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아일린 이데나
란섬의 백작 에반 아이테르는 수도에 일찌감치 올라와 수도의 저택에서 몇 가지 사업을 해결하고 있었다.
이제 이십 대 중반에 접어든 젊은 백작은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정치적 다툼에서 중립을 지켰다. 이는 란섬의 백작들이 대대로 지켜 온 것과 같은 태도였다.
오래전 파스칼 3세가 형제들을 숙청하고 황위를 거머쥐었을 때에도 그랬고, 몇 년 전 가이우스 황제가 대대적인 세력 교체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흔들림 없는 태도가 수백 년간 섬의 평화를 지켜 냈다.
어느 쪽에도 힘을 실어 주지 않는 자세는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고 섬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킬 수도 있었으나 그의 통치하에 란섬은 번창했다. 그가 뛰어난 사업가였기 때문이었다.
작은 섬에서 이익을 창출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선대부터 내려오는 란섬 특산품 수출 사업으로 괜찮은 상단은 물론 적지 않은 국가와의 거래를 성사시켰고, 란섬의 주민들은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대륙에 뒤지지 않는 풍요로움을 누렸다.
소규모이기는 해도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사업을 이끌어 나간 그의 비결은 별것이 없었다. 사업상 이익 외에 어떤 것도 쳐다보지 않는 것. 그는 연인에게도, 친우에게도 사업상으로는 가차 없었다.
그렇기에 사업가들 사이에서 신뢰도가 높았다. 그는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쓸데없는 싸움을 할 일도 없고, 미운 상대가 쩔쩔매는 꼴을 보고 싶어서 대금 지급을 미루는 하찮은 짓거리를 절대로 하지 않으며 약속 또한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었다.
“오셨습니다, 백작님.”
각 맞춰 정리된 서류들을 검토하던 그에게 시종이 조용히 알렸다. 백작은 어깨까지 기른 짙은 검은 머리를 느슨하게 묶고 서류 검토에 몰두하던 참이었다.
“들어오게 해.”
“예.”
시종의 안내에 따라 누군가가 서재로 들어섰으나 그는 아직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방문객이 조용히 자리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면담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게 움직이던 그의 펜대가 멈칫했다. 그는 방문객의 이름을 서류에서만 보았고, 사업을 하는 여인이라기에 중년의 부인쯤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그의 귀에 울린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청아한 느낌이 있는, 젊다기보다는 어린 것에 가까운 소리였다.
슬쩍 고개를 들자 검은 천이 달린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자색 벨벳 드레스를 입은 여인 한 명, 그리고 호위로 보이는 큰 키의 기사 한 명이 자루 하나를 메고 서 있었다.
‘기가 막힌 얼굴이로군.’
미에 둔감하기로 유명한 그였으나 순간적인 감탄은 어쩔 수 없었다. 귀해 보이는 깨끗한 피부며 완벽하기 그지없는 이목구비에 어딘가 신비로운 눈빛까지. 기사의 미모는 그만큼 대단했다.
“별말씀을. 그대가 아일린 이데나 부인이로군.”
그는 빠른 표정 관리와 함께 여인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이름은 맞지만 부인은 아니랍니다.”
여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업에 대해 너무 모르는군.’
처음 만난 사업가들 사이에서는 나이나 경험이 많아 보일수록 좋았다. 어리고 만만하게 보이는 순간 사기 당하고 이용당하는 것이 세상의 섭리 아니던가. 그 자신 또한 젊은 나이에 작위를 이어받았기에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 레이디 이데나라고 부르지.”
그는 겉으로는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여인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만트 왕국에서 왔다고 했나? 나를 만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고 들었네. 꽤 귀한 인맥을 뒀더군.”
그녀는 수년 전 기사 수련을 하던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라파엘 경의 소개를 통해 그를 찾았다. 라파엘은 한때 황실 기사단에서 선황을 섬기다가 은퇴 후 란섬으로 거처를 옮겨 귀족들의 검술 스승을 주 업무로 하는 자였다.
“라파엘 경과 저의 스승님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이지요. 다만 제가 어떤 경위로 백작님을 찾아왔는지는 라파엘 경을 위해서라도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평생 단 한 번도 사업 관계로 알게 된 상대의 비밀을 함부로 누설한 적 없네. 그 점은 나를 믿어도 좋아.”
“백작님의 그 점을 매우 존경해 왔답니다.”
생각만큼 어린 것은 아니었는지, 여인은 침착하게 그의 기분을 띄워 주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얼굴을 보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호감을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았다. 백작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대략적인 제안은 전해 들었네. 하지만 다르마유 판매 건은 이미 다른 상단과 진행할 계획이 있어.”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라파엘 경에 대한 예의로 면담에 응했지만 내 마음을 바꾸기는 힘들 걸세. 그대는 시기도 잘못 잡았고, 경쟁 상대 또한 잘못 만났어.”
그는 말을 마치고 잠시 여인의 반응을 살폈다. 얼굴은 가렸어도 사람은 몸짓으로 많은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그의 답을 예상했다는 듯,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리페르 공작 부인의 루완 상단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아직 공개되지 않은 사실을 여인이 언급하자 그는 조금 놀랐다.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서로 비밀을 지키는 것이 일반적인 만큼,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는 이 외국인이 그 사실을 안다는 점은 의외였다.
“안심하세요. 백작님의 사람들은 모두 입이 무겁답니다.”
여인은 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공작 부인 측에서 누설한 정보란 말인가?”
여인은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긍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루완 상단이 의외로 허술한 것인가? 아니면 워낙 세력이 크다 보니 비밀이 조금 새어 나가도 타격이 없다는 것인가?’
그는 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다시 대화를 이었다.
“알고 있다니 얘기가 빠르군. 나는 그대와 이번 사업을 진행할 수 없어. 그리고 다르마유 차를 대량으로 공급받아 유통시키려면 그 비용은 그대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네.”
“제안을 듣고도 그리 말씀하신다면 바로 인사드리도록 하지요.”
“그대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군. 알다시피 나는 사업에 있어서는 친지들의 편의도 봐주지 않아. 그대에게 직접 사정 설명을 한 것으로 라파엘 경에 대한 예의는 충분히 갖추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는 눈앞의 이 예의 바른 여인에게 많은 사회 경험이 필요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애초에 가능성도 없는 것을 가지고 무턱대고 찾아오는 것부터가 젊은 패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귀하게 자랐거나 외국에서 와서 대륙의 사업을 잘 모르는 모양이나 여기서 그대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네. 사업을 시작할 때에는 조금 더 저렴하고 작은 상품을…….”
“루완 상단의 3배.”
여인의 깨끗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는 몇 마디 조언을 더 하려다가 말고 눈만 꿈뻑거렸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어, 그, 그대가 뭘 모르는 모양인데…… 상대방이 제시한 가격은 그대가 감당할 수준이 안 될 거야. 물론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10년 독점에 에일른 금화 20만 개.”
“뭐…… 그걸 어떻게?”
여인의 입에서 공작 부인이 제시했던 정확한 금액이 나오자 백작은 입을 떡 벌렸다. 그 정도 정보가 담긴 문서는 공작저, 아니 황실을 털어야 나올까 말까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대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대체 어디서 나온 정보력인지.’
그러나 그가 입을 벌리건 닫건 여인은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60만 개를 드리지요. 그리고 독점 기간은…….”
그녀는 작은 왕국의 반년 치 예산쯤 되는 돈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독점 기간은 5년. 그 후 마음에 안 들면 저와의 거래를 끊으면 됩니다.”
“뭐, 뭐라고?”
그는 처음으로 큰 소리를 냈다.
“그건 사실상 루완 상단의 6배나 되는 가격이 아닌가!”
다르마유 차는 나름대로 꾸준한 수요가 있었지만 대단한 유행을 탄 적은 없었다. 향은 좋은 편이나 귀한 사치품이라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서민적이지도 않은, 애매한 이미지를 가진 음료였다.
이걸 어떤 식으로 팔아야 그 가격에서 이윤이 남는다는 건지, 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와의 계약을 승낙만 해 주신다면 금화 10만 개는 지금, 20만 개는 내일 계약서를 받음과 동시에 지불하도록 하지요. 지불이 되지 않으면 약정을 파기하시면 됩니다.”
그녀는 간단하게 작성된 계약서 하나를 그의 책상에 놓았다. 대금의 지급 방식이 너무나 명확하고 지급에 조건이랄 것도 별것이 없었기에 그 내용은 짧았다. 한 마디로, 백작 측에 너무나도 유리하게 쓰인 서류였다.
“그대는…… 그대는 누구인가?”
그는 검은 천 너머의 얼굴이 미친 듯이 궁금했다. 누구이기에 이런 무식한 거래를 제안하는 건지. 어마어마한 부호가 아니라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말했잖습니까. 라만트 왕국의 아일린 이데나라고요.”
“외국인이라 하면 루완 상단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가격에 산 다르마유를 제국 내에서 처리나 할 수 있겠나?”
“애초에 다르마유 차는 제국보다는 다른 여러 왕국에서 인기가 있었지요. 황실에서 저를 거슬려 한들 제게 대단한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백작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 일로 백작님을 배척하면 황실은 그나마도 아슬아슬했던 변방 귀족의 지지를 다 잃게 될 테니까요.”
“그대는 혹시 다르마유를 위험한 일에 사용하려는 것은 아닌가?”
그는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몰랐던 방법으로 다르마유를 주술이나 마약에 이용할 수 있다면? 이 여인이 그런 부정한 방법으로 다르마유를 소비한다면 장기적으로는 백작의 이미지에 주는 타격이 더 클 수 있었다.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 보셨나요?”
여인의 핀잔에 그의 눈이 서류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거기 하단에 있습니다. 만약 제가 상품을 불법적이거나 불명예스러운 용도로 사용할 경우 백작님께서는 언제든지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고요. 기지급된 대금은 반환하지 않고 말입니다.”
백작의 이마에서는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분명 그런 문구가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
여인이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옆의 미남에게 손짓했다. 그는 들고 온 커다란 자루를 살짝 벌려 그 안을 보여 주었다.
‘말도 안 돼!’
자루 안쪽에서 눈이 멀 것 같은 찬란한 황금빛이 스며 나왔다. 그가 조금 더 머리를 기울이자 기사는 재빨리 자루를 닫아 버렸다.
“이래도 설득이 안 된다면, 조금 바꿔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죠.”
여인의 말투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조금 전 후배 사업가로서 겸손하게 그의 이야기를 듣는 듯했던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또박또박 설명했다. 마치 그를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루완 상단과 거래를 할 경우 백작님이 잃게 되는 것이 뭔지는 생각해 보셨나요?”
그녀의 질문이 떨어지자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백작이 물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을 했는지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다르마유 차는 사실 맛도 향도 효능도 탁월해요. 섬에서만 자란다는 희소성까지 있어 제국 귀족들이 좋아할 만한 상품이죠.”
“사실이네.”
“백작님께서는 몇 년 전 그 효능을 알게 된 후 한동안 그 홍보와 판매에 한동안 공을 들였었죠. 그럼에도 제국 내에서는 다르마유 차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 이유가 뭐였죠?”
백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차 판매는 그가 애썼음에도 실패했던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였다. 많은 공을 들였으나 제국 내에서 매년 판매되는 수량은 미미했다.
그 일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언급하다니.
“경쟁 상품이 있었기 때문이네.”
“맞아요. 향이나 빛깔은 아름답지만 다른 특별함은 없는 크라딘 차가 시장에서 우위를 점했죠. 소문으로는 크라딘 차의 호신 효능이 다르마유보다 훨씬 낫다고들 했어요.”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지.”
“그뿐인가요. 다르마유 차를 마시고 얼굴이 망가졌다는 피해자들도 등장했죠.”
“그것 또한 사실이 아니었네.”
백작은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여인이 하는 이야기는 그에게 뼈아픈 기억이었다. 그 일을 겪은 후로 그는 차 사업을 거의 접을 뻔했었다. 다행히 변방의 몇몇 왕국에서의 수입이 있어 유지할 수 있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소문으로 인해 다르마유 차는 한동안 제국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었죠. 그 소문 뒤에 누가 있었는지는 아시나요?”
“……확인된 바 없네.”
그는 짓눌린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작은 이 여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짐작되는 것은 있으시겠지요. 그 소문은 경쟁 상품인 크라딘 차를 독점 판매했던 루완 상단에서 퍼뜨렸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백작은 이를 꽉 깨물었다. 당연히 그도 알고 있었다. 비겁하지만 경쟁에서는 흔한 일이었고, 당시 황제를 등에 업었던 루완 상단은 결국 다르마유 차를 제국의 시장에서 도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원한 같은 것을 오래 간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미래의 이익을 해치는 멍청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이 지금 무슨 상관인가? 그대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루완 상단이 무척이나 유능하다는 반증일세. 당시 피해를 보았다고 내가 앞으로의 사업에서 그들과 손잡기를 꺼릴 것이라 생각하나? 나를 전혀 모르는군.”
“백작님께서 무엇보다도 실리를 중시하는 것은 잘 알고 있답니다.”
여인을 흔들고자 강하게 말했으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지? 루완 상단은 다르마유 차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나와 상의했네. 장기적으로 인기를 높일 수 있는 사업이지.”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의였어요. 만약 루완 상단이 마음을 바꾼다면요? 아니면 사업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상단 쪽에서 다르마유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계약에 따른 그쪽의 재량이네. 최악의 경우 인기가 높아지지 않는다면 독점 기간 후에 내가 다시…….”
“독점이 끝난 후 백작님이 다르마유 차 사업을 다시 굴리는 것을 상단에서 두고 볼까요? 그럴 수 없게 만드는 너무나도 쉬운 방법이 있는데 말이죠.”
백작의 이마에 땀 몇 방울이 더 맺혔다.
여인은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건드렸다. 거금을 주고 상품을 가져가는 쪽에서는 당연히 그 상품의 인기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이 상식이거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여인은 변함없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다르마유 차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란섬 출신 기사 사토르 루이스 경이 마물 섬멸에 공을 세운 것이 계기가 됐죠. 루완 상단이 다르마유 차에 관심을 보인 이유이자, 위협을 느낀 이유이기도 하겠죠.”
여인은 상식이 무척 풍부하거나, 아니면 이 사업에 대해 엄청난 양의 조사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점점 더 그녀의 기세에 눌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속하게.”
“10년 동안 차가 잘 팔리고 란섬의 이미지도 좋아진다면 그것은 백작님에게 이익이 맞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루완 상단에서 이것을 경쟁자를 영원히 제거할 기회로 본다면 그 방법은 간단할 겁니다.”
“무엇인가?”
“10년 사이에 다르마유 차가 실패한 사업이자 쓸모없는 상품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피력하면 됩니다. 루완 상단이 얼마를 지불했든 그들에게 이는 큰 희생도 아닙니다. 장기적인 이익을 생각한다면요.”
정확한 분석이었다.
거대한 상단에서 경쟁자를 제거하는 방법 중에는 경쟁자에게 큰돈을 쥐여 주고 그의 사업을 사들여 없애는 법도 있다는 것을 백작이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10년 안에 백작님께서 다른 이유로 황실의 미움을 사는 경우에도 루완 상단은 어떻게 해서든 백작님께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려 할 겁니다. 정치가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녀가 여기까지 말을 마치고 입을 닫았다. 그녀의 말이 다 맞았기에 백작은 점점 표정 관리가 힘들어졌다.
란섬은 그 규모가 매우 작고 특산품이랄 것이 몇 개 없었다. 이는 그가 다르마유 차 사업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당장 큰 상단에서 현금을 쥐여 준다 하여 다르마유 차를 시장에서 도태시킨다면 이는 막대한 손실이었다.
무엇보다, 섬의 독립성을 무척이나 중시하는 그로서는 향후 10년 동안 루완 상단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싫었다. 문득 그는 눈앞의 여인이 무섭다고 느꼈다. 그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적절하게 자극해서 그에게 사업 파트너에 대한 의심을 불어넣었다.
‘감각이 탁월한 것인가, 아니면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한 것인가.’
여인이 의도적으로 그런 분석을 내놓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가 제안한 대로 5년 동안의 독점 계약을 체결하신다면 그럴 위험은 훨씬 줄어듭니다. 또한 정치적으로 얽힐 여지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백작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녀의 말은 모두 옳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당장 루완 상단이 제안했던 총 대금의 절반을 건넬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유리한 계약서, 누가 보아도 봉 잡았다 할 만한 대금, 경우의 수를 다 따져 보아도 잃을 것이 없는 거래. 무엇보다, 눈앞의 천재적인 거부와 거래를 틀 수 있는 기회.
그는 언제나 그랬듯, 어떤 편견도 없이 여인의 제안을 받는 경우와 받지 않는 경우의 이익을 비교해 보았다. 답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레이디 아일린 이데나.”
그가 감았던 눈을 뜨고 결심한 듯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여전히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네. 허나 그렇기 때문에 그대를 지켜볼 일이 기대되는군.”
“그렇다면…….”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검은 천 너머로 여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 * *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은 백작의 저택을 나서서 마차에 올랐다. 황녀로서 신전에 간다는 핑계로 궁을 빠져나왔던 아폴로니아는 황제가 붙여 준 호위, 아니 감시원들을 잠시 따돌리고 백작의 저택을 방문했던 참이었다.
“구두로 약속만 받고 거금을 주어도 괜찮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로 안 되지. 하지만 아이테르 백작이라면 괜찮아. 그는 사업에 있어서는 신뢰를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내일 틀림없이 날인된 계약서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아까 말씀하신 내용은 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습관처럼 마차 밖을 경계하던 유리엘이 아폴로니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백작의 저택에서 본 그녀의 모습은 또다시 새로웠다. 대체 저 작은 머리에 얼마나 많은 지식이 들어 있는 것인가?
“일부는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들. 일부는 그 후에 내가 공부한 것들. 일부는…… 그냥 당연한 것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사업만 가지고는 하나를 방해하면 다른 것으로 진행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 고모님은 과감하니까. 안 되는 것을 오래 붙잡고 있을 사람은 아니야.”
얼굴을 가렸던 검은 천을 걷어 버린 그녀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를 빨아들일 것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평소보다 강한 이채가 서려 있었다.
살기 위해서, 적과 맞서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사람치고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우아하고 평온해 보였다. 아니, 백작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에는 약간의 설렘 같은 것도 느껴졌다.
즐거워 보일 정도로.
“유리엘, 앞으로 며칠 동안 백작과 나 사이를 오가면서 심부름을 해 줘야 할 것 같아.”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데리고 오셨겠지요.”
“잘 아네? 네 얼굴은 한 번 보면 잘 안 잊어버릴 것 같았어. 어느 집안의 누구인지 소개하지 않아도.”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노련한 사업가인 백작과 오랜 대담을 나누고 나온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편안한 태도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잘생겼잖아.”
아폴로니아는 너무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리샨에서도 그의 얼굴이 잘생겼다는 칭찬을 한 적이 있었다.
다만 유리엘은 그 태도가 너무 무심해 보인다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마치 테이블이 단단하게 잘 만들어졌다고 평가하는 사람처럼.
그녀가 계속 웃으며 쳐다보자 그는 괜히 민망해져서 화제를 돌렸다. 조금 더 마주 보고 있으면 얼굴이든 목이든 붉어진 것이 그녀의 눈에 띌 것 같았다.
“백작을 만나 보니 어떻습니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란섬 백작들의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더군. 그 사무적인 딱딱함도, 쉽게 휩쓸리지 않는 단단함도, 계산적인 느낌도. 그러면서도 상대의 의견을 인정하는 태도도 갖췄지.”
주제가 바뀌었으나 아폴로니아의 입가에 있는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유리엘은 조금 심통이 났다.
“그가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드냐고?”
아폴로니아의 미소가 맑은 웃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난 그의 태도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나 또한 같은 입장에 놓일 수 있으니까. 내게 부족한 것들은 보고 배울 수밖에 없잖아.”
배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 속에 작게 담긴 황금빛이 반짝였다. 편안해 보이면서도 살짝 상기된 그녀의 얼굴은 마치 무도회에 처음 참석한 소녀의 모습 같았다.
유리엘은 확신했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순수하게 즐기고 있었다. 배우고, 배운 것을 실험하고, 흥미로운 상대를 만나 그의 것을 또 흡수하고, 계획하고, 성장하고.
배움을 즐기는 태도는 시드와 아폴로니아의 대화를 들을 때에도 항상 느끼던 것이었다. 생존과 권력 쟁취만을 위해 아등바등해야 할 상황에도, 아폴로니아는 어딘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한 단계 높이 서 있는 것 같았다. 타고난 제왕인 것인지, 쓸데없이 순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 알 수 없는 열정이 쉴 새 없이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