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40화 (40/44)

40.

샤워를 당하며 붉게 달아오른 윤주의 축 늘어진 몸을 커다란 타월에 감싸 안고 이강은 침실로 돌아왔다. 넓은 침대에 곱게 그녀를 눕히고 타월을 벗겨 자신의 품에 꼭 안았다. 청량한 맨살과 맨살이 부딪히는 느낌은 최고였다. 가만히 있으며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만족해하던 윤주가 가만히 눈을 떴다.

“나 회사 그만둘 거야.”

“잘 생각했어.”

“구직을 다시 하긴 할 건데…….”

“아무 걱정 말고 좀 쉬어. 충분히 쉬고 다시 일하고 싶을 때 시작해.”

“맘 편한 소리 한다. 그러다 쭉 백수로 놀고먹는 수가 있다.

“그건 안 되겠는데. 한국에 지사 생기면 나 당신 거기 취직시킬 건데.”

“어?”

“아직 구체적이진 않아. 시기, 규모, 방향성 회사 승인 등등 많은 과정이 남아서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고용보장 해줄 테니까 그때까지 맘 편히 쉬어.”

“기자였던 나 데려가서 뭐 하려고? 능력 없는 낙하산은 재미없어.”

“그건 나도 안 시켜. 홍보, 마케팅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 당신 글발, 인맥 다 써먹어야지. 지금은 그냥 자. 자고 나중에 구체적으로 얘기해.”

이강의 말이 끝나자 윤주는 별말 없이 그의 품으로 들어가 편히 안겼다.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굳히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에 걱정이 많았는데 말만으로도 조금은 안심이 되는 거 같았다.

“백수일 동안은 나 먹여 살려.”

“내 거 다 줄게.”

진심이었다. 물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성취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쉽게 디자인을 못 하는 것도 잘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완벽하고 싶은 욕심 때문인데 윤주 앞에선 그 모든 게 없어지고 그저 그녀 하나만 남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곧 잠이 들었고 그렇게 하루의 평화로운 밤이 지나갔다.

* * *

회사에 출근한 윤주는 나정의 방으로 먼저 향했다. 파티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이 회사에는 한 발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지만 책임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근한 길이었다.

그녀가 노크하자 나정의 목소리가 들렸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나정은 손가락질로 소파를 가리켰다. 윤주가 앉고 금세 전화를 끊은 나정이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언니, 알고 있었죠?”

“얘가 왜 오자마자 도끼눈을 뜨고 시비야?”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해주냐, 나랑 친한 거 맞아?”

“됐고, 아침부터 웬일이야?”

나정을 애교 섞어 흘겨보던 윤주가 테이블 위에 사직서를 올려놨다. 나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놀라지 않았고 윤주도 별말 하지 않았다.

“이번 달까지는 마무리할게요.”

“그럴 거 없어, 이번 주까지만 나와. 막내가 생각보다 일을 잘하더라. 아주 잘 가르쳤던데.”

“선애는 어쩌려구요?”

“부서 전출, 당분간 기사 못 쓰게 할 거야.”

“난리 나겠네요.”

“너 없을 때 생길 일까지 걱정하지 말고, 결혼은 되도록 빨리하고. 소문 퍼지는 거 순식간이야. 슬슬 얘기 나오는 거 같더라.”

“그렇지 않아도 엄청나게 재촉해요. 부모님들께서 우리 엄마도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엄마가 창피해서?”

“언니!”

“그런 거 아니면 왜 망설이는데.”

“우리 엄마가 힘들어하실까 봐.”

“너도 까봐병 걸렸냐? 일단 부딪쳐.”

윤주는 물끄러미 나정의 얼굴을 봤다. 나정의 말을 들으면 세상 어려웠던 일도 쉬워진다. 나정의 말처럼 부딪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윤주는 나정 같은 용기가 쉽게 생기진 않았다.

“언니는 참 용감해요.”

“내 나이만큼 살면 이 정도는 누구나 해. 이제 사무실로 가셔서 마무리하시죠, 서윤주 팀장.”

“알겠습니다, 편집장님.”

나정의 너스레에 윤주는 다소간 가벼운 마음으로 사무실로 향할 수 있었다. 굉장한 사람을 만났다는 실감은 여전히 나지 않지만 자신의 일상이 바뀌는 것으로 이강은 그녀의 삶에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강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이번에도 퇴사 결정은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정의 사무실에서 나왔을 때 동혁이 그곳에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고 담담한 표정의 윤주가 먼저 살짝 인사를 건넸다.

“사표, 냈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좋은 남자 같더라.”

“과분할 정도로 좋은 남자 맞습니다.”

윤주의 말에 동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이 사귀는 동안 자신은 그 남자만큼 깊게 그녀의 세상에 들어갔었나 잠시 생각을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이젠 우스웠다. 미안한 마음까지 싹 지우라던 이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선명히 보였다.

“서윤주 씨.”

“네, 사장님.”

“미안, 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건승을 빕니다.”

“건강하십시오, 사장님.”

두 사람은 간단히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마쳤고 윤주는 뒤돌아 미련 없이 걸었다. 이제야 비로소 동혁과 제대로 된 이별을 했다는 걸 윤주는 느꼈고 역시나 뒤돌아 자신의 길을 걷는 동혁 역시 똑같은 걸 느꼈다.

완전한 이별, 이제는 우연히 만나도 인사하지 않을 관계가 드디어 된 것이다.

* * *

수경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윤주의 얼굴이 꽤나 초조해 보였다. 용기를 내 상견례 아닌 상견례를 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다 되어갈수록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장이 됐다.

“엄마, 오늘 이강 씨 부모님 오세요. 이강 씨가 결혼하자고 했거든. 나는 먼저 인사드렸는데 두 분이 엄마 보시고 싶으시대요. 날 되게 예뻐하시는데…….”

“……그만해.”

“어?”

“한 얘기 또 해.”

“미안해, 내가 좀 초조해서 그래.”

수경은 마치 그런 윤주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소를 지었는데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괴기스러워 보였지만 윤주는 그마저도 반가웠다. 최근 들어 수경의 상태가 많이 양호해져서 윤주는 그나마 안심이 됐다.

“엄마, 나 회사 그만뒀어.”

“잘했어.”

“응, 나도 잘했다고 생각해.”

윤주가 수경의 카디건을 살피고 립스틱을 발라주고 있는데 똑똑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리며 이강이 먼저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로는 곱게 차려입은 가영과 베르기가 함께 등장했다.

“어머니, 이강이 왔어요.”

윤주와 눈인사를 한 이강은 제일 먼저 수경에게 인사를 했고 그 뒤로 윤주는 두 사람을 반겼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윤주의 손을 잡으며 가영은 환하게 웃어줬고 베르기 역시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두드려 줬다.

“안녕하세요, 윤주 어머니. 저는 이강이 엄마 송가영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안녕, 하세요.”

“되게 미인이시네요. 윤주가 어머니를 꼭 닮았어요.”

“사돈도 미인이세요.”

“어머, 우리 사돈이 보는 눈이 있으시구나. 제가 쫌 예쁘죠?”

가영의 높은 웃음에 수경도 편안하게 웃었고 베르기도 인사를 하자며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수경이 힘들지만 천천히 손을 들자 베르기가 두 손으로 그 손을 잡았고 그 행동이 굉장히 따뜻하고 배려가 깊게 느껴졌다.

어눌하고 느렸지만 그녀의 말을 경청했고 대화의 주제 역시 소소한 날씨 얘기부터 사는 이야기, 윤주와 이강의 이야기까지 다양했다. 그들의 대화는 사돈 될 사람들의 격식 있는 대화가 아니라 가까운 친구들의 가벼운 수다 같았다. 수경을 환자 취급하지 않는 두 사람을 보며 윤주는 마음 한쪽이 뻐근하게 아팠다.

“괜찮아?”

“내가 우리 엄마를 환자 취급하고 있었어.”

이강은 그 말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가까운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 잘 알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선입견, 그 선입견에서 윤주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거였다.

“당신은 가족이니까.”

“가족이기 때문에…….”

“더 안 보이는 거야. 가족이라서, 너무 사랑해서. 당신에 대해선 나 역시 객관적일 수 없어. 모두 그런 거야.”

윤주는 이강의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가영과 베르기의 행동에 윤주는 그동안의 시간을 치유받는 것 같았다. 두서없는 어른들의 대화는 꽤나 길게 이어졌고 수경이 피곤한 내색을 한 후에야 가영과 베르기는 자리를 정리했다.

“사부인 만난 게 너무 반가워서 말이 길었네요. 첫날부터 실례했어요. 다음에 또 봬요.”

“우리 윤주, 잘 부탁합니다.”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사부인이 너무 잘 키우셔서 너무 열심히 사는 것 빼놓고는 흠잡을 데가 없어요.”

“결혼식 준비도…… 제가 이 모양이라…….”

“엄마.”

“윤주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쳐요. 다른 걱정은 하지 마시고 결혼식 오실 때까지 건강만 신경 쓰세요.”

“감사, 합니다.”

“윤주는 어머니 주무실 때까지 봐 드리고 와라.”

“네, 어머님. 이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도 감사해요.”

―당연한 일에 그런 인사 필요 없어.

베르기는 씩 웃고 가영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 이강은 수경이 침대에 눕는 걸 도왔고 윤주는 잠이 들 때까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우리 딸, 이제 혼자 아니네.”

“엄마가 있는데 내가 왜 혼자야. 난 평생 혼자인 적 없었어.”

“행복해?”

“엄청.”

“엄마도 행복해.”

수경은 웃는 얼굴로 잠이 들었고 그것이 윤주가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수경은 그날 윤주와 이강의 배웅을 받으며 하늘나라로 갔고 장례는 지체 없이 예를 다해 경건하게 치러졌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이강은 윤주와 함께 상주로 그곳을 지켰고 베르기와 가영도 3일 내내 빈소를 방문해 모든 일이 빈틈없이 진행되는지 지켜봤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울던 윤주는 첫날이 지나고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담담한 얼굴로 끝까지 빈소를 지켰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중간중간 이강과 눈을 맞추면 작게나마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이강은 그녀가 혼자만의 공간에 들어가 있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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