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동부의 마녀
“고모님의 소식은 없니?”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던 아드리안은 웃으며 쪽지 한 장을 건넸다.
“안 그래도 공작저에 심어 놓은 사람이 아침 일찍 소식을 전해 왔어요.”
[페트라 리페르는 기분이 좋지 않아 침실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폴로니아는 쪽지의 내용을 읽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드리안이 아침부터 즐거워 보였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 황제를 찾아와 법안을 건넸지만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는 세타로부터 자세히 들은 바 있었다.
“고모님에게는 충격이 컸겠는데.”
“그렇겠죠. 폐하께서는 공작 부인의 청을 거절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것은 단순히 청을 하나 거절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이데나 상단과 루완 상단의 경쟁에 있어서 황제는 무조건적으로 루완 상단의 편을 들었다. 이는 리페르 공작가의 이득이 곧 황제 자신의 이득이라는 당연한 이유에서였다. 그는 공작가의 전 가주 가이우스 리페르이자, 페트라 리페르의 오빠이니까.
그러나 세타의 말에 따르면 그는 법안 거절의 사유로 이데나 상단이 제국에 기여한 부분을 들었다. 그와 루완 상단의 형평성도. 물론 언급은 없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세타를 선물한 것이 이데나 상단주라는 점일 것이다.
황위에 앉은 지 10년이 넘어가면서, 그는 드디어 리페르 가문과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분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페트라를 충격에 빠뜨렸다.
“세타에게 조심하라고 전해. 음식이든 음료든 하인들에게 먼저 먹여 보기 전에는 먹지 말라고.”
“설마 독살을 시도할까요?”
아폴로니아도 페트라가 당장 세타를 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황제와의 관계가 정말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테니까. 그러나 페트라는 상황이 어려워지면 음지의 힘에 의지하는 성향이 있었다. 살수, 납치, 독살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모든 가능성에 대비는 해야 하니까.”
“알겠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아드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귀엽고 선한 인상의 그녀는 병상에 누운 페트라 리페르를 상상했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폴로니아의 머리 손질을 마저 했다.
“참! 대공 전하께서 서신을 보내셨어요. 아까 일어나시기 전에 전서구가 다녀갔답니다.”
“그래?”
아드리안은 아폴로니아에게 서신 한 장을 내밀었다. 작게 접히는 얇은 종이에 작은 글씨로 쓰인 것은 분명 카엘리온의 필체였다. 아폴로니아로서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편지였다. 그녀는 재빨리 편지를 열어 기다리던 내용을 찾았다.
“전쟁에서 승리했고, 라잔의 피해는 최소화하도록 노력했다…… ‘마일론의 눈’에 대해서는…… 와서 말해 주겠다고 하네.”
그녀는 실망한 듯 편지에서 눈을 뗐다. 복잡한 정보라서 편지로 전하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마일론의 눈’은 몇 년 전에 생긴 대륙 최고의 정보 조직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오랫동안 그 실체를 찾고 있었다. 어느 한 인물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그 조직은 촘촘한 체계며 확보하는 정보의 질과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마일론의 눈’은 어느 여왕이 전날 침실에 들인 남자가 누구인지, 어느 나라의 왕자가 그날 아침에 무슨 옷을 입고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등 쉽게 접근할 수 없을 정보를 순식간에 확보해서 적절한 상대에게 팔았다.
그리고 전쟁 발발 직전, 그녀는 정보망의 핵심이 라잔의 왕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그녀는 카엘리온과 유리엘에게 따로 명령을 내렸다. ‘마일론의 눈’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 오라고. 정보망을 만든 사람을 끌고 오면 가장 좋고, 그게 안 된다면 누구인지라도 찾아내라고.
물론 실현 가능성은 무척 낮은 일이었다. 아폴로니아도 대단한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어떻게 됐는지는 말해 줘야지.”
“답신을 보낼까요?”
“아니, 며칠만 기다리면 소식은 직접 전해질 거야.”
아폴로니아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우며 말했다. 아드리안은 정확히 그 말을 이해하고 미소 지었다.
“유리엘 님이 오랜만에 오시겠군요.”
아폴로니아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아드리안의 말이 맞았다. 유리엘은 아마 바로 지금 순간에도 말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 * *
유리엘은 그날 자정에 찾아왔다. 아폴로니아는 탁자에 놓인 수국 한 송이를 보고 그 사실을 알았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인기척도 없었는데, 수국을 집어 든 아폴로니아의 등 뒤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기다리고 있었어.”
“알고 있습니다.”
“1년 사이에 황실 경비가 삼엄해져서 걱정했는데.”
“별 의미 없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말투는 어딘가 다정했다. 아폴로니아는 웃으며 돌아서서 그와 마주했다.
“왜 더 커진 것 같지?”
전장에서 활약하며 얻은 ‘사신’이라는 별명과 달리 그는 여전히 천사를 닮은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은 5년 전에 그랬듯 아름다웠다. 달빛 같은 찬란한 머리색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같은 눈. 다만 더욱 선명해진 얼굴선 때문인지 전보다 더 성숙한 느낌을 주었다.
얼굴이 전과 큰 차이가 없다면, 몸의 변화는 눈에 띄었다. 길고 마른 체형은 그대로였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키가 훌쩍 자랐고, 더 자세히 보면 온몸의 근육은 십 대 시절보다 훨씬 단단하게 짜여 있었다.
가만히 웃을 때의 유리엘은 홀릴 정도로 눈부셨다. 적을 마주 하고 검을 쥔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신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 괴리는 유리엘에게 묘한 매력을 더해 주었다.
“글쎄요.”
유리엘은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전쟁터에서 온 것치고는 말끔한 상의 자락이 넓은 어깨를 타고 보기 좋게 떨어졌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자 세공된 듯 섬세한 그의 상체의 형태가 드러났다. 스무 살이 넘도록 자란 그는 작은 키도 아닌 아폴로니아를 한참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커진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작아진 것이 아닌지.”
그는 피식 웃으며 창틀에 걸터앉았다. 5년 동안 카엘리온의 수하로 있으면서 유리엘은 셀 수 없이 별궁으로 잠입해 아폴로니아와 소식을 주고받았다.
“가까이 와.”
그제야 유리엘은 몇 발 다가와서 침대 끝에 앉았다. 그에게서 항상 느껴지는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자기 안방처럼 드나든 침실이지만 그는 절대로 아폴로니아의 허락 없이 침대에 앉거나 접근하지 않았다.
5년이 지나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단단한 신뢰며 서로에 대한 존중과 믿음은 그대로 있었다.
두 사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제의 범위는 황제를 상대하는 방안을 제외하고도 음악, 철학, 미술이며 정치, 경제 등 다양했다. 유리엘은 아폴로니아가 관심을 갖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보였고, 몇 년 사이에 두 사람은 아폴로니아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관계에서 대등하게 토론을 할 정도로 변화했다.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이 없을 때면 마음 한구석에서 언제나 그의 방문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때때로 스스로도 놀랄 만큼 컸다. 오랜만에 보는 유리엘 앞에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창문을 열어 두기를 잘했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닫혀 있어도 저는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열어 두면 작은 마물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황궁에서도 날개원숭이 같은 것이 발견된다고 하더군요.”
“해치지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야.”
아폴로니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잔소리를 넘겨 버렸다. 유리엘은 만날 때마다 그녀를 걱정했다.
“승리를 축하해. 5개국을 상대로 승리하는 데 걸린 것이 1년이라니 말도 안 돼.”
“별거 아니었습니다. 다들 금방 항복했으니까요. 어려운 것은 패리스가 명예를 높이겠다고 쓸데없이 살육하려는 것을 막는 일이었지요.”
“상대 국가에도 사상자는 많지 않다고 들었어.”
“저도, 카엘리온도 애를 많이 썼으니까요.”
“위명은 익히 들었어. 패리스의 공로로 포장된 것들도 좀 있었지만.”
아폴로니아의 말에 유리엘이 씩 웃었다. 아폴로니아는 그에게 차를 한 잔 따라 주며 말했다. 그는 얼음이 든 과일차를 좋아했고, 이는 언제나 그녀의 방에 준비되어 있었다.
유리엘은 좋아하는 하얀 잔에 가득 따라진 과일차를 쭉 마셨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며 시원하게 뻗은 목선이 눈에 들어왔다. 귀공자처럼 얌전하고 아름다운 그 모습만 보면 누구도 전장에서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유리엘은 제국이 가진 가장 예리한 검이었다. 5년 전에도 그랬지만, 한 가지 달라진 사실은 이제 그 점을 제국인 모두가 안다는 것이었다. 제국민들을 유리엘을 영웅이라 찬양했고, 사랑했고, 또한 두려워했다.
5년 전에 아폴로니아가 내렸던 지시에 따라, 그는 카엘리온과 함께 학문이며 병법을 닥치는 대로 익혔다. 그러나 유리엘은 단 한 번도 스스로를 과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1년, 2년이 지나는 사이에 그가 황실 사냥 대회 우승자라는 사실조차 묻힐 정도로 그는 조용히 움직였다. 귀족 작위가 무색할 정도로 그는 오직 카엘리온의 곁에서, 그의 호위로만 있었다.
유리엘의 이름을 모든 제국인이 알게 된 것은 카엘리온이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있었던 일이었다. ‘아탈란산의 전투’라고 칭해지는 그 일화는 당시 그와 함께 있었던 병사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대대로 제국의 경계를 수호하던 에핀하르트 대공에게 총사령관의 지위를 내린다.]
아직 소년에 가까웠던 카엘리온은 극소수의 병력을 데리고 황제에게 떠밀리듯 북부 경계선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경계를 자주 침입하던 외부 민족들도 그 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카엘리온의 군대와는 병력의 차이가 심했다.
척박한 땅의 힘든 전쟁에서, 황제가 보냈다던 지원군은 시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곁을 지켜야 할 유리엘은 어느 날부터 실종 상태였다.
몇 안 되는 제국군과 그들을 이끄는 카엘리온은 그것이 황제의 또 다른 암살 시도임을 알았다. 카엘리온이 죽으면 마법처럼 수도의 지원군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도.
그는 쉽게 죽지 않았다. 불리한 전투에서 기적처럼 승리하고 또 승리하며 살아남았다. 그러나 기적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았다. 음식도, 지원도 없이 작디작은 산속에 고립된 그들은 결국 적들에게 포위되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들은 카엘리온의 활솜씨만은 두려워했기에 고립된 그들을 굳이 처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카엘리온의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거리에 진을 친 채로 그들을 포위하고, 제국군이 알아서 죽어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기적은 한 번 더 일어났다.
쉭- 바람이 한 번 불었는지 멀리 적군이 주둔하던 막사 하나의 등불이 꺼졌다. 그러고는 몇 번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윽!”
“윽!”
보이기는 해도 워낙 거리가 멀었기에 병사들은 자신들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몇 초 뒤 옆에 있던 다른 막사가 어두워졌다.
“누, 누구야! 으윽!”
“큭!”
짧은 비명 소리가 들리고 나면 그 옆의 막사에서 같은 일이, 그리고 또 옆의 막사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누군가가 적군의 심장에 침투해 어둠 속에서 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침입자가 들어왔다!”
“침입자를 잡아라!”
다급한 외침과 함께 모든 막사에서 병사들이 뛰쳐나와 침입자를 찾았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카엘리온의 군대가 있는 아탈란산 쪽을 향해 정렬했다.
“죽여라! 대공을 죽이면 더 이상 싸우지 못할 것이다!”
산속으로 진격하려던 적군의 뒤에서 유리엘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병사들이 목격한 것은 전쟁이나 결투가 아닌 도륙이었다. 유리엘의 장검은 은빛 흔적과 붉게 뿌려지는 핏줄기만을 남기면서 빠르게 움직였고, 빛이 스친 자리에 서 있던 자들은 순식간에 쓰러졌다.
검을 든 그는 인간 같지 않았다.
단신으로 적진을 휩쓰는 유리엘의 기세에 적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카엘리온의 군대가 있는 아탈란산 쪽으로 밀렸다. 적군은 설 방향을 잡지 못해 우왕좌왕하며 속절없이 유리엘의 검에 당했다.
“구, 궁수!”
적장의 외침에 따라 궁수들이 활을 준비했을 때, 그들의 진열은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아탈란산과 유리엘 사이 서서 궁수들을 지휘하던 그가 유리엘을 죽이라고 지시를 내리려던 순간.
쉬이익- 퍽!
뒤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가 적장의 왼쪽 눈을 꿰뚫었다.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대공 전하!”
아탈란산 앞까지 나와 활을 겨누고 있는 사람은 카엘리온이었다. 멀었던 거리 덕분에 안전했던 적장은 유리엘의 기습으로 잠시 카엘리온의 존재를 잊고 아탈란산 근방까지 떠밀려 왔던 것이다.
그것이 전투의 끝이었다. 머리를 잃은 적들은 겁에 질린 채 양쪽에 서 있는 유리엘과 카엘리온을 번갈아 보다가 항복했다. 제국군은 기적적인 승리를 하고도 믿지 못했으나, 곧 이 일화는 온 제국으로 퍼져 나갔다.
적군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들고 제국군에 합류한 유리엘에게는 ‘사신’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리고 아탈란산의 전투는 전설로 남았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침실에 앉아 달콤한 과일차를 음미하며 예쁜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는 유리엘은 전혀 사신 같지 않았다. 오히려 커다란 개를 연상시켰다.
‘처음 만났을 때는 늑대인 줄 알았는데.’
아폴로니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엘은 착실하게 보고를 시작했다.
“라잔의 소식이 전해지면 패리스가 이번 전쟁으로 쌓은 명예는 다 소용없을 겁니다.”
“왜? 라잔은 항복했다고 들었는데.”
아폴로니아는 의아해져서 물었다. 패리스는 다혈질인 데다 정치나 머리싸움에 대단한 소질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무장에서, 나아가 전장에서 그는 아버지 못지않은 사령관이었다. 무예로 보아도, 병법으로 보아도 누구에게 뒤떨어질 일은 없었다.
유리엘이나 카엘리온을 제외하면.
“라잔이 항복 의사를 표시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입니다. 패리스는 조건이 마음에 안 든다며 받지 않았죠.”
“그래서?”
“아무리 말려도 끝내 라잔으로 진격했더니, 그쪽에서 일대일 결투를 청했습니다.”
“패리스와?”
“아뇨. 카엘리온과 저 중에 한 명이 나오라고 지목했습니다.”
아폴로니아는 놀란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패리스의 무예가 잘 포장되기는 했지만, 결투를 청하는 입장에서 그는 카엘리온과 유리엘보다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대표를 뽑아 결투를 하는데 굳이 총사령관인 패리스를 두고 다른 사람을 지목하는 것도 이상했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진 두 사람에게 굳이 결투를 청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래서?”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패리스가 분노했겠지. 그는 두 사람에게 열등감이 심하니까. 사령관인 자신을 두고 감히 부관을 지목했다면 펄펄 뛰었을 거고…….”
“흥분한 상태로 일대일 결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받을 필요가 없는 제안이었는데도요.”
아폴로니아는 그제야 라잔 측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들은 사상자를 최소한으로 내고자 했던 것이다. 군대로 보면 전세가 이미 기운 상황에서 패리스가 일대일 결투를 거절할 것을 예상하고 판을 짠 것이다.
“‘마일론의 눈’이 있다더니 패리스의 심리를 잘도 알고 있네. 상대방 진영에서는 누가 나왔지? 검에 능한 편이라는 왕세자인가?”
‘마일론의 눈’은 단순히 드러나는 사실관계를 넘어 사람의 심리까지도 정보로 파악해 주고받는다는 사실로 유명했다.
“사실 라잔 쪽에는 패리스만 한 전사가 없었습니다. 누가 나와도 이길 수 있어야 했던 상황이었죠.”
“그럼……?”
“제3 왕녀가 나왔습니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로요. 병사 한 명 없는 단신이었고 그녀가 나온 뒤 성문은 다시 닫혔습니다.”
“제3 왕녀…… 어디선가 들어 보았는데.”
아폴로니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라잔의 왕녀들 중 스물이 넘도록 대륙 전역을 쏘다니며 마물을 길들이는 일에 매진한 괴짜 왕녀. 일명 ‘동부의 마녀’로도 불리는 사람이었다.
“‘동부의 마녀’가 검을 다뤄?”
“패리스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제국에도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기사들은 많습니다.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한 가지 발생했죠.”
유리엘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듯 눈을 한 번 반짝였다. 패리스의 성정을 무척 싫어하는 그가 아주 가끔씩 내보이는 속마음이었다.
“뭔데?”
“종목은 기마 검술인데…… 아무도 본 적 없는 거대한 말을 타고 나온 겁니다. 등에 날개까지 달린, 일반 말보다 한참 더 큰 괴물을요.”
잘 당황하지도 놀라지도 않는 성격이었지만, 그 말에 아폴로니아는 머금었던 과일차를 뱉을 뻔했다.
“날개가 달렸다면 말이 아니라 마물 아닌가?”
“맞습니다.”
유리엘은 여기까지 설명하고 다시 한 번 씩 웃었다.
“패리스는 물러서지 않았겠군.”
아폴로니아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5년 전 사냥 대회 때 거대한 늑대 마물 앞에서 힘도 못 쓰고 카엘리온과 유리엘에게 관심을 빼앗긴 뒤로, 패리스는 어떻게든 그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애썼다. 황제가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무리하게 마물 퇴치전에 참여해서 진작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의 마녀는 그저 마물 위에서 중심을 잡고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패리스는 준비가 되지 않은 채 그들을 상대하다가 결국 낙마했습니다.”
“모든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총사령관의 체면을 구기기에는 그만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라잔은 항복을 했다고 들었는데.”
“제3 왕녀는 패리스의 목에 검을 들이댄 채로 협상을 요구했습니다. 자신들의 ‘항복’을 받아 주고 군대를 철수하라고요.”
아폴로니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군.”
“예. 치밀한 계획이었습니다. 패리스를 죽인다고 해서 그들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항복 조건은?”
“말 그대로 ‘항복’만 했을 뿐입니다. 제국에 다시 맞서지 않겠다는 맹세였습니다. 반면 저희 쪽에서는 성안의 어떤 것도 해치지 않을 것이며, 포로로 데려가지도 않겠다고 확약을 했기에 약탈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공물이며 관세도 전과 같은 정도로 하기로 했습니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이번 전쟁의 시작은 황제의 폭정이며 과도한 공물 요구에 대한 여러 제후국의 반발이었다. 황제는 그들을 다시 한 번 제국에 굴복시키기 위해 패리스와 그의 군대를 보내야 했고, 결과적으로 많은 비용을 지불해 가며 전쟁을 치렀다.
패리스는 패전국에 대한 약탈로 그 손해를 보전 받고 싶어 했으나 카엘리온과 유리엘의 반대, 그리고 때로는 뒷공작이 있었기에 제대로 된 약탈은 몇 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 비용의 일부 보전, 전과 같은 공물의 약속, 몇몇 포로, 그리고 관세에서의 이득 정도였다. 그런데 라잔과의 일전에서는 그것조차 챙기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아폴로니아는 순수하게 라잔의 제3 왕녀에게 감탄했다. 그 계획의 기초가 되었을 ‘마일론의 눈’에 대해서도. 패리스에 대한 정보에 입각해 세웠을 기발한 계획, 그리고 이를 실행하는 어마어마한 패기. 그녀와 같은 사람은 살면서 본 일이 드물었다.
“‘마일론의 눈’을 확보하는 것은 실패했겠군.”
아폴로니아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가능성 없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뭐?”
유리엘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가 간혹 짓는, 주인의 칭찬을 기다리는 커다란 강아지 같은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라잔에서 데리고 온 포로가 딱 한 명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한 명과 한 마리죠.”
“하지만 포로는…….”
그의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아폴로니아는 그 뜻을 이해했다.
“성 ‘안의’ 어떤 것도 데려가지 않겠다고 확약을 했다? 그러니까 확약 당시 성 바깥에 있던 사람은 예외였겠군.”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가 한 번 반짝였다.
“당시 성안에 있지 않았던 라잔의 제3 왕녀와 그 마물이 패전국의 포로로서 제국군과 함께 수도로 오고 있습니다.”
“네가 한 일이구나.”
그녀는 유리엘을 알았다. 그는 주어진 일을 단순하게 처리하는 듯 보였지만 필요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을 찾아냈다. 라잔에서 요구한 확약에서도, 그는 이를 비틀어 해석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유리엘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단순히 확약의 내용을 카엘리온에게 다시 한 번 읊어 주었을 뿐입니다. 포로를 데려가겠다고 국왕에게 요구한 것은 그 녀석이고요.”
“그쪽에서는 받아들였고? 구국 영웅인 딸을 순순히 내주었어?”
라잔의 국왕도 꽤나 냉정한 아버지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강단이 없거나.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전쟁의 종결을 위해 그 정도의 희생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너는 왜? ‘마일론의 눈’과 제3 왕녀가 무슨 상관인데?”
아폴로니아는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녀가 유리엘에게 지시한 것은 ‘마일론의 눈’을, 정보망을 통제하는 중심인물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데려올 수 없다면 최소한 누구인지 알아 오라고도 했었다. 국왕 본인인지, 그 주변의 천재적인 어떤 대신인지.
“전하, 동부의 마녀가 곧 ‘마일론의 눈’입니다.”
아폴로니아는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고 커진 눈으로 유리엘을 보았다. 유리엘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그런 말투와 표정으로 하는 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어떻게 알 수 있지?”
“라잔이 항복을 한 이후 며칠간 궁에 머무르며 조사한 것입니다. 패리스를 자극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그를 오래전부터 봐 온 것처럼 절묘했으니까요. 계획을 한 사람이 따로 있다기에는 그 태도가 자연스러웠습니다.”
“조사를 했더니 뭐가 나왔어?”
“마물에 미쳐서 대륙을 돌아다녔다는 그 시기가 바로 ‘마일론의 눈’이 탄생한 시기라는 점이었습니다. 왕녀가 거쳐 갔던 그곳에 정보원이 하나씩 생긴 것 같은 흔적도 나왔고요.”
아폴로니아는 그의 말을 곱씹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은 그런 것을 만들 인물이 못 된다 했더니…… 마물에 빠졌다는 것이 일종의 연막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괴물 말을 길들인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니지만 실제로 치중하는 일은 분명 정보의 교환과 처리입니다. ‘마일론의 눈’이 생긴 후로 라잔의 왕실이 부유해졌다는 점과도 일치합니다.”
“제3 왕녀, 동부의 마녀라…….”
대단한 인물이었다. 아폴로니아에게 필요한지 여부를 떠나 감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도착하면 아주 환대해야겠네.”
그녀는 혼잣말처럼 조용히 내뱉었다.
“리페르 쪽에서 무언가 눈치채기 전에 수를 써야 할 겁니다. 그쪽에서도 ‘마일론의 눈’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까요.”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잊지 않는 점이었다.
“제국의 포로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
그녀는 진지했으나 유리엘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는 이런 일에 실패하지 않습니다.”
근거도 없이 확신하는 그 말투에 아폴로니아는 진지함을 버리고 살짝 미소 지었다.
“먼저 와서 소식을 전해 줘서 고마워, 유리엘.”
“별말씀을. 다만 전쟁에서 이기고 오면 청을 들어주신다는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말해.”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던 유리엘은 한 팔을 뒤로 해 몸을 조금 더 편안하게 기댔다. 그러고는 아폴로니아를 지그시 보며 웃었다.
“전하의 리라 연주를 듣고 싶습니다.”
아폴로니아의 미소가 작은 웃음소리로 변하자 유리엘은 다시 한 번 그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처럼 집 한 채를 달라고 청할 생각은 없는 거야?”
“있어 봤자 언제 가겠습니까? 그리고 그 정도는 저도 있습니다.”
“드넓은 과수원과 혼을 쏙 빼놓는 아름다운 화원으로 유명한 비체 백작의 영지를 내가 잊었군.”
아폴로니아의 농담에 다시 어깨를 으쓱한 유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놓여 있던 리라를 가져왔다.
“연주해 봤자 같은 곡인데 질리지도 않나 봐. 그만큼 음악을 접했으면 이젠 눈이 높아졌을 법도 한데.”
악기를 건네받으며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연주는 매번 다릅니다. 전하를 능가하는 연주자는 없고요.”
객관적으로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는 진지해 보였다. 유리엘은 다시 침대에 앉아 눈을 감았고 곧이어 방 안에는 익숙한 선율이 울렸다. 리샨 지방 벨라들의 잔치에서 음악가인 탄이 연주했던 바로 그 곡이었다.
유리엘은 매번 그녀를 찾아올 때마다 같은 곡의 연주를 부탁했다. 덕분에 아폴로니아는 그 곡에 한해서는 꽤나 유려한 연주를 익혔다. 그래 봤자 탄이 하던 연주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낮고 차분하던 음악이 화려하게 고조되었다가 끝났다. 유리엘도 감았던 눈을 떴다.
“이제 가 보겠습니다. 개선 행진 대열에 합류했다가 정식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항상 몸조심해.”
아폴로니아의 걱정 섞인 한 마디에 유리엘은 환하게 웃고 창문을 넘어 사라졌다.
“벌써 보이지도 않네.”
창밖을 내다보았으나 그는 그림자 어딘가로 몸을 숨겼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5년 사이에 유리엘의 실력은 더욱 늘어 이제는 기척을 완벽하게 숨길 정도가 되었다. 검술은 아폴로니아가 재단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섰기에 어떤 경지인지 정확히는 파악이 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실력을 파악하는 것은 큰 의미도 없었다. 제국에, 아니 온 대륙을 뒤져도 그만큼 검에 능한 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카엘리온은 순식간에 성장해 패리스를 넘어섰지만 아직 유리엘의 검술과는 격차가 있었다. 활로 승부를 하면 모를까.
“분명히 더 큰 줄 알았는데…….”
연주한 리라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아폴로니아는 오랜만에 본 유리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유난히 커 보였던 키, 전쟁터에서 조금 야윈 듯한 몸, 환하게 웃으면 예쁘게 접히던 눈꼬리도.
그는 점점 더 남자다워졌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아름다워졌다. 아폴로니아는 자신이 그 점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5년 전에 그를 만났을 때에도 유리엘은 아름다웠으나 아폴로니아에게 그의 외모는 중요했던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잘난 얼굴에 큰 감흥을 느낀 적이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유리엘은……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녀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며칠 내에 개선 행진을 하겠네.’
그녀도 준비를 할 것이다. ‘마일론의 눈’을 자신의 손 안에 쥘 준비를.
그러나 머리를 비우면서도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이 놓고 간 수국을 작은 유리병에 꽂는 것은 잊지 않았다.
* * *
“곧 도착하신대요.”
수도에 있는 패리스 사유의 저택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아모레타가 시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녀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자주 보는 얼굴이지만 어쩌면 이렇게 적응이 안 될까.
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얼굴. 그녀는 벨라를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여자의 외모는 벨라라는 사실로 설명이 안 될 정도였다.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영혼을 빼앗기는 그런 기분을, 시녀는 매일 느끼고 있었다.
“전하가요?”
아모레타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녀의 나른한 목소리에서 깊은 반가움이 엿보였다.
“내일이 개선 행진이에요. 곧 황태자 전하께서 도착하시는 거예요.”
아모레타는 활짝 웃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아모레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녀는 꿈꾸듯 패리스의 모습을 그렸다. 황궁에 도착하고 하루쯤 지나면, 언제나 그랬듯 그녀를 보러 올 것이다.
아모레타는 패리스를 사랑했다.
5년 전 리샨 지방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둑을 만나 가진 돈 대부분을 잃었다. 도둑의 입장에서 혼자서 여행을 하는 데다가 다리 한 쪽을 저는, 세상의 물정에 밝은 편도 아닌 그녀는 너무나도 눈에 띄는 목표물이었던 것이다.
수도에 도착할 무렵에는 돈도 먹을 것도 없이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 그녀를 살린 것이 패리스였다. 패리스는 아모레타의 구원이었다.
그는 아모레타를 만난 순간부터 그녀를 사랑해 주었다. 먹을 것, 입을 것, 편안한 잠자리 등 그녀가 살면서 가져 본 적 없는 많은 것을 주었다. 그는 아모레타가 만났던 어떤 남자보다도 다정했다.
패리스의 돌봄 아래 건강을 회복했을 때, 그녀는 리샨에서 만났던 사람을 찾고자 했었다. 절제절명의 순간에 그녀에게 연민을 가져 주었던 사람.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로브를 쓴 그 여자는 죽을 위기에 처했던 아모레타를 살려서 도망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아모레타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를 찾겠다는 의지가 흐릿해질 무렵, 패리스는 그녀에게 자신의 연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와 있어 줘. 여기서 계속.”
그는 아랫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여기며 폭력을 휘두른다는 항간의 소문과는 전혀 달랐다. 배려심 많고 부드러웠다. 가끔, 아주 가끔 저택 내의 사용인들이 그를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었지만 아모레타를 대하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애정이 넘쳤다.
여색을 밝힌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아모레타 앞에서는 전혀 그런 기색도 없었다. 패리스의 눈에는 언제나 그녀 한 명만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는 리샨에서 만났던 그 사람을 묘하게 닮았다. 짚어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로브 속으로 언뜻언뜻 보였던 얼굴선이며 특유의 우아한 억양과 손짓 같은 것이 그녀를 연상시켰고, 이는 아모레타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그렇게 할게요.”
아모레타는 결국 패리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편안하게 저택에서 생활하며, 패리스가 외출을 할 때마다 그와 시간을 보냈다.
패리스와 함께하면서 그녀가 심심풀이로 만든 장난감 같은 것을, 그는 신기하게 여겨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작 부인을 데리고 저택을 방문했다.
“제약에도 소질이 있는지 보고 싶구나. 전하를 위해 네가 꼭 해 줘야 하는 일이 있다.”
공작 부인은 패리스의 아름다운 갈색 눈을 황실을 상징하는 금적안으로 만드는 약을 원했다.
아모레타는 몇 달 동안 연구에 매달린 끝에 패리스의 눈동자를 공작 부인이 내밀었던 선황의 초상화 속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는 눈동자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기뻤다. 그 일 이후로 패리스는 주기적으로 그 약을 먹기 위해 저택에 더 자주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일하는 것이 어떠냐.”
얼마 후 공작 부인은 아모레타가 생각해본 적 없는 제안을 했다. 상단을 위해 일해 달라는 것. 아모레타는 리샨에서의 일이 떠올라 거절할까 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 패리스는 의미 있고 즐거운 일이 될 것이라며 그녀를 설득했다.
애정을 넘어 그녀의 능력에 감탄하는 그의 표정을 보자 아모레타는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작 부인의 요청에 따라 이런 저런 물건들을 만들어 냈고, 이는 공작 부인의 상단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패리스는 그녀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고 말했고 아모레타는 뿌듯했다. 패리스의 미소를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면 그녀는 얼마든지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한두 번, 공작 부인은 아모레타를 따로 불러 멀리 있는 사람을 해할 수 있는 독약 같은 것을 만들어 줄 수 있는지 은밀히 물어본 적이 있었다.
“패리스를 위협하는 자들이 있단다.”
그녀는 설명을 덧붙이며 말했다. 그러나 아모레타는 그것만큼은 승낙하지 않았다. 리샨에서 은인이 했던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직접 사람을 해하는 물건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찾을 수는 없었지만 아모레타는 기억했다. 그 사람이 자신을 살려 주면서 했던 말을. 아모레타의 거절을 들은 공작 부인은 더 이상의 강요는 하지 않았다.
“전하가 오신다고.”
아모레타의 짙은 자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오랜만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데려가 주시겠지.”
패리스는 떠나기 전 그녀를 더 가까이에 두고 자주 만날 거라는 약속을 했었다.
“황궁으로 데려가 주시겠지.”
아모레타는 들뜬 표정으로 패리스와의 약속을 되새기며, 그와 다시 만날 순간을 그렸다.
* * *
개선 행진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패리스를 선두로 한 제국군은 번쩍이는 은빛 갑옷을 입고 웅장한 행렬을 이루며 수도에 입성했다.
“와아! 맨 앞의 분이 황태자 전하이신 거야? 멋지다!”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이셨다지? 그럼 전쟁에서 이긴 건 다 저분 덕이네?”
각지에서 모여들어 구경하는 백성들은 긴 행렬을 보며 웅성거렸다. 주로 감탄사였지만 그 안에는 조금씩 한 가지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어……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실제로 활약한 건 황태자 전하가 아니라 대공 전하라던데.”
“나도 비슷하게 들었어. 그리고 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비체 백작이라는 것도. 아탈란의 전투 이야기를 알아?”
“두 분이 몇십 번이나 서로의 목숨을 구했다고 했어!”
“몇 년 전 사냥 대회 때 마물을 잡았던 분들 아니야? 그 때도 비체 백작님께서 대공 전하를 구했잖아!”
총사령관은 분명 패리스였으나 백성들 사이에서나 병사들 사이에서나 가장 인기가 높은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패리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개선 행진에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표정으로 조용히 말을 탔다.
“엇! 저기 봐! 저분들이다!”
패리스가 직접 이끄는 제1 부대의 병사들 뒤로, 고급스러운 제복을 갖춰 입은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세상에! 저렇게 생긴 사람들은 처음 봐!”
“두 분이 대공 전하와 비체 백작님이라고? 은발 꽃미남이 어느 쪽이야? 나 저분이랑 결혼할래!”
“딱 보면 모르니? 흑발에 검은 제복이 대공 전하잖아! 황실의 상징인 붉은 눈동자도 몰라? 난 저렇게 위험해 보이는 남자가 좋더라!”
두 사람은 주군과 봉신으로서는 드물게 나란히 등장했다. 그 모습이 더욱 구경꾼의 시선을 끌었다. 한참을 웅성이던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가 한 가지 소문을 더 흘렸다.
“그거 들었어? 패리스 전하를 결투로 이긴 동부의 마녀가 함께 왔대!”
“결투로 이겼다고? 그럼 왜 포로가 됐지?”
“황태자 전하가 여자한테 졌다고?”
“행렬 뒤쪽에 있대!”
백성들의 말 몇 마디가 들렸는지 패리스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그리고 행렬의 마지막에, 어마어마한 것이 등장했다.
“저, 저게 말이야?”
“날개가 달렸어!”
“저걸 사람이 탔다고? 동부의 마녀라더니 진짜인가 봐.”
그들의 시선 끝에는 징그러울 정도로 거대한 말 한마리가 사슬에 목이 묶인 채 행렬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 위에는 비슷한 모습으로 팔이 묶인 여자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높이 묶은 짙은 갈색 머리에 살짝 그을린 피부, 탄탄하고 늘씬한 몸은 한 눈에 보아도 기사의 모습이었다. 라잔에서 가져온 긴 드레스를 입었지만 언제라도 자신을 묶은 사슬을 끊고 튀어오를 것만 같았다. 그 기세는 그녀가 탄 검은 괴수와 닮아 있었다.
포로라고는 하나 여자는 무척이나 당당한 표정이었다. 개선 행진 행렬 마지막에 끌려오고 있으면서 마치 자신이 백성들을 구경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구경꾼과 눈이 마주치면 그녀는 짓궂은 아이처럼 씩 웃었다.
“저거 봐! 하늘에…….”
하늘에는 그녀를 따라온 듯한 몇몇 마물들이 끽끽대고 있었다. 죽음을 상징하는 외눈까마귀며, 불행을 가져온다는 흰눈 박쥐 같은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들을 보며 여자는 한 번씩 입모양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는 했다.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도 보였다.
“무슨 저런 여자가 다 있는지 모르겠군.”
“제국에도 저런 마물들이 가득 차는 거 아니야? 지금은 기껏 작은 날개원숭이 따위나 돌아다니는데…….”
“말의 덩치를 보니 황태자 전하가 졌다는 것이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의 쑥덕거림에 이를 가는 패리스와 달리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 * *
“앞으로 오라.”
황제는 높은 황좌에 앉아 명령했다. 의무적으로 나와 있던 아폴로니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서서 황제 옆에 앉은 세타와 눈인사를 했다.
몇 년 전까지 항상 황제의 옆자리를 차지했던 페트라는 놀랍게도 세타의 옆자리에 서 있었다. 동생에 대한 황제의 신뢰는 변한 것이 없었지만 애정만큼은 새로운 시녀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패리스, 카엘리온과 유리엘을 비롯한 전쟁의 공신들의 공을 치하하는 자리였다. 가장 큰 공로를 인정받은 것은 당연히 패리스였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알게 모르게 카엘리온과 유리엘을 향해있었다.
주역인 세 사람은 함께 황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카엘리온을 훑었다.
5년 사이에 그는 훌쩍 자라 유리엘과 비슷한 키가 되어 있었다. 한때 순한 아이 같았던 눈매는 날카롭게 다듬어져 좌중을 압도했다. 선이 섬세하고 예뻐서 얼핏 보면 기사보다는 예인처럼 보이는 유리엘과 달리 카엘리온은 한눈에 보아도 단단하고 강인한 전사였다.
외모가 닮지는 않았지만 그 기운이 묘하게 파스칼 3세와 비슷했다. 그런 이미지에는 그의 활 솜씨도 한몫했다. 검을 든 그가 현존하는 최고의 검사 중 한 명이라면, 활을 든 그는 한 마디로 괴물이었다. 파스칼 3세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그는 유리엘의 도움을 받아 셀 수 없이 많은 전투와 전쟁, 그리고 암살 시도를 견뎌냈다. 그리고 매번 강해졌다. 결과적으로, 황제와 페트라가 죽을힘을 써서 없애려 했음에도 카엘리온은 살아남았다. 이는 그에게 ‘불사신’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림자처럼 등장해 암살자들을, 적들을 순식간에 벤다 하여 ‘사신’이라 불리는 유리엘과는 묘한 짝을 이루었다.
“제국은 그대들을 기억할 것이다.”
황제는 짧은 몇 마디로 그들의 공로를 치하했다.
“포로를 데리고 오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황좌의 건너편에서 거대한 문이 열리고 라잔의 왕녀가 끌려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팔을 잡는 병사들을 뿌리치며 약간의 불쾌함을 표시하였으나 포로치고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처음으로 그녀를 제대로 보았다. 짙은 초콜릿 같은 머리색에, 창백한 수도의 귀족들과 달리 건강한 구릿빛 피부, 긴 팔다리와 당당한 그 표정은 야생 표범을 연상시켰다.
“라잔의 에반젤린 리에트 왕녀입니다.”
시종이 황제의 옆에서 포로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아폴로니아는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들었다.
‘어울리지 않게 성스러운 이름이네.’
“동부의 마녀, 고개를 들어라.”
황제의 말에 에반젤린이 눈을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프리오닉스를 길들여 부린다는 것이 사실인가?”
프리오닉스는 날개 달린 거대한 말을 칭하는 이름이었다. 대륙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 전설처럼 내려오던 것이었기에 그 존재는 모두의 관심을 받았다.
“글쎄, 프리야를 길들였다기보다는 친해진 거랄까요.”
에반젤린은 놀랍게도 황제를 똑바로 마주 보며 농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그녀를 묶은 사슬이 무색하게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은 듯했다.
“말장난은 필요 없다. 짐승에게 접근해 그를 압도하고 통제하는 것은 그를 길들인 것과 같다.”
황제는 그 장난에 말리지 않겠다는 듯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러나 에반젤린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생각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에반젤린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녀의 적갈색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황태자 전하를 길들인 것은 프리야겠군요. 프리야와 부딪혀 정신 못 차리고 낙마했었으니까요.”
그녀가 자신이 타고 온 마물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한 마디 순간적인 정적을 불러왔다. 둘러선 각각의 사람들의 눈 속에는 분노며, 경악, 긴장감 등 각종 감정이 흘렀다. 아폴로니아도 눈을 크게 뜬 채 황제의 반응을 살폈다. 동부의 마녀가 혹시 미친 것은 아닌가 의심하면서.
“사슬에 묶여 개선 행진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으로는 예의를 배우지 못한 모양이로군.”
“그것이 폐하의 교육 방침이라면, 황태자 전하의 매너도 이해가 갑니다.”
그녀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에게 말대꾸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는 듯 한 마디 한 마디에 날을 세웠다.
“전쟁의 책임을 지고 항복했다면 그 입을 다물라.”
“전쟁은 제국에서 일으켰습니다. 제후국에서 감당할 수 없는 공물을 요구하면서 무엇을 기대하셨는지 모르겠군요.”
황제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에반젤린도 이번에는 장난으로 던진 말이 아닌 듯 긴장이 어린 표정이었다.
“……큰 가죽 부대를 하나 가져오라.”
이윽고 황제가 명령했다. 그는 시종이 가지고 온 부대를 들고 에반젤린에게 몇 걸음 다가섰다.
“보이는가?”
“보입니다.”
“이 부대에 반쯤 썩은 딸의 머리가 담긴 모습을 보는 라잔 국왕의 모습도 보이는가?”
서늘한 그의 협박에 드디어 에반젤린이 멈칫했다.
“가죽 부대를 왕녀에게 하사하라. 왕녀가 이를 보면서 말을 하기 전에 생각하는 버릇을 들일 수 있도록.”
황제는 매서운 황금빛 눈동자로 에반젤린을 노려보며 차갑게 명령했다.
“아버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조용하던 패리스가 나서며 말했다.
“무엇이냐?”
황제는 기분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듯, 에반젤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저 포로를 제게 주십시오. 제가 버릇을 들이겠습니다.”
그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맹세코 저 여자는 다시 아버님께 말대꾸를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에반젤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그 눈에 순간적으로 공포가 스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도, 미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황제와 패리스에 대해 쌓인 분노가 컸던 것이다.
‘볼수록 대담하네.’
아폴로니아는 점점 에반젤린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녀에게는 전에 만난 어떤 사람과도 다른 패기가 있었다.
“좋은 생각이구나.”
타인의 감정을 꽤 섬세하게 파악하는 황제 또한 에반젤린의 눈동자를 읽었는지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부로 왕녀 에반젤린 리에트는 황태자의 노예이다. 죽이든, 시첩으로 삼든, 부하들에게 상으로 내리든 네게 맡기겠으니 좋을 대로 하라.”
“감사합니다, 아버님.”
다시 끌려 나가는 에반젤린을 보며 두 부자의 눈이 다시 한 번 잔인하게 빛났다. 카엘리온과 유리엘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년간 단련된 그들은 황제에게도, 페트라에게도 속마음을 비춰 보이지 않는 법을 잘 알았다.
* * *
“이제야 불러 주니 섭하군요, 누이. 제가 보고 싶지 않으셨습니까?”
“못 본 사이에 능청만 늘었구나. 위엄 넘치는 장군이라더니 소문이 틀렸던 모양이야.”
“장군은 누이를 보고 싶어 하면 안 됩니까?”
별궁의 서재에서, 카엘리온은 빙글빙글 웃으며 아폴로니아에게 농담을 던졌다. 그는 책상에 살짝 걸터앉아 몸을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 바람에 칠흑처럼 검은 고수머리 몇 가닥이 아폴로니아의 눈 가까이로 흘러내려 왔다.
“다친 곳은 없고?”
“멀쩡한 곳이 없었죠. 다만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
“부상 입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아폴로니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일부러 눈꼬리를 내리고는 울상을 지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어린 시절 그녀에게 매달리던 순한 모습이 연상되었다.
“가장 많이 다쳤던 것은 마음입니다. 누이에게 또 다른 약혼자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말입니다.”
“그건 아드리안이 처리했어.”
“압니다. 그래서 마음이 다 나았죠.”
그는 다시 능청스럽게 웃으며 등 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파나스 왕국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본 순간 누이밖에 생각나지 않더군요.”
“이제 약탈도 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공물을 더 내놓으라고 억지를 쓰는 패리스를 막아 준 대가로 국왕이 선물한 겁니다.”
카엘리온의 손에 들린 것은 찬란한 오팔 목걸이였다. 파나스 왕국은 대단한 특산품이 없었지만 유일하게 그곳에서 발견되는 오팔은 대륙 어디보다 아름다웠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뒤로 돌아가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너무 화려해서 지금 차림에는 어울리는지 않을 텐데.”
“누이는 뭘 해도 어울립니다. 어색하면 더 화려한 드레스를 선물로 드리지요.”
아폴로니아를 보는 카엘리온의 눈에는 조금 전 황제 앞에서 느껴졌던 강인함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칭찬을 원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이런 건 연인에게 선물하면 좋을 텐데.”
“그러니 약혼자인 누이와 어울리는 것 아닙니까.”
“말했잖아. 너와 나는 연인이 아니고 함께 살 일도 없다고. 상대를 기만하지 않는 선에서 연애는 해도 돼. 최대한 일찍 이혼해 줄 테니까 그때는 너도 조금 더 자유롭게 살아.”
찰나였지만 카엘리온의 눈에 서글픔 같은 것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금방 더욱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폴로니아에게 농담을 걸었다.
“약혼자 있는 남자를 좋아해 주는 여인이 없어서 말입니다.”
“내 6명의 약혼자 중 3명과 결혼한 시녀들은 여인이 아니고 사내들인 줄 아니? 아드리안이 아무 데도 안 가고 있어 주는 것이 기적일 정도야.”
카엘리온은 큭큭 웃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벌써 6명입니까? 누이도 대단하고 아드리안도 대단하군요.”
“7번째는 조금 늦게 나타나기를 바랄 뿐이야. 상단 일을 하는 데에 자꾸 방해가 돼서 말이야.”
“방해를 받으면서도 대륙 최고의 부호로 떠오르셨군요. 황제보다 부유한 이데나 상단주님.”
아폴로니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웃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많은 투자와 다양한 사업으로 인해 그녀의 부는 몇 년 전 보석 광산을 막 찾았던 때보다 몇 배나 늘어 있었다. 늘어난 건 금전뿐이 아니었다. 이번 전쟁에서 대가 없이 최상급의 무기를 공급한 까닭에 이데나 상단은 정치적으로도 의미 있는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백성들도, 귀족들도 아일린 이데나를 존경했고 제국에 대한 그녀의 충성심을 찬양했다.
“네 도움도 컸단다. 너는 타고난 재능이 많으니까.”
카엘리온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아폴로니아가 스승을 붙이고 책을 선물하며 가르친 덕에 그는 사업에도 정치에도 능했다. 상단 운영의 일부를 대신 하면서 사업을 더 키운 것도 카엘리온이었다.
“유리엘만 하겠습니까. 귀족은 물론 옆 나라 왕녀들조차도 비체 백작 부인이 되고 싶어서 애를 쓰더군요.”
한편 그 옆에서 같은 공부를 했던 유리엘은 별것 없던 자신의 영지를 부유하게 발전시키는 데에 그 지식을 사용했다.
물려받은 유산 하나 없었던 비체 백작은 몇 년 전 몰락 직전의 어느 자작 영지를 사들였고, 이를 기반으로 점점 넓은 땅을 사들여 이제 제국에서 가장 탐나는 영지를 가진 귀족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둘 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마치 잘 키운 동생을 칭찬하는 듯한 아폴로니아의 말에 카엘리온의 눈에는 다시 아쉬움이 스쳐 갔다.
“안부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아폴로니아는 의자를 끌어와서 카엘리온을 앉혔다. 그는 장난스럽게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아폴로니아가 책상 뒤로 건너가 앉자 그저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에반젤린 왕녀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줘.”
“음…….”
카엘리온은 말을 쉽게 뱉지 못했다. 단어를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이야? 마지막에 협상을 한 것도, 포로로 데려온 것도 너잖아.”
“그게…… 평범하지는 않습니다.”
“마물을 좋아한다는 건 사실이야? ‘마일론의 눈’을 덮기 위한 연막은 아니고?”
카엘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마물에 미친 사람인 건 확실합니다. 성을 돌아보기 위해 왕녀의 방에 들어가 봤는데 시골 마구간보다 더한 냄새가 나더군요. 구석구석에 흰눈 박쥐가 날아다니는가 하면 거대한 날개원숭이를 절친한 친구처럼 대하고 있었습니다.”
“뭐? 날개원숭이를 잡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들었는데.”
날개원숭이는 검고 흉한 생김새에 교활할 정도로 지능이 높아 얼마 전까지는 마물 중에서도 혐오스러운 축에 속했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무슨 변화를 겪었는지 대륙 전역에 키가 손가락 정도밖에 안 되는 녀석들이 등장해 민가를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고, 그 외모도 어딘가 귀여워졌기에 간혹 그를 잡아서 키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나 누구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날개원숭이는 날아다니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것과 더불어 필요에 따라 보호색을 가졌기 때문이다. 눈에 거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괴물을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간혹 성공하는 경우 날개원숭이는 하루가 안 되어 죽어 버렸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키우는 것을 포기하고 간혹 먹을 것을 남겨 주는 식으로 그들을 대했다.
“글쎄, 왕녀의 표현에 따른다면 그저 친한 것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분명히 녀석은 왕녀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습니다.”
“외눈까마귀는? 개선 행진 때에 따라왔다며?”
“그것도 방에서 본 것 같습니다. 여러 마리를요. 녀석들이 사람 앞에서 그렇게 얌전한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외눈까마귀는 날개원숭이와 달리 사람들의 환영을 조금도 받지 못하는 마물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해코지한 사람은 평생 기억하고 쫓아다니며 복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적응력이 뛰어나고 집요한 그들은 복수의 대상이 된 사람이 대륙 건너편으로 옮겨 가도 어떻게든 그들을 찾아내어 기습 공격을 하고는 했다. 그렇기에 뛰어난 사냥꾼들도 외눈까마귀를 자극하는 것은 피했다.
“뭐랄까, 마물을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보는 느낌이더군요. 기괴할수록 피하기보다는 접근하려는 성격을 가진 기인입니다. 제일 기괴한 것은 본인이지만요.”
“‘마일론의 눈’으로서는 어떻지?”
“티는 안 냈지만 그 주인인 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그녀를 포로로 잡을 때 국왕은 세상을 잃은 듯한 얼굴이더군요. 곧 납득하고 포기했지만 말입니다. 그녀는 저에 대해서도, 유리엘에 대해서도, 그리고 제국군의 기밀에 대해서도 분명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패리스는 애초에 상대가 안 됐겠군.”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왕녀는 그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었으니까요.”
“흐음…….”
아폴로니아는 생각에 잠겼다. 들을수록 희한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은 사슬에 묶여 감금된 상태라니 어딘가 안타깝기도 했다. 그녀는 중요한 질문을 한 가지 더 하기로 했다.
“그럼, 패리스는 그 사람을 어떻게 할 계획인 걸까?”
카엘리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의문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금방 밝혀졌다.
“아무리 패리스라도 너무 간 거 아니야?”
별궁의 비밀 공간에는 오랜만에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있었다. 카엘리온, 유리엘, 그리고 아폴로니아.
그들은 유리엘이 좋아하는 얼음이 담긴 과일차를 마시며 에반젤린의 처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찬 음료를 좋아하지 않는 카엘리온이 몇 차례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원래 그런 자입니다. 다른 패전국의 포로를 가지고도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소파에 몸을 기댄 카엘리온이 혐오를 숨기지 않고 말하자 유리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아마 이 정도의 일은 어린 시절부터 봐 왔을 거라고 아폴로니아는 생각했다.
그들은 패리스가 병사들 사이에 전달한 전언을 다시 읊어 보았다.
“기사들의 검술 대회…… 상품은 라잔의 제3 왕녀라.”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수치라는 거겠죠. 그다지 똑똑하지는 않지만 사람을 괴롭히는 쪽으로는 머리가 발달한 자입니다.”
“기사들이나 참전한 병사들 사이에서 왕녀의 평판은 어때?”
“갈리고 있습니다. 패리스를 집요하게 추종하는 자들은 미워하지만 상당수의 병사들은 오히려 고마워하고요.”
카엘리온이 설명했다.
“고마워해?”
“사상자 없이 빠르게 전쟁을 끝내 줬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항복하기도 했고요. 물론 마녀라서 꺼리는 분위기는 있습니다.”
“그럴 만하군. 패리스는 전장의 신이니 검을 든 사자니 하는 유치한 별명을 얻어 보겠다고 불필요한 전투를 벌였으니까. 전쟁의 발발도 아버지의 과도한 공물 요구 때문이고…….”
“왕녀를 싫어하지 않는 자가 그녀를 차지한다면 그나마 편안할 수 있겠지만…….”
“그럴 일은 없습니다.”
조용하던 유리엘이 카엘리온의 말을 끊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대답을 듣지 않고도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결론이 맞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가 확신하는 것은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이 대회의 진행 목적이 왕녀에게는 수치심을 안겨 주는 것이니까요. 정신머리가 멀쩡히 박힌 자는 참가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자기 차례만 대충 끝낼 겁니다. 남은 자들은 왕녀에게 흑심을 품었거나 황태자에게 잘 보이려는 가레스 리페르 같은 놈들이겠지요.”
카엘리온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 말이 맞습니다.”
“패리스가 바라는 것도 그것이겠지? 가장 잔인한 자에게 왕녀가 가는 것.”
아폴로니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에반젤린을 데리고 온 것은 카엘리온과 유리엘이었고 이를 지시한 것은 자신이었기에 그녀는 이 모든 일에 책임을 느꼈다.
물론, 연민이나 도의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를 어떻게든 패리스의 손에서 빼앗아 아폴로니아에게 협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제가 들은 것은 다릅니다.”
유리엘이 다시 말했다.
“오늘 패리스의 측근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이번 대회에 왕녀 본인을 참가시킬 예정이라고 합니다.”
“상품으로 내건 사람이 직접?”
“예. 이기면 자유를 주겠다, 뭐 그런 것입니다. 물론 우승하지 못 하겠죠.”
아폴로니아의 마음속에서 패리스에 대한 혐오가 조금 더 커졌다.
“벗어나겠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목적이구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패리스라면…….”
아폴로니아는 무언가를 깨닫고 피식 웃었다. 오라비의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는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그는 패배를 잊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냥 대회에서 우승을 놓친 일로 지금까지 카엘리온과 유리엘을 증오하고 있으니 알 만하지 않은가.
“그는 직접 대회에 참여하려는 거야.”
유리엘도, 카엘리온도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이윽고 카엘리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잔에서 패배했던 굴욕을 씻고야 말겠다는 것이군요. 누이의 말이 맞습니다.”
“잡은 사냥을 살짝 풀어 줬다가 희망을 갖는 순간 다시 잡는 것. 패리스가 어린 시절부터 즐기던 놀이지.”
패리스는 대회 한 번으로 에반젤린의 고통을 끝내 줄 리가 없다. 대회를 열고, 자신의 명예를 높이고, 다시 그녀를 손에 쥔 채로 천천히 핍박하려 들 것이다.
“대회가 멀쩡히 진행된다면 그녀를 찾아오는 방법은 명확할 텐데요.”
유리엘이 카엘리온을 흘깃 보며 말했다.
“카엘리온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는 직접 우승하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카엘리온이 전 제국에 이름을 날릴 수 있도록 유리엘은 한 발 뒤에서 그를 빛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익숙했다.
“맞아. 패리스는 아마 카엘리온이 그런 유치한 대회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정식 대회라기보다는 그저 패리스와 그 수하들의 저질스러운 놀이 같은 거니까.”
“물론 쉽지는 않을 겁니다. 참가한다면 그 쪽에서 뭔가 꼼수를 쓸 테니까요. 미리 부상을 입히려고 하든, 황제를 설득해 물러 달라고 하든…….”
유리엘의 분석에 고개를 끄덕인 아폴로니아는 카엘리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패리스와 정식으로 검투를 해 본 적 있어?”
“열여섯 살 때 키튼 백작 영지에서 수련을 하다가 근처에 들른 패리스가 결투를 청한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제 패배였습니다.”
그는 한 마디 변명도 없이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만큼 패리스는 뛰어난 기사였다.
“그럼 잘됐네. 이번 기회에 스스로의 실력을 시험해 봐.”
아폴로니아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소파에 편안히 등을 기댔다. 다혈질에 잔인한 패리스 덕분에, 골치 아픈 일이 조금 처리될 것 같았다.
“누이, 지금의 저는 일대일 결투에서 패리스에게 지지 않습니다.”
카엘리온은 조금 억울하다는 듯 호소했다. 그 정도는 당연히 이미 알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알아.”
“그럼 그 시험이라는 건…….”
“검술도 검술이고, 연기도 좀 시험해 보겠다는 거야.”
아폴로니아는 이번에는 유리엘을 보았다. 그는 왜 쳐다보는 듯 멀뚱멀뚱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이번 기회에 다른 일도 하나 처리를 해야겠거든.”
“예?”
“몇 년 사이에 유리엘이 황궁으로 숨어드느라 너무 고생을 해서 말이야.”
아폴로니아는 찻잔 앞에 놓인 다과를 하나 집으며 말했다.
“전쟁도 끝나고 세력도 강해진 지금, 카엘리온에게는 전만큼 호위가 필요하지 않고.”
“누이, 그 말은 그럼…….”
아폴로니아는 은은하게 미소를 띠었다. 무언가를 계획할 때 그렇듯, 그녀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조금 더 짙은 붉은빛으로 반짝였다.
“이번 기회에 별궁으로 아예 옮겨 오려고. 유리엘을 말이야.”
짧은 순간 유리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카엘리온은 거의 반대의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는 나한테 필요해.”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이 보고 싶었다는 개인적인 감상은 접어 두고 짧게 설명했다.
“유리엘을 누이 곁에 데리고 있으려고요? 제 기사로 있던 자를 누이에게 주면 누이는 의심을 살 겁니다.”
카엘리온은 무언가 불안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패리스가 깔아 준 판을 이용해야지. 카엘리온의 연기, 그리고 패리스를 가지고 놀 만한 실력이 같이 빛을 발해야만 가능해.”
그녀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카엘리온의 긴장한 얼굴을 관찰했다. 그는 숙제를 하기 싫은 아이처럼 입을 내밀었다.
“누이는 시험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는 불만스럽게 툴툴거리며 유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리엘은 도와줄 생각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과일차를 들이켤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시험이 싫다며 투덜대는 카엘리온은, 오래전 선황을 바라보던 아폴로니아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 * *
“다음은 데이먼 키튼 백작 영식과 에반젤린 리에트!”
황궁의 연무장에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백 명의 기사들이 둘러선 가운데 어린 소년으로 보이는 한 기사가 머뭇거리며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다른 한편에서는 에반젤린이 검을 들고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나왔다.
“허억- 헉.”
“에반젤린님에게는 이번이 7회전이군요.”
사회를 보던 패리스의 측근이 비웃듯 말했다.
대회는 승자가 새로운 도전자와 붙는 방식으로 길게 이어졌고, 전혀 공정하지 않았다. 물론 예상했던 바이기 때문에 에반젤린은 1회전만 대충 치르고 탈락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패리스가 참가자들에게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 에반젤린이 상대하는 이들은 누구도 그녀를 쉽게 지도록 두지 않았다. 그저 힘을 다 빼 놓고 에반젤린이 지칠 때쯤 져 줄 뿐이었다.
검을 던지고 항복을 선언하면 상대도 검을 던지고 체술로 공격해 왔다. 어쩔 수 없이 에반젤린은 모든 시합을 전력으로 치러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을, 패리스는 단상 위의 의자에서 흡족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자, 시작!”
이번에 출전한 것은 어린 소년으로, 지쳐 있는 에반젤린을 상대하는 것이 전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자 패리스의 측근이자 사촌인 가레스 리페르 소공작이 소년의 등을 다시 한 번 떠밀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가, 가겠습니다.”
챙-
소년은 에반젤린의 시선을 피하다시피 하며 검을 휘둘렀다. 지쳐 있는 그녀도 충분히 받아칠 수 있는 속도였다. 보아하니 이 시합이 졸렬하고 비겁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거부할 용기는 없는 듯했고.
“하아-.”
에반젤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조그마한 소년에게 쓸데없는 죄책감을 더해 주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애써서 없는 힘을 냈다.
챙-
에반젤린의 일격에, 아무 의지도 목표도 없던 소년의 검이 날아갔다. 4회전이 끝난 것이었다.
“기사 가문의 영식에, 누이는 비에른의 왕비인 것치고는 부끄러운 실력이로군.”
패리스의 비아냥거림 속에서 데이먼 키튼은 터덜터덜 군중 속으로 돌아왔다.
“다음 도전자는 누구지?”
패리스는 엉덩이가 들썩거려 못 견디겠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그의 증오 가득한 시선은 에반젤린을 향해 있었다.
그제야 에반젤린은 상황을 확실히 깨달았다. 패리스는 마지막을 자신이 장식하려는 것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에반젤린에게 설욕하기 위해서. 이 망할 쪼잔한 녀석은 그녀를 확실하게 이기기 위해 먼저 에반젤린의 기운을 다 빼놓기로 한 것 같았다. 나름의 치밀함 같은 것이었다.
“제 힘은 웬만큼 다 빠졌으니 그냥 전하께서 나오시죠.”
에반젤린이 지쳐서 입을 벌리자 그녀의 본심은 그대로 튀어나왔다.
“……뭐라고 했느냐?”
“제국 최고의 전사 중 하나라더니,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황제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하게, 연무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계집이 아직 혀는 살아 있구나.”
패리스가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그럴수록 그의 민낯은 잘 보였다.
“제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라잔에서의 전투가 너무 충격적이라 제 전력을 떨어뜨려 놓지 않고는 상대할 용기가 안 나는 것 아닙니까?”
이제는 지쳐서 결과를 생각할 힘도 없어진 에반젤린은 그녀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비아냥거리기.
“저는 검을 겨우 3년 배웠고 대륙에는 남녀 불문 저보다 뛰어난 검사들이 넘쳐 납니다. 아폴론의 후예 어쩌고 하는 황태자가 저 하나가 무서워서 당당히 붙지도 못합니까? 이제 힘 다 빠졌으니 검 들고 들어오시죠.”
그녀는 제국에 잡혀 온 이상 어차피 오래 살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죽을 때 속이라도 시원하고자 했다.
“네가 여기서 맞아 죽고 싶은가 보구나.”
“아니, 그러니까 저를 패서 죽이려면 빨리 들어오시라고요.”
패리스가 자극을 받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빨리 오시지 않았다가 에핀하르트 대공이나 비체 백작이 대회에 참가하면 어떡합니까? 그럼 우승도 못 하실 텐데요.”
탕!
패리스가 의자 손잡이를 내려치며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볼만했다.
“……다들 비켜라. 이번이 마지막 검투이다.”
에반젤린의 도발이 효과가 있었던 듯, 그는 단상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저 군중을 헤치고 나온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전하, 죄송하지만 다음 도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에반젤린은 그 목소리를 잘 알았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여유가 사라지고 조금 더 복합적인 감정이 자리했다.
카엘리온 에핀하르트 대공.
입술을 꽉 깨물며 돌아보자, 익히 보았던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이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늦었다.”
“늦지 않았습니다. 참가할 자는 정오까지 연무장으로 모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는 언제나 그렇듯 여유롭게 웃었다.
라잔에서도 그는 저런 표정으로 에반젤린을 포로로 데려가겠다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었다.
얄미운 자식. 얄밉고 잘생긴 자식. 얄밉고 잘생기고 매력적인 자식. 에반젤린은 싫어도 인정해야 했다. 떡 벌어진 어깨며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눈빛, 그 당당한 기세. 나직한 목소리. 그녀가 타던 괴수에게 보이는 은근히 상냥한 태도까지.
그는 사실 에반젤린이 생각하는 이상형에 꽤 가까웠다. 라잔에서 봤던 유리엘도 무척 미남이었지만 그녀는 덩치 큰 연하남을 더 좋아했다.
“나와의 결투가 마지막이라고 했을 텐데.”
패리스가 얼굴을 구긴 채로 으르렁거렸다. 그는 예상치 못한 카엘리온의 참가에 화가 난 것 같았다.
“금방 이길 테니 전하께서는 저를 상대해 주십시오.”
카엘리온은 픽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 에반젤린이 듣기로 그는 어린 시절 패리스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쩔쩔맸다고 했으나, 보아하니 지금은 전혀 달랐다.
“네놈이 이 여자에게 관심을 둔 줄은 몰랐군. 여색은 멀리 한다더니 취향이 독특한가 보구나?”
“글쎄, 전하야말로 왕녀를 놓치는 것이 두려우신가 봅니다. 누가 보면 반한 줄 알겠군요.”
상황은 뻔했다. 패리스는 이런 저질스러운 잔치에 카엘리온이 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애초에 황제가 패리스에게 하사하다시피 한 에반젤린을 누가 굳이 탐내서 데려가려 하겠는가. 이 시합은 처음부터 패리스의 놀이였고, 그 안으로 카엘리온이 끼어든 것이었다.
예상 못한 것은 에반젤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치가 아주 빨랐고, 분명히 카엘리온은 에반젤린을 전혀 이성으로 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얄밉고 잘생기고 매력적이고 보는 눈은 없는 자식. 그는 아마 다른 무언가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둘 중 누구도 연무장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둘러선 기사들은 대체 어떤 시합을 응원해야 할지에 대해 헷갈린 듯 얼간이같이 입들을 벌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에반젤린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녀는 패리스가 싫었다. 그와 함께 가면 무슨 고문을 당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죽는 방법을 찾는 것이 나을 정도로.
카엘리온은? 그녀는 제국의 웬만한 인물들은 손바닥 보듯 잘 알았다. 카엘리온은 냉정한 구석이 있었지만 절대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자는 아니었다. 물론, 재수가 없어 죽는다고 해도 마음에 드는 사람 곁에서 시간을 조금 더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손이 내려놓았던 검으로 향했다.
“전하께서 저와 결투하는 것이 겁이 나신다면…….”
카엘리온은 패리스를 도발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에반젤린이 더 빨랐다.
“이야아아아압!”
카엘리온을 한참 노려보던 그녀는 심판의 사인을 기다리지 않고 카엘리온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채앵-
“에, 에핀하르트의 대공 전하와 라잔의 왕녀 에반젤린 리에트!”
얼떨결에 심판은 두 사람의 시합을 선언해 버렸다. 패리스는 얼굴을 더욱 구기면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챙!
예상과 같이, 카엘리온은 그녀의 검을 간단하게 받아쳤다.
챙! 채챙-
“잉?”
그러고는 세 합 만에 손을 뻗어 그녀의 검을 그대로 빼앗아 버렸다. 은근슬쩍 맞아 주면서 대단한 명연기를 펼칠 작정이었던 에반젤린은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편하게 시합에서 패배했다.
* * *
“대공 전하의 승리입니다……!”
심판을 보던 기사가 패리스의 눈치를 보며 웅얼거렸다. 그러나 구경꾼 중 몇은 이미 카엘리온에게 환호하고 있었다.
“제가 우승입니까? 아니면 전하와 다시 붙으면 됩니까?”
카엘리온은 빈정거리듯 물었다. 전장에서 그는 부사령관의 신분으로 총사령관인 패리스를 최대한 존중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건방진 놈이…….”
눈치를 보던 가레스가 그에게 한 마디 해 주려는 듯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니, 다음 도전자는 소공작인가?”
“윽!”
카엘리온은 검집을 한 번 휘둘러 가레스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그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
“무, 무슨 짓입니까? 나는 시합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참가할 생각이 없다면 시합장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가레스가 항의해 보았지만 카엘리온은 간단하게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다들 비켜라.”
패리스가 무겁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눈이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좋아. 나와 한 번 붙지.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다.”
카엘리온은 심호흡을 했다. 승부는 지금부터였다. 눈치를 보던 심판이 시합의 시작을 알렸다.
차아아아앙!
챙! 챙-
두 사람의 검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허공을 가르고 부딪쳤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몰아붙이는 쪽은 패리스였으나 카엘리온도 쉽게 밀리지 않았다.
“뒤로 숨지 말고 공격해라!”
캉-
패리스가 검에 분노를 실어 내려 그었으나 카엘리온은 살짝 비켜서며 이를 흘려버렸다.
‘결투는 치열해야 해.’
잠시 물러섰던 그는 아폴로니아의 조언을 기억하고 다시 한 발 내디뎠다.
“오냐, 와라!”
패리스는 찔러오는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카엘리온에게 오른발을 날렸다.
퍽-
처음으로 공격이 꽂혀 들어갔다. 카엘리온은 패리스에게 차인 복부를 잡고 몇 걸음 물러섰다.
‘절대로 네가 봐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해.’
패리스는 그가 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카엘리온이 빨랐다.
캉-
산 같은 무게로 밀고 들어온 카엘리온에게 패리스가 밀려 넘어졌다. 두 사람은 재빨리 검을 바로 잡고 자세를 재정비했다. 이 아슬아슬한 시합은 10분이 넘도록 이어졌다. 패리스와 카엘리온의 셔츠는 곧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채앵-
잠시 호흡을 고르는 사이, 치고 들어온 패리스의 검에 카엘리온의 검이 날아가 연무장 중앙에 그대로 꽂혔다.
“와아아아아! 황태자 전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구경꾼의 박수 속에서 패리스가 거친 숨을 내쉬며 환호했다. 그는 진정 대륙 최강의 검사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을 실력이었다.
“보았느냐!”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는 그를 감싸고, 가레스며 기타 측근들은 신이 나 소리를 질려댔다.
“역시 황태자 전하는 다르십니다!”
“그럼 그렇지요! 먼 방계와 직계는 이렇게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군중 속 단 한 사람, 에반젤린만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카엘리온을 빤히 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의심하는 것처럼. 카엘리온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정체를 확신했다.
“연기를 시험해 보자.”
그는 아폴로니아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연기는 그가 좋아하는 일도, 잘하는 일도 아니었다. 이런 연기는 더더욱 싫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녀의 명은 다 따르기로 약속한 것을.
“……다시 한 번 청합니다.”
기사들의 환호 속에서 카엘리온의 조용한 한마디가 들렸다.
“……뭐?”
“다시 한 번 시합을 청합니다.”
“미친놈 아닌가?”
패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연무장에 꽂힌 검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는 카엘리온에게 다가가 이죽거렸다.
“절세미인도 마다하더니 네 취향은 저 야생마 같은 계집이 맞나 보지?”
그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그러나 어떡하느냐. 저 계집은 내 노예인데. 뭐, 일단 내 취향은 아니지만 내가 한참 데리고 있다가 질리면…….”
비열한 그 표정에 에반젤린이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여기 소공작에게 넘겼다가, 또 아몬 경에게 넘기고, 그러다 보면 네 차례가 올지…….”
“말조심하십시오.”
패리스에게서 그 정도의 언사가 나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카엘리온은 모욕당한 십 대 소년에게서나 흔히 보이는 분노를 드러내려 애썼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시 그런 말을 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스스로 제일 끔찍하다 여겼던 대사를 외쳤다. 워낙 낯 뜨거운 대사라 자연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별안간 연무장 전체가 고요해졌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에반젤린도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이상하게 귓가가 붉어져 있었지만.
“크, 크하하하하하하! 정말이었구나! 아주 걸작이야!”
패리스가 별안간 배를 잡고 웃었다.
“살면서 네놈의 그런 표정을 볼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카엘리온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이리저리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이미 시합은 끝난 것을 어떡하…….”
“……을 드리겠습니다.”
카엘리온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나오자 패리스가 웃음을 멈추었다.
“뭐, 지금 뭐라고?”
“제가 다시 지면, 유리엘을 드리겠습니다.”
패리스가 눈을 몇 차례 깜빡였다. 그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네가.”
그의 입이 귀에 닿도록 찢어졌다.
“네가 여자에게 미칠 때가 있구나.”
유리엘이 누구인가? 황제가, 패리스가, 페트라가 도합 수십 번 시도했던 카엘리온의 암살이 실패한 원인이었다.
숲에서 마물을 물리칠 때에도, 전쟁터에서도, 카엘리온의 어릴 적 친구를 포섭해 그를 암살하도록 교사했을 때에도, 유리엘은 한 발 앞서서 현장에 도착했다. 그것이 사람이든 마물이든, 그는 카엘리온을 공격하는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빠르게. 깨끗하게.
아탈란의 전투 이전에도 패리스는 알았다. 유리엘은 카엘리온보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검사였다. 그는 카엘리온이 가진 것들 중 가장 가치 있는 자산이었다.
유리엘이 없는 그를 암살하는 것은 천 배쯤 쉬울 것이다. 게다가 그 도도하고 미끈한 낯짝이 자신의 개 노릇을 하는 꼴을 보면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갈 것 같았다.
유리엘을 내기로 걸겠다는 말에 패리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진심이냐?”
“물론입니다. 저 여인을 전하의 손에 빼앗길 수는 없으니까요.”
패리스는 구경하는 기사들에게 손짓을 해 물러서게 했다.
“검을 잡아라.”
그는 자신의 검을 다시 뽑아들고 카엘리온을 마주했다.
“후회하지 마라.”
그는 교만하게 웃으며 카엘리온이 검을 겨누는 것을 기다렸다.
“자 그럼 간…….”
챙-
그가 말을 미처 끝내기 전에, 카엘리온의 신형이 패리스의 몸통을 향해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속도도, 무게도, 공격의 형태도, 눈빛도. 카엘리온은 마치 거대한 사자처럼 패리스를 압박했다.
챙! 채챙-
두 사람은 다시 치열하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얼핏 보면 조금 전과 비슷했지만 우세한 것은 카엘리온이었다. 그는 사정을 두지 않고 패리스를 몰아붙였다. 마치 사랑에 눈이 멀어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퍽!
조금 전에 패리스가 그랬듯, 카엘리온은 발길질을 날려 패리스를 쓰러뜨렸다.
“일어나십시오.”
패리스가 애써 호흡을 다잡으며 일어나자 다시 이번에는 검집이 그의 어깨를 때렸다.
뻐억!
“일어나십시오.”
카엘리온은 아이를 가르치는 어른처럼 차갑게 명령했다. 끝을 보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결투를 지배하는 것은 분명 카엘리온이었다.
“헉, 허억-.”
패리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카엘리온은 검을 높이 들어 패리스의 머리로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패리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
카엘리온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제,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병사들이 하나둘씩 예를 갖추었다. 패리스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황제와 그 시종들이 서 있었다. 그의 오른편에는 언제나 그와 함께 하는 세타가, 그리고 왼편에는…….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병사들의 외침 속에서, 아폴로니아가 청초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합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카엘리온은 그녀가 지시한대로 시간을 잘 끌어 주었고, 황제와 아폴로니아는 두 사람의 두 번째 결투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연무장에 도착했다.
“아, 아버님…….”
패리스가 뒤늦게 예를 갖추었다. 그는 몸 여기저기에 찰과상을 입었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패리스, 이게 무슨 수준 낮은 행동이냐?”
그는 위엄을 보이기 위해 패리스를 꾸짖었으나 아폴로니아는 알았다. 황제는 패리스에게 절대로 모질지 못했다.
“라잔의 왕녀를 너에게 주었다고는 하나 이를 네 멋대로 상품으로 걸어도 된다고 누가 그랬느냐? 게다가 여기는 황실의 연무장이다. 위엄과 기강은 어디 가고 시장 바닥처럼 내기 판을 벌여?”
“소, 송구합니다. 아버님…… 전쟁으로 병사들의 피로가 쌓였기에 가벼운 시합을 통해 풀어 주고자…….”
패리스는 곧 고개를 숙이며 둘러댔다.
“카엘리온이 오지 않았다면 가볍게 끝났을 일입니다. 정말로 왕녀를 상품으로 할 생각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결판이 났느냐?”
“제가 우승을 했지만…….”
이미 황제가 두 사람의 결투를 지켜본 마당에 패리스는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말끝을 흐렸다.
“됐다. 오는 길에 이미 들었느니라. 비체 백작까지 상품으로 걸려 있었다고? 그는 포로나 노예가 아니다. 생각이 부족했던 것 아닌가?”
황제가 이번에는 카엘리온에게 물었다.
“제게 충성을 맹세한 봉신입니다.”
“비체 백작의 의견은 어땠지?”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제야 군중들 틈에 조용히 섞여 있었던 은빛이 보였다. 유리엘은 줄곧 거기에 있었다.
“대공 전하의 말과 같습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황제에게 대답했다. 그는 원래 감정을 보이는 일이 없기에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대공이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수군거림만 들릴 뿐이었다.
“흐음…….”
황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는 모든 상황을 아는 상태로 연무장에 도착했다. 아폴로니아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날 아침에 문안 인사를 갔다가 소식을 흘린 것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리고 적당히 시합이 끝날 듯 말 듯할 무렵에 황제와 함께 연무장에 등장한 것이다.
그녀는 황제의 표정이 뭘 뜻하는지 알았다. 패리스가 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시합을 멈추었지만 여기서 모두 그만두기에는 유리엘이라는 상품이 아까울 것이다. 그가 있는 한 카엘리온은 제거될 수 없으니까.
그러나 패리스가 지금 카엘리온을 다시 이길 가능성은 낮았다. 이는 두 번째 시합을 지켜본 황제가 잘 알았다.
그렇다면……
“하지만 오라버니.”
아폴로니아가 조용히 한 마디를 던졌다. 황제도, 구경하던 기사들도 예상치 못한 그녀의 목소리에 놀란 듯했다.
“오라버니, 저와의 약속은 잊으신 건가요?”
그녀는 억울하고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패리스가 당황해서 그녀를 보았다.
“무슨 약속 말이냐?”
“출전 전에 저와 아버지의 후궁들에게 말하셨잖아요. 전리품을 많이 가지고 오셔서 뭐든 골라 가질 수 있게 하겠다고요.”
사실이었다. 패리스는 원래 허풍이 셌고, 그 성향은 여인들 앞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래서?”
“마들렌 님은 파나스의 오팔을 달라고 하셨고, 저는 다른 것은 필요 없으니 라잔에서 온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라잔은 보석이나 장신구로 유명한 곳이 아니었다. 따라서 1년 전 그녀의 말은 아마 황비들과 경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 정도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아폴로니아는 ‘마일론의 눈’을, 내지는 그 흔적이라도 찾겠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활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니아, 너도 알다시피 라잔에서 온 전리품은…….”
“제 별궁에는 마물을 놓을 자리가 없어요. 이번에 온 라잔의 왕녀가 검을 쓴다는 말을 듣고 호위 기사로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폴로니아는 황제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더 해야 하나? 이 정도면 방법이 딱 보여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왕녀는 이미 약속된 주인이 있었다는 것인가.”
황제는 카엘리온을 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는 저와 약조하셨습니다.”
카엘리온은 그녀가 연습시킨 대로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먼저 황녀와 약조한 바 있다. 또한 제국의 포로가 황실을 떠나 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황제는 떠보듯 말했다. 그의 늑대 같은 황금빛 눈동자가 더욱 강하게 빛났다.
“폐하, 그녀를 주십시오. 대가를 원하신다면 내놓겠습니다.”
그의 낯간지러운 말에 에반젤린이 황당했는지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황제는 오직 카엘리온의 간절한 눈빛만을 보았다.
“승부가 나서 네가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으면 모를까…… 게다가 첫 시합은 네 패배였다니.”
황제는 계속해서 간을 보았다. 그러고는 슬쩍 곁눈으로 세타를 보았다. 황제의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듯 그를 잘 아는 세타는 황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폴로니아의 가르침 덕분이었지만.
“폐하, 황녀 전하께 필요한 것은 분명 호위 기사라고 했지 않습니까.”
세타가 교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조금 전 내기에서 한 분은 왕녀를, 한 분은 비체 백작을 걸었고요. 그렇다면 그 가치를 동등하게 보아도 되지 않을까요?”
황제는 입이 찢어질 듯 웃었다. 정확히 그가 원했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황녀에게 유리엘을, 카엘리온에게는 왕녀를 보내라는 말이군.”
카엘리온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밥을 안 먹이고 연습을 시킨 보람이 있었다.
“폐하, 조금 전의 시합은 분명 제가…….”
“황실에서 이런 저질스러운 대회를 연 것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겠다.”
황제는 시합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카엘리온의 말을 단번에 끊어 버렸다.
“지금 선택하라. 왕녀인가, 비체 백작인가? 선택하지 않은 쪽은 아폴로니아의 수하가 될 것이다.”
그는 특별히 아폴로니아의 의견을 구하지는 않았다.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패리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유리엘을 그의 곁에서 떼놓는 일에 비해 에반젤린은 대단한 대가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는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재주가 없었다. 유리엘에 대해서도, 에반젤린에 대해서도.
‘유리엘, 너도 연기해.’
아폴로니아가 눈짓하자 가만히 있던 유리엘도 억지로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기에는 아무 영혼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그가 평소에 무뚝뚝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잘생긴 것 또한 다행이었다.
“……왕녀를 데려가겠습니다.”
황제는 거의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좌중이 헉 소리를 내며 커진 눈으로 카엘리온을 바라보았고, 세타도 부채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기는 저렇게 해야 하는데.’
“모두 들었겠지. 오늘부로 라잔의 왕녀는 카엘리온의 소속이다. 비체 백작은 당장 오늘 별궁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가 머릿속으로 수도에 거주하는 자객이 누가 있는지 계산하고 있을 것이라고 아폴로니아는 생각했다.
카엘리온은 마지막으로, 미안한 듯 유리엘을 돌아보고는 에반젤린의 손목을 잡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의 손과 팔이 경직된 채 에반젤린과 많이 닿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 * *
“이렇게 복잡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그냥 처음부터 이겼어도 됐을 텐데요.”
“아버지가 의심했을 거야. 명백히 이겨서 상품을 받아 놓고 굳이 너를 내놓는다고 하면. 아버지는 이상하게 꼬여 있거든.”
유리엘과 아폴로니아는 별궁의 뒤뜰에서 다과를 들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대화였다.
“카엘리온이 한 번 진 상태였으니 뭐라도 내놓으라고 할 명분이 섰던 거군요.”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탁자 앞에 있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차가운 과일향이 혀끝에 느껴졌다.
“바로 그거야. 어쨌든 다들 제자리를 찾았으니 다행이지.”
아폴로니아가 빙긋 웃으며 그의 말을 긍정했다.
두 사람이 거의 처음으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리엘은 마지막으로 그녀를 밝은 빛에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오래전일 것이다. 유리엘은 또 한 번 새로이 아폴로니아에게 반하고 있었으니까. 밤에 보는 그녀가 빨려들어 갈 것처럼 신비로웠다면, 태양 아래의 아폴로니아는 신기할 정도로 아름답고 반짝거렸다.
“별궁에 온 걸 환영해, 유리엘.”
그녀는 눈부시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분명 수십, 수백 번을 보았던 뒤뜰이 갑자기 달라 보였다. 풀은 더 생기 있고, 분수는 더 투명하고.
“‘돌아온’ 겁니다. 저는 다른 곳을 집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의 말에 케이크를 씹던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작게 웃었다. 그러나 인사와 잡담이 끝났다고 판단한 듯, 그녀는 곧 조금 진지해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가 볼까?”
“벌써 말입니까?”
유리엘은 피식 웃고는 찻잔의 차를 다 비웠다. 알고 있었지만 그의 주인은 절대로 오래 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환영 인사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으니까.”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일어섰다.
“‘마일론의 눈’이 잘 있는지 보러 가자.”
앞서는 그녀를 보며, 유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밤의 그녀는 신비로웠다. 낮의 그녀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러나 쉴 새 없이 계략을 짜고 실행에 옮기고, 원하는 것을 끝내 손에 쥐는 아폴로니아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만큼 매혹적이었다.
* * *
카엘리온은 동궁이라 불리는 손님용 건물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는 주로 황제와 친분이 깊은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었으나 카엘리온의 전공이 쌓이고 또 쌓이면서 그 또한 자연스레 황실의 귀한 손님이 되었다.
아폴로니아는 카엘리온이 없을 때에도 동궁에 자주 찾아갔다. 손님이 없는 때에는 황제가 드나들지 않는 곳이면서, 꽤 큰 도서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병법서며, 정치학, 철학 관련 서적을 몰래 읽고는 했다. 누군가를 마주치면 소녀들이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을 읽고 있다고 둘러댔다.
카엘리온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시종의 말을 듣자 그녀는 유리엘에게 그를 찾아오라는 지시를 하고는 자연스럽게 도서관에 들어섰다. 좋아하는 병법서를 몇 권 집어 들고 사람이 없는 구석의 책상에 앉으려던 순간, 몇 걸음 앞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우당탕- 퍽!
“아윽!”
고개를 들어 보니 눈앞에서 아폴로니아와 비슷한 모습으로 두꺼운 책 여러 권을 집었다가 떨어뜨린 에반젤린이 서 있었다. 책 모서리에 발등이 찍혔는지 무척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표범을 닮은 얼굴이 놀란 고양이처럼 한껏 일그러졌다.
“여기서 뭐 하고 있죠?”
“아오…… 화, 황녀 전하는 여기서 뭐 하세요?”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물었다. 아폴로니아를 본 그녀는 적잖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아폴로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병법서를 즐겨 본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었다.
“그저 연애 소설을 조금 보려고 왔답니다. ‘그대의 입술처럼’이라고, 요즘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랍니다.”
아폴로니아가 태연히 웃으며 병법서 위로 소설 한 권을 포갰다. 그녀는 책상에 있는 서적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에반젤린이 책을 떨어트린 자리로 다가갔다.
“어어, 제가 할게요!”
아폴로니아가 떨어진 책을 주워서 돌려주려 하자 에반젤린이 양손을 내저으며 거부했다. 그녀 또한 자신이 무슨 책을 보는지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럼 설마 나와 비슷하게 몰래 병법이나 정치 서적을……?’
아폴로니아는 그녀가 자신과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집어 든 책의 표지를 보았다. 몇 초 뒤 아폴로니아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10가지 마물과 그들의 성생활……?”
“악! 이건 참고용이에요!”
에반젤린이 소리를 지르며 긴 팔을 뻗어 아폴로니아가 집어 준 책을 덥석 가져갔다. 아폴로니아는 그 기억을 떨치고자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그 옆의 책을 집어 주었다.
‘이번에는 다르겠지. 왕녀가 나온 코너는 역사학 책이 많으니까……’
그러나 손에 잡힌 은빛 책의 표지에는 또 다른 낯 뜨거운 제목이 적혀 있었다.
“자칼로페와 늑대의 교미, 생생한 목격담.”
“아니, 그건 제가 공부가 좀 필요해서…….”
에반젤린은 울상이 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아폴로니아의 손으로부터 책을 빼앗아 갔다.
“외눈까마귀의 난교, 그들은 음란한 것인가?”
“흐아아아악! 안 돼!”
“짝짓기 방식이 가장 난잡한 마물―그들과 인간의 공통점.”
“악! 이리 주세요!”
떨어진 책을 주워서 건네줄 때마다 에반젤린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지막으로 『하루에 100번을 교미하는 그들은 누구인가?』를 건넸을 때 그녀는 거의 바닥에 앉아 울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제 취향이 이런 것이 아니고요, 아니, 취향이 맞기는 한데.”
그녀는 애써 책을 주워 모으며 두서없는 변명을 했다.
“이건 다 공부에 참고하는 거라구요. 고향의 도서관에는 이런 책이 잘 없어서……. 키우던 애완동물들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볼 수 있고…….”
아폴로니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제가 성적인 방향으로 통일되어 있었지만 그 책들은 모두 학술적이었다.
‘마물에 미쳐 있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보네.’
“마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들었어요. 오라버니와의 일로 지쳐 있을 텐데 학구열이 대단해요.”
진심이었다. 포로로 잡혔다가, 적장의 시녀 비슷한 지위로 떨어진 왕녀가 쉬면서 처음으로 하는 일이 공부라는 것은 대단했다. 에반젤린은 그녀의 칭찬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몸은 괜찮아졌나요? 시합 때문에 많이 다쳤다고 들었어요.”
“음…… 딱히 다친 데는 없어요. 좀 지치기만 했었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에반젤린의 얼굴이며 팔은 온갖 멍과 찰과상으로 울긋불긋했다.
“그게 다 시합으로 다친 거 아닌가요?”
“워낙 제가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해서…… 뼈 안 부러지면 안 다친 거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만나 본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소년 같은 분위기는 리샨 지방의 타냐와 비슷했지만 더 학구적이고 괴짜 같았다. 아폴로니아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그녀는 빨리 책을 읽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그 표지를 보고 있었다.
“에핀하르트 대공은 방에 없나 보군요.”
“글쎄, 저한테는 동궁 안을 편하게 돌아다니라고 한 게 다였어요. 그 말대로 놀고 있었더니…….”
에반젤린은 어느새 책들을 수습하고 책상 위로 보기 좋게 쌓았다.
“그랬더니 전하도 만나고, 저는 운이 좋네요.”
그녀는 맞은편에 앉으며 고개를 들어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한 시선이었다.
“저를 만난 것이요?”
“네. 저는 전하가 아주아주 재미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순간 아폴로니아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 전 서적을 봤을 때처럼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다. 에반젤린은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아폴로니아가 흥미로운 마물이라도 되는 듯.
황궁에서는 그 누구도 아폴로니아를 그런 눈빛으로 보지 않았다.
“나를 아나요?”
“물론이죠. 6번이나 약혼하고 파혼당한 유명한 황녀. 아폴론의 후손이지만 팔에는 화상 자국이 있는 분. 그리고…….”
에반젤린은 웃으며 주절주절 아폴로니아에 대한 정보를 읊었다. 어느 황녀에게 해도 기분 나빠할 만한 말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쏟아냈다.
“그리고?”
“그리고 제국 최대 규모인 이데나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상단주이시죠.”
에반젤린은 거의 순수하다고 할 정도로 환한 미소를 띠며 아폴로니아의 가장 큰 비밀을 말했다.
“두 얼굴의 황녀, 당신은 정말 직접 한 번 보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뭐라고 했죠?”
“아일린 이데나. 대륙에서 가장 큰 부를 움켜쥔 사람. 에핀하르트 대공과 비체 백작을 발굴하고 키워 내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
에반젤린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전히 순수한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를 낮춘 것을 보면 그녀도 분명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큰 비밀인지는 알고 있을 터였다.
아폴로니아는 순간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마일론의 눈’. 그것이 사람의 가장 개인적인 비밀까지도 꿰뚫어 본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그다지 알려진 것도 없는 아폴로니아까지 관찰하고 있을 거라는 점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체 그것은 어떤 원리로 작용하기에 그렇게 조심했던 비밀이 새 나간단 말인가? 설마 첩자가 있었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에반젤린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전하의 사람은 누구도 전하를 배신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저 눈이 밝으신 거군요.”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에반젤린이 굳이 자신이 아는 정보를 숨기지 않으니, 아폴로니아도 같은 태도를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에반젤린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이미 제가 누군지 아시니까요. 그런 것 같아서 굳이 숨기지 않았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적갈색의 눈동자와 붉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만나 부딪혔다. 그 안에는 경계, 호기심, 감탄과 약간의 호감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마일론의 눈’은 마법을 쓴다더니…… 입 밖으로는 거의 내지도 않은 일을 안다는 것이 대단하군요.”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감탄하며 말했다.
“별 소문이 다 나네요. 저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세상에 평범한 사람이 다 얼어 죽었나.
‘마일론의 눈’ 때문이 아니라, 에반젤린이 그 날개 달린 말 마물을 탄 모습을 보았거나, 황제며 패리스에게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절대로 믿지 않을 말이었다.
“비밀을 풀어 보려 해도 도저히 그 원리는 이해할 수 없더군요.”
“그런가요?”
“대륙 서단의 아르만 왕국에서 반역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대륙 동단에 있는 당신이 가장 먼저 알게 된다는 건 상식에 반하는 일이니까요.”
“아아, 맞아요. 그건 제가 아르만 국왕에게 비싸게 팔아넘겼던 비밀이었죠.”
에반젤린은 조금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높이 묶은 그녀의 초콜릿색 머리카락이 좌우로 경쾌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오히려 대단한 건 그쪽인데요?”
“네?”
“저야 전하에 대한 것을 보고로 듣지만 전하는 그걸 통찰력으로 아니까요. ‘마일론의 눈’이 라잔 왕실에 있다는 건 아무나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걸요.”
에반젤린은 호기심이 더욱 강해진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좋은 일이었다. 에반젤린은 지금 아폴로니아의 말을 들어야 했으니까.
도서관을 둘러보니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계획보다 빨랐지만, 어찌 보면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에 적절한 상황이었다.
“나를 안다면, 내가 당신을 찾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요.”
“음…… 원래 모든 사람들은 나를 찾아요.”
에반젤린은 입가의 오묘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다들 원하는 것은 같아요. ‘마일론의 눈’은 가치가 크니까요.”
그녀는 잠시 뜸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돈으로는 따질 수 없을 정도죠.”
‘알고 있네?’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뭘 필요로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은근히 아폴로니아를 도발하고 있었다. 네가 뭘 제시해도 내가 가진 것의 값을 제대로 치르지는 못할 거라고.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아폴로니아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 거절할 테니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것처럼.
“돈으로 따질 수 없다라…….”
아폴로니아가 천천히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과연 정말 따질 수 없을까? 그런 것은 세상에 많지 않았다.
“이데나 상단은 어떤가요?”
쿵-
아폴로니아의 말을 들은 에반젤린의 눈이 커지면서 그녀가 앉은 의자가 휘청였다.
이데나 상단 전체, 그것은 라잔과 같은 왕국을 열 몇 개는 살 수 있는 부였다. 백 명의 사람들이 평생 최선을 다해서 낭비해도 다 날릴 수 없을 정도의 돈.
“……지금 뭐라고…… 그걸 그냥 주신다고요? 전부 다?”
“상단이 지금의 재력을 갖추기까지 5년이 걸렸어요.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2년이면 다시 쌓을 수 있죠.”
아폴로니아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진지했다. 돈을 버는 것은 쉬웠고, 당장 그녀가 원하는 것은 정보력이었으니까. 그리고 에반젤린이 원하는 것은……
“그리고 추가로 자유를 드리죠.”
조용한 도서관에서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당신은 자유로운 몸으로, 대륙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는 거예요.”
에반젤린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몇 차례 하며 그녀의 제안을 정리했다.
“우와, 진심이시군요.”
“뭐든지 아는 당신을 속일 방법이 없는데 거짓말해서 뭐 하겠어요?”
에반젤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허를 찌르는군요. 지금껏 누구도 그런 제안을 한 적은 없었어요.”
“이만큼의 돈을 내놓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인가요?”
“아뇨. 그것도 사실이지만 제 얘기는 그게 아니에요.”
그녀는 반쯤 황당하고, 반쯤 감탄한 것 같은 미소를 띠고 아폴로니아를 보며 말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가끔 있었어요.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 왕비로 들이겠다, 평생 쓰고 남을 재산을 주겠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의 어느 누가 그런 자산을 원하지 않겠는가? 당장 황제나 페트라도 눈을 뒤집으며 ‘마일론의 눈’이 누구인지를 찾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에반젤린이 몸을 아폴로니아 가까이로 숙이며 말했다.
“누구도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것을 다 내려놓겠다고 한 적은 없었죠. 권력자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다 쥔 채로 저를 끌어올려 주겠다고 했었고, 자산가들은 치밀하게 계산해서 절대로 자신이 쌓은 부가 흔들리지 않는 선에서의 제안만 했었죠. ‘마일론의 눈’이 대단하다 한들, 그들이 이미 쥐고 있는 것을 놓치는 것은 두려우니까요.”
아폴로니아는 미동 없이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었다.
“평생을 걸쳐서 모은 것은 손에 없는 것보다 소중하기 마련이니까요. ‘마일론의 눈’이 없는 아쉬움은 견딜 수 있어도, 쥐었던 것이 사라진 상실감은 견디기 어렵다 이거겠죠.”
“당연한 이야기로군요.”
“하지만 전하는 다른걸요.”
그녀는 단 한 번도 아폴로니아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말을 하던 중에 실수로 옆에 있던 책 두어 권을 쳐서 떨어뜨렸으나 거의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조금 전까지 세상 소중했던 그 책들은 이제 에반젤린의 시야에 있지도 않았다.
“전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지고 있는 모든 부를 주신다고 하셨죠. 금방 다시 모은다면서요. 세상에 전하처럼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는 본 적이 없어요.”
“‘마일론의 눈’이 보지 못한 것이라면, 아마 세상에 없는 것이 사실이겠죠.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었다.
“내가 그런 제안을 한 이유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아까도 말했듯 나는 그 재산을 금방 다시 모을 자신이 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당신이 가진 것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
“황송해라.”
“그럼 받으실 건가요? 제 제안을?”
에반젤린은 그녀를 연구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았지만 아폴로니아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는 이를 잊지 않으려고 했다.
에반젤린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어색할 정도로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는 진정 괴짜였다. 질문을 한 상대를 앞에 두고 눈을 감은 채 침묵하는 것은 물론, 앞뒤로 몸을 흔들며 무언가를 중얼중얼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인상을 쓰다가 다시 몸으로 원을 그리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그녀가 눈을 떴다.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안 돼요.”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재산 외에 다른 부분을 잊으신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조용하고 빠르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기를 바라요.”
그녀의 말에 에반젤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전하의 말을 듣지 않으면 포악한 황태자의 첩이 되거나 황제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 그 얘기로군요.”
“잘 알고 있네요.”
“하지만 전하의 제안은 여전히 거절하겠어요.”
아폴로니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인 대화법을 좋아했으나 에반젤린은 한 번에 대답을 다 해 주는 법이 없었다.
“당장 당신이 카엘리온과 생활한다고 아버님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군요.”
아폴로니아는 에반젤린이 여유를 찾은 이유가 패리스의 멍청한 대회와 그 결과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어느 정도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황제로부터, 패리스로부터 에반젤린을 영원히 지켜 주지는 않을 것이다. 에반젤린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전하는 오해하고 계시군요. 저는 자유가 싫다는 뜻이 아니에요. 물론, 당장 제게 황제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다고 생각하지만요.”
“네?”
“아까 전하께서는 제게 그 제안을 하시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하셨죠.”
“그래요.”
에반젤린은 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눈앞에 들어 보이며 말했다.
“거절의 이유도 두 가지랍니다. 하나는 그 정보망은 저 아닌 사람은 애초에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부와 자유를 ‘마일론의 눈’과 맞교환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녀의 분위기는 패리스가 주최한 시합 때와도, 조금 전 책을 떨어뜨렸을 때와도 판이하게 달랐다. 자신이 하는 일에 완벽한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여유가 보였다. 아폴로니아는 그녀의 말이 사실일 거라고 인정해야 했다.
“물론, 제가 정보망을 통제하면서 알게 되는 이런저런 정보를 전하께 제공하는 것은 가능하겠죠.”
“그렇게 할 생각이 있어요?”
에반젤린은 가르쳐 줄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음…… 사실 생각은 해 볼 수 있죠.”
“두 번째 이유가 있다고 했죠. 그건 뭔가요?”
“그게 지금 하려는 이야기예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바로 하고 몸을 앞으로 더 기울였다.
“저는 이데나 상단 같은 건 원하지 않아요. 돈은 좋지만, 그게 다가 아니니까요. 제가 원하는 건 따로 있답니다.”
“얘기하세요.”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제가 가진 거라면 팔이라도 잘라 드리죠. 제게 그것이 없다면 훔치든, 빼앗든 해서 지불하겠어요.”
황제의 계략이며 페트라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파악할 방법. 장기적으로는 다른 귀족이며 제후국의 동태를 손바닥 안처럼 꿰뚫을 수 있는 완벽한 통치 수단. ‘마일론의 눈’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없었다.
“다행히 전하께서는 제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계세요.”
에반젤린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의 귓가는 이상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뭐죠?”
“카엘리온 에핀하르트 대공.”
도서관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아폴로니아는 방금 자신이 맞게 들었는지 고민해야 했다.
“원하는 것이 뭐라고요?”
“에핀하르트 대공이요. 전하께서 ‘가지고’ 계신 거죠. 전하의 지시를 따르면서 사니까요.”
에반젤린은 자신의 요구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그의 시녀로 있으면서, 그를 당신에게 달라고요? 포로로 온 것에 대한 복수를 원하는 건가요? 아니면 지위를?”
“둘 다 아니에요. 저는 말 그대로 ‘그를’ 원하는 거예요.”
에반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귀가 더욱 붉어졌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당당했다.
“그러니까…… 원한다는 것이…….”
“연인으로요.”
에반젤린이 단도직입적이지 못하다는 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살면서 이렇게 솔직하고 대담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대체 언제…….”
“글쎄요. 라잔에서 말싸움으로 저를 이긴 것도 인상적이었고…….”
에반젤리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대답했다.
“며칠 전, 시합 때에도 마음에 들었죠. 연기인 건 알았지만 귀여웠달까요.”
그녀는 카엘리온이 패리스와 황제 앞에서 에반젤린을 달라고 청하던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아폴로니아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얄밉고, 잘났고, 마물이며 포로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다정하죠.”
“그게 다라고요?”
“라잔 왕실의 여자들은 원래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고 평생 변하지 않는답니다. 어머니도 그랬고, 할머니도 그랬죠. 그렇기 때문에 한 번 반한 사람은 놓치지 않아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눈을 빛냈다. 아폴로니아는 이제야 에반젤린을 파악할 것 같았다.
과연 그녀는 조금 미쳐 있었다. 마물을 탐구해서 길들이듯, 사람도 그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폴로니아에게 보인 흥미도, 카엘리온에게 보이는 흥미도 그러한 선상에서는 같았다. 그저 카엘리온에게는 이성에 대한 끌림이 더해진 것뿐.
“왕녀, 그는 마물이 아니에요.”
“알아요. 사람이죠. 하지만 그게 크게 다른가요?”
“당신이 소유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전하께서 소유했으니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도 있겠죠. 마음을 잡는 건 그다음 일이에요.”
아폴로니아는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다고 느꼈다. 자신의 표정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에반젤린은 아이 같은 얼굴로 아폴로니아를 들여다보았다. 기묘한 순수함과 확신, 집착 같은 것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왕녀, 잘 들어요.”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낮게 울렸다.
“카엘리온은 ‘저만’ 소유할 수 있어요.”
“하지만 비체 백작도 있으시잖아요! 저는 한 명만 필요한데요!”
그녀는 다시 아이처럼 말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차갑게 웃을 뿐이었다. 돈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카엘리온의 인생을 휘어잡고 통제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충성심으로 장난을 칠 계획은 없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들은 둘 다 내 사람이라는 거죠. 그리고 나는 그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생각이 없어요.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녀는 절대로 반박의 여지가 없음을 에반젤린에게 확실히 이해시키기 위해 한 자 한 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까 ‘마일론의 눈’은 당신만 통제할 수 있다고 했던가요?”
“맞아요. 하지만 그들은…….”
“카엘리온은 제게만 충성합니다. 유리엘도 그렇고요.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변하는 순간 죽여 버릴 테니까. 아폴로니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카엘리온을 지금처럼 키워 내는 데에는 자그마치 5년이 걸렸어요. 그는 제게 유용하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저와 결혼한 후에도요.”
에반젤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결혼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를…….”
“나는 상단 같은 것은 얼마든지 팔아 치우지만, 내 사람에 대한 통제는 절대로 넘기지 않아요.”
아폴로니아는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반젤린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그럼 거절인 건가요?”
“내 제안을 그쪽이 거절한 거죠. 하지만 왕녀.”
돌아서던 아폴로니아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착각하지는 말아요.”
“네?”
“내 보호 없이 아버지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요.”
에반젤린은 어깨를 움찔 했다. 그러나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마일론의 눈’이 있으니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에반젤린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솔직하기로는 따를 사람이 없다. 그 솔직함의 기초는 착각이지만.
“아까 아버지는 당신을 죽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죠? 적당히 살다가 수틀리면 죽지 뭐 하는 생각이라면 집어치우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 그건…….”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으로 에반젤린이 말끝을 흐렸다.
“당신이 못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외에도 고통을 줄 방법은 많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그런 분야의 전문가를 곁에 두고 있죠.”
“고문 같은 건…….”
“당하기 전에 목숨을 끊으면 그만이라고요? 아니면 수틀리면 도망간다고요?”
아폴로니아는 조소를 담아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게 착각이라는 말이에요. 내가 말한 고통은 당신에게 가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에반젤린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정답이에요.”
“하지만…….”
“이름이 프리야였던가요? 당신이 아끼는 그 귀한 마물.”
에반젤린이 패리스와의 전투에서 탔던 날개 달린 거대한 말은 ‘프리오닉스’라는 말이었다. 길들이기는커녕 본 사람도 드물다는 전설의 괴수. 황제 앞에서 에반젤린은 이를 ‘프리야’라고 불렀었다. 전설에 나오는 작은 요정의 이름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프리야는 고통에 완전히 무감해요. 뭘 하나 잘라 낸들 멀쩡히 살 수 있는 녀석이죠.”
에반젤린은 지지 않고 반박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어딘가 자신이 생각 못 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듯했다.
“들었어요. 패리스가 검으로 찔러도 꿈쩍하지 않았다고. 동시에 당신과는 서로 마음이라도 읽는 것처럼 완벽히 교감했다고요.”
“맞아요. 그 녀석은 제가 처음 길들인 거대 마물이자 절친 같은 녀석이에요.”
“아버지도 소문을 듣고 녀석을 길들이고 싶어 하시죠.”
“불가능해요.”
에반젤린은 딱 잘라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확신으로 빛났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아폴로니아는 간단하게 자신을 페트라에 대입해 보았다. 살면서 수천 번 해 본 일이기에 쉬웠다.
“프리야가 당신의 비명을 듣는다면요? 그렇게 똑똑한 녀석이라면 당신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죠?”
에반젤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폴로니아는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고통에 무감한 건 신체의 이야기겠죠. 하지만 정서적인 고통은요?”
“그런 것은…….”
“제가 아버지라면 말이죠.”
아폴로니아는 오래전 어머니의 고통을 즐기듯 내려다보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신을 괴롭히고 싶든, 아니면 프리야를 길들이고 싶든, 일단 당신을 그 녀석 앞에 데려다 놓을 거예요.”
입술을 꽉 깨무는 에반젤린을 내려다보며 아폴로니아가 무심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고통을 주는 건 일도 아니죠. 당신은 그냥 죽어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프리야 앞에서 그럴 수 있나요?”
에반젤린이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족을, 동료를 서로 이용해 둘 다를 사로잡는 일은 아버지와 고모님의 전문이랍니다. 당장 그럴 기미가 안 보인다고 해서 그 생각을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아참, 그리고…….”
에반젤린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보았다. 조금 전 확신에 차서 카엘리온을 소유하고 길들이겠다는 사람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패리스가 주최한 시합에서 당신을 카엘리온 쪽으로 빼돌린 건 나랍니다. 내 보호가 없었다면 당신은 이미 죽었거나 그의 궁에 있었을 거란 소리죠. 어쩌면 프리야가 괴로워하는 당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요. 그럼.”
아폴로니아는 에반젤린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뒤에서 에반젤린이 깊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걸었다.
“……무도회에 올 거예요.”
도서관 문을 나서는 아폴로니아의 등 뒤로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네?”
아폴로니아는 돌아서며 물었다. 조금 전 그녀에게 ‘마일론의 눈’을 팔라고 설득할 때만큼의 간절함은 없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아니면 가시든가요.”
“패리스의 눈 색깔을 바꾸어 준 사람, 리페르 공작가에 주술 걸린 상품을 공급한 사람을 궁금해하고 있었잖아요.”
에반젤린은 자신의 발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다만 그 내용은 분명 아폴로니아를 향한 것이 맞았다.
“아주 잘 아는군요.”
“승전 기념 무도회에 그 사람이 올 거예요. 지금까지 숨겼던 사람을, 이 기회에 드러내고 자연스럽게 황궁에 두게 될 거예요.”
아폴로니아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에반젤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몇 초 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떠났던 탁자 앞으로 돌아왔다.
“끝까지 이야기해 주세요.”
“그 사람의 외모는 나도 몰라요. 다만 무도회날 그를 알아보는 것은 쉽답니다.”
“그 방법이 뭐죠?”
“패리스가 소개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 누구도 본 적 없지만 측근이라고 소개할 거예요. 호위라든가, 시종이라든가, 주술의 주인은 그가 분명합니다.”
에반젤린은 여전히 울먹이는 표정이었다. 마치 잘못을 반성하고 벌을 받는 아이처럼. 아이가 절대로 다룰 수 없는 정보를 주고 있었지만.
“……이걸 내게 알려 주는 건 무슨 뜻인가요?”
“협상이요.”
에반젤린은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조금 전 여유로웠던 모습과 대조되는 거의 비장함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프리야와 저를 당분간 보호해 주세요. 방법은 전하께서 찾아 주시고요.”
“마음을 바꿨군요.”
“정보만으로 모든 것에 대비할 수 없다는 걸 알겠어요. 지금 제가 여기 멀쩡하게 있는 것조차도 전하의 뜻이라는 것도요.”
아폴로니아도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전하와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하고 싶어요.”
“내가 당신을 도와준다면 내게 중요한 정보를 주겠다는 건가요?”
“앞으로 뭘 어떻게 할지 정하기 전까지는요. 뭐, 대공을 다시 저한테 주고 싶어진다면 더 좋지만.”
아폴로니아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이 정도가 어디인가. 기대 이상의 결과였다. 최소한 에반젤린은 아폴로니아의 적들과 거래하지 못할 테니까.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전과 같은 감탄과 호기심이 섞인 표정으로.
“그럼, 우린 무도회 때 다시 만나겠군요.”
아폴로니아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 * *
“미친 여자입니다.”
동궁 구석의 개인 서재에서, 카엘리온이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 그는 막 아폴로니아로부터 에반젤린이 요구에 대해 들은 상황이었다. 카엘리온을 찾아왔던 유리엘은 잠시 동궁에 두고 온 물건이 있다며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거절했다니까. 하지만 미친 사람은 아니야.”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앞선 만남을 되새기며 말했다.
“오히려 천재적인 면이 있달까…….”
“아, 천재인 건 맞습니다. 미친 천재요.”
“너 좋아하던데.”
“압니다. 하지만…….”
그는 쥐어뜯던 머리카락을 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이는 아무렇지 않습니까?”
“뭐가?”
“누이의 약혼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요.”
그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축 처진 눈꼬리가 옛날의 그를 떠오르게 했다.
“약혼자 6명을 떠나보낸 사람한테 별 소리를 다 하는구나.”
“저를 그런 자들과 비교하십니까?”
카엘리온은 평소처럼 웃으며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폴로니아와 한 뼘 거리밖에 안 될 때까지. 그에게서는 유리엘과 다른, 어딘가 더 쌉싸름한 향이 났다.
“말씀해 주세요, 누이. 제가 그들과 같습니까?”
대답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넌…….”
벌컥-
아폴로니아가 막 뭔가 말하려던 순간, 서재의 문이 열리고 유리엘이 들어섰다.
“별궁으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오래 있으면 폐하께서 찾으시니까요.”
카엘리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일어서 그를 반겼다.
“귀는 언제나 밝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두 사람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주고받았지만 아폴로니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5년 동안 겉으로 주종으로, 안으로는 친우로 지내 온 그들 사이에 투닥거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일어날까?”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웃었다. 카엘리온이 웃을 때 순해 보인다면 유리엘은 웃는 순간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느낌이 있었다.
“카엘, 왕녀에 대해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언제든 얘기해 줘.”
“뭐, 한두 가지여야 말이죠. 음식은 어마어마한 양을 주문해서 다 먹어치우고, 라잔에서보다는 덜하지만 방에 들어가면 신기하게 마물 냄새가 납니다. 아무것도 없어도요.”
카엘리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웃으며 서재 문을 열었다.
“필요한 건 웬만하면 누릴 수 있도록 해 줘.”
말을 마치며, 그녀와 유리엘은 서재 문을 빠져나왔다.
“즐거웠습니다. 누이. 더 자주 와서 나와 놀아 주세요.”
카엘리온은 다시 애교스럽게 웃었다. 전장에서는 등장만으로 적들을 항복하게 만들었다는 그는 아폴로니아 앞에서 유독 순했다.
“왕녀가 다치지 않도록 해 줘.”
그녀는 조금 전 에반젤린의 당부를 생각하며 말했다. 카엘리온은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이며 다시 웃었다.
“염려된다면 더 자주 오시죠.”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뭔가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유리엘이 무심하게 문을 닫는 바람에 잘 들리지 않았다.
유리엘은 아폴로니아와 함께 정원을 지나 별궁으로 걸었다. 평소와 다르게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각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전하.”
별궁에 도착해 그녀의 방에 들어선 후에서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선명한 벽안이 방을 한 번 훑었다.
‘혹시라도 숨어 있을지 모른다.’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그는 비로소 한시름 놓고 창틀에 기대앉았다.
“응?”
“라잔의 왕녀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셨습니까?”
아폴로니아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눈을 들어 그를 빤히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금적안을 반짝 빛내며 살짝 웃었다. 무언가를 알아냈을 때 그녀가 짓는 표정이었다.
유리엘은 헛웃음을 웃었다. 조금 전 왕녀에 대한 카엘리온의 말을 듣고 그의 뇌리를 스쳤던 생각을, 아폴로니아도 했던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녀는 그보다 먼저 눈치챘을지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
“의아했지. ‘마일론의 눈’ 같은 걸 만들어서 운영하는 사람이 마물 연구에 빠져 살 여유는 없을 거라 생각했어.”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러고는 ‘마일론의 눈’이 어떤 조직인지 생각났지. 말도 안 되게 개인적인 정보까지 찾아낸다고. 그 소식을 대륙 끝에서 끝으로 전하는 데에 며칠 걸리지 않는다고.”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짧게 덧붙였다.
“……인간이라면요.”
아폴로니아의 미소가 더 크게 번졌다. 두 사람은 분명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음식을 많이 주문하고, 방 안에 보이지 않는 마물이 드나들고…… 무엇보다 황궁에 고립된 상태에서도 정보를 받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다면 답은 하나지.”
그녀는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그녀는 마물을 길들여서 정보원으로 사용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