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이강은 의외의 인물로부터 전화를 받고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카페를 들어서자마자 나정은 이미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강은 평상시와 똑같이 호감의 웃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강이 자리에 앉자마자 인사도 하기 전에 테이블 위로 태블릿이 툭 떨어졌고 거기엔 딱 한 번 잡지에 실렸던 그의 가족사진이 떡하니 띄워져 있었다.
“쉔부른은 누구 이름이에요? 테오, 이강 아르노 씨?”
잠시 당황했던 이강이 곧 표정을 수습하고 담담하게 잔뜩 날이 서 있는 나정에게 대답했다.
“제 어머니의 결혼 전 성입니다. 제 미들네임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말로 회피를 해보겠다? 윤주는 그쪽이 재기를 노리는 능력 있는 패션디자이너로만 알고 있던데요.”
“……가족 얘기는 구체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아, 완전 사기꾼이네.”
나정의 직설적인 표현에 이강은 불쾌해졌다. 나정이 윤주에게 친언니 이상으로 가깝고 의미가 있다는 건 알지만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드는 건 간섭이 지나치단 생각이 들었다.
“그 말씀은 불쾌하군요.”
“불쾌? 거짓말보다 더 나쁠까.”
“제가 이야기하지 않은 거로 화내신 다기엔 좀 지나치시군요.”
나정은 이강의 답답한 말에 앞에 놓인 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거의 비워진 컵을 내려놓은 나정이 냉정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신동혁 알죠?”
“두어 번 본 적 있습니다.”
“걔도 나름 한국에서는 알아주는 재벌집 아들이에요. 대학 때부터 5년 동안 연애하면서 동혁이는 윤주한테 집안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동혁이가 청혼한 후에야 모든 걸 알게 됐죠, 그것도 동혁이 모친 덕분에.”
“그렇, 습니까?”
“윤주 어머님도 뵈었다면서요.”
“네.”
“윤주 어머니 그렇게 되신 거 동혁이 때문이에요. 정확히는 그 모친. 윤주는 헤어지자고 했는데 그럴 수 없다고 기다려 달라던 동혁이는 정략결혼을 했어요. 그 결혼식에 동혁이 어머니가 윤주 어머니를 초대했구요.”
“어떻게 그런 일을…….”
“그러니까요. 거기 다녀오시고 어머님이 쓰러지셨죠. 뇌경색이요. 겨우 55살이셨는데, 그게 4년 전이에요. 윤주는 이별에 슬퍼할 사이도 없이 생계를 짊어져야 했어요. 몇 차례 거듭되는 수술비, 병원비, 간병비, 모아놨던 돈 다 쓰고, 대출받고, 그래서 전 남친이 사장으로 발령받은 회사도 그만둘 수 없었죠.”
“악몽이군요.”
“그보다 더하죠. 이별한 연인은 사장으로 계속 만나야 하고 아파할 사이도 없이 현실은 무섭게 몰려오고 거기다 죄책감까지, 아마 상상이 안 될 거예요.”
“아, 윤주 씨가 그래서…….”
“윤주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골병투성이에요. 어머니 때문에 간신히 이 악물고 버티고 있는 거죠. 다시 한번 더 상처받으면 윤주는 못 견뎌요. 아무리 강한 척해도 못 견딘다고. 윤주가 그쪽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서 이래요. 제발 부탁이에요, 똑같은 일 겪게 하지 말아요.”
나정의 마지막 말은 사정이었고 이강의 얼굴에선 가벼운 웃음기가 싹 다 사라지고 없었다. 담담한 것 같았지만 그 안에는 분노와 당당함이 공존하고 같은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완전히 분위기가 변해있었다. 왠지 그의 뒤에선 아우라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해주신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나니 결혼을 서둘러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뭐라구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저희 부모님께서 흔쾌히 윤주를 받아주실 겁니다.”
“누구하고 똑같은 말을 하네. 그 말을 믿을 거 같아요?”
“저희 어머님도 한국 분이십니다.”
이강의 대답에도 나정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집안을 따지는 데 본인의 출신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본인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더 반대할 수도 있죠.”
“우리 집안 남자들은 말입니다, 자신의 것을 지킬 땐 잔인할 정도로 호전적으로 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어머님과 결혼하시는 건 쉬우셨겠습니까?”
“그래서요?”
“윤주는 이미 제 사람이고, 저희 부모님께서는 제가 선택한 이상 반대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아주 잘 아십니다. 걱정해주신 마음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단호하게 말을 한 이강은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고 할 말이 남은 나정은 그저 어버버할 뿐이었다.
“쟤, 뭐니?”
나정이 어이가 없어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강이 다시 돌아왔다. 그 모습에 왠지 긴장되는 건 도리어 나정이었다.
“그런데 제가 외국 사람이라는 게 윤주에게 문제가 됩니까?”
“정확히 알고 싶은 게 뭐예요?”
“윤주가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게 제가 외국인이라서 그런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요?”
“귀화하면 되겠죠.”
‘이 남자 진짜다.’
나정의 머릿속에 그 말이 떠올랐다. 저 정도의 각오면 이번엔 정말 믿어도 되지 않을까?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던 동혁과는 확실히 다르다.
“국적이 문제는 아닐 거예요.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면서 윤주가 성격이 좀 변했어요. 조심성도 많아지고 소극적으로 되고, 또 상처받을까 봐 무서워서 온전히 뛰어들 수 없을 거예요. 특히 결혼 문제는 겁을 많이 낼 겁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제가 종종 전화를 드려도 될까요?”
“나한테요?”
“윤주에 대해서 물어볼 분이 편집장님밖에 안 계셔서요.”
“그래요.”
나정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이강은 처음 올 때와 같은 웃음으로 자리를 떴다. 웃기는 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고 어떻게 윤주의 두려움을 없애줄까도 고민스러웠다.
“뭐지, 저 당당함은? 분명 웃었는데 왜 들어올 때와 나갈 때가 다른 사람 같아.”
이강의 첫인상은 부드럽고 장난기 가득하고 조금은 가벼운,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 남자, 그것도 매우 사나운 맹수의 기운이 가득한 상남자였다. 지금까지 윤주 걱정으로 날이 섰던 나정이 표정을 풀며 의자에 기대앉았다.
“상황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던 거네. 신동혁이 병신이었어. 쟤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이제 윤주의 걱정은 오롯이 이강에게 맡겨도 될 것 같았다.
이강은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빠르게 걷고 있었다. 나정에게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그날, 윤주의 집 앞에서 신동혁을 곱게 보낸 게 너무나 후회됐다.
―나쁜 새끼, 확 밟아버리는 건데.
이강은 이태리어로 끊임없이 욕을 내뱉었고 그건 윤주에게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이강이 회사 앞에 도착했을 때 막 건물에서 빠져나온 윤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그가 그대로 뛰어가 있는 힘껏 윤주를 안아버렸다.
“켁! 이강 씨!”
갑자기 있는 힘껏 안아오는 이강 때문에 윤주는 숨이 막혔다. 윤주가 좀 놔 보라고 그의 어깨를 때렸지만 이강은 안고 있는 팔에 더 힘을 줄 뿐이었다. 그의 등을 때리던 윤주는 에라 모르겠다, 그의 목을 더 꼭 껴안았다. 윤주의 행동에 미소를 되찾은 이강이 드디어 그녀를 바닥에 내려놨다. 윤주는 고개를 살짝 꺾고 자신을 보는 이강의 뺨에 손을 올렸다.
“이강 씨, 무슨 일 있었지.”
“아냐.”
“아니긴, 격양되어 있는 거 같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좀, 아니, 아주 화가 많이 나는 얘기를 들었어.”
“참고 있는 중?”
“간신히.”
윤주는 이강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줬고 그가 윤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윤주야, 나 널 정말 사랑해. 이렇게 보기만 해도 안심이 돼.”
“지금 이 타이밍에 그런 말은 반칙인데.”
윤주는 말을 그렇게 하며 이강의 허리를 감아 더 꼭 끌어안았고 그 역시 안도하며 더 깊게 그녀에게 기댔다. 보기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에는 동혁에 대한 화밖에 없었는데 윤주와 같이 있는 이 순간 갑자기 평화가 찾아들었다. 윤주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그냥 더 따뜻하게 그를 안아줬다.
“자기야, 나 이제 올라가야 해.”
“보내기 싫어.”
“나도 가기 싫어. 근데 백수가 될 순 없잖아.”
“회사 그만둬라, 내가 먹여 살릴게.”
“나 돈 좋아해.”
“나 능력 있어.”
“말이라도 고맙네. 이러다가 진짜 회사 때려치우겠다. 나 올라갈게.”
아쉬움이 가득 담긴 윤주의 말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인 이강의 눈이 차에서 내려 건물로 다가오는 동혁의 모습이 보였다. 윤주의 뒤로 지나가던 동혁 역시 이강을 발견했고 순간적으로 두 남자 사이에 눈싸움이 일어났다.
이강은 동혁의 눈을 똑바로 보며 윤주를 가까이 당겼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회사 앞이라 당황한 윤주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살짝 입술만 물었던 이강은 억지로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혀를 밀어넣었다.