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32화 (32/44)

32.

반듯하게 차려입은 이강이 검은색 세단에서 내렸다. 평소와 달리 말쑥한 양복을 입고 쟝을 비롯한 경호원들 여러 명을 거느리고 공항으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이강은 바로 VIP 입국장으로 향했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전용기로 도착한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아버지 베르기와 그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 가영은 여전히 다정한 모습이었다. 거의 3년 만에 보는 부모님의 모습에 이강 역시 들떠있었다.

“아들!”

“어머니.”

이강을 보자마자 반가움을 숨기지 못한 가영은 두 팔을 벌려 그에게 달려왔고 그 역시 그런 어머니를 꼭 안았다. 가영은 이제 너무 커 안기도 힘든 아들을 품에 꼭 안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그리움과 원망을 쏟아냈다.

“나쁜 녀석.”

“죄송해요.”

“그 말 한 마디로 안 돼!”

“그래서 며느릿감 보여드리잖아요.”

“맞다, 오늘은 같이 안 왔니?”

“두 분 오시는 거 아직 몰라요. 서프라이즈 하려고요.”

“어머, 얘 봐라. 그렇게 좋아?”

말하는 것만으로도 표정이 환해지고 웃음이 걸리는 이강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가영은 놀리기 바빴다. 품위 있고 깐깐해 보였던 조금 전과 달리 가영은 개구지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발 물러서서 모자 상봉을 보던 베르기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오랜만에 나도 좀 안아보자.”

“아버지.”

이강은 베르기와 반가움의 포옹을 나눴다. 베르기는 완전한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들을 보며 뿌듯함과 함께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다. 이젠 보호해줘야 하는 아들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의지해도 되는 아들이었다.

“더 큰 것 같구나.”

“건강하시죠?”

“걱정되면 옆에 와서 도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가세요, 호텔 예약해뒀어요.”

가영을 호위하듯 양옆에 선 베르기와 이강은 꽤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금발에 푸른 눈의 완벽한 백인인 베르기와 어머니를 많이 닮아 진한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이강은 달라 보였지만 고집스러운 입매와 살아있는 눈빛, 살짝 휜 코까지 완전 빼닮았다.

양옆에 선 이강과 베르기를 번갈아 보던 가영이 혼자만 아는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남자 둘을 양옆에 두고 걷자니 어깨가 저절로 펴지는 것 같았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스위트에는 이미 안드레아가 와서 불편함 없이 이것저것 상세하게 지시해 놓은 후였다.

“안드레아.”

―엄마.

―저 녀석은 아직도 엄마라고 하네요.

―막내의 특권이지.

―그 특권 저도 가지고 싶어요.

―그래서, 그 아가씨는 언제 볼 수 있는데.

―파티에서 소개할게요.

―그렇게 좋냐?

―어머니 만나셨을 때 어떠셨는데요?

―세상을 전부 가진 것 같았지.

베르기의 그 말에 이강이 고개를 끄덕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분을 잘 아는 두 남자가 눈을 맞추며 씩 웃었다. 그래도 부모로서 걱정이 되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변하지 않을 마음이냐?

―확신이 없었다면 말씀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한테 이렇게 욕심난 거 처음이에요.

―그럼 질질 끌지 말고 결론 내.

―알겠습니다.

보기 전까지는 안도 보다는 걱정이 많았다. 대충 알아본 여자의 환경은 별로 좋지 않았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결혼 얘기를 하는 게 너무 경솔한 게 아닌가 했는데 이강의 얼굴을 보니 이젠 걱정보단 응원과 축하를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이강아, 서프라이즈도 좋은데 엄마는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 오늘 저녁에라도 보면 안 될까?

―엄마, 나 그 여자 싫어.

―너는 벌써 본 거야?

―어, 그 여자는…….

―근데 형 여자친군데 그 여자라고 하는 거야? 엄마는 너 그렇게 안 가르쳤는데.

―……서윤주 씨는, 예의가 없어. 처음 보는 나한테 머리도 나쁘다고 했고 옷도 못 입는다고 했다고. 정말 사납고 못돼먹었어.

―이 말이 사실이야?

―맞아요. 근데 빠진 이야기가 있네요. 그렇지, 안드레아?

뾰로통한 안드레아의 표정을 보니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가는 바였다. 이 결혼에 안드레아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았는데 둘이 이미 만났다니 반은 해결됐다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여자의 액세서리를 떼버리고 옷을 벗기는 건 아니잖아!

―뗄 액세서리도 벗길 옷도 없었지.

이강의 말에 안드레아의 얼굴은 화로 붉어졌고 가영과 베르기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안드레아의 복장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완벽하다 못해 과한 복장의 평상시와 달리 오늘 안드레아는 아무런 액세서리 없이 타이를 하지 않은 셔츠에 넉넉한 품의 재킷을 입고 있었다.

―혹시 오늘 이렇게 입은 게…….

―아니에요! 그냥 가지고 온 양복이 지겨워서 다른 거 입어본 거예요.

―그래, 알았어.

―아니라구요, 엄마! 절대 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입은 거 아니라니까요.

안드레아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베르기와 가영의 웃음 역시 커졌고 이강의 웃음도 더해졌다. 막내는 이렇게 놀려야 재미있는 건데, 이런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그들에게도 참 오랜만이었다. 그 뒤에도 가족들 간의 핑퐁 같은 대화는 쭉 이어졌고 결국 베르기가 나섰다.

―자, 엄마 아빠는 좀 쉬어야겠으니 이야기는 나중에 더하자꾸나.

―저녁 드시기 전에 모시러 올게요.

이강은 두 분이 쉬실 수 있도록 안드레아를 데리고 나와 다른 쪽 거실로 옮겨갔다. 안드레아는 쀼루퉁해 보였지만 완전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고 이강은 자꾸 웃음이 났다.

―자꾸 웃지 말라고.

―알았어, 안 웃어.

―……뭐라고 안 해?

―뭘?

―그 여자…… 서윤주 씨가 나에 대해 뭐라고 안 하더냐고.

―너한테 너무 과했다고 미안해하더라.

―……내 다리, 못 본 거야?

―알고 있었어.

―미리 알고 있어서 그렇게 담담할 수 있었던 거구나? 난 또, 그 여잔 좀 다른가 했네.

―네가 너무 싸가지 없고 잘생겨서 다리는 보이지도 않았데.

―내가 싸가지가 없다고? 그 여자 진짜 웃겨.

―잘생겼다고도 했다니까.

―치, 그건 다 아는 사실이고 다른 말은 없었어? 나에 대해서 다른 건 뭐 안 물어봤어?

―안드레아, 설마 윤주한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지?

―미쳤어! 난 눈 높아!

―그럼 됐고. 커피 한잔할래?

이강은 길길이 뛰는 안드레아를 두고 여러 가지 음료며 술이 준비된 바(bar)로 갔다. 커피를 준비하며 이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드레아의 말투는 여전히 부루퉁했지만 그 안에 담긴 윤주에 대한 관심이 좋은 징조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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