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34화 (34/44)
  • 34.

    엘리베이터가 닫히며 그들이 사라진 곳에 동혁과 그의 아내 성은, 그의 모친 은정이 등장했다. 동혁의 얼굴을 잔뜩 굳어있었고 성은은 동혁과 은정 사이에서 계속 눈치를 보며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오늘 잘해야 한다. 만약 아르노그룹이 한국에서 새로운 사업을 한다면 그 파트너는 반드시 우리가 되어야 해.”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만약이라고 했잖니.”

    “회사 상황 안 좋은 거 아시잖아요.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 여력 없어요, 어머니.”

    “너는 젊은 애가 어쩜 그렇게 배짱이 없니? 파트너만 되면 투자하겠다는 곳은 줄을 설 거다, 너희 장인도 마찬가지고. 안 그러니, 아가?”

    “아버지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내가 이래서 우리 아가를 좋아한다니까.”

    은정은 웃는 기색 하나 없는 성은를 가깝게 잡아당기며 못마땅한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결혼하고는 곧잘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애교도 부리더니 요즘엔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계속 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웃어라. 아주 중요한 자리니까.”

    여왕벌처럼 앞선 은정만 들떠있을 뿐 그 뒤를 따르는 동혁도, 또 성은도 기꺼운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이강 부모님의 호텔 방 앞에 선 윤주는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윤주가 너무 긴장을 하니 옆에 있는 이강까지 덩달아 긴장감이 높아지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 우리 부모님 당신 무조건 좋아하실 거야.”

    “그런 말은 하나도 위로가 안 돼요.”

    이강이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는 윤주의 등을 쓰다듬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안드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 왔네? 두 분 기다리시는데 안 들어오고 뭐 해?

    안드레아의 질문에 이강은 고갯짓으로 윤주를 가리켰고 하얗게 질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본 안드레아가 피식 비웃었다.

    ―뭐야, 내숭이에요? 나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해요.

    ―안드레아, 나 죽을 거 같아요.

    윤주는 무의식적으로 안드레아의 손을 덥석 잡았고 차갑게 식어 축축하게 땀까지 난 그녀의 손에 장난이 아닌 걸 안 안드레아가 문을 닫고 완전히 밖으로 나왔다.

    ―형, 완전 차가워.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나 안 괜찮아요. 숨 쉬는 것도 힘들고 눈앞도 뿌옇고. 나 어떻게 해요?

    심각한 표정의 안드레아가 이강과 눈을 맞췄고 정말 심각해 보이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았다.

    “우리 엄마 며느릿감이 한국 사람이라고 되게 반가워하셨는데, 마음 편히 먹어.”

    “아버님은 어떠셨어? 나 아빠가 없어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하하, 우리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하네. 내가 딸이 없어서, 너희한테처럼 하면 무섭다고 할까, 라고 물어보셨거든.”

    “그, 그래?”

    분명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강의 말은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새로운 가족을 만난다는 거, 특히나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난다는 게 윤주에게는 무척이나 부담이 됐다.

    “윤주야, 네가 이렇게 어려워하면 우리 부모님도 불편하실 거야. 두 분 역시 새로운 가족을 소개받는 첫 자리잖아.”

    “아, 그렇구나. 두 분도 긴장해 계시겠구나.”

    “그러니까 조금만 편히, 알았지? 내가 항상 옆에 있을게.”

    이강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윤주의 마음은 어느 정도 가라앉는 거 같았다. 자신만 선보이는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어느 정도 해결했으면 이제 들어가자. 조금 더 지체하면 성격 급한 아버지 튀어나오실 거 같은데.

    ―안드레아, 안녕.

    ―에? 갑자기?

    완전 얼어붙었던 조금 전과 달리 생글 웃으며 갑자기 인사를 건네는 윤주에 당황하고 있는데 윤주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왜, 왜 이래요? 오늘은 옷도 액세서리도 뺄 거 없다구요.

    ―오늘도 역시 아름답네요.

    ―저기요, 남자한테 아름답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만.

    ―안드레아는 예외, 본인이 되게 섬세하게 잘생긴 거 알아요? 조각상 같아.

    ―내, 내가요?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보네. 뭐랄까, 조물주가 안드레아 만들 때 머리카락 하나까지 신경 쓰신 거 같아요. 정교하게 만드신 걸작이지,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켜요.

    윤주의 말에 보기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은 안드레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윤주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안드레아의 팔을 잡고 문 앞으로 이끌었고 이강이 그 뒤에 두 사람을 지키듯 버티고 섰다.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큰숨을 한 번 들이쉰 윤주는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눌렀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안녕…….”

    “어머, 드디어 왔네. 반가워요.”

    윤주가 인사를 마칠 사이도 없이 마중 나온 가영이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당황한 윤주가 어떻게 하냐고 눈으로 이강에게 물었지만 어깨만 한 번 으쓱해 보일 뿐 별말이 없었다.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어쩜 이렇게 예쁘니? 들어와요, 들어와. 애들 아빠도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 사람이 성격이 되게 급해요. 여보, 애들 왔어요.”

    가영의 너스레 덕분에 윤주의 긴장은 거의 사라졌다. 다행히도 가영은 그녀의 상상과는 달리 살짝 통통하고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품위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베르기의 인상은 좀 차가워 보였는데 웃는 순간 확 변했다.

    20년 후쯤 이강의 모습이 연상되는 베르기는 살짝 곱슬인 은발 머리를 단정하게 손질해 넘기고 눈가에 웃음 주름이 잡힌 잘생긴 얼굴에 몸에 딱 붙은 양복을 입고 당당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 무척 근사했다.

    “아버지 되게 근사하시다. 아버지에 비하니까 당신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뭐?”

    작게 속삭인 윤주의 말에 이강은 좀 발끈했고 옆에 선 안드레아가 고개를 숙이며 작게 웃었다. 다행히 그녀의 말을 못 들은 가영은 그녀를 베르기에게 인사시켰다.

    “인사해요. 이쪽은 내 신랑이자 애들 아빠. 나랑 30년 넘게 살았는데 한국말을 거의 못해요. 되게 성의 없죠? 그래도 우리 이강이가 한국말을 잘해서 나랑 수다 되게 많이 떨어줬어요. 자라는 내내 다정했지, 우리 큰아들이.”

    “지금은 아닙니까?”

    “다정한 아들이 3년 동안 연락도 없이 지내진 않지!”

    “어머니, 일 년에 세, 네 번은 연락드렸어요.”

    “그래, 내 생일이랑 네 아버지 생일이랑 크리스마스 때. 나쁜 녀석.”

    ―엄마, 내 생일엔 그 잘난 연락도 없었어요.

    ―그랬어? 진짜 많이 혼나야겠네.”

    주제 없이 마구 뒤섞이는 대화에 윤주는 정신이 없었다. 언제 인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대화에 낄 수도 없었다. 인사가 늦었다고 기분 나빠하면 어쩌나 걱정하는데 베르기는 그저 흐뭇하고 사랑 넘치는 표정으로 자신의 아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대화에 윤주가 용기를 내 먼저 인사를 했다.

    “저, 저기 안녕하세요. 저는 서윤주라고 합니다.”

    “아코, 너무 우리끼리 얘기를 했네. 내 소개도 제대로 못 했죠? 나는 송가영, 애들 엄마예요.”

    ―여보, 이름이 서윤주래요. 이름도 얼굴만큼 예쁘죠? 우리 아들이 왜 결혼까지 생각하는지 알겠네. 여보, 나 젊었을 때랑 좀 닮지 않았어요?

    ―그런 거 같기도 하네. 내 눈에는 당신이 훨씬 더 예쁘지만.

    “안녕하세요, 나는 이강이 아빠 베르기입니다.”

    가영과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나눈 베르기는 또박또박한 한국말의 인사와 함께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윤주는 살짝 손을 잡고 묵례를 했고 잔뜩 긴장한 윤주를 보며 가영은 또 깔깔거렸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돼요. 우리 신랑이 며느릿감 만난다고 긴장을 해서 그렇지 평소엔 이렇게 안 딱딱해. 얼마나 마음이 따뜻한데. 이강이가 이 사람 미니미라니까.”

    ―여보, 이 아가씨가 당신이 무서운가 봐.

    그녀를 배려해 계속 한국말과 이탈리아어를 번갈아 말하는 가영에게 이태리어를 할 줄 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끼어들 틈이 없었다. 도와줘야 할 이강도 한마디 말이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하나 윤주는 고민스러웠다.

    ―좀 웃어요. 당신은 깐깐해 보여서 웃어야 한다니까? 10살은 더 들어 보인다고 염색 좀 하자니까 그것도 안 하고. 당신은 내 말 안 들으면 손해만 봐.

    ―사모님, 잠시만요. 사모님, 제가 할 말이…… 사모님!

    “어? 나 불렀어요?”

    ―저 이태리어 할 줄 알아요. 대학 때 유학 가려고 배웠거든요.

    윤주의 말에 잠시 침묵이 떠돌았다. 그리고 윤주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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