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진짜 영주(2)
벨라들이 아폴로니아의 말에 따라 사라졌다. 시드 또한 그들을 돕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집 안에 남은 사람은 유리엘과 아폴로니아 두 사람뿐이었다.
“무모한 건 습관입니까?”
유리엘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예쁘게 뻗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응?”
“무슨 황녀가 그렇습니까? 칼트산에 혼자 들어갔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저런 자 앞에 직접 나서십니까?”
유리엘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소용돌이쳤다. 조금 전 대장이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건드렸을 때, 그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그의 목에 검을 꽂아 버리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했다.
기억도 안 날 만큼 많은 적들과 싸워 봤지만 의무가 아닌 사적인 분노 때문에 상대를 죽이고 싶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저와 처음 만날 때도 그러셨습니다. 어떤 황녀가 살수가 올 것을 알고도 그 자리에서 기다립니까? 그게 위험하다는 걸 모르십니까?”
분노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폴로니아가 원망스러웠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두려웠다.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말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만 몇 차례 깜빡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엘은 한숨을 쉬었다. 온갖 재능을 갖춘 현명한 이 황녀는, 예언에 가까운 그 통찰력을 가지고도 자신의 행동이 이상할 정도로 무모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건가.
“……다른 방법이 없는걸.”
아폴로니아가 조용히 대답했다.
“예?”
“무모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으니까.”
유리엘의 눈이 커졌다. 감히 자신을 다그쳤다며 그를 질책할 거라 예상했지만 아폴로니아는 의외로 차분하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고 있었다.
“유리엘, 이런저런 일에 직접 나서는 건 위험하지만, 나서지 않는다고 안전한 것도 아니야.”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순간 유리엘의 마음 한구석이 저렸다.
“정치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도 어느 날 암살을 당할 수 있고, 본분에 따라 황족에게 검을 가르치겠다고 나선 것만으로 불구가 될 수도 있지.”
아폴로니아의 눈은 유리엘을 보고 있다가보다는 먼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이…… 경험입니까?”
아폴로니아는 다시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직접 경험했을 리는 없잖아? 그냥 가까이서 봤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려 유리엘을 마주 보았다. 당당하던 두 눈에는 짙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유리엘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전해 들은 이야기는 있었으나 그는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까웠던 사람들의 숙청을 보며 살아온 그녀의 삶을. 살얼음판 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매 순간 얼마나 아슬아슬한 판단을 하며 살았는지를.
“칼트산에 혼자 간 건 모험이었어. 하지만 가지 않았더라면? 단순히 부자가 못 되는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와 고모님에게 평생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잖아.”
“그건…….”
“유리엘, 나는 가지고 싶은 것이 많아.”
그를 마주 본 아폴로니아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조금 전 있었던 그림자는 지워 버린 듯했다.
“칼트산의 보석도, 내 영주민들의 행복도, 나 자신의 평온도,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아폴로니아가 말을 맺었다.
“빼앗긴 자리도.”
유리엘은 그 뜻을 알았다. 그저 어리숙한 소녀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자신에게 충성을 요구한 순간부터, 아폴로니아가 원하는 것은 명확했다.
“그러니 무모할 수밖에 없어.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으니까. 그리고 위험할 때면 네가 지켜 주면 되잖아.”
말을 마친 아폴로니아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녀는 한 발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원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그녀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운명의 손에 맡겨 버릴 생각이었다.
유리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선택이 그렇다면, 아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운명이 그녀를 함부로 할 수 없도록, 그 곁에서 지키는 수밖에.
* * *
같은 시간 디아만 자작의 저택.
“약속을 지켰으니 보내 주세요.”
여인은 눈앞의 키 작고 수염을 기른 남자로부터 몇 걸음 물러났다. 눈앞에 선 남자는 평소 모습보다 10년쯤 젊어 보였지만, 그럼에도 타고난 교활함이며 왜소한 체격 때문에 그다지 잘생긴 모습은 아니었다.
몇 달 동안 그는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 왔다. 몇 번의 청을 거절했더니 이제는 그녀를 납치해 데려오기까지 했다.
“글쎄, 너야 약속을 했었지만 나는 너를 풀어 주기로 한 기억이 없는데.”
왜소한 남자, 메이슨 디아만 자작은 느물거리며 그녀에게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눈은 요 몇 달간 그랬던 것처럼 욕정에 불타고 있었다.
“아모레타, 내 제안을 다시 생각해 보거라. 너에게만은 한 번 기회를 더 주지. 태어나서 많은 미인을 봤지만 너 같은 계집은 처음이다.”
그는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훑었다. 끈적끈적한 눈길이 몸을 지날 때마다 그녀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아모레타는 벨라였다. 그러나 그런 수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만나 온 사람들은 축복받았다며 부러워했지만, 그녀에게 미모는 저주나 마찬가지였다. 평생 그래 왔고, 지금 이 순간은 인생 최악의 위기라 할 수 있었다.
“젊어 보이는 약을 만들어 주었잖아요!”
“젊어 보이는 게 아니라 젊음 자체를 달라고 했다. 너는 내 말을 완전히 수행한 것이 아니야.”
디아만 자작은 억지를 쓰며 비열하게 웃었다. 아모레타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면 그는 이상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녀는 리샨 출신이 아니었다. 몇 달 전 누군가를 피해 리샨에 왔다가 그의 눈에 든 운 나쁜 여인이었다. 방탕한 생활에 파묻혀 여자의 외모를 보는 눈이 꽤나 높다고 자부했던 디아만 자작은, 이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돌아 버릴 뻔했다.
얼굴뿐인가. 그녀에게는 타고난 교태랄까, 유혹적인 자태 같은 것이 있었다. 손짓이며 걸음걸이며 향기며 묘하게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그래서 그는 여인을 다짜고짜 저택으로 데려왔다. 아모레타가 적당히 예쁘장한 여인이었다면 그저 강제로 취하고 말았겠지만, 그는 이 여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안겨 오랫동안 곁에 있기를 바랐다. 그는 아모레타를 데려오면서, 주술사가 필요하다고 둘러댔다. 그러고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었다.
“열흘 안에 스스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검을 만들어라. 전투에 쓸 수 있을 정도로. 너도 마녀이니 못 한다고는 하지 말아라. 실패하면 내 여인이 되는 것에 동의한 줄로 알겠다.”
그가 아는 한 제국에 그런 물건은 없었다. 있었더라면 진작 유명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여인에게 통 큰 척 필요하다는 재료를 제공해 주고는 열흘을 기다렸다.
열흘째 되는 날, 그는 좋은 옷을 빼입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
“자아, 이만하면 포기하고 내 품에 안기…… 으응?”
부드러운 여체가 닿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지만, 그의 손에 닿은 것은 서늘한 검날의 감촉이었다. 아모레타는 그로부터 거리를 둔 채 검을 내밀고 있었다.
“이게 뭐야!”
검은 날듯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보란 듯 기사의 기본적인 초식들을 펼쳤다.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않아 녹슨 그의 몸은 검을 따라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삐끗거려 그 후 한동안 앓아누워야 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그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늘렸다.
‘마물을 쫓는 향을 만들어라.’
‘목소리를 여인과 같이 바꾸는 약을 만들어라.’
‘내 목소리가 이상해졌지 않느냐! 그 해독제를 만들어라!’
얼토당토않고, 조금 멍청하기까지 한 요구들을 그녀는 말없이 수행했다. 이윽고 외모를 10년쯤 젊어 보이게 만드는 약의 개발에도 성공하자 디아만 자작은 인정해야 했다.
아모레타는 천재였다. 제약과 주술의 천재.
속으로 수염을 쥐어뜯고 싶었던 그는 이제 대놓고 억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젊음 그 자체를 줄 수 없다면 너는 내 여인이 되어야 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말이라도 해 주셔야 만들지요. 40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면 마흔몇 살인 거지 젊은 외모 말고 젊음 자체를 달라는 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그 순수한 마음 같은 것 말이다! 도전적이고 거침없는 기운! 억누르지 못하는 정력도!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었다. 다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아 심하게 부자연스럽고 징그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가지고 다투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몇 달을 갇혀 지낸 아모레타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그녀는 자작이 듣고 싶은 말을 뱉어 냈다.
그는 껄껄 웃으며 아모레타에게 손을 뻗었으나, 그녀는 냉정하게 손을 쳐내고 처음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능력이 부족하니 그만 죽이시지요. 목숨 말고 제가 드릴 것이 없는 듯합니다.”
그녀는 평생 바라 왔던 소원을 입 밖으로 뱉었다. 죽게 해 달라는 것. 디아만 자작은 눈을 번뜩이며 그녀를 쏘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봐라! 명령을 거부한 이 계집을 데려가 가두어라! 그리고 내 말을 듣겠다고 할 때까지 다시 채찍으로 쳐라!”
아모레타는 냉소를 지었다. 원치도 않았던 삶, 진작 포기했어야 했다.
말없이 끌려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는 지금의 울분을 풀 수 있는 방법을 하나 떠올렸다.
“오늘 잡아왔다는 그 벨라 아이를 데려와! 내게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친절하게 교육해 줘야겠다.”
몇 달 전 사냥개처럼 그의 팔을 물어뜯어 보기 흉한 흉터를 남긴 아이, 이름이 타냐라고 했던가. 그 아이가 저택에 와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 주지.”
그의 명령에 따라 두 사람이 접견실로 들어왔다. 한 명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머지 한 명은 앞선 한 명을 윽박지르며. 익숙한 구도였다. 원래 그들은 처음에 저항을 하다가…… 응?
“놓으라고! 제대로 물려 볼 거야?”
“으허허헉! 난 아프게 잡고 있지도 않잖아!”
이상했다.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더 가늘었고 비명 소리는 성인 남자의 목소리 같았다. 마치 두 사람의 입장이 바뀐 것처럼.
“물지 마! 이제 놓는다니까! 영주님, 데려왔습니다.”
병사는 거의 울먹이면서 타냐의 손을 놓았다. 그제야 눈을 돌려 그들을 본 자작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추태냐! 아이 하나를 못 당하고!”
“저…… 영주님, 그게…….”
병사는 차마 타냐의 집에서 만난 여인과 장검을 쓰는 귀신같은 놈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지는 못했다.
“잘못했습니다!”
디아만 자작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요즘 되는 일이 없다. 머저리 황녀라는 여자는 쓸데없이 방문했다가 납치를 당하지를 않나, 그 탓으로 호위 기사들이 거지꼴로 자작가를 찾아와 황녀를 찾아 달라고 하지를 않나.
아모레타와 바쁘게 진도를 빼고 싶은데 너무 방해가 되기에 대충 거처를 마련해 주고 황녀를 찾는 흉내를 조금 냈었다.
돈 때문에 한 납치라면 어차피 곧 범인이 나타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으나 자신이 관리하는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라 은근히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이름뿐이라 해도 그녀는 황족이고 영주가 아닌가.
그 난리를 치고 겨우 얻은 수확은 저 소녀 하나였는데. 그런데 저것은 꺾이지도 않고 설쳐 대고 있다.
“버릇을 가르쳐 줘야겠구나.”
그는 벽에 걸린 채찍을 몸소 집어 들었다.
짜악-
채찍은 타냐가 서 있던 곳 바로 옆의 바닥을 때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무서운 눈을 하고 있던 타냐가 움찔 하고 놀라자 자작은 껄껄 웃었다.
“다시 한 번 그 때처럼 덤벼 보지 그러느냐. 자, 어서 잘못했다고…….”
“여, 영주님!”
“뭐야!”
하루 종일 방해만 받아 거의 울적해진 디아만 자작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대답을 듣는 순간 그는 귀를 의심해야 했다.
“황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오셨다니, 납치범들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아니,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요. 직접 저택의 문을 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뭣…… 잘못 본 것이 아닌가?”
“그 머리색이며 흔치 않은 눈동자는 분명 황족입니다. 지금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폴로니아 황녀는 갓 열일곱 살 난 소녀였으며,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어리바리하고 순해 빠진 것으로 유명했다. 그 증거로 리샨을 물려받고 나서 단 한 번도 그에게 영주로서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한 적이 없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얼간이 황녀는 납치범들로부터 도망쳤거나, 납치범의 요구하에 자작을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부하들이 멍청해서 그것을 당당한 행차라고 해석하였을 것이다.
그래, 그녀가 데리고 왔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분명 납치범인 것이다. 이 빌어먹을 영지민들은 하도 멍청해서 자작가를 직접 찾아와 몸값 흥정을 할 수도 있는 자들이었다. 그 후 죽을 것도 모르고.
그렇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 당당하게 황녀를 만나 이제 걱정 마시라고 달래 주고, 호위 기사들과 다시 붙여서 최대한 빨리 수도로 보내 버리면 될 것 아닌가.
자작은 타냐를 쏘아보았다. 운도 좋지. 그러나 당장 벌을 주지 않으면 그의 울분은 갈 곳이 없지 않은가.
“시간이 없으니 우선 맛보기로 세 대만 때려 주마.”
타냐는 몸을 떨었다. 질긴 가죽으로 만든 자작의 채찍은 한 대라도 제대로 맞으면 살이 다 찢길 만큼 거칠었다.
“자! 한 대!”
채찍은 휙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고, 타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짜악 하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넌, 넌 누구냐?”
어디서 왔는지 모를 키 큰 남자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팔목에 자작이 막 휘둘렀던 채찍을 감은 채였다. 머리끝까지 덮어쓴 후드 때문에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타냐는 그 붉은 입술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입술이 자작을 향해 조소를 보냈다.
자작은 얼굴이 붉어져서 외쳤다.
“놔라! 이놈을 당장…… 억!”
남자, 아니 유리엘이 채찍이 감긴 팔을 그대로 휙 끌어당기자 자작은 꼴사납게 넘어지며 바닥에 얼굴을 부딪혔다.
“이봐라! 당장 이 침입자 놈과 저 아이를 가두고…….”
“가두지 말게.”
당황한 자작이 급히 상황을 정리하려던 찰나, 문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천천히 들자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아폴로니아 황녀가 서 있었다.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젊은 시절 먼발치에서 엘레니아 황녀를 본 기억이 있는 그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전하.”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필 이런 꼴사나운 모습이라니. 너무나도 갑작스러웠지만 자작의 잔머리는 상당히 빨리 돌아갔다.
“전하! 오셨군요! 제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비굴한 표정으로 후다닥 일어나 아폴로니아를 맞으러 문간으로 뛰어갔다.
“극악무도한 납치범의 소굴에서 벗어나신 겁니까? 이제 제가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곧 수도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일단 저 수상한 침입자 놈을 처리하고…….”
눈물 바람으로 아폴로니아를 향해 뛰다, 그는 아폴로니아가 반가운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다만 그 방향이 자작을 지나 등 뒤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타냐.”
“예? 지금 뭐라고…….”
“자작, 인사하게. 이 사람들은 내가 임시로 고용한 호위들이야. 한 명은 이미 만난 것 같군.”
그는 비로소 황녀의 등 뒤에 서 있는 스무 명 정도의 사람을 보았다. 아름다운 얼굴들이 전부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벨라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로브에 감춰진 남자도 보았다. 그는 건방지게도 황녀를 향해 고개만 끄덕이며 얄미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설마 황녀의 사람이었나.
“그럼 접견실도 넓으니 우리 모두 실례하겠네.”
어버버거리는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지, 금발의 소녀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 들어가 넓은 접견실의 상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십수 년 만에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상석에 앉은 것은. 그러나 소녀는 그 자리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오히려 그에게 명령했다.
“일단 앉게, 자작. 우리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아.”
“전하, 일단은 요양을 조금…….”
“내 앞에서 그런 물건 들고 있지 말게.”
그녀는 자작의 말을 끊고 명령했다. 이번에는 낮고 엄한 경고 같은 말투였다. 디아만 자작은 문득 손에 든 채찍을 내려다보았다.
“아랫사람을 가르치느라…….”
그의 대답에 황녀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아까와 같은 말투로 다시 말했다.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물건이라…….”
“그, 그렇습니다.”
“그런 물건이라면 이리 내게.”
“예?”
“아랫사람인 자네를 가르치는 데 한 번 써 봐야겠으니.”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오만한 지배자의 표정으로 손을 내밀 뿐이었다. 자작은 홀린 듯 그녀의 손으로 채찍을 건넸다.
* * *
자작저의 접견실은 작은 연회에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실제로 그는 간혹 수도에서 내려온 지인들이 방문할 때, 이 공간을 사용해서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황녀와 자작은 물론, 황녀와 함께 온 20명가량의 사람들, 그리고 자작의 집사와 부하 10명 정도를 수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황녀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집사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부하는 물려주겠나?”
그녀는 참으로 평온하게 말했으나, 자작은 엄청난 속도로 머리를 굴리고 간을 보고 있었다.
분명 제 발로 그를 찾아온 황녀는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아 보였다. 이제 와서 설마 영지 관리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것일까? 이 쓰레기 같은 땅에 왜 관심이 생겨서?
그는 제국의 유일한 황녀가 소심하고 바보 같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소문과 조금 달라 보였다. 그는 호흡을 고르며 다시 아폴로니아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녀는 상석에 몸을 기대고 접견실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이런 곳이 처음이라는 듯.
아직 어리고 경험도 없는 소녀이다. 무서운 척해 봐야 리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황녀와 함께 온 사람들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몇 명이 그의 시선에 눈을 내리까는 것이 보였다.
그래. 아직 이곳의 실권은 내 손에 있지.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기선 제압을 해야 할 것이다. 자작은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황녀 전하, 그것은 적절하지 않은 말씀입니다. 데리고 오신 저…… 호위 기사들은 집시에 도적 같은 놈들이라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으니까요.”
“내가 임명한 자들인데, 믿지 못 하나 보군?”
“외람된 말씀이나 황녀 전하, 전하의 즉흥적인 결정들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습니다. 언질도 없이 리샨을 방문하고 납치를 당하고…… 황실의 기사들은 전하를 찾지 못해 자작가의 신세를 지고 있던 참입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는 반항적인 청소년을 다루듯 부드럽게 말했다. 물론 말 속에는 뼈가 있었다.
“원하신다면 저들을 쫓아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제 부하 열 명은 접견실에 두도록 하지요. 그 정도면 저 오합지졸을 제압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황녀의 일행을 둘러보았다. 20명 남짓한 호위들 중에는 늙은이는 물론이고 여자도 섞여 있었다. 로브에 덮인 청년은 여전히 짜증이 났지만 제까짓 게 뭐 어쩌겠는가.
그 능글거리는 말투에 아폴로니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작은 조심성 없이 말하는 듯 보였으나 실은 단어 하나하나를 치밀하게 고르고 있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너는 손님이고, 내가 주인이다. 멍청하게 납치나 당해 민폐를 끼쳤으면 이제 얌전히 내 말 좀 들어라.’
생각보다 대응이 빠른 자였다. 아폴로니아는 겉으로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자작은 기선 제압에 성공해 기쁘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폴로니아는 그의 자축에 찬물을 끼얹었다.
“본론부터 말하지. 나는 그대의 죄를 물으러 왔네. 저택의 수색 또한 필요할 듯하니 협조해 주게.”
“예?”
자작은 잠시 표정이 흔들렸으나, 곧 여유를 되찾고 반문했다.
“아무리 황족이라도 연유조차 말해 주지 않고 사저를 수색하다니요? 그런 명령에는 협조할 수 없습니다.”
무식하게 본론부터 들어가면 얼마나 꼴이 우스워질 수 있는지 모르는 것을 보면 이 여자는 하수였다. 황족이라 한들 이곳에서 그녀의 병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있던 황실 기사단은 아직 소식조차 듣지 못했는데 누구를 시켜 무슨 수색을 한단 말인가? 주워들은 건 있어 가지고.
그녀는 아마 영주민 몇 명에게 자작이 횡포를 부리느니 여자를 겁탈했느니 하는 헛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증거도 무엇도 없이 따지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무턱대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어찌 이해해야 하는지…….”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다음 말은 그의 예상을 아주 조금 벗어났다.
“나는 리샨에 온 첫날 일행과 떨어졌지.”
아하.
자작은 깨달았다. 이 소녀는 병사들을 잃고 고생을 하더니 짜증이 났던 것이다. 그러고는 영주를 대신하는 그에게 화풀이를 하러 온 것이구나. 그런 어린애를 주무르는 것은 더욱 쉽다.
“설마 납치의 책임을 제게 물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전하께서 미리 언질을 주셨더라면 절대로 없었을 일입니다.”
어디 한번 해 보시지? 그는 봐준다는 듯한 미소로 그녀에게 말했다.
“멀쩡한 지역이라면 자작의 비호가 없이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어야 하지. 수십 년간 그대가 관리하던 영지일세. 그런데 나는 경계를 넘은 후 하루 사이에 세 번이나 도적을 만났지. 사실상 리샨은 치안이랄 것이 없는 곳이 아닌가?”
예상보다 날카로운 반박에 자작은 내심 움찔했지만 겉으로는 번들거리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받아쳤다.
“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이곳은 본디 재해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영주민을 먹여 살리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재정으로 완벽한 치안을 이룰 수는 없지요. 선황 시절부터 그러했습니다.”
그는 선황의 이름을 팔면 황녀가 꼼짝 못 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는지 황녀의 얼굴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내친김에 그는 한마디 덧붙이기로 했다.
“부족한 재정으로나마 저는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병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황녀 전하를 찾느라 많은 비용이 나갔고 말입니다.”
마지막 말을 하며 그는 특별히 목에 힘을 주었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그의 말을 되씹었다.
“말 한번 잘했군. 나를 찾으러 왔다는 병사들이 임무는 제쳐 두고 무관한 아이 하나를 끌고 간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자네가 자랑스러워하는 병사들의 실적인가?”
“아이는 과거 저를 공격한 전적이 있는 위험인물입니다. 당연히 황녀 전하의 납치와도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했겠지요. 안 그래도 지금 하시는 면담이 끝나면 호되게 벌을 줄 계획입니다.”
“아이는 납치범이 아니야. 나를 도와줬던 아이일세.”
“전하께서 무언가 사기를 당하신 모양입니다. 벨라들은 사심 없이 귀한 분을 돕지 않으니까요.”
자작은 끊임없이 그녀의 기분을 거슬렀다. 그가 유도하는 반응은 뚜렷했다.
“저 아이와 안면이 있으시다니 오히려 제 병사들의 판단이 어느 정도 맞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녀가 이성을 잃고 화를 내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것. 그런 모습을 보이는 순간 접견실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녀의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택 수색 명령 따위는 더더욱 의미조차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그다지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영지민의 세금으로 최선을 다해 훈련시킨 자네의 병사들이, 황녀를 찾다가 저 아이를 실마리로 데려왔다. 그것이 그대의 설명인가? 병사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면 수장인 그대가 책임을 져야겠지?”
“물론입니다! 전하께서도 결국 안전하게 이곳까지 오셨다는 것은 다 제 병사들의 덕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가슴을 탕탕 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황녀의 언성이 높아진 걸 보니 화가 부글부글 치민 모양이다. 그렇다면 곧 울음을 터뜨리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명확하다.”
“안전하게 오셨으면 이제 얌전히 그냥…… 예?”
승리를 자신하며 떠들던 자작의 입이 벌어졌다. 아폴로니아는 조금 더 무게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아이가 병사에게 잡히던 순간, 나는 같은 집에 있었지. 심지어 그대의 병사와 한두 마디 대화까지 나누었네.”
그녀는 접견실 구석에서 유리엘의 검 손잡이에 얻어맞았던 대장을 발견하고는 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대장은 깜짝 놀라 표정 관리조차 하지 못했고, 그 모습은 모두의 앞에 드러났다. 아폴로니아가 타냐를 잡아 온 자의 얼굴을 알고 지목한 이상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순 없었다.
“저자는 아이를 발견했다며 기뻐하더니 옆에 있던 나의 신분을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돌아갔네. 황녀의 수색대라는 것이 황녀를 눈앞에 두고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뭘 뜻하는가!”
아폴로니아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손에 들었던 채찍을 자작이 있는 방향으로 휘둘렀다. 채찍은 자작의 오른발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 떨어졌다. 타앙 하는 소리가 접견실에 크게 울렸고, 자작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그것은…… 그것은 분명 실수일지 모르나…….”
“그것을 무능함이라고 한다네. 자네의 첫 번째 죄책은 ‘무능’이야.”
접견실에 정적이 흘렀다. 아까 자작에게 기울던 기세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예상 밖의 접근이었다. 귀가 팔랑거릴 어린 나이. 감정에 휩쓸려 횡포를 일삼지 않았냐며 자작에게 무작정 따질 줄 알았던 황녀는 그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별것 아닌 줄로 알았지만 중대하고, 증거가 너무나도 명확한 자작의 과실을.
“이제 내 말이 진지하게 들린다면…….”
아폴로니아는 자작의 옆에서 어버버 거리던 집사에게 말을 걸었다.
“근 10년간의 장부를 가지고 오게. 두 번째 죄를 알려 줄 테니.”
그녀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자작보다 경험이 조금 더 많은 집사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자작님…… 어떻게 할까요?”
그는 모기만 한 소리로 자작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어 버린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채찍을 바닥에 휘둘렀다.
타앙-!
“이곳의 영주는 나야. 집사 자네가 명령을 따르는 데에 자작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네.”
활활 타는 것 같은 금적안이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예, 예! 잘못했습니다! 바로 대령합지요.”
집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라졌다. 그러나 사라지기 직전, 아폴로니아의 눈이 닿지 않는 각도에서 자작의 입술이 뭐라고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집사는 꽁지가 빠져라 서재로 도망갔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어 똑같이 생긴 공책 몇 권 중 검은 책들을 집어 들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준비해 둔 거짓 장부였다.
아폴로니아는 아홉 살 때 영지를 상속받았다. 이미 리샨의 어려운 재정에 대해 알고 있었던 그녀는 즉시 영주민의 세금을 파격적으로 감면하여 주었다.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하였기에 그러한 주요 결정을 할 때에는 아버지인 황제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마침 이미지 관리가 중요했던 황제는 당연하게 동의서를 써 주었다. 그는 물론 중요한 충고 한 마디를 덧붙이기는 했다.
“앞으로는 이런 문제에 신경 쓰지 말거라. 네가 할 일은 악기를 연주하고 단장을 하는 것이란다.”
한편 세금의 관리에 대한 내역 보고를 이미 소홀이 하고 있던 자작은 그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거의 영지의 재정에 대한 연락을 하지 않으며 ‘영주’로서 군림했다. 감면된 세금은 사적인 이익으로 돌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작은 만일에 대비하여 두었다. 혹시 황녀가 리샨을 누군가에게 지참금으로 넘겨야 한다거나, 헛바람이 들어 갑작스럽게 서류를 내놓으라고 할까 봐.
바로 오늘처럼.
거짓 장부는 별것이 아니었다. 거두어들인 세금의 양은 속이기 어려우니 성실하게 기재하되, 그 자금이 모두 영지를 위해 지출된 것처럼 끼워 맞추는 것이었다.
기근이 들었을 때 개미 오줌만큼의 구휼을 해 놓고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곡식을 푼 것처럼 꾸민다든가. 영지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축제를 열었다고 적는다든가. 병사들의 월급 등 기본적인 비용을 부풀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증거는 남지도 않으며, 영지에 사는 사람은 모두 자작의 말을 듣는다. 적당히 짜고 치면 작정하고 파 보더라도 눈치채기 힘들 것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집사가 내민 여러 권의 장부 중 가장 최근의 것을 펼쳤다.
“리샨은 물가가 참으로 비싸군. 지출의 단위가 이렇게 크다니 말일세.”
“재해에 시달리는 영주민을 구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용인도 병사도 많지 않은데 유지비가 많이 드는군. 무기 또한 비싸고 말이야.”
“그것은 말씀드린 대로 치안이 워낙 좋지 않아…… 그것도 다 자연환경의 탓이랄까요.”
“유지비가 든 것치고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그건 아까 얘기했고…….”
자작의 어깨가 움찔했다. 구석에 서 있던 대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장부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최소한 사용인들의 생활은 풍족하겠군.”
“그, 그렇습니다. 다들 만족하며 제게…… 아, 아니 황제 폐하께 충성합니다.”
조금 전 능글거리던 것과 달리, 그는 기가 죽어 말을 조금 더듬었다.
뭐 어떤가. 저 복잡한 장부를 하나하나 어떻게 분석하겠다고. 큰 지출일수록 내역은 꼬이고 얽혀 있다. 밤을 새워 낑낑거리며 정리하고 관계자들을 하나하나 찾아 신문한들, 그 전에 말을 맞춰 두면 그만이다. 사소한 지출을 문제 삼으면 착오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황녀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네 이름과 직위가 무엇이냐?”
그녀는 구석에서 눈을 피하려는 대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예? 예! 저는 스탠 보리스라고 합니다! 영주님, 아니 자작님의 병력을 총괄하는 대장입니다!”
“다른 사용인은 몰라도, 병사들 중에서는 너의 급여가 가장 높겠군. 여기 장부에도 그렇게 나와 있고 말이야.”
“그, 그렇습니다.”
아폴로니아는 들었던 장부를 탁 덮었다. 그러고는 팔꿈치를 탁자에 놓은 채 턱을 괴고 스탠 보리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윽고 입을 열어 툭 내뱉듯 물었다.
“한 달에 얼마를 받지?”
스탠 보리스, 자작, 그리고 자작의 집사는 순간 돌처럼 굳었다. 그녀는 복잡하고 큰 지출을 문제 삼지 않았다. 간단하고 정확하게,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작은 내역 하나를 짚은 것이다. 장부와 스탠의 대답을 맞춰 보려고.
“한, 한 달에…….”
스탠이 더듬거렸다. 안타깝게도 저택 바깥의 일에만 신경 쓰는 그는 비밀 장부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그런 것이 있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어려운 질문이 아닐 텐데?”
“그, 급여는 매년 조금씩 달라집니다.”
“올해의 월급을 말하는 거야.”
그녀는 지루한 표정을 한 채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전하, 저자가 받는 급여는…….”
장부를 직접 작성한 집사가 끼어들려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아폴로니아는 시드에게 눈짓을 했고, 시드가 귀신같은 속도로 검을 반쯤 뽑았다.
쉬익-
날카로운 철이 검집에 스치며 섬뜩한 소리가 났다. 그 검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본 집사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하고 있었지?”
아폴로니아는 다시 스탠에게 물었다. 스탠은 눈치가 없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최대한 저 검은 책에 적힌 내용과 들어맞는 말을 해야 자작이 무사할 것임을 알았다. 일단 자작이 무사해야 자신의 머리와 몸이 붙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도.
“하, 한 달에 에일른 금화 10개를 받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 지급받는 것은 겨우 에일른 금화 3개였지만 장부에는 그보다 훨씬 높은 금액이 적혀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금화 10개라. 적지 않군.”
“영, 아니 자작님의 은덕입니다.”
아폴로니아는 의외라는 듯 눈썹 한 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스탠은 비슷하게 맞췄다 생각하고 맞장구를 쳤다. 사색이 된 자작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아폴로니아는 계속해서 스탠 보리스에게 물었다.
“자네의 부관은 누구인가? 그는 얼마를 받지? 다른 병사들은?”
“예, 그…… 부관은 톰슨이고 그는 에일른 금화 6, 아니 7, 아니 8개를 받습니다. 병사들도 비슷비슷하고요.”
스탠은 시시각각으로 찌그러지는 자작의 표정을 이제야 파악하고 진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촤악-
스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폴로니아는 손에 들었던 두꺼운 검은 책을 집어 던졌다.
“아흑!”
장부는 벌 받는 아이처럼 서 있던 자작의 코를 정확하게 맞추고 떨어졌다. 자작의 인생에서 가장 아프고 모욕적인 순간 중 하나였으나 그는 티조차 낼 수 없었다.
“주워서 읽어 보게.”
“저, 전하.”
시퍼런 서슬을 이기지 못한 자작은 아픔을 호소할 겨를도 없이 천천히 장부를 집어 펼쳤다.
“벼, 병력의 월 급여…… 스, 스탠 보리스…….”
읽어 내려가는 그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에일른 금화 50개.”
“예에?”
말도 안 되는 숫자가 나오자 스탠은 표정 관리도 잊어버리고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아폴로니아는 손짓으로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루한 톰슨…… 에일른 금화 45개.”
스탠의 옆에 대기하던 다른 병사도 입을 떡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나간 돈과 병사들이 받은 돈이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작.”
아폴로니아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는 미세한 분노가 배어 있었다. 그녀의 짙은 붉은색 눈동자가 자작을 빤히 응시했다. 자작은 어딘가 꽉 붙잡혀 버린 느낌이었다.
“자네의 두 번째 죄는 ‘부패’.”
“전하, 오해십니다. 그것은, 저, 저놈이 자기가 돈을 많이 받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거짓말을…….”
“그리고 나의 추궁에도 끝없이 거짓을 고하였으니.”
아폴로니아는 자작의 말을 끊었다. 자작은 더 이상 따지거나 반박하지도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주군에게 충성하기보다는 자기 눈앞의 이익을 좇은 것이다. 세 번째 죄는 ‘불충’.”
타앙-
그녀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접견실에 세 번째로 채찍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자작의 오른발과 왼발 사이에 채찍 끝이 떨어졌다. 자작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큰 비용은 건드린 것이 없습니다! 모든 돈을 제가 토해 낼 테니…….”
“어디 자네 말이 맞는지 보기 위해 자택을 수색할 필요가 있겠군. 집사가 안내를 맡게.”
그녀가 시드에게 눈짓하자, 그는 집사의 한쪽 팔을 잡아끌며 데리고 온 벨라들과 함께 접견실을 훅 나가 버렸다.
이번에는 자작이 항의할 틈도 없었다. 그의 수하들은 무릎을 꿇고 덜덜 떠는 자작의 모습을 보며 시드를 붙잡아야 하는지 보내 줘도 되는지 혼란스러워했다.
순식간에 기세는 역전되었다. 호위 몇과 영주민들을 데리고 무식하게 쳐들어온 황녀가 말 몇 마디에 자작의 저택을 장악하고 만 것이었다.
자작은 그녀가 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녀를 다른 사람들과 격리시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아니면 실종됐을 때 사고인 척 없애 버릴걸! 온갖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적나라한 수치를 당할 줄은 몰랐다.
자작은 억울했다. 그도 사람인지라 리샨의 영주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알아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보원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황녀는 또래 소녀에 비해 아둔하다고 보고했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여자는 누군가? 기사단을 대동하지도 않은 채 자작의 사람들로 가득 찬 저택을 찾아와서는 말 몇 마디로 그를 제압했다. 자작은 태어나서 그녀와 같은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여자가 황실에서는 죽은 듯이 지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자택을 수색하면 무슨 여죄가 나올지 모르겠군.”
아폴로니아가 한숨을 쉬며 자작에게 말했다. 디아만 자작은 태곳적 힘까지 동원해 머리를 굴렸다. 생각에 집중하느라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아모레타로부터 받은 젊음의 약의 약효가 후드득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폴로니아의 서슬에 놀랐을 집사는 저택의 비밀들을 다 숨기지 못할 것이다. 수색에 몸을 빼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고…… 안 돼!
퍼뜩, 그는 지하의 비밀 감옥에 가두어 둔 영주민들을 떠올렸다. 몇몇은 세금을 바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매를 맞고 방치되어 있었고, 그 외에 여자들도…….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수색이 끝나면 그는 죽은 목숨일 것이다. 편히 죽지도 못할지 모른다.
“무슨 문제가 있나?”
입술을 깨물고, 손톱을 물어뜯는 그에게 아폴로니아가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자작은 튕기듯이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 순간 그에게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황녀의 호위 기사라는 것들이 다 나갔지 않나!
접견실에 남은 것은 그와 황녀, 쓸데없이 끼어 있는 꼬맹이 타냐, 황녀 옆에 로브로 얼굴까지 가린―그러나 아직 앳되어 보이는 기사 한 명. 반면 10명 남짓한 자신의 병사들.
그는 과감하게 생각했다. 황녀를 인질로 잡는다면?
무력행사까지는 예상 못했을 그녀는 겁에 질릴 것이다. 그녀를 잡으면 황실 기사단장을 역임했던 대단한 기사도 사색이 되겠지. 그러면 쌓아 두었던 돈을 들고 옆 나라로 도망치면 되지 않을까? 붙잡히면 황족 시해 미수죄로 처벌되겠지만 재빠르게 행동하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기가 막힌 생각에 그는 입이 찢어질 뻔했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이었다.
“전하.”
그는 태연한 척 아폴로니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둘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로브 속 호위 기사와 아폴로니아의 사이보다 더. 로브 속의 입술에 왠지 비웃음이 보였지만 그건 그냥 놈의 평소 표정인 듯했다.
“무엇인가?”
“이것 받으십시오!”
그는 패기 있게 외치며 그녀에게 몸을 날렸다. 자작은 전직 기사였고, 검술보다는 체술이 뛰어난 자였다.
휘익-
‘어?’
그런데 이상했다. 팔에는 느낌이 없고 아픈 것은 자작의 목이었다.
“커헉! 켁!”
숨 막히는 압박에 몇 번 컥컥거리고 보니 로브에 덮인 기다란 팔이 자신의 목에 감겨 있었다.
황녀의 호위 기사였다. 그는 뒤에서 팔을 뻗어 자작의 목을 낚아챈 상태였다. 분명히 자신과 황녀의 거리가 더 가까웠는데 대체 어느새 여기까지 이동했단 말인가.
“케헥!”
목의 압박이 강해지자 자작은 온 힘을 다 해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호위 기사는 계속 팔을 조이다가,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콜록!”
자작은 바닥에 널브러져 기침했다. 조인 것은 목뿐이지만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잠시 접견실의 천장만 눈에 들어왔으나 곧 아폴로니아의 한심해하는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쯧쯧…… 자작, 내가 아무 준비도 없이 시드 바이안 경을 떼어 놓을 리가 있다고 생각했나? 자네를 믿고?”
“흐읍…… 콜록!”
“여기 이 사람이 곁에 있는 한 나를 습격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두 명 정도밖에 없어. 한 명은 지금 이 저택의 지하를 뒤지고 있는 시드 바이안이고, 또 한 명은 수도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뭐, 성공했다고 한들 그 실력으로 얼마나 대단한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으으윽…….”
“황녀를 상대로 웬 위험한 시도인가. 그대의 네 번째 죄는 무려 ‘반역’.”
아폴로니아는 우스꽝스럽게 넘어진 채 부들부들 떠는 자작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시간도 길지는 않았다. 곧이어 시드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그리고 들리는 소리만 가지고도 여죄를 짐작할 수 있군. 영주민에 대한 착취며 부녀자 겁탈, 납치며 감금…….”
그녀는 씁쓸하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작, 미안하지만 대담은 여기까지만 하지. 아마 자네의 남은 생애에 나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거야.”
아폴로니아는 말을 마치고 자작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메이슨 디아만 자작은 뭐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팔다리를 부들거리며 쓰러져 있기만 했다.
* * *
황실 기사단 소속, 경력 20년의 베테랑 기사 군터 베르톤은 디아만 자작가의 별채 식탁에 앉아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는 시드 바이안이나 가이우스 리페르처럼 뛰어난 무장은 아니었다. 나름의 정의감과 공정함은 있었으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를 관철시킬 능력은 부족한, 소규모의 병력이나 작은 영지를 다스리기에 적합한 그런 사람이었다.
남작가의 차남인 그는 작위는 없었으나, 실제로 아버지를 대신해 영지를 경영한 경험도 있었다. 군터는 젊은 시절 전쟁을 경험한 데다 역모에 휘말릴 뻔한 적도 있었으며, 반대로 역모에 동참하지 않았다가 보복을 당할 뻔했던 경험도 많았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가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긴 철칙이 있었다.
‘가늘고 길게 살자.’
영웅을 동경했으나 자신의 적성이나 재주, 그리고 처한 상황을 잘 파악했던 그는 중립이야말로 가늘고 길게 사는 길임을 알고 있었다.
가이우스 리페르가 즉위하고 황실에 수많은 세력 교체가 일어났을 때, 크고 작은 갈등 속에서도 군터는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고 살아남았다.
리페르 가문이 득세하여 황실의 실권을 잡았을 때에도 그는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필요한 만큼의 보고를 하고 주어진 임무만 수행했다. 그렇다고 반대 세력을 돕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승진을 하지 못했다. 페트라 리페르에게 잘 보인 후배들이 제1 기사단의 부단장이니, 제2 기사단의 단장이니 하는 고위직을 꿰차고 작위를 받는 동안 그는 항상 뒷전으로 밀렸다. 밀리고, 밀리다가, 이제는 험지까지 황녀를 수행하는 허드렛일을 맡게 되었다.
‘이제 정말 은퇴하고 형의 영지에서 농사나 짓게 해 달라고 할까.’
그는 항상 그렇듯 자신의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사실 황녀의 수행은 대단히 고된 일은 아니었다. 황녀는 까탈스럽지도 않고, 도적단이 있다고는 하나 형편없는 실력이기에 두렵지 않았다. 약간이지만 수당이 나온다는 점을 생각하면 편안하고 괜찮은 일이었다.
‘기사 생활의 마지막 업무를 하자 없이 해치우고 깨끗하게 정리하자.’
그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래서 황녀를 잃어버렸을 때, 군터는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치열하게 지켜 온 나의 평온함에 이런 오점이라니.’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동정심을 타고났기에 황녀의 신변이 진심으로 걱정되기도 했다. 물어물어 자작가를 찾아갔으나 그는 대충 기사들을 별채에 몰아넣고 황녀를 찾는 시늉이나 하는, 오만함에 가득 찬 저질스러운 작자였다.
직접 수색을 하자니 그는 리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동료 기사들도 별 도움이 안 된 것이, 그들은 황녀를 찾아내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만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대단한 사람이 아닌 것은 알지만, 여린 소녀의 실종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조금 역겨운 일이었다.
“미안하오, 베로니카! 명예롭게 퇴직해서 퇴직금으로 여행을 선물하려 했는데!”
그는 울적함을 참다못해 식탁을 탕탕 치며 자리에 없는 부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는지, 하필 그 부끄러운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베, 베르톤 경…….”
뒤를 돌아보자 후배 기사인 라이언이 서 있었다. 급한 소식이라도 전하러 온 듯 얼굴이 상기된 채였다.
“헛, 으흠! 허! 그, 저, 무슨 일인가?”
군터는 애꿎은 수염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정말 젠장 맞게도 라이언 저놈은 입이 싸기로 유명했다.
그는 군터와 더불어 리페르가와 거리를 두고 있는 기사였는데, 그 이유는 삶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헛소리를 너무 많이 하고 다녀서 황제나 리페르 가문이 딱히 그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이언은 당장 군터 베르톤의 드라마틱한 독백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뭔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저와 베르톤 경을 찾으십니다.”
“뭐?”
귀를 의심한 군터가 되물었다.
“조금 전 자작가로 오셨답니다.”
“자작은 어디에 계신가?”
“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소식은 시드 바이안 님이 직접 전하셨습니다.”
“으잉?”
황녀를 찾으면 제일 먼저 거들먹거리며 소식을 전할 것 같은 자작이 이야기에서 빠져 있다니.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황녀 전하를 되찾았다!
신이 도와 황녀가 크게 다치지 않았고 사지가 멀쩡한 상태라면 그는 소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덜 수 있다. 더불어 명예로운 퇴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군터는 라이언과 함께 한달음에 황녀가 기다린다는 자작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자작의 사용인들이 깔끔하게 관리했기에 한때는 가구며 물건들이 각 잡혀 정리되어 있었던 집무실 바닥에 온갖 서류와 서책, 장부와 잉크 엎지른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난장판 한가운데, 그토록 찾았던 열일곱 살 소녀가 퍼질러 앉아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전하!”
한 손에는 장부로 보이는 책을, 다른 손에는 잉크가 쏟아진 정체 모를 서류를 든 아폴로니아는 양손과 옷자락, 그리고 얼굴에도 잉크 자국이 묻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쥐어뜯기라도 한 듯 헝클어지고, 입술은 깨물리다 못해 피가 날 지경이었다.
“오셨나요?”
그녀는 쉰 목소리로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군터와 라이언이 아는 한, 이 소녀는 언제나 아랫사람에게 깍듯한 존댓말을 썼다. 황녀로서의 위엄이 손상될 정도로.
“전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작은 어디 있습니까?”
“감옥에요. 자작저 안에 있긴 하답니다.”
아폴로니아는 퀭하고 초점 없는 눈으로 대답했다.
“아니 대체 누가…….”
“그러니까…… 명령을 내린 건 저였지만요.”
그녀는 두서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도적들에게 납치를 당할 뻔했으나 시드의 공으로 도망쳐 나온 그녀는, 그 상황에 대해 따지기 위해 자작을 찾아왔다. 지리를 모르니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가 들어선 순간 자작은 죄 없는 어린아이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하께서 불쌍한 아이를 돕기 위해 자작을 추궁했더니, 그의 온갖 죄상이 고구마 줄기처럼 따라 나왔다고요?”
“아이가 그러지 뭐예요. 자작은 매년 막대한 세금을 걷는다고…… 일단 뭐라도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장부를 가져오라고 한 건데…… 거기에 그렇게 많은 문제가 있을 줄은, 자작이 온갖 범죄를 다 자백할 줄은 몰랐어요. 죄상을 자백하는 사람을 가두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황녀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 바람에 이마에도 우스꽝스러운 잉크 자국이 생겼다.
두 사람은 상황을 이해했다. 워낙 해 먹은 것이 많았던 디아만 자작은, 타이밍 나쁜 황녀의 방문에 제 발이 저려 제대로 방어조차 못 해 보고 이것저것 쓸데없는 자백을 하고 만 것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사실 제대로 뭘 수사할 의지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리고 그녀의 성격이 이렇게 어리바리한 줄은 자작도 몰랐을 것이다. 알았더라면 얼마든지 둘러대고 상황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전하께서는 지금…….”
“보시다시피 영주로서 자작의 죄상을 정리하는 중이랍니다. 이, 이 서류들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어요. 너무너무 양이 많고, 용어도 어렵고…….”
말을 하다 말고 아폴로니아는 눈물을 쏟아냈다. 그 와중에 짜증이 났는지 손에 든 서류를 구겨 버렸다.
“아이고, 전하. 일단 그거 놔두고 일어나시지요.”
“횡령만 문제가 아닌가 봐요. 알고 보니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지하에 가두어 두고, 때리고…… 자작의 측근들이라도 도와주면 좋겠지만 다들 공범이래요.”
훌쩍이며 말하는 그녀를, 군터가 따뜻하게 부축해 일으켰다.
“전하, 저희가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사실 베르톤 경을 부른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아폴로니아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베르톤 경은 영지 경영을 해 보셨다면서요. 혹시,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녀는 두 손을 간절하게 모은 채 눈물이 아직 그렁그렁한 눈으로 군터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구세주를 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렇습니다! 베르톤 경이 도우면 되겠군요!”
라이언이 손뼉을 짝 하고 치며 외쳤다. 군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음이 따뜻했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 정의롭고 싶은 사람이었다. 디아만 자작의 만행은 보나마나 엄청날 것이고, 이 어리고 무지한 소녀는 그런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돌아가 쉬시지요. 제가 다 정리하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는 아폴로니아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무언가 가슴속에서 따뜻한 기분이 차올랐다. 황녀를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자책이 사라졌음은 물론, 그녀를 도와 착한 일을 했다는 사실은 그를 기쁘게 했다.
* * *
“사람을 아주 잘 고르셨더군요.”
시드는 감탄한 듯 말했다.
“군터 베르톤은 아주 공정하고 정확하게 사건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옛날부터 그랬지. 원칙에 충실하고 정의로우면서 나름의 융통성도 있고. 시드도 좋게 평가했잖아.”
“나름의 장점이 있다고만 했었죠. 제가 지나가듯 언급한 기사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군터 베르톤을 골라낸 것은 전하이고요.”
시드의 칭찬에 아폴로니아가 빙긋 웃었다.
“언제부터 마음에 두셨습니까?”
“글쎄. 가문도 한미한 사람이 아버지의 편에 서지 않은 채로 오랫동안 기사단 안에서 지위를 유지한 건 항상 대단해 보였지. 지켜볼수록 그냥 놔두기 아깝다 싶었고. 그렇지만 딱히 어떻게 할지 생각해 두지는 않았었어.”
“호위 기사 명단에서 보고 반가우셨겠군요.”
“시드랑 유리엘을 제외하고도 한 명은 제대로 된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만 했지. 상황이 이렇게 맞아떨어질 줄이야.”
아폴로니아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군터 베르톤에게 자작의 처분을 맡긴 지 며칠이 지났다.
자작의 횡포는 대단했지만, 애초에 리샨의 재정 규모가 작고 사용인의 수도 많지 않아 조사는 곧 끝이 났다. 디아만 자작은 멍해진 상태로 군터에게 모든 것을 자백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의 죄책을 부인하지 못했기에 더욱 시간 낭비가 없었다.
아폴로니아가 자작을 추궁하던 날, 접견실에 있었던 자작의 병사와 사용인들은 모두 자작의 측근―다시 말해 범죄의 공범이었다.
“디아만 자작과 집사는 사형, 나머지 사람들은 자작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감안해 나라 밖으로 추방하는 정도가 적절할 듯합니다.”
군터는 조사가 끝난 날 긴 보고서를 올리면서 깔끔하게 의견을 정리했다. 아폴로니아는 실제로 보고서를 매우 꼼꼼하게 검토하고 하나하나 머리에 담아 두었으나, 군터 앞에서는 집행을 두려워하면서도 어른 말을 잘 듣는 소녀를 적당히 연기하며 그의 제안을 승인했다.
아폴로니아가 리샨에 도착한 지 불과 20여 일 만에, 수십 년간 영지민을 착취하고 괴롭혔던 디아만 자작의 처형이 결정되었다. 영지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아폴로니아는 디아만 자작이 숨겨 둔 재산을 풀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작이 권한도 없이 내린 명령들은 해제했다. 그리고 자작의 가장 값어치 있는 보석 중 하나인 백금 줄에 커다란 루비가 박힌 목걸이를 군터에게 상으로 내렸다.
“저, 저는 이런 귀한 것을 함부로 받지 못합니다.”
지나친 선물을 받으면 나중에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는 군터는 처음에 사양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눈물겨운 설득과, 베로니카가 평생 보석 선물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사실 등은 군터에게 한 번의 예외를 허락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영웅처럼 숭배하는 황녀를 보며 그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고, 군터의 활약은 라이언의 입을 통해 과장이 더해지며 퍼졌다.
영지 경영도, 범죄의 처벌도 할 줄 모르는 황녀를 위해, 군터 베르톤이 자작의 악행을 낱낱이 밝히고 처단했다. 그리고 바로 그 보고가 페트라와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안전하게 일처리가 되는 데 비해서야, 루비 목걸이 정도면 아주 작은 대가였다. 물론 군터 베르톤이라는 인재와 가까워진 것 또한 수확이었다. 확고한 중립조차도 오래 공을 들이면 기울일 수 있으니까.
그녀는 이 평범하지만 소중한 인재를 얻기 위해 페트라는 생각도 못 할 만큼 많은 공을 들일 생각이었다.
그래, 그는 스스로 느끼지 못했겠지만 그가 치열하게 지켜 온 중립은 이미 조금 무너졌다. 보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착하지만 업적이 없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할 만한 것. 무력한 누군가에게 영웅이 되었다는 성취감. 그녀가 군터에게 준 진정한 보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 * *
자작의 처형을 하루 앞둔 날, 아폴로니아는 간만에 홀로 자작저 옆의 숲을 산책했다. 자작이 개인적인 산책로로 사용하였다던 한적한 공간이었고, 날씨도 로브를 걸치고 걷기에 적절했다.
그녀는 그날 오전 두 통의 편지를 받았다.
하나는 아드리안에게서 온 것이었다. 수도는 별일이 없고, 황제가 군터 베르톤의 활약을 비롯한 리샨의 소식을 듣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는 것. 그 외 잡다한 별궁 사용인들의 소식 등.
보내라고 지시한 적 없지만 반가운 편지였다. 아드리안은 기대보다 유능했다. 필요한 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것은 물론, 아폴로니아의 속마음을 꽤나 정확하게 파악했다.
[폐하께서는 디아만 자작의 처분에 전하가 관여한 것은 일절 없다고 판단하신 듯합니다.]
편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표현했지만 그녀는 자작의 실질적인 단죄를 아폴로니아가 했을 것이라는 전제로 편지를 보내 왔다. 누구도 리샨에서 진짜 발생했던 일을 아드리안에게 전한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통찰이었다.
아폴로니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나머지 한 통의 편지였다. 이는 비에른의 왕세자, 그러니까 아폴로니아의 약혼자가 전해 온 것이었다. 아폴로니아의 거취가 이미 전해졌었는지, 전령은 수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리샨으로 와 편지만 전하고 떠났다.
[그대의 아름다운 초상에 나는 이미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어서 얼굴을 보고, 사과 같은 뺨에 입을 맞추고, 정식으로 그대를 부인으로 맞아…….]
편지는 아폴로니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임이 틀림없다는 영혼 없는 찬사를 이어 갔다.
거창한 표현들이었지만 사실 정략결혼을 앞둔 사이에 거의 의무적으로 주고받는 내용이었다. 서로 쌓인 추억이 없으니 외모를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폴로니아 또한 여유가 생기면 비슷한 답장을 해야 할 것이다. 전해 들은 그대의 무용을 되새기며 잠 못 이룬다느니, 어서 나를 그대의 나라로 데려가 달라느니 하는 류의.
다만 길고 긴 편지는 왕세자의 본심을 조금 드러내는 부분도 있었다.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심신을 단련할 때 아름다운 법입니다. 이곳 비에른에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함께 비에른으로 돌아가면 검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 뒤에는 검을 든 아폴로니아의 모습은 분명 여신 같을 것이라는 둥의 느끼한 찬사가 더 있었다. 왕세자의 이상형은 용맹한 여기사임이 분명했다. 무를 숭상하는 나라라서일까.
그는 순진하게 아폴로니아가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고 믿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녀와 결혼하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여자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듯했다.
‘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약혼의 파탄을 유도해야 한다.’
그녀가 끊임없이 그 방법을 생각하던 찰나, 숲속 산책길이 끝났다. 그리고 눈앞에는 조그마한 오두막이 하나 보였다. 버려진 공간인가 했으나 자세히 보니 문에는 자물쇠가 걸렸고, 아주 최근까지도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있었다.
자작의 많은 비밀 공간 중 하나인가.
그가 숨기는 것이 어찌나 많았는지, 아폴로니아는 이미 여러 번 의도치 않게 그의 비밀 창고며 감옥 등을 발견했다.
그녀는 지니고 있던 자작의 열쇠 꾸러미에서 자물쇠에 맞는 것 하나를 찾아냈다. 숲속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오두막이기에, 그녀는 그 안에 기껏해야 포도주나 간식 정도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철컥-
“……디아만 자작님?”
그러나 문이 열리는 순간, 안쪽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두려움에 찬 듯한 목소리가. 아폴로니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로브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상대가 위험한 사람일 수 있으니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문이 활짝 열리자 오두막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좁고 어두운 공간. 벽에는 자작의 흔적으로 보이는 채찍이 걸려 있고, 그 외의 가구는 거의 없었다. 구석에는 검집, 로브 등 잡동사니와 몇 개의 약병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그 중간에, 등을 돌린 채 바닥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여인이 아폴로니아가 서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방 안의 풍경은 흐릿해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태어나서 본 여자 중 가장 아름다웠다.
검은 비단 같은 머리카락은 허리 밑까지 내려와 찰랑거렸고, 티 한 점 없는 우윳빛 피부는 가만히 있어도 반짝이는 것 같았다. 보통의 벨라들보다 조금 더 짙은 자색 눈동자는 마주치면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었다.
작은 얼굴은 어느 한 곳 완벽에서 벗어난 부분이 없었다. 화장 없이도 매끄럽게 말려 올라간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며 얼핏 보이는 보조개는 여인에게 순수한 느낌을 더했다.
여인의 몸에서는, 사람을 취하게 만들 것 같은 은은한 향기도 느껴졌다. 향수 같은 것은 아니었다.
아폴로니아는 한때 벨라의 유혹으로 망했다는 나라에 대한 전설이 말도 안 되는 핑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전설 속의 벨라들이 눈앞의 여자와 같았다면 그 이야기들은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미소 한 번 보는 것을 대가로 목숨을 바칠 군주들은 한둘이 아닐 테니까.
비에른의 왕세자는 틀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아폴로니아가 아니라는 증거가 바로 여기 있다.
“누구신가요?”
여인의 입술이 열리고, 나른한 목소리가 음악처럼 흘러나왔다. 다만 어딘가 힘없게 들렸다. 아폴로니아는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했다.
모르는 사람이니 정체는 숨겨야겠지.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오셨죠?”
“자물쇠가 낡아서 거의 부서져 있더군요.”
“그럴 리가 없는데…… 으윽!”
몇 마디 주고받던 그녀는 갑자기 어깨를 잡고 비틀거렸다. 아폴로니아가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비로소 여인의 온몸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뱀이 기어간 듯한 채찍 자국, 발로 찬 것이 분명한 정강이의 멍.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한 듯 초췌한 몸.
아폴로니아가 로브 속에 넣어 두었던 간식과 물을 내밀자 여인은 의심도 없이 허겁지겁 먹고 마셨다. 디아만 자작의 공간에, 상처 입은 미인. 아폴로니아는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저기, 저기 있는 약병을 갖다 주세요.”
여인은 음식을 다 먹고 난 뒤 구석에 늘어선 수십 개의 병 중 하나를 가리켰다. 아폴로니아가 그 말을 따르자 그녀는 약병 속 몇 방울 남지 않은 액체를 어깨에 뿌렸다.
“하아…… 재료가 부족해서 치료제는 못 만들지만 진통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에요.”
말하는 것으로 보아, 여인은 벨라답게 제약사로서도 능력이 있는 듯했다.
“저것들은 각각 뭔가요?”
아폴로니아는 병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대부분 빈 채였지만, 몇몇 병에는 갖가지 색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여인은 머뭇거리며 불안한 눈빛으로 아폴로니아를 보았다.
“……메이슨 디아만은 작위를 박탈당하고 갇혀 있어요.”
“예?”
여인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였다.
“그간의 폭정 때문에요. 제가 숲속을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이 증거예요.”
여인은 로브 속에 그나마 드러난 아폴로니아의 입을 빤히 보았다. 그러고는 반쯤 웃고 반쯤 우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정말 그렇군요.”
“나는 당신을 도와줄 수 있으니 얘기해 주세요.”
“빈 병은 자작님이 만들라고 요구하셨던 약물들, 그리고 액체가 있는 병은 남은 재료를 가지고 제가 임시로 만든 진통제 같은 것들이에요. 그 옆의 물건들도 평범한 것이 아니니 조심하세요.”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제가 요구를 듣지 않으면 저를 취하겠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만든 것이 대부분이죠.”
그 한 마디로 아폴로니아는 상황을 이해했다. 메이슨 디아만의 악행은 끝도 없는 듯했다.
여인이 몇 방울 없는 약을 상처에 바르는 동안, 아폴로니아는 유리병 하나하나를 들여다보았다. 병에 붙은 작은 종이에는 약의 효능이 적혀 있었다.
‘목소리를 여인처럼 바꾼다.’
‘단기간 동안 힘을 장사로 만든다.’
‘외양을 매력적으로’
‘젊은이를 늙게, 늙인이를 젊게’
약의 종류는 끝도 없었고, 모두 들어 본 적 없는 신기한 것들이었다. 몇 가지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약이었다. 벨라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 사람이 그 모든 약을 만들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정말 전부 그대가 만들었나요?”
아폴로니아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약을 만들 때 사용할 듯한 계량기와 램프 같은 것들이 몇 개 널려 있기는 했다. 여인은 그게 뭐 어떠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설마 어린 시절부터 갇혀 있었던 것인가요?”
벨라들은 강력한 마법사 같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구자였다. 그들은 여러 가지 재료와 기술을 연구했고, 알려진 기술을 구현하는 것만 해도 섬세한 감각 위에 치밀한 계산이 들어갔다. 새로운 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여러 약의 효능과 주술의 원리를 분석해서 재구성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녀가 정말 그 약을 다 만들었다면, 10년쯤은 갇혀 있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말을 들은 여인은 잠시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사슴을 닮은 큰 눈을 깜빡거렸다.
“아뇨, 4개월 정도 된 것 같군요. 여기 있으면 시간을 잘 알기 어렵지만…….”
아폴로니아는 귀를 의심했다. 4개월? 4개월 안에 수십 가지의 기존에 없던 강력한 약과 주술을 개발했다니.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 보여 드릴까요?”
여인은 구석에 놓인 허름한 모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게 쓰라는 건가? 로브를 벗고 싶지 않았던 아폴로니아가 거절하려던 찰나, 여인은 미세한 미소와 함께 그 모자를 자신의 머리에 얹었다. 모자가 잠깐 반짝인다 싶더니, 그 빛이 여인의 머리카락으로 옮겨 갔다.
“어때요?”
여인은 모자를 다시 벗고 머리카락을 흔들어 보였다. 비단처럼 매끄러운 흑발은 아폴로니아와 비슷한 금발로 변해 있었다.
“만드는 데 하루가 걸렸지만 자작님은 바로 다른 것을 주문했죠.”
아폴로니아는 벌어진 입을 다물기 어려웠다.
여인의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자의 효능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자작이 오래전부터 이렇게 신기한 물건들을 손에 넣었었다면 그걸 이용해 이득을 챙기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미친 재능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따라가지 못할 천부적인 소질. 극히 불공정한 신의 편애.
아폴로니아는 여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머릿결, 눈부신 미소, 숨을 멎게 할 정도의 얼굴, 유혹적인 향기며 자태. 천상의 아름다움이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기의 천재. 그것이야말로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여인의 정체였다. 다른 말로 수식하기 어려웠다.
“나와 함께 나가요. 나가서 자작의 만행을 알리고 도움을…….”
“감사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기뻐할 줄 알았던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어딘가 모를 체념이 느껴졌다. 아름다운 자색 눈동자도 생기라고는 조금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삶에 대한 의지를 오래전에 잃어버린 사람처럼.
“왜죠? 당신은 분명 이곳을 벗어나…….”
“저쪽에 있는 병들도 읽어 보시겠어요?”
아폴로니아는 그녀가 말하는 대로, 오두막 다른 구석의 작은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멀리 있는 자를 저주하여 죽게 하는 독’
“이건…….”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옆의 병들을 차례로 가리켰다.
‘불에 타는 듯한 고통’
‘비참한 죽음’
‘진실을 토해 내게 하는 약’
“……자작의 명령으로 만든 것들이에요.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여인은 씁쓸하게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비로소 그녀가 아까부터 얼굴의 슬픔을 떨치지 못한 이유를 짐작했다.
“만드는 자는 극형에 처해질 법한 물건이로군요.”
주술과 마법 약은 황실이 강하게 통제하는 분야였다. 위험한 물건들이 있었기에 허락 없이 그런 것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자는 엄한 처벌을 받았다. 사소한 장난감도 그런데, 독약 같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에게든 여인의 흔적이 알려지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었다. 군터같이 청렴하고 공정한 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진실을 토해 내게 하는 약은 뭔가요?”
페트라가 보면 환장할 것 같은 병을 들며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이거야말로 들어 본 적 없는 기적 같은 기술이었다. 그러나 여인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말했듯이 자작의 주문이었어요. 세상에 없는 그런 약을 만들어 내라는.”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만큼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여인의 얼굴에 비친 씁쓸함이 조금 짙어졌다.
“약에 대해 아시는군요. 맞아요, 저는 자작이 생각한 것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답을 내놨죠.”
“그럼…….”
“자연스럽게 진실을 유도하는 약 같은 건 없어요. 정신 지배는 약으로 하기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 약은 ‘실질적으로’ 진실을 토해 내게 하죠.”
“그게 무슨 뜻인가요?”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약이에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극단의. 진실을 토해 내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일반인과는 너무나도 다른 사고, 그를 뒷받침하는 완벽한 재능.
아폴로니아는 감탄하면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섬뜩한 말을 내뱉은 그녀는 보석 같은 두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폴로니아는 하고 싶지 않았던 질문을 했다.
“……사용된 적이 있나요?”
여인은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눈을 피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입술을 떨었으나 결국 아폴로니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디아만 자작은 그 약만큼은 몇 번이고 다시 만들어 달라고 했었답니다.”
아폴로니아는 문득 오래전 외조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감당할 수 없는 재능은 저주이고 재앙이다.’라고 하셨던가.
“전하께서는 어디로 가셨나?”
“글쎄, 이 근처에는 뭐가 있는지 모르겠군.”
아폴로니아의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가고 있을 때, 근처에서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폴로니아를 찾으러 나온 모양이었다. 아폴로니아와 여인은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황실의 기사들이 이걸 보면 당신은 극형을 면치 못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감안하더라도, 사용 대상이 아무리 악인이더라도 여인의 발명은 지나치게 위법하고 유해했다. 무엇보다 그 미모며 재능은 일반인들이 혐오하는 벨라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아폴로니아는 다음 상황이 눈에 선했다. 리샨에 연고도 없는 이 여인은 마녀로 몰려 처형당할 것이다. 자작의 사용인들은 조금이라도 면책되고자 그녀가 자작을 유혹해 정신을 빼놓았다는 등 거짓말을 일삼을 것이다. 벨라들조차도 그녀를 지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큰 손자는 찢어지는 고통에 결국 쓰러지고 말았소.”
노파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인의 재능은 그들에게도 고통을 가져왔으니까. 그리고 아폴로니아는, 아직 공개적으로 나서서 그녀를 지킬 수 없었다.
여인은 체념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까요. 차라리 잘됐어요.”
눈물을 흘리면서도 여인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가까스로 일어서서 아폴로니아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녀는 다리를 조금 절고 있었다. 자작의 소행이 아닌, 오래된 장애로 보였다. 이 여인은 살면서 대체 얼마나 많은 고비를 넘겼을까.
“잠깐 시간을 벌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나마 편안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그녀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삶에 대한 의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폴로니아의 눈에 오두막 구석의 검이 들어왔다. 여인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혹시 몰라 제 옆으로 소환되도록 주술을 걸어 두었어요.”
여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호신용이 아니었다. 아폴로니아는 비로소 그녀가 오래전부터 자살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할아버지는 어떻게 하셨을까.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여인을 죽였을 것이다. 직접 처리하든, 군터 같은 대리인을 통해서든. 위험하고, 유해하고, 당장 내 것으로 쓸 수는 없을 재능. 할아버지는 그 싹을 잘랐을 것이다. 하지만…….
쿵. 쿵. 쿵.
“안에 누가 있는가?”
기사들의 발소리가 가까워 오더니 누군가의 주먹이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여인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대로 있어요.”
아폴로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뻗어 문 쪽으로 가려는 여인을 가로막았다.
“네?”
그녀는 여인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연민 때문은 아니었다. 분명 연민을 느꼈지만 이는 둘째였다. 아폴로니아는 그녀와 만난 짧은 순간에 여인에게 압도당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유리엘을 처음 봤을 때처럼.
가슴이 뛰었다. 하늘이 내린 천재. 어떤 인재들은 존재 자체로 사람을 설레게 만들었다. 죽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웠으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저녁까지 여기 있어요. 말 한 마리를 준비해 줄 테니 자정이 되면 이곳을 떠나요.”
아폴로니아는 급히 로브 속을 뒤져 금화 주머니를 꺼냈다.
“리샨을 빠져나가요. 이곳에는 당신을 지켜 줄 사람이 없으니까. 북쪽 경계로 가면 기사단을 만날 수 있으니 동쪽으로 지나가요.”
“……하지만.”
“한 가지만 약속해요. 다른 사람을 직접 해하는 주술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여인은 덜덜 떨며 금화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알려 주세요.”
여인은 고민 끝에 한 마디를 뱉었다.
“……안 돼요.”
당장 그녀를 믿고 신분을 말할 수는 없었다. 여인을 풀어 주는 것은 아폴로니아 자신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나를 찾고자 한다면 수도로 가세요. 내가 당신을 찾아낼게요.”
아폴로니아도 고민 끝에 말했다. 그래. 찾아낼 것이다. 이런 존재감을 어떻게 숨기겠는가. 찾아내서 이 재능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다면. 내 사람이 된다면.
“사람이 있다면 문을 열어라!”
병사들이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아폴로니아는 문을 열기 위해 한 발 내디뎠다.
“받아 주세요.”
뒤에서 무언가가 잡아끄는 느낌이 들었고, 돌아보자 여인이 그녀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고 있었다. 작은 향주머니 같은 것.
“언젠가 당신을 지켜 줄 거예요.”
아폴로니아는 더 물을 시간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은 아모레타예요. 기억해 주세요.”
돌아서서 문손잡이를 돌리는 아폴로니아에게, 여인이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아모레타. 그래. 잊을 수 없을 이름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어요.”
아폴로니아는 문을 열고 나가, 병사들이 미처 들여다보기도 전에 닫아 버렸다.
“전, 전하, 왜 이런 곳에…….”
“뭐가 있나 해서 들어가 봤어요. 오래 쓰지 않은 폐가 같은 곳이더군요.”
“한눈에 보아도 그렇군요. 혼자 그런 곳에 들어가시면 위험합니다.”
“이제 안 할게요.”
아폴로니아는 온순하게 웃어 보이며 덧붙였다.
“예쁜 숲인데, 이 오두막이 경치를 망치는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철거할 예정이었습니다. 베르톤 경이 한 번 둘러보라고 하더군요.”
“제가 이미 둘러보았어요! 아무것도 없던걸요.”
아폴로니아는 오두막의 지저분한 외양이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이마를 찌푸렸다.
“철거하면 시간도 걸리고 흔적이 남아서 싫어요. 내일 태워 버리세요.”
“예? 하지만 베르톤 경은…….”
“너무 보기 싫어서 그래요. 베르톤 경에게는 내 명령이라고 해 주세요. 오늘은 자작의 처형이 있는 날이니, 내일이 되면 밖에서부터 태워 버리세요.”
병사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은 여느 영애들이 그렇듯 추하고 험한 것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 나이의 소녀라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알겠습니다.”
그렇게 정리되었다.
자작의 처형일 자정에 숲속을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자를 눌러쓴 여인 한 명이 오두막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
다음 날 기사들은 황녀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
아모레타의 흔적은, 저주의 증거는 그렇게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졌다.
* * *
“전하! 이것 좀 보세요!”
장발을 올려 묶은 자안의 미남, 탄이 아폴로니아를 웃으며 불렀다. 그는 손에 불씨가 붙은 나뭇가지를 들고 소년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그저 빙긋 웃었다.
아폴로니아 일행이 돌아가기 하루 전, 자정이 가까운 밤이었다. 자작의 처형이 집행된 다음 날이기도 했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혐의로 불명예스럽게 처형되었다. 그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다른 피해를 입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형장에 나가 그 과정을 지켜보고 환호했다.
밤이 되자, 벨라들은 그들만의 잔치를 열었다. 바위와 나무에 가려 눈에 띄지 않은 언덕을 택해 장작을 쌓고, 불을 피우고, 음식을 굽고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면서.
오랫동안 자유롭지 못했던 그들은 음악과 예술에 취한 과거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무도 모르게 초대된 아폴로니아는 그 희귀한 장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옆에 앉은 유리엘도 함께.
“부르는데 안 가 봐도 괜찮습니까?”
유리엘이 왠지 불만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의 불친절한 시선은 탄을 향하고 있는 듯했다.
“난 황궁 연회용 춤만 배워서.”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흰색의 편안한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땋아 내린 그녀는 얼핏 보면 평범한 소녀 같았다.
“연주는 어떻습니까? 황실의 여인들은 다 리라를 배우지 않습니까?”
“엄청 유명한 스승에게 오래오래 배웠지. 그랬더니 딱 세 곡 연주할 줄 알게 됐어.”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실제로 아폴로니아는 나름대로 열심히 배웠고 음악을 깊이 있게 감상할 줄도 알았다. 다만 손가락의 움직임은 그다지 빠른 편이 아니었다.
어라, 생각해 보니 나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네. 검술도 못 배웠는데.
그녀의 순간적인 울적함을 부채질하듯, 탄이 리라를 집어 들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음유시인 같은 느낌은 허상이 아니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리라 위를 춤추듯 날았고, 그에 따라 품속의 악기는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노래했다.
정식으로 레슨 한 번 받지 않았을 텐데도 그의 연주는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자신감이 넘쳤고, 감정은 즉흥 연주답게 자유롭게 흘렀다.
“잘한다! 저게 내 손자라오.”
노파가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러더니 그녀 자신도 악기를 하나 집어 들고 연주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와, 그냥 나만 못하는 거였구나.
감탄의 연속이었다. 자세며 규칙이며 아폴로니아가 배운 것들을 다 무시하는데도 어쩌면 저렇게 자연스러운지.
마침내 연주가 끝났다. 몇몇 사람들의 춤사위도 잠시 멈추었다.
“오늘 이 자리에 귀한 분이 오셨소.”
움직임이 잦아들자, 노파는 나무를 깎아 만든 잔을 들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 높이 타오르는 불꽃에 그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버림받은 줄 알았던 우리들을 잊지 않고 찾아, 새로운 삶을 주신 분이지.”
그녀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아폴로니아를 가리켰다. 벨라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타냐의 목소리가 특히 두드러졌다.
노파는 아폴로니아와 눈을 맞추며, 한마디 하기를 기다리는 듯 손짓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아홉 살 이후로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께서 수도로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에게 한 마디 축복을 내려 준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소.”
노파의 간절한 말에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다시 한 번 환호성이 들렸다.
“……영지민 여러분.”
그녀는 다소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환호성이 잦아들고 모두가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축복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하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른 이야기라니?
“나는…… 그대들에게 사죄를 하고자 해.”
며칠 동안 준비하고 연습했던 말이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폴로니아는 온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언덕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아폴로니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대들이 알다시피 나는 아홉 살에 리샨을 상속받은 그대들의 영주이자 선황의 손녀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미루고 싶었으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대들을 메이슨 디아만의 손에 방치한 것도, 그의 횡포를 막지 못한 것도, 천재지변으로부터 그대들을 구하지 못한 것도 모두 나의 과오이자…….”
아폴로니아는 심호흡을 했다. 다음 말은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나의 외조부인 선황의 과오일세.”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과 같은 황족. 그중에서도 명군으로 칭송받는 선황을 비난하는 그 손녀라니.
마녀라느니, 요술사라느니 하는 멸칭만 들어 온 벨라들은 누군가의 사과를 받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황녀는 자신들 중 일부가 도적질의 대상으로 삼았었는데.
“나이가 어렸다거나, 다른 일이 중요했다는 것은 핑계가 되지 못하네. 영주로서 영지민을, 군주로서 백성을 보호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야.”
리샨에서의 일은 아니나, 제국에서도 간혹 민란을 버티지 못한 영주들이 영지민에게 사과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주로 영지민 앞에서 고개를 깊이 숙여 가며 무조건적으로 사죄한 후 풀어진 사람들을 두고 돌아가 전과 같이 방탕한 생활을 하고는 했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녀는 영주로서의 품위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누구보다 명확하게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했다.
아폴로니아는 말을 이었다.
“나는…… 나는 그대들이, 지금까지 받아 온 대접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바라지 않네. 나의 영지민 누구도 그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돼.”
누군가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놀랍게도 그것은 커다란 덩치의 벤이었다. 노파도 눈물을 글썽였다. 스스로도 알지 못했으나 그들 안에는 오랫동안 쌓인 울분이 있었다. 그것을 아폴로니아가 건드린 것이다.
“더불어, 나는 그대들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벨라들의 가슴 깊이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듣는 이들의 표정에서, 그녀 가까이로 기우는 몸짓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대들은 지금까지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해 부득이하게 위험한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야 했음을 알고 있어. 앞으로는 원칙과 신뢰를 토대로 영지를 다스릴 것을 약속하겠네.”
그녀는 ‘앞으로는’에 힘을 주어 말했다.
타냐의 가족을 비롯한 영지민의 상당수는 황녀 일행 습격에 대한 책임이 있었고, 이는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중죄였다.
“오늘 이후부터는 원칙과 신뢰를 지키는 자는 보상을, 규율을 어겨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자는 처벌을 받게 될 거야.”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뜻은 명확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습격은 물론 그 전까지의 모든 범죄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도적질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들이 진정 원했던 삶이었다.
그녀가 손짓하자, 옆에 서 있던 누군가가 아폴로니아의 술잔에 붉은 과실주를 채워 주었다.
“술 한 잔으로, 나는 그대들의 과거를 여기 이곳에 묻고자 하네. 그대들도 나의 사죄를 받아 준다면 똑같이 해 주기를 바라.”
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잔을 들었다.
“그대들의 풍요, 그대들의 명예를 위하여.”
짧은 건배사였으나, 그 안에는 벨라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꿈이 온전히 들어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붉고 달콤한 액체를 한 번에 넘겼고, 곧이어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녀를 따라 했다.
역사서에 알려질 수 없는 잔치, 행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모임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아폴로니아는 태어나 처음으로 직접 백성의 신뢰를 얻어 냈다.
* * *
유리엘은 당황했다.
“왜 대답 안 해?”
눈앞에는 타냐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줍게 내민 손에는 작고 초라한 꽃다발 비슷한 것이 들려 있었다.
나팔꽃 같은 건가? 아니 그냥 잡초는 아닐까? 어둡지만 자세히 보니 그 꽃…… 아니 풀뿌리 같은 것에는 흙도 묻어 있었다. 몇 번이고 귀를 의심했으나, 그녀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고백. 그것도 사랑 고백.
이 열세 살밖에 안 된 쬐끄마한 아가씨는 며칠 사이에 유리엘을 좋아하게 됐다고 고백한 참이었다.
“내가 싫어?”
그녀의, 아니 이 아이의 목소리는 한껏 긴장되어 있었다. 긴 속눈썹이 몇 번 깜빡였다. 어디서 누구한테 배운 눈짓인지.
“오해한 것 같은데 자작에게서 너를 구한 건 전하의 명령 때문…….”
“나도 알거든!”
아이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더욱 붉히며 크게 소리쳤다. 덕분에 근처에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이 부끄러운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심지어 큰 소리로 타냐를 응원했다.
“알지만 구하는 순간이 멋있는 걸 어떡해! 이건 진지한 고백이란 말이야! 그리고 오빠들보다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봤다구!”
세상에 이런 솔직함이 있었나? 얘는 수치심 같은 것은 모르나?
구경꾼들은 점점 많아졌고 유리엘의 손발은 끝없이 오그라들었다.
“미안하지만…….”
그는 말을 열심히 골랐다. 나름대로 순수한 것 같은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누구를 좋아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의미도 없는 연극 대사 같은 말이 입에서 나왔다. 어린아이 앞에서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자기 자신을 때려 주고 싶었지만 그는 꾹 참고 최대한 진솔한 표정으로 타냐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럼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단 말이야?”
타냐는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나이도 어린 녀석이 연애 경험 문제로 자신을 불쌍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난 다섯 명이나 만났는데!”
아이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유리엘은 점점 더 수치스러워졌다.
“그러면 안 되겠다. 내가 좀 더 기다릴 테니까 경험을 쌓고 와.”
유리엘이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타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양보하듯 말했다. 그들을 둘러쌌던 사람들도 충격이라도 받은 양 그를 보며 혀를 찼다. 세기의 천재 검사, 사피로의 늑대의 자존심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타냐가 또래의 소년과 춤을 추러 뛰어가 버리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사람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아폴로니아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었으나 그녀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
잠깐 동안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시답잖은 고백을 받는 사이에 그녀를 잃어버렸나?
그는 주변을 확인하며 사람들로부터 조금씩 더 멀어졌다. 그래도 그녀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윽고 유리엘의 등이 커다란 바위에 부딪혔을 때, 뒤쪽에서 귀에 익은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경험이 없다고 차였다며?”
유리엘은 몸을 휙 돌렸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재빠르게 바위 뒤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소리는 들리지만 눈에 띄지 않는 그곳에, 아폴로니아가 앉아 있었다. 새하얀 옷을 입은 금빛 정령 같은 모습으로. 그녀 옆에는 리라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왜 여기에…….”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폴로니아가 처음 보는 너무나도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반가워! 유리엘!”
그녀의 말투는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활짝 웃는 눈은 초승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혔다. 뺨도 평소보다 발그레한 느낌이었다.
“……취한 겁니까?”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세차게 두 번 저었다.
“아닐걸! 나는 아폴론 신의 자손이니까 술도 잘 마시는데…….”
“술을 마셔 본 적은 있고요?”
“음…….”
유리엘은 그녀 가까이 다가가 몸을 붙이고 앉았다. 두 사람은 커다란 흰색 바위 뒤에 완전히 숨겨졌다.
달콤한 향이 훅 하고 느껴졌다. 분명 술이다.
“취하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아폴로니아가 입은 옷은 꽤 얇았다. 유리엘은 로브를 벗어 그녀의 드러난 어깨를 덮어 주었다.
“돌아갈…….”
“유리엘, 리라를 연주할 줄 알아?”
아폴로니아는 계속해서 환하게 웃었다. 쏟아지는 달빛에 그녀의 금적안이 반짝거렸다. 디아만 자작을 다그칠 때에는 불길을 닮았던 눈이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노을을 연상시켰다.
유리엘은 그녀의 미소를 볼 때마다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취한 것도 아닌데 가슴은 조금 더 빨리 뛰었다.
“못 합니다.”
“난 아는데.”
아폴로니아는 농담 섞인 스스로의 말이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셨거든.”
그녀는 노을을 닮은 두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난 어머니만큼의 재능이 없지만 말이야. 그 분은 정치보다는 음악이 좋으셨대.”
아폴로니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엘레니아 황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두 번째였다. 일부러 아는 척하지 않았지만, 타냐의 집에서 말한 ‘정치에 관심이 없어도 암살을 당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그녀에 대한 이야기였을 테니까.
혹시나 하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다행히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그리움이 묻어났다. 본 적 없던 모습이었다. 유리엘은 심장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전하께서는 정치가 더 좋으십니까?”
유리엘이 물었다. 아폴로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비교해 본 적이 없는걸. 할아버지는 나까지 어머니처럼 될까 봐 걱정하셔서 나를 직접 키우셨어. 언제나 제국을 생각하라고 가르치시면서. 다른 것에 너무 깊이 빠지면 안 된다고 하셨어.”
“시드에게 들었습니다. 검술을 제외하면 익히지 않은 분야가 없을 거라고요.”
그는 디아만 자작에게 채찍을 휘두르던 아폴로니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냥 휘두른 것이 아니었다. 정확한 타격의 시점, 위치. 그녀는 협박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건 아니고…… 공부가 어렵기는 했지.”
“어려운 가르침을 따랐다니, 강인하시군요.”
유리엘은 진심으로 말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난 어쩌면 어머니가 더 강인했다고 생각해. 할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낭만을 위해 사셨으니까. 어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황궁을 떠나는 꿈을 꾸기도 하셨대. 뭐, 결과는 너도 알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오랫동안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별다른 슬픔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님과 가까우셨습니까?”
“응. 난 어머니를 좋아했거든.”
아폴로니아가 대답과 함께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주신 물건도 제대로 간수 못 하긴 하지만. 이런 걸 보셨으면 나를 혼내셨겠지?”
그녀의 손에 들린 붉은 보석을 보는 순간 유리엘의 눈이 커졌다. 칼트산에서 그녀가 흠집을 냈던 루비 머리 장식이었다.
“그게…… 유품이었습니까?”
“그래. 여러 유품 중 하나였지.”
아폴로니아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목소리에 다시 한 번 아까의 그리움이 실렸다.
유리엘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대체 파스칼 3세는 손녀를 얼마나 혹독하게 가르친 걸까? 황좌에 가까이 가는 일이라면 어머니의 유품 같은 것은 아무렇지 않게 긁어 버리는 행동을, 그는 자랑스러워했을지 모른다.
차가운 바람이 훅 불었고, 멀리서 들려오던 음악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아폴로니아는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더니 유리엘과 눈을 맞추었다.
똑바로 쳐다보면 호흡이 힘들어지는, 노을을 닮은 그 눈.
“내가 들려줄까? 리라 연주.”
아폴로니아는 몸을 그가 있는 방향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이미 가까웠던 거리가 더욱 좁혀졌다. 두 사람의 몸은 거의 밀착되었지만 그녀는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위험하다.’
심장이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같았다. 유리엘은 순간적으로 일어나야 할지를 고민했다.
“……어떤 곡입니까?”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아까 탄이 연주했던 곡! 연습해 보고 싶었어!”
믿을 수 없게도, 그녀는 신이 나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돌아가자고 말하려 했다.
“……들려주십시오.”
그러나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뿐이 아니라 유리엘의 시선도 아폴로니아의 달아오른 뺨을, 재잘거리는 입을, 곱게 휘어진 눈을 떠나지 못했다.
그녀는 리라를 집어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나른하고 감미롭지만, 때로는 힘이 느껴지는 곡.
그녀는 한 번 들은 곡을 다 기억한 듯했다. 문제라면, 원래 가지고 있었던 테크닉을 떠나서 취해 버린 양손이 그녀의 머리를 따라가 주지 않는다는 것.
멜로디는 잘 가다가 한 번씩 툭툭 끊겼고, 그때마다 아폴로니아는 웃음을 쏟아냈다. 공연치고는 형편없었다. 그러나 유리엘의 눈과 귀는 세상에 다른 것이 없다는 듯 그녀에게 집중했다.
벌어지는 입술, 연주를 틀릴 때마다 부끄러워하는 듯한 표정, 중간 중간에 터지는 웃음소리. 로브가 떨어지는 바람에 다시 드러난 하얀 어깨와 하얀 손가락,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길게 땋아 내린 머리…….
그녀의 웃음소리가 곧 음악이었다. 그녀의 모든 움직임이 춤과 같았다.
‘나는 누구를 좋아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그의 머리에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이 울렸다. 유리엘은 쓰게 웃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말할 때에도 알고 있었다.
“한 번도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단 말이야?”
아니, 그럴 리가. 그는 지금 이 순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뇌리에 강하게 박혀 떠나지 않는 사람. 곧이어 그의 영혼까지 지배하게 된 사람.
그를 죽이겠노라고 차갑게 협박했던 때에도, 어디서든 살아 돌아오라고 간절한 눈으로 하명했던 때에도, 온 마음을 다해 영지민의 신뢰를 얻은 조금 전의 순간에도, 그는 새로이 아폴로니아에게 반했다.
그의 주인이자 단 한 명의 여인.
아폴로니아.
유리엘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새 연주가 끝났다.
제대로 끝맺었다기보다, 아폴로니아가 연주를 하다 말고 잠들어 버렸다.
‘이럴 때 보면 어린아이가 따로 없군.’
그녀는 머리를 유리엘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유리엘은 미동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아폴로니아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달빛을 받아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르게 오르내리는 어깨와 그의 목을 간지럽히는 숨결, 그의 한쪽 팔을 살짝 잡고 있는 손.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모든 요소들은 유리엘의 심장을 거세게 두드렸다.
문득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납치해서 이 세상과 차단시키고 싶었다. 자신 외에 누구도 닿을 수 없도록.
황제도, 페트라도, 괜히 보기 싫은 탄 녀석도, 심지어 시드 바이안조차도.
그러나 그것은 그녀를 망가뜨리겠지. 그녀의 계획도, 야망도, 간혹 보이는 온정도 사라질 것이다.
유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아직 오지 않은 아폴로니아의 미래가 궁금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그녀를, 그 순간을 위해 그녀가 선택할 모든 길들을 하나하나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망상을 한 것인가. 그녀는 애초에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타고난 주인이자 지배자였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아폴로니아.”
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녀가 듣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들었다면 함부로 이름을 불렀다며 화를 냈을 것이다.
“네 사람이 될게.”
그의 시선이 아폴로니아의 감은 눈에서 입술로 옮겨 갔다.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사람. 그렇다면 그녀와 연결될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네 것이 될게.”
그녀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돌아오고, 다시 또 목숨을 걸고…….
멋진 삶이 아닌가.
그가 말을 하느라 움직인 탓인지, 아폴로니아의 장밋빛 입술이 미세하게 벌어졌다.
닿고 싶다.
딱 한순간 입술을 취하고, 그 대가로 그의 평생을 바치고 싶었다.
그러나 유리엘은 빙긋 웃고는 그녀의 손끝으로 시선을 다시 옮겼다. 그는 아직도 그의 팔을 잡고 있는 하얀 손을 살짝 쥐어 풀어내고, 아폴로니아의 긴 소매를 들어 올려 그 끝에 살며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걸로 됐어.”
충분하고도 남을 대가.
“이제 나는 네 거야.”
어떤 고문과 압박 속에서도 지켜 냈던 그의 정신, 그의 진심, 그의 영혼. 그날 밤의 맹약으로, 그 모두가 이제 온전히 한 소녀의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