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어수룩한 황녀
아버지인 가이우스는 언제나 아폴로니아를 싫어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지만 그는 분명 냉담했다. 아니, 어쩌면 냉담을 넘어선 혐오였을지도 모르겠다.
아폴로니아는 세 살 때, 걷다가 넘어져 그에게 손을 내미는 자신을 보고도 일으켜 주는 대신 섬뜩하게 웃던 가이우스의 모습을 보고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나이에는 어렴풋한 느낌이 다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느낌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는 아폴로니아의 사소한 실패를 즐거워했고, 성취는 부정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교묘히 숨겼으나 그의 시선에서, 손길에서, 태도에서 아폴로니아는 점점 그 비틀린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했다. 그녀를 맡아 양육한 사람은 외할아버지인 파스칼 3세였고, 간혹 어머니 엘레니아 황녀가 오가며 그녀를 보살폈을 뿐, 애초에 가이우스나 오빠인 패리스와는 부딪힐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딱 한 번, 외할아버지이자 황제인 파스칼 3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패리스만 사랑하는 건가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줄 알았던 파스칼 3세는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패리스는 아버지의 후계자니까 그런가 보구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그럼 저는요?”
“너는 패리스와 비교도 할 수 없이 고귀하지. 나의 후계자니까.”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가이우스가 패리스를 사랑하고 아폴로니아를 혐오했다면, 황제는 아폴로니아만을 사랑하고 패리스에게는 무감정한 듯했다.
그랬다. 공표된 것은 아니었지만 아폴로니아는 황제가 직접 교육하는 그의 후계자였다. 서열로 보면 어머니인 엘레니아 황녀가 당연히 1순위이겠으나 그녀는 정치를 너무나도 싫어해 일찌감치 후계자의 지위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황제의 설명은 뭔가 이상했다.
“왜 패리스가 할아버지의 후계자가 아닌 거죠?”
“더 크면 설명해 주마.”
황제는 더 이상 설명해 주지 않고 그녀를 쓰다듬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제왕학을 비롯한 각종 학문에 정진했다. 그녀는 총명했고, 아홉 살의 나이에 대륙에서 사용되는 4개 언어를 유창하게 해냈으며 역사, 정치, 경제에도 꽤나 통찰력을 발휘했다.
황위,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아폴로니아의 것이었다. 단 한 번도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기 전까지.
* * *
그날은 할아버지의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파스칼 3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손녀를 시험했다. 평범한 스승들이 그렇게 하듯 책 한 권을 주고 그 안에서 문제를 냈더라면 쉬웠겠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시험들은 그다지 간단하지 않았다.
책장 한 칸을 책으로 가득 채워 한 달 동안 전부 외우라고 지시한 뒤 마구잡이로 질문을 던지는 일은 예사였다. 배운 지 반년도 되지 않은 타 대륙의 언어로 역대 황제들의 업적을 평하는 작문을 하라는 과제 또한 별것이 아니었다.
간혹 그는 아폴로니아를 복잡한 미로 같은 곳에 던져 놓고 혼자 길을 찾아 나올 수 있는지 확인해 보기도 했다. 며칠을 굶어 여윈 그녀가 간신히 미로를 빠져나온 것을 본 황제는 껄껄 웃으며 뿌듯해했다. 황제는 그보다 훨씬 큰 위기에 처할 수 있으니 대처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의 시험 또한 언제나처럼 머리 아팠다.
“파스칼 1세와 대해적 레일라 루페리온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라.”
단순한 글짓기 같지만 황제가 요구한 것은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이었다.
아폴로니아는 제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꼽힌 8대조 할아버지와 그 숙적을 연구하기 위해 온 황궁의 도서관을 뒤졌다. 황제궁부터 시작해서, 희귀 서적을 전문으로 갖추고 있는 엘레니아의 황녀궁까지.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몰랐다. 그곳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 * *
챙그랑-
떨어진 찻잔의 파편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엘레니아 황녀는 숨을 몰아쉬며 돌바닥에 주저앉았다. 태양처럼 밝은 금발이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심장을 조이는 고통을 믿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소파에 앉은 채 괴로워하는 자신을 보며 느긋하게 웃는 눈앞의 남자가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건넨 차를 마시고 쓰러진 엘레니아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가이우스, 왜…….”
“불쌍한 엘레니아.”
남자는 몸을 일으켜 그녀 앞까지 다가왔다. 오만한 눈빛과 느릿한 걸음걸이는 그의 마음속 엘레니아의 위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는 죽어 가는 아내에게 몇 걸음 걸어가는 것조차도 귀찮다는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인생을 바쳐 사랑했던 남편은 큰 결심이라도 하듯 한숨을 내뱉더니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신음하는 엘레니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마지막 자비일까, 조롱일까.
그녀는 애원하듯 울먹였다.
“모든 걸 주었잖아…….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패리스를 나의 친아들로, 황자로 키웠잖아. 대체 왜…….”
“그래, 그랬었지. 당신은 참으로 좋은 어머니였어. 당신이 패리스를 친아들로 대해 준 덕분에…….”
그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황자가 아니라 황제가 될 거야. ‘나’의 아들은. 나와 사틴의 아들은.”
남편의 입에서 10년 동안 언급된 적 없었던 전 연인의 이름이 나오자 엘레니아의 호수 같은 눈이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사틴 아리에타……?”
사틴 아리에타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패리스의 생모였다. 엘레니아가 가이우스를 만났을 때 그는 비밀리에 갓난아이를 키우고 있는 미혼부였고, 아이 어머니는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엘레니아는 그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패리스를 자식으로 받아들이고 황자로 키웠다. 둘 사이에도 아이가 생겼을 때에는, 패리스가 훌륭하게 성장하여 황제가 될 동생을 보좌하리라고 믿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사랑이라…….”
가이우스는 별안간 큭큭거리며 웃었다.
“멍청하긴. 가진 거라고는 집안과 얼굴뿐인 멍청한 어린애를 내가?”
“나에게 당신이 어떻게, 어떻게…….”
“조금 맞춰 줬다고 사랑 놀음에 취하는 꼴이라니……. 사랑에 눈이 멀어 피도 섞이지 않은 사내아이를 황궁까지 들이다니 그 대단한 황실도 별거 없군.”
그는 쓰러지는 부인에게 쐐기를 박았다.
“원망하려거든 당신의 아버지를 원망해. 사틴은 황제 때문에 죽었어. 가족이 반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멸문을 당했다고.”
말을 뱉으며 분노가 차오른 것인지,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엘레니아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아버지는 나의 아들에게 이 제국을 빼앗기겠지. 공평하지 않아?”
엘레니아는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호수 같은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엘레니아.”
가이우스는 갑자기 말투를 부드럽게 바꾸고 손을 뻗어 엘레니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그녀를 바라보는 부드러운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에게 헛된 희망을 주었다.
“제발, 가이우스…… 아니라고 말해 줘. 장난이라고 해 줘, 제발!”
퍼억-
그러나 다음 순간 부드러웠던 그의 손은 그녀의 얼굴을 그대로 밀쳐 버렸다. 엘레니아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입가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크하하하하하! 대체 뭘 기대한 거야? 끝까지, 끝까지 얼간이 같은 최후를 맞는군.”
그는 몸부림치는 황녀의 턱을 잡고 고개를 억지로 옆으로 돌리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너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
힘없이 쓰러진 엘레니아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러나 할 일이 거의 끝났다는 듯, 가이우스는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 했다.
“아들을 대신 키워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그걸로 당신 아버지의 죄를 만 분의 일은 씻었겠지. 물론 당신 부녀의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니아.”
“뭐?”
“아폴…… 아폴로니아, 내 딸…….”
엘레니아 황녀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한 가지 이름만을 불렀다. 겨우 그 말을 이해한 가이우스는 싱겁다는 듯 웃었다.
“니아는 내 딸이기도 하니 최대한 죽이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 얌전히 자라서 정략혼의 좋은 패가 되도록. 나와 패리스의 제국을 위해서.”
그의 말이 마치자마자 황녀의 가녀린 몸은 조금씩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방 한구석을 보며 뭐라고 웅얼거리는 듯했으나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몸부림을 보는 가이우스는 무료한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릴 뿐이었다. 이윽고 마지막 숨이 몸을 떠나고 그녀의 육체가 힘없이 늘어졌다.
“드디어 끝났군.”
그녀의 맥박이 뛰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가이우스는 단 한 점의 미련도 없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엘레니아가 사랑했던 기사다운 강한 이목구비, 언뜻 거칠어 보이지만 만져 보면 부드러웠던 검은 머리카락, 한때 그녀만을 담았던 황금색 눈동자, 귓가에 달콤하게 감기던 저음의 목소리와 무심한 듯한 걸음걸이.
그녀의 세상이었던 모든 것이 엘레니아를 버리고 떠났다.
* * *
방 한구석 난로 뒤에 숨어 있던, 어머니와 같은 백금발의 작은 소녀는 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참았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까지는 참을 수 없었다.
온몸이 공포로 얼어붙은 아폴로니아는 아버지가 자리를 뜨고 나서도 죽은 어머니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녀를 보며 웅얼거린 마지막 말은 마치 귀에 소리치기라도 한 듯 뇌리에 박혔다.
‘살아남아…… 황제.’
살아남을 것. 황제가 될 것.
두 마디 유언이 아폴로니아 영혼 깊이 각인되었다.
* * *
7년 후.
“인사해라.”
연회장으로 불려온 열여섯 살의 아폴로니아는 패리스의 뒤를 따라, 자신보다 겨우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5명의 여인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앞으로 후궁에서 지낼 테니 예의를 갖추도록 해라.”
7년 전, 파스칼 3세와 그 딸 엘레니아가 같은 날 사인 불명으로 숨졌을 때, 가이우스 리페르는 식음을 전폐하고 비통하게 울었다. 주변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그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황녀 부부의 금슬이 얼마나 좋았는지에 대해서 떠들었다.
“리페르 영지에서 운명처럼 만나셨다면서요.”
“첫눈에 반했지만 혹여 폐하의 화를 살까 숨어 사랑을 나누다가, 결국 패리스 전하를 낳고도 한참 지나서 돌아오셨다죠. 낭만적인 이야기예요.”
“쓸데없는 걱정을 하셨군. 폐하께서는 부마를 아끼셨지 않나.”
“더더욱 안타깝군요. 폐하와 전하께서 한꺼번에 가시면 부마와 어린 전하들은 이제 어떻게…….”
황제는 딸이 사랑하는 가이우스를 아들처럼 받아들였다. 원래는 다소 평범한 무가의 수장이던 가이우스는 든든한 대장군이 되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군공도 쌓았다. 그들은 단란한 가족을 이루었고, 행복은 황제와 황녀가 의문의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아이고, 며칠째 식사도 하지 않고 울고 계시는구만!”
사람들은 검은 옷을 고수하며 엘레니아의 이름을 부르짖는 가이우스를 동정했다.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강인한 군인이 사랑 앞에 무너지는 모습은 국민의 마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장례가 끝난 다음부터 일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갔다.
“황실의 유일한 어른으로서, 짐이 제국을 지켜 낼 것이다.”
장례식이 끝나자 가이우스는 자식들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직접 황위에 올랐다. 어디까지나 임시직이었고, 여기까지는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황실 직계 후계자가 장성할 때까지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이우스는 슬픔에서 빠르게 회복하였고, 곧 황궁을 새로 짓고 요직을 교체하는 등 빠르게 자신의 제국을 구축했다. 7년이 지나 제국의 주요 관직이 그의 측근으로 찼을 무렵, 그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행보를 보였다.
“황제의 옆자리가 빌 수는 없는 법이오.”
후궁을 들인 것이다.
사마라 제국은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였으나 오직 황제만은 후궁을 둘 수 있었다. 이는 여러 왕국과 정략결혼을 통해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황실 혈통이 아닌 임시 황제는 그러한 정략혼과 완전히 무관했다. 황녀의 남편으로서 황위에 올라 놓고 다른 여인을 취하는 것을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가이우스는 달랐다. 대신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섯 황비를 한 번에 들였다. 그는 다섯 명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양의 드레스, 황금, 보석 등을 선물하면서 당당하게 황궁으로 초대했다.
“황실의 피를 잇지 않은 폐하가 어떻게 황비를 들인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들어온 후궁이 황실의 일원이라 할 수 있습니까?”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도 크게 반대하며 들고 일어났고, 몇몇 주변 왕국들은 이를 핑계로 전쟁을 일으킬 조짐까지 보였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들 모두를 숙청하거나 진압했다. 그리고 숙청된 자들의 자리를 자신의 가족들로 채웠다.
이제 황궁에서 그의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 5명의 꽃 같은 여인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렸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황제의 매부인 루이스 리페르 공작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보잘것없는 자작이었던 그는 가이우스의 여동생인 페트라 리페르와 결혼한 후, 자신의 성을 버리고 고귀한 처가의 가주가 된 남자였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다른 손님들도 함께 외쳤다.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먹고 마셨다.
아폴로니아는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남색 드레스 차림으로 참석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눈에 띄지 않는 연회장 구석에서 시녀와 함께 숨어 있다가 적당히 얼굴만 비추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필 그곳에 와인을 가지러 왔던 황비 한 명과 부딪히지만 않았더라면.
“어머! 조심해요.”
카트린 로엔하임은 화려한 적갈색 머리칼을 넘기며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아폴로니아를 불렀다.
“하마터면 드레스에 와인을 쏟을 뻔했군요.”
지방 하위 귀족 출신인 그녀는 가이우스로부터 첫 번째로 청혼을 받은 여인이었다. 그만큼 콧대가 하늘을 찔렀고, 은근히 다른 황비들을 견제하며 장기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고자 물밑작업을 벌이는 중이었다.
‘황후 없는 궁의 총비는 결국 황궁의 주인 아니겠어?’
입궁한 지 열흘째, 다른 황비들은 상황을 파악했는지 이미 그녀에게 한 수씩 물러 주는 듯 보였다. 카트린 로엔하임은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기 위해 다음 먹잇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고귀한 지위를 가졌기에 기선 제압하는 의미가 있으면서, 만만해서 그녀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사람. 기왕이면 여인.
이 정도가 그녀가 찾는 대상이었다.
“니아 황녀.”
그리고 하필 그 무렵에 아폴로니아가 눈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진작 오빠에게 밀려 황제 눈 밖에 난, 어리고 존재감 없는 황녀. 잘 꾸미면 예쁘장할 황녀의 얼굴은 항상 수수했고, 애매한 위치 때문인지 그 태도가 소심하고 나약했다.
이 정도면 완벽하다.
카트린은 입술을 핥으며 사냥감을 다정하게 불렀다.
“반가워요, 니아 황녀.”
그녀는 일부러 황제와 황자만 사용하는 별명으로 아폴로니아를 불렀다. 은근하게 자신을 윗사람으로 어필하는 것이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를 황녀는 얼떨떨하게 그 호칭에 익숙해질 것이고, 그 모습을 보는 모두가 카트린을 황후와 동일시하게 될 것이다.
“제가 부딪쳤군요. 죄송합니다, 부인.”
“그 정도는 뭐 내가 너그럽게…… 아니, 방금 뭐라고 했죠?”
고분고분한 사과에 고개를 끄덕이던 카트린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이 멍청한 계집애가 황비를 부인이라 불렀다. 분명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리라. 적당히 쓰다듬어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버릇없는 아이라면 더 따끔하게 말해 줘야 알아들을 것이다.
“황녀, 잠깐 거기 서요.”
카트린 로엔하임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돌아서는 아폴로니아를 불러 세웠다. 모두가 들으라는 듯, 상당히 큰 목소리에 고압적인 말투였다. 몇몇 귀족들이 그 사인을 알아듣고 조금씩 몰려들었다. 황제의 핏줄과 황제의 여인, 두 사람의 관계 정립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까 서로 정식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 같아서요.”
말은 ‘서로’라고 했으나 그녀는 명백히 아폴로니아를 지적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절을 올린 것이 아니라 간단한 목례만을 했다는 것이다. 호칭에 대한 지적이 들어 있음은 물론이었다.
카트린은 과장된 몸짓으로 무릎을 굽혀 먼저 깊숙한 절을 하더니 아폴로니아의 눈치를 보았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예법을 가르치는 듯한 태도였다.
‘자, 보았니? 너도 이렇게 하면 된단다.’
이 여인은 황녀로부터 공손한 인사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약식 인사를 하며 멀뚱멀뚱 카트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네. 반가워요 부인.”
이 미련한 것이!
카트린은 약이 올랐다. 이대로 가 버리면 자신만 혼자 어린 황녀에게 고개 숙인 꼴이 되지 않겠나?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한 그녀는 위엄 있게 쏘아 붙였다.
“황녀, 이렇게까지 해도 못 알아듣는 건가요?”
“네?”
“맹하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나는 폐하의 황비이니 황녀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에요. 윗사람에게 예를 갖추셔야지요.”
“아…….”
답답한 아폴로니아의 대답에 카트린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부인’이 뭔가요. 민간에서도 새어머니에게 그런 호칭을 쓰면 이웃의 욕을 듣는답니다.”
자아, 이제는 좀 제대로 불러 보련? 카트린이 우아함을 잃지 않으며 아폴로니아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그때였다.
“송구하옵니다만 황비님, 잘못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
아폴로니아 옆에 서 있던 여인이 입을 뗐다. 중년이 넘어 보이는 이 여인은 황녀의 시녀 또는 유모쯤일 것이었다.
“지금 내게 말을 건 것이야?”
“아직 예법을 다 익히지 못하셨으니 모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만.”
시녀는 작은 체구와 달리 강인한 눈을 똑바로 뜨고 말을 이었다. 카트린이 얼굴을 구겼다.
“황후와 달리, 황비의 지위는 직계 황족의 아래입니다. 민간의 계모와 비교할 수 없으며, 고로 호칭 또한 전하가 아닌 부인이 맞습니다.”
“뭐, 뭐라고?”
그렇다. 신의 핏줄인 황족을 숭배하는 제국에서, 반신이나 다름없는 황자녀의 윗사람은 오직 황제와 황후뿐이었다. 황비 또한 존중받았지만 황자녀와는 그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다만 오랫동안 황비가 없었던 만큼 카트린은 물론 손님 중 상당수가 황실의 그러한 서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막연히 황후가 없는 궁의 총비는 황후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 그럴 리가. 내 시녀 중 누구도 그런 얘기는 한 적이 없다.”
“그것은 제국에 지난 수십 년간 황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험 없는 시녀들은 황비의 예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요.”
하필 선황은 단 한 명의 황후를 두고 수십 년간 온 힘을 다해 그녀만을 사랑했다. 황실 안팎으로 일부다처제가 없었기 때문에 관련 예법은 쓰임 없이 잊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다른 황비들은…….”
“전하 외에 어떤 분도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의 예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똑 부러진 시녀의 대답에 카트린은 얼굴을 붉혔다.
“네…… 말투가 건방지구나.”
예법에 통달한 시녀 앞에서 논리로는 이길 수 없게 되자, 그녀는 권위에 의지해야 자신의 체면이 살 것이라 판단했다.
“일개 시녀가 감히 황비와 황녀의 대화에 끼어드느냐?”
주변의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그녀의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마땅히 아셔야 할 예법을 알려 드린 것입니다.”
“시녀가 황비에게 지켜야 할 예법은 없는 것이냐?”
“어긋난 점이 있다면 추후에 근거를 들어 벌하십시오.”
그녀는 고분고분한 듯했으나, ‘근거를 들어’ 벌하라는 말 속에는 뼈가 있었다. 카트린이 아무 근거 없이 시비를 걸고 있다는 의미임이 분명했다.
누군지도 모를 시녀 주제에 한 마디도 지지 않아?
시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물러나려 했으나 카트린은 그 태도에 더욱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는 뒤돌아서는 시녀를 기어이 붙잡아 돌려세웠다.
“아직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다!”
짜악- 황비의 손이 허공을 가르자 시녀의 뺨이 획 하고 돌아갔다.
“마야!”
잠자코 서 있던 아폴로니아가 비틀거리는 시녀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외쳤다. 카트린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숨을 씩씩거리며 황녀를 쏘아보았다.
* * *
저 미련한 것이!
이래서, 이래서 내가 최대한 사람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는데. 아폴로니아는 기세등등한 황비를 보며 속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짧은 인사만 하고 돌아서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다. 친해져도 귀찮을 것이 뻔해서 예의는 딱 예법에서 말하는 최소한만 갖췄다. 아폴로니아의 눈에는 그녀의 수작이 뻔히 보였다. 허울 좋은 황족이네 뭐네 해도 지난 7년간 그녀를 은근히 낮추어 보려는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상황과 상대를 파악 못 하는 황비라니.’
아폴로니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까부터 적당히 좀 하라는 사인을 몇 번이나 줬는데 미련하게 그걸 못 알아듣고 있다. 눈치 빠른 마야가 두 사람의 직접적인 대립을 막고자 중간에서 설명을 하지 않았나?
카트린에게 그 눈치가 절반만 있었어도 나이가 많은 마야를 봐주는 척 물러서면 체면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멍청하게도 이 황비는 모두의 앞에서 그녀의 뺨을 치며 주목을 끌어 버린 것이다.
‘그런 머리로 황궁에서 반년은 버틸까?’
아폴로니아는 마음속의 분노와 한심함 중 무엇이 더 큰지 알 수가 없었다.
“황후가, 황후가 있으면 모를까, 폐하의 옆자리가 빈 지금 첫 번째 황비인 나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어요.”
카트린이 붉어진 얼굴로 떼를 썼다. 궤변이었지만, 놀랍게도 옆에 있던 몇몇 젊은 귀족 남자가 한 마디씩 도왔다.
“황녀 전하, 로엔하임 황비님은 폐하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분입니다. 어머니로 대해서 나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나이로 보아도 윗사람이 맞으니 대우를 해 주시지요. 뻣뻣하게 굴어 봤자 전하께서 시집을 가고 나면 어차피 황실에 남는 분은 황비님입니다.”
보나마나 뇌물로 친해진 자들이다. 패리스 앞에서는 감히 이런 말을 못 할 텐데.
“언제 내가 황후가 될지 황녀도 모르는 일 아닌가요? 미리 그에 맞는 정식 예를 갖추어요.”
응원에 힘을 입은 카트린은 고개를 치켜들며 쐐기를 박듯 한 마디 덧붙였다. 어차피 상대는 어리버리한 소녀라는 점을 다시 깨달은 것이다.
아폴로니아는 마야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꼿꼿하게 서 있었으나 한쪽 뺨이 붉게 부어올랐다. 아폴로니아의 붉은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차갑게 변했다.
“그렇습니까.”
차가운 눈빛은 한순간이었다.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제가 어머니를 처음 만나는 날이로군요.”
아폴로니아는 카트린을 향해 한 발 다가서더니, 우아하게 한쪽 무릎을 굽혀 그녀에게 깊은 절을 했다. 흠잡을 것 없는, 가장 정중한 예였다. 카트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곧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진작 이렇게 하지 않고. 용서할 테니 일어나요. 앞으로는…….”
“태양의 땅에 비치는 달빛, 대지를 적시는 비, 빛의 그림자와 같은 분.”
그녀는 짐짓 아량을 베푸는 척 황녀에게 우아한 손을 내밀었으나 아폴로니아는 그 손을 쳐다보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의 눈빛으로 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기적이여…….”
그녀는 길고 긴 인사말을 읊기 시작했다.
“황, 황녀? 인사가 그렇게 길 필요가…….”
주변에는 상당히 많은 구경꾼들이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사를 읊어 내려갔다.
“그대의 영광이 곧 제국의 영광이 되기를, 그대의 지혜가 제국의 양식이 되기를…….”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당황한 카트린이 옆에 있던 측근에게 속삭이며 묻자, 그는 똑같이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이것은…… ‘황후의 서’ 같은데요.”
“그게 대체 뭔데?”
“그것이…… 새로 맞는 황후에게 황실 가족이 하는 인사 같은 겁니다. 엄청나게 길고요. 문제는…….”
귀족이 아폴로니아 쪽을 흘끔 보았다.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주문 같은 말을 술술 읊고 있었다.
“은빛 월계수 관을 쓰고 태양의 옆에서 미소 짓는 분, 온화함으로 제국에 영화를…….”
그녀의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는 카트린이 애가 닳아 귀족을 재촉했다.
“문제가 뭔가? 인사는 언제 끝나는 거야?”
“중간중간에 황후가 답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황후의 서’는 제국 전통의 황후 책봉식 예법 중 가장 복잡하고 지루한 절차였다. 쓸데없이 길고 화려한 인사를 황실의 누군가가 외워서 하면, 중간중간에 황후가 말을 이어 정해진 답을 해야만 했다. 황후로서의 첫 번째 시험이자, 일종의 서약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다.
황후로 책봉된 여인들은 상당한 시간을 들여 서를 외웠다. 답문을 틀리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러니까 지금 황녀가 하는 것이…….”
“예. 말 그대로 황후에 대한 정식 예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카트린은 이마를 짚었다. 융통성도 없는 것! 누가 예식을 치르자고 했나, 그냥 인사나 잘 하라는 거였지! 그녀는 ‘황후의 서’를 외우기는커녕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내용을 틀리면 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그 미덕 중 으뜸은…….”
아폴로니아가 공손한 자세로 한참을 중얼거리다가 말꼬리를 흐리며 카트린을 바라보았다. 그 문장은 카트린이 끝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으뜸은…… 그러니까 미덕의 으뜸은…….”
카트린이 말을 더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런 실용성 없는 인사를 외우는 측근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의 상식을 발휘해 답을 맞혀야 했다.
“우, 우아함과 겸양?”
자신 없는 그녀의 대답에 아폴로니아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강인함입니다.”
가만히 있던 마야가 얄밉게 끼어들며 답을 고쳐 주었고, 카트린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아폴로니아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태양을 마주 볼 수 있는 유일한 분, 마주 본 그와의 맹세로 서로를…….”
아폴로니아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로를…… 사, 사랑할 것입니다?”
“‘존중할 것’입니다.”
마야가 다시 끼어들었다.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이 웃음을 애써 참는 것이 보였다. 카트린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으나 이제 와서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이놈의 서는 언제까지 읊으려는 건가!
“주군을 섬기는 신하와 같이, 아버지를 섬기는 자녀와 같이…….”
“남편을 섬기라, 그것 아닌가!”
이번에는 감을 잡은 카트린이 아폴로니아의 말을 끊으며 외쳤다. 워낙 다급해서 스스로 반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시는군요.”
아폴로니아가 감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릎을 편 모습이, 드디어 인사를 끝낸 것이었다.
“‘황후의 서’를 모를 수가 있나요? 중간에는 조금 헷갈린 것뿐이라고요!”
“전하.”
딱딱하던 마야가 이번에는 약간의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카트린이 똥이라도 밟은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았으나 마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뗐다.
“‘황후의 서’는 아까 끝났습니다. 방금 황녀 전하께서 하신 말씀은 동방의 격언이지요.”
“뭐, 뭐야?”
카트린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원하시던 정식 예의 마지막에는 원래 축복의 말을 붙이는 것이 관례인지라…….”
주변에서 와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터졌고, 카트린은 머리끝까지 시뻘게지고 말았다. 그리고 카트린은 보았다. 웃고 있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자신을 보는 아폴로니아의 얼굴을.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분명히 작은 미소가 아폴로니아의 입가를 스치고 있었다. 카트린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야, 경솔하게 말하지 마.”
카트린을 정말로 화나게 한 것은, 그 자리에서 그녀를 대놓고 비웃지 않는 사람은 아폴로니아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시녀 입을 빌려 자신에게 망신을 준 것이 분명함에도 온화한 가면을 쓰고 시녀를 타이르고 있다. 그 위선에 카트린은 치가 떨렸다.
“그럼, 저는 피곤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폴로니아가 미소를 띠고 돌아서려 하자 구경꾼들 틈에서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카트린의 자존심을 깎아 내고 있었다.
“하이고, 본전도 못 챙겼네.”
“황녀 전하께서는 그저 하라는 대로 하셨을 뿐인데 말이죠.”
“제 발등을 찍은 거죠. 설칠 때부터 알아봤지.”
카트린은 이를 으득 갈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 때문에 저 따위 말을 듣다니. 이대로 상황을 끝내는 것은 싫었다. 어떻게든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지배했다.
찌이이익-
“잘 가요. 황…… 어머, 이런 실수를.”
카트린은 어색하게 인사하며 아폴로니아의 드레스 자락을 살짝 밟았다. 그저 역겨운 가면을 잃고 비틀거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녀의 의도대로 드레스는 밑단만 살짝 찢겼으나, 다음 순간 더 큰 문제가 일어났다.
와장창-
카트린이 그 사소한 복수에 긴장한 나머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려다가 테이블 위에 있던 사기 주전자를 떨어뜨린 것이다. 주전자는 하필 아폴로니아의 몸에 맞아 깨졌고, 아폴로니아는 그 파편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
아폴로니아는 큰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어머나! 황녀 전하, 괜찮으십니까?”
“상처를 보여 주세요, 전하! 피가 납니다.”
“누가 의사를 부르시오!”
사람들이 소란에 놀라 몰려들었고 카트린은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옆에 있던 마야가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파편에 찢겨 피가 흐르는 아폴로니아의 왼쪽 팔을 감쌌다.
“괜찮습니다. 제 방에서 치료할 테니 모두 연회로 돌아가세요.”
괜찮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그날 밤 처음으로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카트린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고, 팔의 고통도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처를 숨길 수 있을까?
아폴로니아는 뜨거운 찻물이 피와 함께 뚝뚝 흐르는 팔을 손수건으로 꽉 싸고 눈으로는 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녀는 마야의 팔을 잡고 빠르게 연회장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너무 늦고 말았다. 연회장을 나서려는 순간, 익숙한 그림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세상에 황녀 전하, 팔이 어찌된 것인가요?”
말의 내용과 달리 기계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것은 황실의 진짜 실세인 여인이었다.
“고모님…….”
페트라 리페르.
완벽하게 틀어 올려진 검은 머리카락과 치켜 올라간 눈썹 밑에, 황금색 눈동자가 마치 잡아 놓은 먹이를 보듯 아폴로니아를 내려다보았다. 차디찬 그 얼굴에 걱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아…… 망했다.’
아폴로니아는 자신의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처음부터 아폴로니아는 카트린과의 신경전 따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황궁의 규율이 우선해서도 아니고, 그런 은근한 여인들의 권력 다툼이 의미 없어서도 아니었다.
카트린 로엔하임은 애초에 황궁을 장악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수도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카트린과 몇몇 측근들뿐이었다.
“소란이 있다고 하더니 사실인가 보군요.”
황궁의 진짜 안주인은 따로 있었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의 페트라 리페르. 황제의 여동생이자 리페르 공작 부인이었다.
가이우스 황제는 그 여동생인 페트라를 끔찍이도 신뢰했다. 그녀는 오빠를 닮아 과감하고 똑똑했고, 가이우스 이상으로 잔인하고 치밀했다.
사업 수완이 좋았던 그녀는 십수 년 전, 혼자 힘만으로 실크와 장신구를 사고파는 작은 상단을 차렸다. 그녀의 상단 ‘루완’이 제국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에는 5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페트라는 사업으로 번 돈을 아낌없이 투자해 지방 유지에 불과했던 리페르 가문의 영향력을 드높였다. 일각에는 가이우스와 엘레니아의 만남을 처음 주선한 것도 페트라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정치에도 능한 그녀는 엘레니아 황녀가 죽은 뒤 사실상 황실의 살림을 마음껏 주무르고 있었다.
“손님 대접을 제대로 못 한 시종들의 탓일까요.”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근처 시종들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만큼 모두가 페트라의 권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페트라의 시선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7년 전 엘레니아와 선황의 장례식에서, 페트라는 아폴로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죽은 듯 살아라. 살고 싶으면 어떤 특별함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녀는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표정으로, 덜덜 떠는 아폴로니아를 두고 멀어졌었다. 그리고 아폴로니아는 그 후 온 힘을 다해 페트라의 조언을 따랐다.
“팔을 보여 주시지요.”
“많이 다치지 않았습니다.”
아폴로니아는 팔을 뒤로 숨겼으나 페트라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조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출혈에 비해 상처는 깊지 않군요.”
페트라는 안도한 듯 말했으나 그 눈에는 의아함이 엿보였다. 아폴로니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페트라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잡은 상태로 몸을 기울여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아폴로니아에게 속삭였다.
“신기하게도.”
“손수건으로 싸고 있어서 번진 겁니다. 출혈도 심하지 않아요.”
아폴로니아는 급하게 대답하고 손을 빼며 복도로 뛰어나갔다. 대답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벌써 조금 전보다 옅어진 상처를 보며, 아폴로니아는 딱 한 가지만 생각했다.
‘들켰을까?’
* * *
사마라 제국의 황족들은 태양신 아폴론의 후손이라고 한다. 신은 그 자식을 유독 사랑하여 자신의 몇 가지 특징을 물려주었다. 태양 같은 밝은 금발, 붉은색에 황금빛이 살짝 섞인 불꽃 같은 눈동자, 상처에서 빨리 회복되고 불에 타지 않는 강인한 신체가 그것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피는 옅어져 아폴론의 상징도 흐려졌지만 일부 황손들은 여전히 그중 몇 가지 특징을 타고났다. 인간 같지 않은 완력을 가졌던 파스칼 3세가 그 예였다.
아폴론의 힘과 외모가 나타나는 정도가 사람마다 달랐기에, 황실에서는 오래전부터 그 특징이 짙은 자를 후계자로 선호했다. 신의 피를 최대한 황실 안에서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했고, 신의 상징은 그 자체로 제국민의 인기를 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재 아폴로니아가 위험에 처한 이유였다.
“하아…….”
그녀는 황제궁을 벗어나 쉬지 않고 달렸다. 그녀는 별궁 침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살짝 손수건을 떼고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별다른 사람을 마주치지 않았다.
‘출혈에 비해 상처는 깊지 않군요.’
몇 분 사이에 상처가 호전되었다. 꽤 깊이 베였지만 아마 이삼일이면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아폴로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페트라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쾅쾅거리는 심장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불운하게도 아폴론이 주었다는 특징들을 거의 다 갖춘 황족이었다. 어머니만큼이나 밝은 금발과 짙은 붉은색에 금빛이 어우러진 그녀의 눈은 그 자체로 태양을 연상시켰다.
외모를 숨길 수는 없기에, 그녀는 아버지 앞에서 병약한 듯 행동했다. 어머니가 그랬듯, 외모를 제외하면 어디 하나 지배자다운 구석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거짓이었다. 그녀는 체질적으로 외할아버지만큼이나 엄청난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아폴로니아는 일부러 사람들을 피했다. 실수로라도 다치면 회복하는 모습을 들키게 될까 봐.
그렇게 잘 숨겨 왔지만 오늘 페트라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아니, 페트라의 확신 어린 표정을 생각하면 의심 정도가 아닐 것이다.
“마야, 시드를 불러 줘.”
어느새 따라와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살피는 그녀의 유모에게, 아폴로니아가 지시했다.
“전하의 팔이…….”
“팔은 괜찮아. 잘 알잖아.”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보아 왔던 마야는 당연히 아폴로니아의 체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야는 그녀의 몸에 난 작은 상처 하나를 두고 보지 못했다.
“뺨 먼저 치료하도록 해. 그러고 나서 시드를 불러 줘.”
“저야말로 괜찮습니다.”
마야는 정말로 괜찮다는 표정이었다. 세를 잃은 아폴로니아를 돌보며 그녀가 겪은 일은 뺨 한 대 정도가 아니었다. 새삼 떠오른 기억에 아폴로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이 돼서 그래. 나는 빨리 낫겠지만 마야는…….”
“전하의 안위는 저의 책임이나 저의 건강은 전하의 책임이 아닙니다. 작은 것에는 일일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야는 조금 전 로엔하임 황비 앞에서 그러했듯 강단 있는 태도로 잘라 말했다. 그녀는 엘레니아 황녀의 하녀였던 시절부터 지나칠 정도로 충성심이 깊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아폴로니아 곁을 지키는 것이었다. 고집도 세기에 바른말로 주인의 태도를 바로잡아 주는 일도 많았다. 아폴로니아는 그 성격을 잘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 둘 다 치료 같은 작은 일은 접어 두기로 하지.”
“시드 바이안 경을 바로 모시겠습니다.”
마야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아폴로니아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시선은 쉽게 아폴로니아의 다친 팔을 떠나지 못했다.
아폴로니아의 팔, 마야의 부어오른 뺨. 그런 것들은 작은 문제였다.
지금 걱정할 것은 아마도 목숨이었다.
* * *
아폴로니아가 뛰쳐나간 후 연회장은 계속해서 술렁였다. 황제의 총비가 황녀와 다투다가 주전자로 황녀를 다치게 했다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저 위험한 것을 어서 치우지 않고 뭐 하는 거지? 귀한 분들이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나?”
페트라는 황궁의 시종에게 직접 지시하여 여전히 피가 묻어 있는 주전자 파편을 정리하게 했다. 그리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상황을 정리하며 천천히 사람들 틈에서 겁에 질려 있는 카트린에게 다가갔다.
“리페르 공작 부인…….”
“황비, 이게 무슨 일입니까?”
카트린은 리페르 공작 부인과 제대로 인사한 적이 없었다. 황제가 여동생을 신임한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기껏해야 흔한 남매의 정이겠거니 여겼을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내심 총애받는 황비로서 페트라를 누르고 황제의 옆자리를 완벽하게 꿰차리라 생각도 했다.
그러나 정면에서 그녀와 맞닥뜨린 지금, 카트린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미련했는지 온몸으로 느꼈다.
연회장의 모든 손님들은 페트라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집중했다. 황실의 시종들은 그녀의 지시에 번개처럼 반응했다. 카트린에게 보였던 공손함과는 차원이 다른 복종이었고 페트라는 그것에 익숙해 보였다.
무엇보다 카트린을 긴장시킨 것은 페트라의 그 눈빛이었다. 맹수를 닮은 금안은 상대가 어디로 도망치든 잡아서 사지를 찢어 놓을 것처럼 번뜩였다. 그 소름 끼치는 응시에 카트린은 다리 힘이 살짝 풀렸다.
“공작 부인, 무엇을 보셨는지 몰라도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주전자는 그저 실수로…….”
“황녀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예?”
“황후가 없으니 황후에 준하는 인사를 받으시겠다고요?”
페트라의 시리도록 차가운 시선이 카트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제야 카트린은 페트라가 어디서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공작 부인, 저는 그저 황녀와 친하게 지내고자…….”
“예의도 모르는 황녀 전하를 가르치겠다 이 말씀이시지요.”
페트라가 피식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폐하께서 제게 궁 내부의 관리를 맡기셨음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니, 황비께서는 제 일처리가 참 답답하셨나 봅니다.”
궁의 실질적인 안주인인 페트라는 황후 노릇을 해 보겠다는 카트린의 말을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카트린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황궁이 그렇게도 부족해 보였다면 문제를 해결해 드려야지요.”
페트라는 느릿느릿 여유를 부리며 말했으나 그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얼음 같았다.
“황비…… 아니 로엔하임 자작 영애를 끌어내라.”
페트라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떨어졌다.
손님들은 웅성거렸고 카트린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무슨,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폐하와 혼약을 맺은 사람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나를 끌어낸단 말…….”
“황실 질서를 어지럽히고 황족을 다치게 한 것은 반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그대는 죄인입니다.”
페트라는 냉정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황실의 질서니 황녀의 안위니 하는 것은 그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를 핑계 삼아 황비를 끌어내렸다. 황궁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시종들이 벌써 카트린의 양옆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다 실수였단 말입니다.”
카트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상황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낀 그녀는 필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그녀의 시선이 멀리서 걸어오는 한 남자의 몸에서 멈추었다.
“폐, 폐하! 폐하!”
카트린은 자신의 생명줄을 붙잡듯이 연인이자 남편인 그를 불렀다. 큰 키가 눈에 띄는 황제는 연회장 반대편에서 천천히 페트라와 카트린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공작 부인이 다 무언가. 황제는 그녀를 구해 줄 것이다.
그녀는 연회 시작 직전에 가이우스가 자신을 보던 따뜻한 시선을 떠올렸다.
“페트라, 이게 무슨 소란이냐?”
그러나 황제는 그녀의 외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페트라에게 물었다.
“로엔하임 양이 황녀 전하를 다치게 했습니다, 폐하. 황후 대접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요.”
페트라의 말에 황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닙니다. 폐하! 이것은 오해…….”
“황족의 피를 흘리게 한 것은 중죄입니다. 폐하. 황녀 전하뿐 아니라 그 시녀에게도 손을 댔으니 오해일 수가 없습니다.”
황제가 편을 들어줄 거라는 카트린의 작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동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과연 중죄로다.”
황제의 입이 열리자 카트린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떤 처분이 맞겠느냐?”
불과 며칠 전 카트린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페트라에게 물었다.
“황실에 도전하는 자는 이 제국이 품을 수 없는 줄로 압니다. 폐위하고 추방하심이 적절하지요.”
“아니, 그것은 적절하지 않구나.”
“전하! 지나친 벌입니다!”
페트라의 제안에 사색이 됐던 카트린은 황제의 답을 듣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으며 외쳤다. 그러나 희망은 다음 순간 절망으로 바뀌었다.
“황녀를 모욕하고 그 위에 서려는 시도만 해도 중죄이나, 그 몸에 상처를 입힌 자를 그냥 놓아줄 수는 없다.”
황제가 서늘한 시선을 그녀에게 던졌다.
“카트린 로엔하임은 폐위한다. 그리고 3일 후…….”
황비의 측근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들은 나서야 할지 물러서야 할지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단두대에 올려라.”
황제의 말이 끝나자 연회장에 정적이 맴돌았다. 카트린은 온몸에 힘이 빠져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측근들은 서로를 잠시 마주 보다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황제의 눈에 띌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폐, 폐하…….”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카트린의 양팔을 잡고 거칠게 문 밖으로 끌어냈다. 황제는 그저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뗐다.
“음악을 다시 시작하지.”
악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 지시에 따랐다.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흥겨운 음악 속에서, 모두가 질려 버린 안색을 숨기기 위해 어색하게 술을 마시는 기괴한 분위기가 연회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 * *
연회는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끝났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면서도 절차적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 연회에서 손님들은 페트라 리페르의 능력을 다시 확인했다.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한미한 가문 출신의 황비들에게 줄을 대려 했던 몇몇 사람들은 카트린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황실을 장악한 것은 황제와 그 가문이다.’
황제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앞으로는 리페르 가문을 제외한 그 누구도 황실을 장악해 보겠다며 허황된 도전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연회가 끝난 밤, 황제는 잠들지 않고 서재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황제는 마흔이 다 되는 나이에도 주름 없이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리페르가의 상징인 큰 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와 밝은 황금빛 눈동자는 거대한 늑대를 연상시켰고 이는 어린 황비들은 물론 황실 시녀들까지 반하게 하는 데에 충분했다.
“폐하, 오셨습니다.”
시종의 안내에 따라 서재에 들어와 공손히 예를 갖추는 여인은 황제의 동생 페트라였다. 황제는 손짓으로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고 시종을 물렸다.
“날이 춥습니다. 더 두꺼운 옷을 입으셨어야죠.”
페트라가 말했다. 그녀의 검고 곧은 머리카락은 언제나 그렇듯 틀어 올려져 있었다. 그 밑으로 황제와 꼭 닮은 황금안이 빛났다.
“난 괜찮으니 너나 많이 입어라.”
황제가 무심히 대꾸하자 페트라는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그럼 따뜻한 것이라도 많이 드세요.”
교태도, 친절함도, 타인에 대한 동정심도 없기로 유명한 페트라는 유일하게 오라비인 황제에게는 조금의 다정함을 보였다.
“로엔하임 자작은 소식을 들었다더냐?”
“전 재산을 바치겠다며 딸의 목숨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자작의 전 재산이라…… 얼마쯤 되는지 파악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한 번 내린 명령을 뒤집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페트라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황제를 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냉정하기는…….”
“남 말 하십니다. 기회를 봐서 누구든 눈에 띄는 황비 한 명을 내쫓으라고 명하신 것이 폐하인데요. 처형을 명한 것은 또 누구입니까?”
제국을 통틀어 황제에게 이렇게 편하게 대꾸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 한 명뿐이었다.
“하하, 그랬지. 입궁한 지 열흘 만에 그렇게 설치는 황비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노골적으로 욕심을 드러내더군요. 다른 황비들은 멍청해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았나 봅니다.”
“미련한 딸을 살려 보겠다고 아예 영지를 다 바치겠다니 이해할 수 없군.”
황제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두어 번 찼다. 그의 얼굴에 황비에 대한 미안함이나 안쓰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카트린 로엔하임의 폐위는 사실 황제가 세운 계획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일부러 한미한 가문의 딸들만을 선별해 황비로 맞았고, 기회를 보아 그중 한 명을 폐하여 본보기로 삼을 생각이었다.
‘누구든 황제의 명령이면 인생이 한순간에 뒤집힐 수 있다.’
황제가 주고 싶은 교훈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동생에게 폐해질 황비와 그 시기에 대한 선택을 위임함으로써 리페르가의 권위도 세웠다.
“부녀간에 정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황제는 피식 웃었다. 페트라가 다음에 꺼낼 주제를 알 것 같았다.
“황녀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또 그 이야기구나.”
“주전자에 베였던 상처가 낫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 애는 피가 짙어요.”
“회복력이라…….”
황제는 잠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곧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네 눈썰미를 못 믿는 건 아니다만, 짧은 시간에 그것을 정확히 볼 수가 있느냐?”
“상처도 상처이지만, 숨기려는 태도는 확실했습니다.”
“그 애 성격이 소심한 것이겠지.”
“살려 두면 위험한 아이입니다. 외모뿐 아니라 강한 체질까지 계승했다면…….”
“네 말이 맞다고 치자.”
황제는 동생의 말을 끊고 달래듯 부드럽게 설명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위험할 것이 뭐가 있지? 상처가 빨리 나은들 유약한 성격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정통성이…….”
“제국 천년 역사에서 여황제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페트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위에 올랐던 이들은 다수가 명군으로 칭해졌습니다.”
“시대를 잘 탔던 것뿐이다. 여인은 원래 통치에 적합하지 않아. 가장 잘난 여인도 결국 사내를 보조할 때 의미가 있다.”
그의 말에 페트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그녀의 표정은 황제가 보기 전에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너조차도, 나의 곁에서 가장 빛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이 네 본분이기 때문이다. 리페르의 모든 여인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그는 오만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폴로니아도 다르지 않다. 너와는 비교도 안 되게 유약한, 제 어머니를 닮은 그 애의 성정으로 정치는 어림도 없지.”
페트라는 다시 반박했다.
“자기 어머니가 그런 것처럼 강한 사내와 결혼하여 후계를 이으면요? 패리스가 머리색은 감추어도 눈동자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녀가 문제 삼는 것은 아폴로니아의 성정이 아니었다.
“그 애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 문제는 그 애의 특징을 보고 황녀나 그 후계를 지지할 대신들이지요.”
아폴로니아의 기질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사실 황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페트라를 볼 때마다 도망가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페트라는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용하기에 따라서 그 애의 결혼은 우리에게 크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딸의 혼사에 대한 결정권은 나에게 있어.”
“…….”
“패리스 또한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지. 황실 핏줄이라는 것도 별것 없다는 거다.”
그는 ‘황실 핏줄’이라는 말을 하며 역겨움을 숨기지 않았다. 페트라는 한숨을 쉬면서도 황제의 말에 동조했다.
“……예, 폐하.”
마지못한 대답에 황제는 만족한 듯 손을 두 번 저어 자리를 물렸다. 페트라는 쓸데없는 인사로 시간을 끌지 않고 서재를 나왔다. 황실의 정문에 대기하는 마차로 향하면서 그녀는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살짝 미소 지었다. 아폴로니아에 대해 마음을 놓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피로를 만나야겠다.”
마차에 오르기 전, 그녀는 심복에게 속삭였다.
“처리할 사람이 있어.”
직접 처리해 버리면 끝날 일 아닌가.
* * *
아폴로니아는 침대 머리맡에서 양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넓은 침대는 웅크린 그녀를 더욱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으로 복잡했다.
내일이면 카트린 로엔하임 황비는 황궁에 없을 것이다. 페트라가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면 뻔한 결과였다. 욕심만 앞섰던 카트린은 애초부터 황궁에서 살아남을 능력도 배경도 없었기에, 경쟁자가 누군지 미처 분간하기도 전에 끝났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사람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아폴로니아는 지난 7년간의 일을 하나둘씩 머릿속에 떠올렸다.
“저것을 타고 싶습니다, 어머니.”
그녀가 열 살 때, 페트라의 첫째 아들인 가레스는 아폴로니아가 탄 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탐냈던 것은 눈처럼 새하얀 갈기가 부드럽게 떨어져 내려와 윤기 나는 몸통을 덮는 아름다운 조랑말로, 아폴로니아가 승마를 처음 배웠던 때부터 타 왔던 말이었다. 녀석은 아폴로니아 외의 사람을 태우는 것을 싫어했기에 그녀는 양보하기를 거절했다.
페트라는 장례식 때 보여 주었던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며 아폴로니아의 양 어깨를 잡았다. 누가 보아도 어머니를 잃은 황녀를 돌보는 고모의 모습이었으나 그 손아귀의 힘은 어깨를 부술 것만 같았다. 페트라는 칼날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말을 주고 싶지 않다면 좋다, 니아. 그러나 네 시종 한 명이 저 말을 대신해 가레스의 노예가 될 거야. 너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거다.”
그녀는 몸을 떼고 아폴로니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 무슨 무례냐, 가레스. 용서하세요, 황녀. 소중한 것을 어떻게 남에게 주겠어요. 소중한 친구가 가레스의 손에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지요.”
아폴로니아는 페트라가 조랑말이 아닌 시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그저 말을 두어 번 쓸어 주고 가레스에게 선물로 하사했다. 새 주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그 말은 이틀 만에 마물의 숲에 버려졌다. 한쪽 다리가 부러진 채로.
아폴로니아가 열두 살 되던 해,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자 패리스의 검술 스승이던 케네스 경은 그녀에게도 검술을 가르치겠다고 자원했다. 변방의 전쟁이 잦은 제국에서 검술은 귀족들 사이에 꽤나 중요한 상징적 가치를 가졌다. 황제는 지그시 케네스를 바라보다가 아폴로니아에게 물었다.
“너도 배우고 싶으냐?”
아폴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페트라는 걱정스러운 듯 한마디 했다.
“그 위험한 것을 황녀가 배운다니 걱정이 됩니다. 섣불리 그런 것을 잡았다가…….”
그녀는 아폴로니아에게 소름 끼치는 미소를 던지며 말했다.
“소중한 황녀께서 어디 하나 부러지면 큰일이지요.”
황제는 그저 껄껄 웃더니 조금 더 생각해 보자고 부드럽게 말하고 자리를 물렸다. 그러고는 열흘 뒤 마물 섬멸을 핑계로 케네스를 변방으로 보내 버렸다. 열악한 환경에서 케네스는 병사 절반을 잃고 팔에 장애를 입은 채 낙향했다.
열네 살 때, 페트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폴로니아의 얼굴에 손을 댔다. 엘레니아의 유품이었던 책을 망가뜨린 패리스와 가레스를 별궁 밖으로 내쫓았다는 이유였다.
짜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아폴로니아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고통과 수치로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고통보다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력감이었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황녀의 방에서 페트라는 짧고 명확하게 경고했다.
“어떤 소중한 것도 네 것으로 지킬 생각 마라.”
그날 저녁, 황제는 아폴로니아의 부은 뺨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어떤 특별함도 드러내지 말아라.’
웅크리고 있으려니, 페트라가 처음으로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아폴로니아는 무릎에 놓인 제 양손을 꽉 쥐었다. 그녀는 노력했다. 정말로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7년 만에 결국 실패했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제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복잡하던 생각이 결단과 함께 정리되었다. 진홍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났다. 평온한 호흡이 돌아왔고 머리는 맑았다.
어린 아폴로니아라고 해서, 지난 7년을 허비한 것은 아니다. 아폴로니아는 페트라의 두 번째 조언을 떠올렸다.
‘어떤 소중한 것도 네 것으로 지킬 생각 마라.’
다행히 그녀는 두 번째 조언은 전혀 따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폴로니아에게는 소중한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정신만 차리면 그것들이 그녀를 지켜 줄 터였다.
* * *
황제와 페트라는 궁의 모든 것을 자신들이 장악했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틀렸다. 선황은 생각보다 비밀이 많은 사내였던 것이다.
첫째, 아폴로니아가 거주하는 별궁에는 그들이 모르는 기능이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원래 황녀궁에서 지냈어야 하지만, 가이우스의 즉위 후 그렇게 큰 공간은 필요 없다면서 스스로 잘 쓰이지 않는 별궁으로 향했다.
황궁 담장 안에 있지만 그 중심인 황제궁과는 애매하게 떨어져 있는 별궁은 선황 대에 손님에게 내주기 위해 지었던 건물이었다. 그것이 표면적인 용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황제의 비밀을 숨겨 놓는 기능을 했다.
선황은 다른 궁은 물론 궁 밖으로도 이어지는 수많은 비밀 통로들과 여러 가지 비밀의 방을 별궁 구석구석에 숨겨 두었다. 혹시라도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습격을 대비한 것이었으며, 황실 장부에서 빠진 보물을 숨기는 장소이기도 했다.
보물 중에는 황금이나 왕관, 보석 같은 것도 있었고, 더욱 희귀한 것으로는 대륙 전체를 뒤져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 마정석도 있었다. 이는 주술에 사용되기도 했고, 사람의 힘으로 깨뜨리기 어려운 마구 등 무기를 만드는 데에도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아폴로니아는 선황의 보물 상당 부분을 황국 바깥, 특히 리페르 가문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는 데 사용했다. 물론 페트라나 그 남편의 최측근까지 접근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꽤나 쓸 만한 간자들을 동원해 페트라의 소식을 파악하고는 했다.
둘째, 별궁의 사용인들 중 아폴로니아를 가까이서 시중드는 몇 명은 시드 바이안이 직접 선별한, 무척 충성스러운 아폴로니아의 사람이었다.
별궁을 관리하는 시드 바이안은 한때 선황의 오른팔이자 황실 기사단장이었고, 전공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백작 위와 영지를 수여받았던 그의 권위는 가이우스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아폴로니아는 7년 전 그에게 가이우스와 패리스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아폴로니아가 탄생한 날부터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시드는 망설임 없이 충성스러운 시종들 몇을 골라 별궁을 채웠다.
물론 페트라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웠지만 최소한 아폴로니아의 음식이며 시중을 직접 담당하는 자들은 변심하여 페트라의 사람이 될 일은 없었다. 간혹 페트라 쪽과 가까운 시종들이 들어오면 그는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그들을 아폴로니아의 곁에서 밀려나도록 했다.
그것이 다였다. 아폴로니아의 소중한 것들. 그것들을 모두 합쳐도 페트라의 공격 한 번을 막아 내기는 쉽지 않았다.
“시드, 밤손님 맞을 준비를 해.”
아폴로니아는 중년의 호위 기사를 불러 말했다. 젊은 시절부터 타고났던 회색 머리칼, 그리고 머리색과 비슷한 잿빛 눈동자는 한때 전쟁터에서 악귀의 상징이 되어 적군을 공포로 몰아넣었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에게 그는 차가운 황궁의 한 가닥 온기였다.
“공작가입니까, 황제입니까?”
그는 핵심만을 물었으나 눈으로는 주군의 기분을 살폈다. 당신을 죽이려는 것이 고모일까요, 아버지일까요? 이것은 열여섯 살 소녀에게는 잔인한 질문이었다.
“일단은 고모님. 자객일지 간자일지 아직 모르겠지만 은밀히 누군가를 보내려 할 거야.”
“간자라면 새로 들어오는 사용인을 면밀히 살펴야겠군요. 그리고…….”
그는 차마 다른 경우를 입에 담지 못했다. 정작 아폴로니아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말을 대신 마쳤다.
“자객이라면, 언제 칠지가 관건이겠지.”
“그렇습니다. 몇 달은 걸리겠지요. 황제의 눈을 피해서 보내든, 황제를 설득하든 시간이 걸릴 겁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이성적인 분석이었다. 그러나 페트라는 상대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허를 찌르는 사람이었다.
“3일.”
아폴로니아가 딱 잘라 말했다.
“3일 내에, 연회의 열기가 식기 전에 올 거야.”
황녀 시해를 덮어씌울 훌륭한 방패막이인 카트린 로엔하임의 스캔들이 사라지기 전에.
시드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빠르게 수긍했다. 그의 어린 주군은 가끔 예언에 가까울 정도의 통찰력을 발휘하고는 했고,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것은 항상 맞아떨어졌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시간이 촉박해.”
“전에 말씀드렸던 결계를 사용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폴로니아는 확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읽은 시드가 말을 이었다.
“만일을 위해 몸을 피하시지요.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런 얄팍한 수는 안 돼.”
아폴로니아는 잘라 말했다. 그런 흔한 수는 페트라가 보낼 암살자라면 백 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것이다.
“내가 자리를 피했다는 보고가 페트라의 귀에 들어가면 나는 어차피 죽어. 누가 오든 무조건 침실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해. 그리고 다시는 나갈 수 없게 해.”
냉철한 그녀의 판단에 시드는 다시 한 번 수긍했다.
“걱정 마십시오. 마정석으로 만든 결계를 뚫을 수 있는 검사는 제가 아는 한 대륙을 통틀어 두 명입니다. 한 명은 저, 한 명은 현 황제 폐하입니다. 아무리 페트라 리페르의 사람이라도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조금 더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으로 들이고 나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문제인 거겠지. 이번에 성공한다면 고모님의 의심을 어떻게 벗어날지도.”
“분명 성공할 테니 심려 마시지요.”
두 사람은 몇 번이나 계획을 되짚어 준비했다. 모든 것은 이치에 맞고 합리적이었다. 그녀는 이번 고비를 넘길 것이다.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다만, 리페르가의 수중에 페트라 자신조차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수준의 천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