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마녀라 불리는 이들
“거 좋은 말로 할 때 가진 돈 다 내놓으시오.”
뽀얀 피부에 긴 속눈썹과 깊은 눈매, 그리고 외모와 대조되는 너덜너덜한 누더기 옷이 인상적인 도적이 말했다. 그의 옆에서 비슷한 특징을 가진 미남과 미녀들이 긴 칼이나 몽둥이 따위를 든 채 마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켜라.”
도적들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천으로 얼굴을 가린 은발의 키 큰 기사가 짧게 내뱉었다. 도적들은 당연하게도 그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고, 유리엘 비체는 검을 검집에서 빼지도 않은 채 크게 몇 번 휘둘렀다.
쉬익- 퍽.
“으윽!”
“크읍!”
그의 검술은 아름답고 우아한 궤도를 그리며 도적들을 내려쳤다. 검집에 꽂힌 채로 그의 장검은 누군가의 등에, 어깨에, 다리에 정확하게 꽂혔다. 한 명당 한 대면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유리엘은 한편으로는 도적떼를 후려 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도, 그러니까 주로 도적들이 크게 다치지 않도록 애를 많이 써야 했다. 아폴로니아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끼어들지 마라. 저 녀석 혼자면 충분하니까.”
시드는 어딘가 힘 빠진 듯한 목소리로 옆에서 창을 겨누는 기사들에게 대충 명령했다. 유리엘 한 명에 의해 전멸한 도적떼가 줄행랑을 치기까지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쫓아가서 죽이겠습니다!”
마차 가까이 있던 갈색 머리의 젊은 기사가 뒤늦게 흥분해 말했으나 시드는 손을 내저었다.
“목숨을 해하지 말라는 아가씨의 명이다.”
그들, 그러니까 아폴로니아, 시드, 유리엘과 황제가 붙여 준 황실 호위 기사단 일행은 리샨 지방의 경계에 접근해 있었다.
제국 남단의 리샨 지방은 이미 수십 년째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는 지역이었다. 척박하고 메마른 그 땅에는 어떤 곡식도 제대로 자라지 않았고, 계절에 따라 더위, 추위, 모래바람, 마물 무엇 하나 그곳을 건드리지 않고 스쳐 가는 재난이 없었다. 같은 지방 내에서도 어디는 태풍이 부는가 하면 어디는 기근이 드는 등 온갖 저주를 받은 땅임이 분명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았기에, 리샨 지방의 주민들은 모두가 가난했다. 대대로 영주들은 리샨과 멀리 떨어진 저택에서 거주했고, 간혹 농담처럼 헐값에 영지를 팔아넘기기도 했다.
“돈 대신 이걸로 받게! 넓은 영지라니까.”
“하이고, 골칫거리를 받느니 돈 그냥 떼먹히고 말겠네.”
몇십 년 전 선황 파스칼 3세는 당시 영주로부터 세금 대신 영지를 통째로 받았다. 그러나 그 또한 리샨을 방치했다. 파스칼 3세가 리샨까지 직접 갈 일은 절대로 없었으므로 그곳은 점점 더 황폐해져 갔다.
이제 리샨에 거주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집시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벨라 일족이었다. 떠돌이, 좀도둑, 강도, 마녀. 인간이지만 어딘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벨라들의 수식어는 많았다.
그러나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의 기묘한 아름다움이었다. 살짝 그을린 이국적인 피부색에 긴 속눈썹, 짙은 검은 머리, 오묘한 자색 눈동자에 타고난 교태는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을 홀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물론, 아름다운 외모는 도적질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실력이 안 되면 사람이라도 많이 데리고 오거나, 머리라도 쓰거나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시 일행이 출발하자 시드가 아폴로니아의 마차에 올라 투덜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세 번째 만난 도적이라 조금 기대했는데 실력이 미진하네.”
아폴로니아는 출발 전, 어떻게 하면 황제가 붙여 준 황실 기사단을 따돌릴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들은 황제에게 소속되어 있었고,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는 훌륭한 기사들이었다. 즉, 아폴로니아를 호위하면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황제에게 보고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있는 한 아폴로니아는 리샨 지방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무언가 발견한다 한들 황제가 알게 되면 말짱 꽝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리샨 지방의 도적떼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기뻤다.
기사단이 도적떼에게 함락당하면 시드와 유리엘을 데리고 탈출한다. 그러고는 자유롭게 영지를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 좋은 계획은 첫 번째 도적떼를 만난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들의 무기도, 준비성도, 실력도 황실 기사단 앞에서는 형편없었던 것이다.
목숨을 해치지 않기 위해, 두 번째 도적떼부터 아폴로니아는 유리엘 혼자 상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개로 들어온 용병을 시험해 봐야 한다는 핑계였다. 다만 외모가 너무나도 인상적인 그에게 얼굴을 가리고 있으라는 명령을 함께 내렸다.
“그나마 처음에 나타난 그 사람들이 낫지 않았나? 좀 더 봐주지 그랬어, 유리엘.”
“‘봐주기만’ 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유리엘이 시드를 쳐다보았다. 그는 출발 전, 유리엘에게 얼토당토않은 요구들을 했었다.
‘도적을 만나면 적당히 져 주고 도적질을 도울 것. 하지만 그 의도를 기사들에게 들켜서도 안 되고, 유리엘 자신의 얼굴을 보여서도 안 되며, 기사들도 도적들도 유리엘 자신도 다쳐서도 안 되고, 무엇보다 아폴로니아가 다쳐서는 안 되고, 마지막에 아폴로니아, 시드, 유리엘만 납치를 당해야 함.’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것인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다행히 시드는 일부러 져 준다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아는 듯, 유리엘을 보며 조금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정도면 많이 봐준 겁니다. 아무 계획도 조직력도 없이 덤비니 이 사달이 난 것이지요. 거 식사를 차려 줬으면 스푼을 들고 먹기는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부러 황금빛 마차를 타고 고급스럽게, 눈에 띄게 돌아다녔지만 기사단이 당하기는커녕 단추 하나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
아폴로니아는 조금 전 도적들의 마른 몸을 떠올렸다. 그들은 필시 며칠을 굶었을 것이다. 힘도 없고 조직력도 없고 정보도 없으니 백전백패가 너무나 당연했다.
“역시 따라오네.”
유리엘이 마차 밖으로 잠깐 고개를 내밀더니 말했다.
“좋아. 더 천천히 가라고 해.”
아폴로니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오늘 밤에는 기필코 납치되어야겠으니까 말이야.”
그날 밤, 황녀가 묵는 객잔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리샨 최고 수준의 시설이라고는 하나 허름하고 형편없었다. 기사단 절반 정도의 인원은 잠을 포기하고 촉을 곤두세우고 철통같은 경호를 하고 있었다. 몇몇 그림자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흡!”
“어억!”
검은 복면을 쓴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기사들은 쓰러졌다. 낮과는 다른 모양새였다. 복면에도 가려지지 않는 미모를 가진 그림자들은 쓰러진 기사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그들은 낮보다 실력이 는 것도, 계획성 있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어둠을 틈타 실력자 한 명이 그들 틈에 숨어 있었을 뿐이었다.
유리엘은 도적들이 침입할 때를 맞춰 얼굴을 가린 채 그들과 합류해 기사들을 쓰러뜨렸다. 어둠이 깊었기에, 그리고 그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기에 아무도 낯선 이가 무리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다만, 얼빠진 우두머리가 조금 정신을 차렸나 보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기절한 자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 더 시급했기 때문에.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유리엘은 혼자 소리 없이 빠져나가 아폴로니아의 방으로 향했다.
펑!
그가 미끄러지듯 다가가 병 하나를 던지자 연기가 피어오르며 아폴로니아의 방 앞에 남아 있던 기사들이 조용히 쓰러졌다. 그는 기절한 사람들을 넘어 열려 있는 방문으로 들어갔다.
“성공이야.”
“잠입의 귀재답군. 구해다 준 독은 쓸 만하던가?”
“보시다시피. 내일 아침까지는 잠들어 있을 거야.”
“아주 좋아. 뒷일은 그 얼간이들에게 맡기고 우린 나가지.”
짐까지 챙긴 시드가 아폴로니아의 손을 잡고 일어서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아폴로니아는 걸치고 있던 로브를 머리끝까지 눌러썼다.
몇 시간 후 병사들이 깨어나면 그들은 침입한 도적들에 대한 단서를 잡을 것이고, 곧 아폴로니아가 그들에 의해 납치됐다고 판단할 것이었다. 아폴로니아는 그저 할 일 다 하고 적당한 때에 나타나 도적 소굴에서 탈출했다며 그들과 합류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이 객잔 뒤 미리 준비된 말에 잠을 싣고 몇 발짝 움직였을 때, 어딘가에서 어떤 외침이 들렸다.
“가진 거 다 내놓고 조용히 사라지시지.”
세 마리 말 모두 키가 커서, 그들은 처음에 누가 어디서 말 하고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당장 내 말을 듣고 항복하면 해치지는 않을게.”
이리저리 둘러보고 나서야, 그들은 시드의 발치쯤에 단검을 들고 서 있는 키 작은 여자 복면인을 찾았다. 반짝이는 자색 눈이며 결 좋은 머리카락. 그녀는 분명 벨라였다. 다만 목소리나 눈빛에 특유의 유혹적인 느낌은 없었다.
아직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나름대로 열심히 협박을 하고 있는 듯했으나 미처 덜 자란 키에 어설픈 자세 때문인지 전혀 위압감이 없었다.
“누구니, 너는? 우리가 짐을 주면 다 들고 갈 수는 있고?”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리샨에서만 13년을 산 이 타냐를 뭐라고 보는 건데? 쓸데없는 걱정 말고 어서 손에 낀 반지부터 이리 줘. 여기서 봐도 큼직한 보석이 박혀 있는데.”
“눈썰미가 좋구나.”
하지만 어쩌면 저렇게 순진할까? 아마도 열세 살인 것 같은 그 아이는 복면을 쓴 것이 의미 없게도 자기 이름이며 나이며 출신까지 술술 불어 버렸다. 얼빠진 도적떼와 한패인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보아하니 저 객잔 손님들인 모양인데, 물건만 내려놓으면 말은 그냥 보내 줄…… 으아아아앗!”
의기양양하던 소녀는 별안간 시드에게 덜미를 잡혀 허공으로 뽑히듯 들어 올려졌다.
“버리고 갈까요, 아가씨?”
그는 아폴로니아에게 물었다. 밖에서 그들은 안전을 위해 전하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으나 사실 위협이 기껏 이 수준이라면 호칭이고 뭐고 꺼릴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려놔! 내려놓으라고 이 영감탱이야!”
타냐라는 아이는 공중에서 발을 동동 굴렀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다. 다만 시드는 영감탱이라는 호칭에 살짝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이 악당!”
“도적놈이 할 소리더냐?”
“내가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아? 리샨은 내 손바닥 안이야! 언젠가는 복수하고 말 거야!”
“황당한 녀석을 다 보겠군.”
아이는 진심으로 시드가 악당 두목쯤 된다고 생각하는 듯, 그를 향한 온갖 저주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저 멀리 던져 놓고 따라갈 테니 앞서 가시죠, 아가씨.”
시드가 길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의 시선은 타냐에게 머무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가씨?”
“리샨이 네 손바닥 안에 있다고 했니? 칼트산에 가는 길도 알아?”
“당연하지! 마물 피해서 얼마나 잘 가는데! 너희는 이제 죽었어!”
타냐는 속사포처럼 온갖 협박을 쏟아 냈으나 아폴로니아는 필요한 정보 외에는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녀는 벌써 타냐를 잡은 채 말을 돌리려는 시드를 불러 세웠다.
“시드.”
“예, 아가씨.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일행이 발견이라도 하도록 어디 묶어 놓는 게 좋겠군요.”
“태워.”
그가 짐을 뒤져 밧줄을 꺼내려던 찰나, 아폴로니아가 조용히 명령했다.
“꺄아아아아아악! 이 마녀 같은 여자!”
“아가씨, 어린아이가 먹고 살기 위해 저지른 일입니다! 어찌 사람을 태워 죽이라고 하십니까! 차라리 검으로…….”
조금 전까지 으르렁대던 두 사람이 동시에 질색하며 소리쳤다. 조용히 구경하던 유리엘조차도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아폴로니아는 머리를 짚었다.
“시드의 말에 태워.”
“예?”
두 사람은 다시 동시에 조용해졌다. 그들이 동그래진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길잡이로 데려가자.”
아폴로니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몰아 앞서갔다.
* * *
리샨 지방은 자연 자원은 눈 씻고 봐도 없으면서 온갖 재해에 취약한 형편없는 땅이었다.
영지 내에 유일하게 나무라도 자라는 곳은 칼트산이었으나 오래전부터 산에는 위험한 마물들만 드글거렸고, 언제부턴가는 신의 저주를 받았는지 비정기적으로 한 번씩 예고 없이 혼자 불길에 휩싸였다가 꺼지고는 했다.
아폴로니아가 가고자 하는 곳이 칼트산이었다. 정확하게는 ‘칼트의 심장’이라 불리는 산 중간의 어떤 위치에 가고자 했다.
‘가장 위험한 곳.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곳. 그 심장에 제국의 조각을 숨겨 두었다.’
선황의 유지―그것을 유지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는 무의미할 정도로 애매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에게 떠오르는 것은 그곳뿐이었다. 틀렸다면 모두 포기해야 했다.
“디아만 자작은 정말 만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호위들을 따돌리고 찾아가 독대하면 편히 설명을 듣지 않을까요?”
디아만 자작은 영주들이 방치한 리샨을 오랜 기간 대신 관리해 온 사람이었다. 아폴로니아는 한 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지만 그는 그녀의 봉신인 셈이었다.
“원래 만나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영지민들이 전부 도적질을 해야 하는 곳이라면 디아만 자작이 하는 일은 없는 것 같네.”
“그렇다면 직무 유기의 책임을 물으셔야지요.”
“그러려고 온 게 아니야. 알아만 두고 가지.”
아폴로니아는 리샨을 찾은 정확한 이유를 시드에게조차 설명해 주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기사는 제대로 된 안내자 없이 지역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를 찾아가는 주군이 걱정되는 듯, 다른 방법을 강구하고자 했다.
“오늘은 여기서 더 못 가. 해가 지면 우린 다 마물 밥이야.”
앞서 가던 타냐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처음에 아폴로니아가 길잡이를 제안했을 때 그녀는 빽빽거리면서 저항했었다. 그러나 시드가 눈에 힘을 주며 몇 마디 협박을 하자 어쩔 수 없이 말을 듣고 있었다.
“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여기서 더 가면 숙박할 마을도 없어. 여기서 자야 내일 칼트산에 갈 수 있다니까.”
타냐는 아까부터 조금 얌전해진 상태였다. 심지어 배가 고프지는 않은지, 물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아폴로니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너희 집이 근처인가 보군.”
조용하던 유리엘이 입을 열자 타냐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드러났다.
“아…… 아니야! 진짜 여기서 자고 가야 한단 말이야!”
“무슨 뜻이지?”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에게 묻자 그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한 푼이 아쉬운 빈민가 아이들은 여행객을 손님으로 받고 싶어 합니다. ‘우연히’ 근처에 있던 자기 집으로 데려가면 그만큼 수입이 생기겠죠.”
그 말이 사실인 듯, 타냐의 솔직한 얼굴은 살짝 빨개졌다.
“그치만, 그치만 거짓말은 아니야! 더 가면 위험하단 말이야!”
“물론, 손님에게 돈이 좀 있어 보이면 밤에 지갑 정도는 당연히 털어가는 거고.”
유리엘은 더더욱 빨개지는 타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듯 말을 마쳤다.
“아가씨, 지도를 보아도 이곳과 칼트산 사이에 민가는 거의 없습니다. 아이 말이 순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시드는 타냐를 옹호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아닌 척해도 아이를 불쌍하게 본 모양이었다.
“물론 도둑질을 하면 응당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말입니다.”
타냐의 얼굴에 미처 화색이 돌기도 전에 그가 음산하게 덧붙였다.
“그렇구나.”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 너희 집으로 우리를 안내하렴.”
“잘 생각했네! 내 말 안 들으면 어차피 다들 죽을 수밖에…….”
타냐의 안색이 순간 환해졌으나, 아폴로니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 전에 유리엘, 앞에 보이는 저 바위를 검으로 잘라.”
아폴로니아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유리엘은 장검을 검집에서 뽑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쉬익-
믿을 수 없이 빠르고 깔끔하게, 거대한 바위가 반으로 잘렸다. 땅에는 자국 하나 남지 않았고, 잘린 바위의 단면은 아름다울 정도로 깨끗했다.
“봤니?”
아폴로니아가 타냐에게 말했다. 여상한 말투임에도 어딘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강한 검사를 만나면 결계도, 마력도 통하지 않을 수 있단다. 행인 하나 털 실력도 안 되는 일당들은 말할 것도 없지. 한 번 더 우리 재물을 노리거나 우리를 상대로 협박을 하면…….”
“꺄아아아악! 나, 나를 반으로 가르려고?”
타냐가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저 수상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검술을 보여 준 것뿐이었으나, 험한 상상력이 뛰어난 타냐에게는 그 이상의 효과를 가져오는 듯했다.
“어떻게 될지 궁금하면 한 번 시도해 보렴.”
아폴로니아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타냐에게 웃어 보였다. 눈앞의 어린 소녀는 검을 가진 시드나 유리엘보다도 아폴로니아가 더 무섭다고 판단했는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야.”
한풀 꺾인 타냐가 데려간 곳은 집이라기보다는 움막에 가까웠다.
“다른 식구들은 저녁에 들어올 거야. 빈방을 써.”
“아가씨께서 이런 곳에서 주무실 수는 없다. 무례가 심하구나.”
타냐는 세 사람에게 방 하나만을 안내했다. 벽이랍시고 쌓아 올렸을 나무판자는 군데군데 썩거나 갈라져 있었고, 바닥은 울퉁불퉁했다. 구석에 작은 침대가 하나 있었으나 그 위에는 이불 대신 얇은 누더기가 한 장 있을 뿐이었다.
“정말 더 나은 민가가 없다고? 모두가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 아니냐.”
“그래도 우리 집은 쥐는 안 나오는데…….”
시드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타냐는 유리엘에게 속셈을 들켰을 때보다 얼굴이 더 빨개져서는 우물쭈물했다. 시드가 뭔가 더 말하려 했으나 아폴로니아가 그를 저지하며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타냐, 이 근처에 다른 시설은 없니? 돈은 걱정 말고 말하렴.”
“여행객도 없고 집시들이나 사는 곳에 누가 시설을 지어? 그나마 경계 쪽에는 객잔이라도 있지만 영지 안쪽에는 다 이렇게 살아.”
아폴로니아는 다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바깥과 완전히 차단되었다고 보기도 어려운 최소한의 벽. 보온도 청결도 갖추지 못한 공간.
아무리 황제와 페트라의 구박을 받았다고는 해도 아폴로니아는 평생 황궁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각오하고 왔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잠을 자는 것은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그녀와 시드가 당황스럽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때, 유리엘이 조용히 물었다.
“리샨에서 돈이나 보석을 받고 생필품을 공급하는 사람이 누구지?”
“없다고 하지 않나. 있어도 멀리서 바꿔 오거나 하겠지.”
시드가 핀잔주듯 대신 대답했다.
“자원도 없는 빈민가 근처에는 부자 한 명이 무조건 있어. 굶어 죽기 직전인 것들이 간혹 손에 넣는 보물을 헐값에 가로채는 사람이 분명히 있지.”
어딘가 경험에서 나오는 듯한 말투였다. 아폴로니아가 곁눈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으나 그의 표정은 특별한 감정을 나타내지는 않고 있었다.
“아니라면 객잔에서 기사들의 지갑보다 음식을 먼저 털었겠지.”
유리엘의 말에 타냐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나 있기는 한데…… 거긴 돈 많이 들고 가지 않으면…….”
만났을 때는 당당했던 그 눈에 약간의 공포가 어렸다.
“어디지?”
아폴로니아가 이번에는 짧게 물었다. 부드럽지만 분명 말하라는 명령이었다.
“영, 영주의 저택.”
“뭐?”
아폴로니아와 시드가 동시에 물었다. 유리엘만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영주라니, 리샨의 영주는 여기 살지 않아.”
“아니야, 영주는 리샨 중앙 자기 저택에서 살아. 음식도 천도 다 거기서만 공급을 하고 우린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해. 가끔 가는 사람이 있지만 발각되면 죽거나 큰 벌을 받아.”
아폴로니아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훔친 물건을 다 영주에게 공급한다는 거니?”
“대부분 그렇지. 영주는 나라에 세금을 바치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해.”
“하아…….”
아폴로니아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깊은 숨을 토했다. 로브 안에 감추어진 금적안이 차갑게 빛났다.
“네가 말하는 영주가 메이슨 디아만 자작이니?”
부드럽던 전과 달리 낮게 깔린 목소리에, 타냐는 흠칫 놀라 되물었다.
“디, 디아만 영주를 아, 알아?”
타냐는 말을 더듬으며 로브 속에 가려진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보려 했다. 시드가 눈짓으로 이를 제지했다.
“여기서는 그냥 다들 영주님이라고 불러.”
자수정 같은 타냐의 눈동자에는 분명 깊은 공포가 서려 있다는 것을 아폴로니아는 놓치지 않았다.
“만난 적이 있구나?”
“…….”
“자세한 건 나중에 듣도록 하지.”
아폴로니아는 시드에게 지시해 작은 주머니 하나를 가져오게 하고는 타냐에게 건넸다.
“안에 있는 걸로 이걸로 며칠간 우리와 너희 가족이 넉넉히 먹을 식량, 담요와 옷감 각 20장을 받아 오렴. 필요하면 짐꾼을 고용해도 좋아. 남는 것은 다시 가져와.”
타냐는 머뭇머뭇 주머니를 받아 열어보았다. 그리고 내용물을 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거…… 진짜 금화잖아.”
작지만 묵직한 주머니 속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래. 너희 영주라는 자가 아무리 값을 낮게 쳐줘도 그 정도면 수도에서 마차 한 대는 살 수 있어.”
타냐는 그 정도의 돈은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다른 필요한 게 있거나 네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뭐든 같이 받아 와. 가족 중 병자가 있다면 약을 사도 좋고. 네 수고비는 나중에 따로 더 챙겨 주지.”
타냐는 주머니를 소중하게 쥐었다. 공포가 잠시 스쳤던 눈동자가 다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응!”
아폴로니아의 눈을 덮은 로브를 뚫어져라 보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늦은 저녁, 타냐는 장정 셋과 노파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물론 식량과 옷감을 잔뜩 둘러멘 채였다.
“돌아왔어! 이쪽은 우리 오빠들이랑 할머니야.”
“귀하고 통 큰 손님이라니 얼굴 좀 보…… 으악! 당신은 아까…….”
인사를 하던 장정이 유리엘을 보고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목덜미와 얼굴 절반을 천으로 가렸어도 그의 날카로운 눈매는 알아볼 만했다.
그는 유리엘이 두들겨 패서 쫓아냈던 세 번째 도적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자세히 보니 그는 허리춤에 객잔의 호위 기사들로부터 훔친 듯한 주머니도 차고 있었다.
“저, 저리 가시오! 우린 훔친 것도 별것이 없다고!”
“다 돌려드릴 테니 목숨만은…….”
“아니, 타냐와 할머니의 목숨이라도…….”
타냐와 비슷한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세 장정은 날카로웠던 눈매를 한껏 죽이고 불쌍하게 말했다. 누가 보면 아폴로니아 일당이 도적이고 이쪽이 피해자인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희게 센 머리를 한쪽으로 길게 땋아 내린 노파도 걸어 나와 음료가 든 병을 세 사람에게 쑥 내밀었다. 타냐의 할머니인 모양이었다. 멍하니 서 있던 아폴로니아의 눈에 노파와 낮의 도적떼 선두에 서서 시드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용감무쌍하게 습격을 주도했던 나이든 여자 복면인이 겹쳐 보였다.
유리엘은 급한 와중에 노파의 나이가 걸렸는지 그녀만은 검으로 때리지 않고 옷깃을 살짝 집어 그녀의 무리가 있는 방향으로 던지기만 했었다.
“일, 일단 먼 길 오셨으니 이거라도 마시고 좀 앉아 계시오. 아까는 귀한 분들을 못 알아보고…….”
황당한 표정으로 병을 받아든 시드가 뭔가 말하려던 순간 타냐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빠들, 할머니, 이 사람들이 우리 손님이야. 길 안내만 해 주면 나 태워 죽이거나 하지 않겠다고 했어. 식량이랑 옷감 사라고 돈 준 것도 이 사람들이야. 나중에 사례도 따로 한다고 했단 말이야.”
“뭣, 그게 정말이냐?”
시드에게 온정을 구하던 네 사람은 흠칫 놀라며 서로를 바라보다가, 시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동시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미리 말을 하지!”
“통도 크십니다! 역시 검술 실력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니까.”
“아이고 그럼 그거 내려놓으시오. 다른 음식을 대접할 테니.”
청년들이 표정을 싹 바꿔 그들에게 아부를 하는 사이에 노파가 세 사람의 손에서 음료를 다시 낚아챘다. 아폴로니아는 그들의 불안을 덜어주고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주었으니 받도록 하지. 맛있어 보이는데 이 음료의 이름이 뭔가?”
그러나 노파는 아폴로니아의 말을 듣지 않고 그녀의 손을 후려쳐 병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죄책감이 살짝 깃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머뭇머뭇 시드와 유리엘 쪽을 쳐다보았다.
“……!”
유리엘과 시드가 동시에 무언가를 깨닫고 반쯤 입에 넣은 음료를 토해 내는 사이, 노파는 아직 투명한 액체가 남아 있는 세 개의 병을 주워서 아무렇지 않게 선반 위로 치우며 짧게 한 마디 뱉었다.
“응, 그거…….”
벨라. 사람들이 그들을 마녀라 칭하며 피하는 이유는 특별한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독약 맞소.”
그들은 독과 주술의 달인이었다.
벨라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대륙 어디에나 존재했고, 어디에도 오래 정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벨라를 배척했다. 그들의 검은 머리와 긴 속눈썹, 보석 같은 자색 눈동자와 나른한 목소리는 사악할 정도로 유혹적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대륙에는 사랑하는 벨라의 웃음소리 한 번 듣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 고문한 국왕이며, 벨라의 관심을 끌어 보겠다고 직접 야만적인 검투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은 대공들이 있어 왔다. 고대에는 벨라가 어느 거부의 부인들을 계속해서 유혹해 그를 자살로 몰고 갔다는 전설도 있었다.
전적이 쌓이면서 벨라에게는 악마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미지를 완전히 고정시킨 것은 독이나 주술에 대한 벨라들의 뛰어난 지식이었다.
원래 타고난 것인지, 궁지에 몰린 그들이 짜낸 생존 방안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벨라들 중 일부는 일반 사람들이 다룰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기술로 많은 것을 발명해 냈다.
독이나 약의 제조에 능함은 물론, 재료만 갖추어지면 영원히 녹슬지 않는 검이라거나, 주인이 부르면 스스로 걸어오는 신발, 잃어버린 물건이 있는 방향으로만 빛을 비추어 이를 찾게 해 주는 램프 같은 신기한 물건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자네는 제약의 달인이다 이건가?”
태연하게 약병을 치우고 뚝딱거리며 다른 더 작은 병을 꺼내는 노파를 보며 아폴로니아가 물었다.
“곤봉으로 기습하는 것만 잘하는 게 아니었군 그래.”
“할머니는 이 동네에서 유명해. 아픈 사람도 할머니가 치료하고, 안 아픈 사람은 아프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타냐가 끼어들며 자랑을 했다. 다만 자랑의 내용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약이나 마시거라. 오늘도 잊어버리고 아주 조심성이 없구나.”
“아니야, 아까 영주님 저택에 갈 때는 마셨어.”
노파는 타냐의 말을 멈추며 그녀에게 작은 병을 주었다. 타냐는 뭔지 잘 안다는 듯 투덜거리면서도 푸른 액체를 받아 마셨다.
“재주가 있어 봤자 무슨 쓸모가 있다고. 영주놈을 저주하려고 갖은 애를 써도 재료가 다 구해지지 않아서 실패만 거듭하는 것을요.”
노파의 말에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눈치를 보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영주에 대해 말해 주게.”
그녀는 여전히 로브를 덮어쓰고 있었고, 특별히 자신을 소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방 안의 모두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따르고 있었다.
노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디아만 자작이라는 그놈은 수십 년 전부터 이 지역 유지였지요. 원래는 더 높은 분의 명에 따라 리샨을 관리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스스로를 영주라 칭하더군요. 그러고는 지금까지 온갖 행패를 일삼고 있소이다.”
“세금을 핑계로 재물을 빼앗는다는 것인가?”
“그것뿐이라면 저희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요. 그는 주민들이 떠나자 어느 순간 모든 영지민에게 허락 없이는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려 억지로 정착하게 만들었소. 어기는 자들은 죽거나, 죽은 것만 못하게 살아서 나머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오. 이제 사람이 몇 명 남지도 않았어.”
노파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으나, 옆에서 작은 소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이 아폴로니아의 눈에 들어왔다.
“실례지만 한 가지 물어도 되겠나?”
“……내 자식은 어떻게 됐냐고?”
노파는 더 이상 시드를 무식하게 공격하던 도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로브 속으로 아폴로니아를 꿰뚫을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의 마음을 짚었다.
“하나 있던 딸이 자식 넷을 남기고 죽었지. 타냐가 다섯 살 때 이야기요. 손자 녀석들이 같이 죽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오.”
아폴로니아는 더 묻지 않았다. 타냐가 노파 뒤에 숨어 시선을 피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재물로 영주는 무엇을 하지?”
“뻔한 것 아니겠소. 수도에 왔다 갔다 하면서 펑펑 쓰거나, 창기를 불러 놀거나. 아, 그놈의 고약한 취미가 하나 더 있었네. 마을에 처녀라는 것들을 잡아다가…….”
“그만해도 괜찮네.”
아폴로니아는 타냐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열세 살 아이가 듣기에는 부적절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짐작에서였다. 그러나 노파는 별것 아니라는 듯 설명을 계속했다.
“내게 손녀가 하나뿐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오.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것도.”
타냐는 이런 이야기가 새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들을 뿐이었다.
“타냐는 디아만 자작을 만난 적이 있나?”
아폴로니아는 앞서 타냐에게 자작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녀가 보였던 반응을 기억했다.
“작년에 형편이 어려워 바쳐야 할 세금을 못 냈다가 큰 손자가 끌려간 적이 있었소. 그놈이 본보기를 보인답시고 직접 마을 광장에서 채찍질을 했고 이상한 독약 같은 것을 입에 붓기도…… 큰 손자는 찢어지는 고통에 결국 쓰러지고 말았소. 그 모습을 보고 화를 못 참은 아이가 뛰쳐나가 자작의 팔을 물어뜯었지.”
노파는 한숨을 쉬며 말했고, 타냐는 약간의 후회를 담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몇 대 맞고 기적적으로 도망쳐 나왔지만 그 후로 놈은 타냐를 찾느라 마을을 다 뒤졌지. 잡으면 죽은 목숨이라며. 타냐가 그를 유난히 무서워하는 건 그래서요.”
“잠깐.”
노파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던 아폴로니아는 의문이 들었다.
“인구도 많지 않은데 벨라인 아이를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는 말인가?”
아무리 벨라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해도 대다수의 영지민은 일반인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긴 팔다리며 미인형인 얼굴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숨길 방법을 애써 찾았거든.”
노파는 이렇게 말하며 타냐의 얼굴을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신비로운 그녀의 눈동자를.
“아니.”
조금 전까지 분명히 영롱한 자색으로 반짝이던 그녀의 눈은 어딘가 탁해 보이는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단순히 색만 바뀐 것이 아니라 초점이 흐리고 묘하게 둔해 보였다.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저거라도 바꾸어 놓으면 나을까 싶어서 내가 만든 약을 먹인다오. 이 녀석이 자꾸 잊어버려서 문제지.”
노파의 말대로 약간이나마 평범해진 외양으로, 타냐는 혀를 내밀어 보였다.
“그럼 설마…….”
“길 안내를 대가로 돈을 많이 준다고 들었어요. 들은 순간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소. 돈은 됐고, 그저 저 아이를 어떻게든 이곳에서 데리고만 나가 주면 나는 모든 재주에 목숨까지 바칠 수 있어요.”
노파의 강인하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을 그녀의 삶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지 아폴로니아는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녀는 여전히 의문이 있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런 부탁을 하는가?”
노파는 간절했지만 분명 이성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아무나 붙잡고 집안의 사정을 다 털어놓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돈이 많아 보여서? 얕은 도적질에 당하지 않는 수하를 데리고 있어서?”
노파는 아폴로니아의 물음에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다가섰다.
“내가 여기 갇혀 사는 수십 년 동안, 리샨을 거쳐 간 부자들은 간혹 있었으나 그들 모두가 디아만 영주를 방문하고 그 저택에서 신세를 졌지. 아가씨처럼 영주 몰래 와서 영지민의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라오.”
정곡을 찌르는 통찰이었다. 시드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고, 유리엘도 조금 긴장한 듯했다. 노파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늙은 벨라의 눈에는, 간혹 희미하게 사람의 감춰진 모습이 보이기도 하거든.”
아폴로니아는 순간, 로브 너머로 노파와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노파의 눈은 아폴로니아에게서 답을 촉구하는 듯,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거절하겠네.”
“확실한 거요?”
실망과 슬픔을 머금은 노파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타냐는 가족을 떠나서 살기에 아직 어려. 그리고 나는 아이를 돌볼 능력이 없네.”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대신.”
순식간에 10년쯤 더 늙어 버린 듯한 노파의 처진 어깨가 아폴로니아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약속하지. 내가 칼트산에서 무사히 돌아오면, 그대들은 다시 디아만을 볼 일이 없을 거야.”
“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타냐의 세 오빠들이 동시에 물었다. 노파는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말 그대로야. 디아만의 얼굴도 볼 일이 없을 거고, 그의 명령을 따를 필요도 없어. 타냐를 데리고 어디든 가도 좋아.”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은 그저 정적뿐이었다. 타냐의 가족들은 의심 반 희망 반인 표정으로 아폴로니아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아는 상식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로브 속의 목소리에는 무시할 수 없는 확신과 힘이 있었다.
그들의 인생을 뒤집을 수 있는 권한이, 태초부터 그녀의 것이었던 것처럼.
“가지고 온 음식을 함께 먹도록 하지. 담요는 바닥에도 깔고 벽에도 걸어서 바람을 막고.”
그녀는 평온하게 지시했다. 시드는 이미 일어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아가씨의 말을 어찌 믿소?”
눈만 껌뻑거리던 노파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눈은 희망으로 가득 찼다.
아폴로니아가 시드에게 눈짓하자 그는 짐 가방 속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낮에 타냐에게 줬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주머니를 열어 보이자 그 또한 금화로 가득했다. 노파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담보로 걸지. 맡겨 놓을 테니 내가 방금 한 말을 지키지 못한다면 다 가져도 좋아.”
“그 정도의 돈이면 귀족 작위도 살 수 있소!”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그렇게 해서 나가는 것도 방법이로군. 그리고 잊어버리기 전에…….”
아폴로니아는 로브 속으로 손을 넣어 머리핀을 하나 빼냈다.
“좋은 말 두어 필은 살 수 있는 가치의 보석이야. 길 안내를 한 값은 이걸로 치르겠네.”
노파는 벌어진 턱을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타냐와 그 오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식사를 주겠나? 내일 일정이 있어 빨리 쉬고 싶군.”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다만 이번에는 공기 중에 벅찬 희망이 채워져 있었다. 아직도 약간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노파는 천천히 발을 끌어 식료품을 부엌으로 옮겼다. 세 청년들도 그녀를 도왔다.
“아가씨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군요.”
“타냐가 칼트산까지 안내만 해 주면 별다른 보답은 필요하지 않아.”
노파는 그녀의 답을 듣지 못한 것처럼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무릎을 탁 쳤다.
“혹시 미남을 좋아하시오? 손자들 중에 아무나 하나 데리고 가면 어떻소?”
“풉!”
아폴로니아는 마시던 물을 뱉을 뻔했으나 노파는 나름대로 진지했다.
“저 셋을 보시오. 마르기는 했어도 하나는 떡 벌어진 장정이요, 하나는 늘씬한 꽃미남, 나머지 하나는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부르는 재주를 가졌다오. 아가씨 취향이 한 명도 없을 리가…….”
그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남자들은 가장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상황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벨라들의 사고방식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더니.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쪽으로 이 상황을 정리하는 방법이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유리엘, 얼굴의 천을 풀어.”
달빛을 엮어 만든 듯한 머리칼의 소년 기사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말에 따랐다. 얇고 부드러운 천 자락이 스르르 풀려 떨어지자, 신의 이목구비를 그대로 조각해 놓은 듯한 얼굴이 드러났다. 명화 속 천사를 닮은 짙은 푸른색의 눈이며 섬세한 턱선은 보는 이를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유혹적인 벨라 청년들이, 유리엘의 옆에 서면 순식간에 평범을 넘어 물컹한 해양 동물을 닮은 생김새처럼 보이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매일 보는 얼굴일세. 다른 미남에 감흥이 없다는 건 이해하겠지.”
벙찐 노파와 그 손자들, 그리고 유리엘의 얼굴로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려는 타냐를 뒤로하고 아폴로니아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유리엘의 귀가 붉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들어간 후, 아폴로니아는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노파에게 물었다. 무언가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황궁에서 패리스의 갈색 눈을 어떻게든 금적안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안달 난 사람들. 그들이 성공하면 아폴로니아의 입지는 더욱 불안해질 수 있다.
“눈동자 색을 바꾸는 약 말인데, 그건 자네 말고 만드는 사람이 없나?”
노파는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빙긋 웃었다.
“아주 적지만 만드는 사람들은 있지. 하지만 걱정 마시오.”
그녀는 다시 한 번, 로브를 꿰뚫는 듯한 눈으로 아폴로니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짙은 붉은색에 감도는 황금빛이라…… 그런 눈동자를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없소.”
아폴로니아는 순간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는 다시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늘이 내린 천재가 아니라면, 똑같이 만들 수는 없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