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두 사람의 외출
에반젤린에 대해 조금 더 파악했지만 유리엘도, 아폴로니아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당장 그녀와 체결한 협상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쓸모 있는 정보를 넘길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페트라에게 아폴로니아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기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가 카엘리온의 통제하에 있는 한 그녀는 위험 요소는 아니었다.
“옷은 준비했어?”
어느 날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에게 물었다. 평범하게, 날씨에 대해 묻는 것 같은 말투였다.
“옷…… 말입니까?”
유리엘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무도회에 입을 옷 말이야. 전공이 제일 큰 사람이 왜 그 생각을 안 해?”
“옷은 뭐 소매 달렸으면 된 거 아닙니까.”
“바지는 안 입고?”
아폴로니아의 심드렁한 농담에 유리엘이 얼굴을 붉혔다. 그는 가끔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진해 보였다.
“선물받은 것도 있고 하니 괜찮습니다.”
“누구로부터?”
“무슨 후작이…… 실크 수입을 하는 에드윈 후작가에서 연미복 포함해서 몇 개 줬습니다. 거절했지만 한 번 더 보내더군요. 멀쩡하니 입으려고 합니다.”
아폴로니아는 에드윈 후작가를 알았다. 정확히는 에드윈 후작의 딸 로렐라이 에드윈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미래의 사위로 점찍고 있다더니 사실이었네.”
“예?”
평소처럼 차를 따르려던 유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밤에는 짙어도 낮에는 하늘색이나 청록에 가까워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커졌다.
“사위라니요! 싫습니다!”
그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사탕을 빼앗긴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최근에 연미복을 보냈다면 뜻은 명확한 것 같은데.”
“무슨 말씀입니까?”
“로렐라이는 네게 보낸 옷에 맞춘 드레스를 입고 참석할 거야. 네가 후작가의 선물을 입고 연회에 온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귀족 사회는 많은 교묘한 규칙으로 움직였다. 공식적인 장소에 남녀가 맞춘 듯한 옷을 입고 나타나면 그들은 당연히 교제 중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에드윈 후작은 이 점을 속임수처럼 이용해서 딸과 유리엘을 엮어 볼 속셈이었다.
“무슨 색이야? 그쪽에서 보냈다는 옷은?”
“흰색에 황금 자수입니다.”
“음, 유리엘은 흰색이 잘 어울리기는 해.”
“전하!”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솔직한 거부 반응에 피식 웃었다.
“…… 흰색을 입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얗게 돼서 싫습니다.”
유리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색깔 같은 것은 신경 쓰진 않는 유리엘의 평소 모습과 너무 달랐기에 아폴로니아는 귀를 의심했다.
“응?”
“다른 색을 입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없잖아. 가서 한 벌 맞추도록 해.”
“혼자서는 갈 줄 모릅니다.”
유리엘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그는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아드리안을 보내 줄까?”
“아드리안은 바쁩니다! 전하께서 얼마나 일을 많이 시키시는데요.”
그는 황급히 거절했다. 그러고는 작게 한 마디 덧붙였다.
“……전하께서 함께 가 주십시오.”
유리엘이 여전히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자고?”
아폴로니아가 놀라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유리엘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제안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가는 길을 몰라서…… 함께 사러 가 주십시오.”
아폴로니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날 암살하러 황궁에 들어올 때는 길을 잘도 찾더니, 옷가게는 찾아갈 줄 몰라?’
하지만 그녀는 흔치 않은 유리엘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지식은 풍부해도 옷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유리엘을 혼자 보내는 것은 불안했다.
“그럼 그럴까?”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엘의 눈이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었다.
* * *
클라리사 젠슨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였다. 20살이 넘어서야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옷을 만들기 시작한 그녀는 일을 시작한지 5년 만에 제국에서 손꼽히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그녀는 제국의 유행을 주도했다. 여러 귀족 영식들의 연미복은 물론 황비들의 생일 드레스며 유명 배우들의 드레스까지, 수도의 유명 인사들 중 패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그녀의 손을 거쳐 갔다.
경력이 길다 보니 그녀도 중간에 한 번 사기를 당해 살롱이 휘청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그 뒤처리로 정신이 없던 그녀는 돈으로 허덕임은 물론 새파란 경쟁자들에게 밀려 영원히 잊힐 위기에 처해 버렸다. 그때 아일린 이데나라는 상단주의 후원으로 다시 전과 같은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당당히 디자인계의 1인자로 우뚝 선 지금, 마담 젠슨은 여간한 모델들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보아도 감탄보다는 분석을 해냈다. 피부 톤, 키, 체형 등.
그녀는 사람들의 외모를 주의 깊게 관찰해서 그에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 냈고, 업무적인 것 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미인이라고 하여 뚫어져라 쳐다보는 촌스러운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아폴로니아 알리스테어 페르디안.’
아침에 예약자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이건 황녀의 이름 아닌가? 6번 약혼하고 6번 파혼당했다는 그 사람.
마담 젠슨은 사실 그녀의 약혼식 드레스를 두어 차례 만든 적이 있었다. 하얗고 순수한 그 옷들은 파혼을 거듭하며 순수의 의미를 잃어 가는 듯했다. 그러나 직접 방문을 한다니?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황실의 사람들은 궁으로 사람을 부르는 데 익숙했고, 옷을 맞추기 위해 살롱을 직접 방문하지 않았다.
이 바보스러운 황녀는 직접 궁 바깥을 돌아다니는 일이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마담 젠슨과 그녀의 직원들은 예상치 못했던 일에 긴장한 채로 귀한 손님을 기다렸다.
그리고 예약 시간이 되어 두 손님이 입장한 순간 마담 젠슨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프로다운 태도로 재빨리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커리어 최초로 손님들을 빤히 쳐다보는 무례를 범했을 것이다.
입장한 것은 두 남녀였다. 한 명은 그녀가 기다리던 황녀 아폴로니아였다. 그녀는 마담 젠슨이 보았던 초상화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얌전하게 눈을 내리깐 것과 달리 묘하게 반짝거리는 느낌이었다. 차림은 지나칠 정도로 수수했지만 태도며 말씨며 흠 잡을 것 없이 우아했고, 노을빛을 닮은 눈동자는 그 외모에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그러나 마담 젠슨의 입을 벌어지게 만든 것은 그 옆에 있던 남자였다.
보기 드문 은발은 가게에 들어서기 전부터 눈부시게 빛났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썹이며 반듯한 콧날과 턱선, 피처럼 붉은 입술은 가만히 있어도 유혹적이었다.
아폴로니아는 그 미남을 유리엘 비체 백작이라 소개하고 주문을 시작했다.
“이 사람이 승전 축하 연회에서 입을 옷이 필요해. 흰색을 제외하고…….”
여기까지 말한 그녀가 백작을 돌아보자 그는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흰색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적당히 어울리는 다른 색으로 맞추려고 해.”
평소 애매한 주문을 싫어하는 마담 젠슨이었다. 그녀가 젊었던 시절 많은 귀족들은 대충 어울리는 것을 골라 달라고 주문했었다. 그들은 수십 차례 옷을 갈아입고는 왜 원하는 것을 맞추지 못하느냐고 생떼를 부렸다. 물론 지금의 마담 젠슨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날만큼은 그 주문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마담 젠슨은 이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에게 입혀 보고 싶은 옷이 수십, 수백 가지 생각났다. 그녀가 디자인했던 모든 남성복은 오늘을 위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으흠,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차라도 한 잔 드시죠.”
잠시 시선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마담 젠슨은 프로였다.
그녀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프로답게 완벽히 표정 관리를 했다. 아니, 너무 잘 관리해서 차가워 보이지는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들 정도로 도도한 얼굴을 유지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드러날 수 있는 흥분을 완전히 숨기기 위해, 마담 젠슨은 예의 바른 인사를 마치고는 살롱의 뒤편으로 우아하게 사라졌다.
“역시 청색이 제일 어울리나?”
그들은 수백 벌의 연미복에 파묻힐 것 같았다.
마담 젠슨은 유리엘을 보자마자 입이 히죽히죽 찢어지더니 구르다시피 살롱 뒤편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어디선가 끝도 없이 남성용 제복이며 연미복을 가져왔다.
그 안에는 연회에 알맞은 복장이 있는가 하면, 평상복은 물론 배우들의 화려한 연극 의상 같은 것도 끼어 있었다. 마담 젠슨은 그것들을 옆으로 분리해 놓고, 계속 배실배실 웃으며 변명을 해댔다.
“아, 이건 혹시 몰라서 말이죠. 일단 입혀 보면 다른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거든요.”
아폴로니아는 몇 년 전 황실 사냥 대회 우승 연회 때 유리엘이 입었던 연푸른 제복을 떠올렸다. 그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이의 눈을 사로잡았었다.
“그럼 청색을 사겠습니다.”
같이 옷을 사러 가자고 졸랐던 유리엘은 정작 옷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아폴로니아에게만 시선을 주면서 그녀가 좋다고 하면 강아지처럼 웃었다.
“오오, 청색! 청색을 입혀 봐야겠군요!”
마담 젠슨은 유리엘에게 억지로 뒤집어씌운 연한 색 재킷을 벗기고 다른 옷을 집었다. 유리엘이 그녀에게 ‘흰색은 싫다고 하지 않았냐’며 툴툴거리자 그녀는 ‘아이보리색과 흰색은 달라요’라며 그를 무식쟁이 취급했다.
“청색도 종류가 아주아주 다양하답니다. 연푸른색도 있고, 청록, 또는 짙은 남색도 있죠. 옷감은 뭘로 할까요? 요즘은 벨벳보다 실크가…….”
아폴로니아는 그 심리를 이해할 것 같았다. 유리엘은 뭘 입어도 잘 어울렸다.
“……진짜 어울리네.”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이 여덟 번째로 입어 본 짙은 청색 연미복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그의 눈동자와 비슷한 그 옷은 서늘한 인상의 유리엘과 맞춘 듯 어울렸다.
색감은 그가 5년 전 사냥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입었던 제복과 유사했지만 그 느낌은 전혀 달랐다. 소년티를 완전하게 벗은 유리엘은 그저 아름답던 전과 달리 가만히 있어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는 청량해 보이는 옷감과 묘하게 어우러져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물론, 그 전에 입어 본 7벌의 옷도 다 마찬가지였다. 마담 젠슨은 가게의 모든 옷을 입혀 볼 기세로 덤비기는 했으나, 귀찮아하는 유리엘의 태도에 할 수 없이 그 중 가장 어울리는 여덟 가지만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녀의 눈썰미는 완벽했다.
“네가 골라.”
아폴로니아는 감탄하며 말했다. 흰 옷을 선물한 후작 영애가 무도회 때 유리엘을 보면 다시 한 번 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리엘에게 굳이 그 사실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굳이 그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뭐든 좋습니다. 전하께서 좋다고 하시니까요.”
유리엘이 아폴로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연미복에 은색 벨트. 그는 정말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스스로의 모습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에게 몸을 살짝 기울여서 속삭였다.
“그럼 전부 다.”
“예?”
유리엘이 놀라 되물었다. 한 번의 연회를 위해서, 드레스도 아닌 연미복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사람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전부 다. 그리고 온 김에 일상복도. 빨리 주문해.”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생각 같았으면 대신 잔뜩 주문해 주고 싶었지만 황제가 별궁 살림살이용으로 주는 돈이 줄어드는 바람에 자신의 명의로 쇼핑을 하는 것은 자유롭지 않았다. 호위 기사를 위해 비싼 연미복을 잔뜩 구매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쓸데없는 의심을 사기에 딱 좋았다.
“전부 다. 그리고 일상복도 보여 주면 고맙겠습니다.”
유리엘은 생각할 틈도 없이 아폴로니아의 말을 마담 젠슨에게 되풀이했다. 태도와 어울리지 않는 그 주문에 마담 젠슨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곧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는 다시 살롱 뒤편으로 사라졌다.
유리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유리엘, 넌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제국에 이름을 알렸지.”
아폴로니아가 조용히 말했다.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네 영지의 통솔도 그만하면 나무랄 데 없이 잘 하고 있어.”
“전하께서 가르쳐 주셨으니까요.”
그는 언제나 그렇듯 순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분명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쓰다듬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사교계에 이름을 알릴 때야.”
아폴로니아가 웃으며 말했다.
“이미 알린 것이 아닙니까?”
“물론, 네 얼굴도, 활약도 유명하니까. 하지만 정식으로 이렇게 큰 연회에서 주역으로 참석하는 것은 사냥 대회 이후로 처음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때는 중간에 자리를 비워 버렸고.”
아폴로니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리엘은 그녀가 아픈 기억을 떠올렸음을 알았다. 유리엘이 그녀를 살수들로부터 구해 내던 날. 그리고 시드가 죽던 날.
“사교계는 정치계의 다른 한 면일 뿐이야. 전쟁에서 아무리 귀신같아도, 사교를 전혀 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이득을 다 챙길 수 없어. 너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
아폴로니아는 빠르게 설명했다. 유리엘은 잠시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그녀가 역시나 시드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이 시점에 저를 다시 불러들인 이유가 있으셨군요.”
유리엘이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이유 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5년간 그를 카엘리온 옆에 붙여서 성장시킨 그녀가 다른 행보를 보인 것은 다 계획이었던 것이다.
“에반젤린은 이번 무도회에서 루완 상단을 돕는 사람이 올 거라고 했지. 우리가 그를 알아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장 내가 집중하고 싶은 건 그 부분이 아니야.”
아폴로니아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그 차분한 목소리는 유리엘의 귀에 달콤하게 들렸다. 계획을 말할 때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이번 무도회는 너의 사교계 데뷔야.”
“예?”
“백작씩이나 되는 네가 내 호위를 맡고 있다는 사실에 조소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러니까…….”
아폴로니아가 말을 하다가 말고 탁자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시 그럴 수 없도록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폴로니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의 호감을 사면 좋겠어. 너를 단순히 사신이니 뭐니 하는, 검만 다루는 평민 출신 기사로 보지 않고 그들과 같은 귀족으로 보도록.”
“……호감이요?”
“너는 사교 쪽에는 경험이 없으니까 대단한 걸 기대하는 게 아니야. 그저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만 해도 주목받을 수 있어. 실수 없이 무도회를 끝내면 너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 또 달라질 거야.”
대단한 걸 기대하는 게 아니라니.
아폴로니아는 별 뜻 없이 말한 것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유리엘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폴로니아의 진심을 알면서도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가 뭔가 대답하려는 순간 마담 젠슨이 또 다른 종류의 옷이며 벨트를 잔뜩 들고 나왔다. 얼핏 보면 아무거나 집어 온 것 같지만 그녀의 손이 닿은 모든 옷이 꽤나 치밀하게 검증되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찌푸려졌던 유리엘의 눈썹이 펴지고, 대신 그의 눈가가 살짝 접혔다. 모두의 호감을 사라. 아폴로니아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유리엘은 얼마든지 따를 수 있었다. 그녀의 기대 이상으로.
바로 지금부터.
“그것들도 전부 주문하겠습니다.”
아폴로니아가 뭐라고 할 틈 없이 유리엘이 말했다. 의아함에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 아폴로니아에게, 그는 빙긋 웃어 보였다.
“전부 말인가요?”
마담 젠슨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마담의 안목을 믿으니까요. 그리고.”
유리엘이 마담 젠슨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무도회 당일 별궁으로 와서 저와 전하의 단장을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가슴에 손을 대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러고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마담 젠슨과 몇 초간 눈을 맞추었다. 순간 창 밖에서 바람이 훅 불어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얼굴을 반쯤 가린 은발은 그 뒤로 비치는 깊은 눈을 더욱 신비로워 보이게 만들었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마담 젠슨만큼은 아니었다.
“다, 당일 말씀이신가요?”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이 20년에 가까운, 어떤 절세미인을 보아도 그저 옷걸이로 대한다던 마담 젠슨의 목소리가 순간 떨렸다. 그녀는 긴장한 듯했지만 유리엘의 눈을 계속해서 마주 보고 있었다.
유리엘은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담 외에 어떤 사람에게도 부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물, 물론이죠.”
그녀가 홀린 듯 대답하자 유리엘은 다시 한 번 눈을 맞추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게 되어 기뻤습니다.”
마담 젠슨의 얼굴에 조금씩 차오르는 환희가 보였다. 순간적으로 유리엘의 얼굴에 홀렸지만, 그녀를 가장 자극하는 것은 역시 본업에 대한 인정이었다. 귀족인 유리엘이 자신에게 보여 주는 깍듯함도.
그는 아폴로니아가 시키기도 전에 물건의 배송을 부탁하고 값을 넉넉하게 지불했다. 그러고는 여전히 넋이 조금 빠져 있는 마담 젠슨을 남겨 두고 살롱을 나섰다.
“방금 뭘 한 거야? 평소랑 너무 다르잖아.”
아폴로니아는 조금 전 일어난 일을 믿기 어려웠다. 유리엘은 예의를 지켰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잘 웃어 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상대가 아폴로니아일 때만 빼면.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미소가 얻어 온 결과였다.
“마담 젠슨은 바쁘고 프라이드가 높은 사람이야. 황족의 결혼식쯤 되지 않으면 살롱을 떠나 직접 방문해서 단장을 돕는 일은 하지 않아.”
아일린 이데나의 이름으로 부탁하면 모를까, 흔한 사교계 행사를 위해 그녀를 불러들이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 일을 한 번의 부탁으로 해내다니.
“평민 출신 기사라는 이미지를 벗기에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눈이 동그래진 아폴로니아에게, 유리엘은 아까 마담 젠슨을 홀렸던 미소를 다시 한 번 지어 보였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연습입니다.”
“뭐?”
“호감을 사는 연습 말입니다. 물론, 마담 젠슨에 대한 존경심은 거짓이 아닙니다. 전하를 만족시켰으니까요.”
아폴로니아는 잠시 멍해졌다가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한 말 때문이야? 그건 지금 당장이 아니라…….”
“청이 있습니다.”
당황한 아폴로니아에게 유리엘이 말했다. 햇빛 아래에서 그는 유난히 밝아 보였다.
“뭐든 얘기해.”
아폴로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오늘 하루는 온전히 저와 보내 주십시오. 제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일을 같이 해 주십시오.”
“하루 동안?”
“부탁입니다.”
그는 말을 하며 아폴로니아의 오른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살짝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정중한 그 태도 때문인지 아폴로니아는 순간 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호감을 사는 연습이 더 필요하니까요.”
유리엘은 눈을 들어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보는 그의 눈동자는 평소의 짙은 푸른색이 아닌, 청록에 가까운 색이었다.
유리엘은 평소에도 한 번씩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입가의 미소며 평소보다 나른하게 접힌 눈매, 이상하게 속삭이는 듯 들리는 목소리가 평소와 비교도 되지 않게 유혹적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조금 전 마담 젠슨의 표정과 행동을 이해할 것 같았다.
유리엘은 몇 년 전, 잘 생겼다는 칭찬 한 마디에 얼굴을 붉히던 모습과 달랐다. 그는 스스로의 무예 실력을 잘 아는 것처럼 자신의 잘난 외모에 대해서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를 사용할 줄도 알았다.
“해, 연습.”
아폴로니아가 대답했다. 반쯤은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였고, 반쯤은 궁금한 마음이었다.
유리엘의 붉은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아폴로니아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5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영지를 살피며, 군대를 통솔하며, 포로와 적을 대하며 그는 사람을 상대하는 법을 체화했다.
사람의 특징을 파악하고 기억하는 것, 이를 활용해 마음을 얻는 것. 모두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잘난 외모가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아폴로니아는 예외적으로 어려운 상대였다. 그녀의 표정, 목소리,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유리엘의 이성적인 사고를 방해하고는 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그녀의 마음이었다.
‘얻게 될 거야.’
한순간에는 아니더라도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