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작별
“며칠 사이에 무리하신 듯하여 피로에 좋은 차를 가져왔습니다.”
페트라가 주전자와 찻잔이 놓인 쟁반을 황제궁 서재 탁자에 내려놓았다. 황제는 생각에 잠긴 채 서재 벽면을 응시하다가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이 어긋날 것을 우려하십니까?”
페트라가 잔을 황제 앞에 놓으며 무심한 듯 물었다.
“……대공 쪽에는 확실히 소식을 흘렸겠지?”
“물론입니다. 수도를 나서는 순간 자객의 습격이 있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탁월한 계략이었다. 수도 안에서 치자니 대공이 눈치 빠르게 떠나 버릴 것이 걱정이었고, 수도 밖에서 치자니 우리가 대공을 압도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는데 말이다.”
“그렇습니다. 수도 안에서 치자면 대회 때문에 몰려든 귀족들의 눈치도 보였겠지요.”
“네 계략으로 나는 그들의 의심도 사지 않고 대공 일가의 출발을 늦출 수 있었지.”
두 마리 늑대를 닮은 그들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대가로 지불할 것이 아까우십니까?”
페트라의 물음에 황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 대가로 대공 일가를 몰살시킬 수 있다면 아까울 것이 없지.”
그의 시선이 다시 서재의 벽면으로, 정확히는 그곳에 걸린 금발 여인의 초상화로 향했다.
“곧 제 어머니의 곁으로 가겠구나. 아비를 위해 이 정도 희생쯤이야 당연하지.”
“비에른과도 파혼한 마당에 굳이 위험 요소일 수 있는 황녀를 살려 둘 필요는 없지요. 대공 일가와 황녀를 함께 처리하면 누구도 폐하를 의심할 수 없을 겁니다. 설령 의심하더라도 입 밖에 낼 수 없을 겁니다.”
황제는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매섭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어떤 슬픔도 죄책감도 비치지 않았다.
그들은 아폴로니아를 미끼로 대공을 안심하게 만들어 수도에 잡아 두었다. 그러고는 대공이 수도 바깥의 상황만을 대비하는 사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그들을 전부 몰살시킬 계획이었다.
불의의 사고에서 황제의 친딸이 죽었는데 그를 배후로 의심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차를 드시지요.”
페트라는 화려한 금빛 문양이 새겨진 황제의 잔에 차를 따랐다. 진하게 우려져 검붉은 빛을 띠는 액체가 쏟아져 나와 잔을 채웠다. 황제가 좋아하는 빛깔이었다.
* * *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 출발하셔야겠습니다.”
젊은 기사가 대공에게 보고했다. 그는 황제가 친히 붙여 준 황실 기사단 소속 기사였고, 대공이 무사히 수도를 빠져나가면 아폴로니아를 황궁까지 다시 호위할 사람들 중 하나였다.
“해가 질 때까지 몇 시간이 남았는가? 황녀 전하의 숙소가 마땅할지 모르겠군.”
그들은 민가로부터 애매하게 떨어진 숲을 지나고 있었다. 길은 넓은 편이고 마물이 출몰하는 지역도 아니었지만, 천막을 치고 잠드는 것은 황녀에게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반 시간도 남지 않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숲은 황실 소유의 사냥터인지라 근방에 황제 폐하께서 친히 사용하시는 집이 있습니다. 지금은 비워져 있지만 대공 전하께서 사용하셔도 무방하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대공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사병들을 정비해서 황실 기사단 소속 호위들의 안내에 따르도록 했다.
“시드는 여기 와 본 적이 있어?”
아폴로니아가 작은 소리로 시드에게 물었다. 부인의 건강이 좋지 않아 한동안 그녀를 떠나 있었던 그는 사냥 대회에 맞추어 간신히 수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황녀의 호위로서 그녀의 곁에 붙어 있었다.
“오래전 선황 폐하와 와 보았습니다. 저 기사의 말대로 황실 소유의 작은 저택이 있습니다만 조금 오래되어 걱정이군요.”
“출발 전에 유리엘을 만났어?”
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에 남아 동정을 살피라고 전해 두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대공령의 가신이나 대회 우승자이니만큼 궁에 남아 있을 명분도 있으니까요.”
그들은 젊은 기사가 예측한 시간에 딱 맞춰 숲 속에 숨겨져 있던 목조 건물에 도착했다.
눈앞의 건물은 오랜 기간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깨끗하게 관리된 모습이었고, 구조 또한 튼튼해 보였다. 언뜻 투박하게만 보이지만 고급 목재로 지어진 것이라 고풍스러움은 물론, 저택 구석구석에는 섬세하게 새겨진 황실 문양이 보였다.
“생각보다 크네.”
“황제 폐하께서 친히 사용하시던 곳이니까요. 호위를 위한 공간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건물에 들어서면서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기울여 카엘리온이 있는 방향을 힐끗 보았다. 그들은 대회 이후로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녀는 카엘리온이 하루 종일 자신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며 눈이 마주치기만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마물로부터 자신을 구해 준 그녀에 대한 감사함과 그녀의 조언을 따르지 못하고 페트라의 함정에 빠졌다는 부끄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몇 번이나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그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조금 불쌍한 마음과 동질감에 그들을 돕고 있었으나 그녀는 아직 대공 일가가 온전한 아군으로 남을지 후환이 될지 판단하지 못했다.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두고 손을 잡았다가 후에 틀어진 관계는 역사에 흔하디흔했다. 더군다나 카엘리온은 처음 만난 날 그녀를 도발했고, 그 후에는 그녀의 조언을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내게 온전히 복종하게 할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녀는 카엘리온의 재능을 높이 샀다. 아직 어리지만 대담한 지략에 무예도, 매력도 다 갖추었다. 무엇보다 선황을 닮은 모습은 그 자체로 상징성이 짙었다.
다만 지금은 그 문제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은 더 중요한 게 있지.’
“들어가십시오, 전하.”
아폴로니아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녀와 시드는 저택 안쪽에 마련된 그녀의 처소에 도착해 있었다.
“저는 바로 옆방에 있겠습니다.”
“아니, 잠깐 이야기해.”
아폴로니아는 돌아서는 그녀의 기사를 불러 세웠다.
“무슨…….”
“리샨에서 돌아오고 나서부터 계속 나를 피해 왔잖아.”
아폴로니아는 무심한 듯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시드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쉬시고 내일 말씀하시지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나 보네.”
아폴로니아는 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 하고 말을 이었다.
“궁으로 돌아가면 은퇴해, 시드.”
순간 시드의 얼굴이 작게 경련했으나 아폴로니아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는 시드의 가족들을 위해서 살아.”
“……제 소명에 대해서는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명령이야, 시드.”
시드의 얼굴이 힘겹게 일그러졌다. 한때 적군은 물론 아군조차도 공포에 떨게 했던 잿빛 눈동자에는 무거운 슬픔밖에 보이지 않았다.
“전하를 혼자 둘 수는 없습니다.”
“부인은 위독하고 내 또래 아들이 있다며. 혼자 두면 안 될 사람은 따로 있어. 더군다나 이제 유리엘이 있어. 시드가 없는 사이에 호위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했지.”
“하지만…….”
“시드.”
갑자기 10년쯤 늙어 버린 듯한 시드에게, 아폴로니아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내가 아홉 살 때, 돌아가신 선황의 침실에서 들키지 않고 내 방으로 도망치게 해 준 것이 누구지?”
“접니다.”
“열두 살에 가레스가 나를 밀쳐서 물에 빠뜨렸을 때, 나를 건져 내고 가레스의 뺨을 후려쳤다가 3일 동안 금식하는 벌을 받은 건?”
“접니다. 그때 죽여 버렸으면 더 좋았겠죠.”
“시드는 내게 아버지이자 스승이야.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
“전하…….”
“지금까지는 시드가 별궁을 꾸려 온 거나 마찬가지지만 앞으로는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이제는 기반이 생겼고, 시드는 할 일을 다 했어.”
돌려 말했으나 그녀는 분명히 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시드의 눈썹 끝이 조금 더 내려앉았다.
“약혼이 파기됐으니 아버지는 나를 더 싫어하실 거야. 친딸을 어쩌기가 어렵다면 곁에 있는 시드나 시드의 가족들을 건드릴 수도 있어. 그건 내가 두고 보기 싫고.”
아폴로니아는 억지로 ‘가족들’을 강조해 말했다. 시드의 아픈 곳을 건드리지 않으면 그도 납득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저를 전하의 곁에서 떠나보내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시드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제게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언제나 전하입니다. 아멜리도, 녹스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진심 어린 항변이었지만 그 아내와 아들의 이름이 시드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아폴로니아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했다.
“안다고 해서 그게 편하다는 뜻은 아니야.”
“제 목숨은 전하를 위해 바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저는 한 번 한 맹세는 지킵니다. 무엇을 희생하든지요.”
“알아.”
아폴로니아가 과거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전장의 악귀. 그는 특출 난 영웅이었다. 일대일로 결투를 할 때면 아버지인 가이우스를 이기기 어려운 실력이었다고 하지만 그의 대체 불가능한 가치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선황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발휘되고는 했다.
주군이 위험에 처했을 때면 그는 망설임 없이 모든 것을 내던져 앞을 막았다.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포위를 뚫고, 셀 수 없는 적을 베며 그는 선황을 지켜 왔다.
어린 아폴로니아가 위기에 처하자 그는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내던졌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그는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명예도, 무관으로서 쌓 아 온 업적도 버리고 별궁의 관리인이 되었다. 그 후로 단 한순간도 후회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시드 바이안이었다.
그 과정에서 페트라의 압박과 견제에 고생한 것은 그의 가족들이었다. 아폴로니아는 그 부분을 시드에게 상기시켜 줄 필요를 느꼈다.
“하지만 시드는 다른 맹세도 했잖아.”
그녀는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나 시드의 결혼식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어.”
아폴로니아는 항변하는 시드의 말을 끊었다. 시드는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참석하셨다면서. 어머니는 그때 시드가 부인에게 했던 맹세를 기억하고 나한테 말씀해 주셨어.”
시드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을 펴지 않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또한 자신의 맹세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대에게 끝없는 환희만을 줄 수는 없으나, 그대의 모든 아픔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겠다.’”
아폴로니아는 엘레니아 황녀에게 들었던 시드의 언약을 읊어 주었다.
“‘간혹 떨어져 있을지라도 영혼의 절반을 그대 곁에 두겠다.’”
시드의 입술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달싹거렸다. 그러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언약을 지키고 있어? 바이안 부인이 쓰러졌을 때, 그 아픔을, 괴로움을 충분히 나누었어?”
시드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최근 부인의 간병을 이유로 아폴로니아의 곁을 비웠다. 그러나 부인의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은 이미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고, 그녀가 미처 낫기 전에 시드는 아폴로니아의 곁으로 복귀해야 했다. 부인의 간병은 아들에게 맡겨 둔 채로.
“말해 봐, 시드. 결혼식 때의 맹세를 다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어?”
“……황궁에 적을 두는 자가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애매하게 말을 돌렸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의 일로 가족을 괴롭게 하지 않을 수는 있지.”
아폴로니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시드를 기사로서 존중하고 스승으로서 존경했지만 이 순간 그를 부른 것은 의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정해 둔 답을 알려 주기 위해 부른 것이다.
“그들 또한 선황 폐하의 백성이자 전하의 백성입니다. 충성의 의무가 있을 수밖에요.”
시드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더욱더 시드를 압박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들은 충성해 왔어.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내어 주면서. 나는 그 충성에 대한 보답을, 남편과 아버지의 목숨까지 빼앗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지 않아.”
아폴로니아는 씁쓸하게 말했다.
“……리샨에서부터 생각하셨군요.”
시드가 말했다. 그는 언제나 아폴로니아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맞아. 시드를 칼트산에 데려갔더라면 죽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도. 그리고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아.”
시드의 잿빛 눈이 젖어 있었다. 그는 아폴로니아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더욱 싸늘하게 덧붙였다.
“이번 임무가 끝나고 별궁에 돌아가면 시드의 자리는 없어. 명심해.”
“그렇게 되면 전하께서는…….”
“걱정할 사람이 줄어들면 나는 더 자유롭겠지?”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시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표정이 불복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임을 알았다. 더 이상 듣지 않는다고 하면 그녀는 아버지이자 스승과 같은 그를 벌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제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고, 시드는 그녀가 대답하기 전에 문을 열고 나갔다.
“하아…….”
아폴로니아는 참아 왔던 한숨을 뱉었다. 새로운 사람을 얻는 것 이상으로, 얻었던 사람을 보내는 것은 괴로웠다. 애써 의연한 척했지만 시드에게 작별을 고하는 그녀의 마음은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선황과 엘레니아 황녀가 죽은 후로 아폴로니아의 곁에 남은 가족은 시드가 전부였다.
‘그래서 지키고 싶어.’
그녀는 부인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사색이 되었던 시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래전 만났던 바이안 백작 부인의 인자한 미소도.
‘그에게는 진짜 가족이 있어.’
그는 아폴로니아에게 삶을 온전히 주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느낌이 아폴로니아에게 그를 빨리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 * *
쿵-
묵직한 무언가가 그녀의 방문에 부딪히며 아폴로니아를 깨웠다.
“시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방 안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누가 들어오려는 건가?’
그녀는 다시 한 번 방 구석구석을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새벽 일찍 다시 떠나기로 했으니 지금은 한밤중일 것이다.
‘잠깐……’
아폴로니아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한밤중에 불도 켜지 않은 방. 그러나 모든 사물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창문 밖에서는 환하다 못해 붉디붉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화르륵- 탁-
익숙한 소리가 들리면서 그와 어울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불?’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폴로니아는 서둘러 침대에서 벗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저택 바깥은 온통 불길이었다. 거대한 붉은빛만이 세상을 삼킬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멀리서 말들이 히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으나 호위들의 모습도 타고 온 말들도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고모님이다.’
그녀는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처음부터 황제와 페트라가 꾸민 일이었다. 대공에게 정보를 흘려 수도 안에서 안심하고 조금 더 머무르도록 한 것도 계략의 일부였던 것이다.
질끈 감은 그녀의 눈앞에 언제나 혐오로 가득 찼던 황제의 눈빛이 떠올랐다.
‘결국 그렇게 하셨군요.’
그는 드디어 친딸의 죽음을 지시했다. 대공 일가의 제거라는 소득을 위한 제물로 그녀를 바친 것이다.
우지끈-
생각에 잠길 시간이 없었다. 건물의 다른 곳에서 열기가 퍼져 나오고, 저택 내부 어딘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채챙-
귀를 기울이자 문 너머로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쿠쿵-
다시 한 번 아폴로니아의 문에서 큰 소리가 났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방문을 열었다. 저택은 연기와 불길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렸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흡!”
한 걸음 내딛던 그녀의 발치에 짙은 핏자국이 보였다. 연기에 휩싸여 있어도 피 냄새는 진하게 풍겼다.
‘자객이 왔구나.’
“시드!”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계속해서 다급하게 시드의 이름을 불렀다.
저벅.
연기로 건물 안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시드, 거기 있어?”
쉬익-
그러나 연기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복면을 쓴 남자였다.
저벅, 저벅, 저벅.
아니, 남자들이었다.
“황녀를 찾았다.”
처음 그녀를 본 자가 주변에 그 사실을 알리자 다섯, 여섯 명 정도의 복면인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전원이 검 두 자루씩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아폴로니아의 등을 타고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미 숫자로는 상대가 되지 않겠구나.’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차라리 불길밖에 없다면 그 안으로 뛰어들겠지만 그녀의 등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
“전부 죽이라고 하셨다.”
처음 그녀를 본 남자가 짧게 말했다. 나머지 복면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빼서 그녀를 겨누었다.
쉬익-
흔한 기합 소리도 없이, 그들은 아폴로니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중 한 명의 검날은 그녀의 얼굴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피할 시간이 없었다.
“으윽!”
그러나 다음 순간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 것은 아폴로니아가 아니라 검을 겨누었던 바로 그자였다. 쓰러진 그의 등에는 눈에 익은 검이 박혀 있었다.
“시드!”
아폴로니아가 눈을 들자 복면인들의 뒤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회색 머리에 강인한 잿빛 눈.
“절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
연기 속에서 그는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팔과 다리에는 불이 붙었다가 꺼졌는지 화상이 있었고, 몸에는 자신의 것인지 모를 핏자국이 보였다.
언제나 사용하던 장검을 아폴로니아 앞의 자객의 등으로 던져서 꽂아 넣은 그에게는, 허리에 찬 작은 단검을 제외하면 무기가 없었다. 아폴로니아의 등에 다시 한 번 식은땀이 흘렀다.
“검을 들지 않았다. 어서 처치하고 우리는 나간다.”
대장으로 보이는 복면인이 다시 지시했다. 시드는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짓고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 미소를 보는 아폴로니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시드는 정말 여유로운 상황에서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웃지 않았다.
아폴로니아가 마지막으로 그 미소를 보았던 것은 선황이 죽은 날, 침실 밖에서 시드를 만났을 때였다.
“죽여라.”
대장은 날카롭게 상황을 지켜보다가 수하에게 말했다. 자객 네 명이 시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뿌연 연기 속에서 잿빛 눈이 번쩍 빛났다. 전장의 악귀. 눈빛만으로 적군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는 시드의 과거 모습이 그와 겹쳐 보였다.
챙- 채챙-
“으아아악!”
“크흑!”
은빛 선이 몇 번 그어지는가 싶더니 자객들의 목이며 심장, 등에서 각각 피가 쏟아져 나왔다. 시드의 팔은 한 번도 허투루 움직이지 않고 약점만을 공격했다.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며 모든 것을 지켜보던 대장의 눈이 커졌다. 전성기가 지나도 한참 지난 호위가 이런 힘을 보이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장의 눈은 남은 한 명의 자객과, 그를 마주한 시드 사이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 그 시선은 결국 아폴로니아를 향했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녀를 직접 처리하고 부하와 합세해 시드를 죽인다는 것.
“전하!”
그 방향을 바라보는 시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폴로니아가 미처 움직이기 전에 대장은 검을 빼서 아폴로니아의 이마를 겨누었다. 세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아폴로니아가 빠져나갈 가능성은 없었다.
“잘 가라.”
대장은 아폴로니아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검을 들어 올렸다.
쉬익- 퍽!
그러나 검이 미처 아래로 그어지기 전, 대장의 이마를 뚫어 버린 것은 피투성이의 단검이었다.
쿵-
대장은 비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안 돼.’
자객의 검 끝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단검의 주인을 알아본 아폴로니아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다. 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피로 범벅이 된 시드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는 이제 완전한 빈손이었다.
“전하, 어서…….”
퍽!
“으윽!”
다급히 무언가 말하려던 그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안 돼!”
아폴로니아가 울음 섞인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시야에 시드의 가슴 사이로 삐져나온 날카로운 검날이 들어왔다. 시드의 뒤에서, 조금 전까지 그와 겨루던 남은 한 명의 자객이 서 있었다. 그의 몸을 꿰뚫은 검 손잡이를 잡은 채.
“정말, 정말 끝이다.”
자객이 숨을 헉헉거리며 말했다. 핏발 선 그의 눈이 아폴로니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눈은 오래가지 못했다.
퍼억!
“으윽!”
그는 동료들과 비슷하게 비명 한 마디를 남기고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그 뒤로 한쪽 무릎을 세운 시드가 보였다.
“전하…….”
그가 든 칼은 자객이 들고 있는 것과 같았다. 무릎을 꿇고서도 자객의 허리에서 단검을 빼낸 것이다. 단검을 놓지 않은 시드의 팔이, 그리고 온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전…….”
털썩-
자신이 죽인 자객의 시체 위로, 시드의 육중한 몸이 쓰러졌다. 그러고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아.”
아폴로니아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목이, 심장이 얼어붙기라도 한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몸을 지탱하던 다리에는 힘이 쭉 빠지면서 그녀는 뜨거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천천히 시드의 곁으로 가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몸을 돌려 뉘였다.
피가 묻은 회색 머리. 한때 온정으로 가득했던, 채 감기지 못한 잿빛 눈. 아직도 놓지 않은 자객의 검.
“시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고, 목에서는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주변에는 여전히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호위 기사는 이제 세상에 없었다.
시드는 죽었다.
아폴로니아는 후회했다.
시드를 더 일찍 돌려보낼걸. 에핀하르트 일가의 배웅에 그를 동행시키지 말걸. 아니, 애초에 카엘리온이 뭐라고 하든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을 그랬다. 사냥터에서 죽든, 황제에게 죽든 그냥 두었더라면 시드는 살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녀가 후회하는 순간에도 건물은 무너지고 있었다. 암살자들의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마 그들 중 살아남은 자들은 저택을 떠났을 것이다.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일단은 건물을 빠져나가야 했다.
“시드…….”
아폴로니아는 떨리는 손을 뻗어 시드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의 시체를 가족들에게 돌려주어야 했지만 끌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폴로니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고는 뺨에 묻은 액체를 닦아 냈다. 언젠가 시드를 위해 눈물을 쏟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나는…… 나는 살아서 나갈게.”
주변에는 온통 화염이었으나 아폴로니아는 뜨겁지 않았다. 이미 칼트산에서 다 겪어 본 것이다.
“끝까지 미안해, 시드.”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시드의 손에 들린 단검을 빼내 그의 머리카락 한 자락을 잘라 품에 넣고 일어섰다. 충격에 얼어붙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았으나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저택의 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몇 개의 방문을 지나 문을 향해 뛰었다.
쿵-
뒤쪽에서 책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는 길 곳곳에 책장 파편이 튀었다. 아폴로니아의 치맛자락에도 불씨가 옮겨 붙은 상태였다.
‘시간이 없다.’
그녀는 치마에 붙은 불을 끄고 복도의 마지막 문을 지나 출구를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콜록! 콜록…….”
타닥거리는 불 소리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출입문과 마주 보는 방에서 나고 있었고, 그 주인은 그녀가 익히 아는 소년이었다.
“카엘리온?”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연기와 화염으로 가득한 방 안에는 카엘리온이 반쯤 쓰러진 채 기침하고 있었다.
“콜록, 살려, 살려 주세…….”
그의 얼굴이며 온몸에는 이미 불에 덴 자국들이 선명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거의 탈진한 상태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아폴로니아를 알아보았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쾅-
저택 어딘가에서 다시 한 번 위협적인 소리가 들리고 건물 전체가 진동했다. 기둥 하나가 쓰러진 것 같았다. 이제 1, 2분이면 저택 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그냥 갈까.’
처음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주먹을 피가 나도록 꽉 쥐었다.
‘한 번 도와준 결과가 이건데, 그냥 둘까.’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시드의 마지막 모습뿐이었다. 피할 수 있었던 싸움을 하다가 가슴에 검이 박혔던 그녀의 기사. 텅 비었던 그의 눈이 아폴로니아를 괴롭혔다.
‘도와주면…… 다시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을까.’
“콜록, 살려 줘…… 살려…….”
카엘리온이 다시 한 번 기침을 했다. 그의 모습은 점점 화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쾅-
그의 양옆에 얼핏 보이던 높은 책장 두 개 중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그를 스치며 쓰러졌다.
‘아니, 그냥 두면 죽는다.’
그녀가 위기에 처한 자를 도울 때면 조용히 자랑스러워하던 시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폴로니아는 결국 문을 향했던 몸을 억지로 돌려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정신 차려, 카엘리온.”
그녀는 한 걸음에 화염을 넘어 들어와 카엘리온을 부축했다. 붉어진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전하……?”
“그래,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따라와.”
그녀는 소년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놓치면 죽어.”
치맛자락 어딘가에 다시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불이 붙은 부분을 찢어 내고 카엘리온을 부축해 문 쪽으로 이끌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다른 한쪽 책장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도저히 피할 시간이 없었다.
“비켜.”
그녀는 급한 대로 카엘리온을 문 쪽으로 밀쳐 냈다. 찌릿한 고통이 어깨와 다리 쪽을 타고 전해졌다. 책장이 넘어지면서 그녀를 덮친 것이다. 다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어디에 깔리지는 않았는지 몸이 움직여졌다.
“멈추지 마.”
그녀는 방을 벗어나 비틀거리는 카엘리온을 다시 잡아끌었다. 그의 옷에도 여기저기 불이 옮겨 붙어 있었다.
“뛰어!”
카엘리온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린 듯했다. 두 사람은 눈앞에서 기둥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있는 힘껏 건물 밖으로 몸을 날렸다.
콰앙-
그들이 빠져나와 겨우 몇 걸음 걷자 건물은 완전히 쓰러졌다. 아폴로니아는 급히 자신과 카엘리온의 옷자락에 붙은 불씨를 꺼뜨렸다.
“아직…… 아직 위험해.”
“으윽!”
숲을 향해 몇 발작을 떼자 어깨로 부축했던 카엘리온이 다시 기침을 토하며 쓰러졌다. 동시에 아폴로니아의 정신도 희미해졌다. 다리의 통증이 너무나 심했다.
“정신 차리…….”
아폴로니아는 아직 근처에 암살자들이 남아 있을 것이라 말하려고 했으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하아…….”
털썩.
저택에서 겨우 몇십 미터 벗어난 곳에서, 두 사람은 쓰러지고 말았다.
“남은 사람들이 있다.”
멀리서 사람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렴풋이 말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불의의 화재로 모두가 죽었다는 것이 황제와 페트라의 포장이라면, 그들은 살아서 나온 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기다리던 자들일 것이다.
‘결국 이렇게 끝났나.’
눈을 뜨려 했지만 한 번 정신을 놓은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의 발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기셨군요.’
그는 결국 그가 증오했던 황실 일가를 전부 죽인 것이다. 자신의 친딸조차도. 아폴로니아는 자신의 눈이 감기도록 두었다. 그리고…….
“전하.”
희미해지는 시야로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달빛처럼 반짝이는 은발이었다.
“꿈이겠지.”
그녀는 힘을 쥐어짜 한 마디를 뱉은 뒤 완전히 기절했다.
* * *
전날 밤. 유리엘은 며칠 동안 이어지는 연회에 의무적으로 참석했다가 빠져나와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적응이 안 되는군.”
그의 주머니는 여러 영애들이 선물한 손수건 따위로 가득 찬 채 머리 아픈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각각의 향을 따로 맡으면 황홀할지 모르나 한데 섞으니 지나치게 독했다. 그래서 유리엘은 그것들을 제복 주머니 깊숙이에 밀어 넣었다.
그는 머리를 깨끗이 하기 위해 아폴로니아를 떠올렸다. 힘들 때는 효과가 확실한 방법이었다.
‘잘 가고 있나?’
그녀는 에핀하르트 대공 일가를 배웅하러 간다고 했다. 유리엘은 따라 나설 생각이었으나 하필 사냥 대회의 우승자는 연회를 전부 참석해야 한다는 전통이 있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대신 아폴로니아는 출발 전 걱정하는 그에게 자세한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에핀하르트 대공이 한때 페트라 쪽에 심어 두었던 간자가 중요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고. 수도를 벗어날 때까지는 별 일이 없을 것이며, 그 후 아폴로니아는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라고.
“간자는 누굽니까?”
그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브랜트 남작. 수도를 빠져나가면 대공 쪽에 합류할 거야.”
그녀는 곧 돌아오겠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떠나고 밤이 된 지금, 유리엘의 마음속에는 이상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고 없이 한 번씩 닥치는 이런 감각은 이는 수년간 암살자로 훈련 받고 살아오면서 그가 깨우친 본능 같은 것이었다.
‘문제가 생겼나?’
연회를 빠져나가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명분도 없고, 근거도 없다. 그가 고민에 잠겨 있을 때, 등 뒤에서는 두 남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남작님.”
“응. 앞으로는 조금 더 자주 보게 될 거야.”
한 명은 귀족에 한 명은 시종인 것 같은 두 사람은 휴게실의 구석에서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나 모든 감각이 그렇듯 청력도 예민한 유리엘의 귀에는 그 내용이 들렸다.
“어쩐지, 좋은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내일 아침이면 난 아마 남작 지위만 가지고 있지 않을 걸세. 내가 여기서 쉬는 동안 처리될 사람들, 아니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남작이라 불린 이는 기분 좋게 웃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옆의 시종은 개의치 않고 맞장구를 치는 듯했다.
“호오…… 그거 축하드릴 일이군요. 그럼 브랜트 자작님이라 불러야 할까요?”
“뭐, 그럴 수도 있고, 나중에는 브랜트 백작 정도 되지 않겠나?”
주륵-
두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은 유리엘의 손에 힘이 풀렸다. 거의 입에 대지 않았던 와인이 그대로 바닥에 쏟아졌으나 그는 이를 인식하지도 못했다.
“브랜트 남작. 수도를 빠져나가면 대공 쪽에 합류할 거야.”
수도 밖에서 기다려야 할 그가 이곳에 있다. 새벽에 어떤 일이 처리되면 작위를 받을 거라는 기대감을 품은 상태로. 유리엘은 날듯이 휴게실을, 그리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남작과 시종은 그를 보지도 못한 듯 수다를 이어 갔다.
‘처리될 일’.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이 갔다.
“이랴!”
유리엘은 아폴로니아가 유사시에 사용하라고 마련해 주었던 흑마 위에 올라 성문을 빠져나갔다. 내일 아침까지는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아폴로니아가 무사하게 버티기를 바라며, 그는 있는 힘껏 말을 달렸다.
* * *
“정신이 드십니까?”
눈을 뜬 아폴로니아의 앞에 보인 것은 왜소한 체구의 남자였다.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있는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남자는 그녀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한 표정이었다.
“수도 근방에 있는 제 집입니다. 황궁에 있지 않을 때는 여기서 생활하지요.”
‘황궁에 있지 않을 때?’
말을 들어 보니 남자는 황실의 사용인인 듯했다.
“……그대는 누구인데?”
“페드로 리스라 합니다. 황궁에서 전하를 뵌 일은 있으나 지금은 황비님들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익숙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얼굴은 닮지 않았으나, 그 표정이, 그녀를 간호하는 모습이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아드리안의 양부로군.”
“그렇습니다.”
그는 침대 맡에서 정식으로 예를 갖추었다.
“딸의 일로 큰 은혜를 입었…….”
“대공은, 그 가족은, 호위 기사들은 모두 어떻게 됐어?”
아폴로니아는 기억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러자 페드로 리스의 주름진 얼굴에 안타까움이 번졌다.
“……두 분 전하께서만 살아남으셨습니다.”
“두 분 전하?”
그녀가 페드로 리스의 말을 이해하려 하며 물었다.
“예. 황녀 전하와 대공자님, 그러니까…….”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끝맺었다.
“카엘리온 에핀하르트 대공 전하 말씀입니다. 선대는 분명 돌아가셨으니까요.”
그는 슬프게 덧붙였다.
“수도로 함께 올라왔던 대공령의 기사들도, 그리고……전하의 호위들도 모두 사망했습니다.”
머릿속이 윙윙거리고 전날 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화염, 무너지는 건물, 멀리서 들리는 비명 소리, 그리고 시드의 가슴에 박힌 검, 그의 텅 빈 두 눈.
“아…….”
다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느끼며, 아폴로니아는 또 기절하고 말았다.
그녀가 다시 깨어난 것은 저녁이었다.
“전하.”
이번에 들린 목소리는 익숙했다.
“아드리안…… 네가 왜 여기 있지?”
“아버지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궁에서 빠져나왔어요. 아버지는 원래 종종 아프시니까 거짓말도 아니죠.”
아드리안은 아폴로니아의 입에 미리 준비되었던 약숟가락을 넣어 주었다. 생기 넘치던 얼굴은 하루 만에 핼쑥해져 있었지만 애써 의연한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드리안은 짧게 설명했다. 일이 잘못됐음을 눈치챈 유리엘이 궁을 나서며 아드리안에게 소식을 전했다고. 마침 근방에 거처가 있는 페드로 리스와 아드리안은 함께 핑계를 대고 빠져나와 아폴로니아를 데려왔다고.
“아슬아슬했어요. 유리엘…… 아니, 유리엘 님이 도착했을 때 두 분 전하께서는 쓰러져 계셨고 건물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대요.”
“기절하기 전에 자객의 발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드리안이 두려움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 유리엘 님은…….”
아드리안은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단어를 고르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은 처음 보았어요.”
아드리안과 페드로 리스가 도착했을 때, 유리엘은 시체가 즐비한 가운데에 서서 남은 몇 명의 자객을 상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고.
“두 분 전하와 겨우 몇 걸음 떨어진 곳이었어요. 유리엘 님이 자객들과 전하들의 사이에 서 있었고요. 결국 그들은 두 분 전하의 몸에 미처 손대기 전에 다 죽었어요.”
두 부녀가 아폴로니아와 카엘리온을 옮기는 동안 유리엘은 자객들의 시체를 전부 불 속으로 넣어 버렸다고 했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폐하께서는 대공령의 호위 기사들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죠. 다 같이 죽은 거라고요.”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은 여전히 조금 멍했고 다리에 다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기절하지 않았다.
“유리엘을 불러 줘.”
그녀는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