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호텔에서 가장 큰 연회홀을 빌려 꾸민 파티장은 말 그대로 화려하고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재계 인사들부터 유명 연예인들까지 한 번에 보기도 힘들 사람들이 그곳에 한가득이었다.
그런 대단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 가족에게 향했고 앞으로 나가려던 윤주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다. 가슴 쭉 펴고 숨을 크게 쉬고 다 비웃어줘.
―네?
―네가 비웃어도 저들은 모른다. 한번 해봐, 그럼 사람들 상대하는 게 훨씬 쉬울 거다. 나도 처음엔 그랬거든.
배려가 가득한 베르기의 말에 윤주의 얼굴에 드디어 웃음이 돌아왔다. 베르기의 말대로 크게 숨 들이쉬고 가슴을 쭉 펴고 최대한 가장 예쁘게 웃었다. 잡지사 기자로 벌써 8년이다.
기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는 배우도 있었고 사보를 그따위로 찍었냐며 가만 안 두겠다고 협박을 한 운동선수도 있었다. 하룻밤 같이 보내자고 한 놈에겐 예쁘게 웃으며 애 보러 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동안 겪었던 별별 일 덕분에 가끔은 웃음이 가장 좋은 무기가 된다는 걸 배웠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 무시하는 덴 일가견 있어요.
그 말 한마디로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밀듯 밀어닥쳤고 며느릿감으로 소개한 그녀에게 지대한 관심을 내보였다. 호텔 방에선 투덜거리던 가영도 아주 능숙하게 사람들을 상대했고 이런 것과는 담쌓고 산 것처럼 보였던 이강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굴이나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났더니 머리도 멍하고 눈도 빙빙 도는 거 같았다. 잠깐이라도 여기서 벗어나야 정신이 좀 돌아올 거 같았다. 주변을 돌아보는 윤주의 눈에 힘들어하는 안드레아가 보였다.
―아버지, 저 잠깐 실례할게요.
윤주의 말에 베르기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줬고 옆으로 오는 이강을 말린 윤주가 안드레아에게 갔다.
―안드레아, 우리 잠깐 나가요.
―어딜 가게요?
―나 허리는 끊어질 것 같고 발도 아파요. 너무 웃었더니 얼굴엔 경련이 난다고요.
―형하고 같이 가요.
―나랑 가는 거 싫어요?
―하아, 미치겠네. 형은 그런 가식적인 표정에 넘어가요?
―그럼요.
말은 그러면서도 안드레아는 걸음을 옮겼고 윤주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잠깐 주춤하던 안드레아는 발이 아픈 듯 매달리는 윤주를 느끼며 팔에 힘을 줬다.
―많이 아파요?
―새 구두거든요. 당신 형이 센스 없이 새 옷에 새 구두를 보냈다구요.
―신기하네요, 형이 여자에 대해 미숙한 것이 있다니.
―아하, 이강 씨가 여자를 많이 만났나 봐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아닌데, 아주 잘 아는 것 같은데. 얘기 좀 해줘 봐요, 형한텐 아무 말도 안 할게.
윤주는 계속 캐물었고 안드레아는 모르는 척 계속 피했다. 두 사람은 파티장 밖으로 빠져나갔고 그 모습을 본 이강이 피식 웃으며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윤주는 계속해서 안드레아를 건드리고 가깝게 다가갔고 안드레아는 귀찮아하면서도 다 받아주고 있었다.
이강이 복도로 나가자 어느새 따라온 건지 쟝이 옆에 섰고 안드레아와 윤주는 팔짱을 꼭 끼고 뭔가 열심히 대화하고 있었다. 의외로 친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 두 사람 말이야, 의외로 잘 어울리네.
―남매 같아.
―귀찮게 구는 누나와 짜증난 동생?
이강이 그 말에 동의한 쟝이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안드레아가 두 명이라…… 응원할게, 친구야.
―윤주는 안 그럴 거야. 하아, 제발 그럴 거라고 말해주라.
부인하면서도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해낸 이강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고 억지로 웃음을 참은 쟝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 시간, 화장실 앞에 도착한 윤주와 안드레아는 각자의 화장실 안으로 사라졌고 잠시 앉아서 구두를 벗고 발을 쉬게 해준 윤주가 밖으로 나왔을 때 안드레아는 두 명의 한국 여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가식적인 웃음을 짓고 뭔가를 캐내려는 듯 보이는 여자들이 마음에 안 든 윤주는 얼른 안드레아에게로 갔다.
―안드레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이태리어를 잘하시네요. 우리 아까 인사 나눴죠?”
“그러네요.”
“초면인 거 같은데, 이런 자리는 처음이신가요?”
“맞아요.”
윤주의 대답에 두 여자가 눈을 맞췄고 그들의 거만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안드레아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그만 가죠.
―좋은 생각이에요.
“저희 먼저 가볼게요.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어요.”
“근데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들이세요? 이태리에서 학교 다녔어요? 유학을 오래 했어도 이 바닥이 워낙 좁아서 한두 명쯤은 안면이 있을 텐데, 혹시 친분 있는 사람이 있어요? 하시는 일은 어떻게 되세요?”
여자들은 되게 예의 없는 질문을 품위를 가장해서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세계에 등장한 그녀가 못마땅한 것 같았고 윤주 역시 순순히 당해줄 마음은 없었다.
“아뇨, 제 약혼자 말고는 없어요. 꼭 알아야 하는 것 같지도 않네요.”
―잠깐만요. 형수, 이분들과 잘 알아요?
윤주는 갑자기 자신의 말을 막고 여자들이 들으라는 듯 유창한 영어로 말을 시작하는 안드레아를 잠시 놀라서 바라보다 얼른 대답했다.
―아뇨.
―근데 방금 전 뭘 물어본 거예요?
―부모님, 학교, 직업 등등?
―예의가 없네, 그만 상대하고 가죠.
안드레아는 윤주를 에스코트해서 그 자리를 떴다. 빨리 걷는 덕분에 그가 다리를 저는 게 더 도드라져 보였고 여자들의 시선이 뒤에 붙박이는 게 느껴졌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잘난 척이야. 좀 생겼다고 상대해 줬더니 건방지기는.”
“돈 많고 집안 좋으면 뭐하니, 다리병신인데. 거저 줘도 안 가지겠다.”
뒤에서 들리는 원색적인 말에 윤주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다. 반사적으로 안드레아를 살폈지만 그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담담했다.
분명 들었을 텐데, 저런 말을 듣고도 이렇게 침착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던 걸까? 이를 악문 윤주가 걸음을 멈추자 도리어 안드레아가 그런 윤주를 잡았다.
―무시해요. 일일이 상대하면 싸움꾼이 돼야 할 거예요.
―되죠, 뭐. 하나도 안 무서워, 나 맷집 세.
윤주는 안드레아를 두고 천천히 걸어 여자들 앞으로 걸어갔고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살폈다.
“와, 굉장히 비싼 한정판 명품으로만 치장하셨네요?”
“그래서요?”
“걸치고 있는 것들의 값어치만큼이라도 개념을 탑재하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옷보다 인성이 후지네, 안타깝게.”
“이 여자가 뭐라는 거야!”
“니들 머리에 개념, 인성, 예의, 부끄러움 이런 말들을 탑재하란 뜻이구요. 그 싸구려 주둥이로 다시는 우리 안드레아 거론하지 말구요.”
“너 뭔데 까부니?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면서 잘난 척은. 남자 하나 믿고 너무 까불지 마. 너랑 나랑은 태생 자체가 다르다고.”
“그 남자 하나면 충분하지 뭐가 더 필요할까, 지금이라도 그 잘난 부모님 찾아가서 너희의 무례한 행동을 얘기해볼까? 아니면 내 남자한테 얘길 해줄까?”
여자의 일그러지는 표정에 윤주의 표정은 한층 더 얄미워졌다. 기자 생활하면서 갈고 닦은 말발에 처세가 몸에 밴 윤주였다. 그녀는 가진 게 없지만 안드레아와 이강이라면 말이 다르다.
“당신, 예의를 다해서 안드레아에게 사과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내가 가진 최고의 파워를 써볼 생각이거든. 건드리고 싶었으면 날 건드렸어야지. 사과, 오래 걸릴까?”
윤주의 말에 여자는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그녀를 때릴 뜻 주먹을 틀어쥐었다. 윤주는 속으로 차라리 한 대 맞고 배로 돌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도발해볼까 하는데 이강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