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사랑과 소유 (19/34)

Chapter 4. 사랑과 소유

“왕녀.”

“왜?”

카엘리온의 서재에서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던 에반젤린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무척이나 순진한 말투며 표정이었다.

“몰라서 묻나?”

카엘리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팔에는 발톱에 할퀸 자국이 잔뜩 있었다.

“약 줄까?”

에반젤린은 여전히 순수하게 물었다. 그 적갈색 눈동자에는 약간의 진심 어린 걱정이 있었다.

카엘리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반젤린을 데리고 있는 것은 예상보다 버거웠다. 초반에는 카엘리온의 눈치를 보느라 숨기는 듯 했지만 그녀의 방은 늘 마물들의 흔적으로 지저분했다. 어떤 날부터는 악취가 풍기기도 했다.

점점 그녀는 방을 오가는 마물을 숨기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다가, 이제는 카엘리온에게 대놓고 그들의 밥을 주문했다. 장정 열 명이 먹을 것 같은 음식을.

음식 정도는 일이 아니었다. 악취 같은 것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가 끼친 민폐는 컸다.

“약이라면 나도 있어.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뭐가 문젠데?”

“네가 기르는 그 마물, 그게 한 일이라는 게 문제다.”

카엘리온은 며칠째 외눈까마귀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마물로서는 놀랍게도 에반젤린과 친해 보이는 그 녀석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카엘리온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내게 각인한 것 같더군.”

녀석들은 한 사람에게 원한을 품으면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디서나 미움 받았다. 자신이 ‘복수’할 대상을 지정하는 것을 각인이라 불렀고, 일단 각인이 되면 그 대상이 어디에 숨어 있든 그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쫓아갔다.

외눈까마귀들은 지능이 높았고, 다른 짐승의 소리를 흉내 내어 사냥감을 꾀어내는 등 계략까지 짤 수 있는 놈들이었다. 앵무새와 비슷하게, 간혹 인간의 목소리를 정확히 흉내 내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런데 재수가 없게도 카엘리온은 어느 새끼 까마귀로부터 각인을 당해 버렸다. 언젠가 창문을 열다가 실수로 그 녀석을 툭 쳐 버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애초에 네가 아니었다면 근처에 그런 녀석이 서성이고 있지도 않았을 텐데.”

카엘리온이 으르렁거렸다.

그놈은 카엘리온이 한 번 외출을 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그의 어깨나 팔 같은 곳을 발톱으로 할퀴고 지나갔다. 아직 어리고 작아서 대단한 타격은 없었지만 그 강도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카엘리온이 실내에 있을 때면 녀석은 창밖에서 지켜보며 집요하게 그를 노렸다. 간혹 기회를 보아 살짝 열린 창틈으로 훅 날아 들어와 날개로 그를 때리고 도망치기도 했다.

녀석은 죽을 때까지 카엘리온을 쫓아다니면 못 살게 굴겠다는 태도로 그를 공격했지만 이를 보다 못한 에반젤린이 휘파람을 한 번 불자 그녀에게 날아가 온순해졌다. 길들이기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종의 행동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다음 날 그놈은 다시 카엘리온의 창문 밖에 나타났지만.

“아, 멜로디 말하는 거구나?”

“뭐, 멜로디?”

카엘리온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웃었다. 깍깍거리는 괴이하고 불길한 울음을 우는 외눈박이 마물에게는 그냥 들어도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날개 달린 흉측한 말은 프리야라더니, 이 말도 안 되는 이름들은 다 어디서 왔단 말인가.

“계속 보면 귀여운데…….”

에반젤린은 속상한 어린아이처럼 툴툴거렸다.

“네가 통제하지 않으면 화살로 눈을 꿰뚫어 버릴 거야.”

카엘리온이 매섭게 그녀를 협박했다. 그러자 에반젤린은 눈썹 끝을 내리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리잖아. 그냥 익숙해지면 괜찮지 않을까?”

그 말에 카엘리온은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이것 봐, 나도 많이 할퀴는걸.”

에반젤린은 소매를 걷어서 팔을 보여 주었다. 과연 팔에는 카엘리온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상처들이 가득했다. 할퀸 자국, 물린 자국, 얻어맞은 자국. 그러나 그녀는 정말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난 두 번 말하고 싶지 않아. 멈추지 않으면 네 애완조를 내일 저녁으로 구워 먹을 거야.”

카엘리온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으르렁거렸다. 사실 외눈까마귀를 잡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빠른 데다 질기고 단단한 몸에는 상처를 입히기 어려웠으며, 상처를 입어도 상당히 빠르게 회복하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까마귀 한 마리가 카엘리온의 화살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그는 마음먹으면 하나의 화살만 가지고도 멜로디의 급소를 정확하게 꿰뚫을 수 있었다.

“음, 그런 거라면 말이야. 전에 말했던 새장을 지어 주면 안 될까?”

에반젤린이 울상을 지우고 실실 웃으며 물었다. 카엘리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에반젤린은 며칠 전부터 그녀가 고국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새장을 만들게 해 달라고 졸랐었다.

다만 그녀가 말하는 크기며 모습은 일반적인 새장과 무척 달랐다. 사방을 감싸서 가두기보다는 바닥과 기둥, 그리고 새가 앉을 수 있는 여러 층의 틀 같은 것을 만들어 둔 단순한 모양새였다.

그녀가 어설프게 그려 준 못생긴 그림에 따르면 그 새장은 방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해야 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새가 아니라 박쥐가 다른 작은 짐승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도 있는 것 같았다. 그 중앙에는 작은 마정석을 붙여야 한다고 했다.

“그게 있으면 멜로디나 다른 녀석들을 쉽게 통제할 수 있단 말이야. 지금은 내가 말려도 다음 날이면 너를 찾아가는 걸.”

카엘리온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지난번에 그녀가 요청했을 때, 그는 거절했었다. 지금도 쓸데없이 왔다 갔다 하는 괴물이 많은데 그런 보금자리를 꾸며 주면 대놓고 수백 마리의 괴물들이 오갈 것이 분명했다.

그랬더니 이런 짓을 해?

“너…… 일부러 그랬군.”

그는 이를 꽉 깨물며 에반젤린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 태도에 카엘리온은 자신의 추측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걸 짓자고 마물이 내게 각인하게 만들어?”

“어…… 창문을 열 때 부딪히라고 한 적은 없는데…….”

“하지만 내가 창문을 열 무렵 근처에 서성이게 할 수는 있겠지.”

그의 노여움에 에반젤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표정은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어려운 게 아니잖아! 필요한 종류의 마정석은 내가 가지고 있어! 쓰던 걸 가져와서…….”

카엘리온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힘없이 말했다. 더 이상 흉측하게 생긴 그 까만 새를 자신의 방에서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하루 줄 테니 짓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

에반젤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가 입 사이로 무언가 찍찍거리는 소리를 내자 창밖을 배회하던 몇 마리의 흰눈 박쥐가 인사하듯 날아 들어와 그녀의 어깨며 머리에 앉았다가 돌아 나갔다.

“경고하는데 혹시라도 그중 한 놈이 누이, 아니 황녀 전하에게 접근하면 난 그 순간 목을 꺾어 버릴 거야.”

그가 말했다. 그러자 에반젤린의 표정이 조금 진지하게 바뀌었다. 어둡기보다는 호기심 어린 얼굴이었다.

“흐음…….”

“뭐?”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엘리온에게 물었다. 카엘리온이 여전히 얼굴을 묻고 있던 손 틈으로 살짝 눈을 들었다.

“그냥 전하한테 고백을 하지 않고 굳이 뒤에서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그녀는 무척이나 직설적으로 물었다. 카엘리온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뭐, 지금 뭐라고…….”

그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지만 에반젤린은 여전히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좋아하면 고백을 하면 되잖아. 자주 보면서 왜 안 해?”

“너, ‘마일론의 눈’을 그런 거 알아보는 데에 쓰고 있었나?”

그는 애써 말을 돌렸다. 그러나 에반젤린은 그런 것에 낚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거 없어도 보여. 황녀 전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눈이 반짝거리는걸. 아까처럼 예민해지기도 하고.”

카엘리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모습은 숨기기 어렵다는 사실은 그도 잘 알았다. 유리엘이 아폴로니아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그도 쉽게 알았으니까. 다만 이 여자에게 들키는 것은 계획에 없었다.

“결혼할 사이라며. 그럼 사랑 고백 같은 것은 간단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

“뭐가 어려운데? 저번에 패리스 앞에서 나한테 고백한 것처럼 하면 되잖아. 내 여자라고.”

“컥, 콜록!”

에반젤린의 말에 카엘리온이 갑자기 기침을 했다. 너무나도 괴롭고 치욕스러운 기억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연기인 걸 알면 잊어버리라고!”

“어떻게 잊어? 그렇게 오그라드는 연기는 평생 본 적이 없는데.”

에반젤린은 무심하지만 잔인한 평가로 그를 괴롭혔다.

“말 돌리지 말고, 결혼할 사이면 고백을 하면 되는 거잖아. 마음이 없다면 있게 만들면 되고. 그 중요한 걸 여태 못 하고 있어?”

에반젤린이 덧붙였다. 카엘리온은 그 말이 자신의 정곡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한때 그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 둘 사이의 언약으로나마 약혼자가 되었으니, 아폴로니아가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거라고.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그를 믿고 아끼면서도 은근히 곁을 주지 않았다. 대공령에서 살 때는 자주 보지도 못했지만, 만날 일이 생겨도 그녀가 집중하는 화제는 딱 두 가지였다. 카엘리온의 공부, 그리고 그가 암살 시도를 피할 방법. 음악이며 어린 시절 이야기도 비교적 자유롭게 하는 유리엘과는 조금 달랐다.

몇 년 전에는 호기롭게 그녀의 마음을 가져올 거라고 유리엘을 자극했지만, 지금까지도 두 사람 사이에는 그가 끼어들 수 없는 유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황궁을 자주 오갈 수 있는 유리엘이 부러웠다.

“마음이 있다고 그 말을 하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

카엘리온이 중얼거렸다. 에반젤린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폴로니아에게 자유롭게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자신이 처음에 인지했던 때보다 훨씬 깊게 아폴로니아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

“중요하니까 더 쉽게 꺼낼 수 없는 거라고.”

그는 아폴로니아를 처음 본 순간부터 호감을 품었다.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의 대화를 엿듣고 그녀의 진짜 얼굴을 깨달았을 때, 페트라의 의심 아래 오랫동안 버텨 온 것은 물론 약혼에서 빠져나갈 온갖 대책을 세우는 그녀의 모습은 인상 깊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저주스러운 그 날, 아폴로니아는 무너지는 건물에서 카엘리온을 구해 냈다. 자신도 상처를 입어 가면서. 그 기억은 카엘리온에게 공포로 남았지만 그는 그날의 순간순간을 기억했다. 불길 사이로 보였던 아폴로니아의 표정,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눈가에 있었던 눈물도.

카엘리온의 어깨를 붙잡고 협박 섞인 청혼을 했을 때 그는 곧바로 승낙했다. 평생 누군가와 결속을 맺는다면 그 상대가 아폴로니아이기를 바랐다. 그 감정이 이성에 대한 호감인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후로 5년 동안, 그의 마음은 끝을 모르고 깊어져 갔다.

카엘리온은 셀 수 없이 그녀에게 감탄했다. 페트라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손목에 화상 흉터를 그려 넣어 아폴론의 후광을 지워 버리는 것부터, 아일린 이데나의 이름으로 대륙의 거부가 되어 가는 것까지. 아폴로니아의 모든 행보는 그를 놀라게 했다.

아폴로니아는 카엘리온의 뇌리 깊숙이에 자리 잡고 절대로 비켜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두려워했고, 존경했으며, 그녀에게 감탄하는 동시에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아폴로니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만날 때마다 아름다워지는 모습 또한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 마음이 너무나도 커지자, 그는 차마 아폴로니아에게 진지하게 고백할 수가 없었다.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도, 거절당하는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약혼자로서 그리웠다는 둥 농담을 던졌다.

“너무 소중하면 말을 못 해?”

에반젤린이 그의 회상을 방해하며 끼어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야?”

“너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군.”

카엘리온이 에반젤린에게 말했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콧등에 거슬리는 파리가 앉은 표범 같았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말을 못 들었어?”

카엘리온은 피식 웃었다. 에반젤린은 만난 지 며칠 만에, 심지어 그가 그녀를 포로로 삼은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무턱대고 호감을 표했었다.

“이대로 제국까지 끌려가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생각날 때 고백을 해야지.”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나도 이성적이라는 듯 말해 그를 당황시켰다. 그 고백에는 어떤 걱정도, 고민도 없었다. 생각이 들었기에 표현한 것이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내 연애 상담을 적극적으로 해 주는 태도는 뭔데?”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네 감정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잖아. 그리고 네가 정말로 가서 고백을 한다 해도 난 너를 찾아올 생각이야.”

그녀는 당당하게 웃었다. 카엘리온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 여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이상했다.

세상 모든 것이 자기 거라는 듯 당당한가 하면, 황제나 패리스 앞에서는 살고 싶은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무모했다. 흉물스럽고 인간에게 해로운 마물들을 집착하듯 수집하고 길들였고, 한 가지에 꽂히면 무섭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아폴로니아와 반대였다. 아폴로니아가 대의를 위해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면서 분노나 슬픔을 비롯한 감정을 한 자락도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살았다면, 이 여자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막 지르면서 사는 것이었다.

그녀는 감정에 솔직했고, 짐승과 그렇듯 사람과도 쉽게 친해졌다. 만난 첫날부터 지금까지 친근한 척 반말을 하는 바람에 카엘리온 자신도 비슷한 말투를 쓰게 된 것이 그 증거였다.

다만 카엘리온을 볼 때면 그녀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집중되어 있었다. 사냥감을 보는 듯한 시선. 그리고 그녀는 그 마음을 포장하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가지고 싶다.’

그것이 에반젤린의 감정이었다.

“너는 소유욕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다.”

“너야말로, 사랑은 소유욕을 동반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무시하려고 애쓰고 있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에반젤린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거 알아? 네가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황녀 전하는 그 잘생긴 기사와 데이트 중이라는 거.”

에반젤린의 말을 들은 카엘리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남의 사생활에 관심 꺼.”

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반젤린이 준 정보에 관심을 끄지는 못했다.

“네가 주군으로 생각하는 그 사람부터 ‘마일론의 눈’을 탐내는데, 무슨 사생활에 관심을 꺼? 사생활에 관심을 끄면 어떻게 정보를 모아?”

그녀는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 온 대륙 인사들의 비밀을 들고 있다는 것이 소름 끼쳤다. 그녀는 제국에 오고 며칠이 지나자 전과 다름없이 ‘마일론의 눈’으로 정보를 모으는 것 같았다.

이미 들켜서인지 그녀는 카엘리온에게는 그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지만, 사실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직접 다른 심부름꾼을 만나지 않으면서 그 일을 처리해 낸다는 것은.

‘마물과 관련이 있겠지.’

며칠 전 아폴로니아가 그 추측을 전달했을 때 그는 동의했다. 그리고 가까이서 관찰하자 더욱 그 말이 사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는 애매한 추측에 불과했고, 여러 가지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마물을 정보망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지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지만 엄연히 짐승이었고, 인간의 말을 상당 부분 알아듣는다 한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인간에게 정확히 전할 방법은 없을 것이었다. 이는 어떤 학자의 책을 보아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에반젤린은 직접 듣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온갖 사실들을 알았다. 매사에 조심스러운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의 행방처럼.

그녀는 아직 문틀에 기대어 선 카엘리온을 향해 몇 걸음 다가섰다.

“하긴, 어차피 결혼을 약속했다면 굳이 마음을 얻을 필요가 없으려나. 네 것이 될 테니까.”

“사람을 물건 취급하지 마. 나는 너와 다르다.”

카엘리온이 경고하듯 말했다. 표정도, 음성도 조금 전보다 무거웠다. 에반젤린은 살짝 물러섰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게 확실해지면 너도 달라질…….”

“거기까지만 하지.”

카엘리온의 목소리는 조금 전 외눈까마귀 이야기를 할 때와 비교도 안 되게 서늘했다. 이번에는 노골적인 협박에 가까웠다. 더 이상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에반젤린은 흠칫 놀라 말을 멈추었다.

“누이에게는 예를 갖춰. 너도 누이를 돕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에반젤린이 불만스럽게 입을 내밀었다.

“협박이야? 난 나름대로 정보도 주고 했는데.”

“그 뜻이 아니야.”

카엘리온이 말했다.

“패리스가 황제가 되면 네 나라가 어떻게 될지 너도 알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지.”

그 말에 에반젤린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황제는 제국 내에서 끝없이 세금을 높이는 한편, 라잔을 포함한 제후국에 대해서도 점점 더 많은 공물을 요구했다. 무언가 하나라도 거슬리면 군사를 끌고 쳐들어간다고 협박했으며, 실제로 전쟁을 자주 일으켰다.

별다른 이득이 없더라도 이는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기 충분했고, 그 공포는 국민들로 하여금 한때 대장군으로 활약했던 황제와 그를 닮은 패리스에게 어쩔 수 없이 기대게 만들었다.

패리스의 치세는 황제보다 더 심할 것이다. 그가 아는 정치는 가이우스 황제의 그것, 딱 하나뿐이었다.

“남을 관찰하는 게 그렇게 즐겁다면 다른 귀족들의 정황이나 살펴 줘. 누이와 협력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귀족들 누구? 황제파? 아니면 너를 지지하는 사람들?”

조금 전 카엘리온이 정색한 것을 잊고 싶은 듯, 에반젤린은 쾌활하게 말했다.

“에드윈 후작과 에스테반 자작 정도.”

카엘리온이 말했다. 에반젤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들의 이름을 따라 했다.

“에드윈과 에스테반…….”

“황제나 리페르 공작 부인과 최근 특별한 교류 같은 것이 있었는지 알아봐 줘.”

“없을 걸. 그쪽은 중립이잖아. 공작 부인이 요즘 자주 보는 건 포트러스 후작 쪽이야. 다만…….”

“다만?”

“곧 누군가를 지지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을 거야. 그 셋은 가끔 모이거든.”

카엘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아폴로니아도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제국의 귀족 중 다수는 표면적으로 황제와 패리스를 지지했다. 이는 황제가 즉위 후 수도를 중심으로 주요 작위를 자신과 친한 자들로 교체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에 반하는 자에게 잔인한 황제의 성정을 알아서이기도 했다.

다만 카엘리온이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후로 상당수의 귀족들이 은근히 그에게 지지 의사를 표했다. 황제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도 있었고, 황제와 패리스의 폭정을 싫어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에드윈 후작과 에스테반 자작은 신중하게 판단을 보류하는 쪽이었다. 둘 다 상당한 규모의 사병을 가지고 있었고, 영지가 수도에서도 멀지 않아 확보할 수 있다면 꽤나 의미 있는 세력이었다.

에드윈 후작의 경우, 정치가 아니라 사랑에 기반한 판단이기는 해도 딸 로렐라이의 사위로 유리엘을 점찍은 것으로 보아 설득의 여지가 있었다. 또한 그는 옛날 어린 아폴로니아에게 경제학을 가르친 적이 있는 스승이자 선황이 아끼던 학자였다.

그 후 변해 버린 아폴로니아의 모습에 은연중에 실망을 내비쳤던 그는 현실과 타협하여 대외적으로 가이우스를 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이쪽저쪽으로 흔들리고 있으리라는 것이 아폴로니아의 판단이었다.

“트리온 후작도 같이 모여. 접근하는 게 목적이라면 그쪽도 같이 해.”

에반젤린이 덧붙이자 카엘리온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트리온 후작은 꽤 오랫동안 황제를 지지해 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최근까지 에드윈 후작과의 관계가 썩 좋지도 않았었다. 양쪽의 딸들이 사교계에서 라이벌로 자리 잡으며 서로를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트리온 후작은 10년 전에 형을 몰아내고 작위를 차지한 자야. 그 배경이 되어 준 것이 황제였고.”

“옛날 일은 몰라. 분명한 건 그 셋이 비밀스럽게 교류를 한다는 거야. 그리고 언제부턴가 리페르 공작가에 발걸음을 끊었어.”

에반젤린의 정보는 틀리지 않았다. 그 점은 카엘리온이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에드윈 후작은 내가 접촉하려 했을 때도 유보적이었지. 그 말은…….”

“패리스도 별로고 너도 별로라고 생각하는 거.”

카엘리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에반젤린은 뭐가 잘못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세력을 가졌지만 계속해서 중립을 고집하는 귀족 중 상당수는 패리스도, 카엘리온도 완벽하게 지지하지 않았다. 주목을 좀 받았다고는 하나, 오랜 기간 황가와 함께해 왔던 그들은 멀쩡한 황실의 직계로 행세하는 패리스를 두고 먼 방계를 지지하는 것을 꺼렸다.

패리스에게 제왕으로서의 면모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황제의 현 정책에 반감을 가졌다고는 해도 그들은 패리스를 지지했을 것이다.

“대충은 짐작했던 대로군.”

카엘리온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와 아폴로니아는 귀족들의 동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결과 결론은 하나였다.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사람은 아폴로니아라는 것. 다만 그녀가 그간 보여 주었던 유약한 모습으로는 그들의 지지를 살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그녀가 가면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할 때였다.

* * *

“……언제부터 계획한 거야?”

“뭘 말입니까?”

당황한 아폴로니아의 물음에 유리엘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는 언뜻 아폴로니아의 질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듯 보였다. 그러나 살며시 올라간 그의 입꼬리는 유리엘이 그녀의 의문을 예상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었다.

“뭘 말입니까라니…… 여긴 언제 예약한 거야?”

두 사람은 수도에서 가장 이름난 레스토랑인 ‘아비엔느’에 와 있었다.

“여긴 한 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절대로 못 들어오는 곳이야. 아버지나 고모님, 아니면 패리스 정도는 돼야 예외를 허락하지. 네 이름으로는 절대로 이런 자리를 예약할 수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정확한 말씀은 아니시군요. 아일린 이데나의 이름을 팔면 못 들어갈 곳이 없으니까요. 물론 전하의 이름을 팔지는 않았습니다.”

아비엔느는 수도 한복판에 지어진 성 같은 곳이었다. 건물을 이루는 돌 하나하나의 크기며 빛깔에 주인의 고급스러운 취향이 반영되어 있었고, 건물을 둘러싼 장미 정원 또한 화려했다. 색색의 장미가 조화롭게 피어서 저마다의 향기를 발산하는 거대한 정원은 수도의 명물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많은 손님들이 그 정원을 한 번 둘러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레스토랑을 방문했다.

‘아비엔느’의 모든 손님들이 탐내는 자리는 그 정원 한가운데에 있었다. 마법을 동원했는지 1년 내내 화창한 날씨를 자랑하는 그곳은 레스토랑의 다른 자리와 동떨어진 채, 흐드러지게 핀 붉은 장미로 둘러싸인 모습이었다. 환상적이고 아름다웠다.

유리엘이 ‘아비엔느’에 입장한 순간 점장은 그와 아폴로니아를 장미 정원의 한가운데 자리로 안내했다.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정원의 넓은 대리석 테이블은 최고급 음식으로 가득 채워졌다.

“제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요.”

황금빛 액체가 든 샴페인 잔을 들며 말하는 유리엘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는 쉽게 사실을 얘기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알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 날을 준비해 온 것이 분명했다. ‘아비엔느’에 유리엘이 입장한 순간부터 그를 특별히 대접하는 점장을 보면 알았다.

그는 단순히 유리엘의 외모나 존재감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었다. 깍듯하고 각 잡힌 태도는 분명히 훈련된 것이었다.

차라리 그들이 아폴로니아를 알아보고 특별한 대우를 했다면 황족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 때문이라고 이해했을지 모른다. 존재감이나 드러나는 세력이 없더라도 그녀가 황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마담 젠슨의 살롱을 나선 뒤 아폴로니아는 벨라들의 약이며 물건으로 외모를 조금 바꾸어 놓은 상태였다. 친하지 않다면 흑발에 녹안의 모습을 한 그녀를 알아볼 사람은 없었다. 지나친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 그리고 유리엘에게 자신의 에스코트를 온전히 맡기기 위해 한 선택이었다.

점장이나 종업원들은 분명히 그녀가 아닌 유리엘을 주목했다. 유리엘의 일행인 그녀에게도 모든 예의를 갖추어 대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경외심 섞인 눈이 향하는 것은 유리엘이었다.

“구운 소고기 요리는 ‘아비엔느’가 가장 자랑하는 메뉴입니다.”

친절하게 그녀의 접시 위에 고기를 썰어 주며 유리엘이 말했다.

“일곱 가지 소스 중 어느 것을 곁들여도 어울리죠.”

그들 앞에 놓인 음식은 실로 화려했다. 바구니에 담긴 채 서빙된 빵의 종류만 일고여덟 가지가 넘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크루아상이며 초콜릿과 각종 잼이 든 세 가지 종류의 에클레어, 버터향이 가득한 브리오슈 등 하나하나가 침이 고일 정도로 완벽하게 구워져서 따뜻한 상태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열 종류가 넘는 잼이며 꿀, 초콜릿 등이 있었고, 테이블의 중앙에는 구운 소고기와 칠면조 요리에 적절한 채소를 곁들인 접시들이 아름답게 장식된 채 은 접시에 담겨 있었다.

샴페인의 종류는 세 가지였다. 한 번 마시면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한 분홍빛의 술, 향기만 맡아도 취할 정도의 독한 투명한 술, 그리고 빛깔이 아름다워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 없는 황금빛의 술.

“유리엘.”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었으나 유리엘은 그녀의 말에 대답해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하아…… 일단 알겠어.”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유리엘이 가지런히 썰어 준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육즙과 버터가 함께 섞여 혀끝에서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어떻습니까?”

“……‘아비엔느’의 음식은 황궁의 것보다 훌륭하다더니.”

아폴로니아는 말을 하다 말고 브리오슈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정말이었네.”

살면서 음식의 질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단순히 고급 재료를 쓴 것이 아니라 굽기의 정도며 재료의 조화에 양까지, 모든 것에 정성이 들어 있었다.

“레오 아비엔느는 제국 각지에서 실력 있는 소년, 소녀들을 발굴해 무상으로 교육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요리를 해 왔던 요리사들은 서로의 능력을 잘 알기에 결과물이 서로 잘 어울린다고 하더군요.”

유리엘은 아폴로니아의 잔에 샴페인을 따라 주며 말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약간의 장난기를 담은 채 빛나고 있었다.

“딱 한 모금씩만 드십시오. 취하면 안 되니까요.”

“이제 그렇게 약하지 않아.”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아폴로니아는 이마를 짚었다. 오래전 리샨에서 술을 한 잔 마시고 취해 유리엘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마셨던 건 타냐의 할머니가 직접 담근 독한 술이었단 말이야. 일반 샴페인과는 비교가…….”

유리엘은 그녀의 항의를 듣지 않았다. 세 개의 작은 샴페인 잔에, 그는 각각 한 모금이면 끝날 정도의 액체만을 따랐다. 아폴로니아는 잠자코 그의 말에 따랐다.

“……맛있어.”

한 모금 한 모금이 황홀할 정도였다. 황궁에서의 고급 음식에 익숙한 아폴로니아에게도 이는 꽤 새로운 맛이었다. 세 가지 샴페인은 모두 맛이 달랐지만 서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최고의 맛을 선사했다.

“따로 마시는 것보다 더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감탄하는 아폴로니아를 보며, 유리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각각 어디서 온 술인지를 알아?”

아폴로니아는 시험하듯 물었다. 공부를 하고 교양을 쌓았다고는 하나 술에 대해서는 옷만큼이나 관심이 없어 보이는 유리엘이 아폴로니아도 처음 마셔 보는 샴페인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몇 년 전 그에게 귀족들이 기본 소양으로 와인이며 샴페인의 종류에 대해 배운다고 말해 준 적은 있었지만 유리엘이 진지하게 이를 배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순서대로 에일라르 지방의 것, 아몬 백작 영지의 것, 그리고 아르만 왕국에서 온 것입니다. 생산 연도에 대해서는…….”

“아, 아니, 알겠어.”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술술 대답하는 유리엘의 모습을 믿기 어려웠다. 갑옷이 아닌 고급스러운 일상복 차림으로 샴페인 잔을 든 그는 전장에서 활약하던 기사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내가 좋아할 줄을 어떻게 알았어?”

“전하께서는 달콤함 속에 약간의 쓴맛을 즐기시니까요.”

그의 대답에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자신의 입맛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말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알아?”

“전하에 대한 건 그냥 압니다.”

유리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의 청록빛 눈이 다시 한 번 웃었다.

“다른 것도?”

아폴로니아는 순간 호기심이 들었다. 유리엘이 자신을 얼마나 관찰했는지, 얼마나 잘 아는지 궁금해졌다.

“물론입니다.”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에 썰어 준 고기 조각을 삼키고 차 한 모금을 넘긴 다음 물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마야가 만든 사과 파이입니다. 한동안 못 드셨죠.”

“처음 가졌던 애완동물은?”

“‘흰 장미’라는 이름의 백마였습니다.”

“스무 살 생일에 입었던 옷은?”

“하늘색 드레스를 입으셨습니다. 레이스가 많고 드레스 자락에는 수정이 박힌 것이었죠. 저는 연회에 가지 못했지만 그날 밤 전하에게 대공령의 소식을 전하러 찾아왔었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색깔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원래 모든 색은 각각 어울리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시니까요.”

“제일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은?”

“독특하게도, 파스칼 1세와 대적하다가 처형되었던 대해적 레일라 루페리온을 좋아하십니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몇 가지는 아폴로니아 자신조차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리엘의 대답 중 틀린 것은 없었다.

“더 할까요?”

“……어떻게 그걸 다 알아?”

아폴로니아는 벨라들 덕분에 녹색을 띤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질문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관심이 있으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유리엘이 자신의 샴페인 잔에 입술을 가져가며 말했다. 붉은 입술을 타고 넘어가는 황금빛 술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5년이나 떨어져 있었으면서, 쓸데없는 데에 관심을 너무 쏟은 거 아니야?”

“전하의 취향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쓸데없다니요.”

유리엘은 정색하며 말했다.

“유모였던 마야도 너만큼 나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을 거야.”

아폴로니아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전하에 대해 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딱 한 명이겠죠.”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그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았다.

“아드리안 리스 말입니다. 전하 곁에 밤낮으로 붙어 있는.”

어딘가 투덜대는 듯한 말투였다.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주인이 다른 애완동물을 쓰다듬으면 다가와서 툭툭 치는 거대한 강아지 같았다.

“디저트를 가져오라 하지요. ‘아비엔느’에는 마야가 만든 사과 파이를 제외하면 전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딸기 타르트를 비롯해서 훌륭한 음식이 많답니다.”

유리엘의 말은 이번에도 맞았다. 아폴로니아는 딸기가 들어 있는 디저트는 다 좋아했다. 잘 만들어진 타르트라면 더더욱. 두 사람 앞에는 곧 온갖 종류의 케이크며 타르트, 초콜릿, 마카롱 등 가지각색의 디저트가 화려한 접시에 담긴 채 놓였다.

“유리엘, 이제 정말 말해 줘. 대체 여기는 어떻게…….”

“비체 백작님.”

아폴로니아가 말을 채 마치기 전에, 마지막 마카롱 접시를 가지고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온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연푸른색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나이며 옷차림이 다른 종업원과 달랐다. 그는 반가운 표정으로 유리엘에게 인사하더니 아폴로니아에게도 예의를 갖추었다.

“오랜만이군.”

유리엘도 그를 잘 안다는 듯, 그리고 그가 직접 와서 말을 걸 것을 예상했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 짧은 인사말이었지만 연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반가움으로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그간 걸음이 뜸하셨다가 최근에 저희 식당을 예약하셨다는 말을 듣고 어찌나 반가웠는지…….”

그는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한 표정이었다. 다른 종업원들의 훈련된 공손함과는 조금 달랐다.

“레오 아비엔느입니다.”

유리엘이 아폴로니아에게 소개했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남자를 보았다.

“이 레스토랑의 주인이로군.”

“반갑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저희 가게에 들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아폴로니아의 한쪽 눈썹이 의아함으로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레오 아비엔느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마담 젠슨과 비슷한 기질을 가진 그는 자신의 레스토랑이며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음식점은 모두에게 공평해야 한다는 이념으로, 그는 모든 손님을 예약 순서대로 받았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가리지 않았고 일찍 예약해서 정해진 가격을 지불하기만 하면 모두에게 최고급의 음식을 대접했다.

언젠가 파나스의 국왕이 직접 찾아와 식사를 하려 했으나 예약이 없다는 이유로 쫓겨났다는 일화는 꽤나 유명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유일한 예외는, 아폴로니아가 알기로는 황제와 패리스, 그리고 어쩌면 페트라 리페르 정도였다. 그렇기에 정원 한가운데의 자리를 예약한 유리엘이 놀라웠던 것이다.

“음식은 입이 맞으신지요.”

그러나 제국의 귀족들을 들여보내 달라고 애원하게 만든다는 이 대단한 남자는 유리엘과 아폴로니아를 오랜 친구를 보는 듯한 반가움으로 대했다.

“아주 잘 맞는군. 최근에 먹어 본 요리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인상적이야. 수도의 자랑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네.”

그녀의 칭찬에 레오 아비엔느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그는 아폴로니아를 유리엘의 친우인 귀족 아가씨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비체 백작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종업원들의 태도며 레오 아비엔느 본인의 인사를 보았을 때, 유리엘은 분명 그와 특별한 친분이 있었다.

“저와의 인연이라면…….”

레오 아비엔느는 회상에 잠겨 대답했다.

“제 아들은 황실 기사단의 말단 기사입니다. 녀석이 2년 전 에일라르의 마물 퇴치전에 투입되었을 때 비체 백작님과 연을 맺었죠.”

아폴로니아는 에일라르의 전투를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카엘리온과 유리엘은 가장 힘든 전투에 함께 투입되었고, 거대한 마물 수백 마리를 퇴치하고도 멀쩡하게 살아 나와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었다.

“명령을 잘못 듣고 숲 속에 혼자 고립됐던 제 아들을 구해 준 것이 비체 백작님이셨습니다. 그 후로 쭉 인연을 유지하고 있죠.”

레오 아비엔느는 살짝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맺었다.

“명령이 잘못 전달된 것은 센이 아니라 중간 전달자의 책임이었지. 센은 잘 있나?”

유리엘이 물었다. 센은 아마 레오 아비엔느의 아들인 듯 했다.

“예, 기사를 그만둔 후로 드디어 제 뒤를 잇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지금은 주방에서 견습생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잘 됐군. 원래 센은 퇴치전 중에도 요리를 담당하고는 했으니까.”

“실력이 괜찮다면 레스토랑을 물려줄 생각입니다. 물론 어떻게 되든 비체 백작님은 언제든지 방문하셔서 무료로 음식을 드시면 됩니다. 저희의 영광이니까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다. 아폴로니아는 굳이 끼어들지 않았으나 흥미롭게 유리엘의 모습을 관찰했다.

사실 그녀는 유리엘이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제대로 본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은 언제나 비밀스럽게 만났으니까. 아폴로니아가 아는 유리엘의 모습은 두 가지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수. 그리고 아폴로니아 앞의 커다란 강아지.

그러나 이 날의 유리엘은 달라 보였다. 자신의 매력을 정확히 알고 이를 이용해 마담 젠슨의 호감을 사는 모습도, 까다로운 레오 아비엔느와의 친분을 오래 유지하는 모습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타인으로부터 특별한 호감을 사고 유지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배려심도, 관찰력도 모두 필요했다.

레오 아비엔느는 아들을 구해 준 은혜로 유리엘을 특별 대접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아폴로니아는 알았다. 깐깐한 그는 유리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했으며, 그의 방문을 무척 반가워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아들에 대한 답례는 금전 같은 것으로 대신했을 것이다.

유리엘은 이미 사교 활동을 어렵지 않게 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레오 아비엔느가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방해가 아니야. 레이디께서도 자네를 보고 흥미롭게 관찰하고 계시니까.”

레오 아비엔느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아폴로니아에게서 시선을 완전히 떼지 않았던 유리엘이 말했다. 그는 아폴로니아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다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이야. 유명한 레오 아비엔느를 직접 만나게 되어 나도 반갑군.”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 아비엔느가 겸손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말씀하신 것을 준비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주면 고맙겠군.”

레오 아비엔느는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준비한 거?”

아폴로니아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음식이 더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대리석은 이미 색색의 디저트로 물 샐 틈 없이 꽉 차 있었으니까.

“음식이 아닙니다.”

유리엘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는 익숙한 손짓으로 아폴로니아에게 세 가지 샴페인을 다시 한 모금씩 따라 주었다.

“차례로 드십시오. 다만 이번에는 분홍색을 마지막에요.”

그는 잔의 순서를 바꾸어 아폴로니아 앞에 놓아 주었다.

“왜?”

“마지막 맛은 달콤하게 남기를 바라니까요.”

유리엘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미소 지었다. 넥타르를 따라 주는 신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매혹적이었다.

“마지막 맛이라니, 음식을 더 준비한 건 정말 아닌가 보네.”

아폴로니아가 말하자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입니다. 전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곡.”

그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열 걸음 쯤 떨어진 곳의 장미 넝쿨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게 뭐…….”

넝쿨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양옆으로 열렸고, 그 뒤로 작은 단상이 드러났다. 그 위에는 네 명의 악사들이 각자의 악기를 들고 준비하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많은 것을 준비했다.

“좋아하는 곡이라…… 로엔 에드안의 왈츠? 아니면 페르센의 광시곡?”

아폴로니아는 자신이 좋아했었던 유명한 곡들을 꼽아 보았다. 그러나 유리엘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리샨에서 들었던 곡?”

아폴로니아는 탄의 리라 연주를 떠올렸다. 따라해 보려던 자신의 시도도. 무참하게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건 제가 좋아하는 곡입니다. 전하 외의 사람이 연주하는 건 관심 없지만요.”

유리엘은 대답을 마치고 악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동시에 연주를 시작했다.

“이건…….”

첫 소절을 듣는 아폴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러나 오랫동안 들어 보지 못한 곡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마야에게 물어봤습니다. 오래전에요.”

네 명의 악사들은 각자의 악기를 연주해 완벽한 화음을 이루어 냈다. 날씨며 분위기, 음식에 모두 어울리는 솜씨 좋은 연주였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를 자극하는 것은 그들의 실력이 아니었다.

“……악보를 구할 수도 없었을 텐데.”

“기억하는 시녀가 있었습니다. 마야를 통해 수소문해서 적어 달라고 했죠.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폴로니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봄 날씨에 어울리는 산뜻한 연주였지만 그녀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잊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했어?”

“전하께서는 이런 것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연주하는 곡은 엘레니아 황녀가 아폴로니아의 8살 생일에 직접 작곡해서 선물했던 곡이었다.

화려한 연회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그 날 아폴로니아는 선황의 시험 하나를 마치고 피곤한 상태로 연회에 얼굴만 비추었었다. 방으로 돌아가 잠들려던 그녀에게 조용히 찾아온 엘레니아 황녀는 아폴로니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했었어야 하는 일인데. 어머니는 항상 미안하단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하려 했다. 자신은 공부가 좋다고, 좋은 황제가 되고 싶다고.

시녀들 몇 명만이 있는 그 침실에서, 엘레니아 황녀는 가지고 온 리라를 연주했다. 아폴로니아를 위해 직접 작곡한, 밝고, 아름답고, 청량한 그런 곡이었다.

리라를 잡은 엘레니아 황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정치에 관심이 없고 유약해서 선황을 실망시켰던 그녀.

아름다운 머리칼과 남들보다 조금 더 강한 회복력을 제외하면 아폴론을 닮은 구석이 없다는 말을 듣는 그녀였지만 아폴로니아는 알 수 있었다. 어머니도 할아버지만큼이나 아폴론의 피를 짙게 타고났다는 것을. 그는 태양의 신이고 활의 천재였으나 음악의 신이기도 했으니까.

이것은 아폴로니아가 가진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잊고 지내 왔지만.

“……잘하네.”

악사들의 연주는 엘레니아의 그것과 많이 달랐다. 더 화려하고 풍부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는 강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유리엘을 보았다. 그의 눈은 악사들을 향해 있었지만 아폴로니아는 그의 신경이 여전히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아폴로니아가 감상에 젖거나 슬플 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까지 정확하게 알았다. 아폴로니아는 조금 전 유리엘이 따라 준 샴페인을 그가 가르쳐준 순서에 따라 마셨다. 쓴맛을 먼저, 달콤한 것은 마지막에.

“마지막 맛은 달콤하게 남기를 바라니까요.”

조금 전 유리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 모금의 술, 그리웠던 음악. 그것으로 아폴로니아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가장 달콤한 맛으로.

유리엘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그리움에 공감하며 함께 가슴 아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계획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설렜다.

아폴로니아에게 달콤함으로 남을 것은 엘레니아 황녀에 대한 기억뿐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준비한 사람, 이 순간, 이 기억을 만들어 준 사람. 아폴로니아는 앞으로 엘레니아 황녀를 떠올릴 때마다 유리엘을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그는 벅찬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연주가 끝나고 아폴로니아가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보며, 유리엘은 조금 전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깊게 숨을 내쉬었다.

사랑일까, 이상한 집착일까?

아폴로니아는 분명 유리엘의 의도대로 감동과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세심하게 안배된 계획의 성공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주도권을 쥔 것 같지가 않았다.

‘당연한 일이겠지.’

그도 알았다. 유리엘이 아폴로니아에게 끼치는 영향이 작은 산들바람 같은 것이라면,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것은 거대한 폭풍이었다.

슬픔, 기쁨, 그리움, 안도…… 아폴로니아가 미세하게 드러내는 작은 감정의 조각 하나하나조차도 유리엘을 미치게 만드는 자극이었으니까.

* * *

“즐거우십니까?”

유리엘이 아폴로니아에게 물었다. 그의 눈은 장난기를 살짝 품은 채 웃고 있었다.

“음…… 일부러 이러는 거야?”

아폴로니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아니 거대한 빵이 들려 있었다. 입에 넣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기의 얼굴만 하고, 속에는 고기와 치즈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동그란 빵이었다.

“백성들이 많이 접하는 음식을 맛보고 싶다고 하셔서.”

“난 흔한 음식점 같은 걸 얘기한 건데.”

“이 근방에서 제일 알려진 건 마들렌의 빵집입니다. 아까 줄 선 사람들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두 사람은 수도의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마침 그날은 시장이 열리는 날이었기에 길거리에 온갖 물건이며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분명히 아폴로니아가 원해서 온 것이었다. 그녀는 백성들의 생활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이 무엇을 즐기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 모든 것이 알고 싶었다.

평범한 음식을 먹고 싶다는 아폴로니아에게 유리엘이 쥐여 준 것은 커다란 샌드위치 같은 것이었다. 부드럽고 풍성하고 소스도 독특해서 아주 맛있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넌 안 먹어?”

아폴로니아는 동그란 샌드위치 같은 그것을 한 입 베어 물며 물었다. 큰 입을 먹었지만 조금도 먹은 티가 나지 않았다.

“저는 점심을 많이 먹어서 배가 부릅니다.”

아폴로니아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빵을 먹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 빵의 맛은 크기만큼이나 대단했다.

“꽃 사세요! 꽃!”

시장 끝까지 구경을 마쳤을 무렵, 두 사람의 앞에 열 살가량의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그는 한쪽 팔에 장미꽃이 가득 든 바구니를 끼고 있었다.

“잘생긴 형님, 예쁜 연인에게 꽃을 선물하세요!”

아이는 빙글빙글 사람 좋은 웃음을 띤 채로 유리엘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바구니 속 장미 한 송이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와 같은 아이들은 여럿 있었다. 이 남자아이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손님을 찾아다니는 듯했다.

유리엘은 아이를 보는 아폴로니아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말했다.

“한 송이만 다오.”

“잘 생각하셨어요! 잘생긴 형님!”

아이는 꽃을 건네고 손을 내밀었다. 일을 많이 했는지 거칠어 보이는 손에는 얼룩이 묻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이는 누더기 같은 차림새였다. 아폴로니아는 순간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주머니를 뒤져 금화 하나를 꺼냈다.

“자, 여기…….”

“여기 있다.”

아폴로니아가 금화를 내미려는 순간, 유리엘이 그녀의 손을 급히 막으며 아이에게 동전을 쥐여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아이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왔던 길을 다시 뛰어서 돌아갔다.

“유리엘?”

“죄송합니다, 전하.”

놀란 것은 아이만이 아니었다. 아폴로니아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리엘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는 아폴로니아가 하려는 행동을 갑작스럽게 막은 적이 없었다.

“가난한 아이에게 큰돈을 쥐여 주는 것은 위험합니다. 적어도 여기에서는요.”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설명했다.

“그건…….”

“주변에 아이를 주시하는 눈이 있습니다. 아이는 혼자 꽃을 주워다가 파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명령을 듣고 있는 겁니다. 저런 아이들은 전부 같죠.”

유리엘은 딱 잘라 말했다. 아폴로니아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과연 유리엘의 말대로 소년과 비슷한 어린아이들이 이쪽을 흘깃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저쪽은 그나마 번화했고 사람이 많아 안전한 편입니다. 그러나 시장을 벗어난 이런 곳에서 함부로 돈이 많은 티를 내면 큰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의 말이 맞았다. 오랜만의 외출에, 유리엘과 함께 하는 하루에 조금 들떴던 건지, 아폴로니아가 실수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서있는 곳은 인적이 드물고 어두웠다. 시장의 끝에서 몇 걸음 왔을 뿐인데도 불빛이나 사람이 훨씬 적었다.

“어쩌다 골목까지 와 버린 제 잘못입니다.”

유리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다시 돌아가면 될 일입니…….”

시장 방향으로 몸을 돌린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조금 전까지는 있었던 장신구를 파는 시장이 반쯤 사라졌던 것이다. 멀리 불빛이며 잡화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들 두 사람 가까이에 있던 상인들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잠시만 그대로 계십시오.”

유리엘이 아폴로니아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천천히 저쪽으로 걸으시면 됩…….”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는지 차분하게 설명하던 유리엘이 말을 멈추었다. 두 사람을 둘러싸고, 몇 개의 그림자들이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 곁에 바짝 붙어 계십시오.”

유리엘은 몸을 굳힌 채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지켜보았다.

몇 걸음 앞까지 오자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다섯쯤 돼 보이는 그들은 모두 성인이었으나 조금 전의 아이와 비슷한 누더기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거 부자 양반들이 여기까지 오셨구만.”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말했다. 회색 수염이 덥수룩했지만 나이는 아직 마흔이 안 돼 보였다.

“긴 말 안 할 테니 가진 거 다 내놓으시오.”

그가 말하자 그 뒤를 따라온 그림자들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유리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가 순간 긴장했던 것은 그들이 아폴로니아나 자신을 노린 훈련된 암살자라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더기 차림의 이 다섯 사람은 그저 동네에서 강도짓을 해서 먹고 사는 건달들로 보였다. 수준이라고 해 봤자 몇 년 전의 벤, 탄, 룬 삼형제와 차이가 없을 것이었다.

“우리 정도면 사람을 잘 만난 거지.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밤길을 돌아다니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거든.”

그 뒤에 있던 조금 더 젊은 남자가 느물거리며 한 마디 덧붙였다. 조금 전 안도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유리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그림자들과 아폴로니아 사이에 단단하게 버티고 섰다.

“10초만 주십시오.”

유리엘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는 굳이 누더기 차림의 강도들에게 그 말이 들리지 않도록 할 생각이 없었다.

“얼굴은 기가 막히게 잘생겼는데 정신은 좀 이상한가 보군.”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비아냥거렸다. 그는 여유롭게 유리엘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10초가 지나면 가진 걸 다 내놓으려는 모양……. 으윽!”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유리엘의 긴 다리가 그의 몸을 스쳤고, 남자는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퍽!

“어어? 형님…… 윽!”

퍼억!

“아야야야야!”

“아윽!”

짧은 비명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다섯 명 모두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각각이 배, 팔, 등, 어깨 등을 붙잡고 있었다.

“더 있어?”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그녀는 손에 든 빵을 떨어뜨리지도 않고 있었다. 유리엘보다 훨씬 차분해 보였다.

“그걸 아직 드시고 계십니까? 기대했던 음식과 다르다고 하시더니.”

“버릴 수는 없잖아. 먹고 있는 건 아니고 이따가 먹을 거야. 버릴 틈도 없었고 버릴 이유도 없잖아.”

젊은 남자의 희롱에 분노했던 유리엘과 달리 아폴로니아는 그들을 본 순간부터 그다지 긴장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살수였으면 어쩌려고 그리 태평하십니까?”

“몇 년 전도 아니고 살수가 나를 노릴 일이 없으니까……. 게다가 요즘 공작가는 사업 때문에 정신이 없어.”

유리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치밀하고 조심스러운 아폴로니아는, 유독 자신의 몸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모할 때가 있었다.

“네가 있으니까 걱정을 덜한 거야. 아니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아폴로니아는 변명하듯 말했다. 녹색으로 변형시킨 그녀의 눈은 사선 아래를 보며 내리깔고 있었다. 얼굴만 한 빵을 들고 중얼거리는 그 모습은 유리엘의 눈에 순수한 아이처럼 보였다. 한 마디로, 귀여웠다.

“가까이에는 없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요.”

유리엘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몇 마디만 물어볼게.”

아폴로니아의 말에 유리엘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 순수한 아이 같던 모습이 사라지고 진지한 통치자로서의 눈빛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유리엘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었다.

“……물어볼 것이 있으시다면 궁으로 데려가시지요. 여긴 지저분하기도 하고…….”

유리엘이 돌려서 반대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가 있는 이상 대단히 위험할 것은 없었으나 유리엘은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뜯어보며 느물거리던 것들이 그녀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 물론 그는 아폴로니아가 거절할 것을 알고 있었다.

“잠깐이면 돼.”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가와서 수염이 난 남자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뭘 하던 사람이지? 어쩌다가 거리에서 강도짓을 하게 된 거야?”

“으으윽…….”

남자가 계속해서 배를 잡고 신음했다. 그러나 유리엘이 한 번 쏘아보자 그는 곧바로 공손한 자세가 되어 대답했다.

“데인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땅을 가진 농부였으나 십수 년 전 땅을 다 잃어 거리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유리엘은 남은 네 사람을 차례차례 쏘아보았다. 그들은 얌전히 데인을 따라서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아벨입니다. 데인 형님의 동생이고요, 형님과 함께 땅을 잃을 무렵 팔 한쪽을 못 쓰게 되어…… 잘못했습니다.”

“엘이라고 합니다. 몇 년 전까지는 장사를 했는데 세금을 견디지 못해 파산을 해 버려서…….”

“저는 궁에서 근무하시던 부모님이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매를 맞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들은 각자의 사정을 짧게 설명하고 아폴로니아의 처분을 기다렸다.

아폴로니아는 마지막으로 말한 자그마한 덩치의 사람에게 물었다. 처음 네 사람이 다 쓰러지자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한 그는 머리가 짧아 소년이라고 생각했으나 목소리를 들어 보니 여자인 것 같았다.

“너의 부모님은 궁에서 무슨 일을 하셨지? 말 한 마디 잘못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화, 황궁의 문지기였습니다. 그 일은…… 사담으로 한 말을 높으신 분이 들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 했는데?”

“서, 선황 폐하 때가 더 좋았다고…….”

아폴로니아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실제로 황제가 처음 등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지나치게 무거워진 세금이며 몇몇 귀족에게만 유리하도록 바뀐 정책으로 선황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녀는 데인과 그 동생인 아벨에게 물었다.

“땅을 잃었다는 것은 뭐지?”

“어느 귀족으로부터 대대로 가지고 있었던 땅을 팔라는 제안이 들어와서…… 거절했더니 어느 날 저희도 모르게 조작된 서류를 들이대며 나가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반항하다가 맞아서 한쪽 손이…….”

데인은 말을 흐리며 아벨의 한쪽 소매를 들어 보였다. 소매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귀족은 누구인가?”

“아, 아몬 백작입니다.”

아폴로니아의 표정이 조금 더 흐려졌다. 유리엘은 몇 년 전 사냥 대회에서 만났던 아몬 백작과, 에반젤린을 건 패리스의 시합에 참가했던 그 아들을 기억했다. 그는 리페르 공작가의 먼 친척이었다.

“저, 저희도 다른 선택이 있었더라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정직하게 세금을 내며 사는 것은 너무나도 힘이 들어서…….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애초에 장사를 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엘이라고 소개한 사람이 호소하자 나머지 네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도 시장은 평범하게 장사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아폴로니아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나 표정으로 짐작했을 때 그들의 말이 사실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조, 조금 전 장사를 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바로 저희들입니다…….”

데인이 진땀을 흘리며 고백했다. 그는 골목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위치에는 조금 전까지 시장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물건들이 담긴 보따리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장사를 하다가 다른 기회가 보이면, 그러니까…….”

“강도짓을 한다는 거로군.”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하는 데인을 대신해서 아폴로니아가 그 문장을 맺어 주었다. 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은 다 다르지만 그저 정직하게 장사만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희처럼 행인을 좀 털어먹거나, 아니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세금을 조금 덜 내거나 하는 식이죠.”

“언제부터 그랬지?”

“10년쯤 전부터 점점 상황이 좋지 않게 변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은 힘들어지고, 이런 자잘한 불법은 재수가 좋으면 안 걸릴 수 있으니까요.”

아폴로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더기 차림의 강도들은 그녀의 마음이 약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몇 마디를 덧붙이며 호소했다.

“저, 정말로 저희는 큰 욕심이 없습니다! 그저 먹고 살 길이 없다 보니…….”

“저희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수도에 부랑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옛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라구요!”

“수, 수도뿐이 아닙니다. 저희 고향 땅에 가 보면…… 지금 제국에서 치안이 멀쩡한 곳은 에핀하르트 대공령이나, 리샨을 비롯한 일부 남부 지역 정도일 겁니다. 이데나 상단주의 영향력이 강하니까요. 그분은 자선 사업도 워낙 많이 하시니까…….”

한 마디 한 마디를 듣는 아폴로니아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아가씨를 공격한 자들입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유리엘이 차갑게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이들에게 동정심을 가질지 모르나 그가 생각하는 정의는 그녀와 달랐다. 아폴로니아를 상대로 공격을 가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이유도 사정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잘 기억해 둬.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자.”

잠깐의 침묵 끝에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유리엘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 말을 따랐다. 이곳에 더 있는 것보다는 그녀의 말대로 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다.

“도망갈 생각 하지 마라. 나나 아가씨의 허락이 있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면 곧바로 죽여 버릴 테니 그렇게 알고 처분을 기다려라.”

그는 몸을 돌리기 전 여전히 꿇어앉은 다섯 명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들 전부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십니까?”

유리엘이 아폴로니아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조금 전의 골목을 벗어나 작은 언덕 위에 올라와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큰 나무가 없기에 시장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반짝이는 불빛과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들이 매일 마주하는 가난과 위험이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조금 전만큼 어둡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밝지도 않았다. 그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주술이 풀려 버린 덕분에 아폴로니아의 머리칼은 다시 원래의 밝은 금발로 돌아와 있었다. 노을빛의 눈동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하께서는 이미 많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들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유리엘이 덧붙였다.

“이데나 상단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일수록 백성들의 삶의 질은 더 좋습니다. 그것만 보아도…….”

“알아.”

아폴로니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

“아까 그 자들이 한 말에는 과장이 섞여 있다는 것도, 영지민이 잘사는 지역이 있다는 것도, 내 상단이, 자선 사업이 나름대로 그들의 행복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그럼 뭘 걱정하십니까?”

“시간이 정말 없구나 생각했을 뿐이야. 아버지로부터 황위를 되찾아 올 시간이. 아버지나 페트라나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은 권력을 다지는 거니까. 패리스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나아질 가능성은 전혀 없을 거야.”

아폴로니아는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침묵했다. 눈은 여전히 시장의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마음은 착잡했다. 그들 하나하나의 행복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유리엘이 나직하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이미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난 몇 년간 그녀는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몸은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은 온갖 계획으로 가득했다.

다만, 그 모든 생각들이 백성들의 삶을 바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 답답했다.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넌?”

문득 유리엘을 보자 그는 아폴로니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예?”

“무슨 생각을 하지?”

유리엘은 입술을 지그시 짓씹고 있었다. 대답을 해 줄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왜? 말해 주기 싫은 것처럼.”

“전하의 마음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잠깐의 정적 후 그가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는 분명 다른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리엘은 표정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고 말했다. 그저 일상을 얘기하는 것처럼.

“뭐?”

“전하를 공격했던 자들을 말입니다.”

그는 몸을 돌려 아폴로니아를 마주했다. 낮에는 밝은 햇빛을 받아 청록빛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짙은 푸른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차가운 바다를 닮았지만 어딘가 타는 듯한 분노가 느껴졌다.

“유리엘…….”

“그들을 동정하라는 말씀은 마십시오.”

그는 빠르게 내뱉었다.

“저와 전하는 생각도, 기준도 다릅니다. 전하께서는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시지만 저는 전하의 안위만 걱정하니까요. 전하를 공격하는 자들에 대해서 동정심을 느낄 만큼 여유롭지 않습니다.”

가감 없이 자신의 냉정함을 드러내는 그는 오래전 그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오르게 했다. 다만, 지금의 냉정함 속에는 치열한 분노가 함께 있었다.

“전하께 무슨 일이 생겼더라면 저들은 지금쯤 황제나 귀족들에 대한 원한 같은 것은 기억도 못 하는 상태가 되었을 겁니다.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을 테니까요.”

피처럼 붉은 입술로 독설을 내뱉는 그는 눈빛을 제외하면 놀라울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 과장 없는 태도는 오히려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몸에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아폴로니아의 표정을 살폈다. 칼같이 냉정한 말을 하면서도, 분노에 찬 상황에서도 그는 그녀의 마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유리엘.”

“그러니 전하, 앞으로는 조금만…… 조금만 무모한 행동을 삼가 주십시오.”

그는 망설이다가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눈빛과 달리 어딘가 애절하게 느껴질 정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너와 있으면 안전하잖아.”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일은 한순간에도 틀어질 수 있으니까요. 저도, 전하도 불사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제발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유리엘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아폴로니아를 보았다. 조금 전 타오르던 분노는 이제 사그라들었다. 다만 애절한 목소리와 어울리는, 조금 처진 눈꼬리가 시선을 끌었다.

“……알겠어.”

아폴로니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의 말은 다 맞았다. 지위를 막론하고, 잘못을 저지르면 사과해야 하는 법이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미안해, 유리엘. 조금 전의 상황은 내 실수야.”

그녀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아이에게 불필요하게 큰돈을 내민 것도, 골목을 빠르게 빠져나오지 않은 것도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사과를 하자 유리엘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른 말은 신경 쓰이지 않으십니까?”

“뭐가?”

“제가 아까 그 자들을 죽이고 싶다는 것. 그들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유리엘은 혼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내 일이지, 네 일이 아니야. 네 일은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를 걱정하고, 나를 위해 분노하는 것이 맞아. 아주 잘해 주고 있지. 언제나 그래 왔어.”

아폴로니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사람은 제각기 걱정할 것이 따로 있었고, 유리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폴로니아의 안전이었다.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였다.

“하지만 영지 운영에 대해 가르쳐 주실 때는…….”

“영지민을 걱정하라고 했지. 하지만 너는 이미 행동으로 내 모든 가르침을 실현하고 있어. 그 결과 네 영지는 부흥했고, 영지민은 행복해. 그럼 된 거야.”

“조금 전 만난 자들이 제 영지의 사람들이었더라도 저는 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영지 운영은 그저 전하의 가르침에 따른 것뿐이니까요.”

아폴로니아는 미세한 미소를 지었다.

“동정심은 없지만 그럼에도 영지민을 위해 일하는 유능한 영주라. 너는 이미 제국에서 가장 훌륭한 영주 중 하나야. 마음만 넘치고 무능한 자들보다 백배쯤 낫지.”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유리엘, 나는 내 사람을 항상 지켜 내지는 못하지만 배신을 당하지는 않아.”

“……압니다.”

“사람을 잘못 보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 그리고 너는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야.”

아폴로니아가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유리엘의 귓가가 조금 붉어졌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네가 그들에게 분노해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해도, 그건 틀린 것이 아니니까.”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하는 아폴로니아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거야.”

아폴로니아는 조용히 말을 끝냈다. 유리엘의 분노도, 간혹 소름 끼치는 냉정함도 그녀는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해하는 자를 죽이고 싶다는 유리엘의 말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정말로 그러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그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그를 다스리는 자신의 능력이었다. 그리고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을 다스리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다른 능력을 시험할 때였다. 조금 전의 상황으로 그 사실은 더 명확해졌다.

“유리엘, 난 더 이상 유치하게 시녀를 이용해서 약혼자들이나 내쫓고 싶지 않아. 그럴 시간이 없거든.”

그녀는 유리엘의 어깨를 잡은 채,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며 말했다.

“이데나 상단과 카엘리온의 이름을 빌려서 활동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아주 조금씩이라도, 아버지나 고모님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유약한 가면을 벗어야 해.”

“그 말씀은…….”

“패리스를 싫어하면서도 먼 방계 황족인 카엘리온을 완전하게 지지하지 못하는 중립층의 귀족에게 내 존재를 알릴 방법을 찾으려고 해. 난…….”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맺었다.

“패리스가 등극하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겠으니까.”

노을빛을 닮은 그녀의 눈이 바다 같은 유리엘의 눈을 응시했다. 살아 있는 것을 그대로 박제하는 힘이라도 있는 듯, 절대로 시선을 뗄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있었다.

“위험한 일을 그만하겠다고 말씀하시자마자…….”

“진짜 위험한 일은 가만히 있다가 패리스를 황제로 섬기거나 다른 왕국으로 팔려 가는 거지.”

유리엘의 미소를 놓치지 않은 아폴로니아가 따라서 미소 지었다.

“그 접근 방법이 사교계로군요. 정치적으로 황제나 공작 부인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전하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요.”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계에 데뷔하라, 호감을 사라는 것은 그 말씀이셨습니까? 전하를 빛내는 역할로요?”

“맞아. 그런 네가 내 곁에 있으면 나 또한 빛날 테니까. 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사람들이 무도회에 몇 명 올 거야. 그리고 나면 그들과 접촉할 다른 기회가 또 오겠지.”

유리엘은 비로소 아폴로니아의 뜻을 이해했다.

“앞으로 조금 바빠질 거야.”

“저는 언제나 바빴습니다.”

유리엘이 장난스럽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모든 것을 사랑했지만 그녀의 야심은 유독 아름다웠다.

서늘한 바람은 쉬지 않고 불었다. 은색과 황금색의 실타래 같은 그들의 머리카락이 엉킬 듯 말 듯 가까이서 흩날렸다. 아폴로니아의 양손은 여전히 유리엘의 팔에 얹어 둔 채 떼지 않고 있었다. 유리엘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돌아가시죠. 밤은 춥습니다.”

유리엘은 침묵을 지키다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의 냉정했던 표정은 이제 흔적도 없었다. 낮에 그녀의 마음을 뜻대로 움직였다고 뿌듯했던 마음 또한 사라지고 없었다. 어깨에 얹은 손을 의식하자 그는 심리적 평온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분노 같은 것은 진작 녹아 버렸다.

그 말에 아폴로니아가 작게 웃었다. 그녀는 추위나 더위를 타지 않았고, 유리엘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걱정하는 그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네가 추우면 안 되니까 돌아가자.”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녀는 유리엘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대신 그의 한쪽 팔을 잡았다.

“고마웠어, 유리엘.”

“예?”

“오늘 말이야.”

언덕을 내려가며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매력적이었습니까?”

그가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작게 웃었다.

“연습이 필요 없을 정도였지.”

유리엘은 잠시 자리에 멈추어 섰다. 순간 그는 아폴로니아의 말이 사실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아폴로니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한 번씩 연습해도 될까요?”

그는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물었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보는 이를 황홀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순간적으로나마 황제도, 페트라도 잊게 만드는 표정.

조금 전까지 여유를 지키고 있었으나 아폴로니아는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짙은 푸른색의 눈을 보고 있으니 어딘가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담 젠슨의 가게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보다 훨씬 강렬하게.

“……언제든지.”

그녀는 홀린 듯 대답했다.

* * *

데인과 아벨을 비롯한 강도 다섯 명은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골목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됐지?”

그곳에서 기다리던 한 남자가 물었다. 그는 모든 상황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게…… 워낙 역부족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그 요사스럽게 생긴 사내놈이 너무 빨라서…….”

데인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변명했다. 그러나 사내는 특별히 실망한 것 같지는 않았다.

“뭐. 실력 차이가 그렇게 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납치가 쉬운 줄 알았나, 그럼.”

사내의 말에 데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이 두려운 사내는 실패한 납치 의뢰에도 불구하고 씩 웃고 있었다. 강하고 날카로운 턱선이 달빛을 받아 두드러졌다. 그의 잿빛 눈이 반짝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

“그게, 저희의 과거를 물었습니다. 저희를 잡기 위해 신상을 묻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강도가 됐는지를 물었습니다. 사실대로 말했더니 일단은 가라고 놔주었습니다. 마치…….”

데인이 조심스레 단어를 골랐다.

“마치 저희의 상황을 동정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말에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강도들에 대한 동정이라니, 쓸데없는 오지랖이 넓으신가 보군. 그 아가씨는…….”

“예?”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데인과 그 일행이 의아하게 쳐다보았으나 사내는 다른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저 여자를 건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다, 당연히!”

데인이 소리치듯 대답했다. 선금을 토해 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야 했다.

“옆에 있는 그 놈이 없을 때를 노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방법이 있을 수가 없어요!”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그가 천천히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를 쓸어 넘기자 잘생긴 이목구비가 달빛 아래에 드러났다. 손가락 사이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머리카락은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듯한 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회색이었다.

“그럼 조금만 더 치밀하게 준비를 해 볼까.”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그 고귀하고 소중한 아가씨를 만날 준비를.”

* * *

“전하, 어떤 드레스를 입으시겠어요?”

아드리안이 코끝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녀는 그날 열 번째로 아폴로니아의 옷장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네가 골라.”

“다 별로예요.”

아드리안이 말하면서 옷장 문을 닫았다. 그녀는 본분을 알고 배려심도 많았으나 때로는, 특히 아폴로니아의 화장이나 옷차림에 대한 일에 있어서는 무척 솔직했다.

“그냥 한 벌 사시지 그러셨어요.”

“아버지께서 별궁에 주시는 돈을 줄이고 나서는 그럴 여유가 없단다.”

아폴로니아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아드리안이 코웃음을 쳤다.

“들고 계신 붉은 다이아몬드 팔찌부터 치우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거 하나면 수도의 의상실은 다 살 수 있겠어요.”

아드리안의 지적에 아폴로니아는 손에 들었던 팔찌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그것은 황제의 옆자리를 공고하게 지키는 세타에게 이데나 상단의 이름으로 전달할 선물이었다.

“옷 한 벌도 사면 안 된다는 게 이해가 안 가요. 상단주로서의 정체를 숨기는 것을 떠나서, 전하는 황녀잖아요. 저 같은 하급 귀족도 연회에는 새 드레스를 입고 가는데 왜 전하는 낡은 옷을 입어야 하는 거예요?”

평소에는 순하고 귀여운 인상인 아드리안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럴 때의 그녀는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내 예전 약혼자들이며 이 남자 저 남자로부터 선물을 잔뜩 받은 너한테야 새 옷이 있는 게 당연하지. 아버지께서 주신 돈만으로는 새 옷을 사기에 부족하니 안 사는 게 자연스럽단다.”

“하지만 예전에 성년식 때에는…….”

“성년식이야 내가 주인공이니까 아버지 체면에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붙여 준 거고.”

“전하!”

아드리안이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말씀하셨잖아요. 대공 전하께서 돌아오셨고 유리엘 님도 곁에 있고, 몇몇 귀족들을 생각하면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낼 때라고. 그런데 그런 차림은 어울리지 않잖아요.”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표정은 다소 시큰둥했다.

“출처가 의심스러운 돈을 쓰는 건 다른 문제야. 아직 상단주로서의 정체를 드러낼 때는 아니야. 적어도 모두에게는.”

아폴로니아는 깔끔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했으나 아드리안은 전혀 설득당한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하, 그 자리에 나오는 귀족 영애니 부인이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남 뒷말하기를 좋아하는데요. 전하께서 너무 초라한 모습을 보이시면…….”

“유리엘을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초라해 보일 수는 없어. 장식은 그걸로 차고 넘치니 너무 걱정 마.”

열변을 토하며 항의하는 아드리안은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사실 아폴로니아도 외양과 차림이 사람의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 귀족들 앞에서 유약한 이미지를 벗는 데에는 화려한 차림이 가장 효과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파혼에 짜증인 난 황제는 아폴로니아의 용돈을 확 줄여 버렸고, 그녀의 소비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기에 유리엘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는 아폴로니아가 두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장식품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하고는 일어섰다.

“곧 마담 젠슨이 올 거란다. 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적당히 꾸미고 갈 수는 있을 거야. 시간이 남는다면 네 단장도 도와달라고 해야겠다.”

아드리안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하는 황녀 전하는 어떤 면에서 너무나도 무심했다.

두 사람이 한참 실랑이를 하고 있을 무렵, 아폴로니아의 침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셨습니다.”

시녀의 안내와 함께 들어선 것은 마담 젠슨이었다.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의 그녀는 높이 올려 묶은 머리에 깐깐해 보이는 안경을 쓰고 두리번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서 그녀를 보조하는 직원 두 명이 들어섰다.

“전하를 뵙습니다.”

“와 줘서 고맙네. 내 시녀와 함께 옷을 골라 주겠어? 내 단장에는 별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니까 괜찮다면 이 아이를 도와주고. 무엇보다 비체 백작에게 신경을 써 주면 좋겠군.”

“예? 하지만…….”

마담 젠슨이 의아한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보았다. 그녀 또한 단장에 신경 쓰지 않는 황녀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게는 멀쩡한 옷이 많으니 신경 쓸 거 없어.”

“그게 아니라 전하.”

마담 젠슨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의 드레스는 제가 가지고 왔는데요.”

예상치 못한 말에 아폴로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담 젠슨을 바라보았다. 마담 젠슨도 똑같은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마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지난번에 비체 백작님이 전하의 옷을 주문하셔서…… 모르셨습니까? 대금도 다 지불하고 가셨는데요.”

마담 젠슨의 뒤에 선 직원들은 과연 천으로 고이 덮어 놓은 드레스 한 벌을 들고 있었다.

아폴로니아의 머릿속에 마담 젠슨을 방문했던 날이 스쳤다. 살롱을 나오기 직전 유리엘은 일상복을 잔뜩 주문하면서 마담 젠슨과 단독으로 몇 마디 말을 나누었었다.

그때 주문한 건가? 말도 없이?

“나중에 따로 연통을 넣어 세세한 설명까지 덧붙이셔서…… 전하께서도 아시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폴로니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옷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 대체 왜?

“일단 보기로 하지.”

아폴로니아의 애매한 승낙이 떨어지자 곤혹스러웠던 마담 젠슨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보시면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그렇고말고요! 제가 아주 오래 공을 들여 만든 작품이랍니다.”

그녀가 손짓하자 직원 두 명이 드레스를 덮었던 천을 걷을 준비를 했다.

“황궁에서 주문을 받아 전하의 약혼식 의복을 여러 차례 만들어 드렸지만……. 지난번에 전하를 직접 뵈니 그 옷들은 그다지 어울렸을 것 같지 않더군요.”

마담 젠슨이 눈치를 보며 설명했다.

“비체 백작님이 주문한 모양과 제가 생각한 것이 아주 딱 맞아떨어졌답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손짓하자 직원들의 손에 의해 천이 벗겨지고 옷이 드러났다.

“어머!”

아드리안이 입을 가리고 환희에 찬 비명을 질렀다.

직원의 손끝에 걸려 있는 그것은 분명 드레스였지만, 한 떨기 붉은 꽃처럼 보였다. 강렬하고 화려한 장미처럼.

“선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마담 젠슨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직원에게 손짓하자, 직원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푸른 벨벳으로 덮인 고급스러운 상자였다.

“백작님의 말과 같은 것을 찾기 위해 수도의 보석상을 다 뒤졌답니다.”

마담 젠슨은 너스레를 떨며 상자를 열어 보여 주었다.

“세상에…….”

아드리안이 거의 눈물을 글썽이며 감탄했다. 무심하게 서 있던 아폴로니아도 살짝 떠오르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작고 투명한 다이아몬드 여러 개가 하나의 작은 보석을 감싼 형태의 그 목걸이는 정교하고 우아했다.

“전하의 눈 색깔과 비슷하네요. 황금색은 없지만…….”

아드리안이 목걸이를 황홀한 표정으로 그녀와 목걸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라만트의 유명한 장인이 세공한 거랍니다. 이 정도로 정교한 건 드물어요. 비체 백작님이 거듭 요청을 하셔서 어찌어찌 찾아왔죠.”

마담 젠슨도 덧붙였다.

아드리안의 말대로, 목걸이의 정중앙에는 아폴로니아의 눈동자를 닮은, 드레스의 색과도 비슷한 피처럼 붉은 루비가 박혀 있었다.

“……알고 있네.”

아폴로니아는 목걸이에 박힌 것과 정확히 같은 모양의, 같은 장인이 세공했던 보석을 가졌었다. 아니, 지금도 가지고 있었다. 서랍에 넣어 두고 사용하지 못할 뿐.

리샨에서 다이아몬드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긁어서 흠집을 냈던, 엘레니아 황녀의 유품.

유리엘은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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