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가족이 모인 저녁 식사였지만 사적인 이야기보단 일적인 대화가 많이 오가는 자리였다. 가영은 지루한 얼굴이었지만 오랜만에 모인 부자는 그 어떤 때보다 적극적으로 사업 이야기에 몰두했다.
―그래서, 테오는 패션쇼 끝나면 다시 회사 복귀하는 거냐?
―생각 중입니다.
―형, 또 떠나려고?
―아버지, 저는 아시아를 소비시장이 아니라 창조시장으로 키워보고 싶습니다. 그룹 차원으로 공격적인 투자만 보장된다면 서울을 거점도시로 신진 디자이너를 키우고 새로운 브랜드로 신 트렌드를 이끄는 거죠.
―흐음, 지금까지의 회사 방침과는 맞지 않는구나.
―아버지 말씀대로 명품들은 기존 브랜드를 병합하는 게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만든 새로운 방향의 럭셔리가 필요합니다.
―그건 저도 형 말에 동의해요. 지금 가지고 있는 브랜드를 키우기만 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어요. 새로운 투자가 필요합니다.
베르기는 신중하게 두 아들의 말을 경청했다. 아버지가 세운 건축 회사를 부동산 투자 회사로 키워 지금의 회사를 만든 그였다. 그가 움직이면 한 나라의 대통령들이 촉을 세울 만큼 그가 가진 부와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그만큼 그는 한 회사를 책임지고 있는 회장으로 객관적인 판단을 해야만 했다.
―테오는 이제 디자인이 아니라 경영에 관심이 생긴 거냐?
―확실한 건 저는 조직에 맞는 디자이너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경영학 전공한 거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공부를 좀 더 해보고 싶기도 하구요.
―아주 큰 변화구나.
―이제 그만. 일 얘기는 사무실에서 하고 이제 우리 가족 이야기를 좀 해볼까?
가영의 말에 식탁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엄격하고 신중했던 회장의 얼굴에서 다정한 남편이자 인자한 아버지의 얼굴로 바뀐 베르기가 다 성장해 결혼 이야기를 꺼낸 이강을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봤다.
―평생 결혼은 안 할 거 같이 굴더니.
―저도 윤주 만나기 전까진 그랬어요.
―엄마, 형이 은근 바람둥이 기질이 있지 않았어? 만나는 여자들 꽤 있었는데
―맞아, 쟤 첫 여자친구 사귄 게 아마 8살 때일 걸? 그러고 보니 시종일관 금발만 만났네. 너 금발 취향 아니었니?
―그 여자들이 절 좋아한 거예요. 제가 먼저 좋아한 여자는 윤주밖에 없습니다. 그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재수 없어, 잘난 척 대박이야.
―안드레아, 말조심.
―네, 어머니.
누구도 못 이길 고집쟁이 안드레아도 가영 앞에선 금세 꼬리를 내렸다. 그건 항상 가영에게 힘을 실어주는 베르기 덕분이기도 했다. 베르기는 가영이 틀렸든 맞았든 일단 사람들 앞에선 그녀의 편을 들었고 그걸 보고 자란 이강과 안드레아였다. 이강은 다정한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윤주와 알콩달콩 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해질 만큼 행복했다.
* * *
패션쇼 전에 홍보의 일환으로 파티가 열렸다. 말이 홍보 파티였지 새로운 사업을 위한 부드러운 분위기의 미팅이었다. 새로운 언론사 기자들의 출입은 일제히 금지시키고 아르노그룹의 수장을 만나고 싶어 하는 정재계 인사들을 비롯한 유명 셀럽과 패션쇼에 설 모델들만 초대한 자리였다.
파티장이 있는 호텔의 입구에는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모여 있었지만 그들은 대규모로 고용된 안전요원들로 사진 한 장 찍는 게 쉽지 않았고 초대된 명사들 역시 파티장 안에는 핸드폰을 비롯한 각종 영상 기기들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이미 사전 공지한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을 입구에서 가방 검사 등에 순순히 응했고 그건 순전히 세계적 부호로 꼽히는 베르기와 아르노그룹이 가진 힘 덕분이었다.
파티를 앞두고 가족들은 호텔 방에 모여 있었다.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에 가영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이 단장하고 있었고 다들 조금은 들뜬 표정이었다.
“오늘 드디어 그 아가씨 만날 수 있는 거지?”
“그럼요. 조금 있다가 도착할 거예요.”
“네가 데리러 못 가서 어쩌니?”
“그 정도는 이해해줄 여자예요.”
이강의 말에 안드레아는 질겁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베르기와 가영은 기분 좋게 웃었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윤주의 말만 나오면 변하는 이강의 표정, 행동, 말투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윤주를 사랑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리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쟝이 들어왔다. 깍듯하게 인사를 한 쟝은 베르기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테오 님과 안드레아 님께서 먼저 내려가시고 회장님 내외께선 파티 끝나기 30분 전쯤 내려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지.
―나 심심해요, 여보. 구경하고 싶은데 당신은 여기 있고 나는 가면 안 될까? 사람들 내 얼굴을 잘 모르는데.
―어, 안 돼. 어서들 내려가 봐. 쟝, 수고 많았다.
베르기의 치하에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쟝이 안드레아와 이강과 함께 방을 나왔다. 함께 복도를 걷는 세 남자가 근사했다. 화려한 금색 단추가 달린 검은색의 스트라이프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에 하얀 셔츠를 입은 이강의 손에는 오늘만은 안드레아와 똑같은 문장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를 끼면 자신들만 가질 수 있는 당당한 만큼 책임감이 더 커지기도 했다. 다른 때와 달리 아주 당당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강의 뒤로 깔끔하지만 과하지 않은 양복을 입은 안드레아가 따랐다. 확실히 이강과는 다른 선이 가늘고 섬세한 그만의 아름다움이 아주 돋보였다.
그 옆에 조금 딱딱해 보이는 정장을 입은 쟝은 완벽한 비서실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줬다.
―윤주는?
―곧 도착하실 겁니다. 에스코트할 차를 보냈습니다.
―고마워요, 쟝.
이강의 말에 쟝은 슬쩍 미소를 짓고 말았다. 지금은 공적인 자리, 쟝은 직원으로 이강은 오너의 자세로 각자의 위치를 잘 지키고 있었다.
이강이 파티장으로 가는 시간, 한 대의 리무진이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 검은색의 럭셔리한 차에서 내린 사람은 차려입은 나정과 윤주였다.
완벽한 메이크업에 머리까지 세팅하고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햅번 스타일의 원피스에 재킷을 걸친 윤주가 차에서 내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다가왔다. 책임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그녀를 안내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곳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김 실장이라고 합니다. 두 분은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게 철통 보안이 된 윤주와 나정이었고 경호원을 따라가면서도 윤주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했지만 나정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워 보였다.
“언니, 우리 그냥 파티 가는 거 아니었어? 이거 홍보 파티라며? 이강 씨와 둘이 무슨 작당한 거야?”
“홍보 파티 맞아. 너는 그냥 즐기면 돼. 나머지 얘기는 네 피앙세한테 듣고.”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예요?”
“어머, 나는 아무것도 몰라.”
윤주는 뭔가 더 물으려 했지만 일행은 엘리베이터 앞에 멈췄고 윤주도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따져 묻기에는 상황과 장소가 적당하지 않았다.
그들이 탈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그곳에서 이강이 내렸다. 평상시와 달리 완벽한 차림을 한 이강의 모습에 윤주가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고 나정에게 살짝 묵례한 이강이 비켜나자 경호원들 몇 명이 나정을 데리고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들이 올라가고 이강과 윤주, 나머지 경호원들만 남았다.
“잘 왔어? 미안해, 마중 못 가서.”
“그건 별거 아닌데, 잠깐만 나 좀 봐요.”
주변 경호원들이 신경 쓰인 윤주가 이강의 손목을 잡고 구석으로 향했고 이강은 따라오려는 경호원들을 손으로 말리고 그녀와 단둘이 남았다.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이 너무나 혼란스러운 윤주는 이강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게 다 뭐예요? 홍보 파티라며 기자들은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한테 벌어진 일을 좀 봐요. 내가 타고 온 리무진에 저 많은 보디가드들 그리고 당신 이 모습은 또 뭔데? 제발 나한테 솔직히 말을 좀 할래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걸 이강도 알지만 모든 걸 다 알았을 때 또다시 윤주가 도망을 갈까 봐 쉽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너한테 최대한 솔직할 거야.”
“그런데?”
“내 솔직함에 네가 도망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
“약속, 하는 거지?”
“……약속해.”
“아르노그룹 알지.”
“……아르노? 설마 그 아르노?”
“아버지가 거기 회장이셔. 내 풀네임은 테오 이강 쉔브른 아르노야.”
이강의 말을 들은 윤주가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놀라움과 불안함, 믿을 수 없다는 그 모든 감정을 담은 눈동자가 요동을 치며 이강을 보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러지 마, 윤주야. 부모님도 너 보러 이미 여기 와 계셔. 오늘 파티는 그래, 당신이 짐작한 대로 단순히 홍보 뭐 그런 거 아니고 새로운 비즈니스 때문에 모이는 자리야.”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얘기를 지금, 여기서…… 당신 날 존중하긴 하는 거야? 정말 사랑하긴 하냐구?”
“당연하잖아.”
“날 사랑한다면 이러면 안 되는 거였어.”
윤주는 그대로 몸을 돌렸고 그 앞을 이강이 막아섰다. 가려는 그녀와 잡으려는 이강 사이에 꽤 긴 실랑이가 벌어졌고 결국 윤주는 그를 피할 수가 없었다.
“신동혁이 준 상처가 그렇게 깊어?”
“이강 씨…….”
“그 사건이 없었어도 당신이 날 이렇게 밀어냈을까?”
“…….”
“나는 내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데 우리 집안이 중요하거나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해본 적 한 번도 없었어. 나는 나일 뿐이고 우리 부모님 역시 내 인생은 내 선택이라고 하셨어. 그런데 넌 나는 안 보이고 배경만 중요해? 그러면 너 나한테 미안해야 하는 거야.”
이강은 섭섭함을 담아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얘기했고 윤주도 스스로에게 자문이 들었다. 신동혁을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 핑계를 대면서 그때의 일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상처를 더 깊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시간이 필요해?”
“잘 모르겠어.”
“확신이 없다면 부모님은 뵙지 않는 게 좋겠어. 저 사람들에게 집까지 배웅을 부탁할게.”
냉정하게 말했지만 표정은 상처받은 게 역력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고 머리도 뒤죽박죽이고 궁금한 것도 알아야 할 것도 많았지만 상처받은 채로 돌아서는 이강보다 우선인 건 없었다. 윤주는 빠른 걸음으로 이강을 따라가 그의 허리를 안았다.
“미안해. 잘못했어.”
윤주의 사과에 이강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제 허리를 꼭 잡고 있는 윤주와 손을 겹치며 이강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다시는 그러지 마. 나는 너만 봐.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쉽지는 않을 거 같지만 노력해볼게.”
이강은 뒤로 돌아섰고 미안해하고 있는 윤주를 꼭 안았다. 이미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됐는데 아직도 고민하고 주춤하는 윤주가 안쓰러웠다. 가만히 안겨 있던 윤주가 꽤 매서운 손길로 그의 등을 야무지게 때렸다.
“내가 좀 못나게 굴었다고 그렇게 냉정하게 돌아서서 가냐? 은근 못됐어.”
“누가 할 말을, 내가 얼마나 쫄았는데.”
분위기가 풀리며 다시 티격태격했고 그런 서로가 너무 웃겨서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되게 예뻐.”
“당신이 만든 옷이라며. 정말 마음에 들어. 당신도 오늘 되게 멋지네. 솔직히 좀 놀랐어, 낯선 사람 같아서.”
“그래서 좋아?”
이강은 안고 있는 그녀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은근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그의 팔뚝을 만지고 있던 윤주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우리 이럴 시간 없는 거 아냐?”
“맞다, 우리 올라가야 해. 가실까요, 아가씨?”
이강은 팔을 내밀었고 윤주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온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드가 잡아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