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38화 (38/44)

38.

생각도 못한 베르기의 말에 모욕을 당한 은정의 얼굴을 붉게 달아올랐고 동혁과 성은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매서운 표정과 차가운 목소리로 가영이 은정에게 명령했다.

“쫓겨나기 싫으면 여기서 조용히 나가.”

“너, 너, 어떻게 이렇게 무례하게……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너는! 내가 누군지 알고 건방을 떨어! 감히 내 며느릿감을 깎아내리고 내 아들을 모욕하고 더불어 우리 가족까지! 그 잘난 너희 회사 풍비박산 내기 전에 여기서 나가!”

가영의 고성에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확 줄어들고 은정의 얼굴에도 당황과 두려움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 옆에 선 동혁의 얼굴을 비참했고 성은 역시 편한 표정은 아니었다.

가드들이 그 일가족을 압박하듯 다가왔고 부들부들 떨던 은정은 표독한 표정으로 홱 돌아섰다. 뒤에 남은 동혁은 눈을 질끈 감았고 그 옆에 성은도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던 가영이 표정을 풀고 여전히 긴장한 채 서 있는 윤주의 손을 잡았다. 윤주는 도저히 어떤 표정으로 가영과 베르기를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윤주야, 조상이 널 도왔다. 저런 사람들을 피해갔으니 말이다. 가자.”

가영은 처참한 표정으로 선 윤주를 데리고 자리를 떴고 한참 흔들리는 동혁의 시선이 그 뒷모습에 붙박여 있었다. 그리고 이강이 그런 동혁의 시선을 차단했다. 아주 당당하게 자신의 앞을 막아선 이강에게 동혁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미안, 합니다.”

“미안해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당신 마음에 남아있는 그 감정의 찌꺼기까지 모두 없애요.”

“참, 잔인하군요.”

“잔인? 당신 모자(母子)는 정말 염치라는 게 없군.”

이강은 점점 더 자신 안에서 참을성과 인내심이 얇아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정에게 두 사람의 과거를 듣고 나서 그렇지 않아도 딱 한 번만 걸려라 벼르고 있었는데 하는 말이 저따위다. 그나마 지금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건 자신의 폭주가 윤주를 더 힘들게 만들 걸 알기 때문이었다.

“윤주 어머니께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고 있나? 그분께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사과한 적 있어? 그로 인해 윤주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는 알고?”

그 말에 동혁의 고개를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신의 결혼식장에 그분이 초대됐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어떤 때보다 비참했고 죄송했지만 차마 직접 찾아뵙고 사과드릴 용기는 없었다.

“지금 느끼고 있는 그 하찮은 감정만큼이 윤주에 대한 네 마음인 거야. 꺼져, 죽여버리기 전에.”

이강은 그 어떤 때보다 처참한 모습으로 서 있는 동혁을 두고 돌아섰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그들과 엮일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것 하나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 * *

뻑적지근한 가족 모임을 한 후 이강과 윤주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호텔에 머물기로 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가영의 뜻 때문이었다.

이강이 안드레아와 쟝과 다 하지 못한 대화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옷도 벗지 못한 윤주는 침대에 대자로 뻗어 구두까지 신은 채 잠들어 있었다. 문 앞에서 잠시 서서 그녀의 편안한 숨소리를 듣고 있던 이강이 조용히 걸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윤주는 정말 피곤했는지 살짝 코를 골며 입을 벌리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편안히 잠든 그녀를 보던 이강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눈가를 간질이고 있는 머리카락도 치워줬다.

“예쁘다.”

이강은 잠자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자신이 준 반지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만져봤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청혼하고 나서 그런 건가 그녀에 대한 감정이 전체적으로 더 강해진 것만 같았다.

‘좋은 아이 같더라. 그런데 너무 노력해. 그게 안쓰럽더라.’

가영의 말이었다. 열심히 사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라서 노는 것도 잘 모르고 쉬는 것도 잘 모르는 그녀가 항상 안타까웠듯이 가영도 그걸 벌써 느꼈던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벗어 던진 이강은 불편해 보이는 그녀의 구두부터 벗겼다. 타이트한 구두에 눌린 작은 발을 좀 주물러주고 그녀의 원피스를 벗겨주려다 잠시 감상하듯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있는 그녀를 봤다.

옷을 만들 때마다 항상 행복하긴 했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러웠다. 만족의 한숨을 내쉰 이강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원피스를 벗겨냈다.

“설마…….”

당연히 슬립 정도는 입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벗겨내는 원피스 안에는 아주 기본적인 속옷만 있었다. 옷을 완전히 다 벗겨내자 그녀의 몸에는 검은색 레이스 속옷 세트와 가터벨트, 반투명한 스타킹만 남았다.

유난히 하얀 윤주의 피부와 완전히 대조적인 검은색의 속옷, 거기에 아이처럼 입까지 벌리고 자는 얼굴에 이강이 마른세수를 했다. 목으로는 자꾸 마른침이 넘어가고 눈치도 없이 몸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미치겠군.”

안 되는데, 그러면서도 눈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아랫도리는 벌써 힘이 들어가 불끈거리고 있었다.

“……구경만 할 거면 이불 좀 덮어주지.”

“자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만지작거리는데 안 깨고 어떻게 버티니.”

눈도 뜨지 않고 잔뜩 잠이 묻은 목소리로 말을 한 윤주는 반쯤 굴러 이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주 탐나는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던 이강은 옷을 입은 채로 그녀의 옆으로 들어가 누웠다.

“계속, 잘 거야?”

“안 자면 뭐 해줄 건데?”

“뭐하고 싶은데?”

“……샤워.”

반쯤 눈을 뜨고 살짝 웃으며 꼬시는 게 분명한 윤주의 그 말에 이강은 바로 일어나 욕실로 향했고 가면서 옷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그 모습에 혼자 풋 웃은 윤주였고 곧 아무것도 입지 않은 이강이 나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윤주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걸었고 귓가에 입을 맞췄다. 이강은 그녀의 키스를 받으며 그대로 샤워부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온도에 맞춰진 조금 뜨거운 물이 두 사람 위로 쏟아져 내렸다.

윤주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편안하게 기댔다. 따뜻한 물 아래서 오늘 하루 받았던 긴장이 다 풀어지는 것 같았다. 특히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이강이 있어 더 좋았다.

갑자기 마음이 울컥해지며 감정이 격해졌다. 윤주는 그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얼굴을 기대고 있던 이강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앗, 왜? 내가 뭐 잘못했어?”

“얄미워.”

“나 오늘 잘못한 거 없는데.”

“당신은 좋겠다, 너무 좋은 부모님이 계셔서.”

“아파!”

그 말을 끝으로 윤주가 그의 어깨를 한 번 더 깨물었고 이강은 아프지도 않은데 과하게 엄살을 떨며 그녀의 엉덩이를 살짝 때려줬다.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는 윤주를 조금 더 가깝게 당겨 안으며 등을 타일 벽에 기대게 만들었다. 물에 젖은 윤주의 얼굴을 보던 이강이 갑자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정말 재미있군.”

“뭐야, 왜 웃는데?”

“눈 감아봐.”

“어?”

“눈 감으라고.”

이강의 커다란 손이 눈앞을 가리자 윤주가 자연스럽게 눈을 감게 됐다.

이강은 윤주가 눈을 꼭 감을 걸 확인하고 그녀의 눈가에 까맣게 번져 있는 마스카라 자국을 대충 닦아내고 손에 클렌징폼을 덜어내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윤주는 그때서야 흉하게 번졌을, 자신의 화장한 얼굴을 생각해냈다.

“내가 할게.”

“가만히 있어. 안 보이잖아.”

“나 내려줘, 불편하잖아.”

“안 불편해, 안 무겁고. 눈 뜨지 마.”

이강은 몽글몽글하게 일어난 거품을 윤주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바르고 문질렀다. 한 손에도 다 차지 않을 만큼 작은 얼굴에 눈, 코, 입이 다 들어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조금만 힘을 준다면 그대로 망가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윤주는 친절한 이강의 손길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가족을 만난 후 이강에 대한 마음이 더 커졌다. 처음엔 아예 사귀겠다는 마음이 없었고 사귄 후에도 헤어져도 그만이란 생각으로 발을 반쯤 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없으면 안 되겠다는 집착과 꼭 가지고 싶다는 소유욕이 함께 생겼다.

“왜 그렇게 빤히 보는데?”

“너무 좋아서?”

이강과 눈이 맞은 윤주가 그의 목을 끌어당겨 물이 흐르는 샤워기 아래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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