명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을…….

“아, 그리고 아모레타.”

패리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너는…… 잠시 이곳을 떠나 있거라.”

예상치 못한 말에 아모레타가 눈을 크게 떴다.

“네?”

“별거 아니야. 즉위식 전까지 어수선해서 하는 말이지. 황궁은 위험한 곳이니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이라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해 왔거든.”

조금 전까지 그녀가 좋아 어쩔 줄 모르던 패리스는 살짝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불안감이 아모레타의 마음을 잠식했다.

“어…… 어디로 가서요?”

제발, 제발.

그녀는 속으로 빌며 물었다. 제발 그녀의 의심이 틀렸기를,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그저 우연이기를, 패리스의 입에서 다시 그 이름이 나오지 않기를.

“마침 적당한 곳이 있다. 경치가 아름답고 넓은 사냥터도 있는 곳이지.”

아모레타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패리스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내가 잘 아는 자의 영지이다. 언제든 네가 갈 수 있게 준비되어 있어.”

그가 말을 이었다. 아모레타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마지막 한 마디를 듣기 전에 패리스의 입을 막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나의 친우이자 충신, 가브리엘 포트러스 후작에게 가도록 해.”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머리가 웅웅거리고 다음 말이 들리지 않았다.

햇살처럼 밝게 웃는 황태자의 품에 안긴 채, 아모레타는 심장이 천 개의 조각으로 찢기는 것을 느꼈다.

* * *

열어 놓은 창으로, 뺨에 흉터가 난 흰눈박쥐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다. 찌부러진 얼굴이며 초점 없는 눈, 털북숭이 몸뚱어리까지 꽤나 흉한 외모였지만 아폴로니아는 반갑게 녀석을 맞아들였다.

“어서 와, 판.”

판은 에반젤린의 마물 중 하나였다. 흰눈박쥐는 날개원숭이만큼 똑똑하지도, 외눈까마귀만큼 집념이 강하거나 빠르지도 않았지만 얌전한 편이라 단순한 심부름에 알맞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날개원숭이는 단순한 일만 시키면 우울해지거나, 아니면 재미를 찾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판은 먼 길을 가기보다는 에반젤린과 아폴로니아 사이만을 오가며 몇 가지 서류를 전달했다.

“간식 준비를 해 놓아서 다행이에요.”

지켜보던 아드리안이 과일을 한 접시 가져왔다. 판은 기쁨에 찬 울음소리를 내고는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

“입맛이 고급이라더니, 사과 중에서도 비싼 것만 골라서 먹어요. 보기와는 다르게 요조숙녀 같은 성격이에요.”

아드리안이 신기하다는 듯 녀석을 관찰하며 말했다. 손으로는 판이 떨어뜨린 편지를 집어 들고 있었다.

“왕비들의 답장이에요. 빨리도 왔네요.”

아폴로니아가 아드리안으로부터 편지 세 통을 건네받았다.

에반젤린이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돌아선 후로, 아폴로니아는 리샨이나 외국으로 보내는 서신도 그녀를 통해 처리하고는 했다. 방법은 알 수 없었지만 에반젤린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서신을 전달하고 답신을 받아서 아폴로니아에게 전달해 주었다.

“에반젤린 님이 조금 무서워질 정도예요. 비에른과 리튼, 바엘 왕국에도 정보원이 있다는 뜻이겠죠?”

“그래. 비에른 왕궁 깊숙이에 보내 놓은 자와는 벌써 10년을 알고 지냈다고 하더군. 그사이에 그자는 자식도 여럿 보았다고.”

“어머, 사람이에요?”

아드리안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묻자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글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자식이 이백이라고 했으니…… 마물이거나 엄청난 정력의 소유자거나?”

황당해하는 아드리안을 두고 아폴로니아는 편지들을 펼쳤다. 적혀 있는 내용은 거의 같았다.

“초대장은 잘 받았다는군. 아버님 이름으로 보낸 정식 초대도, 내가 개인적으로 보낸 것도.”

아폴로니아가 빠르게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즉위식에 호화로운 사절단을 파견하겠다고 해. 인원을 최대한으로 하고 내가 요청한 대로…….”

그녀는 각 편지의 하단을 읽고 빙긋 웃었다.

“평범하게 위장시키되 전원을 무예에 능한 기사로 구성하겠다고.”

“본인들은요?”

아드리안이 물었다. 그녀도 옛 동료들의 소식이 반갑다는 표정이었다.

“위험할 수 있으니 오지 말고 남편들만 보내라고 했지만…… 비앙카는 부득부득 이카르트와 함께 오겠다는군.”

아폴로니아가 가운데 놓인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드리안은 피식 웃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 셋을 둔 부모가 그렇게 무모하다니…… 아니, 육아로부터 도피를 하는 거려나요? 첫째 왕자가 그렇게 장난이 심하다더군요.”

“그래?”

아폴로니아는 세 아이와 함께 있는 비앙카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곧고 기개 높은 그 얼굴에는 행복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번 일이 성공해야 할 텐데.”

“비에른의 국왕이 있는 한, 비앙카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아드리안의 말에 아폴로니아는 몇 년 전 보았던 곰 같은 남자를 떠올렸다. 그가 마물에게서 비앙카를 구해 내던 용맹한 모습도.

“네 말이 맞아.”

그녀는 한 손으로 편지 세 통을 한데 모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촛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촛대를 기울여 편지 한구석에 불을 붙였다. 아드리안은 한 발짝 물러섰지만 아폴로니아는 편지가 다 탈 때까지 그것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예전에는 타고난 체질 때문에 목숨이 위험했다고 하시더니, 이제는 쓸모를 찾으셨네요.”

아드리안이 작은 화염에 휩싸인 채 편지를 쥐고 있는 아폴로니아의 손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아폴론은 어쩌면 증거 인멸의 신이었을지도 몰라요.”

편지 세 통이 완벽하게 재가 되는 모습을 본 그녀는 책상 한구석을 가리켰다.

“저것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그녀의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에는 화려한 금빛 무늬로 장식된 흰 종이와 봉투 몇 장이 쌓여 있었다. 제국의 이름으로 다른 왕국에 보낼 즉위식 초대장들이었다. 작성은 시종장이 다 마쳤으나 황실의 인장을 찍을 권한을 가진 것은 아폴로니아였다.

“몇 통은 그냥 보내도 괜찮아. 기껏해야 사절 몇 명과 선물만 보낼 테니까. 하지만 맨 위의 두 통은…….”

아폴로니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제국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두 왕국, 아실리아와 타른의 왕에 대한 초대장이었다.

두 나라 국왕 사이에는 공통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로는 형제자매와의 경쟁에서 승리해 왕위에 올랐고, 당시 가이우스는 페트라의 조언에 따라 그들을 지원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가이우스의 폭정에도 불구하고 두 왕국은 그를 공고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는다는 공통점 또한 가지고 있었다.

“고모님이었다면 이럴 때 호화로운 행렬과 함께 직접 방문해 패리스의 위엄을 빛내 달라고 했겠지.”

아폴로니아가 초대장을 봉투에서 꺼내며 말했다. 시종장인 모튼이 쓴 것은 투박하고 단순한 즉위식 초대였다.

“물론, 단순한 초대장을 보내도 그들은 똑같이 할 거야. 아버님을 존경하지는 않아도 진 빚을 갚는 자들이니까.”

그녀는 봉투에서 꺼낸 내용물을 집어 들고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전 놓았던 촛대를 다시 기울여 종이에 불을 붙였다.

화륵-

가지런한 글씨와 정중한 문체로 이루어진 두 통의 편지는 순식간에 아폴로니아의 손에서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그러니 조금 바쁘게 해 줘야지.”

그녀는 손에서 재를 털어 버린 후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 두 장을 자신의 앞에 놓고 펜을 잡았다.

“뭐라고 쓰시는 거예요?”

아드리안이 호기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폴로니아는 간단하게 휘갈긴 편지를 들어서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즉위식을 앞두고 나와 그대의 경계에서 도적이 기승을 부리니, 다소 급박하더라도 사절들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적을 소탕해 달라. 소탕이 끝나거든 부디 즉위식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달라.]

“이 정도면 당연히 할 수 있는 부탁이네요. 하지만…….”

아드리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실리아와 타른의 국왕들은 모두 유능하고 용맹한 자들인데, 일찍 소탕을 끝내 버리면 어떡해요?”

“걱정 말아.”

아폴로니아가 각각의 편지를 봉투에 넣고 인장을 찍으며 말했다.

“아주 유능한 도적들을 보내 놓았거든. 몇 년 동안 훈련을 시켰으니 이제 그 정도는 상대할 수 있겠지.”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벤, 탄, 룬, 타냐 사남매는 수백 명의 산적 떼를 이끌고 국경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온갖 무기와 주술로 무장한 채.

“자진해서 철수하지 않는 이상, 1년 내에는 절대로 소탕 못 해.”

그녀는 편지 봉투에 찍힌 인장을 훅 불어 말리고는 봉투를 옆으로 치웠다. 과일을 다 먹은 판이 찍찍거리며 발톱을 내밀었다.

“너 아니야. 이건 모튼을 통해 정식으로 전달할 거야.”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으며 판의 귀 뒤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마물들이 사랑스럽다는 에반젤린의 말에는 여전히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최근 계속 보는 몇 마리에 대해서 거부감이 줄어들고 있었다.

‘어쩌면 에반젤린의 말처럼 마물들에게도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이 있을지도…….’

찍…… 찌익!

아폴로니아가 생각에 잠겼을 때, 그녀의 손 밑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던 판이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심코 녀석을 따라 시선을 돌렸던 아폴로니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우우우웅-

판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커다란, 어린아이만 한 박쥐 한 마리가 허연 눈을 희번덕거리며 전속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녀석의 몸통은 거대한 쥐와 같았고, 얼굴은 험악하게 구겨져 있었다. 지저분한 털투성이의 입에는 기다란 무언가가 매달린 상태였다.

캬아아아아악- 철퍽!

녀석은 기괴한 소리를 한 번 지르더니 거칠게 창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 물었던 것을 마저 입 속으로 넣어 삼켰다.

“꺄아아아악! 뱀, 뱀이에요!”

아드리안이 기겁하며 아폴로니아를 자신의 뒤로 잡아끌었다. 그녀의 말대로, 녀석의 입 속으로 꿈틀대며 사라진 것은 화려한 무늬의 독사였다.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귀엽기는 무슨,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푹 쉬며 조금 전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툭-

“편지……구나. 고마워, 알리.”

만류하는 아드리안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아폴로니아가 커다란 흰눈박쥐의 발톱에서 쪽지 하나를 빼냈다.

캬아아아아악!

커다란 흰눈박쥐는 별거 아니라는 듯 시원한 트림을 하며 고기 한 조각을 토해 내고는 창밖으로 시원한 날갯짓을 하며 사라졌다. 자세히 보니 그가 토해 낸 조각에는 아까 본 뱀의 무늬가 박혀 있었다.

“다 이 녀석처럼 얌전하지는 않나 봐요.”

아드리안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판을 바라보며 아폴로니아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판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우아하게 찍 하고 울더니 아까 그 녀석을 따라 창밖으로 사라졌다.

“하아…….”

한숨을 토해 낸 아폴로니아가 쪽지를 펴서 그 위에 삐뚤삐뚤하게 적힌 메모를 읽었다. 에반젤린이 직접 쓴 소식이었다.

“하늘이 내린 악필이에요. 볼 때마다 심해지는 것 같아요.”

아드리안이 투덜대며 아폴로니아 어깨 너머로 종이를 보았다. 그러나 내용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표정은 진지하게 바뀌었다.

“이거…….”

“그래.”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서도 조금 전의 당혹스러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고대하던 소식을 접한 그녀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아모레타가 나를 찾고 있어.”

드디어, 드디어 그녀가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패리스는 결국 손에 든 보석을 놓아 버렸다. 아니, 놓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진 그 조각을 주울 기회는 다시 아폴로니아에게 온 것이었다.

“로브를 준비해 줘.”

아폴로니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해가 저물면 바로 나갈 거야.”

* * *

아모레타는 거울 속의 여인을 들여다보았다.

우유처럼 맑은 피부에는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검은 머리카락은 최상급의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이목구비는 그림으로 그려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섬세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자안은 신비롭게 빛났다.

예뻤다.

예쁜 얼굴이었다.

그것이 증오스러웠다. 살면서 그녀를 욕망했던 사람이 몇이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덕분에 아모레타는 몇 번이나 재앙을 맞았다. 리샨에서 만났던 디아만 자작, 포트러스 후작,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패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모레타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알려 준 그는 구원이자 재앙이었다.

지긋지긋한 삶이었고, 지긋지긋한 사람들이었다. 이제야, 아모레타는 그 모든 것들과의 연을 끊을 준비가 되었다.

다만 딱 한 명, 리샨에서 그녀를 살려 주었던 은인과는 인사를 해야 했다. 그것이 아모레타의 유일한 과제이고 미련이었다.

“잠시 산책을 나가려고 해요.”

그녀는 다른 시녀에게 대충 둘러대고 황태자궁을 나섰다. 에반젤린을 통해 약속한 장소는 사르비아 정원이었다.

그곳은 패리스의 소유로서, 패리스 외의 사람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몇 년 전에는 그의 친우들이 이용하기도 했지만 가레스 리페르가 큰 실수를 한 번 저지른 후로는 관리만 될 뿐 외부인에게 닫혀 있는 공간이었다.

“관리인은 7시가 되기 전 1분가량 자리를 비울 거예요. 놓치지 말고 들어와요.”

에반젤린은 쪽지를 통해 그렇게 전했었다.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이 된 일개 왕녀가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아는지 알 수 없지만 아모레타는 그녀의 말을 따랐다.

‘정말이다.’

항상 보이던 보초가 자리에 없었다. 누군가의 급한 호출이 있어야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입구를 지나는 아모레타의 가슴이 뛰었다.

수 년 전의 짧은 만남이었고,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모레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사람이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 그러니까 자신을 둘러싼 환경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한없이 증오스러웠던 때 나타났던 여인이었다.

아모레타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을 해쳤다. 몇 명인지 알 수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겼다는 사실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디아만 자작의 협박으로 만들어 냈던 독이며 저주가 몇 가지였던가. 그의 몰락을 알게 된 후에도 삶을 끝내는 것 외에 다른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모레타는 스스로 목숨을 끝낼 여유도 없이 병사들에게 발견되어 처형당했을 것이다. 그녀 때문에 괴로워했던 사람들의 환희 속에서 마녀다운 최후를 맞으며.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행복을 알지 못한 채로.

그 여인은 단순히 아모레타를 안전하게 내보내 주기만 한 것이 아니다. 아모레타의 가감 없는 고해성사를 듣고도 연민을 가져 주었던 사람이었다.

아모레타의 모든 비밀을 알고도 그녀를 증오하지도, 어떤 협박을 하거나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던 유일한 사람. 그런 사람의 존재가 아모레타로 하여금 사라졌던 희망을 찾게 해 주었다.

강렬했던 만남은 어느 순간 패리스로 대체되어 꿈의 한 조각으로 남았다. 다정한 목소리와 매력적인 미소로 곁에 남아 달라 조르던 그는 그녀가 처음 찾은 행복이었다.

그 미소가, 그 애절함이, 사랑 가득한 그 눈빛이 어느 순간 휘몰아치는 감정이 되어 과거의 모든 인연을 흐리게 했다. 그 여인에 대한 기억조차도.

에반젤린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다시 한 번 절망을 앞둔 아모레타에게, 그 여인은 기적처럼 퇴로를 열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모레타는 그 친절을 받을 여력조차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대체 그 사람은 누구일까.’

에반젤린을 만난 순간부터, ‘리샨을 지나는 여행객’일 뿐이라는 과거의 소개가 거짓임은 알 수 있었다. 어떤 평범한 여자가 라잔의 왕녀를 수족처럼 부린단 말인가.

애초에 어떻게 아모레타를 찾았을까. 패리스가 지정해 준 거처를 단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그녀였는데.

바스락-

정원 벤치에 앉아 기다린 지 몇 분이 지나자, 발소리가 들리고 어두웠던 정원 입구에 어떤 실루엣이 나타났다.

한 명이었다. 짙은 갈색의 로브를 머리끝까지 덮어쓴 사람. 아모레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오래전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실루엣은, 아니 여인은 조금씩 형체를 드러냈다. 로브 속에 감춰진 작은 입술, 우아한 걸음걸이. 5년 전에 보았던 그녀와 똑같았다. 아모레타는 저도 모르게 벤치에서 일어나 여인과 마주했다.

“오랜만이군.”

그녀였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한 느낌이었지만 짧은 인사에도 특유의 품위가 묻어났다.

아모레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붉은 꽃이 핀 어두운 정원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만나고 싶었어요. 아주 많이.”

여인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게 묻고 싶은 것이 많을 텐데.”

아모레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부터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인지, 자신을 어떻게 찾았는지, 왜 계속해서 친절을 베풀려는 것인지. 그러나 먼저 말을 한 것은 상대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찾지 않은 것은 그대였고.”

아모레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여인은 목소리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다스리는 것이 익숙한 듯 자신을 ‘그대’라고 부르고 있었다. 오두막에서 들었던 말투와는 달랐다.

문득 아모레타는 다른 것들이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왜 패리스를 떠날 확신이 생긴 후에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을까? 왜 그를 싫어하는 것일까? 패전국이기는 하나 일국의 왕녀인 에반젤린은 왜 이 사람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걸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그녀가 천천히 물었다. 로브 아래로 여인이 살짝 웃는 모습이 보였다.

“아, 그래. 그게 먼저겠네.”

그녀가 머리를 덮은 로브자락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내 이름은 아폴로니아 알리스테어 페르디안.”

그녀가 로브를 어깨까지 끌어 내리며 말했다.

“제국의 황녀이다.”

차가운 바람이 여인을 훑었고, 그녀의 드러난 머리칼이 훅 하고 날렸다.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허리 아래로 물결치는 황금빛 머리칼은 눈부시게 반짝였다.

시선을 조금 들자,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아는, 구현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했던 아름다운 빛을 띤 눈동자가 보였다.

패리스와 비슷한, 그러나 어딘가 더 깊어 보이는 금적안.

그녀는 약 따위를 마신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아모레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빛깔과 그녀가 타고난 빛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황녀?”

아폴로니아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순간 아모레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나야말로, 그대가 보고 싶었어.”

아폴로니아가 반쯤 반갑고 반쯤 슬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모레타는 머리를 무언가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놀란 얼굴이군. 여행객이 드문 리샨에서, 디아만 자작이 몰락할 무렵 그의 영지를 혼자 돌아다닐 만한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해?”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리샨에서의 만남이 다시 한 번 아모레타의 머리를 스쳤다.

절묘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뿐이라 여겼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영지의 상황에 아무 관심도 없는 어린 황녀가 우연한 일로 자작의 비리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자작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에도 그저 신이 안배한 인과응보려니 생각했었다.

그때와 같은 차림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아폴로니아를 보고서야, 아모레타는 5년 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아니 전하께서 자작을 끌어내렸군요.”

아모레타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모레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고정된 채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우연히 만나 자신이 무사히 도망치도록 친절을 베풀어 준 은인이라고만 여겼으나 단순한 친절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쥐고 있던 디아만 자작을 심판한 영주였다.

우연히 그랬다는 소문과 달리, 이는 아폴로니아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아모레타는 그녀의 태도에서, 그간 보내왔던 사인에서, 이 황녀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제 와서 그건 중요하지 않아.”

아폴로니아가 아모레타가 앉았던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아모레타를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마치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한 아모레타의 반응을 걱정하는 듯.

“중요한 건 내가 끌어내릴 더 중요한 사람이 있다는 거지.”

“네?”

“다행이야. 너무 늦지 않게 네가 패리스의 곁에서 떨어졌으니.”

아폴로니아의 말이, 정확히는 ‘패리스’라는 이름이 아모레타를 충격에서 깨웠다. 그녀의 머리는 다시 천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패리스의 여동생, 아폴로니아 황녀.

소문에 따르면 유약하고 미련하기 짝이 없다던 그녀였다. 그런 사람이 에반젤린을 보내 조언했다. 패리스를 떠나라고. 그는 잔인한 사람이니 그 곁을 떠나라고. 믿기지 않는다면 시험해 보라고.

그 조언이 얼마나 정확하게 들어맞았나. 그녀는 포트러스 후작의 곁으로 떠나라던 패리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황녀 전하께서 계획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아모레타가 물었다. 그러나 질문을 하면서도 그녀는 답을 알 것만 같았다. 가슴이 조금 전보다도 더 빨리 뛰었다. 아폴로니아가 아모레타와 천천히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내 것을 찾는 것.”

“그렇다면 누군가를 끌어내린다는 건…….”

아모레타의 말을 들은 아폴로니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필연적으로, 패리스는 파멸할 수밖에.”

* * *

아폴로니아는 그동안 할 수 없었던 모든 설명을 해 주었다. 가이우스가 한 일도, 패리스의 출생도, 자신의 과거도. 과거에는 신분조차 밝힐 수 없었지만, 이제 아모레타가 모든 것을 안다 한들 그 사실은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아모레타에게는 그런 비밀을 흘릴 대상이 없으니까.

“……공작 부인이 전하를 죽이려 했었다고요.”

조용히 아폴로니아의 말을 들은 아모레타가 말했다.

“공작 부인의 상단이 결국은 전하를 위협하는 자본이 되었고, 제가 만들어 준 황태자 전하의 눈동자는 전하의 자리를 완전히 차지하는 힘이 되었군요.”

차분하게 행동하려 애썼지만 아모레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모레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회한으로 젖어 있었다.

“저를 죽도록 내버려 두셨어야…….”

“나는 후회하고 있지 않아.”

아폴로니아가 아모레타의 말을 끊었다.

“디아만 자작의 강압에 따라 했던 일을 그대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까. 영주가 된 몸으로, 어떻게 영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남 탓을 하지?”

“하지만 만약 저를 돕지 않으셨다면…….”

“그 당시에는 최선의 판단이었어. 보기는커녕 들어 본 적도 없는 그대의 재능이 아까웠고, 그대가 처한 상황이 안타까웠으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모레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말투도 몸짓도 우아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디서도 느껴 본 적 없는 강단이 있었다.

“그러니 희망을 버려서는 안 돼. 그대는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살아 보지 못했으니까.”

아모레타는 아폴로니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의심했다.

“패리스를 떠나서, 아니 수도를 떠나서 기다리도록 해.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믿기 어려웠다. 평생 패리스와 황제에게 자리를 빼앗긴 채 페트라로부터 위협당하며 살았던 그녀가, 그들의 세력이 되어 주었던 아모레타를 돕고 싶어 한다니.

아모레타의 과거도, 패리스를 사랑했던 그녀의 마음도 알고 있으면서.

리샨에서 느꼈던 따뜻함이 순간 다시 한 번 마음을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정리되었던 마음은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전하는…… 정말로 독특한 사람이군요.”

아모레타가 말했다.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는 아폴로니아의 눈빛이 그녀의 것과 마주쳤다. 분명히 자신은 서 있고 상대는 앉아 있는데도 마치 상대를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대 또한 만만치 않아. 그러니…….”

“그러니 죽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아모레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죽음을 생각할 거라 여기셨군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폴로니아는 아모레타를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 눈빛에 담긴 안타까움이 아모레타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다.

눈앞의 이 여인은 아모레타를 귀하게 여겼다. 그것이 자신의 재능 때문이든, 인간 대 인간의 연민이든 이는 아모레타가 살면서 받았던 가장 꾸밈없는 애정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어렵게 입을 뗐다.

“그대가 겪은 충격은, 누구라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니까.”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진심이었다. 아모레타는 평생을 바람 속의 갈대처럼 타인의 손에 흔들리고 꺾이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아모레타는 마치 아름다운 조각상이라도 되는 듯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를 바라보는 자색 눈은 여전히 조금 젖어 있는 듯했고, 오묘한 그 눈빛 안에는 수십, 수백 가지 생각과 감정이 스쳤다.

“황녀 전하.”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모레타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생을 전부 정리한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은인에게 보답할 기회를 주세요.”

그녀는 천천히 아폴로니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그녀는 의아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전하의 계획을 도울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이 연약해 보이는 여인이, 패리스가 몰락하는 현장을 피하기는커녕 직접 기여하겠다는 말인가.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데?”

“포트러스 후작은 즉위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고.”

아모레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즉위식 당일. 전하의 어떤 설득이나 무력이 없이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은 패리스가 아폴론의 핏줄이 아님을 깨닫게 될 거예요.”

아폴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자들도, 심지어는 패리스의 친우들조차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모레타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힘이 실려 있었다.

“단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을 거예요.”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그녀의 입꼬리는 살짝 들려 있었다. 아모레타는 그만큼 엄청난 제안을 하고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각오했던 희생을 말도 안 되게 줄여 주겠다는 것.

“다만 황녀 전하.”

아모레타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다만’이라는 단어에 아폴로니아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청을 하나 들어주세요.”

“……뭐지?”

아모레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말을 뱉는 것이 어렵다는 듯 온몸을 떨었다.

“무엇이든 말해도 좋아.”

아모레타는 조심스럽게 꿇었던 무릎을 반쯤 펴고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비슷해졌을 때, 아모레타는 목소리를 낮추고 아폴로니아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폴로니아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가 다시 회복되었다.

“……진심인가?”

아폴로니아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물었다. 아모레타는 서글픈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원합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딘가 서늘한 아폴로니아의 시선을 받아 내는 아모레타의 표정은 결연했다.

“……그대는?”

한참을 침묵하던 아폴로니아가 입을 열었다.

“네?”

“내가 그 말을 들어주면 그대는 어떻게 되지?”

아모레타가 눈을 크게 떴다. 아폴로니아의 십년지대계를 흔들 수 있는 제안을 한 자신에게, 그 뒤의 일을 왜 묻고 있냐는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그대에게 요청한 것은 하나야. 삶을 누리고, 나의 제국을 위해 일해 달라는 것.”

아모레타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미묘한 미소가 번졌다. 여전히 서글프지만, 어딘가 해방감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아모레타는 사라지려 해요.”

아폴로니아가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그대는 정말로…….”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말을 끝내기 전, 아모레타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그녀의 귀 쪽으로 몸을 기울여 무언가를 길게 속삭였다. 아모레타가 말을 끝내자,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찌푸렸던 미간을 다시 폈다.

“……그게, 그대가 원하는 결말이군.”

“네, 전하.”

한참 동안 아모레타를 바라보던 아폴로니아의 입가에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대를 잘못 보았어.”

“예?”

“연약하고, 타인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줄 알았거든.”

아폴로니아가 스스로에게 조소하며 말했다. 얼마나 틀린 생각이었나.

아모레타는 약하지 않았다. 당돌하게 아폴로니아에게 청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그녀는, 순식간에 인생의 방향을 정리했다. 그리고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결단을 내렸다.

자신을 평생 괴롭혀 온 것을 가차 없이 버리겠다고.

“그대의 청을 들어주겠어.”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대 또한, 나와의 약속은 지키도록 해.”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아모레타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그 얼굴에는,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던 환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 * *

“……오지 않았다고?”

패리스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의 손에는 포트러스 후작이 보낸 짤막한 편지가 들려 있었다.

불쾌한 내색을 역력히 드러내는 그 편지에는, 영지로 오기로 약속한 아모레타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그녀에게 걸맞을 방과 정원을 꾸미기 위해 들인 비용이 어마어마하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정중한 인사말 대신 즉위식에 참석할 계획이 없다는 날카로운 거절 문구가 보였다.

“함께 갔던 호위들이 돌아왔습니다. 그……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패리스가 손에 든 편지를 구기며 소리쳤다.

아모레타를 잃어버려? 몸값이 대체 얼마인 줄 알고 그런 실수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카엘리온과의 줄다리기를 결정지을 열쇠였다.

쾅!

패리스가 신경질적으로 벽을 내리치자 소식을 전한 시종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 하루 종일 수색을 해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납치의 흔적도 없고, 마치 그대로 사라진 것처럼…….”

“하…….”

패리스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붉은 눈이 차갑게 빛났다.

“책임이 있는 놈들을 전부 잡아들여. 즉위 후 처형한다.”

“예!”

시종이 나가자 패리스는 책상에 앉아 아모레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포트러스 후작에게 몸을 의탁하라는 말을 듣고 순순히 떠났다. 낯선 곳이라며 거부할 것을 우려하였으나 오히려 너무나도 빠르게 짐을 정리하고 출발했다.

아모레타는 마지막 날 짧은 인사와 함께 약병을 건넸다. 자신의 책장 위 가장 오른쪽에 놓여 있었던, 패리스에게 영원히 빛날 태양신의 눈동자를 만들어 줄 그 약을.

“복용하고 나면, 전하의 삶은 영원히 바뀌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른한 평소의 목소리와 달리 어딘가 슬프게 들렸지만 아마 착각일 것이다. 표정은 어땠더라? 이상하게 눈빛이 기억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약간의 가책을 느껴 눈을 마주치지 않았나 보다.

‘사라졌다…….’

그는 잠깐 동안 눈을 감고 그녀와 함께했던 지난 몇 년을 돌이켰다.

애정을 가득 담아 자신을 보던 아모레타의 아름다운 눈동자, 한때 사랑한다 여겼던 어여쁜 얼굴이며 자태가 잠시 머리를 스쳤다.

‘그래. 사라졌다.’

납치의 흔적이 없다고는 하나, 범인은 인근의 도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모레타는……

그는 고개를 흔들어 그녀에 대한 약간의 마음을 떨쳐 버렸다. 아모레타의 운명은 다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아모레타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의무를 마쳤다.

패리스는 아모레타가 떠난 직후 그녀가 직접 패리스의 손에 쥐여 주었던 그 약을 설명에 맞게 복용했다.

그 후로 보름이 지난 지금, 붉은빛과 황금빛이 뒤섞인 오묘한 색채는 그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7일에 한 번 약을 먹지 않으면 색이 탁해졌던 평소와는 달랐다.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아폴론의 후예였다. 과거에는 그가 눈동자의 변색을 위해 약을 먹는다는 사실을 누가 알게 될까 전전긍긍했던 패리스였지만 이제 마음속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는 입꼬리를 살며시 끌어 올렸다. 이제 중요한 것은 미래였다. 앞으로 그와 함께할 사람은 누구인가. 아니, 그가 다스려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포트러스 후작은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패리스가 아무리 자기 탓이 아니라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대가를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내놓을 생각이 없는 자였다.

‘결국은 중립 귀족인가.’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즉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카엘리온에게서 반역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귀족들과 적당한 관계만 유지하면 이러나저러나 황위는 그의 것이었다.

황제는 행동을 조심하라 일렀지만 이는 지나치게 소심한 처사였다. 패리스는 황실의 장자이자 태양신을 닮은 그의 후손이었다. 일단 그 자리에 앉고 나면, 누구도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기다리자.’

그의 긴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당장은 몸을 사리며 즉위를 기다릴 것이다. 모두와의 관계를 적당히 유지하면서. 그리고……

‘때가 되면, 모두를 쓸어버리리라.’

어두운 방 안에서, 붉은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싸늘하게 빛났다.

* * *

“비체 영지의 준비는?”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에게 물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원활합니다. 최대한 많은 인원을 동원하되 지나친 주의를 끌지 않도록 이런저런 위장을 시켰습니다. 일부는 곧 수도에 도착할 겁니다.”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가오는 패리스의 즉위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 황제, 패리스, 페트라, 모두의 명운이 걸린 날이다. 아폴로니아는 의심을 사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많은 인원을, 그중에서도 검이나 활을 쓸 수 있는 인원을 동원하고자 했다.

“대공령도?”

아폴로니아가 문득 생각난 듯 다시 물었다. 황궁을 떠났던 카엘리온은 최근 직접 대공령에 내려가 즉위식에 참석할 인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여기사들을 많이 투입했으니 위장에는 도움이 될 듯합니다. 패리스와 황제는 여인을 보고 기사일 거라 잘 짐작하지 못하니까요. 사병들의 배치도 전하의 명령에 따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사의 투입…… 네가 생각해 낸 거지?”

유리엘은 대답 대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단신으로 검을 쓰는 것에 익숙한 그는 간혹 전략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적에 대한 파악도 치밀했고, 그 점을 유리하게 이용할 줄도 알았다.

제국에서는 전반적으로 여인의 지위를 남자와 완전히 동등하게 보지는 않았다. 그래도 선황 때에는 황실 기사단에서 유능한 여기사들을 간혹 볼 수 있었는데, 가이우스 등극 이후에는 여기사가 황실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귀족들의 사병 중에는 간혹 이름난 여기사들이 있었고, 대공령에는 그 수가 유난히 많았다.

“리페르 가문의 고질병 같은 거지.”

아폴로니아가 냉소를 띠고 말했다.

리페르 가문은 오래전부터 유난히 남녀의 역할을 엄격히 구분하는 전통을 가졌다. 가문의 구성원 모두가 리페르의 영광을 위해 일생을 바치도록 교육받았지만, 직접적인 공로를 통해 그 이름을 높이는 것은 남성들에게 주어지는 임무였다.

“고모님은 예외라고 봐야 하려나, 아니면 병폐의 중심이라고 봐야 하려나.”

그녀는 어떤 사내보다도 출중한 능력을 가진 페트라를 떠올렸다. 다른 리페르의 여인들과 같이, 페트라는 가이우스의 출세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본인이 가진 능력과 무관하게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페트라 리페르는 황제와는 조금 다릅니다.”

유리엘의 말에 아폴로니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두 사람은 리페르 가문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유리엘이 페트라를 콕 짚어 황제와 비교하는 일은 드물었다.

“무슨 뜻이야?”

“여인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받아들이지만, 여인의 능력 자체를 경시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는 먼 기억을 회상하고 있는 듯 했다.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이 어디서 왔는지를 떠올렸다.

“리페르 일가의 전통이 있으니 여기사를 등용하지 않았지만, 음지에서 활동하는 살수 중에는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오래전의 일이라 잊고 있었지만 그는 사피로의 늑대, 리페르 가문 휘하의 살수였다. 그의 바다빛 눈동자가 평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아폴로니아는 문득 그를 스쳐 갔던 사람들이 궁금했다.

“너는…… 암살보다는 잠입을 많이 했다고 했지.”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리엘이 자주 언급하지 않는 과거를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사피로 밑에서 한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다른 가문으로의 잠입이고.”

유리엘이 말했다.

“또 하나는 경쟁 집단의 제거였습니다. 사피로는 공작가의 이익보다는 사리를 챙겼으니까요.”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아는 사실이었다.

“사피로의 수하 중에도, 경쟁 집단에도 여인들은 있었습니다. 황제는 그렇게 구체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공작 부인은 그 점을 잘 이용했죠.”

그가 말을 이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푸른 안광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여인들은 눈속임에 유리합니다. 상대를 쉽게 방심시킬 수 있으니까요. 현명한 자라도 연약해 보이는 정부가, 어려서부터 봐 온 유모가 자신을 위협할 거라고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서 나온 생각이야? 이번에 대공령의 여기사들을 시녀로 위장시켜 데려간다는 게?”

아폴로니아가 감탄과 황당함이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세상에, 리페르에서 나온 전략을 황제에게 사용한다니.

유리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모든 전략은 응용에서 나온다고 배웠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폴로니아를 향하는 눈빛은 다시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고모님의 전략은 응용할 만하지.”

아폴로니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 유리엘의 과거에 빠졌던 그녀의 사고는 다시 평소처럼 돌아와 상대를 분석하고 있었다.

“리페르 백작가를 공작가의 지위에 올려놓은 것도 결국 그 사람 덕이니까.”

“계략에 무척이나 능한 자입니다.”

“다른 것도 있어? 하나 더 말해 줘.”

아폴로니아가 묻자 유리엘은 그녀의 호기심이 재미있다는 듯 순순히 대답했다.

“경쟁 가문의 기밀문서를 훔쳐낼 때면 문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리죠. 그 문서가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며, 곧 누군가가 잠입할 것이라고요. 그럼 이 정보를 들은 자는 문서의 위치로 가서 그 안전을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미행했다가 시기를 보아 훔쳐 낸다는 거구나. 고모님다워.”

아폴로니아가 약간의 감탄을 섞어서 말했다. 유리엘이 말한 것과 같이, 페트라는 계략의 달인이었다.

“공작 부인의 머리에서 나왔고, 사피로가 흔히 쓰던 방식입니다. 물론…….”

유리엘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요즘은 그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황궁을 자기 집처럼 누비고 다니던 페트라 리페르는 이제 궁 안에서 마주치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몇 달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궁을 출입하는 것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상단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일전 신상품 출시 기념회에서 공개적인 모욕을 당한 후 루완 상단은 진출한 모든 업계에서 큰 타격을 입었으나, 아직 유의미한 자본을 거래하고 있었기에 황제에게 관련 보고를 해야 했다.

루완 상단이 채우지 못한 빈자리는 자연스레 이데나 상단의 것이 되었다. 패리스의 즉위를 기념해 가치를 상정하기도 어려운 찬란한 금은보화를 선물로 보낸 아일린 이데나는 대면한 적도 없는 황제의 소중한 측근으로 떠올랐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중립 귀족들은?”

“말씀하신대로, 패리스와 잘 지내는 척을 하고 있습니다.”

“배신할 가능성은?”

유리엘이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대며 다시 한 번 웃었다. 그의 입매가 올라감과 동시에 눈꼬리가 접히고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조금 전에 보였던 날카로움은 어디 갔는지, 그는 유난히 소년처럼 보였다.

“없습니다. 패리스 같은 자를 모시기 위해 제국의 반역자가 될 자들은, 그중에는 없으니까요.”

아폴로니아가 손을 뻗어 유리엘의 머리를 쓸었다. 언제나처럼, 그는 눈을 감고 머리를 숙여 주었다.

한참 그를 쓰다듬던 아폴로니아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넌 궁금한 것이 없어?”

유리엘은 그녀의 수많은 질문에 다 대답해 줬지만 먼저 뭔가를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

“많죠.”

유리엘이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전하께서 어젯밤 잘 주무셨는지라든가.”

배시시 웃는 모습에 아폴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아니, 진지한 거.”

“지금처럼 중요한 때에, 전하의 건강한 수면보다 진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상하게 말이 되는 논리였다. 아폴로니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유리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제 많이 못 잤으니 지금 조금만 잘까.”

아폴로니아가 반쯤 눈을 감으며 말했다. 할 일이 많았지만 유리엘의 어깨는 편안했고, 그에게서는 언제나처럼 달콤한 향이 났다. 긴장과 피로가 한순간에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폴로니아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시 쉴 생각이었…….

“저 왔어요!”

1초나 눈을 붙였을까, 서재 문이 열리고 에반젤린이 뛰어 들어왔다.

“전하께서 쉬고 계십니다.”

유리엘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그녀는 그다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아폴로니아가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고개를 들었다.

“아냐, 이제 일어날래.”

“잠이 부족하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아폴로니아의 머리를 다시 제 어깨에 기대 보려던 유리엘의 손은, 아폴로니아가 휙 하고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허공에서 헤매야 했다.

“잠이 정말 부족한 건 이쪽인 걸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눈 밑이 퀭한 것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잠을 못 잤어?”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에반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날개원숭이와 외눈까마귀 몇 마리가 한꺼번에 알을 낳아서요. 겹치는 건 피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에반젤린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은 어미가 품을 텐데 뭐가 걱정이지?”

“품긴요. 외눈까마귀는 저한테 각인을 시켜야 하니까 제 책임이고, 날개원숭이는 원래 알을 낳기만 하고 품지 않아요. 알아서 크라는 거죠.”

울적한 목소리까지 울적한 채였다.

“게다가 날개원숭이들은 부화할 때 곁에 없으면 순식간에 혼자서 1차 성장을 마쳐 버려요. 그 때 옆을 지키고 있지 않으면 길들이기도 어렵고…… 게다가 옆에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습성도 있거든요.”

“닥치는 대로?”

아폴로니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먼저 자란 새끼가 나머지를 잡아먹으니까요. 형제도 먹고 외눈까마귀 알도 노려요. 그냥 본능이 먹보인 거죠. 루벤은 자기 형제를 다섯이나 먹었어요.”

에반젤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놀란 아폴로니아와 달리 그녀는 애완동물들의 잔인한 습성에 대해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피곤할 뿐.

“과자를 그렇게 많이 챙겨 두는 이유를 알겠군.”

아폴로니아는 드디어 녀석들의 게걸스러운 식습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그거예요. 다 마물들을 위한 과자죠.”

에반젤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각났다는 듯 테이블 위의 과자로 손을 뻗어 한 움큼 자기 입에 털어 넣었다. 방금 전 자신이 한 말과 모순되는 행동에 유리엘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너무나 피곤해 보이는 에반젤린이 안쓰러웠는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앤눈까아이가 자아언…….”

“다 먹고 말해.”

에반젤린이 과자 부스러기를 이리저리 튀기며 말하자 아폴로니아가 그녀를 제지했다. 에반젤린은 입 안의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 태어난 외눈까마귀가 좀 더 자라면요, 전하께도 각인을 하게 한다고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요.”

아폴로니아는 카엘리온에게 각인했던 작은 새, 멜로디를 떠올렸다. 어떤 마물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대상의 소재를 파악하는 녀석이었다. 에반젤린은 과거에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까마귀를 골라 각인을 해 두었다고 말했었다.

“그래. 기다리지.”

그녀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적당한 때에 요청할 생각이었으나, 각인을 먼저 제안해 준 에반젤린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뭐, 한참 사고 치는 원숭이들에게 잡아먹히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에반젤린은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양손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양육의 부담이 그녀에게 상당히 큰 모양이었다.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직접 왔다면 중요한 소식이 있다는 거겠지?”

아폴로니아는 그녀의 일을 빨리 끝내 줄 생각으로 물었다. 물론 에반젤린으로부터 기다리는 소식도 있었다.

“보고할 건 있는데, 음…….”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며 말했다.

“아모레타의 일은?”

“원하셨던 대로 됐어요. 패리스도 결국 포트러스를 포기하고 중립 귀족들과 적당히 관계 유지를 하고 있고요.”

“본인은?”

“본인도 원하던 대로 됐죠. 사라지고 싶다고 했으니까.”

에반젤린이 짧게 대답했다. 무심한 평소의 모습과 달리 타인에 대한 약간의 안타까움이 보였다.

“그럼 그 일은 됐어.”

아폴로니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일도 있긴 해요. 있긴 있는데…….”

에반젤린이 적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머뭇거렸다. 어딘가 무언가 잘 안 풀려서 답답한 표정이었다.

“페트라에 대한 일이군.”

에반젤린이 아폴로니아를 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해 줘.”

에반젤린의 입술이 달싹거렸다가 멈추었다. 그녀는 유리엘을 보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에반젤린이 무슨 말을 꺼내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워낙 비밀스러운 것이라 카엘리온과도 상의한 적 없는 주제였다.

“사틴 아리에타에 대한 것이라면 유리엘도 알아도 괜찮아. 이미 내가 얘기했어.”

사틴 아리에타가 죽은 경위에 대한 소식, 정확히는 누가 그녀를 죽게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 즉위식이 겨우 한 달가량 남은 상황에서 아폴로니아가 가장 기다려 왔던 정보였다.

“그래서, 결론이 뭐지?”

“결론이 뭐냐 하면…….”

에반젤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시작했다.

“심증은 짙지만, 물증을 못 찾겠다는 거예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무언가 자신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폴로니아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슨 뜻이지?”

에반젤린은 대답하지 않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에반젤린.”

아폴로니아가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말에 다시 정신을 차렸는지, 에반젤린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입을 뗐다.

“두 가지 방법으로 찾아보았어요. 첫째는 사틴 아리에타를 중심으로, 그녀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이 있는가. 둘째는 리페르 공작 부인이 그때 무슨 일을 꾸몄었는지, 그 사람의 수하 중 그 때의 일을 알 만한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사틴 아리에타를 아는 사람은 그 수가 아주 적었고요, 황제가 그 사람을 어디에 숨겼는지까지 알았을 법한 사람은 더더욱 없더군요. 당시 같이 숨어서 패리스를 돌보던 유모가 살아남은 모양이지만…… 그 사람은 오히려 몸을 던져서 사틴을 구하려고 했던 모양이고요.”

에반젤린이 손으로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고모님은?”

“공작가의 내부 문서까지 뒤져 가면서 찾아봤어요. 전하 말씀처럼 황실 기록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으니까요.”

에반젤린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당시에 리페르 가문은 지금처럼 대단하지 않아서, 가주를 배신해 가면서 페트라 리페르를 위해 일처리를 할 법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죠. 눈에 띄는 점은…….”

에반젤린이 아폴로니아의 눈치를 보았다. 아폴로니아는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공작 부인과 가장 가까웠던 한 명, 공작 부인이 어렸을 때부터 그 사람만을 모셨던 하인이 얼마 후 실종되었다는 거예요.”

아폴로니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

그녀는 소파에 기댔던 몸을 반쯤 일으켜서 에반젤린과 시선을 맞추고 물었다.

“가이우스 리페르가 황실로 들어오기 직전에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에반젤린이 있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심증이 짙다는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만약 모든 것이 페트라가 꾸민 일이라면, 그녀는 제 오라비가 사틴의 죽음을 그냥 잊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황실의 권력을 등에 업은 순간부터 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 연인의 흔적을 찾았을 테니까.

물론 그는 친동생을 의심할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트라는 옅은 가능성에도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기록을 지우고 흔적을 없앴어도 불안했던 그녀가 그 심부름을 해 주었던 하인을 제거했다는 추측은 이치에 맞았다.

“……그래서 심증이 있고 물증이 없다는 거군.”

“맞아요. 유일한 증인이 20년도 더 전에 실종이 돼 버렸으니까요.”

“죽었겠군.”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페트라는 자신의 깊은 비밀을 아는 자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사체가 발견되는 것도 위험하다고 판단했기에 그들의 몸은 바다 밑바닥 같은 곳에 버려졌다. 공식적으로는 실종 처리가 되었지만.

“살아 있어요.”

에반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확신이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물 중에 그걸 구분하는 녀석들이 있어요. 누군가의 소지품을 가져와 그 냄새를 맡게 하면, 죽은 사람일 때와 산 사람일 때 반응이 미묘하게 달라요.”

“그럼…… 고모님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도망쳐서 숨었다?”

“그렇다고 봐야죠.”

흔치 않은 일이지만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젤린이 살아 있다고 한다면 그는 살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답을 알 것 같은 질문을 에반젤린에게 던졌다.

“그의 흔적은?”

“……없어요. 전혀.”

에반젤린이 내뱉었다. 그녀는 말 중간중간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저도 몇 년 만에 처음이에요. 살아 있는 것이 확실한 자를 못 찾은 건. 마물을 포함해서 ‘마일론의 눈’ 전체를 동원해도 없어요. 부인도, 자식도 아직 리페르 영지에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 정보원을 붙여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돼 있어요.”

그녀는 변명처럼 몇 마디를 덧붙였다.

“20년째 외출도 거의 하지 않으며,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지내고 있다는 거죠. 외톨이 짐승처럼.”

아폴로니아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사틴은 페트라 때문에 죽었다. 이 점에 대해서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상황을 다르게 볼 것이다. 아무리 지금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졌어도 24년 전의 페트라는 그의 하나뿐인 동생이고 충성스러운 가신이었으니까.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20년 동안 인간다운 삶을 포기했다?’

에반젤린의 설명은 어딘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대체 누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20년이 넘은 일 때문에 ‘마일론의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 숨어 버렸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처음이라면 몰라도, 도피한 지 10년, 20년 동안 별일이 없으면 긴장은 풀어지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페트라가 무서워도, 그녀를 벗어난 후 그 오랜 세월이 가도록 짐승처럼 지냈다는 건 이상했다.

자의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타인의 감시가 있었다면 모를까.

‘타인의 감시? 그 말은…….’

순간 다른 추측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아폴로니아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아니야.”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러자 에반젤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은 도피한 게 아니야.”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유리엘이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고모님이 그 사람을 감추어 둔 거야. 그가 함부로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에반젤린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위험한 비밀을 안고 주인을 배신한 자가 있으면.”

말을 잇는 아폴로니아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났다. 그 안의 황금빛이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밝았다.

“고모님이 그 가족을 가만히 둘 리가 없으니까. 말하자면…….”

그녀는 다시 유리엘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소년 같은 오늘의 유리엘은 몇 년 전 그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가 실종된 지 불과 며칠 만에 사피로는 죽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리페르 영지에 계속 살고 있는 그들은 페트라의 인질이야. 그 하인을 짐승처럼 가두고 감시하기 위한 수단.”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에반젤린도, 유리엘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죽이는 대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죽은 듯이 살도록 안배했다는 말씀이시군요.”

잠시 후 조용하던 유리엘이 입을 뗐다. 아폴로니아의 추측에 동의한다는 듯, 그의 입매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죽이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지. 보기 드문 한 가닥의 온정이었거나, 아니면 죽여서는 안 되는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몰라. 중요한 건 그자를 어떻게 찾아내느냐겠지.”

그녀의 시선이 에반젤린을 향했다. 멍하니 아폴로니아의 추측을 듣던 에반젤린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저로서는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했어요.”

그녀는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얼굴을 찌푸렸다. 스스로의 실패가 무척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공작 부인 본인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것 말고는 딱히 더 생각나는 방법이…….”

에반젤린은 ‘잡아다가 고문하는 것’이란 말을 하며 아폴로니아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 게 가능했으면 애초에 그 하인을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잖아.”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그녀는 실망한 듯 한숨을 쉬었다.

“공작 부인이 친절하게 위치를 알려 주면 모를까, 저는 정말 모르겠는 걸요. 머리를 더 굴리기보다는 잠을 자는 게 낫겠어요.”

에반젤린은 투덜거리며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이제 포기했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아폴로니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게 하면 되겠네.”

“네?”

그녀의 말을 들은 에반젤린이 감았던 눈을 떴다.

“고모님이 위치를 알려 주면 돼.”

아폴로니아가 작게 미소 지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유리엘과 아폴로니아의 눈이 다시 한 번 마주쳤다. 그는 순간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뒤늦게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그렇군요.”

유리엘이 중얼거린 말을 들은 에반젤린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아니 나는 농담이었…….”

“알아. 하지만 나는 아니야.”

아폴로니아가 다시 에반젤린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거짓 정보를 흘리면 돼.”

유리엘은 아폴로니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모든 책략은 응용에서 나온다고 말씀드린 것이 겨우 몇 분 전인데…….”

그가 감탄을 섞어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에반젤린이 방으로 들어오기 조금 전, 유리엘이 해 주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경쟁 가문의 기밀문서를 훔쳐 낼 때면 문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렸죠. 그 문서가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며, 곧 누군가가 잠입할 것이라고요. 그럼 이 정보를 들은 자는 문서의 위치로 가서 그 안전을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다만 찾아야 할 대상이 문서에서 사람으로 바뀐 것뿐이었다.

“어떤 거짓말을 하실지 정하셨습니까?”

유리엘이 물었다. 아폴로니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감탄과 애정이 섞여서 반짝였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타를 만나야겠다.”

에반젤린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폴로니아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서재 문을 열었다.

“좀 자. 네가 쓰러지면 곤란하니까.”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는 문 너머로 슥 사라져 버렸다.

“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에반젤린이 황당함을 떨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혹시 무언가 설명이라도 해 줄까 하는 기대에, 자신과 함께 남겨진 유리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나간 방향을 보는 그의 표정을 본 순간 에반젤린은 한숨을 쉬며 기대를 접었다. 아까까지 날카로웠던 그의 눈이,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달콤하게 풀려 있기 때문이었다.

‘하이고…… 내가 저 표정을 알지.’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것도 영혼까지 빼앗긴, 강렬하고 뜨거운 사랑.

‘와, 얄미운 인간들.’

실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 앞에서 연인에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쏘아 대는 유리엘을 향해, 에반젤린은 속으로만 투덜대며 천천히 방을 빠져나왔다.

깊은 사랑이나 공작가의 파멸, 응용한 책략이니 뭐니 해도 지금 그녀에게는 잠이 더 소중했다.

* * *

페트라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공작가 내 장미 정원 테이블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게 틀어 올린 검은 머리,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과 예리한 눈매, 꼿꼿한 자세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존재감을 크게 만들었다. 다만 찌푸려진 미간과 흔들리는 눈동자는 평소보다 불안해 보였다.

‘하아…….’

페트라는 자신만큼이나 완벽한 정원을 둘러보았다.

가을 초입이었으나 그곳의 장미는 여전히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흰 것은 순수하고, 노란 것은 화사하고, 붉은 것은…… 최근 꿈에서 계속 보는 핏빛이었다.

페트라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최근 계속해서 악몽을 꾸고 있었다. 매번 내용은 달랐지만 꿈의 끝은 죽음이었다. 꿈 속의 그녀는 낭떠러지에서, 교수대에서, 누군가의 검 끝에서 계속 죽음을 맞았다.

꿈속에서는 간혹 그녀가 과거에 제거했던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핏빛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예지몽을 믿지 않았다. 길몽이든 악몽이든 그저 평소의 심리를 드러내는 자신의 무의식일 뿐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최근 며칠 동안, 페트라는 불안한 기운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레아, 거기 있겠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두 걸음만 떨어져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저는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정원 어디에선가 나직한 대답이 들려왔다. 분명 사람의 언어였으나 마치 새소리나 물소리처럼 자연에 섞이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 어려운 그런 소리였다.

“너의 숙명을 알고 있겠지.”

“저는 리페르 일가와 운명을 함께합니다.”

“그래.”

페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원의 핏빛 장미가 여전히 거슬렸다.

“리페르가 사라지면…… 그때 너의 의무는 무엇이냐?”

그녀는 전날 밤의 생생한 꿈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것은.”

정원 어딘가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피의 복수입니다.”

“좋아. 앞으로도 잘 기억하도록 해.”

페트라가 말했다. 목소리는 질문이 없으면 나서지 않는지, 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참.’

페트라는 헛웃음을 웃었다. 참으로 쓸데없는 질문, 의미 없는 대화였다. 다양한 상황에 대비하는 평소의 습관이 무심코 튀어나온 것이었다.

가문이 사라지다니,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리페르의 영광은 영원할 터였고, 그 혈통은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영원히 흐를 것이다. 지금의 황제도, 곧 황위에 오를 패리스도 리페르의 사람이 아닌가. 황제가 잠시 그녀를 멀리한다 하여 달라질 것은 없었다.

페트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새삼 자신이 가이우스의 출세를 위해 해 왔던 일들이 머리를 스쳤다.

힘을 제외하면 자신보다 나을 것이 없는 그가 돋보이도록, 사내이자 장자로 태어나 당연한 듯 가주 지위를 물려받은 그가 빛날 수 있도록, 그녀는 때로는 물러서고 때로는 온몸으로 나서며 많은 것을 희생했다.

할 일을 한 것이라고는 하나 그 열매는 기대보다 달지 않았다. 가이우스는 페트라가 해낸 모든 일이 자신의 성공이라 여겼고, 그녀가 어찌할 수 없었던 실패는 페트라의 무능으로 치부했다.

‘상관없다.’

페트라가 고개를 흔들어 불안함을 떨쳤다. 어차피 이제 황제가 되는 것은 패리스였다. 가이우스는 페트라를 멀리했지만 패리스까지 그럴 이유는 없었다. 가레스는 그의 친우이자 혈연이었고, 패리스의 몸에 흐르는 것도 결국 리페르의 피였다.

공작가는 여전히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가이우스의 신뢰도 곧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가이우스가 이기적이라 해도, 결국 그는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페트라가 아니면 과연 그가 누구와 정사를 논할 것인가?

사틴을 닮은 그 여자가 페트라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녀는 곧 코웃음을 쳤다. 황제의 정치적 파트너가 되기에, 그 계집은 배경도 지식도 한참 부족했다.

‘얼굴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하지만 페트라는 알았다. 사틴 아리에타를 닮은 그 얼굴이 황제에게 얼마나 의미가 큰지를. 사틴 아리에타를 향한 가이우스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자신이었다. 24년 전에 보았으니까.

지나가는 바람인가 싶었던 두 사람의 눈빛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누구도 막지 못할 기세로.

그리고 그들의 불꽃에서 생명이 잉태되어 가문의 명예가 훼손될 위기에 처했을 때, 페트라는 자신의 손으로 이를 짓밟아 꺼뜨렸다. 당장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가이우스에게, 배가 부른 채로 식을 치를 수는 없으니 출산 전까지만 사틴을 어디론가 숨기라고 설득한 것이다. 출산 후에 두 사람을 갈라놓을 계획을 품고.

그 후 하늘이 도왔는지 죄인의 신세가 된 사틴을, 페트라는 익명의 밀고를 통해 처리할 수 있었다. 리페르의 새로운 기둥이 되어 줄 패리스만을 남긴 채.

사틴은 영지민들 사이에서 한때 철없던 젊은 영주의 사랑을 받았던 순진한 소작농의 딸 정도로 기억되었다가,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혔다. 그 후 페트라는 엘레니아 황녀를 이용해, 패리스와 가이우스를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려 주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사틴을 잊고 살았다. 세타를 보기 전에는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 어디서 그런 사람을 구해 와서는.’

페트라가 이를 갈았다. 그녀는 세타를 황제에게 진상한 장본인, 아일린 이데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치밀한 여자였다. 황제의 기호며 취향을 파악하다가 수십 년 전 첫사랑의 외모까지 캐낸 걸 보면. 덕분에 아일린 이데나는 루완 상단을 거의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 빈자리까지 꿰차지 않았나.

‘그 계집이 시작이었구나.’

그랬다. 페트라와 황제가 멀어진 것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은 그녀였다. 얼굴도 모를 그 증오스러운 계집. 세타를 들여보내고, 루완 상단의 비밀을 캐내고, 페트라를 능가하는 자금을 대어 황제의 마음까지 건드린 사람.

그 계집이 밟아 온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거슬렸다.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페트라를 노린 것처럼, 몇 년 사이에 페트라의 것을 조금씩 잠식해 나갔다. 재력도, 지위도, 심지어는 황제의 호감까지.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상대는 페트라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페트라는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부인.”

익숙한 목소리가 페트라의 사념을 깨뜨렸다. 고개를 들자 남편인 루이스 리페르 공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가실 시간…….”

“압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 일어섰다.

“폐하를 뵙고 오겠습니다. 그사이에…….”

그녀는 문뜩 최근 쉬지 않고 바르탄 지역 도박장에 출입하는 아들을 떠올렸다. 한심한 큰아들은 패리스와의 친분을 가지고도 그녀를 돕지 못하고 있었다.

“가레스를 찾아 놓으세요. 한심하게 도박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교육하세요.”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페트라는 빠르게 돌아서서 정원을 빠져나갔다.

24년 전에도, 지금도, 그녀는 뼛속까지 리페르의 딸이었다. 공작가라는 명예, 넘치는 재력과 황실 다음 가는 권력, 이 모든 것은 가문의 이름으로 유지되어야 했다. 그것이 페트라의 보람이고 삶의 이유였다.

유순한 남편은 그를 위한 훌륭한 수단이었고, 큰아들은 그녀의 욕망이 투영된 대상이었다.

* * *

거의 한 달 만에 방문한 황제의 서재는 전보다도 새로워져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시종은 언제나처럼 페트라를 그곳으로 안내하고는 문을 닫았다. 다만 그의 말은 미묘하게 짧았고, 인사는 전만큼 깊지 않았으며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무뚝뚝했다.

페트라는 속으로 그 시종의 이름을 기억해 두면서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황금빛이 도는 찻물은 향긋했으나, 예민한 그녀의 혀에는 전과 다른 맛이 느껴졌다. 시종은 더 이상 황궁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차를 페트라에게 내어 주지 않았다.

‘건방진…….’

시종을 불러 매질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했다. 이성이 돌아오자 페트라는 분노보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시종이 무슨 힘이 있어서 그녀를 함부로 대하겠는가. 황궁 내 모든 사용인의 태도는 결국 황제의 태도였다. 황제는 페트라를 멀리할 뿐 아니라 무시하고 있었다. 기다린 지 반 시간이 되도록 황제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페트라는 표정을 침착하게 유지하면서 테두리가 황금으로 장식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어쨌든 오늘은 황제를 대면할 것이다. 패리스의 즉위식이 얼마 남지 않은 이상, 황제도 리페르 가문을 완전히 모르는 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그를 만나면…….

“오래 기다리셨군요.”

서재의 문이 열렸다. 귓가에 들린 목소리는 황제의 그것이 아니었다. 페트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죄송해요. 폐하께서 지금에서야 제게 가 보라는 말씀을 하셔서.”

고개를 들자 익숙한 곱슬머리와 환한 미소가 보였다. 24년 동안 잊고 지냈었던, 그러나 최근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는 그 얼굴이었다.

“……왜 네가 왔지?”

페트라가 물었다. 조금 전 엄습했던 불안감 때문인지 의도보다 목소리가 더 날카롭게 나왔다. 그러나 세타는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말씀드렸다시피, 폐하의 명입니다. 조금 전 오수에 드셔서 직접 만나기 어려우니 대신 서류를 받아 놓으라는 전갈이에요.”

페트라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제는 대면조차 허락해 주지 않았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어머, 차가 식었네요. 이걸로 다시 따라 드릴게요.”

세타는 천진하게 웃으며 가지고 온 주전자로 페트라의 빈 잔에 향긋한 액체를 따라 주었다.

“제가 즐겨 마시는 차랍니다. 한번 드셔 보세요.”

이 여자, 아니 이 출신 모를 하찮은 시녀가 따라 준 차에서 풍기는 향이며 빛깔은 조금 전 페트라의 잔에 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이번에는 페트라도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세타는 여전히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 차림은 무엇이지?”

이윽고 페트라가 물었다. 예기치 못한 황제의 전갈 때문에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지만 세타가 입은 옷은 평소와 많이 달랐다.

무늬 없는 검은 드레스에 검은 브로치, 흰 레이스와 머리에 묶은 흰 공단 리본. 그것은 마치…….

“상복입니다.”

“상복?”

페트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황실에는 최근 죽은 사람이 없었다.

“가족이 죽은 것인가?”

“아닙니다. 직접 아는 사람이 아니라…….”

세타는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 무엇이지?”

“폐하의 소중한 분을 기리기 위한 차림입니다.”

몇 초 동안 정적이 흘렀다. 한 줄기 불안감이 페트라를 스쳤다. 세타는 말하지 않았지만, 페트라는 왠지 그 대상을 알 것만 같았다. 최근 그녀의 꿈에 등장하던 이름. 세타를 볼 때마다 연상되는 그 이름이 생각났다.

“사틴 아리에타를 아시나요?”

세타는 머뭇거리며 페트라를 바라보다가 결국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페트라가 눈을 크게 떴다.

“폐하께서 몽중에 가끔 부르시는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저를 부르시는 줄 알았지만…….”

세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워낙 진심 어린 표정을 지어서 그것이 가식인지 그저 순진한 천성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페트라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오래전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고 제게 말씀해 주셨어요. 엘레니아 황녀님을 만나기도 전에요.”

“……그래서?”

페트라는 얼굴에서 일어나는 작은 경련을 무시하며 물었다.

세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황제가 그녀에게 가장 비밀스러운 일까지 상의한다는 점은 과거에 확인한 바 있었다. 절대로 말하지 않을 사항이래야 패리스의 출생 정도일 것이다.

“저를 보면 그 사람이 자꾸 생각이 난다시며, 최근 그 기억이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고 괴로워하셨어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렵다는 듯, 세타의 말이 빨라졌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위험해진 그분을 피신시켰지만, 결국 끝까지 지켜 주지 못했다고 하시며…… 아마도 그분의 은신처를 누설한 사람을 끝끝내 찾지 못해 더욱 잊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말이 끝난 찰나 페트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세타는 보지 못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는 그분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상복을 입었죠.”

“……오래전의 일이다.”

페트라가 작은 목소리로 한 마디 내뱉었다. 세타는 그녀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눈물을 머금었던 그녀의 눈은 다시 희망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공작 부인 말씀대로, 그 일은 너무 오래되어 범인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죠.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말라니?”

“그분을 연상시키는 제 모습을 보며, 폐하께서는 한 가지 다짐을 하셨거든요.”

페트라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왠지 그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황위에 계시는 동안…….”

하지만 세타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온 힘을 다해 범인을 찾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범인을?”

세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의 은신처를 입 밖에 낸 자를 처벌해 사틴의 한을 풀겠다고 하셨어요. 그 사건과 관련된 증인을 찾을 방법이 있다고.”

“방법이라니?”

“폐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과거에는 조건 없이 믿었던 자들도…….”

그녀의 시선이 페트라에게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떠났다. 페트라는 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한 명 한 명 빠짐없이 의심할 거라고, 기필코 그자를 벌한 후에 양위를 하겠다고 하셨어요.”

페트라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서재에는 다시 한 번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은 가만히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윽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세타는, 페트라가 내려놓은 서류를 집어 들고는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럼, 편히 쉬다 가시기를 바라요, 공작 부인.”

흙빛이 되어 굳어 버린 페트라의 얼굴을 보며, 세타는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 * *

“어디에 다녀왔느냐?”

“아까 서재에 두고 나온 물건이 있어서요. 폐하께서는 어디 가시나요?”

침대에 앉아 있다가 자신을 보고 반갑게 일어난 황제에게 세타가 방긋 웃어 주었다.

“페트라가 나와의 대면을 청했다기에 가 보려는 참이다.”

황제도 자애가 가득한 미소로 대답했다.

“어머, 공작 부인이라면 아까 서재에서 마주쳤어요. 폐하께 드리라며 이 서류를 건네고 그냥 가셨어요.”

세타가 귀엽게 입을 가리며 말했다. 황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독대를 청하더니 그냥 갔다고?”

“폐하께서 요즘 바쁘신 것 같다고, 공작 부인도 시간이 많지 않으니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하셨답니다.”

애교 섞인 세타의 말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불쾌한 표정이었다. 세타가 전한 말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감히……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멋대로 나를 만나지 않고 돌아갔다? 황궁 살림에 대한 권한을 빼앗았다 하여 시위라도 하는 모양이지?”

그는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공작 부인께서는 원래 바쁘시잖아요.”

서류를 내려놓은 세타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에게 파고들자, 그가 녹을 듯이 웃어 주었다.

“……그래. 우선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지. 그런데.”

그가 한쪽 팔로 세타를 안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검은 옷은 뭐지? 청초하고 어울리긴 하지만…….”

“먼 친척이 죽었어요. 장례식에는 갈 수 없으니 오늘 하루만 예를 갖추려고 해요.”

세타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창틀로 다가갔다.

“하늘이 맑군요. 창을 조금 열어 둘까요?”

황제를 향해 미소 지으며, 그녀는 뒤에서 손을 움직여 작은 쪽지 한 장을 창틀에 올려 두었다. 조금 전의 상황이 간략하게 적힌 편지였다.

“왠지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은 날이에요.”

* * *

“오셨습니까, 공작 부인? 안색이…….”

“시간이 없다, 낸시.”

반갑게 자신을 맞는 중년의 시녀, 칼린 부인을 보고, 페트라는 손을 한 번 내저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칼린 부인은 곧바로 분위기를 읽고 조용히 곁으로 와 지시를 기다렸다.

“안톤을 옮겨야겠다.”

페트라가 시녀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칼린 부인의 눈이 커졌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지시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많은 의문이 스쳤지만 칼린 부인은 가장 중요한 질문만을 했다. 지금은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오랜 기간 페트라와 함께했던 그녀의 연륜이 페트라의 심경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언제 옮기라고 할까요?”

“오늘 중으로 전령을 출발시켜. 그리고 아주 비밀스럽게 내 지시를 전달해.”

페트라는 서류 한 장을 칼린 부인에게 쥐여 주며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조심스레 서류를 치맛자락 속으로 숨긴 시녀는 그날 밤 이를 봉인하여 다른 하인에게 전달했다.

그 후 서류는 봉인된 채로 차례차례 전달되었다. 성 밖의 어느 마부에게, 다시 어느 상인에게, 또다시 어느 심부름꾼에게…….

너무나 많은 사람을 거쳤기에 당사자들 중 누구도 그 행방을 알기 어려워질 무렵, 그 서류를 든 한 어부가 숲속 폐가를 방문했다. 수도와 한참 떨어진 해안 마을에서의 일이었다.

쾅쾅쾅!

어부가 주먹으로 폐가의 문을 두드렸다.

“이보시오! 이보…… 하, 내가 말을 말지, 돈 몇 푼 받자고 답답한 심부름을…….”

폐가의 주인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어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사람인지 짐승인지도 모를 그자는, 낮에는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몇 초 더 기다려 보다가 손에 든 종이를 문틈에 끼웠다. 어차피 이곳까지 와서 종이를 훔쳐 갈 사람은 없었다. 밤이 되면 집주인은 어슬렁어슬렁 문까지 와서 편지를 찾아갈 것이다.

“난 할 일 다 했소.”

어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른 새벽이었다.

끼이-

인적이 없는 그 폐가 위에서, 커다란 갈색 날개원숭이 두 마리가 검푸른 보호색을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리페르 공작가에서부터 몇날 며칠 동안 긴 비행을 했던 녀석들은, 드디어 일정이 끝났다는 기쁨에 공중에서 몇 바퀴나 회전했다.

몇 시간 전에 문틈에 끼워졌던 편지는 어느새 집 안으로 빨려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폐가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그곳을 다녀간 다른 사람도 없었다.

폐가는 그 편지의 종착지였다. 즉, 긴 비행의 종착지인 셈이었다.

끼이-

한참을 기뻐하던 중, 덩치가 큰 한 마리가 동료를 향해 한 번 울더니 몸을 돌렸다.

목적지를 찾았으니, 이제 주인에게 보고할 시간이었다.

* * *

“세드릭은 싫대요.”

에반젤린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아니, 라잔에 있는 남동생에게는 부탁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아폴로니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돕고 싶었는걸요. 혹시라도 잘못되면 패리스는 저를 데려다가 어디 묻어 버릴지도 몰라요. 동생이라는 게 누나의 안위는 신경도 안 쓰다니. 내가 누구를 돕다가 여기로 온 건데.”

그녀는 막 라잔의 왕세자로부터 편지를 받은 참이었다.

얼마 전 에반젤린은 꽤나 의욕적으로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 너도 즉위식에 초대되었으니, 비에른의 국왕 부부처럼 적극적으로 사람을 데려와 아폴로니아를 도와 달라고 요청했었다.

아니, 요청이라기에는 좀 단순하고 험했다. 장황하고 두서없는 상황 설명 뒤에 나온 맺음말은, ‘누나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까마귀 다섯 마리를 준비해 두었다가 모조리 너에게 각인시킬 것이다. 새 부리에 머리카락이 다 뜯기고 싶지 않으면 말을 들어라.’라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겨우 열아홉 살인 세드릭 왕세자는 만만치 않았다. 그는 간단하게 ‘싫은데.’라고 답장을 쓰고서는, 그 종이를 여러 겹의 실크에 곱게 싸고 리본까지 묶어서 화려한 선물과 함께 보냈다.

포장을 보고 한껏 기대했던 에반젤린은 아폴로니아의 방까지 그것을 들고 뛰어와 놓고 아폴로니아와 아드리안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편지를 뜯었다가 엄청나게 실망했다.

“세드릭은 원래 좀 계산적이에요.”

에반젤린이 댓 발은 튀어나온 입으로 말했다.

“남매가 닮았…….”

아폴로니아의 곁에 서 있던 아드리안이 중얼거리기 시작했지만 아폴로니아가 그녀를 쿡 찔러서 저지했다. 다행히 에반젤린은 투덜대느라 바빠서 그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전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죠. 아직 누가 이길지 모르는 싸움에 나라를 걸 수는 없다 이거예요.”

“패리스가 네게 해코지할 것을 걱정하지는 않고?”

“음, 그 자식은 저를 걱정하지 않아요. 오히려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 걱정하는 못된 습관을 가졌죠.”

그녀는 괘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머리는 꽤 좋은 편이에요. 전쟁 때 제가 패리스를 이겼던 것도, ‘마일론의 눈’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구체적인 판은 그 애가 짰으니까요.”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평범함과 거리가 먼 남매였다.

“하, 의리 없고 치사한 자식.”

에반젤린이 계속해서 툴툴거렸다.

“그 애는 원래 그래요. 내기를 하든, 승패를 점치든, 도박을 하지 않아요. 확실한 것에만 투자하는 겁쟁이 같은 놈이죠.”

“현명한 국왕이 되겠군.”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반젤린은 못내 아쉬운 듯 ‘싫은데.’라고 적힌 종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결국 구겨서 바닥에 던져 버렸다.

“……며칠이 지났지?”

에반젤린을 바라보던 아폴로니아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드리안이 그 말을 이해하고 대답해 주었다.

“딱 20일째예요.”

“아직인가.”

그녀는 페트라의 하인을 찾으러 갔을 마물을 생각하고 있었다. 즉위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제국은 넓으니까요. 하지만 즉위식 전까지는…….”

끼이이이이이이이-

에반젤린이 뭔가 말하던 중, 창밖에서 괴성이 들리더니 흉측한 갈색 물체 하나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류!”

갈색 날개원숭이를 본 에반젤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조금 늦게 녀석을 발견한 아폴로니아와 아드리안도 반색했다.

끼이이이이이-

‘류’라고 불린 커다란 암컷은 다시 한 번 괴성을 지르더니 창틀에 털썩 주저앉았다. 커다란 덩치는 날개를 접고 나서야 창 사이를 통과할 수 있었다. 녀석의 등 뒤에는, 중간에 붙었으리라 추정되는 루벤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어미가 퍽 반가운 모양이었다.

에반젤린과 류는 한참 동안 손짓과 이상한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을 주고받았다.

“뭐라고 하지?”

둘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그녀는 평소에 참을성이 많은 편이었으나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팔트 바다 근처에서 찾았대요.”

에반젤린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류를 위한 과자가 들려 있었다. 콰작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과자 가루가 휘날렸고, 그 사이로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간 녀석이 지키고 있으니 어디로 옮겨져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정말로 찾아냈다니.”

아폴로니아가 조금 멍하게 말했다. 류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게걸스럽게 과자를 입에 쑤셔 넣었다.

“고생했어, 류.”

에반젤린이 그녀를 쓰다듬었다. 류는 말만 하지 말고 먹을 것이나 더 가져오라는 듯 앞발을 휘둘렀다. 루벤도 덩달아서 발을 흔들어 댔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유리엘을 보낼 거야.”

아폴로니아가 씩 웃으며 말했다. 에반젤린이 따라서 웃었다.

“감시자들의 눈에 띄지 않게 납치해서, 고모님에게 보고가 들어가기 전에 아버님 앞에 데려가려면 유리엘이 직접 가야 해. 보름이 채 안 걸릴 거야.”

“그 사람이 말한 방법이 먹혔다니, 되게 신기하네요.”

그녀는 류의 과자를 빼앗으려고 손을 뻗으며 말했다. 커다란 날개에 얻어맞고 실패했지만. 아드리안이 피식 웃으며 과자를 더 꺼내 주었다. 그녀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밝았다.

“세타 님이 그러더군요. 가끔 거짓말은 과감할수록 잘 통한다고. 한번 믿기 시작하면 그다음에는 무슨 말을 해도 믿을 거라고요.”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교묘하게 이리저리 조종하는 일에 세타만큼 능한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시간을 두고 페트라와 황제의 사이를 조금씩 조금씩 벌려 놓았다. 거짓과 진실을 섞어서 비틀어 놓은 그 관계는 이제 완전한 파국을 맞을 것이다.

“아드리안, 유리엘이 돌아오면 너도 함께 가자.”

아폴로니아가 아드리안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어디를요?”

“어디긴.”

아폴로니아의 눈이 짙은 붉은색으로 반짝였다.

“페트라 리페르가 황궁에서 영원히 쫓겨나는 모습을 보러.”

* * *

“무슨 일이냐, 아폴로니아?”

황제가 물었다. 높고 사치스러운 황좌에 앉은 채였다.

“성문 앞에서 아버님을 뵙겠다고 애원하는 자가 있어서 데려왔습니다.”

아폴로니아의 말에 황제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아폴로니아 옆에 꿇어 엎드린 노인을 향해 있었다.

노인의 꼴은 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였다. 반쯤 세어 버린 머리는 산발에, 누더기를 기워 만든 옷은 찢어지고 더러운 채였다.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벌벌 떨며 바닥만 보고 있었다.

“출신도 모를 거렁뱅이를 내 앞으로 데려왔다? 조금 똑똑해졌나 했더니 넌 아직도 그 꼴이구나.”

황제가 아폴로니아에게 비아냥거렸다. 익숙한 장면, 익숙한 말투였다. 이 홀에서 그녀는 언제나 황제를 올려다보았고, 셀 수 없는 빈정거림과 호통을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늘 그런 것은 중요한 일이 될 수 없었으니까.

“아버님, 이자의 말을 들어 주세요.”

아폴로니아가 침착하게 간청했다. 그녀는 노인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에게 일어나라 지시했다.

“이자가 아버님을 안다고 해요.”

노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들썩거렸고, 다리 한쪽이 심하게 곪았는지 냄새까지 났다. 황제는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미천한 자가 나를 알아?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다시는…….”

“……을 뵙습니다.”

노인이 웅얼거렸다.

“뭐라고?”

“……리페르 백작님을 뵙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노인이 고개를 든 순간 그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안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안톤인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24년 만입니다. 백작…… 아니 폐하.”

이가 반쯤 빠져 버린 그는 황위에 앉은 옛 주인의 모습이 생소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살아 있었군.”

황제가 말했다. 오만과 냉정함이 몸에 밴 그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알아 왔던 하인의 귀환은 그에게도 신기한 일인 듯했다.

“예.”

“그간 어디에 있었나? 가족들은?”

“24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리페르 영지에 살아 있는 것으로 압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말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살아 있었다면 왜 그간 나타나지 않았나?”

노인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답답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페트라의 심복이 아니었나. 자네가 사라지고 페트라는 오랫동안 자네를 찾았어.”

뭔가 말하려던 노인의 얼굴이, 페트라의 언급에 파랗게 질렸다.

“그, 그것은…….”

“할 말이 있으면 하라.”

더듬거리는 그에게, 황제가 흥미를 잃은 얼굴로 명령했다. 잠깐의 반가움은 그의 짧은 인내심을 늘려 주지 못했다.

“폐하, 제가 떠났던 이유는…….”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자 황제는 반밖에 남지 않은 그의 치아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지루하다는 듯. 노인은 말을 계속했다. 그의 위태로운 목소리가 황제에게 전달되면서, 무료함과 답답함뿐이었던 황제의 표정이 조금씩 변해 갔다.

무료함에서 의아함으로, 의아함에서 그리움으로, 그리움에서 괴로움으로, 괴로움에서 충격으로, 충격에서 불신으로.

아폴로니아는 황제의 감정이 격정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지?”

황제가 불신 가득한 얼굴로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은 대답 대신 지난 24년간 받았던 편지 수십 통을 꺼내 보였다. 한 통 한 통을 열어서 그 내용을 확인하는 황제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천천히, 불신은 또 다른 감정으로 변해 갔다.

“……끌고 와.”

분노, 끝없이 타오르는 분노였다.

“예?”

대화가 잘 들리지 않는 거리에서 문을 지키던 시종이 물었다. 그러나 광기 어린 황제의 눈빛을 보고 흠칫 놀랐다. 황제의 얼굴에서, 짐승의 눈처럼 번뜩이는 황금빛 안광에서, 뒤틀릴 대로 뒤틀린 표정에서,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페트라 리페르를 내 앞으로 끌고 와!”

그의 목소리는 고요했던 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시종이 날 듯이 그곳을 빠져나갔다. 복도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사용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행여나 불똥이 튈까 고개를 푹 숙이고 움직이지 못했다.

당혹스러운 척, 그들과 같이 고개를 숙인 아폴로니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기다렸던 명령이었다.

황제는, 드디어 제 오른팔을 잘라 버리려는 것이다.

* * *

“한심하구나, 가레스.”

“어,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페트라의 냉정한 시선이 고개 숙인 아들에게 꽂혔다. 가레스의 왼쪽 뺨은 부어올라 있었다.

“아무리 가르쳐도, 너는 배울 줄을 모르는구나.”

“다, 다시는 도박장에 가지 않을게요! 그, 그저 이미 잃었던 것이 억울해서 본전만 찾으려고…….”

계속되는 추궁에 가레스가 고개를 더욱 깊숙이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의 변명은 페트라의 심기를 더욱 건드리는 듯했다.

“소공작이 잘못을 깨닫도록, 다락으로 데려가 매질해라.”

칼날 같은 목소리가 떨어지자 사용인들도, 가레스도 새파랗게 질렸다.

“부인,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공작이 나서며 그녀를 말렸다.

“가레스는 리페르 공작이 될 몸입니다.”

페트라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진작 가르쳤어야 했거늘…… 걷기 어려울 정도로 매질을 하면 자연스레 도박을 끊겠지요. 그럼 새 황제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도 배울 것입니다.”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공작의 뒤에서 머뭇거리던 니샤도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잘,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제발…….”

가레스는 진심으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도 도박장에 출입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 몇 번은 호기심이었고, 그다음은 많은 돈을 땄다는 우월감이었고, 돈을 잃기 시작한 후로는 억울함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바르탄 지역에서 아론 남작이 운영하는 도박장에 습관처럼 출입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제발, 어머니…….”

“끌고 가.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페트라가 애원하는 아들을 뿌리치고 돌아서려는 참이었다.

“고, 공작 부인! 공작님!”

칼린 부인이 황급하게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무슨 일이지?”

“화, 황실에서…… 폐하께서 부인께 입궁을 명했습니다.”

“갑자기?”

페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창문 밖에는 평소의 심부름꾼이 아닌 십여 명의 황실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고 하지?”

칼린 부인에게 경우를 묻는 페트라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렸다. 얼마 전부터 자주 느끼던 불안감이 다시 한 번 그녀를 스쳤다.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습니다. 그저 폐하의 명령이라고만…….”

페트라는 심호흡을 했다.

별일 아닐 것이다. 황제는 그저 얼마 전 그녀를 대면하지 못했던 일 때문에 다시 부른 것이리라. 명령이 없으면 입궁이 불가하니 명령을 내린 것 아니겠는가.

“공작 부인…….”

“마차를 준비시켜.”

페트라가 말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남편과 아들을 마주 보았다. 시종들에게 팔을 잡혀 끌려가기 직전이었던 가레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레스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혼자 입궁하는 것이 꺼려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자신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녀의 본능이 어떤 위기가 닥쳤다고 말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시종들이 그의 팔을 놓자, 가레스는 훅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 걱정 마십시오, 어머니. 제가 있으면 어머니께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고는 급히 페트라의 뒤를 따라나섰다.

저택 안에서, 남겨진 공작과 니샤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멍하니 두 사람을 배웅했다.

“소공작께서는 밖에서 대기하십시오.”

황제궁 앞 정원에 도착하자, 맨 앞에서 가던 기사가 말했다. 공손한 안내가 아닌 명령이었다.

“내가 누군지…….”

“가레스, 대기해라.”

페트라가 짧게 지시했다. 그녀는 가레스를 정원에 남겨 둔 채, 황제궁의 메인 홀로 향하는 복도를 통해 걸음을 옮겼다.

가슴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그럴수록 페트라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이 불안감을 떨치고 싶었다. 실체도 없이 무겁기만 한 감정은 사고에 방해가 되었다. 그녀는 빨리 황제를 만나 자신의 불안감이 기우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왔느냐, 페트라.”

메인 홀에 발을 들이는 순간, 페트라의 등을 타고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황좌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는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빛도 목소리도 얼음처럼 차가웠다.

끼이익- 쿵.

의아한 표정의 페트라 뒤로 홀의 문이 무겁게 닫혔다.

“반가운 얼굴이 찾아왔더구나.”

황제가 말했다. 건물 안에 한기가 차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도착하기 전 시종들을 물린 듯했다. 홀에는 페트라를 포함해 네 사람뿐이었다. 황제와 자신,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폴로니아, 그리고 그 옆에 꿇어앉은 것은…….

“알아보겠지.”

“……안톤.”

페트라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눈앞의 거렁뱅이는 그녀의 하인이었다. 그녀를 돌봤고, 그녀를 따랐고, 그녀를 위해 위험한 심부름을 해 주었던 사람.

종국에는 그가 아는 것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살려 두는 것이 위험할 정도로.

“페트라 님…….”

주름진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페트라와 마주친 그의 눈은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느냐?”

황제가 물었다. 그의 금안이 매섭게 빛났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페트라가 간신히 대답했다. 황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탕-

황제가 황좌의 손잡이를 내리치자 사방의 벽에서 메아리가 울렸다. 그는 잠시 이글거리는 눈으로 페트라를 쏘아보았다.

“안톤이 모든 것을 자백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너를 위해 무슨 험한 일을 했는지. 너의 상단을 위해 뇌물을 뿌리고, 경쟁자에게 해를 입히고, 서류를 위조하고…….”

황제가 그녀의 잘못을 하나하나 읊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누구도 황제가 분노한 이유가 그런 것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틴을 밀고했지.”

잠시 말을 끊었던 황제가 나직이 덧붙였다.

홀 안에 긴 정적이 흘렀다. 페트라는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몸의 떨림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그 말을 믿으십니까?”

페트라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분노에 찬 가이우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사틴을 밀고하라 지시한 것이 저였다면, 안톤의 목숨이 지금까지 붙어 있을 수 있습니까?”

페트라가 말을 계속했다.

“좋은 질문이구나.”

황제가 으르렁거리며 안톤을 쏘아보았다.

“네가 말하라.”

“예.”

안톤이 대답했다. 수십 년 만에 듣는 목소리는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저는 24년 전, 공작 부인의 명으로 반역자의 딸 사틴 아리에타를 고발하였습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병이 들었는지 또렷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폐하께서 권력을 잡을 무렵 공작 부인께서는 저를 죽이려 하셨으나 그리하지 못하셨습니다.”

“……왜?”

황제가 물었다. 짐승을 닮은 그의 눈은 페트라를 향해 있었다.

“제가 아는 비밀이…….”

“안톤!”

페트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노인이 곁눈으로 페트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지만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제가 아는 비밀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안톤, 경고하는데…….”

“닥쳐라, 페트라.”

황제가 호통을 쳤다. 페트라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한 번 더 말을 끊으면 네 혀를 잘라 버리겠다.”

황제가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손에 잡으며 말했다. 소름 끼치는 협박이었다. 분노로 가득 찬 황제의 눈빛에서, 페트라는 그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는 페트라 님을 오래 수행해 왔기에 저와 제 가족에게 닥칠 운명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전에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미리 친우에게 편지를 맡겨 두고, 제가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 페트라 님의 모든 비밀이 백작님, 아니 폐하께 전달되도록 조치해 둔 것입니다.”

페트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지금이라도 눈앞에 선 옛 하인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 싶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페트라 님은 그 사실을 알고 저를 사흘 밤낮으로 고문하셨습니다. 그 편지를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실토하라면서요. 하지만 저뿐 아니라 가족의 목숨까지 달려 있는 상황에서 입을 열 수는 없었습니다.”

먼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노인은 눈앞의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결국 저와 페트라 님은 합의를 도출했습니다. 제가 그분의 비밀을 지켜 드리는 대신 저와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으로요. 대신 저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숨어 살기로 했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24년 동안,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으며 지냈습니다. 유일한 소통은 페트라 님이 저를 통제하는 차원에서 보냈던 전갈, 그리고 제가 1년에 한 번 친우에게 보내는 간단한 생존 확인 소식이었습니다. 페트라 님은 이따금 저를 멀리서 감시하는 자들을 보내셨지만, 그들과 저 사이에 대화가 오가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안톤은 말을 맺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말을 듣는 페트라 또한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페트라의 감시하에 친우와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것이 가능했단 말인가?”

황제가 날카롭게 물었으나 안톤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전서구를 통했습니다. 이 방식은 저와 페트라 님이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합의안이었기에 페트라 님은 서신의 내용을 사전에 검토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를 허용해 주셨습니다. 전서구를 쫓아 친우의 정체를 파헤치는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시도가 확인되면 제가 아는 리페르 가문의 모든 비밀을 세상에 공개하겠다고 말씀드렸으니까요.”

페트라를 상대로 대담한 협상을 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노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에서야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황제가 물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안톤은 페트라가 들어선 후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겁에 질린 그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아폴로니아를 향한 것처럼 보였다. 아폴로니아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것도.

‘잘못 보았겠지.’

페트라는 그 와중에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는 자신이 황당했다. 지금은 아폴로니아 같은 하찮은 자에게 정신을 빼앗길 때가 아니었다.

“……편지를 맡겨 두었던 친우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제 목숨에 대한 담보가 없으니 나서지 않으면 어차피 죽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망설이던 안톤이 대답했다.

페트라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안톤은 치밀하고 독했다. 모진 고문에도 그는 그 친우라는 자가 누구인지 입을 열지 않았고, 결국 페트라는 그를 죽이지 못했다.

그것이 지금에서야 그녀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안톤이 대답하는 내내, 황제의 시선은 페트라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안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황제의 신뢰를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릴 방법이 필요했다. 물증이 없다면, 아직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폐하, 이자의 말을…….”

“안다. 너는 어떻게든 발뺌을 하려는 거겠지.”

페트라가 입을 열자마자 황제가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것은…….”

“봐라.”

페트라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황제가 품속에서 한 묶음의 편지를 꺼내 페트라에게 던졌다. 촤라락 소리와 함께 수십 장의 종이들이 허공에 뿌려졌다. 페트라의 호흡이 더욱 거칠어졌다.

“직접 보아라.”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중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자신이 안톤에게 직접 적었던 지시문이었다. 거처의 보안이 불안하니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그녀는 그 옆에 있던 다른 편지를, 그리고 또 다음 편지를 집어 들었다. 모두 한 문장이었고, 내용은 비슷했다.

‘생존 여부를 보고하라.’

‘이웃과 접촉할 시 아들은 무사하지 못할 것.’

‘연락 방식을 바꿀 것.’

페트라는 편지를 쥔 손을 떨었다.

어떤 인장도, 서명도 없었고 필체마저 평소의 자신과 달랐다. 편지를 발견한 것이 다른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부인이 가능했다. 황제만이 예외였다.

“너는 여러 종류의 필체를 사용하지. 그러나 나만은 네가 어떤 필체로 글을 쓰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황제가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지금 와서 발뺌하기에, 두 사람은 함께해 온 세월이 너무나도 길었다.

“이래도 네 결백을 주장할 수 있다면 해 보아라.”

황제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그의 눈에서 불같은 분노가 보였다.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거늘, 너는 나를 배신했다.”

빠져나갈 틈은 없었다. 순간적으로, 페트라는 사고가 완전히 멈춰 버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황제와 마주 보았다.

“하…….”

길고 긴 침묵 끝에, 페트라의 입이 다시 열렸다.

“하…… 하하하하!”

황제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터뜨린 것은 다름 아닌 실소였다.

“결백이라…… 제가, 제가 어떻게 결백한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황제가 이를 으득 갈았으나 페트라는 그 사실이 보이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고작 반역자의 딸을 고발한 것이 저의 죄입니까? 폐하를 그 자리에 올려 드리느라 했던 다른 일은…….”

“그 입을 다물어라!”

황제가 고함을 쳤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이 아폴로니아를 향했다가 다시 페트라에게 돌아갔다. 행여라도 반역이나 패리스의 출생에 대한 언급을 하면 안 된다는 경고였다.

아폴로니아는 그 눈빛을 읽었다. 그녀는 더욱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친절을 베풀려다 얼떨결에 아버지와 고모의 다툼에 휘말려 버린, 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가련한 황녀를 연기해야 했다.

“네가 충성할 대상은 나다. 가주인 나의 등 뒤에서, 내가 지켜야 한다고 했던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나에 대한 배신이다.”

“제가 충성할 대상은 바로 가문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페트라가 고개를 치켜들며 대답했다. 황제는 그 모습에 더욱 분노하며 눈을 부릅떴다.

“너의 가문은 곧 나다. 나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곧 리페르의 영광이다. 나를 보좌하는 것이 너의 의무야!”

“그러나 폐하의 행복이 곧 리페르의 행복은 아니지요.”

페트라가 받아쳤다. 그녀의 허리는 언제나처럼 꼿꼿했다. 황제가 이성을 잃을수록 그녀는 더욱 차분해졌다.

“가주가 일개 소작농과 놀아나느라 가문의 명예를 높이지 못하기에 올바른 방향으로 폐하를 보좌한 것뿐입니다.”

“감히!”

황제가 황좌의 팔걸이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는 배신감에 떨고 있었다.

“……사냥개가 주인을 무는 격이구나.”

“오만이십니다.”

페트라가 그 배신감에 불을 질렀다.

“가문의 모든 여인이 오직 가주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셨다니요.”

그녀가 냉정하게 말했다. 황제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고, 페트라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허탈했다. 그리고 한심했다. 평생 오라비를 보좌했던 그녀는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오만하고 감정적인 황제는 그녀를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는 페트라가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도,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페트라는 다시 한 번 헛웃음을 웃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참았던 말을 뱉어 냈다.

“저의 가문이 곧 폐하라고 하셨습니까? 폐하께서 제게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하셨습니까? 폐하야말로 제가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리페르의 장남으로 태어나 저를 동생으로 두지 않았다면 폐하께서 지금 그 자리에 계실 것 같습니까?”

그녀는 오랫동안 참아 왔던 말을 뱉었다.

“제가 사냥개라면, 제 주인의 이름은 가이우스가 아니라 리페르입니다. 그를 위해 폐하의 행복도 희생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황제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조금 전 페트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믿었던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장자로 태어나 일찍 가주가 되어 가문을 공작위까지 올려놓았던 그는, 리페르 가문이 자신과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가문은 자신의 휘하에 묶여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영원히.

그러한 생각을, 페트라가 면전에서 비웃은 것이다. 그는 페트라의 주군이 아니었다. 페트라는 그를 가문을 위한 도구라 칭하고 있었다.

그는 이를 꽉 깨물었다. 배신감과 분노, 증오가 뒤섞여 그를 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

“……너는 네 죄를 반성하지 않는구나.”

“벌하시지요.”

페트라가 일그러진 미소를 띠며 말했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그녀는 오히려 대담해졌다.

“못 할 것 같으냐?”

“글쎄, 이미 수배 중이던 죄인을 밀고한 것이 어떻게 죄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비릿하게 웃으며 아폴로니아를 힐끗 보았다.

“다른 죄를 물으신다면 기꺼이 자백하지요. 바로 이 자리에서, 아니, 필요하다면 다른 귀족들에게도 알리도록 하지요.”

황제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물러설 곳이 없어진 그녀는 황제를 협박하고 있었다. 과거 안톤이 페트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황제와 모든 것을 공유했다. 측근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그는 페트라에게 의지해 왔다. 때문에 그녀는 황제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았다. 과거도, 약점도, 한순간에 그와 패리스를 천국에서 지옥까지 끌어내릴 수 있는 비밀도.

황제의 시선이 아폴로니아를 향했다. 몇 걸음 뒤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깐 그녀는 위협과는 거리가 먼 딸이었다. 그러나 페트라가 사틴과 패리스의 관계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하면 멍청한 그녀조차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니, 필요하다면 다른 귀족들도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페트라가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끝내 죽이지 못한 카엘리온,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귀족들이었다. 명분이 갖춰지면 패리스를 칠 수도 있는.

황제의 황금안이 페트라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았다. 그러나 페트라는 그의 눈을 피하는 대신, 그와 똑같이 닮은 눈으로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네가…… 네가 감히 나에게…….”

그가 숨을 몰아쉬며 반쯤 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간악한 것. 불충한 것. 그는 눈앞의 동생을 죽이고 싶었다.

“……돌아가라.”

그러나 그는 알았다. 지금은 그렇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즉위식이 끝날 때까지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가 말을 이었다.

“패리스가 즉위할 때까지, 너와 너의 가족은 저택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이곳에서 나간 순간부터 내 눈에 띄지 말아라. 이는 황명이며, 어기는 순간 너의 가족 전부를 반역으로 처단할 것이다.”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나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도 마라. 너의 목숨 정도는 나의 손에 있으니까. 황제로서든, 선황으로서든 너 하나 죽이는 것이 어렵겠느냐.”

살기 어린 그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페트라는 한동안 황제를 쏘아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황제의 말을 따르는 것이 자신에게 최선임을 알았다. 지금으로서는 그녀에게도 다른 수가 없었다.

“다시는 황궁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돌아서려는 그녀의 등 뒤로, 황제가 서늘하게 덧붙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니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들오들 떠는 아폴로니아에게, 황제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예, 아버님.”

아폴로니아는 한 걸음 다가서며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 그려 넣은 화상이 황제의 눈에 잘 드러나도록. 그녀가 얼마나 무해한지를 황제가 잊지 않도록.

“오늘 들은 이야기는 전부 잊어라.”

황제가 말했다.

“패리스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오라비의 즉위식에 쓸데없는 말이 나오는 것을 바라지는 않겠지.”

그가 싸늘한 눈빛으로 아폴로니아의 표정을 훑으며 덧붙였다. 이해했냐는 의미였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버님.”

아폴로니아는 바닥에 꿇어앉으며 대답했다. 파르르 떨며 고개를 흔드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모든 것을 잊으려는 듯이 보였다. 조건 없는 순종, 평생의 유약함. 그것은 몇 걸음 뒤에 서 있는 페트라의 날카로운 눈빛과 대조되었다.

“……페트라가 누렸던 모든 권한은 너에게 있다. 즉위식 준비도, 황궁의 다른 대소사도 네가 맡아 처리해야 할 것이다.”

황제가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내리깔았던 눈을 살짝 올려 그의 표정을 살폈다. 황제의 얼굴은 싸늘했으나 살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리페르 공작 부인을 황궁 문밖까지 배웅해라. 네 눈으로 그녀가 나가는 것을 똑똑히 보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확실히 알려 주어라.”

두 사람을 지켜보던 페트라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아폴로니아를 향한 그 명령은 페트라에게 주는 메시지였다. 그녀의 지위는 이제 보잘것없는 아폴로니아와도 비할 수 없다고.

“황궁을 차질 없이 엄격하게 관리해야 할 것이다. 알아들었다면 지금 당장 페트라를 내 눈 밖으로 치워라.”

황제가 덧붙였다. 평생 타인을 짓누르는 것에 익숙했던 황제는, 아폴로니아를 이용해 페트라에게 최대한의 수치를 주려는 것이었다.

페트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오늘은 죽지 않은 것이 수확이었다. 이 정도의 오욕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덜덜 떠는 아폴로니아 따위는, 그녀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무릎을 굽혀 인사한 뒤, 다시 열릴 것 같지 않던 무거운 문 뒤로 걸음을 옮겼다.

“배웅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제궁의 복도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페트라가 말했다.

“황궁 문에서 시종이 대기하고 있으니 혼자 가겠습니다.”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녀가 아는 아폴로니아는 질문이 아닌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황명이니 바래다드리겠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는 페트라의 등 뒤로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페트라가 복도에 멈춰 서서 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아폴로니아를 보았다.

“황궁 문까지 동행할 것입니다.”

페트라는 귀를 의심했다.

아폴로니아가 대답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그 내용이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페트라를 놀라게 한 것은 그 목소리와 말투였다. 낮게 깔려 또렷하게 귀에 꽂히는 목소리. 당연한 듯 자신의 의견을 우선하는 태도.

부드러운 것 같지만 그 의도는 드러났다. 이는 마치…….

“부인과 그 가족들이 다시는 황궁을 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황궁의 문지기에게도 알려야 하니까요.”

하대였다. 아폴로니아는 동행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권이 페트라에게 없다고 통보하고 있었다. 윗사람의 입장에서. 페트라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히고, 그녀의 눈매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폐하께 임무를 하나 받았다고, 자신이 뭐라도 된 듯싶습니까?”

그녀가 날카롭게 물었다. 이글거리는 금빛 눈동자가 아폴로니아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페트라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아폴로니아 가까이로 다가섰다. 그녀의 귀와 자신의 입이 거의 닿을 때까지.

“옛날에 했던 말을 잊었나 보구나.”

페트라가 말했다. 아폴로니아가 팔을 뻗어 밀어내려 했으나 페트라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어깨를 아프게 잡았다.

“죽은 듯이 살라, 눈에 띄지 말라고 했었지.”

페트라가 나직하게 협박했다. 듣는 이에게 악몽을 선사할 정도의 서늘함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달라졌어도 상대는 아폴로니아, 유약하고 미련해 약혼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황녀였다.

페트라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일거수일투족 자신의 눈치를 보며 떨던 아폴로니아의 표정이 생각났다.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겁을 내며 물러설 줄 알았던 아폴로니아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뼛속까지 새겨서, 죽어도 지워지지 않을 교훈으로 삼았습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페트라의 귀 가까이에서 울렸다. 문득, 그녀는 작아 보였던 아폴로니아의 키가 자신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무슨…….”

페트라는 아폴로니아를 잡았던 손을 놓고 그녀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한 걸음을 뒤로 내딛었음에도 두 사람의 거리는 벌어지지 않았다. 페트라의 눈이 커졌다. 눈을 살짝 내리깔자 자신의 어깨를 단단히 잡은 아폴로니아의 손가락이 보였다. 조금 전 자신이 했던 것처럼.

“덕분에 고모님의 눈을 피해 지금껏 살아남지 않았습니까.”

지금껏 들었던 어떤 말보다 서늘한 한 마디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페트라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뭐?”

그녀는 자신을 잡은 손을 강하게 뿌리치며 물러났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보았다. 찰나였지만 페트라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폴로니아는 두 눈을 똑바로 들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폴론의 불꽃을 닮은 금적안은 페트라를 꿰뚫을 것 같은 안광을 뿜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아이의 눈을 본 것이 언제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17세 생일 전이었을 것이다. 팔에 커다란 화상을 입은 후로, 카엘리온이라는 강적이 떠오르기 시작한 후로 그녀는 페트라의 경계 밖에 있었으니까.

페트라가 기억하는 아폴로니아의 시선은 항상 아래를 향해 있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대등하게 마주 본 적이 없었다.

이 순간까지는.

“조심성 많으신 고모님,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느라 저를 잊으셨습니까?”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전달되었지만 페트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아폴로니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적…… 이라고.”

자신의 말을 따라 하는 페트라에게, 아폴로니아가 차가운 냉소를 흘리며 다시 물었다.

“루완 상단을 무너뜨리고, 세타를 아버님 곁으로 들여보낸 사람이 적이 아니면 무엇인가요?”

자신을 조롱하는 듯 살짝 접힌 금적안을 보며, 페트라는 순간적으로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텅 빈 복도에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들리는 것은 조금 거칠어진 페트라의 숨소리뿐이었다.

“아, 아일린 이데나……. 그 계집이…….”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페트라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심지어는 조금 전 황제 앞에 꿇어앉은 안톤을 봤을 때조차도 이렇게 당황한 적이 없었다.

“제가 아니면 누가 고모님을 그렇게 가까이서 지켜보겠어요?”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조소하며 물었다.

“저는 고모님의 가르침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답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조언뿐 아니라, 고모님이 밟아 오신 한 걸음 한 걸음이 제게는 훌륭한 교과서였으니까요.”

이제 페트라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아일린 이데나, 루완 상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치밀하게 따라 하고, 끝내 황제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무너뜨린 상단주. 세타를 진상해서 황제의 마음까지 빼앗아 간 사람. 그리고…….

“네가 이번 일을 꾸몄구나.”

페트라가 분노와 충격에 휩싸여 내뱉었다.

24년을 숨어 있던 안톤이 어디서 나타났겠는가? 깊이 숨긴 물건을 찾아내는 방법은 하나였다. 이를 숨긴 자를 자극해 위치를 파악하는 것.

그녀는 몇 주 전 세타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한 마디 한 마디 자신의 신경에 거슬리던 그녀의 말투,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고는 황제가 사틴을 찾고 있다며 겁을 주던 그녀. 그녀는 아일린 이데나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만 가지고 고모님을 어떻게 밀어내겠어요? 그보다 강한 무언가가 필요했답니다.”

“……폐하 앞에서 내 자리를 빼앗는 게 목적이었나?”

페트라가 물었다. 아폴로니아의 말이 옳았다. 수많은 적들 사이에서, 아폴로니아는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것이 이토록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오다니.

“……편하실 대로 생각하시죠.”

아폴로니아가 짧게 대답하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앞서 걷던 페트라를 스쳐 지나가더니, 다시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가시지요. 고모님은 더 이상 황제궁에 한시도 머물 수 없습니다.”

“폐하의 뒤에서 그 엄청난 짓을 했다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너라도 아무 일 없을 것 같으냐?”

페트라가 으르렁거렸으나 아폴로니아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버님이 아신다고요? 어떻게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고모님이 말한다 한들 아버님이 믿겠습니까? 아니.”

그녀는 다시 조금 전의 조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온 가족이 자택에 연금된 상황에서 고모님이 무슨 수로 그분을 독대하겠습니까?”

아폴로니아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말씀드리시지요. 저야 상단을 아버님께 바치면 그만이지만 고모님께서는 아버님의 눈에 띄는 순간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버린 페트라를 남겨 둔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시종 몇 명만 조용히 대기하는 황궁 복도에 아폴로니아의 발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드디어…….’

아폴로니아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표정도, 목소리도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9살 이후로 마치 시선이 고정된 듯 땅만 보면서, 그녀는 페트라를 마주 볼 수 있는 순간을 기다렸다. 오랫동안 두려워했던 그 냉정한 눈을 보며, 이제 당신이 나를 두려워할 차례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어떤 상상보다 강렬했다. 페트라는 이제 황궁에서 영영 쫓겨났고, 황제는 자신의 오른팔을 잃었다.

‘아드리안을 찾아야겠다.’

그녀는 황제궁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갈색 머리의 시녀를 떠올렸다. 페트라의 몰락을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은 자신뿐이 아니었다.

아폴로니아는 복도 끝까지 걸어와 황제궁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아드리안을 처음 만났던 곳, 작은 시녀가 페트라에게 얻어맞아 처참해진 얼굴로 서 있던 곳이었다.

이쪽저쪽을 살피는 아폴로니아의 눈에, 황궁 벽에 기대 있는 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드…….”

그녀를 부르려던 아폴로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드리안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작은 몸 가까이로, 익숙한 남자가 다가서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불쾌하고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설마…….”

두 사람은 다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드리안은 물러서려 했지만 여의치 않은 듯했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남자가 위협적인 주먹을 뻗었다. 주먹은 아드리안 바로 위 벽을 강타했다.

어디선가 보았던 모습이었다. 아폴로니아는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드리안 앞에 서서 그녀를 협박하는 남자는 가레스 리페르였다.

* * *

조금 전,

“대기해라.”

페트라가 짧게 명령하고 황제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따라가려던 가레스는 민망하게 멈춰 서야만 했다. 두 사람을 황제궁까지 안내한 기사들도 일이 끝났다는 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봐.”

그는 기사 한 명을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다소 불손했다. 최근 황실 출입을 하지 않아 어머니의 지위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지 못하는 그는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다시 물었다.

“안에 누가 있지?”

“폐하와 황녀 전하께서 계십니다.”

“아폴로니아가? 왜?”

기사는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황녀 전하이십니다. 말씀을 조심하시지요. 황실의 여인으로서 황궁의 대소사를 맡아 하시니 폐하와 함께 계십니다.”

가레스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성장하며 비대해진 그는 어린 시절에 비해 더욱 험악한 인상을 갖게 되었고, 그 위에 얼굴을 찌푸리기까지 하자 정말로 못난 얼굴이 되었다.

“그럼, 폐하와 황녀가 함께 앉아 어머니를 불렀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기사는 짧은 대답만 남기고 차갑게 돌아서서 가 버렸다.

‘괘씸한.’

가레스가 속으로 내뱉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의 어머니가 급히 소환된 자리에 하찮은 아폴로니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분 나빴다.

더군다나 황실의 대소사를 맡았다니! 이는 페트라의 일이었다. 아폴로니아 같은 미련한 계집이 그녀를 대신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황녀 전하는 무슨,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눈치만 보았던 아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빼앗을 수 있었고, 실제로 다 빼앗지 않았나. 그런 사람이 페트라를 내려다보고 있다니.

그는 최근 들어 귀족 친우들이 자신을 멀리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한때 그에게 잘 보이겠다고 알랑거리던 것들은, 몇 달 전 황제가 페트라를 ‘무능하다’며 공개적으로 질책한 날 이후 그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모든 것이 거슬렸다. 전과 달라진 그들의 태도, 자신의 지위, 조금 전 자신을 불손하게 대하던 기사의 말투까지도.

이상하게도 그 짜증은 머릿속에서 집약되어 한 사람을 향했다.

아폴로니아. 별것도 아니면서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계집. 조금 전 그 기사는 별것도 아닌 황녀를 위해 자신에게 말대꾸를 했고, 황제는 페트라가 하던 일을 그녀에게 주었다.

습관처럼, 그는 심술이 났다. 아폴로니아의 무언가를 빼앗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아니, 빼앗는 것이 아니라 망가뜨리고 싶었다.

문득, 어린 시절 그가 빼앗았던 아폴로니아의 백마가 떠올랐다. 끝까지 길이 들지 않았기에 그는 녀석의 다리를 부러뜨린 후 마물의 숲에 버렸다. 산 채로 잡아먹히도록.

그래, 바로 그런 것이 필요했다. 그때만큼 아폴로니아를 괴롭히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원 한쪽에서 황제궁 벽에 등을 기댄 작은 시녀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 아주 가끔이지만 생각났던 여자였다. 몇 년 전에도 예뻤고, 완전히 성인이 된 지금은 더욱 아름다워진 사람.

“아드리안.”

그가 나직하게 여인의 이름을 부르고는 입술을 핥았다. 망가뜨릴 대상을 찾았다. 가레스는 아드리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사람의 발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무척 오랜만이군.”

아드리안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이 빠르게 잿빛으로 변했다. 머리로 어떤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심장이 쾅쾅거리기 시작했다.

“……소공작님.”

“그래.”

그녀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곳은 리페르의 저택이 아니었다. 아무도 오지 못하는 사르비아 정원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도 5년 전의 기댈 곳 없던 소녀가 아니었다.

“소공작을 뵙습니다.”

아드리안이 벽에서 몸을 떼고 예를 갖추었다. 처음 한 마디와 달리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가레스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나름대로는 의연한 척하려 해도 그녀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위로 얄미운 아폴로니아의 얼굴이 겹쳐 보여 즐거웠다.

“아주 유명 인사가 되었더구나. 아폴로니아의 약혼자들이 너만 보면 파혼을 한다지? 예전에 내 앞에서는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네 행실이 볼만하구나.”

그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아드리안의 안색이 한층 어두워졌다.

“아폴로니아는 그런 너를 아낀답시고 계속 곁에 둔다지? 주종 두 명이서 대체 무슨 꼴인지…….”

“말씀 삼가십시오.”

한참 시시덕대던 가레스의 입이 벌어졌다. 방금 아드리안이 자신에게 뭐라고 한 것인가?

“방금 뭐라고…….”

“황녀 전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죄입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드리안의 호흡이 조금 더 빨라졌다. 그녀는 온몸이 긴장으로 굳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다가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후회할 겨를이 없었다. 가레스의 입에서 아폴로니아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불쾌함이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다.

“뭐…….”

가레스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곧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네가 미쳤나 보구나.”

그가 위협적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이제는 너조차 나를 무시하는 모양이지? 몇 년 전에는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으면서, 몇 년 전에는 내가 그 계집을 뭐라고 불러도 대꾸하지 못했으면서, 이제는 내가 하찮다 이거냐?”

비대한 몸에서 흉흉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아드리안이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애원하거나 비명을 지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레스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는 확실히 과거보다 하찮아 보였다. 덩치가 커진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물러서 주십시오. 저는 황녀 전하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싫다면?”

가레스는 나직하게 으르렁대며 오히려 한 걸음 다가섰다. 아드리안이 물러나려 했으나 등 뒤는 벽이었다.

“싫다면 어쩌려느냐?”

가레스가 비열하게 웃었다.

“……생각이 짧은 건 여전하시군요.”

“뭐?”

그가 누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어머니의 눈동자를 가졌으나 이상하게 탁하고 미련해 보였다. 서늘한 느낌의 페트라와는 다른 의미에서 소름 끼쳤다.

“이곳은 황제궁 앞입니다. 공작 부인을 데리러 간 것은 시종과 마차가 아닌 기사들이었고요. 상황을 아직도 모르십니까?”

다시 한 번, 말이 쏟아져 나왔다. 가레스는 여전히 위협적으로 서 있었지만, 아드리안은 말을 이을수록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좋지 않은 상황에서, 소공작님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녀가 가레스를 비웃으며 물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커다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이 보였다.

“……닥쳐라.”

“물러서십시오.”

“닥치라고 했다!”

쾅-!

가레스가 아드리안의 머리 위 벽을 주먹으로 치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아드리안의 작은 몸이 휘청였다.

“네가 옛날 일을 다 잊은 모양이다. 다시 한 번 알려 주면 기억에 새기겠지.”

그가 분노로 떨며 말했다. 아드리안을 보는 눈빛에 광기가 어렸다. 아드리안은 조금 전 사라졌던 공포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너무나도 가까웠고 근처에 시종들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웅웅거리고, 차분해졌던 몸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궁금하구나, 과연 너 따위가 어떻게 되었다고 대단한 결과가 있을지 말이다.”

그가 벽을 짚었던 커다란 손을 천천히 내리며 말했다. 아드리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손을 치우…….”

간신히 입을 열려는 그녀의 얼굴로, 가레스가 거친 손을 뻗었다.

“한번 보자꾸나.”

불쾌한 입김이 느껴지고, 역겹고 두려웠던 손의 접촉이 기억나려던 순간이었다.

쉬익-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멈춰.”

가레스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거짓말처럼 그의 손이 멈추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가레스는 눈만 깜빡이며 허공에 든 손을 떨었다.

“손을 치워.”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드리안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녀는 목소리의 주인을 잘 알았다. 과거에도 아드리안을 구해 주었던 그녀였다. 다만, 가레스가 왜 그녀의 말을 순순히 듣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목 중간에 강철 막대기를 꽂은 채 돌아다니기 싫다면 물러서.”

가레스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한 걸음 비켜났다. 그제야 아드리안은 상황을 파악했다.

“……전하.”

비켜선 가레스의 뒤로 보이는 얼굴은 아폴로니아였다. 그녀의 손에는 조금 전까지 가레스가 허리에 차고 있었던 검이 들려 있었다.

조금 전의 쉭 하는 소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가레스의 뒤쪽에서 다가오다가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무기를 검집에서 빼 그 주인의 목에 겨눈 것이다.

그 검 끝은, 다름 아닌 가레스의 목에 닿아 있었다. 그의 두꺼운 목에 한 방울 피가 맺힌 것이 보였다.

“옆으로 비키렴, 아드리안. 소공작과 나는 할 말이 있단다.”

아드리안은 더 기다리지 않고 아폴로니아의 등 뒤로 비켜섰다. 가레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아폴로니아를 향했다. 이제 황궁 벽에 등을 댄 것은 그였다.

아폴로니아의 손에 들린 검은 여전히 그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갑작스런 검날의 감촉 때문인지, 그의 동공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검투는 배우지 않았으나 그녀는 무기를 들어 사람을 위협하는 것에 능했다. 타고난 기백이 가레스를 짓누르고 있었다.

“너……. 네가 나에게 감히…….”

그가 중얼거렸다. 검은 무서우나, 검을 든 손의 주인은 그가 한 번도 두려워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점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멍청하게 태어나서 배울 줄도 모르는구나, 가레스. 너는 언제나 그랬다.”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녀의 눈이 짙은 붉은색으로 타올랐다. 아폴로니아는 분노로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이놈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것 같았다.

오늘은 아드리안을 데려온 것은, 그녀가 리페르 저택에서 겪었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페트라가 쫓겨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쓰레기처럼 딸려 온 가레스 때문에 그녀는 오히려 과거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 했을 것이다. 공작가에서 있었던 일들도, 사르비아 정원에서 가레스에게 얻어맞았던 일도.

“이, 이것 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가레스가 위엄을 지켜내려 애쓰며 말했다.

“내 이름은 네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야.”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러고는 한층 서늘하게 덧붙였다.

“아드리안 또한, 네가 함부로 눈에 담아서는 안 되고.”

그녀는 검을 든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아드리안을 건드려서 대단한 결과가 있을지 궁금하다고 했지.”

“컥…….”

목에 가해지는 압력이 강해지자 가레스가 헉헉거리며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그의 등 뒤는 벽이었고, 그는 비대한 몸을 벽에 밀착시키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비로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듯, 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예언을 하나 해 줄까?”

아폴로니아가 바싹 다가서며 다시 말했다.

“네 운명은 둘 중 하나야. 비참하고 긴 삶을 살거나, 아니면 금방 죽거나. 그리고 어느 쪽이든…….”

아폴로니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예언, 또는 저주를 하는 것 같은 그 말투에 가레스의 커다란 몸이 떨렸다.

“너는 죽기 직전까지 후회하게 될 거야. 그 애를 건드린 것을, 아니 5년 전 그 애를 만난 것을.”

아폴로니아는 한동안 검을 그의 목에 겨눈 채 가레스를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자신을 훈계하는 것도, 그녀가 일개 시녀를 위해 리페르 소공작이자 사촌 오빠를 위협한다는 것도, 그의 이해를 벗어난 일이었다.

아폴로니아는 가레스의 목을 누르고 있던 검을 내렸다.

“커헉!”

“물론, 오늘의 무례는 바로 처벌할 거고.”

목을 부여잡고 켁켁거리는 가레스를 두고, 아폴로니아가 큰 소리로 외쳤다.

“경비병!”

몇 초 지나지 않아 황제궁 반대편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 몇 명이 뛰어왔다. 선두에 선 것은 키가 크고 온몸에 근육이 가득한 자로, 카엘리온을 수행해 바멜산에 갔던 기사들 중 하나였다. 기사들 전원이 아폴로니아를 보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평소보다 깍듯한 모습이었다. 아폴로니아가 페트라며 가레스와 입씨름을 하는 사이, 페트라의 모든 권한을 빼앗아 공식적으로 아폴로니아에게 주겠다는 황제의 명령이 전달된 모양이었다.

“소공작이 감히 황녀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으니, 올바른 예의를 알려 드려야겠다.”

아폴로니아가 싸늘하게 명령했다. 기사들은 잠깐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가레스에게 다가왔다.

“소공작의 뺨을 쳐라. 황실의 예를 몸속 깊이 새길 수 있도록.”

“물러서라! 너, 너희가 감히…….”

짝!

선두에 섰던 덩치 큰 자의 거친 손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가레스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휙 돌아가고,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소공작은 황궁의 시녀를 희롱했으니 그에 대한 예도 가르쳐 주어라.”

“뭐?”

짜아악!

기사가 커다란 덩치에 온 힘을 실어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가레스의 얼굴이 이번에는 왼쪽으로 휙 돌아갔다. 그는 부어오른 뺨이며 터진 입을 감싸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폴로니아가 손을 들어 덩치 큰 자를 정지시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기사들 한 명 한 명을 쏘아보았다.

“이 정원을 비롯해 황제궁 주변을 지키는 것은 그대들의 임무이다. 앞으로 전원이 자리를 비우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 그대들의 부재중에 누군가가 위험해지는 상황이 한 번 더 생기면 기사단 전원을 벌할 것이다.”

“예, 전하!”

기사들이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처음 보는 황녀의 냉철한 모습에 그들 중 몇몇은 어리둥절했으나 누구도 반박하려 들지는 않았다.

아폴로니아의 질책은 타당했다. 황실을 꽉 잡고 관리하던 페트라가 얼굴을 비추지 않은 사이, 시종들은 물론 기사들의 기강도 해이해지고 있던 참이었다. 잘못을 해도 탓하는 사람이 없으면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폴로니아가 기사들을 불러 질책하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힘으로 그들은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질서를 가져다줄 새로운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바멜산에서 아폴로니아와 만났던 덩치 큰 기사는 묘하게 기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나, 가레스. 너와 너의 어머니는 당장 황궁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녀는 아직까지 들고 있던 가레스의 검을 내던지며 그에게 명령했다.

“흐…… 흐읍.”

뺨이며 입, 그리고 검에 눌렸던 목까지, 성한 곳이 없는 가레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차마 아폴로니아를 바로 보지 못했다.

“두 명은 소공작의 팔을 잡아라. 황궁 문까지 가는 동안 소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단단히 잡아.”

소심하게 버둥거리는 가레스를 죄인처럼 포박한 채, 두 명의 기사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너희는 공작 부인을 모시고 뒤따라가도록 해.”

아폴로니아는 아드리안과 함께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남은 자들에게 명령했다. 기사들은 칼같이 정돈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명을 따랐다.

“……전하.”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이 팔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하구나. 가레스가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어.”

아폴로니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드리안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멀쩡한 목소리에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떨고 있을 줄 알았던 그녀는 의외로 초연한 표정이었다. 아니 어딘가 속이 시원해 보였다.

“저…… 솔직히 말하면, 소공작이 맞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드리안이 다시 말했다. 가레스를 만나고 나면 언제나 떨었던 그녀는, 오히려 보일 듯 말 듯 웃고 있었다.

“비겁한 일일까요? 그가 기사에게 뺨을 맞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제가 힘들었던 일들이 상쇄되는 느낌이었어요.”

아드리안의 거침없는 말에 아폴로니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아드리안은 보이는 것처럼 작고 연약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총명하고, 강단이 있으며 마음속 깊은 곳에는 분노 또한 간직하고 있었다.

“비겁은 무슨.”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아드리안의 모습은, 그녀가 봐 온 것 중 가장 솔직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그리고 나서도 가레스가 멀쩡하다면 네가 자주 가서 때려 주렴. 기억이 다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아드리안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감사해요, 전하.”

아드리안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밝아진 미소와 가벼워진 걸음걸이를 바라보며 아폴로니아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공작 부인, 가셔야 합니다.”

페트라는 아폴로니아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가레스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는 순간부터 일어난 모든 일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아들의 목에서 검날에 벤 피가 흐를 때도, 아들이 기사들로부터 뺨을 맞고 쓰러질 때도, 죄인처럼 팔을 잡혀 끌려갈 때도, 페트라의 시선은 아폴로니아를 향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어렸던 계집이…….’

그녀는 여전히 조금 멍했다. 아폴로니아는 이미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 약했던 아이가.’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보고, 몰락시키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치밀하고 계산적으로 걸어온 적이었다. 가레스 같은 것은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조심성 많으신 고모님,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느라 저를 잊으셨습니까?”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뼈아픈 실책을. 절로 주먹이 꽉 쥐여졌다. 그녀는 지금껏 아폴로니아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아폴로니아를 파헤치리라 다짐했다.

아폴로니아의 옆에서 걸어가는 아드리안을 본 순간, 페트라의 입술 한쪽 끝이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폴로니아는 아드리안을 소중히 여겼다. 가레스의 목에 직접 검을 겨눌 정도로. 침착함을 잃지 않았지만 페트라의 눈에는 보였다. 아폴로니아는 아드리안 때문에 진심으로 분개하고 있었다.

적을 파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약점이 아닌가. 약한 부분은 즉, 소중한 부분이었다. 페트라는 그중 하나를 찾은 것이다.

“가지.”

그녀가 기사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무겁게 버티고 섰던 발을 뗐다. 일단은 황제의 명령을 들어야 했다.

쥐 죽은 듯 리페르 저택에 감금되어 있을 것이다. 새로운 기회가 올 때까지는 준비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만 오늘 본 아폴로니아의 모습은 절대로 잊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에 대한 작은 것 하나라도.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것이다.

* * *

“돌아왔습니다.”

카엘리온이 말했다. 아폴로니아 앞에서 언제나 그렇듯,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건강해 보이네.”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몇 달 동안 영지로 떠나 있던 사이 카엘리온의 머리칼은 조금 길어졌다.

“막 왔을 때는 비쩍 말랐었어요. 와서 하루 동안 실컷 먹고 자더니 완전히 멀쩡해졌죠. 황족이 맞긴 한가 봐요.”

에반젤린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누이, 저 지금도 무척 힘들고 배고픕니다. 누이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카엘리온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부득부득 오늘까지 안 먹고 전하를 만나겠다고 우겼어요. 그러라고 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저렇게 통통해져 있더군요.”

“누이, 그건 저 녀석이 자꾸 옆에서 닭튀김 같은 것을 먹어서 그렇습니다. 박쥐며 원숭이들과 모여 앉아서 한 상 걸게 차려 놓고요. 그래서 밤중에 저도 그만…… 하지만 통통이라니! 제가 어떻게!”

두 사람은 바멜산에 다녀온 후로 급격히 친해진 것 같았다. 다만 연인의 다정함이라기보다는 서로가 편안한 친구 사이에 가까워 보였다.

“볼살 쪘네.”

가만히 있던 유리엘이 툭 던졌다. 카엘리온은 소파에 놓인 쿠션을 집어 던지려 옆자리를 더듬었지만, 이는 어느 순간 아폴로니아의 등 뒤에 놓여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유리엘이 한발 빨랐던 것이다.

“귀신같은 놈.”

“전하의 등이 불편한 것을 그대로 둘 수는 없잖아.”

유리엘이 카엘리온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폴로니아가 그에게 웃어 주었다.

아폴로니아, 유리엘, 카엘리온과 에반젤린은 황궁 밖, 카엘리온 소유의 작은 저택에 모여 있었다. 날씨가 꽤 서늘해졌지만 벽난로에 장작이 활활 타고 있기에 안락하고 따뜻했다.

페트라와 황제가 척을 지고 아폴로니아에게 주어진 권한이 커진 후로, 그녀의 황궁 밖 출입은 전보다 편안해졌다. 별다른 핑계가 없어도 얼마든지 원하는 곳을 오갈 수 있었다.

네 사람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흘렀다.

“이틀 뒤네요. 우와! 긴장되겠다!”

물론, 항상 천하태평인 에반젤린을 빼면.

패리스의 즉위식이 이틀 뒤로 다가왔다. 황궁 안팎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아폴로니아는 지금에서야 시간을 내 카엘리온을 찾아올 수 있었다.

“잘되면 좋겠어요. 안 그러면 저 빼고 세 사람은 한 번에 죽을 거…… 읍.”

헛소리를 하는 에반젤린의 입으로, 카엘리온이 커다란 빵 한 조각을 밀어 넣었다.

“패리스의 시녀로 들어가는 건 뭐 더 나은 운명일 것 같고?”

에반젤린은 몇 초 동안 빵을 뱉을지 말지 고민하더니 우물거리며 씹기 시작했다. 의외로 맛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누이는 그사이에 공작 부인을 연금시키셨다면서요?”

카엘리온이 감탄을 섞어 중얼거렸다.

“에반젤린 덕분에.”

그녀가 공을 돌리자 에반젤린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세타의 공도 컸고.”

아폴로니아도 살며시 미소 지었다.

에반젤린이 찾고 유리엘이 데려온 안톤을 황제 앞에 데려갔던 그날, 황제는 페트라를 마음속에서 끊어냈다. 그녀가 자신의 가장 큰 전력이라는 것을 모른 채.

“공작 부인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더군요.”

유리엘이 말했다. 그날의 일을 들은 후 그는 한편으로는 아폴로니아의 성공을 축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다음의 일을 경계해 왔다.

당장 나가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 후 페트라는 얌전히 돌아가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가레스가 금족령을 어기고 다시 도박장을 출입한다는 소식이 있었으나 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제의 시선에서 떨어진 순간, 아폴로니아는 자신의 정체를 페트라에게 밝혔다. 그것은 오랫동안 참아 왔던 일종의 복수였으나 아무 계산 없이 감정적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다.

“고모님은 내가 고모님의 자리를 노리고 아버님과 패리스를 구워삶으려 한다고 생각하셨겠지. 내가 정체를 드러낸 것은 그 성공의 축배라고 여겼을 거고.”

그녀가 말했다.

“지난번 전쟁 때 나는 패리스를 도왔으니까 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그녀는 아일린 이데나의 이름에 치를 떨던 페트라를 떠올렸다.

“고모님은 패리스의 즉위를 고대하고 있을 거야. 나를 다시 끌어내리고 자신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서. 성대한 즉위식이 무사히 진행되면 아직 재력이며 사병이 건재한 리페르 일가는 쓸모가 있을 테니까. 어쨌든 패리스는 고모님의 조카고, 아버님과 달리 고모님을 증오할 이유도 없으니까.”

“누이의 계획에는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겠군요.”

“그래. 내 목표는 완전히 달성했어.”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즉위식에 리페르 일가가 얼굴을 비추지 않는 것. 공작 부부도, 가레스도, 그들의 사병도 말이야.”

그녀는 빙긋 웃었다. 이는 그녀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황제 곁에서 그를 수호하던 페트라를 떨어뜨려 놓는 것. 페트라가 없으면 황위의 반은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찾아온 후 그녀를 다시 상대해야겠지만.

“카엘리온, 네 준비는?”

“마쳤습니다.”

소파에 늘어지려던 그가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중립 귀족들도, 다른 변방의 귀족들도 준비를 끝냈습니다. 사병을 모았지만 의심은 없을 겁니다. 요즘 산적이 워낙 위험하니까요.”

그가 씩 웃었다. 리샨의 사남매는 맡긴 일을 말도 안 되게 잘해 주고 있었다.

“녹스 바이안도 마찬가지고……. 문제는 저 녀석이죠. 제일 중요한 걸 맡았으니까요.”

카엘리온이 유리엘을 가리켰다. 그는 저택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거의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다른 곳을 볼 때조차도 그의 신경은 아폴로니아에게 가 있었다.

“뭐……. 지금 보니까 잘할 것 같기는 합니다.”

카엘리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멜산에서 돌아온 후로, 그는 유리엘과 아폴로니아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아도 그다지 상처 입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자신의 고생도 봐 달라며 아폴로니아에게 농담 섞인 투정을 부렸지만 그뿐이었다.

잊었거나, 아니면 전보다 감정을 더 잘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기다리면 되겠군요.”

카엘리온이 말했다.

“맞아.”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끝났다. 와야 할 사람은 올 것이고, 오지 않아야 할 사람은 금족령에 묶여 있었다. 심지어는 즉위식 의상까지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먼 곳을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중요한 일을 맡은 또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물론 그 사람은 몇 달 전에 이미 자신이 맡은 모든 일을 끝냈지만.

“……아모레타를 생각하십니까?”

유리엘이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순간 깜짝 놀랐지만 이내 피식 웃었다. 유리엘이 그녀의 생각을 예민하게 알아차린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맞아.”

아폴로니아는 어둠 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짙고 아름다운 자안을 떠올렸다. 마지막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도, 언제나 슬퍼 보였던 미소도.

아모레타는 사라졌으니까. 그녀가 원했던 그대로.

아폴로니아는 잠시 눈을 감고 유리엘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익숙한 감촉이 전해졌다.

머릿속으로 앞서 떠나갔던 다른 사람들이 스쳤다. 선황과 어머니, 그리고…….

“시드가 알면 자랑스러워했을 겁니다.”

유리엘이 그녀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폴로니아가 눈을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걸 또 알아챘다니.

“……내가 방금 혼잣말로 뭐라고 했나?”

“안 들어도 압니다.”

유리엘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속삭였다.

“저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반쯤 일어나려던 아폴로니아의 머리를 감싸 다시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며 말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생각하시는 사람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시거든요.”

그가 웃었다. 몇 달 동안 쌓였던 긴장을 한 번에 풀어 주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추억하실 사람이 많으실 테니, 이대로 조금만 눈을 감고 계십시오.”

유리엘이 속삭였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아폴로니아의 귓가에 닿았다. 아폴로니아는 그의 말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이 걸어온 길을,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을 회상했다.

실패는 없었다. 그녀는 드디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앞서간 자들을 위해, 함께 있는 자들을 위해, 제국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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