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31화 (31/44)

31.

악착같이 피하려던 윤주의 눈이 감기고 그의 목에 매달리며 눈을 감았다. 이강이 이럴 땐 이유가 있을 거였다. 두 사람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졌고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동상처럼 굳어졌던 동혁은 침통한 표정으로 결국은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키스를 하던 이강은 이미 동혁의 존재를 잊은 지 오래, 윤주와의 다디단 키스를 즐기고 있었다. 긴 키스가 끝나고 숨이 거친 윤주가 이강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거친 숨이 다 가라앉을 때까지 이강은 그녀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다독였다.

“너랑 같이 있고 싶어.”

“……가자.”

윤주는 이강의 손을 잡았다. 회사도, 일도, 내일 당장 감당해야 할 것들도 아무것도 중요한 게 없었다.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고 무책임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눈앞에 이강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제일 먼저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별로 없는 영화관에서 표를 사고 팝콘과 음료수를 하고 나란히 커플석에 앉아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기보단 서로 팝콘도 먹여주고 음료수도 먹여주고 손도 잡고 가끔은 키스도 하고 서로 꽁냥거리느라 영화는 보이지도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온 두 사람은 서울 시내를 그저 쏘다녔다. 이강이 한국에 오고 각자 일이 바쁜 두 사람은 이런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강은 길거리 떡볶이를 먹다가 너무 매워서 눈물까지 글썽였고 윤주와는 자판의 귀걸이를 두고 옥신각신했다.

같이 다니는 내내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투닥거리면서도 서로를 보는 눈에서는 사랑이 뚝뚝 떨어졌다. 그의 손을 잡고 걷던 윤주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윤주는 한참을 웃음을 참지 못했고 이강은 그 웃음이 좋아서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하아, 배 아파.”

“나도 같이 좀 웃으면 안 될까?”

“지금 오후 4시밖에 안 됐다?”

“그게 뭐?”

“나 말이야, 땡땡이치는 거 상상도 해본 적 없었거든. 근데 걱정이 안 되네.”

“이직 생각 있어?”

“요즘 잡지사들 사정 안 좋아서 있는 기자도 줄이는 판이야.”

“진로를 바꿔보는 건?”

“신동혁 신경 쓰이는구나.”

“……알았어?”

“갑자기 전화해서 나오라고 하고, 막무가내로 키스하고, 고민해봤는데 당신이 이럴 이유가 신동혁밖에 없더라고.”

“당신이 회사에서 매일 그 인간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열 받아. 못 참겠어. 조만간 쳐들어가 그 새끼 면상에 주먹을 날릴 것 같아.”

그리고 이강의 입에선 꽤 거칠게 들리는 이태리어가 쭈욱 흘러나왔고 윤주는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걱정하고, 자신을 위해서 욕해주는 사람은 엄마 말고는 처음이었다.

“당신 진짜 나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결혼하자.”

“……뭐?”

“부모님께 말씀드릴 거야. 그럼 당장이라도 날아오실 거고 당신 만나면 결혼 얘기부터 하실 거야. 오래전부터 내 결혼을 원하셨거든.”

“이강 씨…….”

“갑작스러운 거 알지만 더 이상 내 마음이 참아지지 않아. 평생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이강의 말에 윤주는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들고 그저 앞에 선 그의 얼굴만 보고 있었고 이강이 그런 윤주의 손목을 잡고 택시에 올랐다.

두 사람은 집에 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윤주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 건지도 헛갈렸다.

집에 도착하고 거실에 마주 서고 나서야 윤주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강은 윤주의 손을 잡았고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결혼하자는 거 진심이야.”

“그럼 길게 연애하면 되잖아.”

“그건 우리 두 사람 모두를 불안하게 하겠지. 당신이 날 불안해하는 거 알아.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당신은 얼마쯤 나를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이방인으로 취급하잖아. 나 역시 그런 네가 불안해.”

“그렇다고 결혼이 해답은 아닐 거야.”

“아니, 나한텐 그게 최선의 해답이야.”

윤주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강압적으로 보이는 이강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항상 그녀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고 이해해 주던 이강이 결혼을 이야기하는 지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이 사람을 조급하고 강압적으로 만드는 게 뭘까, 고민하게 되는 윤주였다.

“당신, 내 개인적인 일에 대해 물은 적 없잖아. 우리 가족도, 회사도, 내 일도, 친구도, 뭐 하나 물어본 적 없어. 그거 언제든 헤어질 준비하고 있는 거 아냐?”

“우리 집을 처음 와 본 것도, 우리 엄마를 만나 본 남자도 당신이 처음이야.”

“그 말은 감동적이네. 그러니까 결혼해.”

“무슨 말만 하면 결혼하제.”

“이것만 정직하게 대답해줘. 나 사랑해?”

“아주 많이.”

“그럼 됐어. 이번 일은 당신 의견과 상관없이 진행될 거야. 어머니도 나 마음에 들어 하셨어.”

강요라는 걸 알지만 결혼 문제로 윤주와 실랑이를 해봤자 빙빙 돌 뿐,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안다. 현실적인 문제로 윤주는 계속 결혼을 피할 거고 자신도 곧 회사로 복귀해야 한다. 제일 싫은 건 그런 문제들 때문에 윤주와 거리감이 생기는 거였다.

이강은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매달아 놓았던 반지를 빼내 윤주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자잘한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놓여 있었다.

“3년 전에 집 떠날 때 어머니가 주신 거야. 아버지가 처음으로 사랑 고백하면서 주신 반지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거라고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주라고 하셨어. 이거 꼭 너한테 주고 싶어.”

윤주는 감정이 벅차올랐다. 좋은 건지 싫은 거지 판단 내리기도 전에 목까지 뭔가 치고 올라와 숨이 쉬는 것도 힘들 정도로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그녀가 대답을 못 하고 망설이는 사이 이강은 그녀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줬고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반지는 그녀에게 꼭 맞았다.

“예쁘다.”

말없이 한참을 보던 윤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고 이강은 여전히 조마조마한 눈길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청혼, 진심이야?”

“응.”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응.”

“만약에…… 부모님께서 반대하시면 어떡해?”

윤주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아는 이강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럴 일은 없어. 우리 어머니가 나한테 이 반지를 주셨다는 건 날 전적으로 믿는다는 뜻이고 그건 내 결정을 지지하신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절대 고분고분하진 않아.”

농담 같은 마지막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던 윤주는 여전히 생각이 많은 얼굴로 반지만 빙빙 돌리고 있었고 그걸 보던 이강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나 하나면 될까?”

“……뭐?”

“내가 당신한테 많이 부족하면 어쩌지?”

“당신은 그 어떤 자리에도 그 누구에게도 부족하지 않아.”

“정말, 그럴까? 만약 안드레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신한테 상처 줄 수도 있잖아. 솔직히 나도 겁나.”

“우리 둘 다 되게 겁쟁이네.”

윤주는 앞에 선 이강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자신과 비슷한 듯 다른 이 남자와 함께한다면 그대로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가 조금은 생긴 거 같았다.

“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어, 당신은 어때?”

“결혼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걸.”

“둘 다 겁쟁이에 환상은 없으니까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나와 결혼하는 거야?”

“결혼, 하자.”

“오, 예스! 대답했다. 무르는 거 없어.”

“풋,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이강은 윤주를 안아 들고 거실을 빙빙 돌았다. 드디어 그녀가 용기를 냈고 그녀의 대답 한마디에 마음이 벅차오르며 상상도 못한 기쁨이 몰아닥쳤다.

윤주는 너무나 좋아하는 이강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동안 망설인 것도 좀 미안하고, 너무 좋아해 주니 그것도 감사하고 앞으로 뭔가 되게 큰일이 남은 거 같기는 한데, 잠시 고민하던 윤주는 갑자기 침대에 던져진 충격에 잠시 멍했다.

“뭐하는 거야?”

“결혼 약속을 기념하기에 딱 좋은 장소야.”

이강은 그대로 얼굴을 내려 키스를 했고 두 사람의 뜨거운 시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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