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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41화 (41/44)
  • 41.

    경기도 외곽의 작은 수목장에 수경을 모시고 돌아온 날부터 윤주는 계속 잠을 잤다. 이강은 조용히 그녀의 옆을 지켰고 윤주는 2일 만에 잠에서 깼다. 일어난 그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자신의 앞에 누워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봐주고 있는 이강이었다.

    “잘 잤어?”

    별말 없이 한참 이강을 보던 윤주가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의 존재가 실체라는 걸 깨닫고 난 후에야 윤주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행이다.”

    “꿈꿨어?”

    “아주 긴 꿈을 꿨어. 꿈을 꾸는 내내 나 혼자였는데 너무 무서웠어.”

    “이젠 괜찮아. 당신한텐 내가 있잖아.”

    이강은 팔을 벌렸고 윤주가 그의 품에 안겼다. 긴 한숨을 내쉬는 윤주를 보며 이강은 안타까움에 그녀를 꼭 안았다. 가족이 하나도 없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을 겪은 그녀가 이강은 너무 안타까웠고 그녀 옆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의지가 더 강해졌다.

    “미안해.”

    “이강 씨가 왜?”

    “어머니 말이야, 나 때문에 괜히 일찍 가신 게 아닌가 싶어서.”

    “난 고마운데, 우리 엄마 나 때문에 힘들게 버티고 계시다가 당신 덕분에 편히 가신 거 같아서.”

    “그렇게 말해주니까 나야말로 고맙네. 우리 결혼식 빨리하자. 그러고 싶어.”

    “나도 좋아. 결혼식 소박하게 하고 싶은데 부모님 서운해하실까?”

    “가족끼리 모이는 조촐한 결혼식이 좋겠다고 아버지가 그러셨어.”

    “부모님께 정말 감사해. 안드레아도 장례식 때 고생 많이 했는데. 고맙다고 전화라도 해야겠어.”

    “이제 가족이잖아. 일일이 그런 거 안 챙겨도 돼. 배 안 고파?”

    “몰라, 기운이 없긴 해.”

    “기다려, 맛있는 거 해줄게.”

    윤주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침대에서 벗어난 이강은 방을 나가 닫힌 문에 기대고 나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윤주가 그를 외면하거나 이 상황에 그를 원망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인 지난 며칠이 이강에겐 완전 지옥이었다.

    윤주에게 말은 안 했지만 결혼 준비는 이미 시작됐다. 수경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가영과 베르기는 최대한 빨리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말을 했고 그걸 의논하려고 했던 순간 수경이 돌아가셨던 거다.

    겉으론 담담한 척,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속으론 많이 무서워하고 약해진 걸 알기에 수경도 없는 지금 이강은 하루라도 빨리 윤주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

    주방으로 들어간 이강은 부지런히 움직여 밥상을 차려냈다. 먹기 좋은 부드러운 음식들을 쭉 늘어놓고 마지막으로 미역국을 뜨는 데 마침 윤주가 나왔다.

    “자기야, 이거 어때?”

    “뭔데?”

    “이 드레스 나랑 잘 어울릴 거 같지 않아?”

    윤주는 잡지 하나를 들고 와 모델이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보여줬다. 아무 무늬 없이 보트넥의 새틴 원단의 하얀 웨딩드레스는 고급스럽고 귀족적으로 보였다. 아마 저걸 윤주가 입으면 그녀의 섬세한 목선과 선이 고운 상체가 돋보일 터였다.

    하지만 이강은 아무 표정 없이, 조금은 짜증이 난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거기에 짧은 베일을 쓰고 치맛단에는 금색 실로 간단한 자수를 놓으면 더 고급스러울 거 같은데.”

    “……혹시 디자인하고 있었어?”

    “아마도?”

    “내가 눈치가 없었구나.”

    “무척이나. 앉아, 앉아서 밥이나 먹어. 근데 보는 눈은 다 비슷비슷한가 봐. 그거 내가 디자인한 거랑 엄청 비슷해.”

    “내가 정말 잘못했네. 밥이나 먹을게. 못 본 걸로 해줘.”

    미안한 표정의 윤주는 고개를 푹 파묻고 잘 퍼진 낙지 죽에 미역국을 떠먹었다. 조금 김이 새긴 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디자인을 좋아해줄 거라는 확신이 생겨 그건 다행이었다.

    * * *

    약 3주 후에 두 사람의 결혼식이 거행됐다. 경기도 외곽의 작은 별장에서 가족과 지인들만 초대한 결혼식은 단출했지만 아름다웠고 경건했다.

    신부 대기실로 찾아간 이강은 자신이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윤주를 보며 그 어떤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예쁘다.”

    “드레스가 너무 예뻐. 마음에 쏙 들어.”

    이강이 직접 디자인한 연한 베이지색의 실크 드레스는 윤주를 아주 돋보이게 만들었다. 원단, 색깔, 디자인, 장식 그 어느 하나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길게 파인 보트넥 네크라인은 그녀의 긴 목과 섬세한 쇄골이 돋보이게 만들었고 꽉 막힌 앞은 경건하고 깊게 파인 등은 여성성을 돋보였다. 네크라인을 따라 수놓아진 진짜 다이아의 촘촘한 수가 햇빛을 받아 베일에 가린 윤주의 얼굴을 빛나게 만들었다.

    단정하지만 폭넓은 치마와 긴 테일에 수놓아진 금색 자수는 고급스럽고 고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설레는 표정의 이강이 무릎을 꿇으며 손을 내밀었고 윤주가 그 손을 꼭 잡았다. 윤주를 보는 이강의 눈빛은 거의 경배에 가까웠고 그 눈빛에 윤주는 너무 설레서 심장이 뛰었다.

    “내 아내가 되어줘서 고마워. 사랑해.”

    “여기까지 오게 해줘서 나도 고마워. 사랑해.”

    그의 사랑에 벅차고 행복한 윤주가 그의 뺨을 감고 아주 감미롭게 그에게 입을 맞췄다.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아주 경건하게 입을 맞췄고 두 사람의 심장은 맞대어 있는 것처럼 같이 박동을 높였다. 입맞춤을 끝낸 이강이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윤주를 바라봤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윤주는 이강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윤주는 이강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기억을 떠올렸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그녀의 인생에 뛰어들었고 결국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평생을 같이하게 됐다. 모든 일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더니 인생 역시 끝까지 살아 봐야 어떻게 살았는지 보이는가 보다.

    드디어 두 사람이 꽃길로 만들어진 버진로드 입구에 섰다. 그들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고 그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신부가 참 예쁘죠? 내가 더 행복하네요.

    ―이강이가 우리 아들이 아니라 윤주가 내 딸 같아.

    ―그렇게 딸, 딸 노래를 하더니 드디어 그 소원 풀었네요, 당신.

    ―이상하게 정이 가네, 저 아이가.

    ―나도 마찬가지예요. 전생에 인연이 있었나 봐요. 사부인도 이제 마음이 좀 놓이시겠죠?

    가영은 하객석 맨 앞줄에 놓인 수경의 사진을 봤다. 웃음이 고운 수경, 살아서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 아쉬움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사돈 걱정 마세요. 윤주는 제가 사돈 몫까지 사랑하고 아껴줄게요.’

    가영은 같은 여자로 수경의 고단한 삶이 안쓰러웠다. 남편이 있어도 아들 둘 키우며 울고 싶을 때가 엄청 많았는데 여자 혼자 남편도 없이 아이 낳아 키우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저렇게 반듯하게 자식을 키워낸 걸 보면 수경의 훌륭한 인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공을 들이더니 드레스밖에 안 보이네.

    ―여전히 심술이냐, 너는.

    ―사실이잖아. 옷은 사람을 돋보이게 해야지, 옷에 파묻히는 디자인은 실패한 거야.

    ―그건 맞는 말이다.

    ―웬일로 내 말에 동의를 해?

    ―나는 객관적으로 맞는 말에는 상대가 누구건 동의해.

    ―생각해보면 리더 자리엔 형이 가장 잘 어울리는 거 같아.

    쟝은 생전 처음 듣는 안드레아의 말에 놀란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봤다. 일하는 능력은 좋지만 예민하고 괴팍하고 제멋대로라고만 생각했는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몰랐다.

    ―너 왜 그래?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면 큰일 난다.

    ―어휴, 진짜. 내가 무슨 말을 하냐. 됐어, 못 들은 걸로 해.

    쟝과 안드레아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윤주와 이강은 강단에 도착했고 주례가 없이 거행되는 예식은 두 사람의 인사와 간단한 성혼선언문 낭독으로 진행이 됐다. 맨 마지막에는 대표로 베르기가 두 사람을 축복해줬다.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싸우고, 또 열심히 배려하고 화해하고 그렇게 살아라. 잘못은 괜찮지만 후회는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절망은 하되 포기는 하지 마라.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다. 이젠 가족이다. 잘 살아보자. 자, 이제 두 사람은 부부고 남편은 아내에게 키스하세요!

    베르기의 마지막 말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이강은 호응하는 뜻으로 윤주의 허리를 꺾으며 격하게 키스했다.

    키스를 마친 두 사람이 행진을 시작할 때 잔잔한 클래식 음악에서 신이 나는 음악으로 바뀌었고 윤주가 하늘 높이 던진 부케는 쟝의 품속으로 떨어졌다.

    “다음은 쟝의 순서예요.”

    “이, 이건…….”

    “6개월 안에 장가 못 가면 앞으로 3년 안에 장가 못 간대요.”

    “내가 원한 게 아니었다구요!”

    쟝은 절규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하며 댄스파티를 시작했다. 베르기는 윤주에게로 갔고 이강은 당연히 가영과 손을 잡았다. 베르기는 온화한 표정으로 자신의 며느리가 된 윤주를 봤고 윤주 역시 감사와 존경을 담아 베르기를 봤다.

    ―무척이나 예쁘구나.

    ―감사합니다.

    ―잘 부탁한다, 윤주야.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아버지.

    ―우리 시아버지 며느리 말고 아버지 딸처럼 지내보자.

    ―네, 제가 많이 칭얼거릴게요.

    이강과 가영이 흐뭇한 미소로 다정한 베르기와 윤주를 보고 있었다. 특히나 이강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에게 인정받는 그래서 너무 뿌듯하고 행복한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엄마는 네가 아주 자랑스러워.”

    “어머니.”

    “자라는 내내 안드레아 때문에 네가 얼마나 상처받는지 알면서도 네 편을 못 들어줬어. 그게 내내 미안했어. 정말 미안해, 이강아.”

    생각지도 못한 가영의 말에 멍한 얼굴로 서 있던 이강이 그녀를 꼭 안았다. 다 이해하는 척했지만 그의 속 어딘가 남아있는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이강은 분명 부모님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었고 가영의 그 말 한마디에 찌꺼기 같았던 감정들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감사해요, 어머니. 이젠 정말 다 괜찮아요.”

    “고맙다. 이렇게 근사하게 자라줘서. 사랑해, 아들”

    “사랑해요, 어머니.”

    가영과 이강은 꽤 길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가족이라고 모든 것이 용납되는 게 아니다. 때로는 가족이라 더 많은 이해와 용서를 구해야 할 때가 있고 또 가족이라 간단한 말 한마디로 그 진심을 깨달을 수도 있다, 지금 가영과 이강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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