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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그들 사이의 거리 (1) (25/34)

Chapter 9. 그들 사이의 거리 (1)

챙!

황제의 손을 떠난 찻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세타는 조용히 시종에게 손짓해 그것을 치우라고 명했다.

“돌아왔다니…….”

그가 분노에 차 중얼거렸다. 눈치를 보던 시종은 세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깨진 조각들을 집어 들고 후다닥 밖으로 튀어 나갔다.

“대공 전하 말씀이시군요.”

세타가 침착하게 말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큼은 실패하면 안 된다고 했거늘…… 한심하기 그지없군.”

세타는 평온하게 웃으며 새 찻잔을 꺼내 황제 앞에 놓아 주었다.

“마물과 싸우다가 크게 다쳤다고 들었는데, 대공 전하는 여전히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나요?”

“고귀한 대공이 또다시 위기에서 살아남았다며 기뻐하는 자들이 많다더구나. 중립 귀족들의 마음도 그쪽으로 기울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세타가 황제의 잔에 그가 즐기는 옅은 붉은색의 찻물을 채워 주었다.

“폐하께서는 제국의 지존이신데 어찌 대공 전하를 그렇게 걱정하세요?”

순진하게 묻는 그녀의 모습에 황제는 분노를 조금 사그라뜨리며 대답했다.

“결국은 아폴론의 핏줄 문제가 아니겠느냐.”

“핏줄…… 이요?”

“태양신의 후예가 아닌 자는 황위에 오래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있기에, 나의 자리는 언제나 취약하다.”

그는 씁쓸하게 대답했으나 세타는 뜻밖에도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녀 전하가 폐하의 딸이라서 다행이에요.”

“뭐?”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평민 출신 기사에게 눈이 멀어 원수 같은 카엘리온을 구해 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딸의 이름이 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프리오닉스를 타고 마물을 물리친 영웅이라는 명예를 가졌으니까요.”

황제의 눈썹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세타의 말대로 아폴로니아는 황제의 마구간에서 프리오닉스를 훔쳐 탔다. 덜떨어진 딸이 자기 힘으로 마물을 탈 리는 없으니 에반젤린 왕녀의 도움이 컸으리라. 과거 카엘리온이 그녀를 얻고자 유리엘을 포기했던 일이 왕녀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아폴로니아가 여왕 크로아딘의 입에 독약을 부었다고들 하지만 이는 분명 단검을 들고 그녀와 함께 있었다는 유리엘 비체가 일구어 낸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다행인 일인가?

황제의 황금빛 눈동자가 세타를 바라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황녀 전하는 누가 뭐래도 폐하의 딸이니까요. 대공 전하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갔던 마물을 황녀 전하께서 물리쳤다는 사실은 곧 폐하의 명예가 아니겠어요? 방계인 대공 전하보다는 직계의 힘이 강하다는 의미가 아닌가요?”

황제는 천천히 세타의 말을 곱씹었다. 그녀의 말대로 카엘리온은 이번 임무에서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부상을 입은 채 황녀의 도움을 받아 목숨만 건졌다는 것이 더 어울리는 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짜증이 났으나 세타의 분석은 일리가 있었다.

최소한 이번 사건에서 카엘리온은 마물을 물리치고 제국민을 구한 영웅이라는 호칭은 얻지 못했다. 그 호칭은 황당하게도 아폴로니아에게 돌아갔다. 팔에 커다란 화상을 입은, 능력도, 배경도, 야심도 없기에 패리스에게 위협이 될 수 없는 딸.

“……그를 구해 온 것이 다름 아닌 내 딸이기에, 카엘리온을 죽일 뻔한 것이 나의 함정이라는 여론은 완전히 힘을 얻지 못했지.”

“그것 보세요. 황녀 전하는 쓸모가 많다니까요.”

황제가 자신의 말에 동조하자 세타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그렇게 웃을 때면, 뺨의 주근깨도, 정돈이 쉽지 않은 곱슬머리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전통적으로는 황후께서 부재하실 때에는 황실의 살림을 맡는 것도 황녀라고 들었어요.”

황제의 얼굴이 풀어지자 세타는 더욱 신이 난 듯 이야기했다.

“언젠가 공작 부인께서 폐하의 곁에서 멀어진다면, 그러면 황녀 전하가 할 일이 많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녀의 뺨을 쓸던 황제의 손이 멈추었다. 세타가 동그래진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자 그는 찻잔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페트라가 곁에서 멀어진다라…… 마치 내가 아닌 그 애의 선택으로 멀어질 것처럼 말하는구나.”

세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시, 실언했습니다, 폐하!”

“괜찮다.”

황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내뱉었다.

“말해 보아라. 무슨 소문을 들었나?”

“그, 그것은…….”

세타는 기겁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별것 아닌 소문을 하나 들었을 뿐인데, 하필 폐하께서 최근 리페르 공작가의 사정으로 그곳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줄었다는 말씀을 하신 게 떠올라서…….”

“그게 뭐지?”

황제가 날카롭게 묻자 세타는 애써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소공작께서 바르탄의 도박장을 자주 드나드신다고…….”

황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다지 새로운 소식은 아닌 것 같구나.”

“지난달에만 그곳에서 금화 5만 개를 쓰셨다고 들어서요. 지지난달에도 비슷했고, 그 전달은 더 쓰셨다고 했어요. 폐하께 전해 들었던 공작가의 사정과는 너무 다른 것 같아서…….”

“뭐?”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세타가 말한 액수는 가문을 뒤흔들 정도의 돈은 아니었지만, 가주도 아닌 소공작이 물 쓰듯 흘려 버리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금액이었다. 정말 가레스가 그 정도의 소비를 할 여유가 있는 거라면 공작가와 상단의 사정이 나빠졌다는 페트라의 말은 거짓일 터였다.

“……그 애는 공작가의 재산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황제가 서늘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세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가 말하는 사람이 가레스가 아니라 페트라라는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상단을 그만큼 키우고 유지하는 것은 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인 것도 잊고, 리페르 가문은 나의 가문인 것도 잊은 것처럼 말이다. 지시한 일은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서…….”

황제가 냉소하자 세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폐하, 제가 잘못 안 것일지도 몰라요. 공작 부인은 좋은 분이세요.”

그녀는 황급히 손목에 찬 사파이어 팔찌를 풀어 황제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보세요. 제게 이런 귀한 것을 선물하셨어요. 공작가의 재산이 곧 폐하의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더라면 어찌 폐하의 여인인 제게 이런 귀한 것을 주셨겠어요.”

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가 내민 팔찌에 박힌 푸른 보석을 보았다. 그가 익히 아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황제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훨씬 싸늘하게 바뀌어 있었다.

“……흠집이 있구나. 이걸 네게 주었다고?”

“그, 그건!”

세타의 얼굴은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황제는 깊이 숨을 내뱉고 고개를 끄덕였다.

“변명은 필요 없다. 시녀를 무시하는 페트라의 성정은 내가 잘 아니까.”

세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속눈썹 끝에는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황제는 곧 다시 표정을 풀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엇이 슬퍼서 울지?”

“폐하께서 심려가 깊은데, 세타는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요.”

그녀가 황제의 팔에 안겨 오며 말했다.

“공작 부인도 그렇고 에핀하르트 대공 전하에 대해서도, 폐하의 걱정을 덜어 드리지 못하는 것이 슬퍼요.”

황제는 두 팔로 그녀를 껴안았다. 이런 여인을 왜 더 일찍 찾지 못했을까.

“대공에 대해서 너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폐하께서 아폴론의 핏줄이…….”

“패리스가 있지 않느냐.”

그는 빙긋 웃으며 속삭였다.

“귀족들도, 백성들도, 나의 통치를 반대할 명분은 있을지라도 패리스의 등극을 반대할 명분은 없어. 속마음은 카엘리온을 지지하더라도 먼 방계인 그가 패리스를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지. 그는 누가 보아도 아폴론의 현신 그 자체이니까.”

“……그렇군요.”

“나의 계획의 끝은 언제나 패리스의 등극이었다. 그 아이는 이제 다 컸어.”

황제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오래전 스스로가 한 다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의 반대 세력이 커진다면, 적절한 시점에 패리스에게 양위를 하면 될 일이다.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요?”

세타가 황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황제가 세타의 턱을 들어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너와 나는 그저 호화롭게 사는 거지. 아주 오랫동안, 행복하게.”

안심하고 미소 짓는 연인이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자, 황제의 표정은 다시 굳어 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여동생을 떠올렸다.

충성심도 쓸모도 점차 옅어져 가는 그녀를.

* * *

“이게 다 몇 마리죠?”

“지금 방에 있는 건 총 232마리…… 아니, 지금 하나 더 들어왔으니까 233마리요.”

에반젤린이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언가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아폴로니아에게는 그저 바람이 한 번 분 것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아폴로니아는 감탄해야 할지 황당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게 ‘마일론의 눈’을 이루는 핵심이라고요? 모두가 다?”

“그중 일부요. 이곳을 드나들지 않는 정보원들도 많고.”

에반젤린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마일론의 눈’에 대한 정보를 숨기지 않고 아폴로니아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드나들지 않는 정보원은 누구죠?”

“인간이죠. 정보망에 마물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제 정보원들은 대륙 각지에 있어요. 그러니 유지비가 많이 드는 거고.”

에반젤린이 허공에 비스킷을 내밀며 말했다. 비스킷은 우걱우걱 소리와 함께 한 입씩 사라졌다.

“정보를 이리저리 판 돈은 거기 썼군요.”

“맞아요. 전하께서 가끔씩 주신 용돈 같은 것도 그리 들어갔죠.”

에반젤린이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그녀와 거래하는 동안 한 번씩 뇌물조로 보석을 쥐여 주고는 했었다.

“그럼 쪽지를 물고 오는 녀석들은 그들의 소식을 전하는 거군요.”

아폴로니아가 퍼드득거리며 창틀을 통과하는 외눈까마귀를 보며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자기들은 정보를 전한다는 인식이 없지만요.”

에반젤린이 그 까마귀를 향해 손을 뻗자, 녀석은 얌전히 다가와 그 팔에 앉았다.

“에반젤린.”

아폴로니아가 입을 열었다. 전투적인 새가 에반젤린에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은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네?”

“마물을 길들일 때…… 주술을 사용하나요?”

“주술이요? 푸흡!”

아폴로니아의 진지한 질문을 들은 에반젤린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난 주술 같은 건 몰라요. 딱 한 번 어렸을 때 주술사가 쓰다 만 마력석을 가지고 놀다가 동생의 머리카락을 다 태워 버린 게 유일한 경험이죠.”

에반젤린이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듯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문득 에반젤린의 동생, 즉 라잔의 현 왕세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제게는 그저 마물이 뭘 좋아하는지 연구하는 게 재미있었을 뿐이에요. 열 살 때 자칼로페 울음소리가 신기해서 따라가다가 집을 못 찾은 적도 있었거든요.”

“언제 돌아갔는데요?”

“2년 후에요.”

아폴로니아는 생각을 바꾸었다. 가장 불쌍한 것은 라잔의 국왕 부부였다. 에반젤린은 어깨를 으쓱 하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는 외눈까마귀한테 빠졌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이 원수와 어머니, 양쪽에 각인해 그 사이를 오가며 평생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전령으로 써먹기 딱 좋은 성질이었죠.”

“어머니에게 각인을?”

“새들이 흔히 그렇듯, 알에서 깨서 처음 보는 것에 각인한다는 거예요. 원수를 찾아 복수하는 본성이 있듯, 어머니에게 돌아와 그에 복종하는 본성도 있죠. 그래서 어찌어찌 알 몇 개를 손에 넣어 부화시켰어요. 나에게 각인하도록. 그다음 새끼들도, 그다음도 다 내게 각인하도록 했기 때문에 이 방에 있는 녀석들은 내 말을 들어요.”

그 말을 증명하듯, 작은 외눈박이 새가 에반젤린의 손짓 한 번에 얌전히 새장으로 들어갔다.

“정보망의 정보원들은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심었어요. 여행하다 알게 된 이들에게 뇌물도 주고, 신뢰도 쌓고, 국왕인 아버지의 도움도 받았어요. 하지만 ‘마일론의 눈’의 장점인 빠른 정보 교류는 주로 이 녀석들이 책임지죠.”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는 어머니의 각인을, 정보원들에게는 원수의 각인을 하도록 했군요. 쉴 새 없이 그 사이를 오가도록. 그 사람이 어디 있든, 찾아서 소식을 전달하도록.”

단순하지만 기가 막힌 방법이었다. 에반젤린이 긍정의 미소를 지었다.

“가끔 실종된 사람을 찾는 용도로 붙이기도 하죠.”

그녀는 새장 안의 한 새를 가리켰다. 씩씩거리는 태도며 크기가 멜로디가 분명했다.

“그럼 사적인 대화 내용을 다 아는 건 어떻게 하는 거죠?”

“주로 날개원숭이예요.”

에반젤린이 씩 웃으며 허공에 대고 무언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듯했던 천장에서 사람 절반만 한 점박이 날개원숭이가 거꾸로 매달린 모습을 드러내더니 끽끽거리며 바쁜 손짓을 했다.

“완벽하게 소통이 되는 건가요?”

“뭐, 그럭저럭요. 얘들은 잘 가르치면 사람 말을 다 알아들어요. 이 녀석들이 내게 쓰는 언어에는 원래 녀석들이 쓰던 몸짓과 울음소리, 제가 가르친 수화, 이런 것들이 다 섞여 있죠.”

아폴로니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연구보다는 퇴치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마물의 본능은 물론 울음소리와 몸짓까지 분석했다는 것은 평생 마물에 미친 상태로 지냈다는 의미였다. 간혹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한 마리 한 마리의 능력치는 다 달라요. 그래서 대상에 따라 선별적으로 붙여야 하죠. 예를 들어 황제 곁에는 가장 유능한 아이를 보내요. 공작가에도요. 모습도 완벽히 숨기고, 잘 알아듣고 수화로 말 하고, 글도 읽는 아이요.”

과거에 에반젤린은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정보력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이제야 그 말뜻을 이해했다. 에반젤린이 어떤 정보를 우선적으로 수집하느냐의 문제는 가장 유능한 마물들을 누구의 곁에 붙여 두느냐의 문제였을 것이다.

에반젤린은 과연 천재였다. 외모를 구분하기도 힘든 몇백 마리의 마물 한 마리 한 마리의 재능을 파악한다는 것은 놀라운 능력이었다.

“물론, 녀석들은 환경만 맞춰지면 순식간에 번식하고 성장하기 때문에 조금만 있으면 유능한 정보원의 숫자는 늘어날 거예요. 제국으로 오면서 환경이 바뀌는 바람에 지체가 됐었죠.”

에반젤린은 대화 도중에 원숭이 외에도 박쥐와 다른 기괴한 모습의 벌레, 새 같은 것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뭘 알아봐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면 애들을 적절하게 배치할게요. 이제 전하 거니까요.”

에반젤린이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깃털과 박쥐 배설물 같은 걸로 지저분했지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후회하지는 않아요? 대가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는데.”

아폴로니아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의외로 에반젤린은 평온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게요. 보는 눈도 없는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그녀는 농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뭐, 일이 다 끝나면 감동해서 저한테 결혼해 달라고 무릎 꿇고 조를지도 모르죠.”

솔직한 대답에 아폴로니아가 미소 지었다. 이제는 본론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아버지와 고모님 옆에 가장 유능한 마물을 두는 것은 그대로 유지해요.”

그녀가 첫 번째 지시를 했다. 에반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트리온 후작, 에드윈 후작, 에스테반 자작에 대해서. 그들이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지, 언제, 어디서 모이는지에 대해 가능한 한 모든 정보.”

에반젤린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완 상단과 아모레타가 주고받는 모든 소식. 특히 새로 출시할 상품에 대한 것.”

“그게 다인가요?”

에반젤린은 아폴로니아의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무언가 손짓을 했다. 그 손짓에 따라 방 안에 있던 마물 몇 마리가 창밖으로 나갔다.

“아뇨.”

아폴로니아가 조금 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 더 알아봐 줬으면 하는 게 있어요. 이건 단순히 누군가의 옆에 마물을 붙이는 걸로 찾을 수 있는 정보는 아니에요.”

에반젤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폴로니아가 그녀 앞으로 한 발 다가서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 일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은밀하게 처리되어야 했다.

“23, 4년 전쯤 반역으로 처형된 어느 일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반젤린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라면 전하가 태어나기도 전인데요?”

“맞아요.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기 직전, 패리스가 갓난아기였을 때 있었던 일이죠. 그러니까…….”

아폴로니아가 에반젤린이 앉은 소파 옆 창틀에 기대며 말했다.

“패리스의 친모에 대한 정보를 찾는 거예요.”

에반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파묻혔던 소파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패리스의 친모? 그는 분명히 전하와 같은…….”

“아니, 그의 친모는 다른 사람이에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기 전에 그 부친이 반역을 했다는 이유로 멸문당한 사람이죠.”

아폴로니아는 짤막하게 사틴에 대한 이야기를 에반젤린에게 해 주었다. 엘레니아가 죽던 날 그녀가 들었던 이야기를.

“……알려지면 엄청난 일이로군요. 패리스가 황실 혈통이 아니었다니.”

“그러니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죠.”

“전하께서 왜 당연하게 황제를 하려고 했는지 이제 알겠어요.”

에반젤린이 드물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뭘 찾으면 되는 거죠?”

“……누가 그녀를 고발했는지.”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에반젤린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 사람은 자기 아버지가 처형된 후 바로 잡힌 것이 아니에요. 배 속에 패리스를 품고 있었던 그녀는 내 아버지 덕분에 집안이 멸문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접했고, 한동안 그의 비호 하에 숨어 지냈죠. 결과적으로 발견된 것은 익명의 고발 때문이었어요.”

이는 아폴로니아가 세타를 찾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로, 오랫동안 의아하게 생각해 온 일이었다. 가이우스를 상대할 방법을 찾기 위해 사틴 아리에타의 흔적을 뒤쫓았고, 가능한 한 모든 기록을 읽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직접 반역에 가담한 적도 없을뿐더러 사건이 터진 후 영리하게 원래의 집을 버리고 숨었다는 것까지 확인이 되었다.

리페르 가문의 가주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면 갑자기 발견될 이유가 없었다. 설령 우연히 발견이 된다 한들 약간의 돈과 인맥이 있으면 새로운 신분을 얻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그러나 패리스의 출생 직후 누군가가 그녀를 고발했다. 영주인 가이우스를 거치지 않고 황실에 직접.

“원한을 샀었나요?”

“그럴 수 있겠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 여자에게 원한을 품을 이유를 가진 사람은 없었어요. 유일하게 짐작되는 것은…….”

아폴로니아가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그녀의 의심은 오래된 것이지만 아직 아무런 근거가 없기에 입 밖에 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그녀가 방해가 되었다는 것.”

“방해요?”

“그러니까…….”

아폴로니아의 금적안이 반짝 빛났다.

“가문의 수장이 죄인의 딸인 평민과 사랑에 빠졌다면, 가문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누군가는 불만을 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에반젤린은 아폴로니아의 말뜻을 파악하느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랑에 빠진 건 가이우스 황제였다고 했으니까…… 불만을 품은 사람은…… 설마?”

놀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에반젤린에게 아폴로니아는 살짝 웃어 주었다.

“맞아요.”

그녀는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하나의 가설을 말해 주었다.

“저는 페트라가 사틴 아리에타를 고발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세타를 찾아내기 전, 사틴 아리에타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수소문할 때 에반젤린은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는 한 노파를 찾아냈었다.

“그 애는 누구의 미움을 사지 않았어요. 영주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았다는 것 말고는 평범한 사람이었소.”

그녀는 전령을 통해 노파의 말을 전해 들었다. 그 후 아폴로니아는 여러 서류를 손에 넣어 검토했지만 고발인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사틴을 죽이려 했던 사람은 꽤나 조심성이 많은 모양이었다. 바로 그 점이 아폴로니아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을 세워 주었다.

영주와 평민의 사랑을 원하지 않았던 자, 사틴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자, 고발인의 정보를 기록에서 지울 만큼 영향력이 있는 자, 그 후 황제의 집요한 추적에도 완전히 벗어났던 자, 사틴이 죽은 후 거짓말처럼 황녀와 가이우스를 연결해 주고 가문의 작위를 공작으로 상승시킨 자.

모든 정황이 페트라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만 아폴로니아의 손에는 증거가 없었다.

“아직 추측일 뿐이에요.”

“하지만 대단한 추측인 걸요. 사실이라면 제국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에반젤린이 감탄하며 말했다. 흥미로 가득 찬 적갈색 눈이 아폴로니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그 당시 리페르 공작 부인이 뭘 했는지를 중심으로 찾아보도록 할게요. 24년은 긴 세월이기는 하지만 사틴을 아는 사람이 다 죽었을 정도의 시간은 아니니까요.”

에반젤린이 씩 웃었다. 아폴로니아가 창틀에서 몸을 떼고 문 쪽을 향해 몇 걸음 떼자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

“가설이 사실이기를 바라야겠네요. 만약 아니라면 황제의 팔 하나를 자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니까요.”

아폴로니아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섰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글쎄.”

아폴로니아가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만들어야죠.”

에반젤린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의 마음에 충분한 의심이 생겼을 때, 눈앞에 들이밀면 믿을 수밖에 없는 그런 증거를. 그러니 너무 걱정 말아요.”

아폴로니아가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문을 나섰다.

“사건이 완벽하게 덮였다면 덮인 대로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에반젤린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아폴로니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양쪽 입꼬리를 쭉 올리며 미소 지었다. 카엘리온을 포기했지만, 어쩌면 이 황녀는 그 이상으로 재미있는 연구 대상이었다.

* * *

“뭘 연구하세요?”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있는 아폴로니아에게 아드리안이 물었다.

“에반젤린이 가져다준 소식 때문에.”

애매한 아폴로니아의 대답에 아드리안이 맞은 편 의자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은 날마다 엄청난 양의 소식을 전해 주는 걸요. 덕분에 전하께서 잠을 줄이셨잖아요.”

사실이었다. 에반젤린은 여러 가지 정보를, 특히 페트라에 대한 정보를 쉴 틈 없이 전달했고 아폴로니아는 중요한 사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소식을 꼼꼼하게 검토했다.

“상단에 대한 거야.”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아드리안의 눈이 반짝 빛났다.

“기다리셨던 그 소식인가요?”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루완 상단에서 이런 걸 출시한다는구나.”

그녀는 편지 몇 장을 아드리안 앞으로 내밀었다. 아드리안이 감탄과 한탄이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모레타라고 했나요? 그 사람의 재주는 끝이 없네요.”

“재주가 좋은 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야. 만드는 속도는 오히려 빠르지.”

아폴로니아는 리샨의 벨라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들은 수년간 루완 상단에서 만드는 제품을 연구하고 따라 하며 자신들의 주술 능력을 많이 발전시켰다.

“지금부터 매달리면, 같은 물건을 루완 상단보다 한 발 앞서서 출시할 수 있을 거야.”

“뭘 하시려는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아드리안이 슬쩍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우리 벨라들은 아모레타가 만든 완성품을 보기 전에는 그 주술을 잘 흉내 내지 못하지. 재능의 한계가 있으니까.”

아폴로니아가 그녀의 문장을 대신 끝내 주었다. 아드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있는 소포를 뜯어보렴.”

아폴로니아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창틀에 놓은 작은 꾸러미를 가리켰다. 아드리안이 꾸러미를 집어 들고 포장을 뜯자 그 안에서는 작은 녹색 리본이 하나 나왔다.

“이건 설마…….”

“맞아.”

아폴로니아는 리본을 받아서 허공에 빙글 돌려 보았다. 리본은 곧 화사한 개나리색으로 바뀌었다.

“제품을 만들고 남은 조각이야. 에반젤린의 날개원숭이 한 마리가 훔쳐냈지.”

리본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려질 때마다 개나리색에서 순백으로, 순백에서 다시 연보랏빛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는 아드리안의 얼굴에도 조금씩 미소가 번졌다.

“벨라들이 서둘러 줘야겠군요. 루완 상단의 신제품 출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종이와 잉크를 꺼냈다. 타냐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공작 부인은 신제품 출시 자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이데나 상단에서 먼저 같은 물건을 낸다고 하면…….”

열심히 날짜를 계산하는 아드리안에게, 아폴로니아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출시는 그대로 하게 할 거야.”

“루완 상단이 계절마다 여는 출시 기념회를 열지 못하면 적지 않은 타격이 될 텐데, 그걸 포기하시게요?”

의아해하는 아드리안에게,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출시 기념회는 열려야지. 루완 상단의 고객들이, 그리고 아버지가 고모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을 볼 수 있도록 말이야.”

그녀는 읽고 있던 편지에 찍힌 리페르 가문의 인장을 빤히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루완 상단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모두에게 각인시켜야 하니까.”

* * *

“오랜만이군요, 아몬 백작 부인.”

로렐라이 에드윈이 자신의 옆에 선 여인에게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황실에서 영애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네요.”

아몬 백작 부인도 빙긋 웃으며 예를 차렸다. 그들은 황제궁 서쪽의 작은 홀에 모여 있었다. 주변에는 수십 명의 귀족 영애와 부인들이 화려한 차림을 한 채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1년에 네 번, 황궁에서 열리는 루완 상단의 신상품 출시 기념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었다. 고위 귀족 여성들, 그중에서도 사교계에 영향력이 있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자리였기에 이 행사에 초대되는 것은 많은 여인들의 꿈이었다.

사교계의 장미라 불리는 로렐라이 에드윈은 이곳에 초대받은 것이 처음이었다. 아직 열여덟에 불과한 그녀는 다소 과한 치장을 한 채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 비해 리페르 공작가의 측근인 아몬 백작 부인은 황궁이 자신의 안방인 것처럼 여유로웠다.

“드레스가 아름답군요. 입는 사람에 맞추어 꽃을 피워 낸다는 루완 상단의 그 옷인가 보죠? 치맛단의 붉은 장미가 잘 어울려요.”

아몬 백작 부인의 말에 몇몇 부인들이 로렐라이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모두 루완 상단의 상품을 두르고 있었다. 그들이 차려입은 옷은 이 행사를 주관하는 공작 부인에 대한 예의였고, 각자의 재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맞아요. 몇 달 전에 나온 것인데 딱 다섯 벌밖에 만들지 않았다고…….”

“공교롭게도 라일라 트리온 영애가 같은 옷을 입었군요.”

백작 부인이 재미있다는 듯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부채가 향한 곳에는 로렐라이의 라이벌로 불리는 라일라가 얼굴을 붉힌 채 서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화려하게 장식된 라일락 꽃송이가 보였다.

로렐라이가 한숨을 쉬었다. 하필 라일라와 겹칠 것이 뭔가. 사교계의 라이벌로 떠오른 두 사람은 상대방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했고, 무리해서 이번 드레스를 구입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같은 옷을 라일라가 입고 왔다니.

“호호, 역시 공작 부인의 상단은 대단해요. 사교계의 두 송이 꽃이 함께 상단의 상품을 노린다니 말이에요.”

아몬 백작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녀는 노련하게 어린 영애들을 이용해 루완 상단의 위세를 높이고 있었고, 이 방법은 언제나 효과적이었다.

“맞아요. 이데나 상단과는 다르죠. 언제나 한 발 앞서가니까요.”

주변의 몇몇 여인들이 웅성거리며 백작 부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모두 리페르 공작가와 가까운 가문의 여인들이었다.

“이데나 상단과 비교를 하는 것부터 말이 안 돼요. 아무리 같은 아름다움을 가졌어도, 처음 출시되는 것과 그를 따라 하는 것의 가치는 전혀 다른 걸요. 단 하루의 차이가 나더라도 두 번째로 나오는 물건은 그저 아류일 뿐이죠.”

아몬 백작 부인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로렐라이는 우아하게 따라 웃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오늘 어떤 상품이 공개되든, 그녀는 그것을 가장 먼저 구입할 것이라고. 이는 단순한 기 싸움이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나 사교계에서의 영향력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최근 사교계에서는 다양한 상품에 있어서 루완 상단보다 이데나 상단의 것을 선호하는 귀족들이 늘어 가고 있었다. 대륙 각지의 젊은 인재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재능을 꽃피우게 해 주는 상단주 덕분에 이데나 상단은 많은 분야에서 루완 상단을 넘어섰다.

간혹 루완 상단에서는 일시적으로 외모를 완전히 바꾸어 주는 화장수나, 강하지만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검 등 독특한 제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술이 걸린 물건인 만큼 생산량이 제한되기 때문에 사업가로서의 지위를 뒤집기에는 부족했다.

오히려 그러한 기능성 상품이 시장에 풀리는 순간 이데나 상단에서 그와 정확히 똑같은 물건을 대량으로 만들어 출시하는 바람에 루완 상단에서는 역효과만 보았을 뿐이었다.

다만 루완 상단의 상품 중 가장 특색 있는, 주술이 걸린 드레스와 장신구만큼은 여전히 고위 귀족의 사랑과 지지를 공고하게 받았다. 제한적인 생산이며, 먼저 출시한 디자인이라는 점은 사치품에 한해서 그 가치를 높이는 요소이기 때문이었다.

루완 상단에서는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의 의상에 화려한 주술을 걸어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의 고급 상품을 만들었고, 이는 예외 없이 사교계의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물론 그 출시 기념회가 황궁에서 진행된다는 점, 그리고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다는 점도 루완 상단의 권위를 높이는 데 한몫 거들고 있었다.

“과연 이번에는 얼마나 대단한 상품이 나올지 궁금하네요.”

“사교계의 유행을 바꾸어 놓을 정도의 제품이 아니겠어요? 벌써 기대가 되는군요.”

아몬 백작 부인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두 여인이 기대에 차 호들갑을 떨었다. 수다를 좋아하고 유행에 민감한 그들은 사교계의 중요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인사들이었다.

“시점이 미묘해서 더욱 관심이 가네요. 바로 어젯밤에, 이데나 상단에서도 신제품 출시 기념회를 진행했으니까요.”

“어머! 저도 초대장을 받았었어요. 워낙 갑작스러워서 직접 가지 못했지만 조카를 대신 보냈답니다.”

“그럼 들으셨겠군요! 이번에 나온 물건이야말로…….”

“쉬잇! 어제는 몇몇 손님에게만 깜짝 공개를 한 거고, 정식 출시 전까지는 비밀이라고 들었어요.”

두 사람은 아몬 백작 부인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 속닥거렸다.

“……무슨 자신감으로 루완 상단 행사보다 하루 전에 갑작스런 기념회를 진행했나 했더니, 정말 태어나서 처음 보는 황홀한 드레스였어요.”

두 여인 중 젊어 보이는 한쪽이 속삭이듯 말하자 주변의 여인들이 관심을 보였다.

“대체 뭐였죠? 이데나 상단에서 출시한 상품이…….”

“솔직히 말하면 오늘 루완 상단에서 그 상품 이상 가는 물건을 선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그걸 선보이는 방식이…… 그러니까 뭐냐 하면…….”

젊은 여인은 나이 많은 여인에게, 나이 많은 여인은 그 옆의 다른 부인에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곧 방 안에는 작은 탄성들이 울려 퍼졌다. 아몬 백작 부인이 크게 헛기침을 해 모두의 시선을 끌 때까지.

“흠! 이데나 상단의 물건은 아무리 대단해도 아류예요. 그런 곳의 물건을 쓰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요?”

그녀의 일갈에 방 안은 조용해졌다.

“걱정 마세요. 공작 부인의 손을 거친 상품은 단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니까요. 곧 모두 알게 되겠죠.”

앙칼진 그녀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상기되었던 얼굴을 침착하게 바꾸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와 리페르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울리자 화려한 차림의 황제와 페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 옷감에 황금색 자수를 새긴 옷을 입은 두 사람은 큰 키며 매력적인 얼굴, 맹수를 연상시키는 눈빛까지 꼭 닮아 있었다.

계절마다 진행되는 이 행사에, 황제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것은 이 기념회를 어떤 상단의 행사보다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였다.

에핀하르트 대공이 바멜산에서 무사히 돌아온 후로 두 사람의 사이가 전만 못하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공식석상에서 페트라의 권위는 변함이 없었다. 황제는 여전히 그녀의 사업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인 잔을 손에 든 페트라가 입을 열자 웅성거리던 좌중은 조용해졌다.

“저희 상단에 오랫동안 보내 주신 관심과 애정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언제나 그렇듯, 루완 상단은 여러분의 기대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한 명 한 명의 손님과 눈을 맞추며 우아하게 말을 이었다.

“따라서 오늘 선보일 상품은 그 화려함, 아름다움, 그리고 독창성에서 과거에 존재했던 그 어떤 옷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손님들의 눈이 기대로 빛나는 모습을 보며, 페트라는 자신 있게 미소 지었다.

“그럼, 더 기다릴 것 없이 보도록 하죠. 우리 상단에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새로운 의상입니다.”

페트라의 말과 함께 문이 열리고, 커다란 악기를 든 악사 네 명이 등장했다. 의아함에 눈을 크게 뜬 손님들에게, 페트라는 세련된 미소를 보냈다.

악사들은 아무 말 없이 홀의 중간에 자리 잡고 연주를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춤을 추기에 딱 좋은 산뜻한 곡이었다.

손님들의 표정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바로 그 때, 악사들이 들어온 문이 다시 한 번 열리고 화려한 외모의 남녀가 손을 잡고 들어섰다. 그중 여인은 유난히 아름다운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여러분이 저 옷을 입고 무도회에 참석하면, 들어서는 순간부터 누구도 그 드레스에서 눈을 뗄 수 없을 겁니다.”

페트라의 설명은 음악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홀 안을 울렸다. 그녀가 젊은 남녀에게 눈짓하자,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머!”

아몬 백작 부인이 호들갑스럽게 탄성을 내뱉었다. 남자의 손을 잡고 한 바퀴 빙글 돌아선 여인의 드레스가, 밤하늘 같은 짙푸른 색에서 연분홍빛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시 능숙하게 두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러자 드레스는 다시 연녹색으로, 또 보랏빛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마치 시시각각 빛깔이 바뀌는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춤을 추었고, 여인이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드레스는 색을 바꾸었다. 악사들의 연주가 고조될수록 드레스는 극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이윽고 음악이 멎었다.

한 곡의 춤으로, 두 무용수는 구름처럼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매력을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 같군요!”

두 무용수의 춤이 끝나자 아몬 백작 부인이 크게 박수를 쳤고, 페트라는 자신 있는 미소로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짝짝…… 짝……

그러나 무언가가 이상했다. 여러 귀부인과 영애들은 잔잔한 미소를 띠고 박수를 쳤지만, 그 표정과 태도가 무척이나 어색했다. 마치 감탄이 나오지 않는 순간에 예의상 억지로 칭찬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역시 루완 상단이에요. 새로운 것을 따라 하는 재주밖에 없는 이데나 상단과는 다르다니까요!”

아몬 백작 부인도 묘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더더욱 분위기를 띄워 보려 애썼다. 그럴수록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어색해지기만 했다. 라일라 트리온도, 로렐라이 에드윈도, 옆에 서 있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게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죠?”

거슬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페트라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녀가 지목한 것은 아몬 백작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서로의 귓가에 뭔가를 속닥거리던 두 귀부인이었다.

“아니, 아닙니다. 무척 아름다운 드레스입니다.”

나이가 어린 쪽이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사람도, 또 다른 사람도 같은 표정으로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페트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몬 백작 부인 옆에 서 있던 다른 젊은 부인 한 명을 곁으로 불렀다. 사전에 심어 둔 또 다른 측근이었다.

“무슨 일인지 당신은 알고 있겠죠?”

모르면 죽여 버릴 것 같은 표정에, 젊은 귀족 부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합니다.”

“똑바로 말해요.”

“이, 이데나 상단이 어제 출시한 물건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페트라의 황금안이 무섭게 번뜩였다.

“이데나 상단에서 무엇을 내놓았다고요?”

“오, 오시기 직전에 베일린 자작 부인이 이야기한 것이 있어서…… 이데나 상단에서 어제 비밀리에 개최한 기념회에서 거의 같은 드레스를 선보였다고…….”

페트라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곁에 서 있었으나 그 침묵이 그녀를 더욱 짓눌렀다.

“더 자세히.”

페트라의 짧은 명령에 여인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재질과 디자인은 달랐지만, 한 번 돌 때마다 색깔이 바뀌는 점이 같았다고 합니다. 다만 그 색과 모양이 훨씬 다채롭고 화려했다고…… 비슷한 방식으로 옷을 소개했지만 무용수 한 쌍이 아닌 열 쌍을 초대해 각자 다른 의상을 입혀, 여러 무희들이 동시에 빙글 돌면 드레스의 색이 각자 더욱 눈부시게 바뀌어서, 몇 초에 한 번씩 연회장의 분위기가 극적으로 변해 황홀했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위험한 분위기에 눌려 점점 작아졌다. 이윽고 할 말을 다 한 그녀는 황제와 페트라를 두고 도망치듯 다른 여인들 곁으로 가 버렸다.

“……그럴 리 없습니다.”

페트라가 중얼거렸다.

“분명 제가 직접 기획한 것입니다. 아일린 이데나 그 계집이…….”

“누가 먼저 떠올린 생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너도 알다시피.”

황제가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냉정한 목소리가 어딘가 음산하게 들렸다.

“어떤 대단한 물건을 만들어도, 그 비밀을 경쟁자에게 들킨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게지.”

그는 냉소를 지으며 페트라로부터 등을 돌렸다.

“무능하구나.”

페트라의 두 눈이 커졌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에 그녀는 제대로 된 대꾸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

“폐, 폐하…….”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앞으로 내가 부르지 않으면 황궁에 오지 않아도 좋아.”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지나 사라졌다.

“폐하!”

페트라는 다시 한 번 황제를 부르며 그를 쫓아 복도로 나갔다.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않았던 우아함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홀 안에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본 여인들이 다시 한 번 부채 뒤로 수군거렸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폐하께서 공작 부인을 저리 대하시는 모습은 처음 봐요.”

“루완 상단의 행사가 이렇게 처참하게 실패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이데나 상단의 물건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을 신제품이라고 내놓을 줄은…….”

“애초에 비슷한 것을 훨씬 비싼 값에 파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나요?”

작지만 또렷한 말소리들이 홀 여기저기에 울렸다.

“조용히들 해요!”

아몬 백작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페트라를 변호했다.

“공작 부인의 능력을 10년 넘도록 지켜보신 분들이 겨우 이런 일에 동요하다니요.”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겨우 하루 차이로 출시된 상품이에요. 이데나 상단 측의 디자인이 크게 우월한 것도 아닐 테고…….”

“하지만 부인.”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부인이 직접 말하지 않았나요? 아무리 같은 아름다움을 가졌어도, 처음 출시되는 것과 그를 따라 하는 것의 가치는 전혀 다르다고요. 단 하루의 차이가 나더라도 두 번째로 나오는 물건은 그저 아류일 뿐이라고요.”

중년을 넘은 나이인 그녀는 이데나 상단의 기념회에 직접 참석했었던 베일린 자작 부인이었다. 한때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그녀는 유행을 보는 눈이 무척 날카로웠고, 패션에 대한 토론을 할 때에는 어떤 권위 앞에도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그건…….”

아몬 백작 부인이 말을 더듬었다. 베일린 자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루완 상단의 물건을 가장 사랑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예요. 이데나 상단에서 아무리 질 좋은 보석과 아름다운 드레스를 출시해도 나는 유행을 만들고 주도하는 루완 상단의 것을 더 높게 쳤었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장 큰 장점이자 유일한 장점이 이렇게 사라질 줄은 몰랐지 뭐예요.”

베일린 자작 부인은 잠시 시선을 떨어뜨리더니 들고 있던 부채를 접어서 손에 쥐었다.

“기념회는 이렇게 끝난 것 같군요. 더 기다려도 의미가 없겠어요.”

그녀는 벽 쪽에 서 있던 자신의 시녀에게 손짓했다.

“부인!”

아몬 백작 부인이 소리쳐 불렀으나 베일린 자작 부인은 이미 시녀와 함께 문을 나서고 있었다.

“공작 부인을 위해서도, 일단 모두 해산하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해요.”

차분한 그녀의 말에, 나머지 손님들도 하나둘씩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루완 상단의 실패에 대한 그들의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아가씨, 저희도 갈까요?”

눈만 깜빡이며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던 로렐라이 에드윈이 시녀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래야지.”

다른 사람들을 따라 홀을 나서며, 그녀는 고개를 돌려 라일라 트리온의 탐스러운 갈색 머리칼을 찾았다.

몇 걸음 뒤에서 숄을 걸치던 라일라가 어깨에 피어난 라일락을 손으로 가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는 둘도 없이 자랑스러워하던 장식이었다. 라일라는 자신이 거금을 들여 루완 상단의 최신 디자인을 구매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깨달음은 로렐라이를 멍한 충격에 빠뜨렸다.

마차에 오르며, 그녀는 자신의 치맛단에 피어난 장미를 바라보았다. 이데나 상단에는 이미 그보다 화려한 꽃을 피우는 다양한 드레스며, 그에 어울리는 장신구들이 많았다. 루완 상단의 것이 가치 있게 여겨졌던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오랜 기간 쌓아 왔던, 유행을 가장 먼저 이끌고 주도한다는 이미지였다.

“에바, 내일 아침 일찍 이데나 상단 소속 살롱에 예약을 잡아 줘.”

덜컹거리며 출발하는 마차 속에서 로렐라이가 말했다.

“어제 선보였다는 그 드레스를 입어 볼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간이 언제인지 물어봐.”

불과 몇 시간 전, 루완 상단이 출시하는 상품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디자인도, 가격도, 기술도, 독창성도, 정보력도, 어느 것 하나 경쟁자를 이기지 못해 망신당한 루완 상단의 물건을 공식 석상에서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는 에드윈 후작가의 외동딸이자 사교계의 장미인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시녀가 헷갈리지 않도록,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앞으로 모든 행사에서 이데나 상단의 최신 상품을 착용할 거니까 그렇게 알도록 해.”

* * *

“언제 오신다고 하셨소?”

에스테반 자작이 불안한 듯 물었다.

“아직 조금 남았으니 기다립시다.”

트리온 후작이 말을 받았다. 에드윈 후작도, 그리고 몇몇 다른 귀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수도에 있는 트리온 후작저의 작은 회의실에서 비밀리에 모여 있었다. 늦은 밤이었기에 어둑어둑한 회의실의 벽에는 작은 횃불만 드문드문 보였다.

장소는 트리온 후작의 저택이었지만 그들을 초대한 것은 에핀하르트 대공이었다. 그는 바멜산에서 돌아와 상처를 치료한 후, 트리온 후작에게 은밀히 연통을 넣어 중립 귀족들을 모아 달라고 요청했다.

자신의 영지 관리 부실로 카엘리온의 목숨이 위험했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껴 온 트리온 후작은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의 정치적인 입장이 황제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점도 그 선택에 영향을 주었다.

지금껏 대공과 연락을 유지하되 완전히 가깝지는 않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트리온 후작과 다른 중립 귀족들은 곧 마음을 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유능한 대공은, 과연 황실 직계인 패리스를 누를 정도의 사내인가?

그들은 바로 오늘 그 점을 판단할 것이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둥근 테이블의 한쪽 끝에 앉은 에스테반 자작이 물었다. 그도, 다른 귀족들도 아직 에핀하르트 대공을 지지하는 데에 완전한 확신이 없었다. 그의 능력은 출중했지만 황제 후보로 보기엔 그 혈통이 직계와 너무나 멀었다.

더군다나 최근 바멜산의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한 것은 그가 아닌 아폴로니아, 즉 현 황제의 딸이자 패리스의 누이동생이었다. 이는 처음부터 갈피를 잡지 못하던 중립 귀족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황실의 분위기 또한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다. 황제의 측근으로 공고하게 자리 잡았던 리페르 공작 부인이 최근 황실 출입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소문이 돌면서 권력의 귀추는 미궁에 빠졌다.

“글쎄,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이…….”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두 분 손님과 함께요.”

시종 한 명이 방에 들어서며 말했다. 조금씩 지쳐 가던 사람들이 다소 긴장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윽고 검은 고수머리를 가진 장신의 청년, 에핀하르트 대공이 회의장에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것은 그의 친우이자 한때의 봉신인 유리엘 비체였다. 두 사람보다 반걸음쯤 뒤에서, 로브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누군가가 따라 들어왔다.

몇몇 귀족들이 유리엘을 보며 수군거렸다. 황녀의 호위이자 연인이 된 그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두고, 비체 백작의 충성심은 결국 오랜 기간 함께한 옛 주군을 향한 것인가 하며 술렁이는 것이었다.

또 다른 몇몇은 로브 속의 인물에게 경계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비밀스러운 회의에 정체불명의 자가 들어온 것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먼 길 와 주셔서 고맙소. 장소를 빌려준 후작도.”

카엘리온이 입을 열었다. 분산되었던 시선은 다시 그에게 집중되었다.

“내가 그대들을 부른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라 믿소.”

귀족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긴장한 채 카엘리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기 있는 이들 중 다수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가 저택의 주인인 트리온 후작의 방향을 보며 말했다.

“이제 숨길 것도 없으니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하겠소.”

귀족들 중 누구도 섣불리 대답하지 않자, 그는 빙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황위에 무척 관심이 많소.”

순간 회의장이 술렁였다. 귀족들이 어느 정도 예상했던 말이었지만, 다른 준비도 없이 노골적으로 진의를 드러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카엘리온은 그들의 반응을 보고도 그저 살며시 웃기만 할 뿐이었다. 옆에 서 있는 유리엘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대공 전하의 인품이며 능력을 모르는 자는 없습니다. 다만…….”

에스테반 자작이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미 황태자 전하가 계신 지금,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전하와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황실에 도전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카엘리온에 대한 완전한 믿음이 없는 그들은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카엘리온의 투박한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른 근거나 확신이 필요했다.

“그대들이 원하는 황제의 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소. 선황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아폴론의 후예, 언제나 제국의 안위를 우선하는 마음을 가진 왕재, 그리고 위험으로부터 제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귀족들이 다시 한 번 웅성거렸다.

“정확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트리온 후작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카엘리온은 자신이 말한 황제의 상에 부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 정통성이 문제였다.

바멜산에서 단숨에 마물을 섬멸한 주인공이 되어 그 기세를 몰아갈 수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는 황실 직계인 아폴로니아에게 그 후광을 빼앗기지 않았나.

“그대들은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군.”

웅성거리는 귀족들을 둘러보던 카엘리온이 말했다.

“나는 황위에 누가 앉는지 관심이 있다고 했을 뿐, 내가 그 자리를 원한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소.”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갈 곳을 잃은 눈빛들만 혼란스럽게 흔들릴 뿐이었다.

“선황께서 직접 지정하신 후계자, 아폴론의 피를 이어받은 직계, 제국의 안위와 번영을 위한 혜안을 가진 분이 계시는 한, 다른 누구도 그 자리를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오.”

카엘리온이 말을 이었다. 입가의 미소는 사라지고 목소리에는 엄중함이 실려 있었다.

“나는 오늘, 그대들에게 그분을 소개하기 위해 이곳에 왔소.”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뜬 귀족들 앞으로, 로브를 쓴 채 카엘리온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이 한 걸음 나섰다. 한순간에 모든 이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그들은 카엘리온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얼떨떨한 표정으로 로브를 쓴 자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 사람은 천천히 손을 올려 머리까지 덮은 로브를 젖히고 얼굴을 드러냈다. 태양 같은 금발, 오묘한 금적안, 신비롭고 여유 넘치는 미소까지. 전설 속 아폴론 신의 모습과 꼭 닮은 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여인이 로브를 벗음과 동시에 카엘리온과 유리엘이 그녀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의 주군, 황녀 아폴로니아 전하이시오.”

그 자리에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귀족들 사이로, 카엘리온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대공 전하의 말씀은 설마.”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어느 젊은 남작이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설마, 설마 황녀 전하께서 직접 황위를 잇는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그의 물음에 굳어 있던 분위기가 깨졌다. 귀족들은 동시에 여기저기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옆 사람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고, 일부는 남작의 의문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6명의 약혼자들조차 지키지 못했던 그녀였다. 패리스에게 치이고 황제에게 눌려 어떠한 야심도 드러낸 적 없는 황제의 둘째 자식이 갑자기 황위에 오르고자 한다니?

“카엘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내가 다시 한 번 말해 주지.”

차분한 목소리가 회의장에 깔렸다. 남작은 그 주인을 확인하고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말을 꺼낸 것은 아폴로니아였다. 그녀는 카엘리온의 어깨에 손을 얹어 일어나라고 지시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대공에게 명령을 내렸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회의장 안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아폴로니아는 부담은 조금도 느끼지 않는 듯 방 중앙에 서서 그들의 눈빛을 받았다.

“정식으로 선언하지. 나는 선황이 인정한 단 한 명의 후계자, 아폴론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직계 황족이자 여기 있는 에핀하르트 대공의 주군, 아폴로니아 알리스테어 페르디안이다.”

긴 침묵이 회의장을 메웠다. 원탁에 둘러앉은 귀족들 중 누구도 그녀의 말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아폴로니아의 모습은 그들이 알던 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눈부신 머리칼도, 독특한 눈동자에 예쁜 외모도 그들이 알던 그대로였지만 그 눈빛이며 목소리에서는 묘한 위엄과 여유가 동시에 느껴졌다.

약혼자들에게 버림받고 황제의 앞에서 울던 그녀가 아니었다. 귀족들은 그녀의 선언을 섣불리 받아들일 수도, 반박할 수도 없었다.

다만 트리온 후작과 에드윈 후작, 그리고 에스테반 자작 세 사람만은 무언가 깨달은 표정이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승전 기념 무도회 때 그녀가 가레스에게 물러나라 명령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전하.”

조금 전 말을 꺼냈던 젊은 남작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선황께서 황녀 전하를 후계로 인정하셨다는 말은, 저로서는 금시초문입니다. 먼저 태어난 황태자 전하를 두고 그리하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는 아폴로니아가 미치기라도 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몇몇 젊은 귀족들이 그에 동조하는 눈빛을 보냈다.

“에릭 하비트 남작이로군.”

아폴로니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긴장한 듯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아폴로니아에게 꽂혀 있었다.

“그대의 의심은 타당하네. 젊은 그대는 선황이 살아계셨을 때의 상황을 모를 테니까. 다행히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 잘 아는 사람이 이곳에 있지.”

그녀는 잔잔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다음 순간 회의장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의 귀족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에드윈 후작.”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린 시절의 스승을 불렀다.

“내가 사사했던 스승들 중 다수는 이미 죽거나 쫓겨났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대 한 명이네. 그대는 선황이 무슨 뜻으로 나에 대한 지도를 명하셨는지 잘 알고 있겠지.”

“황녀 전하…….”

에드윈 후작이 입술을 떨며 대답했다. 그의 눈빛은 복잡했다. 어린 시절부터 알아 온 그녀에 대한 반가움과 벅참, 그리고 지금 아폴로니아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조차 믿기 어렵다는 의아함 등이 섞여 있었다.

“……전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하비트 남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시 전하께서 어리셔서 공개적으로 황태자의 지위를 내린 것은 아니었으나, 선황께서는 분명히 패리스 전하가 아닌 황녀 전하를 후계로 여기고 계셨습니다.”

회의장이 술렁였다. 그러나 에드윈 후작은 말을 계속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 이를 누설하는 자들을 엄히 처벌했기에 감추어졌던 일이지요. 허나 황녀 전하.”

그는 여전히 혼란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폴로니아에게 말했다.

“전하의 총명함은 제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어린 시절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전하께서는 비범함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그는 얼마 전 가레스에게 맞섰던 아폴로니아의 모습을 떠올리는 듯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폴론의 후예라는 호칭은 단순히 핏줄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전하의 팔에는…….”

그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폴로니아는 로브를 살짝 걷어 올려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오래된 듯하지만 선명한, 검붉은 흉터가 보기 싫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폴론 신의 제국에서 불에 취약한 황제를 둔다면 제국민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선대 폐하들 중에서도 화기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한 분은 안 계셨으나, 대부분 화상을 입어도 곧 회복이 되셨기에 이토록 눈에 띄는 흉터를 가졌던 분은 안 계셨습니다.”

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으며 로브를 더 걷어 올렸다. 흉터로 덮인 팔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대의 말은 모두 옳아.”

그녀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검붉은 흉터를 쓱 하고 문질렀다.

“아니!”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폴로니아의 팔에 있던 화상은 몇 번 손으로 문지르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깨끗하고 하얀 팔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카엘리온이 벽에 걸린 채 방을 밝히고 있는 횃불을 내려서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아폴로니아는 망설임 없이 횃불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저, 전하! 조심하십시오!”

몇몇 사람들이 소리쳤으나 그녀는 횃불로 자신의 손과 팔을 가볍게 훑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고, 불에 닿은 피부는 여전히 깨끗했다. 귀족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아폴로니아가 불을 들었던 시간은 짧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충분히 화상을 입었을 접촉이었다. 아니, 선황도, 그 선대도 불을 직접 만지는 모습을 신하들에게 보인 적은 없었다.

최근 들어 패리스가 병사들 앞에서 자신의 핏줄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재빨리 불 속에 팔을 집어넣다 빼는 모습을 보여 줄 때가 있었지만, 이 또한 찰나의 순간 옷 위로 하는 행동이기에 귀족들은 이를 그저 주술을 이용한 사기 증진 정도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보여 준 것은, 유례없이 짙은 아폴론의 피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답이 되었나? 내가 왜 5년 동안이나 팔에 물감을 칠하고 살아야 했는지 그대는 짐작하겠지.”

아폴로니아가 횃불을 다시 카엘리온에게 넘기며 에드윈 후작에게 말했다. 그는 커진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황이 죽자마자 아폴로니아를 별궁으로 몰아내고 그녀와 가까이 지내던 스승들 대부분을 처단한 황제였다. 아폴로니아가 화재로 크게 다쳤다는 말이 돌기 전까지 황제가 그녀를 견제했다는 사실을, 에드윈 후작은 알고 있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애매하게 황제를 지지하는 척했으나 그는 언제나 아폴로니아를 안타깝게 여겨 왔다.

“하, 하지만 황태자 전하는 어떡합니까!”

또 다른 귀족 한 명이 소리쳤다.

“황녀 전하와 마찬가지로 금발에 금적안을 가진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직계이고 현 황제 폐하의 아들입니다. 선황 폐하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황녀 전하를 지지하는 것이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아폴로니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자 그 귀족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로군.”

아폴로니아의 또렷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회의장에 울렸다.

“여기 있는 모두는 5년 전까지 패리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겠지. 그의 눈동자가 황실의 색을 띤 것은 그가 청년이 된 이후였네.”

회의장의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리스는 열여덟이 넘고 나서 눈동자 색이 변했다. 황제는 그것이 뒤늦은 발현이라 공표했지만 선례가 없는 일이기에 많은 사람들의 의아함을 샀던 일이다.

“길게 설명하지 않겠네. 패리스가 황궁 밖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겠지. 그는 리페르 가문의 사람이지만 어머니의 친생이 아니야. 이는 선황께서 알면서도 어머니를 위해 묵인해 주셨던 사실이네. 물론 황자 이상의 지위는 허락하지 않으셨지.”

그녀가 짧게 내뱉은 몇 마디에, 회의장의 귀족들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눈동자의 색은 주술로 바꿀 수 있네. 그가 진정 어머니의 자식이었다면 사내이자 장자인 그를 두고 선황이 굳이 나를 후계로 세울 이유도, 그의 눈동자가 뒤늦게 변이할 이유도 없어.”

“하, 하지만 전하, 그런 주술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눈동자의 색을 바꾼다니…….”

조용하던 트리온 후작이 말을 꺼냈다.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트리온 가문은 유서 깊은 명문가로서 오랜 기간 황실과 함께했으나, 선황이 죽은 후로 상당히 최근까지 가이우스 황제에게 충성해 왔다.

10년 전의 트리온 후작에게 그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황제의 정치가 선황의 그것과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지만 어쨌든 그는 황실의 일원이었으니까.

무엇보다 황실의 장자인 패리스가 황위를 물려받기 전까지 가이우스는 패리스의 가장 적절한 보호자이기도 했다. 즉, 트리온 후작은 자신의 행동이 황실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이우스가 패리스의 혈통에 대해 거짓을 말했다면 상황은 달랐다. 만약 그렇다면 황제는 외부인에게 제국을 넘기려 하는 반역자였고, 트리온 후작은 반역을 도운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고급 주술이지. 그러나 원한다면 지금 보여 주겠네.”

그녀는 로브 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며 유리엘에게 손짓했다.

“잘 보도록 해.”

유리엘은 말없이 씽긋 웃더니 그 병을 가져가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아, 아니!”

“비체 백작의 눈이…….”

차가운 심해와 같이 푸르던 눈이 몇 초 만에 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시.”

그녀는 다른 약 한 병을 유리엘에게 건넸다.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받아 마신 그의 눈이 연녹색으로 빛났다. 평소처럼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더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이 정도 보여 주어도 믿지 않는다면 더 설명하지 않겠네. 애초에 패리스의 혈통은 중요하지 않아.”

“하, 하지만 전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트리온 후작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는 여전히 가이우스 황제가 반역을 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들이 황실 직계인 황제를 원했다면 애초에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테니까. 핏줄이 아닌 자질을 보는 그대들이기에 패리스와 카엘, 두 사람을 놓고 망설이지 않았나?”

그녀의 말에 귀족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확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패리스의 혈통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가 좋은 황제가 되리라고 여기지 않았었다. 이는 카엘리온이 그의 경쟁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어떻습니까?”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그 순간, 에드윈 후작이 조용히 물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황태자에게 없는 자질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폴로니아는 그의 표정에서 십수 년 전 보았던 날카로움을 발견했다. 현실과 타협하며 그 예기를 잃어버렸지만, 과거에 그는 애매한 대답이며 근거 없는 주장을 용납하지 않는 엄한 스승이었다.

다만, 지금 아폴로니아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간절한 희망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부디 왕재로서의 자질을 갖췄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제국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감히 묻고 싶습니다. 전하 또한 가이우스 황제 폐하의 딸이 아닙니까? 지난 세월 세금이며 불필요한 전쟁으로 모두가 힘들어하는 동안, 전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언뜻 들으면 무례한 언사였지만 이는 오히려 기회였다. 바로 그녀가 듣고 싶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나는 긴 대답은 하지 않겠네. 대신 몇 가지 사실관계만 말해 주지.”

그녀는 천천히 입을 뗐다.

“지금 제국에서 백성들이 가장 풍요롭게 사는 곳이 어디인가?”

“……남부의 리샨 지방과 그 부근입니다.”

“그다음은?”

“에핀하르트 대공령, 그리고 비체 백작령…….”

“리샨은 나의 유일한 영지이고, 대공과 비체 백작은 모두 나를 주군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은 그대도 알고 있겠지.”

“허나 리샨의 풍요에 기여한 것은 황실이 아닌 이데나 상단이 아닙니까.”

에드윈 후작이 끈질기게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이를 환영했다. 치밀한 반박이 있어야 깔끔한 설득도 가능할 것이다.

“집시들만 있는 황량한 땅에 거대한 상단이 들어서고 자선 사업을 벌였지요. 사업가로서는 드물게, 백성들의 고충을 듣고 영주 대리와 함께 새로운 제도의 정착을 돕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상단의 사업을 허락하고 대리인을 세운 것 외에 또 무엇을 하셨는지요?”

“후작.”

“리샨을 부흥시킨 것은 분명 업적이나, 그것이 황제의 자질이라면 진정한 왕재는 아일린 이데나 상단주가 아닙니까?”

몇몇 귀족들이 후작의 씁쓸한 농담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폴로니아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후작, 그대는 이데나 상단주가 누구라고 생각하지?”

“예? 그 사람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상단의 인장이 여기 있네. 그 문양을 모르는 자는 없을 거라 믿어.”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에게 손짓하자, 그가 품속에서 청색으로 빛나는 사각형 인장을 꺼내보였다.

“드물게 마정석을 조각해 만든 것으로, 조작은 불가능하지. 혹시 믿지 않는다면 이것도 보게. 지난 번 강철 사업 때 그대의 가문에서 이데나 상단주에게 보냈던 서신을 그대로 가져왔으니.”

인장과 서신을 번갈아 보는 에드윈 후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장도, 서신도, 이데나 상단주 본인이 아니라면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이, 이것을 대체 어떻게 전하께서…….”

“글쎄, 어떻게 한 것 같은가?”

에드윈 후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초기에 리샨과 남부 지방 위주로 부흥했던 이데나 상단의 사업, 딱딱 들어맞은 영지의 제도와 상단의 활동, 과할 정도로 자주 진행되었던 상단의 자선 사업, 거기에 아폴로니아의 손에 들린 서류며 인장을 조합하면 떠오르는 결론은 하나였다. 그러나 에드윈 후작은 차마 그 말도 안 되는 결론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이미 깨달았겠지만, 여기 계신 황녀 전하와 이데나 상단주는 같은 사람이오.”

카엘리온이 조용히 한 마디 거들었다. 회의장의 귀족들은 다시 한 번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나와 비체 백작의 영지는 둘 다 아일린 이데나와 많은 거래를 해 왔으니 틀림없는 사실이지.”

“하지만…….”

“믿기지 않는다면 빨리 정리를 해 주지.”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그 곳의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트리온 후작, 그대의 과일 사업 제안에 대한 우리 상단의 답변은 오늘 도착했을 거야. 정확한 수익을 계산한 답변이지. 하비트 남작에게도 오늘 오전에 하나의 서신이 갔었으나 그 내용은 영업 비밀이니 말하지 않겠어. 에스테반 자작은 쭉 거래가 없었지만, 이틀 전 상단의 대리인을 영지로 보내 달라고 요청한 바가 있었지.”

그녀는 언급한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너무나도 정확한 정보에 누구도 반박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하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버지가 알았다면, 나를 절대로 그냥 두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그대들도 잘 알 테니까.”

회의장의 분위기는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녀를 미친 사람처럼 보던 귀족들은 이제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더 궁금한 점이 있는가?”

아폴로니아가 다시 물었다. 회의장 안은 대답 없이 고요했다.

“없다면…….”

“딱 한 가지…….”

하비트 남작이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었다. 그의 태도는 조금 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아폴로니아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동경과 호기심, 그리고 파악하기 어려운 상대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까지 있었다.

“물어도 좋아.”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몇 분 전이었다면 그녀의 허락이나 명령을 듣는 것을 불쾌히 여겼을지 모를 이 젊은 귀족은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지만 전하, 제국은 본디 무를 숭상하는 나라로…… 군공을 세우지 않은 황제는 무척이나 드물었습니다.”

아폴로니아는 미동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하비트 남작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선황은 물론 가이우스 황제도, 패리스도, 카엘리온도 예외 없이 이름 높은 무장이었다. 기사들의 도움을 입는다고는 하나, 마물을 섬멸하고 적들을 소탕하는 강인함은 황제에게 빠져서는 안 되는 자질이었다. 그러한 자질을 갖추지 않은 자가 황위를 노릴 경우, 제국 내부는 물론 외국에서도 반발하는 목소리가 있을 수 있었다.

“남작은 잊은 건가?”

머뭇거리는 하비트 남작을 상대로 입을 연 것은 트리온 후작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대공 전하조차도 물리치지 못한 바멜산의 마물을, 병력도 없이 상대한 것은 다름 아닌 황녀 전하셨네.”

예상 외로 호의적인 말에, 아폴로니아가 눈을 들어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많은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군공이란 직접 전장에 나가야만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병법이지.”

아폴로니아의 뒤에 서 있던 카엘리온이 말했다.

“선대 황제 중에는 장애를 입은 채 침실에 누워 군사들에게 전쟁을 지시한 분도 계셨소. 무예를 알지 못하는 분들 또한 많았소.”

“그것은 사실이지만 황녀 전하께서는 병법에도 능하지가…….”

하비트 남작이 말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하는 그의 모습에, 아폴로니아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들렸다. 귀찮기는 하지만, 곁에 두면 나름대로 유용할 자였다.

“전하께서는 나의 병법 스승이시오.”

카엘리온이 다시 한 번 말했다. 그의 말에 귀족들의 눈이 다시 한 번 커졌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지. 소년 시절부터 직접 병법서를 골라 나를 가르치셨소.”

하비트 남작은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카엘리온이다. 병법에 있어서는 과거의 가이우스 황제조차 그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이 주론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그를 가르친 사람이 아폴로니아라면, 누군들 그녀의 능력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에드윈 후작이라면 알고 있겠지. 전하께서 병법에 어느 정도의 재능을 보이셨는지.”

에드윈 후작은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기쁨이 서려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전하께 군공이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겠군요.”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 전쟁에서 제국이 쉽게 승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이데나 상단에서 지원한 강철, 검, 활이며 식량 덕분이었으니 말입니다.”

에드윈 후작의 말에 회의장 안의 대부분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조차도 인정한 공로였지요. 사실은 항상 궁금했습니다. 젊은 여인이라고만 알려진 상인이 대체 무슨 수로 전쟁의 흐름을 읽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에드윈 후작의 옆에 있던 에스테반 자작이 덧붙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이데나 상단에서는 파나스 왕국에서의 장기적인 포위를 예상하고 식량을 공급했고, 로윈 왕국과의 전투에서는 지형과 상황을 고려해 원거리 공격에 적합한 활을 공급했다. 그 밖에도 전쟁 내내 제국군의 상황을 귀신같이 파악해 부족한 물건을 빠르게 지원했다.

한때 루완 상단의 경쟁자로서 황제에게도 패리스에게도 그저 거슬리는 존재일 뿐이었던 이데나 상단은, 전쟁에서의 활약을 통해 제국과 황실의 든든한 조력자라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다.

하비트 남작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하기 전에 다른 목소리가 그의 말을 막았다.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이 있는데.”

수십 개의 눈동자가 목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회의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유리엘이었다.

“나 또한 전하께 병법을 배웠으며, 전하께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몸이오. 그렇기에.”

어느새 청색으로 돌아온 그의 눈동자가 아폴로니아를 향했다가 다시 하비트 남작에게 꽂혔다. 살기도 악의도 없는 시선이었지만 하비트 남작은 하얗게 질려 시선을 피했다.

“나는 오랫동안 전하만을 위해 검을 들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생각이오.”

하비트 남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리엘 비체, 그는 대륙에 적수를 찾을 수 없는 검사였다. 어린 나이에 황실 사냥 대회의 우승자가 되었던 것은 물론, 그 후 전장에서 신과 같은 능력을 발휘해 수없이 많은 목숨을 거두고, 그보다 더 많은 목숨을 지켜온 자였다.

단신으로 군대 하나를 상대하는 그가 아폴로니아를 위해 움직인다면, 그녀 자신이 검을 다룰 수 있는지 없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유리엘이 주군으로 모시는 자는 그 자체로 강했다.

긴 정적이 흘렀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들여다보았다. 누군가는 두려움에 눈빛이 흔들렸고, 누군가는 충격 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명도 아폴로니아로부터 시선을 떼지는 못했다.

“전하.”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트리온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가이우스 황제 폐하를 지지해 왔던 제가, 전하의 어려움을 모른 척했던 제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허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트리온 후작가는 전하와 운명을 같이 하고 싶습니다.”

후작은 아폴로니아의 바로 앞까지 걸어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간의 불충을 씻을 기회를 주십시오.”

늙은 후작의 목소리에는 분명히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이들 중 지난 십수 년간 외적으로나마 아버지에게 충성하지 않은 자는 없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야.”

그녀는 귀족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러니 그대들을 불충하다고 단죄하지 않겠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멈추자 회의장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모여 있는 이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밝히는 바, 황제 가이우스는 선황과 어머니를 죽인 반역자이며, 그 아들 패리스는 황족이 아니야.”

회의장에는 다시 한 번 정적이 흘렀고, 귀족들의 눈빛은 크게 흔들렸다. 패리스의 혈통을 밝힌 순간부터 모두가 의심했던 정황을 아폴로니아가 확인해 준 것이다. 트리온 후작이 주먹을 꾹 쥐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니 바로 이곳에서, 그대들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나와 함께 반역자를 처단하거나, 아폴론의 후예를 적으로 돌리거나.”

낮고 위엄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예리하게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타는 듯한 붉은 눈, 그 속의 황금빛이 그들을 꿰뚫을 것처럼 쏘아보았다.

‘따라야만 한다.’

한 가지 생각이 모두의 머리를 스쳤다.

아폴로니아는 ‘선택’이라 했지만 그녀가 내린 것은 명령이었다. 더 이상의 반박은 듣지 않겠다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는 포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전하를 유일한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에드윈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트리온 후작의 옆으로 걸어 나왔다.

“불충을 씻을 기회를 주십시오.”

그는 트리온 후작 옆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옛 제자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귀족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중립은 끝났다.

아폴로니아는 그들이 모실 수 있는 유일한 주군이었고, 그녀의 말에 반박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전하를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전하를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비트 남작도, 에스테반 자작도 자리에서 걸어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한 명씩 한 명씩, 회의장의 모든 이가 그녀 앞에 머리를 숙였다.

“전하를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침내 모든 귀족들의 목소리는 하나가 되어 회의장에 울렸다. 아폴로니아의 금적안이 강하게 빛을 뿜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자신에 찬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의 신하들이여.”

그녀가 말했다. 충성을 맹세하던 귀족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한 명 한 명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들과 함께, 나는…….”

아폴로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해 왔던 다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떨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 있는 모든 이의 진심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잃었던 황위를, 나의 제국을 반역자의 손에서 되찾아 올 것이다.”

아폴로니아의 엄숙한 선언이 무릎 꿇은 모든 이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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