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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제국의 조각 (6/34)

Chapter 5. 제국의 조각

“계획이 있습니까?”

유리엘이 정적을 뚫고 앞서가던 아폴로니아에게 물었다. 시드와 타냐의 둘째 오빠를 포함한 네 사람의 말은 칼트산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타냐의 둘째 오빠는 노파가 말한 늘씬한 꽃미남이었다. 장발을 느슨하게 묶었고 어딘가 풀려 있는 듯 몽환적인 표정을 타고난 그에게는 자유로운 유랑 시인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탄’이라고 소개하고 직접 두 사람을 안내했다. 형과 동생의 이름은 각각 ‘벤’, ‘룬’이라고 했다.

아폴로니아는 어떤 설명도 주지 않았다. 산이 가까워 올수록 그녀는 말수가 적어졌다. 유리엘의 질문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 왔습니다.”

탄의 말과 함께 멈춘 그곳에는 과연 거대한 산봉우리가 몇 개 있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평평한 지형에 불쑥 솟은 산맥은 음침하다고 할 만큼 조용했다. 산에는 괴기스럽게 가지가 꼬이고 비틀린 나무들이 있었으나 그 외에는 새의 울음소리도 벌레 소리도 없었다. 아예 생명체가 살지 않는 곳 같았다.

분명 산이지만 어딘가 잿빛의 황폐한 느낌이었다. 그러한 산맥의 중간에, 가장 높은 봉우리가 있었다.

“오래전에는 화산이었다고 하더군요. 중간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은 자세히 보면 분화구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상한 나무들에 가렸지만요. 나머지 산들은 모양도 크기도 가지각색인데 전설에 따르면 신이 대륙에 흩어진 여러 산을 장난으로 한데 모아 놓았다고도 합니다. 높은 산의 분화구를 ‘칼트의 심장’이라 부릅니다.”

“산이 불타는 건 화산 폭발과는 다른 거지?”

“그렇습니다. 화산은 죽은 지 오래됐고, 산이 울리는 것은 오히려 분화구 바깥입니다. 산이 혼자 불에 타는 일이 반복되고부터는 살던 것들도 다 없어졌죠. 저 나무들은 마력이 깃들어 불에도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지요. 저것들도 없었다면 그냥 잿더미 같은 민둥산으로 남았을 겁니다.”

“마물은?”

“건기에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서 불길이 치솟을지 모르니까요. 한 달쯤 지나면 몇몇 녀석들이 이곳으로 와서 둥지를 틀 겁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먹을 것도 없는 곳에 출입하는 것이요. 뭔가에 이끌리듯 꾸역꾸역 옵니다.”

“둘러보는 건 위험할 것이 없겠군.”

“산과의 거리를 조금 유지하면 괜찮을 겁니다. 마물이 있다고 해도 산속이 아닌 근처에 있는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산이 불타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에 가까이 가면 사신과 악수하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탄은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태연한 척해도 칼트산은 그에게 으스스한 곳이었다.

“온갖 괴기스러운 전설이 넘칩니다. 심지어 이 주변은 날씨도 이상해요. 칼트의 심장 쪽은 비가 오는데 다른 곳에는 해가 쨍쨍하지를 않나…….”

“유리엘만 남고 모두 돌아가.”

그녀가 짧게 명령했다. 평소의 지시보다 한층 무거운 말투였다. 다른 의견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위험하니 제가 남겠습니다.”

시드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말하자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유리엘이 돌아가고 시드가 남으면 타냐의 가족들이 무서워할 것 같아서 그래. 나타날 것은 기껏해야 도적떼인데 그건 유리엘 한 명이면 됐고.”

그녀는 감정을 담지 않고 한 말이지만 이를 들은 탄이 조금 움찔했다.

“그저 산을 둘러보고 갈 거야. 혼자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돌아가서 기다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아폴로니아는 조금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러나 거역하기 어려운 힘을 한층 더 실어 시드에게 말했다. 그는 뜻을 굽혀야만 했다.

“절대로 산에 닿지는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약속할게.”

아폴로니아가 옅게 웃어 보이자 시드는 그제야 탄에게 말을 돌리자고 눈짓했다.

“잠시만.”

탄이 허리에 멨던 가죽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할머니가 어제 밤새 만드신 물건입니다. 안전에 도움이 된다더군요. 괜찮으시다면 이걸로 로브를 바꾸시지요. 아가씨의 안전은 중요하니까요.”

그는 천을 한 장 건네며 그녀에게 눈을 찡긋했다. 그에게는 타고난 교태 같은 것이 있었고, 간혹 그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드러나는 듯했다. 얇고 값싼 천이었으나 노파가 만든 것이라면 왠지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여긴 아폴로니아는 천을 받아서 로브 위에 이중으로 걸쳤다.

탄을 힘껏 노려보던 시드가 다시 한 번 묵례를 하고 말을 돌렸다. 두 사람은 함께 사라졌다.

“한 바퀴를 빠르게 돌아도 한나절은 걸릴 겁니다.”

유리엘이 산 오른쪽으로 말을 출발시키며 아폴로니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산에 올라가는 거.”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는 듯 태연한 대답이었다. 그녀의 말은 벌써 산 바로 아래 음침한 나무 밑을 딛고 있었다.

“방금 한 약속은 뭡니까? 위험하다는 건 잊으셨습니까?”

평소 표정의 변화가 많지 않은 유리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걸릴지도 몰라. 산이 크니까 시드도 이해할 거야. 넌 따라오지 말고 근처에 있어 줘.”

“이해는 무슨! 그 영감을 모릅니까? 혼자 보내면 나를 죽이려 들 겁니다.”

유리엘의 우아한 눈썹이 찌푸려졌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유리엘 비체. 너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해.”

아폴로니아는 조금 전 시드에게 했던 것과 같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궁극적인 의무는 내 명령을 듣는 거야. 시드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지만 유리엘의 가슴속에서는 형용하기 어려운 뜨거운 감정이 치밀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솟았다.

“시드를 떨치기 위해 저를 이용한 겁니까? 저의 호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너의 가치가 여러 가지일 뿐이야. 더 이상 묻지 말아.”

아폴로니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불편한 듯 한 손으로 로브에 달린 후드를 벗자 그가 기억하는 강렬한 금적안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불꽃을 닮았지만, 얼음처럼 서늘한 눈.

유리엘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폴로니아는 그가 다시 살 수 있는 희망과도 같았다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 그는 장기말 같은 것이라는 것. 어쩌면 시드조차도.

그는 왠지 나오지 않으려는 목소리를 짜내 물었다.

“……저를 리샨에 데려온 목적이 그거였습니까?”

“…….”

부정하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그를 차갑게 바라보다가 말머리를 돌려서 산을 올라갔다. 따라간다면 그녀는 유리엘이 호위로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미련 없이 그를 처단할 것이다.

냉정한 주군. 과연 제왕의 씨앗이자 리페르의 핏줄.

그 칼 같음과 대조되게도, 태양처럼 밝은 금발이 바람에 흩날리는 뒷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유리엘은 그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나무 뒤로 사라졌을 때, 그는 결심한 듯 말에서 뛰어내렸다. 명령이면 어떤가. 듣지 않으면 또 어떤가. 애초에 살고자 했던 이유가 그녀 아니었던가.

그녀의 얼굴, 목소리, 말투, 머리카락, 눈빛. 통찰력, 결단력, 동정심. 치밀하다 못해 냉정하고, 냉정하다 못해 교활한 그녀의 사고방식까지. 그 어느 하나도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유리엘의 머리를 지배했다. 그의 몸은 이미 본능적으로 칼트산을 향해 있었다.

* * *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을 뒤로한 채 말을 타고 산에 올랐다. 선황의 유지에 대한 힌트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피며 집중했지만 그녀의 머리에는 유리엘의 슬픈 눈이 잔상으로 남았다.

“저를 리샨에 데리고 온 목적이 그거였습니까?”

그것은 반쯤은 사실이었다. 유리엘이 없었다면 시드는 절대로 그녀를 혼자 위험한 곳에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유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녀가 혼자서 수행해야 하는 일 때문에 두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산길에는 기괴하게 구부러진 잿빛 나무들이 그녀를 잡아먹을 듯 둘러싸고 있었다. 나무들이 조금씩 모양을 바꾸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생명체는 느껴지지 않았고, 다만 나무들 사이로 간혹 검게 타 버린 짐승의 뼈 같은 것이 보여 머리털이 곤두서게 했다.

아폴로니아는 조심스레 말을 몰면서 유리엘에 대한 생각을 떨치려 했다.

“히히힝-.”

좁다란 길 끝에서 그녀의 말이 더 이상의 걸음을 거부했다. 사람이 다니지 않기에 길이 너무나도 좁았던 것이다. 아니, 마물이 오래전 대충 헤쳐 놓은 공간을 길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것이다.

산에 들어선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났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무들 외에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곳.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곳. 그 심장에 제국의 조각을 숨겨 두었다.’

선황은 분명 그렇게 말했기에 가장 위험하고 무가치한 칼트산에 왔다. 그러나 어쩌면 그녀는 잘못 짚은 듯했다.

“돌아갈까?”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말머리를 살짝 돌려 보았다. 말은 반가운 듯 히힝거렸다. 하지만 아폴로니아는 다시 고삐를 당겼다.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너만 돌아가.”

그녀는 천천히 말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디뎠다. 타고 온 흰 말은 어리둥절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주인을 보았다.

“위험해지기 전에 돌아가렴.”

그녀는 말을 돌려세우고 꼬리 옆쪽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흰 말은 히힝 소리를 내며 왔던 길을 다시 달려 내려갔다.

“후우-.”

아폴로니아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말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가 없다. 드디어 완전히 혼자가 되었나 생각한 순간. 바스락, 바삭- 나무 사이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그녀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아니라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푸드득-

머리 바로 위의 커다란 나무 사이로 거대한 날개 한쪽이 보였다. 아폴로니아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건기에는 마물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거의.”

그 말은 즉, 운이 나쁘면…….

“끼이이이-!”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거대한 검은 물체가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아폴로니아의 머리를 향해 급강하했다.

“허억!”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피했고, 마물은 불과 팔 하나 정도의 간격을 두고 그녀를 스쳐서 다시 날아갔다. 그러나 놈은 다시 허공으로 날아올라 조금 전보다 가까운 가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폴로니아는 비로소 마물의 형상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온몸이 새까만 녀석은 새처럼 날았으나 깃털 대신 박쥐와 흡사한 미끈한 날개를 가졌다. 날개를 다 펼쳤을 때의 크기는 말과 비슷했고, 입을 벌릴 때마다 수십 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강철 같은 발톱은 굵은 나뭇가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끼이이이-.”

마물은 반가운 먹잇감을 발견한 듯, 아폴로니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위협적으로 울었다. 가만히 앉은 듯하나 자세히 보면 육중한 몸에 꽉 찬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낭패였다.

주변을 살폈으나 그녀의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아폴로니아와 마물 사이에는 구부러진 나무들 몇 그루 외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었다.

아폴로니아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오른손을 품속에 숨겨 온 단검으로 가져갔다. 마물이 함부로 공격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녀석과 시선을 맞추고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검을 제대로 익힌 적이 없었다. 제왕학의 일환으로 선황으로부터 아랫사람에게 겁을 주거나 매질을 하는 요령을 배웠고, 시드로부터 몇 차례 호신용 단검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으나 그마저도 실전은 아니었다. 즉, 승산은 크지 않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천천히 마물의 약점을 찾았다. 발톱과 단단한 날개를 지나자 상대적으로 부드러워 보이는 복부가 눈에 들어왔다.

“좋아.”

그녀는 반쯤은 혼잣말로 말했다.

“준비가 되면 언제든 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물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다시 수직으로 떨어졌다.

“끼이이이이-!”

방어하기 어려운 각도임에도, 아폴로니아는 피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가까워지는 마물을 향해 왼팔을 내밀었다. 왼팔을 물어뜯을 때 오른팔로 단검을 찔러 넣으리라.

5미터, 3미터, 1미터.

마침내 녀석의 날갯짓이 만드는 바람이 그녀의 귀를 스쳤고, 눈앞에 수십 개의 이빨이 번뜩였다.

“아악!”

단단한 발톱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고통을 참고 오른팔을 뻗었지만 녀석의 가죽은 지나치게 단단했다. 단검은 뱃가죽만을 할퀴고 피 몇 방울밖에 내지 못했다.

“끼이이이이익!”

공격에 자극받은 마물이 울음소리를 높였다. 발톱은 그녀의 어깨를 뚫고 깊숙이 들어왔다. 아폴로니아는 그 힘에 밀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끝이다.

아폴로니아가 두 눈을 질끈 감으려던 순간.

쉬익-

“끼이이익!!”

녀석의 무시무시한 몸통이 허공에서 멈추더니 대각선으로 갈라졌다.

투두두둑.

한껏 펼쳤던 두 날개가 찢긴 연 조각처럼 땅에 떨어졌다. 절단은 빠르고 깔끔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모양으로 생긴 물건인 것처럼. 마물의 뒤로 장신의 소년이 자신의 키만큼 긴 장검을 겨눈 채 나타났다.

“유리엘.”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고 그녀를 노려보는 그 모습은 평소에 연상시켰던 천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푸른 눈에는 분노와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신. 그는 마치 아름다운 사신 같았다.

“명령을 따르러 왔습니다.”

그는 한쪽 눈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그녀에게 말했다.

“전하를 지키다가 죽으라고 하셨으니까요.”

“…….”

두 사람은 마물의 사체를 사이에 두고 몇 초 동안 가만히 서로를 응시했다. 숨을 몰아쉬는 아폴로니아와 달리 유리엘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짙은 바다색 눈동자가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한동안 그녀에게 순종했다 하여 처음 만났을 때의 위압감을 잊었던 걸까. 아폴로니아는 순간 진심으로 그에게 압도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으읏…….”

충격 때문에 잠시 잊었던 왼팔의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뼈를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출혈이 심했다.

그녀의 신음 소리에 유리엘의 동공이 커졌다. 한걸음에 그는 땅에 떨어진 마물을 넘어 아폴로니아의 바로 앞까지 왔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괜찮…….”

“가만히.”

황제나 리페르 가문 사람들 외에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지금이 그런 지적을 할 상황이 아님을 알았다. 유리엘의 시선이 그녀의 머리끝부터 왼쪽 손가락까지를 훑었다. 상처가 난 자리를 본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조심스럽게 어깨를 잡았다.

“아윽…….”

“가만히.”

그는 다시 말했다. 아까의 매서웠던 표정과 달리 음성은 차분했다. 아니, 다정함에 가까웠다. 마치 아픈 것을 달래 주려는 듯이.

감히.

마물의 공격으로 옷자락이 찢어져 왼쪽 팔과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유리엘의 숨결이 목덜미와 쇄골에 닿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팔을 빼려고 했으나 유리엘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자신의 옷자락을 조금 찢었다.

“유리엘.”

그는 듣지 못한 척 찢은 옷자락을 그녀의 팔에 감아 지혈했다.

“유리엘.”

“됐습니다. 흉터가 남겠지만 치료하면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단단하게 묶인 어깨는 어느덧 피가 멎어 있었다. 그의 진단은 얼추 맞을 것이다. 아폴로니아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다만 그녀는 평범하지 않았고, 마물이 해결된 이상 문제는 유리엘이었다.

“돌아가, 유리엘. 여긴 위험해.”

“전하께서 안 가면 저도 안 갑니다.”

그는 이제 그녀의 말에 굳이 분노하지 않았다.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은 그냥 무시하기로 한 것 같았다.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엘, 사실은…….”

그녀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순간,

우르르르르릉-

산이 울렸다.

귓가에 분명하게 들린 소리를 표현할 다른 방법은 없었다. 분명 이것은 벨라들이 말했던 산의 울음이었다.

우르르르르릉-

산은 다시 한 번 울렸다. 이번에는 강한 진동과 함께.

“위험합니다!”

유리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고, 두 팔이 그녀를 단단하게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그녀의 발은 땅에서 떨어져 있었다. 유리엘이 아폴로니아를 안아 올림과 동시에 앞쪽으로 몸을 날리자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불기둥이 화르륵 솟아올랐다.

“꽉 잡으십시오.”

산의 곳곳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규칙도, 예고도 없었다. 그는 그저 예민한 본능에만 의존해 안전한 땅으로 발을 디뎠다.

쿠쿵-

또 한 번 불길이 솟아나자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그들을 가까이 스치며 쓰러졌다. 유리엘은 아폴로니아를 안은 채 왼편으로 날듯이 몸을 던졌다.

“유리엘.”

다리가 쓰러지는 나무에 스쳤는지 아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가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려 하자, 아폴로니아는 그의 목에 매달렸던 팔을 풀며 말했다.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싫습니다.”

“유리엘, 나를 믿어 줘.”

그녀는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목숨이 오가는 상황임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한 확신에 차 있었다. 단순한 고집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제가 왜…….”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서 익숙한 강한 열기가 느껴졌다.

“피해!”

마지막 말은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다음 순간 아폴로니아의 두 손이 그를 강하게 밀쳐 냈다.

너무나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그는 열기와 바람에 밀려 산 중간의 거대한 분화구 근처까지 크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탄이 말했던 칼트의 심장이었다.

동시에 그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무시무시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폴로니아!”

당황한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왔다. 그러나 불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거대한 구덩이 쪽으로 구르던 그의 눈앞에서, 아폴로니아의 가냘픈 몸은 화르륵 소리와 함께 불길에 삼켜졌다.

“아폴로니아!”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를 지키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주인으로 받아들였던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상실감이 그를 감쌌다.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용암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는 빠르게 구르던 자신의 몸을 멈추고, 이제는 산 전체를 태우고 있는 듯한 불길을 향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를 집어삼킨 붉은 괴물 속으로 함께 뛰어 들어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몸은 말을 듣고 있지 않았고, 흐려진 눈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다리의 통증과 부족한 공기에 질식할 듯한 기분을 참고 그가 불길을 향해 뛰려던 순간.

“설마……?”

마치 기적처럼, 아폴로니아는 이글거리는 불의 배 속에서 다시 걸어 나왔다. 열기에 날리는 머리카락은 불길과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마치 태양 같은 모습이었다.

사방의 불꽃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그녀는 유리엘에게 시선을 맞추고 그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휘익-

그러고는 그가 미처 반응조차 하기 전에, 그녀는 유리엘의 몸을 포옹하듯 감싸며 그가 빠져나온 칼트의 심장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폴론……?”

그녀의 이름인지, 신의 이름인지 모를 단어를 중얼거리며, 유리엘은 깊은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 * *

산은 계속해서 울었다.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처음에 가파르게 굴렀던 것과 달리, 지금 그들이 쓰러졌던 곳의 땅은 평평했다.

칼트의 심장은 불에 타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분화구는 깊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넓었다. 산 바깥에서는 잘 알 수 없었겠지만 심장의 안쪽에는 나무들도 거의 없어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아직도 불타고 있는 그 주변과 대조되는 풍경이었다.

“살아…… 살아 있었습니까?”

유리엘이 아폴로니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의 눈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로브 속의 옷이 여기저기 조금씩 그을린 것 외에는, 그리고 마물이 할퀴었던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 외에는 멀쩡했다.

옷조차 멀쩡한 것은 이상한데.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본 순간 답을 알았다. 마녀가 만든 로브. 그 옷에는 미약하게나마 화기에 대한 방어력이 있었던 것이다. 걱정되었던 것은 오히려 유리엘이었으나 그 또한 걷고 말하는 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래. 생각보다 멀쩡하네.”

“대체 어떻게……?”

“원래 내 몸이 그래. 상처도 빨리 낫고 추위나 더위도 안 타.”

“신의 피라는 건 그냥 전설이 아닙니까?”

“나도 이 정도로 멀쩡할 줄은 몰랐어. 궁에서는 그냥 촛불 같은 걸로만 해 봤거든.”

황족 중에도 신의 특징을 타고 태어나는 자는 희귀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불에 타지 않는 사람은 역사서에만 몇 명이 있을 뿐이었다. 아폴로니아 또한 어린 시절 선황이 펄펄 끓는 찻물을 쏟았음에도 멀쩡했던 일이 없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고모님의 의심이나 사는 쓸데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쓸모가 많네.”

아폴로니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빙긋 웃었으나 유리엘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그게 제가 전하를 죽여야 했던 이유입니까?”

“그래. 재수 없게 페트라가 알게 돼 버려서.”

유리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산 위로 향한 이유도 그것이었군요. 불에 타지 않으니까 안전하다는 것.”

“맞아. 마물은 예상을 못했지. 그건…….”

그녀는 머리카락 속의 재를 털어 내다가 말고 유리엘의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내가 판단을 잘못했었어. 네가 내 목숨을 살렸어.”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아폴로니아의 말에, 그의 예쁜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잠시 침묵하던 유리엘의 입술이 열렸다.

“비밀이 많은 사람이로군요, 황녀 전하는. 리페르 쪽에서는 전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황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두 얼굴을 가졌지. 황제도 고모님도 나도 예외가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폴로니아의 머릿속에는 단순하고 다혈질임을 숨기지 못하는 패리스와 가레스가 차례로 떠올랐다.

“리샨에, 칼트산에 온 진짜 이유는 뭡니까? 불 속을 그냥 헤매고 싶었던 건 아닐 테고요.”

유리엘은 아폴로니아가 계속해서 피하려 했던 질문을 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알린 이상 더 숨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의미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가장 위험한 곳.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곳. 그 심장에 제국의 조각을 숨겨 두었다.’”

그녀는 선황의 유언을 중얼거렸다. 앞도 뒤도 없는 주문 같은 말이었지만 유리엘은 감이 빨랐다.

“……누가 한 말입니까?”

“할아버지. 아버지가 올린 차를 마시고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가 찾아갔었어.”

아폴로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에게도 해 준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반역을 알고, 죽어 가는 할아버지를 잠깐 찾아갈 시간이 있었거든.”

유리엘은 잠자코 들었다. 조금도 충격을 받은 표정은 아니었으나 약간의 연민이 얼굴을 스쳤다.

“딱 한 마디 남길 시간밖에 없었어. 이미 정신은 나갔을 테니 의미 없는 말일지도…… 하지만 와 보지 않을 수 없잖아.”

그들은 분화구 속, 정확하게는 불타는 산과 심장의 정중앙 사이쯤에 앉아 있었다. 사방에서 불꽃이 터졌으나 그곳은 거의 평온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요했다.

“분명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셨지만 사후에 못 찾은 마정석이 많아서, 그걸 이쪽에 숨긴 것이 아닐까 하고…….”

유리엘은 그녀의 말을 듣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나?

나름대로는 중요한 이야기였지만 그다지 듣고 싶지 않았는지, 그는 아폴로니아를 등지고 심장의 중심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리엘?”

아폴로니아가 얼떨결에 그를 따라가며 불렀다. 분화구의 정중앙에 가까워졌을 때, 그는 여전히 그녀를 등진 채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찾은 것 같습니다.”

“뭐?”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시선이 멈춘 곳으로 다가갔다. 칼트의 심장 한가운데에, 거대한 돌 하나가 수호령이라도 되는 듯 혼자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돌에는 마치 비석처럼 한 마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자격을 증명한 황제의 손길만이 제국의 조각을 드러내리라.]

돌은 묘하게도 빛을 받아 찬란했다.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위압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손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홀린 듯, 아폴로니아는 자신의 오른손을 돌의 한가운데에 가져다 댔다.

우르르르릉-

아폴로니아의 손이 닿았던 곳부터 황금색 빛이 터져 나왔고, 그와 동시에 산 전체가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울렸다.

화악-

그녀가 미처 손을 떼기도 전에, 빛은 돌 전체로 번졌다.

“이게 뭐…….”

그녀가 말을 마칠 겨를도 없이 빛은 칼트의 심장을 채워 나갔고, 그다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우르르르릉-

황금빛이 칼트산 전체로 퍼지면서, 산을 태우던 불꽃은 이제 거대해진 빛에 흡수되었다. 그러자 산은 미친 것처럼 진동했다. 아폴로니아와 유리엘이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눈앞이 너무나 환해 앞을 보기도 어렵다고 느낄 무렵, 모든 것이 멈췄다. 불꽃도, 진동도, 웅웅거리는 소리도 없었다. 눈을 멀게 할 것 같던 찬란한 빛도 한순간 사그라들었다.

“전하.”

몸에 감각이 돌아올 무렵, 유리엘의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눈을 돌려 보니 그는 긴 팔로 그녀를 단단하게 부축하고 있었다. 아까 빛이 너무 강해 휘청거렸던 것일까. 유리엘은 그녀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보십시오.”

그의 시선은 고정되지 않고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유리엘이 말하는 대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화구 안쪽의 바닥과 가장자리는 전과 마찬가지로 흙과 돌로 되어 있었으나 어딘가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산을 감쌌던 황금빛과는 달랐다. 한눈에 보기에는 마치 바다의 모래알 같았으나 훨씬 찬란했다.

마치 그녀가 성인식 때 머리에 썼던 작은 월계수관처럼.

“설마…….”

유리엘이 몸을 숙여 반짝이는 돌 조각 하나를 주워 드는 순간, 아폴로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설마…… 말도 안 돼.”

유리엘의 손에 들린 그것은 큐브형의 투명한 크리스털 같았다. 화산에 오래 묻혀 있던 돌치고는 깔끔하게 잘려 있어 돌이라기에는 너무 예뻤다. 그러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역시 사방의 빛을 강하게 반사하는 그 오묘한 광채였다.

아폴로니아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 장식을 뽑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그녀의 눈동자와 잘 어울린다며 선물했던, 피처럼 붉고 아름다운 루비였다. 반만 틀어 올렸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어깨로, 허리로 쏟아졌으나 그녀의 눈도 정신도 오직 유리엘의 손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유리엘의 손 위에 있는 크리스털 조각을 아폴로니아는 말없이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조각의 가장 날카로운 부분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루비의 표면을 강하게 긁어내렸다.

“무슨……!”

“정말이었어.”

티 한 점 없이 찬란하게 빛났던 어머니의 유품 정중앙에 보기 흉한 자국이 남았다.

“함부로 망가뜨려도 되는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

“유리엘,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순식간에 가치가 없어지다시피 한 루비를 손에 든 아폴로니아는 조금의 아쉬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루비를 긁을 수 있는 것은 마법을 제외하면 세상에 하나뿐이야.”

“……그럼 설마.”

“제국의 조각을 품은 칼트산, 그건 마정석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칼트산은 거대한 광산이었던 거야.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다이아몬드 광산.”

선황은 그녀를 아버지와 페트라의 손에 혼자 남겨 두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가이우스는 그의 유산을 모두 가져간 듯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진짜 유산은 황폐하고 거친 리샨에 있었다. 대륙의 경제를 흔들 수도 있는 부. 그는 그것을 지켜 내어 끝내 자신의 후계자에게 주었다.

“황제의 마정석이 사라졌다는 것은 연막이었던 겁니까?”

유리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이아몬드 조각을 보며 말했다.

“아니, 오히려 마정석이 여기 있다는 추측이 맞았던 거지.”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훌륭하고 용맹한 제왕. 그의 내면을 그녀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할아버지는 언제부터 주변 사람을 의심했을까? 얼마나 의심했을까? 누군가를 믿은 적은 있었나?

“칼트산에 저주 같은 건 없었어. 마물이 들끓어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던 보석 광산이었던 거지. 할아버지는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 한층 더 광산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주술을 걸었던 거야. 그가 가진 모든 마정석과 주술사를 동원해서.”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침입자가 있으면 불타오르는 산을 만들고, 산을 숨기는 듯한 기묘한 수목을 구해 심고, 원래 황폐했던 리샨을 더 황폐하고 부패하게 내버려 두어 발길이 끊기게 만들고…….”

그는 영주를 대신하는 봉신이 부패하여 주민을 괴롭힐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도.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황제이니라.’

선황의 목소리가 뇌리에 울렸다. 온정과 냉정함을 함께 갖추고 백성을 아꼈던 명군.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철혈의 황제였다.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유리엘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접근을 방어하기 위한 장치들은 유산의 상속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잖습니까.”

그는 마물이 깊이 할퀸 아폴로니아의 어깨며, 여기저기 긁힌 그녀의 상처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녀의 어깨에 묶은 유리엘의 옷 조각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말은 의도보다 깊숙이 아폴로니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알아.”

그녀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아까 돌에 쓰여 있었잖아.”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까보다도 더 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고. 그 말은 단순히 돌에 손바닥을 대는 문제가 아니야. 할아버지는 어쩌면 다 짐작하셨던 거야. 다시 말하면…….”

“그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무언가 짐작한 유리엘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물에게 죽거나, 불길도 뚫지 못하는 후계자 따위는 광산을 물려받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는 뜻이지.”

말을 뱉어 내고, 그녀는 쓰게 웃었다.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드디어 찾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녀가 원했던 답은 아닐지라도.

평생 남이 따라 주는 차만 마시던 선황은 그날 왜 사람을 물리고 직접 찻주전자를 들었을까? 황제의 찻물이 왜 그날따라 펄펄 끓고 있었을까? 다른 노인들과 달리 건강해서 손을 떨지도 않았던 그는 하필 그날 손녀의 팔에 차를 쏟았다.

그녀가 화상을 입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그는 항상 아폴로니아를 시험했다. 그녀의 자질을, 지식을, 능력을. 그리고 그녀의 신체까지도.

칼트산은 단순한 유산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선황의 마지막 시험이었다. 정말로 화기에 다치지 않는지, 리샨까지 올 수 있는 추진력과 과감함을 갖추었는지, 마물과 맞설 능력이 있는지, 없다면 대신 죽어 줄 부하를 키워 냈는지.

“내가 실패하고 죽으면, 불에 타지 않는 다른 후예가 언젠가 나타나 유산을 찾으면 된다고 판단하셨던 거야.”

끝이 보이지 않는 휘황찬란한 보석들의 틈에서,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씁쓸하게 웃었다.

* * *

밤늦게 돌아온 두 사람의 몰골을 보고 시드는 어마어마하게 화를 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습은 폭발하는 화산, 또는 불타오르는 칼트산과 비슷했다.

“위험한 곳에 가시려면 저를 대동하셨어야지요! 호위인 저보다 전하께서 먼저 돌아가시면 저는 뭐가 됩니까!”

쩌렁쩌렁한 고함이 사그라들고 아폴로니아가 이야기를 다 마치자 그는 비로소 조금 진정했다.

“선황 폐하답군요.”

모든 상황을 전달받은 그는 짧게 평가했다.

“놀라지 않은 모양이네.”

“현실적이고 냉정하신 분이셨습니다. 선황께서는.”

“아버지를 의심하셨던 걸까?”

“그분은 모두를 의심하셨습니다. 지금의 황제는 오히려 신뢰를 받는 편이었죠. 다만 만일을 대비하셨을 겁니다.”

시드는 예상했던 것보다 차분하게 말했다. 그것이 아폴로니아는 마음에 걸렸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시드를 내 호위 기사로 임명했잖아.”

“그렇습니다.”

그는 회색의 눈동자를 아폴로니아와 맞추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잘 살아남는다면 전하와 함께 리샨까지 와 죽을 수 있겠다고 판단하셨나 봅니다.”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듯 여상했으나, 그의 말에는 진심이 들어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달라.”

시드의 표정에 약간의 균열이 생겼다. 그는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러나 전하, 저는 전하의 기사입니다.”

나직하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독특하게도 그런 말투를 쓸 때 시드가 가장 진지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살얼음판 같은 길을 눈앞에 두고 있고, 그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전하의 소명입니다.”

“알아.”

“제 소명은 그 길을 함께 걷다가, 전하를 지키며 죽는 것입니다.”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요.”

아폴로니아는 움막 같은 집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방 앞을 지키던 유리엘은 그녀를 조용히 따라나섰다.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허름한 곳. 집시와 도적밖에 살지 않는 버려진 땅. 그러나 시린 공기를 뚫고 몇 걸음 걷자 나타난 것은 수천 개의 별이 쏟아질 듯한 하늘이었다.

그녀는 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고, 태양 같은 밝은 금발이 별빛 아래에서 반짝였다.

“아까 이야기를 들었어?”

돌아보지 않고 꺼낸 이야기였다. 기척을 느꼈을 리는 없으니 아마 그의 행동을 예측한 것일 터였다. 유리엘은 미끄러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시드 바이안이 그러더군요. 다른 명령이 없으면 전하의 옆에 붙어서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들으라고.”

돌려 말했지만 인정이었다.

“너도 산에서 나를 지키다가 죽겠다고 했었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로 죽이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지.”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과 달리 빠른 수긍이었다.

“하지만 그 말의 진짜 의미는 오늘에서야 와닿은 것 같아.”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유리엘을 마주했다.

“돌아가면 시드를 은퇴시키려고 해. 마야도.”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고 하셨지. 하지만 이제 그 희생을 재력으로 대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제게 하고 싶은 다른 말이 있으시군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말투였으나 어딘가 망설임이 있었다. 그의 질문에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렇게 할래? 지금, 딱 한 번 기회를 줄까? 당장 떠나면 난 아마 너를 못 찾을 거야.”

그녀의 황금빛을 품은 붉은 눈동자가 그를 향해 살짝 웃었다. 어딘가 달콤하고, 어딘가 처연한 미소. 유리엘은 그 눈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유리엘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긴장시켰다. 그것은 그에게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순간, 유리엘은 이 닿을 수 없을 것처럼 고귀한 소녀의 감정을 한층 더 자극하고 싶다는 뒤틀린 욕심이 생겼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쳐 있으면서, 혼자 있어서는 안 되는 때에 굳이 그를 떼어 놓겠다고 말하는 아폴로니아에 대한 반감이었을지도 모른다.

“글쎄.”

유리엘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섰다.

“오래 보고 싶지 않으면, 그냥 지금 죽일 수도 있잖습니까.”

둘 사이의 간격이 한 뼘 정도로 좁혀졌다. 아폴로니아가 그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얼굴을 드는 것이 보였다. 미세하지만 분명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한 뼘의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자극에 성공했으나 그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피해 버린 것은 오히려 유리엘 쪽이었다.

“유리엘.”

아폴로니아는 칼트산에서 했던 것처럼 그의 얼굴을 감싸 다시 그녀를 보게 만들었다. 차가운 손끝이 뺨에 닿자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듯했다.

“명령을 바꾸도록 할게.”

“……뭡니까.”

“내 옆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밤바람 때문인지 갑작스레 은은한 향이 훅 느껴졌다. 차분하고 우아한 그 목소리는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 눈동자를 그는 더 바라보고 있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선을 떼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원한다면.”

그는 가까스로 토해 내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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