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0. 우승자 (12/34)

Chapter 10. 우승자

백 명의 참가자 중 단연 돋보인 것은 패리스였다. 아폴로니아와 상당히 비슷한 아름다운 백금발에 아버지를 닮아 잘생긴 얼굴은 멀리서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옅은 갈색의 눈동자는 햇빛을 강하게 받아 평소보다 밝게 빛났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듯, 그는 다른 사람들과 잘 구분되는 황금빛 천을 팔에 매고 있었다. 참가자들 중에는 그와 유사하게 천을 매거나 가문을 상징하는 옷 색깔을 선택한 자들이 있었으나 황금빛은 패리스 한 명이었다.

그 뒤로는 짙은 녹색 사냥복을 입고 창을 든 이카르트와, 가장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촉감의 옷을 두른 가레스 등도 가까이서 달려 나갔다.

“올해 준비된 사냥감은 어떤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폐하. 5년 전보다 강하고 희귀한 것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황제는 눈을 참가자들에게 고정한 채 시종장의 설명을 들었다. 페트라 또한 간간이 대화에 참여했다. 귀한 사냥감들은 이제 하나씩 참가자들 앞에 풀어질 것이었다.

패리스는 대부분의 기사들과 달리 활을 메지 않고 있었다. 대신 허리에 보검과 단검 한 자루씩만을 차고 있었다. 이는 화살로 잡을 수 있는 작은 사냥감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는 오직 가장 크고 화려한 실적을 원했다.

피잉- 핑-

대회가 시작되자 몇몇 기사들이 활을 쏘아 사냥터에 사는 토끼 같은 것들을 잡았다. 여러 마리를 잡으면 체면치레를 할 수도 있을 것이나 본격적인 승부는 마물의 확보에 달려 있었다.

패리스를 포함한 몇몇 우승 후보들은 일부러 마물을 유인하는 효과가 있는 미향을 뿌리기도 했다. 무척 위험한 선택이었으나 더 많은 사냥감을 확보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신경을 집중하고 대회를 지켜보던 아폴로니아의 눈에 카엘리온이 들어왔다. 그는 활을 메고 있었으나 패리스와 마찬가지로 작은 동물은 상대하지 않았다.

‘따라 할 대상을 잘 골랐네.’

그의 순한 눈이 패리스를 좇는 것을 본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은……’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외모를 가졌음에도 유리엘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남들이 찾지 못하는 곳으로 숨었을 것이다. 비슷한 옷을 입은 기사들 틈이든, 잎사귀도 없는 나무를 기가 막히게 이용해서든. 분명한 것은, 그가 카엘리온의 곁에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펑-

“카야 60마리를 풀었습니다!”

시종장이 외치자 구경하던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신호음이 터지고 사냥터에는 성인 남자와 비슷한 덩치의 검은 짐승들이 달려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대한 쥐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꽤 흉측한 편에 속하는 짐승이었다. 발톱과 이빨이 날카롭고 움직임이 매우 빠르며, 입에서는 사람을 중독시켜 기절시킬 수도 있는 악취를 뿜었다.

갑작스런 습격에 몇몇 참가자들이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순간 그들의 대형이 흐트러졌고, 거대한 쥐들은 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 사이로 달려들었다.

“으악!”

“큭!”

덩치와 맞지 않은 빠른 공격에 몇몇 기사들이 쓰러졌다. 귀족들 중 누군가는 혀를 찼고, 누군가는 환호했다.

아폴로니아는 환호하는 쪽이었다. 카야 두 마리의 앞발에 맞아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은 붉은 옷의 기사가 카엘리온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넘어지면서 교묘하게 옆으로 굴러 카야들의 시야를 벗어나고 있었다.

“비켜라!”

멋지게 등장한 패리스의 보검이 쉭 소리를 내며 허공을 몇 차례 갈랐다. 한순간에 대여섯 마리의 거대한 쥐들이 피를 튀기며 쓰러졌다.

“오오오오! 역시 첫 번째로 마물을 사냥한 것은 패리스 전하이십니다!”

“폐하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지켜보던 모든 이가 환호했다. 뒤이어 이카르트도 창을 휘둘러 멀리 있는 카야 몇 마리를 쓰러뜨렸다.

아폴로니아는 작은 미소만을 띠고 다시 카엘리온을 찾았다. 그는 자기 머리를 붙잡고 덜덜 떠는 시늉을 하다가 패리스의 검이 지나간 후에야 엉덩이를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섰다.

‘이대로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아폴로니아는 안도하면서도 약간의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흘끗 살펴보니 페트라는 집중할 때 언제나 그렇듯 미간만을 찌푸린 채 사냥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펑-! 펑-! 펑-!

거대한 쥐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신호음은 더욱 바쁘게 터졌다. 각종 외양을 가진 마물들이 하늘에서, 땅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참가자들을 공격했다.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크기는 점점 커졌다. 더욱 귀한 사냥감이라는 의미였다.

유리엘은 최대한 검을 쓰지 않으면서 적당한 거리에서 그늘에 숨은 채 카엘리온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날쌔고 강해 보였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이 소년은 상당히 계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커다란 매와 비슷한 마물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며 유리엘은 조금 감탄했다.

“으아앙!”

그는 검을 뽑아 크게 크게 휘두르다가 마물의 신경을 건드려 표적이 되었다. 매는 그를 작은 먹잇감으로 생각한 듯 목덜미 쪽 옷깃을 붙잡고 날아오르려 했다.

“하! 멍청한 놈이 꼴사납구나.”

마물이 2미터쯤 날아오른 순간 근방에 있던 패리스가 장검을 휘두르며 녀석의 발목을 베었다. 새는 끽 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카엘리온을 떨어뜨렸다.

“큭큭. 저 덜덜 떠는 꼴이라니. 한때 북방의 경계를 수호하던 에핀하르트 대공가도 별 볼 일 없군요.”

패리스의 옆에 딱 붙어 있던 가레스 리페르가 카엘리온을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그의 어깨를 밀쳤다.

“힉!”

그가 요란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지자 패리스도 비웃음을 흘리며 커다란 매를 향해 뛰어올랐다. 곧이어 마물은 패리스의 다섯 번째 사냥감이 되었다.

‘일부러 황자가 탐낼 만한 마물만을 골라 도발하고 있다.’

그는 패리스에 의해 구해지는 역할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구할 수 없는 곳에 있을 때에는 몸을 사리고 눈에 띄지 않았다.

“같은 수법을 계속 쓰면 위험할 텐데.”

땅으로 힘없이 떨어지는 그를 받으며 유리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내 걱정 말고 너나 잘 하시지. 보다시피 호위 기사 없이도 잘 하고 있으니.”

얼굴에 울상을 짓던 카엘리온이 유리엘에게만 들리게 맞받아쳤다. 몸으로는 허둥지둥하며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아무 데로나 날렸다.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자 관람석에서 웃음이 터지는 것이 보였다.

“아주 대단하군. 희극 배우를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겠어?”

유리엘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카엘리온도 지지 않고 다시 대꾸했다.

“검 한 번 뽑지 않고 마물을 피하기만 하는 너야말로, 사냥보다는 숨바꼭질에 타고난 재주를 가진 것 같은데.”

사실이었다. 사냥감을 잡으면 순위에 들어 공식 기록에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기에 유리엘은 일부러 마물들을 피하기만 했다. 눈에 띄는 것은 최대한 피하려는 계획이었다.

펑-!

“슬슬 끝나가겠군.”

또 다른 신호음과 함께 거대한 뱀이 사냥터를 휘감을 것처럼 등장하자 유리엘이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이 녀석이 바로 준비된 사냥의 피날레 같았다. 패리스의 상기된 얼굴만 보아도 짐작 가능했다. 그는 곧 다가올 영광의 순간을 생각하며 전율하고 있었다.

* * *

“와아아아아아아!”

긴 혈투였다. 패리스가 피투성이가 된 채 뱀의 목에 마지막 일격을 꽂아 넣자 거대한 마물은 드디어 쓰러졌다.

부러진 창을 든 이카르트는 분하다는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카엘리온은 덜덜 떨며 근방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물론 유의미한 상처는 입지 않은 채였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경하드립니다! 핏줄은 숨길 수 없다더니 역시 폐하의 아들이자 아폴론의 아들입니다.”

“훗날 강한 황제가 되실 것이 분명합니다.”

아직 대회는 완전히 종료되지 않았으나 관람석의 몇몇 귀족들은 벌써 축배를 들고 있었다.

“남은 마물들이 정리되면 마무리하도록 하지.”

황제도 흡족한 듯 말했다. 남은 마물은 카야 쥐 몇 마리를 비롯한 하찮은 것들뿐이었으므로 패리스의 우승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공과 대공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때.

쿵-

“우우우우-!”

사냥터 주변이 한 번 울리더니,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이게 무슨…….”

“우우우우우-.”

짐승의 울음소리는 다시 한 번, 더 가까이서 울렸다. 묘한 소리였다. 귀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뇌리를 울리는 느낌이었다. 짐승이 울 때마다 아폴로니아는 가벼운 두통을 느꼈고, 주변을 둘러보자 몇몇 사람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분명 평범한 짐승이 아니었다. 아폴로니아는 마물 중 소리를 이용해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사냥감은 분명 전부 풀렸다고 했는데?

고개를 돌리자 시종장도 당황한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이번에는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울렸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냥터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대체 이게 뭡니까?”

“뱀 말고 남은 것이 있었단 말입니까?”

“아니, 사냥 대회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렇지, 관람객의 머리까지 아프게 하면…….”

여러 귀족들이 머리를 감싸며 술렁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웅성거림은 완전히 멈추었다.

쿵-!

사냥터 전체가 다시 한 번 흔들렸고, 소리의 주인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저, 저것은!”

사냥터 경계에 네 발로 서 있는 것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검은 마물이었다.

녀석은 한 마리의 짐승이라기보다는 작은 언덕이었다. 늑대와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으나 꼬리는 길고 가는 채찍 같았고, 눈에서는 푸른 안광이 위협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거친 털로 뒤덮인 입가에는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칼로페…….”

관람석의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여기저기서 헉 하는 소리가 나왔다.

자칼로페는 인간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마물이었다. 그를 직접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는데, 이는 녀석이 다른 마물을 주식으로 삼는 희귀한 녀석이라 민간에 내려올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그, 그것은…… 마주치면 절대로 살아날 수 없다는 괴물이 아닙니까?”

그렇다. 무척 드물어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자칼로페를 재수 없게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다.

“분, 분명 죽은 마물의 냄새를 맡고 찾아온 모양입니다. 냄새가 멀리 가지 않도록 제가 조심했어야 했던 것을…….”

사냥감을 준비했던 총 책임자인 시종장이 입술을 떨며 말했다.

사냥 대회 진행 중 인근의 다른 마물이 피 냄새를 맡고 제 발로 사냥터로 뛰어드는 일은 종종 있었다. 이는 예상치 못하게 대회의 판도를 바꾸는 등 재미를 더했기에 일반적으로 환영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칼로페는 달랐다. 녀석이 한 발만 더 내디딘다면 이 대회의 사냥감은 더 이상 마물이 아니라 귀족 자제들이 될 터였다. 황제도 이 사실을 알기에 표정이 어두웠다.

“당장 황자 전하를 호위하여 이쪽으로…….”

“놔두어라.”

황제를 보며 애원하듯 말하는 시종장의 말을 자른 것은 페트라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통을 느끼는 듯 관자놀이를 짚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관람석의 누구보다도 침착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약간의 흥미까지 엿보였다.

“지금 와서 황자를 호위할 길은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저놈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것이지.”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마주했다. 흔들림 없는 바른 자세는 그녀의 큰 키를 더욱 커 보이게 만들었다. 자연스레 관람석의 모두가 페트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폐하, 제가 나서서 놈의 주의를 끌어 보겠습니다.”

“네가 무슨 수로?”

그녀는 여유롭기까지 한 미소를 흘렸다. 사냥터 쪽에서 자칼로페와 대치하는 패리스를 보던 황제가 어서 말해 보라고 손짓했다.

“여기 관람석은 과거 성물로 여겨졌던 나무가 자랐던 곳이기에 마물로부터 안전하지요.”

“그것이 어떻다는 말이지? 마물이 뛰어드려는 사냥터는 이곳과 다르다.”

“제가 이곳으로 녀석을 불러오겠습니다.”

“대체 어떻게?”

황제는 초조해 보였다. 자칼로페는 아직 정확한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사냥터 주변을 맴돌고 있었으나 언제든 그 중간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상 허락을 내린 황제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페트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딱 한 분만 도와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든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있는 방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아폴로니아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려던 찰나 페트라의 시선은 그녀를 스쳐 다른 사람에게 향했다.

창백한 낯을 하고 남편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중년 여인에게로.

“대공비 전하.”

* * *

녀석은 산처럼 거대했다.

사냥감을 선별하듯, 하급 마물과 기사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그 눈빛은 마주치는 사물을 얼릴 것처럼 매서웠다. 슬쩍 드러난 흰 이빨은 사람 한둘은 그냥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고, 단단하게 땅을 딛는 발톱도 마찬가지였다. 쉭쉭거리며 흔들리는 꼬리에는 한 대만 얻어맞아도 살갗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날 것이다.

“우우우우-.”

카엘리온은 그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두통을 느꼈다. 몇몇 기사들은 이미 기절한 듯했다.

그와 유리엘은 하필 괴물의 코앞에 있었다. 녀석이 한 번 입을 열 때마다 그 숨결이 살에 닿을 정도였다. 용맹스럽게 마물을 사냥하던 패리스조차도 머리를 감싸 쥔 채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

유리엘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카엘리온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보았다. 수백 마리의 마물이 풀린 사냥터에서 몇 시간을 뛰어다녔는데도,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그 얼굴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표정 또한 평온했으며 호흡도 전혀 거칠어지지 않았다.

‘괴물 같은 놈.’

카엘리온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유리엘 같은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을 호위로 붙여 주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것이 형식적인 친절이라 생각했다. 필요한 정보를 주었으니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하기 뭐해서 한 가지 도움을 더 준 것이라 여겼다. 이를 거절할 수는 없으니 그에게 대공령 소속 기사 신분을 급히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사냥터에서 그의 모습을 보자 그런 생각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는 사람은 물론 마물로부터도 완벽하게 몸을 숨길 줄 알았다. 그리고 카엘리온에게 정말 필요한 순간에 어디선가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 검 한 번 뽑지 않고도.

“5년 전의 우승자와 겨룬 적이 있습니다.”

그는 문득 자신이 아폴로니아에게 했던 자랑 아닌 자랑을 떠올리고 심한 민망함을 느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 정체 모를 호위기사는 그와 비교도 되지 않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어쩌다가 이런 자를 수족으로 두게 된 건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대공자인 내게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라니.’

그러나 카엘리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의 권위는 아폴로니아로부터 왔고, 그는 아폴로니아에게 복종할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버티고 섰다.

곁눈으로 유리엘의 손이 검 손잡이를 향해 움직이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사냥 대회가 시작된 후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하지만 저걸 정면으로 상대하려고?’

카엘리온은 검으로 눈앞의 괴물을 상대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유리엘이 검을 조금씩 잡아당기려던 그때, 바람이 훅 하고 불더니 기사들을 노려보던 자칼로페가 하늘로 고개를 쳐들었다.

“으르르르릉-.”

녀석은 처음 듣는 울음소리를 내며 허공을 향해 코를 킁킁거렸다. 마치 기존의 장난감보다 훨씬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찾기라도 한 듯.

운이 좋은 것인가?

번쩍거리는 안광을 내뿜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마침내 마음을 정한 듯, 몸을 한껏 웅크렸다가 훌쩍 뛰었다.

“히이익!”

아직 기절하지 않은 몇몇 기사들이 소리쳤다. 그러나 마물의 목표는 그들이 아니었다. 놈은 기사들을 아예 뛰어넘어 사냥터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지나갔다. 어서 이쪽으로 피하…….”

유리엘이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웅웅거리며 머리를 울리던 두통이 사라진 카엘리온은 그 말을 따르며 어깨 너머로 마물이 향한 방향을 보았다.

무엇이 있기에 갑작스럽게 방향을 틀었지?

마물의 시선 끝을 따라가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한 순간,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어…… 어머니…….”

대회의 관람객이 모여 있는 언덕. 그리고 관람석 앞쪽으로 걸어 나와 홀로 마물의 시선을 받고 있는 여인.

그녀는 분명 에핀하르트 대공비였다.

대공비의 한 보 뒤에, 소름 끼치게 싫은 페트라 리페르가 그녀의 팔을 붙잡고 서 있었다. 마치 마물에게 제물을 바치기라도 하듯.

“어머니!”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대공비의 창백한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려 있었고, 마물은 침을 질질 흘리며 전속력으로 그녀에게 뛰어가고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명심해. 어떤 순간에도 네 목적을 잊지 마.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 죽을 위기가 닥쳐도 절대 네 능력을 보이면 안 돼.”

아폴로니아의 경고가 떠올랐으나 새하얘진 그의 머릿속에 자신의 목숨 같은 것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겁에 질린 어머니의 모습뿐이었다. 자칼로페는 이제 관람석에서 1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대공비를 노려보는 그의 거대한 이빨이 희게 빛났다.

“안 돼!”

피이잉-

카엘리온은 마물의 정수리를 향해 있는 힘껏 화살을 날렸다.

* * *

몇 분 전.

“한 분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창백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대공비 앞에서, 페트라는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무뚝뚝해 보였던 그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보였다.

“마물은 원래 사내보다 여인에게 관심을 줍니다. 위험한 일이 아니니 잠시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대공비는 손을 떨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혼자 무엇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도와 달라는 부탁을 뿌리칠 명분은 없었다. 더군다나 황자를 구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 무엇입니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페트라가 미소 지었다.

“참가자들 중 특히 용맹한 몇은 마물을 유혹하는 미향을 몸에 뿌리고 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아시지요?”

“그, 그것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

페트라는 한 손으로 대공비의 손을 잡아 관람석 몇 걸음 앞, 사냥터와 가까운 곳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들이 쓰고 남은 향이 제게 있습니다. 이걸로 마물의 주의를 돌리는 겁니다.”

대공비는 미처 생각하거나 거절할 틈이 없었다. 그녀는 페트라가 이끄는 위치, 그러니까 그녀보다 반보 정도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페트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십수 년을 대공비로 살아 온 그녀는 이미 사냥 대회의 관람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관람석이 위치한 언덕은 신의 가호를 받는다고 불릴 정도의 안전지대였다. 어떤 마물도 그곳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알겠습니다.”

대공비는 결국 대답했다. 미처 관객들이 경황을 파악하기 전에, 페트라는 상자를 열어 안에 든 향료를 자신과 대공비의 몸에 쏟아부었다. 이토록 대량의 향을 한 번에 쓰는 사람은 없는 만큼, 두 사람의 몸에서는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강한 향이 퍼졌다.

“이제 기다리면 됩니다.”

페트라의 목소리가 왠지 음산하게 들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폴로니아는 눈썹을 찌푸린 채 그녀의 계획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 순간 훅 하고 바람이 불었다. 관람석에서 사냥터 방향으로.

“우우우우우-.”

잠시 주변을 탐색하던 마물이 미친 듯이 울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코를 자극한 냄새의 근원을 찾아 킁킁대며 움직였다.

“으르르르릉-.”

마침내 그의 광기 어린 눈에 사냥터 너머의 언덕이 들어왔다. 누가 대응할 시간도 없이, 패리스와 대치하던 마물은 곧바로 사냥터를 가로질러 관람석을 향해 날듯이 돌진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대공비 전하.”

페트라는 대공비의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잡았다. 대공비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 설마!’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두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페트라의 시선이 향한 방향을 깨달은 순간 아폴로니아는 그녀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페트라는, 손으로는 대공비를 앞으로 밀면서, 시선은 사냥터에 고정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냥터 안, 붉은 옷을 입은 고수머리 소년에게.

그녀는 대공비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를 앞세워 마물의 공격을 부추기고 이를 기회로 카엘리온의 진짜 실력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함정이다.’

아폴로니아는 분명 대회 전 그에게 어떤 일에도 반응하지 말고 자신을 숨기는 데에만 집중하라고 일렀었다.

‘하지만 대공비를 이용할 것이라고는…….’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던 그녀의 눈이 사냥터의 소년을 찾은 순간, 그녀는 자신이 건넸던 당부가 헛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위험 앞에서, 어리숙해 보였던 그의 온몸이 미친 듯이 떨리고 붉은 눈은 타오르듯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에는 더 이상 이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머니!”

아찔한 외침과 함께 카엘리온의 손은 결국 활시위를 당겼다.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단단하고 완벽한 자세였다.

쉬이익- 퍽!

“으르르릉!”

그의 손을 떠난 화살은 먼 거리를 날아와 나는 듯이 움직이는 마물의 정수리에 정확하게 꽂혔다. 자칼로페는 화살로 뚫기가 거의 불가능한 두꺼운 가죽을 타고났다. 카엘리온의 화살이 머리에 꽂혔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는 그가 마물의 피를 바른 특수한 무기를 지녔다는 것. 그리고 카엘리온의 기술과 힘이 엄청나다는 것. 전자는 사냥 대회 출전에 있어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나 후자는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니! 방금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굽니까? 에핀하르트 공자가 아닌지…….”

“말도 안 됩니다! 조금 전까지는 활을 잡을 줄도 몰랐는데 어떻게…….”

관람객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폴로니아 또한 크게 놀랐다.

‘기껏해야 타고난 완력이 세고 검술 좀 배운 줄만 알았더니……’

그의 패기며 순발력, 달려오면서 화살을 날리는 능숙함. 모두 상상 이상이었다. 동그랗고 순해 보이던 그의 눈은 목표물에 고정된 순간 매서운 붉은 빛을 뿜었다. 마치…….

‘마치 활을 쥔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궁술은 선황의 특기였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장사였고, 활에 있어서는 죽을 때까지 숙적을 만나지 못했었다. 그리고 눈앞 소년의 몸짓 하나하나는 그 영광스러웠던 선황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나 또한 경계하지 않을 수 없구나.’

아폴로니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저 소년은 언젠가 자의로든 타의로든 황제 후보로 거론될 것이다.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는 듯, 아폴로니아 옆에 선 페트라가 맹수 같은 금안을 번뜩이며 같은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웅성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검은 자칼로페가 화가 난 듯 울부짖었다.

“으르르릉! 우우우우-!”

거리 때문인지, 화살은 머리에 명중했지만 깊이 꽂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자칼로페는 머리를 몇 차례 흔들며 화살을 털어 냈다.

쉬익- 퍽! 퍼퍽!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놀랄 만한 속도로 관객석을 향해 뛰어오면서, 카엘리온은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캥!”

마물의 머리와 목덜미에 화살이 하나씩 박혔다. 자칼로페는 흥분한 듯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노려보며 울부짖었다.

“설마, 설마 녀석을 정말 잡는 것은 아니겠지요?”

“대회가 종료되기 전인데…… 그렇다면 우승은?”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이것저것 물었다. 안전지대에 있는 그들은 큰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황제는 인상을 찡그린 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 속에는 아들인 패리스가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의 우승이 불투명해졌다는 불쾌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 난리 속에서, 페트라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채 사냥터를 가로질러 뛰어오는 카엘리온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폴로니아는 그런 페트라를 눈으로 좇았다.

피잉-

“으릉!”

미간에 박힌 한 발을 끝으로, 카엘리온의 화살은 결국 동이 나고 말았다.

“오오, 마물이 멈춰 섰습니다!”

“정수리에만 몇 발의 화살이 꽂혔는데 쓰러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 그렇다면 역시 우승은…….”

그들은 괴물이 쓰러지기를 기다렸다. 깊숙이 박힌 것은 아니더라도 약점만 골라 날린 화살을, 그것도 마물의 피를 바른 특수한 화살을 몇 발이나 맞고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괴수는 없을 것이다. 보통의 마물이었다면 이미 몇 번이나 죽었을 정도의 상처였다.

“우우우우-.”

그러나 자칼로페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놈은 쓰러지기는커녕 힘을 다해 울부짖었다. 관람석의 귀족들 상당수가 신음을 흘려야 할 정도였다. 마침내 그는 빈 화살 통을 메고 자신을 노려보는 카엘리온을 발견했다.

“으르르릉!”

마물은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카엘리온에게 다가갔다. 이미 사냥터를 가로질러 뛰어와 관람석 앞에 서 있던 카엘리온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군. 마물이 아직까지 버티는 것이 정상인가?”

황제가 묻자 시종장이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저, 저것은 평범한 마물이 아닌지라…….”

“무슨 말인가?”

“특수 화살에는 마물의 피가 발라져 있습니다. 죽은 마물의 힘을 그대로 이용해 다른 마물을 공격하는 방법이지요. 그러나 저놈은 작은 마물을 주식으로 삼는 거대한 괴물인지라…….”

“그럼 어떻게 된다는 것이지?”

“저 화살은 일반 화살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칼로페에게는 힘을 실어 주고 있습니다. 녀석을 죽이는 방법은 그만큼 대단한 무기를 쓰거나 마법을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화살로는 도저히…….”

황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조금 전까지 패리스의 활약이 가려졌다는 이유로 심기 불편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폴로니아는 그 표정을 알았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 얼굴. 그는 이 기회에 남의 손을 빌려 카엘리온을 제거할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제 기사단을 투입해 대공자를 도와야 합니다, 폐하. 그렇지 않으면…….”

“대회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다. 대공자가 우승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면 그것이 공정한 대회라고 볼 수 있겠는가?”

얼핏 공정하게 들리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 옆에서 덜덜 떨던 대공비의 다리가 풀렸다.

“아아, 안 된다. 카엘…….”

이제 마물과 카엘리온의 거리는 겨우 2미터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관람석에서는 거대한 자칼로페의 뒷모습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꼬리만 보일 뿐, 카엘리온의 모습은 그에 가려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크르릉-.”

마물이 카엘리온을 향해 한 발짝 내딛자 카엘리온이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크아앙-!”

“하앗!”

둘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채애앵-

마물의 거대한 앞발에 맞은 그의 검은 단번에 부러지고 말았다.

“아아!”

“대공자님!”

카엘리온은 검이 부러진 채 땅에 쓰러졌다. 들썩이는 그의 어깨만 보아도 그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카르트를 비롯한 몇몇 참가자들이 근처까지 달려와 있었지만, 당장 그를 도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아폴로니아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유리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카엘리온이 워낙 갑작스럽게 행동했기에 유리엘이 미처 따라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이대로 저 아이가 죽는다면……’

그녀의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카엘리온은 미래의 경쟁자인가? 아니면 가장 소중한 동맹인가? 그가 힘을 기른 후에도 아폴로니아는 그를 통제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많은 계산속이 지나가는 와중에, 소년의 목소리가 그녀 마음을 파고들었다.

“저를 살려 주세요, 누이.”

간절하게 떨리던 음성. 눈물이 고였던 눈동자.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카엘리온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죽음을 앞에 두고 의연해져 있었다. 그는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듯, 조금도 꺾이지 않은 표정으로 자칼로페를 마주했다.

그의 손에는 이제 제대로 된 무기가 없었고, 마물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웠다.

“끝인가…….”

황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 있던 아폴로니아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크르르릉-!”

자칼로페는 상대에게 방어 수단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듯, 여유롭게 한 발씩 카엘리온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거대한 입에서 더운 숨이 훅훅 뿜어져 나왔다.

“내 아들!”

대공비의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놈이 거대한 입을 벌려 카엘리온을 향한 순간이었다.

탁-

아폴로니아는 페트라가 떨어뜨렸던 상자 속 향료를 전부 자신의 몸에 쏟아부었다.

“전하!”

옆에 있던 비앙카가 경악해 소리를 질렀으나, 아폴로니아는 오히려 앞으로 몇 걸음 달려 나갔다.

“으르르르릉!”

자칼로페는 무언가 헷갈리는 듯, 카엘리온과 아폴로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넘어져 있는 카엘리온 뒤로 경악한 표정의 이카르트와 다른 참가자들이 보였다.

그녀는 한 발 더 마물을 향해 내디뎠다. 이제 그녀는 언덕과 사냥터의 경계에 서 있었다.

“우우우-!”

자칼로페가 결심한 듯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꺄악!”

“안 돼!”

가까이서 비앙카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이카르트가 달려오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아폴로니아와 거대한 마물 사이에는 누구도 없었다. 거대한 검은 늑대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빛내며 그녀를 향해 몸을 웅크렸다. 흥분했는지 녀석의 꼬리가 더욱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드디어 녀석이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아폴로니아는 한 발을 안전지대에, 한 발을 사냥터에 걸친 채 온몸을 긴장시켰다.

“캥!”

다음 순간 들려온 것은 마물의 비명이었다. 모든 관객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의 눈에는 목덜미에서 피를 뿜으며 밀려나는 자칼로페만 들어올 뿐, 그 상처를 일으킨 원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

땅에 쓰러졌던 카엘리온도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쉬익! 쉭!

별안간 허공에서 은빛의 날카로운 무언가가 날아와 자칼로페의 몸 위에서 몇 차례 반짝이며 호를 그었다. 빛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핏줄기가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캐앵!”

마물이 다시 한 번 고통스럽게 울며 휘청거렸다.

그 뒤에서, 빛나는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그것은 보통 사람이 휘두르기 힘든 장검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장검이 마물의 몸에 그린, 날카로운 궤도였다.

그러나 더욱 빛나는 것은 장검을 손에 쥔 사람이었다. 황홀하게 반짝이는 은발에 머리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색의 눈, 그리고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 입술.

유리엘이었다.

“저, 저것은 또 누구입니까?”

“저런 참가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러나 관객들이 제대로 경위를 파악하기 전에, 유리엘은 다시 한 번 허공으로 날아올라 검을 휘둘렀다.

쉭-

아폴로니아는 그의 검술을 처음으로 온전히 볼 수 있었다. 급소만을 노리고 가장 빠른 길로 향하는 검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계산. 망설임도 군더더기도 없는 아름다운 움직임. 그것은 예술 같았다. 위험한 곡예 같기도 했다.

퍼억-!

“캥!”

유리엘은 마지막으로 자칼로페의 목덜미 깊숙이 검을 찔러 넣었다. 마물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천천히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펑-!

그와 동시에, 대회의 끝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끝…… 끝났다!”

“대회가 끝났다! 그렇다면 우승자는…….”

관객과 참가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소리쳤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유리엘에게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페트라조차도.

황제 또한 그를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경탄이 아닌, 약간의 분노와 놀라움이 섞인 얼굴이었다. 유리엘도 언덕 아래에서 그 시선에 맞섰다.

그는 평온함을 잃지 않은 바다색 눈으로 황제를 마주 보다가, 아직 그대로 들고 있던 장검을 허공에 휙 하고 휘둘러 묻어 있던 마물의 피를 없앴다.

이윽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가까이 오라.”

아폴로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나도 의외의 전개에 넋이 나간 채 유리엘의 짧은 전투를 지켜보았지만, 사냥이 끝나자 그들이 이 상황에 대처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 쪽 보지 마.’

그녀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유리엘은 마치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객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름이 무엇인가?”

그가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와 묵례를 하자 황제가 물었다. 유리엘이 입었던, 눈동자 색과 비슷한 짙은 청색 기사복은 마물의 피가 튀어 강렬한 붉은 색이 섞여 있었다. 이는 다른 사람의 몸에는 지저분하게 보일 것이나 유리엘이 걸친 상태에서는 의도하기라도 한 듯 기막힌 조화를 보이고 있었다. 여인은 물론 남자들도 그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유리엘입니다, 폐하.”

그는 짧게 대답했다.

“어느 집안의 자제인가?”

“…….”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답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은 유리엘이 침묵하자 황제가 다시 물었다.

“유리엘 비체는 에핀하르트 대공령의 기사입니다.”

언덕 아래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저의 호위 기사이기도 하며, 다른 특별한 작위는 없습니다.”

유리엘의 뒤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카엘리온이었다. 그는 유리엘의 한 걸음 뒤에서 멈추어 선 채 황제를 노려보았다. 대공비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아폴로니아의 눈에 들어왔다.

“유리엘 비체…….”

황제가 나지막히 읊조렸다. 그는 상대를 뚫어 버릴 것 같은 시선으로 유리엘을 바라보았다.

“이번 사냥 대회의 우승자는.”

긴 침묵이 끝난 후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에핀하르트 대공령의 유리엘 비체이다.”

그의 입에서 사냥 대회의 공식 결과가 떨어지는 순간,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가 탄성을 내뱉었다.

“와아! 새로운 우승자 탄생을 축하합니다!”

“오오, 이런 혜성 같은 등장이라니.”

“다른 작위가 없다니, 그렇다면 평민 출신이라는 것입니까?”

유리엘 비체는 엷은 미소로 호응에 화답하며 황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몇백 년 만의 평민 출신 우승자이자, 역대 가장 아름다운 우승자의 탄생이었다.

* * *

모든 사람의 눈이 커졌다. 페트라조차도.

“유리엘 비체. 그대는 영예로운 황실 사냥 대회의 우승자이다.”

황제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당연하게도, 딸을 위험에서 구해 주어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작위와 포상을 수여해야 하는바,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라.”

누구도 이 상황에 대비하지 못했다. 유리엘 자신을 포함해서. 눈치 빠른 에핀하르트 대공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 저 아이는 저희의 추천으로 대회에 참가하였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희가…….”

그러나 대공이 입을 열자마자, 유리엘의 청아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선황 폐하의 묘지에 절하게 해 주십시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 부탁에,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 또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겨우 그런 것이 무슨 소원인가? 작위이든, 돈이든, 보석이든, 실질적인 것을 말하라.”

“제게 소원은 그것뿐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황제이자 기사이셨으니까요. 존경하는 선황 폐하께 인사 올리는 영광을 주신다면 달리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의 간청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또렷하게 들렸다. 아폴로니아를 포함한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몇몇 사람들은 갑작스레 선황에 대한 추억에 잠겨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진짜 의도를 찾고 싶었다.

‘정말 저 말의 뜻을 알고 말하는 걸까?’

유리엘은 머리를 숙이며 겸손하게 말했으나 그의 말에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가이우스 황제는 즉위 후 수년간 눈에 띄지 않게 선황의 업적을 지워 왔다. 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황족이 아닌 자신이 적통 황제였던 파스칼 3세보다 위대하다는 점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는 파스칼 3세의 동상을 자신의 것으로 교체하고, 역사서를 교묘하게 개편하여 자신의 공적을 과장했다. 그것이 효과적이었는지, 아니면 황제의 측근이 너무 많이 교체된 탓인지, 가이우스 즉위 7년 만에 귀족들 사이에서는 선황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물론, 한때 선황이 후계로 점찍었으나 현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폴로니아의 입지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황실의 세력 상당 부분은 리페르 가문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기적 같은 일을 해내고 영예를 독차지한 제국 최고 최고의 기사가 잊혔던 선황을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황제’라고 칭한 것이다. 이는 예민하게 보자면 현 황제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유리엘이 왜? 누가 황제였든, 그의 과거는 불행했다. 그가 선황에 대해 특별히 애정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제 꿈은 그것뿐이었습니다. 존경하는 폐하를 직접 뵙고 인사드릴 수 있다면 그 이상 어떤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유리엘이 한 마디 덧붙이며 아폴로니아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슬쩍 틀었다.

‘설마……!’

그는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빙긋 웃었다. 분명 아폴로니아를 향한 미소였다. 짧디짧은 시간에, 그는 아폴로니아에게 힘을 실어 줄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선황의 위대함을 언급함으로써 그에 대한 향수를 상기시키고, 황제가 그에 못 미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선황이 점찍은 후계가 아폴로니아라는 사실을 아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은근히 그녀의 정통성을 일깨워 주는 것.

이는 교묘하고 정치적인 행동이었다.

“감동적이군요!”

“선황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름 없는 아름다운 소년이 선황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거대한 마물을 쓰러뜨리고 사냥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이 소식은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회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나이가 어리고 출신이 밝혀지지 않았기에, 누구도 그의 판단에 계산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선황을 영웅으로 섬겼던 천재 사냥꾼의 이야기만 남을 것이다.

‘언제부터 그런 판단을?’

당황한 아폴로니아를 두고 그는 다시 한 번 예쁘게 웃더니 황제를 마주 보았다.

“그대의 충심을 알겠다. 언제든 선황 폐하께 인사드려도 좋다. 물론 그 외에도 포상이 따를 것이다. 대회의 우승자에게 작위를 주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니라.”

황제는 불쾌한 기분을 완벽하게 감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수여식은 축하연으로 미루도록 하고, 지금은 좀 다른 일을 처리할 필요가 있으니 이만 물러나거라.”

“폐하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유리엘이 사람들 속으로 물러나자 황제는 부드러웠던 표정을 굳히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아폴로니아 앞에 멎었다.

“나의 딸 아폴로니아.”

황제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너는 나의 허락 없이 관람석을 떠나 스스로를 마물에게 노출시켰다. 네가 얼마나 한심하고 위험한 일을 했는지 아느냐? 감히 나를 무시하고 멋대로 그런 행동을 해?”

그녀를 질책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녀가 잘 아는 혐오와 무시가 짙게 배어 있었다.

“왜 그런 일을 한 거지? 네가 자칼로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라도 했느냐?”

딸을 걱정한 아버지의 말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버님. 소녀가 어찌 감히 태양의 명령을 무시하겠습니까?”

그녀는 황제 앞에 무릎 꿇으며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온순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전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을 흉내 내려 애쓰며.

“소녀는 아버지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님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랍니다.”

그녀는 춥기라도 한 듯 팔로 몸을 감싸고 살짝 떨었다. 가냘프고 청초한 한 송이 백합처럼.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네게 마물과 맞서라고 가르친 적 없다.”

“아버님께서는 여인의 의무 중 으뜸은 지아비를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어쨌다는 말이냐?”

“지아비를 섬기는 것이 의무라면, 비록 소녀가 힘없는 여인일지라도 지아비가 위험에 처하면 나서야 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여…….”

그녀는 살짝 눈을 들어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잘생긴 짙은 눈썹을 찌푸렸으나 그녀의 말은 듣고 있었다.

“그 끔찍한 마물이 저의 남편이 되실 분인 이카르트 왕세자님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자 제 한 몸을 바쳐 구하지 않을 수 없었나이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의 사람들이 조금 전의 상황을 언급하며 술렁거렸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 나서기 전에 비에른 왕세자께서도 마물과 맞서고 계셨지요.”

“참가자들 중에서도 가까이 계셨으니 사실 아주 위험한 순간이었지요.”

“아아, 연약하신 몸으로 그런 순정이라니.”

“하지만 그 순간 왕세자께서는…….”

귀족들 중 누군가가 말끝을 흐리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보았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유리엘이 등장하기 전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참가자들은 물론 관람석까지도 위협하던 마물, 그에 맞서다가 위험해진 카엘리온 대공자, 그리고 가까이에 있던 이카르트를 비롯한 기사들, 보다 못해 몸에 미향을 가득 부어 마물의 주의를 돌린 황녀.

“분명 전하께서 나서시는 순간에…….”

그들 중 몇이 기억하는 하나의 장면이 더 있었다.

안 된다고 소리치며 객석 쪽으로 몸을 날리던 이카르트. 그러나 그가 막아선 것은 아폴로니아가 아니었다.

“비앙카!”

그는 분명 아폴로니아 뒤의 다른 여인을 붙잡으며 함께 넘어지지 않았나?

여기까지 떠올린 사람들의 시선이 이카르트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황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카르트 왕세자.”

그의 날카로운 눈이 사람들 틈에 있던 커다란 사내 앞에 멈추었다. 그는 만만치 않게 큰 키의 젊은 여인과 가까이 붙어 서 있다가, 조금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폐하.”

비록 떳떳한 표정이 아니었지만 그는 옆에 서 있는 다른 여인, 그러니까 비앙카 키튼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황제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이리 나와 설명하라.”

이카르트는 못 내켜 하면서도 비앙카의 손을 놓고 아폴로니아 옆으로 걸어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나의 딸은 그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때 그대는 무엇을 했지?”

황제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의 황금안이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카르트는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미처 황녀 전하의 의도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폐하. 저는…….”

그는 잠시 아폴로니아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황제를 보았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저는, 비앙카 키튼 영애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언덕에 있던 모두가 조용해졌다.

“니아의 시녀를 말하는 건가?”

“그녀는 단순한 시녀가 아닙니다, 폐하.”

이카르트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강건하게 말했다. 황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녀는…… 저는 그녀를…….”

“이카르트 왕세자.”

이카르트가 무언가 이야기하려던 찰나, 황제가 다시 그의 말을 잘랐다. 낮고, 무겁고, 어딘가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그대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 잘 생각하고 말하게.”

아폴로니아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이카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 짐작하고 있구나.’

하긴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약혼자를 두고 시녀를 구하러 뛰어들었는데 누군들 그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겠는가. 그럼에도 다시 묻는 것은 애초에 왕세자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제는 지금, 그에게 결혼을 강행할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 아폴로니아가 있든 없든. 이카르트도 그 뜻을 이해했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눈이 잠시 아폴로니아를 향했다가, 다시 건너편에 서 있는 비앙카를 향했다. 이윽고 왕세자의 입이 다시 열렸다.

“송구하옵니다, 황제 폐하.”

그는 이번에는 떨지 않았다. 멀리서 비앙카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보였다.

“저는 황녀 전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부디 파혼을 허하여 주소서.”

한순간 관람석 전체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방금 뭐라 말했지?”

“황녀 전하와의 혼인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비에른은 제국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잇는 이카르트의 눈에는 황제도, 황녀도 없었다. 오직 그가 사랑하는 여인, 비앙카 키튼뿐이었다.

황제의 얼굴에 노골적인 분노가 자리 잡았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황녀 전하와의 파혼을 청합니다.”

물러섬 없는 그의 부탁, 아니 요청에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황제 앞에 무릎 꿇은 아폴로니아에게로 옮겨 갔다. 아폴로니아는 지금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윽…… 흐읍.”

그녀는 큰 소리로 울기보다는 울음을 참는 것을 택했다. 그 편이 더 진심 어리게 보일 것이다. 다만 몇 방울의 눈물은 끝내 뺨을 타고 내려와 떨어지도록 신경 썼다. 그녀가 가련하게 몸을 떨며 울자, 좌중의 시선은 아폴로니아를 떠나지 못했다.

“불쌍한 황녀 전하…… 몸을 던져 약혼자를 구하려 하셨는데.”

“어쩌면 바로 그 순간 배신을 당했을까요? 나이도 어리고 여리신 분이 어쩜…….”

“세상에, 곁에 뒀던 시녀가 그런 야심을 품었을 줄이야…….”

불쌍하고, 안타깝고, 기가 막히고.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대부분 아폴로니아가 의도한 방향과 같았다. 내친김에 그녀는 한발 더 나아가기로 했다.

“저는, 저는 괜찮아요. 제가 어떻게 사랑하는 두 사람을…… 부디 왕세자님의 청을 들어주세요, 아버지.”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에 좌중이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누군가는 감동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카르트도 순간 놀란 듯했다. 그러나 황제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너는 참으로 쓸모없는 딸이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내뱉은 것은 그 한마디였다. 아폴로니아가 더욱 서럽게 울며 고개를 떨어뜨리자 그는 고개를 다시 이카르트 쪽으로 돌렸다.

“황가의 혼인이 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왕세자인 그대가 모르지 않겠지? 황실과 비에른 왕국 사이에 구두로 약속한 거래는 다 잊은 것인가?”

명색이 일국의 황제라는 자가 상대가 파기하자는 혼사에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수 없다. 그래서 황제는 사무적인 부분을 문제 삼기로 한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의 예상과 다르게, 이카르트는 오히려 조금 더 당당해진 태도로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폐하, 기존에 언급하신 거래는 제국의 사정으로 실행할 수 없게 된 것으로 압니다.”

“무엇이라?”

“비에른에서 판매하기로 하였던 찻잎을 공급하실 수 없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카르트는 설마 그 사실을 모를 줄 알았냐는 듯한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황제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자, 이카르트는 더욱 강하게 말했다.

“제국과의 신의를 비에른에서 어찌 배신하겠습니까. 그러나 란섬의 다르마유 차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모두 판매되어, 부왕과 폐하께서 합의하신 내용대로는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

“그 문제에 대해서 제국의 책임을 물을 생각은 당연히 없습니다. 하나 이 시점에 계약의 내용을 바꾸는 것 또한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자네 혼자만의 생각으로 진행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황제는 붉어진 얼굴로 겨우 말을 이었다. 그 옆에 선 페트라 또한 보기 드물게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백작의 입은 확실하게 막았는데 어떻게 그 말이 새 나간 것인가?

“저는 몸이 아픈 부왕을 대신하여 지난 5년간 정사를 맡아 왔습니다. 저의 뜻은 곧 비에른의 뜻입니다.”

이카르트는 과연 어른이었다. 그는 아폴로니아가 보아 왔던 모습 중 가장 용감하고 성숙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비앙카가 설레어하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아폴로니아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약서의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비에른에서 얻는 것은 제국 일부 지역에 대한 무기 공급권. 그러나 그 가격이나 요구 사항은 비에른에 크게 유리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이 결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황실과의 돈독한 관계였으나, 이제 이카르트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겨 버렸다. 황제도 이를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르르 떨 뿐이었다.

“……언젠가 자네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영애를 얻을 수 있다면, 어떤 대가도 아깝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긴 눈싸움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황제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두 사람의 파혼을 선언했고, 이카르트는 눈물을 훔치는 아폴로니아를 미안한 듯 보더니 연인에게 달려가 손을 잡았다.

이 사건은 장소가 장소였던 만큼 상당한 유명세를 탔다. 대륙인의 절반은 이카르트가 냉철한 배신자라고 욕했고, 나머지 절반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그가 낭만적이라며 찬양했다.

양쪽이 팽팽히 대립했기에, 훗날 이 일은 여러 이름의 가곡과 희극으로 재탄생했다. 그렇게, 아폴로니아가 뿌렸던 씨는 적절한 시점에 찬란한 꽃을 피웠다.

* * *

“성공이야, 아드리안.”

긴 하루를 보내고 별궁으로 돌아온 아폴로니아는 제일 먼저 아드리안을 찾았다.

“비련의 주인공이 되셨다더니,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자극적인 소문은 빨리 퍼지는 법이다. 아드리안은 이미 다 들었다며, 농담 섞인 축하의 말을 건넸다.

“다 네 덕분이다. 어쩌면 네가 비앙카보다 이카르트를 더 잘 알지도 모르겠네.”

아폴로니아는 쓸데없이 두꺼웠던 옷과 불편한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사실이었다. 사람을 매수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이카르트의 취향을 파악한 것도, 그에 맞게 비앙카의 교육에 신경 쓴 것도 아드리안의 공이었다. 그녀는 볼수록 유능한 아이였다.

“그뿐인가요. 비앙카를 따라다니던 후작 영식도 제가 따돌렸는데요. 저 이런 일에 소질이 있나 봐요. 다음번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제가…….”

부쩍 여유가 생겨 농담을 계속하는 아드리안에게 아폴로니아가 눈을 흘겼다.

“나이가 좀 더 들면 모를까. 지금은 안 돼.”

가레스 한 놈 떨쳐 내는 것도 힘든데 한 놈을 더 붙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딱 잘라 거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레스가 계속 아드리안을 귀찮게 굴면 다른 남자를 끌어들여 그 손으로 몇 대 패 주는 방법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쉽게 시집보낼 생각 없으니 잘 붙어서 일이나 하렴.”

“시집간다는 건 아니고……!”

아드리안이 얼굴을 붉히며 항변하려 했으나 그때 누군가의 조심스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천천히 문을 밀고 들어온 것은 비앙카였다. 사냥터에서 돌아와 수수하고 편안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깨끗하게 빗어 넘긴 그녀는 문가에 멈추어 서서 머뭇거렸다.

“아드리안, 일단 나가 줘.”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자 아폴로니아는 비앙카에게 손짓해 가까이로 불렀다.

“기다리고 있었단다.”

“전, 전하…….”

비앙카는 주춤거리며 조금씩 아폴로니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디 네 말부터 들어 볼까?”

아폴로니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비앙카는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전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비앙카로서는 많은 고민 끝에 한 말이었다. 그녀는 사냥터에서의 일로 주변인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듣고 온 참이었다. 비앙카는 원하는 남편감을 사로잡았지만 비에른에 가서조차도 배신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환영받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억울했지만 한편으로는 아폴로니아에게 미안했던 것도 사실이기에, 그리고 아폴로니아가 저녁 연회에서 엉엉 울며 그녀를 욕하기라도 하면 낭패이기에 그녀는 형식적으로나마 사과를 하기로 결정했다.

하긴 단순히 차이는 것을 넘어 그렇게 공개적인 파혼이라니. 이런 굴욕을 겪은 황녀는 죽으려 들지도 모른다.

비앙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카르트의 공개적인 고백을 들은 후 따라왔던 사람들의 시선이 문득 생각났다. 천하의 죄인을 보는 그 눈빛들. 심지어 아버지인 키튼 백작조차도 얼굴에서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우지는 못했다.

비앙카는 성인군자는 아니었지만 항상 솔직하고 당당하게 살아왔기에, 누군가의 등 뒤에 칼을 꽂았다는 사실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사태에 가장 충격을 받았을 한 사람이 자신의 코앞에 있었다. 철없고 순진한 어린 황녀가.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구나.”

푹 숙인 고개 위로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냥터에서처럼 울음을 터뜨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소처럼 차분했다. 아니, 오히려 평소와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마음에도 없으면서, 비에른의 예비 왕비인 너를 내가 벌할 수 없음을 알면서 죽여 달라느니, 벌을 달게 받겠다느니 하는 내숭은 너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단다.”

“저, 전하?”

“하지만 네가 내게 미안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지 않니? 아직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것 말이다.”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말투와 너무나도 친절한 태도에, 비앙카는 미안함도 잊은 채 아폴로니아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시녀의 가장 큰 덕목은 다른 주인을 섬기지 않는 것이란다. 물론 네가 나를 진짜 주인으로 생각하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만.”

분노도 서운함도 없이 그저 사실만 지적하는 그 말에 비앙카는 놀라서 굳어 버렸다. 물론 눈치가 빠르고 처세술 좋은 사람이라면 황실의 업무를 처리하는 리페르 공작 부인이 의도적으로 비앙카를 보냈다는 것 정도는 알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리고 순진하기 그지없는 아폴로니아로부터 기대한 적 없는 현명함이었다.

더 이상한 것은 그녀가 지금 와서 명확하게 이 사실을 지적한다는 것이었다. 페트라 리페르의 사람인 것을 알았다면 오히려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모님의 요구 사항은 별것 아니었겠지만 솔직하고 올곧은 네 성정과 잘 안 맞아 보이더구나. 너무 걱정 말렴. 네가 했을 보고라고 해 봤자 내게 해가 될 것은 없었을 테니까.”

아폴로니아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비앙카가 하려던 변명을 대신해 주는 그녀는 악의도 없고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비앙카는 아폴로니아가 어떤 말을 듣고 싶어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지 종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최대한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네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겠지. 고모님은 네게 모든 것을 줄 수 있었고, 곧 시집가 버릴 예정이었던 나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

비앙카는 부인하고 싶었지만 진실과 다른 말은 입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그게 달라진다면 어떻게 할래?”

“예?”

아폴로니아는 우아한 웃음을 띠고 비앙카를 빤히 쳐다보았다. 익숙지 않은 눈빛이었다. 황가에 전해지는 눈동자는 아폴론과 닮았다고 한다. 비앙카는 처음으로 그 의미를 이해할 것 같았다. 믿기지 않는 위압감, 마음을 꿰뚫리는 듯한 느낌, 그리고 기묘한 아름다움.

“넌 모르겠지만, 난 이미 네게 이카르트를 주었단다.”

아폴론을 닮은 그녀는 비앙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큰 것을 줄 계획이야.”

“……예?”

“페트라 리페르가 약속한 것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부귀, 너는 훼손됐다고 생각하는 너와 네 가문의 온전한 명예, 왕비로서의 업적까지.”

“전하…….”

“지금 내 사람이 된다면 다 네 것이란다.”

비앙카는 할 말을 잃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는 것 외에 다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충격 받은 와중에도 그녀의 귀에 걸리는 한 마디가 있었다.

“이카르트를…… 이카르트를 제게 주셨다는 것은, 그럼…….”

아폴로니아는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비앙카에게 이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비앙카의 머리에 지난 한 달 동안의 일이 스쳐 갔다. 이카르트와 시간을 보내라고 등을 떠밀었던 아폴로니아. 옷이며 장신구며 세세하게 신경 써서 입히고 꾸며 주던 그녀의 모습,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이카르트의 취향에 얼마나 완벽하게 들어맞았는지도. 순진하게도 비앙카는 그 모든 것이 운명이라 생각했다.

“물론, 네가 원하지 않았다면 강요하지는 않았을 거야. 내가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너와 이카르트가 신기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건 사실이란다.”

그녀는 바보처럼 시녀에게 배신당한 주인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판을 짜는 아폴로니아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춘 것은 오히려 비앙카였다. 비앙카를 빤히 바라보던 아폴로니아의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다. 그녀는 들어 본 적 없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여기서 정하렴. 어느 쪽을 선택하든 너는 비에른의 왕세자비가, 그리고 나중에는 왕비가 되겠지. 그러나 이대로 이카르트와 결혼을 진행한다면 주인을 물었다는 불명예가 너를 항상 따라다니게 될 거야. 너도 그걸 알기 때문에 굳이 내게 사과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네가 평소에 나를 미워했다, 내 보석을 훔쳐서 달고 내 약혼자를 만났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다는 것은 아는지 모르겠구나.”

“그것은 혹시 전하께서…….”

비앙카는 자신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는 것을 느꼈다.

“그 소문은 내가 퍼뜨린 것이 아니라 너와 이카르트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퍼진 거란다. 물론 그 보석들은 다 내가 빌려줬던 거니까 나나 아드리안이 해명할 수야 있겠지만…….”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으며 말을 끝맺었다.

“내게 충성하지 않는 시녀를 위해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겠지. 비에른까지 소문이 퍼져 기껏 이루어진 사랑이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히더라도 말이야.”

여상한 표정과 대조되는 싸늘한 협박에 비앙카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폴로니아의 말은 전부 옳았다. 비앙카의 평판은 반나절 만에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주인의 뒤에서 그 일거수일투족을 다른 사람에게 보고해 왔던 비앙카는 그에 대해 아폴로니아의 도움을 요청할 자격이 없었다.

“정말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이 늦어 버린 것 아닙니까? 해명으로 소문을 잠재운다 한들…….”

비앙카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고, 그녀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아폴로니아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수많은 상대와 대련을 해 보았으나 무기조차 들지 않은 소녀에게 기가 꺾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 연회에서 내가 직접 두 사람을 위한 축사를 해 준다면 어떨까?”

비앙카는 눈을 크게 떴다. 황족의 축사는 그 자체로 결혼을 앞둔 시녀에게 더없이 큰 영예였다. 더군다나 이카르트로부터 파혼당한 전 약혼자가 두 사람을 축복한다면 사람들이 비앙카를 욕할 명분은 옅어질 것이다.

“그리고 모두의 앞에서 이것을 네게 걸어 주마. 결혼 선물로써 말이야.”

비앙카의 눈앞에 찬란한 푸른색 빛이 반짝였다. 고개를 들자 아폴로니아가 웃으며 그녀에게 팔을 뻗고 있었고, 그 손가락 끝에는 작은 수정 조각들을 두른 눈부신 사파이어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달의 눈물’이라고 불렸던 보석이다. 보석 자체는 최고급품이 아니지만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처음 착용하셨던 물건이니 의미가 남다르지.”

비앙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황실의 일원이 착용했었던 목걸이는 상징성이 짙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아폴로니아가 이를 그녀에게 선물한다는 것은 단순히 비앙카를 용서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그녀의 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비에른에서도 두 팔 벌려 그녀를 환영할 수밖에 없다. 제국의 몇몇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아폴로니아를 멍청하다 욕할지언정 비앙카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앙카는 작게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제안이 반가운 동시에 아폴로니아가 무서웠다. 휘둘리고 빼앗기는 천성을 타고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혼과 관계된 모든 이를 장기말처럼 움직이는 소녀. 그것이 황녀의 정체였다.

그러나 길게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비앙카는 한 발 다가와 아폴로니아의 곁에서 양 무릎을 꿇었다.

“키튼가에서는 훌륭한 남편 외에도 중시하며 찾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강하고 현명하며 수하를 아껴 주시는 주군입니다.”

그녀는 천천히 아폴로니아의 오른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

“전하께서 갖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비앙카는 전하를 돕겠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아폴로니아를 마주 보았다. 오묘한 금적안과 기개 어린 황갈색 눈빛이 허공에서 만나며 두 사람 사이에 무언의 결속이 생기고 있었다.

* * *

“계획대로 되었나요?”

연회를 위해 아폴로니아의 머리 손질을 도우며 아드리안이 물었다.

“응. 예상대로야.”

“대단하세요.”

아드리안은 감탄 섞인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계획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그보다 대공에게 말은 전했니?”

아폴로니아가 습관처럼 말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아드리안 또한 나직하게 대답했다.

“말씀대로 비앙카와 말씀을 나누시는 사이에 끝냈어요.”

그녀가 대공에게 전한 말은 짧고 간단했다.

‘연회를 기다리지 말고 수도를 벗어나세요.’

아드리안은 처음에 그 심부름을 맡고는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당장 떠나면 무례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텐데요.”

“체면이나 예의를 따질 때가 아니야. 당장 수도를 벗어나면 대공을 도울 수 있는 귀족가 사병은 많아. 그러니 그 전까지가 위기인 셈이지.”

“하지만 아무리 폐하라도 설마 오늘 손을 쓰실 수 있나요? 수도에 지방 귀족들까지 다 모여 있는 상황에서 대공가를 건드리면 다른 귀족들이나 대공가 소속 기사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있을 리가…….”

“네 말도 맞아. 마찰을 피하기 어렵고 누군가는 이 일을 계기로 반란을 도모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당장 치지 않을 수도 있다.”

아폴로니아는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카엘리온을 후계로 둔 에핀하르트 대공 일가는 아버님이 아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야. 고모님이라면 모든 결과를 감수하고라도 재빨리 제거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하셨을 가능성이 커.”

그녀는 조금 뒤에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라면 그렇게 판단했을 테니까.”

아드리안이 움직임을 멈추고 겁에 질린 듯 눈을 크게 떴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흔들며 살짝 웃어 주고는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설령 아니더라도 그 위험을 감수하며 수도에 남는 건 현명하지 못해. 다만 고지식한 대공이 내 말을 듣고 결단을 내려 줬을지 모르겠구나.”

사냥 대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카엘리온. 그와 대공 일가가 바로 움직이지 않으면 그의 진짜 위기는 지금부터일 터였다.

“걱정 마세요, 전하. 한참 전에 말씀을 전했으니 지금쯤이면 꽤나 멀리 갔을 거예요.”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으나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 *

“저렇게 반짝이는 은발은 처음 봤어!”

“사람이 어쩜 저렇게 생겼을까? 신이 조각해서 숨을 불어넣은 것 같아.”

“한 번만 닿아 보고 싶어요.”

사냥 대회 우승자 축하연의 화제는 당연히 유리엘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아름답고 강한 어린 기사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런데 카엘리온 대공자도 대단하지 않으셨어요?”

“맞아요. 아직 열다섯밖에 안 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몇 년 지나면 유리엘 님을 따라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패리스 님보다 더 대단한 것 같기도……. 그 눈동자를 보셨나요?”

물론 조용했던 에핀하르트 대공의 후계자 또한 만만치 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그에 대한 대화는 더 조용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황제가 달가워하지 않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회 시작 전까지는 이카르트와 아폴로니아의 파혼 스캔들 및 여우 같은 비앙카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 주목을 끌었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가 두 사람을 공식적으로 축복하며 할머니의 유품을 시녀에게 선물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들은 더 이상 함부로 그 일을 논할 수 없음을 알고 다른 화제로 옮겨 갔다.

유리엘은 푸른색 천에 금실 자수가 화려하게 새겨진 제복을 입고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보검을 착용한 채 연회장 정중앙에 서 있었다.

“비체 남작님.”

아폴로니아는 그에게 다가가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사냥터에서 제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녀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순진한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젊은 영웅과 그가 구해 준 황녀의 조합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그 상황은 유리엘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전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아폴로니아에게 답했다.

최소한의 예의만을 갖추고 말을 아끼는 대회 우승자의 모습은 신비로웠다.

연회장의 손님들은 남녀 불문 모두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젊은 영애들은 수줍게 미소를 던졌고, 젊은 영식들은 그와 친분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으며, 몇몇 나이 든 귀족들은 자신들의 딸이나 조카가 유리엘과 몇 살 차이가 나는지 계산하고 있었다.

“잘 어울려. 이젠 귀족이네.”

연회장이 바쁘고 시끄러운 틈을 타 아폴로니아가 목소리를 낮춰 유리엘에게 속삭였다.

“작위는 그다지 필요 없는데 말입니다.”

그는 보검뿐 아니라 황제로부터 남작위와 작은 영지를 하사받은 참이었다.

“필요해. 원래 내가 주려고 했었지만 차라리 잘됐어.”

“전하께서 주셨다면 기쁘게 받았을 겁니다.”

유리엘이 아폴로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 뒤에 서 있던 몇몇 영애들이 부러움 어린 시선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귀족의 행동 범위는 평민에 비해 훨씬 자유롭다는 점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려 했으나 뒤편에서 어느 귀족 영애가 유리엘에게 인사하게 위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우선 물러서야 했다.

“전하, 물건을 떨어뜨리셨습니다.”

유리엘은 돌아서는 아폴로니아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몸 쪽으로 끌며 말했다. 그가 다른 한 손으로 내민 것은 새하얀 손수건이었다.

“그건 내 것이 아니…….”

“에핀하르트 대공 일가가 연회장에 있습니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말을 자르며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아폴로니아가 놀라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다시 예의 바른 귀족 청년의 얼굴로 돌아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세심하시군요. 고마워요.”

“별 말씀을. 전하를 뵈어 영광입니다.”

두 사람은 마주쳤던 눈을 돌려 각자의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아직 수도를 떠나지 않았다니?’

아폴로니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뭘 믿고 호랑이 굴에서 버틴단 말인가? 그녀가 한숨을 쉬며 대공을 찾으려던 순간, 시종장 모튼 프라이어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 계셨습니까, 황녀 전하.”

“모튼!”

아폴로니아는 순간적으로 환한 미소를 입에 걸며 말했다.

“낮의 일로 크게 충격을 받으셨을 줄 알았는데 괜찮으시니 다행입니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겸손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사냥 대회에 마물이 뛰어들어 아폴로니아가 위험할 뻔한 일에 자신의 책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더욱 순수하게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세요. 덕분에 멋진 기사님을 만났으니까요.”

모튼 프라이어의 눈에 안도와 무시가 함께 스치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께서 전하를 찾으십니다.”

“나를?”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연회장 옆의 작은 방으로 향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왔느냐, 니아.”

황제 전용 휴게실 겸 간이 접견실인 방에 들어서자 황제가 평소보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반겼다.

“아비로서 네게 맡길 일이 생겼단다. 피곤하더라도 네가 해 주어야 한다.”

“하명하세요, 아버지.”

의아한 이야기였다. 타국 왕자와 혼인해 그에게 부귀를 가져다주는 것을 제외하면, 황제는 아폴로니아에게 특별히 일을 맡긴 적이 없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휴게실의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가 찾던 세 사람이 들어섰다.

“폐하를 뵙습니다.”

“더 머물지 못한다니 아쉬운 일이로군.”

황제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치 오랜 벗이라도 마주친 듯한 얼굴이었다.

“이미 넘치도록 황송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폐하.”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마른 몸에 다리를 살짝 저는 남자와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두 사람.

에핀하르트 대공 일가였다.

“인사는 이미 주고받았겠지, 니아.”

그는 아폴로니아에게 똑같이 부드러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네가 나를 대신해 귀한 손님을 수도 밖까지 배웅해 줘야겠다.”

* * *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짤막한 인사가 오간 뒤 아폴로니아와 대공 일가는 사람이 없는 황제궁 뒤편의 정원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전하.”

여전히 안색이 창백한 대공비 옆에 서 있던 카엘리온이 한 발 나서며 설명하려 했다. 그는 머리카락과 같은 검은색 제복을 갖춰 입은 채였다. 아직 덜 자랐지만 키는 아폴로니아보다 더 컸고, 얼핏 보아도 그 자세며 몸짓 하나하나에 품위가 흘렀다.

마물에게 다쳤던 상처들이 목과 손목에 보였지만 상당히 좋아져 있었다. 아폴로니아에 못 미치지만 그에게도 일반인과 다른 회복력이 있음이 분명했다.

‘다시 보아도 할아버지와 비슷해.’

어리지만 그는 분명 타고난 위엄이 있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말을 시작한 카엘리온을 한 손을 들어 저지했다.

“대공께서 설명하시지요.”

대공 일가는 결국 그녀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고, 그 결정은 에핀하르트 대공의 책임이고 판단이다. 그녀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다. 아들과 대조되는 마르고 약해 보이는 체격을 가진 대공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카엘에게 해 주셨던 조언을 모두 들었습니다. 아들놈이 가만히 있으라는 전하의 당부를 따르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지나간 일은 됐으니 아직 수도에 남아 계신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아폴로니아는 뻔한 위로를 생략하기로 했다. 그러기에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전하의 전언대로 일찍 떠날 계획을 세웠습니다만…….”

“떠나지 않으셨군요.”

“측근으로부터 한 가지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귀족들 사이의 뒷말을 걱정해 저희가 수도에 있는 동안이 아닌, 빠져나간 직후에 처리하기 위해 암살자들을 보냈다는 이야기를요.”

“믿을 만한 사람입니까?”

“오래전 제가 목숨을 구해 주었던 자입니다. 다른 소식통으로 알아보니 그자가 말한 바로 그 자리에 리페르 공작가의 측근 몇이 모이고 있다고 합니다. 필시 저희를 맞을 준비를 하는 거라 판단되어 저희 쪽에서도 대응을 지시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대공은 조심스레 아폴로니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들로부터 그녀에 대해 전해 들은 것인지, 그는 그녀의 조언을 듣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면서도 아폴로니아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아폴로니아는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측근 몇이 ‘모이고’ 있다.

대공이 얻은 정보가 사실이라고 할 때, 그 말은 대공이 그녀의 조언대로 빠져나갔더라면 황제의 준비가 다 끝나기 전에 그 수하를 만났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소수 정예인 호위 몇의 희생을 각오하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아폴로니아는 그의 따뜻하고 동정심 많은, 때로는 우유부단한 태도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분명 그는 호위의 본분이라고는 하나 자신을 위해 기사들을 죽을 위기에 처하게 하는 일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대공이 오랜 세월 함께한 수하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 또한 칼트산에서 시드와 유리엘의 안전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었나?

그러다가 죽을 뻔했지만.

어쨌거나 이미 늦은 일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대공의 대응이 충분할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황녀 전하께서 직접 수도 바깥까지 배웅을 나가시게 한다는 전언을 듣고 완전한 확신이 들더군요.”

그는 마지막 말을 하며 목소리를 한결 낮추었다.

“지금은 폐하에 반하는 지방 귀족들이 수도에 집결되어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그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터. 일부러 친딸인 황녀 전하를 함께 보내 저희 가족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면 우리가 헤어진 직후 누군가가 대공 전하를 해하더라도 아버지를 의심하는 목소리는 작을 것이라 판단했으리라는 말씀이시군요. 친딸인 저를 보내 배웅하는 예를 갖추었다, 귀한 손님으로 대접했다는 평판을 생각해서요.”

“그렇습니다. 합리적인 판단이고 모든 정황과 맞아떨어집니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곱씹어 보면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황제의 입장에서도 대공을 제거하면서도 평판을 해치지 않을,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으로는 최선일 것이다.

다만 이는 페트라의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과감했고, 중대한 일에서는 굳이 두 마리 토끼를 쫓는 대신 한 마리에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이미 수도 밖에 영지를 가진 멜린 자작가에 사병을 요청해 두었습니다. 소식을 미리 들은 이상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대공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황제이지 그 동생이 아니다. 그는 페트라보다 많은 것을 신경 썼고 간혹 그녀와 다른 방식으로 일처리를 해 왔다.

“내일 출발하지요.”

그녀는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대공과 헤어졌다. 다만 뱃속에서 계속되는 불길한 예감을 완전히 떨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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