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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어떤 청혼 (14/34)

Chapter 12. 어떤 청혼

“전하.”

아폴로니아의 부름을 전달받은 유리엘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여기저기 긁힌 상처를 제외하면 멀쩡했다. 속마음은 거의 죽어 가고 있었지만.

3일 전이었다. 불 속에서 걸어 나와 숲 속에서 기절한 아폴로니아를 발견한 것은. 그녀를 둘러싼 것이 살수들이라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이미 그의 검은 그중 한 명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전부 정리하고 나서 간신히 그들을 페드로의 집 안으로 옮겼지만, 그리하여 아폴로니아의 몸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지만 유리엘은 알았다. 시드를 잃은 아폴로니아는 평생 이 날을 기억하고 후회하고 괴로워할 것이라는 것을.

“깨어나셨군요.”

그는 애써 걱정을 숨긴 채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침대에 앉아 작게 웅크린 그녀를 본 순간, 그의 얼굴은 괴로움으로 무너져 내렸다.

“시드가 죽었어.”

아폴로니아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엘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허공을 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는 당장 떠오르는 유일한 말을 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시드가 죽기 전에 도착했어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그들만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긴 했을까?”

아폴로니아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강인하고 총기 넘쳤던 붉은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텅 빈 것 같은 그 모습이 유리엘의 심장을 아리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어떤 정도 없다는 것은 이로서 확실해졌어. 이번에는 대공을 죽이는 데 이용했으니,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없지 않겠지.”

“전하.”

“리샨에서 광산을 찾았을 때, 나는 승부가 내 쪽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너무 약했던 거야…… 시드를 지키지도 못할 만큼.”

허공을 보던 아폴로니아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유리엘이 침대 가까이로 다가가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렸다. 무언가를 그로부터 숨기려는 듯.

유리엘의 심장이 다시 한 번 내려앉았다.

아폴로니아는 울고 있었다. 언제나 아름답게 반짝였던 그 눈에서 흐르는 것은 분명히 눈물이었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아폴로니아는 조금 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유리엘에게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유리엘은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 주고 싶었다. 그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그 또한 뜻대로 해 주고 싶었다.

그는 오른팔로 조심스럽게 아폴로니아의 어깨를 감쌌다. 순간적으로 그녀가 움찔하고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팔을 타고 약한 떨림이 전해지는 순간 그는 몸을 더 기울여 양팔로 그녀를 껴안았다.

“아무것도 못 보았습니다.”

그가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가녀린 어깨의 떨림이, 등을 타고 그의 손으로 전해지는 흐느낌이 그를 괴롭혔다.

“잠시만 이렇게 있고 싶습니다.”

유리엘이 다시 한 번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폴로니아의 양손이 매달리듯 유리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으읍…… 윽…….”

그가 절대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확신이 그녀의 긴장을 풀었는지, 아폴로니아는 결국 작게 소리 내어 흐느꼈다. 유리엘의 어깨에, 가슴에 아이처럼 온몸을 파묻은 채로.

유리엘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서로에게 매달렸다. 몇 분이 지났는지, 몇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도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아폴로니아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유리엘을 다시 밀어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리엘과 시선을 맞추었다. 눈물은 이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초점은 여전히 정확하지 않았다.

“유리엘…… 난 어떻게 할까?”

그녀는 쉬어 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혼인을 통한 탈출? 난 타국의 왕비 같은 것은 되고 싶지 않아. 혼인을 한다 한들 그 대상이 나에게 온전히 힘을 실어 주지도 않겠지. 제국에 남아 있는 이상 고모님의 눈은 항상 나를 견제할 거고…….”

그녀는 시선을 반쯤 내리깔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유리엘은 지긋이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슬픔에 잠긴 그녀를 보는 것은 죽을 것처럼 괴로웠지만, 그 처연함에는 평소와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핏기 없는 입술도, 창백한 뺨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살고 싶으십니까?”

끝없이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결국 유리엘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별생각 없는 듯 가벼운 말투였으나 그 눈에는 어떤 안타까움, 그리고 갈망이 담겨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행복하시겠습니까? 외국의 왕비가 되지 않고 그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있다면요?”

토해 내듯 묻는 그의 질문에 두 사람은 눈을 맞춘 채 길게 침묵했다.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이 무엇을 제안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는 아폴로니아를 데리고 떠나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로부터, 핏줄의 굴레로부터 도망칠 수 있도록. 어머니인 엘레니아 황녀가 한때 꿈꿨던 것처럼.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태어나고 자란 황궁을 떠나 숨어 산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녀는 언제나 황위를 향해 있었다.

“그건 죽는 것과 다르지 않아.”

바다 같은 색의 눈에 희미한 희망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아폴로니아가 살고 싶은 이유는 그와 함께하는 삶 따위가 아니지 않은가.

유리엘은 금방 쓴웃음을 지었다.

“전하의 마음을 스스로 확인하셔야 할 것 같아서 물어보았을 뿐입니다.”

“뭐?”

“전하.”

유리엘은 조금 전 품었던 갈망을 얼굴에서 깨끗하게 지워 냈다.

“간단합니다, 전하. 혼인이 싫다면, 빠져나갈 방법을 찾으십시오. 약하다면 힘을 기르시고요. 견제가 걱정이라면 견제를 피하십시오. 페트라 리페르를 죽이든, 아니면 그녀가 집중할 다른 대상을 이용하든지요.”

그는 마치 어린아이의 응석을 떨치듯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조금 전 그녀의 흐린 눈동자와 창백한 얼굴에 함께 무너지던 모습은 없었다.

“유리엘…….”

“시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사실상 그가 어린 전하께 충성을 맹세했을 때부터 정해졌던 운명입니다.”

그는 멍한 표정의 아폴로니아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그 시체를 뒤로하고 불타는 건물을 빠져나온 것은 아직 전하께서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뜻 아닙니까?”

건방진 태도였다. 그러나 지금 아폴로니아에게는 그와 같은 건방진 다그침이 필요했다.

“목표가 확실하다면 고민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해 오셨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유리엘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의연하게 돌아섰다.

찰칵.

그의 등 뒤로 나무로 된 작은 문이 닫혔다. 아폴로니아를 다시 한 번 혼자 남겨 둔 채.

유리엘이 남긴 말은 아폴로니아의 머리에 남아서 울렸다.

“혼인이 싫다면 빠져나가고, 견제가 걱정이라면…… 그녀가 집중할 다른 대상을 이용한다…….”

멍했던 그녀의 표정에 아주 미세하게 빛이 돌아왔다.

그의 말이 옳다. 그녀는 살 것이다. 타국의 왕자와 결혼하지 않으면서, 힘을 키우고, 또…….

아폴로니아의 머릿속에 한 가지 계획이 떠올랐다.

* * *

5일째 되는 날.

아폴로니아는 다리에 부러진 것 외에 대부분의 부상에서 회복되었다. 애초에 화상은 입지 않았고 쓰러진 책장과 부딪히고 뒤에서 날아오는 파편에 맞은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페드로 리스도 아드리안도 그녀의 회복력을 보았으나 놀란 티는 내지 않았다. 덕분에 아폴로니아는 심적으로 조금 더 편안할 수 있었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무렵까지 아폴로니아는 방을 나서지 않았다. 다만 끊임없이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그 기간 동안 머리는 말도 안 되게 싸늘했다. 가슴에서 차오르는 분노와 대조되게도. 아폴로니아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죽은 시드를 위해서도.

그녀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어딨지?”

“네? 유리엘 님은 옆방에서 대기하고…….”

그러나 그녀가 찾는 것은 유리엘이 아니었다.

“카엘리온은 어딨지?”

“정신은 차리셨는데…… 전하, 더 쉬세요! 어딜 가시려고 그러세요?”

기겁한 아드리안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폴로니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를 부축해 줘.”

아드리안이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문 쪽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아!”

완전히 치료되지 않은 오른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몸이 휘청거렸으나 다시 주저앉지는 않았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어깨를 내주었다.

“제발 천천히라도 가세요.”

두 사람은 문을 나서서 건너편의 방으로 향했다. 작은 집이기에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았다.

철컥-

아폴로니아는 노크 없이 방문을 열었다.

방 안 침대에는 팔이며 다리에 온통 붕대를 감은 검은 머리 소년이 앉아 있었다. 회복력이 일반인보다 뛰어나다고는 하나 아폴로니아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멍했던 그의 눈이 아폴로니아를 보는 순간 미세하게 빛났다.

“……전하?”

“일어났구나.”

아폴로니아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말했다. 카엘리온의 눈이 커졌다.

“……예.”

“들었겠지. 네 가족은 이제 없다. 물론…….”

그녀는 차갑게 말하려 했으나 말끝이 흐려졌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야.”

카엘리온은 잠시 몸을 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일련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카엘리온.”

아폴로니아는 카엘리온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우린 지금 5일째 실종된 상태야. 황실에서는 우리가 저택에서 화재로 죽었다고 여기고 있을 거다.”

그녀는 카엘리온이 대답할 틈도 없이 설명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가면 넌 문에 들어서는 순간 죽을 수도 있지. 영지로 돌아가면 조금 더 살겠지만 언제나 공격당할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할 거야.”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겠으나 타인의 입으로 듣는 것은 느낌이 다를 것이다.

“나는 너를 살린 것을 후회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 사과라도 하려는 듯 입술이 움직였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꿨어. 그리고 너를 살리고 나도 살 방법이 떠올랐지.”

그녀는 카엘리온의 침대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공포와 충격, 슬픔, 그리고 분노 같은 것이 뒤섞인 얼굴은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선택하렴.”

아폴로니아는 드디어 준비했던 말을 했다. 놀란 카엘리온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에게 선택지는 딱 두 가지야. 지금부터 죽는 순간까지 모든 행동에 있어서 내 지시를 따르며 너의 부모님을, 그리고 나의 가족들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하거나.”

그녀의 말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친족에 대한 정도, 고아가 된 그에 대한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죽거나.”

긴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카엘리온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아폴로니아를 응시했다. 자세히 보면 여전히 두려움이 들여다보였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지금 결정해. 내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너를 굳이 살려 둘 이유도 없으니까.”

그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아폴로니아는 간접적으로 황위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것과 닮은 열다섯 소년의 붉은 눈동자는 그녀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다만 그의 호흡이 조금 더 거칠어진 것 같았다.

타닥-

카엘리온이 대답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순간, 문 밖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벽난로에서 나는 소리였지만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흠칫 몸을 떨었다.

“그날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니?”

아폴로니아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할 것이다. 그는 눈앞에서 부모가 죽는 모습을 지켜봤으니까. 아폴로니아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잊어서는 안 돼. 절대로.”

그러나 마음과 달리,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잔인할 정도로 차가웠다. 카엘리온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폴로니아는 그의 양쪽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을 각인시켜야 했다.

“잊지 마렴. 너의 부모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네가 어떻게 될 뻔했는지, 그리고…….”

그녀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말을 이었다.

“너를 구해 준 것이 누구인지.”

떨리는 그의 금적안에서 다시 한 번 공포심이 차올랐다. 아폴로니아는 자신의 눈이 그와 다르게 의연한 모습이기를 바라며 말을 이었다.

“너를 구해 준 것이 누구인지. 살기를 원한다면 한순간도 잊지 마렴. 네 목숨은 이제 내 거고, 언제든 다시 가져갈 수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길고 긴 침묵이 방을 채웠다.

“……전하.”

이윽고 카엘리온의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소년답게 청아했던 전과 달리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몸을 아폴로니아 쪽으로 조금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들릴 듯 말 듯 가늘게 이어지는 그의 말이 귓가를 간지럽힐 지경이었다.

“……에핀하르트를, 제 모든 것을, 전하께 드리겠습니다.”

아폴로니아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고립, 충격, 고통과 공포. 결국은 그것들이 열쇠였을까.

그녀는 많은 것을 잃었으나, 드디어 온전한 그의 복종을 얻어 냈다. 황실과 가장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대공의 복종을.

“그럼 이제 저는 어떻게 됩니까?”

카엘리온이 물었다. 아폴로니아에게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빠르게 차분해졌다.

“거처를 마련해 줄 테니 거기 머무르면서 상처를 치료하도록 해. 아직 너와 나는 할 이야기가 남았으니까. 회복이 끝나면 대공령으로 돌아가서 늦게나마 네 부모님의 부고를 알리고 장례도 화려하게 치러 드려. 절차에 맞게 황궁에도 소식을 알리고.”

“돌아가면 죽을 위기에 노출될 거라면서요? 몸을 사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잘못 생각해 왔던 것이 바로 그거야.”

아폴로니아는 쓰게 웃었다. 수년간 몸을 사리면서 배운 것은 페트라의 끈질김뿐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사리면 더 조용히 죽을 뿐이야. 너는 모두의 이목을 끌어서 아버지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을 갖추어야 해. 사냥 대회 우승자 따위가 아닌 더 큰 명예를 노려라.”

“제가 어떻게…….”

“제국 전체가 네 능력을 알 수 있도록. 네가 아폴론의 후예이자 선황을 닮은 황족임을 알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패리스의 경쟁 대상으로 떠올라야 해.”

카엘리온의 눈이 커졌다. 그의 아버지가 평생 피해 왔던 일을, 아폴로니아는 정답이라고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해내야 해. 아버지가 예상할 수 없도록. 너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배가되고, 너를 죽이는 것이 전쟁처럼 어려운 일이 되어야 해.”

“전하.”

눈을 피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말씀을 들으니 제게 황위를 권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 번도…….”

“그 모양을 만드는 것이 계획이야. 아버지도, 고모님도 너에게 집중하느라 나를 잊어버리도록. 하지만.”

아폴로니아는 카엘리온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서늘하게 말했다.

“모두가 네가 황위를 원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절대로 네 눈에 황좌를 담아서는 안 돼.”

그건 내 거니까. 아폴로니아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굳이 꺼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카엘리온은 그녀의 눈을 마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약속합니다.”

“좋아.”

“그러나 세력의 구축에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인맥도, 자금도. 대공령은 부유하지만 당장 제 이름을 알리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제 검술 스승은 며칠 전 죽어 버려서 수련을 할 방법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최고의 스승이 갖추어졌다고 한들 제국의 영웅으로 떠오르는 것은 단순히 수련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정보는 밖으로 알려져야 했고 그런 일에는 자금이 들었다.

“모두 내가 제공할게. 자금도, 네 교육도 도와줄 수 있어. 너는 제국에서 가장 강한 전사이자 가장 현명한 영주가 될 거야. 패리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도록.”

아폴로니아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눈앞의 이 소년은 그녀가 말한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의 능력은, 잠재력은 이미 검증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아폴로니아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 세력이 온전히 구축되면…….”

아폴로니아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다지 뱉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실행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동안 몇 번을 다시 정리해도 이것 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결혼하자.”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말을 뱉은 순간, 이틀 전 울고 있던 그녀를 한참 동안 꽉 안아 주었던 유리엘의 모습이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카엘리온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어붙었다. 방 안에는 다시 길게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물러서지 않고 그의 시선을 그대로 받았다.

“……진심입니까?”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네가 만들어 놓을 그 세력을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흡수할 방법이자, 패리스에 대적할 만한 정통성을 갖출 방법이기도 하지. 너와 나는 모두 아폴론의 피를 받은 황족이니까.”

낭만이라고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청혼이었다. 그러나 좋든 싫든 두 사람의 운명은 이미 엮여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아예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공고하게 엮이자는 것이 아폴로니아의 생각이었다.

황족이 귀한 제국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많은 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진짜로 부부 생활을 하자는 의미가 아니야. 아버지와 리페르 일가가 제거되면 너는 대공령으로 내려가도록 해. 대공의 신분은 계속될 테니 그 때는 자유롭게 살아.”

그녀는 처음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 자신도 어렸지만 아직 열여섯 살 생일도 지나지 않은 카엘리온에게 지나친 부담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니?”

카엘리온은 여전히 동그란 눈으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 몇 초가 지나자 그는 드디어 온전히 그녀의 제안을 이해한 것 같았다.

“답은 아까 드렸을 텐데요.”

생각이 정리된 듯, 그의 대답은 의외로 차분했다.

“제 모든 것을 전하께 드리겠다고요.”

놀랍게도 그는 미소를 지었다. 얼굴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기에 힘겨워 보였지만 그렇다고 억지스러운 웃음은 아니었다. 그러고는 아폴로니아의 손끝을 살짝 잡아 자신의 이마에 대는 방법으로 예를 갖추었다.

“……언젠가 대공령에서 가장 좋은 보석으로 결혼반지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3일 전 가족과 수하들을 잃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차분함이었다. 그것은 허세도, 억지도 아니었다. 그저 타고난 기품 같은 것이었다.

“쉬어.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아폴로니아는 아직까지 손끝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내려놓고 방문을 나섰다. 끝까지 그녀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전하.”

문 밖에서 기다리던 아드리안이 그녀를 맞았다.

“내가 이틀 전 말한 건은 어떻게 됐지?”

억지로 그녀를 쉬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아드리안은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화장 기술에 대한 건이라면 저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익혔어요.”

“그 정도면 됐어. 넌 원래 손재주가 좋은 데다가 아버지의 눈썰미는 이런 쪽으로 발달한 건 아니니까.”

아폴로니아는 아드리안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얌전히 방 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황제와 페트라를 속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두 사람 중 누구도 아폴로니아에게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 * *

“기적이 분명합니다, 폐하.”

황궁의 페드로 리스가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아폴로니아의 침실에 둘러서 있었다. 황제로서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딸의 방에 걸음한 것이었다. 주변에는 황궁에 머무르던 중에 문병차 아폴로니아를 방문한 몇몇 귀족 여인들과 시녀들, 그리고 황궁의 페드로 리스가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전하께서는 팔과 다리에 화상을 입으셨지만 그 외에 다친 부분이 없습니다.”

“화상이 아직 남아 있는가?”

황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불에 다친 것은 그렇다 쳐도 회복력 좋은 그녀의 몸에 화상이 남아 있다니.

“송구하오나 흉터는 평생 갈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폴로니아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팔을 걷어 보아라.”

그녀는 순순히 시키는 대로 소매를 걷어 올렸다.

“허…….”

페드로 리스가 말한 것과 같이 그녀의 팔목에는 불긋불긋 보기 흉한 상처가 있었다. 몇 년이 지나 다 아문다고 해도 완전히 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황제의 기분은 그날 벌써 수차례 오르락내리락했다.

숲 속의 저택이 화재로 전소되어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 죽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드디어 앓던 이를 뺐다는 생각에 기뻤다. 그 사건에 투입된 인력이 전부 죽었다는 사실은 의아했으나 시드 바이안을 비롯한 잘난 기사들이 한 짓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살아서 돌아왔다. 호위도 없이 황궁으로. 순간 그는 황족 중에는 화기에 강한 자들도 극히 드물게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설마 아폴로니아가?

그러나 그녀의 화상 자국을 보니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그뿐인가. 태양신 아폴론의 후손이라 떠받들어지는 황족이 영구적인 화상을 입었다는 소문이 여러 귀족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녀에게 남아 있던 조금의 권위도 사라질 것이다.

화상으로 흉까지 진 황녀는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황위를 건드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떻게 빠져나왔느냐?”

그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황제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화염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 그래.”

“에핀하르트 대공자가 저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황제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얼핏 부드러워 보였던 눈빛은 순간적으로 살기를 띠었다.

“그가…… 너와 함께 나왔느냐?”

“그는 정말로 대단했어요.”

아폴로니아는 둘러선 모든 이와 눈을 맞추며 힘주어 말했다.

“불길 사이로 들어오면서도 뜨겁지 않은 것처럼 성큼성큼 걸었어요. 다치지도 않았고요.”

그녀를 보는 모든 열 몇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몇 초 후 모든 이들이 동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불을 뚫고 걸어 들어왔다면…… 설마.”

“사냥 대회 때의 모습을 봤잖아요. 불에 타지 않는 몸을 가진 거죠.”

“전설인 줄 알았더니 황족 중 그런 분이 정말로 계셨네.”

“그런 몸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황제가 되었다고…….”

한 귀족 영애가 중얼거리다 말고 입을 닫았다. 자신을 보는 황제의 싸늘한 시선을 느낀 것이다.

“잘 생각해 보아라. 정말로 그는 불길 속을 걸었단 말이냐? 황족이라 하나 촌수를 따질 수도 없는 방계 혈통이 그런 능력을 타고난 일은 없었다.”

그는 꽉 깨문 이 사이로 낮게 으르렁댔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영문을 모른다는 듯 순진한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정말이에요, 아버지.”

감동이라도 한 듯, 아폴로니아의 눈에는 작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마치, 마치…… 아폴론 신을 보는 것 같았어요.”

* * *

“앞으로 네가 공부할 양이다.”

“이걸 다 말입니까?”

“그래. 내가 어린 시절 봐야 했던 것들이야.”

아폴로니아는 산처럼 쌓인 책들을 사이에 두고 카엘리온에게 말했다.

카엘리온은 별궁 내부 비밀의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별궁 구조를 모르는 황제가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유일한 곳이었고, 두 사람이 만나기도 쉬웠다. 궁 바깥과 연결된 통로가 있기에 추후 황궁을 벗어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좋은 스승을 구하기 전까지는 독학하도록 해. 한 번씩 어디까지 배웠는지 나에게 보고해. 때가 되면 다음 교재를 보내 줄 테니까.”

카엘리온은 책을 한 권 한 권 펼쳐 보았다. 다수가 각 분야의 유명한 학자들에 의한 책이었지만 몇 권은 그가 들어 본 적 없는 서적이었다. 이 내용을 아홉 살 때 배웠다면 아폴로니아는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총명했다.

“병법서라…….”

그는 가장 아래에 있던 갈색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아주 중요한 책이지. 작가는 한때 제국 최고의 명장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전하, 하지만…….”

“그래. 부마이자 대장군이었던 영웅.”

당황한 그에게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가이우스 리페르가 직접 쓴 병법서야.”

“하지만!”

“뭐가 문제지? 아버지는 모두가 인정하는 무신이었어. 힘으로는 전성기의 할아버지만 못했지만 병법으로는 비견할 자가 없었다.”

“전하, 그는 저의 원수이자 전하의 원수입니다.”

“아주 체계적이고 충실한 내용을 갖춘 책을 쓴 사람이기도 하지.”

아폴로니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게 그렇게 충격이라면 그 위의 책을 보고는 까무러치겠군.”

“예?”

카엘리온은 병법서 바로 위에 있던 푸른 표지의 두꺼운 책을 집어 들었다.

“경제학의 이론과 사업의 실무가 함께 담겨 있는 책이야. 중요한 내용이다.”

“……페트라 리페르.”

카엘리온은 저자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대로 공부해야 해. 내용을 외울 정도로.”

“비슷한 책은 많습니다.”

“아직 이해를 못하는구나.”

아폴로니아가 카엘리온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강한 적을 상대할 때에는 그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가지고 있어야 하지. 너도 모르지 않을 텐데.”

카엘리온은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는 더 미루지 않고 책을 폈다. 공부에 빠져든 그를 남겨 두고 아폴로니아는 방을 나섰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방문 앞에 서 있던 유리엘이 아폴로니아를 쳐다보지 않고 물었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대회를 우승하고도 연회장을 뛰쳐나왔던 그는 수도로 돌아온 뒤 주군이었던 대공 일가가 걱정된다는 핑계로 공식석상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별궁에 머물렀다.

“완전히 나았어.”

아폴로니아는 웃으며 손목의 화상 자국을 문질렀다. 아드리안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려 준 흉터는 쓱 하고 지워졌다.

“……다행입니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아폴로니아는 먼저 빙긋 웃어 보였다.

“고마워, 유리엘.”

“뭐가 말입니까?”

“며칠 전에 네가 한 말이 옳았어. 난 죽지도 않을 거고 포기하지도 않을 거야.”

“계획이 서셨군요.”

유리엘은 여전히 착잡하고 생각 많은 표정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결혼까지 말입니다. 아드리안에게 들었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아폴로니아의 눈을 피했다. 화가 난 표정, 아니 정확하게는 화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표정이었다. 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카엘리온과 결혼 약속을 하던 날을 기억했다. 그에게 청혼하는 순간 유리엘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도. 그러자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아렸던 사실도.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정치 다툼에서 결혼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지. 때가 되면 카엘리온에게는 최대한의 자유를 줄 거야. 다른 여인을 만날 수 있도록.”

“그가 자유를 원하는 것은 맞습니까?”

“응?”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아폴로니아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나 유리엘은 다시 주제를 돌려 버렸다.

“세력을 구축하는 데는 최소한 몇 년이 걸립니다. 그동안 대공을 어떻게 살려 두시려고요? 제가 아는 리페르 공작가라면 일 년에 다섯 번쯤 암살 시도를 할 겁니다. 그 수단은 다양할 거고요.”

“유능한 호위를 줄 생각이야.”

“예?”

이번에 되물은 것은 유리엘이었다. 그는 돌렸던 고개를 다시 들어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유리엘, 나를 지키겠다고 했지?”

“당연한 것을 자꾸 묻지 마십시오.”

“그럼 카엘리온을 따라가.”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보다도 더 착잡해진 얼굴이었다.

“유리엘, 나는 몇 년 안에, 패리스가 황위를 계승하기 전에 모든 승부를 낼 거야.”

아폴로니아는 한 발 다가서며 그를 설득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도, 카엘리온도 모두 필요해. 그를 지킬 사람은 너밖에 없어.”

“전하는요? 시드가 죽은 이상…….”

“카엘리온이 멀쩡하게 살아서 성장하면 나 같은 건 결국 관심 밖이 될 거야. 네 말대로 강한 견제의 대상이 생기는 거니까.”

유리엘의 눈썹이 찌푸려지고 아름다운 얼굴이 수심에 잠겼다.

“그리고 너를 위해서도 필요해.”

“무슨 의미입니까?”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시선을 맞추며 계획의 다른 부분을 말해 주었다.

“너는 네가 제국에서 어떤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그건…….”

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평생 정식 신분을 갖지도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살아온 그이기에 자신에게 지위가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냥 대회의 우승은 네 생각보다 의미가 커. 그리고 너는 많은 면에서 재능이 있어. 검술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진심이었다. 검술과 별개로 그는 상황 판단과 대처가 그녀가 아는 누구보다 빨랐다.

“영지에 함께 가. 카엘리온이 익히는 모든 것을 너도 익히고 가능하면 그를 넘어서. 그의 곁에서 너 또한 성장해야 해. 때가 되면 내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네 명예가, 네 능력이, 다 내게 도움이 될 수 있게.”

모든 계획을 들은 유리엘은 다시 오랫동안 침묵했다. 이윽고 입이 열렸을 때 그가 물은 것은 한 가지였다.

“전하께서 원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그래.”

“정말로, 그렇게 하면 행복해지시는 겁니까?”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행복이라. 아폴로니아는 그다지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생존, 승리, 복수 이런 것이라면 모를까. 그러나 그의 물음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

그녀의 대답을 들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폴로니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턱에 아폴로니아의 이마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였다. 조금 전보다 심장 박동이 미세하게 빨라졌다. 아폴로니아는 한 걸음 물러서려 했지만 유리엘의 시선이 그녀를 자리에 고정시켰다.

“기억하십시오. 저는 오직 전하만을 위해서 움직입니다. 제가 떨어져 있는 것이 전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돌아올 겁니다. 전하가 뭐라고 하시든지요.”

그의 짙은 바다색 눈이 아폴로니아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방 안의 대공은 평생 전하의 명령을 듣겠다고 맹세했는지 모르지만, 저는 전하를 지키겠다고 했을 뿐이니까요.”

대답을 마친 유리엘은, 아폴로니아를 그 자리에 남겨 둔 채 먼저 미끄러지듯 복도를 빠져나왔다.

* * *

“불에 타지 않았다…….”

패리스는 한 손에 활을 든 채 말 위에 앉아 중얼거렸다. 추워진 날씨에 숨어 버린 사냥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었다.

“몇백 년 만에 처음이라 온 제국이 떠들썩합니다. 벌써 차기 황제가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괘씸한 소문이구나.”

그를 호위하는 시종의 전언에 패리스는 이를 으득 하고 갈았다. 황제도, 엘레니아 황녀도 닮지 않은 연갈색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니아는 팔과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고?”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겠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을 거라고 합니다. 십수 명의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패리스는 헛웃음을 웃었다.

고모인 페트라는 견제의 대상을 잘못 보고 있었다. 여우를 걱정하느라 호랑이가 있는 줄도 몰랐던 꼴 아닌가.

사람이 화재로 인해 화상을 입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었으나 황족의 경우는 달랐다. 오래전부터 황실의 후계자들은 화상을 입어도 감추기에 급급했다. 불에 다친 흔적을 온몸에 지닌 황녀라면 누구도 후계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애를 쓸데없이 신경 쓰시더라니…….”

“공작 부인께서 황녀 전하 곁에 심었던 간자들에게는 철수 지시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리고 에핀하르트 그놈은…… 천천히 상대할 수 있겠지.”

그는 차갑게 웃었다. 핏줄이 어떻든, 사냥 대회에서 무슨 활약을 했든 그는 보호자 한 명 없는 어린 소년이다. 처리할 기회는 많을 것이다. 패리스는 숲 깊숙이 말을 달렸다. 복잡한 문제를 잊는 데에는 역시 승마와 사냥이 최고였다.

“전하, 날이 춥습니다. 이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떨지요. 곧 눈이 올 것 같습니다.”

“시끄럽다.”

패리스는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이리저리 말을 달렸다. 반쯤은 잔소리하며 따라오는 시종을 곯려주고 싶은 생각이었다.

“히히힝-!”

한참을 달리던 그는 갑작스레 말을 멈추었다. 숲길에 사람 한 명이 쓰러진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아 젊은 여인인 듯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뭐야…… 이거 죽은 사람인가?”

패리스는 짜증을 내며 시종에게 치우라고 명령했다. 날이 추우니 아직 죽지 않았다면 어차피 곧 죽을 것이다. 그는 시체를 처리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에서 내려 여인의 몸을 살짝 일으켰다.

“……잠깐.”

여인의 얼굴이 드러나자 패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시종을 멈추었다.

“얼굴을 이쪽으로 돌려라.”

패리스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느낌으로 지시했다.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쓰러진 여인의 얼굴은 그가 살면서 보았던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흑단처럼 길고 반짝이는 검은 머리카락,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이목구비며 티 하나 없는 피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떼기 어렵게 했다.

“죽었나?”

조금 전까지 귀찮은 물건을 보듯 치우라고 명령했다는 사실은 잊은 듯, 패리스는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기절입니다.”

“비켜라.”

패리스는 시종을 밀치고 자신이 대신 여인을 받아 안았다. 시종의 말대로 여인은 고르게 호흡하고 있었다.

“행색을 보아 하니 먼 길을 왔구나. 탈진해서 쓰러진 것 같다.”

그는 시종에게 손짓해 자신의 말안장에 달려 있던 물 부대를 가져오게 한 뒤 직접 여인의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여인의 입술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녀가 기침을 토해 냈다.

“……콜록!”

“정신이 드느냐?”

패리스는 오랜 연인을 보듯 다정하게 여인을 부축했다.

“허억, 허억…… 누구신지…….”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그러나 그 음색마저 매혹적이라고 느낀 패리스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려워 말아라. 네 사정은 모르겠지만 나를 만났으니 너는 이제 안전하다.”

“저를…… 저를 살려 주신 건가요?”

“그렇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 쓰러지면 짐승 밥이 되기 십상이야.”

여인은 입을 다물고 패리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기절했을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짙은 자색 눈동자도 더할 수 없이 매혹적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아모레타입니다.”

“얼굴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구나. 나는 이 제국의 황자인 패리스다.”

여인, 아니 아모레타는 몽롱한 정신으로 그녀를 구해 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뜬 순간부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그는 분명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아모레타.”

자신을 패리스라고 소개한 남자는 그녀를 안아 올려 말에 태웠다. 그러고는 눈을 맞추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대로 나와 함께 황궁으로 가자.”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되었을까? 아직 소년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그는 밝은 금발의 미청년이었다.

“저는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을 찾을 때까지라도 머무르거라. 내가 도와주마.”

거듭 친절을 보이는 패리스의 모습에 아모레타는 퍼뜩 그가 연상시키는 사람이 누군지 떠올랐다. 리샨에서 그녀를 살려 주었던 은인. 그녀가 수도에서 찾고자 했던 그 사람. 로브를 쓰고 있어 얼굴도, 나이도 모르지만 살짝 보였던 이목구비는 묘하게 이 남자와 닮아 있었다.

아모레타는 갑자기 드는 반가움에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에 패리스도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혹시 찾지 못하거든 언제까지고 황궁에 머물러도 좋다.”

수중의 돈을 모두 잃고 며칠 동안 먹지 못했던 아모레타는 혼미한 정신에도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기절했다.

* * *

유리엘은 복도를 지나며 한숨을 토해 냈다. 갈수록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숲속에 쓰러진 아폴로니아를 봤을 때에는 눈이 뒤집힐 것 같았고, 그녀가 카엘리온에게 청혼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심장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흔들리지 않았다. 시드를 잃고 자신에게 안겨서 울던 아폴로니아를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다짐했다.

다시 그녀를 울게 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와 약혼하든 아니면 결혼을 하든, 아폴로니아가 웃고 있다면 유리엘은 승자였다. 아무 생각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던 그는 조금 전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생각이 많아지면 같은 장소를 계속 걷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퍽!

생각에 잠겨 미처 보지 못한 사이에, 누군가가 그에게 부딪혀 왔다.

“아야…….”

카엘리온이었다. 두꺼운 책을 두어 권 떨어뜨린 것으로 보아 그는 서재로 향하는 것 같았다. 별궁에는 아폴로니아가 주로 사용하는 서재 외에도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숨겨진 서재가 하나 더 있었다.

“괜찮나?”

유리엘이 책 한 권을 주워 주며 물었다. 아직 그에 비해 한참 작은 카엘리온이 이마를 문지르며 책을 받았다.

“상처가 낫지 않았는데 가만히 있지 그래?”

유리엘이 무심하게 물었다. 카엘리온은 대답 대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너는 아직도 내게 반말을 하는군.”

그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유리엘은 코웃음이 나왔다.

“싫다면 존경을 받게 행동해 보지 그래.”

그는 이 순간 카엘리온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사실 아폴로니아와의 혼약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유리엘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등 뒤에서 들리는 카엘리온의 말에 그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나와 누이의 혼약은 아무런 애정도 없는 거야.”

“……뭐?”

“내게 청혼하면서 누이가 그러더군. 나중에는 자유롭게 해 주겠다고. 다른 여인을 만나라, 그 말씀이셨겠지. 누이는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

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왠지 마지막 한 마디가 반가웠다. 유리엘은 천천히 몸을 돌려 카엘리온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니까 누이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도, 누군가가 누이를 좋아하는 것도 나와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카엘리온은 유리엘의 표정을 관찰하며 말끝을 흐렸다. 유리엘은 최선을 다해 그에게 무표정으로 응대했다.

“라고 말해 줄까 생각했었지. 너는 누이를 좋아하니까.”

순간 애써 덤덤하게 유지하던 유리엘의 표정에 균열이 생겼다. 카엘리온은 다 안다는 듯 빙긋 미소 지었다.

“숨겼다고 생각한 거야? 누이를 보는 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 그 정도 실력이면 어느 권력자 옆에 붙어도 안락하게 살 수 있을 네가 굳이 위험하게 누이 곁에 남는 것도 그렇고. 뭐, 지금은 나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말을 끝까지 해.”

유리엘이 말했다. 왠지 카엘리온의 말끝에는 반전이 예고된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이야, 너를 찾아서 그 말을 해 주려던 순간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 거야. 이유도 없이.”

카엘리온이 스스로도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왜 그런가 잘 생각해 봤더니…… 내가 누이에게 이미 반한 것 같더라고.”

그의 말이 끝나자 부드럽게 뻗은 유리엘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뭐?”

“말 그대로야. 누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나는 누이에게 반했어. 정말로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그는 여전히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다. 순해 보이는 그 눈으로.

유리엘은 아무렇지 않게 고백하는 카엘리온의 모습이 거슬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지금 내가 누이에게 그저 하나의 장기말인 걸 알아. 누이가 나를 완전히 믿지 않고 견제한다는 것도. 혼약으로 나를 묶어 두는 것이 나의 배신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도. 어쩌면 너를 내 곁에 붙이는 것에도 감시의 목적이 있을지 모르지.”

그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누이의 마음을 온전히 얻을 거야. 나를 완전히 신뢰해서 정치적인 목적이 없이도 나를 원하도록. 순수하게 사랑으로 결혼하고 싶도록.”

다시 고개를 들어 유리엘을 마주 보는 소년의 얼굴은 자신에 차 있었다.

“그래서? 전하는 너와 결혼할 테니 나는 가만히 있어라, 그 말을 하려는 건가?”

유리엘이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아폴로니아의 뜻이면 모를까, 감히 제까짓 게 뭐라고 건방진 지시를 하려 드는가.

“아니, 그 반대야.”

카엘리온이 다시 그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폴로니아의 것과 똑같으면서도 분위기는 다른 금적안이 반짝 빛났다.

“그 전까지 누이는 내 연인이 아니니 너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라는 거야. 고백이든, 사랑의 세레나데든.”

카엘리온은 책을 팔에 안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며 말했다. 넘치는 여유가 마치 유리엘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미래에 누이와 내가 연인이 됐을 때, 그게 정략혼이라서 네가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 대는 꼴을 보고 싶지 않거든.”

유리엘은 입술을 짓씹으며 자신보다 두어 살 어린 소년의 말을 들었다. 조롱인지, 훈계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조언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나를 몇 번 구해 줬으니 해 주는 말이야. 그저 약혼자의 지위에 밀리면 넌 억울할 테니까. 무엇보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난 결국 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거든. 자신이 정말 원하는 사람과 함께.”

유리엘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태도는 얄미워도 카엘리온은 진심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유리엘에게 공평한 승부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아폴로니아의 마음을 두고.

“너, 내가 누구라고…….”

“신분이 낮다, 뭐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마. 넌 이미 음지의 검 같은 게 아니야. 그리고 난 누이랑 신분이고 뭐고 상관없는 사랑을 할 거거든.”

카엘리온은 허공을 보며 씩 웃었다. 뭔가 아주 낭만적인 상상을 한 것 같았다.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다야. 나중에 누이가 내 마음을 받아 주면 그 때는 건드리지도 못하게 할 거니까, 네가 나보다 누이의 마음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해 보라고. 의미 없겠지만.”

그는 말을 마치더니 책을 소중히 안고 복도를 따라 사라졌다. 떨어뜨린 나머지 한 권은 잊어버린 듯했으나 유리엘은 굳이 말해 주지 않았다.

유리엘은 조용히 멈추어 선 채 그의 말을 생각했다.

아폴로니아는 누구의 연인도 아니다. 그녀의 마음은 유리엘을 향할 수도 있다.

욕심낼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다. 지금까지는.

신분에 대한 자격지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귀족들이 대단하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다만 그녀의 눈은 오직 황좌를, 그리고 그녀의 백성을 향하고 있었기에 다른 곳에 쓸 마음은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득 그는 자신을 붙잡고 매달리던 아폴로니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시 한 번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연인이라.’

새길수록 달콤한 단어였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폴로니아에게 행복을 주고 싶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녀를 울게 하는 모든 것을 찢고, 베고,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유리엘은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녀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

감정을 자각한 그는 카엘리온이 떨어뜨리고 간 책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카엘리온이 익히는 모든 것을 너도 익히고 가능하면 그를 넘어서.”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제는 그 의미가 훨씬 강렬하게 다가왔다.

어두운 복도에 서서, 그의 붉은 입술이 살며시 호선을 그렸다. 그는 모든 것을 익힐 것이다. 그리고 카엘리온을 넘어설 것이다. 그렇게 성장해서……

언젠가는 아폴로니아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 그녀의 곁에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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