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새로운 시녀
선혈같이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리페르의 장미 정원에서, 그 주인인 페트라는 국화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작은 사파이어 핀 하나만을 꽂아 장식한 머리는 언제나처럼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나 반듯한 이목구비는 한때 그녀에게 미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의 외모가 바뀐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를 수식할 다른 말이 너무나도 많아졌을 뿐. 그녀는 상업에 있어서 천재적이고, 황실행정에 치밀하고, 적을 상대하거나 가치 없는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는 잔인했다.
‘아름다운 호박색 눈동자’라는 칭찬을 듣던 그것은 이제 ‘시류를 꿰뚫어 보는 황금안’이라 불리며 뭇 사람들의 두려움을 샀다.
페트라는 그것이 싫지 않았기에 내버려 두었다.
“루완 상단에서 올해 사파이어 원석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서쪽의 광산이 바닥을 드러내어…….”
그녀의 옆에서는 시녀이자 가장 가까운 측근인 칼린 부인이 업무 보고를 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페트라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대답했다. 대륙의 보석 광산은 대부분 주인이 존재했고, 페트라의 자원은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혈통을 이어받지 못한 황제의 권력을 유지하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국에 루완 상단과 대적할 만한 상단은 없었다. 무엇보다 요즘 페트라는 보석 사업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보석보다 더 귀한 것. 예를 들어 주술이 없이는 만들 수 없는 한정적인 장난감 같은 것. 인재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럼 다른 상단의 것이라도 최대한 끌어서 충당하겠습니다.”
페트라는 한쪽 손을 들어 그 의견에 대한 반대를 표시했다. 제한된 조건에 끌려다니는 것은 힘이 없는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녀는 시장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가.
“아니. 우리 것도 절반만 사용하고 남겨. 신상 제품 생산을 제한하되 여느 때보다 디자인에 공을 들여 화려하고 섬세하게 만들어. 한정적인 자원일수록 귀족들은 더 원하는 법이다. 가격은 세 배를 올려.”
칼린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의 사업적 선택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럼 다음 건으로 넘어 가겠습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익숙한 페트라는 한편으로 사업을 계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험지에서 돌아온 조카를 떠올렸다. 물론 애틋한 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아폴로니아를 처분할 때가 멀지 않았다.’
습관처럼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페트라는 상황을 정리했다.
아폴로니아의 리샨 방문은 크게 보면 탈 없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방문 과정에서 우연히 봉신의 부패가 드러났지만 스스로 처리할 능력이 부족해 대리인을 새로 찾았다고.
거슬리는 조카는 곧 시집을 가게 될 것이다. 대가로 군사 강국인 비에른을 우방으로 얻음은 물론 페트라의 상단에서 추진해 온 차 판매 사업권도 얻게 될 것이었다. 세부적인 조건은 아직 논의해 봐야겠지만 큰 틀은 다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이 계획이, 그 진행 상황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황녀 전하께서 가까운 호위와 함께 5일간 실종되었다가 무탈하게 돌아오셨습니다.”
뜬금없이 리샨에 내려간 황녀가, 시드 바이안을 옆에 끼고도 5일 동안 사라졌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이 다시 돌아왔다니.
전령은 리샨의 치안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하다고 했다. 길도 잘 나 있지 않아서 한 번 길을 잃으면 다시 찾기 어렵다고. 그럼에도 페트라는 그 5일의 시간이 신경 쓰였다.
‘마치 무슨 용건이라도 처리하고 돌아온 듯한 모양새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실패했던 암살 사건을 떠올렸다. 목숨을 잃을 뻔했으면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짚지도 못한 채 자신의 혼사부터 걱정하던 아폴로니아도. 팔에 분명하게 남았던 상처도.
페트라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그 겁에 질린 표정은 페트라를 대했던 아폴로니아의 평소 모습과 일관적이었다. 뒤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근거 없는 느낌이 아닌 이성적 판단을 믿어야 한다.’
이는 그녀의 철칙이었다. 그 원칙은 페트라를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했다.
좋다. 어차피 모든 일은 황녀가 타국의 후계자와 결혼함과 동시에 해결될 것이다. 그리된다면 그녀는 황위 계승권을 상실할 테니까.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의 원활한 진행이었다. 그 기간 동안 별일이 일어나지만 않으면 될 것이었다. 그리고 페트라는 일이 틀어질 아주 작은 요소라도 남겨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작 부인, 키튼 백작이 왔습니다.”
하인 한 명이 장미 정원에 들어서며 칼린 부인과 페트라의 회담을 깼다.
“지금은 방해하지 말라 했는데.”
“아니, 잘됐다. 나머지는 내일 하지.”
중요한 실크 수입 건에 대해 보고하던 칼린 부인이 인상을 쓰며 한 마디 하려 했으나 페트라는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황녀의 결혼 진행을 도울 사람이 때마침 도착한 것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부인.”
흰머리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남자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예를 생략하시지요. 황제 폐하의 오랜 전우이자 저의 친우가 아니십니까.”
페트라는 보기 드문 미소로 백작을 맞이했다. 그 또한 부드럽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는 과거 선황의 정복 전쟁에 가이우스와 함께 참전한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공로가 적지 않아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격되고 그 후 영지 운영도 야무지게 하는, 나름대로 이름 높은 가문의 수장이었다.
페트라와 키튼 백작은 사업적, 정치적으로 얽혀 있었으나 사실 친우라기에는 먼 관계였다. 굳이 그러한 단어를 쓴 것은 페트라가 특별히 호의를 보인다는 의미였다. 백작의 안색이 밝아졌다.
“편지에 적은 바와 같이, 부인을 뵙기를 원했던 것은 제 장녀 때문입니다.”
무인 출신인 백작은 무뚝뚝하고 말이 짧은 사람이었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비앙카는 적당히 현명하고 겸손한 아이이지요. 이제 나이가 차 혼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작은 쓸데없는 겸손을 부리지 않았다. 딸 셋 중 첫째인 비앙카는 그와 부인의 가치관을 가장 온전히 받아들인 아이였다. 즉, 키튼 백작과 죽이 잘 맞는 소중한 딸이었다.
“그 아이가 벌써 스무 살인 것으로 압니다. 말씀대로 혼인할 나이가 충분히 되었지요.”
페트라는 이미 그의 요청을 짐작하고 있었으나 별다른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대단한 집안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큰물에 있을수록 만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라…….”
백작이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렸다. 페트라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예로부터 황녀나 황후의 시녀직은 영애들이 선망하는 명예로운 자리가 아닙니까? 황실은 물론 여러 명문가와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고 십중팔구는 좋은 혼사로 이어지는 길이지요.”
“맞는 말씀입니다만 황실에는 황후가 없어서…… 황비라면 많지만 말입니다.”
“저는 황녀 전하를 말하는 겁니다, 공작 부인. 비앙카를 황녀 전하의 시녀로 넣어 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백작의 입에서 페트라가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황녀 전하의 시녀직이라면 분명 좋은 혼처를 보장하는 귀한 자리이지요. 허나 당장은 별궁에 사람이 부족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그러니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백작은 솔직하게 말했다.
페트라도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키튼 백작이 그 장녀를 애지중지하면서, 동시에 원하는 신랑감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다는 것을. 그는 취향이 무척이나 뚜렷하여 재물이나 작위가 아무리 좋아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차게 거절했기에 사윗감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녀는 아량을 베풀 듯 말했다. 백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입니까?”
“황녀 전하의 시녀직으로 넣어 줄 뿐 아니라 제가 직접 비앙카의 앞길을 보장하지요. 황녀가 결혼할 무렵에 백작도 마음에 드는 사위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가문을 걸고 약속드리죠.”
“그렇게까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한 가지 간단한 일만 도와주면 됩니다. 그것만 해 준다면 이 일은 은혜랄 것도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황녀를 가까이서 모시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제게 알려 달라는 것뿐입니다.”
백작은 순간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모시는 주인의 행실을 타인에게 보고하는 것은 일종의 배신처럼 느껴졌다.
“그저 결혼식 전까지 황녀 전하께 무슨 문제가 생길까 걱정하는 것뿐입니다. 그 이상은 시키지 않을 테니 염려 마세요.”
백작은 그제야 페트라의 의중을 이해했다.
그녀는 궁 안에 다양한 감시책을 두고 있었다. 주로 그녀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약점을 잡힌 사용인들이었으나 개중 친분 있는 귀족의 자제들도 있었다.
만약 페트라가 자신의 심복을 골라 황녀의 시녀로 들여보낸다면 그녀의 불순한 의도는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귀한 손님인 비에른의 왕세자에게까지도. 그는 자신의 미래 신부가 받는 대접에 불만을 품을지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페트라는 황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포장할 수 있는 명문가 영애를 원하는 것이다. 여전히 뒤로는 자신의 사람이 되어 줄.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페트라는 미리 준비해 둔 듯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가 모른 척 열어 보자 안에는 찬란한 오팔 팔찌가 들어 있었다.
“딸에게 이런 것을 결혼 선물로 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가치를 책정하기 어려운 귀중품이었다. 즉, 페트라는 그에게 최대한의 예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황궁은 황제와 그 일가의 손에 있는 것. 주인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대세를 따르는 것은 부끄러울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고귀한 집안으로, 기왕이면 무예를 아는 사위에게 시집가는 것을 간절히 원했다. 이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은 다 해 주고 싶었다.
“좋습니다, 부인. 딸에게 말해 놓을 테니 적절한 때에 데려가십시오.”
“잘 생각하셨습니다. 비앙카는 백작이 감탄할 만한 신랑감을 만나 고귀한 신분이 될 겁니다.”
페트라는 만족스럽게 백작과 인사했다.
그녀는 사실 비앙카의 앞길에는 관심이 없었다. 필요한 것을 얻은 후 아무 귀족 사내를 적당히 포장해서 소개하면 백작은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면, 아니면 충성의 대상을 잘못 고른다면 그 전에 사고를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페트라는 몰랐다. 비앙카 키튼에게 귀한 남편을 구해 주겠다는 자신의 약속이, 가까운 미래에 완벽하게 지켜질 것이라는 사실을. 백작도 놀랄 만큼 완벽한 신랑감이 비앙카를 눈에 담을 것이라는 사실을.
* * *
리샨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군터 베르톤은 영주의 대리가 되어 리샨에 남아 달라는 황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혼자 남았다.
“자작에게 고통받은 영지민들이 불쌍해요! 베르톤 경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남아서 그들을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아폴로니아는 군터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부탁했었다. 유능하고 청렴한 군터에게 리샨을 맡기는 것은, 벨라들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할 때부터 마음속에서 정해 두었던 행보였다.
그녀는 디아만 자작이 가졌던 지위며 녹봉을 군터에게 주었다. 지금까지 해 왔던 일처리에 대한 감사는 물론, 그에 대한 굳은 신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중립을 지키며 권력자의 눈에 들지 못했던 군터는 한 번도 그러한 신뢰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폴로니아의 결정은 군터에게 신선한 만족감을 주었고, 원래 은퇴를 앞두고 있었던 그는 고민 없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먼 지방으로 내려오는 것인 만큼, 리페르 공작가나 황제의 미움을 살 걱정도 없는 직책이라는 점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사랑하는 그의 아내 베로니카는 망설임 없이 짐을 싸서 남편 곁으로 오기로 했다.
아폴로니아는 마음 놓고 돌아와 다음을 계획할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아버님.”
황궁으로 돌아온 뒤, 아폴로니아는 형식적인 인사를 하러 황제궁에 들렀다.
“리샨에서 실종될 뻔했다더니, 괜찮은 것이냐?”
황제가 물었다. 내용은 부드러운 듯해도 말투는 딱딱한, 익숙한 인사였다.
“제 실수였답니다. 다행히 훌륭한 기사님들을 다시 만나 돌아올 수 있었어요.”
“호위의 뒤를 따르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은 한심하구나. 너로서도 말이다.”
주변에 황비 한 명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이 없어서인지, 그는 조금의 가식도 결국 접어 버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 가만히 들었다. 수천 번쯤 연습한 표정이었지만 그날따라 피곤해서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 방법을 알았다.
“콜록! 콜록!”
시끄러운 기침 소리에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몸까지 상한 것이냐? 약혼을 앞둔 몸으로?”
“죄송해요 아버님. 남쪽 지방인데도 리샨은 날씨가 추웠는걸요. 옷을 아무리 많이 입어도 오한이 들어서…….”
황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폴로니아가 그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그 습관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표정의 의미를 알았다. 그는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아폴로니아가 추위를 많이 탄다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황궁은 항상 따스하고 쾌적해서 몰랐어요. 다른 지방은 얼마나 힘든지…….”
아폴로니아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황제의 표정이 의아함에서 작은 미소로 바뀌었다. 좋은 징조였다. 아주 미세한 정도겠지만, 아폴로니아는 그 앞에서 전보다 더 유약한 모습으로 보이는데 성공했다.
“돌아가 요양하라.”
짧은 지시로 두 부녀는 상봉을 끝냈다.
‘유리엘은 잘 있으려나.’
아폴로니아는 황제궁을 나서며 생각에 잠겼다.
리샨에서 돌아온 후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에게 따로 집을 구해 주고 시드를 통해 간혹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항상 음지에서만 살았던 그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출발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리샨에서는 항상 곁에 있던 그가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림자처럼 소리도 없이 따라오다가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그녀를 지켜 주었다. 언제부터인가 아폴로니아는 그의 옆에서 유독 긴장을 풀었다. 누구에게도 들려준 적 없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며 리라 연주까지…….
문득, 아폴로니아의 머릿속에 리라 연주를 듣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형편없는 그녀의 연주를, 유리엘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음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이럴 때가 아니지.’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약혼자의 처리를 비롯해 다른 사안들이 시급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별궁으로 돌아온 그녀를 가장 먼저 맞은 것은 아드리안이었다.
못 본 사이 상처가 다 나아서인지 밝아진 그녀는 완벽하게 몸에 익은 궁중 예법으로 아폴로니아에게 인사했다.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을 준비했습니다. 좋아하시는 다과도 준비 중이니 목욕을 마치고 드실 수 있어요. 언제든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마야에게 배운 것인지,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버릇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목욕을 할 때는 시중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좋아하는 종류의 차와 음식도. 그녀는 아마도 진심으로 아폴로니아의 안녕을 바라는 듯했다. 딱딱한 예법으로도 숨기지 못하는 반가움이 그 얼굴에 있었다.
“그간 별다른 일은 없었니?”
“특별한 일은 없어요. 황비들끼리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는 가십 정도를 빼면요. 다만 예정되어 있던 중요한 일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할까요.”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사냥 대회가 열리겠구나.”
무를 숭상하는 제국에서는 5년에 한 번 황제가 주최하는 사냥 대회가 열렸다. 승마는 하지만 검이나 활을 다루지 못하는 아폴로니아는 주로 의무적으로 참석해서 얼굴만을 비추었다.
다만 올해는 손님이 있을 예정이었다.
“비에른의 왕세자도 사냥에 참석하실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이미 출발하셨을 거예요.”
아폴로니아가 살짝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아직 이 왕자를 따돌릴 계획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다만 유일한 황녀의 결혼인 만큼 양국이 합의할 세부 사항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할 뿐. 그 사항 중 하나를 틀어 버리는 것이 가장 간단해 보였다.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알아챘는지, 아드리안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아폴로니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 빙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른 손님도 있어요. 아주 오랜만의 참가라고 해요.”
“누구지?”
“에핀하르트 대공가요.”
아폴로니아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들은 그녀와 같은 황족이었다. 먼 방계이기는 하나 대대로 세운 전쟁 공로가 휘황찬란했기에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다만 가이우스 황제의 등극 후로는 대공령에서 죽은 듯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름인가?”
“공식적인 초청이야 매번 가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강하게 여러 차례 요청했다는 소문이에요. 대공 측에서 결국 거절하지 못했나 봐요.”
황제는 그들을 탐색하려는 것이다. 대단치 않다고 판단된다면 그는 계속해서 죽어지내라는 경고 정도를 줄 것이다. 황족 모두를 경계하는 그로서는 당연한 행보였다.
“내 또래의 대공자가 한 명 있었지?”
대공과 대공비는 자신들이 몸을 사렸던 것은 물론, 한 명 있는 아들을 대공령에 감추어 두고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몸이 약하다는 소문 정도만 있었다.
“한두 살 아래이실 거예요. 같이 오신다고 들었어요.”
“눈에 띄지 않으려고 더더욱 안간힘을 써야겠구나.”
아폴로니아는 문득 그들과 자신의 처지가 조금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연대하기에는 부적절했다. 그들은 어떤 충돌도 피하기만을 원할 테니까.
그녀가 무언가 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전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께서 쉬고 계십니다.”
아드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전했으나, 밖에 있던 누군가는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아폴로니아는 그것이 황제의 심부름임을 알 수 있었다. 황녀의 직속 시녀 아드리안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의미.
문이 열리자 과연 황제의 시종장인 모튼 프라이어가 오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바로 준비된 미소를 띠며 그를 맞았다.
“모튼! 오랜만이에요. 아까 황제궁에서는 보이지 않아 걱정했는데.”
그러나 성질 나쁜 염소와 비슷하게 생긴 그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딱딱하게 대꾸했다.
“할 일이 많아서 항상 황제궁에 있지는 않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아폴로니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여전히 부드럽게 물었다. 삼촌을 보는 조카 같은 표정으로.
“전하의 궁에 새로 시녀를 보내라는 폐하의 명입니다.”
그의 옆에는 짙은 금발 여인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아드리안이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황제의 뜻이라고는 하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갑작스레 사람을 밀어 넣는다는 것은 무례한 일이었다.
“갑자기 왜?”
아폴로니아는 계속해서 순진하게 물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미 알 것 같았다.
‘페트라가 결혼 전까지 돌발 상황이 없도록 내게 감시를 붙이려는 거야.’
리샨에서 잠시 감시를 벗어났던 것이 그녀의 예민한 촉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별궁이 하찮기는 해도 황제나 페트라는 원래 여기저기 눈을 심어 두는 것을 좋아했다.
“약혼을 앞둔 전하께 유능한 시녀가 필요할 것이라 판단하신 폐하의 선물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답을 듣지 않고 형식적인 인사만 하더니 돌아갔다. 아드리안이 코끝을 찡그리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 집안의 누구니?”
아폴로니아가 인사를 건네며 찬찬히 여인을 뜯어보니, 그녀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서 있는 자세며 위치며 궁중 예법을 배운 것으로 보였다.
“키튼 백작가의 장녀 비앙카입니다.”
아폴로니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다른 데도 아니고 백작가라니. 그중에서도 꽤나 이름 있는 집안이네.
“유명한 무가의 딸이구나. 키튼 백작은 아버님의 전우였다지.”
“그리 여겨 주신다면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여인은 고개를 살짝만 들며, 얌전하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품위 있는 태도였으나 치켜든 고개며 아폴로니아를 똑바로 마주 보는 시선에서 약간의 오만함이 엿보였다.
아폴로니아와 비슷한 키였지만 조금 더 성숙해 보이는 외모, 꽤나 영민해 보이는 황갈색 눈동자, 상대를 견제하는 것이 보이지만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태도.
고모님이 눈여겨볼 만하지.
아폴로니아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키튼 백작은 황제와 친분이 있었으나 그의 심복이라고 할 만큼 종속적인 자는 아니었다. 나름의 원칙과 이해관계를 따지는 사람이었다.
그의 딸은 자신을 황녀의 시녀로 넣어 준 페트라 리페르에게 이런저런 소식을 전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위해 황궁의 규칙을 어기거나 황녀를 해할 동기까지는 없다는 뜻이었다.
키튼 백작은 단순히 페트라와의 관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딸의 혼사를 비롯한 앞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황녀의 시녀직으로 들여보냈을 것이다.
독살 걱정은 없겠네.
“잘됐다! 나는 또래 친구가 많이 없어서 항상 외로웠거든.”
아폴로니아는 활짝 웃으며 비앙카의 손을 잡았다. 너무 스스럼없는 태도에 놀랐는지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살짝 떨리는 그녀의 손에는 귀족 영애로는 드물게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손이 조금 거칠구나.”
“무가의 딸이라 어려서부터 오라버니와 기사 수련을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귀족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버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다른 영애라면 부끄러워할 만한 상황임에도 비앙카는 당당하게 손바닥을 펴 굳은살을 보여 주었다.
‘조심성만 조금 더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폴로니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비앙카의 말은 얼핏 들으면 그저 집안 전통의 언급이었지만 실은 은연중에 검을 배우지 못한 자신을 도발하는 말이었다. 이를 알면서도 아폴로니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대단하구나! 키튼 백작가에서는 여기사도 종종 배출했었지. 네가 시녀직을 하면서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도발을 이해하지도 못한 듯한 아폴로니아의 답에 비앙카는 순간적으로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은 괜찮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검 외에도 자수며 살림이며 여인의 미덕을 모두 가르쳐 주셨으니까요.”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연줄을 찾아 가며 황녀의 시녀직을 원하는 집안은 뻔했다. 키튼 백작은 신부 수업을 해 가며 애지중지 키운 딸에게 대단한 혼처를 찾아 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었다. 보아하니 비앙카 또한 아버지의 그러한 생각을 따르려는 것 같았다.
“여인의 미덕이라…… 그럼 사내의 미덕은 뭐라고 생각하니?”
아폴로니아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히 자신의 여인을 지킬 수 있는 강한 힘 아니겠습니까?”
비앙카는 기다렸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녀는 오만하지만 동시에 무척 솔직한 사람이었다. 이 시녀는 아폴로니아의 결혼 전까지 눈에 불을 켜고 신랑감을 찾을 것이다. 집안 좋고, 무예가 출중한 사람으로.
아폴로니아는 문득 어린 시절 읽었던 황실의 야사가 떠올랐다. 황후의 시녀로 들어와 감히 황제를 유혹해 후궁이 된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황녀의 시녀로 들어와 주인의 구혼자 중 한 명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려 신분상승을 꾀했던 다른 여인의 이야기도.
황실의 여인들은 그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보다 조금 더 못난 외모의 시녀들을 두고는 했었다.
‘그렇다면 그 반대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아폴로니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이 든 순간 그녀의 머리에 섬광처럼 어떤 생각이 스쳤다.
“비앙카, 고개를 들어 볼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비앙카가 그 말에 따랐다.
건강해 보이는 짙은 금발, 어딘가 지적이고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눈매, 탄탄한 체격에 기개며 무예 실력까지 갖춘 귀족 영애.
[본디 사람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신체를 단련할 때 아름다운 법입니다.]
왕세자의 편지에서 보았던 문구가 떠올랐다. 과연, 신체를 단련하는 여인은 아름다웠다. 리샨에서 만났던 아모레타 같은 미인은 아니지만, 아드리안만큼의 귀여움은 없었지만 분명 독특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오만함은 편지에서 드러난 비에른 왕세자의 성격을 닮아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아폴로니아는 환하게 웃으며 비앙카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잡일 같은 건 안 해도 괜찮아.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그야…… 하명하십시오.”
비앙카는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하는 아폴로니아가 황당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의 그분에 대해 알아봐 줘.”
“네?”
아폴로니아는 눈을 반짝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비에른의 왕세자님 말이야. 키튼 백작가 영지는 비에른과 가까우니까 어떻게든 소식이 빠르지 않을까? 그분이 어떤 여인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분에게 다른 여인은 없는지, 그런 것들을 알아봐 줘!”
“아…….”
비앙카는 그 순진함에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목욕을 마칠 때까지 방에 가서 쉬어도 좋아. 밖에서 하녀들이 안내해 줄 거야.”
그녀가 아폴로니아의 말에 따라 침실 밖으로 나가자, 아드리안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전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정말 저 사람을 시녀로 중용하시게요?”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었다. 비앙카 앞에서 보였던 순진한 웃음이 아닌, 조금 더 냉소적인 표정이었다.
“사람은 다 쓸모가 있으니까.”
“그건…….”
“인력이 생겼으면 쓰면 되지 않겠니.”
필요하고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 페트라가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 일. 아폴로니아는 그 일에 비앙카를 중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시녀를 시켜 약혼자의 호불호를 조사하는 것은 평범한 소녀의 본분이 아니던가. 물론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아폴로니아의 잘못이 아니다.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었다. 아드리안은 그 의중을 짐작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아드리안. 너는 왕세자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리고 도착한 후에도 따로 그의 호불호를 알아보렴.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마. 그의 시중을 맡을 사람들, 전에 그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 가리지 말고 뇌물을 돌려.”
아폴로니아는 목소리를 낮추어 지시했다.
“……고급 정보일수록 많은 재화가 필요할 텐데요.”
아드리안은 조심스럽게 아폴로니아의 상황을 걱정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외면당한 황녀의 지갑 사정은 뻔했으니까.
아, 아드리안은 잠시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눈치가 없어 정확히 이해를 못 했던 것인가? 황녀는 어쩌면 아드리안에게 그 정보 수집의 비용을 알아서 부담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드리안은 자신이 이미 아폴로니아에게 평생을 맡기기로 다짐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신하는 본디 주군을 위해 자금을 지출하기도 하는 법이지.
“전에 제가 개인적으로 모아 둔 것이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태어나서 별 헛소리를 다 듣는구나.”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잘라 말하며 아드리안의 손에 작은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전하, 이, 이건…….”
손을 펴 본 아드리안은 헉 하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그것은 투명한 다이아몬드였다. 흠집 하나 없는 그것은 빛깔과 투명도 또한 완벽해서 반지나 목걸이로 만든다면 누구나 탐낼 법했다. 못 팔아도 준마 한 필에 맞먹을 가격의 물건이었다.
“내일 세공이 끝나면 같은 것을 스무 개 더 줄 테니 두고두고 쓰렴.”
아폴로니아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네가 모아 둔 돈에 비해 너무 하찮지 않다면 말이야.”
아드리안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손 안의 보석을 수차례 확인했다. 황제의 눈 밖에 난 딸, 황폐하고 쓸모없는 영지 하나만을 가진 영주. 자기 몸 하나 챙기기도 빠듯해야 정상인 상황에서, 아폴로니아는 웬만한 거상도 놀랄 만한 자금을 아무렇지 않게 약속한 것이다.
그녀는 뭔가 더 물어보려 고개를 들었으나 아폴로니아는 할 일이 더 있는 듯 방을 빠져나가고 없었다.
* * *
“비에른의 왕세자 이카르트입니다.”
장신에 어마어마한 넓이의 어깨를 가진 남자가 아폴로니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남자는 스물셋이라고는 하나 그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다. 단정한 연미복을 입었으나 그을린 피부며 온몸의 근육에서 그가 지녔을 어마어마한 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반듯한 이목구비였으나 덥수룩한 수염 때문인지 조금 무서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 마디로 곰 같았다. 귀여운 인형 같은 곰 말고, 앞발로 사람 다섯쯤 기절시킬 수 있는 거대한 곰.
“춤을 청합니다.”
그는 행진하듯 걸어와 딱딱하게 말했다.
사냥 대회를 며칠 남기고 열린 이카르트의 환영연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그들은 잘 통하지 않았다.
“제국의 음식은 입에 맞으신가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음식의 맛은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 지방이 없는 고기만을 먹죠. 그 맛은 어디나 같습니다.”
“제국을 여행하신 적이 있으시다고요?”
“여행이라기보다, 기사 수련 도중에 걸어서 대륙을 반쯤 횡단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만 살이 빠지면서 근육 손실이 너무 많아 그만두었죠.”
그는 아폴로니아의 외모가 기대보다 마음에 드는 듯, 간혹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자주, 자기 자신의 양팔과 어깨를 살펴보고는 했다. 힘을 줬다 뺐다 하면서, 마치 그사이에 근육이 사라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듯.
대화는 지루했지만, 아폴로니아는 바로 그의 기호와 취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 혐오하는 것 모두. 그녀는 최대한 그에게도 지루한 대화를 선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하께서는 혹시 기사들을 좋아하십니까? 제국에는 황제 폐하를 비롯해 훌륭한 기사들이 많습니다.”
“글쎄요. 저는 더위도 많이 타고 땀 흘리는 걸 싫어해서요. 검투는 무서워서 보지 못한답니다.”
“제국에서 생산하는 철강은 대륙 최고의 무기가 됩니다. 전하께서는 아십…….”
“제국에서 생산되는 보석이야말로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지요. 저희 고모님께서 운영하는 상단은 최고급 사파이어만 취급한답니다.”
아폴로니아는 그가 관심을 갖는 주제는 끊고, 그와 가장 멀 것 같은 화제만을 꺼냈다. 덕분에 초반에 보였던 이카르트의 호감이 조금씩 식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계획했던 그대로.
억지스러운 대화 속에서 춤 세 곡을, 그조차도 없는 어색한 정적 속에서 또 두 곡을 춘 그들은 의무적인 교류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아폴로니아는 춤이 끝나자 양 눈썹 끝을 내리고 입술을 깨물며 울상이 된 표정으로 그녀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그분은 나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무슨 말씀이세요, 전하?”
호기심을 눈에 가득 담고 대기하던 비앙카가 물었다.
“빨리 네가 가서 그분과 춤을 한 곡 추고 와! 최대한 호감을 사야 해. 그래야 네 주인인 나에 대해서도 좋은 마음을 갖지 않을까?”
아폴로니아는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비앙카를 졸랐다. 마치 언니에게 조르는 철없는 동생처럼.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머리핀은 어디 있니?”
형식적으로나마 자신을 달래 주던 비앙카에게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연회에는 조금 더 여성스러운 보석이 어울린다고 들어서…… 가지고는 있습니다.”
귀족들은 흔히 가문의 문양이 박힌 장신구를 지니고 다녔다. 유사시에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으나 그렇기에 이를 장신구로서 사용하는 이는 드물었다. 신분증을 가슴에 차고 다니는 것은 이상하니까.
키튼가의 문양은 투박한 활과 화살의 형태였다. 비앙카는 그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연회장에서 착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안 돼. 지금 한 핀을 떼고 그걸 착용해. 나랑 같은 사파이어를 했다가 나보다 더 눈에 띄면 어떡해?”
‘중앙의 귀족들은 옷차림 외에는 관심사가 없다더니.’
평생 심신의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비앙카의 눈에 아폴로니아는 거의 어린애였다. 유약할 뿐 아니라 꽤나 귀찮은 아가씨.
“황궁에 들어간 시녀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주인의 질투심이니라. 너는 예쁘고 총명하니 그것만 피하면 한 몸 바쳐 가문의 영화를 가져오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아폴로니아는 악독한 구석은 없었으나 시녀들의 차림을 많이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연회 전에는 비앙카에게 직접 입을 옷을 골라 주기도 했었다. 연녹색과 진녹색이 어우러진, 조금 수수한 느낌의 드레스였다. 자신은 화려한 보랏빛 옷을 입을 것으로 보아 혼자 돋보이겠다는 심산임이 분명했다.
비앙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황녀의 시녀로서 본분을 지키며 좋은 남편감을 찾아 눈도장을 찍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경험 없는 황녀가 모르는 것은, 간혹 짙은 화장과 화려한 드레스보다도 수수한 드레스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녹색이 어울리는 비앙카 자신처럼.
그녀는 아폴로니아를 곁눈으로 슬쩍 보았다. 무겁게 보석을 두르고 나이 들어 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황녀보다는 더 돋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찮은 심부름이 끝나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봐야지.’
그녀는 꽤나 자신감이 생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것을 착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그것보다 네 외가인 레바인 가문의 문양이 좋겠다. 검의 모양으로 해. 그것도 가지고 있지?”
“네, 전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녀는 속으로 짜증 섞인 한숨을 푹푹 쉬며 머리핀을 바꾸어 단 후 이카르트에게 다가갔다. 혹여 나중에 페트라가 묻는다면 이 까탈스러운 황녀의 신경은 온통 약혼자에게 쏠려 있다고 보고할 계획을 세우며.
“황녀 전하의 시녀 비앙카 인사드립니다.”
멀리서만 보았을 때는 몰랐으나 가까이서 그 뒷모습을 보니 이 남자는 풍채가 보기 드물게 좋았다.
떡 벌어진 어깨며 그 밑으로 늘씬하게 뻗은 허리는 완벽한 역삼각형을 만들었다. 연미복을 갖추어 입었음에도 몸의 어느 곳 하나 단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가 돌아서서 인사했다. 남자다운 듬직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는 투박한 말투이나 약혼녀의 시녀에게도 나름대로 예를 갖추고 있었다.
‘멀쩡한 사람인데, 전하께서는 뭐가 그렇게 문제였던 걸까?’
그녀가 잠시 머리를 굴리는 사이, 이카르트의 짙은 갈색 눈이 그녀의 머리핀을 향해 반짝였다.
“엇, 영애는 혹시 레바인가의 사람입니까?”
“저희 외조부께서 레바인 백작이신데…… 아십니까?”
이카르트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찾은 표정이었다. 그는 비앙카의 손을 다짜고짜 덥석 잡더니 밑도 끝도 없는 찬사를 내뱉었다.
“알다마다요! 레바인가의 검법을 개인적으로 존경해 왔습니다! 제국에 온 김에 이를 직접 볼 기회가 있기를 바랐는데 백작께서 사냥에는 참가하지 않는다고 하시어 속상하던 참입니다!”
비앙카는 얼굴이 밝아졌다.
황궁으로 온 지 겨우 열흘. 영지에서는 대접받던 몸이었으나 수도에서 그녀는 흔하디흔한 귀족 영애였다. 쟁쟁한 집안들 사이에서 그녀의 가문을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외가인 레바인은 한때 검법으로 조금 이름이 있었으나 지금은 쇠락하여 알아주는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갑자기 외가의 문양을 장신구로 착용한 것이 아주 끝내주는 선택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외가의 검법을 아시는군요! 외할아버지께서는 검법을 전수받아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평생을 쏟으셨답니다.”
“오오오! 제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대단한 영광이었을 텐데요! 혹시 위에서 베는 동작에서 팔에 무리가 가는 점을 보완한 겁니까? 비에른 왕가의 검법에도 비슷한 문제점이 있었답니다.”
“비슷해요! 정확하게는 그 동작을 하더라도 팔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팔을 단련시키는 방법을 연구하셨죠. 아마 다른 검법에도 다 적용될 수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은 오랜 친구라도 되는 듯 검법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한참 쏟아 놓았다. 그는 비앙카의 친가가 활로 유명한 무가라는 말을 듣고는 박수까지 치려 했다.
“역시 레바인과 키튼가의 영애는 차림 또한 남다르군요.”
반짝반짝 빛나던 그의 눈이 이번에는 그녀의 녹색 드레스를 보았다. 아폴로니아가 골라 준 것이었다.
“과하게 반짝이는 장식을 단 다른 영애들보다, 편안하고 어울리는 복식을 하신 영애께서 더 우아해 보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는 한 마디 꾸밈도 없이 솔직하게 마음속의 생각을 뱉는 사내였다. 촌스러웠으나 한편으로는 기개가 있지 않은가. 며칠 전 작별한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저, 혹시 저와…….”
그녀가 아폴로니아의 명령을 다시 떠올린 순간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이카르트는 먼저 커다랗고 단단한 손을 내밀어 비앙카를 리드했다. 검과 친숙해 굳은살이 박인 두 손이 맞닿았고,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반갑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단련을 할 때 아름다운 법이었다.
* * *
아드리안은 바빴다.
별궁의 살림은 별것이 없었지만 비밀리에 왕세자 뒷조사를 하랴, 아폴로니아를 챙기랴, 황실의 구조와 권력관계를 익히랴 할 일이 많았다. 전날까지 이카르트가 좋아하는 색이며 관심 갖는 기사 등 온갖 것들을 알아보러 다니느라 정작 연회는 즐기지도 못했다.
물론 그 덕에 과거 이카르트와 기사 수련을 함께 했던 비에른 출신의 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왕세자가 비앙카의 외조부를 한때 존경했었다는 고급 정보를 손에 넣을 수도 있었고.
그녀는 그 기사가 나중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의 손에 상당한 돈을 쥐여 주었다.
밤이 깊어서도 연회가 계속되고 이카르트와 비앙카의 대화가 원활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마침 황제궁의 앞뜰에는 새로 설치한 분수가 있었다.
그녀는 모처럼의 평화 속에서 아름답게 물을 뿜고 다시 빨아들이는 분수를 홀린 듯 바라보고며 생각에 잠겼다. 주로 새 주인에 대한 것이었다.
‘볼수록 무서우신 분.’
자신과 동갑내기에 얼핏 보면 더 순진해 보이는 그녀는 매사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치밀했다.
과감한 청혼으로 아드리안을 리페르 가문에서 빼내 온 것은 물론, 제한된 정보로 이카르트의 취향을 파악해 간접적으로 그의 마음을 주무르고 있었다.
비앙카의 의상이며 장신구의 선택도 그렇다. 겉보기에는 소녀가 질투심에 몇 마디 간섭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아폴로니아가 비에른에서 유행하는 색이며 이카르트가 좋아하는 예복을 참고하여 만들어 둔 것이었다.
실제로 비앙카가 입은 그 옷은 그녀 본인에게 딱 맞음은 물론 이카르트의 연녹색 커프스와 맞춘 듯 어울렸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드는 비용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련해 냈다.
‘어디까지 생각하신 걸까?’
바스락.
아드리안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
“오랜만이구나, 아드리안.”
꿈속에서도 마주치기 싫었던 끔찍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소공작님…….”
“황궁 시녀로 있으면서 나를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여긴 것은 아니겠지?”
가레스 리페르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아드리안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이미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술을 꽤나 마신 듯 얼굴이 벌게진 그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입을 열자 짙은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더 예뻐졌구나. 초췌했던 얼굴에 생기도 돌고. 어디 가까이서 볼까?”
그는 마치 제 것이라도 되는 양 오른손으로 아드리안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왼손은 이미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어머니를 닮았으나 페트라 특유의 이성과 총기는 없는 노란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듯,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또 피하는구나, 새삼스럽게. 하긴 너는 그런 모습이 매력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거라. 내 흥미가 떨어지지 않도록.”
끈적하고 미지근한 손이 뺨을 쓰는 것과 동시에 귓가에 불쾌한 더운 바람이 불었다. 아드리안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황녀의 시녀가 된다 하여 내 손이 너에게 닿지 않을 것 같았느냐? 오늘은 내가 기어코…….”
“거기 있었구나, 아드리안.”
가레스가 석상처럼 굳은 아드리안의 뒷목을 붙잡아 끌어당기려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 매번 방해만 받는군. 대체 누가…….”
그가 짜증을 내며 돌아서자 분수 너머로 금빛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폴로니아.”
제국의 유일한 황녀이자 그가 희롱하던 시녀의 주인인 아폴로니아를 보고도 가레스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 마음을 놓은 듯했다.
“오랜만입니다. 가레스 오라버니.”
“보다시피 우린 조금 바쁘구나.”
“하지만 아드리안에게 시킬 일이 있는걸요.”
아폴로니아는 순진무구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들의 모습에 당황하거나 화가 난 기색은 없었다. 빙긋빙긋 웃으며 물러서지 않는 그 모습에 가레스는 은근히 짜증이 났다.
항상 만만한 이 사촌동생이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아폴로니아가 거슬렸다.
어린 시절에는 분명히 그녀로부터 문제없이 이것저것 빼앗기만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녀를 만난 날은 재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시비를 걸면 상관도 없는 데서 이상한 일을 당하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작년에 시드 바이안이 없는 곳에서 그를 이빨 없는 호랑이라며 모욕했던 날에는 마차의 바퀴가 빠져 길가에 몇 시간을 갇혀 있어야 했다.
어린 시절 아폴로니아로부터 빼앗았던 책을 그녀의 코앞에 흔들며 자랑을 좀 했던 날은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다. 같은 음식을 먹었던 다른 사람들은 멀쩡했기에 누구의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아폴로니아의 생일에 아드리안을 취하려 했던 일은 또 어떤가.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오히려 그녀를 빼앗기고 어머니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그는 한심한 사촌 누이가 실제로 무슨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가 불운을 몰고 다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었을 뿐. 그리고 그 미신은 아폴로니아를 향한 심술로 이어졌다.
“아폴로니아.”
그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린 시절 네가 내게 주지 않으려고 버텼던 백마를 기억하니? 눈처럼 하얗고 예뻐서 흰 장미라고 불렀지.”
“무슨 말씀이 하고 싶은 건가요?”
“그 말은 아주 고통스럽게 죽었단다. 마물에게 산 채로 뜯어 먹혔지. 네가 총명했다면 그때 뭐라도 배웠을 텐데 말이다.”
웃으며 상대를 협박하는 방법은 그가 어머니에게 유일하게 제대로 배운 기술이었다. 그의 미소는 더욱 비열하게 일그러졌다. 아폴로니아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듯.
그러나 사촌 누이는 곧 다시 미소를 회복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배웠지요. 언제나 고모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요.”
“그래. 바로 그것이다. 제 아무리 황녀라도 우리 집안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드리안을 제가 데려가야 하는 거랍니다.”
여유롭게 웃던 가레스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고모님께서는 아드리안을 리페르가에서 내보내시며 그 아비인 페드로 리스에게 단단히 말씀하셨거든요.”
아폴로니아는 언제 다가왔는지 아드리안의 팔을 슬쩍 잡아당겨 그녀의 작은 몸을 가레스에게서 빼냈다.
“‘그대의 미천하고 부정한 딸이 한 번이라도 내 아들의 눈에 띄었다가는 경을 칠 것이다.’라고요.”
“뭣……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페드로가 그 후에 아드리안을 제게 맡겼으니까요. 제 시녀에 대한 책임은 제가 져야 하지 않겠어요?”
사촌 누이는 어디 하나 흠 잡기 어려운 나긋나긋한 말투를 쓰면서도 팔에 힘을 주어 아드리안을 잡아당겼다. 어느새 갈색 머리의 예쁜 시녀는 가레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고모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답니다. ‘어리고 경험이 없어 순수한 소공작은 판단력이 흐리니 마땅히 그대가 책임지고 두 사람을 갈라놓아야 할 것이다.’라고요. 그렇다면 아드리안의 새 주인이 된 제가 책임지고 오라버니에게서 아드리안을 떼 놓아야 하지 않겠어요? 다 오라버니를 위한 거랍니다.”
그녀의 말에 가레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내였다. 거칠 것이 없었으나 유일하게 두려운 것은 어머니였고, 그 때문에 간혹 주변에서 어머니 품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아냥을 듣고는 했다.
그런데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어머니의 말을 별것도 아닌 사촌의 입에서 들어야 하다니! 가레스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뭐 하고 있니 아드리안? 돌아가서 비에른의 사신단에 부족한 것이 없는지 챙기도록 해. 오늘 자정까지는 한눈팔지 말고 사신단 바로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한다.”
그가 씩씩대며 서 있자 아폴로니아는 멋대로 아드리안을 들여보내고 말았다. 아드리안은 그 말에 환해지는 얼굴을 숨기지도 않은 채 연회장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에게 인사조차 제대로 남기지 않은 상태로.
“너…… 너 말이다…….”
“네, 오라버니.”
아폴로니아는 흠 잡을 곳 없는 예법으로 정중하게 가레스의 말을 받았다.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만 있는 채로.
“황제 폐하의 친조카이자 공작가의 후계자인 내가 우스워 보이는가 보구나.”
가레스는 이를 으득 갈며 아폴로니아에게 한 발 다가섰다.
아폴로니아는 한숨이 나왔다. 대체 어떻게 페트라와 루이스 리페르 공작 부부 사이에서 이런 아들이 나왔을까?
지략으로는 제국에서 적수가 많지 않은 어머니, 차분하게 그녀를 감당하고 또 보조하는 아버지. 상식적으로 둘의 아이는 똑똑하거나, 신사적이거나, 두 가지 장점 중 하나는 갖추어야 했다.
그러나 가레스는 그저 폭력적일 뿐이었다. 스스로도 주변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그는 자격지심이 심했고, 이는 어린아이의 반항 같은 형태로 드러났다. 지금 아폴로니아를 위협하는 것도 그 맥락일 것이다.
“오라버니, 화를 가라앉히세요.”
“내가 너 하나 어떻게 못 할 줄 아느냐?”
“제 약혼자가 보면 오해할지 모릅니다.”
마지막 말 한마디에, 가레스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이카르트는 그 정의로움과 기사도로 유명했다. 자신의 약혼자를 웬 남자가 위협하는 모습을 보면 검부터 뽑을 것이다.
그러나 가레스 리페르는 분노를 다스릴 만큼의 이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보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한 그는 다시 험악하게 으르렁대며 아폴로니아를 분수 바로 앞까지 밀어붙였다. 취기와 분노로 이성을 잃은 그의 금안이 아폴로니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다시는 내게 헛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그의 거친 손이 허공으로 치켜 올라갔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무례를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대책 없을 줄은 몰랐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때리려는 것이다.
아폴로니아는 마음속으로 조소를 보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뺨을 맞는 정도의 수치는 별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레스가 이 일로 근신하게 되면 아드리안의 활동이 편해질 것이다.
쉬익- 퍽!
그러나 그녀가 고통을 각오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어디선가 작은 돌멩이 하나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날아왔다. 단단히 땅을 딛고 있던 가레스의 몸이 갑자기 휙 하고 꺾였다.
주변에는 분명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풍덩!
범인을 찾을 시간은 없었다. 그의 눈이 초점을 잃음과 동시에, 비대한 몸이 분수대 속으로 꼴사납게 빠지고 말았다.
아폴로니아는 순간 안도하면서도 머리를 짚었다.
유리엘. 와 있었구나.
* * *
“소공작께서 분수에 빠지셨다!”
“어서 소공작을 구해 내라!”
첨벙거리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달려와 외쳤다. 그들은 금세 물에 젖은 채 기절한 가레스를 분수에서 빼냈다.
누구도 가레스가 무언가에 맞았다는 사실은 몰랐다. 아마 그 자신도 영문을 모른 채 기절했을 것이다. 근처에 있을 유리엘 또한 어떤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유리엘은 가까이에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를 지켜 주면서.
“오라버니께서 많이 취하셨나 봅니다. 어서 의사를 부르지요.”
아폴로니아는 적당히 놀란 척을 하였으나 속으로 잘됐다고 생각했다. 멍청한 가레스라도 그녀 옆에 있을 때 재수가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가르치면 언젠가는 배울 테니까.
“전하, 괜찮으십니까?”
이카르트도 조금 늦게 달려와 물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듯했다.
‘나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괜찮은 남자였다. 관심의 범위가 말도 안 되게 좁다는 점, 대화할 때 상대가 그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 쓸데없이 사람을 가르치려 드는 경향이 있다는 점, 더럽게 지루하다는 점 등 사소한 단점들을 빼면.
조금 전과 달리 그의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딘가 부드러워진 표정이었다. 아폴로니아는 그의 어깨 너머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비앙카를 보았다. 그녀의 황갈색 눈동자는 분명 아폴로니아보다는 이카르트를 향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씨앗은 뿌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 시녀 아이와의 대화는 즐거우신지요?”
“비앙카 양 말씀이십니까? 대단한 시녀를 두셨더군요! 검술과 궁술에 대한 지식이 저를 능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비앙카는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기를 잘 다룬답니다.”
이카르트의 입이 헤벌어졌다.
“역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군요! 편한 자리에서 만났다면 제가 한 수 가르쳐 드렸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무예에 대해서는 참으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왕족으로서, 뛰어난 기사로서의 거만함은 어쩔 수 없었다. 상대의 실력을 알지도 못하면서 당연히 자신이 우월하다고 전제하다니.
선황은 생전에 아폴로니아에게 다양한 사람을 상대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법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었다. 이카르트 같은 사람은 공략이 쉬웠다. 그의 예상을 깨뜨리면서도 자신감을 적당히 치켜세워 준다면 그는 비앙카의 포로가 될 것이다.
“친절한 말씀이시군요. 연회가 불편한 자리였다면 그 아이와 따로 만나 무예를 겨루어 보시겠어요?”
아폴로니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카르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정말,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는 지식도 힘도 부족해 상대를 해 드릴 수 없으니 시녀를 대신 보낼 수밖에요. 민폐가 되지 않는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비앙카도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벙긋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 있던 비앙카와 이카르트가 눈을 맞추며 인사하는 모습을 아폴로니아는 놓치지 않았다.
뿌려진 씨는 순조롭게 자라날 듯 보이니, 수확은 멀지 않을 것이다.
* * *
연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황제도, 페트라도 비에른의 사신단과 무언가를 협상하기에 바빠 아폴로니아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아폴로니아의 가장 큰 성공이었다.
별궁의 앞뜰에 도착한 아폴로니아는 사람들을 물렸다.
“이제 나와.”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진 않는 어둠을 향해 말했다. 거짓말처럼, 유리엘이 어딘가에서 미끄러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겁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아폴로니아는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처음도 아닙니다.”
유리엘이 몇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표정은 이상하게 굳어 있었다.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이상한데…….”
“약혼…… 축하드립니다.”
유리엘은 무척이나 억지스러운 목소리로 한 마디를 뱉어냈다. 눈썹은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 불만스러워 보였다.
“응?”
“한동안 황실 소식에 어두운 채로 있었더니 약혼하신 줄도 몰랐습니다. 시드로부터 전하의 약혼자의 방에 잠입해 서류를 빼 오라는 지시를 전달받고 나서야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는 이를 꽉 깨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화를 참고 있는 사람처럼.
“아…… 결정된 건 최근이라서. 유리엘은 숨어서 지내니까 몰랐던 게 당연해.”
소외당했다고 느끼는 건가?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불만스러운, 아니 그것을 넘어 상처받은 듯한 표정이 얼른 이해되지는 않았다.
“서류는 가져왔습니다. 왕세자의 방을 보니 별 이상하거나 변태적인 것도 없이 멀쩡하더군요. 쓰지도 못 할 오래된 검을 잔뜩 수집하는 것 같지만.”
그는 계속해서 툴툴댔다.
“검을 배우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편 될 사람은 결혼 후에도 연무장에서 살 것 같더군요.”
“남편 될 사람……?”
아폴로니아는 팔짱을 낀 채 애꿎은 땅을 툭툭 차는 유리엘을 보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고는 유리엘이 무슨 오해를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못 본 사이에 소통이 부족했구나.
“유리엘, 나는 약혼자와 결혼할 생각이 없어.”
“뭐…… 연인이 될 사람에 대해 조사해 달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유리엘의 날카롭게 올라갔던 눈꼬리가 처졌다. 흡사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아폴로니아는 순간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유리엘, 황녀의 결혼은 원래 상업적 거래 같은 거야. 아무도 우리가 연인이라고 생각 안 해. 그 얘기를 안 해 준 건 해 줄 만한 가치가 없어서였어.”
“하지만…….”
“그리고 내가 너한테 잠입을 부탁한 건 그 거래를 깨기 위해서야. 타국의 후계자랑 결혼하면 여기서 할 일을 할 수가 없잖아.”
유리엘은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척 다행스러우면서도 억울한 표정이었다.
“시드는 그런 설명을 안 해 줘서…… 황위 다툼에서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경우도 흔하니까요.”
평소와 다르게 발등을 내려다보며 중얼중얼 변명하는 그는 쓸데없는 짓을 하다가 주인에게 들킨 강아지를 닮았다. 아폴로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유리엘의 귓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귀엽잖아.’
아폴로니아는 어쩐지 멈추고 싶지 않은 손을 떼고 그에게 물었다.
“서류는?”
“여기 있습니다.”
두 사람은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별궁 안 아폴로니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네.”
유리엘이 건넨 서류를 펼쳐 본 아폴로니아가 말했다. 황제와 비에른이 체결할 예정인 계약서의 초안이었다.
“약혼 성립을 계기로 비에른은 제국의 특산품인 석궁과 군마 같은 것들을 제국 내 13개 지역에 독점적으로 공급한다는 것. 그리고 제국 쪽에서는…….”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던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란섬의 다르마유 차를 비에른에 향후 20년간 독점적으로 공급한다…….”
다르마유에는 약간의 마법이 깃들어 있어 그 잎으로 차를 끓여 마시면 사소한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속설이 있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효력이 입증되기도 했다. 마시는 이의 신체를 튼튼하게 함과 동시에 그 정신을 예민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제국에서는 한때 유행할 뻔했다가 묻혀 버렸고, 간혹 변방의 왕국에서 찾는 그런 차였다. 비에른은 전사의 나라이므로 호신의 효능이 있는 차를 좋아할 법하지만 국민 정서상 마법과 주술을 꺼리는 면이 있어 그곳에는 수출된 적이 없었다.
“다르마유 차를 즐기는 제국 출신 황녀를 비로 맞으면 자연스레 그 유행이 비에른에서도 돌 수 있다는 판단이었겠지. 공급하는 쪽에서는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좋은 사업이야. 문제는…….”
그녀는 계약서의 다음 항을 가리켰다.
“어이없게도, 이 물건을 비에른에 공급하는 주체는 황실이 아니라 고모님의 루완 상단이라는군.”
유리엘 또한 미간을 찌푸렸다.
“황녀를 팔아 이익을 취하면서 그 이득은 공작가가 챙긴다…….”
아폴로니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예상된 내용이었다. 황제는 황실 자체의 이익보다 공작가의 이익을 더 챙길 테니까.
“이상한 계약이군요. 이걸 막을 방법이 있습니까?”
아폴로니아는 잠시 이마를 짚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뗐다.
“그럼.”
시원한 대답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유리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란섬은 거의 독립국에 가까워. 제국의 소속이기는 하나 직접적인 통치자도, 섬에서 생산되는 물건의 소유자도 황실이 아닌 백작이지. 아직은 내 결혼식 날짜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루완 상단은 다르마유를 확보하기 전일 거야. 즉, 아직 모든 것은 아이테르 백작이 쥐고 있다는 의미이지.”
“하나 루완 상단에서 제안을 넣으면 받지 않겠습니까?”
“백작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거든. 작은 섬나라를 지키기 위해 대외적인 업무에서는 철저히 이해관계를 따져서 진행하지. 즉, 누군가 루완 상단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그의 마음은 금방 얻을 수 있다는 거야. 이 시점에 그런 제안을 넣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하지만 누가 감히…….”
“백작은 사냥 대회를 위해 제국에 와 있어. 대회 자체가 아니라 그걸 보러 온 귀족들과 사업을 진행하러. 행사가 끝나면 바로 상단과 다르마유 공급 계약을 할 예정이지. 그럼 루완 상단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 비에른에 공급할 수 있겠지.”
아폴로니아는 힌트를 하나씩 흘리는 것처럼 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표정을 들여다보던 유리엘이 몇 초 뒤 눈을 크게 떴다.
“그를 수도에서 만나 거래를 가로챌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사람이…… 설마.”
“나야.”
아폴로니아가 씩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많은 보석들을 다 어디다 쓰겠어? 평생 썩히게?”
유리엘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과감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다. 거의 무식하다고 할 정도로. 그러나 성공한다면 무척이나 효과적일 것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그렇게 해서 거래를 불가능하게 만들면…… 결국 다른 거래를 조건으로 결혼을 진행하지는 않겠습니까?”
아폴로니아는 그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한 번 더 미소 지었다. 목소리뿐이 아니었다. 유리엘은 여전히 조금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걱정 많은 커다란 강아지.
“그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할 거야. 이카르트는 이 결혼이 하기 싫어지게 될 테니까.”
그 또한 이해관계를 위해 감정과 무관하게 결혼이 필요하다는 점은 잘 알 것이다. 비앙카는 그 이해관계가 틀어지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존의 계획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 장치였다.
“어떻게 말입니까?”
유리엘이 다시 물었다. 그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유혹. 이카르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유혹하려 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아폴로니아는 속으로 덧붙였다.
유리엘의 얼굴이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무너지는 모습은 미처 보지 못하고 말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