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황제의 여인 (2)
수도 뒷골목에 위치한 어두운 선술집에 사람 세 명이 들어섰다. 장정 셋에 여자 한 명이었다.
“어이! 여기 마실 것 좀 갖다 주쇼!”
가장 앞에서 걸어 들어온 여자가 소리쳤다. 작은 선술집이었기에 덩치 좋은 남자가 세 명이나 들어 있는 그 일행은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몸 전체에 로브를 두른 그녀는 작은 키에 마른 몸을 가졌다. 짧은 머리카락이며 호탕한 말투 덕에 언뜻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자세히 보면 그 이목구비는 상당히 예뻤다.
“무얼 드릴까?”
“이 셋은 맥주. 나는 그냥 우유.”
선술집 주인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맥주를 한 양동이는 마실 것처럼 걸걸하게 외치더니 주문하는 것이 겨우 우유라니. 주인이 웃거나 말거나 작은 여자와 그 일행은 바에 앉았다.
여자가 로브를 벗자 새까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이 어두운 등불 밑에 반짝였다. 머리처럼 검은 눈동자는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리샨에서 오신 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스물이 안 돼 보이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로 짧은 사내 한 명이 조용히 그녀 뒤로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여자가 홱 고개를 돌리더니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모르는 얼굴인데.”
“지난번에 뵀었습니다! 리샨으로 직접 갔었는데요!”
“네가?”
“긴 머리로 갔더니 안 어울린다며 비웃으셔 놓고! 머리를 잘랐다고 못 알아보시면 어떡합니까?”
사내는 난감한 표정으로 설명했으나 여자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의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로브에 덮여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그녀의 세 일행 또한 다소 험상궂은 표정으로 사내를 보고 있었기에 분위기가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
“그때 머리가 긴 사내가 온 건 맞지만…… 얼굴은 잘생기지 않아서 까먹었단 말이야. 당신을 어떻게 믿지?”
“그건, 저…….”
“……우리가 아는 그 분의 사람이라는 증표가 없다면 아무것도 줄 수 없소.”
여자의 일행 중 키가 크고 마른 쪽이 나직하게 말했다. 말을 걸었던 사내는 울상이 되었다.
“저 여자분이 얼굴을 기억할 거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증표는 두고 왔는데…….”
“치밀하지가 못하군. 얼굴을 기억한다 해도 증표 확인 없이 넘겨주겠다는 뜻은 아니야. 우리는 지시받은 대로 따라야 한단 말이야.”
여자가 날카롭게 쏘아붙이고는 사내로부터 몸을 돌려 버렸다.
사내는 난감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했지만 네 사람은 한 몸이기라도 한 듯 누구 하나 그를 봐주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낭패입니다. 다시 가져오려면 두 시간은 걸릴 텐데…… 서신을 바로 전하지 않으면 저는…….”
사내의 뒤로는 그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 두어 명이 초조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엄격한 주인을 섬기는지 한숨을 푹푹 쉬며 그에게 손짓 발짓을 하고 있었다.
“아, 답답한 소리 그만해! 사업 비밀이 가득 든 서신을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넘겨줄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제가 온 거…….”
사내는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러나 여자도, 그 일행도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중 가장 덩치 좋은 자는 곧 로브 속에 슬쩍 보이는 단검을 휘두를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동생이 얼굴을 못 알아보겠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소. 돌아가서 증표를 가지고…….”
“저도 안 되나요?”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선술집의 구석에서 연갈색 머리의 여인 한 명이 다가오며 말했다. 로브를 입은 네 사람과 사내, 그리고 사내의 동료들까지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드리안?”
검은 머리의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안녕. 오랜만이에요.”
아드리안은 손짓으로 그들 모두를 술집 안쪽의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사내가 말을 걸었던 때와 달리 네 사람 중 누구도 증표를 요구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거기서 대기해. 이번 한 번은 봐주겠지만 증표를 놓고 다니는 멍청한 짓은 다시 하지 마.”
아드리안은 짧은 머리의 사내와 그 동료들에게 짧게 지시했다. 그들은 훈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안심한 듯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아드리안 님!”
그녀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는 로브를 쓴 네 명이 기다리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드리안! 보고 싶었어요!”
검은 머리 여자는 조금 전의 날카로운 모습과 판이하게 다른 태도로 환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검었던 눈동자가 어느새 짙은 보랏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 뒤에 있던 세 명의 남자들도 하나둘씩 로브를 벗었다. 그들 또한 검은 머리에 자안을 가진 보기 드문 미남자들이었다.
“못 본 사이에 키가 조금 더 큰 것 같군요, 타냐.”
“정말이에요? 오빠들은 진작 다 컸으니 포기하라고 했는데! 역시 아드리안밖에 없어요.”
“예의상 하시는 말씀을 너무 진지하게 듣지 마렴.”
사남매 중 첫째인 벤이 타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핀잔을 주었다. 타냐가 짜증을 내며 그 손을 뿌리쳤다.
“할머님은 잘 계신가요?”
아드리안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그들 남매의 장난에 익숙해져 있었다.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매일 황녀 전하의 평안을 위해 이런저런 주술을 연구하고 계시죠. 딱히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번에도 파혼에 성공한 건 할머님 덕분인가 보군요.”
아드리안은 예의 바르게 대답해 주었다.
“군터 경은 잘 지내고 있나요?”
아폴로니아의 부탁으로 리샨에서 영주의 대행을 맡은 군터는 완전히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긴 기간 동안 편지로 영지의 통치에 대해 논의하며, 그는 조금씩 아폴로니아의 현명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다만 그로 인해 유약하다는 아폴로니아의 평판이 바뀔 일은 없었다. 그는 정보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사람이었다. 군터보다 입이 무거운 사람은 제국 내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폴로니아의 지시와 그의 노력으로, 리샨은 더 이상 범죄의 온상이 아니었다. 벨라도, 일반 사람들도 편안하게 거주하고 오갈 수 있었으며, 이데나 상단의 기여까지 있어 영주민의 삶은 훨씬 부유해져 있었다.
다만 대외적으로 리샨에서 칼트산은 여전히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쓸데없는 소문을 예방하기 위해 아폴로니아가 유도한 것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칼트산에서 생산되는 보석에 관한 사항을 소수의 사람에게만 알렸고, 그 채굴이며 세공 또한 은밀하게 진행했다.
“사업 쪽으로는 소식이 있나요? 남부의 사업은 벤과 룬이 맡고 있었는데.”
“사업은 벌이는 대로 전부 성공입니다. 남부에는 아일린 이데나와 이데나 상단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리페르 가문의 루완 상단의 영향력은 없다시피 합니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벤이 설명을 계속했다.
“보석 사업으로는 진작 루완 상단을 넘어섰죠. 이번 전쟁을 기점으로 무기 공급에서도 확실하게 자리매김했고요. 루완 상단에서 희귀한 장난감 같은 것이 출시되지만 않았더라면 진작 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주술이 걸린 상품들은 저희 쪽에서도 만들고 있지만 아직 그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하고 있죠.”
“여기, 새로 연구한 물건들의 목록입니다.”
벤은 품속에 소중히 간직했던 서신을 아드리안에게 건넸다.
“마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는 약, 언제나 주머니로 돌아오는 열쇠…… 모두 루완 상단에서 먼저 출시한 물건들이로군요.”
아드리안이 리스트를 확인한 후 고개를 들었다.
“잘하셨어요. 정확히 전하께서 지시한 대로예요.”
아일린 이데나와 이데나 상단. 그것은 아폴로니아의 또 다른 이름과 그에 딸린 사업이었다.
5년 전부터 계획했던 다르마유 차 사업을 비롯해서, 이데나 상단은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해 보석과 드레스를 비롯해 수많은 사업을 성공시켜 대륙 최고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아폴로니아는 5년 안에 루완 상단을 도태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 계획은 절반 정도만 성공했다.
원래 루완 상단이 치중하던 보석과 귀중품 관련 사업에서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한 순간 루완 상단에서 전에 없었던 새로운 상품들을 출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계절마다 색과 디자인이 바뀌는 스카프, 머리를 빨리 자라게 하는 묘약, 옷차림에 맞추어 어울리게 변형되는 이런저런 장신구들도.
귀족들은 그 상품들에 열광했다. 누구도 가져 본 적 없는 신기한 장난감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다투기도 했다. 그 상품들은 소량으로만 생산되었지만 엄청난 고가에 판매되었다.
제국은 마법이나 주술이 들어간 물품의 판매를 엄격하게 법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를 등에 업은 루완 상단은 간단하게 몇 가지 법을 바꾸어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희소성 높은 그 물건들을 팔았다.
누가 그런 물건을 발명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벨라들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한 번도 밝혀진 바는 없었다.
“루완 상단에 있는 그 누군가에 못 미치지만, 이미 있는 상품을 모방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으니까요. 기존에 저희가 모방해서 출시한 것들은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벤이 말했다.
“공작 부인은 지금쯤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아드리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아폴로니아는 루완 상단의 신제품에 대해 듣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응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의 출시 속도와 품질을 능가할 수 있는 제품의 연구가 어렵다면, 출시된 인기 상품과 최대한 비슷한 것을 만들어 시장에 풀자고.
그 작전은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데나 상단에서는 비슷한 물건들을 만들어 많은 양을 순식간에 공급했다. 간혹 기존 제품을 응용해 조금 더 새로운 것을 만들기도 했다.
타냐와 그 가족들, 그리고 리샨에 거주하던 벨라들은 이데나 상단의 핵심 인력이 되었다. 루완 상단에서 데리고 있는 사람만큼의 천재성은 없지만, 인원에서는 이데나 상단이 월등하게 앞섰기 때문에 사업은 원활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는 어렵지만, 이미 있는 물건을 유사하게 따라 하는 것은 쉬운 법이다. 귀족들은 루완 상단의 제품에 환호하다가도 이데나 상단의 것으로 갈아타고는 했다. 누군가는 그 희소가치가 사라졌다며 샀던 물건을 버리기도 했다.
“물론 이 정도로 공작가가 망할 일은 없겠지만요. 그 사람을 데리고 있는 이상.”
아폴로니아도, 다른 누구도 그 주술사의 정체를 밝히지는 못했다. 그 사람이 천재라는 것 외에는 다른 정보가 없었다. 다만 아주 가끔, 아폴로니아는 그 의문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말없이 생각에 잠기고는 했다. 마치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저희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쪽을 완전히 넘어설 방법이 생길 겁니다.”
아드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샨의 벨라들은 이데나 사업 전반에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 정도의 능력과 충성심을 갖춘 인력은 다시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아폴로니아도 말한 적이 있었다.
“눈동자 색을 바꾸는 방법도, 입은 사람을 불에서 보호하는 옷감도 같은 사람이 개발한 걸까요?”
그녀는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고 물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런 천재가 한 명 더 있다고 믿기는 어려우니까요.”
벤이 대답했다.
몇 년 전부터 패리스의 눈동자는 붉은 색에 황금색이 섞인, 황실 특유의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또한 패리스는 자신의 신체가 불에 타지 않는다는 선포를 하며 몇 차례 귀족들이나 병사들이 보는 가운데서 불길 속으로 팔을 집어넣어 보이기도 했다. 그의 팔은 분명히 매번 멀쩡했다.
황제는 이를 뒤늦은 발현이라고 포장했으나 아폴로니아는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첫째는 패리스가 황족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가 평소에는 화상을 극도로 조심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 셋째는 이미 비슷한 주술을 본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타냐나 저희의 눈을 검게 바꾸는 것과는 다릅니다. 전하의 눈 색은 약으로 만들어 내기가 무척 힘들어요. 옷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옷 자체를 방화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를 입은 사람까지 보호하는 것은 훨씬 강한 주술이 필요하니까요.”
“언제부턴가 황태자 전하 쪽의 경비가 삼엄해진 것과도 연관이 있겠죠. 그 사람은 지금 공작가의 최대 자산이나 마찬가지인 셈일 거고요.”
“바로 그렇습니다.”
“뭐, 너무 걱정 마세요. 전하께서는 충분히 잘 대응하고 계시니까요.”
아드리안은 빙긋 웃으며 말을 마쳤다. 그리고 벤이 건넸던 문서를 자신의 로브 속에 넣고는 일어섰다.
“벌써 가십니까?”
조용히 있던 탄이 웃으며 그녀를 붙잡았다. 삼형제 중에서도 유독 매혹적인 미소를 가진 그였기에 처음 만났을 때 아드리안은 흔들릴 뻔했다. 그는 예쁜 여자를 보면 본능적으로 유혹한다는 사실을 아폴로니아가 미리 말해 주었기에 그런 일은 없었지만.
“전하께서 시키신 일이 많아서요. 수도에 오신 김에 오래 있다 가세요. 아, 그리고…….”
아드리안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폴로니아에게 그들로부터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 오셨으니, 바로 돌아가실 것이 아니라면 며칠 내로 다른 부탁을 하나 드릴지도 모르겠어요.”
말을 마친 아드리안은 미리 준비한 금화 주머니를 탁자에 내려놓고 타냐에게 눈인사를 건넨 후 선술집을 빠져나왔다.
* * *
챙-
고요하던 리페르 공작저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마, 마님…….”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하인 한 명이 페트라에게 빌다시피 말했다. 페트라가 내던진 은잔이 닿은 그의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정작 페트라의 시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거울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아랫사람을 매질할 때 절대로 그들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표정에서도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시종을 상대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 자체가 수치라는 양.
대신 그녀는 다른 행동을 하는 도중에 예고 없이 물건을 던지거나 뺨을 쳤다. 손짓 하나하나에 우아함에 배어 있는 페트라는 그 과정에서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는 그녀의 습관을 아는 모든 시종들이 평소에도 그녀를 두려워하는 원인이 되었고, 절대적인 복종을 불러왔다.
“마님…… 진정하세요.”
하인이 다시 한 번 애원했다. 그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진정하라’는 그의 말에 페트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가 이성적이지 않다는 뉘앙스의 말은 페트라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주변에 서 있던 사용인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끌고 가.”
“마, 마님.”
그녀가 짧게 지시하자 하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그가 미처 애원할 틈도 없이 다른 하인들이 그의 양팔을 잡고 방에서 끌어냈다. 시중을 들다가 페트라의 팔에 몸이 닿았다는 이유로, 이제 그는 불구가 되도록 매질을 당하고 쫓겨날 것이다.
“칼린 부인만 남고 모두 나가.”
페트라가 서늘하게 지시하자 사용인들은 일사불란하게 그녀의 지시를 따랐다. 언제나 차가운 그녀였지만, 오래 함께한 사용인들은 이 날 주인의 심경이 유난히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페트라는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머리를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마님.”
칼린 부인이 조용히 다가와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소식을 보고해.”
“마님.”
“어서.”
칼린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페트라는 그 표정만 보아도 소식을 예상할 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녀를 괴롭혀 왔던 이데나 상단이 또 한탕 한 것이 분명했다.
“저…… 리샨과 노르, 에일라르, 바사노 등 남부 지방은 아예 철수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탕-
페트라가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누가 판단을 하랬나. 보고를 하랬지.”
칼린 부인은 서슬 퍼런 페트라의 모습에 고개를 조아렸다.
“예, 예. 그곳의 영업을 담당하는 이들이 입을 모아 전한 것입니다. 몇 년째 적자뿐이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요. 남부는 이데나 상단이 꽉 잡고 있다고…… 그들과 협력들 하는 작은 상단은 다 유지가 되지만 저희는 어려울 거라고요.”
“하아…….”
페트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녀 앞에서 한숨이라니,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지금만큼은 참기가 어려웠다.
“아일린 이데나.”
그녀는 생각만 해도 증오스러운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년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말이 돼?”
페트라는 다시 한 번 책상을 쳤다. 칼린 부인은 고개를 더 깊이 떨구었다.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사업 외적으로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보일 때에는 매번 머리색이나 눈동자의 색이 달라서…….”
아일린 이데나는 5년 전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등장한 순간부터 페트라의 신경을 거슬렀다.
그녀가 처음 시작한 사업은 보석이었다. 엄청난 자금을 가지고 나타난 그녀는 루완 상단에서 취급하는 최상급 보석보다 질 좋고 희귀한 다이아몬드를 황비 중 한 명에게 진상하며 ‘이데나 상단’의 존재를 알렸다.
황비의 생일날 그녀의 목에 걸린 붉은 다이아몬드를 본 귀족들은 눈이 뒤집혀 그 출처를 찾았다. 이데나 상단에서는 그 기회를 타고 조금씩 비슷한 류의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데나가 푸는 보석은 최고의 기술자들이 세공했지만 그 원석이 어디서 오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보석은 그 출원지가 가치에 영향을 끼쳤으나, 그녀가 판매하는 보석이 워낙 무결하고 찬란했기에, 곧 ‘이데나 상단’이라는 브랜드는 그 자체로 명품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외국이나 어느 알려지지 않은 섬에서 상품을 공수해 오는 것이라 믿었다.
엄청난 수익을 본 아일린 이데나는 곧이어 다른 보석이며 드레스 등을 판매했고, 이는 가구며 예술품, 부동산까지 확장됐다. 그리고 건드리는 사업마다 성공을 거두었다.
묘하게도 이데나 상단이 확장되는 과정이며 그 상품은 오래전 루완 상단이 확장되던 모습과 비슷했다. 그들이 건드리는 사업 또한 루완 상단의 주력 사업이었다.
유일한 차이점은, 귀족들을 겨냥해 희소가치 있는 제품만을 만드는 루완 상단과 달리 이데나 상단은 평민들까지도 고객으로 보아 훨씬 넓은 범위의 상품을 판매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백성들 사이의 평판은 이데나 상단이 훨씬 앞서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판매 정책은 특별함을 인정받고 싶은 귀족들 사이에서 매력이 떨어지기 쉬웠다. 그러나 이데나 상단에서 판매하는 보석의 가치가 워낙 높았기에 그 지위는 여러모로 공고해지기만 했다.
“그때 사람을 보내 죽여 버리든가 했어야 했는데.”
페트라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데나 상단이 정말로 그녀의 그녀를 자극한 것은 다르마유 차 사업이 시작이었다. 비에른의 왕세자가 황녀와 파혼하고 그 시녀를 왕비로 들인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페트라는 그 사업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한때 수익이 손에 잡힐 것처럼 확실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1년 뒤, 이데나 상단에서 정확히 그녀가 구상했던 사업을 진행했다. 그 방식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페트라의 생각과 일치했다.
아이테르 백작과 독점 계약을 체결하고, 비에른의 왕비를 통해 상품을 홍보하고, 비에른의 문화며 역사를 적절히 활용하여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다르마유 차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이데나 상단은 아이테르 백작과 추가적인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비에른의 국왕과 왕비 또한 그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백작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어도 쉽지 않았다. 그의 중립적이고 계산적인 태도를 누구나 알고 또 그 판단을 신뢰하기에, 섣불리 건드리면 자신의 평판만 떨어질 판이었다.
“저…… 한 가지 소식이 더 있습니다.”
“뭐지?”
신경질적인 페트라의 대답에 칼린 부인이 움찔하고 놀랐다.
“그게…… 이데나 상단에서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는 묘약을 출시했다고 합니다. 그, 그리고 그 약에는 결이 좋고 풍성해지는 효과도 있다고…….”
“후우…….”
페트라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전생에 나와 원수라도 졌나 보지.”
페트라와 그녀의 상단이 점점 이데나 상단에 밀려 입지가 좁아질 무렵 그녀는 기적처럼 돌파구를 찾아냈다.
절대로,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주술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한 것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 천재적인 그 사람은 페트라가 꿈에도 그리던 인재였다.
그녀는 신이 선물하기라도 한 듯 어느 날 패리스의 곁에 나타났다. 그러나 영혼까지 사로잡는 미모를 넘어, 그녀의 재주를 알아본 것은 페트라 자신이었다. 페트라는 그녀를 톡톡히 활용해서 상단을 다시 세웠다. 귀족들은 모두 그녀가 개발하는 장난감이며 장신구를 착용하고 싶어 했다.
한숨 돌린 것도 잠시, 이데나 상단에서는 곧바로 루완 상단의 것과 유사한 상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주술을 이용한 물건들까지 따라 할 줄이야…….”
그것은 충격이었다. 우연히 천재가 넝쿨째 굴러 들어온 페트라와 달리 아일린 이데나는 주술에 능한 벨라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루완 상단에서 출시한 것을 바로 따라 하는 것을 보면 급하게 모은 인력은 아니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꾹 짚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신의 손에 망했던 수많은 상단과 이데나 상단은 달랐다. 아일린 이데나는 마치 페트라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 그녀의 계획을 따라 하고 빼앗았다.
그렇다고 귀족들을 동원해 그녀와의 교류를 단절시키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순식간에 황비들을 비롯해 수많은 귀족들과 친분을 쌓았으니까.
유리엘 비체와 함께 다니는 것을 보았다, 에핀하르트 대공을 후원한다는 소문이 도는가 하면, 최근에 전쟁에서는 패리스에게 무상으로 최상의 무기를 지원하기도 했다. 가레스조차도 그녀가 지원한 무기를 들고 참전하지 않았나.
이데나 상단은 은밀히 퇴출시키기에는 너무나도 커져 버렸다. 그 영향력은 쉽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남부의 보석 사업은 철수해.”
“예. 저, 그럼 다른 문제는…….”
칼린 부인은 무언가 대답을 기대했다가 서슬 퍼런 페트라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페트라는 차가운 물 한 잔을 쭉 마시고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 마음을 정리했다.
그녀는 지지 않았다. 아니, 질 리가 없다.
이데나 상단이 어떻든, 그녀에게는 황제가 있었다. 그는 영원히 그녀의 편일 것이고, 황실을 등에 업은 이상 제국의 사업은 그녀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리고 황제와 페트라의 사이는 영원히 굳건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 * *
수도 부근에 위치한 바르탄 지역은 20년 전까지는 작고 초라한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가난했고, 오래 머무는 사람은 드물었다. 별다른 특산품도 큰 상단도 보이지 않는 그곳은 폐허가 돼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었다.
그곳의 영주는 아론 남작이라는 자였고, 건달처럼 살았지만 꽤나 욕심이 있었다.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로부터 이 손바닥만 한 쓸모없는 영지만을 상속받은 그는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바르탄을 다시 부활시키는 방법을 찾았다.
‘역시 제일 쉬운 사업은 어린 귀족 놈들 등쳐 먹는 거지.’
그리하여 그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모아 자신이 제일 잘 아는 사업을 시작했다. 영지 한복판에 도박장을 차린 것이다.
사업 수완이 좋았는지, 아니면 허허벌판에 호화로운 도박장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는지 그의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국에서 허영심 좀 있다 하는 귀족 자제들은 바르탄에서 모여 술과 도박을 일삼았다.
‘도박장이 있으면 마땅히 여자도 있어야겠지.’
그는 곧이어 그가 아는 여러 사업가와 손을 잡고 도박장 근처에 윤락업소들을 차리고 홍등가를 만들었다. 그 또한 꽤나 큰 성공을 거두었다.
환상과 타락의 극치. 그것이 바르탄의 실체였다.
정확히 5년 전까지만.
5년 전, 아론 남작은 여자 한 명을 만났다. 자신을 ‘아일린 이데나’라고 소개한 그녀는 무척 젊은, 어쩌면 스무 살도 되지 않았을 여자였다. 짙은 갈색 머리에 잿빛 눈동자로 나타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그녀는 어마어마한 재물을 그에게 안겨 주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도박장을 제외한 모든 윤락업소를 부수고 극장을 지으라는 것.
“이런 것 말고 떳떳한 사업을 하세요. 당신 정도의 수완이면 얼마든지 양지에서 성공할 수 있으니까.”
평생을 건달처럼 살았던 그는 다른 귀족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평생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모든 자금을 제공하고 바르탄이 극장과 공연업으로 성공할 때까지 밀어주겠다는 아일린 이데나의 제안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가 돈 자루를 안기기 전에, 홍등가의 여인 몇을 함부로 대했다는 이유로 그를 묶어 놓고 수하를 시켜 흠씬 두들겨 팼다는 점도 그러한 판단에 영향을 끼쳤다.
그 수하가 얼굴은 가렸지만 괴물 같은 힘과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든 상단주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말을 따랐다. 도박장은 귀족들의 사교장으로서 기능하도록 남겨 두되 매춘을 하는 업소는 모두 사업을 중단하도록 했다. 반발이 있었지만 그는 말을 안 듣는 자들을 때려서 내쫓는 것에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결국 3년이 채 지나기 전 바르탄 지역에는 거대한 극장들이 지어졌고, 그곳은 곧 배우들의 성지로 거듭났다. 그것이 현재 바르탄의 모습이었다.
다만 그의 사업에도 빈틈이 있었기에, 몇몇 홍등가의 업주들은 평범한 술집인 듯 행세하며 윤락업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적당히 뇌물도 쓰고 조사관을 구슬리면서, 그들의 사업은 원활하게 굴러갔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라테아의 천국’이었다. 화려한 붉은 건물, 보기만 해도 혼미해질 정도의 미녀들이 기다리는 곳. 술과 음악, 교태가 넘치는 신세계.
“들어오세요.”
이른 저녁 업소의 주인인 라테아와 그 남편 로날드는 다섯 명의 손님을 맞았다. 젊은 남자 셋에 여자 둘. 술집이기도 한 그곳에는 여인들도 오갔기 때문에 이상할 것 없는 조합이었다.
다만 눈길을 끈 것은 그들의 기가 막힌 외모였다. 남자 셋은 형제라도 되는 듯 윤기 나는 검은 머리에 잿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여자 중 작은 쪽은 금발에 생기 넘치는 갈색 눈동자, 또 한 명의 키가 큰 여자는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에 하늘같은 푸른 눈동자였다.
다섯 명은 모두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들은 시선을 끌었다.
“방으로 안내해 주시오.”
긴 머리에 유독 여리고 섬세한 외모를 가진 남자가 청했다. 배우인가? 달콤한 목소리며 눈짓이 기가 막히다고 라테아는 생각했다.
“루아나라는 여자를 불러 주시오.”
“어머, 루아나를 보러 오셨군요. 그럼 다른 남자분들은……?”
남녀가 섞여 있기에 술만 주문하나 했던 라테아는 화색을 띠며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루아나 한 명만 있으면 되오.”
라테아는 더 묻지 않았다. 한 명뿐이라는 말에 실망할 법했지만 그들이 부른 것은 업소에서 가장 비싼 여자들 중 하나였다.
“운이 좋으시군요. 일찍 오셔도 루아나를 바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답니다.”
* * *
“매춘굴치고는 화려하고 눈에 띄는군요.”
“고급 업소들은 원래 그렇다고 들었어.”
탄과 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아폴로니아는 천장과 벽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루완 상단의 신상품, 빗으면 머리색이 바뀌는 빗을 사용해 머리색을 타는 듯한 붉은색으로 바꾼 채로 바르탄에 도착했다.
귀족 여인들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값비싸고 희귀한 것이었으나 아폴로니아로서는 구하기 어렵지 않았다. 아드리안 또한 같은 물건을 이용해 머리를 금발로 바꾼 상태였다.
다섯 명 모두 형제들의 할머니가 만든 약을 통해 눈동자 색도 다르게 바꾸었다. 삼형제는 잿빛, 아드리안은 갈색, 아폴로니아는 그녀가 좋아하는 짙은 푸른색 눈동자였다.
“오래된 곳인 것 같네. 직접 와 본 건 5년 전이 마지막이라 이런 곳이 남아 있는 줄은 몰랐군.”
“전하, 오늘은 루아나라는 여자만 데리고 가는 거죠?”
아폴로니아는 불만을 내색한 것이 아니었지만 아드리안은 조금 걱정되는 듯 물었다.
“그래. 웬만하면 그렇게 할 거야. 얼마 안 걸릴 거라고 생각해.”
“여기 왔습니다.”
라테아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리더니 한 여인이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루아나라고 합니다.”
그 말에 고개를 들었던 아폴로니아는 순간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속이 비치는 옷을 입고 등장한 그녀는 짙은 금발에 푸른 눈, 도자기 같은 피부를 가진 미인이었다. 교태 가득한 몸짓이며 표정은 매혹적이었지만 초상 속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네가…… 루아나라고?”
“그렇습니다. 어떤 분을 상대해 드릴까요?”
그녀는 삼형제를 차례로 보고, 아폴로니아와 아드리안도 보았다. 교태스러운 미소를 완벽히 유지한 채였다.
“혹시…… 예전에는 검은 머리였나?”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이름을 잘못 알고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작은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어머, 어떻게 아셨나요? 원래는 저 세 분 손님들처럼 검고 풍성한 머리였답니다. 금발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솔직하게 웃는 그녀는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찾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대답해 줘서 고맙군. 상대는 됐으니 받고 돌아가게.”
고개를 갸웃하는 루아나에게 아폴로니아는 금화를 하나 쥐여 주었다. 그녀의 푸른 눈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거 정말 고맙군요.”
그녀는 금화를 깨물어 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제대로 실패했네.”
아폴로니아가 한숨을 쉬었다. 아드리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초상으로 볼 때는 분명 저 얼굴이 아니었는데, 화가가 잘못 그린 모양이에요.”
별일이었다. 실제 얼굴보다 못생긴 초상을 그리는 화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실력이 없어도 심하게 없는 자였던 모양이다.
“나가지.”
더 볼일이 없다고 판단한 아폴로니아는 주문한 술을 그대로 두고 일어섰다. 그녀의 호위를 위해 따라왔던 벤과 탄, 룬 삼형제도 따라서 일어났다. 음식도 술도 건드리지 않았지만 아폴로니아는 종업원에게 모든 값을 지불하고 ‘라테아의 천국’의 출입문으로 향했다.
여러 테이블을 지나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퍽!
“이 여자가 어딜 들어가!”
문 앞의 작은 복도 쪽에서 여자 한 명이 나동그라졌다. 방 안의 누군가가 그녀를 밀쳐 낸 듯했다.
“분명히 제 이름을 말했는데 그게 제 잘못이에요?”
“시끄러! 상식적으로 저 정도 되는 손님이 너를 찾겠냐고!”
벽에 부딪힌 어깨를 잡고 일어서는 그녀는 조금 전 보았던 금발의 여자와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분명히 이곳 업소에서 일하는 여자였다. 다만 얼굴을 덮고 흘러내리는 정돈 안 된 검은 곱슬머리 때문인지 조금 더 지저분한 인상을 주었다.
“그만 좀 때려요! 부끄럽지도 않나?”
그녀는 멍든 어깨를 붙잡으면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방 안의 남자에게 맞서서 소리쳤다. 아폴로니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루아나를 찾는 부자 손님이 너를 보면 얼마나 실망하셨겠어? 이름이 같으면 알아서 판단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빈정거리며 방문을 나오는 남자는 라테아의 남편, 로날드였다. 그는 술에 반쯤 취한 눈으로 루아나를 노려보며 다시 손을 들었다. 아폴로니아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벤에게 눈짓했다.
“주인장, 우리 좋은 말로 합시다.”
벤이 로날드를 가로막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삼형제 중 가장 덩치가 큰 그는 가만히 서 있어도 위압감을 뿜었다. 로날드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일어나지.”
아폴로니아가 여자에게 다가가 휘청대는 그녀를 잡아 주었다. 여자는 다소 거친 손으로 아폴로니아의 부축을 받으며 바로 섰다.
‘어……?’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인 여인을 보는 아폴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익히 보았던 것이었다.
초상화 속에서.
“아가씨는 이름이 뭐지?”
아폴로니아가 다급하게 묻자 여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루’라고 하는데요.”
“루?”
“그쪽 계집은 손님들이 신경 쓸 거 없소이다. 얼굴이 썩 예쁘지가 않아서 돈 많은 분들은 찾지 않거든요.”
로날드가 아폴로니아를 보며 말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그녀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원래 이름은?”
“‘루아나’입니다. 이곳에는 동명이인이 있어 ‘루’라고만 해요.”
아폴로니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출신과 나이를 말해 보겠어?”
“스물아홉 살이고 데이튼 마을 사람이랍니다. 무슨 일로…….”
아폴로니아를 올려다보는 그 눈은 로날드의 거친 손길에도 전혀 꺾이지 않은 듯했다. 여인은 양손으로 머리를 몇 번 빗질하고 곧게 서서 아폴로니아를 마주 보았다. 아폴로니아는 그녀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녀는 일반적인 윤락 업소의 여인들보다 아름답다고 하기 어려웠다. 엉켜 있는 검은 곱슬머리는 정돈되지 않아 보였고, 얼굴의 주근깨며 완전히 고르지 않은 치아는 시골의 말괄량이 같은 모습이었다. 몸태가 다 드러나는 옷차림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만 그녀의 새까만 눈은 당돌함으로 반짝거렸다.
그녀의 모든 매력은 그 표정에 있었다. 초상 속의 바로 그녀였다. 아폴로니아는 로날드에게 손짓했다.
“다시 방을 마련해 줘. 이번에는 주인장 부부와 여기 ‘루’가 함께 들어오도록 해. 둘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서.”
부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결국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돈을 많이 주는 손님의 말은 일단 듣고 보는 것이 그들의 원칙이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준비된 방에 모여 앉은 그들에게, 아폴로니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루’를 데려가고 싶네.”
루의 눈이 커졌다. 지금껏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제안임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루와 주인장 부부는 서로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녀의 말에 라테아 부부가 벙 찐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좀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아서. 그리고…….”
아폴로니아가 루의 어깨에 든 멍을 힐끗 보았다. 조금 전 로날드가 밀쳐서 생긴 듯 했다.
“여기보다 더 어울리는 자리를 소개하고 싶군.”
루는 멍하게 멈춰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동자를 스친 희망을 아폴로니아는 똑똑히 보았다.
“저어, 아가씨, 그건 말입니다.”
라테아가 눈치를 보며 말을 뗐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눈에도 무언가 빛이 났다. 아마도 탐욕일 것이다.
“이곳의 주인은 저희 부부이니 일단 저희와 이야기하시죠.”
아니나 다를까, 아폴로니아의 예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제안이었다.
“루, 나가도록 해.”
라테아가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루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녀는 빠르게 부부의 눈치를 살폈다.
“어서.”
“그럼 옆방에 있는 내 일행들과 대기해 주면 좋겠군.”
갈등하는 루를 보며 아폴로니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루는 결국 한숨을 깊이 내쉬고는 나갔다. 그 직전에 그녀는 아폴로니아와 눈을 맞추고는 뭔가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조심하라.’인 것 같았다.
“그래. 자네들은 갑작스럽겠군.”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하지만 부부의 대답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이 욕심으로 희번덕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뭐……. 그렇지요, 예.”
“루는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석 달 정도밖에 안 됐습니다. 그 전에는 다른 곳에서 일했다더군요.”
“루는 다른 지역에 있을 때에 아주 인기가 많은 걸로 유명했었답니다.”
남편의 솔직한 대답에 라테아가 급히 한 마디를 붙였다.
“부자 손님들은 안 찾는 줄 알았는데?”
“에헤헤헤……. 그건 아까 그 손님만 그렇고요. 실제로 루는 우리 업소의 꽃이랄까, 그 아주 인기 많은 아가씨랍니다.”
그녀는 벌써부터 아폴로니아를 위아래로 훑으며 그녀의 부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 인기 많은 아가씨와 계약을 하다니, 주인장은 운이 좋군.”
“아무렴요. 저희는 큰돈을 들여 저 아가씨를 데려왔답니다. 그래서 그…….”
라테아는 아폴로니아의 눈치를 보았다.
“얼마를 원하나? 계약을 파기하는 데에.”
아폴로니아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두 부부의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크게 찢어졌다.
“그, 그러니까……. 최소한, 최소한 말입니다. 금화로 70개는 주셔야…….”
“100개는 돼야 한답니다. 그 밑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로날드가 애매하게 웅얼거리자 라테아는 딱 잘라 남편의 말을 끊었다. 아폴로니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큰돈이지만 액수를 감당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금화 100개?”
아폴로니아는 이마를 짚었다. 그들이 요청한 금액은 위약금 정도가 아니었다. 70개든 100개든, 이들 부부가 금액을 높여서 부른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부부가 말한 금액의 책정 기준은 말 그대로 몸값이었다. 사람을 사고파는, 인신매매의 가격. 당연히 불법이었지만 이런 업소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조금 전 루가 매를 맞던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제 발로 계약금을 받고 온 것이 아니라 팔려 온 것이다. 그녀의 몸값을 받은 사람은 그 전 업소의 주인일 수도 있고, 그녀의 가족일 수도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매춘 자체를 싫어했지만 인신매매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아론 남작 이 개자식이.’
유리엘이 때렸던 매가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이 정도도 관리를 못하고 있었다니.
“100개 밑으로는 안 됩니다.”
라테아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높은 값을 불러 놓고 보는 것이 그녀의 협상 방식인 모양이었다.
“자네들에게 금화 100개를 주면 된다는 거지?”
아폴로니아가 확인차 물었다. 혹시라도 라테아가 말한 것이 고액의 위약금이라면 그녀는 루에게 따로 계약금을 더 지급해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유, 당연한 말씀을. 루는 뭐든 잘 먹는답니다. 일도 시키는 대로 잘하죠.”
“저래 봬도 잘 가꾸어 놓으면 꽤 예쁘답니다.”
라테아는 히죽거리며 말했다. 로날드도 옆에서 장단을 맞추었다.
“현금으로 지급하겠네. 즉시.”
아폴로니아의 말이 떨어지자 부부의 입이 쩍 벌어졌다. 현금으로 금화 100개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연히 한참 실랑이를 할 줄로 예상했을 그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밖에서 가져오지. 당장 짐을 싸라고 하게.”
아폴로니아는 대답을 듣지 않고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잠깐.”
뒤에서 라테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아폴로니아가 돌아서며 묻자 라테아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흥분한 것인지 긴장한 것인지 그녀의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생각을 해 보니, 루의 몸값만 받아서는 부족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뭐?”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들 부부는 점점 더 불쾌해져만 갔다.
“루가 여기 와서 먹고 쓴 것들이 있잖습니까. 비용이라는 게, 그것도 좀 보상을…….”
‘제대로 먹이지도 않으면서 일을 시킨 티가 나는데 보상이라고?’
아폴로니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까 몸값에 다 포함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폴로니아가 짜증스럽게 대꾸하자 로날드가 움찔했다. 그러나 라테아는 그보다 배짱이 좋아 보였다.
“아,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고급 요리며 옷들을 먹고 쓰는데요.”
“얼마인가?”
“예?”
“원하는 것이 총 얼마냐고?”
아폴로니아는 치미는 화를 누르며 물었다. 그들의 태도는 괘씸했으나 금액 자체는 아폴로니아에게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일단 잡음 없이 루를 데리고 나가기를 원했다.
“총……. 금화 250개는 주셔야겠습니다.”
순간 로날드가 표정 관리를 못 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라테아는 물러서지 않고 아폴로니아를 쳐다보았다. 아폴로니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들은 그녀를 호구로 보고 있었다.
하긴, 이쪽 사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게 생긴 젊은 여자가 갑자기 큰돈을 내놓겠다는데 무시를 안 하는 것이 이상했다. 더군다나 투자 대상이 루였다. 그들이 볼 때에는 하찮고도 하찮은. 물론 그들에게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250개라…….”
아폴로니아가 심호흡을 하며 금액을 다시 말했다.
“그, 그렇습니다.”
“계약서를 가지고 오게.”
아폴로니아가 내뱉었다. 라테아의 얼굴은 충격으로 잠시 얼어붙었다.
“어서.”
“예, 예.”
두 사람은 아폴로니아를 남겨 둔 채, 안쪽 공간과 연결된 복도 반대편 문으로 나갔다. 아폴로니아는 차고 온 연푸른 다이아몬드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그들을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철컥.
문이 열리고 라테아와 로날드 부부가 들어섰다.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면…….”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들자 눈에 보인 사람은 두 명이 아닌 다섯 명이었다. 부부 외에도 덩치 큰 사내 세 명이 함께 들어선 것이다. 그들은 꽤나 험상궂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뭐 하자는 건지?”
아폴로니아는 차갑게 물었다. 라테아가 히죽거리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게, 우리도 생각을 해 봤는데……. 루를 팔아넘기는 것도 좋지만 아가씨가 가진 돈이 금화 250개 정도가 아니라서 말이지.”
세 남자들은 아폴로니아를 흘깃흘깃 보며 위협적으로 웃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감이 왔다.
“그래서?”
“뭐,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돈을 볼 일이 잘 없거든.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라서.”
라테아의 말투는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폴로니아를 손님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아가씨와 좋게 계약을 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몸에 지닌 것을 다 털고 사람은 팔든 죽이든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겠다, 이런 이야기야.”
언제나 솔직한 로날드가 털어놓았다. 이번에는 라테아도 남편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폴로니아가 어차피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를 팔든, 죽이든 하겠다라.”
아폴로니아가 그의 말을 따라서 중얼거렸다.
“거 금화 수백 개랑 다이아몬드 팔찌 같은 것은 함부로 몸에 지니고 다니면 못 써. 딱 이런 범죄의 대상이 되기 좋거든.”
로날드가 신이 난 듯 덧붙였다.
“내가 데려온 사람들은?”
“옆방에서 세상모르고 술 먹고 있겠지. 여기서는 비명을 질러도 안 들려. 조금 기다리면 함께 묶어서 팔아넘겨 주지.”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의 질문 하나하나에 답해 주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역겨울 수가 있군. 그런 사람을 많이 봐 왔지만 자네들은 아주 특별해.”
“너무 원망 말아. 아가씨는 예쁘니까 좋은 곳에 팔릴 수 있을 거야. 뭐, 어디 신고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야 그 전까지 돈 들고 튀면 되니까 마음대로 해.”
라테아는 씩 웃으며 세 명의 남자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조금씩 아폴로니아가 앉은 탁자를 향해 걸어왔다. 가장 앞의 남자가 아폴로니아에게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쾅!
복도 쪽에 있던 문이 쪼개지면서 벤, 탄, 그리고 룬이 방으로 쏟아지듯 들어섰다. 그들은 각자 숨겨왔던 단검을 아폴로니아에게 접근하던 세 남자에게 던졌다.
퍽! 퍽! 퍽!
“으으윽!”
그들은 거의 동시에 어깨를 붙잡고 쓰러졌다. 곧이어 삼형제는 날듯이 다가와 라테아와 로날드의 어깨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눌렀다.
“어억!”
“윽!”
두 사람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우악스러운 손길에 눌려 무릎을 꿇었다.
“상대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군.”
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실력이 늘었다더니, 정말이었네.”
아폴로니아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형제와 타냐는 몇 년 전 유리엘에게 된통 털리고 나서 아폴로니아의 도움 하에 제대로 된 무예를 배웠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관심은 검이나 활보다는 암기에 치중되었지만, 날랜 몸들을 타고나서인지 실력이 쑥쑥 늘었다.
“타냐는 어때?”
“말도 마십시오. 저희 중 제일 정확하고 빠릅니다. 오늘 같이 왔더라면 저희는 구경만 하고 있어도 됐겠죠.”
“어려서 안 돼.”
눈앞에서 신음하는 다섯 사람이 보이지 않는 듯, 그들은 여상하게 안부를 주고받았다.
“루는?”
“저쪽에…… 옆에 한 명을 남겨 둘까 했지만 전하가 위험할까 봐 같이 왔습니다.”
벤이 쪼개진 문을 가리켰다. 그 뒤로 눈을 동그랗게 뜬 루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기다려 주겠어?”
아폴로니아가 웃으며 말했다. 루는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라테아 부부와 아폴로니아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라테아와 로날드였다.
“대, 대체 어떻게……?”
라테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묻자 비로소 세 형제와 아폴로니아는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왠지 그냥 느낌이 와서 말이야. 이 팔찌는 조금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거든.”
그녀는 차고 온 연푸른 다이아몬드 팔찌를 매만졌다. 팔찌를 만든 장본인인 탄이 씩 웃었다.
“이 정도 준비도 하지 않고 왔을 리가 없잖아. 자네들 말대로 딱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쉬운데 말이야.”
아폴로니아의 말을 들은 부부의 얼굴이 굳었다. 세 남자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단검에 독을 발랐던 것인지, 그들은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여,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라테아가 바락바락 소리쳤다. 아마 밖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듣고 구하러 올 거라 생각하는 듯 했다.
“일단은 빠져나갈 생각이 없으니 걱정은 넣어 두게.”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루만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거든.”
“누, 누구 마음대로! 밖에 있는 우리 사람들이 몇인 줄 알아?”
“규모가 크니 30명은 되겠지.”
“그래! 그 수를 세 명이서 상대하겠다고? 실력도 변변찮은 것들이……. 여봐라! 누가 이리 좀 와서…… 윽!”
잃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듯 고함을 치기 시작한 라테아가 룬의 손가락에 어깨를 꽉 잡히면서 비명을 질렀다.
“이봐.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고. 우린 이 지역의 높으신 분들을 알아. 아론 남작님을 아나? 그 오른팔격인 스벤 님이 우리 뒤를 봐주고 계신단 말이지. 심지어 우리는 아론 남작님을 실제로 뵌 적도 있다.”
“아하. 스벤이라는 자에게 책임을 물려야겠군.”
이것저것 떠드는 로날드에게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테아와 로날드는 그 여유에 깜짝 놀란 듯 말을 멈추었다.
“뭐,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긴 해.”
“뭐? 누가?”
아폴로니아는 라테아의 물음에 대답을 해 주는 대신 부서진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빨리도 왔구나.”
아폴로니아의 인사가 떨어지기 무섭게, 아드리안이 한 남자를 데리고 들어섰다. 주술을 통해 금발에 갈색 눈이 되어 있던 그녀는 평소보다 더 성숙한 인상이었다.
“영지가 워낙 작으니까요. 다행히 현명하신 아론 남작께서는 상단의 증표를 바로 알아보셨답니다.”
그녀는 루와 주인 부부와 함께 방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아폴로니아가 지시한 바에 따라, 밖에 묶어 두었던 말을 타고 남작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드리안을 따라 들어온 남자는 마흔쯤 되어 보이는, 머리에 기름칠을 많이 한 체격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아폴로니아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떨고 있었다.
“왔군요, 아론 남작. 나를 알아 보겠나요?”
“이, 이데나 상단주님…….”
붉게 염색한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본 아론 남작은 외모만으로는 그녀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를 기억했다. 두 사람의 인사에서, 그 관계의 갑이 누구인지가 확실히 드러났다. 아론 남작은 아폴로니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 아론 남작님?”
“세, 세상에, 정말로 남작님이…….”
라테아와 로날드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들은 아론을 알아보았다.
“나, 남작님. 이 무뢰배들이 저희 가게에 들어와서 다짜고짜 흉기를 휘둘렀습니다. 어서 붙잡아 처벌을…….”
라테아가 이때다 싶었는지 그에게 하소연했다. 평소 스벤에게 먹였던 뇌물이 지금도 효과를 발휘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남작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아론 남작, 이들을 아시나요?”
아폴로니아는 라테아의 말을 무시하고 아론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사람을 긴장시키는 위압감이 무겁게 서려 있었다.
“하아…… 지역 상인의 수가 적다 보니 얼굴은 본 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술집을 운영한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남작은 어딘가로 숨어들어가고 싶다는 듯 고개를 자꾸 떨어뜨렸다. 아폴로니아를 똑바로 보지 않으려는 얼굴에는 약간의 공포심도 어려 있었다.
“매춘업은 그때 말씀하신 후로 전부 폐점했었습니다. 그 후에 이곳을 조금 떠나 있었다 보니 지금까지도 술집의 간판만 내걸고 당당히 매춘을 하는 곳이 있을 줄은…….”
“단순한 매춘이 아니더군요. 여인의 몸값으로 금화 100개를 요구하는 것을 보면.”
“배, 백 개요?”
남작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를 쏘아보는 아폴로니아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그, 그 말은 그러니까.”
“네. 인신매매를 하고 있다는 거죠. 내가 절대로 이곳에서 보고 싶지 않다고 했던.”
아폴로니아는 그때까지도 구석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루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화를 듣고 있던 루가 그 의미를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일하는 여자들 중 자기 발로 온 사람은 거의 없어요. 팔렸거나 납치가 됐거나.......”
아폴로니아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
남작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는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아폴로니아에게 사정했다.
“제,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이런 일은 다시 없을 겁니다!”
눈물이라도 뿌릴 것처럼 애원하던 그는 별안간 시선을 라테아와 로날드에게 돌렸다.
“이, 이자들을 잡아 죽이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그러니 제발 지난번처럼은…….”
그의 말을 들은 부부의 표정도 흙빛으로 변했다. 그들은 비로소 상황을 깨달은 것 같았다.
“봐, 봐주십시오! 루를 그냥 드리겠습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이 지경이 되도록 사람을 상품으로 거래하려 하다니.
“나도 가끔 탐나는 사람이 생기지만 납치와 매매는 방법이 아니라네.”
한때 유리엘을 감금했었던 일을, 아폴로니아는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루의 몸값은 지불하지 않겠어. 애초에 법에 따르더라도 당신들의 소유물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리고 남작.”
아폴로니아는 일어서며 말했다. 남작이 움찔하고 아폴로니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3일 줄 테니 영지 내에서 매춘업을 하는 모든 가게를 폐점시켜요. 이곳뿐 아니라 전부 다. 소속된 여자들은 남작이 책임지고. 그들이 영지에 남기를 원한다면 한 명 한 명에게 일자리를 구해 주고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요.”
그녀는 제시한 것은 말도 안 되게 짧은 기간이었지만 남작은 그조차도 감사한 듯 머리를 조아렸다.
“아, 알겠습니다! 당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3일 후 확인했을 때 단 한 곳이라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재산이고 작위고 팔아 치워야 할 거예요. 내가 투자한 돈을 전액 회수할 거니까. 물론 신체도 멀쩡하지 못하겠지만.”
남작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거듭 조아렸다. 식은땀이 머리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루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이 젊은 여자는 말 몇 마디로 바르탄 지역 전체를 뒤집었다. 루의 눈에는 대단해 보이기만 했던 라테아와 로날드를 바닥에 꿇리고, 엄청난 권력자 같았던 아론 남작까지 마음대로 다루었다.
“나가지.”
아폴로니아는 아론 남작을 그 자리에 세워 두고 방을 나섰다. 아직 얼떨떨한 표정을 한 루의 손목을 잡은 채였다. 삼형제와 아드리안도 따라 나왔다.
“마차는?”
아폴로니아가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상황이 위험해 보여서 진작 밖에 대기시켰답니다. 남작이 있어서 쉬웠죠.”
역시 빨라.
아드리안에게 미소 지으며, 아폴로니아는 절규하는 부부를 뒤로하고 대기 중이던 마차에 몸을 실었다.
* * *
루, 아니 루아나는 상황이 도저히 정리되지 않았다.
멍청한 종업원이 손님을 특정해서 가 보라고 하기에 갔더니 재수 없이 로날드에게 얻어맞은 것까지는 평범한 하루였다.
그러나 그다음부터는 이상했다. 모르는 여자가 자신을 도와주는가 싶더니 몸값을 치르겠다고 하고. 어차피 부부가 바가지를 씌울 것을 알았기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화려한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그 후로 3일이 지났다. 3일 동안 루아나는 평생 누려 보지 못한 안락함을 누렸다. 폭신한 침대며 따뜻한 목욕물, 푸짐한 음식, 그리고 아무도 그녀를 괴롭히지 않는 길고 편안한 휴식.
참으로 행복한 3일이었다.
마지막 날 저녁, 그 여자가 다시 찾아왔다.
“상처는 치료했어?”
별일 없었다는 듯 그 여자가 차를 따라 주며 물었다. 두 사람 앞에는 먹음직스러운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루아나는 그녀가 분명 마녀일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 전까지 불길 같은 진홍빛이었던 머리카락이 화려한 금발로 바뀌어 있었다. 눈동자는 또 처음 보는 금적안이었다.
가게에서 보았을 때도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욱 화려한 외모였다. 다만 표정이나 자세에 따라 인상이 바뀌는 것 같았다.
“상처랄 것도 없어요. 그냥 멍인데요.”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케이크로 손을 뻗었다. 라테아와 로날드를 탈탈 털어 버린 이 마녀가 무섭기는 했지만 일단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루아나는 케이크를 아주 좋아했고, 탁자에는 딸기, 포도, 무화과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과일 타르트며 찐득한 초코 케이크까지 그녀가 좋아하는 간식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루아나는 한동안 말없이 먹었다. 그러나 배가 찰수록 루아나에게는 눈앞의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차올랐다.
“바르탄 지역은 다 정리됐어.”
그녀가 미처 묻기 전에 여인이 말했다.
“네?”
“너와는 이제 무관한 일이지만 궁금해할까 봐 말해 주는 거야. ‘라테아의 천국’에 대한 처리는 다 끝났고, 앞으로 그곳에서 다시 인신매매를 하는 사람은 절대로 없을 거야.”
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 있었다. 확신에 찬 그 태도는, 마치 ‘그런 일을 다시 하는 사람은 내가 다 죽일 거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루아나는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순간 온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루아나는 험한 삶에 익숙한 여자였다. 다만 라테아 부부에게 납치되다시피 끌려온 후로는 조금 있었던 희망이 사라졌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어두운 동굴 같은 그곳에서, 이 여자는 너무나도 손쉽게 그녀를 빼내 주었다.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던 모든 여인들에게도 다른 삶을 선사했다.
“저…… 아론 남작님과 아시는 사이인가요?”
“좀 투자를 하고 있지.”
그녀의 짧은 대답에서, 루아나는 이 여자가 너무 세세한 질문은 귀찮아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루아나는 그런 쪽으로 눈치가 무척 빠른 편이었고, 그 덕분에 라테아를 만나기 전에 있었던 업소에서는 실제로 인기가 좋았다. 라테아는 그녀와 그 동료 몇을 우연히 보고 납치하듯 ‘라테아의 천국’에 데려간 것이기에 사실 루아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눈앞의 이 여자는 쓸데없는 수다를 싫어했다. 그래서 루아나는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제게 시키실 일이 뭔가요?”
몸값을 지불했든 안 했든, 이 여자는 분명 라테아로부터 그녀를 데려왔다. 그녀가 본 것이 정확하다면 아론 남작이고 그 망할 부부고 할 것 없이 그녀를 두려워했고, 그 말은 루아나도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루아나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라테아의 천국’에서 이 저택으로 그녀를 데려와 주고, 눈앞에 있는 다과를 비롯해 온갖 친절을 보여 준 것만으로 그 이유는 충분했다.
바로 명령부터 내릴 거라 생각했으나 그 여자는 잠시 침묵했다. 차가워 보이는 눈빛에는 희미하게 연민이 스치는 것 같았다.
‘나를 불쌍히 여기나?’
루아나의 촉은 잘 틀리지 않았다. 이 사람은 분명 사람을 사고파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지?”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말을 돌리듯 루아나에게 질문을 했다.
“글쎄요, 5년은 넘었고 10년은 안 됐어요.”
그녀는 다시 침묵했다. 루아나는 진한 초코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한입 가득 씹어 삼키고 차로 입을 헹구었다. 입이 깨끗해지자 그녀는 살짝 웃으며 여인에게 말했다.
“유혹이군요. 당신이 제게 시키고 싶은 일이.”
금발의 여자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매춘은 싫어하는 것 같으신 분이, 그 비슷한 걸 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여쭤 봤어요.”
마녀든 뭐든, 그녀는 마차에 몸을 실을 때부터 그녀를 주인으로 생각했다. 라테아와 로날드에게 핍박받다가 죽을 뻔한 운명에서 구해 준 사람이니 다른 이유가 필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유혹은 맞아. 하지만 매춘은 아니야. 그 점을 정확히 알았으면 해.”
“네?”
루아나가 되물었다.
“그럼 어느 설마 어느 귀족의 정부로 들어가는 건가요?”
“뭐, 비슷해.”
루아나는 귀를 의심했다. 오랫동안 몸을 파는 생활을 해 온 그녀에게 어느 귀족의 정부로 들어가라는 이야기는 거의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안락한 생활, 편안한 몸, 그리고 돈. 간혹, 아주 운이 좋다면 권력까지도. 본처에게 괴롭힘을 당한다고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하지만 왜 저를…….”
루아나는 자신의 생김새를 잘 알았다. 그녀는 금발의 루아나처럼 미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주 젊은 나이도 아니며 특별한 교양을 갖추지도 못했다. 그녀가 잘하는 것은 오직 남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적임자가 너니까. 하지만 루아나.”
여자는 부드럽게 말하며 루아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정말 신비로웠다. 짙은 붉은색에 황금색이 살짝 뿌려진, 노을 같은 모습.
그래, 저렇게 생긴 사람이 정부로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일단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그리고 싫다면 거절하고 나가. 거절하고 간다고 해도 네가 평생 매춘을 하지 않아도 가족들과 함께 먹고살 만한 땅과 돈을 줄게. 어디로 가는지는 내게 보고하지 않아도 좋아.”
그녀의 말은 이상했다. 저런 약속은 루아나가 승낙을 했을 때 하는 것 아닌가. 아니, 애초에 라테아에게 잡힌 그녀를 데려와 놓고 왜 또 의견을 묻는 것인가.
“받아들이면, 뭐 돈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고 살게 될 거야. 그냥 원하는 게 있으면 다 가진다고 생각하면 돼.”
루아나는 꿈같은 그 말에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꿈이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거야말로 평생의 꿈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오묘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치밀함, 냉정함, 그 안에는 연민, 그리고…….
루아나는 이제야 여인의 태도가 왜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졌는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루아나를 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녀의 안위를 바라고 있었다. 평생 아무도 그러지 않았는데.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이 처음 보는 사람이 무엇을 시키든 그 말에 따르고 싶다는. 그런 마음으로, 루아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저어, 그럼……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
“네가 유혹해야 할 사람은.”
루아나는 아마 이 여인이 어떤 치매 걸리고 비대한 여든 살 노인을 그녀에게 맡기려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건강하고 질투심도 많은 본처며, 견제가 심한 자식들도 딸려 있는.
그녀는 아주 감사하게 받으려 했다. 어디인들 그녀가 살아온 곳보다 못하겠는가. 돈이 많고 귀족이라는데 어떤 험악한 조건인들 놀라겠는가. 그러나 눈앞의 여자가 말을 끝맺은 순간 루아나는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황제야.”
길고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루아나는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했다.
자신이 황제를 유혹할 정도의 외모가 되는지, 애초에 황제를 유혹할 만큼 자신을 황제 주변에 보낼 힘이 눈앞의 여자에게 있는지,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바르탄에서 남작을, 라테아 부부를 상대했을 때처럼. 그녀가 확신한다면, 일은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위험한 일이야. 그는 때로 잔인하고, 또…….”
“할게요.”
“뭐?”
숨도 쉬지 않고 대답하는 루아나에게, 여자는 놀란 듯 되물었다.
“할게요.”
루아나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황실이 위험하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황제가 포악하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장 내일 죽어도 루아나는 그 자리를 원했다. 평생 한 푼 두 푼 모아도 모이지 않던 돈, 평생 그녀를 비웃고 무시했던 사람들, 그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할 그 자리.
하루를 살더라도 올라 보고 싶었다.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더군다나 눈앞의 여자가 제안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후회는 없었다. 루아나는 이미 그녀를 온전하게 믿고 있었다.
그녀가 꾸었던 어떤 꿈보다도 황홀한 제안이었다.
* * *
아폴로니아가 루아나를 데리고 갔던 곳은 페드로 리스의 저택이었다. 지난 몇 년간 아드리안이 아폴로니아의 일처리를 많이 한 덕에 그 또한 상당한 부자가 되었고, 부녀는 수도 내외로 여러 채의 저택을 구매했다.
루아나의 빠른 승낙이 있었기에, 아폴로니아는 곧 자신이 누군지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차피 궁에 들어가면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이렇게 얽힌 이상 루아나와 그녀는 완전히 한 배를 탄 셈이었다.
“황, 황녀……?”
루아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멍해지더니 곧 무릎을 꿇었다. 뭐가 됐든 스스로 잘못한 것이 있을 거라고 넘겨짚은 것 같았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마.”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한 번 젓고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누구도, 설령 황제도 너를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해. 쉽게 무릎을 꿇으면 사람들은 쉽게 너를 내려다볼 거야.”
루아나가 정신을 차린 후, 아폴로니아는 빠르게 그녀를 가르쳤다.
걷는 법, 웃는 법, 말하는 법, 그리고 황제의 마음에 들어가는 법. 거기에 덧붙여서 그녀는 춤이며 음악 선생을 구해 그녀에게 붙여 주었다.
루아나가 그 모든 것을 배우는 속도는 놀랍도록 빨랐다. 특히 화술은 어떤 면에서 아폴로니아보다 더 뛰어났다.
과거에 인기가 있었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기억력도 좋았는지 그녀는 초상을 보고 웬만한 귀족들이며 그들의 취향을 전부 읊어 내는 데 성공했다. 황제의 취향을 훤히 꿰는 것은 물론이었다.
“잠자리는 어떤가요?”
루아나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이 부분은 어쩌면 정부로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아폴로니아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피해.”
“네?”
“하지 마. 정식 황비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의 시녀이니까. 피할 핑계는 얼마든지 있어. 가르쳐 준 것을 그대로 소화한다면 잠자리 없이도 얼마든지 그의 마음에 들 수 있을 거야. 아주 오랜 기간은 아닐 테니까.”
아폴로니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그 방법도 효과적일 수 있어.”
루아나는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부 자리를 노리면서 잠자리를 피하라고?
그녀의 황당해하는 눈빛을 본 아폴로니아는 무언가 고민이 덜 끝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아나는 깨달았다. 아폴로니아는 황제에게 접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루아나의 입장을 고려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몸을 팔며 살았던 그녀에게 같은 일을 다시 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말 몇 마디로 바르탄 지역을 쓸어버렸던 것도, 그곳에서 일하던 여인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도 모두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녀는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도의에 대한 자신의 원칙을 지켰고, 그 사실은 루아나에게 묘한 감동 같은 것을 주었다.
‘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루아나는 속마음을 굳이 꺼내지 않고 우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몇 달 만에, 그녀는 웬만한 귀족 영애가 갖출 만한 교양을 겉핥기식으로나마 다 쌓았다.
3개월이 지난 후, 황제의 탄신연이 열렸다.
“축하드려요 아버님.”
아폴로니아는 청순하고 하늘하늘한 연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그에게 절을 올렸다. 황제는 거의 보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사십 대 중반을 넘어선 그는 여전히 곧고 단단해 보였다. 전쟁터를 누비지는 않았어도 검은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맹수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아직 고모님은 오지 않으셨군요.”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루완 상단이 이데나 상단에 밀려 제국 남부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로 페트라는 사업에 매진하느라 황궁에는 자주 출입하지 않았다.
“바쁘다고 하더구나.”
단상에 앉아 연회장을 내려다보는 황제는 언제나 그렇듯 옆자리를 비워 두었다. 이는 페트라의 것이었다. 언제나.
“아버님의 만수무강을, 그리고 라잔에 있는 패리스 오라버니가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라요.”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형식적인 인사를 한 뒤 연회장 구석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앞으로의 구경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무희들의 춤이 있겠습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무희들이 등장했다. 지켜보던 아폴로니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은 그녀가 아일린 이데나의 이름으로 섭외한 무리였다. 그녀의 주문과 같이, 20명가량 되는 하늘하늘한 여인들은 서로 완벽히 하나 되어 움직였다.
움직임뿐 아니라 머리색도 옅은 갈색으로 일치하는 그들은 예쁘장했지만 서로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유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모습만큼이나 비슷한 동작을 선보였다. 조금 지루해질 정도로.
3분이 지났을까, 5분이 지났을까, 황제가 참지 않고 하품을 할 때쯤 공연의 분위기는 단번에 바뀌었다. 음악이 조금 고조되는 순간, 눈에 확 들어오는 붉은 의상을 입고 검은 곱슬머리를 한껏 풀어헤친 루아나가 그들의 정중앙으로 등장한 것이다.
“오오오, 독특한 무희로군요.”
“힘 있는 움직임이 눈에 확 띄네요.”
“갑자기 공연이 볼만해졌군요.”
그들을 지켜보는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아폴로니아의 세세한 지시에 따라 꾸민 루아나는, ‘라테아의 천국’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고고하고, 아름답고, 그러면서도 특유의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윽고 루아나가 무희들을 헤치고 연회장 깊숙이까지 뛰어든 순간이었다.
높은 단상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황제는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흥겨운 음악, 박수치는 사람들과 춤추는 무희들 뒤에서, 그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온몸은 누가 고정시켜 놓기라도 한 듯 루아나를 향해 있었다. 맹수를 닮은 황금안만이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좇았다.
루아나는 경쾌하게 움직였다. 어린 시절 춤을 배웠다더니 그 움직임은 과연 가벼웠다. 객관적인 실력은 전문 무희들에게 뒤떨어졌지만 그 모든 것은 정교하게 짜인 안무와 그녀 자신의 매력에 덮였다.
물론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발견한 이상, 황제는 루아나가 백만 명의 인파에 묻혀 있어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와아아아아!”
무희들의 춤이 끝났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그때까지도 황제는 커진 눈을 루아나에게 고정시킨 채 가만히 있었다.
“폐하, 이들은 이데나 상단의 상단주가 폐하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선별한 여인들입니다.”
시종의 설명에 따라 무희들이 하나둘씩 나서서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마지막 순서로 루아나가 고개를 숙이자 그는 드디어 굳어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그녀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름이 무엇인가?”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놀라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말투였다.
“세타라고 합니다.”
루아나는 아폴로니아가 지어 준 새 이름을 말했다. ‘사틴’을 동부식 억양으로 읽은 것이었다.
“세타…….”
황제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는 목소리뿐 아니라 온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가까이 오라.”
루아나, 아니 세타는 아폴로니아가 교육한 우아한 걸음걸이로 단상에 올라섰다. 황제는 그녀의 턱을 살짝 잡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세타라고 했나…….”
그는 세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매력적으로 살짝 헝클어진 검고 힘 있는 곱슬머리, 조금 낮은 코며, 어딘가 패리스와 닮은 섬세한 턱선. 그리고 화장으로 다 숨겨지지 않는 주근깨.
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듯한 매력적인 두 눈.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자, 황제는 홀린 듯 세타의 턱을 잡은 손을 앞으로 당겨 왔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아니!”
“어머,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무리 폐하라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황비님들도 옆에 계신데…….”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었음에도 세타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레 그의 진한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녀 자신이 오히려 더 갈구하는 듯, 적극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자, 황제는 비로소 세타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그녀의 일거일동을 주목하고 있었다.
“폐, 폐하, 이들은 이제 돌아가야 하옵니다.”
시종이 황급하게 아뢰었다. 이제 다른 무희들은 퇴장해 연회장에 보이지 않았다.
“그대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황제가 홀린 듯 세타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빙긋 웃었다.
“떠돌아다니는 무희인지라 갈 곳은 없답니다.”
황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손으로 그의 왼편을 가리켰다.
“나와 함께 연회를 즐겨다오.”
그가 가리킨 곳은 황좌의 옆자리였다. 황좌만큼이나 호화로운, 연회장 가장 상위에 있는 곳. 페트라가 언제나 앉는 바로 그 자리에, 세타는 사뿐히 몸을 걸치고 황제의 손을 잡았다.
* * *
“폐하, 리페르 공작 부인 드셨습니다.”
시종의 알림과 함께 페트라가 황제의 접견실로 들어섰다.
“폐하, 드릴 말씀이…….”
평소와 같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페트라는 말을 하다 말고 끊었다. 황제의 옆에서 차를 따르던 검은 머리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가 페트라와 차를 마시면서 제삼자를 초대하는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게 대체 누구…… 아니!”
페트라는 세타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나서 작게 소리쳤다. 그러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그녀를 다시 한 번 뜯어보았다.
“세타라고 한다. 나의 새로운 시녀다.”
“세타라고요?”
페트라는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 이름도, 그 얼굴도.
“폐하, 이 여인을 어디서 만나셨습니까?”
“탄신연의 무희였다. 이제 그녀의 출신은 중요하지 않아. 총애하는 시녀이니 그렇게 대하도록 해라.”
페트라는 당황한 와중에도 정신을 차렸다.
탄신연에서 황제가 어느 무희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그러나 그 외모가 사틴 아리에타를 완전히 빼다 박았다고 말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 사틴 아리에타를 아는 사람 자체가 황궁에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두 사람은 정말 닮아 있었다. 젊은 시절 리페르 영지에서 농사를 짓던 사틴의 얼굴을 페트라도 기억하고 있었다. 세타와 같은 머리며 눈동자에, 패리스가 유일하게 모계에서 물려받은 턱선까지도 그대로였다.
마치 사틴의 유령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그럴 수는 없지.’
페트라는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버렸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눈앞의 그녀는 사틴과 동갑이던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닮은 무희, 그뿐이었다. 페트라는 그녀를 잠시 잊기로 했다. 일단은 더 중요한 과제가 있었다.
“폐하, 상단 일로 상의를 드릴 것이 있습니다.”
페트라는 가지고 온 서류를 황제에게 내밀며 말했다. 남부에서 입은 사업적 손해를 수습하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다음 계책을 연구했고, 그 서류는 그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이데나 상단의 성장을 억제할 법안이 필요해요.”
황제는 말없이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페트라가 이미 만들어 온 그 내용은 꼼꼼하고 빈틈없었다.
“세세한 트집을 잡아 세금을 올리자는 이야기로구나.”
“세세한 트집을 잡지 않으면 올릴 방법이 없으니까요. 자유롭게 놓아두면 그들은 루완 상단을 집어삼킬 겁니다.”
“이데나 상단에 이것저것 빼앗겼다는 것은 알고 있다.”
황제는 두꺼운 서류를 사분의 일 정도만 훑어본 채 다시 내려놓았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데나 상단의 사업 방식이며 그 틀은 루완 상단과 거의 같아. 그들에게 세금을 받으면서 루완 상단의 세금을 올리지 않을 방법이 없지.”
“허나 폐하…….”
“페트라.”
황제는 어린 동생을 달래는 듯한 말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페트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데나 상단은 이미 매년 어마어마한 세금을 내고 있다. 제국의 경제에서 커다란 축을 담당하고 있고.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돕는다고 하여 평판이 좋은 가운데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높지.”
“상단에 충성심이 어디 있습니까.”
“평판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번 전쟁에 무상으로 최고급 무기를 공급한 것도 아일린 이데나 그 여자가 한 일이야.”
페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는 그녀가 들어서기 전부터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과한 청이기는 했으나 이토록 단호한 거절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황제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는 요소를 한 가지 떠올렸다.
“폐하…… 이데나 상단은 에핀하르트 대공을 후원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으셨지 않습니까.”
그녀의 조심스러운 언급에, 황제는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았다.
“아일린 이데나와 비체 백작의 모습을 함께 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페트라.”
황제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페트라는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거대한 상단을 정리할 수는 없다. 아니.”
그는 페트라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오히려 소문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하다. 에핀하르트의 그놈은 이제 우리가 쉽게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커 버렸어.”
페트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황제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셀 수 없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아 성장했다. 뼈아픈 실패였다.
“그를 후원하고, 수많은 귀족들이며 다른 왕국들과도 얽혀 있는 이데나 상단을 노골적으로 건드렸다가 닥쳐올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느냐? 자칫 잘못하면 반란은 금방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눌러야지요.’
페트라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말을 이었다.
“재물은 중요하나, 상단 간의 경쟁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시할 수는 없다. 루완 상단은 지금도 충분한 경쟁력이 있어.”
황제는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는 듯 서류를 뒤집어서 탁자에 두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페트라의 입술이 살짝 떨렸고, 황제와 같은 금빛 눈동자가 분노로 번뜩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조용히 앉아 있는 세타를 향했다.
“저 무희를 진상한 것이 이데나 상단주라고 들었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폐하…….”
“더 이상 말하지 마라.”
페트라는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아일린 이데나 그 망할 계집.
지난 몇 년간 황제에게 잘 보이려 애쓰던 그녀는 기어코 황제에게 저런 선물을 바쳤다. 저 가짜 사틴 아리에타는 겨우 며칠 만에 황제의 마음으로 쏙 들어간 듯했다.
그러나 페트라는 남 탓만을 하지는 않았다. 경쟁 상단이 있다 한들, 무리한 법안으로 그를 억누르는 것은 다소 과한 대처일지도 몰랐다. 그래,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황제는 여전히 그대로였으니까. 평생을 다져 왔던 두 사람의 유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녀는 순순히 탁자에 앉았다. 건너편의 세타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차가 식었을 듯합니다. 폐하. 다시 따라 드리지요.”
페트라는 평소와 같이 황제의 찻잔을 들어 옆에 있던 다른 잔에 따라 버리려 했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황제는 그녀의 손을 막았다.
“……폐하?”
“짐은 세타가 따라 준 차를 마시고 싶구나.”
표정 변화 없이 그대로 앉아 있는 세타와, 그녀를 바라보는 황제의 부드러운 시선. 이를 지켜보는 페트라의 가슴이 쾅 하고 내려앉았다.
* * *
“폐하, 공작 부인께서 언짢으셨나 봅니다.”
그날 밤, 황제의 옷을 갈아입히며 세타가 걱정스레 말했다.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황제는 웃으며 대답했다. 폭군이라 칭해지는 그는 세타의 앞에서 더없이 온화했다.
“일찍 잠자리에 드시지요.”
“그럼 너와 일찍 헤어져야 하지 않느냐.”
황제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세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옆에 있어다오.”
황제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두 사람이 만난 지 7일가량 지났지만 그들은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었다. 하지 말라던 아폴로니아의 지시를 떠올린 세타가 머뭇거리자 황제가 먼저 그녀를 배려했던 것이다.
“영원히 하지 않아도 좋아.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피할 수 있을 거라던 아폴로니아의 말은 맞았다. 살며시 손을 잡고 그녀를 감싸 안는 황제는 그녀에게 말도 안 되게 약했다.
“폐하.”
하지만 세타에게는 세타의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며칠간 깊이 생각하고 내린 그녀의 결론이었다. 세타는 아폴로니아를 존경했고, 그녀의 지시를 어길 생각은 없었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세타는 사람의 마음을 읽었다. 아폴로니아가 그녀에게 잠자리를 피하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그 방법이 더 좋아서가 아니었다. 험한 라테아 부부 밑에서 핍박받는 모습을 본 이상, 세타에게 비슷한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배려심은, 세타로 하여금 아폴로니아를 더욱 진심으로 따르게 만들었다.
“진심이신가요?”
세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나 아직 사내 경험이 없는 아폴로니아는 세타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녀의 능력을, 잠자리가 사내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그리고 잠자리로 권력자를 달래고 조종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저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거우신가요?”
세타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뜨겁게 불타올랐다.
“이리 오세요.”
서로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대로 뛰어들었다. 제국 최고의 권력자를 품은 밤. 세타에게는 일생에서 가장 황홀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