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은발의 암살자 (3/34)

Chapter 2. 은발의 암살자

아폴로니아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암살자는 3일이 다 지나기도 전, 연회 바로 다음 날 그녀를 찾아왔다.

자정.

황비들의 환영연이 지나자, 활기를 띠었던 수도의 밤에는 다시 적막함이 내렸다. 고요함뿐인 황궁 앞 거리. 어둠 속에서 한 실루엣이 움직이고 있었다.

유리엘 비체, 그는 음지의 검이었다.

그는 리페르 가문에 소속되어 평생 암살자와 간자, 도둑을 비롯한 어둠의 심부름꾼들을 양성해 온 사피로가 빈민가를 뒤져 찾아낸 가장 소중한 원석이자 그가 키운 일생의 역작이었다.

사피로가 양성한 살수들은 ‘사피로의 늑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들은 모두가 고아였고, 가장 혹독한 훈련과 고문으로 깎이고 단련된 자들이었다. 사피로가 늙어서 전과 같이 활발하게 일하기 어려워지자 그들의 숫자는 줄었지만, 한때 ‘사피로의 늑대’는 음지의 모든 칼잡이들을 떨게 만들 정도로 위명을 떨쳤다. 그러나 그들 중 유리엘 같은 자는 없었다.

그는 열세 살에 이미 완성되었다. 그 이후 4년 동안 받았던 모든 임무를 빠르고 완벽하게 수행했으며, 어떤 흔적도 흘린 적이 없었다.

잠입의 대가이자 검술의 천재. 그는 임무와 관련해서는 사피로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자신이 키워 낸 인재들을 자신만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두기 위한 사피로의 방식이었다.

“이건 내 일이 아니잖아.”

유리엘은 전날 지시사항이 적인 문서를 건네받고 얼굴을 찌푸렸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자 보기 드문 찬란한 은발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사피로가 그를 통해 하는 일은 주로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간간이 리페르 공작가를 위해 적진에 잠입해 필요한 기밀을 빼 오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두 번째 일은 공작가 몰래 다른 암살 집단, 즉 사피로의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것.

공작가는 사피로 외에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자들을 여럿 고용하고 있었고, 한때 그들 사이에는 상호 견제가 치열했었다. 그러나 유리엘이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사피로와 대적할 만한 집단은 대부분 죽거나 흩어졌다.

한때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암살자들이었던 ‘발란의 유령’의 은신처에 단신으로 침투해 수십 명의 암살자들을 불구로 만들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열다섯 살이었다.

유리엘 덕분에 늙은 사피로는 계속해서 공작가의 중책을 맡을 수 있었다. 그의 스승인 사피로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공작 부인께서는 특별히 잠입에 능한 자를 요청하셨다. 황궁까지 들키지 않고 잠입할 수 있는 적임자가 바로 네놈 아니겠느냐.”

“이런 일은 하기 싫다고 했을 텐데. 당신이 키워 낸 다른 녀석들은 다 죽었나?”

유리엘이 다소 거칠게 쏘아붙이자 사피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실제로 최근 몇 달 사이에 그는 페트라가 내린 임무에 몇 차례 실패했고, 그 때문에 살수 몇을 잃었다. 이번은 어쩌면 그의 마지막 기회였다. 사피로는 보기 드물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내가 지시한 것은 모두 너의 임무다. 그 사실을 잊었다면 생각나게 만들어 주지.”

사피로가 으르렁댔다. 어린 나이에 사피로에게 납치되다시피 했던 유리엘은 그 말 뒤에 따라올 고통을 잘 알았다. 자신이 그의 명령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도.

어린 그를 데려와서 사피로가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뒷목에 검날과 비슷한 모양의 붉은 문신을 새기는 일이었다. 주인에게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주술이자 표식. 검술로 늙은 사피로를 능가해도 그 문신이 있는 이상 유리엘은 그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다녀오지.”

“살고 싶다면 성공하고 돌아와야 할 거다.”

“‘당신이’ 살고 싶다면 내 성공을 바라야 하는 거겠지.”

그는 사피로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한 마디 빈정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유리엘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얼굴과 차림은 검은 로브 한 장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움직임은 신기할 정도로 우아했다.

그는 미끄러지듯 걸었다. 중심도 호흡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그 속도는 웬만한 사람이 뛰는 것보다 빨랐다. 달빛을 피해 건물의 그늘에서 그늘로 움직였고, 발소리는 일반인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세했다. 인간이 아닌 그림자에 가까웠다.

건물들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그림자는 순식간에 황궁 담을 넘어 별궁 쪽으로 향했다. 사전에 들은 바와 같이 경비병들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꼭대기 층, 오른쪽에서 세 번째 방……’

목표물의 위치는 오래 찾을 필요가 없었다. 별궁 내에서는 가장 큰 방이었으니까. 그는 날듯이 궁벽을 기어올랐다. 맨손으로 오르기는 거의 불가능한 벽임에도 짐승 같은 움직임으로 벽돌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이용해 빠르게 꼭대기 층에 도달했다.

모든 과정에서 그는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숨결은 평온했고, 동작은 여전히 우아하고 매끄러웠다.

목표한 방 앞에 도착하고 창문을 밀자 예상대로 쉽게 열렸다. 유리엘은 기척을 숨기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전에 파악한 대로 창문 쪽에는 커다란 침대가 하나 있었다. 그는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목표물을 향해 다가가며 허리의 검을 건드렸다.

스르릉-

장검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뽑혔고, 유난히 밝은 달빛에 검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검을 그대로 든 채, 목표물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그는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어린 여자?’

암살의 대상을 확인한 순간 냉정했던 그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고급스러운 침대에 옆으로 누워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은 열여섯에서 열일곱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규칙적으로 숨 쉬는 소녀의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베개 위로 흩어진 채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사피로 이 개자식.

유리엘이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언제나처럼 단순하게 목표물의 위치만을 전달받고 왔으나, 막상 확인해 보니 이건 마음에 들지 않는 임무 정도가 아니었다.

유리엘에게 죽음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쟁 집단의 암살자를 제거하는 임무에 특화되었던 그는 무방비한 소녀를 상대로 검을 휘둘러 본 일은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깊이 잠들어 있는 소녀를 다시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해서 그 페트라 리페르에게 밉보인 건지 모르겠지만…….”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 연민이 묻어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서로 운이 나빴다.”

유리엘은 다시 한 번 숨을 내뱉고는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나는 훨씬 고통스럽게 죽을 테니까. 안 됐지만 네 목숨이 내 것보다 중한 것은 아니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 안에 잠시 비쳤던 연민은 이내 사라졌다.

“명복을 빌어.”

손에 든 검날이 달빛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고 소녀에게 떨어졌다.

쉬익- 터엉!

그러나 소녀의 몸을 덮은 이불에 닿기 직전, 검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딪혀 튕겨져 나왔다.

“뭐…….”

유리엘이 눈썹을 찌푸렸다. 자신의 검날이 의도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경험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검을 들어 허공에 그었다.

쉬익- 텅!

검은 이번에도 소녀의 몸에 닿지 못했다. 유리엘은 비로소 이번 임무에서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용없어.”

그 순간 침대에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정적을 뚫고 그의 귓가에 꽂혔다. 귀를 의심하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까지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소녀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녀와 시선이 마주침과 동시에, 그를 둘러싼 공기가 웅웅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유리엘은 두어 걸음 물러섰으나 등 뒤에서 무언가가 그의 움직임을 막고 있는 듯, 자유롭게 이동하기 어려웠다.

“명복이 필요한 건 그쪽이야.”

소녀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함정이다.

그의 동공이 확장됨과 동시에 몸이 반응했다. 그는 순식간에 다시 창문 쪽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그의 몸은 다시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혔다.

“결계라는 거야.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네 검으로 베어지는 게 아니야.”

소녀는 이제 몸을 반쯤 일으켜 앉아 있었다. 그녀의 밝은 금발과 루비 같은 눈동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눈동자에는 오묘한 황금빛도 섞여 있었다.

‘황족……?’

그녀는 그저 조용히 유리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당황스러운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잠깐이었지만 그 시선은 유리엘을 압도했다. 소녀의 눈빛에는 적을 함정에 빠뜨렸다는 우월감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에 대한 원망도 없었다.

양 끝이 내려간 눈썹이며 살짝 깨문 입술은 오히려 약간의 연민을 담고 있는 듯했다. 그 자신이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내가 포기하기를 기다리고 있구나.’

그녀는 마치 자신이 유리엘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듯 행동하고 있었다. 임무 수행 중 냉정함을 잃은 적 없었던 그의 마음속에 갑작스런 동요가 일었다.

유리엘은 순간 그 오만함을 꺾어 주고 싶었다. 무기 하나 들지 않고 자신의 검 아래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를 내려다보는 듯한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유롭게 그를 동정하는 그녀의 눈빛을 바꾸어 놓아야 했다.

‘검기는, 그 주인에 따라서는 모든 것을 벤다.’

그는 증오스러운 사피로의 목소리를 억지로 떠올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계라고 다를 것도 없을 것이다. 결계를 벨 수 없다는 소녀의 말은 믿지 않았다. 유리엘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던 것은 모두 위기의 상황에서였다.

그가 검 손잡이를 고쳐 잡자 기다란 검신이 은빛 검기로 번뜩였다. 그는 그대로 검을 들어 올려 다시 한 번 흔들림 없이 소녀를 겨누었다.

웅웅거리는 진동이 더 강하게 느껴졌으나 그의 검기 또한 여느 때보다 강하고 날카로웠다. 그는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검을 그대로 내려 그었다. 조금 전과 비교될 수 없는 속도와 힘이었다.

쉬이이익- 검과 결계가 닿는 순간, 유리엘은 결계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반동과 충격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 균열 사이로 검날을 밀어 넣었다.

챙-

소리보다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결계는 깨졌다. 유리엘이 침대 위로 반쯤 몸을 던짐과 동시에 은빛으로 빛나는 그의 검이 슥 하고 공기를 갈라 소녀의 이마 끝에서 멈추었다.

짧지만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한 뼘도 안 되는 검날만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소녀의 동공이 커지는 것이 보이고 살짝 흐트러진 숨결이 느껴졌다.

“너…….”

무언가 말하려는 그녀의 입술은 분명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긴장을 확인하자 로브 아래로 드러난 유리엘의 한쪽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들렸다.

한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침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사내가 들이닥쳤다.

휘익-퍽!

소녀와 대치하던 유리엘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사내가 던진 단검이 그의 왼쪽 어깨로 날아가 박혔다.

* * *

시드는 순식간에 뛰어 들어와 로브 속의 남자를 끌어내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단검이 어깨에 박힌 그는 강하게 반항하지는 않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후에 단죄하여 주십시오.”

아폴로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전의 장면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저자가 분명 결계를…….’

그녀의 눈은 잘못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로브에 덮인 장신의 남자는 분명 결계를 가르고 그녀의 눈앞에서 검을 멈추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분명 그녀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어깨에 단검이 꽂힌 채 시드에게 포박되고 있었다.

“의자를 가져다줘. 직접 신문하겠다.”

아폴로니아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시드에게 손짓했다. 시드가 포박을 마치고 무릎 꿇린 남자 앞으로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았다.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그 앞으로 걸어가 앉았다.

“벗겨 봐.”

시드는 겨누고 있던 검으로 자객의 로브를 젖혀 머리에서 벗겨 냈다. 달빛을 받아 그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아폴로니아의 눈이 잠시 커졌다. 시드 또한 놀란 듯 어깨를 움찔했다. 미동도 하지 않고 꿇어앉은 이는 아폴로니아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극히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은발은 한 올 한 올 달빛을 녹여 만든 것처럼 찬란했고, 반듯하고 선명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턱선은 더없이 완벽한 조각상 같았다. 살짝 찌푸려진 눈썹은 붓으로 그린 듯 섬세했고 유난히 붉은 그의 입술과 조화롭게 어울렸다.

세상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품은, 천사와 같은 생김새였다. 다만 심해를 담은 짙은 푸른색의 두 눈에는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딱히 아폴로니아나 시드를 향한 것이 아닌, 그저 타고난 날카로움이었다.

“믿을 수 없군요. 이런 어린 녀석이…….”

시드가 감탄하듯 내뱉었다.

“사피로의 늑대가 맞을까?”

“확실합니다. 하루 사이에 황실로 사람을 보낼 수 있는 것은 그쪽뿐이니까요. 몇 남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이런 실력자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사피로의 늑대.”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조용하던 방 안에 깔렸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녀의 말에 소년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이내 소년의 눈은 다시 아폴로니아의 발등에 고정되었고, 붉은 입술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죽이러 온 거야?”

소년은 계속해서 침묵했다. 아폴로니아는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씁쓸하게 웃었다.

“고모님이 핏줄에 정을 두지 않는다는 건 알았는데 말이야.”

그 말에 소년의 미간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아폴로니아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

그가 고개를 가로젓자 아폴로니아는 손짓으로 시드에게 검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손을 뻗어 소년의 턱을 잡아 올렸다.

“잘 봐.”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천사를 닮은 소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입은 열릴 듯 열리지 않았다.

“몰랐던 거지, 네가 죽여야 하는 사람이 어린 여자라는 거. 페트라의 조카, 가이우스 리페르의 딸이라는 것도.”

아폴로니아는 엄지와 검지로 그의 턱을 잡은 상태로 말을 이었다. 깊은 바다 같은 눈동자에는 그 말을 인정하듯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였던 거야. 하지만…….”

아폴로니아는 일단 그의 턱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도 기회가 있었는데 왜 나를 죽이지 않았을까? 네 말대로, 내 목숨이 네 것보다 귀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의 답을 기다렸으나 유리엘이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자신이 그녀를 왜 죽이지 않았는지 유리엘 자신도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결계를 깨뜨리던 순간 그는 그녀를 흐트러뜨리고 싶다는 오기로 가득 찼다. 그저 그 붉은 눈동자가 놀라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냉정하게 목숨을 끝내지 못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유리엘은 생각보다 그 사실이 후회되지 않았다.

“이유가 뭐든, 많이 안 내켰나 보지.”

황녀는 무언가 더 말하고자 하는 듯했지만 그 옆의 중년 기사가 경고하듯 끼어들었다.

“전하, 곧 날이 밝습니다. 이자를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셔야 합니다.”

“일단 3일은 가두어 둬. 자객의 생사가 분명하지 않으면 고모님은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피로를 죽일 거야. 어깨에 상처가 있으니 그사이에는 진통제를 줘.”

황녀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3일이 지나면 죽…….”

그녀는 말을 다 마치지 않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머리색과 같은 밝은 금빛 속눈썹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죽여.”

유리엘은 그녀를 도와 문장을 끝내 주었다. 황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뭐?”

“말했잖아. 임무에 실패하면 어차피 죽을 거라고. 원한다면 3일은 잘 견뎌 줄 테니 그 후에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죽여.”

유리엘은 진심이었다. 사피로는 다른 자객들을 많이 잃었고, 이대로 간다면 그는 어차피 원하지 않는 임무만 배당받다가 언젠가는 처리되었을 것이다. 사피로의 늑대들은 모두 비슷한 최후를 맞았다.

사피로가 그에게 허용했던 인생에는 별 즐거움이 없었기에 그는 삶에 대해 대단한 미련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굳이 죽을 이유도 없었기에 버텨 왔을 뿐. 그의 삶은 항상 치열했으나 한편으로는 권태로웠다.

죽을 계획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삶보다 못할 것 같지도 않다. 그것이 유리엘의 생각이었다.

“주인에 대한 애정은 없어 보이는군.”

“사피로는 내 주인이 아니야. 리페르 공작가도 마찬가지다.”

아쉬울 것이 없어진 그는 황녀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옆에 있던 기사가 눈을 부릅떴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재수가 없어서 이번 생에는 못 벗어나는 것일 뿐이다.”

사실이었다. 오히려 사피로 그 개자식에게 죽기 전 엿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은 약간의 보람이었다.

그의 대답을 들은 황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유리엘의 턱을 잡아 올렸다. 이번에는 그 손길이 부드럽지 않았다.

“중부의 악당 사피로는 어린아이를 납치해 혹독한 고문으로 전사를 만들어 낸다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지.”

“전하…….”

중년의 기사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렀으나 그녀는 유리엘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그 정신도, 영혼도, 눈빛도 꺾여서 사피로에게 지배당한다고 말이야. 늑대들이 그 수장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듯이, 사피로가 키워 낸 자들은 죽어도 주인을 배신할 수 없다고 하셨어.”

“……잘 아네.”

유리엘은 웃으며 멀쩡한 쪽 팔로 로브를 살짝 끌어 내렸다. 그의 어깨에 있는 수십 개의 지렁이 같은 흉터가 드러났다. 황녀와 기사가 심호흡을 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야. 가끔은…….”

그가 잠시 단어를 고르느라 말을 멈추었다. 아폴로니아가 그의 말을 대신 끝내 주었다.

“가끔은……완전히 길이 안 드는 자가 있구나.”

“…….”

“……너는 전부 견뎠나 보구나.”

그녀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반대편 어깨의 고통이 조금씩 심해지고 있었지만 유리엘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몇 살이지?”

유리엘은 자신을 관찰하듯 내려다보는 소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녀의 눈 속에 자리 잡았던 연민은 사라지고 다른 무언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열일곱.”

그녀는 유리엘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고 얼굴을 가까이로 가져갔다. 어깨의 고통 때문에 그의 몸이 움찔 하고 움직였다. 황녀의 입가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그들은 한동안 탐색하듯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긴 침묵의 시간이 지났지만 둘 중 누구도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음을 바꿨다, 시드.”

이윽고 황녀가 나직하게 명령했다.

“고모님이 버린 새끼 늑대를 우리가 키워야겠다.”

* * *

유리엘 비체는 포박되어 별궁의 작은 방에 갇힌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평소와 다른 임무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페트라 리페르의 친조카를, 황녀를 암살하라는 임무였다니.

그는 다시 눈을 감고 황녀와의 대담을 떠올렸다.

‘나를 죽이러 온 거야?’

그녀의 질문은 담담한 듯했으나 묘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여왕처럼 앉아 그를 날카롭게 내려다보던 소녀는 그의 눈동자의 미세한 흔들림 하나까지도 꿰뚫어 보았다. 그러고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판단을 해냈다.

그리고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려던 소녀는 어느 순간 흔들렸다.

‘몇 살이지?’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면서, 유리엘은 그녀의 미세한 표정 하나까지도 눈에 담았다. 지배자 같은 태도에 창백한 얼굴, 불꽃 같은 색을 품고도 얼음을 더 닮은 눈동자. 그럼에도 언뜻 엿보이는 동정심.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 표정의 의미를 읽어 낸 유리엘은 눈을 의심했다.

슬럼가에서 태어나 사피로의 늑대가 되기까지, 그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은 많았다. 그들의 얼굴은 다양했지만 유리엘은 그 속의 감정은 몇 가지로 한정되었다.

“저리 가! 이 더러운!”

혐오.

“여긴 우리 구역이야! 구걸을 하려거든 저쪽으로 꺼져!”

경계.

“이 개새끼가 빵을 훔쳐! 퉤!”

분노.

“아름답구나. 나를 따라오지 않으련? 맛있는 것을 매일 먹을 수 있단다.”

열 살이 넘어 눈에 띄는 외모를 갖게 된 그를 본 몇몇 귀족들에게서 느껴진 번들거리는 탐욕.

“너의 주인은 오직 나, 사피로뿐이다. 네 신세는 개와 같다.”

열한 살의 그를 납치해 다짜고짜 낙인을 새기고 채찍질하던 사피로의 눈에 비친 무시, 심지어는 약간의 희열.

그러나 유리엘을 포박하고 미소 지은 소녀의 얼굴은, 그 반응은 그가 보았던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고모님이 버린 새끼 늑대를 우리가 키워야겠다.”

그는 알았다. 찰나였지만, 그녀의 얼굴을 스친 것은 희망이었다. 일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기에, 아폴로니아와 시드는 바쁘게 움직였다.

페트라의 자객이 임무에 실패하고 흔적도 없이 실종된다면 그녀는 분명 아폴로니아를 의심할 것이다. 아폴로니아는 아직 마정석의 결계도, 스스로의 준비성도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최대한 개연성 있게 대처하기로 했다. 현장을 재빨리 정리하고, 암살자를 만난 열여섯 살 소녀와 그 호위 기사가 보일 법한 반응을 보이기로 한 것이었다.

“꺄아아아아악!”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 소녀의 비명 소리가 별궁을 가득 채웠다.

“치한…… 치한이다!”

먼저 달려온 것은 가까이에 있던 호위 기사 시드 바이안과 시녀 마야였다. 곧이어 대여섯 명의 사용인도 맨발로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아버지 같은 호위 기사 시드의 품에 안겨 흐느끼던 황녀는 두서없이 조금 전의 일을 설명했다. 그녀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밤중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 있던 중, 창문 쪽에서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인가 하고 다가가 보니 웬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창문을 잡아 열고 있었다.

사내는 곧 창문을 열고 들어와 이미 다리가 풀려 버린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한 발 늦어 비명은 이미 그녀의 입을 빠져나간 후였다.

“내가 아직 잠들지 않았기에 천만다행이었다. 필시 어느 미친놈이 연회에서 전하를 보고 마음에 품었던 게지.”

덜덜 떠는 아폴로니아를 토닥이던 시드가 이를 으득 갈며 말했다. 다른 사용인들도 그의 분노에 공감하며 신속하게 경비병을 찾았다.

진실을 아는 세 사람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사내가 자객일 거라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는 패리스 황자가 명실공히 후계자로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아폴로니아를 암살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결론에는 아폴로니아와 시드의 교묘한 단어 선택이 미친 영향도 컸다.

순식간에 황녀가 웬 사내에게 겁탈당할 뻔했다는 소문이 황궁에 퍼졌다. 사내가 어찌나 날래게 도망쳤는지 경비병에게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궁을 빠져나갔다는 소문도.

* * *

리페르 공작저의 분위기는 아침부터 심상치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공작 부인의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른 새벽에 보고를 하나 받더니 몇 시간째 사용인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페트라의 화풀이 방식은 다혈질인 황제나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일쑤인 아들 가레스와 매우 달랐다. 오래 갈고 닦은 우아한 귀족의 태도가 몸에 뱄기 때문에 웬만큼 화가 나더라도 살짝 찌푸린 미간을 제외하면 표정이나 말투에서는 언짢음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우아한 몸짓과 미소 사이사이에 사용인들을 잔인하게 괴롭힐 뿐이었다.

“날씨가 좋구나.”

그녀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놓여 있던 묵직한 은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다음 순간 보지도 않고 손을 한 번 휙 내저었다.

따아악- 페트라가 무심한 듯 던진 잔이 시녀의 이마에 맞았다. 그녀는 페트라가 직접 데려온 어느 하급 귀족이었다.

외모가 아름다워 소공작인 가레스 리페르의 시녀로 들일 예정이었으나, 몇 번 내키지 않는단 티를 낸 후로 그녀는 페트라의 화풀이 전용 표적 역할로 전락한 상태였다.

“아악!”

반짝이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피가 흐르는 이마를 감싸고 주저앉았으나, 페트라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옆의 사용인들도 놀란 티를 낼 수 없었다. 동요하면 공작 부인이 더욱 잔인해진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소녀는 이마를 감싸고 덜덜 떨며 혼자 일어났다.

“너.”

페트라가 소녀를 가리켰다.

“오늘은 네가 내 머리를 손질해라.”

“네?”

소녀는 놀라 되물었으나 곧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몇 달 전 공작 부인의 지시를 바로 따르지 않았다가 불구가 될 때까지 얻어맞은 동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다가가 페트라의 머리를 빗질하기 시작했다.

“아……!”

소녀의 손길은 부드러웠음에도, 손이 머리에 닿자마자 페트라의 입에서 불쾌하다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짜악!

그리고 소녀의 눈에는 별이 보였다.

짜아악- 짜악-

날아오는 페트라의 손에 몇 번이고 쓰러지며, 소녀는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다시 일어날 뿐이었다.

“마님!”

여덟 번 정도 뺨을 맞았을 때, 시녀 한 명이 급히 들이닥쳤다.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공작 부인의 침실에 급히 들이닥칠 수 있는 사람은 시녀장인 칼린 부인뿐이었다.

“즉시 입궁하라는 폐하의 전갈입니다.”

“……그래.”

페트라의 짧은 대답에 피투성이가 된 소녀는 혹시 매질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헛된 것이었다.

“너도 함께 채비해라.”

잔인한 공작 부인은, 한 번 점찍은 먹잇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 * *

“소식을 들었느냐?”

서재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던 황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페트라에게 물었다. 그녀는 막 입궁해서 황제를 독대한 참이었다.

“들었습니다.”

“들었겠지. 황녀가 겁탈을 당할 뻔했다는 소문이 얼마나 빠르게 퍼지겠느냐.”

황제가 옆에 있던 책상을 쾅 내리쳤다.

“폐하.”

“별궁의 하인 놈들이 소문을 부풀리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꽉 다문 이와 찌푸린 미간. 그의 옆얼굴은 분명 짜증이 나 있었지만 딸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황제는 빙글 몸을 돌려 동생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페트라, 나는 너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너도 예상하고 저지른 일이겠지.”

“…….”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증거 없이 처리하면, 그래서 누구도 항의하지 않으면 내가 화조차 내지 않고 넘어갈 거라 생각했느냐.”

“폐하, 그 아이는…….”

“겁탈을 당할 뻔했다는 소문이 겁탈을 당했다는 소문으로 번지기 쉽다는 것을 모르느냐? 내가 정체 모를 놈한테 딸을 빼앗긴 아버지가 되어도 상관이 없느냐?”

황제에게 딸의 안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딸의 미래 가치와 자신의 체면은 중요했다. 페트라는 미간만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살수와 치한을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그 어린애가 내게 위협이 될 거라고 믿느냐?”

페트라는 조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폴로니아는 역시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혈통이나 의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야밤에 잠입한 사내가 암살자일 가능성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 회복력은…….”

“그게 그렇게 걱정이냐. 그것이 나의 권위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 수십 번의 전투에도 살아남고 승리한 내 능력이, 그깟 계집의 회복력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느냐?”

황제의 손이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제 말의 갈기가 검은 것처럼, 핏줄로 우연히 얻은 잔재주가 무어 대단하겠습니까.”

페트라는 조심스레 황제를 달래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련하고 단순합니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도, 기이한 현상은 기이하다는 이유로 기적이라 불리니까요. 황녀 또한 그렇게 보일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황제의 찡그렸던 눈썹이 조금 펴졌다.

“네 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페트라.”

황제는 감정과 이성을 구분할 줄 아는 자였다. 그는 화가 난 와중에도 동생의 판단을 인정했다.

“그러나 일주일에 나을 상처가 사흘 만에 낫는다 한들, 사람이라면 다 갖춘 회복력이 조금 더 강하다 한들 누가 그것을 알아보겠느냐?”

“허나 폐하, 순간이지만 제 눈에 띄었습니다. 흔적까지 사라지는 데 사흘이 채 안 걸릴 것입니다. 그것은 우매한 백성의 눈에 기적으로 보이기 충분합니다.”

황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동생을 응시했다. 당찬 계집 같으니. 이 상황이 되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동생의 냉철하고 조심스러운 판단이, 그 고집이 과거에 몇 번이나 자신을 구했었나. 몇 번이나 자신에게 재물과 영예를 가져다주었나. 몇 번이나 운명을 뒤집었나.

황제는 페트라를 벌하기보다는 설득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아폴로니아가 과연 얼마나 큰 위협인지 너도 있는 곳에서 확인을 한번 해 보자꾸나.”

페트라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제는 보지 못한 척, 책상 옆의 줄을 당겨 시종을 불렀다.

“황녀를 데려와라.”

시종이 대답과 함께 사라지자 황제는 다시 분노가 남아 있는 눈을 동생에게 고정시켰다.

“한 번이다, 페트라. 내가 오늘 그 아이가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이후에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나는 너를 보호하지 않겠다.”

두 쌍의 꼭 닮은 황금안이 물러서지 않고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이윽고 페트라는 마지못해 고개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확인하고도 그리 생각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아폴로니아는 창백한 안색으로 시드의 팔에 몸을 지탱하며 들어왔다.

“아버님과 고모님을 뵙습니다.”

가느다란 소녀는 곧 쓰러질 듯 떨며 몸을 숙였다. 전날 받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낯빛이 좋지 않구나.”

황제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간밤의 일을 너에게 직접 듣기 위해 불렀단다. 그놈의 얼굴은 보았느냐?”

황제는 떠보듯 물었고, 페트라도 몸을 기울이고 황녀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아폴로니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을 더듬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못 보았어요. 아무것도 못 보았어요. 아버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자가 다시 올까 봐 너무 무서워요…….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이제 누가 저를 데려가려 할까요?”

그녀의 떨리는 진홍색 눈동자는 선황과 같이 강렬하기보다는 슬프고 청초했다. 곱게 자란 열여섯 살의 소녀답게 아폴로니아는 어느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을 품고 있음이 분명했고, 그 꿈이 흔들리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별궁 사용인들의 입단속이나 잘 시키고 있거라.”

“으흑…….”

황제는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는 딸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며 곁눈으로 페트라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아폴로니아를 바라볼 뿐이었으나, 그녀를 잘 아는 황제는 그 눈에서 무시, 심지어는 약간의 혐오까지 읽어 냈다.

눈치 없고 미련해서 상황을 읽어 내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페트라가 본능적으로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녀도 어쩔 수 없이 황녀를 한심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다쳤다던 팔은 좀 어떠하냐?”

“팔은…… 깊이 베이지 않아 괜찮습니다. 많이 나아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님.”

아폴로니아는 팔을 뒤로 숨기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여 다오.”

황제의 목소리는 얼핏 들으면 다정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들어 있었다. 그의 말은 분명한 명령이었다.

“보기…… 보기 흉합니다, 아버님.”

“폐하의 말을 못 들으셨습니까?”

그녀가 머뭇거리자 페트라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그녀를 밀어붙였다. 아폴로니아는 어쩔 수 없이 숨겼던 팔을 앞으로 내밀고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심려를 끼쳐드리기 싫어서 황궁의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아폴로니아의 드러난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붕대에는 분명 핏빛이 보였다. 황제는 성큼 다가가 그녀를 우악스럽게 잡고 빠르게 붕대를 풀었다. 아폴로니아는 조금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황제, 페트라, 시드의 시선이 조금씩 드러나는 아폴로니아의 하얀 왼팔에 쏠렸다.

“아니!”

“아야……!”

아폴로니아가 신음을 내뱉음과 동시에, 황제와 페트라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그녀의 고운 팔에는 분명 날카로운 것에 베인 선명한 상처가 있었다. 심지어 그 상처는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은 듯 덧나서 지저분한 상태였다.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흡…… 아픕니다, 아버님.”

붕대가 풀리고 황제의 거친 손이 닿아서인지,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는 새빨간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보기 흉합니다.”

1분이나 지났을까, 계속 피가 흐르는 상처를 견디다 못한 아폴로니아가 붕대로 팔을 가렸다. 황제는 말리지 않고 놔두었다.

“폐하, 황녀 전하께서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시드가 아폴로니아의 지혈을 도우며 걱정스레 고하자, 황제는 힘주어 잡았던 팔을 놓고 그들을 보내 주었다.

“황녀를 데리고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는 어제와 같은 일이 없게 하라.”

둘만 남은 서재 안에서, 그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린 페트라를 다시 마주했다.

* * *

“아흐…….”

황제궁 밖으로 나오던 아폴로니아는 다시 한 번 신음을 뱉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전하. 방에 가서 씻기만 하면 금방 나을 것입니다.”

아폴로니아는 깊게 숨을 내뱉으며 새로 생긴, 아니 새로 만든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연회 날 생겼던 상처는 그날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아물었고, 반나절이 더 지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몇 시간 전에 화병을 하나 깨뜨려 그 조각으로 같은 자리를 한 번 더 그었다.

혹여라도 황제가 의원을 부르거나 그녀를 오래 잡아 둘까 봐 상처가 아무는 것을 방해하는 독초까지 발라 두었다. 머리가 돌아 버릴 정도로 쓰라렸지만 효과는 있었다. 고통 덕분에 황제와 페트라 앞에서 현실감 있는 연기를 할 수도 있었다.

이제 당분간 그녀는 의심에서 벗어날 것이다. 연기가 그녀의 생각만큼 설득력 있었다면, 자객을 그녀가 잡아 두고 있다는 사실도 비밀로 남을 것이다.

“독하시군요, 전하.”

황제궁의 복도를 지나며, 시드가 작은 소리로 내뱉었다. 그는 팔에 다시 상처를 내는 것까지는 억지로 동의했지만 독초를 바르는 것은 반대했었다. 고통이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내가 독한 것이 실망스러워?”

“천만에요.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선황을 점점 닮아 가십니다.”

무뚝뚝한 대답이었으나 아폴로니아는 그 말에 아픈 팔도 잊고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는 대부분 사람들의 평가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으나 시드의 칭찬만은 소중했다. 할아버지가 독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조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황제궁을 벗어나던 두 사람의 눈에, 궁 앞에서 홀로 대기하던 시녀 한 명이 들어왔다. 아폴로니아가 전에도 본 적이 있는 페트라의 어린 시녀였다.

평소 같으면 보지도 않고 지나쳤겠지만 고개를 푹 숙인 시녀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아폴로니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너, 고모님의 시녀로구나.”

“황, 황녀 전하…….”

“고개를 좀 들어 보겠니?”

반짝이는 머릿결을 가진 시녀는 아폴로니아의 말에도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전하의 말이 들리지 않는가? 고개를 들어 보게.”

시드가 독촉하자 그녀는 마지못해 천천히 바닥에서 시선을 뗐다. 아폴로니아는 시녀의 태도가 어딘가 조금 전의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보기 흉합니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연기한 모습을 닮았다.

시녀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들자 아폴로니아는 그녀의 위축된 태도를 단번에 이해했다. 아폴로니아의 또래로 보이지만 키는 한 뼘 정도 작은 그녀는, 얼굴이 온통 멍으로 뒤덮여 있었고, 입가에는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아폴로니아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왠지 이 시녀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사촌 가레스 리페르의 최근 술주정에 등장했던 여자다. 사실상 노예와 비슷한 시녀이면서, 페트라 리페르의 명령을 받았으면서 그 아들의 구애를 받아 주지 않았다는 그녀.

“그년이 어디까지 버티나 지켜볼 거야.”

성년이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촌은 한 달 전에 귀족 청년들을 모아 놓고 헛소리를 했었다. 그리고 이틀 전 연회에서는 뭐라고 했더라?

“그깟 것이 피해도 별수 있나. 며칠 내로 굴복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고.”

아폴로니아는 잠시 그냥 지나칠까 고민했다. 지금은 남을 도울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이 방법만 쓰면 백발백중이거든.”

가레스의 토 나오는 한 마디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방법’이 뭔지 아폴로니아는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여인은 지금 멍투성이의 얼굴로 아폴로니아 앞에 있었다. 내버려 두면 왠지 자신이 페트라와 똑같은 사람이 돼 버릴 것 같았다.

아폴로니아는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스스로의 마음에 냉소를 지었다. 지난 몇 년간 이미 황제와 페트라가 죽인 사람이 몇인데? 그건 막지도 못했으면서 이것 하나 막는다고 책임을 다했다 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앞의 이 소녀를 돕고 싶었다. 어쩌면 그저 혐오스러운 리페르 가문에 대적하는 자를 응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시드, 잠시 자리를 비켜 줘.”

시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지자 시녀와 아폴로니아는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황제궁 문 앞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풀숲과 나무에 가려져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자유로웠다.

시녀는 처음으로 독대하는 황녀 앞에서 불안한 듯 몸을 비틀었다. 둘만 남았음에도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너는 왜 다른 시녀들과 함께 궁 안에서 기다리지 않는 것이지?”

아폴로니아는 답을 짐작하면서도 물었다.

“공작 부인께서 제 얼굴을 보이지 말라고 하셔서…….”

시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안면도 없고 자신을 알지도 못할 황녀의 관심이 달갑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시녀는 불편해하는 것도 잊고 고개를 들었다. 황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정확하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 리스.”

“네? 그걸 어떻게…….”

시녀는 당황한 듯 에메랄드빛 눈을 크게 떴다. 아폴로니아는 하필 매력적인 녹안을 들여다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레스에게도 눈은 달려 있었다. 거울 속의 못생긴 제 모습을 만족스럽게 들여다볼 때만 빼면 정상적인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으니 이 아이가 탐나는 것은 당연했다.

“잘 잊히는 얼굴이 아니라서 말이지. 너는 고모님을 따라 입궁한 것이 두 번째일 것이다.”

“맞습니다.”

“가레스와 잠자리를 갖는 것을 피하고 싶니?”

아폴로니아는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요점을 짚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아드리안은 떨리는 동공으로 아폴로니아를 마주 보았다.

지금 이 말이 곱게 자란 열여섯 살 황녀 입에서 나온 것이 맞나? 자신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눈앞의 황녀가 진지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가족들이 아니었으면 목숨을 끊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드리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레스의 여성 편력과 좋지 않은 손버릇은 사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여러 순진한 하급 귀족 여식들에게 접근해 그들 모두와 동시에 교제를 하는가 하면 눈에 띄는 젊은 시녀들에게도 쉬지 않고 추파를 던졌다. 누군가가 그에게 넘어가 몸이라도 허락하면 그는 태도가 돌변하여 그녀와 헤어졌다.

거기서 끝이면 좋으련만. 그는 그 여인과 있었던 온갖 은밀한 일들을, 그들이 주고받았던 정담 한마디 한마디부터 여인의 신체 특징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주변의 모든 남자들에게 떠벌려서 그녀에게 수치를 안겼다.

그에게 여인이란 단지 정복의 대상이자 사냥감이었다.

아드리안도 아마 몇 차례나 위기를 겪었을 것이다. 반응을 보아하니 성희롱이나 추행은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대화를 계속했다.

“혹시 황궁 뒤편의 사르비아 화원에 가 본 적 있어?”

주제와 전혀 무관한 황녀의 질문에 아드리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은 그저 장난을 치려는 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쓸데없는 잡담을 걸며 상대적인 여유를 즐기는 것은 몇몇 귀족들의 악취미였다. 그러나 황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원래 할아버님께서 만든 화원이었고, 지금은 패리스 오라버니가 관리하고 있지. 그러나 그곳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외부인이 한 명 있다.”

선황이 딸 엘레니아 황녀를 위해 만든 사르비아 화원은 황궁 내에서도 화려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선혈처럼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은 오직 아름다움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으로, 보는 이의 넋을 빼 놓기에 충분했다.

다만 그곳은 황궁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황실 사용인조차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비밀스러운 장소였으며 외부에는 절대로 개방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출입할 수 있는 외부인이라니? 아드리안은 황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라버니의 둘도 없는 친우 가레스 리페르 소공작이지. 다만 그는 혼자서는 그곳에 가지 않아.”

“설마…….”

“그래, 화원에 딸린 작은 별채에서는 간혹 한 번씩 여인의 물건이나 속옷이 발견되고는 하지. 그것들은 가레스의 모험담에 꼭 다시 등장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은 아드리안을 두고, 아폴로니아는 말을 이었다.

“가레스가 떠벌리는 그만의 유혹이라는 건 항상 같아. 그는 조만간 네가 황궁에 동행해 본 경험이 있다는 핑계로 너와 함께 입궁할 거야. 그리고 너를 사르비아 화원으로 데려가서…….”

“그런 것으로 저를 유혹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드리안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글쎄, 그는 그것을 ‘유혹’이라 부르더라만, 그 정도로 모든 여자들의 마음을 얻기야 하겠어.”

아폴로니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르비아 정원에서만큼은 여인의 몸을 얻는 데 실패한 적이 없다고 하더군.”

“그것은…… 그 말은…….”

새파랗게 질린 아드리안을 보며, 아폴로니아는 건조하게 잘라 말했다.

“황궁에서 소란스럽게 여인을 겁탈할 수는 없으니 정원에 아젤리아 꽃을 심었다고 하더구나.”

아젤리아, 그것은 미약의 성분이었다. 아드리안은 충격에 몸을 살짝 휘청였다.

“아젤리아 꽃이 강한 미약이라고는 하나 해독제는 구하기 어렵지 않아. 미리 마셔 두면 죽음보다 싫은 상황은 피하겠지.”

아무리 망나니 같은 가레스여도, 황궁 내에서 거부하는 여인을 완력으로 겁탈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비명이라도 지르면 누군가에게는 발견될 테니까. 멍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드리안을 두고 아폴로니아는 돌아섰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시드가 그녀와 합류했다.

“간자라도 심으십니까?”

그는 농담처럼 물었다.

“간자 노릇은 무슨. 맞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죽는 것보다 가레스가 더 싫다면 그래도 도움이 된 것 아닌가.”

“공작 부인이 소공작 앞으로 떠밀고 있는 여인이랍니다. 한 번 빠져나간다고 끝나지 않을 텐데요.”

“이 기간만 잘 넘기면 안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레스의 흥미는 쉽게 오고 빠르게 가니까.”

“그럼, 도움은 여기서 끝입니까?”

그는 시험하듯 물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가레스가 다음에 입궁하면 그의 동태를 살펴 줘.”

시드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황의 죽음 후로 그는 사실상 아폴로니아의 아버지이고 스승이었다. 물론 그는 이미 성년에 가까운 아폴로니아를 주인으로 섬기고 존중했다. 그녀의 치밀함과 냉철함을 신뢰하고 따랐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아낀 것은 아폴로니아의 선함이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위험해지지 않는 선을 지키면서도 타인을 최대한 도와주고자 했다. 황제에게 쫓겨나 낙향한 신하들, 다혈질인 패리스에게 얻어맞는 시종들, 황궁 밖의 가난한 자들, 심지어 황제가 괜히 얄미워하는 시드 바이안의 가족들에게까지.

황녀는 어떤 때에는 가명을 사용하고 어떤 때에는 자신의 마음 여린 이미지를 그대로 활용하여 그들에게 재물을 쥐여 주거나 다른 도움을 주었다.

선황에게 몰래 받은 유산은 그런 이유로 빨리 줄어들었기에 불안했지만 그녀는 소비를 줄이지 않았다. 시드도 그것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릇 백성을 돌보는 것은 훌륭한 황제의 기본이니까. 그녀가 도왔던 자들 중 상당수가 정보원이 되어 그녀를 돕는다는 것은 덤이었다.

회색 머리의 기사가 푸근한 미소로 자신을 보는 것을 모르는지, 아폴로니아는 그저 차분한 걸음으로 앞서 나갈 뿐이었다.

* * *

유리엘은 지루했다.

임무에 실패하고 별궁의 어느 방에 갇힌 지 6일째. 하루 세 번 마야가 식사를 넣어주는 것 외에는 누구와도 교류가 없었다.

탈출이 걱정되었는지 회색 머리 기사는 방문을 걸어 잠그는 것으로 부족해 그의 주변에 결계까지 쳐 두었다. 방 안에서는 자유롭게 활동하되 문 쪽으로는 접근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물론 그는 탈출할 계획이 없었다.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그를 기다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황녀는 그를 키우겠다고 했지만 리페르 공작가는 그런 것을 내버려 둘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얼굴을 모른다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모든 것을 포기할 무렵,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시간 맞춰 나오는 푸짐하고 맛있는 음식, 거위 털로 채운 폭신한 침대, 말끔하게 씻을 수 있는 침실 옆 공간까지. 계획을 짜고 머리를 굴리려 해도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중에서도 음식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맛있었다. 메뉴는 매 끼니 바뀌면서도 언제나 균형 잡혀 있었는데, 특히 정성스러웠던 전날 점심에는 알맞게 구워진 칠면조 요리와 막 만들어진 바삭한 흰 빵, 신선한 과일과 한 입 마시면 기분이 황홀해지는 꿀술까지 있었다.

어쩌면 태어나서 이 정도의 식사는 처음 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내용물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담긴 접시며 잔도 무척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독을 탔다고 해도 원망스럽지 않을 식사였다.

그의 몸은 어쩔 수 없이 긴장을 풀었고, 곧 지루함까지 느꼈다. 다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소녀가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낮고 차분하게 깔리는 목소리, 조금 창백한 마른 얼굴, 냉소적이지만 약간의 슬픔을 담은 표정, 포박된 그를 내려다보며 살짝 치켜 올라간 눈썹. 한 번은 부드럽게, 한 번은 거칠게 그의 얼굴에 닿았던 손과 그를 완벽하게 읽어 냈던 진홍색 눈동자.

유리엘보다 어려 보이는 주제에 한참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그를 신문하던 그 묘한 소녀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점점 짙어져 갔다.

그리고 6일째 되던 날, 그녀는 다시 나타났다.

끼이익-

작은 방문을 열고 아폴로니아가 두 걸음 들어섰다. 그녀는 자객을 가둔 결계 바로 앞에 멈춰 서더니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러고는 벽에 기대고 서 있던 소년에게도 앉으라는 신호를 했다.

그들이 밝은 곳에서 마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소년은 그녀가 기억했던 것보다 호리호리했다. 키만 보면 완전히 어른 같았지만 완성되지 않은 그 몸은 아직 여린 느낌을 주었다. 그것이 소년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며칠 동안 쉬어서인지 그는 부상당한 어깨에도 불구하고 혈색이 좋아져 있었다.

“잘 먹고 있다더니 사실인가 보구나.”

침대에 걸터앉은 소년은 아폴로니아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그가 적절한 호칭도, 말투도 결정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이 뭐지?”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보일 듯 말 듯 호기심 어린 미소만 띠고 있었다.

“좋아, 대답하기 싫다면. 난 소식을 전하러 왔으니까.”

그녀는 그의 천사 같은 푸른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전할 소식은 중대했고, 상대의 반응은 예상하기 어려웠다.

“사피로가 죽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긴 정적이 흘렀다. 침착했던 소년이 수려한 눈썹을 찌푸렸다.

“……확실해?”

침묵 끝에 그가 뱉은 것은 짧은 한 마디였다.

그녀는 가지고 온 초상화 한 장을 펼쳤다. 평범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으나 순간 소년의 두 눈이 커지는 것을 아폴로니아는 놓치지 않았다.

“사피로는 변장에 능해 그 얼굴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지. 나 또한 그를 본 적은 없어. 어디 사는지도 알지 못하고.”

아폴로니아는 종이를 다시 접어 품속에 넣고는 몸을 소년의 방향으로 조금 기울였다.

“하지만 초상화 속의 사람은 어제 죽었어. 그자가 사피로라는 것은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녀는 여지를 남기지 않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조금 고민한 뒤 설명을 덧붙여 주기로 했다.

“너는 연회가 끝나자마자 나를 찾아왔지. 그 말은 너와 네 스승이 신분을 위장한 채 수도에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는 의미라고 판단했다.”

“…….”

“그래서 최근 며칠 동안 수도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는지 알아보았더니 세 사람이 죽었고, 셋 중 한 명은 살인범이 잡히지 않았지.”

소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네 주인, 아니 스승인가……. 어쨌든 그는 이제 세상에 없어.”

그녀는 품속에서 반짝이는 다른 물건을 꺼냈다. 짐승의 송곳니를 가죽 끈에 걸어 만든 목걸이였고, 자세히 보면 피가 묻어 있었다.

“현장에서 빼돌렸다. 너는 알아보겠지.”

그녀는 결계 속, 소년의 무릎 위로 무심하게 목걸이를 던졌다. 그는 천천히 목걸이를 집어 들어 살폈다.

“……그렇군.”

분노든, 희열이든 격한 감정을 보일 거라는 그녀의 예상과 달리 소년은 그저 씁쓸하게 피식 웃고는 목걸이를 침대 구석에 내던져 버렸다.

“끝이야?”

“늙어서 비대해질 때까지 잘 먹고 잘 살다 죽은 놈인데 명복까지 빌어줄 생각은 없어.”

정보가 정확하지 않았던 걸까? 분명히 사피로의 세뇌를 받은 자들은 그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한다 들었는데 눈앞의 이자는 너무나도 침착했다.

“나는 일종의 실패작이야.”

의아한 그녀의 표정에, 소년이 설명해 주듯 말했다.

“사피로의 고문을 너무 잘 견뎌서 죽을 위기에 처했었지. 개가 되기에 부적절하다고.”

그는 거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마침 그 때 그의 오른팔 격인 수하 하나가 죽는 바람에…… 대체할 사람이 없어서 나를 살리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나 보더군.”

아폴로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소년의 설명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투철한 사피로가 예외를 허용한 원인은 아마도 며칠 전 보았던 소년의 말도 안 되는 재능 덕일 가능성이 높았다.

처음 보는 결계를 두 번의 시도 만에 깨뜨린 자.

그녀도, 시드도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선황도, 한때 무예로는 제국에 적수가 없었던 아버지도 그 정도의 천재는 아니었다.

소년이 의외로 소식을 멀쩡하게 받아들였기에, 그녀는 더 중요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도 없고 널 구속하던 사람도 죽었으면 이제 누구에게 충성할 거야? 리페르?”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소년은 질문을 듣더니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릴 뿐이었다. 별 순진한 질문을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알다시피 너는 돌아가면 죽어. 아마도 무척 고통스럽게. 나는 너에게 다른 선택지를 줄 수 있어.”

아폴로니아는 소년에게 답을 강요하는 대신 자신이 할 말을 전하기로 했다.

“사피로가 죽었다면 공작가에 네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어. 난 너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려고 해.”

소년은 비웃음을 거두었다. 그는 말을 끝까지 해 보라는 듯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네 이름이 뭐든,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무슨 일을 했든 상관없다. 앞으로 나를 위해 살아.”

아폴로니아 자신이 생각해도 지나치게 단순한 요구였으나 돌려 말할 방법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의리 같은 감정도 없었고, 그녀는 굳이 소년의 목숨과 자유를 담보로 쥐고 하는 명령을 부탁인 것처럼 포장할 만큼 위선적이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가 필요했다. 그러나 소년이 확실한 거절을 한다면 그를 죽이는 것을 굳이 망설이지는 않을 것이다.

소년은 침대에 걸터앉아 듣고 있었으나 그녀가 말을 마치자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아폴로니아의 앞까지 다가왔다.

“시…….”

아폴로니아는 그 갑작스런 움직임에 본능적으로 시드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소년은 그녀 바로 앞에 멈추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느릿느릿 고개를 숙여 얼굴을 아폴로니아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갔다.

“지금 뭘 하는…….”

아폴로니아가 말하려 했으나 소년은 그저 냉소적인 미소를 띠고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일 뿐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아폴로니아 쪽으로 천천히 뻗어 그들 사이의 투명한 결계를 짚었다. 결계가 없었더라면 그녀에게 입이라도 맞추려 한다고 착각할 것 같은 자세였다.

지나치게 가까웠으나 아폴로니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네 눈에도 내가 꽤 아름다운가 보군.”

그가 나직하게 뱉은 것은 아폴로니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듣자 아폴로니아는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는 그의 완벽한 이목구비를 훑을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과연 아름답다. 냉소적인 미소도, 질문을 하는 붉은 입술도, 뚫어져라 쳐다보는 바다 같은 두 눈도. 그러나 그 눈에 담긴 조소에서 그녀는 그의 의도가 단순히 그녀를 자극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무례하구나.”

“네 사람이 되어 달라며.”

“그 뜻이 아니잖아.”

그의 여전히 지나치게 가까운 얼굴에 서린 냉소적인 미소가 짙어졌다. 그 바람에 아폴로니아의 눈빛 또한 차가워졌다.

“난 내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 자에게 친절하게 웃어 주는 버릇은 없어.”

그녀는 결계 쪽으로 반 보 정도 다가서며 말했다. 소년은 그녀가 물러설 것이라 예상했는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죽여 달라고 했었지. 정말 그게 소원이라면 똑바로 말해. 결국 네 선택지는 두 가지니까. 나를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이곳을 나가서 살거나, 빛을 보지 못하고 죽거나. 물론 사피로에게 했던 것처럼 형식적인 충성도 안 돼.”

그녀는 싸늘하게 쏟아 냈다. ‘주인’이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소년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두 가지를 착각하고 있군.”

소년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그는 천천히 결계를 짚지 않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첫째는 네가 나를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착각.”

소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왼팔 전체가 묘한 은빛을 띠었다. 순간 그녀 코앞에 있던 결계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틈을 만들었고, 그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왼손을 검처럼 내리그었다.

챙-

믿을 수 없게도, 두 사람을 갈랐던 결계가 속절없이 깨졌다. 그날 밤과 똑같은 모습이었으나 이번에는 소년의 손에 검이 들려 있지 않았다.

‘마법에 강한 체질을 타고났던 건가?’

그녀가 미처 시드를 부를 시간도 없이, 소년은 아폴로니아의 양쪽 손목을 가볍게 잡아 그녀의 등 뒤에 있던 벽에 눌렀다.

“검이 없어도 검기를 다루는 방법은 있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못 봤지만.”

그가 말을 하며 얼굴을 앞으로 기울이자 두 사람의 이마는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아폴로니아는 잡힌 손을 움직여 보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빠져나오기 어렵도록 단단히,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프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그녀의 양손을 제압하고 있었다.

“놔.”

그녀의 명령에 소년은 의외로 순순히 손을 놔주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짝-

그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아폴로니아의 손바닥이 소년의 뺨을 매섭게 때렸다. 소년의 아름다운 얼굴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다시 그런 짓을 하면 네가 평생 겪었던 것 이상의 고통을 알게 될 거야. 리페르 공작가로 돌려보내 달라고 빌다가 죽고 싶지 않으면 내 몸에 손대지 마.”

말을 마친 아폴로니아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소년은 부은 뺨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방금은 잘했어.”

“……뭐?”

“너를 때리는 손을 막을 수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었으니까. 죽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해. 나를 제압한다 해도 문 밖에는 몇 겹의 결계가, 그리고 그 뒤에는 석궁을 든 시드가, 그다음에는 황실 기사단까지 있으니까. 칼 맞은 어깨로는 시드를 상대할 수도 없겠지만.”

소년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더니 뒤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듯했으나 그녀의 협박이 두려워서는 아닌 것 같았다.

“두 번째 착각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소라기에는 너무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네가 나를 살려 둘 수 있다는 것.”

그가 어딘가 모순되는 말을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리페르 공작가에서 도망치는 건 어차피 불가능해.”

소년은 천천히 아폴로니아에게서 시선을 떼면서, 길고 하얀 오른손 손가락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내 얼굴을 몰라도 그들은 나를 구분할 수 있으니까.”

그의 뒷목에는 작은 검날 모양의 문신이 희미한 붉은 빛을 내고 있었다.

“이건 주술이 깃든 표식이야. 보통은 드러나면 안 되니까 눈에 안 띄지만 표식의 주인이 원하면 드러나게 할 수 있지. 이게 드러났다는 건 그들이 나를 찾고 있다는 뜻이야. 빛이 강해지면 고통이 더해지지.”

아폴로니아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문신을 만져 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자 문신의 빛이 조금 더 강해졌다.

“주인이 표식을 짙게 만드는 건 돌아오라는 뜻이야. 듣지 않으면 고통은 점점 더해져서 죽고 싶은 지경이 돼. 그렇게 되면 선택지는 두 가지야. 죽거나, 돌아가거나.”

아폴로니아가 표식을 쓰다듬도록 내버려 두는 그는 큰 개를 연상시켰다. 상황에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죽기 전까지는 새 신분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야.”

아폴로니아는 손을 다시 거두었다. 그녀는 사실 그 표식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황녀 전하, 난 너의 사람이 될 수가 없어. 편하게 죽여 주면 고맙고, 아니면…… 네 말처럼 차라리 공작가로 보내 달라고 애원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는 다시 이를 꽉 깨물며 말을 끝냈다. 아폴로니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말을 놓치지 않고 들었다. 건방지지만 과묵한 소년이 이만큼이나 솔직하게 입장을 말해 준 것은, 정말로 그에게 살 의지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가 아는 것과 다르다면 어떨까.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내가 말해도 돼?”

침대로 돌아가 다시 널브러지려던 소년은 흠칫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직 할 이야기가 있어?”

“내 제안을 완전히 듣지 않았잖아.”

그녀의 손짓에 따라 소년은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그러고는 어디 말해 보라는 듯 시선을 맞추었다.

“나를 따르면 너는 나에게 복종해야 할 거야. 하지만 나는 고모님과 같은 방법은 쓰지 않아.”

“…….”

“네 몸에 원치 않는 표식을 새기지도 않을 거고, 고문으로 네가 싫다는 일을 강요하지도 않아. 최악의 경우, 네가 내 명령을 도저히 따를 수 없다고 하면 원하는 대로 깨끗한 죽음을 하사하지.”

소년의 동공이 커졌다.

“내 말을 못 들었어? 나는…….”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문신의 주술을 푸는 방법은 두 가지야. 네가 아는 하나는 그 사람의 죽음이고…….”

아폴로니아는 언젠가 가레스가 술에 취해 웅얼거렸던 말을 떠올렸다.

“기르는 짐승들이 절대로 못 도망가게 하는 방법이 있거든. 주인이 놓아주지 않으면 죽어야 벗어난다고…… 리페르의 피가 없으면, 어디 가도 개목걸이를 찬 신세지.”

그는 킬킬대며 자신이나 페트라나 짐승을 위해 피를 흘려줄 생각은 없다고 덧붙였다. 당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술주정뱅이의 헛소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모든 주술에는 해제의 열쇠가 정해져 있고, 가레스는 그것을 흘렸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네 주인 일가의 피를 가지고 푸는 거야.”

소년은 여전히 커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한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식 웃었다.

“그런 거라면 더더욱 쓸데없는 시도겠군.”

“아니, 오히려 쉬워.”

그녀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소년과의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아폴로니아가 소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리페르의 피는 내 몸에도 흐르고 있으니까.”

아폴로니아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엄격한 지도하에 공부했던 주술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주술사의 도움 없이 직접 주술을 걸 방법은 없었지만 그녀는 이론에 해박한 편이었다.

모든 주술에는 해제의 열쇠가 있다.

그것은 주술을 거는 사람의 의도와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데, 가장 낭만적인 열쇠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맞춤이나 맹세 같은 것이었다.

아르키움 대륙에서 주술을 거는 데는 많은 비용과 어려움이 따랐지만 해제의 열쇠를 찾기만 하면 푸는 것은 쉬웠다.

리페르 가문은 사피로의 늑대들 한 명 한 명에게 표식을 새김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소유했고, 그 해제를 함부로 할 수 없도록 리페르의 피를 해제의 열쇠로 지정했다. 이것은 고대에 힘 있는 가문들이 간혹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그와 같은 수단은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왔지만 선황의 직접적인 교육으로 제국의 역사에 해박했던 아폴로니아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오래전 할아버지로부터 사피로의 암살자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바로 그 주술과 열쇠까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가레스의 술주정은 그에 대한 확인과 같았다.

표식 주술에서 먼 방계의 피는 열쇠로 기능하지 않았으나 아폴로니아는 한때 가주였던 가이우스 리페르의 직계였다. 그보다 더 확실한 열쇠는 없었다.

“내가 지워 줄게, 그 문신.”

소년은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주술사가 필요하니까 당장은 안 돼. 며칠만 기다려.”

“며칠이라고?”

방금 전까지 스스로의 죽음을 의심치 않았던 소년은 머리를 가로로 흔들며 되물었다. 영원한 속박이라 생각했던 표식을 며칠 기다리면 지워 준다는 소리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 성인식이 7일 뒤니까…… 그때 숨겨서 들여오면 되겠다. 문신이 지워지면 정말 죽고 싶은지 다시 생각해 봐.”

아폴로니아는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소년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참, 그리고…….”

문 쪽으로 다가가 방을 나서려던 그녀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서서 소년에게 말했다.

“나에 대한 호칭은 ‘전하’, 말투는 존대.”

“그게 무슨…….”

“내 백성으로 태어나 고생만 한 건 미안하지만 내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수하를 둘 수는 없어.”

아폴로니아는 다시 결계 가까이 다가가며 소년과 눈을 맞추고 말했다.

“당장 나를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네 마음이지만 다시 나를 ‘너’라고 부르면 네 오른쪽 어깨에도 단검을 하나 박아 줄 거야.”

웃음기 하나 없는 싸늘한 표정에, 소년은 눈썹을 살짝 찌푸릴 뿐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문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를 당기는 순간 뒤에서 나직한 한 마디가 울렸다.

“유리엘 비체.”

“뭐라고 했지?”

“내 이름…… 입…… 니다.”

그는 어딘가 불만스러운 듯 힘겹게 말을 마쳤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서린 것은 더 이상 냉소도, 분노도, 불신도 아니었다. 아름다운 두 눈동자에 언뜻 비치는 것은 어쩌면 희망이었다.

“유리엘 비체.”

그녀는 천천히 그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나는 아폴로니아 알리스테어 페르디안.”

처음 만난 그날과 같이,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다만 이번에는 그 시선이 더 부드럽게 얽혔다.

아폴로니아가 나간 후 유리엘은 다시 작은 침대에 털썩 누웠다.

“하아…….”

그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조금 전 일어난 일을 믿기가 어려웠다. 표식을 지운다니, 상상해 본 적 없었다.

눈을 감자 아폴로니아의 얼굴이 다시 생각났다. 지난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떠올렸던 얼굴이었으나 실제로 다시 만난 그녀는 더욱 강렬했다.

그녀는 냉정하고 다정했다. 계산적이지만 모든 행동의 기저에는 온정이 있었다. 사피로의 죽음을 알리는 그녀는 스스로 차갑다고 생각한 듯했지만 유리엘의 눈에는 그의 감정을 살피는 찰나의 모습이 보였다.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것은 날카로운 협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친절이었다. 깨끗한 죽음이라니, 쓸모가 있다고 판단되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살려 두며 골수까지 이용해 먹는 사피로와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양손을 천장 방향으로 들고 손끝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손목을 잡았을 때의 감촉이 다시 느껴졌다. 순간적인 오기로 결계를 뚫고 나갔지만 막상 접촉한 순간 그녀의 당황한 표정을 보자 손의 힘이 풀렸다.

“놔.”

아폴로니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물러섰다. 손을 놓으라는 명령에 바로 따르다니, 누가 보면 그의 뒷목에 표식을 새긴 사람이 아폴로니아인 줄 알 것이다.

유리엘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이미 아폴로니아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주인이라.’

익숙하지만 증오스러운 단어.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단어는 유리엘의 머릿속에서 아폴로니아의 붉은 눈동자와 겹쳐졌다.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품은 그 눈은 주인이라는 단어를 거의 달콤하게 만들었다.

유리엘은 그 눈이 웃는 것을 보고 싶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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