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6. 새로운 불씨 (2)(4권) (22/34)

Chapter 6. 새로운 불씨 (2)

연회가 끝난 뒤 패리스는 자신의 궁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회를 위해 갖춰 입었던 흰 제복을 벗지 않은 상태였다.

“오셨습니다.”

시종이 말과 함께 한 남자가 들어서자 패리스는 예를 갖추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시종의 안내에 따라 들어온 이는 포트러스 후작이었다. 도착이 늦어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그를, 패리스가 특별히 초대해 차를 대접하는 것이었다.

이는 황제의 지시였고, 원래는 페트라의 생각이었다. 포트러스 후작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산가이자 세력가였다. 대대로 내려오는 군수 사업을 키우고 불린 그는 선황 대에나 가이우스 황제의 치세에나 만만치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과거 가이우스가 즉위하면서 가장 공들여 자기편으로 포섭했던 것도 바로 선대의 포트러스 후작이었다. 당시 제국에서 가장 강한 사병을 가졌던 그는 많은 대가를 받고 가이우스를 지지했으며, 세력 교체에서 큰 축을 담당했다.

그의 아들인 가브리엘 포트러스는 약 3년 전에 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선대와 달리 황제와 패리스를 상대로 친분을 유지하면서도 완전한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마치 한 걸음 물러서서 그들을 관찰하는 것 같았다.

황제도, 페트라도 그를 압박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그들은 가브리엘 포트러스를 완전한 우방으로 포섭하고자 했고, 패리스 또한 그에게는 특별한 대우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판단에는 측근으로 삼았던 핵심 귀족들 중 몇이 최근 지나친 비리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워졌다는 점도 작용했다.

“기다리고 있었네.”

“늦은 시간에 직접 환영해 주어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강한 턱선과 짙은 눈썹이 특징인 그는 마흔 정도의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잘 다듬어진 수염은 원래 강골인 그를 더욱 단단해 보이게 만들었다.

포트러스 후작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예에 어긋나지는 않으나, 다른 귀족들보다 훨씬 가벼운 예였다. 그는 카엘리온의 등장으로 골머리를 앓는 패리스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듯했다.

“후작이 수도에 오는데 얼굴을 보지 않을 수야 없지.”

패리스가 반갑게 말하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그는 짧은 인사말을 하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황태자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해 온 것인지, 그의 얼굴에는 벌써 미세한 피곤함이 서려 있었다. 패리스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 듯 그에게 차를 권했다.

“이거 황송하군요.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자주 들르도록 하게. 후작은 제국의 중요한 인재니까. 앞으로도 볼 일이 많았으면 좋겠군.”

그는 페트라가 사전에 조언한 대로 말했다.

“사냥을 즐긴다고 들었네. 희귀한 사냥감이 산처럼 쌓여 둘 곳이 없다지.”

“민망하지만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 수집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까요.”

포트러스 후작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실제로 그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신수로 취급받는 황금빛 말이며 은빛 뿔을 가진 사슴을 그는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길들였고, 길들일 수 없다면 죽여서 박제했다.

“언젠가 황실 소유의 사냥터로 초대하도록 하지.”

“그렇게 해 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그들은 한 시간가량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서로에게 진심 어린 호감은 없는 두 사람의 사담은, 주로 사업 이야기 또는 의미 없는 칭찬, 은근한 자랑 같은 것이었다.

“사실 후작을 부른 것은 제안할 것이 하나 있어서야.”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고 판단될 무렵 패리스가 말했다. 소파에 기대앉아 있던 후작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경청하겠다는 것이었다.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것이 무척 명예로운 자리라는 건 자네도 알고 있겠지.”

후작이 빙긋 웃었다. 황실의 카드는 이것이었나.

“그 자리가 조만간 빌 예정이야.”

“그 자리는 브로넨 백작이 맡고 있는 걸로 압니다만.”

“지나친 업무 태만으로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네.”

패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황실의 측근 중 하나인 브로넨 백작은 과거 황제의 전우였던 덕에 황실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었고, 나름대로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많은 양의 뇌물을 받고 친우의 아들을 기사단에 넣어 주었다는 혐의가 알려지면서 입지가 불안해진 상황이었다.

황제와 페트라는 그 점을 신경 쓰고 있었다. 황제 등극 후로 황실 기사단장직은 몇 차례 교체가 되었으나, 도무지 그 역량이 되는 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몇 년 전 유리엘 비체가 사냥 대회의 우승자로 떠올랐을 때, 페트라는 그를 기사단에서 키울 계획을 하기도 했었다. 미래에 황실 기사단장을 맡기는 것도 그녀의 머리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유리엘 비체가 대공의 충성스러운 봉신으로 남기를 고집하면서 틀어졌다. 몇 차례의 암살 시도를 유리엘이 막으면서, 그는 페트라의 가장 큰 골칫거리로 둔갑해 버렸다.

“그 자리를 채울 사람을 찾다가 생각이 나서 불렀네.”

패리스가 은근하게 말했다. 역량이 되는 인재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면 아예 도움이 되는 자를 거기에 앉히자는 것이 페트라의 차선책이었다.

이는 대단한 제안이었다. 황실 기사단장은 황실 내에서 가장 빨리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을 장악한 사람이었다. 즉, 명예와 권력 모두를 쥘 수 있는 요직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라. 즉, 권력의 중심에 서라는 것이었다.

“후작은 수도를 떠난 지 오래지만 한때는 기사단에 몸담았던 경력이 있지. 그렇다면 자격은 충분해.”

패리스는 더욱 노골적으로 말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이런 명예를 누릴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황실 기사단장은 꼭 황제파로 채워야만 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후작이 이 제안을 승낙한다면 황제와 패리스는 향후 몇십 년간 강력한 우방을 옆에 둘 수 있는 것이었다.

“감사한 제안이지만.”

후작이 말했다. 패리스의 예상과 달리 그는 그 제안에 대단한 감명을 받지 않았다.

“저는 사냥에나 심취했지, 기사단의 운영에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돈과 권력이 이미 충분한 지금,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모아 곁에 두는 것은 기사단 나부랭이보다 중요했다.

또한 그는 친황제파 귀족의 선두로 설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에핀하르트 대공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굳이 막대한 비용을 부담해 가면서 패리스를 도울 원동력이 없었던 것이다.

“늦은 시간이니 일어나 볼까 합니다.”

당황한 패리스의 얼굴을 보며, 포트러스 후작이 반쯤 소파에서 일어나려 한 순간이었다.

“전하, 차를 새로 가져왔습니다.”

포트러스 후작의 등 뒤, 문 쪽에서 들린 여인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자극했다. 흔하디흔한 시녀의 보고였으나 그 음성은 묘하게 나른하고 달콤했다.

“아모레타, 이런 것은 네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패리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까 전하를 충분히 보지 못했는걸요.”

여인은 애교스럽게 말했다. 조금씩 가까이 오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들어도 특별했다.

“이리 두고 나가도록 해. 앞으로는 이런 것 하지 말아라.”

패리스의 핀잔을 들으며, 포트러스 후작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전신이 마취라도 당한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미녀를 수없이 보고, 또 품어 보았다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그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모레타라고 했던가. 벨라임이 분명한 그녀는 인간보다는 여신, 아니 인간을 홀려 영혼을 훔치는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신이 조각해 만들어도 그보다 완벽할 수 없을 얼굴, 노력하지 않아도 유혹적인 자태, 패리스를 보며 입가에 띤 미소까지도.

“그럼 먼저 들어가겠어요.”

그녀는 간단히 인사하고 들어온 문을 통해 나갔다. 그러나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후작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후작.”

“……”

“후작?”

패리스의 반복되는 물음에 그는 정신이 들었다.

“새로 들어온 내 시녀일세.”

패리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포트러스 후작은 여전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패리스는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웃으며 말했다.

“원한다면 벨라 여인들을 찾아서 소개해 주지. 후작은 몇 년 전 부인이 죽었다고 들었으니 시중을 들 시녀가 조금 필요하겠지.”

그러나 후작의 귀에 패리스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단순한 벨라 여인 몇 명 정도는 그도 질릴 만큼 품어 보았다.

“……전하.”

포트러스 후작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패리스를 만난 후로 가장 진지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지?”

“원하시는 것이 포트러스가의 조건 없는 지지가 맞습니까?”

긴 대화에도 슬쩍 피해 왔던 주제를, 그는 노골적으로 언급했다. 패리스의 눈이 커졌다.

“맞네. 즉위 후에도 내게 충성할 강력한 지지자가 필요하니까.”

“전하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귀족들이며 백성들로 하여금 전하를 찬양하게 하려면 자금도 필요하시겠지요. 루완 상단이 끝없이 돈을 뱉어 내지는 않을 테니까요.”

조금 전까지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어보였던 그의 눈은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사실이네. 도움은 클수록 좋으니까.”

포트러스 후작이 무언가 결심하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다 드릴 수 있습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패리스가 반색하며 물었다.

“한 가지 조건만 들어주신다면요.”

“그게 뭐지? 단장직을 원한다면 그건 당연히…….”

“기사단에는 관심 없습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요.”

포트러스 후작은 그런 것은 하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패리스를 마주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아모레타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는 자신의 진지함을 알리려는 듯, 미동 없이 패리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동안 부딪혔다. 그리고……

쾅!

포트러스 후작의 몸은 한순간 벽에 밀쳐졌다. 그의 옷깃이 패리스의 손아귀에 잡힌 상태였다.

“……아모레타는 내 시녀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자네도 알 거라고 생각하네.”

사나운 사자 같은 모습으로 패리스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불같은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녀라고는 하나 조금 전 아모레타의 말투에서, 패리스와 그녀의 연인 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었다. 황태자의 연인을 제게 달라니, 불경도 이런 불경이 없었다. 지위를 막론하고 참아 주기 어려운 언사였다. 그의 멱살을 잡은 패리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전하.”

포트러스 후작은 조금의 후회도 없는 표정으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패리스가 그의 말을 막았다.

“아무리 스스럼없는 사이라도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지.”

그는 서늘한 협박과 함께 천천히 손을 놓아 주었다. 다혈질인 성격상 그를 당장 잡아서 지하 감옥에 처넣고 싶었지만 지위를 보아 참을 수밖에 없었다.

“후작의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네.”

패리스는 여전히 식지 않은 분노를 눈에 담은 채 문을 가리켰다. 이제 가 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후작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상의를 정리할 뿐이었다.

“갑작스럽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전하.”

그는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저의 제안은 전하의 등극 전까지 유효할 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처음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깊숙이 허리를 숙여 패리스에게 예를 갖추고 문 뒤로 사라졌다. 패리스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두운 복도에서 번뜩이는 포트러스 후작의 눈에는 타는 듯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 * *

페트라는 황제의 서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드나들었던 곳이자, 몇 년 동안 황비들이며 황녀인 아폴로니아를 제치고 황궁의 안주인 노릇을 해 온 페트라 자신이 가구를 배치하고 장식까지 담당한 공간이었다.

10년이 넘도록 황궁 살림에 관여한 그녀는 궁의 구석구석이 손바닥처럼 익숙했다. 아폴로니아가 거주하는 별궁 정도가 예외였지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황녀가 그렇듯 별궁 또한 있으나 마나 한 공간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날 서재의 모습은 이상하게 달랐다. 얼핏 보면 익숙한 모습 그대로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새로웠다.

‘대체 뭐가…….’

페트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책장 사이의 벽, 정확하게는 벽에 걸린 그림에서 멈추었다.

‘내가 고른 것이 아니다.’

페트라는 예술 작품의 특성이며 여러 작가의 이름을 훤히 꿰고 있었지만 그에 감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림을 장식할 일이 있으면 특색이 강한 작품보다는 무난한 풍경화, 또는 웅장한 건물 그림을 선호했다. 또는 정치적인 의미를 담아 초상화를 걸기도 했다. 황제의 젊은 시절 모습을 담은 그림도 그녀가 흔히 하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 벽에 걸린 것은 작고 앙증맞은 검은 고양이가 털실을 가지고 노는 유화였다. 페트라는 절대로 고르지 않을.

‘대체 누가?’

감히 누가 그녀의 허락 없이 황궁의 장식을 건드렸단 말인가. 그것도 그녀가 싫어할 만한 취향으로.

페트라의 눈이 다시 서재를 훑었다. 이번에는 책장 속 책들이 눈에 거슬렸다. 역사며 정치, 외교, 경제. 황제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지식으로 가득한 책장에 페트라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연애 소설 몇 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근에 건드린 듯, 책장 안에서도 잘 보이는 위치였다.

“설마......?”

페트라가 미간을 찌푸리고 책을 노려보는 사이, 시종이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 공작 부인. 폐하께서 조금 늦으신다고 하십니다.”

“알고 있다. 굳이 다시 보고할 필요 없어.”

페트라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러나 시종은 우물쭈물하며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지?”

“저, 세타 님이 서재에서 책 한 권을 가져가겠다고 오셨습니다.”

페트라의 눈이 커졌다. 황제는 서재에 사람을, 특히 여인을 함부로 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페트라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이었다.

“……폐하께서 계시지 않으니 나중에 오라고 해라.”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저, 죄송하지만…….”

시종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뭐지?”

“폐하께서 세타 님은 언제든 서재에 출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폐하의 직접적인 명령이 없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요.”

시종은 최대한 페트라의 눈치를 보며 부드럽게 설명했다. 그의 설명을 듣는 순간, 페트라는 서재의 장식을 누가 건드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이 황제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여인, 세타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페트라는 다시 한 번 거슬림을 느꼈지만 곧 스스로의 마음을 평온하게 다스리며 대답했다.

“......알겠다.”

더 이상 세타를 무시하거나 피할 수만은 없었다.

페트라의 대답이 떨어지자 시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물러났다. 그 뒤로 들어서는 것은 검은 곱슬머리에 뺨에 주근깨가 있는 여인이었다.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그녀는 페트라를 보고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두 사람의 유일한 사적 만남은 페트라가 새로운 법안을 들고 황제를 찾아왔다가 거절당하고 그 탓을 간접적으로 세타에게 돌린 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이 기억에 없는 듯 순수하게 반가운 표정이었다.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군.’

페트라는 속마음을 감추며 부드럽게 그녀를 맞았다. 그녀는 이 기회에 세타를 가늠해 볼 생각이었다.

“폐하를 모시느라 고생이 많군.”

“고생은 공작 부인께서 하고 계시죠.”

세타는 흠 잡을 곳 없는 예의로 페트라에게 인사했다.

“수도 근방에서도 기승을 부리는 마물이며 황실 기사단장을 임명하는 일로 심려가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세타의 말투는 공손하고 상냥했으나, 예상치 못한 내용에 페트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폐하께서 그 이야기를 네게 했다고?”

황실 기사단의 단장은 아직 공석이 아니었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일을 시녀에게 흘리는 것은 황제답지 않았다. 요직이 공석이라는 소문을 들은 귀족들이 세타를 통해 청탁을 넣을 것이 뻔히 짐작되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 그저 풍문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세타는 허를 찌르는 페트라의 질문이 당황스러웠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페트라의 눈을 피하며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포, 포트러스 후작께서 황태자궁에 다녀가셨다고도 들어서요.”

그 말을 들은 페트라의 얼굴에는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세타는 포트러스 후작의 방문이 황실 기사단장직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다. 이는 시녀들 사이의 풍문으로는 전달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단한 연줄이 있거나, 정세를 오랫동안 관찰해 왔거나, 그게 아니라면 역시…….

“폐하께서 너를 완전히 신뢰하시나 보구나.”

페트라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재빨리 세타의 얼굴을 관찰한 페트라는 그녀의 당황스러운 표정에서 그 말이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제를 제외하면 세타에게 그런 말을 해 줄 사람은 없었다.

의심이 많아 페트라를 제외한 누구도 온전히 믿지 않았던 황제지만 세타에게는 굳건한 신뢰를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 세타와의 첫 만남에서 느꼈던 위협적인 기분을 페트라는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었다.

“그게, 저…….”

“됐다. 폐하께서 신뢰하시는데 무엇이 걱정이지?”

세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황제가 비밀리에 상의한 문제를 페트라에게 흘려 버렸다는 사실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점은 묘하게 페트라의 심리를 자극했다. 황제는 페트라에게 무언가를 비밀로 하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페트라는 몇 마디 질문에 속을 보이는 세타와 달랐다. 그녀는 인내를 아는 사람이었고, 적의를 숨기고 상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줄도 알았다.

페트라는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장 사라지지 않을 사람이라면 일단 세타를 호의적으로 대해야 했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며 쓸데없는 다툼은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앞으로는 네가 더욱 바빠지겠구나.”

그녀는 팔목에 차고 온 팔찌 중 가장 화려한, 청록빛 토파즈에 은장식이 있는 것을 빼냈다.

“작은 성의니 받거라.”

“이, 이건 너무 값진 물건이에요.”

세타는 거절하면서도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페트라는 빙긋 웃으며 팔찌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유명한 장인이 세공한 것이니 황실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지. 그냥 선물이라고 생각하렴.”

페트라는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께서 많이 늦으시는 듯하니 다음에 오겠다고 전해 드려. 오시더라도 아마 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시겠군.”

그녀답지 않은 친절과 배려에 황망해하는 세타를 두고 페트라는 다시 한 번 미소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욱 가까이 두어야 하는 법이었다.

그녀를 처리할 수 있을 때까지.

* * *

“......저, 세타 님, 누군가가 오셨습니다.”

한 시간 후, 서재에서 방으로 돌아온 세타에게 시종이 말했다.

“들여보내 주세요.”

그녀는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는 듯, 누군지 묻지 않았다.

“세타 님.”

인사하며 들어서는 사람은 아드리안이었다. 언제나 친절해 보이는 그녀의 녹색 눈이 웃고 있었다.

“전하께서 지난번 연회 때 세타 님과 인사하다가 물건을 떨어뜨리셨다고 하셔서요.”

“푸른색 손수건 말씀이시군요.”

세타는 기다렸다는 듯 서랍을 열어 손수건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사실 아폴로니아의 물건이 아니었다. 다만 의심 없이 아드리안과 만날 핑계로 쓰기 위해 보관해 두었던 여러 수단 중 하나였다.

“오신 김에 차라도 한잔하고 가세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시종을 물리고 아드리안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때마침 잘 오셨어요. 방금 리페르 공작 부인이 왔다 가셨거든요.”

아드리안은 찻잔을 내려놓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직접 만나셨어요?”

“네. 그쪽에서 원하는 것 같더군요.”

세타는 여유롭게 웃었다. 그녀는 무서운 속도로 황궁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아폴로니아의 훈련 덕에 황제의 심사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조금 전의 경험으로 그녀는 페트라를 상대하는 방법도 조금 알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요?”

“황실 기사단장직에 포트러스 후작을 앉히려 한 것이 맞았어요. 예전에 황녀 전하가 추측하신 대로예요.”

페트라는 당연히 알 수 없었지만, 황실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브로넨 백작이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도, 황제가 그 직위를 포트러스 후작에게 제안해 제 사람으로 끌어들이려 할 것도 아폴로니아가 세타에게 미리 알려 줬던 사실이었다.

세타는 조금 전 페트라의 반응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빙긋 웃었다.

“떠보니 그대로 얘기하던가요?”

아드리안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아는 페트라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간단히 언급했더니 폐하께 들었을 거라고 추측하더군요. 그럴 수밖에요. 무희 출신에 정치에 어두운 제가 그런 일을 직접 추측해 낼 리도 없고, 대외적으로는 저에게 그런 것을 알려 줄 사람도 없으니까요.”

페트라의 처음 생각대로, 황제는 세타와 정치에 대한 문제를 직접 상의하지 않았다. 세타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정치적인 비밀을 연인과 쉽게 나누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요?”

“솔직하게 얘기했죠. 소문으로 들은 거라고요. 황녀 전하께 들은 것도 일종의 소문 아니겠어요?”

세타가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분명히 페트라의 추궁에 ‘풍문으로 들었다’고 대답했으니까. 다만 그 태도가 부자연스러웠을 뿐이었다.

“전하의 말씀이 옳아요. 의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의심할 거리를 줘야 한다는 것이요. 일부러 말을 더듬었더니 폐하께 직접 들은 것이라고 결론을 짓더군요.”

아드리안이 잠시 감탄한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그걸 실행에 옮기다니, 전하도 그렇지만 당신도 대단해요.”

“저처럼 온갖 사람을 겪고 나면 이간질에도 능하게 된답니다.”

세타는 자랑인지 자조인지 모를 말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지만, 마음은 멀쩡하지 않을 거예요. 폐하와 비밀리에 상의한 내용을 제가 안다는 것은 배신감을 안겨 줄 수밖에 없죠. 그런 것이 쌓이고 쌓이면 두 사람 사이의 균열은 커질 테고요.”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때 페트라가 선물한 팔찌가 손목에서 짤랑거렸다. 아드리안의 시선이 그녀의 팔목에 꽂혔다.

“공작 부인이 전략을 바꾸었나 보군요. 선물을 한 걸 보니.”

“이걸 아시나요?”

“아주 오래전, 부마였던 황제 폐하께서 공작 부인께 선물했던 물건이에요.”

아드리안이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귀한 물건을 제게 주셨다는 건…….”

“아뇨, 값어치는 대단하지 않아요.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공작 부인은 시녀의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진정 귀한 물건을 주지 않으니까요. 보기에 화려하지만 중요한 자리에 착용하는 것은 아니에요. 폐하께서 준 여러 선물 중 하나였을 뿐이죠.”

“그럼 왜……?”

이번에는 세타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반면 아드리안은 다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전하만큼은 아니지만 공작 부인의 심사는 저도 웬만큼 알죠.”

아드리안은 씁쓸하게 웃더니 대답했다.

“당신이 그걸 차고 있는 모습을 폐하께서 보기를 바라는 거예요. 결국 폐하의 여인을 챙기는 것도 공작 부인이다, 뭐 그런 뜻이요. 지난번 만남이 어색하게 끝났으니 더더욱 폐하에게 잘 보이고 싶겠죠.”

세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페트라는 목적 없는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황제가 세타의 손목에 찬 팔찌를 보았다면 그는 잠깐 소원해졌던 누이를 더욱 가까이 여기게 될 것이었다.

“그럼 차지 말아야겠군요.”

세타는 아드리안에게도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며 팔찌를 손목에서 뺐다. 잊을 뻔했지만 순진해 보이는 이 녹안의 아가씨는 아폴로니아의 결혼을 세 번이나 뒤엎은 전적이 있었다.

“음, 한 번 줘 보시겠어요?”

아드리안은 팔찌를 받아 자세히 살폈다. 그러고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오래된 물건인데다 원래 상등품은 아닌지라 흠집이 있군요.”

그녀는 다과 옆에 놓여 있던 작고 날카로운 나이프를 잡았다.

스윽.

“어머!”

세타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아드리안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팔찌의 토파즈를 긁어 내렸다. 눈에 거의 보이지 않던 흠집이 미세하게 커졌다. 멀리서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피면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저 또한 이간질에 대해서 조금은 안답니다. 파혼을 세 번 성공시키는 것도 결국은 이간질의 일종이니까요.”

아드리안은 방금 한 행동을 잊었는지 순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계속 차고 다니세요.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폐하께서 보실 일이 있을 거예요.”

“……흠 있는 물건을 제게 선물했다는 점을 알리라는 거군요.”

세타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시녀는 주인을 닮는다더니, 아드리안이 방금 한 행동은 아폴로니아를 빼다 박은 듯 대담하고 영리했다. 황제가 팔찌를 자세히 본다면 그는 페트라가 마음속으로 세타를 무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뭐, 사실이니까요. 말했지만 바로 눈에 띄지는 않을 거예요.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 그런 계획이죠.”

그녀는 조금 전 세타가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의식중에 아드리안은 세타를 라테아 부부에게 얻어맞는 가련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세타는 아드리안을 공손하게 아폴로니아의 명령을 따르는 예쁜 시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짧은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만큼이나 교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보석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세타는 서랍을 열어 다른 팔찌 하나를 꺼냈다. 얇은 은줄에 작고 붉은 보석이 박힌 것이었다. 루비보다 더 투명하고 찬란한 빛을 내는 그 보석은 가치를 따지기도 어려운 붉은 다이아몬드였다.

“아까의 것과 달리 흠 하나 없더군요. 이걸 자주 하고 다니면 될까요?”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아폴로니아가 이데나 상단의 이름으로 세타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전하께서는 이데나 상단주로서는 폐하의 신뢰를 사고 싶어 하시니까요.”

세타는 팔찌를 받는 순간 그것이 다음 계획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아폴로니아 또한 이유 없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드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물은 그저 선물이에요, 세타 님. 그저 아름다운 손목에 어울릴 것 같아서 드린 거니 팔아서 쓰시든 자주 착용하시든 세타 님의 선택이랍니다.”

조금 전 계산적이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아드리안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호의가 가득 담긴 순수한 미소로 세타에게 말했다.

“폐하의 호의는 전쟁 때 황태자 전하께 무기를 제공한 것으로 충분히 샀으니 팔찌는 그냥 편히 쓰도록 하세요. 그게 전하의 뜻이에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찻잔을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께서는 세타 님을 좋아하신답니다.”

아드리안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떴다. 세타는 조용히 자리에 남아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전하께서는 세타 님을 좋아하신답니다.”

영리한 아드리안은 세타의 환심을 살 수 있다는 계산하에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아드리안의 태도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폴로니아가 세타를 꾸준히 존중하고 신뢰한다는 것은 행동에서 언제나 드러나고 있었다.

살면서 그런 사람이 있었나?

세타는 두 팔찌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화려하고 크지만 귀하지 않은 것, 작지만 세상에서 보기 드문 귀한 것. 두 가지 보석은 페트라와 아폴로니아가 각각 그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세타는 남은 차를 후룩 마시고 빙긋 웃었다.

돈과 보석, 명예와 권력. 모두 그녀가 살면서 막연하게 원했던 것들이었고, 이제 그중 상당 부분이 손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세타의 마음속에는 그것들보다 더 소중한 누군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폴로니아. 그녀가 무엇을 계획하든, 세타는 그녀를 도울 생각이었다.

* * *

“그래서, 만났어요?”

에반젤린이 물었다. 그들은 동궁 안, 에반젤린의 방에 모여 있었다. 동궁에 많은 장소가 있었지만 에반젤린의 방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마 마물 때문인 것 같았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는 좋았다.

“패리스가 기사들을 여럿 데리고 왔다면서요. 벨라가 여러 명이던데요. 그중…….”

“없어요.”

아폴로니아가 딱 잘라 말했다.

“없다니……. 에반젤린의 정보가 잘못됐다는 말씀이십니까?”

카엘리온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반젤린을 부담스러워 하는 그였지만 그녀의 정보가 틀렸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에반젤린은 그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아니. 아주 정확했어. 다만 그 벨라들 중에는 없었던 거지.”

아폴로니아는 방에 있는 세 사람에게 아모레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 만남부터 연회 날의 재회까지.

“말도 안 돼. 그 새로 온 시녀요?”

에반젤린이 입을 쩍 벌렸다. 그녀는 여러모로 야생 동물을 연상시켰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특유의 매너도 그 특징 중 하나였다.

“일종의 연막이로군요.”

유리엘이 말했다.

“맞아. 꽤 치밀하지. 아모레타의 외모를 본 사람들은 그녀가 상단을 책임지는 주술사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텐데도 그만큼 신경을 쓴 거야.”

에반젤린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녀, 다시 한 번 제안하고 싶어요.”

아폴로니아가 에반젤린을 향해 말했다. 에반젤린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마일론의 눈’ 전체를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요. 내가 다스릴 수 없다는 걸 알겠으니까.”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에반젤린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서렸다.

“하지만 나는 그에 상응할 정도로 많은 정보가 필요해요. 연회에서 보았던 세 명의 귀족들에게도, 아모레타에게도, 페트라 리페르와 황제, 그리고 패리스에게도. 사람을 붙여 그들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요. 단순히 어디선가 모인다는 것을 넘어서 개인적인 생각이며 일상적인 대화까지도.”

당신이 나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아폴로니아는 속으로 덧붙였다.

에반젤린이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어려울 것 같아요.”

“불가능하다는 건가요?”

“아뇨.”

에반젤린이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전하.”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제가 가진 정보원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모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숫자에서 한계가 있죠. 말하자면…….”

그녀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너무나 많은 정보를 주고 싶지는 않다는 듯.

“라만트의 여왕을 탐색하려면, 파나스의 국왕은 한동안 내버려 둬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이건 정보원들의 한계뿐 아니라 제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해요.”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조금은 아는 사실이었다.

‘마일론의 눈’은 어떤 인물에 대해서 공적인 영역부터 사적인 영역까지, 그 자신도 몰랐던 정보를 털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보망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이상, 그녀의 정보원들이 매 순간 세상 모든 이를 그 정도로 자세하게 지켜볼 수는 없는 것이 당연했다.

에반젤린이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요청하신 모든 것을 한다면, 다른 곳에 보내 놓은 자들을 철수시켜야 해요. 그러니까, ‘마일론의 눈’을 전체적으로 움직여야 하죠.”

그녀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께서 요청하신 것은 단순히 하루 이틀의 조사가 아닌 것으로 보이고, 결국 그 지시는 ‘마일론의 눈’을 일정 기간 전하께 넘기라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가 힐끗 카엘리온을 보았다.

“……저는 원하는 대가를 받지 않으면 정보를 팔지 않아요. 예외 같은 건 없죠.”

에반젤린으로서는 무척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녀의 의사는 명확했다. 가능은 하나, 거절한다는 것이었다.

카엘리온을 주면 모를까.

에반젤린은 조금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폴로니아의 눈치를 살폈다. 지난번의 만남으로 그녀는 아폴로니아를 조금 무서워하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살짝 미소 지으며 일어섰다. 어떤 불만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 요청까지 쉽게 들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일단은 전과 비슷한 정도만 도와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도록 하죠.”

“그, 그런가요?”

에반젤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유리엘도 아폴로니아를 따라서 일어섰다.

“나는 왕녀와 잘 지내고 싶으니까요.”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에반젤린은 기인이고, 가끔 이기적이고, 카엘리온을 상당히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폴로니아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미친 듯한 학구열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 같은 것이 있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녀를 돕고 싶었다. 더 적극적인 협조는 시간을 두고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참, 그리고 대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폴로니아가 문을 나서기 전 생각난 듯 말했다.

“곧 레스틴 백작으로부터 라잔의 국왕에게 사업 제안이 갈 거예요. 황실과도 관련이 깊은, 철강 사업권에 대한 이야기죠. 오랫동안 레스틴 백작이 맡아 왔던 일이고, 이번에는 이데나 상단도 약간의 도움을 주기로 했죠.”

에반젤린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잔에게도 유리한 일이니 성사되어야 해요. 혹시 그들과 연락하고 있다면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하세요. 함정 같은 건 없다고. 그렇게 하면…….”

아폴로니아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 이어 말했다.

“중요한 사업이 걸려 있게 되니, 황실에서 당신을 아주 함부로 대할 수는 없게 되겠죠. 프리야도, 당신도 무사할 수 있어요.”

에반젤린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진심으로 환호하고 있었다.

“저, 정말인가요?”

“물론 이건 지난번의 약속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아까 요청한 일을 들어주지 않으리란 건 아니까요. 그럼.”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을 앞세워 문을 나섰다. 카엘리온도 뒤따라 나갔다. 에반젤린은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눈으로 멍하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사람이야, 그렇지 않니?”

세 사람이 나가고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멍하게 서 있던 에반젤린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어디선가 끽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대답하는 것처럼.

“궁금해졌어. 저 사람이 다스리는 제국은 어떨까?”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작은 비스킷을 잘라 허공으로 내밀었다. 어디선가 작은 발톱이 나타나 그것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게걸스러운 소리와 함께 먹어 치웠다.

“내가 도와주면, 정말로 황제가 될 수 있으려나?”

그녀는 두 번째 비스킷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발톱은 두 번째 비스킷도 훅 하고 낚아챘다.

“얘! 천천히 좀 먹어라.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못 알아들어도 좀 듣는 척해 주면 안 돼?”

비스킷이 가루를 흩뿌리며 순식간에 사라지자 에반젤린은 투덜거렸다. 발톱의 주인은 변명이라도 하는 듯 다시 한 번 작게 끽끽거렸다.

“일단 조금 더 지켜보지, 뭐.”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손으로는 공중의 누군가를 쓰다듬는 것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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