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황제의 여인 (1)
5년 후.
“폐하, 황녀 전하와의 혼약을 파기해 주십시오. 모든 책임을 왕국에서 지겠습니다.”
로뮈르 왕국의 제1왕자, 놀란 로뮈르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낭만에 젖은 잘생긴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황제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물었다.
“아드리안 리스 영애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여섯 번째였다. 아폴로니아는 여섯 번째로 파혼하는 데에 성공했다.
“황녀의 약혼자인 그대가 황녀의 시녀를 사랑해? 대륙의 왕자라는 놈들은 왜 다들 그 모양인가?”
아폴로니아는 최대한 진정성 있는 눈물을 흘리며 지난 5년간의 일을 떠올렸다. 첫번째 약혼자인 이카르트를 떠나보내자 곧이어 그 옆 나라의 첫째 왕자가 청혼을 했었다.
거대한 상선을 여러 척 소유해 부유했던 그 나라의 왕자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그는 순전히 부모의 욕심으로 등을 떠밀려 진심 없는 구애를 해 왔다.
아폴로니아는 적절한 시점에 왕자보다 두어 살 많은 일로나 아르펜 후작 영애를 시녀로 들였다. 다른 형제가 없기에 후작가의 친딸처럼 키워졌으나 일로나는 사실 아버지의 외도로 태어난 사생아였고, 무희였던 그 어머니는 일로나가 어렸을 때부터 남자의 마음을 어떻게 주무르는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교육해 왔었다.
일로나에게 어린 그를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착한 아들로 살아왔지만 마음속에는 낭만과 환상을 품었던 그는 순식간에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벅찬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던 그는 약혼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공개적으로 일로나와 입을 맞추었고, 아폴로니아와 파혼함으로써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에게 반항을 했다.
2년가량 지나서 다시 청혼해 온 세 번째 약혼자는 아폴로니아보다 열 살가량 나이가 많았다. 왕자는 아니었지만 다른 왕국의 대상단을 가진 무척 부유한 후작이었다.
워낙 급작스러운 청혼이라 아폴로니아가 미처 대비하지 못했건만, 총명한 아드리안이 기지를 발휘해 순식간에 그에게 접근했다.
“걱정 그만하세요. 이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어요.”
아드리안은 대수롭지 않게 아폴로니아에게 말했다.
실제로 그는 공략하기 어렵지 않았다. 허세가 심했던 그 남자는 여기저기 오지랖을 떨며 훈수 두기를 좋아했다. 아폴로니아는 그가 멋진 모습으로 나서서 누군가를 구원하고 영웅으로 주목받는 것에 환상을 가지고 있어 종종 불필요한 싸움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아드리안은 연약하고 가련한 모습으로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드리안의 눈물 많은 모습만으로 그녀가 누군가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을 거라 넘겨짚은 그는,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술을 퍼마시더니 아폴로니아를 비롯한 황실을 싸잡아 모욕했다. 그러고 나서는 패리스의 주먹에 맞아 연회장 바닥에 나뒹굴 때까지 설교를 멈추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일을 저지르고 나서도 아드리안을 얻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황제의 미움을 너무 많이 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폴로니아는 일을 조금 덜었다.
다만 그 사건 이후로 아폴로니아의 시녀직은 인기를 얻었다. 신분이 높지 않은 아드리안조차도 부유한 고위 귀족의 애정을 얻을 수 있다면 고위 귀족의 여식들은 얼마나 쉽게 신랑감을 구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자들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네 번째 약혼자는 작은 나라의 젊은 국왕으로, 무척 현실적인 사람이기에 결혼에 있어서 낭만 같은 것을 좇지 않았다.
그는 여자를 무척 좋아해서 황실의 시녀들이며 하녀들 여럿과 몰래 잠자리를 가졌지만 절대로 파혼할 생각이 없었고, 그들과는 오로지 즐기는 관계로 남았다.
황제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아폴로니아의 남편이 그녀에게 충실한지는 그와 상관없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폴로니아는 시녀인 안느를 보내 그를 유혹하도록 했다.
그녀는 평생의 꿈이 왕비였고, 무척 목표지향적인 사람이었다. 화끈하되 뒤끝 없는 하룻밤을 보내기로 약속한 그들은 결국 잠자리를 함께했는데, 안느의 ‘실수’로 침실을 잘못 찾아 아폴로니아의 침대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우연히’ 여러 귀족 영애들을 자신의 방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하려 했던 아폴로니아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그들을 발견하고 눈물을 뿌리며 뛰쳐나갔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황제는 황실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파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변방에서 나름의 영향력과 권력을 가졌던 안느의 가족들은 국왕에게 딸과 결혼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안느는 자신이 원하던 해피엔딩을 맞아 국왕과 함께 떠났다.
뭐,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는 걸 보면 금슬이 괜찮아 보였다.
그다음부터는 비슷비슷했다. 아드리안의 활약 덕분에 아폴로니아는 어렵지 않게 약혼자들을 정리했다.
“대체 이게 뭐냔 말인가!”
황제가 다시 소리를 질렀고 아폴로니아는 회상에서 깨어났다.
“아버지, 들어 주세요.”
그녀는 적당한 때에 황제에게 말했다. 목소리를 떨면서, 눈은 내리깔면서. 여러 번 해 보았기에 이제는 쉬웠다.
“둘의 사랑을 축복해요.”
“니아.”
“저는 왕자와 결혼 안 할래요, 아버지 곁에서 평생 살고 싶어요.”
아폴로니아는 최대한 진정성을 갖추어 말했다.
“저, 저는, 정말…… 괜찮아요.”
황제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혐오하며 혀를 찼다. 그러고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저는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두 사람이 잘 살면 좋겠어요.”
그녀는 연기에 집중하면서도 한편으로 다시 회상에 잠겼다. 아폴로니아는 시집가는 비앙카와 일로나, 안느에게 각각 금은보화를 한 짐씩 안겨 주었다.
황제는 화가 나서 매달 별궁으로 가는 예산을 삼분의 일로 줄여 버렸지만 때는 늦었다. 아폴로니아의 관대함은 그들 모두를 감동시켰고, 이제 왕비가 된 그들, 그리고 그 남편들은 아폴로니아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있었다.
황제와는 사이가 틀어졌지만.
“이런 미련하기 짝이 없는!”
황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폴로니아를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지난 5년간 그는 더욱 잔인해졌다. 상황이 계획과 달리 흘러가거나 무언가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죄 없는 아랫사람을 불러 채찍질을 하는 일이 흔했다.
그는 억지로 취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 소모적인 전쟁을 벌였다. 외부에 적이 있으면 내부의 단결이 쉬울 것이라는 단기적인 판단 때문이기도 했고, 선황 때와 달라진 정책에 반발하는 왕국들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폭력성에 기반한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황제는 전쟁을 위해 세금을 올리고 강제로 징병을 했다. 전쟁으로 죽어 나간 자들의 수가 많았기에 민심은 갈수록 흉흉해졌고, 과거 명예로운 대장군이었던 그는 이제 폭군이라는 호칭을 더 자주 듣고 있었다.
황제의 곁에서 그를 지지하고 이득을 취하는 자들과, 폭정에 불만을 품고 그에게 반발하는 자들 사이의 갈등 또한 심화되었다.
“썩 꺼져! 보고 싶지 않다!”
그는 버럭 소리를 한 번 지르고는 자리를 물렸다. 아폴로니아는 뛰쳐나갔고, 둘러서 있던 대신들, 시녀들은 모두 혀를 차며 황녀의 미래를 안타까워했다.
“불쌍한 황녀 전하, 너무 순하기만 하셔서…….”
“순한 건지, 바보인 건지 모르겠어요. 아드리안을 아직도 내치지 않았다니.”
“남자들 마음 하나 붙잡지 못하면 황녀가 다 무슨 소용이야.”
“이 정도면 전하께서도 당할 만해서 당한 거 아닌가.”
한심한 황녀.
눈앞에 만찬이 차려져 있는데도 그걸 떠먹지도 못하는 모자란 사람. 그들은 아폴로니아가 자리를 벗어난 후에도 한참을 쑥덕거렸다.
* * *
“다행이야. 이번에는 아버지가 날 죽이려고 할 줄 알았네.”
정원에서 만나 함께 별궁으로 돌아온 아드리안게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마야가 은퇴한 지금 아드리안은 아폴로니아가 가장 가까이 두는 시녀였다.
“요즘 평판도 좋지 않은데 악명을 더 높이기 싫을 테니까요. 전하를 시집보내고 좋은 우방을 얻어 대공 전하를 더 견제하겠다는 생각도 점점 강해지고 있을 테고요.”
“그렇긴 해.”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서랍에서 붓과 물감을 꺼내고 소매를 걷었다. 길고 하얀 팔에는 울긋불긋한 화상 흉터가 있었고, 그 끝부분은 번지기라도 한 듯 희미했다.
“소매 때문에 자주 번지네.”
아폴로니아는 분홍빛 물감에 붓을 찍어 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붓의 움직임에 따라 번졌던 화상 흉터가 다시 선명해져 갔다.
“긴 소매만 입으시니 아무도 안 볼 텐데요.”
“확실히 하려고 그래.”
아폴로니아는 능숙하게 흉터를 완성했다. 5년 동안 해 왔기에 익숙한 일이었다.
5년 전 화재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그림 공부를 하겠다며 미술 선생을 섭외했다. 황제의 마음에 드는 얌전한 취향이었기에 아무런 무리도 반대도 없었다.
그녀가 결국 찾아온 화가는 연극 업계에서 분장을 전문으로 하는 자였다. 그녀는 그로부터 가짜 흉터를 그리고, 지우고, 다시 똑같이 그리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아무도 그녀의 팔에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아폴로니아는 치밀했다. 매일 목욕 후 바로 붓을 집어 흉터를 그려 냈다.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도록. 덕분에 아폴로니아는 황제와 페트라의 견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폐하께서 전하를 해칠 일은 없을 거예요. 전하는 선황녀 전하를 닮은 외모 때문에라도 은근히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는걸요.”
“으응…….”
아폴로니아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듯, 그 대답은 건성이었다.
“무슨 생각 하시는지 맞춰볼까요?”
아드리안이 웃으며 물었다.
“응?”
“이제 폐하 곁에 사람을 심어야겠다는 생각.”
“어…….”
아폴로니아가 벙찐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은 간혹 독심술이라도 익힌 것처럼 그녀의 생각을 그대로 읽어 냈다.
“위기의 순간에 전하의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폐하 가까이에 심을 때가 됐다. 이런 생각이셨던 거죠?”
“어…… 어떻게 알았어?”
아드리안은 환하게 웃었다. 아폴로니아의 약혼자들을 홀렸던 바로 그 예쁜 웃음이었다.
“전하께서 지난 5년간 적임자를 찾으셨던 것도 알아요.”
기가 막혔다.
조심하느라 아무에게도, 정말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던 사안이었다. 물론 아드리안에게 관련 심부름을 좀 시켰지만 원인을 알려 준 적은 없었다.
“너 요즘 벨라들한테 주술 배우니?”
진지한 질문이었지만 아드리안은 까르르 웃었다.
“안 배워도 주인 마음 같은 건 잘 안답니다. 제가 전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아드리안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아폴로니아의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연회장에서 울며 뛰쳐나오느라 조금 헝클어진 상태였다.
“며칠 전에 제가 드린 초상화들을 유심히 보시는 것 같아서, 그 안에 적임자가 있나 보다 했어요.”
“대체 언제부터 내 의도를 다 알았던 거니?”
“전하께서 폐하의 첫사랑을 닮은 사람을 찾아오라고 하셨을 때요.”
“뭐야, 처음부터 알았네.”
아폴로니아는 픽 웃었다. 확실히 그렇게 말하니 자신의 의도는 빤했을 것 같았다.
“제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요.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초상을 달라고 하시지 않나, 그걸 닮은 사람을 온 대륙을 뒤져서 찾아내라고 하시지 않나.”
아드리안은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고는 조금 안쓰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전하다워요. 그 상황에서 들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써먹다니.”
“나와 사틴의 아들.”
“사틴은 황제 때문에 죽었어. 가족이 반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멸문을 당했다고.”
아폴로니아는 아홉 살 때 황제가 엘레니아 황녀에게 했던 말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5년 전부터 온 제국을 뒤져 반역자인 아리에타 가문을 알았던 노파 한 명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노파는 사틴의 아버지가 리페르 영지의 소작농이었으나 영달을 추구한답시고 어느 귀족의 시종으로 들어가 온갖 불법적인 잔심부름을 했었다고 말해 주었다. 불행히도 심부름 중 상당 부분은 선황에 대한 반역 도모를 돕는 것이었고, 결국 그 귀족은 물론 반역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가가 멸문당했다.
사틴의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사틴은 당시 영주였던 가이우스의 도움을 받아 어딘가로 숨었으나, 곧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붙잡혀 처형당했단다.
아폴로니아는 그 말을 전해 듣고 씁쓸하게 웃었다. 짐작은 했었지만 엘레니아 황녀를 만나기 전까지 황제에게는 나름의 순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폴로니아는 황제의 마음속에서 패리스는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이고, 자신은 원수의 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명확히 깨달았다.
그녀는 사틴의 얼굴을 노파가 말하는 대로 복구했다. 그녀가 섭외한 여러 화가들이 수차례 실패를 겪은 다음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모습이 정확합니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에요.”
그다음부터는 온 제국, 아니 대륙을 뒤져서 그 초상과 닮은 여자를 찾았다. 황제의 마음에 들 만한 사람으로. 뒤틀린 그 마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지만 아폴로니아는 확신했다.
그는 사틴을 잊지 못했다.
황비들과 어울리고 그들 중 일부를 총애했지만 처음 들어왔던 5명의 황비들 중 쫓겨나거나 죽지 않고 무사히 남은 것은 겨우 2명이었다. 황제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을 이용하고 버렸고, 새로운 사람을 들여 그들을 대체했다.
‘마음은 주지 않았다는 거겠지.’
패리스를 볼 때마다 그녀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패리스에게 향했다.
아폴로니아는 이를 대신 빼앗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제국 곳곳에 사람을 보냈고, 결과적으로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루아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다.
“다시 한 번 보여 주겠니?”
아폴로니아는 붓을 집어넣은 뒤 아드리안이 건넨 초상 두 장을 들여다보았다. 하나는 사틴의 것, 하나는 루아나의 것. 두 얼굴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수도 부근 바르탄 지역에서 몸을 파는 여자예요. 험하게 자라서 황실에서 어떨지 모르겠어요.”
“바르탄에서 몸을 판다…….”
아폴로니아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가 알기로 그 지역은 매춘업이 없어야 할 곳이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다시 루아나에게 집중했다. 몸을 파는 여자.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가 보았던 어떤 후궁들과도 다를 것이다. 애초에 사틴 아리에타도 귀족이 아니었다.
“패리스 전하와도 조금 닮았어요. 이목구비가, 특히 턱선이요.”
아드리안이 고개를 숙여 초상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눈 색깔은 패리스 전하의 옛날 모습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이런 눈이 햇빛을 받으면 연갈색으로 빛나기도 하죠.”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패리스는 당연하게도 황실의 특징을 조금도 타고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밝은 금발로 염색을 했던 까닭에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이 패리스의 원래 머리색이라 여겼다.
다만 신기한 것은 5년 전쯤부터 연갈색이었던 그의 눈동자가 변했다는 것이었다. 아폴로니아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붉은색에 금빛이 섞인 것으로.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황제는 황실의 특징이 뒤늦게 발현된 것이라고 소문을 냈다. 아폴로니아 또한 그 경위를 알 수 없었지만 당장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카엘리온의 소식은?”
그녀는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아드리안에게 다른 이야기를 물었다. 동시에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지시하는 것은 아폴로니아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아드리안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감탄했고 한편으로는 신기해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 그 모습이, 묘하게 아폴로니아의 천적 같은 페트라 리페르 공작 부인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친척이라 닮은 걸까.’
“안 그래도 전서구를 통해 긴 서신이 왔어요.”
“뭐라고 해?”
아폴로니아는 아드리안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어떤 기밀 사항도 아드리안에게는 허용되었고,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바쁠 때에는 서신 같은 것들을 미리 읽어서 내용을 알려 주기도 했다.
“전쟁이 거의 끝났다고요. 마지막으로 남은 라잔을 상대로 싸워야 하지만 그들의 군사력은 아주 약하대요.”
1년 전, 제국은 황제에게 반발하는 주변 제후국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전쟁을 일으켰다.
5년 사이에 황자에서 황태자가 된 패리스는 총사령관에, 전쟁 경험이 많은 카엘리온은 부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제국군은 짧은 시간에 다섯 개 제후국을 모두 휩쓸어 대승을 거두었다.
황제는 이를 패리스의 공로로 포장하였으나 사실 대부분의 제국민들은 실제로 공을 세운 것이 카엘리온임을 알았다. 정확하게는, 카엘리온과 그 부관인 유리엘 비체 백작의 공로라는 것을.
두 사람은 지난 몇 년간 수없이 많은 위기를 함께 겪었다. 황제와 페트라의 암살 시도만 수십 번이었다. 그럼에도 카엘리온이 죽지 않은 것은 그가 어디에 있든 유리엘이 귀신처럼 나타나 앞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암살 시도가 실패하자 황제는 두 사람을 전쟁과 전투로 내몰았다. 그들은 마물 격퇴에 동원되고, 변방에서 전쟁을 치르고, 북부의 국경을 지키며 많은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카엘리온과 유리엘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몇 번이고 살아서 돌아왔다. 그리고 매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세력을 넓혀 갔다.
이번 전쟁 또한 하나의 위기였다. 패리스는 틈만 나면 두 사람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번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다시 한 번 영웅으로 이름을 알렸다.
덕분에 유리엘의 신분은 백작까지 상승했다.
제국에서 제일가는 두 전사들. 그들은 또한 제국 최고의 미남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어디 봐.”
아폴로니아는 카엘리온의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녀가 전쟁의 종결 외에도 기다리는 소식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아드리안은 잘 알았다.
“뭐, 그게 다네.”
“다른 일은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녀가 마지막 빗질 한 번으로 아폴로니아의 머리 손질을 다 끝냈다.
“파혼도 잘 끝났으니 여행을 좀 가 볼까?”
아드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뜻을 알아채고 미소 지었다.
“어디로요?”
“수도 부근 바르탄 지역.”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두 초상을 보고 있었다.
“루아나를 만나러 가야겠다.”
“저는요?”
아드리안이 묻자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었다.
“너도 같이. 하지만 너는 먼저 해야 할 심부름이 있단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드리안은 로브를 챙기고 있었다.
“안 그래도 보낸 녀석이 못 미더워서 직접 가려고 했답니다.”
이번에는 아폴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진짜로…….”
“사람 마음을 읽는 주술을 배웠냐고요?”
아드리안이 아무렇지 않게 되묻자 아폴로니아의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가 더 커졌고, 그 속에 품은 황금빛이 선명해졌다.
아드리안은 그 표정을 볼 때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것을 넘어 순수하게 감탄하는 주인이라니. 아폴로니아는 항상 그랬다. 냉정할 때에는 철혈로 만든 사람 같다가, 가끔은 어린아이 같았다.
“금방 다녀올게요, 전하.”
아드리안이 미소를 띠며 방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