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7. 재회 2 (23/34)

Chapter 7. 재회 2

“우유 한 잔! 따뜻하게!”

즐겨 찾는 수도의 술집에서, 타냐는 가장 좋아하는 음료를 주문했다. 그녀는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할머니도, 오빠들도 음주를 즐겼고 타냐에게 특별히 엄격한 교육을 하지 않았기에 어려서부터, 그러니까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고 나서부터는 손쉽게 술을 접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 쓴맛이 싫었다. 취하는 기분이 좋다고들 했지만 타냐는 타고난 주량이 대단했던 건지 아무리 마셔도 그 기분을 느낄 수가 없었다.

“여긴 맥주가 맛있는데, 다 큰 아가씨가 취향 참 독특하시구만.”

선술집의 주인이 커다란 잔에 우유를 가득 따르면서 말했다. 타냐의 옅은 자색 눈이 반가움으로 반짝였다.

“초콜릿 가루도 있는데 넣어 줄까?”

주인의 친절한 말에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그녀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초콜릿 음료가 나타났다.

“크~ 이 맛이지. 역시 주인장이 타주는 핫 초코가 최고야.”

“선술집에서 우유를 주문하는 사람은 제국에 또 없을 거야.”

“우유를 파는 선술집이 있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타냐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돈을 지불하려 했다. 그러나 주머니로 손을 뻗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어…… 뭐야.”

“응? 왜 그래?”

“돈이 없어졌는데.”

타냐는 인상을 강하게 찌푸리며 다시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분명히 있었던 묵직한 주머니는 거기 없었다.

“아오! 어떤 도둑놈이 나를 털어?”

그녀는 우유 잔을 쾅 하고 내려놓았다.

“요즘 이 동네에 소매치기가 얼마나 많은데, 조심 좀 하지 그랬수. 아가씨는 단골이니 우유값은 나중에 내요.”

술집 주인이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타냐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중은 무슨! 감히 내 주머니를 건드린 그 미친놈을 잡아야지! 분명히 아직 근처에 있을 거라고!”

타냐는 구겨진 인상을 펴지 않았다. 주머니에 들었던 것은 여비의 전부였다. 그것이 없으면 그녀는 심부름이 끝나고 리샨까지 걸어서 가야 할 판이었다. 이번에는 혼자서 다녀오겠다고 오빠들에게 큰소리를 빵빵 쳤는데 시작부터 일이 꼬인 것이다.

“아드리안한테 돈을 빌리기는 창피한데…….”

그녀가 난감하게 중얼거리는 사이, 누군가가 그녀와 주인장의 사이로 동전 하나를 내려놓았다.

“내가 대신 사도록 하지.”

타냐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옆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타냐보다 겨우 네다섯 살 정도 많아 보였다.

‘잘생겼네.’

1년에도 몇 번씩 짝사랑의 상대를 바꾸는 그녀가 속으로 생각했다. 얼핏 보이는 턱선만 봐도 그는 미남이었다. 그녀는 왠지 오래전 어디선가 이 사람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신이 누군데?”

그녀는 경계를 풀지 않고 물었다. 남자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무 경계하지 말아. 아가씨에게 부탁할 일이 좀 있거든.”

선술집 주인이 눈치를 보다가 남자의 돈을 쓱 집어 갔다. 타냐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좀 해도 될까? 저 구석으로 가도 괜찮아.”

그녀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 좋아하나?

짧은 머리에 걸걸한 말투의 타냐는 사실 인기가 꽤 많았다. 그녀가 1년에 반하는 사람의 수가 서른 명이라고 하면, 그 중 삼분의 일 정도는 타냐에게 넘어갔다. 그들의 연애 같지 않은 연애는 타냐가 다음 사람에게 반할 때까지만 지속되었다.

“이야기만 들어줘.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는 그 다음에 판단하도록 해. 아가씨에게도 나쁠 거 없을 거야.”

남자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타냐는 핫 초코를 한 모금 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술집 구석자리라면 이 남자보다 타냐에게 더 익숙한 장소였고, 남자는 특별히 일행을 데리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당장은 위험할 것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 들어보지.”

남자는 씩 웃더니 사람이 거의 오가지 않는 코너의 테이블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타냐가 건들건들한 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할 이야기가 뭐야?”

“이데나 상단주에게 전할 서신이 있어서.”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 타냐의 자안이 커졌다.

“너…… 방금 뭐라고…… 나를 알아?”

수도에서는 그녀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안다 해도 그녀와 이데나 상단주와의 관계까지는 절대로 알 수 없었을 텐데.

“이데나 상단주에게 소식을 전하러 가는 길이지? 난 아가씨에 대해서 들었어.”

역시 변장에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나? 타냐는 후회하며 남자를 다시 살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특별히 그녀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똑바로 말해. 나를 어떻게 알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들었으니까.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나는 상단주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전혀 없어. 그저 사업을 하나 제안하고 싶을 뿐이야.”

남자는 악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상단 일은 지역마다 대리하는 사람이 있어. 제안할 것이 있는 사람은 그쪽을 통하지.”

타냐가 으르렁거렸다.

“이 일은 꼭 상단주 본인에게 직접 제안해야 하는 일이야. 너를 통하면 그녀를 찾을 수 있다고 아이테르 백작이 그러더군.”

그 말에 타냐의 표정이 경계에서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아이테르 백작이 누구인지는 그녀도 잘 알았다. 돈 앞에서는 이성밖에 없다는 냉정한 사업가. 그는 이데나 상단의 믿을 만한 파트너였고, 입이 무거운 것으로도 유명했다.

타냐는 몇 년 전 상단에 인력이 충분하지 않던 시절 아폴로니아의 요청으로 란섬에 심부름을 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 본 아이테르 백작 옆에 유명 배우를 닮은 시종이 하나 있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테르 백작이 소개했다고?”

그가 타냐에 대한 이야기를 이 남자에게 해 준 것이라면, 남자는 분명 이상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래. 아주 가끔이지만 상단주는 직접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고 하셨지. 다르마유 차 건으로 처음 그를 만났을 때에도 그랬다고.”

타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말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아폴로니아, 유리엘, 아이테르 백작 모두가 입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증거 있어?”

남자는 빙긋 웃더니 편지 하나를 보여 주었다.

“내용은 볼 것 없어. 밑에 찍힌 인장을 봐.”

분명 그곳에는 백작의 인장이 있었다. 타냐도 잘 아는 문양이었다. 그 인장은 그가 사업상 중요한 문서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일반인들은 그 정확한 모양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무척 복잡해서 위조가 어려웠다.

“어때?”

“맞는 것 같은데…….”

그는 내용을 보지 말라고 했지만 타냐는 얼핏 인장 위에 쓰인 내용이 눈에 보였다. 그 서류를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의 신원을 자신이 보장하니 만나 달라는 것이었다.

“다른 건 없어. 그저 이걸 그분께 전달해 주면 돼. 나를 안 만나겠다면 그것도 상관없어.”

타냐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았다. 남자의 말은 특별히 이상한 구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나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의 신원은 들고 있는 서류로 충분히 증명이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데나 상단주에 대해서 이미 상당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아이테르 백작과의 신뢰 관계도, 타냐가 그녀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정말로 아이테르 백작이 소개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정보를 다 알기는 어려웠다.

“갑작스런 부탁이라 곤란한 걸 이해해. 편지를 전해 주겠다고 약속만 하면 사례는 지금 할게.”

그는 소매 속에서 두둑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 살짝 열어 보여 주었다. 안에 가득 찬 것은 금화였다. 타냐의 가슴이 빨리 뛰었다.

수도에 오자마자 지갑을 털린 그녀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장 황궁까지 갈 차비도 애매한 데다, 리샨에서 처리할 일이 산더미인데 꼼짝없이 늦게 생겼으니까.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말이 믿을 만했고, 설령 수상한 자라고 하더라도 아폴로니아가 알아채고 그와의 만남을 거절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달만 하는 거야.”

그녀는 주머니와 서류를 휙 낚아채며 말했다. 그러고는 남은 핫 초코를 쭉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용이 생겼으니 편안한 마차를 타고 황궁 근방까지 가서 아드리안을 만나면 될 것이다.

“정말 고마워.”

남자는 다시 한 번 씩 웃으며 말했다. 타냐는 이미 문을 나서고 있었다.

“똘똘하고 의심도 많은 아가씨로군.”

혼자 남은 자리에서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품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그래도 충분히 많지 않아서 문제지만.”

그는 손에 들린 주머니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조금 전, 타냐가 술집에 들어선 순간 그가 훔쳤던 그녀의 돈주머니였다.

* * *

“세타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잘해 주고 있나 보네.”

거울 앞에 앉은 아폴로니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머리를 빗어 주던 아드리안이 대답했다.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말도 안 되게 똑똑해요.”

“페트라 리페르를 긴장시켰다면 보통 사람은 아니지. 선물은 좋아했고?”

“네. 그 가치를 분명하게 아는 것 같았어요.”

아폴로니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연락을 주고받도록 해. 의심은 사지 않는 선에서. 아버님과 고모님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작업은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돼야 해.”

“알아요, 전하.”

아드리안은 정성스러운 빗질을 마치고 돌아서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품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참, 타냐가 왔다 가면서 편지를 하나 전했어요. 아이테르 백작의 소개로 왔다며 이데나 상단주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대요.”

“아이테르 백작의 소개?”

“네. 그 남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고 그냥 에녹 테안이라는 이름의 상인이라고 해요. 이 서류를 가진 자의 신원은 보장할 수 있다고, 그가 말하는 사업은 상단에서 필수적으로, 그것도 전하께서 직접 진행하셔야 한다고 적혀 있어요.”

아드리안이 편지를 읽어 주며 말했다. 아폴로니아가 이를 받아들었다.

“다른 종이 한 장은?”

“그 남자가 전하께 직접 쓴 글이에요. 개의치 않으신다면 내일 점심 무렵에 알브레이트 정원의 가장 안쪽, 백합이 있는 곳에서 보자고 하네요. 전하께서 사람이 너무 많은 자리를 꺼리신다는 걸 고려한 것 같아요.”

“직접 오라는 제안이라니…….”

아폴로니아는 편지를 읽고는 다시 한 번 아이테르의 인장을 확인했다. 이는 그녀가 아는 모양과 일치했다. 그 필체 또한 마찬가지였다.

“알브레이트 정원은 오랜만인데.”

아폴로니아는 반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곳은 그녀가 어린 시절 시드와 함께 자주 방문했던 장소였다. 과거에 알브레이트라는 이름의 거부가 개인적으로 만들었다가 사람들을 위해 개방해 둔 그곳은, 각 대륙의 식물들을 한곳에 모아 두어 화려한 광경을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금은 인기가 조금 식었지만 아폴로니아를 포함해 그곳을 찾는 사람은 꽤 있었다. 황실에서 속상한 일이 생기면 시드는 그녀를 알브레이트 정원에 데려가 달래 주고는 했었다.

“아이테르 백작에게 내가 그런 이야기도 했었나?”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일린 이데나로서 얼굴을 가린 채 그를 만난 것은 한 번이 아니었다. 모두 사업상 만남이었지만 꽤나 마음이 잘 맞았던 두 사람은 그와 상관없는 잡담도 몇 차례 나눈 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수도의 명소를 이야기하다가 한 번 언급하신 적은 있어요.”

두어 번 머리색이며 눈동자의 색을 바꾸고 그녀와 동행한 적이 있는 아드리안이 말했다. 워낙 여러 사람이 오가는 장소이기에 그 정도의 정보로는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은 없는 말이었다.

“그 이야기까지 전했다면 그는 정말로 백작의 절친한 측근인가 보군.”

아폴로니아가 편지를 다시 접어 서랍에 넣으며 말했다.

“가서 만나 볼 필요는 있겠어.”

“유리엘 님과 함께 가세요. 혹시 모르니까요.”

아드리안이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 아폴로니아를 걱정했지만 유리엘이 함께 있으면 이 주인은 잘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다.

“그래야겠네.”

아폴로니아는 다음 날 정오에 외출할 준비를 모두 마치고 유리엘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승마 따위의 핑계를 대고 궁을 나갈 예정이었다.

“오셨습니까.”

유리엘이 살짝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최근 들어 그는 전보다 자주 웃었다. 지금과 같이 해가 비칠 때면 그의 미소는 더욱 예뻤다.

“손에 든 건 뭐야?”

“편지입니다. 갑작스럽지만 중요한 소식이긴 합니다.”

그가 들고 있던 종이를 아폴로니아에게 건넸다.

“트리온 후작가의 초대장? 식사 자리에 참석해 달라니…….”

그녀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에드윈 후작이라면 모를까, 트리온 후작가에서 유리엘에게 관심을 보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딸을 위해서인가?”

아폴로니아는 무도회에서 얼핏 스쳤던 라일라 트리온의 시선을 기억했다. 오직 유리엘을 향한, 반쯤 꿈꾸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런 줄 알았지만 독서 모임을 주최하는 것은 트리온 후작 본인이더군요. 그리고 에드윈 후작, 에스테반 자작도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합니다.”

아폴로니아는 빠르게 편지를 훑었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는 적극적인 초대였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카엘리온을 확실하게 지지하지 못했던 그들의 마음이 드디어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였다.

“불참하게 된 것이 조금 아쉽지만,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요.”

유리엘이 말했다.

“불참?”

“예. 날짜를 보십시오.”

그녀의 눈이 식사 날짜 부분에 멈추었다.

“……오늘 정오였네?”

“그러니 안 되는 것이지요.”

유리엘이 편지를 다시 가져가 서랍에 넣으며 말했다.

드르륵- 탁.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그가 닫은 서랍을 다시 열어 편지를 꺼냈다.

“전하?”

“참석해, 유리엘.”

아폴로니아가 짧게 말했다.

“예?”

“이건 쉽게 올 수 없는 기회야. 날마다 마음이 바뀌고 있을 그 셋은 한 번 초대를 거절하면 다시 부르기까지 오래 걸릴 거야. 아예 안 부를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를 부른 건 분명 카엘리온이나 나를 염두에 둔 거고, 그들의 의중을 알 필요가 있어.”

아폴로니아는 초대장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여러 번 가 봤고, 혼자서도 갈 수 있는 곳이야. 어차피 외부에서 호위 인력을 고용했으니 걱정 말아.”

아폴로니아는 그를 안심시켰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간혹 아일린 이데나로서 외출을 하느라 기사단의 호위를 받지 못할 때면 그녀는 흔히 민간의 인력을 동원했다. 그들은 경험도 실력도 있는 믿을 만한 자들이었고, 돈만 제때 지급하면 의뢰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내키지 않습니다.”

유리엘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단호했다.

“괜찮으니까 가. 이야기만 듣고 올 테니 걱정할 거 없어. 늦어도 2시가 되기 전에 돌아올 거야.”

아폴로니아는 대답 없는 그를 다시 방으로 밀어 넣었다.

“금방 다녀 올 테니 정오의 모임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와 줘.”

그녀가 웃으며 부탁하듯 말했다. 유리엘은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궁 바깥까지만 배웅하겠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창한 날씨, 그리운 정원, 트리온 후작의 초대, 아이테르 백작을 통한 소개. 운이 좋은 날이었다.

* * *

알브레이트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가 기억하던 그대로. 중앙에는 자색이며 분홍색, 황금색까지 온갖 화사하고 희귀한 꽃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역시 백합이었다.

아폴로니아는 기억을 따라 백합 정원을 찾았다. 그곳은 다른 곳보다 조용했고, 온통 희고 청초한 꽃으로 덮여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곳은 일반인의 모습을 한 호위 두어 명을 곁에 둘 수 있으면서 남이 들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차단된 실내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낯모르는 사람을 상대하기에도 안전한 편이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아폴로니아는 사전에 연락해 비용을 지불하고 그들에게 백합 정원을 통째로 비워 달라는 요청을 넣었다. 그녀는 옆에 호위 몇 명을 남기고 밖에 다른 몇 명을 세워 둔 채, 그녀를 만나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몸수색 후 들여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상단주이십니까?”

등 뒤에서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궁을 나서서 민간 호위를 만나는 순간부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백합 정원에 다른 여자가 없어서인지, 그는 바로 아폴로니아를 알아본 듯했다.

“아이테르 백작께서 소개하신 에녹 테안이로군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곧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눈앞의 사람은 로브를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있었다. 천으로 얼굴을 가린 아폴로니아만큼이나 비밀스러운 모습이었다.

“정식으로 신원을 밝히고 얼굴을 보이세요.”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 전이라면 모를까, 그녀를 만나고도 얼굴이나 신분을 숨기는 자와는 거래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비밀스러운 것은 아폴로니아 한 명이면 족했다.

“물론, 요청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로브 속 남자는 씩 웃으며 말했지만 로브를 벗지는 않았다. 천 아래로 어렴풋이 드러난 얼굴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목소리 또한, 짚어 말하기 어렵지만 이상하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그가 바로 말을 듣지 않자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본 적이 있든 없든, 그가 10초 안에 제대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으면 돌아설 생각이었다.

“듣던 대로 단호하신 분이로군요.”

남자가 앞으로 한 걸음을 떼며 말했다. 그는 과할 정도로 그녀에게 바짝 접근했다. 표정도 말투도 부드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기운을 흘렸다.

아폴로니아는 순간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펴 호위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조금 전까지 백합 정원 안에는 호위 세 명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을 찾기 위해 주변을 훑어본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에 있었다. 다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쓰러진 상태로. 눈에 보이는 세 명 전부가 의식이 없어 보였다.

“이게 뭐…….”

“이제 눈치채셨군.”

남자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폴로니아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폴로니아는 본능적으로 눈앞의 남자로부터 두어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퇴로를 찾기 위해 돌아섰다.

“늦었어.”

남자는 빠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돌아서는 그녀의 입으로 하얀 손수건이 덮어졌고, 불쾌하고 강한 향이 느껴졌다. 이는 강한 마취제였다.

“비키……지, 못…….”

그녀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 * *

유리엘은 트리온 후작저의 접견실에 앉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녀가 그를 안내한 지 10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유리엘은 그런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기다리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이 너무나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작을 비롯해 여러 귀족이 모였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가주가 귀한 손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다면 저택은 위아래로 정신없이 분주해야 정상이 아닌가. 그러나 이곳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유리엘은 눈썹을 찌푸렸다.

누군가의 장난이었나? 하지만 왜…….

철컥.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접견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오셨군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인사를 건넸다. 반가움과 설렘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라일라 영애?”

유리엘의 앞에 나타난 것은 라일라 트리온이었다. 탐스럽고 풍성한 갈색 머리를 가진 그녀는 꽤나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갖춰 입고 공들여 단장한 모습이었다. 입가의 점이 그녀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후작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유리엘이 딱딱하게 물었다. 그녀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 아버님…… 이라니요?”

유리엘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모르는 척 마십시오. 저는 후작님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을 받고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라일라는 눈을 한 번 동그랗게 뜨고 입을 열었다. 그 표정이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점심 초대는 제가 한 거랍니다. 아버지 이름의 초대장이 간 거라면…… 며칠 전 아버지께서 주최하셨던 식사 자리 초대장과 실수로 바뀐 모양이에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원래의 계획은 전혀 달랐을 것이나, 유리엘의 날카로워진 눈매 앞에서는 입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기, 기왕 오셨으니 저와 식사를 하고 가시면 어떨까요? 아버님은 저녁이 되어야 들어오실 거예요.”

유리엘의 눈썹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그의 얼굴에 부드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죄, 죄송해요! 시녀 잘못인가 봐요!”

라일라는 당황해서 변명을 시작했다.

“저는 백작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지난 번 도움도 있었고…….”

유리엘은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빠르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지나치기 직전 멈추어 서서 토끼 눈을 뜬 라일라를 마주했다.

“영애.”

바다 같은 푸른 눈은 얼음처럼 서늘했다. 무도회 때와 달리 그의 눈빛에는 그저 차가운 분노만 어려 있었다.

“예, 예?”

“경고입니다. 다시는 거짓말로 저를 불러내지 마십시오. 이런 짓을 다시 하면 그 때는 참지 않겠습니다.”

라일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유리엘은 그녀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복도를 지나 저택의 문을 나서 버렸다.

‘젠장.’

단순히 어린 영애의 장난이기는 했지만 그는 이 때문에 아폴로니아와 동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별일 없을 것이다. 5년 동안이나 아폴로니아의 곁을 떠나 있었다. 아폴로니아가 그의 동행 없이 일을 처리하는 데는 아주 익숙했다.

트리온 후작가는 황궁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저녁이 되기 전에 다시 황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하는 어디 계십니까?”

별궁에 들어선 그는 가장 먼저 마주친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유리엘 님?”

그녀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복도를 오가다가 그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자세히 살피니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유리엘의 뱃속에 묵직한 불안감이 자리 잡았다.

“하, 함께 가신 것이 아니었나요?”

아드리안의 말을 듣자 그의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그가 함께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니, 그럼 설마 아폴로니아가 아직…….

“저는 갑작스럽게 다른 일이 생기는 바람에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호위가 있었을 텐데요.”

털썩.

아드리안이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았다. 그녀는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입술을 잘게 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유리엘도 호흡이 거칠어졌다.

“전하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민간에서 고용했던 호위들도 찾을 수가 없고요.”

곧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분명 2시까지는 돌아온다고 하셨는데, 저는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유리엘의 호흡이 견딜 수 없이 거칠어졌다. 머릿속으로 그녀에게 일어났을 수 있는 수만 가지 일들이 상상됐다. 하나하나가 괴로웠다.

“……몇 시간째입니까?”

아드리안은 정확히 그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애써서 말을 뱉었다.

“정오에 알브레이트 정원에 도착하셨다는 사실까지는 전달받았어요. 소식이 끊어진 것은 그 다음이에요.”

여섯 시간 전이었다.

유리엘은 그녀를 그대로 보낸 자신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돌이켜 보니 타냐를 통한 접근부터 수상했다. 아폴로니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기에 신뢰를 주었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이는 그가 오랜 시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마음속은 불안하고 착잡했으나 그는 결론을 내렸다.

“실종…… 아니 납치입니다.”

스스로도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그는 애써서 입 밖으로 꺼냈다. 아드리안이 입술을 더욱 꽉 물었는지 그녀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 * *

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아폴로니아를 깨웠다. 눈을 뜨자 희미하게 나무로 된 천장이 보였다. 그녀가 있는 곳은 어느 작은 오두막인 듯했다. 공기가 무거웠다. 곧 비가 오려는 것처럼.

그녀는 눈을 다시 한 번 깜빡여 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몸의 감각이 아직 완전하게 돌아오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빠르게 기절하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로브를 쓴 남자, 그리고 강한 마취향. 기절한 호위들.

‘납치됐구나.’

아폴로니아는 비로소 상황을 파악했다.

‘바보같이.’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몇 대 때려 주고 싶었다. 타냐를 통한 수상한 접근, 갑작스런 유리엘의 부재, 이는 꽤나 치밀하게 계산된 함정이었다.

‘나에 대해서 대체 어떻게 알고…….’

납치범은 그녀를 오랜 시간 분석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테르 백작의 소개장은 분명 정교하게 위조된 것이고, 백작의 소개가 아니면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에 대한 정보들은 납치범이 공들여 모은 정보일 것이다.

누군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알브레이트 정원, 그중에서도 백합 정원을 좋아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드리안과 유리엘, 그리고 지금은 곁에 없는 마야 정도가 전부였다.

‘백작에게는 그냥 지나가다 언급한 것이 다였지. 이제 기억났어.’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장소의 이름 때문이었는지, 그 이름이 불러일으킨 향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녀 스스로 기억을 왜곡했던 건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누가, 왜?’

그녀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으나 답은 보이지 않았다. 시력은 조금 전보다 좋아진 느낌이었지만 여전히 흐릿했다.

탁.

오두막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렸던 문틈으로 바깥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젖은 듯한 느낌으로 보아 곧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다.

“정신이 들었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물었다. 그녀를 납치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분명 처음 만나는 건데도 이상하게 익숙한 음성.

“으음…….”

아폴로니아는 목소리를 내 보려 했다. 조금 전보다 몸에 힘이 돌아왔지만 완전히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소리는 들리는 모양이군. 곧 정상적으로 보고 말하고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약 기운이 떨어질 때가 됐으니까.”

납치범치고는 친절하게 들리는 설명을 하며, 남자는 성큼 다가와 아폴로니아의 몸 쪽으로 팔을 뻗었다. 아폴로니아는 저항을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 상태로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으면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긴장한 그녀의 표정을 봤는지, 남자는 조금 더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일으켜 주려는 거야. 난 묶여 있는 여자를 억지로 건드리는 쓰레기 같은 취향은 없어.”

그의 말을 듣고서야 아폴로니아는 자신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는 자신이 말한 대로 아폴로니아를 일으켜 앉혔다. 그녀는 손이 앞으로 묶인 채 침대에 반쯤 누운 상태가 되었다.

오두막의 형태가 조금 더 눈에 들어왔다. 작지만 나름대로 탄탄하게 지어진 곳이었다. 어느 소탈한 귀족이 오래전 사냥 따위를 위해 지어 둔 건물인 것 같았다.

“목이 마를 테니 마셔.”

남자는 찬물 한 잔을 그녀의 입에 대 주었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옆쪽에 서 있었지만, 뚫어질 듯한 그의 시선은 느낄 수 있었다.

“……누구지?”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돌아왔지만 그 소리는 아주 작았다. 남자는 대답을 망설이는 듯했다. 조금 전 들어설 때 얼핏 보인 형체로 볼 때 그는 로브를 쓰고 있지는 않았다. 아마 그녀가 몸을 돌리면 얼굴이 보일 것이다.

“……이봐.”

남자가 그녀의 생각을 짐작한 듯 다시 한 번 아폴로니아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 손대거나 그녀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시야는 약간 흐릿했지만 형태를 구분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윽고 남자의 얼굴이 완전히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익숙한 턱선, 익숙한 콧날, 그녀가 사랑했던 회색 머리칼. 강인하고 때로는 냉정했지만 그녀를 볼 때면 언제나 따뜻했던 잿빛 눈동자.

아폴로니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믿을 수 없는 모습에 눈물이 차올랐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그는 분명히 자신의 눈앞에서 죽었다. 자객의 검날이 심장을 꿰뚫는 모습을 직접 보았었는데…….

“시…….”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아폴로니아의 반응에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그 모습.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입을 열고 힘겹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드?”

남자는 당황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흐릿하게 보이는 얼굴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에 고인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봐.”

남자가 다시 말하며 얼굴을 가까이로 가져왔다. 그의 입매도, 찌푸린 짙은 눈썹도 시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이나?”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약효가 거의 떨어졌을 거라는 남자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그녀의 시야가 조금 깨끗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아폴로니아의 얼굴은 실망에 잠겼다.

그는 시드가 아니었다. 같은 회색 머리, 같은 이목구비, 묘하게 비슷한 음색과 말투. 그러나 이 남자는 아폴로니아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불현듯 아폴로니아의 머릿속에 어떤 인물 하나가 떠올랐다. 만난 적은 없지만 그 존재를 잊은 적은 없는 사람.

“나는 그 사람이 아니야. 아가씨는 나를 몰라.”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스?”

아폴로니아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뭐?”

“녹스…… 녹스 바이안.”

그녀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남자는 이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알아?”

그는 어딘가 씁쓸한 말을 뱉더니 아폴로니아의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녹스 바이안. 그는 시드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열일곱의 나이에 시드의 작위를 이어받았던 젊은 바이안 백작. 아버지의 죽음 후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영지에 눌러앉은 채 수도를 출입하지 않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이제 완전히 회복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드와 정말 닮아 있었다. 얼굴뿐 아니라 큰 키며 단단한 체형, 가만히 있어도 느껴지는 패기까지도. 걸음걸이며 자세만 보아도 그가 만만치 않은 무인임은 알 수 있었다.

다만 그의 표정과 눈빛만큼은 달랐다. 같은 잿빛 눈동자였지만 순수하면서도 고집스러운 충성심, 아폴로니아에 대한 온정이 담겼던 시드의 눈과 달리, 녹스의 그것은 어딘가 차갑고 날카로워 보였다.

아폴로니아의 마음속에서 조금 전과 다른 벅찬 감정이 느껴졌다. 한 번 죽은 시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이 사람은 분명히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분신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그녀를 탐색하는 것 같았다.

긴 정적 끝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납치당해서 감금된 사람치고 경계가 너무 풀린 것 아닌가? 누가 보면 오랜만에 만나는 남매라도 되는 줄 알겠네.”

그는 헛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그 말을 듣고서야 그에게 비쳤을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반가움을 미처 다 지워 내지 못한 표정에 눈가에는 아직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데려온 건지 알겠어?”

그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아폴로니아를 직시했다. 그 안에는 적의와 함께 약간의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조금 전 벅차올랐던 마음을 억지로 접고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아폴로니아는 녹스에게 납치된 상태였다. 우발적인 것도, 오해도 아닌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 아폴로니아는 머리가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빠르게 되짚었다.

아이테르 백작의 소개, 의심하기에는 그녀와 그녀 주변의 사람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이 남자. 유리엘이나 카엘리온조차도 알기 어려운 알브레이트 백합 정원의 추억을 이용해 그녀에게 접근했던 사람.

“……다 시드가 알고 있었던 일이구나.”

아포로니아가 반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소중한 황녀님이 어떤 정원을 좋아하는지는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아이테르 백작의 인장 같은 건 그 사람의 서랍에서 나온 서류에 찍혀 있어서 위조할 수 있었어. 거슬리는 놈을 옆에서 떼 놓는 게 문제였는데……. 라일라 트리온의 시녀를 매수해서 그쪽에 바람을 넣었더니 해결되더군.”

“상단에 대해서도 들었던 거야?”

“아니.”

그는 다시 한 번 헛웃음을 웃었다.

“알잖아. 그 사람은 가족들에게도 그런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지는 않아.”

녹스는 어딘가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죽기 한참 전에 남긴 유언장에 중요 서류를 보관한 장소가 적혀 있었어. 자기가 죽으면 보지 말고 다 태워 버리라고. 어머니는 그대로 하려고 하셨지만 내가 몇 가지 빼돌렸지. 상단 이야기며 벨라 꼬맹이 이야기는 다 거기 있었어.”

그는 짧게 말을 끝내고 아폴로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되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이제 궁금한 게 끝났어?”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천천히 물었다. 아폴로니아로부터 다른 질문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왜 납치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는지 그는 먼저 말을 꺼냈다.

‘당연히 궁금하지.’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아폴로니아에게 녹스 바이안이 그녀를 노린다고 미리 말해 줬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페트라와 결탁?’

아폴로니아가 하나의 가능성을 머리에 떠올렸다가 다시 지워 버렸다. 리페르 공작가는 시드의 죽음 전이나 후에나 녹스 바이안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바이안가가 아직도 수도를 피해 있는 이유도 그 입지가 사라지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녹스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납치라는 사실을 떠나서, 시드를 언급하면서 보이는 씁쓸한 표정과 그녀에 대한 약간의 적의는 영웅이자 충신이었던 시드와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한 가지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나를 원망해?”

질문을 한 순간 그녀는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여유를 유지하던 녹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기 때문에.

“……시드가 나 때문에 죽어서?”

아폴로니아의 머릿속에 5년 전의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시드의 몸을 꿰뚫었던 자객의 검도, 치솟았던 불길도.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그의 분노는 아폴로니아를 향해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아폴로니아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녀 자신이 공감하는 감정이었다.

시드는 분명히 그녀 때문에 죽었으니까. 아폴로니아도 그 일로 오랫동안 스스로를 원망해 왔으니까.

“그래서 이런 위험한 짓을 했니?”

아폴로니아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황녀 납치는 반역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는 이유를 불문하고 죽을 죄였다. 그녀가 여기까지 말하자 녹스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의 입에서는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으니 내가 복수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유치해 보여?”

“아니라면 뭐야?”

“이제 와서 나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지 마.”

녹스가 더욱 싸늘해진 표정으로 날카롭게 내뱉었다.

“솔직히 조금 역겨우니까.”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아폴로니아를 노려보았다. 눈동자 속의 적의가 더욱 노골적으로 빛났다.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시드와 닮았지만 시리도록 차갑고 위험한 그 눈은 순간적으로 아폴로니아의 몸에 소름이 돋게 했다.

그는 몇 초간 아폴로니아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고는 아폴로니아와 비슷한 모습으로 벽에 몸을 기댔다.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이 친근하게 붙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둘 사이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단순히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당신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야.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당신이 싫었어.”

그는 아폴로니아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그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나와 어머니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나?”

그는 아폴로니아의 질문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녀는 조금씩 녹스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황실 기사단장의 아들로 부유하게 살았던 잠깐의 기억을 제외하면, 내 어린 시절은 빼앗기고 피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녹스가 아홉 살 되던 해까지 그는 명예로운 백작가의 외동아들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황실 기사단장을 지냈던 시드 바이안의 아들을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고, 아버지가 바빠서 영지를 떠나 있을 때면 어머니는 백작을 대신해 현명하게 영지를 꾸려 나갔다.

그러나 선황이 죽은 후 그들의 세상은 뒤집어졌다. 사방에 있는 리페르 공작가의 측근들은 그들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으며, 실제로 영지를 침략하고 사업을 방해하는 등 셀 수 없는 타격을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이안 백작가는 입지가 불안해졌고, 한때 그들을 따랐던 수많은 귀족이며 기사들은 조금씩 곁을 떠났다. 사병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어머니는 모든 문제를 혼자서 떠안았다. 최소한의 영지만을 남기고 토지를 팔아 비상금을 마련하고, 녹스의 교육을 책임지고, 어린 나이에 기사 수련을 시작한 녹스가 동료들에게 은근한 무시를 당할 때에도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간혹 아버지는 어디선가 비상금을 마련해 왔지만 그것은 대세를 뒤집기에 부족했다. 결국 백작 부인은 자신의 보석까지 팔아 영지 살림에 보태야 했다.

“하이고, 한때 대단하시던 백작 부인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빛 좋은 개살구가 바로 저런 거지.”

사람들의 비아냥이 뒤따랐고, 두 모자는 사교계에서 편히 얼굴을 비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기다렸다. 바쁜 아버지가 곁으로 돌아오기를. 아버지의 시간을 대가로 명예와 부를 얻었던 거라면, 이제 그 모든 것을 잃었으니 아버지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녹스가 자라는 동안 한 달에 한 번도 얼굴을 제대로 비추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를 지키는 일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언제나 그를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걱정하고, 또 사랑했지만 아버지의 눈 속에는 어린 주군뿐이었다.

백작 부인은 머지않아 병을 얻었다. 한 번 앓아누운 그녀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혼미한 정신으로 항상 남편을 찾았다. 아버지는 간혹 한 번 들러 그녀의 건강을 확인하거나 편지를 보내 올 뿐, 곁에 있어 주지도, 병에 도움을 주지도 않았다.

녹스는 열일곱이 되던 해에 아버지에게 길고 긴 편지를 보냈다.

[어머니께서 위독하십니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버티지 못할 겁니다.]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시드는 며칠 후 영지에 도착했다. 녹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진심 어린 감동을 느꼈다.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겨우 이틀을 머무르고 다시 떠났다. 자신의 옷자락을 꼭 쥔 부인의 손을 뿌리치고, 모든 간병을 어린 아들에게 맡겨 두면서.

“나는 전하를 지키러 돌아가야 하니 너는 남아서 어머니를 지키거라.”

‘돌아’간다. 그 한 마디는 녹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언제나 기다리던 아버지의 집은 황궁이었고, 가족은 아폴로니아였다는 사실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

“곧 다시 돌아오마.”

그는 한 마디 약속을 남기고는 말을 달려 사라졌다. 언제나 그렇듯이. 다만 언제나와 다른 점은, 그 후로 시드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상황은 악화됐어. 어머니는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하셨지만 우린 작아진 영지에 갇히다시피 한 채로 살고 있으니까. 사용인들은 떠나고 가까웠던 친인척들과도 멀어졌지.”

녹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마쳤다. 눈동자 속 적의는 그대로 있었다.

“평생을 황실에 바친 대가로 얻은 게 그런 것이더군. 추락을 지켜보는 이들의 온갖 조롱,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먼 친척이 후원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작위고 영지고 다 팔아 버려야 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몰락한 가문.”

아폴로니아는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대답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책임했어. 자식이라고 낳아 놨지만 나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지. 같은 시기에 태어난 황녀 전하에게 모든 정신이 쏠려 있어서 나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더군. 매년 생일은 잊어버리고 연락이 없다가 뒤늦게 누군가가 대신 썼을 형식적인 인사말을 보냈고, 내가 몇 살인지, 무슨 교육을 받았고 뭘 잘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뭐, 이제 죽어 버렸지만.”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오랫동안 다물려 있었던 그녀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그게 나를 데려온 이유야?”

조금 전보다 또렷해진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약 때문에 혼미했던 정신은 이제 예민한 평소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녹스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어머니가 고생하는 꼴을 보는 것까지는 익숙했어. 그런데 어느 순간 뭔가 불공평한 것 같은 거야. 시드 바이안의 부재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여기 있는데, 정작 당신은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황궁에서 편하게 살았다는 것이. 나중에 상단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니 더더욱 짜증이 나더군.”

그의 말은 조금씩 빨라졌다.

“파스칼 3세의 후계자, 아버지가 목숨을 희생해 가면서 지킨 주군, 아폴론의 후손. 그런 당신이 역겹게 느껴지기 시작하더군. 허울만 좋지 결국 수하를 살기 위한 수단 정도로 쓰고 버리는 건 지금의 황제와 찍어 낸 듯 닮았어.”

녹스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 말을 시작할 때는 차분해 보였던 그는 이제 치미는 분노를 누르지 않았다.

“……부인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아폴로니아가 마음속에 품었던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이 녹스를 더욱 자극했는지 그의 호흡이 미세하게 거칠어졌다.

“당신의 입에서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는 말이 나오다니 아주 우습군.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어. 당신을 데려온 이유는 그거니까.”

무릎 위에 놓은 그의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뚜렷하게 선 핏줄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뱃속에서 불안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둘러싼 공기가 조금 전보다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5년 전에는 회복했지만 어머니의 병은 쉴 틈 없이 재발했다. 얼마 전 의사가 말하길 살날이 길어야 1년이라고 하더군.”

아폴로니아는 오래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백작 부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녹스는 그 모습을 보고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머니의 병은 아버지의 부재로 생겼던 거야. 난 어머니까지 돌아가신 후에도 당신이 멀쩡히 사는 꼴을 도저히 볼 수가 없어. 울화가 치밀어 못 견딜 것 같아.”

녹스는 허공을 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렇게 두지 않으려고.”

녹스는 허공을 향했던 시선을 다시 아폴로니아에게 고정했다. 그의 음성은 조금 전보다 한층 음산해져 있었다. 그 눈을 마주치는 순간 아폴로니아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전장의 악귀.’

아폴로니아의 머릿속에 갑자기 시드의 별명이 떠올랐다. 적군은 그의 소름 끼치는 눈빛만 보고도 겁에 질려 도망쳤다고 했다.

아폴로니아는 지금에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잿빛 눈. 그 강렬한 안광에는 적개심뿐이었다. 주군을 위협하는 적군을 보는 시드의 눈이 그랬을 것이다. 다만 지금 증오 가득한 그 눈빛이 보고 있는 대상은 오로지 아폴로니아였다.

불안감이 다시 한번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불안감은 완전한 실체를 갖추었다.

“어머니가 죽기 전에, 당신이 먼저 죽으면 되는 거잖아.”

녹스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그녀의 목을 겨누었기 때문에.

* * *

쾅!

카엘리온이 자신의 방 벽을 내리쳤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이 후드득 떨어지고, 창문이 흔들거렸다.

“헛소리하지 마.”

그는 굳은 표정으로 방문 앞에 서있는 유리엘에게 따지듯 물었다.

“황녀가 사라졌는데 못 찾는다는 게 말이 돼? 군대라도 동원해서 찾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상단주를 만나고자 한다는 편지를 받아서 나간 거다. 군대를 동원하려면 전하께서 해 왔던 모든 일을 밝혀야 해. 무엇보다 시간이 없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리엘이야말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아폴로니아가 사라졌다. 아마도 계획적인 납치로 인해. 누가 한 일인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유리엘은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억지로 정신을 붙잡은 것은 아폴로니아의 안전을 다시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은 혹시 단서가 될까 싶어 급히 타냐를 궁으로 불렀지만 납치범의 정체를 모르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지켰어야지!”

카엘리온은 으르렁거리며 유리엘의 멱살을 잡았다. 유리엘의 시종으로 가장하고 따라온 타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유리엘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씹었다. 그는 이미 아폴로니아를 지키지 못한 것을 죽도록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단을 동원해서 찾을 수 없다면 잃어버린 순간 너부터 튀어 나가서 찾았어야지! 나를 찾아오는 사이에도……”

“네가 화낸다고 도움이 되는 게 아니야. 그리고……”

유리엘은 카엘리온을 밀쳐내며 문 쪽을 힐끗 보았다.

“착각하나 본데 너를 찾으러 온 게 아니야.”

그의 시선 끝에는 아드리안과, 그녀의 손을 잡고 따라온 어리둥절한 표정의 에반젤린이 있었다.

“지금 전하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유리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반젤린을 보는 그의 눈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왕녀, 납치된 전하를 찾아 주십시오.”

“……정말 사라졌나 보군.”

에반젤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며 카엘리온의 소파에 털썩 앉았다.

“흐음. 몇 년 동안 아무에게도 협박을 안 받고 잘 살았잖아.”

그녀는 반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넋이 조금씩 빠져 있는 네 사람과 달리 에반젤린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황녀 전하가 아닌 이데나 상단주를 원했어요. 그럼 루완 상단이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손쓴 건 아닌지……”

아드리안이 말했으나 유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자는 전하의 정체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떼 놓기 위해 라일라 트리온에게 접근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럼 라일라 트리온을 끌고 오면 배후를 알 수 있겠군.”

카엘리온이 꽉 다문 이 사이로 말했다.

“후작가에서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리고 딱 들어 보니까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데. 가짜 초대장을 보내라느니 하는 아이디어는 아마 여러 사람을 거쳐서 그 아가씨 귀로 들어갔을 거야.”

에반젤린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도 몸도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눈썹은 찌푸렸다가 폈다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뒤로 기댔다가, 뭔가 고민하는 듯, 어디 하나 가만두지 못했다.

카엘리온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 누이를 찾을 수 있어?”

에반젤린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엘리온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찾을 수 있어?”

“글쎄.”

애매한 대답에 카엘리온이 눈을 부릅떴다. 에반젤린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말했잖아, 저번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카엘리온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원하는 대가를 받지 않으면 도울 수 없다고.”

카엘리온의 눈이 커졌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윽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엘리온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대가를 논하는 거야?”

“지금 상황에서도 그 대가를 내놓는 게 싫어?”

에반젤린이 그에게 되물었다. 습관처럼 움직이던 몸은 이제 바르게 고정된 상태였다. 눈가에는 언제나처럼 장난기가 남아 있었지만 강렬한 적갈색 눈동자는 진지하면서도 냉정했다.

그녀는 방 안에 있는 나머지 네 사람처럼 아폴로니아를 사랑하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도움을 제공할 생각은 없었다. 그 사실은 분명했다. 유리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에반젤린은 물러서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아 냈다.

“누이가 네게 큰 도움을 준 건 잊었어? 넌 분명히 협조하겠다고 했다.”

“약속한 만큼은 이미 하고 있어. 내가 빚진 거라고 착각하지 마.”

“누이가 없었으면 넌 패리스의 노예 신분이었다.”

“아니, 황녀 전하가 아니었으면 난 라잔에 있었을지도 모르지. 나를 데리고 오라고 한 게 전하니까.”

에반젤린의 눈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빛났다. 카엘리온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카엘리온이 무언가 대답을 하려 하자 에반젤린은 차가웠던 시선을 거두고 한층 부드럽게 말했다.

“전하가 싫다는 게 아니야. 오히려 좋아해. 현명하고, 관대하고, 냉철하면서도 속은 깊어. 라잔을 위해서도 패리스보다 훨씬 좋은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해. 다만 우리는 거래를 하는 사이야.”

그녀는 대답을 원하는 듯 카엘리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5분이면 대략적인 행방을 알려 줄 수 있어. 정확한 위치를 아는 데는 몇 시간 더. 하지만 단언컨대 나보다 더 전하를 빨리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에반젤린의 입에서 구체적인 답이 나오는 순간 유리엘, 카엘리온, 아드리안 세 사람의 눈이 반짝 빛났다. 유리엘이 숨을 깊게 들이쉬며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에반젤린은 순진하게도 자신이 입을 다물면 정보는 지켜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틀렸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무력으로 정보를 얻어 내는 방법은 많았다. 오래전 사피로로부터 다 배우지 않았나.

유리엘이 마음만 먹으면 에반젤린은 그의 앞에서 어떤 비밀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아폴로니아가 알면 충격을 받아 그를 멀리 쫓아낼 정도의 잔인한 일을, 그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쓰지 않았지만, 되도록 다시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폴로니아가 걸려 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난 다른 건 원하지 않아.”

그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에반젤린이 말을 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였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아폴로니아가 절대로 내주지 않았던 것.

카엘리온.

“모든 걸 동원해서 전하를 찾아 줄게. 그리고 대가로 대단한 걸 바라지도 않아. 딱 반년. 반년 동안 나와 연인처럼 지내 줘.”

에반젤린이 깔끔하게 제안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괜찮지 않느냐는 듯, 약간의 기대가 어린 표정으로 카엘리온을 보았다. 방 안에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분명 조롱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녀로서는 합리적이고, 심지어는 사려 깊은 제안일지도 몰랐다. 평생을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검을 잡았던 유리엘의 손에도 힘이 살짝 풀어졌다.

“이제 대답해. 내가 원하는 대가를 줄 거야?”

그녀와 카엘리온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싫다면…….”

에반젤린이 고개를 돌리고, 유리엘이 검을 잡은 손에 다시 힘을 준 순간이었다.

털썩.

카엘리온은 그녀가 걸터앉은 소파 바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유리엘과 아드리안, 타냐의 눈이 커졌고, 냉철했던 에반젤린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는 직계 황족을 제외하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을 가진 자였다. 그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무릎 꿇은 카엘리온의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부탁이다.”

황제 앞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예를 취한 적이 없던 카엘리온이 무릎을 완전히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에반젤린의 발등을 향해 있었다.

“누이를, 누이를 찾아 줘. 제발 부탁이야.”

언제나 여유로 가득했던 카엘리온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호흡은 거칠었고 시선은 불안했다.

“……이런 걸 하라고 한 게 아니잖아.”

에반젤린이 화가 난 듯이 따졌다.

“내 말을 이해하지…….”

“내 인생은 내가 함부로 가지고 거래할 수 없어. 가능했다면 얼마든지 줬겠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온전히 누이의 것이다.”

카엘리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반젤린은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쓸데없이 그러지 말고 일어…….”

“……그러니까 애원할 수밖에 없잖아.”

카엘리온이 다시 한 번 간절하게 말했다. 목소리뿐 아니라 그의 온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어미를 잃어버린 새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유리엘은 알 수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카엘리온에게 단순한 동경의 대상이나 연모의 대상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아폴로니아만을 의지했던 그에게, 그녀는 사랑이자 구원, 약혼자이자 누이, 심지어는 어머니와도 같았다.

에반젤린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꼿꼿하고 당당하면서! 암살 시도 수십 번을 겪고도 전투에서나 정치판에서나 몸을 사리지 않으면서! 라잔에서 내가 네 총사령관을 이겼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협상 같은 걸 해서 날 속일 생각을 했으면서!”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그의 모습을 차마 쳐다볼 수 없는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런 거 보고 싶어서 대가를 달라고 한 게 아니야. 차라리 협박을 해! 아니면 돈을 잔뜩 내놓고 나를 설득하든가. 어울리지 않게 자존심 버리는 건 그만둬!”

그러나 카엘리온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이의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협박 같은 건 안 해. 이건 애원이고, 간청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그의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에반젤린의 표정은 불안해졌다. 두 사람은 1분 정도 아무 말 없이 대치했다. 그리고 결국 울상이 되어 소파에 쓰러지듯 다시 주저앉은 것은 에반젤린이었다.

“일어나, 제발.”

그녀의 눈에는 보일 듯 말 듯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억울해서인지, 아니면 카엘리온의 약한 모습을 봐서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알았으니까 일어나라고.”

그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엘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네 사랑과 내 사랑은 다르다는 걸 보여 주겠다는 심리라면 충분히 했어. 난 내가 관심 있는 사람을 살리겠다고 다른 사람 앞에서 그렇게 자존심을 다 버리는 일은 죽어도 못 할 테니까.”

그녀가 말했다. 에반젤린에게, 사랑이란 곧 소유이지 희생이 아니었다.

“……찾아 준다는 거야?”

“당장 완벽하게는 못 찾아. 아까 말했잖아.”

그녀는 조급하면서도 감정적으로 말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어느 쪽으로 갔는지 정도는 지금 물어볼 테니까.”

에반젤린은 누군가가 쫓아내기라도 한 듯 방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조금 일그러진 표정이며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고 싶은 눈치였다.

카엘리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의 호흡은 여전히 거칠었고, 눈빛 또한 불안했다.

“몇 시간…… 몇 시간을 기다려야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고.”

대치에서 이긴 셈이었으나 방에 있는 누구도 기뻐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폴로니아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몇 시간 안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몰랐다.

유리엘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상황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 아폴로니아의 비밀을 너무나도 자세하게 아는 자. 몇 다리를 건넜는지 몰라도 라일라 트리온에게 접근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

“귀족이겠지…….”

무의식중에 그가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과연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왜?

“귀족.”

아드리안이 그의 말을 듣고 따라서 중얼거렸다. 유리엘은 의미 없이 한 말이었지만 아드리안은 작은 단서를 놓치기 싫다는 듯 다시 그 단어를 따라 했다.

“귀족이라…….”

그녀의 눈이 겁에 질린 채 창가에 서 있는 타냐에게 향했다.

“타냐.”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지금 상황에서 타냐가 겁을 먹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 사람의 얼굴을 못 본 것이 확실한가요?”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타냐를 알고 있었다면, 기억은 안 나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는 않을까요?”

아드리안이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타냐는 직접 만난 귀족의 수가 많지 않으니까, 그 안에서 잘 생각해 보면 납치범이 누군지 떠올릴 수도 있을지도 몰라요.”

아드리안은 말을 하면서도 대단한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반젤린이 답을 가지고 돌아오기 전까지 그녀는 더 노력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게, 이상하게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타냐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드리안의 눈에 미약한 희망이 비쳤다.

“분명히 초면인데도 어디선가 아주 비슷한 사람을 본 것 같은…… 미안해요, 아드리안. 기억이 안 나요.”

타냐는 애써 기억을 더듬다가 결국 어깨를 늘어뜨리고 울먹거렸다.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타냐의 탓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철컥.

그때 문이 열리고 에반젤린이 다시 들어왔다. 소매가 작은 발톱에 찢긴 듯 조금 전보다 살짝 너덜거리는 것 같았다.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대. 알브레이트 정원을 기준으로 남서쪽 방향. 한 시간 전에 드몬 광장을 지난 것 같아.”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게 말했다.

“다행히 방금 보고를 들었지만 지금 어디 있는지는 다음 보고가 와야 알 수 있어.”

에반젤린은 조금 전보다 멀쩡해진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툴툴대는 말투로 얘기했다.

“드몬 광장을 지나 남서쪽…… 더 간다면 수도 경계의 숲이고 그 전에 멈춘다면…… 근방에 있는 어느 귀족가의 저택이나 사유지, 또는 사업체로 들어갈 수도 있겠죠.”

아드리안이 말했다. 아폴로니아의 교육 덕분에 그녀는 근방의 지형은 물론 어느 귀족이 어디 사는지까지도 외우고 있었다.

“범위가 너무 넓어서 당장 방향만 가지고는 찾을 수가 없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눈을 돌려 다시 타냐를 바라보았다.

“타냐.”

아드리안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안색은 흙빛이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위기 상황일수록 침착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그녀는 아폴로니아를 보며 배웠다.

“천천히 생각해 봐요. 전하와 사업을 함께 하면서 직접 만난 사람이 누가 있는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되짚어서 생각해 줘요.”

그녀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혼이 빠진 것 같은 표정이었던 타냐가 그 말에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으음…… 처음 만났을 때부터라면…….”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찌푸려진 눈썹에서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가 보였다.

“처음, 처음…… 어?”

순간 타냐의 눈이 토끼눈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어어……?”

“뭔가 기억이 났어요?”

“……영감탱이!”

타냐가 창틀을 내려치며 외쳤다.

“영감?”

“시드 바이안! 그 사람을 닮았었어요! 얼굴이 안 보였지만 분명히 그 사람이랑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뭐……? 하지만 바이안 백작님은 5년 전에…….”

“그게, 영감이라기보다는 영감의 분위기를 닮았달까, 나이는 아드리안이랑 비슷한 정도였는데…….”

타냐가 자신 없게 덧붙이는 순간이었다.

툭!

아드리안과 타냐의 대화를 들은 유리엘이 순간 멍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카엘리온과 에반젤린을 포함한 네 사람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잘 때조차도 검을 떼어 놓지 않는 그가 검을 떨어뜨리다니?

그러나 그들의 시선에도 유리엘은 검을 주워 들지 않았다. 다만 입 속으로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시드와 닮은, 젊은 남자…… 귀족…….”

그는 조금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하다가 아드리안을 돌아보았다.

“아드리안, 왕녀가 말한 장소 근처에 바이안 가문이 사용하는 장소가 있습니까?”

“네? 하지만…….”

당황한 아드리안이 말을 더듬으며 무언가 기억해 보려 했다.

“바이안 가문은 원래부터 수도에서 사업 같은 건 잘 하지 않았어요. 저택도, 집도, 아무것도 없는 데다가 요즘은 아예 출입을…… 아!”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저택은 없지만 남서쪽 숲 속에서 사냥을 즐겨 했었던 걸로 알아요. 예전에 시드 바이안 님에게 직접 들었던 말이에요. 그 숲에는 선황께서 바이안 가문에게만 사용을 허락한 사냥터가 있었다고, 선황이 돌아가시고 그 명령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지만 그때 사용했던 작은 오두막은 남아 있다고.”

타악!

유리엘이 떨어졌던 검을 발로 차올려 손으로 잡았다.

“그곳입니다.”

그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전하께 원한을 가졌을 수도 있는 자, 동시에 전하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자.”

그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듯, 방문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시드 바이안의 아들밖에 없습니다.”

아드리안과 타냐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었다. 선황과 아폴로니아의 가장 충직했던 신하. 그들을 위해 살다가 결국 목숨까지 바쳤던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주군을 납치했다니.

“……확실한 거야?”

카엘리온이 물었다. 그는 반쯤 유리엘을 따라가려다가 다시 에반젤린을 바라보았다.

“틀린 추측이라면 귀한 시간을 더 잃을 수 있다.”

“맞는 말이야. 그러니 너는 기다려.”

유리엘은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말했다.

“정확한 장소가 파악되면 그때 움직이도록 해.”

그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순식간에 복도를 지나 사라졌다. 젖은 공기가 더 무거워지는가 싶더니, 창밖에서 한 줄기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 *

투둑! 투둑!

고요한 가운데 오두막의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녹스는 아폴로니아의 목에 댄 검을 한층 단단히 쥐었다.

“똑똑히 알기를 바라. 당신을 돌보고 지키기 위해 누가 무엇을 잃어야 했는지. 시드 바이안이 오랫동안 따랐던 진정한 황제라는 당신이 실은 그 아버지와 다를 것도 없다는 사실도.”

녹스는 할 말을 쏟아 내더니 입을 다물고 아폴로니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녹스, 내 말을 들어…….”

“내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내 이름을 부르지 마. 나는 당신의 친구도, 신하도 아니니까.”

단검을 쥔 그의 손이 아폴로니아의 목을 눌렀다. 그녀의 목에 엷은 붉은색의 상처가 생겼다. 이를 본 녹스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목에서 검을 떼지는 않았다.

검날의 소름 끼치는 차가움이 목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아폴로니아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대로 죽는다고?’

그녀의 머릿속에 미처 되찾지 못한 황위가 떠올랐다. 선황의 유언이 귓가에 울리며 그녀를 괴롭혔다. 수많은 사람들과 기억들이 뇌리를 스쳤다. 어머니, 선황, 시드, 아드리안, 마야, 리샨의 백성들, 카엘리온, 심지어 가이우스 황제와 페트라도. 그리고…….

많은 기억들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빛나는 것은 유리엘의 얼굴이었다. 위기 상황에서는 언제나 나타나 주었던 유리엘. 그러나 지금 그가 생각난 것은 상황이 위험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떠올린 것은 유리엘의 미소였다. 평소에 잘 보여 주지 않지만 리라 연주를 들을 때면 눈가를 떠나지 않던 부드럽고 따뜻한 웃음. 아폴로니아는 그 표정을 좋아했다.

아니, 사실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모든 모습을 좋아했다.

처음 만나서 그녀에게 검을 들었지만 내려치지 못했던 모습도, 칼트산의 심장에서 할아버지의 의도를 깨닫고 충격을 받았던 그녀 곁을 지키던 것도, 그녀를 위해 살겠다고 약속하던 것과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켜왔던 모든 순간들도, 시드를 잃었던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했던 다정함도.

그는 아폴로니아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넘기지 않고 기억했다. 입 밖에 내지도 않았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까지 읽어 낼 정도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녹스의 검이 목에 닿은 순간 그 모든 사실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다시는 유리엘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뇌리를 스치자 못 견디게 괴로웠다.

아폴로니아는 깊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머리를 무언가로 얻어맞은 듯한 자각이 들었다.

‘사랑하는구나.’

그녀는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유리엘을 사랑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조차 없었지만 그는 아폴로니아의 뼛속까지 스며들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말해 주고 싶어.’

유리엘이 보고 싶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단검을 쥔 녹스의 손에 다시 한 번 힘이 들어갔다. 아폴로니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폴로니아 알리스테어 페르디안.”

그가 아폴로니아의 이름을 읊었다. 조금씩 떨리고 있는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이제 나와 어머니에 대한 빚을 갚아.”

아폴로니아는 눈을 감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녹스를 마주했다. 예상치 못했는지 날카로웠던 잿빛 안광이 살짝 떨렸다.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검을 쥔 것은 녹스였지만 오히려 아폴로니아의 눈이 그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녹스, 들어 봐.”

아폴로니아가 다시 말했다. 녹스는 애써서 시선을 외면하고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 순간이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오두막의 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빗소리가 커졌고, 젖은 공기가 오두막 안으로 훅 하고 들어왔다.

“전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두 사람이 미처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은빛의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와 녹스를 덮쳤다.

퍼억!

“윽!”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는 멱살이 붙잡혀 바닥으로 강하게 밀쳐졌다. 들고 있던 단검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무사하십니까?”

“……유리엘?”

아폴로니아가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유리엘이었다. 비에 젖은 은빛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 그의 심해 같은 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짙게 빛났다.

“……또 와 주었구나.”

아폴로니아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언제나 곁에 있었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얼굴, 몸, 시선, 숨소리 하나하나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고마워.”

유리엘은 말없이 그녀를 묶은 줄을 풀어 주었다. 손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젖은 셔츠 너머로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전하…….”

유리엘은 움직이지 않고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의 걱정 어린 시선은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하아……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그 때 녹스가 붉어진 목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폴로니아는 흠칫 놀라 유리엘의 어깨에서 이마를 떼고 녹스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같은 사람을 곁에 한 명 더 두고 있는 것 같더니, 능력이 아주 대단해. 사냥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다며?”

그의 잿빛 시선이 유리엘과 아폴로니아의 사이를 오갔다. 조금 전 아폴로니아의 목에 검을 들이댔을 때 미세하게 떨렸던 모습은 이제 없었다. 오직 분노만이 그의 눈동자 속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실력도 비슷한지 볼까.”

녹스는 벽에 세워져 있던 장검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그대로 계십시오.”

유리엘이 한 걸음 나서며 아폴로니아를 녹스로부터 완전히 차단했다. 그 또한 허리의 장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유리엘과 녹스는 몇 초 동안 미동도 없이 서로를 탐색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검집에서 빼냈다.

챙!

검이 강하게 부딪혔고, 그로 인한 소리가 오두막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검을 맞댄 채로 힘을 겨루다가 한 발씩 뒤로 물러섰다.

“너 뭔데 힘이 그렇게…….”

녹스가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유리엘은 그의 말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채앵! 챙!

그의 검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사정없이 녹스의 머리와 팔, 다리로 떨어졌다. 녹스는 검의 방향을 읽을 틈도 없이 본능에 의지해 공격을 막아 내야 했다.

채애앵!

“윽…….”

몇 합을 겨루었을까. 좁은 오두막에서 벽에 막혀 움직이지 못한 녹스는 결국 검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허억, 헉…….”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눈에는 괴물이라도 본 것 같은 경악이 자리했다. 유리엘은 툭 하고 녹스의 검을 오두막 구석으로 차 버렸다.

녹스의 목에 검을 겨누고 선 그는 한 자락의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얼핏 냉철해 보이는 눈 속에는 아폴로니아를 위협한 상대에 대한 분노가 보였다.

“유리엘, 검을 내려놔.”

두 사람의 동작이 완전히 멈추자 아폴로니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유리엘은 순순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가 옆으로 한 걸음 비켜나자, 아폴로니아의 시선 끝에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녹스가 있었다.

가슴 한쪽이 아렸다. 그 모습은 그녀가 기억하는 시드의 마지막 모습과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냥 죽이지 뭘 기다리는 건지 모르겠군.”

녹스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도, 목소리에도 깊은 체념이 배어 있었다.

“황족 시해로 처벌을 하긴 어렵겠지. 상단의 일까지 밝혀야 할 테니까. 그럼 지금 죽이는 게 맞지 않아?”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정확히 마주하고 내려다볼 수 있도록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할 말이 있나? 아버지를 닮지 못했다는 질책? 내가 그가 쌓은 모든 것을 깎아내렸다는 훈계? 나야 들을 수밖에 없으니 뭐든 해.”

녹스는 스스로를 향한 것인지 아폴로니아를 향한 것인지 모를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그런 그를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열린 아폴로니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녹스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2월 15일.”

“……뭐?”

“네 생일. 2월 15일이잖아. 나이는 나와 같고.”

아폴로니아는 훈계도, 질책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지?”

“좋아하는 음식은 사과. 이유는 시드가 좋아해서. 잘 다루는 무기는 검보다는 창. 존경하는 인물은 파스칼 1세. 남들보다 조금 늦게 말을 시작했지만, 또래의 누구보다도 빨리 걸었다고. 악기에는 재능이 없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고, 농업이나 사냥에 대해서도 빨리 익혔으니 좋은 영주가 될 자질이 있다.”

아폴로니아의 입에서 녹스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조금 전 그의 정체조차도 몰랐던 점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녹스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녀를 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정확했다.

“……라고, 시드가 말해 줬었어.”

그녀는 말을 마치고 다시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와 달리 그녀의 눈빛에는 어떤 비난도, 적의도, 분노도 없었다. 오히려 약간의 안타까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뭐?”

녹스가 입술을 떨다가 멍한 표정으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조금 전과 달리 억울함도, 분노도, 비아냥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드는 네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았거든.”

아폴로니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시드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너에 대한 이야기는 사소한 것도 다 기억했어. 매년 생일에는 직접 편지를 써서 내게도 보여 줬지. 무뚝뚝한 성격 탓에 길게 쓴 편지는 다 찢어 버리고 짧은 문구만 보냈지만 나름대로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네가 뭘 배웠는지, 앞으로 뭘 가르칠지에 대해서 백작 부인과 하루에도 몇 통씩 편지를 주고받았어.”

아폴로니아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는 너와 부인을 사랑했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녹스는 앉은 자세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덧붙였다.

“녹스, 미안해. 너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아 가서.”

그녀가 말을 맺었다.

몇 분 동안 세 사람의 귀에 들린 것은 빗소리뿐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 녹스가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돼…….”

그는 고개를 떨구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눈에는 얼핏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바닥을 짚었던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정말이야.”

아폴로니아의 대답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입술을 꽉 깨문 것이 보였다.

“그게,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윽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며 다시 고개를 들어 아폴로니아를 마주 보았다.

“그동안 왜 아무 도움을 주지 않았지? 아버지가 당신을 살리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알면서, 왜…….”

“그건 백작 부인의 뜻이었어.”

아폴로니아가 입술을 살짝 떨며 말했다.

“시드가 죽은 이후로 몇 번이나 찾아가려 했지만 부인은 양쪽 모두에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거절했어. 금전적 도움도 마찬가지야.”

그녀는 점점 더 가라앉아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5년 전 자신이 바이안 백작 부인에게 보냈던 수십 통의 편지를 떠올렸다.

“남편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나를, 자신 때문에 위험하게 만들 수 없다며 모든 연락을 거절했어. 그래서.”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떨구었다가 다시 들며 말했다.

“난 조금만 더 기다리기로 했어. 위험이 사라지고 당당히 너와 부인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변명이야! 마음먹으면 도울 방법은 있었다.”

녹스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프게 웃었다.

“하나 있었지. 그것밖에 해 주지 못한 게 미안하지만.”

“뭐?”

“루실 에드먼드. 그 이름을 알지?”

그 이름을 들은 녹스가 다시 한 번 얼어붙었다.

“그, 그건……. 우리 집에 후원을 해 주었던.”

“그래.”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나는 금전적으로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어. 내 이름으로 된 후원을 거절한다면 다른 이름으로 하면 될 거라고 판단했지. 부인의 친척에게 연락이 닿았을 때 나는 드디어 그녀에게 약간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었어. 부인은 정말로 최소한의 지원만을 받고 나머지를 거절했지만…….”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충격 받은 녹스의 눈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녹스. 조금만 더 기다려 주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너를 먼저 찾았어야 했는데.”

그녀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심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게만 말해 주지 않았군.”

녹스가 한숨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부인은 아마 그게 너를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하아…….”

녹스는 한숨을 쉬고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고는 조금씩 몸을 떨며 큭큭거리기 시작했다. 이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조소였다.

“……아니,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지. 진짜 복수의 대상은 당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녹스는 한탄 섞인 말을 이었다. 웃음소리와 대조되게도 그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배어 있었다.

“알고 있어. 집안이 몰락한 것도,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당신을 지켜야 했던 것도 다 황제와 리페르 공작가 때문인 것을. 하지만 별수 있나. 그들을 직접 잡아다 죽일 수는 없잖아. 당신에게라도 분풀이를 하고 싶었는데…… 바보 같은 짓인 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쓸데없는 짓이었을 줄이야.”

그는 오두막의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럼?”

녹스가 힘없이 내뱉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려고?”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옛날 일은 옛날 일이고, 이제 난 당신을 납치한 납치범이잖아. 이대로 나를 살려 둘 거야?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래?”

그는 도발하듯 아폴로니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녹스를 보았다.

“살려 둘 거야.”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한층 또렷해져 있었다.

“너 어차피 날 죽이지도 못할 거였잖아.”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녹스의 눈이 더욱 동그란 모양으로 변했다.

“검을 목에 갖다 대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으면 말 다 한 거지. 스스로 자각을 했든 안 했든, 넌 그냥 네 이야기를 내게 하기 위해 날 이리로 데려온 거야. 사실 그냥 황궁으로 찾아와도 됐을 텐데.”

“그건…….”

“녹스, 난 네 아버지를 다시 살려 낼 수 없어. 하지만…….”

아폴로니아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복수는 약속할 수 있어.”

녹스는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앞으로 1년이라고 했나? 부인에게 남은 수명이.”

녹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 네가 조금 전 말한 사람들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해 줄게. 물론 그와는 별개로 부인에게는 가장 좋은 의사를 구해다 줄 거야. 이번에는 거절을 듣지도 않을 거고.”

아폴로니아의 말에 녹스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는 경계가 걷히지 않았다.

“복수할 수 ‘있도록’ 해 준다라……. 결국 나에게서도 아버지와 같은 충성을 요구하는 것 아닌가?”

“물론 도와준다면 일은 더 쉽겠지. 네 능력은 아까도 봤으니까. 창을 주로 다루면서 유리엘과 몇 합을 겨룰 정도로 검술이 뛰어나다면 넌 제국에서 손에 꼽을 실력자야. 하지만 충성은 기대하지 않아.”

“그게 무슨…….”

“나를 돕든 말든 원하는 대로 해. 중간에 백 번을 배신해도 괜찮아.”

아폴로니아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녹스의 눈이 커졌다.

“시드에게 진 빚은 그걸 덮고도 남을 정도로 크니까.”

아폴로니아는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기사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사실 지난 몇 년간 시드는 단 한 번도 그녀의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녹스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시드의 얼굴을 한 그의 분신. 분명 다른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녹스는 그녀의 기사가 남기고 간 그의 한 부분이었다. 시드를 다시 만난 것만 같은 울림이 가슴 속에 느껴졌다.

“그러니까 일단 여기서 나가자. 아직 할 일이 많아.”

아폴로니아가 천천히 녹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은 녹스가 잡아 주기를 바라는 듯 그의 가슴 앞에서 멈추었다.

“……바보 같은 사람들이야. 당신이나 아버지나.”

녹스가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노을을 닮은 아폴로니아의 눈동자를 떠나지 못했다.

“쓸데없이 남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버지도, 이렇게 위험한 상황을 겪어 놓고 나를 놔주는 당신도.”

그는 느릿느릿 손을 뻗어 아폴로니아의 손을 맞잡았다.

“마음대로 해. 복수가 끝나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면 난 정말로 당신을 해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살리겠다면 알아서 해.”

“기다렸던 답이야.”

아폴로니아가 조금 전보다 짙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잠시 손을 맞잡은 채 가만히 있었다. 바깥의 빗소리가 다시 한 번 오두막 안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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