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rologue (1/34)

Prologue

“폐하, 황녀 전하와의 혼약을 파기해 주십시오. 모든 책임을 왕국에서 지겠습니다.”

로뮈르 왕국의 제1왕자, 놀란 로뮈르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낭만에 젖은 잘생긴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사마라 제국의 황제 가이우스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물었다.

“아드리안 리스 영애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여섯 번째였다.

“황녀의 약혼자인 그대가 황녀의 시녀를 사랑해? 대륙의 왕자라는 놈들은 왜 다들 그 모양인가?”

로뮈르 왕자는 이제 22살이 된 아폴로니아 황녀의 여섯 번째 약혼자였다. 그리고 곧 여섯 번째 파혼자가 될 예정이었다.

파혼 절차는 항상 같았다. 그들은 제국을 방문하고, 예정대로 황녀와 약혼식을 치르고, 방문이 끝나기도 전에 시녀와 바람이 났다. 로뮈르 왕자를 포함해 세 명의 경우, 바람 상대는 모두 황녀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아드리안 리스였다.

평범한 시녀였다면 머리가 열 개라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드리안 리스는 살아 있었다. 살아서 계속 왕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 부탁을 들어주세요.”

분노한 황제 옆에서 아폴로니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둘의 사랑을 축복해요.”

주인인 아폴로니아가 배신당한 줄도 모르고 그녀를 싸고돌았기 때문이었다.

“니아.”

“저는 왕자와 결혼 안 할래요, 아버지 곁에서 평생 살고 싶어요.”

그녀는 괜찮은 듯 말했으나 목소리도 속눈썹도 떨리고 있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예뻐야 할 긴 금발이 힘없이 늘어졌다. 어제까지도 왕자의 눈짓 한 번에 수줍게 얼굴을 붉혔던 그녀는 결국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쏟았다.

“저, 저는, 정말…… 괜찮아요.”

가련하고 답답하고 한심했다.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배알이 없으니 약혼자들을 빼앗기는 게지.’

황제는 혀를 찼다. 제국 유일의 황녀라는 지위를 가지고, 못생기지도 않은 얼굴을 가지고서도, 아폴로니아는 자기 약혼자들을 지키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나도 조용한 성격 탓에 눈에 잘 띄지 않았으며, 순진함이 과해서 매력도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혈통에 어울리지 않게 병약해서 술과 연회를 싫어했다.

반면 반짝이는 녹안의 아드리안은 언제 어디서나 활기 넘치는 미인이었던 것이다.

‘매력도 없으면서 작정한 듯 미녀들만 시녀로 두다니, 이런 멍청한 여자가 어디 있는가!’

약혼자를 몇 명이나 빼앗아 간 시녀를 싸고돌며 바득바득 곁에 두는 한심한 딸.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저는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아폴로니아가 가련하게 울먹였다.

가까운 시녀들에게 앞서 세 명의 가까운 시녀들에게 약혼자를 빼앗겼을 때도 아폴로니아는 그들을 벌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약혼자가 마물에게 습격당한 그녀를 내팽개치고 시녀만을 구했을 때에도, 황녀 자신의 궁에서 벌거벗고 뒹구는 두 남녀를 찾았을 때에도, 연회장에서 공개적으로 시녀에게 입을 맞춘 약혼자를 보았을 때에도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물러섰을 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두 사람이 잘 살면 좋겠어요.”

심지어 그들에게 왕자들과 결혼하라고 혼수까지 쥐여 주었다. 황녀의 시녀직이 좋은 혼처로 가는 등용문이라는 소문이 돌아 경쟁이 치열해질 정도였다. 점점 아름다운 시녀들이 들어왔고, 약혼자들의 눈은 즐거워졌다.

아드리안도 하급 귀족의 수양딸이라는 미천한 신분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왕비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미련하기 짝이 없는!”

황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딸을 노려보았다. 핏줄이기는 하나 한 번도 진짜 자식으로 대해 본 적 없는 딸.

아폴로니아는 태어난 순간부터 마음에 드는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제 어머니를 빼닮은 외모도, 유약한 성격도, 고귀하다는 그 혈통도. 모든 것이 거슬렸다. 유일한 쓸모가 혼사라고 생각했으나 그마저도 받아먹지를 못했다.

부유한 왕국에게 딸을 주는 대가로 챙길 수 있었던 사업권이며 재화가 얼마인가. 아둔한 여식 덕분에 여섯 번이나 눈 뜨고 그것들을 놓쳤다.

‘살려 둘 가치가 있기는 했던 걸까.’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황제는 아폴로니아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썩 꺼져! 보고 싶지 않다!”

그는 버럭 소리를 한 번 지르고는 자리를 물렸다. 둘러서 있던 대신들, 시녀들은 모두 혀를 차며 황녀의 미래를 안타까워했다.

“불쌍한 황녀 전하. 너무 순하기만 하셔서…….”

“순한 건지, 바보인 건지 모르겠어요. 아드리안을 아직도 내치지 않았다니.”

“남자들 마음 하나 붙잡지 못하면 황녀가 다 무슨 소용이야.”

“이 정도면 전하께서도 당할 만해서 당한 거 아닌가.”

한심한 황녀. 눈앞에 만찬이 차려져 있는데도 그걸 떠먹지도 못하는 모자란 사람. 그들은 아폴로니아가 자리를 벗어난 후에도 한참을 쑥덕거렸다.

온갖 속삭임과 눈초리를 뒤로하고, 한 떨기 백합처럼 가냘픈 아폴로니아는 청초한 걸음걸이로 황제궁을 나서서 바깥뜰로 향했다.

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며 누군가를 찾았다.

“전하! 전하! 이쪽이에요.”

그녀 뒤에서 귀여운 목소리가 속삭이듯 불렀다. 아폴로니아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얼굴을 빼꼼 내밀고 손짓했다.

배은망덕한 시녀, 주인을 무는 개, 희대의 탕녀.

아드리안 리스였다.

“아드리안!”

아폴로니아는 시녀의 이름을 한 번 외쳐 부르더니 빠른 걸음으로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대신들 중 하나가 보았다면 드디어 정신을 차린 황녀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시녀에게 뺨이라도 한 대 치는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잘해 주었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아폴로니아의 얼굴에는 눈부시게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조금 전 속눈썹 끝에 매달렸다가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증발이라도 된 듯 흔적도 없었다.

“그럼 성공이군요?”

“네게 깊이 빠진 모양이야. 고생이 많았다.”

약혼자의 배신을 입에 담는 황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전하께서 시키는 대로 한 게 다인데요. 누구를 보내도 성공했을 거예요.”

아드리안이 겸손하게 말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한편으로는 아쉬워요. 전하께서 마음만 먹으면 로뮈르 왕자를 직접 유혹해 발밑에라도 꿇리셨을걸요.”

“로뮈르 왕국이 뭐라고 그걸 아쉬워해.”

아폴로니아가 차갑게 웃었다. 불과 몇 분 전 눈물을 글썽이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냉정함이었다.

“그보다 왕자가 네게 청혼하면…….”

“오늘 일이 바로 로뮈르 국왕의 귀에 들어가도록 손을 썼어요. 충동적으로 파혼까지 했지만 국왕은 죽어도 일개 하급 귀족을 왕자비로 받지 않을 거예요.”

아드리안은 이미 주인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명랑하게 보고했다.

“잘했다, 나의 보물. 이러니 너만 아무 데도 안 보내는 거지.”

아폴로니아는 충성스러운 시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5년 전 아드리안과 주종의 연을 맺은 날부터 단 한순간도 이 아이의 가치를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로뮈르 왕국의 왕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아폴로니아는 언제나 그렇듯 황제가 정해 주는 혼사에 순종했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 뒤로 시녀를 시켜서 왕자 쪽에서 파혼하도록 유도했을 뿐. 아름다운 아드리안을 일부러 더 아름답게 꾸며 왕자의 시중을 들도록 했을 뿐. 혼담이 오가는 몇 달 동안 왕자를 치밀하게 조사해서 아드리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취향에 맞추었을 뿐.

“다른 아이들의 연락은?”

“말도 마세요. 감사하다는 편지가 끊이지 않고 오고 있어요. 비앙카는 둘째 왕자를 출산한 와중에 전하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고요.”

“선물로 은을 좀 보내야겠구나.”

아폴로니아의 충직한 시녀는 아드리안뿐만이 아니었다. 아폴로니아의 뒷공작으로 훌륭한 약혼자들과 결혼해 왕비가 된 다른 시녀들은 이제 그녀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 되어 있었다.

“은을 보내면 그만큼의 황금이 돌아올걸요.”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다들 전하의 일이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언제든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참 오래도 기다렸지.”

“…….”

“뭐, 당연한 거 아니겠니. 아버지도 어머니와 선황을 죽이는 데 10년 공을 들였으니.”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자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무시무시한 말과 대조되는 차분한 태도에 아드리안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주인은 항상 그랬다. 성녀 같은 미소를 띠고 비수를 벼리는 분.

그녀의 목표는 뚜렷했다.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다.

“다시 빼앗아 오려면 그에 못지않게 준비해야 하지 않겠니?”

황위 찬탈. 아폴로니아의 계획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찬탈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것이었으니까. 입으로는 역모를 말하면서도, 아폴로니아는 따뜻한 봄바람을 즐기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오늘의 깔끔한 성공을 되새겼다.

‘아버지, 저는 왕자와 결혼하지 않을래요.’

왕비가 아니라 황제가 될 거거든요.

‘아버지 곁에서 평생 살고 싶어요.’

정확히는, 아버지가 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살고 싶어요.

기다려요 아버지, 딸이 가고 있어요.

빼앗긴 내 것을 되찾으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