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재회
승전 축하를 위한 연회장은 여느 때보다 화려했다.
실제 경위가 어땠든, 황제는 패리스의 이름으로 얻어 낸 성과를 모두에게 보여 주려 했다. 라잔에서의 일이 널리 소문으로 퍼졌기에, 더더욱 과시적인 연회를 통해 그 소문을 묻어 버리려는 계획 또한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수도는 물론 지방에서도 수많은 귀족들이 올라왔다. 연회가 아직 무르익기 전,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일찍이 도착해 연회장의 한쪽 구석에서 여러 귀족들과 사업을 논의하는 카엘리온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젊은 청년들의 사담은 주로 연애나 결혼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에 패리스 전하의 결혼 상대를 찾는다는 소문 들었나요? 혹시 로렐라이 에드윈 후작 영애도 물망에 있으려나요?”
입가에 점이 있는 갈색머리 여인이 손에 든 와인 잔을 톡톡 두드리며 티 없이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짙은 금발의 귀족 영애에게 말했다.
“그런 말씀 말아요, 라일라 영애. 로렐라이는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는 걸요.”
그녀 옆에 서 있던 적갈색 머리의 여자가 슬쩍 흘리자 로렐라이라 불린 여인은 얼굴을 붉혔다. 곁에 서있던 젊은 남녀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주고받았다.
“사교계의 꽃인 로렐라이 에드윈 영애께서 마음에 둔 분이 있으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중 갈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 한 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라일라와 닮은 그는 트리온 후작가의 장남 시몬 트리온이었다.
로렐라이와 맞추기 위해 일부러 새하얀 제복을 입고 나타난 그는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와 눈 한 번 맞추어 보지 못하고 있었다.
“부끄럽게 그러지 말아요, 제니스 언니.”
그녀가 유리엘 비체 백작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또래의 귀족들은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평민 기사 출신인 그와 대대로 권세 있는 에드윈 후작가는 지위의 차이가 컸지만 늦게 낳은 고명딸을 유독 사랑하는 에드윈 후작은 딸의 뜻을 어떻게든 이루어 주기 위해 안달이 나 있었다.
“너무 낭만적이에요! 출신도 지위도 따지지 않고 사랑을 선택하시다니. 유리엘 비체 백작님은 복도 많으시지.”
제니스가 한 마디 더 거들자 주변의 여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제니스 에멘은 자작가의 딸로, 로렐라이와는 사촌이었다.
“하지만 그분은 출신이 필요 없을 정도로 멋진걸요. 이번 전쟁에서도 혼자서 파나스 왕궁으로 쳐들어가 왕을 포로로 잡았다고 들었어요.”
“덕분에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파나스 왕국의 항복을 받아 냈다고 하죠.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서 어쩜 그렇게 멋질 수가 있는지.”
“하지만 그분은 곧 로렐라이의 부군이 되시겠죠. 다들 언감생심 이상한 생각 말아요.”
제니스가 쐐기를 박자 몇몇 여인들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도 로렐라이와 유리엘은 잘 어울렸던 것이다. 둘러선 남자들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제니스의 말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뭐, 백작 부인이 돼서 황후나 대공비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싶다면 그럴 수도 있죠.”
처음 말을 꺼냈던 입가에 점이 있는 여자, 라일라 트리온이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로렐라이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으나, 언제부턴가 서로 사교계에서 주목을 받으려는 경쟁이 붙어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도 유리엘을 만난 적이 없었기에 그에 대한 수다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마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여자들의 이상형이라도 되는 듯 말하는 제니스와 로렐라이가 무척 아니꼽던 그녀는 한 마디 일침을 놓기로 작정한 듯 비아냥거렸다.
“라일라 영애!”
“천사를 닮았든 악귀를 닮았든, 외모, 능력, 지위를 모두 본다면 에핀하르트 대공만 한 분이 없겠죠. 지위만 본다면 패리스 전하이고요. 내가 틀린 말 했나요?”
“로렐라이 앞에서 너무 무례하시군요.”
제니스는 눈을 부릅뜨고 사촌과 그녀의 사랑을 옹호했지만 라일라는 시큰둥했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로렐라이 에드윈의 아버지 못지않은 권세를 자랑하는 트리온 후작이었던 것이다.
오빠인 시몬과 달리 그녀는 로렐라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평민 출신 남편을 만나 고생하고 싶다는 분에게 뭐라고 말씀드리겠어요? 그저 에드윈 후작님이 안타까울 뿐이죠. 전투를 잘하면 뭐 하나요? 그런다고 황족과 무슨 비교가 되겠어요? 다들 비체 백작 비체 백작 하지만, 저는 솔직히 가까이 지낼 생각이 안 드는군요. 평생 마물 사냥이나 다니는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에요.”
거들먹거리며 말하는 그녀 앞에서, 로렐라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라일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소설을 너무 읽은 것 같은데, 정신을 좀 차리세요.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최소한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죠. 교양은 배운 적도 없고 천박하게 그저 전투만 아는 사람이라니……. 싸움터에서나 멋있지, 그런 사람과 어떤 대화를 할 수 있겠어요?”
안색이 하얗게 변한 로렐라이 앞에서, 라일라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게다가 지금 신세는 어떻죠? 주군으로 모시던 에핀하르트 대공 전하를 떠나 일개 호위 기사가 됐죠. 평민 출신의 한계가 아니겠어요? 선대 바이안 백작께서야 선황 폐하의 유지에 따라 전하의 호위를 맡으셨다지만 주군에게 버림받아 물건처럼 팔려간 경우는 그와 너무도 다르죠.”
“라, 라일라 영애.”
“뭐죠? 할 말이 있으면 하시지 그러세요.”
라일라는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고 말했다. 말싸움으로 자신을 이길 만한 사람이 어디 제국에 흔하던가.
그러나 왠지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의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분노와 억울함으로 붉으락푸르락해야 할 여러 여인들의 얼굴이 이상하게 행복해 보였다.
“응? 대체 무슨…….”
뒤를 돌아본 그녀는 순간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구…… 어머!”
와인 잔을 손에 들고 있던 라일라는 실수로 술을 자신의 팔이며 옷에 쏟고 말았다. 그녀가 돌아본 순간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남이 보인 탓이었다.
“조심하십시오, 라일라 트리온 후작 영애.”
조금 전의 대화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는 손수건을 꺼내 라일라에게 건넸다.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주변에 서 있던 모든 여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일라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들은 것 이상의 미남이었다. 라일라는 천천히 손수건을 받아 들고 몸에서 와인을 닦아 냈다. 다행히 투명한 색이었고 드레스는 많이 젖어 있지 않았다.
손을 움직이는 동시에,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다시 한 번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밤하늘처럼 온통 검은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무척 세련된 의상으로, 분명 마담 젠슨의 디자인이었다. 다만 손목의 커프스 버튼만은 피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서나 눈에 띄었을 밝은 은발은 깔끔하게 빗어 넘겨진 채로, 검은 옷에 대조되어 더욱 빛났다. 베일 듯한 턱선이며 짙은 푸른색의 눈은 그녀가 상상했던 유리엘의 모습과 무척 달랐다.
‘검밖에 모르는 기사라더니, 이렇게 귀티가 흐르다니?’
그녀가 아는 가장 잘생긴 사람인 카엘리온 에핀하르트 대공의 남성성 넘치는 모습과 달리, 유리엘은 길고 마른 체형에 섬세한 이목구비로, 전쟁 영웅이라기에는 너무나 예쁜 얼굴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옷에도 라일라가 쏟은 와인이 묻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와인을 쏟아서…….”
그녀는 유리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제가 조심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트리온 영애.”
분명히 거짓말이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세상에서 가장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저, 저를 아시나요?”
라일라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조금 전까지는 마치 자신이 인생 선배라도 되는 듯 로렐라이에게 잘난 척을 해댔지만, 사실 그녀도 아직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였다.
“영애의 오라버니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시몬 트리온 영식과는 지난번 전쟁에서 함께 싸웠었지요.”
그는 와인이 쏟아져 버린 라일라의 잔을 받아들며 싱긋 웃었다. 라일라의 뒤로 서 있는 영애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엘은 잔을 건넨 후 시몬을 비롯한 남자들과도 눈을 맞추고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아직 어정쩡하게 서 있는 라일라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잔에도 술이 묻었습니다. 새것으로 드리지요.”
그는 몸을 돌려 트레이 가득 와인 잔을 들고 지나가던 사용인을 불러 세우고 새로운 잔 하나를 집었다.
“괘념치 않으신다면 이 와인을 추천해 드리지요. 향은 은은하지만 색은 더 강렬하고 맛은 달콤합니다.”
그는 분홍빛 술을 라일라의 손에 살며시 쥐여 주었다. 그녀의 다른 손에는 여전히 유리엘이 빌려준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의 예의는 세련되고 나무랄 데 없었다. 음색은 아름다우면서 나직했다. 북방부에 있는 트리온 영지에서 가족들이 쓰는 거친 말투와 무척이나 달랐다. 라일라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으흠, 흠!”
멍하니 유리엘을 바라보는 라일라에게, 제니스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라일라는 갑작스레 현실로 돌아온 듯,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오랜만입니다. 제니스 자작 영애.”
“오랜만이군요. 비체 백작님. 한 번밖에 뵙지 못했는데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감사해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제니스는 유리엘을 본 순간 알았다. 그는 로렐라이의 아버지인 에드윈 후작이 선물한 새하얀 연미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두 남녀를 한 쌍으로 보이도록 엮어 보려는 후작의 계획은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제니스는 남녀를 엮고, 또 깨뜨리는 데에 무척 노련한 사람이었다.
“오늘 입으신 검은 연미복이 로렐라이의 새하얀 드레스와 무척 잘 어울려요. 마치 한 쌍인 것 같군요.”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문 채 한 걸음 떨어져 있던 로렐라이가 살짝 웃었다.
“재미있는 우연이군요. 개인적으로 로렐라이 영애의 옷은 순백을 입고 저기 서 있는 시몬 트리온 영식과 더 어울리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유리엘은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시몬의 얼굴이 밝아짐과 동시에 로렐라이의 표정은 다시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제니스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원래 반대되는 색이야말로 서로 가장 어울리는 법이죠. 두 사람이 춤을 추면 한 폭의 그림 같을 거예요. 마침 악사들이 준비를 하고 있군요.”
“아이, 제니스 언니도 참.”
로렐라이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잘한다, 제니스.’
사촌이기는 해도 지위나 권세가 에드윈 후작가보다 한참 떨어지는 에멘 자작가의 딸 제니스를 로렐라이가 항상 데리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제니스는 화술에 능했다. 로렐라이가 누군가와 대립할 때나, 지금처럼 누군가를 로렐라이 가까이로 끌어들일 때나 교묘한 언사로 그녀에게 도움을 주었다.
“아니, 백작님은 전쟁터에 너무 오래 계셔서 혹시 춤을 못 추시는 건 아니겠죠?”
제니스가 도발적으로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이것 또한 나름의 전략이었다. 유리엘에 대한 사교계의 편견이 있음을 일깨워 주고, 이를 극복하는 가장 간단한 방안으로 로렐라이와의 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로렐라이는 부채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 유리엘의 춤 신청을 기다렸다. 그가 순백의 옷을 입고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쉬웠지만, 막상 은발을 돋보이게 해 주는 검은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멋졌기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기다려도 유리엘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영광이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순간 곁에 멍하게 서 있던 라일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조금 전의 충격에서 깨어난 듯, 턱 끝을 치켜들고 로렐라이에게 조소를 보냈다.
사교계의 꽃은 두 사람이고, 로렐라이가 아니라면 자신밖에 없었다.
“그럼 저와…….”
“저는 첫 춤을 다른 분과 춰야 해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라일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리엘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다시 한 번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로렐라이와 라일라는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여인들도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그게 누군가요?”
로렐라이는 얌전한 이미지를 위해 제니스의 입을 빌려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사교계에 얼굴을 잘 비추지도 않는 유리엘에게 특별한 여인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에게 구애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는 언제나 연애도 결혼도 생각이 없다고 답할 뿐이었다.
“황녀 전하이십니다. 그분께서 제 춤 신청을 받아 주실지 모르겠지만요.”
“예?”
그곳에 있던 남녀 모두가 동시에 입을 모아 외쳤다.
“황녀 전하와 첫 춤을 춘다니, 진심입니까? 그분은 성년식 때를 제외하면 춤을 춰 본 적도 없는 거 아니었습니까?”
시몬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둘러선 다른 남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지난 번 파혼 후로 연회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주군이라고 해서 춤을 함께 춰야 할 의무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백작. 백작을 기다리던 로렐라이 영애와 함께 추시죠.”
“솔직히 황녀 전하와 어울리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외모는 아름답지만 매력이 없는 분입니다. 차라리 아드리안 리스 영애면 모르겠군요.”
키가 작은 금발의 남자 하나가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말했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들은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유리엘의 눈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빛났다.
“영식은 황녀 전하를 잘 아나 보군.”
금발의 남자를 대하는 그의 말투가 달라졌다. 남자는 흠칫 놀라 목을 움츠렸다. 그는 하급 귀족 출신의 기사였고, 유리엘과 이번 전쟁에 함께 참여해 그의 지휘를 받았었다.
“말을 조심하지 않는 것은 군대에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고.”
유리엘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평온한 가운데 조금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만 그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차가움이 묻어 있었다.
그 말투에, 키 작은 금발의 남자의 어깨가 굳었다. 유리엘은 군대 안에서도 단독으로 임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수하를 부릴 때에는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반 영식을 용서하세요, 백작님.”
로렐라이가 가녀린 목소리로 호소하듯 말했다.
“황녀 전하께 무례할 생각은 저희 중 누구도 없답니다. 다만 전쟁 공로가 크신 백작님을 호위로 부린 것으로 부족해 연회에서도 파트너가 될 의무를 부여하시는 것은 황녀 전하의 평판에도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금 전 유리엘에게 예정된 파트너가 있다는 말을 듣고 소심해졌던 그녀는, 그 정체가 6번이나 파혼당한 황녀임을 깨닫자 다시 자신감이 차올랐다. 로렐라이는 다른 여인과 춤을 추라고 말하며 은근슬쩍 유리엘의 시선을 끌 생각이었다.
“얼마나 남자가 없으면 억지로 호위 기사를 시켜서 춤을 춰야겠는가, 뭐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으니까요. 그걸 방지하려면 백작님은 역시…….”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미처 말을 맺기 전에,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시종의 말과 함께 들어선 것은 아폴로니아였다.
“아니?”
“저, 저분이 황녀 전하시라고요?”
“말도 안 돼!”
젊은 귀족들은 너도나도 감탄사를 쏟아 냈다. 그들의 눈앞에 등장한 사람은 자신들이 알던 황녀와 너무나도 달랐다.
아폴로니아는 장미 꽃잎처럼 짙은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들어왔다. 소매와 허리 라인에 검은 천을 대어 세련미를 더하고 곳곳에 은실로 자수를 넣은 그 옷은 강렬하고 과감했다.
반만 올려 고정시킨 긴 금발에는 짙은 녹색의 사파이어가 군데군데 장식되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작은 불빛처럼 보이는, 자연스럽지만 무척이나 섬세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목에는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 역시 화려한 드레스를 잘 살려 주는, 작고 섬세한 보석이었다.
무엇보다 눈을 끄는 것은 아폴로니아의 시선과 태도였다. 아주 미세한 미소만을 지은 채 당당한 시선을 앞에 고정시킨 그녀는 약혼자 앞에서 유약하게 떨고 울던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다.
“마침 오셨군요.”
유리엘은 입가의 미소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는 매 순간 아폴로니아에게 반하고 있었고, 지금은 이를 드러내도 괜찮을 때였다. 드디어.
아폴로니아를 향해 걸음을 떼는 그의 시선 한쪽에, 연회장 안쪽에서 얼어붙은 채 홀린 듯한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보는 카엘리온이 보였다. 유리엘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비, 비체 백작님.”
금발의 키 작은 귀족이 말을 더듬었고, 로렐라이와 라일라가 그를 매달리듯 붙잡았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로렐라이의 그들의 손을 떼어 냈다.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유리엘은 아폴로니아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살짝 웃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연인지 악사들이 바로 그 순간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유리엘은 자연스레 아폴로니아의 손을 잡아 리드를 시작했다.
“춤을 출 수 있어?”
“전하께서 귀족들이 배우는 것은 다 배우라고 하셨죠.”
유리엘은 가볍고 우아하게 움직였다. 날카로운 눈빛도 벨 것 같은 기세도 없었지만 그의 모습은 묘하게 검술을 할 때와 닮아 있었다. 매끄러운 리드는 그 자신뿐 아니라 아폴로니아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연회장을 빙글빙글 돌며 미끄러지는 두 사람의 동작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검은색과 붉은색은 한데 어우러져서 구경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척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저 아름다운 분이 황녀 전하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약혼식 때 춤추는 모습은 봤지만 저런 느낌이 아니었는데요.”
“유리엘 백작은 또 어떻고요? 연회장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으시던 분이 저런 매너며 춤 실력이라니.”
“저 사람이 저렇게 웃는 것은 처음 봤어요.”
구경하는 사람들은 물론, 함께 춤을 추는 남녀도 힐끗힐끗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좋은 반응이었다. 그녀가 말한 것 이상으로, 유리엘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폴로니아 또한 돋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이상하게도 그런 성과들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유리엘의 시선이며 숨결, 그리고 달콤한 향기가 유난히 강하게 느껴졌다.
“옷 선물은 뭐야? 왜 말해 주지 않았어?”
아폴로니아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유리엘과 아폴로니아의 옷은 색깔이며 디자인, 재질까지도 맞춘 듯 잘 어울렸다. 유리엘의 손목에 있는 붉은 커프스 버튼은 아폴로니아의 옷과 완벽하게 같은 색이었다.
“잘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유리엘은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듯 말했다.
“나한테 이 붉은 드레스가?”
“저와 전하의 모습이요.”
그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폴로니아가 눈을 크게 뜨자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전하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전하께서 공식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는 금원은 한정돼 있으니 제가 드릴 수밖에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유리엘의 분석은 옳았다. 황제를 급하게 자극하거나 지나친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아폴로니아를 돋보이게 하는 방법. 외면의 단장은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아폴로니아도 알지만 준비하지 못했었다.
“호감을 사고 주목을 받으라고 했지, 내게 이런 신경을 써 달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전하를 빛내 달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황녀 전하에게 마음을 빼앗긴 호위 기사가 어떻게 주목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는 여유롭게 대답했고, 아폴로니아는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의 동경과 호기심 섞인 시선이 둘을 향해 있었으니까. 아폴로니아는 그 순간 황녀로서 한 번도 누리지 못한 사교계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이윽고 음악이 멈췄다. 구경하던 사람들, 춤추던 사람들 할 거 없이 모두 박수를 쳤다.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야 했으나, 아폴로니아는 순간적으로 춤이 끝난 것이 아쉬웠다.
그 마음을 아는지, 유리엘이 다시 한 번 매혹적으로 웃었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장인 모튼 프라이어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렸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모두의 인사를 받으며 황제와 세타가 등장했다. 세타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아직 시녀의 신분이었지만 고상해진 태도며 아름다워진 외모, 화려한 치장은 어떤 황비보다도 고귀해 보였다.
황제의 다른 한쪽 옆에는 페트라와 패리스가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이성으로 무장한 차가운 미소를 띠고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름다웠지만 귀엽게 황제의 팔에 붙어 있는 세타와 꼿꼿한 페트라는 무척 대조되었다.
“1년간의 전쟁을 마치고 제국의 이름을 빛낸 그대들 모두를 환영한다.”
황제가 위엄 있게 말했다.
“이번 전쟁의 성과는 나의 후계자이자 제국의 후계자인 패리스의 공로이다. 그는 이번 승리로 제국을 이끌 수 있는 자질을 보였느니라.”
작은 환호가 있었고, 패리스는 씩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보석 같은 금적안이 유난히 밝게 반짝였다. 황제가 손짓하자 그는 앞으로 나와 황제의 곁에 섰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나라들은 여전히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고 있으며, 나라의 각지에서 기승을 부리는 마물 또한 나의 병사들이 물리쳐야 할 적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여러 가지 요소로 듣는 이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의 청을 받아, 황실 기사단에는 패리스를 보좌할 여러 인재를 투입할 것이니라. 모두의 도움으로, 제국은 새로운 시대를 향해 도약할 것이다.”
황제는 연회장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폴로니아가 본 적 없는 여러 명의 남자들이 자리 잡고 서 있었다. 그들은 기사로 보였다. 그러나 유난히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몇 명이 있었다.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동시에 연회장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벨라…… 아닙니까?”
황제가 가리켰던 남자들 대부분은 자색 눈에 검은 머리를 가진 미남자들이었다. 리샨에서 보았던 삼형제와 비슷한 느낌의, 유혹적인 분위기도 느껴졌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모두가 박수를 쳤다. 그들은 벨라들의 외모에 감탄했지만, 한편으로는 신성한 황실 기사단에 그들을 들이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벨라가 기사라니, 들어 본 적 없어요.”
“우리 오라버니가 저들과 함께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황태자 전하께서는 대체 왜…….”
그들은 전쟁터에서 함께 싸웠던 기사들이 아니었다. 다른 공로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패리스는 만족한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그 이유를 완벽하게 알 수 있었다.
“에반젤린이 말했던 게 이거였나?”
아폴로니아가 유리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벨라로 추정되는 루완 상단의 주술사, 그리고 패리스에게 없던 정통성의 상징까지 쥐여 준 사람. 패리스가 그를 황궁으로 들인다는 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다른 신분으로 위장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여러 명의 벨라 기사를 한꺼번에 들이다니.”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가짜일 겁니다. 그냥 있어도 눈에 띄는 벨라를 가까이 두면 지나치게 시선이 집중될 테니 아예 여럿을 들여 관심을 분산시키는 의도겠죠. 황태자가 주술사를 가까이 두고 지낸다는 소문이 퍼지면 누구나 그자가 루완 상단의 상품에도 관여한다고 추측할 테니까요. 그런 비밀은 쉽게 유출시키려 하지 않을 겁니다.”
유리엘이 대답했다.
“‘마일론의 눈’조차도 누군지 확실히 파악이 안 될 정도로 조심하고 있다는 거군. 칭찬할 만해.”
아폴로니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나 패리스만 있으면 몰라도 페트라가 그렇게 쉽게 루완 상단의 인재를 노출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더군다나 그 사람에게는 패리스의 정통성이 달려 있었다.
다만 아폴로니아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방금 보았던 벨라 청년들 중 과연 정말 상단의 주술사가 섞여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페트라의 상단에서 무언가를 내놓을 때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만났던 한 사람의 얼굴이 스치기 때문이었다.
놀랍도록 재능 있었던, 그러나 아쉽게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여인이.
정말 그런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은 머릿속 한구석에만 담아둔 생각이었다. 아무런 근거도, 확신도 없이. 그녀가 하필 페트라의 수중에 떨어졌을 가능성은 너무나 희박했으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일단은 다른 귀족들과 어울리도록 하고.”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에게 황금빛 와인 잔을 하나 들려 주고 다시 젊은 귀족들의 틈으로 돌려보냈다. 연회장 중앙에서는 다시 음악과 춤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중립 귀족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빠른 길은, 그 자식들과 사교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리엘은 분명히 그 적임자였다.
‘조금 쉴까.’
아폴로니아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춤이 끝난 후 들어섰던 황제와 페트라조차도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눈썹 한쪽을 들어 올릴 정도였다.
물론 그들은 다음 순간 그녀의 모습을 잊어버렸다. 몇 년 전 그녀의 팔에 영구적인 화상이 생긴 후로, 카엘리온이 불 속을 걷고도 멀쩡했다는 소문이 퍼진 후로 그들은 아폴로니아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간혹 한 번씩 있는 약혼과 파혼 때를 제외하면.
그러나 귀족 영애며 영식들은 달랐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아폴로니아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눈빛이 느껴졌다.
‘저들과는 할 이야기가 없는데.’
아폴로니아의 관심은 에드윈 후작을 비롯한 몇몇 귀족에게 쏠려 있었다. 조금 전 카엘리온이 그들과 서 있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그 후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자신이 가장 익숙한 연회장 구석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는 불필요한 대화를 피하면서 연회장의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카엘리온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 있었네.”
“그러게 말입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누이의 곁에 있군요.”
그는 언제나처럼 농담을 했다.
“에드윈 후작은?”
“조금 있다가 휴게실에서 다시 보기로 했습니다. 에스테반 자작과 트리온 후작도 함께요. 주로 사업 이야기를 했지만 저를 반가워하더군요.”
“트리온 후작에 대한 정보가 사실…….”
“누이.”
아폴로니아가 무언가 말을 더 하려 했지만 카엘리온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항상 바쁜 누이, 잠깐이라도 잡담을 하면 안 됩니까?”
그는 장난스레 물었다. 다만 그 목소리에는 약간의 간절함이 있었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
“일단 누이의 모습이 여신 같다는 것.”
카엘리온이 아폴로니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주변에서 또래 귀족들이 그 모습을 보고 수군거렸다.
“이런 곳에서 우리가 지나치게 친해 보이면 위험해.”
“염려 마십시오. 이럴 때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저는 만나는 모든 여인들에게 다정했으니까요.”
그는 씩 웃었다. 실제로 카엘리온의 다정한 매너는 그를 사교계의 총아로 만들었다. 물론 그와 관련해서는 아폴로니아의 가르침이 있었다.
“게다가 저는 이미 포로에게 영혼을 사로잡혀 충성스러운 봉신을 팔아 치운 몸입니다. 누이 덕분에 말이죠.”
그가 투정 부리듯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그 말에 결국 살짝 웃어 주었다.
“네 모습도 멋지구나. 청색 옷이 잘 어울려.”
카엘리온은 어두운 청색에 황금 자수가 새겨진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어두운 머리색과 위험한 분위기를 조금 밝게 해 주는 옷이었다. 연미복을 입은 유리엘의 모습이 모두에게 새로웠다면, 카엘리온은 무엇을 걸치든 당연히 처음부터 그의 것으로 만들어졌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누이가 청색을 좋아한다고 들어서요. 뭐, 이제 아닌 것 같지만…….”
그는 툴툴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아폴로니아의 목걸이로 향했다.
“……목걸이도 잘 어울립니다.”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순간 카엘리온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 걸어 주었던 파나스의 오팔 목걸이가 떠올랐다. 표정을 살피니 분명했다. 카엘리온은 마치 아이처럼, 자신이 선물한 물건을 아폴로니아가 쓰지 않는다며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네가 준 오팔만큼 값비싼 것은 아니야.”
그녀는 살짝 웃으며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그러나 카엘리온의 눈매가 소년 시절 그랬던 것처럼 아래로 축 처지고 있었다.
“옷과 함께 선물로 받은 거라…… 네가 준 것은 워낙 귀해서, 내가 샀다고 하면 의심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걸고 있던 루비를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카엘리온에게는 변명처럼 둘러댔으나 손에 든 그것은 이미 소중했다.
“압니다, 누이.”
카엘리온이 한순간 씁쓸함을 지워 버리고 환하게 웃었다. 그의 미소에는 유리엘과 다른 매력이 있었다.
“무엇을 걸어도 나의 누이는 아름다우니까요.”
악사들이 한 곡의 연주를 마쳤다. 아폴로니아와 카엘리온은 듣고 있지 않았지만 적절하게 갈채를 보냈다.
“언젠가는 저도 누이와 춤을 출 수 있겠지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려한 오팔을 누이의 목에 걸어 주고, 모두의 부러움을 사면서 말입니다.”
카엘리온이 아폴로니아의 나직이 속삭였다.
“……나는 춤을 그다지 즐기지는 않는단다.”
아폴로니아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에 맞추어 카엘리온과의 춤을 고대한다고 대답할 수도 있었으나 왠지 그것은 거짓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평소처럼 받아주지 않자 카엘리온의 금적안이 살짝 흔들렸다.
순간 그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어딘가 억울하고, 또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몸을 틀어 아폴로니아를 마주하고 서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반 뼘밖에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갑작스런 접근에 아폴로니아는 반사적으로 물러나려 했으나 그녀의 등 뒤는 벽에 막혀 있었다.
“카엘……?”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은 거의 밀착될 정도로 가까워졌다. 카엘리온은 타는 듯한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바라볼 뿐, 그 자리에서 비킬 생각이 없는 듯했다. 쌉싸름한 향기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저 또한 춤을 아주 즐기는 것은 아닙니다, 누이.”
그가 아폴로니아의 다시 한 번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살짝 닿는 느낌이 들었으나 아폴로니아는 그와 벽 사이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미래의 신부와의 첫 춤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폴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팔을 들어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미처 그녀의 손이 그에게 닿기 전에 카엘리온이 먼저 숙였던 몸을 펴고 그녀로부터 물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 같은 환한 미소가 다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 누이, 저는 다시 에드윈 후작에게 가 보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휴게실에서 뵙도록 하지요.”
평소와 같은 넉살 좋은 표정으로, 카엘리온은 예를 갖추고는 사람들 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젠장.”
아폴로니아와 멀어지자 그의 입에서는 나지막한 욕설이 새어 나왔다. 조금 전 그가 아폴로니아에게 한 행동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한 눈에 받으며 유리엘과 춤추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유리엘과 달리 자신에게는 곁을 주지 않는 그녀를 대하면서 카엘리온의 가슴속에는 억누를 수 없는 오기가 차올랐다.
어떻게든 그녀를 자극하고 싶은 충동이 들어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뿐이었다. 마음을 주지 않는다고 약혼을 핑계로 상대를 압박하다니, 그것도 아폴로니아를.
이건 마치……
“사랑은 소유욕을 동반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무시하려고 애쓰고 있군.”
순간 카엘리온의 머릿속에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만하게도 나는 너와 다르다고 말했었지만, 카엘리온은 조금씩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리엘과 웃는 아폴로니아를 볼 때면 그는 두 사람이 다시는 서로 닿을 수 없도록 영원히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녀의 미소를 혼자서만 보고 싶다는 이 마음이 소유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만하자.’
카엘리온은 머리를 한 번 세차게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 버리려 애썼다. 그리고 곧 다른 귀족들을 만나며 매력적으로 웃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속 한구석에는 여전히 아폴로니아가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녀는 한순간도 그의 마음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 * *
아폴로니아는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바깥으로 나왔다.
정원의 바람은 시원했다. 황제궁에서 아폴로니아는 셀 수 없을 정도로 황제로부터, 페트라로부터 수모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장소를 싫어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름다웠던 곳. 아폴로니아의 마음속에서 그 정원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녀는 휴게실로 향할 적당한 시간을 기다리면서, 조금 전 카엘리온의 말을 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타는 듯한 그의 시선도.
잠시 앉아 생각에 잠겼을 때, 아폴로니아의 눈에 정원으로 다가오는 여인의 실루엣이 보였다. 아폴로니아와 비슷하게, 앉아서 쉴 곳을 찾는 것으로 보였다.
연회장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여인이었고, 복장으로 봤을 때 그녀는 누군가의 시녀인 듯했다. 피곤했던 것인지, 그녀는 조금 휘청이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다리를 절었다.
“하아…….”
나른하게 한숨을 토하며 분수대로 가까이 오는 그녀의 얼굴이 보이자 아폴로니아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녀는 벨라였다. 검은 머리, 유난히 짙은 자안. 믿기지 않을 정도의 외모.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신은…….”
분명히 어디선가 보았던 얼굴이었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강렬할 인상을 남겼던 그녀.
아모레타였다. 아폴로니아가 만났던 최고의 천재.
5년 동안 수소문했지만 흔적도 찾지 못했던 그녀가 아폴로니아의 눈앞에 나타났다. 아폴로니아는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계신 줄 몰랐어요.”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기억하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5년이 지난 지금 아모레타는 예전보다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순수한 듯 탁한 듯, 사람을 홀리는 눈동자에는 반가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는 아폴로니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앉아도 된다.”
잠시 말을 잃었던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폴로니아 옆에 앉았다.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인가? 왜 너를 처음 보는 것 같지?”
아폴로니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에게 물었다. 놀란 표정을 숨기기 위해 애써야 했다.
“저는 패리스 전하의 시녀예요. 기사단에 들어간 오빠를 따라서 황궁에 들어올 수 있었답니다. 연회에는 초대받은 신분이 아니라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어요.”
아모레타는 시녀로서의 예의를 잘 배웠는지 눈을 살짝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녀는 아폴로니아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오빠가 있다고? 그는 패리스 오라버니와 어떻게 알게 된 사이니?”
아폴로니아는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이 아는 한 아모레타는 고아였다. 그녀는 눈을 살짝 피하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어렵게 살다가 전하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그녀는 자신의 실제 신상을 숨기고 있었다. 분명 누군가의 지시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 순간 아폴로니아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루완 상단이 데리고 있는 주술사. 머리색을 바꾸는 빗이며 주술이 걸린 장신구와 드레스. 웬만한 천재는 구현해 낼 수 없는 색을 완벽하게 만들어 낸 패리스의 눈동자. 화상을 피하게 해 주는 옷까지도.
그런 것을 만들 사람은 아모레타 한 명뿐이었다. 패리스가 데리고 온 벨라 기사들은 일종의 눈속임이었던 것이다. 주술에 능통한 루완 상단의 인재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워낙 많았으니까.
출신이 불분명해 보이는 사람 여럿을 세워 의심을 받게 하고, 진짜인 아모레타는 뒤에서 시녀로 들여온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도 아모레타가 상단의 기술자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외모에 현혹되면 그 너머를 알아보기 어려운 법이니까. 아모레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패리스의 시녀이자 연인, 미래의 정부 정도로 인식될 것이다.
‘무슨 이런 인연이.’
세상에 둘은 없을 것 같았던 재능이기에, 루완 상단을 상대하면서 몇 차례 그녀가 떠오른 적은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페트라나 패리스가 아모레타를 데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그냥 믿기 싫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패리스 오라버니를 언제부터 어떻게 알았다고?”
“만, 만난 것은 5년쯤 전이에요. 춥고 배고파 쓰러져 있는 저를 구해 주셨어요.”
아모레타는 시선을 다시 내리깔며 말을 더듬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미묘하게 상기된 것이 보였다. 아폴로니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그 표정을 알았다. 한때 타냐가 유리엘을 보면서 지었던 표정. 오래전 어머니가 황제를 보며 띠었던 미소. 간혹 유리엘이 아폴로니아 자신을 보는 그 눈빛.
설마.
의심을 지우려 노력하며, 아폴로니아는 아모레타에게 물었다.
“……5년 동안, 너는 패리스 오라버니의 연인이었고?”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출신은 비천하나 기가 막히는 미인이 여색을 밝히는 황태자의 시녀로 들어왔다면 누구나 두 사람을 연인 관계라 생각할 것이다. 아모레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언감생심 연인의 지위를 바라지는 않아요. 그저 시녀일 뿐입니다.”
그녀는 연인이라는 단어를 말하며 특별히 더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아폴로니아의 마음이 내려앉았다.
“패리스 오라버니는 한 번도 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연인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었으니까.
“제가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처음 저를 구해 주셨을 때에요. 아무것도 아닌 저에게 누군가 관심을 갖는 것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요.”
아모레타의 얼굴은 눈에 띠게 붉어졌다.
“……오라버니를 연모하는구나.”
아폴로니아는 씁쓸하게 말했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아모레타 같은 사람이 왜 패리스의 곁에 남아 페트라의 심부름을 해 왔는지. 그것을 보고 페트라가 얼마나 쉽게 이용했을지도.
“……전하께서는 제게 친절하셨거든요.”
아모레타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무언가 변명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다른 가족이나 친지가 있니? 수도에 아는 사람은? 없다면 퍽이나 외롭겠구나.”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그녀는 아모레타가 리샨에서의 일을 기억하는지 궁금했다. 분명 그녀는 아폴로니아를 다시 만나고 싶어 했었는데.
“한 명 있었지만 지금은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답니다. 저를 구해 주셨던, 무척 감사한 분이었는데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죠, 사실.”
아모레타가 말했다.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녀의 표정이 아련해 보였다. 분명 그녀는 리샨에서 만난 아폴로니아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쩌면 아직 기회가 있는 것일까.
“그럼 그 사람을 찾지…….”
“한동안 그분을 찾았었는데 이제는 아니에요. 다만 그분의 뜻을 기억할 뿐이죠.”
아모레타는 딱 잘라 말했다.
“왜?”
“어차피 찾을 수 없는 걸 아는 데다가, 이제 제게는 패리스 전하가 계시니까요.”
그녀는 다시 아까의 그 꿈꾸듯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제게는 가장 소중한 분, 아니 주군이에요. 시녀로서 감히 많은 것을 바라지 않지만, 저는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요.”
아폴로니아의 마음이 실망으로 가라앉았다. 아모레타는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아모레타!”
아폴로니아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돌아보자 눈에 들어온 것은 아폴로니아의 것과 같은 눈동자였다. 어둠 속에서, 그 안에 섞인 황금빛은 잘 보이지 않고 피처럼 붉은색만 남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눈은 패리스의 잔인한 성정을 닮아 있었다.
“공기가 차니 들어오도록 해.”
패리스는 보기 드물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아모레타를 특별히 아끼는 듯했다. 하긴, 그녀가 쥔 것이 자신의 정통성이니 그럴 만도 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모레타는 반갑게 그를 맞았다.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구나, 니아.”
잠시 아모레타와 이야기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듯했던 패리스의 표정이 아폴로니아를 보는 순간 풀렸다. 전혀 경계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한 것이다.
“평소와 다른 복장이구나.”
“어쩌다가 선물을 받았답니다.”
“훌륭한 옷이다. 네 화상 흉터를 아주 잘 가려 줄.”
그의 얼굴에 약간의 조소가 떠올랐다. 아모레타는 당황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전하, 이제 들어가고 싶어요.”
“그러지.”
아모레타의 설득으로 패리스는 아폴로니아에게 다시 눈길을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다른 인사 없이 황궁 안으로 사라져 갔다.
“하아…….”
아폴로니아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패리스인가? 그냥 다른 영애들처럼 유리엘이나 카엘리온을 좋아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을. 아니, 사실 아폴로니아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패리스보다 먼저 아모레타를 찾았으면 좋았을 것을. 최소한 페트라가 그녀의 재능을 알기 전에.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리샨에서 아모레타를 살려 주었던 자신의 선택을 떠올렸다. 할아버지라면 베풀지 않았을 선행을. 그녀가 그곳에서 죽었더라면 지금 루완 상단의 세력은 훨씬 약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폴로니아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분의 뜻을 기억할 뿐.”
아모레타가 카엘리온을 독살하지 않는 이유. 그녀가 재능을 이용해 패리스나 황제의 폭정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는 이유. 그것은 아폴로니아와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당신의 재능을 남을 해치는 데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녀가 다짐을 받았었기 때문에.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황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수확이 있었다. 패리스의 눈동자를, 루완 상단의 상품을 담당하는 사람의 정체를 잘 알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 그녀를 어떻게 할지는 천천히 생각할 것이다. 돌고 돌아 찾은 아모레타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황궁으로 다시 들어서서 연회장 옆 휴게실로 들어갔다. 사전에 카엘리온은 때가 되면 그 곳으로 다른 귀족들을 데려올 것이라고 했었다. 아폴로니아는 잠깐이라도 그들과 자연스럽게 마주칠 기회를 원했다.
문손잡이를 돌리며, 아폴로니아는 아모레타의 일을 머리에서 잠시 지웠다.
철컥.
황금으로 장식된 무거운 문을 열자 차단되었던 화려하고도 아늑한 공간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다소 지저분한 광경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아주 대단하시군. 비체 백작.”
가레스의 비아냥거리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곁에는 자주 함께 다니는 몇몇 귀족 청년들이 있었다.
“로렐라이 에드윈의 구혼을 받더니, 이제 아폴로니아를 넘봤다고? 아예 황제가 돼서 부인을 여럿 두겠다고 하지 그래?”
그는 언제나처럼 술에 취해 있었다.
“네놈은 점점 건방져지는구나. 아까 지나가면서 내 옷에 고의로 술을 쏟은 것을 모를 줄 알았더냐?”
그의 셔츠 깃에는 과연 보기 싫은 누런 얼룩이 져 있었다. 다만 가레스는 그 얼룩 자체에 화가 났다기보다는 그 핑계로 눈앞의 남자를 괴롭히고 싶어 하는 듯했다. 아마 술을 쏟았다는 것도 유리엘의 잘못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레스를 올려다보며 앉아 있는 것은 유리엘이었다. 그는 녀석의 조롱에 그다지 영향을 받고 있지 않은 표정이었다.
“황녀 전하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소공작.”
유리엘은 그저 거슬리는 파리 같은 것을 본 듯한 말투로 조언했다. 가레스의 일행 중 가장 덩치가 큰 두 명이 그의 팔을 잡아 의자에 누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아폴로니아도 아는 얼굴로, 유명한 무가 출신에다 현재 황실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브로넨 백작의 장남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레스가 흔히 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줄 같은 것으로 포박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는 그가 사전에 준비한 상황은 아니라 충동적으로 시비를 건 것이었다.
“뭐, 소공작은 원래 사람의 호칭을 잘 구분하지 못하셨죠. 전장에서는 부사령관인 대공 전하에게 반말을 쓰기도 하셨으니까요. 그러다가 호되게 벌을 받았지만.”
유리엘의 빈정거림에 가레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닥쳐! 쏟은 술에 대한 사과조차 하지 않으면서 무슨 헛소리야.”
그러나 유리엘은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레스에게 말했다.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데 얼룩에 시선이나 가겠습니까? 얼룩 하나 지운다고 얼굴이 살 것도 아닌데.”
“감히 누구에게 잔소리를 하지? 겨우 황녀의 호위 기사 따위나 하는 주제에.”
그의 옆에 서 있던 바런 아몬 백작 영식이 가레스를 대신해 소리 질렀다.
“존대할 상대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주인이나 그 개나 똑같군. 소공작의 개 노릇을 하는 거야말로 명예와는 거리가 먼 일인데 말이지.”
가레스는 더욱 붉어진 얼굴로 유리엘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우악스럽게 그의 멱살을 잡았다.
“과연 내 개와 아폴로니아의 개 중 누가 더 하찮은지 보고 싶군. 여기서 바런이 네 낯짝을 두들겨 놓고도 멀쩡하다면 그건 네가 하찮다는 뜻이겠지?”
가레스가 넓적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어디 한 군데를 부러뜨리면 정신을 차리겠지. 이건 어머니께서도 하셨던 말씀이야. 즉, 네게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거다.”
그는 바런에게 손짓했다. 나름대로 검을 좀 쓰는 바런은 순식간에 유리엘의 얼굴을 가격했다.
퍽!
그의 손이 유리엘의 얼굴에 꽂혔다. 꽤나 정확하게. 그 바람에 유리엘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그는 입술이 조금 찢어졌지만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저 조롱 섞인 얼굴로 눈썹을 치켜 올릴 뿐이었다.
“그만두세요.”
아폴로니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휴게실 안에 울렸다.
그녀는 참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그 모습은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바런 같은 자 때문에 유리엘의 입술이 찢어진 것을 보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솟았다.
가레스와 그의 친우들이 고개를 돌렸다. 아폴로니아의 화려한 붉은 드레스와 눈에 띄는 단장은 그들의 시선을 평소보다 오래 잡아 두었다.
“아폴로니아.”
가레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폴로니아는 언제나 그렇듯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서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황,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가레스를 제외한 나머지 청년들이 마지못해 예를 갖추었다.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으나 대단히 경계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그들의 눈에는 아폴로니아를 향한 멸시가 어려 있었다.
“내 기사에게 뭘 하고 계셨나요?”
“비체 백작께서는 출신 때문인지 예의를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한 수 가르쳐 드리고 있었습니다.”
바런이 조소하며 말했다.
“전하께서 바쁘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대공령에 있을 때면 모를까, 황궁에서 살고 싶다면 소공작님을 대하는 예는 갖추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다 필요해서 하는 일입니다.”
바런이 말을 마치자 청년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내 호위 기사라는 사실을 잘 아시는군요?”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스스로의 목소리가 차갑게 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입니다. 전하의 물건을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그러니 훈계가 필요한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바런은 ‘물건’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있는 힘껏 비아냥거렸다. 그는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천민 출신인 유리엘의 명성이 무척이나 거슬리던 차였다.
그러나 유리엘은 그 말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는 다만 아폴로니아의 존재를 모두가 인식한 순간부터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황제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가면을 조금씩 벗는다. 그것은 아폴로니아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장 그녀가 생각했던 상대는 가레스가 아니었다.
“그를 놔주세요.”
고민 끝에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황녀라면 당연히 할 정도의 명령, 아니 요청이었다.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유리엘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가레스와 바런의 뺨을 각각 백 대씩 후려치고 싶었지만 갑작스레 황녀의 권위로 그들을 벌한다면 페트라의 지나친 관심을 끌 위험이 있었다.
그녀는 가레스와 함께 유리엘의 양팔을 잡아 누른 귀족들의 얼굴을 빠르게 훑고 기억했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들 하나하나에게 불운이 닥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가레스는 일단 일을 부드럽게 해결하고자 하는 아폴로니아의 뜻을 알아주지 않았다.
“뭔가 잘못 먹은 거 아닌지 모르겠구나, 니아.”
가레스가 아폴로니아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으르렁댔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는 스스럼없이 황녀인 아폴로니아에게 하대를 했다. 말도 안 되는 무례였으나 그 안하무인의 태도는 그의 친우들에게 힘을 주었는지 바런의 입가에 띤 조소가 깊어졌다.
“이제는 우리 어머니가 두렵지 않나 보지?”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내쉬고 그의 말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한심함을 숨기지 못했다.
“존경하는 고모님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오라버니께서 제 기사를 부당하게 잡아 두신다는 것을 알면 고모님도 슬퍼하실 거예요.”
순진한 말이었으나 그녀는 가레스가 쓸데없는 사고를 치면 페트라가 화를 내리라고 돌려서 표현한 것이었다. 그녀는 페트라를 향한 가레스의 두려움이 이 상황을 끝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의 말이 가레스를 자극한 듯, 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용건이 끝나면 보낼 테니 거기서 기다리든가 마음대로 해.”
그는 한껏 비아냥을 섞어서 말했다. 바런을 비롯한 그의 친우들이 다시 한 번 낄낄거렸다. 유리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으나 그들은 미처 보지 못했다.
“호위를 떼 놓을 수 없으니 지금 풀어 주세요.”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언제든 카엘리온이 귀족들과 함께 휴게실로 올 것이다. 그들 앞에서 가레스 따위에게 한 수 접어주는 모습을 굳이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레스는 여전히 그녀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폴로니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더니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뭔가 멋진 대사가 생각나기라도 한 듯이.
“값이 떨어져 팔려 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입만 살았구나.”
가레스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혼잣말처럼 들렸으나 분명 방 안의 모두에게 들릴 정도였다.
아폴로니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가레스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진작 성인이 된 황녀에게, 다른 귀족 청년들의 앞에서 이 정도의 모욕을 주는 것은 그로서도 극단적인 일이었다.
바런은 여전히 따라 웃고 있었다. 그러나 가레스의 나머지 일행들은 이 정도의 말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다소 충격받은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유리엘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조금 전 바런에게 얼굴을 맞으면서도 여유로웠던 표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입이라도 다물고 살면 이 중에라도 싼값에 너를 데리고 갈 놈이 있을지 모르…….”
그는 계속해서 모욕적인 말을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미처 끝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리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쾅-
그를 잡아 누르던 두 청년은 힘조차 써 보지 못하고 밀려났다. 바로 앞에 서 있던 바런은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짜악-
눈 깜짝할 사이에 유리엘의 손이 가레스의 뺨을 쳤다. 주먹이 아닌 손바닥을 썼지만 조금 전 바런이 뻗었던 주먹과는 비교도 안 되게 센 강도였고, 그의 고개는 홱 하고 돌아갔다.
“아악! 이놈이…….”
“입 다물어.”
유리엘은 망설임 없이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짝-
“큭!”
순식간에 가레스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소공작님!”
바런이 깜짝 놀라 유리엘에게 달려들었다.
퍽-!
그러나 유리엘은 그에게 시선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발을 한 번 뻗어 바런의 배를 걷어찼다.
“아윽!”
그가 가레스의 옆으로 나동그라지며 배를 움켜잡았다.
“너, 너…….”
뺨을 붙잡고 뒹굴던 가레스가 손가락으로 유리엘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유리엘의 싸늘한 시선을 보고는 손가락을 내렸다. 그의 일행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리엘과 가레스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전장의 사신이니 뭐니, 그들은 그저 잘난 얼굴에 따라온 수식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금 느껴진 기세는 보는 이의 온몸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 여유가 넘쳤던 청년들은 갑작스레 숨을 죽여야만 했다.
“유리…… 비체 백작.”
그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을 불렀다.
“분명히 폐하께서는 저를 전하의 호위 기사로 임명하셨지요.”
유리엘이 딱 잘라 말했다.
“전하께서 모욕을 당하시는데 가만히 있는다면 황명에 대한 거역이 되지 않겠습니까?”
가레스와 바런, 그리고 나머지 청년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유리엘의 말은 사실이었다.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유리엘이 짧게 내뱉으며 그들을 쏘아보자 그들은 모두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씩씩거리는 가레스 정도를 제외하고.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에게만 보일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은 정확했다.
황제가 그를 아폴로니아의 호위로 임명한 순간 다른 귀족들은 그녀를 무시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유리엘은 당당히 그녀 곁에 있을 수 있었고, 다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으니까.
‘가끔은 나보다 판단이 빠르구나.’
아폴로니아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바런에게 맞을 때에는 가만히 있던 그는 아폴로니아에 대한 모욕적인 말이 나오자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그 사실은 아폴로니아에게 묘한 만족감을 안겼다.
가레스는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몸에 밴 허세와 폭력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아폴로니아, 네가…….”
그는 다시 일어서며 이 사이로 으르렁거렸다.
그는 공포와 분노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했다. 가레스 뒤에 서 있는 청년들이 이쪽저쪽 눈치를 보며 물러섰다.
“예를 갖추라고 했습니다, 소공작. 소공작은 이미 전하께 몇 번이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이대로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요.”
유리엘이 차갑게 내뱉었다. 가레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황궁의 다른 모든 사람이 가레스의 눈치를 보아도 유리엘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감 잡은 것 같았다.
“네, 네가 나를 벌하기라도 한다는 거냐? 더 때리면…….”
그가 빌빌거리면서도 쉽게 굽히지 않자, 유리엘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실렸다.
“제가 뭐라고 소공작을 벌하겠습니까.”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레스와 아폴로니아 사이에 섰다.
“전하께 깊이 고개 숙여 사죄하고, 앞으로 다시 그런 짓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십시오.”
“뭐, 뭐?”
가레스가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는 아폴로니아와 눈을 마주치고 섰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운 듯 했다.
“깊이 고개를 숙이라고 했습니다. 소공작의 눈이 전하의 무릎 정도를 볼 수 있으면 적당하겠군요.”
유리엘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레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와드려야 할까요?”
유리엘은 천천히, 가레스의 머리로 긴 팔을 뻗었다. 그의 뒤통수를 붙잡아 아래로 누르려는 듯. 지켜보는 청년들의 눈이 커졌고, 가레스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정 그렇다면 실례하겠습니다.”
가레스의 머리에 유리엘의 손이 닿는 순간, 그는 발작하듯 돌아서서 유리엘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
퍽-
“감히!”
가레스가 분노에 차 울부짖었다. 유리엘이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듯 냉소를 짓자 그는 다시 한 번 유리엘을 밀쳤다. 그의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감히 너희들 따위가 내게!”
유리엘이 꿈쩍도 하지 않자 그의 시선은 아폴로니아를 향했다.
“소공작.”
유리엘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한 마디 했으나 가레스는 멈추지 않고 아폴로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탁-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얼굴에 닿기 전, 그의 손은 허공에서 붙잡혔다.
“뭐…….”
유리엘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그를 붙잡은 것은 이 상황을 지켜보던 아폴로니아 본인이었다.
“그만하세요, 오라버니.”
아폴로니아는 가레스를 더 두고 보고 싶지 않았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그 순간에 그녀는 스스로 가레스를 멈춰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유리엘에게 손을 대는 순간 그녀는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은 그의 만행을 허용하면 안 되었다. 아폴로니아는 이제 생존만을 원하는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시선이 그를 똑바로 보았다. 불꽃을 닮았지만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아폴로니아의 눈빛은 그를 꿰뚫어 버릴 것처럼 날카로웠다. 항상 그를 피했던 아폴로니아는, 가레스가 무엇을 빼앗아도, 심지어는 밀치고 넘어뜨려도 아무 저항을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가레스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를 붙잡은 힘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새로운 아폴로니아의 모습은 생소했으나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그 칼날 같은 목소리, 사람을 멸시하는 듯한 냉정한 시선. 가레스를 긴장시키는 태도.
아폴로니아의 태도는 가레스가 가장 무서워하는 여인, 페트라를 연상시켰다.
“그만하시지요.”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던 그 때, 문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인 것은 문 쪽에 서있는 카엘리온의 모습이었다. 다만 가레스를 말리던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많이 취하셨소, 소공작.”
카엘리온의 뒤로 서 있는 것은 네 명의 귀족 남자였다. 트리온 후작, 에드윈 후작, 에스테반 자작, 그리고 바런의 아버지인 아몬 백작까지.
세 명의 중립 귀족과 한 명의 황제파 귀족은 전부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반 정도는 가레스에 대한 한심함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을 향한 호기심, 또는 이를 넘어선 감탄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달라진 아폴로니아의 태도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아몬 백작.”
가레스는 조금 전 들린 목소리의 주인을 보며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 전 자신이 아폴로니아에게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바런, 너는 그게 무슨 짓이냐.”
“아, 아버지, 언제 오셨습니까?”
유리엘에게 맞은 뺨을 붙잡고 있던 바런이 중얼거렸다.
“다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르고 별 추태를 보이더구나.”
아몬 백작은 혀를 쯧쯧 찼다. 평소 번드르르한 그 얼굴은 수치심에 구겨져 있었다. 황제의 측근인 그는 아들의 행실 자체보다는 그가 상황과 상대를 분간하지 못했다는 점이 못마땅한 듯했다.
“대, 대체 어떻게 여기를…….”
“에핀하르트 대공과 진행하는 광산 사업을 논의할 장소를 찾다가 왔습니다. 이런…… 싸움이 벌어진 줄은 몰랐지요.”
에드윈 후작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평소에도 가레스를 좋게 보지 않았으나 지위를 생각해 조심하려 애썼던 그는, 가레스의 언사에 대한 충격과 경멸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은…….”
“소공작, 방금 일을 공작 부인께 아뢰진 않겠습니다.”
아몬 백작이 가레스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는 빠르게 양옆의 귀족들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봐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흠, 앞으로 황궁 내에서는 술을 자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드윈 후작이 마지못해 말했다.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간접적으로 아몬 백작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전하께서도 괜찮으신지요?”
아몬 백작은 아폴로니아를 보며 물었다. 그는 습관처럼 아폴로니아의 의견을 가장 나중에 물었으나, 조금 전 상황 때문인지 눈빛은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다들 취해서 한 일이니 괜찮습니다. 중요한 회의를 방해해서 오히려 죄송하군요. 대공께도 미안합니다.”
그녀는 카엘리온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며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의 친분은 아직 알려질 때가 아니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니,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전하와 비체 백작은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카엘리온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자 당황했던 귀족들은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몬 백작이 가장 먼저 가레스와 그 일당을 앞세워 휴게실을 떠났다.
그러나 에드윈 후작, 트리온 후작과 에스테반 자작 또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떠나기 전, 그들은 고개를 다시 한 번 돌려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전하.”
에드윈 후작이 나지막이 한 마디를 뱉어냈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그녀가 가레스를 막아서는 모습은 에드윈 후작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다는 그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인사이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한때 그녀의 스승 중 하나였던 후작은 어린 시절, 총명하고 강단 있었던 아폴로니아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에스테반 자작과 트리온 후작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잠시 관심 어린 시선으로 아폴로니아를 응시하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휴게실에 세 사람만 남자, 아폴로니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렀지만,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