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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37화 (37/44)
  • 37.

    조금만 더 늦게 오지 생각하고 있는데 애정을 과시하듯 이강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귀 옆에 입을 맞췄다.

    “여기서 뭐해?”

    “이분들과 볼일이 좀 있어서, 많이 찾았어요?”

    “응, 시간이 오래 걸릴까?”

    “글쎄요, 저분들이 어떻게 하냐에 달린 일이라서…….”

    “빨리 해결하면 좋겠는데.

    여자들은 완벽하게 한국말을 하는 이강을 보며 얼굴이 해쓱해졌고 떨리는 동공으로 떨어져 서 있는 안드레아를 힐긋거렸다. 여자들의 꺼림칙한 행동과 불안한 눈빛에 이강 역시 뭔가를 눈치챈 듯싶었다.

    “우리 안드레아와 아는 사입니까? 옥스포드 동문? 그럼 나와도 동문인데.”

    옆에 서 있던 윤주는 이강의 말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가족 한정으로 이 남자의 촉은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 윤주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바짝 얼어붙은 여자가 어버버 말을 시작했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고…… 그러니까 잠시 오해가…….”

    “오해? 우리 안드레아가 오해를 만들고 그러지 않을 텐데. 안드레아와 같이 얘기해 볼까요? 이리로.”

    말은 부드러웠지만 말투와 행동은 강요에 가까웠다. 이강의 단호한 태도에 여자들은 당황한 게 보였고 안드레아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그쪽을 보고 있었다.

    “이강 씨, 파티장에 가보는 게 어떨까요? 여긴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

    “쟝!”

    “네, 테오 님.”

    “내 피앙세가 이분들과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니까 쟝이 옆에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신, 확실히 하고 와.”

    “걱정 마.”

    윤주의 눈치에 이강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 줬다. 어쩌면 오늘 일은 윤주가 가족이 되고 처음으로 가족으로 뭔가를 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드레아, 잘 부탁해.

    ―걱정 마. 근데 형수 되게 대책 없는 거 알아?

    ―그게 매력이야.

    ―하아, 진짜 괴롭다. 가버려!

    안드레아는 이강의 어깨를 툭 쳐서 보냈고 계속 여자들과 대치하고 있는 윤주를 봤다. 이제야 여자들도 심각성을 깨달은 건지 아까의 당당함과 잘난 척은 사라져 버렸다.

    잠시 기다리자 의기양양한 윤주가 불만 가득한 여자들을 데리고 왔고 그 앞에 세웠다. 쟝과 함께 걸어오는 윤주는 누군가를 연상시켰고 그건 바로 가영이었다.

    ―잘도 찾아냈네.

    드디어 윤주와 여자들이 왔고 안드레아는 아무 말 없이 거만한 눈빛으로 여자들을 내려 보고 있었다. 심술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성격의 안드레아였다. 불만 가득한 여자들은 서로 눈빛만 보낼 뿐 말이 없었고 안드레아의 표정이 한층 더 시니컬해졌다.

    “할 말 없으면 그만 가죠. 보다시피 다리가 온전치 못해서.”

    “그, 그게 아니고…… 아까는 죄송했어요. 저희는 그냥……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줄 모르고…….”

    “엄마가 한국 사람인데, 참.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하는 머리는 뭐 하러 달고 다니는지. 멍청한 것보단 차라리 다리병신이 낫지.”

    “안드레아, 예의를 지켜요.”

    “대충한 사과는 받은 거로 치고, 다음부터 누구한테 시비 걸고 싶으면 머리를 좀 쓰고. 가요, 형수.”

    안드레아는 윤주의 팔을 자신에게 걸고 돌아섰다. 몇 걸음 걷던 윤주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하이파이브하자고 손을 내밀었고 안드레아가 손을 마주쳐줬다.

    ―다음부턴 들어도 못 들은 척 좀 참아요.

    ―내 일이면 참았어요.

    ―나랑 뭐 얼마나 친하다고.

    ―어머, 초면에 옷도 벗긴 사인데.

    ―남들이 들으면 오해해요.

    ―안드레아도 한국말 잘하던데요?

    ―말 돌리지 말고요. 알고 보니까 나보다 한 살 어리던데.

    ―오빠는 이강 씨 하나로 만족해요.

    쟝은 끊이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씩 웃었다. 안드레아의 태도에서 윤주를 완전히 받아들였다는 걸 알았고 그녀는 이제 완벽한 아르노 가족의 일원이 된 거였다. 그리고 앞으로 왠지 두 배는 머리가 아파질 것 같은 이강에게 애도의 마음이 생겼다.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자 베르기와 가영이 누군가와 반갑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천천히 그쪽으로 가고 있는데 이강이 다가와 그 앞을 막았다. 이강은 말없이 어리둥절한 윤주를 빤히 보고 있었고 그의 침묵에 윤주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왜 그러는데?”

    “신동혁.”

    “어?”

    “부부와 그 모친이 여기 왔어.”

    다급하게 숨을 들이쉰 윤주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이강이 얼른 그 손을 잡아줬다. 그녀에게 충격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이강은 진실을 그대로 말해줬다.

    “어머니 스위스 가시기 전까지 그 모친이랑 같은 고등학교 다니셨데. 꽤 친하게 지내신 모양이야.”

    “하필이면…….”

    “피하고 싶으면 도와줄게.”

    “당신은 내가 안 피했으면 싶구나?”

    “이제는 당신이 완전히 벗어났으면 싶어.”

    이강의 말에 윤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세상에서 절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신동혁과 그 모친이었다.

    은정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살면서 반드시 한 번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면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 의지로 그들과의 관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내 옆에 있어줄 거지?”

    “가자.”

    빠르게 윤주의 이마에 입을 맞춘 이강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가영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손이 차갑게 식으며 축축해지는 걸 느꼈고 더 힘을 줘 잡았다.

    “허리 펴고 당당하게, 당신은 더 이상 저 사람들에게 힘없이 당하던 서윤주 아니야. 당신은 내 약혼자고 우리 가족 일원이야.”

    이강의 말에 윤주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등을 곧추세우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이제 이강의 배우자이자 그의 가족이 될 사람이니까 말이다.

    드디어 윤주가 이강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베르기와 가영에게 다가갔고 가영은 손을 내밀며 윤주를 반겼다.

    “윤주야, 이리 와. 인사해 이쪽은 내 친구, 그리고 이쪽은 우리 큰아들과 그 약혼녀.”

    가영의 소개에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던 동혁의 모친, 은정은 윤주를 보자마자 파삭하게 표정이 굳었다. 그건 동혁과 성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윤주는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윤주 역시 배 속부터 스멀스멀 긴장과 두려움이 피어올랐지만 그때 이강이 그녀의 손을 더 힘줘 잡았다. 이강의 손길에 정신을 차린 윤주가 차분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널 여기서 볼 줄은 몰랐구나.”

    “저 역시 그렇습니다.”

    “너 참 대단하구나.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지, 그렇게 악착같이 굴더니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은정의 말투에서 비웃음과 빈정거림을 느낀 이강과 가영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지만 윤주는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자신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은정은 틀렸든 맞았든 생각을 바꿀 사람이 아니었고 그녀를 설득하는 노력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은 윤주였다.

    사람들 사이의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을 깬 건 가영이었다. 표정을 그렇지 않았지만 질문하는 목소리만은 나긋했다.

    “윤주를 알아?”

    “우리 아들 결혼 전에 사귀던 애야. 주제도 모르고 결혼을 하겠다지 뭐야.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모녀가 참 독하더라.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정말 많이 놀랐었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평생의 반련데, 학력, 재력, 사회적 지휘는 그렇다고 쳐도 미혼모 자식은 좀 그렇지 않니?”

    은정의 말에 윤주가 주먹을 틀어쥐었다. 유복자인 그녀를 낳은 탓에 수경은 미혼모로 참 많은 오해를 받았고 그 때문에 이유 없는 욕과 비방에 시달리기도 많이 했다. 억울한 일이 많아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꿋꿋하게 버텼는데, 윤주는 더 이상 이런 구설에 수경이 오르내리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저희 어머니는 미혼모가 아니십니다.”

    “그래, 말로는 뭘 못 할까? 미혼모가 미망인이 되는 건 일도 아니지.”

    은정은 대놓고 윤주를 비웃었다. 자신이 하찮다고 짓밟아버린 윤주가 그들보다 더 대단한 집안의 며느리가 되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어머니, 그만하세요. 다 지난 일이에요.”

    “우린 과거지만 내 친구에게는 진행형인 일이라서 아는 정보를 좀 공유하는데 그게 뭐 어때서? 가영아, 결혼은 인륜지대사라잖니. 너도 조금 더 신중한 게 좋지 않겠지? 결혼이란 자고로 격이 맞아야 하는 거니까. 우리처럼.”

    은정은 옆에 선 성은의 팔짱을 껴 보였고 지금까지 조용히 듣고 지켜보던 가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자식 결혼도 사업처럼 하는 모양이구나, 너는.”

    “당연하지. 결혼에 사랑을 논하는 거야말로 너무 나이브한 거잖아. 특히나 우리네 같은 사람들한테는 말이다.”

    “너 참 후지게 변했구나. 자식 결혼까지 사업 수단으로 이용해야 하는 수준이면 차라리 사업을 접는 게 낫지 않겠니?”

    “얘, 아무리 기분 상했어도 말은 좀 가려서 하자. 수준이라니, 좋은 뜻으로 한 말에 그렇게 발끈할 게 뭐야. 알 만큼 알 나이에 순진한 척하는 거야?”

    “긴말할 거 없고, 우리 윤주한테 사과해.”

    “내가 왜? 난 틀린 말한 거 없다. 더한 말도 할 수 있는데 그나마 네 얼굴 봐서 참은 거야. 저렇게 수준 떨어지는 애를 며느리 삼으면서…….”

    ―가드!

    뒤에 서 있던 베르기가 파티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쳐 대기하고 있던 가드들을 불렀다. 사람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쏠리고 가드들은 재빨리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내보내.

    간단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엄청났다. 순수한 의도 하나 없이 예전 친분으로 가영에게 다가왔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전부 알아들은 건 아니었지만 시시각각 비참하고 분노하는 윤주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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