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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주인이 되다 (4/34)

Chapter 3. 주인이 되다

사마라 제국의 여인들은 열일곱 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렀다.

성인식은 혼인이 가능한 나이가 됐음을 뜻했으며, 독립적으로 가문 외의 사람들과 자유롭게 교류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도 있었다. 드물게 여인이 작위를 가진 경우 후견인을 배제하고 정식으로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시점이기도 했다.

모든 제국의 여자아이들처럼, 아폴로니아도 자신의 성인식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그러나 그것은 백마 탄 왕자님과의 로맨스를 꿈꾸어서도 아니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뭇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제국 남부 지역에는 그녀가 선황으로부터 하사받은 영지가 있었고, 그녀는 그곳을 둘러보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현지의 봉신에게 권한을 위임했었지만 성인식이 끝나면 영지부터 방문할 참이었다.

그녀는 파스칼 3세의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에 그가 죽기 전에 이미 하사받은 영지가 많았다.

수도와 가까운 중부에도, 비옥한 동부에도 그녀 몫의 드넓은 영토가 있었다. 그러나 선황의 죽음 이후로 황제는 야금야금 그 영지들을 빼앗아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으로 돌렸다.

대외적으로는 황녀가 너무 어리다는 점을 이유로 댔으나 곧 그 영지들은 아폴로니아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패리스의 소유가 되었다. 다만 대신들의 눈치를 조금은 보아야 했기 때문에 가장 넓지만 아무 쓸모도 없는 남부의 리샨 지방만큼은 그녀에게 남겨 주었던 것이다.

치안도 형편없고 토지도 메마른 그곳에서는 세금조차 제대로 걷을 수 없었기 때문에, 리샨 지방은 수도와의 연결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집시들의 소굴이 되어 가고 있었다.

“소문과 같습니다. 천재지변만 많은 무법지대이죠.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직접 그곳에 가 본 적이 있는 시드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그걸 내게 주셨잖아.”

“전하 외에는 딱히 물려줄 사람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꼭 직접 그곳에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시드를 비롯해 누구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파스칼 3세의 말이 귓가에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위험한 곳.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곳. 그 심장에 제국의 조각을 숨겨 두었다.”

파스칼 3세는 생전에 아폴로니아 앞에서 버릇처럼 그런 말을 했다. 가끔은 노래를 붙여 흥얼거렸고, 또 가끔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의미가 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문구에 그녀가 관심을 가진 것은, 파스칼 3세가 아폴로니아 외의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그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녀에게만 들려주는 수수께끼인 것처럼.

아폴로니아가 마지막으로 파스칼 3세의 모습을 보았을 때도 그는 같은 말을 남겼다. 엘레니아 황녀의 죽음을 목격한 뒤 남들의 눈을 피해 자신을 찾아왔던 아폴로니아에게, 그는 힘이 다 빠져나간 몸으로 몇 차례 같은 말을 읊었었다. 그것이 파스칼 3세의 마지막이었다.

설령 그곳이 유언과 상관없는 정말로 쓸모없는 땅덩어리에 불과하더라도 그녀는 자신의 영지를 직접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시드 외에 꼭 데려가고 싶은 호위가 있었다.

“주술사는 준비가 됐대?”

“물론입니다. 제 가족으로 가장하고 들이겠습니다.”

아폴로니아와 시드는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성인식이 지나 그녀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면 그녀는 본격적으로 황제와 맞설 방안을 찾을 것이다. 만약 유리엘 비체를 얻는 데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시작이 될 것이다.

* * *

황녀의 성인식은 성대하게 준비되었다. 비록 황제의 애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받지 못하는 그녀였지만 제국 유일의 황녀인 만큼 성인식은 큰 행사일 수밖에 없었다.

황비들의 환영연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귀족들은 황궁에 초대되어 중요 인사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식 당일 황궁을 들락거리는 마차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주술사 노인 한 명을 숨겨 들여와야 하는 아폴로니아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전하께서 성인식 드레스를 입으신 모습을 가장 먼저 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성인식 날 아침, 느지막이 그를 데리고 입궁하기로 한 시드는 몇 번이나 아쉬워했다.

“내가 봤는데 그냥 레이스가 잔뜩 달린 흰색 드레스야. 평범해.”

“아니, 드레스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입은 전하의 모습을 말입니다. 제가 여인의 드레스에 왜 관심을 가집니까?”

“난 지금도 드레스 입고 있는데.”

“성인식에 전하만큼 무신경한 여인은 제국을 다 뒤져도 없을 겁니다.”

아폴로니아는 그렇지 않다, 성인식을 기점으로 계획한 일이 얼마나 많으냐며 반박했지만 시드는 한 마디로 그 반론을 묵살했다.

“성인이 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과 성인식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은 다릅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은 듯했으나 아폴로니아가 더 이상 들어 주지 않을 거라 판단했는지 일찍 별궁을 나섰다. 물론 이제부터 남자들을 다 조심하라는 둥 몇 마디 구시렁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반역자 아버지에게 죽지 않으려 노력하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굳이 필요한 조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폴로니아는 고맙게 들으며 그를 배웅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저녁 시간이 되자, 아폴로니아는 예정대로 연회장에 들어섰다.

그녀는 태어나서 수많은 연회에 참석했었지만,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간혹 열리는 그녀의 생일 연회조차도 그저 귀족들이 교류할 하나의 핑계에 불과했기에 누구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성인식 날 그녀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황제가 체면상 파견한 황실 최고로 솜씨 좋은 시녀는 하루 종일 그녀의 얼굴과 머리를 매만지더니, 창백했던 그녀를 장밋빛 뺨을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로 변신시켜 놓았다.

“살이 조금만 더 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시녀는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그녀가 탄생시킨 것은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순수를 상징하는 새하얀 드레스에 알알이 박힌 보석들, 그리고 투명하고 찬란한 다이아몬드가 정교하게 장식된 작은 월계수관. 이 모든 것이 아폴로니아가 원래 가진 아름다움과 조화되어 더욱 화려하게 빛났다.

아폴로니아가 연회장에 들어서고 나서부터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기까지의 짧은 시간에도 그녀는 상당수의 청년들에게 춤 신청을 받았다. 그녀 또래의 소녀들도 온갖 칭찬을 쏟아 내는 데 바빴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이윽고 아폴로니아가 연회장 끝의 의자에 앉아 있던 황제에게 예를 취하자 평소 그녀를 험악하게만 보았던 황제도 순간 감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는 언제나처럼 딱딱한 표정의 페트라가 있었다.

황궁 내의 암살 사건 이후로 아폴로니아는 그들을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다. 다만 아폴로니아가 상처를 보여 주고 돌아온 후 페트라가 상당히 자주 황제를 알현했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두 사람의 관계가 상하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들의 사이가 어떤지 아폴로니아는 알지 못했으나 사건이 워낙 떠들썩하게 퍼졌기 때문에 페트라가 암살 시도를 다시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추측했다.

“성인이 다 되었구나.”

황제가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아버지의 표정으로 말하자 가까이에 있던 황비들이 황홀한 듯 미소 지었다.

“제가 누리는 모든 것은 아버님의 은혜입니다.”

아폴로니아는 가식적인 인사에 가식으로 대답했다.

“마침 너에게 전할 좋은 소식이 있다. 오늘 연회의 의미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일이다.”

황제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분명 희소식이겠지요.”

그녀는 벌써 가슴이 설렌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치 누가 더 가식적인지 경쟁하는 느낌이었고, 분명 그녀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약간의 당황스러움을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네 앞으로 청혼서가 왔다.”

황제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곧 약혼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 옆에 있던 페트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청혼…… 이요, 누구로부터입니까?”

아폴로니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물었다. 다행히 수줍은 소녀의 설렘 정도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비에른 왕국의 왕세자가 스물셋이고 너와 잘 어울릴 성격이라고 하더구나. 몇 달 후에 제국을 방문하고 정식으로 다시 청혼한다고 하니 너도 그리 알고 있거라.”

“그러면 아버님은 이미 결정하신 것입니까?”

“그렇다. 자잘한 준비는 페트라가 도와줄 것이니 마음 놓고 맡기거라.”

잘 어울릴 성격은 무슨. 비에른 쪽에서 제국에 줄을 대겠다고 무기니 상권이니 잔뜩 갖다 바친 것이 분명하다. 아폴로니아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당황한 와중에도 그녀는 이 약혼이 급하게 결정된 경위를 파악하려 애썼다.

“축하드립니다, 황녀 전하.”

페트라가 억지스러운 미소를 한껏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하자 아폴로니아는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이른 결혼은 황제와 페트라가 극적으로 찾은 합의점이었던 것이다. 아폴로니아를 살려 두고 이득을 찾으려는 황제, 그녀를 눈엣가시로 보는 페트라, 때마침 좋은 조건으로 들어온 청혼서.

“축하드립니다, 황녀 전하.”

곁에 있던 황비들도 입 맞춰 말했다. 황제는 어서 감사인사를 하라는 듯 그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아버님.”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폴로니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열일곱 살 생일을 맞은 순수한 소녀에게 어울리는 발그레한 표정이었다.

“비에른의 왕세자는 당당한 풍채에 무예도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풍채가 좋다는 말은 어지간한 귀족 남자들에 대해서 칭찬할 것이 없을 때 쓰는 말이었고, 무예 이야기는 비에른의 특산품이 무기라는 점을 고려하여 적당히 때려 맞춘 것이었다.

아폴로니아는 당연히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상황의 장점은 명확했다.

페트라의 암살 시도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약혼을 하는 순간 그녀의 안위는 비에른과의 외교와 직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녀는 의외의 방어막을 얻은 셈이다.

또한 황족 여인의 결혼은 거대한 무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급하게 결정된 약혼인 만큼 황제와 비에른의 국왕은 세부적인 조건에 대해 많은 협상이 남아 있을 것이며, 그러한 조건이 맞지 않아 긴 약혼이 깨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아폴로니아는 일단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최대한을 취하기로 했다.

“신부로서 필요한 소양을 더욱 갈고 닦아 제국의 영광을 위해 힘쓰도록 하라.”

황제는 한 송이 백합 같은 그녀의 미소를 보며 자못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부족함 없는 안배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다만 소녀에게 청이 하나 있습니다.”

아폴로니아는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고하라.”

“할아버지께서 제가 남겨 주신 리샨 지방에 가 보고 싶습니다. 이제 결혼을 하면 다시 가기 어려울 테니 그 전에 영주로서 최소한의 소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곳은 비록 너의 영지이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방이다.”

“할아버지께서 제게 남겨 주신 유일한 영지에 가 보지 않는다면 불효가 될까 두렵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신다면 비에른의 그분이 방문하기 전까지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황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파스칼 3세가 그녀에게 남겨 준 영지는 리샨 외에도 많았으나 모두 황제 자신이 빼앗아 가고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리샨에 대한 권한조차도 제한하려 한다면 딸의 재산에 눈이 먼 아버지라는 누명을 쓰게 될 것이 뻔했다. 물론 그것은 누명도 아니었지만.

그는 아까의 자비로운 미소에 애절함을 더한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 먼 곳까지 간다니 아비로서 마음이 찢어지나 어쩔 수 없구나. 황실 기사단에서 호위를 골라 데려가도록 하라.”

언제나 꼿꼿한 페트라와 달리 그의 연기는 해가 갈수록 깊이를 더해 가고 있었다. 어찌 됐든 결과를 얻어 낸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깊숙한 절을 하고 물러났다.

* * *

연회는 차질 없이 종료되었다.

아폴로니아는 그날 방문한 수많은 귀족 청년들과 춤을 추면서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고, 눈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 호의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아폴로니아가 같은 인사를 일흔 세 번쯤 듣고 그에 어울리는 대답―말없이 수줍게 눈을 내리깔며 미소 짓기―도 일흔세 번쯤 했을 무렵 그녀는 드디어 연회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물론 연회는 밤새 이어지겠지만 그녀는 밤에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앗, 실례. 황녀 전하.”

피곤한 발을 끌고 연회장 문을 벗어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치고 지나간 것은 사촌인 가레스 리페르 소공작이었다.

그는 아홉 살 이후로 황녀인 아폴로니아에게 적절한 예를 취한 적이 없었다. 패리스의 사촌이자 친우인 그는 마치 자신이 황자인 양 행동했다. 어머니를 닮아 큰 키에 짙은 머리색을 가진 그의 황금안이 술에 취해 흐물흐물 풀려 있었다.

“어디 가는 길인가요, 오라버니?”

연회가 파하려면 한참 남은 시간에 궁을 나서는 것은 가레스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들이 서 있는 복도에도 아직 수많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오가고 있었다.

“잠시 바람을 쐬고 오려 한다. 듣자 하니 약혼이 결정되었다면서?”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리며 아폴로니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가레스 리페르는 어린 시절부터 황궁을 드나들며 그녀와 자주 보던 사이였으나 아폴로니아를 보는 그의 시선에서는 페트라나 황제와는 또 다른 기분 나쁜 느낌이 있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워졌는데 말이지. 이걸 다른 왕국에 보내야 하다니…….”

그는 손을 뻗어 아폴로니아의 얼굴 가까이에 가져가며 말했다. 마치 그녀를 사냥감이나 애완동물 보듯 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것은 아폴로니아뿐 아니라 모든 젊은 여인을 바라볼 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비에른에 가는 것은 오라버니의 물건이 아닌데, 술이 과하긴 과하셨나 봅니다.”

아폴로니아는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의 손길을 피하고 황제궁을 빠져나왔다. 한참 후 고개를 돌리자 그가 누군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황궁 뒤편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징그러운…….”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시드와의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별궁으로 향했다. 잠깐……. 겨우 별궁 쪽으로 몇 걸음을 뗀 그녀의 머릿속에 갑작스럽게 어떤 생각이 스쳤다. 조금 전에 가레스를 부축하던 사람의 뒷모습이 조금 익숙했다.

작은 체구에 옅은 갈색 머리, 술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조금 강압적이었던 가레스의 태도. 얼마 전 황제궁 앞에서 만났던 시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드리안 리스.

아폴로니아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발걸음을 돌렸다. 황녀의 성인식을 기념하며 열리는 연회.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지 않고 누군가를 황궁으로 끌어들이기 좋은 날. 또한 모두의 시선이 연회장에 쏠려 있는 날이기도 했다.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듯했지만 이것은 그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연회에 동행한 어린 시녀 한 명을 부축해 달라는 핑계로 데리고 나가는 것. 시드의 말에 따라 그의 동태를 살피던 몇몇 기사들도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향할 곳은 뻔했다.

아폴로니아가 빠른 걸음으로 사르비아 정원에 도착하자 그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중 작은 쪽은 어떻게든 그를 뿌리치려 했으나 별 효과가 없는 듯했다.

아폴로니아는 그들을 소리쳐 부를까 했다가 마음을 바꿨다. 정원이 그녀의 것도 아닌데 그들을 부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황녀 전하……?”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가레스의 어린 남동생인 니샤 리페르가 서 있었다.

“연회장에 계시지 않고 무엇 하십니까?”

니샤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는 잠시 바깥 공기를 쐬고 있는 듯했다.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아폴로니아에게 어떤 생각이 스쳤다.

“오늘 선물 받은 머리 장식을 잃어버려서 찾고 있었단다, 니샤. 아까 실수로 사르비아 정원 안쪽으로 떨어뜨려 버린 것 같은데 혹시 나 대신 저쪽으로 들어가서 찾는 걸 도와주지 않겠니?”

그녀는 가레스가 어렴풋이 보일 법한 위치를 가리키며 니샤에게 물었다. 어머니도 형도 닮지 않은, 아직 어리고 순수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전, 전하! 안에, 안에 사람이…… 사람이 있어요!”

잠시 후 니샤가 놀란 눈을 하고 다시 갔던 길을 돌아 나왔다.

“사람이라니? 저곳은 황실 사람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데 그게 무슨…….”

“정말이에요! 안에 사람이 있었어요! 도, 도둑이 아닐까요?”

아직 열한 살 정도의 앳된 얼굴을 가진 니샤는 겁에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최대한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정말이라면…… 황실에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걸까?”

니샤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그럼…… 패리스 황자님께 알려야…….”

아폴로니아가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니샤는 사르비아 정원에서 다시 연회장으로 달렸다. 그 뒤를 따라가자 곧 복도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패리스와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니샤가 눈에 들어왔다.

“황자 전하!”

가레스와 비슷한 체형이나 훨씬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진 청년이 몸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패리스 비아나스 페르디안. 사실상 제국의 차기 황제로 내정된 자.

아폴로니아와 비슷한 밝은 금발의 미소년인 그는 또래의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원래 옅은 갈색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나 어머니의 죽음 후로 그 색이 달라졌다. 황제는 아폴론의 상징이 나중에서야 드러난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었다. 실제로 그 특성이 나중에 발현되는 사람은 많았기에 모두 그 말을 믿었다.

“무슨 일이지, 니샤?”

패리스와 주변의 귀족들이 아이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폴로니아가 바라던 바였다.

“사르비아 정원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어요! 누군가가 정원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합니다.”

“진정하고 말하렴. 니샤, 네가 본 것은 한 사람이니? 모습이 어땠지?”

아폴로니아가 뒤따라와 부드럽게 아이를 달랬다.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인 것 같았어요, 전하.”

패리스의 얼굴이 난감하게 변했다. 그는 그 도둑이 가레스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이유도 눈감아 준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니샤가 ‘남녀’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한 이상 무엇이라 편들어 주기가 어려웠다. 선황이 엘레니아 황녀를 위해 만든 사르비아 정원에 아무 여인의 출입까지 허용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그 자신의 체면과도 직결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근위병과 함께 가 보도록 하지요.”

“다른 정원도 아니고 사르비아 정원에 도둑이라니요! 연회를 틈타 전하의 것에 손대 보려 하다니 혼을 내주어야 합니다.”

패리스의 마음도 모르고, 주변의 귀족들은 질세라 그를 위해 대신 분노해 주었다.

“도둑이라면 무엇 하러 정원에 가겠나. 분명 연회의 손님 중 한 명이 술에 취해 길을 잘못 든 것이겠지.”

패리스가 수습해 보려 했으나 손님들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허나 전하, 그 정원은 길을 모르는 자는 입구를 찾기도 어려운 곳입니다. 도둑은 아니더라도 어느 괘씸한 자가 사전에 계획한 일이 틀림없습니다.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은 근위병을 대동하고 황실 후원 쪽으로 향했고, 패리스와 니샤, 아폴로니아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앞선 근위병이 정원 입구에 도달했을 때, 과연 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다만 그 소리는 말보다는 비명에 가까웠다.

“소공작님, 제발…… 제발 놓아주세요!”

아직 앳된 여인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비명소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묻혔다.

“닥쳐라, 이년! 반항할 때마다 네년의 멍이 하나씩 늘어날 것이다.”

짜악-!

“악!”

남자의 말과 함께 강한 파열음, 그리고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근위병과 손님들은 물론 패리스조차도 인상이 찌푸려졌다.

친우이자 사촌인 가레스가 정원에 여인을 데려오는 것까지는, 그곳에서 비열하게나마 여인을 취하는 것까지는 눈감아 주었으나 거친 욕설과 폭행까지는 허락한 적이 없는 까닭이었다. 여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지금과 같은 시끄러운 상황이 싫어서였다.

“전하, 저희가 가서 붙잡아 오겠습니다.”

패리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내렸다.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오라.”

잠시 후, 근위병들의 손에 끌려 나온 것은 씩씩거리는 가레스 리페르와 뺨에 멍 자국과 눈물 자국이 낭자한 아드리안 리스였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옷도 조금 찢어져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니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놔! 놔라!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냐?”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그는 근위병을 물리치며 소리를 꽥꽥 질러 대더니 패리스의 굳은 얼굴을 보고 몸부림을 뚝 멈췄다.

“황, 황자 전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패리스의 주먹이 가레스의 얼굴에 꽂혔다.

퍽!

“크읍!”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패리스는 다른 사람들이 말릴 시간도 없이 가레스의 멱살을 잡아 그의 얼굴이 자신의 코앞까지 오도록 거칠게 끌어당겼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패리스가 가레스에게 준 신호는 명확했다.

‘모두 네놈 잘못이니 나에게 구정물 튀길 생각 마라.’

패리스는 사촌의 멱살을 쥐고 몇 차례 흔들더니 그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감히 내 정원에서 여인을 겁탈하려 해?”

가레스는 눈을 몇 번 꿈뻑거리더니 드디어 상황을 파악한 듯 패리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잘못했습니다, 전하.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은 조금씩 더 몰려오고 있었다. 보다 못한 손님 중 몇 명이 패리스를 달래기 시작했다.

“전하, 소공작의 실수입니다. 이 모습을 폐하나 공작 부인께서 보시기 전에 돌려보내시지요.”

“저 여인은 어차피 소공작의 시녀입니다, 전하. 문제를 키우는 것은 저 여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폴로니아는 패리스가 못 이기는 척 그 말을 들을 것을 알고 있었다. 패리스는 가레스보다 특별히 더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가레스가 모든 일을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면, 패리스는 자신의 체면을 조금 더 생각하는 정도였다.

즉, 자신이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않는 정의로운 황자님이라는 점을 모두에게 확인시켜 줄 수만 있다면 여인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황제를 상대할 때와 같다. 어차피 결말이 정해져 있다면, 취할 수 있는 것을 취해야 했다.

“오라버니, 일단 가레스 오라버니를 돌려보내시지요.”

그녀가 말하자 구경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리스도 표정이 조금 풀린 듯했다. 성인식의 주인공이자 여동생의 부탁을 들어준다 하여 트집을 잡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아이는 제가 데리고 치료할까 합니다. 이 상태로 고모님을 모시고 돌아갈 수는 없겠지요.”

그녀는 옷이 찢긴 채 바닥에 쓰러져 덜덜 떨고 있는 아드리안에게 겉옷을 덮어 주며 말했다. 패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가레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앞으로 나의 정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 니아의 성인식을 더럽힌 죄는 추후에 묻겠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모여 있던 손님들은 성인식을 망치고도 어린 시녀를 감싼 황녀의 따뜻한 마음씨와, 황궁에서 무례를 범한 소공작에게 가르침을 준 황자의 위엄을 찬양하며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전하, 이분은…….”

남아 있던 하녀들이 난감한 듯 아폴로니아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폴로니아는 성치 않은 몸으로 기절해 늘어진 아드리안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눈앞에 있기에 구했으나, 그녀의 앞날에 비슷한 일이 다시 생기는 것을 막을 자신은 없었다.

“별궁으로 데려다 놓고 의사를 불러 줘.”

그녀는 한숨을 쉬며 지시했다. 리페르 공작가의 피해자는 어쨌든 그냥 두고 보기 어려웠다.

* * *

자정이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유리엘, 시드, 그리고 시드가 데려온 한 노인은 유리엘의 방에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지저분한 흰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노인은 마야가 가지고 온 식사를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중이었으나 유리엘과 시드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전하께 들으니 길이 좀 들었다던데 지금 보니 아닌 것도 같구나.”

“당신한테 길들 생각은 없는데.”

“말투도 전혀 나아진 게 없는데 전하께서는 대체 뭘 보고…….”

“당신한테 존대하라는 명령은 못 들어서 말이지.”

“명령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누구 명령을 말하는 거냐고 묻는 거야? 아폴로니아 알리스테어 페르디안이라고 하던데.”

유리엘의 도발에 전장의 악귀 시드 바이안이 잠시 의자에서 일어나 뒷목을 잡고 휘청였다.

“네놈이 감히 입에 담을 이름인 줄 아느냐!”

유리엘은 시드의 반응을 즐기며 벽에 여유롭게 기대앉았다.

“꺼억-.”

시드가 뭔가 더 말하려던 순간 주술사는 마야가 가장 잘 만드는 바삭하고 달콤한 사과파이 한 판을 해치우고 시원하게 트림을 했다.

“누가 보면 마치 먹기 위해 들어온 줄 알겠군. 며칠 굶기라도 한 거요?”

시드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사실은 그도 연회를 놓쳐 배가 고팠고, 사과파이를 한 조각쯤 먹고 싶었던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야 해서 말이오.”

애써 하객으로 위장하였으나 그는 사실 거렁뱅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주술에 대해서는 남다른 지식을 자랑했으나 그것을 가지고 돈을 버는 데는 재주도 없고 성실함도 부족했기에 조잡한 마술이나 보여 주며 구걸하던 사람을, 몇 년 전 아폴로니아가 알아보고 돈과 먹을 것을 지원해 오고 있었다.

시드는 혀를 쯧쯧 차며 남은 닭고기 요리도 그에게 밀어주었다.

“많이 드시오. 그래야 주술도 잘 풀겠지.”

시드가 노인과 유리엘을 상대로 투덜대는 사이에 마야가 방문을 두 번 두드렸다.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세 사람은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드는 한 번에 튕겨져 일어났고, 노인은 기름 묻은 제 손을 빌려 입은 시드의 비싼 옷에 닦으면서 느릿느릿, 그리고 유리엘은 가만히 앉아 있으려다가 시드의 손에 목덜미를 잡혀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세 사람의 티격태격은 아폴로니아가 들어선 순간 멈추었다.

“내가 늦었네. 사정이 좀 있어서.”

세 사람은 모두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 전하…….”

시드가 이윽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꺼냈다. 사실 그것은 말이라고 하기에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세상에, 제가 이때까지 산 보람이 있군요. 전하의 성인식을 보게 되다니…….”

시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젊으신 양반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잘 어울리십니다, 전하.”

바로 전까지 게걸스레 파이와 고기를 해치우던 주술사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멋들어지게 절을 했다.

“별것이 다 보람이네. 오래 기다리더니 친해진 것 같군.”

아폴로니아는 민망한 듯 핀잔을 주면서 유리엘 쪽으로 돌아섰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문신은 좀 어때?”

그는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폴로니아가 평소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평소 그 앞에서 손목까지 가려지는 어두운 계열의 보수적인 차림만을 해 왔던 그녀는 이 날만큼은 어깨까지 드러나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창백하던 뺨에도 장미 같은 홍조가 있었고, 밝은 금발은 반만 틀어 올리고 은빛 월계수 모양의 관을 썼다.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폴론의 후손이라더니, 눈앞의 그녀는 분명 청초하고 성스러웠다.

“문신은 좀 어때?”

그녀가 두 번째로 질문을 한 뒤에야 유리엘은 천천히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뒷목을 보여 주었다. 문신은 더 붉어져 있었다.

“고통스럽지는 않나?”

주술사가 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심해지긴 합니다.”

“원래 그런 것이네. 그러다가 시간이 더 지나면 고통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원래 주인을 찾아가거나 목숨을 끊으려 하기도 하지.”

주술사는 천천히 방 한가운데로 걸어가서 섰다.

“그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아폴로니아가 유리엘 가까이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남 이후 결계 없이 마주한 것이 처음이었다. 시드가 곁에 있어서인지 아폴로니아는 서슴없이 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준비는 됐어?”

아폴로니아가 유리엘에게 물었다. 유리엘은 그날따라 유난히 집중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아폴로니아가 가까이 다가와서 서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다시 말했다.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넌 거절할 권리 같은 건 없어. 문신이 지워진 후에도 죽는 것이 더 좋다면 다시 얘기해.”

그녀는 유리엘이 주술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판단했는지 단도직입적인 설명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거절할 생각 없…… 없습니다.”

유리엘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잘 생각했어.”

아폴로니아는 그 정도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이 충성을 거부하면 그녀는 여전히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그 사실을 가지고 굳이 그를 협박하지는 않았다.

주술사는 그들과 한 번씩 눈을 맞추더니 가지고 온 지팡이로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분명 지팡이에는 무엇도 묻어 있지 않았으나 그가 그리는 곡선을 따라 바닥에서는 희미한 빛으로 문양이 그려지고 있었다.

잔뜩 집중한 주술사의 얼굴에서는 땀이 몇 방울 흘러나왔다. 네 사람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수많은 곡선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도형이 완성되자 그는 유리엘에게 손짓하여 그 안에 서도록 하고는 쉴 틈 없이 주문을 외우며 뒷목의 문신을 지팡이 끝으로 건드렸다.

“윽……!”

문신에서 새빨간 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자 유리엘이 낮은 비명을 뱉어 내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손을 문신으로 가져가려 하자 주술사의 지팡이가 손을 저지했다.

“열쇠가 필요합니다.”

주술사가 호흡을 고르며 아폴로니아에게 주문했다. 아폴로니아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던 시드에게서 단검을 건네받고는 조금씩 경련하는 유리엘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쓸었다.

“조금만 기다려.”

타는 듯한 고통을 참아 내는 와중에도, 유리엘은 그녀의 접촉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니, 오히려 몸의 감각이 더 예민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쓱- 아폴로니아는 유리엘의 옆에 서서 단검으로 손가락을 세게 그었다.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리베르템 아멜 셈페르. 그대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술사가 고대어로 이루어진 주문을 외우고 그 뜻을 설명했다. 아폴로니아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쉽게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리베르템 아멜 셈페르.”

주술사의 지시에 따라 주문을 외우며, 아폴로니아는 피가 흐르는 손을 유리엘의 목 뒤에 가져다 댔다. 그녀는 쉬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리베르템 아멜 셈페르.”

유리엘은 고통 속에서 떨었다. 온몸의 감각이 다 깨어나는 것 같았다.

“리베르템 아멜 셈페르.”

뒷목을 쓰는 아폴로니아의 손길이 더없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리베르템 아멜 셈페르.”

그녀의 주문에는 분명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묘하게도 그 감각은 그녀의 손을 타고 그의 피부로 전해졌다. 하지만…….

“리베르템 아멜 셈페르.”

그는 자유와 동시에, 살면서 단 한 번도 알아본 적 없는 어떤 다른 종류의 속박이 시작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리베르템 아멜 셈페르.”

그 새로운 주인은.

“리베르템 아멜 셈페르.”

아폴로니아일 터였다.

* * *

“허억!”

아드리안 리스는 낯선 방에서 깨어났다. 얼마 전부터 그녀는 악몽만을 꾸었다. 그리고 악몽에는 항상 그가 등장했다.

‘꽤나 귀여운 얼굴이로구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뺨이며 귀를 쓰다듬는 불쾌한 손길.

‘겁에 질린 표정도 귀엽구나.’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는 끈적한 시선.

‘앙탈을 부린다 한들 네가 어딜 가겠느냐.’

그녀의 몸부림을 비웃으며 기어이 허리를 끌어안고 귓가에, 뺨에 입을 맞추던 입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 네년 얼굴에 멍이 하나씩 늘어날 것이다!’

사정없이 내리꽂히던 주먹까지.

“윽…… 으흑.”

아드리안은 손으로 입을 막고 눈물을 쏟았다. 몇 시간 전 겪었던 일이 하나씩 떠올랐다.

어떻게든 황궁에서 그를 피하려 했으나 결국 소공작은 그녀에게 부축을 명령하여 화원에 들어갔다. 황녀의 경고로 그녀는 며칠 동안 날마다 아젤리아 꽃의 해독제를 복용했었다. 또한 최대한 핑계를 대서 황궁에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소공작을 멈추지는 못했다. 하필 그날은 연회가 있었기에 아드리안이 빠질 수가 없었고, 황궁에 도착한 다음에는 정원 근처 근위병도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주먹을 뻗었다. 아드리안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저항하다 보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결국 그녀는 가레스의 주먹에 맞아 반쯤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불쾌한 손은 한동안 그녀의 몸에 머물렀다.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일어났느냐?”

기품 있는 목소리가 방 안에 울리자 아드리안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부어오른 눈 때문에 깨끗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긴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황녀 전하.”

아드리안은 곧 나머지 기억들을 떠올렸다.

쓰러진 자신에게 덮어졌던 고급스러운 옷감. 걱정스러운 듯 그녀에게 닿았던 손길. 민신창이가 된 그녀를 내려다보던 수많은 눈길 중에 단 하나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던 얼굴.

“황녀 전하…….”

“아직 충분히 쉬지 않은 것 같구나.”

“여기는 어디입니까?”

“별궁이다. 내가 머무르는 곳이지.”

“소공작은…….”

“돌려보냈다. 처벌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근신해야 할 거야.”

“그분의 잘못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드리안은 스스로 무엇을 묻고 있는지 확신이 없으면서도 물었다. 그러자 아폴로니아가 눈썹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정식으로 문제 삼은 것이 없으니 죄명도 따로 없다. 그러나 오라버니의 정원에 침입해 소란을 피웠다는 것이 문제였겠지.”

당연한 대답에 아드리안이 다시 눈물을 흘렸다.

“정원을 더럽혔다는 거군요. 저는…….”

“너는 그의 시녀다. 너의 가족이 나서면 모를까, 때린 정도로 그의 죄를 물을 사람은 황실에는 없을 것이다.”

아폴로니아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가레스와 황실에 대한 분노가 묻어 있었다.

“저는 돌아가야 합니까?”

아드리안의 질문에 아폴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꽤나 솔직한 질문이구나.”

“돌아가기 싫습니다.”

아폴로니아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아폴로니아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황제궁의 앞뜰에서 터진 뺨을 붙잡은 채 마주쳤던 그녀는 아드리안이 알았던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그녀는 대책 없는 동정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부류도, 위기에 빠진 상대의 처지를 그저 이용하려는 부류도, 어려움에 처한 자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부류도 아니었다.

무심한 듯 보여도 분명히 아드리안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던 그녀는, 아버지를 제외하면 누구도 아드리안에게 보여 준 적 없는 친절을 베풀었다. 아드리안의 얼굴을 알아보는 눈썰미며 가레스의 수작을 꿰고 있는 현명함은 또 어떤가. 아드리안은 자신이 그 동안 아폴로니아에 대해 아무런 소문을 들은 적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아드리안은 다시 그녀를 만났다.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아드리안이 살아서 아폴로니아의 궁에 옮겨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녀의 계획이다. 죽을 것처럼 괴로웠던 바로 그 순간에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어 준 것이다.

아드리안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아폴로니아의 옆에 남고 싶었다.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조용했다. 돌아가야만 하느냐는 아드리안의 질문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듯했다. 그 조용함에서, 아드리안은 차가워 보이는 아폴로니아의 마음속 틈새를 발견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쓰러지듯 빠져나와 아폴로니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곁에 남게 해 주세요.”

“아드리안.”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겠습니다. 어떤 일이든 하겠습니다.”

아폴로니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전 주인에게는 몸도 허락하지 않았으면서, 나를 위해서는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겠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아드리안은 고개를 들어 아폴로니아의 시선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신했다. 그녀는 소문처럼 유약하고 착하기만 한 황녀가 아니었다. 공작 부인만큼이나 냉철한 분이다.

“내 곁에 있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라면 그때는 네가 후회할 수도 있단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갔다.

“전하 곁에서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뭐?”

“어떤 주인을 위해서는 물 한 잔 바치기도 싫고, 어떤 주인을 위해서는 열 번도 죽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전하. 소공작께서 한순간이라도 절 사람으로 보았다면 그분을 대하는 제 태도도 달랐겠지요.”

아드리안은 무릎을 꿇은 채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드리안.”

아폴로니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 안의 감정은 종잡기가 어려웠다.

“너의 출신에 대해 말해 보렴. 네 가족은 어디 있지?”

“저는 미천한 자작가의 수양딸입니다. 고아였던 저를 양부께서 거두어 주셨지요. 아버지께서는 영지의 수입이 변변치 않아 다른 직업을 가지셔야 했기에 저희는 사실상 평민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아드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가정사를 읊었다.

“어느 날 제가 공작 부인의 눈에 띄었고 아버님은 그것이 좋은 기회라 판단하여 저를 시녀로 들여보냈습니다. 제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게 된 후에는 이미 때가 늦어 다시 마음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가족들 때문에 목숨을 끊을 수 없다고 했지. 네 아버지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지?”

“사람을 살리는 고귀한 일이라 하여 의술을 배우셨습니다. 황궁의 페드로 리스가 제 아버지입니다.”

아드리안이 여기까지 말하자, 아폴로니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는 무언가에 집중한 듯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전하……?”

“페드로 리스…… 들어본 것도 같아서. 남들은 은퇴도 하는 나이에 황궁의로 들어와 쉬지 않고 일한다던 그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가족의 병환으로 그나마 있던 가산마저 써 버리는 바람에…….”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하군. 고모님께서는 원래 함부로 대하기 좋은 집안의 아이들을 시녀로 데려다 쓰시니까. 가레스가 무슨 짓을 해도 넘어갈 수 있는…….”

아폴로니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언가 생각난 듯, 그녀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번졌다.

“아드리안.”

“네, 전하.”

“소공작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니?”

“예?”

아폴로니아의 입에서 끔찍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아드리안은 황당했다.

“아시다시피 인간으로 보지도 않으시지요.”

“그렇구나.”

아폴로니아는 부드럽게 아드리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전하…….”

아드리안의 얼굴이 환해졌다. 부어오른 얼굴의 고통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기뻤다.

“방금 너를 공작가에서 데려올 방법이 떠올랐다.”

* * *

페트라 리페르는 모처럼 산뜻한 기분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윤기 넘치는 검은 머리는 오랜만에 느슨하게 내려뜨린 상태였다. 그녀는 오랜만에 느른한 오전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의 휴식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눈엣가시 같던 아폴로니아의 행보가 결정되었다는 점이었다. 아직 약혼식은 치르지 않았다고 하나 황제와 국왕의 합의가 있는 이상 그녀는 영영 황위와는 멀어지는 것이었다.

페트라는 친조카인 아폴로니아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워하지도 않았다. 선황의 손녀라는 이유로 친딸을 혐오하는 가이우스와는 전혀 다른 깔끔한 감정이었다. 아니, 사실 감정이랄 것도 없었다.

페트라가, 리페르 가문의 모든 여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였다. 가문의 영광. 여인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였다. 아버지를, 아들을, 남자 형제를 출세시키는 것.

가문의 모든 여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배웠다. 형제를 위해 일하고, 형제에게 가장 이득을 줄 수 있는 결혼 상대를 고르고, 모든 것을 바쳐 가문에 기여하라고.

정치부터 사업까지 모든 면에서 어떤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는 페트라의 마음속에도 어린 시절부터 익혔던 가풍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어마어마한 일들을 해냈지만 결국 모든 것은 가문을 위한 것, 그리고 가이우스를 위한 것이었다.

리페르 가문의 여인들이 대대로 그래 왔듯, 페트라는 오라비인 가이우스의 성공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타고난 수완으로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통해 가이우스에게 유능한 측근들을 붙여 주고, 끝없이 그에게 투자했다.

결국 페트라는 선대의 어떤 조상들보다도 성공했다. 황녀인 엘레니아와 가이우스를 만나게 했으니까. 변방의 백작이었던 그를 다름 아닌 부마로, 그리고 나중에는 황제로 만들었으니까.

덕분에 리페르 가문은 공작위를 얻었다. 이보다 더한 성공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 성공을 지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패리스의 순조로운 황위 계승이었다. 가이우스가 어린 시절부터 자기 손으로 키웠던 그의 사랑하는 아들. 공식적으로는 황족이나 실제로는 아닌, 리페르 가문과 절대로 척을 지지 않을 사람.

아폴로니아는 달랐다. 엘레니아 황녀의 딸인 그녀는 황실의 피가 짙을 뿐 아니라 선황이 직접 지정한 후계자였으니까. 강한 핏줄을 타고나 어린 시절을 선황 슬하에서만 보낸 그녀는 절대로 리페르의 여인이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폴로니아는 걸리적거렸다. 말 몇 마디로 누를 수 있었던 과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타고난 신체 조건이 알려진다면 다른 이야기였다. 날이 갈수록 자신의 어머니를 닮아 가는 외모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황실에서 사라져야 했다. 암살은 운 나쁘게 실패했지만, 약혼 또한 이를 실행시키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 와중에 그 모자란 황녀는 멀고 험한 리샨 지방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 저의가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약혼식 전까지 먼 곳에 있겠다고 하니 그것 또한 잘된 일이었다. 변수가 줄어들 테니까.

그녀가 휴식을 즐기는 두 번째 이유는 아폴로니아에게 보냈다가 실종됐던 사피로의 수하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살아남는다면 화근이 될까 싶어 찜찜하던 차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물론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부리는 주술사 한 명으로부터 이미 보고를 들었으니까.

“녀석의 표식에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자살이겠지요.”

그리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몇 시간 전 수도를 지나는 딘강 하류에 은발 남성의 시체가 떠내려 왔다. 퉁퉁 불어 얼굴이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시간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녀석이 분명했다.

“하아…… 좋구나.”

그녀는 햇빛을 받으며 기지개를 켰다. 한 달 가까운 기간 동안 아폴로니아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을 했으니 이제 휴식을 취할 참이었다.

아들인 가레스가 황궁에서 사고를 쳐 얻어맞고 근신 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이는 작은 일이었다. 술에 자주 취하는 그는 싸움에 휘말리기가 예사였고, 이번 일로 패리스나 황제가 특별히 화를 낸 것도 아니었다. 패리스는 암암리에 사람을 보내 자신이 때린 가레스의 상처를 확인하기도 했다.

가레스의 일을 떠올리자 페트라는 갑자기 아드리안 리스가 떠올랐다. 꽤나 예쁘고 총명해 보여 가레스의 몸종으로 삼고자 데려왔던 아이다. 그러나 나이도 어린 주제에 고집이 셌던 그 아이는 감히 주인을 거부하다가 별궁에 앓아누운 꼴이 되었다.

페트라는 이 문제로 가레스를 훈계할 생각이었다.

아랫사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죄. 그것은 즉 아랫사람에게 충분한 공포를 심어 주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대인관계에서 예의와 신의는 물론 중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는 경우의 이야기였다. 하찮은 황궁의의 딸, 주인을 무턱대로 거부하는 종은 오직 공포와 강한 원칙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페트라의 생각이었다.

아드리안은 복귀하는 대로 쓴맛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는 전처럼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자기 위치를 알게 할 것이다.

혹여라도 황궁에서의 일을 빌미로 가레스에게서 겁탈을 당할 뻔했느니 하는 헛소리를 주장할지 모르나 그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두 젊은이의 치정 정도로 알려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아드리안은 더더욱 공작가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황실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둔 그녀는 마음대로 가레스를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누구도 리페르 가문을 마음대로 벗어날 수는 없다.

휴식하려던 원래의 예정을 잊고 조금씩 앞으로의 계획을 짜는 페트라의 방에, 갑작스레 남편인 루이스 리페르 공작이 들이닥쳤다.

“부인,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공작은 작지 않은 키를 가졌으나 유난히 흰 피부에 처진 눈매 등 어딘가 유약해 보이는 남자였다.

“오늘은 다 미루자고 하지 않았나요?”

페트라는 언짢은 듯 손을 내저었다.

남편은 무척이나 온화한 성정을 지녔기에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정치적인 판단까지 모두 페트라에게 맡기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부인의 성을 따르고 공작가의 가주가 된 후에도 그는 집안 대소사의 결정권을 부인에게 주었다.

그는 처가가 어마어마한 권력을 손에 넣기 전에도 언제나 부인에게 존대하며 그녀의 모든 선택을 따랐고, 그것이 그와 페트라가 잘 맞는 이유였다. 페트라가 섬기는 것은 그녀가 나고 자란 가문이지 남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온화하던 남편은 물러나지 않았다.

“급한 일입니다. 이것 좀 보세요.”

그의 손에는 작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페트라는 그를 받아 열어보았다. 무척 고급스러운 종이가 한 장 나왔다.

“이게 무슨……?”

페트라는 종이 위의 글자를 읽으며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그 짧은 메시지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죠?”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페트라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며 다시 종이의 메시지를 읽었다.

[친애하는 리페르 공작 각하, 아폴론의 축복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저의 하나뿐인 여식인 아드리안은 소공작과 마음을 주고받아 본의 아니게 중인 앞에서 그 정을 보였습니다. 두 젊은이의 뜻이 그렇다면 하루빨리 이를 이루어 주는 것이 도리인 줄로 아는 바, 정식으로 소공작과 아드리안의 혼인을 청합니다.

친애하는 공작 각하와 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저와 제 딸의 큰 복입니다.

존경을 담아, 페드로 리스.]

페트라는 몇 차례나 심호흡을 했다.

페드로 리스 이 미천한 놈은 혹시 약을 잘못 만들어 놓고 그걸 자기 입으로 다 털어 넣었나? 그게 아니라면 귀족이기를 포기하다시피 한 일개 황궁의가 어디 감히 공작가에 청혼을 한다는 것인가?

딸이 가레스의 눈에 한 번 들었다고 그걸 미끼로 공작 부인이 되어 보겠다니. 페트라는 헛웃음을 몇 번이나 웃었다. 고집이 세다 했더니 불여우가 아닌가?

“이걸 들고 온 놈을 흠씬 두들겨 패고 쫓아내야겠습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부인, 그것은 좋은 생각 같지 않습니다.”

“뭐라고 했죠?”

평소 페트라의 말에 토를 달지 않던 공작의 말에 페트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흘겼다. 리페르 공작은 한숨을 푹 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황녀 전하의 성인식 이후로 가레스와 아드리안에 대한 소문이 파다합니다. 대부분은 소공작이 어린 소녀를 겁탈하려다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리페르 소공작이 평민이나 다름없는 계집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부인, 젊은 청년이 색을 좋아한다 하여 흠 잡히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모든 사실이 적당히 덮여 양쪽이 쉬쉬하고 넘어갈 때의 일입니다. 황궁에서 중인의 목도하에 일어난 일은 다르지요.”

공작은 매서운 페트라의 시선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그녀를 설득했다.

“앞길이 막혀 버린 여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혼인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게다가?”

“아드리안은 다시 공작가로 들어올 예정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가레스는 하급이기는 해도 귀족인 처녀를 겁탈하고 그 청혼은 거절하면서 다시 그 여인을 억지로 집에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페트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페드로 리스가 딸을 내놓으라고 떼를 쓸 것은 예상했었고, 겁을 좀 주면 포기를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몇 대 때리고 겁탈을 했다 해서 혹시 가레스의 처벌을 주장할까 생각도 해 보았으나 역시 너무나 쉽게 떨어뜨릴 수 있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일이라고 주장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그런 험한 일을 당해 놓고 ‘마음을 주고받았다’면서 청혼이라? 잘 생각해 보니 청혼을 거절하고 아드리안을 다시 데려오자니 모양이 너무나도 변태적이었다.

심지어, 모두가 잊고 있었지만 아드리안은 귀족이었다. 가레스는 모두의 앞에서 귀족 처녀를 겁탈한 것이다. 그것은 상징성이 있는 일이었다.

만약 정말로 청혼을 받은 상태로 다시 그녀를 끌고 온다면? 청혼을 아무리 시끄럽게 거절해도 사교계의 인사들은 두 사람이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말 것이다. 그럼 가레스의 진짜 혼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그녀가 어떤 문제로 남편의 의견을 묻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갑작스런 사건이었다.

“청혼을 한쪽에서 철회하도록 설득해야지요. 필요하다면 금전적인 지원을 하면서라도.”

온순한 것과 미련한 것은 다르기에, 공작은 가장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그렇군요.”

페트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드리안은…….”

“아드리안은.”

나른한 휴식을 집어치우고 예민한 정신을 회복한 페트라가 남편의 말을 끊고 말했다.

“어디로 보내든 상관없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가레스와 단둘이 만날 일이 없도록 해야겠지요.”

공작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부부는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궁에 머물던 아드리안 리스에게 해고 통지가, 황궁의 페드로 리스에게 금화 50개가 든 주머니가 각각 전달된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페드로 리스를 불러 앉혀 편지 내용을 읊어 준 아폴로니아가 예상한 것과 정확히 같았다.

아드리안은 그렇게 아폴로니아의 시녀가 되었다. 물론 황궁의 페드로 리스 또한 이 일로 황녀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 * *

아폴로니아의 성인식 이후로 보름이 지나자 유리엘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의 흔적을 깔끔하게 없애고 새로운 신분을 줄 수 있다는 아폴로니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와 시드는 성인식 전후로 유리엘과 비슷한 체구의 시체를 구해 딘강에 띄웠다.

“시체에 문신이 없는 건 문제 되지 않을까?”

아폴로니아가 걱정했지만 주술사는 원래 죽으면 표식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간단한 설명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입에 초콜릿 퍼지 케이크를 가득 물고 말했기 때문에 소리가 묻히기는 했지만 그 의미인 것은 확실했다.

아폴로니아는 당일 유리엘에게 그녀의 사람이 되겠는지 다시 묻지 않았다. 대신 가끔 그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었고, 전과 같이 푸짐한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를 내주었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아폴로니아는 그의 작은 방에서 유리엘을 마주했다. 그녀는 이제 결계를 치지 않고 그의 방에 들어와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자.”

그녀는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작은 보랏빛 꽃이었다. 그녀가 내민 꽃을 보고 유리엘은 어색하게 물었다.

“이걸 왜…….”

“그냥. 예쁘잖아.”

은빛 머리칼의 아름다운 소년은 피식 웃었다. 그것이 진심인지 억지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유리엘 비체.”

그의 편해진 표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아폴로니아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를 리샨 지방에 데려가 줘.”

“…….”

“호위가 필요해. 실력이 아주 좋고 나를 해치지 않을.”

“제 전적이 그 일에 어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존대하라는 아폴로니아의 말을 예상했던 것보다 잘 따르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을 호위로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런 거 하나하나로 사람을 걸러 낼 수는 없지. 리페르와 척을 진 귀한 인재인데.”

어딘가 섬뜩한 말이지만 아폴로니아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과거의 관계로 미래의 이익을 해치고 싶어 하지 않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거절하면 어쩌시렵니까?”

“약속대로 죽여 줄 테니 독약과 단검 중에 골라.”

여전히 손에 들려 있는 보랏빛 꽃이 무색할 것 같은 살벌한 답이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기왕 죽어야 한다면 나를 위해 죽어 줘.”

유리엘이 침묵하자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당장 나를 평생의 주군으로 선택하라는 게 아니야. 다만 작전이 조금 필요해서 그래.”

“뭡니까?”

“아직 몰라도 돼. 성공하면 시드에게 아는 검법을 다 전수해 주라고 할게. 그 값을 위해 일한다고 쳐.”

“실패하면?”

“싫어도 시드를 스승으로 섬겨야 해. 끔찍한 벌이지.”

반쯤 농담이었으나 유리엘은 웃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폴로니아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폴로니아는 새삼 눈앞의 소년이 얼마나 눈에 띄는 미모를 가졌는지 다시 깨달았다. 깊은 바다 같은 눈동자의 안쪽에는 약간의 청록색도 섞여 있었고, 그 오묘함 때문인지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황실의 붉은 눈동자며 화려한 금발이 다 무슨 의미인가. 정작 남신은 여기 서 있는 고아 소년인데.

“퍽이나 저를 살려 두고 싶으신가 보군요.”

그의 목소리가 아폴로니아의 생각을 깨뜨렸다.

“왜 그렇게 생각해?”

“어린아이 달래듯 삶의 목적을 하나씩 쥐여 주고 있으니까요. 검법도, 음식도, 바깥으로 데려가 준다는 그 제안도, 그 꽃도.”

그의 시선이 아폴로니아의 눈에서 보랏빛 꽃으로 움직였다.

“눈앞에 희망을 가져와 보여 주는 거니까요.”

자연스럽게 보이려 노력했으나 그는 다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한 것은 정확히 핵심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의아함을 비치지 않으며 오히려 묻기로 했다. 이리저리 비틀어 말하는 것은 페트라나 황제에게만 해도 충분했다.

“그래서, 희망을 보았어?”

오색이 찬란한 바다 같은 눈동자는 다시 그녀를 빤히 보았다. 이번에는 약간의 미소를 띤 것도 같았으나 아마 착각일 것이다.

그는 느릿느릿 침대에서 긴 몸을 일으켜 아폴로니아의 앞에 섰다.

“리페르의 핏줄이라지만, 분명히 다르군요.”

그는 천천히 몸을 기울여 부드럽게 그녀 손에 있던 꽃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커진 아폴로니아의 눈동자를 보며 조심스럽게 한쪽 손끝을 잡았다. 얼굴에 그의 숨결이 살짝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유리엘은 손을 잡은 채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승낙.”

“……진심이야?”

“일단은 리샨까지만입니다.”

더없이 붉은 그의 입술이 아폴로니아의 손등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거 잘됐네.”

아폴로니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분명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마치 수줍어하는 것처럼. 기묘하게도 그런 모습은 유리엘이 그녀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나를 위해 살아.”

그녀가 결계를 사이에 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왕 죽어야 한다면 나를 위해 죽어 줘.”

조금 전 그녀는 다시 그렇게 말했었다. 유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

그를 구속하고는 곧이어 자유를 준 사람.

그가 살 만한 이유, 또 죽을 만한 이유. 평생 찾아지지 않아 그를 무료하게 만들었던 그것이 어쩌면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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