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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35화 (35/44)
  • 35.

    한국말과 이태리어, 가끔은 영어와 불어까지 오가는 대화의 홍수 속에서 윤주는 머리가 터질 거 같았다.

    “자, 잠깐만요. 여러분 잠깐만…… 이강 씨!”

    윤주가 목소리를 높여 이강을 부른 후에야 모든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고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강 씨, 나 물 한 잔만 줄래요? 그리고 안드레아는 부모님 모시고 자리에 좀 앉는 게 어떨까요?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또다시 시끄럽게 떠들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가영과 베르기, 안드레아가 소파에 앉자 윤주가 그 앞에 앉고 물을 가져온 이강이 그 옆에 앉았다. 일단 목을 축인 윤주가 살짝 묵례를 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넸다.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서윤주라고 합니다. 두 분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인사를 끝낸 윤주가 앞에 앉은 가족을 찬찬히 살폈다. 베르기는 반백의 머리에 살짝 날카롭게 생긴 눈매와 달리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자신의 아내를 보는 눈에는 여전히 사랑이 가득했고 아들들을 자랑스럽게 보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가영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며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윤주는 이강이 가진 진정한 강함이 그들의 가족에서부터 비롯됐다는 걸 알게 됐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안드레아가 어머니를 닮아서 아름다운가 봐요.

    ―어머, 말 예쁘게 하는 거 봐. 내가 젊었을 땐 한 인물 했지. 근데 지금은 주름도 많고 뱃살도 축 늘어지고, 살을 빼야 하는데…….

    ―엄마, 오늘 형 결혼 얘기하는 자리라며. 우리 시간 별로 없어요. 파티도 가야 하거든요.

    ―맞다, 내가 좀 흥분을 해서. 며느릿감 만나는 게 처음이라 그래요. 난 솔직히 죽기 전에 이강이 결혼하는 거 못 볼 줄 알았거든. 근데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데려왔지 뭐야. 정말 고마워요, 우리 아들 받아줘서.

    가영의 말에 두 사람의 결혼이 현실로 확 다가오며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 아무 문제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에 대해 잘 모르시죠? 저는 아버지가 안 계세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데요. 어머니께서는 몇 년 전에 사고를 당하셔서 지금도 병원에 계세요. 뇌를 다치셨는데 치매가 오셨거든요.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살았나?

    ―네?

    ―부모님 얘기는 충분히 들었고 이제 자네 얘기를 해보란 말이네. 자네는 어떻게 살았나?

    ―저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엄마와 같이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았거든요.

    ―됐네, 그럼.

    ―예?

    ―열심히 살았고 가족 소중한 줄도 알고 뭐가 더 필요하지?

    베르기의 덤덤한 말에 윤주는 맥이 턱 빠졌다. 자신의 부모님을 믿어 보라던 이강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것도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 가정환경부터 물어보던 동혁의 모친과는 수준이 다른 분들이었다.

    ―그 반지 받은 거 보니 청혼은 받은 거 같은데, 맞아요?

    ―네, 맞습니다.

    ―그럼 날짜만 잡으면 되는 건가? 이왕 온 김에 결혼식까지 하고 가면 좋겠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성격이 급해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온 김에 어머님은 만나 뵙고 싶은데 그건 가능하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어머님이 병원에 계셔서, 저도 못 알아보실 때 있고 보기 편하진 않으실 텐데요.

    인사한 미소를 지은 가영이 윤주의 손을 꼭 잡았다. 혼자 의지할 사람도 없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많이 안쓰러웠다.

    ―사람은 누구나 아파요. 그건 창피해할 일도, 꺼릴 일도 아니죠. 못 알아보시면 어때, 옆에 계셔주시는데. 살아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잖아요.

    ―어머니 덕분에 중심 잃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윤주 씨 이렇게 근사하게 키우신 분 만나 뵙고 우리도 감사합니다, 인사드려야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럼 윤주 씨도 편히 해요. 나한테 엄마라고 해도 되는데.

    ―알겠습니다, 어머니.

    가영과 베르기의 환대에 그녀를 내내 못나게 만들었던 상처 하나가 스르르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받은 호의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보답을 하듯 상처 역시 다른 사람의 위로로 없어질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자, 이제 파티장으로 내려가야 해요. 지금도 많이 늦었어요.

    ―파티 재미없어, 얘.

    ―그래도 가셔야 해, 엄마. 오래 말고 딱 30분만 계셔.

    ―퍽도, 내려가면 네 아버지 사람들한테 잡혀서 꼼짝도 못 할 텐데.

    ―그렇긴 해.

    ―윤주, 이리 와라.

    ―저, 저요?

    ―우리 가족으로 처음 나서는 자리니까 아버지인 내가 소개해야지.

    아버지라고 칭하는 베르기의 말 외에는 아무것도 안 들렸다. 어릴 때부터 내가 아빠가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한대로 상상했었는데 베르기는 그녀의 상상을 넘어서는 근사한 아버지였다.

    윤주는 조심스럽게 베르기가 내민 손을 잡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은 베르기는 윤주의 손을 제 팔에 걸었다.

    ―앞으로는 아버지라고 불러라.

    ―……그래도 될까요?

    ―아주 좋지. 안드레아가 아들인 걸 안 순간 난 절망했었어.

    ―아버지, 다 들려요.

    ―녀석, 쓸데없이 귀만 밝아서는. 너는 아버지가 없고 나는 딸이 없고, 우리 좋은 부녀가 될 수 있을 거 같지 않니?

    그 말이 너무 좋아서 윤주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귀에 걸릴 만큼 웃음이 터지려는 입을 간신히 모아 물고 힘을 줘 베르기의 팔을 잡았다.

    ―아버지, 너무 좋아요. 아버지는 제 상상 속 아버지보다 백배는 멋지세요.

    ―앞으로도 운동은 계속해야겠구나.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라도 하셔야 해요. 근데 아버지, 저 실수하면 어쩌죠?

    ―걱정 마라. 네가 어떤 실수를 해도 대놓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베르기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감히 대놓고 그의 집안사람을 그 앞에서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그들의 가족이 예의를 지켰을 때 말이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이강이 가영과 팔짱을 끼었고 나머지 팔로 안드레아를 잡았다.

    ―우리 안드레아도 내년쯤엔 장가갔으면 좋겠네?

    ―됐어요, 엄마. 난 여자 하나 만났다고 형처럼 바보같이 굴긴 싫어.

    ―너는 나보다 더하면 더 하지 덜하진 않을 거다.

    ―안드레아는 어머니 많이 닮았어요. 그래서 안드레아가 예쁜가 봐요.

    ―아, 거 좀. 자꾸 예쁘다느니 아름답다느니 그런 말 좀 하지 맙시다.

    ―안드레아가 생긴 것만큼 성격도 예쁘면 좋으련만.

    가영의 놀림에 안드레아는 짜증 섞인 투정을 부렸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애정 표현인 걸 아는 가족들은 그저 웃어넘겼다. 방을 나가자 쟝을 비롯한 가드들이 지키고 있었고 마치 무슨 군대의 호의를 받는 것처럼 가족들은 파티장에 도착했다.

    ―긴장하지 마라, 아가.

    ―아버지 그런 말도 아세요?

    ―공부 좀 했지.

    파티장 앞에 도착해 긴장의 한숨을 내쉬는 윤주의 팔을 도닥이며 베르기가 찡긋 윙크를 보였다.

    가족이 한 명 더 생기는 일은 그들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고 굉장히 큰일이었다. 물론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러면 남도 그럴 수 있는 거였다. 물론 자란 환경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딱히 물질적인 것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한 부모 자식이지만 윤주는 사랑을 가득 받고 자란 티가 났고 그걸로 충분했다.

    ―자, 가볼까?

    베르가의 말 한마디에 파티장 문이 열렸고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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