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9. 또 한 명의 황족 (11/34)

Chapter 9. 또 한 명의 황족

비앙카는 하루에도 스무 번씩 마음이 바뀌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사내 중의 사내를 찾아라. 좋은 남자를 찾으면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말거라.”

아버지는 숨기지도 않고 이렇게 일렀었다. 아버지처럼 듬직한 신랑감을 찾는 일은 비앙카도 바라던 바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덩치 크고 힘이 세지 않으면 남자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동생들은 여자보다 더 예쁜 여리여리한 꽃미남이 좋다고들 했지만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와 키튼 백작은 항상 의견이 일치했다.

아버지는 또한 덧붙였었다.

“황녀 전하에 대한 간단한 보고를 리페르 공작 부인께 하면 너의 종신대사는 문제없을 것이다. 단테 후작가의 장남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하더구나.”

그녀는 무언가를 숨기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기에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공작가에 보고하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보고 대상은 어차피 황녀의 고모였기에, 그리고 그 대가가 무척 마음에 들었기에 이번 한 번은 그 제안을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폴로니아의 시녀가 된 지 약 한 달, 그녀의 마음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예상이 아주 조금씩 엇나갔기 때문이었다.

우선, 까탈스러운 줄만 알았던 그녀의 주인 아폴로니아는 의외로 무척 친절했다. 그녀는 비앙카에게 여유롭게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업무를 주었다. 그 외의 시간에는 책을 읽든 검을 수련하든 편히 내버려 두었다.

그렇다고 비앙카를 방치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기존에 있던 시녀인 마야와 아드리안 등은 비앙카를 친절하게 가르쳐 주면서도 그녀의 의견을 무척 존중했다. 주인의 세심한 배려가 없었다면 그 정도로 편안한 환경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을 비앙카는 잘 알았다.

‘공작 부인의 사람이 되어야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거야.’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해 보아도, 마음이 조금씩 아폴로니아에게 기우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황녀인 아폴로니아의 약혼자, 이카르트 왕자였다.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 느꼈다. 그는 비앙카의 이상형이었다.

아버지나 오빠보다 훨씬 큰 키와 넓은 어깨, 큼직한 근육이며 위엄 있는 목소리는 가만히 있어도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냈다. 젊은 나이에도 덥수룩한 수염은 남자다운 매력을 한층 더했다.

무예에 대한 그의 열정은 또 어떤가. 그는 존경스럽게도, 언제나 검과 수련, 그리고 바람직하게도 몸 키우는 방법만을 생각했다. 이두근과 삼두근의 차이도 모를 다른 곱상한 남자들처럼 시며 음악 따위에 아까운 시간을 쏟지 않았다.

그를 두 번째로 만난 날,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강한 권유로 이카르트의 수련 상대가 되었다. 체구에서 큰 차이가 나는 그는 대련에서 그녀를 압도하였지만, 그녀가 외할아버지의 검술 초식을 선보이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자세나 기세는 저보다 훌륭합니다! 사내였다면 제가 상대가 되지 않았겠군요!”

우연히도 그 전날 아폴로니아가 검술을 구경하고 싶다면서 비앙카의 사촌 오빠를 일일 스승으로 구해다 주면서까지 연습을 격려했던 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이카르트 앞에서 평소보다 훨씬 좋은 실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참으로 짜릿한 경험이었다.

그녀가 움직임 하나하나에 쏟은 공을 알아봐 주던 그의 순수한 눈빛은 비앙카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사내도, 여인도, 단련할 때 아름다운 법이지요.”

이카르트는 습관처럼 그 말을 했다. 집안에서는 기사 수련을 받았지만 주변에서는 검이 여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취미라는 뒷말을 들어 온 비앙카에게, 그의 시각은 가뭄 속 비처럼 달콤했다.

비앙카는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이 비밀스러운 감정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카르트의 시선에서, 몸짓에서 그녀는 분명 특별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람!’

일이 꼬일 대로 꼬이더니, 리페르 공작 부인이 넌지시 밀어주겠다던 단테 후작 영식은 최근 황궁을 방문하기는 했으나 그녀에게 관심도 없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만 하려고 해도 어디선가 나타난 아드리안이 그를 다른 방향으로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에게 관심이 생기지도 않았다. 무가의 장남이라 해서 솔깃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너무 마르고 하얀 서생 같은 외양이었기 때문이었다. 딱 동생들 취향이었다.

곱상하면 뭐 하나. 겉으로 드러나는 우락부락한 근육이 없으면 그게 남자던가.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나?’

그녀는 똑똑한 데다 황녀의 총애를 받는 아드리안을 쓸데없이 적으로 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종신대사가 걸린 일에서 다른 여자와 경쟁하는 것이야 각오하고 있었지만 단테 후작 영식은 그다지 일생을 맡기고 싶을 정도의 남자는 아니었다.

거기다 황녀인 자신을 대신해 약혼자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주라는 아폴로니아의 지시가 있다 보니 그녀 곁에는 항상 이카르트 한 명만이 붙어 있게 되었다.

붙어 있다 뿐인가. 황녀 전하는 약혼자를 잘 챙겨야 한다는 이유로 비앙카에게 비에른의 예법을 가르치는가 하면 많은 드레스에 보석까지 달아 주었다. 그리고 그 보석 하나하나는 이카르트의 눈을 사로잡았다.

“좋은 사람을 만나거든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말아라.”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지금까지는 비앙카가 당연하게 여기고 동의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녀 전하의 약혼자를?’

비앙카는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은 그녀였지만 황녀의 파혼까지 성공시킬 자신은 없었다.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왕자님과는 잘되어 봐야 측실이겠지. 그건 싫어.’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설득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깊숙하고 우렁우렁한,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섹시한 목소리가 그녀를 상상에서 깨웠다. 머리가 아프다던 아폴로니아를 대신해 이카르트와 정원을 산책하던 비앙카가 자신의 임무를 다시 자각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하.”

“무슨 일이 있습니까? 갑자기 저와 거리를 두는 듯한 말투로군요.”

그는 세심하게도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비앙카는 더욱 울적해졌다.

“영애에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갑작스레 진지한 표정으로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와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하시려는 걸까?’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절연 선언을 기다렸다.

그래, 어차피 끝날 거 빨리 정리하자. 그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다시없겠지만 비슷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하지만 비슷한 사람이 없잖아!’

그의 불끈불끈한 팔 근육을 보자 새삼 나오려는 눈물을 참는 비앙카의 귓가에, 그녀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영애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네?”

믿을 수 없는 고백이 들려왔다. 눈을 들어 보니 이카르트는 어울리지 않게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숱 많은 짙은 수염 위로 강인한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억눌러 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압니다. 황녀 전하와의 약혼은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어떻게든 참아 보려 했습니다만 최근에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생긴 것 같더군요.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그래도 어떻게든 진행해 보았겠지만…… 어쩌면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빠져나올 길이라니요.”

“……그대는 그저 저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앙카는 이 곰 같은 남자가 내민 장미를 조심스레 받았다. 조금 전 다잡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눈앞의 섹시한 야수만 보일 뿐이었다.

“좋아요.”

죄송해요, 황녀 전하. 저는 그이가 없으면 살 수 없게 되었답니다. 배신자라고 욕하시겠지만 이건 결혼 문제잖아요.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죄책감을 눌러 버리기 위해, 비앙카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 * *

“거의 다 된 것 같지?”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을 보며 물었다. 보는 눈이 없는 밤이었기에 그들은 별궁의 후원에서 잠시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비앙카가 이카르트의 고백을 받던 날은 공교롭게도 란섬의 백작으로부터 다르마유 공급 계약을 온전히 따낸 날이었다.

“앞으로 5년, 전하와 란섬 주민을 제외하면 제국의 누구도 다르마유를 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름은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지만요.”

유리엘은 훌륭한 사자였다. 그는 부인의 간병 때문에 자리를 비우고 있는 시드를 대신해서 소식을 전달해 주었다.

“백작과의 계약을 두고 공작가와 경쟁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은 진작 비에른 사신단에 들어갔습니다. 그 와중에 왕세자의 마음도 식어 버렸으니 파혼 이야기는 그 쪽에서 나올 겁니다.”

“아버님의 동향은?”

“아직 파혼까지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고 합니다. 다른 적절한 거래를 찾고 있을 거라더군요. 공작 부인은 사냥 대회 준비로 바쁘다고 하고요.”

예상대로였다. 아폴로니아는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님께 자세한 보고가 들어가기 전에 파혼 이야기가 나오면 돼. 그건 사신단이 알아서 해 주겠지.”

“시드가 확보한 다르마유의 처리 방법을 물었습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얻어 낸 것이지만 앞으로 제국에서는 판매하기 어려울 수 있다더군요.”

유리엘은 우려하는 말투였다. 약혼 한 번 피하기 위해 지불한 비용이라 하기에 20년간 생산될 다르마유 전량의 구매는 너무나도 컸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었다.

“팔아야지.”

“네?”

“아주 잘 팔릴 거야.”

유리엘을 통해 확보했던 서류에는 비에른에서의 다르마유 차 사업에 대한 확실한 방향이 제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현명하고 치밀했으며, 많은 수익을 보장하고 있었다. 시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떠올릴 수 없는 계획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순수하게 감탄했었다.

“고모님께서 구상한 사업인데, 성공은 확실한 거 아니겠어? 우린 그걸 그대로 차용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비에른의 국민들은…….”

“곧 제국 출신의 왕비를 맞게 될 거야. 다르마유 차를 즐겨 마시는.”

“비앙카 키튼의 취향입니까?”

“아니. 하지만 내가 마시라고 하면 마실 거야. 난 그 애를 그냥 떠나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그 애는 내 말을 듣게 될 거야.”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고, 그중 죄책감과 채무 의식은 상당히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왕세자의 사랑을 받는 미래의 비에른 왕비가 그녀에게 죄책감을 품고 있을 것이다.

아폴로니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들인 비용이 얼만데, 겨우 파혼만 얻어 내고 끝낼 수는 없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그녀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신기하냐는 듯.

유리엘은 얼핏 순수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미소를 들여다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판단력을 잃지 않는 총기 가득한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온정과 냉정이 항상 공존하는 타고난 지배자의 눈.

“전하께서는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그 가죽을 벗겨 팔 계획을 세우실 겁니다.”

그는 칭찬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낮게 웃었다. 유리엘은 문득 처음 아폴로니아와 만나 별궁의 작은 방에 갇혔던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당장 죽을지, 아니면 살아서 아폴로니아의 명령에 따르며 살지 선택하라고 했었다.

그때 살기를 잘하지 않았나?

유리엘이 조용히 웃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활약을 앞으로 또 얼마나 보게 될까. 그가 그녀의 방향으로 조금 더 몸을 기울이던 찰나.

바스락- 가까이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람의 발소리였다.

* * *

“에핀하르트 대공 부부와 그 자식은 여전히 두문불출하고 있다더냐?”

황제가 날카로운 금안을 빛내며 동생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란섬의 백작이 다르마유 사업 건을 최종적으로 거절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본디 사업은 복잡한 것이다. 비에른에서 약혼을 진행시킬 생각이 있는 한 다른 것을 얻어 내면 그만이었다.

‘대안이 나올 때까지 비에른 측에 그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된다.’

황제와 페트라는 빠르게 합의했고, 그에 따라 백작의 입을 제대로 단속했다. 이카르트의 마음이 이미 황녀를 떠났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따라서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수도에 온 지 보름이 되어 가는데 첫날 문안 인사를 한 것 외에는 동궁 안의 거처를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아들은 문안조차 오지 않았지.”

“예. 어느 날은 기침이 심하다, 어떤 날은 고열을 앓는다, 기력이 없다 온갖 핑계를 다 대고 있더군요. 외모조차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노골적으로 황제를 피하는 그 태도에 화가 날 법도 했으나 그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여우 같은 놈이 퍽이나 겁을 먹었군.”

그들이 대공 일가를 수도로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어린 자식인 카엘리온의 자질을 보기 위해서.

대공자는 패리스와 몇 살 차이가 안 나는 데다, 대공가는 세력이 없지도 않다. 만에 하나라도 황제의 재목이 나온다면 패리스에게는 경쟁자가 생기는 것이었다.

대공 본인이 왜소한 체구에 다리를 전다는 점이 그나마 황제의 견제를 덜고 있었으나 그 후계자는 이야기가 달랐다. 황제와 척을 진 자들 중 일부는 이미 대공에게 줄을 대려 애쓰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대공가는 기를 쓰고 아들이 공개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적진에서 몸을 사리지 않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까닭이었다. 물론, 황제는 이제 와서 그들을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전해라. 그 병약하고 쓸모없는 놈이 대회 당일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아들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살아 있는 녀석을 그날 데려오지 않으면 시체가 끌려 나올 것이라고.”

노골적인 황제의 말에 페트라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깃펜을 들어 종이에 그 말을 순화하여, 그러나 메시지가 분명하게 전달되도록 적었다.

“…… 정말로 병약하고 쓸모없는 아들이라면 거리낄 것 없이 데리고 오겠지요.”

그녀는 건조하게 말했다. 이미 페트라의 마음속에서는 본 적 없는 대공자에 대한 판단이 조금씩 자리 잡고 있었다. 백금발, 적안. 둘 중 하나조차 갖추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기를 쓰고 자식을 숨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제거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 * *

바스락-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명 사람의 발소리였고,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어쩌면 대화가 들릴 정도로. 하지만 누가 이 시간에 별궁 근처를 헤맨단 말인가? 페트라의 눈이라면 근처에 없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휘익- 퍽!

유리엘의 눈이 날카롭게 주변을 살피는가 싶더니 그의 날렵한 몸이 아폴로니아 뒤편 덤불로 날았다.

“윽!”

짧은 비명과 함께 유리엘의 손에 질질 끌려 나온 것은 검은 머리의 작은 소년이었다. 그는 겁에 질린 듯 몸을 한껏 뒤로 뺐지만 유리엘은 그의 저항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소년을 끌고 나와 아폴로니아의 앞에 던졌다.

“이거 놔! 너, 너 나한테 지금…….”

스릉-

소년은 미약하게 항의를 해 보았으나 유리엘이 검을 뽑아 목에 겨누자 입을 다물었다.

“누구지?”

아폴로니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년의 외양을 살폈다. 분명 처음 보는 아이였다. 하얗고 잘 손질된 고급 옷감이며 셔츠 깃에 세심하게 수놓아진 황금 자수가 그의 지위가 상당함을 보여 주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상했다. 그 정도 지위의 또래 귀족이라면 안면 정도는 있어야 할 테니까.

“놔…… 놔주세요.”

그러나 공손히 무릎 꿇은 소년이 고개를 든 순간, 아폴로니아의 머리를 스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귀를 덮고 목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고수머리에 작고 고운 얼굴이 어울리는 미소년이었다. 아폴로니아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려 보이는 그는 꽤나 얌전해진 태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동그란 눈, 정확히는 그의 홍채였다. 짙은 붉은색에 얼핏 빛나는 황금빛. 그녀가 만난 사람 중 그러한 눈동자를 가진 것은 그녀 자신과 선황뿐이었다.

“…… 에핀하르트 대공자.”

소년은 자신의 호칭이 아폴로니아의 입에서 나오자 살짝 놀란 듯했으나 이내 미소를 지어보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카엘리온이라 합니다.”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에게 손짓해 소년의 목에 겨누었던 검을 치우게 하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나요? 많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방에만 있기 답답하여 나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일단 숨었는데 그게 전하일 줄은…….”

그녀는 고개를 숙여 카엘리온의 말간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목소리며 혈색이며 움직임이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또래의 다른 소년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프다는 것은 거짓이로군요.”

황제의 눈을 피하려는 대공가의 목적은 아폴로니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다만 눈앞에서 그들의 핑계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줄이야.

아폴로니아의 말을 들은 소년의 동공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보였다. 겁에 질렸구나. 그녀는 순간 연민이 들었다. 몸을 낮추는 데 익숙한 모습이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조심하라고 하고 돌려보낼까? 그가 어디까지 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물어보아도 당연히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들었든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특히 황제와 척을 진 사이라면 그녀의 말을 누군가에게 보고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녀 자신만 모른 척하면 다 없던 일이 될 텐데. 그러나 그녀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그의 입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이 나왔다.

“…… 전하께서 미련하고 욕심 없다는 소문이 완전히 거짓인 것과 같습니다.”

묻기도 전에, 그는 스스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을 둘러서 자백했다. 외양과 어울리지 않는 도발적인 말이었다.

스르릉-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리엘이 다시 검을 뽑았다. 카엘리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

아폴로니아가 손을 들어 유리엘을 저지했다.

“귀가 밝으신가 보군요, 대공자. 어디까지 들으셨나요?”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최대한 누르며 부드럽게 물었다. 물론 카엘리온의 귀에는 대답에 따라서는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협박으로 들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의 동공이 다시 한 번 확장되었다.

“…… 백작으로부터 다르마유를 산 사람이 전하라는 것과, 약혼자에게 여인을 붙여 준 것과, 앞으로의 사업과…….”

그는 어깨를 살짝 떨면서도, 얄미울 정도로 솔직하게 손가락을 꼽으며 대답했다. 아폴로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 들었다니 상황 파악이 되었겠군요.”

그녀는 카엘리온에게 손짓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부드러움을 버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실을 내게 굳이 말하는 건, 나에 대한 협박인가요?”

“…….”

“대공자께서는 이 넓은 궁의 여기저기에서 실수로 낙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는지요?”

으스스한 그녀의 말에 카엘리온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전하께서 도와주시면 살지 않겠습니까?”

“……뭐라고?”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전하…… 아니, 누이, 저를 살려 주세요. 그러면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그러고는 자세를 고정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너 일부러 내 눈에 띄었구나.”

아폴로니아는 가면을 아예 벗기로 했다. 눈앞의 소년이 그렇듯.

“대화를 듣고 일부러 소리를 냈구나. 내 눈에 띄고 나와 거래하기 위해서.”

그녀가 알기로 대공자는 올해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이 순진해 보이는 동그란 눈의 소년은 교활하고 대담했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페트라 리페르의 코 밑에서 안 죽고 살아남은 사람 아닙니까.”

그는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며 대답했다.

“언제부터 나를 의심했지?”

“이곳에 도착한 후 비앙카 키튼과 이카르트 왕세자의 모습을 봤을 때부터 의아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영애가 야심이 넘치는구나 싶었지만…… 두 사람은 마치 하늘이 돕기라도 하듯 우연히 함께할 기회가 많더군요.”

“그것만으로 내 의도를 의심해?”

“아닙니다. 누이를 아는 모든 이가 그분은 어떤 계산도 할 줄 모른다고 했으니까요. 방금 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면 어떤 확신도 없었을 겁니다.”

그는 꽤나 겸손하게, 그러나 솔직하게 말했다. 아예 아폴로니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운명을 맡기겠다는 식이었다.

“약혼이며 사업이며 공작가의 계획까지 망쳐 놓았다면서요. 그런 사람은 누이뿐입니다.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요.”

기가 막혔다. 그는 그녀와 유리엘 사이의 이야기 몇 마디를 듣고 자신의 목숨을 여기 맡기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겨우 몇 초밖에 안 될 시간 동안. 촌수를 따질 수도 없을 만큼 먼 친척 주제에 뻔뻔하게 자신을 ‘누이’라고 부르면서.

보통 아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페트라가 알면 그는 당장 죽을 것이다.

“도와주세요, 누이. 어떻게 하면 누이처럼 살 수 있는지 알려 주세요. 어머니와 아버지를 제외하면 제게 가족이라 할 사람은 누이뿐입니다.”

그가 겁에 질린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겁먹은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아폴로니아의 동정심을 자극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떨리는 시선도 목소리도 계산되어 있을 것이다. 그녀의 치맛자락을 살짝 쥐는 그 손도. 그럼에도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별안간 아폴로니아는 페트라의 입장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먼 방계이기는 해도 황실의 피를 받은 자. 나름의 세력도 있는 이자는 능력까지 출중하다.

그는 패리스의 경쟁자이자, 길게 보면 아폴로니아의 경쟁자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그녀의 적이 된다면 위험할 사람.

‘제왕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미래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다. 게을리하면 죽는 것은 자신이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이 울렸다.

“……좋아.”

그러나 결국 아폴로니아는 그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동그란 눈이 희망에 젖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버님과 고모님에 대해 알려 줄 테니…….”

“예, 누이!”

“한 마디도 놓치지 말고 잘 들어.”

황제와 척을 진 사람이 어디 흔한 자원이던가.

* * *

대회 당일, 황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했다.

기둥 하나하나에 금칠을 새로 하고 벽면을 화사하게 발랐음은 물론, 정원의 꽃 한 송이나 풀 한 포기도 모난 부분이 없었다. 제국 내외의 갖은 귀빈들을 맞기 위해 궁의 사용인 또한 화사한 치장을 하는 것이 허용되는 하루였다.

궁내에서 간단한 식사 자리가 앞섰으나 진정 중요한 행사는 당연히 사냥이었다. 5년 주기로 돌아오는 이 대회는 평범한 동물뿐 아니라 마물까지 사냥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준비 기간에 황궁에서는 수많은 마물을 미리 잡아 놓았다가 사냥터에 풀어 볼거리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대회의 꽃은 우승자를 가리는 것이었다. 누구든 대회에서 가장 크고 위험한 사냥감을 잡아 우승하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다. 간혹 황족 중 우승자가 나올 경우, 그는 높은 확률로 다음 황제가 되었다. 선황이 그랬던 것처럼.

“그대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니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드는군.”

드넓은 사냥터 앞 언덕에 모인 손님들과 참가자들 앞에서 황제가 위엄 있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갑주를 입고 보검을 찬 그는 10년 전 대장군으로 전쟁터를 누비고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세월과 함께 쌓인 연륜은 그의 황금안에 깊이를 더했다.

아폴로니아는 그와 가까운 곳에서 자리 잡고 있었기에 황제의 한마디 한마디에 미소 짓는 황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올해에는 나를 뛰어넘는 우승자가 나오기를 기대하겠다.”

그는 15년 전 부마의 신분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당시 그는 악명 높은 거대한 식인 마물 수십 마리를 일격에 소탕하며 전설로 남을 만한 기록을 세웠다. 현재까지 그보다 더 거대하고 위험한 마물을 잡은 우승자는 나오지 않았다.

간혹 그를 견제하는 자들은 그의 우승을 누군가가 조작했다고 의혹을 제기하였으나 아폴로니아는 대회의 우승이 온전히 황제의 실력이었음을 알았다.

검술이면 검술, 기마술이면 기마술, 병법이면 병법. 그가 젊었던 시절 그에게 무(武)로 대적할 자는 제국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접했던 것은 시드 바이안 정도.

“폐하의 위엄을 절반이라도 따라갈 자가 이 대륙에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다만 올해는 패리스 전하가 참석하실 예정인 만큼 모두의 기대가 큽니다.”

황제의 측근 중 하나인 아몬 백작이 입바른 소리를 하자 몇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한때 천재 무인이었다고는 하나 황실 핏줄이 아닌 황제를 칭하기에는 부적절하고 위험한 말이었다. 선황을 비롯한 황족 전체를 무시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패리스는 분명 짐보다 뛰어날 것이다.”

황제는 아몬 백작을 지적하지 않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격려에 참가자들 사이에 있던 패리스가 살짝 미소 지었다. 아버지를 닮았기에 패리스 또한 보기 드문 무예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승하겠지만.’

아폴로니아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냥 대회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상당히 불평등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고위 귀족들이 호위 기사를 데리고 함께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호위들은 한편으로는 주군을 엄호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가 있는 방향으로 사냥감을 모는 등 그의 실적을 올려 주었다.

패리스에게는 그런 기사들이 여러 명 붙어 있었다. 대부분 페트라가 엄선한 자들이었고, 그 외에 가레스와 같은 친한 귀족 자제도 끼어 있었다.

“대공의 생각은 어떤가? 공자는 가장 어린 참가자였지. 구경을 위해 온 줄 알았더니 출전을 희망한다 하기에 깜짝 놀랐다네.”

황제는 친절하게 웃으며 에핀하르트 대공을 바라보았다. 마른 몸에 창백한 얼굴을 가진 그는 안색이 좋지 않은 부인을 감싸며 대답했다.

“치기 어린 아들놈에게 마물의 무서움을 빨리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검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사냥을 논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니까요.”

“글쎄.”

더 이상 겸손할 수 없는 답이었으나 황제는 그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영웅의 진가는 위기 속에서 드러나겠지.”

* * *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나선 것은 카엘리온이었다. 다만 그가 밝힌 이유는 아폴로니아의 비웃음을 샀었다.

“그러니까…… 대회 우승을 차지하고 세력을 모아 아버지가 쉽게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겠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참가하지 않으면 어차피 저를 죽이려 할 테니까요.”

카엘리온의 대답에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치 마음만 먹으면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처럼 들리는구나.”

“……지난번 우승자와 겨룬 적이 있습니다.”

그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말했다. 짙고 긴 속눈썹이 뺨까지 그림자를 만들었다. 사실을 전달하면서 최대한 겸손하게 보이려는 듯했다. 지난번 우승자는 레바인 가문의 차남으로, 나이는 어렸지만 키나 힘은 어떤 참가자보다 뛰어났다.

“사냥과 대련은 다르다고는 하나, 제가 그와 비교해서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겸손한 듯 보이지만 상당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너도 아폴론의 힘을 나누어 받았구나.”

아폴로니아는 조금 씁쓸하게 내뱉었다. 대공이 소년을 숨기고 싶어 했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열 살 때부터 힘으로는 성인에게도 지지 않았으니까요.”

버둥거리며 유리엘에게 끌려 나온 것은 분명 연기였다는 말이다.

“그 사실은 철저하게 숨기렴.”

“하지만 그렇다면 대회는…….”

“대회에는 예정대로 참가하도록 해. 하지만 우승할 생각은 집어치워. 네가 두각만 나타내도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너를 죽일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어떤 후폭풍보다도 너를 죽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쯤,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

그녀가 싸늘하게 말하자 카엘리온이 눈을 크게 뜨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다면 왜…….”

“아버님은 어떤 식으로든 네 실력을 시험하시려 할 테니까. 아예 그 눈앞에 보여 드리라는 거야. 네 사냥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단순히 숨고 피하는 것으로는 황제와 페트라의 의심을 떨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아폴로니아는 잘 알았다.

“열다섯 살이면 치기 어린 나이다. 무조건 우승하겠다며 강한 마물을 찾아다니렴. 그러다가 적당히 상처를 입고 나가떨어지는 거야.”

카엘리온은 빠르게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무척 불안한 표정이었다.

“……이해는 가나 자신이 없습니다.”

“무슨 뜻이지?”

“힘을 다 드러내고 승리하기는 쉽지만 힘을 다 숨기면 목숨 보전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는 허세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힘을 숨겨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면 자유롭게 사냥터를 누비며 활약할 수 있으나, 눈치를 보면서 허둥거린다면 싫어도 크게 다칠 것이라는 의미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냥터에서 다치거나 죽는 이들은 종종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그는 이를 위한 훈련이 되어 있지도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한편으로는 그를 견제했으나, 한편으로는 점점 이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감에 차 있는 아이.

“함께 참여해서 네 뒤를 봐 줄 호위가 없니?”

“대공령에서도 몇몇 기사들이 출전하지만…… 그들은 정직합니다. 각자 자신의 명예를 위해 사냥할 뿐 저를 위해 움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폴로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핀하르트의 청렴함과 강직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간혹 고고함은 불편함을 수반했다. 돈을 좀 쥐여 주고 부탁하라 한들 소용없겠지.

“기사 한 명을 더 데리고 참가하도록 해.”

“기사 한 명이라 함은…….”

그녀는 유리엘에게 눈짓했다. 여전히 카엘리온의 목에서 칼을 거두지 않고 있던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국에 이만한 호위는 없어.”

그녀는 잘라 말했다. 은발의 천사 같은 이목구비에도 날카롭기 짝이 없는 유리엘과, 검은 머리에 불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색을 타고났음에도 부드러운 인상인 카엘리온이 서로를 마주했다.

“누이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자는 키만 컸지 강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저를 지킬 사람은 아무래도 조금 더 경험이 많은…….”

“방금 내 손에 질질 끌려 나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끌려 나와 주었다는’ 것을 아직도 모른다면 정말로 의심이 가는군요.”

둘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 듯, 인상을 펴지 않았다.

“그만해.”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팔을 잡아끌며 카엘리온에게 경고했다. 그녀의 말에 검은 고수머리의 소년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카엘리온을 무시하고 유리엘에게 돌아섰다.

“잘 들어, 유리엘. 네가 없으면 이 아이는 죽어.”

카엘리온이 반박하려는 듯 입을 삐죽거리는 것이 보였으나 아폴로니아는 진심이었다.

수백 명의 손님 앞이라 황제가 조심하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와 페트라는 과감한 사람들이었다. 필요하다고 여기면 다른 기회가 없다고 생각되면 그 자리에서, 아니면 늦어도 대공가가 수도를 떠나기 전 손을 쓸 것이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나에게 그가 필요해질지도 몰라. 그러니까 넌 그를 살려야 해.”

그녀는 유리엘의 짙푸른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명령이다. 사냥 대회가 끝날 때까지 그가 살아 있도록 도와줘.”

“……예.”

유리엘은 짧게 대답했다. 낯모르는 또래의 소년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으나 유리엘은 개의치 않았다. 사냥이 처음이라거나, 대회가 자신에게도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이유도 필요 없었다. 아폴로니아가 원하는 일이라면.

* * *

“시작하라.”

화려한 반지로 장식된 황제의 손이 떨어졌고, 기사들은 사냥터로 흩어졌다. 구경꾼들은 사냥터 바로 옆 언덕 위 관람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언덕이 상당히 높았기에 넓은 사냥터가 한 눈에 들어왔다.

사냥터는 나무와 풀이 많았으나, 관람석의 시선을 막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나무들은 대부분 잎이 잘려 나가 있었다. 그 말은, 마물 또한 그들을 쉽게 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기습이 어렵기 때문에 머리보다는 완력과 무예가 중요한 싸움이었다.

그들 모두는 소리를 증폭시키는 마구를 차고 있었다. 이는 관람을 더욱 재미있게 만들었다. 사냥터에서 일어나는 일을 웬만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회에 참가하는 기사의 수는 총 백 명. 각자의 가문의 명예를 걸고 출전한 자들이었다.

이미 승리한 듯 웃는 패리스와 그 옆의 가레스, 그리고 최대한 그들의 오만한 표정을 따라 하는 카엘리온은 참가자들의 선두에서 사냥터를 향해 달려갔다. 대공가의 문양이 새겨진 사냥복을 갖춰 입은 은발의 기사는 미끄러지듯 그 뒤를 따랐다.

“행운을 빌어. 모두들.”

아폴로니아는 읊조렸다. 그녀는 그들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패리스가 우승해서 그녀가 그 후광 뒤에 평안하게 몸을 숨길 수 있기를.

카엘리온은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하고 무능만을 드러낸 채 대회가 마무리되기를.

대회가 원활하게 진행되어 유리엘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곁으로 돌아오기를.

그러나 그녀의 소원 세 가지는, 단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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