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사랑할 때
쏴아-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먼저 떠났습니다. 마차는 전하께서 쓰시라고 놔두고 가더군요.”
녹스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돌아온 유리엘이 말했다. 그는 머리뿐 아니라 몸 전체가 다 젖어 있었다.
“유리엘.”
생각에 잠겼던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아예 돌려 버렸다.
아폴로니아답지 않았다. 유리엘 쪽은 아폴로니아의 눈짓, 몸짓 하나 하나에 과민하게 반응하며 시선을 피하거나 하려던 말을 안 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아폴로니아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유리엘이 물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모두가 전하를 찾고 있습니다.”
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제가 타고 온 말을 마차에 매어 보겠…….”
“기다려.”
다시 문 쪽을 향하는 유리엘의 손을 아폴로니아가 붙잡았다.
“할 말이 있었는데…….”
아폴로니아가 여전히 평소 같지 않은 모습으로 말을 흐렸다. 조금 전의 일로 초췌해졌지만, 그녀는 새삼스럽게 아름다웠다. 살짝 흐트러진 황금빛 머리카락도, 이상하게 상기된 것 같은 뺨도. 작고 낡은 오두막 안에서 아폴로니아는 혼자 우아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유리엘을 붙잡은 아폴로니아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유리엘은 갑자기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아 호흡이 빨라졌다.
“……전하?”
“유리엘.”
아폴로니아가 갑자기 결심한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금적안이 평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분명했다. 그녀는 갑자기 평소보다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
그녀가 다시 한 번 입술을 달싹거렸다. 유리엘은 입술을 향하는 자신의 시선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폴로니아의 입에서 그의 모든 사고를 정지시키는 말이 나왔다.
“좋아해.”
몇 초인지, 몇 분인지 모를 정적이 흘렀다. 유리엘은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꿈인가 생각해 보았지만 아폴로니아는 분명히 거기 있었다. 정신을 빼놓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은 채.
‘좋아해.’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어떤 오해의 여지도 없이.
빗소리도, 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온몸이 저릿한 가운데 그의 신경은 아폴로니아와 닿아 있는 자신의 오른손에만 집중되었다.
그녀의 손은 작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어린아이도 뿌리칠 수 있을 만큼 살며시 잡은 손이었지만, 유리엘에게는 그 가벼운 접촉이 강철 사슬로 묶어 두기라도 한 것처럼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유리엘.”
아폴로니아의 입술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짙은 붉은 눈동자 속 황금빛이 일렁거렸다. 언제나 냉철하고,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고고하던 그 눈이 그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의 반응을 걱정하는 듯.
미치도록 예뻤다.
“유리…….”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폴로니아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이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유리엘은 문 쪽을 향하던 몸을 돌려 아폴로니아 앞에 섰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긴장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는 작고 약해 보였다. 목에 검날이 닿은 채 협박을 당해도 눈을 똑바로 뜨고 있던 조금 전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랐다.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몸을 숙여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아폴로니아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좋아해, 유리엘.”
달콤한 그 말 한마디가 그의 뇌리를 울렸다. 유리엘의 심장이, 아니 온몸이 거세게 전율했다. 아폴로니아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금적안은 연약하게 흔들렸지만, 동시에 그를 집어삼킬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유리엘의 시선은 아폴로니아의 눈을 지나 붉게 물든 뺨으로, 그리고 다시 더 아래로 향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창백한, 그러나 더 아름다운 입술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유리엘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아폴로니아가 앉은 곳 바로 옆에 걸치고 몸을 더 숙였다. 아폴로니아가 살짝 몸을 떠는 것이 보였지만 그녀는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그를 잡고 있던 마지막 이성이 툭 하고 끊겼다.
“저도 좋아합니다.”
나지막이 속삭이며 유리엘은 그대로 얼굴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천천히 감기는 것이 보였다.
아니, 사실은 사랑해.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 시절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아.
나의 전하, 나의 주인.
나의 황제.
나의 여신.
나의 아폴로니아.
달콤한 향기가 훅 풍겨 왔고, 선혈처럼 붉은 유리엘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다. 입 속에서 두 사람의 혀가 얽혀 정신을 마비시켰다. 유리엘은 한 손으로 아폴로니아의 등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단단하게 그녀를 안았다.
젖은 셔츠 너머로 그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쾅쾅거리는 심장도.
아폴로니아는 눈을 감은 채로 그를 받아들였다. 숨도 쉬지 못할 것같이 황홀한 자극이 몇 분간 이어진 끝에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유리엘은 잠시 그녀를 놔주었다가 아쉬운 듯 다시 한 번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난 안 가르쳐 줬는데.”
아폴로니아가 한숨을 몰아쉬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모든 것을 배워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유리엘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귓가에서 울릴 때 가장 달콤했다. 아폴로니아는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평소보다 짙은, 끝을 모를 심해를 닮은 눈.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이, 긴 속눈썹 끝에 매달린 작은 물방울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한때 이 눈이 차갑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의 시선은 분명 아폴로니아를 향해 불타고 있었으니까.
“……사랑합니다.”
유리엘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아폴로니아의 입가에 주체할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아까는 좋아한다며.”
“둘 다입니다. 제게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유리엘이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뺨을 감쌌던 손을 더 뻗어서 그의 목에 둘렀다. 두 사람이 완전하게 포옹을 하자 유리엘의 젖은 은발이 목덜미에 닿았다.
“알아.”
아폴로니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유리엘의 팔이 더욱 단단하게 감겨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한참 동안 그렇게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완전한 행복이었다.
찰박.
그러나 그들이 겨우 몸을 뗐을 때, 부서진 오두막의 문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뭐…….”
유리엘과 아폴로니아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발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카엘리온!”
아폴로니아가 소리쳤다. 쏟아지는 빗속으로 돌아서는 모습은 분명히 그였다. 그녀의 부름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는 타고 온 말에 다시 올라 돌아가고 있었다.
“……봤구나.”
아폴로니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걱정이 되십니까?”
유리엘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의 한쪽 손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에 감겨 있었다.
“……조금. 하지만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르지.”
그녀는 허리를 감싼 유리엘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말했다.
“숨길 생각은 조금도 없어.”
* * *
그들은 자정이 조금 넘어 별궁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작은 강아지를 닮은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뛰어들었다.
“전하!”
아드리안이었다. 아폴로니아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작은 그녀는 유리엘을 밀쳐 내다시피 하며 아폴로니아를 껴안았다.
“전하…… 죄송해요. 죄송해요, 전하. 제가 편지를 전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아폴로니아를 붙잡은 채 한참을 흐느꼈다.
“내 앞으로 온 편지를 누구 마음대로 전하지 않는다는 거지?”
아폴로니아는 일부러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은 아드리안을 더 서럽게 울게 만들 뿐이었다.
“그, 그럼, 그럼 제가 가지 마시도록 말렸어야…….”
“아드리안, 넌 아무 잘못도 안 했어. 내가 가겠다는 걸 네가 무슨 수로 말려.”
아폴로니아가 아드리안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고 말했다. 작은 시녀는 몇 번 더 훌쩍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몸은 괜찮으신 거예요? 비는 안 맞으셨어요? 유리엘 님은 맞으셨는데!”
아드리안이 그제야 비에 흠뻑 젖은 유리엘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는 괜찮…….”
“너무 가까이 있다가 전하께서도 젖으신 거 아니에요? 드레스 앞쪽이 축축해요!”
유리엘은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으나 아드리안은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오직 아폴로니아의 주변을 돌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이상하네, 열은 없는데 얼굴은 빨개지셨어요. 뭘 하다 오셨기에…….”
아드리안이 아폴로니아의 이마를 짚으며 말하자 아폴로니아가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유리엘도 몇 차례 헛기침을 했다.
“아드리안, 카엘리온이 혹시 오지 않았어?”
아폴로니아가 화제를 돌릴 겸 물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유리엘님과 비슷하게 흠뻑 젖어서 오시더니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덕분에 전하께서 무사하시다는 말을 일찍 전해 들었죠.”
아드리안은 여전히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며 유리엘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말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사실 유리엘의 건강을 상당히 신경 쓰는 편이었다. 호위 기사가 아프면 아폴로니아에게도 피해가 가기 때문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숨을 한번 내쉬고는 서재로 향했다.
“전하.”
“금방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줘.”
유리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지만 아폴로니아는 살짝 웃어 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철컥.
서재의 문을 열자 그 안에 보이는 것은 소파에 늘어진 카엘리온의 긴 몸이었다.
그의 앞에는 아드리안이 가져다준 듯한 수건이며 마른 옷과 차가 놓여 있었지만 그는 어떤 물건에도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젖어서 평소보다 조금 더 곱슬거렸고, 단단한 턱선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내가 찾아가려 했는데.”
“그러실 것 같아서 왔습니다.”
카엘리온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카엘, 아까 있었던 일은…….”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는 무언가를 억눌러 참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제가 누이에게 그런 것으로 간섭할 사람입니까?”
“카엘…….”
아폴로니아는 카엘리온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살짝 얼굴을 돌려 시선을 피하는 그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과 꼭 닮은 금적안.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어서인지 마치 빗속에서 작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은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전 괜찮으니 안심하라고 찾아온 겁니다. 누이.”
그는 애원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이의 사생활은…….”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아는 눈치구나. 그 주제를 계속 피하는 걸 보니.”
아폴로니아가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카엘리온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내가 누구와 입을 맞추든, 누구와 끌어안든 그게 내 선택인 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당연해. 우리 사이에 이 점은 5년 전부터 항상 명확했어.”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조금 전 유리엘이나 아드리안과 있을 때와 달리 그녀의 얼굴은 다소 냉정했다. 입맞춤이니, 누구를 끌어안느니 하는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얼굴 한 번 붉히지 않았다. 반면 카엘리온은 여전히 시선을 살짝 피하고 있었다.
“카엘리온, 날 봐.”
그녀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말했다.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듯, 카엘리온이 억지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누이…….”
“……너와의 결혼을 다시 생각하려고 해.”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카엘리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거센 바람 속에 불길이 흔들리는 것처럼. 그러나 그와 대조되게도 아폴로니아의 태도는 차분했다. 그녀는 카엘리온을 불길 속에서 구해 냈던 5년 전의 일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앞에서 흥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누이답지 않습니다.”
한참을 침묵한 끝에 그가 한 대답은 그것이었다.
“혼사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누이의 생각이었잖습니까. 누이를 제위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것만을 생각하셨잖습니까.”
그는 조금 억울하다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변방의 귀족들은 상당수가 저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통하지 않으면 그 세력을 누이가 흡수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카엘.”
“입맞춤 한 번에 제위에 대한 생각이 옅어지신 겁니까? 이대로 황녀의 자리에서 호위 기사와 연애하며 살면 행복하실 거라고 생각을 바꾸신 겁니까? 제왕의 자세가 겨우…….”
“경고하는데, 카엘.”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서재 전체에 낮게 깔렸다. 그녀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싸늘해져 있었다.
“다시는 내게 제왕의 자세에 대해 가르치려 들지 마.”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시선이 카엘리온을 향했다.
똑같은 금적안이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불꽃의 색깔을 가진 얼음이었다. 이를 정면으로 마주한 카엘리온은 순간적으로 5년 전 아폴로니아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를 구해 준 것이 누구인지. 살기를 원한다면 한순간도 잊지 마렴. 네 목숨은 이제 내 거고, 언제든 다시 가져갈 수 있다는 걸.”
그리고 또 다른 한 마디도.
“모두가 네가 황위를 원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절대로 네 눈에 황좌를 담아서는 안 돼.”
그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실언했습니다.”
아폴로니아에게 맞서는 것은 카엘리온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 번도 그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난 나의 연애 때문에 결혼을 다시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야.”
아폴로니아가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덧붙였다. 카엘리온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그럼…….”
“네가, 사사로운 감정과 결혼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카엘리온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그의 표정이 괴롭게 무너져 내렸다. 아폴로니아는 말을 계속했다.
“네 감정 자체를 내 멋대로 휘두르려는 게 아니야. 그건 네 자유니까. 다만 너는 그것을 숨기지 못해.”
“누이…….”
“우리의 결합은 분명 효과적으로 세력을 잡는 방법이야. 하지만 네가 형식뿐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의 부군이 되어 내 곁에서 살고자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건 너에게 불행이고, 나에게는 불안이야. 황가의 피를 이어받은 부군이 수도에 상주하는 것이 황제에게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봐.”
“누이, 저는 감히…….”
카엘리온은 당황한 표정으로 무언가 변명을 하려 했지만 아폴로니아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지난번 승전 축하 연회 때부터 생각했던 일이야.”
두 사람 사이에 다시 한 번 정적이 흘렀다. 카엘리온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꽉 쥔 주먹에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이는…… 저를 진심으로 걱정하신 적이 있습니까?”
한참 동안 조용하던 그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이지?”
“지난 5년간 말입니다. 제가 수십 번 자객의 칼을 받는 동안, 미처 피하지 못한 독을 먹고 사경을 헤매다가 살아나는 동안, 전쟁터로, 마물 사냥으로 밀려다니며 죽을 고비를 넘기는 동안, 저를 한 번쯤, 한 번만이라도 진심으로 걱정해 준 적이 있습니까?”
내용은 무언가 따지는 듯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오히려 간청에 가까웠다.
“카엘.”
“제가 아폴론의 피를 온전히 받아 불길 속을 걷는다는 소문이 퍼진 후로…… 단 하루도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습니다. 대공령의 수하 중 일부는 암살에 가담했고, 일부는 암살자에게 저 대신 희생되었죠. 나머지는 잃고 싶지 않아 제가 내보내고 친분 없는 자들로 교체했습니다.”
그는 한 손으로 젖은 머리를 천천히 쓸며 한숨을 쉬었다.
“누이가 결혼을 청했기에 다른 부인을 맞을 생각은 머릿속으로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이가 쳐다도 보지 말라고 했던 황위는 눈에 담지 않았고요.”
그는 한탄하듯 말을 이었다.
“압니다. 누이가 보낸 유리엘이 웬만한 위험을 저와 함께 감당했다는 것을요. 누이가 없었더라면 저는 더 위험했을 것이라는 것도 잊은 적 없습니다. 하지만 누이.”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슬픈 눈이 다시 한 번 아폴로니아를 마주 보았다.
“……이 정도면, 누이의 방패 역할을 꽤나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았습니까?”
아폴로니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카엘리온은 그녀를 추궁하거나 자신의 노력이 보답을 받아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애원하고 있었다. 자신의 괴로움을, 노력을 조금만 알아 달라고.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호소하는 것처럼.
“이 정도면, 누이의 곁에서 누이를 마주 볼 자격이 조금은 있는 것 아닙니까?”
그의 눈에는 빗물인지 아닌지 모를 무언가가 고여 있었다.
“카엘…….”
아폴로니아가 미처 그를 붙잡기 전에 카엘리온은 먼저 몸을 일으켰다.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만 하셨으니, 일단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정말로, 정말로 깊이 생각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누이.”
그는 들릴 듯 말 듯한 말을 중얼거리고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 * *
“하아…….”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들어서는 순간 풍기는 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셨군요.”
어느새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유리엘이 창가의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네가 좋아하는 차는 그게 아니잖아.”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유리엘은 과일향을 좋아하기에 두 사람이 다과를 할 때 그녀는 언제나 과일차를 준비했었다. 그러나 지금 방을 채우는 향은 은은한 재스민이었다.
“전하께서 재스민을 좋아하시니까요.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고 아드리안도 말하더군요.”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으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괜찮으십니까?”
유리엘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그저 그녀를 향한 순수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무슨 말을 나눴는지 궁금해?”
아폴로니아가 떠보듯 물었다. 그녀는 유리엘도 카엘리온을 질투하는지가 궁금했다.
“전하께 걱정을 끼쳐 드린 일이라면, 제가 그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궁금합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황홀한 눈웃음을 보자 아폴로니아는 자신이 뭘 떠보려고 했는지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다.
“그러니까…….”
그녀가 말을 더듬자 유리엘이 다시 한 번 싱긋 웃었다. 긴장을 시키려는 건지 풀어 주려는 건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었다.
“유리엘, 내가 카엘리온과 정말 결혼할 건지 신경 쓰이지 않아?”
그녀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유리엘은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를 질투하지 않아?”
그녀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저는 전하와 가까운 모든 사람이 부럽습니다. 굳이 한 명을 고르라면 카엘리온보다는 아드리안이겠죠. 전하를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그는 아폴로니아의 잔에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른 아드리안은 아마 조금 전의 모습만으로도 유리엘과 그녀의 사이를 짐작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혼은…….”
“저는 전하의 부군의 지위를 바란 적 없습니다.”
“그럼?”
아폴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리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대답은 그녀에게 조금 의외였다. 유리엘은 토끼눈을 한 그녀를 빙긋 웃으며 바라보았다.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그녀와 카엘리온의 결혼이 신경 쓰인 적 없다고 한다면 당연히 거짓말이다. 다만 그 자신이 황제의 부군이라는 지위를 바란 적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진심으로 바란 것은 훨씬 소중한, 다른 것이었다.
“마음…….”
그가 말끝을 살짝 흐리며 대답했다.
“내 마음?”
아폴로니아가 살며시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나 유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언감생심 꿈꾸지 않습니다.”
“그럼?”
유리엘은 살며시 아폴로니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며 대답을 마쳤다.
“전하께 제 마음을 조금도 남김없이 드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그뿐입니다.”
입가에만 살짝 보였던 아폴로니아의 미소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 전체로 번졌다. 마치 태양이 밝아 오듯이, 방 전체가 환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괜찮아지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카엘리온은 일단 내버려 둘 거야.”
아폴로니아가 조금 전보다 안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낮고 차분한 평소의 말투였다.
“그보다, 에반젤린에게 부탁할 일이 떠올랐어. 녹스에게 제안할 일도.”
유리엘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 쉴 틈 없이 미래를 바라보는 아폴로니아의 평소 말투였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 * *
“수도에 계실 때는 여기서 지내시면 돼요. 겨우 며칠이지만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니 일단 혼자 지내도록 하세요. 일단 영지에 내려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셔요.”
아드리안은 뚱한 표정으로 녹스에게 집 내부를 안내해 주었다. 그곳은 아폴로니아가 아드리안과 그 아버지 페드로 리스를 위해 구입해 준 작은 저택이었다. 한때 세타도 머물렀던 이곳은 황궁과 멀지 않으면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에 사람을 숨기기에 적당했다.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이 돌아온 지 겨우 몇 시간 만에 아폴로니아는 녹스를 다시 찾아내 몇 마디 말을 전했다. 그가 괜찮다면 수도에 잠시 머물러 달라고, 몇 가지 부탁할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한때는 생활고를 못 이기고 황궁의로 취직을 했던 사람의 집치고는 호화롭군.”
녹스가 말했다. 그는 삐딱하게 타고난 말투를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부러우면 백작님도 취직해서 돈을 많이 버세요. 돈 잘 주는 고용주를 만나시고요.”
아드리안은 녹스의 빈정거림에 위축되기는커녕 한층 더 떠서 놀리듯 대꾸했다. 녹스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귀족으로서 다른 전문적인 직종을 갖는 것은 무척 어려운 데다가 다른 귀족들의 비웃음을 살 일이기도 했다.
“나를 싫어하나 보군.”
“잘 아시네요.”
“내가 황녀를 납치하려 해서?”
“네.”
녹스가 피식 웃었다.
아폴로니아를 오래 조사해 온 그는 아드리안에 대한 일도 잘 알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황녀의 약혼자를 3명이나 빼앗아 간 요부이지만 실제로는 황녀에게 헌신적인 시녀라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날의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들었어?”
“자세하게 다 들은 건 아니지만 뻔하죠.”
뚱한 표정으로 다른 곳만 보던 아드리안이 눈을 들어 녹스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키가 작아서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했지만 그녀는 여유로워 보였다.
“유리엘 님에게 잔뜩 얻어맞고 나서야 전하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는 반쯤 마음이 풀리신 거요.”
그녀가 녹스의 얼굴이며 팔에 난 상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탁자의 서랍을 열어 연고 두어 개를 꺼냈다.
“왼쪽부터 오른쪽 순서로 날마다 바르면 빨리 나아요.”
아드리안은 아폴로니아와 전혀 다른 인상이었지만 오래 함께 지내서인지 미묘한 생활 습관 같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지위나 체구 차이로 위축되지 않는 점이라든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습관이 그랬다. 납치 사건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그 납치범에게 치료제를 찾아 건네주는 것도 그런 습관의 발현이었다.
“납치 때문에 나를 경계한다면서 치료를 도와주는 건 아이러니하군. 아가씨는 애초에 자신을 죽이려던 나와 손을 잡겠다는 그 사람의 결정이 이해가…… 어으아악!”
경고 없이 약통을 열어 그의 팔에 난 상처에 약을 바르는 아드리안의 빠른 손길에, 녹스가 뭔가 물어보려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약이 아니라 독 아닌가? 다칠 때보다 배로 아프잖아!”
“음, 독으로 쓰이기도 하는 원료예요. 그래서 아프지만.”
기겁을 하는 녹스에게 아드리안은 약을 더욱 듬뿍 발라 주었다.
“으흐하학!”
“배합을 잘 하면 흉터를 남기지 않는 데에 유용하죠. 아버지가 직접 배합한 약이니 믿어도 괜찮답니다.”
그녀는 환자의 비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약은 잔뜩 사용해서 녹스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세 종류의 연고는 하나하나가 타는 듯이 아팠다.
“얼굴에는 직접 하세요.”
녹스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그녀의 말에 따랐다. 끔찍한 약이었지만 그나마 직접 바르는 것이 덜 아플 거라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녹스를 태연하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까 뭐라고 했더라……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으로부터 협조를 구하는 전하의 결정이 이해가 가냐고 하셨나요?”
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명을 지르느라 말을 끝내지는 못했지만 그가 하려던 질문의 취지는 아드리안이 말한 것과 같았다.
“오랫동안 뒷조사를 한 것치고 전하를 제대로 알지는 못하시군요.”
그녀는 말을 이으며 다른 서랍을 뒤졌다. 또 무슨 독약을 꺼내는 건가 하고 녹스가 긴장했으나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붕대였다.
“전하께서는 진짜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사람을 곁에 두지는 않아요. 시드 바이안의 아들이 아닌 시드 바이안 본인일지라도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손을 내밀지는 않으실 테죠. 그러니 추측을 해 보자면…….”
그녀는 막 세 가지 약을 다 바른 녹스에게 붕대를 툭 하고 던져 주었다. 고통이 미처 가시지 않아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던 녹스는 붕대에 이마를 정확하게 얻어맞았다. 작고 고운 손에 선해 보이는 눈매와 대조되게도 그녀의 행동은 꽤나 심술궂었다.
“전하께서는 애초에 백작님이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판단하신 거겠죠.”
녹스의 눈이 커졌다. 아드리안의 판단은 마치 그녀가 오두막에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정확했다.
“맞네요. 표정 보니까.”
녹스가 스스로 팔에 붕대를 매려고 끙끙거리자 아드리안이 손을 뻗었다. 그가 흠칫 놀라 몸을 빼려 했지만 그녀는 붕대 한쪽 끝을 잡아 주며 피식 웃었다. 겨우 이런 걸로 겁을 먹었냐고 놀리는 듯한 미소였다.
“……백 번을 배신해도 괜찮다고도 하더군.”
녹스가 대꾸했다. 조금 전에는 그저 심술부리는 아드리안에게 그 주인의 뒷말을 하고 싶어 틱틱거린 것이었지만 이제 그는 진지하게 그녀의 분석이 궁금했다. 붕대 감는 것을 돕던 아드리안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양쪽 눈매의 끝을 내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진심일 거예요. 시드 바이안 님에 대해서 여전히 많이 미안하실 테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아가씨는 불안하겠군. 무슨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을 내가 황녀의 곁에 있다면 말이야.”
녹스는 다시 약간의 심술을 담아 말해 보았다. 그러나 놀라거나 짜증을 낼 거라는 그의 예상과 달리 아드리안은 그저 헛웃음을 웃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전하를 배신할 생각을 할 만큼 멍청하시지는 않겠죠.”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글쎄, 내 말이 틀렸나?”
“‘전하께서는’ 백 번 배신을 당해도 백작님을 내버려 두시겠죠. 시드 바이안의 친아들이 전하의 손에 죽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하지만 사람을 해치는 건 뭐 전하만 할 수 있나요?”
아드리안의 눈빛이 순간 싸늘하게 빛났다.
“그런 일이 생기면 유리엘 님이나 대공 전하까지 갈 것도 없이, 저부터 백작님을 죽이려고 할 텐데요.”
녹스의 눈이 더욱 커졌다. 별 볼일 없는 지위의 시녀가 자신을 협박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협박은 순간적으로나마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그러니 이상한 생각 말고 그냥 하시려던 복수에 집중하세요. 전하와 이해관계가 맞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시고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군.”
그는 아드리안의 녹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조금 전의 싸늘함이 사라진 그 눈은 그저 청초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뭐가요?”
“그 사람, 아니 황녀 전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겠어. 아랫사람에게 관대하게 베푸는 면이 있다는 것도.”
그는 저택을 다시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게 윗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정도의 일인가? 대신 사람을 해쳐 가면서?”
아드리안이 당장 대답을 하지 않자 녹스가 말을 계속했다.
“주인을 위해서 약혼자 3명을 유혹했다면서. 여인으로서 평판은 당연히 훼손됐을 것 아닌가. 그렇다고 어느 왕국으로 시집을 간 것도 아닌데 억울하기는커녕 이 정도의 충성심이라니……. 일반적으로 시녀가 황녀나 황후에게 충성하는 건 좋은 혼처를 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크지 않나?”
아드리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러 가지를 잘못 알고 계시네요. 전 혼처를 원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평판을 떨어뜨린 건 제가 원했던 일이랍니다.”
녹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좋은 혼처를 마다하고 자기 평판을 훼손시킨다는 말인가? 아주 희귀한 경우로 아폴로니아 한 명 정도가 있겠지만 그 시녀는 대체 왜?
“……누군가를 피할 수 있어서요.”
조금 전까지 여유로웠던 아드리안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그늘이 스쳤다.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하고,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녹스는 굳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말은, 단순히 그 사람을 위해 내 것을 빼앗긴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녀는 녹스를 보며 빙긋 웃었다. 한 번 나타난 그늘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어떤 확신이 실려 있었다.
“오히려 그 사람으로 인해 삶이 의미를 가졌다는 뜻이죠.”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녹스는 팔과 얼굴의 상처를 잊고 그녀가 한 말을 곱씹었다. 그녀의 말뜻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상처 받은 과거, 그리고 아폴로니아로 인해 얻은 삶의 의미.
“……전하는 아가씨에게 일종의 구원이라는 건가.”
그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이 살짝 웃어 보였다.
“제게는 구원이고 누군가에게는 희망이고,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향을 주시는 분이랍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표정을 보니 완전한 구원은 아니군. 여전히 과거의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의외로 아드리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들은 결과로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리죠.”
“언젠가는 극복할 거라는 건가?”
“그럴 수도 있죠. 확신은 없지만요.”
아드리안은 녹스가 바르고 남은 약을 치우며 말했다.
“마찬가지로 시드 님의 희생이 장기적으로 바이안 가문의 몰락이라는 결과를 불러온 건지, 아니면 기울고 있던 가세를 뒤집는 원인이 될지 아직 알 수 없다고 생각해요.”
녹스는 조금 전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피식 웃었다. 잠깐 방심했더니 화제는 다시 그와 그의 가족으로 돌아와 버렸다. 황녀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었다라. 다시 생각해 보니 이는 아버지에 대한 말이었다. 시드 바이안은 황녀를 통해 자신의 제국도 가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고 있었을 테니까.
“그 사람은 죽어 버렸는데…….”
“부인과 백작님은 살아계신 걸요. 그렇다면 바이안가의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에요.”
녹스는 반박할 생각을 버렸다. 그는 아드리안의 말을, 그 희망에 찬 얼굴을 믿고 싶어졌다.
“모쪼록 그러기를 바라.”
그가 조용히 말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몰락한 바이안 가문은 다시 웃음과 영광을 되찾고…….”
그는 잿빛 눈을 들어 아드리안을 정확하게 마주 보았다.
“아가씨도 뭔지 모를 그 기억을 극복하기를 바라도록 하지.”
마주 본 녹안이 살짝 흔들리다가 빙긋 웃었다.
* * *
페트라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은 언제나처럼 틀어 올려 고정시켰고, 몇 시간째 쉬지 않았음에도 자세는 완벽하게 반듯했다.
자로 잰 듯한 각도로 가지런히 쌓은 수많은 서류 중 그녀가 든 것은 패리스의 편지였다.
내용은 짧았다. 포트러스 후작이 황실 기사단장직을 맡으라는 그의 청을 거절했음은 물론, 그에게 심각한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 당장 죽여 버릴까 했지만 참았다는 것.
“하아…….”
페트라가 한숨을 쉬었다. 아모레타를 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직 쓸모가 너무 많았으니까. 그녀가 없으면 상단도 타격을 입지만 무엇보다 패리스의 눈동자 색을 조절하는 약은 아모레타밖에 만들지 못했다. 주기적으로 복용하지 않으면 색은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기에 아모레타를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이하게 비틀린 포트러스 후작의 성격을 알았다. 그는 이미 공고한 지위며 재력을 갖추고 있어서인지 돈에는 대단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무언가를 눈에 담으면 그것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였다. 사냥감도, 사람도.
그들에게 포트러스 후작은 중요한 세력이었다. 황제는 한때 여러 요직을 자신의 사람으로 채웠으나 당시 뜻을 모았던 귀족들 중 일부는 세대가 교체되었고, 일부는 거듭되는 세금의 인상이며 흉흉한 민심으로 황제에게 전처럼 충성하지 않았다. 물론 리페르 공작가와 그 친척인 아몬 백작가만 해도 상당한 세력이었으나 제국 전체를 호령할 만큼은 아니었다.
‘일단 황실 기사단장은 다른 사람을 알아봐야겠군.’
후작의 세력을 확보하는 방법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그러나 황실 기사단장직에 측근을 앉히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한때 유명한 무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황제였으나, 최근 무의미한 전쟁을 계속한 탓에 기사들의 충성도는 날로 떨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가 차기 황실 기사단장을 찾아서 추천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최근 그녀에 대한 황제의 태도 때문이었다.
세타를 만난 이후로 황제는 전처럼 페트라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그녀를 신뢰하기는 했지만 황궁 내에서 그녀의 권한은 아주 미묘하게 전보다 제약되어 있었다.
그녀는 세타가 입궁한 후 처음 황제를 찾아갔던 날부터 생소한 불안감을 마음속에 품고 지내야 했다. 평생을 바쳐 황위에 올린 것은 물론, 목숨 걸고 지지했던 오라비가 그녀를 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불안감이었다.
페트라는 황제의 요직을 자신과 가까운 사람으로 채우고 싶었다.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황제에 대한 영향력을 전과 같이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녀 외에는 황제를 가까이서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게 해야 했다.
그녀와 거래를 주고받아 친분이 없지 않은 포트러스 후작은 여러모로 좋은 후보였지만 이제 그 가능성은 닫혔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유능하지만 더 고분고분한 무가 출신의 인재를 찾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무척 드물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내로라하는 기사들을 압도할 정도로 유능한 자. 황제를, 그리고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자. 무엇보다 이름만으로도 명망이 있어 기사들의 충성심을 살 수 있는 자.
“부인, 힘들어 보이십니다.”
산더미 같은 서류들 너머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루이스 리페르 공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으니 신경 쓸 것 없습니다.”
페트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들에게는 익숙한 관계이고 익숙한 대화였다. 집안의 웬만한 일처리는 페트라가 맡아서 했고, 그 조력자인 루이스 리페르 공작은 가끔 귀족 회의에 가는 것 외에는 집 안에서 지내며 아들들의 교육 등 페트라가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니샤가 부인께 주겠다며 꽃다발을 만들어 왔습니다.”
루이스가 그녀에게 작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 아직 열일곱 정도의 소년인 그들 부부의 둘째 아들 니샤는 이런 작은 선물들을 좋아했다. 거칠기만 한 가레스와는 딴판이었다.
“쓸모없군요.”
페트라는 힐끗 꽃을 보더니 이를 받아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꽃을 선물하는 행동을 이해해 본 적이 없었다. 보석처럼 영구적인 아름다움도 있는데 며칠만 지나면 시들어 버리는 꽃을 보고 왜 기뻐해야 하는 것인가.
“부인, 니샤는 부인을 기쁘게 하고자…….”
“기뻐했다고 전해 주세요.”
페트라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들들에 대해서 특별한 애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가문을 이어 나갈 중요한 후계였고 그에 맞는 대접을 받아 마땅했지만 애틋한 감정의 대상은 아니었다.
리페르 공작은 그녀의 이런 사고방식에 항상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강하게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뜻에 따를 뿐이었다.
“부인, 그보다…… 의외의 손님이 한 명 찾아왔습니다.”
공작이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며 서류 몇 장을 그녀에게 건넸다.
“이 보고를 함께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 같군요.”
페트라가 빠르게 종이를 훑었다.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폴로니아 황녀가 납치를 당했다……?”
“쉬쉬하고는 있지만 몇몇 황궁의 문지기들이며 시녀 등의 증언을 맞춰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납치한 사람이…….”
그녀는 납치범의 이름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페트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접견실을 가리켰다.
“믿기 어렵지만 그가 직접 공작가를 찾아와 부인과의 독대를 청했습니다.”
페트라는 흥미롭다는 듯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비는 답답할 만큼 꼿꼿한 성격이더니, 아들은 미친놈인가 보군요.”
그녀는 천천히 공작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인, 위험할 수 있으니 그래도 누군가를 함께…….”
“아닙니다. 밖에서 대기하라고 하죠.”
페트라는 손을 내저으며 접견실로 통하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아직 살아 있는 어머니가 고문 끝에 비명을 지르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섣부른 짓은 못 할 겁니다.”
그녀는 웃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철컥.
그 안에는 초면이지만 익숙한 얼굴을 한 젊은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일어서서 공손하게 예를 갖추는 그 남자를, 페트라는 몇 초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황금안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시드 바이안을 꼭 닮았군.”
그녀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그 남자, 녹스 바이안은 씁쓸하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든 싫든, 외모는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그 말에 페트라의 눈이 다시 한 번 반짝거렸다.
“황녀를 납치했다가 그 호위에게 붙잡힐 뻔했다고 하더군.”
녹스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그 정도 정보력도 없을 거라 생각했나? 애초에 황녀가 납치됐는데 그 사실을 완전히 숨길 수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멀쩡히 살아 있는 걸 보니 황녀는 그 사실을 폐하께 보고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말이야.”
녹스가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를 보아 없던 일로 하겠다고 하더군요.”
“약혼자를 빼앗은 시녀들에게 혼수를 쥐여 준 장본인이니 그럴 만하지.”
페트라가 자리를 권하며 대꾸했다. 한때 아폴로니아는 그녀의 신경을 거스르는 눈엣가시 같았으나, 이제 그녀는 팔에 흉한 화상을 입고 황위와 멀어진 무해한 황녀였다.
“아버지의 일로 황녀를 미워했나?”
페트라가 물었다. 너무나도 직접적인 질문에 녹스는 당황한 듯했으나 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죽이고 싶겠군.”
“예?”
“그 화재가 사고였다는 소문을 믿는다는 순진한 헛소리를 할 건가? 난 시간 낭비가 싫어.”
페트라가 차갑게 말하며 그를 쏘아보았다. 녹스는 심호흡을 하고 대답했다.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작 부인을 죽이고 싶지도 않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응시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지? 나보다 황녀를 더 미워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적을 처단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부하를 지키지 못한 것은 못난 일이니까요.”
페트라는 피식 웃었다. 고지식하기 짝이 없던 시드 바이안이 이 말을 들었다면 무덤 속에서 통곡했을 것이다.
“그럼 나를 처단하러 왔나? 내가 자네의 적이라서?”
녹스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저는 공작 부인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오랫동안 믿었죠. 하지만 그분이 돌아가시고 5년이 지난 후에야 알겠더군요.”
녹스가 말을 이었다.
“좋은 사람 같은 것은 원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승패가 갈리는 순간, 누가 승자의 편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죠.”
그는 페트라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한때 부유했던 저희 가문은 이제 이름만 남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저는 병약한 어머니조차 돌보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페트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바이안 백작가의 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모두 그녀가 한 일이니까.
“……그래서?”
녹스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페트라 앞으로 다가섰다.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를 보고 나서야, 저는 공작 부인을 거스르는 가문의 최후를 뼈저리게 알았습니다. 선황에게 충성한 대가가 별 볼 일 없다는 것도요.”
장신의 그림자가 페트라의 몸 위로 드리워졌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공작 부인께 저를 적으로 돌리지 말아 달라고 청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는 페트라의 발아래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고 영지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저의 모든 것을 공작 부인께 맡기겠습니다.”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녹스의 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진지했다.
이윽고 페트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 명망 높은 충신 시드 바이안. 영웅의 의심스러운 죽음은 지금까지도 암살이라는 소문이 퍼져 황제의 명성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런 자의 아들이, 지금 페트라의 발밑에 꿇어앉아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것이었다.
충격적이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리페르 공작가에 복수를 하고 싶었다면 목숨을 걸면서 굳이 황녀를 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황녀를 해치려 했다면, 그의 사고방식은 시드 바이안과는 아예 다르다는 의미였다.
아버지의 판단으로 고생만 했던 병약한 어머니, 몰락한 가문. 이를 지켜봐야만 했던 아들이 아버지와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바이안 백작가의 충성이라…….”
“가진 것은 없지만 이름만은 살아 있습니다.”
녹스의 진심 어린 말에 페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그만큼 가치 있는 것도 없지.”
그녀는 녹스에게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어머니에게는 최고의 의사를 붙여 주겠어.”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바이안 백작 부인은 좋은 인질이 되어 줄 것이다. 물론, 황녀를 납치하려 했었다는 사실만 쥐고 있어도 약점으로는 충분했지만.
그녀는 녹스의 잿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한때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느껴졌던 시드 바이안과 완벽하게 닮은 그 눈. 그러나 이제 그것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사실은 페트라조차도 감출 수 없는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승리의 맛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바이안 가문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걸세.”
그녀는 감격해하는 청년에게 달콤하게 말했다. 찰나의 순간 청년의 한쪽 입꼬리가 비밀스럽게 올라갔으나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자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실 기사단을 이끌게 될 테니까.”
* * *
“황태자 전하, 소식 들으셨습니까?”
“뭐지?”
패리스는 침대 속에서 짜증스럽게 시종이 내미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가 다시 밀어냈다. 그는 종이를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특히 아침에는.
“됐으니 말로 해.”
“새로 임명한 녹스 바이안 황실 기사단장의 통솔 하에, 기사들은 여느 때보다도 기강이 바짝 잡혔다는 내용입니다.”
“배알도 없는 놈이 기강을 잡다니, 개가 웃겠군.”
패리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몇몇 겁 없는 자들이 그에게 도전했지만 창술로나 검술로나 누구도 이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물론 전하의 실력에는 못 미치지만 말입니다.”
시종이 패리스의 눈치를 보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아비를 닮은 구석이 있기는 있나 보군.”
“좋은 소식입니다. 전하. 선대 바이안 백작을 존경하는 이들로부터 충성을 이끌어 낼 수 있으니까요.”
“알아, 알아.”
패리스는 손을 내저으며 시종을 내보내려 했다.
“전하…… 그게, 황실 기사단장이 부임한 지도 며칠이 지났으니 전하께서는 직접 가셔서 훈련을 지켜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상황을 점검할 수도 있고…….”
“잔소리 좀 그만하거라!”
잠자코 물러나지 않는 시종에게 패리스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사실 한동안 연무장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에반젤린을 걸고 시작한 내기에 카엘리온이 참여한 것이 화근이었다. 두 사람의 결투를 끝까지 지켜본 많은 이들이, 황태자의 실력은 대공에 비하면 보잘것없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이는 그가 라잔에서 에반젤린에게 패했었다는 소문과 뒤섞여 그의 명예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전하, 이는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전통적으로 전하께서는 기사단장과 함께 훈련을 진행하거나 비무를 하여…….”
시종은 황실에서 오래 근무했지만 황태자궁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은 자였다. 그는 패리스의 성정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아서인지 포기하지 않고 그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시종의 마지막 말을 들은 패리스의 표정은 싸늘했다.
“나더러 연무장에 가서 그놈과도 결투를 하라고?”
시종이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움츠러들었다.
“그, 그것이…….”
“내가 그런 놈보다 뛰어나다는 것조차 직접 증명해야 한단 말인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인 내가?”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저, 전하, 진정하시고…….”
“누가 이놈을 끌어내라.”
시종은 손을 내저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패리스의 하인들이 들어서서 시종의 양팔을 잡고 끌어내고 있었다.
“광산으로 보내 노역 따위나 시켜. 내 눈에 다시 보이지 않게 해라.”
시종의 애원이 궁을 울렸으나 패리스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표정으로 씩씩거렸다.
“……전하.”
서늘하게 시종이 나간 방향을 노려보는 그의 뒤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모레타.”
그의 환복을 돕기 위해 반대쪽 문을 열고 들어선 아모레타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저놈은 잘못을 해서 저리 된 거니 너는 신경 쓸 거 없다.”
패리스가 말했다. 그로서는 드물게 부드럽고 사려 깊은 말이었지만 아모레타는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패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외모만 보면 여전히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아모레타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녀 앞에서 친절한 척 연기를 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연기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아모레타에게 반했었으니까. 그녀의 외모는 지금도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절뚝거리는 다리가 거슬리지도 않을 정도로.
게다가 아모레타는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신뢰와 사랑을 주었다. 단순한 패리스도 그런 여인이 흔하지 않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러나 패리스는 애초에 한 여자를 오래 좋아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여자가 좋다고 해서 그 앞에서 성격을 숨기는 것 또한 그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아모레타 앞에서는 죽을 짓을 한 자들을 죽도록 패는 것도 조심해야 했다. 아주 귀찮은 일이었다.
‘적당히 필요할 때만 만나면 좋을 텐데.’
그는 벽에 걸린 거울을 힐끗 보았다. 햇빛을 받아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금적안. 이는 아모레타가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 것이었다. 전쟁을 하는 동안 그는 그 모습을 유지하느라 몇 차례나 수도로 심부름꾼을 보내 약을 가져와야 했다.
그녀의 약은 대량으로 만들어서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패리스에 대한 아모레타의 사랑은 유지되어야 했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게 아니라면 어떤 대체제가 나올 때까지.
“고모님에게 보낼 물건은 보냈나?”
“요청하신 대로 보는 사람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드레스를 보내 드렸어요.”
그녀는 다정하게 패리스에게 다가와 기대며 말했다. 다행히 그녀는 조금 전 시종이 정말로 대단한 잘못을 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책상에 서류가 많은데, 제가 정리해도 되나요?”
“아니, 그…….”
패리스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아모레타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그의 책상으로 향했다.
“이게 뭐…….”
책상에는 몇 장의 종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몇몇 귀족가 영애들의 신상을 적어 둔 것들이었다. 정확하게는, 황태자비로 적당한 여인들의 신상이 적힌 것이었다.
“……아버님께서 약혼을 권하시기에 보고 있었던 것뿐이다.”
패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모레타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는 종이를 정리했다.
“아모레타.”
“더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전하.”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슬플 때조차도 달콤했다. 그 달콤함조차도 때로는 피곤했지만.
“전하께서 황태자비를 간택하시는 건 당연한 걸요.”
패리스는 아모레타에게 걸어가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내 마음이 너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전하…….”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패리스는 피식 웃었다. 여인의 마음이란 얼마나 쉬운가.
“황제로서 나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다른 가문의 영향력도 필요한 법이야. 난 태생적으로 황실의 외모를 가지지 못했었기 때문에 지지 기반이 약했었거든.”
그는 힐끗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억울하다는 듯 속삭였다.
“지금도 반쪽짜리 기반인 거지. 약을 달고 살지 않으면 눈은 예전의 연갈색으로 돌아갈 테니까.”
“저는 그 눈을 좋아했는걸요.”
아모레타가 조용히 대꾸했다. 패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과장되게 말을 이었다.
“고맙지만 나는 금적안을 유지하지 못하면 언제든 위험할 수 있는 입장이야. 약을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아슬아슬한 일인지.”
아모레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아모레타, 조금만 더 노력해서 약의 효과를 영구적으로 지속시키는 방법을 찾으면 안 될까?”
그는 아모레타를 꽉 붙잡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모레타가 빠져나가려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전하……. 그건 어렵다고 말씀드렸는걸요.”
“아니야, 넌 나의 천재니까. 분명히 할 수 있어. 그럼 황태자비 따위는 없어도 돼. 매일 너와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거지.”
그는 달콤하게 말을 이었다. 아모레타가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그럼, 저녁에 부르도록 하지.”
패리스는 겨우 아모레타를 놔주고 그녀가 방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구적으로 외모를 바꾸는 약. 그런 것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지만 아모레타의 실력으로는 어쩌면 가능할 것이다.
평범한 갈색 머리며 연갈색 눈동자. 이 모든 것은 그를 어린 시절부터 은근히 괴롭혀 왔다. 분명히 같은 황실의 태생인데도 여동생인 아폴로니아와 자신을 다르게 보던 선황의 눈길을 패리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약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는 자유를 의미했다. 아모레타는 여전히 곁에 둘 생각이었지만 더 이상 벨라 시녀 따위의 눈치를 보며 성격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패리스의 머릿속에 포트러스 후작의 탐욕스러운 눈빛이 스쳤다. 무시할 수 없는 그의 사병과 재력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가진 것이 탐난다 한들 여인을, 그것도 아모레타 정도 되는 여인을 줄 수는 없었다.
그는 아모레타와 포트러스 후작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책상의 종이를 집어 들었다. 여러 영애들의 나이며 집안을 훑으며, 그는 미래의 황후감을 찾기 시작했다.
* * *
아모레타는 황태자궁을 빠져나와 궁 뒤편의 화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넓지도 않고 꽃의 종류도 적은 편이라 사람이 드문 곳이었다.
‘영구적으로 외모를 바꾸는 약.’
아모레타는 패리스의 요청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드린다면 망설임 없이 드시겠지.’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 요청을 받아왔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것을 만들어 내는 데에 성공했다.
효과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계산은 언제나 완벽했기에 실험은 필요하지 않았다. 평생 셀 수 없이 많은 주술을 걸어 보았지만, 결과가 그녀의 예상과 달랐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약을 패리스에게 건네는 것은 왠지 싫었다. 그녀는 약 복용 전에 패리스가 가졌던 연갈색 눈을 좋아했었다. 무엇보다, 그가 자신을 정기적으로 찾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최근 들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패리스를 두려워하는 시종들의 눈빛, 패리스의 눈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잔인함. 바로 오늘 아침,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몰라도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던 시종.
패리스의 저택에서 살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러한 모습은 점점 더 자주 눈에 띄었고,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자 그녀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아 잊히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패리스를 깊이 사랑했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처음으로 그녀를 온전히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구원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간혹 보이는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볼 때마다, 그의 부탁을 다 들어주는 것이 왠지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고민에 잠겼을 때, 화원 앞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누군가의 형체가 훅 하고 앞으로 뛰어나왔다.
“잡았다!”
초콜릿색 머리에 적갈색 눈동자를 한 표범을 닮은 여인은 풀숲을 나오자마자 앞으로 뛰듯이 넘어졌다. 그녀의 손에는 퍼덕거리는 박쥐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누구죠?”
아모레타가 물었다. 여인은 예를 갖춰야 하는 대상인지 아닌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차림새를 보면 저잣거리를 뛰어다니는 소년 같았지만 황궁 안에서 이렇게 조심성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면 천한 신분은 아닐 것 같았다.
“일단 가만히 있어 봐.”
여인의 손바닥에 잡힌 채 푸드덕거리는 박쥐는 일반적인 녀석들보다 더 흉한 생김새였다. 검은 몸에 못생긴 얼굴, 그리고 초점 없이 빛나는 흰색 눈.
마물이었다.
“당신이 라잔의 왕녀로군요.”
아모레타가 말했다. 그녀는 바깥소식에 어두운 편이었지만 에반젤린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패리스가 한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녀에게 당한 패배 때문이라고 했으니까.
“당신은 황태자궁의 시녀고요.”
마녀치고는 평범하고 호감 가는 외모를 가진 그녀가 아모레타를 이미 아는 것처럼 인사했다. 박쥐를 바지에 달린 넓은 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저를 아세요?”
“잘 아는 건 아닌데…… 황태자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게 그냥 신기해서요.”
여인은 예의라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그렇다고 은근한 신경전을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순수하게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는 사람이었다.
“전하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아 주세요.”
“하이고…… 표정을 보니 정말인가 보네요. 약점이라도 잡혔나 했더니.”
그녀는 표범을 닮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모레타를 관찰하며 몸을 기울였다. 초콜릿색의 머리카락이 아모레타에게 닿을 정도로 가까이.
“황태자 전하는 친절하신 분이에요.”
아모레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뱉는 순간 아침에 끌려 나가던 시종의 모습이 떠올라 목소리에 자신이 없어졌다.
“황궁에 친구가 정말 한 명도 없나 봐요. 그걸 믿다니.”
에반젤린이 팔짱을 끼고 혀를 쯧쯧 찼다.
“그분은…….”
“그분이 어떤 절세미인을 상품으로 걸고 병사들에게 싸움을 붙였다는 건 아세요? 전쟁 중간중간에 밤마다 여인을 바꿔 가며 잠자리에 들었다는 건? 같은 궁에 살면서 그가 심심하면 아랫사람을 때리는 것도 못 봤고요?”
그녀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모레타의 무지를 비웃는 것이 아니었다.
아모레타는 처음 듣는 이야기들에 얼굴을 찡그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초면인 여인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아모레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여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요. 믿기 싫으면 말아요. 뭐, 나중에 알아서 깨닫겠죠. ‘그 사람’이 그렇게 예측했으니까. 아마 틀리지 않을 거예요.”
“네?”
에반젤린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전 당신과 마주치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죠……. 아야! 물지 마! 얘는 잠깐 넣어 놨더니 주머니가 자기 집인 줄 알아. 내 손이 네 집에 침입한 게 아니라고!”
주머니에 박쥐가 들었다는 사실을 잊었는지 그녀는 여기저기 뒤지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빼냈다.
“내게 할 말이 있어요?”
“네. 정확하게는 전할 말과 보여 줄 물건이 있죠. 여기 어디 뒀는데…….”
괴상하게 생긴 그녀의 바지는 여기저기 넓은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하나하나에 손을 넣어 보더니 결국 무언가를 쥐고 빼냈다.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면서도 그걸 보낸 사람이 누군지 드러내지 않으려면 나를 시켜야 한다나요.”
“편지인가요?”
아모레타가 고개를 쭉 빼서 에반젤린의 손을 보려 했으나 그녀는 꼭 쥔 주먹을 펴지 않았다.
“아니, 그건 위험하니 말로 전하라고 했어요. 일단 잘 들어요. 한 자도 빼놓지 말고.”
조금 전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녀는 적갈색의 깊은 눈을 진지하게 뜨고 아모레타를 마주 보았다.
“‘리샨에서 무사히 도망친 모습을 보아 반갑고, 5년 전의 약속을 지켜 줘서 고맙고, 건강한 것 같아 기뻐요.’”
에반젤린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설령 가까이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해도 바람 소리며 풀벌레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였다.
“리샨……?”
그녀의 말을 듣는 아모레타의 자안이 흔들렸다. 먼 기억 한 조각이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황태자의 곁에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때 나를 찾아와요.’”
에반젤린은 말을 마치고 쥐고 있던 물건을 아모레타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아모레타의 눈이 커졌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자수정을 닮은 아름다운 눈에 물기가 고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에반젤린이 쥐고 있던 물건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분명히 5년 전 자신이 은인에게 주었던 향주머니였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인연. 그녀가 가까이에 있었다.
“그분을…… 그분을 아세요? 대체 어디에…….”
“미안하지만 내가 전할 말은 이게 끝이에요.”
에반젤린은 다시 주먹을 쥐고 향주머니를 쏙 가져가 버렸다.
“전하의 곁에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때 찾아오라니, 그분은 대체…….”
아모레타가 충격과 반가움, 그리고 약간의 우려가 섞인 표정으로 조금 전 들은 메시지를 분석했다.
“그분은 전하를 싫어하시는 건가요?”
“음…… 그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지만 조금 전 내가 한 말을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나요?”
에반젤린은 짓궂은 아이처럼 말을 빙빙 돌렸다. 아모레타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를 되짚어 보았다.
“황태자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요.”
그 말은 즉, 에반젤린이 아는 다른 여인들은 모두 패리스를 싫어한다는 의미로도 들렸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아모레타의 은인을 알고 있었다. 아모레타의 심장이 조금 내려앉았다.
“……저는 전하를 사랑해요.”
“알아요.”
에반젤린은 다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거든요. 당장은 오라고 해도 오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생각이 바뀌면 말하라고.”
아모레타의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은.”
에반젤린은 다시 진지해진 표정으로 아모레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네?”
“무서운 구석이 있는 사람인데 당신한테는 의외로…….”
에반젤린은 뭔가를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무튼 전할 말은 다 전했어요. 황태자에게 비밀이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겠죠? 난 그냥 도망친 박쥐를 잡으러 온 거예요.”
에반젤린은 주머니를 툭툭 쳤다. 그 안에서 작은 물체가 꾸물거렸다. 돌아서려던 그녀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참, 만약 마음이 바뀌면 당신이 가진 작은 물건 하나를 동쪽 창틀에 놓아 주세요. 기왕이면 반짝이는 걸로. 그럼 내가 알아듣고 그 사람에게 전할 테니까. 편지를 구구절절 쓰는 건 위험해요.”
“네? 하지만 그걸 어떻게…….”
“그리고 이건 조언인데.”
에반젤린은 아모레타의 물음을 무시하고 말했다.
“너무 오래 끌지 말아요. 황태자의 곁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아예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묶이는 수도 있으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아모레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정원을 빠져나가 버렸다.
* * *
“다 했어요?”
“당연하죠. 이해는 잘 안 되지만.”
아폴로니아의 물음에 에반젤린이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대답과 동시에 한 손으로 주머니를 열어 박쥐를 내보내 주었다.
“자, 자. 이제 좀 얌전히 있으렴.”
“뭐가 이해가 안 되죠?”
“내가 협조하기 싫다고 했을 때는 협박부터 했잖아요!”
에반젤린이 서운함을 잔뜩 담아 소리쳤다.
“내가 납치됐을 때는 거래 관계니 대가 없이는 안 찾아 주겠다고 한 건 누구고?”
아폴로니아가 묻자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목소리를 작게 줄였다.
“진짜 안 알려 줄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카엘리온이 무릎까지 꿇었다면서요. 뭐, 이번에는 됐어요. 결과적으로 나는 분명 도움을 받았으니까.”
뭔가 더 변명하려는 에반젤린에게 아폴로니아는 손을 살짝 저어 보였다. 에반젤린은 다시 기가 조금 살았는지 빙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당장 만나러 오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내에 대해 가진 건 고마운 기억이지만 패리스에 대해 느끼는 건 사랑이니까요. 정체를 밝히면 위험할 뿐이에요.”
아폴로니아가 약간의 씁쓸함을 담아 말했다. 에반젤린은 그 씁쓸함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계속해서 물었다.
“안 되면 어쩔 생각이세요?”
“뭐가요?”
“아모레타가 끝까지 황태자의 곁에 남으면요?”
“패리스의 성격상,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오래는 못 숨길 거라 생각해요. 확실히 알게 되면 아모레타는 그를 떠날 거고요.”
아폴로니아는 과거 아모레타의 피폐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남에게 상처를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싫었지만 억지로 그것을 겪어야 했다. 폭행이 몸에 밴 잔인한 자와 행복할 수 없을 사람이었다.
“그래도 사랑의 힘이 더 강하다면요? 사람이 사랑을 하면 이해 못 할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에반젤린이 집요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아폴로니아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녀는 나의 강력한 적인 거겠죠.”
그녀의 눈동자에서 연민이 지워지고 냉철함이 자리했다. 아폴로니아는 에반젤린과 눈을 맞추며 덧붙였다.
“그러니 늦지 않게 손을 잡아 주기를 바랄 뿐이에요. 내가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하게.”
에반젤린의 눈이 커졌다. 아폴로니아의 마지막 말은 어쩐지 아모레타뿐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처럼도 들렸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죠.”
생각에 잠긴 에반젤린을 뒤로하고,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을 빠져나갔다.
* * *
“이것이 다인가? 페트라.”
오랜만에 페트라를 황궁으로 부른 황제가 딱딱하게 말했다.
“리페르 가문에서 내게 내놓을 수 있는 돈이 올해는 줄었군.”
황제의 황금빛 눈이 그와 꼭 닮은 여동생을 보며 매섭게 빛났다.
“루완 상단의 이윤이 대체 얼마나 떨어진 거지? 제국의 온갖 제도를 다 입맛에 맞게 고쳐 주어도 이게 최선인가?”
그는 들고 있던 서류로 짜증스럽게 책상을 한 번 쳤다.
“폐하, 저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습니다.”
페트라가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받았다. 그녀는 전보다 훨씬 황제의 반응을 민감하게 살피고 있었다. 전 같으면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 상황을 설명하거나 황제에게 따질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 또한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미묘하게 불편한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황제를 등에 업고, 패리스의 시녀인 그 벨라 계집의 도움까지 있는데 대체 왜 전만큼의 수익을 내지 못하는 거지?”
“이데나 상단과 경쟁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남부에 이어 서부에서도 영향력이 강해져 가고 있습니다.”
“패리스에게 강한 황권을 무사히 전해 주기 위해서, 그를 완전히 지지하는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자금은 더 필요하다.”
페트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기에 제가 이데나 상단을…….”
“그들은 전쟁 당시 패리스에게 무상으로 최상급 강철 무기를 지원했던 전적이 있지. 그 상단주는 전쟁 승리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 자체로 패리스의 지지 세력이라고 볼 수도 있어.”
황제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페트라가 다시 한 번 깊은 숨을 내쉬었다. 미간이 강하게 찌푸려졌다.
“……리페르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야겠지. 리페르는 나의 것이고, 패리스의 것이니까.”
순간적으로 페트라의 표정이 조금 더 어두워졌으나 황제는 보지 못했다.
“물론, 경쟁자를 도태시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달라진 말투가 화제의 전환을 의미하고 있었다.
“……대공이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그를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실패를 거듭했던 카엘리온의 암살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맹수를 닮은 두 쌍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황제도, 페트라도 이견이 없었다. 카엘리온은 죽어야 했다.
5년간 말도 안 되게 성장해버린 그는 패리스를 넘어 황제까지도 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자금으로 상당한 귀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그간 카엘리온이 전쟁이며 마물 퇴치며 숱한 공로를 세운 것에 더해 황제에 대한 백성의 반감이 심해지면서, 카엘리온은 차기 황제 후보로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황제의 눈엣가시였지만 지금은 절대로 내버려 둘 수 없는 강적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의 위협은 커졌다. 그가 죽으면 패리스 외에 다른 황제 후보는 어차피 없을 것이기에 세력을 불리기 위해 전전긍긍할 필요가 훨씬 줄어들을 것이다.
“유리엘 비체를 곁에서 떼 낸 지금이 적기이다. 대공령으로 돌아가면 가망이 없어. 그에게는 상당한 지지 세력이 있어서 이제는 접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페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무언가 계략이 떠올랐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계획이 있느냐?”
황제가 그 표정을 알아보고 물었다. 그가 페트라의 말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려 한 것은 다소 오랜만이었다.
페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는 한 가지 계획이 있었고, 이는 절대적으로 성공해야 했다. 그녀는 몸을 살짝 기울여 황제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실패하면 결과를 짐작할 수 있겠지.”
그는 잠시 조용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부딪혔다.
페트라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실패하면 황제와 패리스의 입지가 흔들릴 뿐 아니라 그녀와 황제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번만큼은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카엘리온 에핀하르트, 그는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마지막 숨을 내뱉게 될 것이다.
* * *
“어디 가는 거야?”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언제나처럼 낮고 차분한 그 목소리는 유난히 달콤하게 들렸다. 눈이 웃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단둘이서 외출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산책을 가고 있었다. 조금 멀리. 유리엘은 말 두 필을 준비하는 것 외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아폴로니아는 기꺼이 말에 올랐다.
“아비엔느의 레스토랑?”
“아닙니다.”
유리엘은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을 친절하게 듣고 대답해 주었지만 목적지만큼은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짧게 대답하고 눈을 살짝 접어 웃을 뿐이었다.
“시장?”
“변장도 하지 않고 그런 위험한 곳에 갈 수는 없습니다.”
말은 상당히 멀리까지 달렸다. 수도를 벗어났다 싶을 정도로.
“시내는 아닌가 본데…… 숲이 더 위험한 거 아니야?”
유리엘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어 버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폴로니아는 그다지 위험을 느끼지는 않았다. 유리엘이 함께 있을 때 그녀는 위험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가 칼트산 정도였을까.
“피곤하십니까? 천천히 갈까요?”
유리엘이 힐끗 눈을 돌려 아폴로니아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 보아도 승마 솜씨는 훌륭하시군요. 검은 안 배우셨으면서.”
아폴로니아의 자세는 흠 잡을 데가 없었다. 고삐를 잡은 손은 여유로웠으며 말과의 교감도 자연스러웠다.
“할아버지 계획으로는 열 살쯤부터 배울 예정이었어. 검을 언제 어떻게 써야 가장 효과적인지를 먼저 가르치겠다는 생각이셨겠지. 검을 드는 법, 좋은 검을 알아보는 법, 무기를 관리하는 법 같은 건 조금 배웠었어.”
유리엘은 리샨에서 채찍을 다루던 아폴로니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단순히 검에 대한 이론만 배운 게 아닐 것이다. 검술은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 아폴로니아는 무기를 다룰 줄 알았다. 무기에는 원래 직접적인 제압과 살상 외에도 협박의 기능이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등극하신 후에 시드가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거절했어. 무예가 몸에 익으면 견제당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승마는 취미로 즐기기에 이상할 것이 없었지.”
아폴로니아는 말을 정확히 유리엘의 속도에 맞춰 몰며 말했다.
“검을 안 배우겠다는 말씀에 시드가 실망하지는 않았습니까?”
“글쎄, 조금? 내가 검을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같이 검을 훈련하면서 군신 관계를 다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것 같아. 다들 그렇게 하니까. 물론 관계를 다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우린 가족 같은 사이가 됐지.”
아폴로니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녹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게 알브레이트 정원이군요.”
유리엘이 말을 몰며 조용히 말하자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울할 때 둘이서 그곳에 가면 기분이 좋아졌거든. 원래도 시드를 좋아했지만 그곳에 다녀오면 유난히 더 친해진 것 같았어.”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씁쓸하게 들렸다.
알브레이트 정원은 녹스의 납치 사건 이후로 잠정 폐쇄되었다. 물론 정확한 경위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곳을 지키던 민간 호위와 직원들이 약에 취해 쓰러진 채 발견되는 바람에 정원의 보안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알브레이트 정원은 더 이상 없었다. 다시 열린다 한들 그 모습은 과거와 다를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잠깐 추억에 잠겼던 아폴로니아에게 유리엘이 말했다.
“……처음 와 보는 곳인데.”
그들은 황궁과 멀리 떨어진, 그러나 수도를 벗어나지는 않은 어느 숲 속에 있었다. 나무가 울창하고 아름다웠으나 작은 숲이라서인지 아폴로니아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공식적인 이름은 없는 곳입니다. 다만 석양이 질 때 붉어진 하늘의 색을 깨끗하게 반사하는 호수가 있어 전 주인은 ‘붉은 호수의 숲’이라고 불렀다더군요.”
“전 주인?”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주변을 다시 살피니 숲은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사유지로 보였다.
“예. 지금은 제가 주인입니다. 얼마 전 어느 상인으로부터 샀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휙 돌려 유리엘을 보았지만 그는 그저 빙긋 웃었다.
“제게 필요한 것들은 다 이데나 상단주께서 베풀어 주시니 제가 가진 하찮은 재산으로는 이런 것을 샀습니다.”
아폴로니아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냥터로도, 농지로도 쓸 수 없는 데다 영지랑 멀리 떨어진 땅을 왜…….”
“훨씬 중요한 용도가 있으니까요.”
그는 말에서 내려 숲 깊은 곳으로 아폴로니아를 이끌었다. 나무는 울창했지만 여기저기 해가 닿아 어두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몇 분이나 걸었을까. 두 사람의 눈에는 수십 그루의 커다란 버드나무가 들어왔다. 한눈에 보아도 오래된 듯한 그 나무들은 구부러진 가지며 무성한 잎으로 그 뒤의 무언가를 지키고 있을 법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가시죠.”
유리엘이 중간에 있는 버드나무에 다가가며 아폴로니아를 돌아보았다. 반짝이는 은발이며 예쁘게 웃는 푸른 눈이 마치 정령 같았다.
“뿌리를 조심하십시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사람을 홀리는가를 모르는지,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폴로니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손을 잡고 굵고 구불거리는 나무뿌리들을 넘어 한 걸음 내디뎠다.
“이쪽입니다.”
유리엘이 휘장처럼 드리워진 나뭇가지들을 걷어 내며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그가 이끄는 방향으로 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어……?”
걷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서자 처음 느껴진 것은 시원하게 부는 바람이었다. 한 차례 바람이 지나간 다음, 아폴로니아의 눈에 비로소 아름다운 풍경이 들어왔다.
숲 한가운데에는 나무가 없는 대신 맑은 호수가 자리했고, 그 위로 쏟아지는 햇빛이 물에 다시 반사되어 수면에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 같은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상당한 깊이에도 불구하고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은 그 호수는 유리엘의 눈동자보다 조금 옅은, 청량한 푸른색이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눈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은 호수가 아니라, 호수를 둘러싼 광경이었다.
“이게 대체……?”
둥근 호수를 빙 두르고 있는 것은 흐드러지게 핀 수국과 백합. 연보라색, 푸른색, 분홍색 등이 다양하게 섞인 수국 사이사이로, 청초하게 피어 있는 흰 백합이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그 꽃들은 한 송이 한 송이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더 안전하고 조용한 정원이 필요하실 것 같았습니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는데, 그는 그녀가 알브레이트 정원의 폐쇄를 아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언제, 언제부터…….”
“꽃을 구해 심고 숲을 정리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전하께서 좋아하는 꽃이 한 계절에 함께 피는 두 가지라서 다행이었죠. 백합은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셨고…….”
그녀는 실제로 수국과 백합을 좋아했다. 백합은 시드와의 추억이 생각나서, 그리고 수국은…….
“수국은 네가 항상 가져다주던 꽃이지.”
유리엘의 영지는 화려하게 피는 수국으로 유명했다. 그는 카엘리온과 있으면서 매번 아폴로니아를 방문할 때마다 그 꽃을 한 송이씩 가져다주었다. 어느 순간 그녀에게는 테이블 위 유리병에 담긴 수국을 보는 것이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 되었다.
유리엘이 다시 한 번 웃었다. 조금 전처럼 눈꼬리만 접는 것이 아닌, 정말로 행복에 젖은 환한 미소였다.
“기쁩니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미소만큼이나 환하게 쏟아지는 햇빛을 한 몸에 받는 그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전하의 새 정원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내 정원……?”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유리엘의 말을 따라 했다. 그 말을 들은 그가 고개를 갸웃하고 기울이며 그녀를 보았다.
“제 것은 원래 모두 전하의 것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내 정원을 갖는 건 처음이야.”
아폴로니아가 반쯤 혼잣말로 말하자 유리엘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어렸을 때는 황실에 있는 정원을 내 것처럼 돌아다녔지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정원을 만들어 준 적은 없었거든.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사하셨던 사르비아 정원은 패리스가 가졌고…….”
그녀는 말끝을 흐렸으나 유리엘은 이해했다. 가이우스가 황제로 있는 이상 황실의 어떤 장소도 온전히 아폴로니아의 것이 될 수는 없었다. 별궁 후원의 작은 꽃밭조차도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있었다.
“그래서 황궁 바깥의 정원에 가셨군요.”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유리엘과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유리엘의 귓가가 붉어졌다.
“……어렸을 때 이런 곳이 있었다면 난 아마 날마다 여기서 지냈을 거야.”
그녀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 버드나무와 그 밖의 숲으로 완전히 바깥과 차단된 풍경, 찬란하게 빛나는 푸른 호수와 시원하게 부는 바람. 이곳에서 그녀는 진심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곧 노을이 집니다.”
“알아. 너무 늦게까지 있자고 하지 않을게.”
아폴로니아는 얌전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 유리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귓가에 있던 붉은색이 목과 얼굴로 퍼졌다.
“……노을이 질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붉은 호수의 숲’이니까요.”
유리엘이 아폴로니아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말했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반달처럼 접혔다. 평소와 대조되는 아이 같은 미소, 살짝 상기된 뺨이며 그에게 반쯤 기댄 어깨와 그 위로 늘어뜨린 찬란한 금발이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러게, 벌써 붉어지고 있는데.”
하늘에 붉은빛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호수의 표면도 그 색을 그대로 반사시켰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에도 오묘한 변화가 일었다.
“예쁘다, 유리엘.”
분명히 경치를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마치 그를 향해 하는 말 같아서 유리엘은 순간적으로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띠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유리엘.”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유리엘을 불렀다. 그녀는 기댔던 어깨를 떼고 그를 마주 보며 섰다.
“나도 줄 게 있어.”
그녀는 걸쳤던 로브 안에서 평범해 보이는 작은 흰색 향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제국에서 가장 천재적인 주술사가 만든 거야. 호신의 효력이 있대.”
유리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으며 주머니를 유리엘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가장 천재적인 주술사라면…….”
“아모레타야. 나와 그 사람이 전에 만났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필요했지만 이제 됐어.”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유리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정말 호신의 효력이 있는 것이라면 전하께서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 물건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신은 없었지만 아폴로니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물건이라면 그녀에게 남겨 두고 싶었다.
“유리엘, 주술에 실린 호신의 효력은 사실 커 봤자 대단하지 않아. 어떤 천재가 만들었어도 마찬가지야. 많은 경우, 그건 그저 심리적인 안정을 줄 뿐이지.”
아폴로니아가 주머니를 쥐고 있는 유리엘이 손을 펴지 못하도록 그의 주먹을 양손으로 감쌌다. 유리엘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주술은 일종의 수학 같은 것이었다. 어떤 주술이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언제나 구체적인 답이 있어야 했고, ‘호신’이라는 애매한 효능을 지녔다고 알려진 물건들은 대부분의 경우 그저 마음의 안정을 주는 장식품 같은 것이었다. 아모레타가 만들었다면 조금 특별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마유 차에도 비슷한 효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차를 마신다고 해서 정말로 불사의 몸이 되는 건 아니야. 몸과 정신을 예리하게 만들고 약간의 운을 가져다줄 뿐이지. 사람의 생과 사를 가르는 건 어차피 신의 영역인걸.”
“……그렇다면 이것을 왜 제게 주십니까?”
유리엘이 물었다. 그는 향주머니 같은 장식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나는 저 물건을 받고도 딱히 몸에 지니고 다니지는 않았었어.”
아폴로니아가 엷게 웃으며 말했다. 유리엘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아폴로니아는 자신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생존이든 황위를 얻는 데에 있어서든 도움이 될 수도 있는 물건을 굳이 거부할 사람이 아니었다.
“효력을 크게 믿지도 않았지만, 설령 있다고 한들 내 운명을 운이나 주술에 맡기고 싶지 않아서.”
부드러운 미소 속에, 강인한 금적안이 빛났다.
“황위를 갖는 일은 오직 내 의지로 하고 싶었어. 어차피 내 것이라면 그런 부적에 의지하지 않아도 손에 들어와야 하니까. 아버지가 지키고 있는 황좌에 앉는 날, 그것이 내 힘으로 되찾은 내 자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싶었다고 할까.”
그것은 일종의 오기였다. 아폴로니아는 인재를 좋아하고 그들을 잘 활용했지만, 그녀에게는 주술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인생을 헤쳐 나가려는 고집 같은 것이 있었다.
유리엘은 더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제게는 대체 왜……?”
부적에 의지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유리엘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그는 주술에 통제되어 살았던 좋지 않은 기억이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잠시 입을 다물고 유리엘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그에게 반걸음 다가섰다. 두 사람의 몸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고, 향주머니를 쥔 유리엘의 오른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너만큼은 이런 물건에 의지해서라도 지키고 싶어서.”
그녀가 유리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숨결이 귀에 닿자 유리엘의 온몸이 저렸다. 두 사람은 몇 초 동안 닿을 듯 말 듯 서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꽃들의 향기와 섞인, 은은한 아폴로니아의 체향이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유리엘, 나는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그녀가 몸을 살짝 떼고 다시 유리엘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너를 의지하고 사랑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유리엘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녹스의 오두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결혼 같은 것을 약속할 수는 없어.”
그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폴로니아가 씁쓸하게 말했다.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카엘리온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말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럴싸한 작위와 영지는 있어도 독자적인 세력이나 배경이 없는 유리엘은 부군으로서 대단한 가치가 없었다. 평민 출신과 결혼했다는 사실은 몇몇 귀족들 앞에서 그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 같은 것도 당분간은 줄 수 없겠지. 너는 앞으로도 나 때문에 위험에 처하게 될지 몰라.”
아폴로니아가 다시 말했다.
“그래서 주는 거야. 네 안전만큼은 무엇에 의지하든 지키고 싶어서. 그 전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네가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유리엘의 심장이 다시 한 번 쿵 하고 뛰었다. 아폴로니아는 운명을 운이나 주술에 맡기지 않겠다는 자신의 원칙을 유리엘을 위해 예외적으로 꺾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향주머니를 바라보았다. 평범해 보였던 그 물건은 그 순간 천금 같은 가치를 갖게 되었다.
유리엘이 다시 시선을 들었다.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애정, 신뢰를 비롯한 온갖 감정이 뒤섞인 시선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초가 지나고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손을 놓으며 물러서려 했으나 유리엘이 한쪽 팔로 아폴로니아의 허리를 감았다.
“……유리엘?”
“전하께서는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가 향주머니를 꼭 쥐며 말했다.
“제가 가진 것 중, 전하께서 주지 않으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는 옅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내가…… 네게 뭘 줬는데?”
선혈처럼 붉은 입술에 잠시 정신을 빼앗긴 아폴로니아가 되물었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저는 죽었거나, 아니면 목적 없이 살고 있었겠죠. 그러니 더 주시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폴로니아가 그를 따라서 미소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 남아 있던 씁쓸함이 걷혔다.
“삶의 목적을 주었다? 내가?”
그녀가 다시 물었다. 장난스럽게 하려던 말이었지만 의도보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그녀를 감싼 단단한 팔의 감촉이 느껴졌다. 편안함을 주면서 동시에 그녀를 긴장시키는 접촉이었다.
“아뇨.”
유리엘이 몸을 기울여 아폴로니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자 순간 아폴로니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 사실을 눈치챈 유리엘의 입가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그는 팔에 살짝 힘을 주어 그녀를 더욱 가까이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아폴로니아의 뺨을 감쌌다.
“전하께서는 제 삶의 목적 그 자체입니다. 더 원하는 것이 있을 리가요.”
나직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귀에 감겼다. 유리엘의 짙은 푸른색 눈은 여전히 그녀를 빨아들일 것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려 하자 뺨을 감싼 유리엘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려놓았다.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치자, 그의 눈가가 아폴로니아가 좋아하는 모양으로 접혔다. 그녀는 조금 전보다 강해진 긴장감을 느꼈다.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유리엘. 그러나 그가 때때로 아폴로니아를 압도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유리엘?”
“아니, 생각해 보니 원하는 것이 더 있기는 합니다.”
그가 다시 한 번 느릿느릿 속삭였다. 그의 눈가가 한층 더 매혹적으로 접혔다. 그 아름다운 미소에 시선을 빼앗긴 순간, 유리엘의 입술이 조금 더 휘어지는 듯하다가 그대로 아폴로니아의 입술에 포개졌다.
온몸을 감싸는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칼트산을 태웠던 불길 속에서도 알지 못했던 뜨거움을, 아폴로니아는 지금에서야 깨닫고 있었다.
강하게, 또 부드럽게. 빨랐다가 다시 느리게, 거친 듯하다가도 조심스럽게, 유리엘은 오랫동안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녹을 것 같은 황홀함 속에서 아폴로니아는 그의 목에 팔을 걸고 천천히 그를 안았다.
긴 시간 끝에 두 사람이 떨어지고, 아폴로니아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유리엘이 다시 한 번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녀의 반응이 꽤나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이었다.
“……방금 뭘 했지?”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유리엘이 한 번 더 이마를 맞대며 속삭였다.
“모르시면 다시 한 번 할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한 번 겹쳤다가 떨어졌다.
“……다시.”
아폴로니아가 눈을 감은 채로 다시 말했다. 유리엘은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아직 모르겠는……. 읍.”
유리엘은 아폴로니아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또다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또다시.
노을이 짙어지고, 호수면까지 붉은빛과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노을을 담은 아폴로니아의 눈이 감겼다가 뜨고, 다시 감기는 모습을 보며, 유리엘은 그녀에게 셀 수 없이 많은 키스를 남겼다.
* * *
“바멜산의 마물 소탕을 에핀하르트 대공에게 일임한다.”
황제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렸다. 그의 황금안이 번쩍 하고 빛났다.
카엘리온이 수없이 들었던 명령이었다. 마물을 퇴치하라, 전쟁을 끝내라, 도적을 소탕하라. 황제는 수많은 명령을 내리면서 단 한 번도 마물이나 전쟁, 도적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의 진짜 사냥감은 언제나 카엘리온이었다. 5년 전 화재를 겪고도 살아 돌아온 아폴론의 후손. 수십 차례의 암살 시도에도 멀쩡하게 살아남아 불사신이라 불리는 대공.
“폐하, 대공 전하의 사병은 대부분 대공령에 있습니다. 수도까지 급히 올 수 있는 병력으로는 바멜산의 마물을 상대하기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어느 백작의 목소리가 불안한 듯 말했다.
“폐하, 그곳의 마물은 지나치게 번식이 잦고 종의 크기며 모양도 빠르게 바뀌어 파악이 어렵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직접 가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또 다른 목소리도 말했으나 황제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들은 카엘리온을 지지하는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사병을 국경 근처에 둔 그들은 수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세력은 되지 못했다. 회의에 미처 참석하지 못한, 카엘리온을 지지하는 많은 지방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회의장에는 여러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수도에 거주하는 이들이었다. 귀족들은 예고 없이 긴급하게 소집되어 수도의 북쪽 경계에 위치한 바멜산 부근에 출몰하는 거대 마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크로아딘이라 불리는 악어를 닮은 거대 마물은 보통 산이 아닌 바다에서 사는 파충류에 가까운 괴물이었다. 그들은 생명을 가진 것은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는데, 평소 인간과 부딪힐 일은 많지 않아 포악하다는 것 외에 알려진 습성도, 공략법도 없었다.
크로아딘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은 아주 드물었고 새끼가 아닌 성체를 잡는 데 성공한 사람은 거의 전설 속에만 등장했다.
“바로 어제, 바멜산에서 사냥을 나온 마물로 인해 수도의 백성 세 명이 죽었다. 이 긴급한 사안을 맡을 만한 다른 인물이 있는가?”
황제가 말했다. 그의 시선은 카엘리온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어떤가, 대공? 그대는 이미 수없이 마물과 싸우고 승리한 경험이 있다. 급박한 상황이니 대공령의 사병은 데려오기 어려울 것이나, 전쟁에 함께 참여했었던 그대의 병사들은 아직 수도에 남아 있으니 충분히 그대를 도울 수 있다. 또한 황실 기사단으로 하여금 그대를 돕게 할 것이다.”
카엘리온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상황이 훤하게 보였다.
전날 있었다는 마물의 습격은 황제가 꾸민 짓이 분명했다. 마물이 수도까지 오도록 유혹을 했든, 아니면 사람을 시켜 백성을 살해하고 마물의 짓으로 꾸몄든.
황제는 그 핑계로 급히 카엘리온을 마물 소굴로 보내려는 것이다. 그가 거절하기 어렵도록, 그리고 사병이 수도로 올 시간이 충분치 않도록.
그는 거절할까 생각했다. 그는 더 이상 옛날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황제가 그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거절했다고 해서 황제가 분노한다 한들 그와 한편에 서서 반감을 드러내 줄 지지 세력도 있었다.
황제가 굳이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조금 전 발언한 두 명을 제외하면 소집된 자들 대부분은 황제의 측근이었고, 카엘리온에게 부담을 지워 거절을 어렵게 만드는 데에는 도가 튼 자들이었다.
“백성의 죽음 앞에 무엇이 두렵습니까. 아 사태를 해결할 사람은 당연히 대공 전하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몬 백작이 목청을 높였다. 다른 몇몇 귀족들도 그를 지지하며 웅성거렸다. 황제의 매부인 루이스 리페르 공작은 평소처럼 조용했지만 그 작위만으로도 존재감을 뿜어내며 아몬 백작의 말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트리온 후작은 어떻게 생각하지?”
황제가 회의장 구석에 앉아 있는 트리온 후작에게 물었다.
바멜산은 트리온 영지에 속한 땅이었다. 후작은 마물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수도의 사람이 죽은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으나 영지 내에는 이미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얼마 전 그가 친동생을 선두로 세워 바멜산으로 기사들을 보냈으나, 그 결과 출병했던 병력 중 삼분의 일이 마물에게 잡아먹혔고 후작의 동생은 다리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을 카엘리온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저의 잘못입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두 눈이 퀭한 그가 힘없이 말했다.
“누구든 도와주신다면…… 트리온 가문은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카엘리온에게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카엘리온의 금적안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다른 귀족들은 이를 단순히 황제의 말에 대한 동의라고 보았을지 모르나 트리온 후작은 분명히 카엘리온에게 어떤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이 사태를 해결해 주면 중립인 자신은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수도 경계에 가장 강한 사병을 가진 그가 황제로부터 돌아설 것이라고.
카엘리온이 머리를 짚었다. 그의 고민이 조금 더 깊어졌다.
함정이 분명한 이 임무를 거부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강한 세력을 가진 중립 귀족의 지지가 걸려 있다는 것.
카엘리온은 눈을 들어 다시 한 번 황제의 얼굴이며 몸짓을 훑었다. 그는 겉보기에 자만과 여유로 가득한 듯했지만 그것은 연기였다. 굳어 있기라도 한 듯 유난히 빤하게 고정된 눈동자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은 카엘리온뿐 아니라 황제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했다.
황제에게도 이번 작전은 모험이었다. 카엘리온이 이번에도 성공한다면 트리온 후작을 중심으로 하는 중립 세력이 그를 향해 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일이 잘못되면, 그러니까 카엘리온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살아 돌아오면 황제의 입지마저 불안해질 수 있었다. 백성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지금, 황실의 핏줄을 타고나지도 않은 황제에게 반대할 명분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일종의 승부수인가.’
카엘리온이 속으로 냉소했다. 이 정도의 모험을 한다는 것은 황제와 페트라의 불안감이 상당히 커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카엘리온을 통해 황제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힘을 키우겠다는 아폴로니아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칼트산의 보석에 기반한 자금력으로 그는 꾸준히 세력을 모았고, 아폴론의 후예라는 명성과 그간 쌓아 온 공로로 인해 카엘리온의 주변에는 이미 상당한 세력이 모여 있었다.
패리스의 경쟁자로 떠오름은 물론 황제 자신도 위협하는 카엘리온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죽이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5년 사이에 장성해 연륜이 쌓이고 세력도 커진 카엘리온이다. 더 이상 평범한 방법으로는 암살할 수 없었다.
살수를 보내면 매번 시체가 되어 돌아왔고, 독을 보내면 바로 알아보아 입에 대지 않았다. 황태자의 부관으로 임명해 전쟁에 내보내자 총사령관을 제치고 백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래서 황제는 무리를 하면서까지 카엘리온을 험지로 내보내려는 것이다. 그가 죽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일단 그가 죽으면 귀족들이 무슨 마음을 먹든 자신에게도 패리스에게도 위협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비체 백작은 황녀의 호위라는 중책을 맡아 그대와 함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의 실력은 온 제국이 다 아는 바, 백성들을 도탄에서 능히 구해 낼 수 있을 터.”
카엘리온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최근 들어 그는 유리엘의 이름이 들릴 때마다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그와 입을 맞추던 아폴로니아의 모습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같은 날 자신에게 파혼을 고했던 모습도.
“너와의 결혼을 다시 생각하려고 해.”
그를 배려해 ‘다시 생각한다’고 했지만 말투는 한 가닥의 미련도 없이 단호했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그를 사랑한 적이 없으니 미련이라는 단어는 맞지도 않았다.
파혼한다.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아폴로니아에게 쓸모가 없다는 뜻일까? 카엘리온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대공.”
황제의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고,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어찌하겠는가.”
황제가 그에게 다시 한 번 압박을 가하였다. 카엘리온은 움직이지 않는 그 황금안을 피하지 않고 쏘아보았다.
카엘리온의 눈길이 다시 트리온 후작을 향했다. 그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도와주면 그는 카엘리온에게 힘을 실어 줄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그 얼굴에 아폴로니아가 겹쳐 보였다.
수도에 거주하는 중립 귀족의 세력은 아폴로니아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정말로, 정말로 깊이 생각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누이.”
카엘리온은 자신이 아폴로니아에게 남겼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결혼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는 말을.
그녀는 쉽게 마음을 바꾸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주어야 했다. 오팔 따위가 아닌, 그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을.
카엘리온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어진 어깨와 큰 키, 그리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회의장을 꽉 채웠다. 황제도, 귀족들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제국을 위해, 마물을 섬멸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아폴로니아는 카엘리온을 곁에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
“가지 마.”
에반젤린이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진심으로 카엘리온을 걱정하는 듯했다.
“함정이야. 게다가 크로아딘은 사냥으로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늑대 마물인 자칼로페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달라.”
“함정이라는 건 알고 있어.”
“그걸 아는 사람이 황제가 시킨다고 냉큼 간다고 해? 이제 어쩔 거야? 무슨 비책이 있다고 그런 곳을 가?”
에반젤린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카엘리온이 그녀의 적갈색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
“비책은 여기 있잖아.”
에반젤린의 눈이 커졌다.
“너…… 설마.”
“마물 퇴치가 전쟁보다 어려운 이유는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적기 때문이지. 움직임을 예상할 수 없으니까. 흔히 접하지 못하는 녀석들은 더더욱 그럴 거고.”
“잘 아네!”
“그러나 너는 다르지 않나. 마물을 길들이고 부리는 너라면 녀석들을 사냥하는 법도 알고 있겠지. 주술이든 무기든.”
그가 에반젤린이 앉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피식 웃었다. 황당하다는 듯 굳어 있던 에반젤린이 간신히 입을 뗐다.
“안 돼.”
“왜?”
“난 전하하고 거래했지 너하고 한 적 없으니까 너한테 그런 거 알려 줄 의무는 없어. 게다가 뭐라도 알려 주면 넌 진짜 가 버릴 거잖아.”
“안 알려 줘도 가야 해. 이미 승낙했으니까. 가지 않는다면 황제를 기만한 죄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에반젤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노와 황당함, 걱정 등이 버무려진 날카로운 눈빛이 카엘리온을 향했다.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야. 떼로 있는 크로아딘을 인간이 사냥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그 말은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거군.”
두 사람은 마치 누구의 고집이 더 센지 겨루기라도 하듯, 서로 시선을 마주친 채 한동안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날카로운 표정을 먼저 거둔 것은 에반젤린이었다.
“……한 가지 약속해. 출발하기 전에 전하에게 알리겠다고. 그 사람은 너보다 신중하니까 널 말릴 수도 있겠지.”
“좋아.”
잠깐의 침묵 후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설명을 시작했다.
“주술 같은 건 나도 몰라. 알려 줄 수 있는 건 습성뿐이야.”
카엘리온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에반젤린의 말이 정말 사실일까 의심했다. 마물을 잡는 것에 멈추지 않고 마물과 소통하며 그들에게 지시까지 하는 그녀를 보면, 주술의 힘을 조금도 빌리지 않았다는 말은 믿기가 어려웠다.
그가 의심을 하든 말든, 에반젤린은 말을 계속했다.
“수가 갑자기 늘었다면 그 안에 몇백 년은 묵은 여왕이 있는 거야. 그걸 잡아야 하는데 발견하기도 어렵고 상대하는 건 더 어려워. 물에서 사는 것이 대체 어떻게 산에서 번식까지 했는지 나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악어와 유사하다고 했나?”
카엘리온이 물었다.
“외양이 그나마 비슷한 짐승이 악어라서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전혀 달라. 더 크고 빠르고 강하고, 땅에서도 순식간에 움직이는 데다가 사냥할 때에는 기척을 숨기기 때문에 기습에도 아주 능하지. 물과 음식이 없어도 잘 견디니까 굶겨 죽이기도 어렵고, 체온을 조절하기 때문에 더위에도 추위에도 끄떡이지 않아. 그 부분은 마치…….”
에반젤린이 적절한 표현을 고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범을 닮은 날카로운 눈이 잠시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
“마치 황녀 전하 같아.”
카엘리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흉측한 마물을 묘사하고는 그것이 아폴로니아를 닮았다니. 그러나 에반젤린은 스스로의 표현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녀석들에게는 화공도 안 먹히거든. 한 마리 잡아서 키워 볼까 했었는데 실패했었어.”
카엘리온은 더욱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식인 괴물을 키운다고? 하긴, 그녀는 만만치 않은 날개 달린 검은 괴수를 길들여 타고 다니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잡는 방법은?”
“그나마 가능한 건 르시앙 꽃의 독. 몸에 닿는 정도로는 안 되고 화살 같은 무기로 꽂아야 해. 상당한 양의 독을 체내로 투입시켜야 해서 쉽지 않아. 사실 가장 효과적인 건 치사량의 독을 먹이는 거지만 녀석들은 교활해서 독이 든 음식을 귀신같이 가려내지. 그 방법은 포기해.”
“화살이 잘 들어가는 약점이 있나?”
“가죽도 두껍고 거의 없어. 그나마 눈알? 보통은 한 발 명중시키면 죽겠지만 여왕은 세 발쯤 쏴야 할 수도 있어.”
카엘리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에반젤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수십 마리가 무리를 이루는데 한 몸처럼 협력해. 한 놈을 화살로 잡으면 다음 순간 다른 놈에게 먹힌다는 거지.”
그녀가 몸을 부산하게 흔들며 말했다. 마지막 말에는 카엘리온도 이마를 찌푸렸다.
“딱 하나 효과적인 건 여왕을 잡는 것. 한 집단을 이루는 녀석들은 어딘가 연결되는 점이 있어서 여왕을 잡으면 다른 놈들도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해. 물론 여왕은 너무 강해서 잘 안 잡히지.”
“여왕을 구분할 방법은? 다른 녀석들과 구분되는 소리라든가.......”
에반젤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냥 제일 거대하고 강한 놈이야. 무리의 다른 녀석들에게도 포악하게 군림하고. 크고 위험한 짐승을 사냥할 때에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지만 일단 사냥감을 제압하고 먹을 준비가 되면 가장 먼저 달려들어. 그때 길을 막는 녀석은 가차 없이 죽여 버리지.”
“좋아하는 먹이가 있나?”
“그냥 날고기면 다 좋아해. 인간도 포함이야.”
그녀가 으스스하게 말했다.
“엄청난 지식이군.”
카엘리온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거대한 식인 마물에 대해 에반젤린만큼 관심을 갖는 이는 온 대륙을 뒤져도 없을 것이다.
다른 마물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였다. 마물을 절대적인 적 또는 사냥감으로만 보는 대부분 사람들과 달리 에반젤린은 그들을 흥미로운 연구 대상으로 보았다. 그들을 관찰하는 그녀의 시선에는 진심 어린 애정까지 담겨 있었다.
“가지 마.”
그녀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카엘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가야 해.”
“너를 못 믿는 것이 아니야. 어려운 일이지만 굳이 적임자를 찾자면 너겠지. 하지만 이건 무모해. 황제의 함정이라면 네가 짐작하지 못한 위험 요소가 더 있을 수도 있어.”
카엘리온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이겨야 했다. 아폴로니아를 위해서.
“시간이라도 줘. 며칠만 주면 내가 더 알아볼 테니까. 몇 마리나 있는지, 여왕은 주로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큰지. 정보는 많이 알고 들어갈수록 좋단 말이야.”
에반젤린이 다시 한 번 그를 붙잡았다. 그러나 카엘리온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면 신세는 분명하게 갚도록 하지.”
“최소한 약속은 지켜. 전하에게 물어보고 가.”
에반젤린이 그의 등 뒤로 한 마디 덧붙였다. 카엘리온은 돌아서려다 말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표범을 닮은 눈매는 걱정 때문인지 끝이 처져 있었다. 그런 모습은 맹수보다는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누이는 어디에 있지?”
에반젤린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카엘리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엘과 함께로군.”
“호위니까 당연하지. 곧 돌아올 거니까 그때…….”
카엘리온은 에반젤린의 표정을 살피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약속했으니 물어보고 가도록 하지.”
그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에반젤린이 이마를 찡그렸다.
“가지 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허공에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뻗었다.
“방금 그거 거짓말이겠지? 물어본다는 거.”
에반젤린이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평소에 나를 볼 때랑 표정이 너무 다르잖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산에 풀린 크로아딘에 대해 살펴 줘.”
그녀가 말했다. 허공에서 찍찍거리는 대답이 들려왔다.
* * *
“출병했다고? 벌써?”
아폴로니아가 어두워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짙은 붉은색으로 빛났다.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녀의 말에 따르면 전하께 보고를 드릴 틈도 없이 바로 출발했다더군요.”
아폴로니아가 머리를 짚었다.
붉은 호수의 숲이 마음에 들어 아예 하루를 더 보내고 온 것이 문제였다. 카엘리온은 긴급하게 소집된 회의에 참석하더니 준비할 틈도 없이 바로 사병과 황실 기사단의 일부 기사들을 데리고 바멜산으로 향했다.
“하아…… 마물 퇴치라.”
그것은 황제와 페트라가 여러 차례 썼던 방법이었다. 익숙한 방식이었고 카엘리온은 이미 같은 수법을 몇 번이나 벗어난 적 있었지만, 마물 퇴치는 단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었다.
“유리엘이 곁에 없고 카엘이 수도에 있는 이 기회에 아버지와 고모님이 판 함정…….”
아폴로니아가 중얼거렸다.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위험한 녀석들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임무이고 아마 팽팽한 접전이 될 거라고 하더군요.”
“그렇겠지. 녹스는 당연히 같이 안 갔겠지?”
“어떤 임무에 누구를 투입할지 결정하는 것은 기사단장이지만 이번에는 황제가 직접 대상자를 선정했습니다. 기사단장은 물론, 황제가 아끼는 어떤 기사도 이번 일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최악의 경우 살아 돌아오지 못해도 괜찮은 자들만 골라 보낸 듯합니다.”
아폴로니아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참으로 노골적인 함정이었다. 황제는 이번 작전에 꽤나 많은 것을 걸었다.
“녹스에게 그쪽 상황을 알게 되면 바로 연락하라고 전해 줘. 에반젤린도.”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녀는 이미 무언가 지시를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장 답이 나오지는 않겠죠.”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그녀는 카엘리온의 능력을 믿었다. 에반젤린이 도움을 주었다면 더더욱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황제와 페트라가 함께 만든 함정은 준비 없이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를 걱정하시는군요.”
유리엘이 그녀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일 이후로 거리를 뒀다고 말없이 가 버릴 줄은…….”
“많이 불안했나 봅니다.”
“……불안이라.”
“카엘리온은 전하께서 동생을 얼마나 생각하시는지 모르니까요.”
유리엘이 덧붙였다. 아폴로니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는 이렇게 잘 아는데 말이야.”
그녀는 카엘리온에게 정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잠재적인 경쟁자이자 재능 있는 소년 정도로 생각했으나, 그를 후원하고 성장시키면서 그녀는 카엘리온을 진짜 혈육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그에게 애정을 보여 주려 하면 그가 눈꼬리가 순하게 내려뜨리면서 연정에 대한 기대를 품는 모습이 보였기에 최대한 선을 그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은 혈육이지만 군신이기도 했으니까.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면서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것이 그녀가 카엘리온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급히 출병했다는 소식은 아폴로니아를 걱정시키기에 충분했다.
“카엘리온은 강합니다, 전하.”
아폴로니아의 혼잣말에 유리엘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카엘리온과 몇 년간 생사를 함께한 유리엘은 제국의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았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입술을 깨문 채였다. 이를 본 유리엘이 그녀의 뺨을 살짝 쓸며 웃었다.
“하지만…….”
“하지만 혹시 모르니 가 보려 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아폴로니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유리엘.”
“전하께서 그 사이에 아무데도 외출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면요.”
아폴로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를 안심시키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만의 하나라도 녀석이 잘못되면 전하께서 슬퍼하실 테니까요.”
아폴로니아의 마음 한구석이 저렸다. 유리엘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카엘리온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언제나 그랬다. 아폴로니아를 위해서.
“조심해서 데려오겠습니다.”
그녀의 걱정 어린 시선을 보았는지, 유리엘이 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카엘리온이 혹시 정말로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거라면, 그래서 네가 그를 구하게 된다면…….”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애매한 표현이지만 일종의 허락인 셈이었다.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섰다.
“이 말을 전해 줘.”
그녀는 유리엘의 양쪽 뺨을 감싸 그의 얼굴을 끌어당기고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리고 조심해.”
“당부 잊지 않겠습니다.”
유리엘이 그녀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전하의 마음이 다칠 일은 만들지 않겠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고개를 숙여 아폴로니아의 이마에, 뺨에 입을 맞추었다. 한 번 한 번의 키스가 넋을 잃을 만큼 달콤했다.
“남은 건 돌아와서 하도록 하죠.”
사람을 홀리는 말을 남기고, 유리엘이 그녀의 방을 나섰다.
* * *
바멜산은 거대했다. 산 하나라기보다는 봉우리가 다섯 개쯤 되는 산맥이었는데, 거대한 바위와 절벽이 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중간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기는 하나 그마저도 바위며 그 틈에서 자란 나무들에 덮여 있기에 어둡고 인적도 드문 곳이었다.
산 밑으로는 강이 하나 흘렀다. 이는 농사용으로, 식수로 활용되는 트리온 영지민들의 중요한 생활 기반이었으나 그 강을 통해 크로아딘 떼가 바멜산으로 들어온 후부터는 부근의 민가에 사람이 남아나지 않았다. 몇몇이 잡아먹히자 남은 자들이 멀리 도피한 탓이다.
기사단을 이끌고 그곳에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크로아딘은 인간이 다닐 수 없는 바위나 절벽을 쉽게 탔지만 기사들은 움직임이 크게 제한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유리엘은 카엘리온의 병력 대부분이 산 아래에서 활과 창을 든 채 대기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문제는 기사들의 얼굴이 흙빛이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대공 전하는 어디 계신가?”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대기 중이던 황실 기사단 소속 기사에게 물었다.
“백작님…….”
유리엘을 본 그는 더더욱 사색이 되어 말을 더듬었다. 유리엘의 오른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에 찬 검을 잡았다.
“놈들을 이곳까지 유인해 잡겠다는 계획이 아닌가? 대공 전하는?”
그는 늘어선 궁수들을 빠르게 훑었다. 선두에 있어야 할 카엘리온이 보이지 않았다. 기사의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게…… 녀석들은 생각보다 지능적이라…… 산을 둘러싸며 대기하는 것을 지켜보기라도 했는지…….”
공포에 질린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갈라졌다.
“언, 언제 이동했는지 강물 밑으로 몸을 숨기더니 뒤에서 접근해 순식간에 병사 다섯을 물고 사라졌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빠르게 발견하고 그중 둘의 왼눈을 명중시켰지만…… 아마 녀석들과 물린 병사들이 다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은 듯합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강변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핏자국과 갑옷 조각들이 있었다. 유리엘이 눈썹을 더욱 찌푸렸다.
“그래서?”
한층 낮고 힘이 들어간 목소리에 위협을 느꼈는지, 병사가 흠칫 몸을 떨며 대답했다.
“저, 저희는 그렇게라도 녀석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잡아야지 않겠냐고 했지만 대공 전하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유리엘이 입술을 짓씹었다. 답답하게 말을 흐리는 기사의 표정을 보자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여, 여왕을 끌어내려면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시며…… 윽!”
기사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유리엘이 한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붙잡았기 때문에.
“대공 전하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 그것부터 말해.”
시리도록 새파란 안광이 기사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는 덜덜 떨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병, 병사 몇 명만을 데리고 직접 산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유리엘의 눈이 커졌다. 그의 손에 힘이 풀리자 멱살이 붙잡혔던 기사가 땅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에반젤린으로부터 들었던 크로아딘의 습성을 떠올렸다. 그녀는 카엘리온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를 유리엘에게도 똑같이 해 주었다. 여왕을 잡아야 다 끝나는 거라고.
“여왕은 크고 위험한 짐승을 사냥할 때에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지만 일단 사냥감을 제압하고 먹을 준비가 되면 가장 먼저 달려들어.”
유리엘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젠장.’
얼마나 교활한지, 크로아딘은 산 아래에 주둔한 병력을 보고 이를 ‘크고 위험한 짐승의 사냥’이라 여긴 것이다. 인육을 즐기는 것들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를 알아본 카엘리온은 물러서지 않고 여왕을 끌어낼 방법을 찾았다.
‘무모한 놈.’
제 발로 마물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 그는 스스로 ‘먹을 수 있게 준비된’ 사냥감이 되어 여왕에게 다가간 것이다. 거대하고 강한 마물의 눈에, 병력과 분리된 카엘리온과 호위 몇 명은 그저 한 끼 식사에 불과할 테니까.
그는 이번 일에 정말로 사활을 걸어 버린 것이다.
“……언제 들어갔지?”
유리엘이 덜덜 떠는 기사에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도 한층 낮고 위험하게 들렸다. 기사는 땅에 주저앉은 채 대답했다.
“하, 하루…….”
“뭐?”
유리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계십니다.”
타앗!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리엘은 전속력으로 바위산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거칠고 미끄러웠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수십 미터를 추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리엘은 날개라도 달린 듯 순식간에 산 중턱에 이르고 숨을 골랐다. 그는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도 높이 자란, 기괴하게 비틀린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나무는 거대한 짐승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사이에 해가 졌는지 사방이 어두워져 다른 것은 잘 보이지 않았다. 고요한 가운데 정체 모를 벌레들의 울음소리만 산을 울렸다.
찌르륵- 찌르륵- 찌르륵-
유리엘은 카엘리온과 그의 호위들이 남긴 약간의 흔적을 찾아 올라가고 있었다. 거의 지워진 발자국, 부러진 나뭇가지와 짓밟힌 풀 같은 것이었다. 유리엘은 멈추어 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위투성이인 산이기에 흔적 자체가 찾기 힘들었고, 그나마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주변에 깔린 부서진 바위 조각과 잘게 부스러진 돌멩이들, 그리고 옆으로 쓰러져 있는 나무 한 그루였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쓸고 지나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왕인가…….”
그가 날카롭게 돌 조각을 하나 집어 들어 허공에 던져 올렸다가 다시 받았다. 자연스럽게 갈라진 것이 아니라 무언가의 강력한 힘으로 잘게 부서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상당히 최근에.
찌르륵- 찌르- 찌륵.
돌을 몇 차례 던지고 받던 유리엘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벌레 울음소리가 멎으면서 그를 둘러싼 공기가 변한 것이 느껴졌다.
“이런.”
크르르르르르르.
그가 한 마디를 내뱉는 순간 등 뒤에서 묵직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왔군.”
유리엘은 돌아섬과 동시에 검을 뽑았다. 검이 달빛을 받아 머리색과 같은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눈앞에 서 있는 그놈은 다 자란 들소의 세 배쯤 되는 덩치를 자랑했다. 짙은 회색 몸은 한눈에 보아도 갑옷처럼 단단해 보이는 가죽으로 덮여 있었고, 뾰족한 뿔 같은 것이 잔뜩 달린 꼬리는 한 대만 맞아도 10미터는 날아갈 것처럼 육중해 보였다. 길게 찢어진 입 사이로 수백 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반짝였다. 놈의 황금색 눈은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네가 여왕인가?”
녀석의 크기는 에반젤린이 말한 여왕과 얼추 비슷해 보였다. 유리엘이 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검 끝에는 미리 발라 놓은 독이 투명하게 빛났다.
크르르르르르르-
놈이 다시 한 번 으르렁 댔다. 일전을 앞두고 긴장한 것이 아닌, 즐거운 식사에 흥분한 모습으로 보였다. 몸의 길이에 비해 짧지만 강하고 빠른 다리가 땅을 몇 번 차더니 유리엘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유리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크르르르르- 꽤액!
괴물이 막 그의 코앞까지 다가오려던 찰나, 갑자기 무언가가 뒤에서 녀석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녀석의 거대한 몸이 공중으로 들리며 꼬리가 힘없이 흔들렸다. 공격을 준비하던 유리엘이 눈썹을 찌푸렸다.
크르르릉!
녀석을 들어 올린 것은 거대한 수백 개의 흰 이빨이었다. 훨씬 더 크고, 더 강한 어떤 짐승에게 달린.
끼이이이-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들리고, 무시무시한 이빨 사이로 회색 몸이 반으로 갈리는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순식간에 죽었다. 그 시체 뒤로, 새로 나타난 크로아딘이 피묻은 이빨을 번뜩이며 느릿느릿 몸을 폈다.
유리엘의 푸른 눈이 커졌다.
크르르릉-
처음 나타난 것의 세 배가 넘는 덩치. 에반젤린이 설명한 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컸다. 먼젓번의 녀석보다 짙은, 검은색에 가까운 가죽을 갑옷처럼 두른 크로아딘은 유리엘을 발견한 것이 기쁜지 두꺼운 목을 위쪽으로 쭉 빼고 그를 내려다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난 네 식사가 아니야.”
유리엘이 경고하듯 말했다. 그러나 크로아딘은 징그러운 혀를 내밀고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그는 여왕을 찾아내려는 카엘리온의 작전을 떠올렸다. 확실히 영리한 판단이었다.
위험한 사냥감을 만날 때는 물러서 있다가 먹이가 준비되면 앞으로 나선다는 여왕이다. 그러니 자신의 서식지에 겁도 없이 들어선 인간 몇 명 정도는 일종의 날고기, 즉 한입 식사로만 보고 빠르게 앞으로 나섰을 것이다.
그 증거로 이 녀석은 유리엘의 움직임을 감지하자마자 그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감히 자신보다 먼저 ‘먹이’에 접근한 괘씸한 부하를 두 동강 냈다. 성인 남자만 한 길이의 꼬리가 좌우로 흔들리자, 그 힘에 주변의 바위가 쿵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면 놈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그대로 타고 올라온 것 같았다.
“여왕은 너였군.”
유리엘은 검을 뽑아 들고 녀석을 관찰했다. 여왕이 천천히 그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그 육중한 몸은 짐승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거대한 바위 같았다.
“뭐……?”
높이 고개를 들어 마물의 얼굴을 올려다본 유리엘이 눈썹을 찌푸렸다. 사람 주먹만 한 녀석의 왼눈은 누렇게 빛나고 있었으나, 오른쪽 눈은 검붉은 색으로 파인 채 부러진 화살이 다섯 개쯤 꽂혀 있었다.
“카엘리온…….”
유리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신궁은 신궁이었다. 화살은 분명히 그의 것이었다. 그는 에반젤린의 조언을 정확하게 따랐고, 여왕의 눈동자에 독화살을 꽂은 것이다. 확실한 성공을 위해 한쪽 눈에만 집중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유리엘은 오랜만에 온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왜…….”
크르르르르르릉!
에반젤린의 말대로라면 여왕은 죽었어야 했다. 화살을 하나도 아닌 다섯 개나 눈동자에 박았으니까. 당연히 독을 발랐을 것이고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나야 했다. 그러나 여왕은 살아 있었다. 오른눈에 초점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멀쩡했다.
마물과 인간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인간인 유리엘이었다.
“좋아.”
그는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마물의 시선을 피해, 녀석의 왼쪽 어깨 밑 사각지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크르릉!
완벽하게 계산된 거리였으나, 몸을 돌린 순간 여왕은 유리엘의 코앞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움직임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따악!
유리엘이 뒤로 몸을 날려 피함과 동시에 여왕의 긴 주둥이가 그의 옷깃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닫혔다. 입맛을 쩝쩝 다시는 여왕을 보며, 유리엘은 깊이 심호흡했다.
살면서 이렇게 거대한 것이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에반젤린의 경고에 비추어 보아도 이 녀석은 예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었다.
거대한 덩치는 물론이고, 검붉게 변한 눈 색을 보면 분명 독 자체는 효과가 있을 것인데 그런 독화살을 몇 번이나 맞고도 버티는 저항력도 말이 되지 않았다.
쿵!
그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여왕은 쏜살같이 유리엘을 향해 돌진했다. 놈을 피해 몇 걸음 물러서자 등 뒤에 커다란 바위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양옆으로 비슷한 바위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뒤는 절벽이었다.
유리엘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여왕은 유리엘이 올라온 길목을 꼬리와 몸통으로 막으며 그를 몰아붙였다.
‘지형을 이용하고 있어……?’
따아악!
그가 몸을 비틀어 피하는 순간 여왕의 이빨이 다시 한 번 그의 코앞에서 닫혔다. 머리카락 끝에서 땀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녀석은 보기 드물게 지능적인 마물이었다.
달빛에 비친 여왕의 집채만 한 그림자가 유리엘의 몸 위로 드리워졌다. 녀석은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시며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유리엘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 카엘리온은 무모한 구석이 있었지만 전술을 짤 때는 냉철하고 현실적인 사령관이었다. 그는 죽을 생각을 하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분명히 산에 들어서면서는 여왕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왕의 눈에 성공적으로 화살을 박아 넣은 흔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여왕은 살아 있다. 들어 본 적 없는 힘과 지능을 갖춘 채로. 반면 카엘리온은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유리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더 이상 카엘리온을 멀쩡한 모습으로 찾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는 어쩌면 이미…….
크르르릉!
그의 생각을 깨며, 여왕이 다시 한 번 돌진했다. 유리엘은 이번에는 피하는 대신 검을 들어 여왕을 겨누었다.
“약점이 눈밖에 없다고.”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이 마물이 유일하게 살짝 느려지는 순간은 유리엘이 녀석의 오른쪽으로 몸을 비킬 때였다. 후각과 청각도 분명 민감했지만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나자 녀석의 시야가 좁아졌다. 그것은 분명 놈의 약점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때를 기다렸다가 괴물이 부딪혀 오는 순간 그의 오른편으로 몸을 날렸다. 피하는 대신 오히려 여왕의 얼굴을 향해 다가섰다. 기회는 한 번, 일격에 끝내야 했다. 그가 쥔 장검에선 어느새 검기가 서늘하게 빛났다.
크릉!
여왕이 그의 위치를 읽고 반응하려는 찰나의 순간에, 그는 희게 번뜩이는 수백 개의 이빨들 가까이로 뛰어들었다.
그의 몸이 가까워지자 화살이 꽂히지 않은 왼쪽의 누런 눈이 드디어 그를 발견한 듯 섬뜩하게 번쩍거렸다. 유리엘은 검을 든 손을 올려 바로 그 눈을 겨냥해 길게 내리그었다.
쓰으으윽-
크앙!
서늘한 은빛의 검날이 시원한 호선을 그리자 여왕의 왼눈에서 피가 튀었다. 눈에서 입까지, 녀석에게 검의 궤도와 같은 모양으로 휘어진 긴 칼자국이 새겨졌다.
유리엘의 몸이 순간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퍼억-
그는 손잡이를 고쳐 잡아, 이미 부상을 입은 왼눈에 긴 검을 다시 박아 넣었다. 최대한 많은 양의 독약이 녀석의 몸에 들어가도록.
크아아아아아아앙!
마물은 괴로운 듯 울부짖었다. 큰 몸이 발작하듯 뒤틀렸다.
휘익-쿵!
거센 움직임에 유리엘은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검은 여전히 괴물의 눈에 깊숙이 박힌 채였다. 화살에 발라진 독이 부족했다면, 검은 더 효과가 있어야 했다.
“죽어라, 제발.”
유리엘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마물의 비틀림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움직임이 거의 멈출 때까지.
“죽어.”
그가 다시 한 번 내뱉었다.
크르르르릉……
그러나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던 여왕은 이내 몸을 꿈틀거렸다.
“미친…….”
크아아아아아앙!
유리엘은 주먹을 꽉 쥐고 한숨을 쉬었다. 녀석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에 휩싸인 듯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울부짖었다. 시력을 잃은 두 눈은 공허했지만 녀석의 움직임에는 별 제약이 없었다. 여왕은 곧 코를 벌름거리며 공기 중의 냄새를 맡더니 유리엘이 서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향하고 섰다.
유리엘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단검을 잡았다가 다시 놓았다. 혹시 몰라 독을 발라 두기는 했지만 보아하니 치사량에는 못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등 뒤에 자리한 바위틈으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 쪽으로 뛰어야 뼈가 하나라도 덜 부러질까?
유리엘이 고민하는 사이에 여왕은 엄청난 속도로 그가 선 바위를 향해 돌진해 왔다.
“젠장.”
여왕의 이빨이 닫히려는 찰나에, 그는 바위 위로 뛰어올라 절벽으로 떨어질 생각이었다. 몸이 으스러지겠지만 어떻게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목숨을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크르르르-
휙-
유리엘은 두 다리로 강하게 땅을 박차고 뛰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쪽으로, 어서!”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의 손이 그의 다리를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딱!
커다란 이빨이 그의 셔츠를 스쳤고,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아래쪽 어딘가로 끌어내려졌다.
털썩-
유리엘은 바위틈에 나 있던 어둡고 좁은 구멍을 통해 슥 하고 미끄러져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게 뭐…….”
“비켜.”
그의 등 밑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멍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 덕분에 그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살아 있었군.”
“그럼 죽은 줄 알았나? 다리 깔고 앉지 말고 비켜.”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유리엘은 천천히 그의 말에 따랐다. 깔려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자 그의 얼굴이 더욱 잘 보였다. 검은 고수머리에 익숙한 금적안, 동굴을 꽉 채울 것 같은 넓은 어깨에 큰 키를 가진 그는 카엘리온 에핀하르트였다.
“여기 숨어 있었던 거야?”
“그래. 어느 산짐승이 파 놓은 굴인지 아주 유용해. 넓은데다 잘 숨겨져 있어서 드러나지도 않고, 입구를 막은 바위는 튼튼한지 여왕이 무슨 짓을 해도 안 부서지더군. 뭐…….”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죽기에 괜찮은 장소일지도 모르지.”
그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진 데다 핏자국도 묻어 있었다. 그러나 더 문제인 것은 다리였다. 누군가의 옷자락으로 동여맨 다리는 한눈에 보아도 부상이 심각했다.
“부러졌나?”
“응. 화살이 다 떨어지니 별수 있나? 누이였으면 벌써 다 붙었겠지만 난 며칠 더 걸릴 것 같아.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여유로운 듯 말했지만 그의 얼굴은 초췌했다. 그다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호위를 데리고 왔다며?”
“저쪽에 있어.”
카엘리온이 턱으로 가리킨 곳에는 기사 두 명이 동굴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도 핏자국이 낭자했다.
“저래 보여도 살아 있어. 치료만 해 주면 회복이 될 텐데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군.”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엘리온은 다시 유리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반젤린에게 듣고 온 거야?”
“그래. 하지만 상황이 왕녀의 예상과 다른 것 같군. 당장 크기만 보아도 왕녀가 말한 것의 두어 배는 넘겠던걸.”
“아아, 맞아. 너무 쉽게 생각했지. 그래도 한쪽 눈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면 죽을 줄 알았는데. 애꾸라도 만든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카엘리온이 씁쓸하게 웃었다.
“마찬가지야. 검으로 왼눈을 찔렀지만 눈만 멀었지 살아서 움직이더군.”
“검으로 직접 찔렀어? 호위도 없이 혼자 그 짓을 하다니 진짜 미친놈 아닌가.”
그는 감탄과 책망이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하긴, 나도 위험한 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
카엘리온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무언가 더 파악되면 출발하라는 에반젤린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듯했다.
“……정보가 부정확했던 게 문제라고 생각하나?”
“그럴 리가 없잖아. 너도 아니까 묻는 거 아닌가.”
유리엘의 질문에 카엘리온이 잘라서 대답했다.
“리페르 공작가가 생각보다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한 함정이야. 여왕을 보는 순간 깨달았지.”
그가 조용히 말했다.
“마물을 거대화하는 약을 먹였을 거야. 독약이 아닌 이상 고기에 섞어서 뿌리면 여왕이 제일 먼저 먹을 테니까. 자연히 일반적인 양의 독으로는 안 죽는 상태가 된 거고. 바다에서 사는 놈들이 여기 있게 된 것부터가…….”
“누군가가 먹잇감을 통해 유인했다는 것이로군.”
카엘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아딘이 아무리 악명이 높아도, 그들이 본 괴물은 상식을 넘어섰다. 크기며 능력이며 자연의 상태로는 다다를 수 없는 상태였다.
“녀석들이 그 덩치를 유지하며 이 산에서 몇 달을 서식했다는 건…….”
“사냥감이 다 사라진 후에도 누군가가 고기를 가져다 두었다는 것.”
유리엘이 다시 한 번 카엘리온의 말을 대신 끝내 주자 카엘리온이 이마를 짚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깨달은들 뭐 하겠어. 다리가 이 모양인데. 멀쩡한 네놈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기회를 노려 봐. 어차피 죽을 목숨, 미끼 역할은 한 번 해 주지.”
짧은 정적이 흘렀다. 유리엘이 눈썹을 치켜올리고 카엘리온을 보았다.
“뭘 놀라? 그럼 둘이 같이 죽자고 달려들 줄 알았어? 네놈한테 나까지 살려서 나갈 능력은 없으니 혼자라도 나가라는 거야.”
유리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삼 그와 카엘리온이 지난 5년간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셀 수 없이 겪었던 위기, 두 사람은 생사의 기로에서 살다시피 했다.
앞에 서서 먼저 칼을 맞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역할이었는데, 카엘리온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반대되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어둡고 조용한 동굴 속에서, 유리엘이 픽 하고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많이 컸구나. 카엘리온 에핀하르트.”
불쾌한 듯 구겨지는 얼굴을 보며, 유리엘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 * *
에반젤린은 한 손에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올 때가 한참 지났는데.”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1분 사이에도 수십 마리의 작은 마물들이 들락거리고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에반젤린이게 작은 글씨가 빽빽이 쓰여 있는 종잇조각 같은 것을 전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에반젤린이 기다리는 소식은 아직 오지 않았다.
“역시 속도로는 외눈까마귀를 못 따라간다니까.”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엘리온이 크로아딘에 대해 물어본 이후로 에반젤린은 줄곧 마음이 불편했다. 하고 싶은 말은 바로바로 내뱉고, 하고 싶은 일도 참지 않는 그녀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말도 안 듣는 놈.”
에반젤린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는 카엘리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에반젤린이 만났던 생명체 중 가장 매력적이었다. 외모도, 목소리도, 퉁명스럽지만 어딘가 따뜻한 태도도 좋았다. 그래서 그를 곁에 두고 싶었다.
길들이고 싶었다. 마물들을 길들였던 것처럼.
“너는 사랑과 소유욕을 착각하고 있다.”
카엘리온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이끌려 그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이란 말인가. 심지어 몇 번이나 거절당해도 포기가 안 될 정도로 강한 끌림인데.
그녀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빨리 손을 잡기 바란다.’고 했던 아폴로니아의 모습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어 버렸다.
멀리 내다보고 지속 가능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에반젤린의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것을 원할 뿐이었다. 그것이 에반젤린의 본능이고 사랑이었다.
훅-
창문 틈으로 바람이 한 번 불었다. 에반젤린의 눈이 반짝였다.
“왔네?”
그녀가 지시하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허공에서 작은 갈색 날개원숭이 한 마리가 보호색을 없애고 모습을 드러냈다. 큰 눈에 찌부러진 얼굴을 가진 녀석이었다.
“늦었잖아.”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원숭이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에반젤린의 물음에, 날개원숭이는 며칠 사이에 보고 들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반젤린은 녀석의 손짓, 몸짓과 내는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집중했다.
“크로아딘을 만나기 위해 자신을 미끼로 삼아……? 미친놈 아닌가.”
그러나 에반젤린은 다음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날개원숭이가 그다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뭐?”
에반젤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작은 마물은 이어 자신이 본 카엘리온의 전투를, 크로아딘 여왕의 무시무시함을, 그리고 그가 처한 상황을 더 상세히 설명했다.
“다리가 부러졌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바위틈으로 떨어져서 고립된 지 하루도 넘었고.”
온몸을 무언가에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하얗게 빛나는 머리를 가진 인간이 한 명 더 왔지만 구해 내지 못했어. 아마 같이 죽게 될걸.”
머리가 멍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물이 움직임을 멈추자 그녀는 숨 쉬는 방법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이상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다. 부상을 입은 채 산속에서 고립된 카엘리온을 상상하니 생전 알지 못했던 불안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어…… 이게 뭐…….”
문득 뺨에 손을 대니 몇 방울의 액체가 만져졌다. 눈물이었다. 에반젤린은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격정적인 기분의 정체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카엘리온을 결국 손에 넣지 못한다는 상실감일까? 하지만 에반젤린에게는 점찍었던 무언가를 얻지 못한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 때마다 조금씩 실망했지만 이런 충격은 처음이었다.
날개원숭이가 주름진 얼굴을 더욱 찌푸리며 찍찍거렸다. 그녀를 걱정하는 듯했다.
“나…… 무서워.”
에반젤린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온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가 죽을까 봐…… 그게 그냥 너무 무서워.”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휘청이는 몸을 애써 창틀에서 떼어 냈다.
“도움을 청해야 해.”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려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달려가고 싶었지만, 전쟁 포로인 그녀는 황궁을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려운 일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 황궁에서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에반젤린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은 단 하나였다.
아폴로니아.
* * *
“전하, 바이안 백작의 전갈이에요. 급하다고 했어요.”
아드리안이 전한 것은 아폴로니아가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유리엘이 바멜산을 향해 출발한지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황궁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것이 당연했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폴로니아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이리 줘.”
편지는 두 장이었다. 그중 녹스가 직접 쓴 것은 앞장으로, 내용은 두 줄밖에 되지 않았다.
[시간이 없으니 제가 받은 소식을 그대로 전합니다. 동봉한 것은 바멜산에 파견된 기사가 제게 전한 전갈입니다.]
안부도 인사도 없는 짧은 편지였다. 그의 말에 따라 다른 글씨체로 쓰인 두 번째 장을 읽은 순간, 아폴로니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아폴로니아는 한동안 말을 잃은 채 편지의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전하?”
아드리안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편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하…….”
“……카엘리온은 실종.”
아폴로니아가 힘겹게 입을 열고 말했다. 아드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요?”
아드리안의 물음에 아폴로니아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마치 다음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루 늦게 바멜산으로 들어간 유리엘 비체…… 마찬가지로 실종.”
말을 마친 아폴로니아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드리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손에서 조심스레 편지를 받아 들어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바멜산의 크로아딘은 기사단이 상대했던 어떤 마물과도 다르다…… 신체 능력이 발달했음은 물론 정교한 전술을 구사할 정도의 지능을 보이고…… 두 사람을 기다리는 사이에 몇몇 병사들이 공격을 당하기도 했으며, 대공 전하와 비체 백작님 또한 아마도…….”
아드리안은 마지막 말을 차마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아폴로니아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하, 이 추측이 사실일 리가 없어요. 실종된 지 겨우 하루, 하루 반 정도라면 그분들은 아직 어딘가에…….”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아폴로니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산에서 나오지 못한 채로.”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 또한 편지의 내용을 다 믿는 것은 아니었다. 카엘리온도, 유리엘도 쉽게 죽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하루 이상의 실종이라면 목숨이 붙어 있다 한들 어딘가에 고립되었다는 의미였다. 기사단이 상대해 본 어떤 마물보다도 강한 괴물이 서식하는 산속에서.
“전하, 기다리면 분명히…….”
“기다리면, 병력은 철수할 거야. 더 이상 인명을 잃을 수는 없을 테니까.”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 있다고 한들 두 사람의 몸이 성할 거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기적적으로 산에서 빠져나온다 해도 그들을 도울 사람이 없다면…….
아폴로니아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상황은 다급했지만 그럴수록 침착해야만 했다. 유리엘을, 그리고 카엘리온을 구해 낼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집중하면, 길은 보인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천천히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카엘리온을 위해 사병을 내줄 귀족 중, 북쪽 트리온 영지와 가장 가까운 곳은 돈 백작 영지겠지.”
아폴로니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은 아폴로니아의 집중을 깨지 않기 위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소식을 전하는 데만 하루, 백작이 쉬지 않고 바멜산에 간다 한들 또 하루…… 안 돼.”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한 번 흔들어 과감하게 처음 떠올린 선택지를 머리에서 지워 버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불가능했다.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위험한 일에 순순히 자신의 사병을 투입할 것이라는 확신도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바멜산에 주둔한 병력의 도움이 필요할 터였다. 현재 사령관을 잃어버린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자체적으로 카엘리온과 유리엘을 구출해 낼 거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두 사람이 바멜산 어디쯤에 있는지조차 파악할 능력이 없었으니까. 무턱대고 마물이 득실거리는 산으로 들어서는 것은 의미 없는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황실 기사단은 모르지만 대공령 소속의 기사들은 모든 것을 걸고 주군을 구할 터였다. 마물에게 목숨을 내주어야 한다고 해도.
황제의 핍박 속에서 겪어 온 수많은 전투에서 함께한 기사들이다. 카엘리온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이미 증명이 되고도 남았다. 두 사람의 위치를 당장 파악할 방법이 있다면, 그 후 권위 있는 누군가가 그러한 정보를 기사들에게 전하고 구출을 명할 수 있다면…… 확신은 없어도 희망은 있었다.
방 안에는 길고 긴 정적이 흘렀다.
“아드리안.”
이윽고 아폴로니아가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떴다.
“바멜산에 가야겠다.”
아드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하…… 직접 가시는 건 위험해요.”
“기사단을 지휘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 가야 해. 동원할 만한 다른 사람이 없어.”
“바이안 백작님은…….”
“아버지가 고의적으로 그를 제외한 사람들을 보냈는데 그곳에 가는 건 반역이나 다름없지.”
아드리안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단어를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전하의 안위예요. 잘 아시잖아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애원하듯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아폴로니아는 그 뜻을 이해했다. 아드리안은 아폴로니아의 이성에 호소하고 있었다. 유리엘에게 품은 감정 때문에 여태껏 온 힘을 다해 지켜 온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은 아폴로니아의 평소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알아.”
아폴로니아는 아드리안과 눈을 맞추고 다짐하듯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불안했지만, 사랑 때문에, 또는 카엘리온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드리안, 두 사람이 없으면 나는 더 위험해.”
아폴로니아는 진심이었다. 카엘리온은 그녀가 쌓은 세력의 기반이었고, 유리엘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그녀의 검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없다면 아폴로니아는 평생 황위를 되찾지 못한 채 황제와 페트라의 말 한 마디에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직접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말이 아니야. 난 그런 능력은 없으니까. 약간의 도움을 주려는 것뿐이야.”
아드리안의 입술이 조금씩 떨렸다. 그녀의 우려는 직접적인 위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성공하더라도 아폴로니아의 행동은 황제의 시선을 끌 것이 분명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구출에 성공할 수만 있다면…… 생각이 있단다.”
아폴로니아는 다시금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확신이 없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폴로니아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조금 전 충격을 숨기지 못했던 눈동자는 다시 평소의 차가운 침착함을 되찾았다.
“아드리안, 당장 에반젤린 왕녀를 데려와.”
그녀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장 빨리, 가장 정확하게 두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황궁 안에 있었다.
“네, 전하. 하지만 그 사람은…….”
아드리안이 방을 나설 준비를 하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에반젤린은 작은 심부름을 잘해 주었지만 무조건적인 협력이 필요한 순간에는 한 발 물러서서 대가를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그녀의 태도는 어딘가 뻣뻣했다. 카엘리온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를 구해 내는 대가로 그에 대한 소유를 요구할지 어떨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제까지 아폴로니아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자발적인 협조를 구하는 것, 포로가 된 왕녀에 대한 배려, 그런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협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아폴로니아가 싸늘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아주 급하다고 전해. 만약 이번에 조건을 달면 우리의 거래는 끝이라고. 내 손으로 아끼는 그 동물들부터 하나씩 잡아 죽여 버리겠다고.”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문을 열었다.
“다녀오…… 어머!”
문이 열리는 순간 사람 한 명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를 지나쳐 아폴로니아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로 미처 그 사람을 잡지 못한 시종 한 명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뛰어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아폴로니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왕녀……?”
그녀는 에반젤린이었다. 동궁에서 별궁까지, 그리고 별궁 안에서 아폴로니아의 방까지 무턱대고 뛰어왔는지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닫아.”
아폴로니아가 짧게 명령하자 시종이 세 사람을 방 안에 남겨두고 문을 닫았다.
“왕녀…….”
“도와주세요, 전하.”
아폴로니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에반젤린이 아폴로니아가 앉은 의자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전하…….”
에반젤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폴로니아를 다시 한 번 부르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털썩. 아폴로니아의 발밑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아폴로니아도, 아드리안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와주세요.”
에반젤린이 고개를 들자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마는 여전히 땀에 젖은 채였고, 뺨에는 눈물 자국이 선연했다.
“……왕녀가 내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아폴로니아가 다시 묻자 그녀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떨리는 입술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공이…… 카엘리온이 아주아주 위험해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만, 만났어요.”
에반젤린이 말을 시작하자 눈물 몇 방울이 다시 볼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개의치 않는지 고개를 더 들어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전하밖에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생각나지 않아요.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에반젤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순간 말을 잃었다. 언제나 패기 넘치고 자유로웠던 왕녀에게 상상한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아폴로니아는 에반젤린에게 어떤 감정의 변화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갑작스러운 위기 때문에 무언가를 깨달은 걸까. 아니, 어쩌면 그녀는 그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가 살면 좋겠어요.”
에반젤린이 애원하듯 말했다. 그녀의 몸짓에, 목소리에, 눈빛에서 절절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를 당장 구해 오는 것이 어려운 일인 건 알아요. 하지만…….”
“왕녀…….”
“그를 사랑해요.”
이미 몇 번이나 왕녀의 입에서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걸맞은 무게가 온전히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를 살려 주세요. 그렇게 해 주면…….”
사랑은 소유욕을 동반한다던 그녀는, 자신의 말과 가장 모순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에반젤린은 다시 애원하듯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마일론의 눈’을, 온전히 전하에게 드릴게요. 저 자신도, 라잔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전하를 위해서만 사용할게요.”
몇 번을 흔들어도 들을 수 없었던 말이 에반젤린의 입에서 나왔다.
“……일어나요.”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에반젤린은 눈물을 슥 닦아 내며 그 말을 들었다.
“카엘리온과 유리엘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낼 방법이 있나요? 얼마나 걸리죠?”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에반젤린이 천천히 눈을 들어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그녀의 얼굴이 희망으로 밝아졌다. 아폴로니아가 자신의 간청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정말, 정말 가 주시는 거예요?”
“실종된 건 카엘리온뿐 아니라 유리엘도 있고, 둘 다 내 사람들이에요.”
아폴로니아의 말에 에반젤린의 얼굴에는 조금씩 희망이 번지기 시작했다. 아폴로니아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간단하게 말했다. 이제는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의 정확한 위치를 찾으려면 얼마나 걸리죠?”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요.”
에반젤린이 짧게 대답했다.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전하가 실종되셨을 때는 보고를 받기까지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아드리안이 옆에서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멜산은 넓어요. 어제 특정 위치에 있었더라도 그건 시시각각으로 변할 수 있는…….”
“카엘리온은 전하의 경우와 달라요. 제가 그렇게 조치를 해 놨으니까.”
에반젤린이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아폴로니아가 묻자 에반젤린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외눈까마귀에 대해 아시나요?”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원수를 찍어 각인하면 그를 세상 끝까지 쫓아가 괴롭힌다는 새였다. 얼마 전 카엘리온이 작은 외눈까마귀에게 각인당했다며 투덜댄 기억이 있었다.
“라잔에 있는 아버지, 남동생, 두 명의 언니들 모두, 외눈까마귀에게 각각 각인을 당했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고요.”
“뭐라고요?”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대체 그게 무슨 못된 짓인가?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상황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마물을 그저 물리칠 대상으로만 여기죠. 하지만 조금만 사고를 바꾸면 그들은 소중한 자원이에요.”
에반젤린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계속했다. 아폴로니아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그녀의 말뜻을 이해해 보았다.
소중한 자원…… 자원?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든지 직감으로 그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마!”
무척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을 본 에반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종된 사람을 찾을 때, 녀석들보다 유능한 길잡이는 없어요. 제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외눈까마귀를 붙이는 건 그 때문이죠.”
에반젤린이 답을 내놓았다.
아폴로니아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에반젤린의 시각은 과연 신선했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방법으로 마물을 관찰하고 활용하는 그녀는,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실수인 척 카엘리온이 외눈까마귀에게 각인당하게 만든 것이다.
간단한 사고의 전환이었으나, 마물을 혐오하기만 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들을 제 곁으로 소환하는 에반젤린의 능력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녀석은 제가 데리고 있고, 풀기만 하면 가장 빨리 그에게 전하를 데려다줄 거예요.”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의 상황은 어떻죠?”
에반젤린은 한숨을 푹 쉬더니 그녀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카엘리온이 언제 산에 들어갔는지, 유리엘은 어떻게 되었는지, 여왕 크로아딘의 덩치며 상태가 어떤지.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지만 죽기에는 부족해요. 녀석을 죽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독을 한 병 정도 먹여 버리는 거지만 거의 불가능해요. 마물을 잡기보다는 두 사람을 구해 내는 것을 목표로 하셔야 할 거예요.”
“고모님이 준비를 많이 하셨군.”
아폴로니아가 내뱉었다. 상황은 쉽지 않았다. 유리엘과 카엘리온뿐 아니라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르는 호위 두 명을 다 데려와야 했다. 병사를 지휘할 수 있다 한들 그들을 구출할 방법은 마땅치 않았고, 그곳까지 빨리 도착할 수 있는지도 문제였다.
“한 가지…… 몇 시간 만에 전하가 그곳까지 갈 방법이 있긴 해요. 길을 찾는 까마귀와 비슷한 속도로. 지금이 밤이니 날이 밝기 전에 정확하게 도착할 수는 있어요.”
에반젤린이 확신 없는 말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잠시 다른 곳을 보며 생각에 잠겼던 아폴로니아의 고개가 휙 돌아가 에반젤린을 향했다.
“그게 뭐죠?”
“그건…… 전하에게 조금 위험할 수 있는데…….”
에반젤린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더니 대답했다.
“프리야가 빨라요.”
“네?”
아폴로니아와 아드리안이 동시에 물었다. 에반젤린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말했다.
“그곳까지 어떤 말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수단은 프리오닉스예요.”
잠깐의 정적이 스친 후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이야기였다. 개선 행진 때 보았던 날개 달린 거대한 말을 타면 바멜산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한 가지 큰 문제점을 무시한다면.
“에반젤린 님 한 명을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프리오닉스를 타 보려던 사람들은 대부분 발굽에 밟히고 날개에 맞아서 죽었어요.”
대화를 듣던 아드리안이 그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 말이 맞았다. 패리스도 전쟁 후 몇 번이나 프리오닉스를 길들이겠다고 시도해 보았지만 꼴사납게 말 등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세 사람은 알고 있었다.
마물은 애초에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예외적으로 에반젤린이 그랬던 것처럼 아폴로니아가 녀석의 마음에 든다고 한들 그 신뢰를 얻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프리야는 제 말은 믿어요. 제가 잘 부탁하면, 어쩌면 들어줄 수도 있어요.”
에반젤린은 마치 프리오닉스가 사람인 것처럼 말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면…….”
그녀의 눈에는 희망이 반짝이고 있었다.
* * *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에반젤린의 간절한 목소리가 마구간 구석에 울렸다.
“논리적으로 설득한다면서요.”
아드리안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에반젤린은 들리지 않는지 손을 모으고 불쌍하게 눈을 깜빡여 보았다.
세 사람은 황제의 마구간에 조용히 들어와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황녀가 마물을 구경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마구간지기에게 뇌물을 쥐여 주자 세 사람은 무사히 프리야를 만날 수 있었다.
“녀석에게는 어차피 주술 걸린 마구니 사슬이니 하는 것들이 씌워져 있으니, 구경은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평소 아드리안이 친분을 다져 놓았던 마구간지기는 사람 좋게 웃으며 그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히히히힝!”
목에, 다리에 온갖 사슬을 칭칭 감다시피 한 검은 괴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에반젤린은 울상이 되었다.
“카엘리온이 죽을 거란 말이야! 전하를 태워 줘.”
흉측할 정도로 커다란 데다 박쥐 날개처럼 생긴 거대한 검은 날개가 달린 프리오닉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말을 전부 이해하는 것 같았다.
“고집이 세군요.”
“카엘리온을 싫어해요. 그가 저를 제국으로 데려왔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래요. 전하의 눈동자가 그와 닮아서 더 내키지 않은 것 같아요.”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에반젤린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이 녀석은 정말로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한 짐승이었다. 다만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서 에반젤린의 말을 다 들어주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주인을 닮았군요.”
아드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는 외눈까마귀들에게는 주인이지만 이 녀석과는 친구예요.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떠날 능력이 있지만 저를 생각해서 남아 주는 거죠. 그럼 부탁은 좀 들어주지!”
에반젤린이 괴수를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프리야가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고 했나요?”
아폴로니아가 묻자 에반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거짓말을 바로 꿰뚫어 보죠. 길들일 수 없는 건 그 때문이에요. 자신에게 접근하는 목적을 다 알아보니까요.”
아폴로니아가 괴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정말로 그가 에반젤린을 닮았다면, 프리야는 간절한 설득보다는 협상을 원할 것이다. 그리고 에반젤린을 닮은 이 녀석은 소중한 것을 잃을 위기를 자각해야 고집스러운 마음을 바꿀 것이다.
“프리야.”
아폴로니아는 에반젤린과 프리야의 사이로 들어서며 프리야의 이름을 불렀다.
“푸르르르!”
한참을 올려다봐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이 커다란 검은 괴수는 콧김을 뿜으며 아폴로니아를 노려보았다. 발굽으로 땅을 쿵쿵 두드리고 사슬을 찬 몸을 비트는 것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공격할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잘 들어.”
그녀는 흥분한 말의 갈기를 양손으로 붙잡아 녀석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넓은 이마가 자신의 이마와 거의 닿을 정도로.
“푸르르르르르…….”
“나를 태워 주지 않으면 에반젤린은 아주아주 괴로울 거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녀가 차가운 얼굴로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듣는 이를 압도하는, 칼날 같은 목소리였다. 에반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말뜻을 이해한 듯 프리야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카엘리온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푸르르르르…….”
프리야가 콧김을 뿜는 것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녀석의 머리를 놔주지 않고 다시 한 번 힘주어 끌어당겼다. 괴수의 검은 눈과 아폴로니아의 금적안이 가까이서 마주쳤다. 아폴로니아는 그 시선을 먼저 피할 생각이 없었다.
“나를 태워 주지 않으면 너는 다시 에반젤린을 만날 수 없어.”
감정 없이 잔인한 말투에, 프리야가 진심을 의심하는 듯 아폴로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방금 아폴로니아가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푸르르…….”
“하지만 네가 나를 도와주면, 그래서 일이 성공하면 너를 에반젤린의 곁으로 돌려보내 줄게. 당장은 아니지만 빠른 시일 내에. 난 그렇게 할 수 있어.”
프리오닉스는 커다란 얼굴을 아폴로니아와 맞댄 채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푸르르르르…….”
이윽고 그녀의 말이 전부 진심이라는 것을 이해한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여전히 불만스러웠지만 그의 거친 움직임이 멈추었다.
“지금 타세요.”
에반젤린이 낮게 속삭였다.
“사슬을 풀어야 하는데…….”
“아니, 지금 타요.”
에반젤린의 말을 들은 아폴로니아는 사슬이 칭칭 감긴 그의 몸에 조심스럽게 올라타 갈기를 붙잡았다.
“받아요. 여왕을 죽일 정도의 독이에요. 피하는 게 상책이지만 혹시 모르니 가져가요.”
아폴로니아는 에반젤린이 내민 병을 입고 있던 로브 자락 속에 넣었다.
“프리야, 멜로디를 따라가. 절대로 놓치면 안 돼.”
에반젤린은 자신의 로브 속에서 작은 새장을 꺼내며 말했다. 그 안에는 아주 심술궂어 보이는, 멜로디라는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 하나 달린 못생긴 새가 들어 있었다.
“왕녀, 사슬을 풀기 전에는 출발을…….”
“가!”
에반젤린은 아폴로니아의 말을 듣는 대신 새장을 열었다.
외눈까마귀가 무서운 속도로 마구간 밖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프리야가 우렁차게 울부짖었다.
“히히히히힝!”
아폴로니아의 몸이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프리야의 긴 갈기를 더욱 꽉 붙잡았다.
철컹- 투둑-
프리야의 커다란 몸이 몇 번 강하게 움직이더니, 그를 묶은 사슬이 하나 둘씩 끊어지기 시작했다. 주술이니, 마구니, 사슬이니 하는 것은 애초에 녀석을 묶어 두지 못했다.
툭- 투둑-
“히히히힝!”
마지막 사슬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아폴로니아의 몸은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그 움직임이 멈추지 않았다.
콰앙-
자유가 된 프리야는 아폴로니아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는 대신 마구간의 울타리를 몸으로 부수며 뛰쳐나갔다.
“전하!”
아드리안의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아폴로니아는 돌아볼 틈이 없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무시무시한 속도로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폴로니아는 한 손으로 갈기를 단단히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고 있는 로브의 두건 부분을 잡아 자신의 머리 위로 덮었다.
프리야는 몇 번의 날갯짓으로 황궁 위 허공을 가로질렀다. 궁의 문지기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모여드는 모습이 보였다.
“프리오닉스가 탈출했다!”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지? 왕녀가 함께 탈출한 건가?”
“아니…… 잠깐만.”
황궁 문을 지나는 순간 프리야는 속도를 높였다. 아폴로니아는 한 손으로 잡았던 로브를 놓고 양손으로 갈기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덮었던 천이 흘러내렸고, 긴 금발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검은 밤하늘에 검은 말, 그 위에서 흩날리는 금발은 별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화, 황녀 전하?”
“황녀 전하다!”
“황녀 전하께서 프리오닉스를 타셨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타지 못했던 전설 속 마물을 길들이셨다!”
황궁 문에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궁 바깥에도 한두 명의 사람들이 그녀를 가리키며 뭔가를 외쳤다. 눈이 휘둥그레진 그들의 외침을 뒤로하고 아폴로니아는 순식간에 허공을 갈라 멀리 사라졌다.
* * *
“그나저나 누이는? 너 허락은 받고 온 거냐?”
조용하던 동굴 속에서 카엘리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벽에 기대 깜빡 잠이 들었던 유리엘이 눈을 떴다. 이틀째 부상당한 채 아무것도 먹지 못해 흐려졌던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순간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아폴로니아에 대한 걱정, 유리엘에 대한 궁금함, 그리고…….
“전하께서 너를 걱정해 나를 보냈다는 말이 듣고 싶은 거야?”
유리엘이 정확히 짚은 듯, 카엘리온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에 스쳤던 것은 아폴로니아가 자신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약간의 희망이었다.
“틀린 건 아니야.”
“뭐?”
카엘리온의 붉은 눈동자 속 황금빛이 반짝 빛났다. 아폴로니아가 파혼을 제안한 후로 그녀와의 대화를 피해 왔던 카엘리온이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 조금의 감정이라도 느낀다는 사실이 기쁜 듯했다.
“너에게 토씨 하나도 틀리지 말고 전하라고 하셨다.”
유리엘은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충성스러운 조력자이자 소중한 동생을 위해 사랑하는 연인을 보낸다고.”
카엘리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매번 네 곁으로 보내는 것은 어떤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너를 구해 내겠다는 전하의 뜻이라고, 너는 그 정도로 소중하다고.”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렇군.”
카엘리온은 고개를 툭 떨어뜨리며 웃었다. 기쁨과 허탈함이 뒤섞인 웃음이었다.
“누이다운 말이야.”
“실망했나?”
“아니, 실망한 게 아니라…….”
카엘리온은 굴 벽에 등을 기댔다.
“애정 어린 포옹을 받으면서 동시에 칼로 심장을 찔리는 기분이군.”
유리엘은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연인을 보내 지키고 싶은 소중한 동생’이라는 지위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아폴로니아로부터는. 그녀는 언제나 카엘리온을 동생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파트너로 대해 왔고, 유리엘을 통해 전한 말은 그녀가 지금까지 카엘리온에게 했던 말 중 가장 애정 넘치는 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유리엘이 자신의 연인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선을 긋고 있었다. 너에게는 어떤 사심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그 말은 카엘리온에게 비수 같았겠지만 유리엘에게는 꿀처럼 달콤했다.
“야, 웃지 마.”
그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는지 카엘리온이 한 마디 쏘아 주었다.
“누이의 뜻이 그렇다면, 너만큼은 돌려보내야 하는데 이게 생각처럼 될지 모르겠군.”
그는 투덜거리며 다시 자신의 다리를 보았다.
“여왕은 후각도 청각도 무시무시해. 시력을 잃었다고 해서 크게 약해지지도 않았을 거고 무엇보다 우린 무기 하나 안 들었지. 아주 절망적이야.”
유리엘은 고개를 들어 구멍 밖의 정황을 살폈다. 그가 동굴 속으로 사라진 후 여왕은 한참 동안 근처에서 쿵쿵거렸으나 지금은 바깥이 조용한 편이었다.
“다리 빼고는 멀쩡하다면 같이 나가지.”
“안 돼. 나가긴 할 거지만 내려가는 건 너 혼자야. 네가 나 때문에 죽으면 누이는 조각난 내 시체를 마물 배 속에서 꺼내서 조합한 다음 새로 동강을 내 버릴지도 몰라.”
대체 이놈은 아폴로니아를 좋아하는 건지, 무서워하는 건지. 유리엘이 다시 한 번 바깥을 살피는 동안 카엘리온은 계속 중얼거렸다.
“멜로디보다 더 짜증나는 마물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지. 부러진 다리에 비하면 긁힌 자국 정도는 얼마든지…… 응?”
유리엘이 멜로디가 누군지 물어보려던 찰나에 퍼드득 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카엘리온의 눈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이 소리는…… 설마.”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는 순간, 작고 검은 물체가 동굴 속으로 휙 날아 들어왔다.
“까악!”
“악! 멜로디!”
멜로디인 것으로 추정되는 못생긴 검은 새는 곧장 발톱을 세운 채 카엘리온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비켜! 뭘 여기까지 따라왔어!”
조금 전까지 힘이 빠져 가는 듯하던 카엘리온이 비명과 고함 사이의 큰 소리를 냈다.
“까아악!”
“아야야야야!”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던 카엘리온은 부리에 몇 번 쪼이고서야 새를 양손으로 붙잡을 수 있었다.
“최후의 만찬으로 먹히기 싫으면 넌 좀 가만히 있어! 큰 소리를 내면 위험해!”
“너, 혹시 그 새랑 친해진 거 아닌가?”
유리엘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카엘리온의 얼굴이 구겨졌다.
“끔찍한 소리 말아. 내 손에 검이 있었으면 지금쯤 이놈은…….”
쿵-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들을 가리고 있는 바위들이 진동했다.
타닥-
곧이어 발소리가 들리고 바위가 다시 가볍게 울렸다. 무언가가 그들 위에 서 있었다.
“……여왕인가.”
카엘리온이 굳은 표정으로 말하자 유리엘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여왕이라면 다가오는 사이에도 진동이 있었을 텐데. 이건 소리가 조금 다르군. 마치…….”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커다란 것이 날아와 착지한 느낌…….”
타닥- 타닥-
“말발굽?”
다시 한 번 발소리가 들리자 유리엘과 카엘리온이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말했다. 그 소리에 잠들어 있던 호위 두 명도 조금씩 눈을 떴다.
“푸르르르르르!”
분명 말이 내는 소리였다. 유리엘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동굴 입구를 몇 발짝 올라갔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는 않았지만 희미하게나마 바깥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말……?”
동굴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던 유리엘의 손이 단검을 향했다. 밖에 도착한 것은 카엘리온을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 보내진 살수일 수도 있었다.
타닥-타닥-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판단된 순간, 그는 몸을 밖으로 빼냄과 동시에 단검을 뽑아 말 위에 탄 사람의 허리를 겨누었다.
“누구냐.”
말은, 아니 말처럼 보였던 그 괴수는 거대했다. 양 옆으로는 미처 접지 못한 날개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프리오닉스?”
익숙한 짐승의 높은 등 위로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유리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단검이 겨눈 몸의 주인을 보았다. 프리오닉스 위에 앉은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유리엘의 푸른 눈이 커졌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믿을 수 없었다.
길게 물결치는 금발, 어슴푸레한 공기 속에 붉게 빛나는 눈동자, 그 안에 반짝이는 작은 태양 같은 황금빛,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아름다운 그녀가 마물의 등 위에 곧게 자리 잡은 채 동그래진 눈으로 유리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하?”
분명 아폴로니아였다. 그녀는 갑작스런 유리엘의 등장에 놀란 듯 가만히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전하, 여길 어떻게…….”
“검…… 집어넣지 그래.”
그녀의 시선이 더 아래를 보았다. 그 끝에는 독이 발라진 유리엘의 비수가 아폴로니아의 허리를 찌를 듯 말 듯 한 상태로 겨누어져 있었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니야. 처음 만났을 때는 내 목을 겨누었는걸.”
검을 집어넣는 그를 보며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었다. 유리엘은 여전히 그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전하, 여긴 대체 어떻게…… 이 마물을 타고 오신 겁니까?”
유리엘이 프리야를 가리키며 묻자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 카엘리온은 안에 있는 거야?”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급히 주변을 살폈다.
“부상당했지만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긴 위험합니다, 전하. 언제 크로아딘이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상황 파악이 되자 그는 갑자기 아폴로니아가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해 있는지 깨달았다. 아폴로니아도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폴로니아는 프리야의 등을 툭 쳐 보았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그 녀석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날개를 몇 번 접었다가 폈다. 자기 등에 다른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태우면 날개로 쳐서 죽여 버리겠다는 것처럼.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들이 있는 곳은 산꼭대기가 아니었고, 지금은 크로아딘이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날 것 같다는 희망이 보였다.
“이제 어딘지 알았으니 곧 사람을 보내서 데리러올…….”
크르르르르르르르-
그러나 유리엘이 동굴 속으로 한 걸음 딛는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크르르-
크릉-
그르르르릉-
유리엘의 몸이 긴장으로 예민해졌다. 이번에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하필 아폴로니아가 있을 때.
“설마 이게…….”
“전하. 가만히 계십시오.”
아폴로니아는 놀란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려 유리엘의 등 뒤를 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십 쌍의 누런 눈동자가 살기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걷히지 않은 새벽안개 사이로 악어를 닮은, 그러나 더 크고 어두운 그들의 형태가 드러났다.
크르르르릉-
그리고 그들 뒤, 산의 조금 더 위쪽에 검은 바위라고 생각했던 커다란 것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른 녀석들과 비슷한 모양을 가진, 그러나 훨씬 거대한 크로아딘이었다.
‘여왕이구나.’
아폴로니아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검붉게 변한 두 눈이 파여 있고 한쪽 얼굴에 긴 칼자국이 난 그 녀석은 프리야를 장난감 말처럼 보이게 만드는 크기였다. 여왕은 쉽게 나서는 대신 다른 마물들 뒤에 물러나 있었다. 카엘리온과 유리엘을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랐다.
‘위험한 적이라고 인식하고 있구나.’
얼굴의 칼자국을 보니 납득이 갔다. 눈 정도를 제외하면 검과 화살을 맞아도 멀쩡하던 여왕은 유리엘의 검기에 중상을 입고 크게 놀라 경계를 강화한 것이다. 여왕은 정확하게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이 있는 방향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전하, 제가 유인할 테니……”
“날아, 프리야!”
유리엘이 미처 조치를 취하기 전에 아폴로니아를 태운 또 다른 괴수는 높이 날아올랐다.
크르르르릉!
수십 마리의 마물들은 일시에 공중을 향해 으르렁댔다. 눈이 보이지 않는 여왕도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어 살기를 드러냈다.
아폴로니아는 아슬아슬하게 크로아딘 떼의 입이 닿지 않는 높이로 날아올랐다. 프리야는 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아폴로니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멀리 내다보자 여왕은 귀를 쫑긋거리며 프리야의 움직임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여왕을 둘러싼 다른 마물들의 움직임도, 산 아래에서 대기 중인 기사들이 놀란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모습도 보였다.
다만 그림자 같은 유리엘은 그녀가 날아오르는 순간 어딘가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산 아래에 대기 중인 병력을 동원해 카엘리온과 유리엘을 구해 내려던 계획을 다시 정리해 보았다.
크로아딘 십수 마리가 이미 동굴 근처에 모여 있는 이상, 그들을 피하거나 정면으로 돌파해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데리고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피하는 것 말고 어떤 방법이…….’
아폴로니아는 로브 속에 가지고 온 병을 만지작거렸다.
“활을 쏘고 검으로 찔러도 치사량의 독이 몸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어요.”
아폴로니아는 별궁에서 에반젤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덩치에 맞는 양의 독을 체내에 넣으려면 먹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하지만 위험하니까…….”
그 뒤에 몇 마디 우려의 말이 따라왔으나 아폴로니아는 이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혹시?’
크르르르릉-
이를 드러내며 울부짖는 여왕을 지켜보며 그녀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기회는 한 번이었고, 시간은 없었다. 이 순간에도 카엘리온과 그의 기사들은 지쳐 가고 있었다.
“유리엘, 나를 도와줘.”
아폴로니아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유리엘은 듣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는 아폴로니아를 시야에 두고 있을 테니까.
“생각이 있어. 잠깐만 여왕의 주의를 돌려 줘.”
프리오닉스를 탄 그녀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몇 초 동안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은빛의 무언가가 바위틈에서 나타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크로아딘 떼의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크르릉-
그들은 빠르게 반응했지만 유리엘이 더 빨랐다. 작은 틈새를 이리저리 파고들어 순식간에 여왕의 꼬리 근처까지 접근했다. 여왕을 지키던 잿빛 크로아딘 두 마리가 동시에 그를 향해 돌진했다.
쉬익-
그의 단검이 두어 번 호선을 그리는가 싶더니, 잿빛 마물 두 마리의 몸통을 가로지르는 긴 칼자국이 새겨졌다. 그들은 비명도 없이 양옆으로 쓰러졌다.
파고드는 유리엘의 위치를 감지한 여왕이 두꺼운 꼬리를 위협적으로 움직였으나 유리엘은 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마물의 등을 밟고 올라갔다. 거슬리는 것을 떨치려는 듯 몸을 크게 흔드는 여왕의 움직임에도 유리엘은 멈추지 않고 여왕의 등을 지나 머리를 붙잡아 몸을 고정시켰다.
으르르릉-
‘좋아.’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을 잘 아는 듯, 프리야는 뭐라고 지시하기도 전에 하강을 준비했다. 여왕의 뒤쪽에 절벽을 타고 올라온 마물들이 한두 마리 더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지금!”
아폴로니아의 말이 떨어진 순간 유리엘은 은빛 검기로 빛나는 단검으로 여왕의 눈 밑을 그었다.
크아아아아아앙-
얼굴에 세로로 새겨졌던 칼자국이 십자 모양이 되는 순간 여왕은 울부짖으며 몸을 비틀었다. 그 힘에 유리엘의 몸이 휙 하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가 떨어지려는 자리에는 여왕의 절반만 한 회색 크로아딘 두 마리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아폴로니아의 눈에는 그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제발.”
그녀는 오직 여왕의 쩍 벌어진 입에 집중하며 들고 있던 병뚜껑을 돌렸다. 프리야는 이미 엄청난 속도로 하강을 시작하고 있었다.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고, 거친 움직임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프리야는 여왕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선 후에도 하강을 멈추지 않았다.
후우웅-
프리야의 날개 끝이 여왕의 이빨을 스쳤고, 여왕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쾌한 열기가 느껴졌다. 여왕의 벌어진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려던 순간. 아폴로니아는 시커멓게 보이는 여왕의 목구멍 속으로 병 안의 액체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주르륵 흘려 넣었다.
따아아악!
뭔가를 감지한 여왕이 이빨을 꽉 다물었다. 프리야가 몸을 돌린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어도 독병을 든 아폴로니아의 오른팔이 통째로 날아갔을 것이다.
끼이이이이이-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여왕의 괴로운 듯한 비명 소리가 산을 울렸다.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자 몸을 크게 비트는 여왕이 보였다.
여왕은 괴롭게 몸부림치며 몇 번을 옆으로 굴렀다. 뒤틀린 꼬리가 옆에 서 있던 바위를 내리치자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사람 머리만 한 돌이 아폴로니아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으르릉- 으륵-
괴물의 거세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졌고, 녀석은 짧고 답답한 울음소리를 몇 차례 토해 냈다.
크릉-
굵은 울음과 함께 공기가 입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왕은 이를 드러낸 상태로 천천히 쓰러졌다.
쿠우웅-
커다란 몸이 쓰러지고 산 전체가 진동했다.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여왕의 입에서 마지막 숨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긴 정적이 흘렀다. 아폴로니아는 몇 초 동안 멍하게 공중에 멈춰 있었다. 조금 전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 유리엘!”
그제야 여왕의 몸에서 튕겨 날아간 유리엘이 생각난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가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회색 마물 두 마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마치 인형으로 변한 것처럼, 눈알을 굴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공중에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니 나머지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수십 개의 거대한 조각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전하.”
익숙한 목소리는 바위틈을 뚫고 자란 나무 위에서 들려왔다. 유리엘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날아가는 와중에 몸을 돌려 붙잡은 모양이었다.
“제가 지금…… 뭘 본 겁니까?”
어느새 날은 완전히 밝아 유리엘의 얼굴이 잘 보였다. 그는 황당함, 충격, 걱정, 감탄을 비롯한 온갖 감정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내려 줄까?”
아폴로니아는 달리 할 말이 없어서 조심스럽게 프리야를 타고 유리엘 가까이로 날아갔다.
“아니…… 이 정도는 혼자 내려올 수 있습니다.”
유리엘이 얼굴을 붉히며 극구 사양했다. 그러고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날듯이 나무줄기를 타고 땅으로 내려왔다. 프리야가 그 뒤를 따라 살며시 땅에 착지했다.
“유리엘, 구출해야 할 사람들이 몇 명이지?”
“……세 명입니다.”
유리엘이 미처 입을 열기 전에, 등 뒤에서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대신 답을 했다.
“카엘.”
아폴로니아가 천천히 돌아서자 그곳에는 카엘리온이 서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그는 두 명의 호위에게 부축 받으며 굴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그사이 새벽이 지나 하늘이 밝아져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빛이 눈부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폴로니아의 것과 같은 금적안은 햇빛을 받아 평소보다 더 반짝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폴로니아가 카엘리온의 가슴으로 뛰어들어 그를 껴안았다.
“……이 미친 짓을 한 겁니까.”
짧은 포옹을 하는 동안 멍하게 굳어 있던 그는, 아폴로니아가 팔을 풀어 주자 겨우 말을 끝냈다. 창백하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내려가서 사람들을 부를 테니까. 저기 굳어 있는 녀석들이 언제까지 저 모양일지 모르니 조심해.”
아폴로니아가 눈알만 뒤룩뒤룩 굴리는 마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카엘리온을 보고 거센 콧김을 내뿜는 프리야의 모습에, 그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검은 말의 몸 위로 다시 올라앉았다.
길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던 전설 같은 괴수를 탄 그녀의 모습에 커진 몇 쌍의 동공을 뒤로하고,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사라진 카엘리온을 이틀째 기다리는 그의 기사들에게로.
프리야는 커다란 날개를 몇 번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산기슭까지 하강했다. 발굽이 땅에 닿자마자 아폴로니아는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곳에서는 수백 명의 기사와 병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조금 전 보았던 크로아딘처럼, 그들은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한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기사단은 들으…….”
“와아아아아아아아!”
무언가 명령을 내리려 했으나, 그녀의 말은 커다란 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굳어 있던 사람들의 쩌렁쩌렁한 환호성 때문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마물을 물리치셨다!”
“황녀 전하께서 여왕 크로아딘을 잡으셨다!”
대기 중이던 자들은 일시에 함성을 질렀다. 아폴로니아가 프리야를 타고 그들의 머리 위로 지나간 것도, 여왕을 피해 날아다니던 것도, 결과적으로 여왕 크로아딘이 쓰러진 것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사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대공령 소속이었지만 다수를 이루는 것은 황실 기사단이었다. 그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아폴로니아를 부르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10년이 넘도록 황제와 패리스의 그늘 아래에서 숨어 지냈던 그녀였지만, 황실 기사단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언제나 자신의 기사들이었다. 황제도, 페트라도, 패리스도 없는 이곳에서, 그녀는 잠시나마 그들 앞에 당당하게 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감상에 젖어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황녀 전…….”
“이럴 시간이 없으니 어서 올라가 실종된 자들을 데려오도록 해. 여왕이 죽었으니 나머지 마물들은 당분간 힘을 쓰지 못한다.”
에핀하르트 대공령 소속의 어느 기사가 감격해서 만세 삼창을 시작하려던 순간 아폴로니아가 지시했다. 대기하던 자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카엘리온과 그 호위 두 명이 몇몇 병사들의 말 위에 탄 채 모습을 드러냈다. 몇 걸음 앞에서 먼저 내려오는 아름다운 그녀의 연인도.
아폴로니아는 심호흡을 하고 아드리안의 우려를 떠올렸다. 카엘리온과 자신의 결탁을 알게 되면 황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 그들 사이를 숨기기 위해 해 왔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 수 있다는 것. 아무리 환영을 받고 있다고 해도, 수백 명의 기사들 전부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프리오닉스를 훔쳐 타고 이곳까지 온 것에는, 카엘리온의 구출 외에 다른 대외적인 목적이 필요했다. 감격을 접어 두고 다시 약간의 연기를 해야 할 때였다.
“유리엘!”
아폴로니아는 연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그에게 뛰어갔다.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작의 작위까지 가지고 있는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흔히 기대하는 황녀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폴로니아는 로브 자락이 흘러내리는 것도 무시하고 그에게 뛰어갔다. 막 산 밑에 다다른 유리엘이 놀란 눈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듯 붙잡았다.
“전하? 무슨 생각을…….”
“키스해 줘.”
아폴로니아가 속삭였다.
“예?”
“나한테 키스해.”
“여기서 어떻게…….”
“진하게.”
아폴로니아가 조금의 장난기도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양쪽 귀가 붉어진 유리엘은 순간 할 말을 잃은 듯 얼어붙었다.
“내가 해?”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잠시 얼이 빠진 듯 동그래졌던 유리엘의 청아한 눈이 천천히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후회 마십시오.”
“알겠으니까 어서……읍.”
아폴로니아의 말이 끝나기 전 유리엘이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그러고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껴안았다. 몇 초, 아니 몇 분의 시간이 흘렀다. 숨결이 오가고, 타액이 섞이고 야릇한 기분이 몇 차례나 온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이제 됐……”
“아직입니다.”
유리엘은 떨어지려는 그녀를 다시 한 번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입술과 혀를 오가는 달콤함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얽히고서야 유리엘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아…….”
숨을 깊이 내뱉은 아폴로니아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울 것 같은 표정의 카엘리온 외에도, 수백 쌍의 눈이 경악한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다시 유리엘에게 시선을 맞추며 환하게 웃고는 말했다.
“사랑하는 유리엘, 이제 무슨 일이 생겨도 이런 위험한 짓은 하면 안 돼요.”
그녀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 말했다.
“옛날 주군에 대한 마지막 의리를 다하겠다며 갔었으니 이제는 평생 내 곁에만 있어야 해요.”
“전하…….”
달라진 아폴로니아의 말투에 충격받은 표정이었던 유리엘은 그녀의 눈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기사들의 얼굴을 보고서야 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듯했다. 유리엘은 금세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내 사랑.”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포옹했다. 유리엘의 어깨 너머로 아폴로니아는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그들은 그녀의 말을 믿었다.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다.
며칠 후, 황제는 물론 수도의 귀족들 모두가 다음과 같은 소문을 전해 듣게 되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에 빠진 황녀가, 위기에 처한 호위 기사를 마물의 손에서 구해 냈다.’
에핀하르트 대공이 다시 한 번 죽지 않고 돌아온 것 또한 화제였으나, 황녀가 의도적으로 그를 도왔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 * *
카엘리온은 자신의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황궁의 페드로 리스는 부러진 다리며 여러 찰과상, 거기다가 구출 직전에 멜로디가 할퀸 상처까지도 깨끗하게 치료해 주고는, 요양만 하면 곧 나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는 머리가 복잡했다. 아폴로니아는 그가 쉬어야 한다며 별다른 설명 없이 방을 나가 버렸지만 정황상 한 가지는 명백했다.
구원의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먼저 도착한 멜로디. 곧이어 도착한 프리오닉스와 아폴로니아. 에반젤린의 말대로 독물을 먹임으로써 아폴로니아가 여왕을 무너뜨렸다는 것.
카엘리온을 직접 구한 것은 아폴로니아였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에반젤린이었다. 그녀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지금쯤 땅굴 속에서 굶어 죽었을 것이다.
끼이익-
“대공 전하, 라잔의 왕녀께서 오셨습니다.”
멍하게 누워 있던 그는 시종의 보고에 몸을 일으켰다.
“들어오라고 해.”
카엘리온은 씁쓸하게 웃었다. 올 것이 온 모양이었다.
“몸은 어때?”
에반젤린이 속삭이며 들어섰다. 그녀는 최대한 조용하고 싶었는지 방문을 살짝만 열어 몸을 겨우 통과시켰는데, 이는 오히려 쓸데없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냥 들어와. 몸은 멀쩡하니까.”
카엘리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반젤린은 그의 침대맡에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표범처럼 날카로웠던 눈매는 평소에 비해 훨씬 차분해 보였다.
“네가 날 살려 준 거지?”
카엘리온이 물었으나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원하는 걸 가지게 된 거야? 아니면 나한테 달라고 온 거야?”
그가 탁한 목소리로 묻자 에반젤린이 눈썹을 찌푸렸다.
“누이와…… 드디어 만족스러운 거래를 했나? 어쩔 수 없지. 너한테는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빚을 져 버렸으니.”
에반젤린의 적갈색 눈동자가 잠시 떨렸다.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대가를 원한다며. 공정한 거래를. 네가 이 정도 했으면 뭘 요구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그는 베개에 기댔던 몸을 조금 더 일으키며 말했다. 바멜산에서 있었던 일과 지금 찾아온 에반젤린을 생각하면 결론은 하나였다. 아폴로니아는 카엘리온의 목숨을 구하는 대신 에반젤린에게 그를 주기로 한 것이 분명했다. 그 자신을 위해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터였다.
“원하던 대로 난 네 거야. 이제 어떻게 할래?”
카엘리온이 힘없이 물었다. 그의 말을 이해한 에반젤린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조용히 카엘리온의 말을 되뇌었다.
“내 것을 어떻게 하느냐…….”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의 폭신한 고수머리 위에 얹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느릿느릿 카엘리온의 머리를 세 번 쓰다듬었다. 자신에게 소중한 말이나 강아지를 만지는 것처럼. 카엘리온은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이윽고 짧은 대답이 에반젤린의 입에서 나왔다.
“풀어 줄게.”
“뭐?”
카엘리온이 되물었다. 청력도 이상해진 건가? 방금 풀어 준다고 한 것 같았는데.
“풀어 준다고.”
그러나 에반젤린은 조금 전 한 말을 취소하는 대신 또박또박 다시 한 번 말해 주었다. 카엘리온은 머리가 더욱 혼란스러웠다.
“난 말이야, 키우는 동물이 많아.”
에반젤린이 여전히 손을 그의 머리에 올린 채 조용히 말했다.
“잡아서 길들인 것도 있고, 내가 부모를 골라 짝을 지어 태어나게 만든 것도 있어. 다 소중한 자산 같은 거고, 없어서는 안 될 전령이기도 해.”
그녀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친구는 아니야. 난 분명히 그 녀석들의 주인이지. 내가 친구로 대하는 마물은 한 마리뿐이야.”
“프리오닉스.”
카엘리온이 홀린 듯 대답하자 에반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다른 녀석들보다 나를 훨씬 더 잘 이해하거든. 프리야는 길들일 수 없는 애야. 그래서 그냥 친해지기로 했지. 그 애는 내 감정도, 고민도 이해하고 나를 위해서 황궁에 남아 줄 만큼 의리도 있어.”
“그래서?”
“그래서, 그 애를 어딘가에 가둘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이곳에 오면서도 몇 번이나 혼자 도망치라고 했었지. 나를 떠나면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난 정말로 그 애가 행복하기만을 바랐거든. 다른 녀석들에게는 해당 없는 이야기지.”
“그 이야기를 왜…….”
“네가 바멜산에 간 후로 깨달았어.”
에반젤린이 눈을 들어 카엘리온과 시선을 마주쳤다.
“나는…… 너를 좋아해. 정말로 좋아해. 어쩌면 프리야보다 더.”
조금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던 눈동자는 분명히 젖어 있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너무 좋아해서, 너를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을 만큼. 네가 예전에 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뭐?”
“다른 어떤 것보다 그냥 네가 행복하기를 바랄 정도로 좋아해. 나랑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그냥 네가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에반젤린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이제 너를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 자주 만나러 오지도 않을 거고. 비록 내게로 온 것은 아니지만 넌 안전하게 돌아왔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다 얻었어.”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듣고 있는 카엘리온에게, 그녀는 살짝 웃어 보였다.
“사랑은 소유욕을 동반한다더니…….”
“소유욕을 넘어설 수도 있는 모양이지.”
에반젤린은 그의 머리를 살포시 누르고 있던 손을 떼고 몇 걸음 물러섰다.
“빨리 낫기를 바라. 멜로디가 다시 한 번 할퀴어 주고 싶다고 기다리고 있거든.”
가벼운 농담을 한 마디 던진 그녀는 그가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방문을 빠져나가 버렸다.
“하아…….”
혼자 남은 카엘리온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에반젤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뇌리를 울렸다. 그를 풀어준다. 사람을 소유할 수 있다며 집착하던 그녀는 결국 제 손으로 그를 구해 놓고서는 다시 놔주었다. 에반젤린의 사랑은 소유욕을 이겼다.
‘그럼 나는?’
그는 무도회에서 유리엘과 행복하게 춤을 추던 아폴로니아를 떠올렸다. 녹스의 오두막에서 두 사람이 입을 맞추던 모습도. 그 후 심장이 다 타 버릴 것 같은 자신의 분노도. 선명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그를 괴롭혔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모든 것을 원했다. 정치적 동반자로서, 연인으로서, 그리고 배우자로서. 다른 사람이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 그냥 네가 행복하기를 바랄 정도로 좋아해. 나랑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그냥 네가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귀를 울렸다.
“사랑은 소유욕을 넘어선다…….”
그는 천천히 그 말을 곱씹었다. 씁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에반젤린은 그가 안전하게 돌아왔기에 자신이 원하던 모든 것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저 그가 행복하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그는 바멜산에서 유리엘을 보며 환하게 웃던 아폴로니아를 떠올렸다. 가슴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웠다. 그가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유리엘을 그녀의 곁으로 보내려 했던 것은 그 때문 아니었던가.
카엘리온은 천천히 손을 뻗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힘없이 미소 지었다. 동부의 마녀, 마물에 미친 이상한 여자. 그녀가 해낸 것을 자신이 못 할 리 없었다. 그녀의 사랑이 자신의 것보다 위대할 리도 없었다.
“사랑해, 누이.”
그는 다시 입 밖에 내지 않을 말을 작게 되뇌어 보았다. 그러고는 결심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계속해서 아폴로니아를 사랑할 것이다. 소유욕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많이.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그녀의 행복만을 원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